moon0932023-04-10 20:15:03
완벽한 범죄 영화 | 암수살인
한국범죄영화를 찾는다면 추천드립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OCN을 보다가 암수살인이 나와서!
어?! 하면서 나도 모르게 빠지면서 봤던 그 작품을 가지고 왔어요
OCN 아무 작품이나 틀어주지 않는데 정말 암수살인은 정말 완성도 높은
범죄 영화 중 하나로 믿고 보는 김윤석과 주지훈의 환상의 호흡으로
몰입감 넘치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 영화 암수살인을 안본 사람이 있다면?!
영업하기 위해 가지고 왔습니다!
기본 정보
장르 : 범죄, 스릴러
감독 : 김태균
각본 : 곽경태
출연진 : 김윤석, 주지훈
개봉일 : 2018년 10월 03일
평점 : 8.58
스트리밍 : 티빙, 넷플릭스, 웨이브, 쿠팡, 왓챠
기획 의도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이예."
수감된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는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추가 살인을 자백한다.
형사의 직감으로 자백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 형민은,
태오가 적어준 7개의 살인 리스트를 믿고 수사에 들어간다.
"이거 못 믿으면 수사 못한다. 일단 무조건 믿고, 끝까지 의심하자."
태오의 추가 살인은 신고도, 수사도 없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암수범죄!
형민은 태오가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뒤섞고 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수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가오는 공소시효와 부족한 증거로 인해 수사는 난항을 겪게 되는데..
여담
암수살인 영화의 암수란?
인지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즉, 피해자들이 단순 실종이나 스스로 행적을
감추었다고 판단되어서 살해 당했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못한 살인사건.
한국범죄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사이코패스와 형사의 감성팔이 영화가 아닌,
서스펜서와 영화의 적적한 트릭 등으로 인하여 기존의 형사물과는
차별화된 담담하지만 실화 이야기를 잘 살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평론가와 관객 모두에게 8~9점대의 높은 점수대를 받았고,
영화는 각종 상을 싹쓸이 했습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암수살인 결말을 살펴보자면...
범인 강태오(주지훈)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다른 교도소 이감되는
버스 안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바깥을 응시합니다.
아직 범죄를 다 밝히지 못한 김형민(김윤석)은 빼곡하게 기록한 노트를 열어
작은 마을에 방문하여, 휴대전화의 마지막 발신 위치를 보여주며
아직도 밝히지 못한 사건들을 추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보통 수사범죄 영화는 피해자의 초점을 주로 포커스를 맞췄다면,
영화 암수살인의 경우 범죄자와 그걸 반드시 밝혀낸다는 포커스로
두 사람의 끝없는 심리싸움을 하면서 우리에게 밝히지 않은 범죄가 또 있을까?
라고 마지막에 묻는 것 같아 더욱더 재미있게 봤던 작품이다.
한줄평 : 이 작품 보면 솔직하게 국수 먹고 싶어집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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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짱 두둑한 개미들이 코끼리에게 덤비다
게임스탑으로 따라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어딘가에 사는 애널리스트 키스 길(폴 다노)다. 그냥 직장 다니는 소시민인 키스 길. 아무래도 이번 생에서 큰돈 만지기는 글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희망을 놓지 않는 키스 길. 부인(쉐일린 우들리) 캐럴라인과 ‘게임스탑’이라는 주식에 투자했고 대박을 노리고 있다. 이런 키스 길의 투자방식이 그냥 무작정 얻어걸려라는 아니다. 나름 치밀한 분석을 통해서 게임 스탑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모름지기 돈은 혼자 버는 게 맞긴 하나, 혼자서는 외롭다. 레딧 유저들과 함께 인터넷 방송을 하는 키스 길. 수많은 개미들이 키스 길에게 설득되고 이는 곧 코끼리 같은 부자들과 대립하는 결과와도 이어진다. 여러 사건들이 미국 경제들을 훑고 지나갔지만 개미들은 당하기만 했다. 과연 이번엔 개미들이 이길 수 있을까?
나름 친절해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장점 중 하나는 ‘경제(특히 주식) 용어를 잘 몰라도 이해하기가 쉽네!’라는 점이다. 어떤 이유에서? 바로 영화의 핵심을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다. 감독은 이 핵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캐릭터 개성 살리기’를 선택했다. 글쓴이가 상영관에서 나와 가장 먼저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한 것은 인물들이다. 주인공이 한 명만 있지 않다. 그 주인공들을 A팀과 B팀으로 나누는데, 인물들을 각기 다르게 설정했다. 이 인물들의 속사정은 다 다르다. 누구는 성소수자고, 누구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고, 누구는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다. 심지어 세 바운더리에서 직업도 다 다르다. 한 사람은 평범한 대학생인데 어떤 인물은 간호사고 또 다른 캐릭터는 그냥 게임스탑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인물들의 속사정이 판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각기 튀는 캐릭터들에 개성도 부여한다. 주인공 키스 길은 또 다르고, 게임스탑 아르바이트생은 또 어떻고, 간호사는 어떻고 하는 식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복을 통한 강조만 했을까? 아니다. 이 영화는 인물마다 다른 말 맛(?)을 부여하며 코미디까지 살렸다. 글쓴이가 이 글을 쓰면서 영화를 기억하다 보니 모든 캐릭터가 기억에 남는 이유가 인물마다 다른 웃음 포인트를 살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인물들을 A팀과 B팀으로 나뉘어 대비를 강조한다. 그 경계를 나누는 기준은 ‘게임스탑 주식 투자자’라는 점이다.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엮이면 그 정서가 절실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이 연출이, 그러니까 인물마다 개성을 살리는 방식이 영화에서 장점으로 발현된 것은 흥미롭다. 개미 투자자들이 똘똘 뭉치는 유대감을 캐릭터의 힘으로 살리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뭉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지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영화가 정말 비판하고 싶었던 대상의 속성과도 어울리는 감이 있다. 이 대상의 특성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그림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를 전복시키는 이야기를 갖고 있는데, 이야기의 구조로 형상화한 감독의 솜씨가 놀랍다. 또 직접적으로 대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까지 가는 과정을 영화가 잘 짰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알면 좋은 것
이 영화를 이해할 때 ‘공매도’와 ‘게임스탑’, ‘레딧’과 ‘로빈후드’가 무엇인지는 알 필요가 있다.
정말 간단하게 설명하면 ‘레딧’은 외국인들의 인터넷 커뮤니티다. 특정한 소재가 있다. 가령 ‘아시안 컵 한국 대표팀’이라는 소재가 있다고 쳐보자. 그럼 그쪽에 관심 있는 유저들이 모여서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는 곳인데, 인터넷 커뮤니티의 속성 상 저속한 표현이 많다. 특히 주식같이 금전적인 문제가 달려 있으면 더 그렇다. ‘게임스탑’과 ‘로빈후드’는 2021년 미국에 실존했던 기업체 이름이다. 게임스탑은 ‘스팀’의 오프라인 형태라고 보면 쉽다. 콘솔/PC게임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파는 곳이다. 중고 게임을 파는 경우도 몇 있다. ‘로빈후드’는 주식 거래 어플이다. ‘~증권’ 어플을 미국인들이 쓴다고 보면 된다.
사실 이런 업체 이름 말고 더 중요한 것은 ‘헤지펀드’와 ‘공매도’라는 개념이다. 헤지펀드는 개인 투자자들이 높은 목표수익률을 추구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 자본 그 자체를 말한다. 보통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큰 손이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매도’는 돈을 빌려 매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격이 올라가는 걸 예상해 돈을 빌려 주식을 매입하고 그만큼 팔아 중간차익을 노리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헤지펀드’는 누구고 ‘공매도’를 이루거나 하는 행위가 누구에서 오는지를 본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팬데믹의 향기
이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팬데믹 묘사다. 이 전염병 사태를 거치며 여러 변화가 있었다. 어떤 점에서는 백신이라는 것이 유달리 중요했던 때가 있고, 오프라인 매장이 경제상황에 치명타를 가한 적도 있다. 영화는 이를 철저하게 묘사하며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강한 연대의식을 강조한다. 또 주인공 키스 길의 직업이나 ‘영상으로 기록이 남는다’는 점을 묘사하기 위해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언어의 모습이 바뀌기도 했는데, 이는 번역가의 힘이다. 가령 이 영화에서 인터넷 방송과 관련된 용어는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키스 길이 인터넷 방송을 운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밈을 번역하는 입장에서 일일이 다 살리는 것이 단순히 언어를 저기서 이걸로 바꾸는 것 말고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연히 다 조사해야 그 맥락이 살기 때문이다. 황석희 씨의 열일이 영화의 입체감을 살리는 장점이 됐다.
정상적인 연기는 오랜만이야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폴 다노는 외유내강의 캐릭터를 깔끔하게 소화했다. 폴 다노가 <파벨만스>나 <루비 스팍스> 같은 역할도 곧잘 했지만 <더 배트맨>이나 <데어 윌 비 블러드> <프리즈너스> 같은 센 연기도 잘 소화했다. 이 <덤 머니>에서의 키스 길은 두 종류의 캐릭터에서 <파벨만스> 쪽에 가까운 연기를 한다. 이 인물은 유약한 그냥 직장인 같아 보이지만 마음 안에 굉장히 강한 구석이 있는데, 어떤 대사를 중심으로 이 내면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캐릭터를 마냥 센 템포로 해석하지 않은 역량이 돋보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인물의 연기가 뛰어났기 때문에 키스 길의 감정선이 더 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보였다. 뭐 실존 인물이 이렇게 무덤덤한 인물(?)이라면 할 말 없지만.
순수 재미는 떨어질지도
이 영화에 대해 아쉽다고 느끼는 점은 장르적인 재미다. 이런 비슷한 소재와 주제로 <빅 쇼트>라는 걸출한 작품이 있어서? 아니다. 플롯에서 여러모로 긴장감이 느껴질 만한 장면이 많은데 왠지 모르게 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잔잔한 느낌? 영화 자막으로 센 수위의 밈들이 나오고 큰돈이 걸렸는데도 영화 전체적으로 플롯을 이끄는 방식이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폴 다노나 세스 로건, 쉐일린 우들리의 카리스마와 연기가 주는 감정이입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느낌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불호여론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임과 동시에 치명적인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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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된 여자
<서브스턴스(The Substance)>(2024, 코랄리 파르자)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호러 이미지 묘사 포함
SNS가 메인 미디어로 자리 잡은 시대에 실물의 TV에서 방영하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소재로 택한 것부터,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인위적이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따지는 행위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인물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대신 현실의 인간들이 감추고 있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말하고 움직인다. 선명한 색을 띠는 단순화되고 과장된 배경, 자주 대칭적인 화면 구도는 극이 전하는 공포에 효과적으로 몰입하도록 길을 닦아놓는다. ‘서브스턴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엘리자베스가 아는 바가 다인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원본’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 젊고 더 나은 나”를 분열시켜 끄집어낸다는 설정과 함께, 작품은 성공적으로 바디호러 이미지를 구현한다. 손톱에서 척추까지, 피부에서 내장까지- 주어진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주인공의 신체 외에도 두렵거나 싫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영리하게 포착한다. 화장실에서 통화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새우를 먹는 하비의 탐욕스러운 입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소스 범벅이 된 손을 영화는 때로 슬로모션마저 입혀 들이민다. 잦은 클로즈업은 깔끔한 편집을 만나 부담스럽다는 감상을 피해 간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스타다.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금색 별로 박혀 있다. 날달걀로 ‘서브스턴스’를 실험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며 오프닝을 끊은 후, 영화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그 별이 새겨지고 잊히는 과정이다. 엘리자베스는 스타‘였’다. 그는 오랫동안 진행을 맡아 온 에어로빅 쇼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스튜디오 복도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찍은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고 그것을 바라보는 데미 무어의 팔다리는 여전히 매끈하다.**(맨 하단 덧붙임) 무엇이 그를 스타이거나, 스타가 아니게 하는가. ‘골드 스타’ 시퀀스에서는 꼭 수많은 팬들의 환호가 엘리자베스를 스타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환호의 방향은 교묘하게 조정되기도 한다. 이름마저 하비인 프로듀서가 엘리자베스를 방송에서 내보내려는 까닭은 단순히 나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특정한 몸이 아름답다’는 아이디어를 주입받아온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다면, 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엘리자베스의 이웃과 같이 댄서들을 성적 대상으로 관람하는 남성들을 타깃으로 짜였다.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수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하는 가운데 정작 안무는 구별하기도 힘든 쇼다. 할리우드의 공급과 수요를 통제해 온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의 법칙에 따르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방송이 잘 팔리고, 나이 든 여성은 외모가 어떠하건 성적 대상일 수가 없다. 그럴듯한 재현에 힘쓰기보다는 픽션적 허용을 통해 곧장 본질substance로 돌진하는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올드한’ 쇼의 ‘부활’을 그림으로써 할리우드(뿐일 리가)의 낡은 미소지니가 아직도 건재함을 꼬집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그에게 USB를 건넨 남자의 경우와 다르리라 짐작한다. 그가 ‘서브스턴스’ 실험에 참여하는 동기는 젊음을 향한 동경 자체보다는, 계속해서 스타이고자(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가까워 보인다. 하비처럼 결정권을 쥔 남자들이 나이 든 여성을 ‘사랑받지 못한다’고 정의하기에 엘리자베스는 젊어져야만 한다. 엘리자베스가 ‘오로지 당신만 남아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괴로워하며 찾은 것은 “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girl야”라고 말한 동창 프레드의 연락처다. 본래 건강검진 결과지 귀퉁이였으며 진흙탕에 푹 젖어 변색된 종잇조각을 엘리자베스는 고이 보관했다. 그는 이제껏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타인, 특히 남성으로부터 확인받도록 학습해 왔다. (수가 처음으로 규칙을 어기는 순간이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기 직전이었다는 점도 유사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므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력적임을 인정해 줄 남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이 거기 있는 이상, 엘리자베스는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수가 규칙을 어기며 엘리자베스는 급속도로 노화한다. 엘리자베스의 체액에 기생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수는, 마치 그것이 자신일 리 없다는 듯 ‘본체’를 기피한다. 영화도, 종종 엘리자베스 스스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을 취한다. 그의 신체는 과장된 연출과 만나 싫은 것을 넘어 두려운 것으로 그려진다. 위협적으로 짜증을 내던 수의 하룻밤 상대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움츠러들었으나, 후엔 자신의 구부정한 실루엣과 쉰 음성을 이웃 남자를 쫓아내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멘탈은 행동으로 발현되고, 주방을 어지럽히는 공격적인 몸짓이나 부러 이를 악물고 긁으며 내는 목소리, 먹은 음식의 지저분한 잔해들도 ‘괴물스럽게’ 다가온다. 아마도 의도된 위장이다. 이는 “자기 관리”가 잘 된 수의 외면, 몸짓과 대조를 이루며, 익히 배운 대로 ‘괴물’과 ‘천사’를 구분하도록 현혹한다.
그러나 ‘빌런’은 사실 수가 아닌가. 수는 엘리자베스가 내면화한 미소지니/메일게이즈의 의인화 혹은 판타지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첫 장인 “엘리자베스”는, 관객이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두 번째 장 “수”의 화자는 엘리자베스와 수이고 관객 역시 양쪽 모두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낯설지 않은 분열이다.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 여성의 자아분열: ‘나만으로도 괜찮다’는 목소리와 ‘나는 내가 아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는 충돌한다. 서로의 안타고니스트가 된 그들은 애초에 “하나”이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엘리자베스는 ‘실험을 끝내겠냐’는 물음에 매번 ‘안 돼’라는 답을 한다. ‘나’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빌런’을 ‘또 다른 나’로 설정함으로써, 작품은 그 ‘또 다른 나’가 탄생한 배경을 응시하려 한다.
엘리자베스가 실험을 중단하려다 말고 수를 살려 내면서, 두 자아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수는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머리를 붙잡고 거울을 마주 보며 그대로 여러 차례 박아 맺힌 상을 깬다. 이는 자기 파괴와 다르지 않다. 수는 현재 ‘나’의 외형에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특정한 여성성을 지니지 않은 상태의 ‘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엘리자베스/수는 스스로를 (여성)혐오하는 것이다. 수의 승리는 곧 패배다. 홀로 자아를 차지한 그가 곧 재분열을 택하는 전개는 필연적이다. 엘리자베스는 파괴되고, 원본 없이는 환상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새해 전야 쇼를 앞둔 수의 신체 부위는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치아가 빠져 입을 벌리지 못하는 수를 향해 하비는 “예쁜 여자는 웃어야지”라고 말하고, 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이야말로 호러다. 하비의 사무실에 불려가 불안해하던 수가, 새해 전야 쇼 진행을 제안받고 활짝 미소 짓는 장면이 호러였던 것처럼 말이다.
패닉한 수는 집으로 달려가 ‘서브스턴스’를 재사용하며 최종 금기를 어긴다. 마지막 장 “몬스트로 엘리자수”, 자아들은 분열되지도 완전히 융합되지도 않은 채로 기이하게 공존한다. 수의 거죽을 열고 나온 ‘엘리자수’는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들을 재조립한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카메라는 이 몸을 충실하게 전시하며 호러 연출을 하는 동시에, ‘그의 입장에서’ 움직인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엘리자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찬사와 함께 맞이하는 환영을 본다. 엘리자베스의 ‘동기’가 재확인되는 순간이다. 허나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새해 전야 무대에 오른 그를 맞이하는 건 침묵. 여기서 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무대와 객석 사이를 흐르는 긴장과 위화감이다. 웃는 낯으로 굳어 눈알만 굴리는 “예쁜 여자” 백댄서들이 이 광경의 기괴함을 극대화한다. 오려 붙인 엘리자베스의 사진이 떨어지고 얼굴이 대중에게 드러나자 오히려 엷은 해방감이 끼어든다. 이즈음 영화는 엘리자베스/수가 들어 온 말들을 보이스오버로 삽입한다. 꼭 그 평가들을 한계까지 흡수한 몸의 거부반응이 모여 ‘엘리자수’로 실체화된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군”, “저 코 대신 유방이 달려 있는 게 낫겠어” 오디션 시퀀스에서 캐스팅 디렉터가 뱉은 대사가 화면에 겹치는 가운데, 엘리자수는 유방을 낳는다. 결국 그는 한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느닷없이 등장해 고전 호러 속 영웅이라도 된 것 마냥 엘리자수의 머리를 가르는 이 남성은, 하비, 이웃집 남자, 주주들, 객석을 채운 관중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엘리자베스를 고용하고 스타로 ‘만들고’ 그를 해고하며, 다시 엘리자베스와 같은 사람인 수를 고용하고 그의 모습이 달라지자 ‘목을 자른’다. 그것을 수행하는 ‘본질적인’ 주체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엘리자수의 피는 남자의 손뿐 아니라 무대와 객석 전체에 묻어 있다.
엘리자수의 몸 한쪽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붙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진 채로 고정돼 있는 모양이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삼켰던 엘리자수의 신체는 무너져 내린다. 비로소 몸으로부터 해방된 얼굴(어쩌면 영혼)은 떨어져 나와 금색 별 위에 자리한다. 작품 초반- 낡아 갈라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별에 행인이 샌드위치를 떨어뜨려 시뻘건 소스의 흔적이 남는 컷은, 엔딩- 이 얼굴이 터져 별이 피범벅이 되는 컷과 일종의 불쾌하고 비극적인 수미상관을 이룬다.
‘먹히길 기다리는 탐스러운 복숭아’, ‘개미떼에게 점령당하는 사과’: 코랄리 파르자의 전작 <리벤지> 속 주인공 여성 젠은 그러한 위치에 놓였다가 맹금으로 되살아난다. <서브스턴스>에서 인간(대개 엘리자베스)의 몸과 연결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새우, 닭뼈, 내장 따위다. 엘리자베스/수의 ‘교환’ 도중 그들은 수의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오거나 수의 배꼽에서 닭뼈가 튀어나오는 등의 악몽을 꾸고, 스튜디오가 은퇴 선물로 엘리자베스에게 건넨 요리책엔 내장을 주재료로 하는 레시피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수의 남자친구와 엘리자베스가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벗은 둔부가 각각 스크린 중앙에 놓이기도 했는데, 어디에 무엇이 달렸건 주름이 얼마나 있건, 무방비한 인간의 몸은 하비의 손이 흔들던 새우의 몸처럼 초라하다. 댄스 쇼의 카메라가 수의 신체를 의도적으로 확대하듯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것들을 확대한다. <리벤지>가 젠을 포식자로 부활시켜 장르영화의 미소지니를 장르 화법으로 응징했다면, <서브스턴스>는 장르를 뒤집기보단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몸이 거기 철저히 잠식당하게 만든다. 여성이 내면화한 미소지니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장르에 충실하게 묘사한다. 지속적으로 관객의 피부와 내장에 강렬하고 익숙한 감각을 주입해 바디호러의 기능을 다하고, 그 감각의 이면에서 ‘바디’에 관한 ‘호러’적이고 공공연한 비밀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서브스턴스>가 흥미로운 작품인 까닭은, 예상을 깨고 놀라게 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당연하게 거기 있어온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보여주며, 어째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는가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비체가 되고 끝내 완전히 사라지는 이야기를 목격한 우리가 도달하는 장소는 ‘그는 그렇게 했고, 대가를 치렀다’는 식의 교훈이 담긴 마침표 보다는, ‘그는 왜 그렇게까지 했나’라는 물음표에 가까워야 한다. 몸 없이는 영혼도 없을 테지만, 영혼 있는 몸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고정된 상을 띤 채 하나의 물건이 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몸은 대체 무엇인가. 몸을 가르고 비틀고 조립하고 다시 해체하며, <서브스턴스>는 ‘어떠한 몸’에 대한 계획된 물신에 질문을 던진다.
** 덧붙임
데미 무어의 연기가 대단한 까닭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와 동일시될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 아니 기꺼이 스스로 엘리자베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자신을 기준으로 엘리자베스(와 데미 무어)가 꾸준히 관리했기에 그러한 신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기준의 몸’은 “25세”의 것이므로 애초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전 세계 ‘뷰티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에 다다르라’고 ‘안티 에이징’을 부추긴다. 이 이미지는 엘리자베스와 같은 ‘스타’는 물론, 스타가 아니며 될 생각도 없는 여성들의 내면에도 침범한다. 그러나, ‘이상적인/미디어 표준의 몸’은 단지 젊은 것 뿐 아니라 촘촘한 규격을 충족시키는 몸이다. 대부분의 이십대 여성의 신체는 수의 것과는 거리가 멀고, 수의 “완벽함”은 깨지기 쉽다. 이 환상이 옥죄는 것은 ‘나이 든’ 여성만이 아닌 모든 여성,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으로 인식되지만 여성이 아닌 이들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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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명적 세계에서 몸부림치는 실존, <파닥파닥>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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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부터 이어집니다.)
그 고등어가 재수 없는 이유
<장면 5>
“빨리 우리들처럼 죽은 척 해. 이렇게 해야 살 수 있어요.”
수조 속 물고기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가장하는 것이다. 살아있을수록, 더 싱싱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들이 선택한 방식은 ‘죽은 척하기.’ 그들은 배를 까뒤집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겨우겨우 삶을 부지한다. <장면 5>, 고등어의 1인칭 시점 카메라로 본 수조 속 물고기들의 생존법은 기괴하다. 고등어가 노래한 OST ‘악몽’의 가사 일부는 아래와 같다.
“그들이 나를 데려간 그곳엔
많은 이들이 죽어있었어, 아니 살아있었어.”
그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철학자 야스퍼스로 바라본 벗어날 수 없는 수조 안, 그리고 곧이어 들이닥칠 죽음의 예고는 수조 안 생선들이 맞닥뜨린 한계상황이다. 죽음의 순간을 잠시 미루는 것에 불과한 ‘죽은 척하기’ 생존법으로는 그들을 둘러싼 한계상황을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없다. 이 한계상황에서의 대처방식을 두고 고등어와 다른 수조 속 물고기들은 사사건건 부딪힌다. 야스퍼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수조 속 물고기들과 고등어가 추구하려는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장의 배고픔과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한 수조 속 물고기들. 이들의 생존법은 오히려 죽음을 안일하게 망각하는 회피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상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안주하는, 비(非)본래적인 삶에 그쳐 있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그 다음은요?”
이들에게는 다음이 없다. 잠깐 죽음을 피해봤자 그뿐. 그들은 여전히 수조라는 절망적인 한계상황에 머물러 있다.
반면 수조를 벗어나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무작정 몸을 불사르는 고등어, 고등어에게 바다가 아닌 수조 속에서의 삶은 다른 의미로 진정한 삶이 아니다. 그에게 유리벽에 가로막혀 바다를 포기하고 죽은 척하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파닥파닥’에서 고등어가 그토록 염원하는 바다는 자유이자, 본래적 삶이자,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실존 그 자체를 상징한다. 고등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실존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삶의 본래적인 가치를 수조 속 물고기들에게도 계몽시키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계몽이라는 작업은 마음만큼 쉽지 않다. 당장 눈앞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인 물고기들에게 고등어는 언제나 붕 뜬소리만 해대는 눈엣가시다. 자꾸만 이룰 수 없는 목표에 몰두하고 도전하려는 고등어의 모습이 다른 물고기들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비본래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에만 매몰된 그들에게, 고등어가 본래적 삶의 가치를 계몽하려는 시도는 안주하고 있던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채찍질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장면 6>
그러나 이토록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희망찬 탈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말끔히 손질되어 접시에 오른 고등어. <장면 6>의 카메라 앵글은 인간의 시점에서 여러 밑반찬과 함께 식탁에 오른 고등어를 내려다보며 그가 더 이상 실존을 외치던 존재 ‘고등어’가 아닌, 그저 ‘고등어 회’라는 섭취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의 정서를 심화시킨다. OST ‘용서해요’ 뮤지컬 시퀀스 직후, 음악 없이 식탁에 접시를 올리는 ‘달그락’ 효과음으로 시작되는 <장면 6>은 직전의 시퀀스에서 고등어와 올드넙치가 죽음의 순간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장면과 대조적으로 매정한 현실의 상황을 부각시킨다. 인간의 기호와 즉흥적인 선택으로 뒤바뀐 올드넙치와 고등어의 생사의 갈림길. 장난삼아 그 입에 담배를 물리는 남자는 눈앞의 생선이 얼마나 자유를 부르짖으며 몸부림치다 죽어버렸는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고등어의 죽음은 진정한 삶을 향한 실존의 추구가 종종 극복할 수 없는 숙명과 권력 아래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도 몸부림쳐야 삶이지
영화 ‘파닥파닥’은 횟집 수조 속 생선이라는 독특한 화자의 시선을 빌려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불평등, 그리고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바다를 갈망하던 고등어의 죽음을 통해 영화 ‘파닥파닥’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제 포기하고, 저항하지 말고, 늘 그랬듯 수조 속에서의 삶에 안주하라는 회유일까?
<장면 7> <장면 8>
여기서 영화의 마지막, 올드넙치의 탈출이 가지는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올드넙치의 탈출에서 ‘모형 칼’은 중요한 모티프다. <장면 7>에서 인간 병사 장식품의 손에 들려 있던 모형 칼은 저항하는 고등어를 찌르며 상처 입힌다. 이는 인간의 막강한 권력이자, 실존의 추구를 좌절시키려는 불평등한 현실의 제약이다. 그러나 고등어의 몸에 박힌 칼은 이제껏 죽음을 회피하며 숨기에 급급했던 올드넙치에게로 전달된다. 탈출하기 직전 인간의 손아귀에 붙잡힌 절망적인 상황, <장면 8>에서 올드넙치는 숨기고 있던 모형 칼을 인간을 향해 날리며 마침내 자유를 손에 얻는다. 고등어로부터 전해져 올드넙치를 바다로 이끌어준 모형 칼은 곧 자유를 향한 갈망이자 저항의 상징이다. 작은 모형 칼은 결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대단한 도구가 못 된다. 생선에게 인간은 언제나 압도적인 포식자이자 뒤집을 수 없는 서열. 그럼에도 그는 고등어로부터 이어진 그 칼을 인간에게 겨눔으로써 비로소 죽음의 수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인간과 생선의 서열이 뒤바뀌는 이변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들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불평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저항을 통해 올드넙치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올드넙치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변화했다는 것이다.
“운명이 짓궂은 장난을 치네요, 바보처럼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해낼 수 있어요…내가 항상 같이 할 테니.”
<장면 9> <장면 10>
OST ‘용서해요’의 뮤지컬 시퀀스 속. 좁은 정육면체에 갇혀 있던 <장면 9>에서 그것이 해체되며 자유로워지는 <장면 10>으로의 이행은, 비단 올드넙치뿐만 아니라 고등어 또한 탈출에서 정신적 주체로서 함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고등어는 육체적으로는 죽음을 맞이했으나, 결국 그 죽음이 누구보다 비관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에 매몰되었던 올드넙치를 변화시켰다. 올드넙치와 고등어는 정신적인 동반의 관계를 맺어 함께 바다로 나아간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이어받은 올드넙치의 탈출은 고등어가 지향했던 실존적인 삶의 추구를 계승한다. 바다를 향해, 진정한 삶을 향해 저항하고 몸부림치는 그 과정 자체가 실존이다. 그 점에서 고등어는 이미 실존을 완수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개인이 처한 절망적인 현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필연적인 숙명이라는 한계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외친다. 언뜻 비극적으로 보였던 고등어의 죽음은 올드넙치의 탈출을 통해 그 의지를 계승하며, 충분히 우리가 우리의 삶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제 ‘파닥파닥’은 단순한 의태어가 아니다. 온갖 불평등과 극복할 수 없는 숙명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삶을 소망하는 실존적인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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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법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오늘 시사회는 그대로 진행됩니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용기를 다룬 작품이니, 오셔서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려면, 12월 4일 오전 9시 49분에 발송된 문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밤, 초현실적인 내란 획책이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나는 지금 ‘영화 따위’가 문제냐며 퇴근 후 곧바로 어느 집회 현장이든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문자를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언젠가 사회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가 떠올랐다. 참사 후 가수들이 예정대로 콘서트를 진행하자 비난 여론이 일었다. 그때, 한 음악 평론가가 말했다. ‘그럴 거면 앞으로 음악으로 위로받았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우리는 지금 예술이 ‘하찮아지는’ 시국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실이 예술을 초월하는 기막힌 상황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술에서 이 시국을 헤쳐 나갈 용기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며, 나는 내란범과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에 맞설 ‘사소한’ 방법 중 하나를 떠올렸고, 되새겼다.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펄롱의 걷는 장면이다. 그의 걷는 모습을 비추거나, 그가 걸으면서 마주했을 법한 풍경을 비추는 장면 말이다. 펄롱이 일상적으로 걸으며 마주하는 그 모든 사람과 풍경에서, 그는 정동 소외자다. 펄롱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대로 느끼지 못한다. 펄롱은 학대당한 가난한 아이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어 동전을 건넨다. 수녀원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그들이 학대당한다는 낌새를 느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펄롱을 나무란다. 퍽퍽하지만 그런대로 소박한 현재의 안온한 삶을 잃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그들에게서 마음을 끊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펄롱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르막길’이다. 펄롱은 종종 그 길을 오르며 헉헉거린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석탄을 배달하는 펄롱은 거친 솔로 손가락과 손톱 구석구석에 낀 석탄 가루를 닦아낸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느낀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흔적도 없이 닦아내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펄롱은 헷갈린다. 수녀원에서 본 소녀들에게서 사랑하는 딸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펄롱은 그들에게서 고아인 그를 조건 없는 선의로 돌봐준 어른들 덕분에 번듯하게 성장한 그가 마주했을지도 모르는,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본다.
이제 펄롱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솔직할 것인가, 모두의 요청에 따라 막강한 영향력의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에 눈감을 것인가. 펄롱은 이 문제를 거창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자신이 오랫동안 해온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가 수녀원에서 마주한 소녀 세라와 함께 걸으며, 수녀원이 아닌 자기 집으로 걸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펄롱은 수녀원에 갇힌 ‘사고 치는 여자’와 ‘사랑스러운 딸’ 사이에 놓인 임의의, 우연적인, 불분명한 구분선을 지워낸다. 자기 자신의 경험과 감각, 감정과 정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펄롱은 그저 세라의 손을 잡고 길을 걸음으로써 이 일을 해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아일랜드 수녀원에서 대규모로 자행된 소녀들의 노동력 착취 및 감금, 학대 사건에서 출발한다. 원작 소설을 쓴 클레어 키건에 따르면, 1996년에 마지막 막달레나 세탁소가 문을 닫기 전까지 수녀원에 감금당한 채 강제 노역에 시달린 소녀의 숫자는 최소 만 명에서 최대 3만 명에 달한다. 9천 명의 소녀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금의 명분은 ‘타락한 여성’의 수용이었다. 우리나라의 형제복지원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는가?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질문해보면 막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한 개인이 감당하고 맞서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압도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펄롱처럼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변화와 저항을 모색할 수 있다. 자기 감각과 경험을 믿는 것이 출발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감각과 경험이 누군가의 삶과 생명, 개별 인간들의 관계성,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규칙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짓밟는 것으로 지향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내란범들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경험과 감각이 중요할 것이다. 불완전하고 문제투성이일지라도, 우리 일상의 토대를 이루는 연결망을 어떻게 더 확대할 것인지가 기준이어야 한다.
담담한 소박함으로, 평범한 소시민들이 각자와 서로의 삶을 꾸려온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폭력을 거스르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말하는 듯하다. 내면에 침잠해 세상을 짊어진 펄롱의 용기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따로 또 같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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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은 호러지만 안은 따뜻한 겉바속촉형 호러
만약 과거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괴롭히던 부랑자들을 한두 대 두들겨 팰 수 있을까. 물론 폭력은 나쁘지만 아쉬움이 있다. 왜 날 괴롭히던 애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었나?라는 아쉬움이다. 운동을 열심히 했으면 그렇게 무시당하지 않았을 텐데. 갑자기 성인이 되고 나서 겪었던 몇 흑역사가 여기에서 온 것 같아 또 과거의 나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시간을 돌린다면 내가 내 힘으로 나 자신을 지킬 것이다. 맘에 안 드는 놈에게 찍소리 못하며 당할 바에 운동 열심히 하는 게 나 자신을 지키는 좋은 방법인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년시절은 서로 이어져있다. 당당하지 못하면 맘에 드는 이성에게 말 한마디 걸기 어려울 수도 있다. 또 친해지고 싶은 상대와 오히려 안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 쉬웠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 결국 나를 만드는 일이란 걸 윗 문단을 쓰며, 또 이 문장을 만들여 다시 한번 느낀다. 극복은 사람 살면서 정말 어려운 난관 중 하나다. 어쩌면 10대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전가한 과제를 아직까지도 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솔직히 나한테 까부는 놈 한 방 쳤을 것 같다. 살면서 누구의 얼굴에 주먹을 꽂은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생각이 아직도 난다. 때리지만 않는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때의 객기가 살면서 중요하다는 걸 미리 알았을 텐데 말이다. 이 소년 피니는 글쓴이보다 더 한 두려움을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가면 쓴 남자가 관객과 소년을 납치했다. 탈출하는 방법은 이번 주 수요일에 극장에 가는 것이다. <블랙폰>이다.
연쇄 납치범
1978년 미국. 한 범죄자가 덴버라는 마을에 활개 치고 있었다. 죄목은 유아 납치. ‘더 그래버’라는 범죄자는 복면을 쓰고 덴버 마을 곳곳에서 아이들을 납치하고 있었다. 범죄 수법 공통점은 납치된 곳 근처에서 검은 풍선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공포에 떠는 마을. 그러나 남매 피니와 그웬에게 더 무서웠던 건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설명이 어려운 한 요인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버지 혼자만 남게 된 후 아이들은 점점 받는 상처가 늘어났다. 걸핏하면 맞는 아이들. 오빠 피니에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악몽 같은 10대를 보내고 있던 피니. 이런 피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줬던 건 급우 로빈과 여동생 그웬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피니. 화장실에서 나쁜 놈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피니에게 폭언을 하고 있었다. 맘에 안 드는 놈 하나 패고 있던 로빈은 화장실로 따라 들어와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나쁜 놈들을 모두 쫓아낸 로빈과 피니. 로빈은 피니에게 “이제 너 스스로가 너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한다. 순수한 근력은 셌지만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몰랐던 피니. 그런데 더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기를 지켜주던 친구 로빈이 납치됐다. 곧이어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 일어났다. 피니마저 그래버에게 납치됐다. 지하에 갇힌 피니. 탈출에 유용할 정보는 독방에 덩그러니 있는 고장 난 검은색 전화기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검은색 전화에서 울리는 의문의 전화벨. 통화 상대는 그래버에게 피살당한 친구들이었다. 피니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은 아이들과의 통화를 시작한다.
블룸하우스 발 호러영화?
블룸하우스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다들 한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맞다. 호러 영화에서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회사가 제작한 영화는 적은 비용으로도 높은 효율을 뽑는 작품들이 많았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인시디어스>, <겟 아웃>, <해피 데스 데이> , <23 아이덴티티>, <위플래쉬>까지 이 제작사는 감독의 역량이 중요한 호러/스릴러 영화에서 좋은 타율을 선보였다. 그중에서 내 기억 속에 세 번째로 기억에 남았던 게 뭐냐? <살인 소설>이었다(첫 번째는 <위플래쉬> 두 번째는 <겟 아웃>). 스콧 데릭슨이라는 이름이 사실 생소하긴 하다. 나중에 마블에 입덕 하고 나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맡은 감독이었다고 하나 개인적으로는 그 작품마저 그렇게 인상 깊진 않았기 때문에 그냥 흘려 지나갔던 기억이 있다.
다시 <살인 소설>로 들어간다. 이 <살인 소설>은 글쓴이 개인적으로 저평가가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내 기준으로 호러영화의 대표 격하면 <컨저링>이나 <쏘우>가 나오곤 하는데 이 두 작품보다 <살인 소설>이 밀린다 곤 생각 않는다. <살인 소설>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잘 활용한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기괴한 이미지를 삽입하는데 이 장면이 끌고 가는 공포가 후반부까지 쭉 이어진다. 또 어딘가 익숙하지만 살짝 변용한 톤이 중간중간 기억에 굉장히 강하게 남는다. 또 사운드 연출이 잘돼서 점프 스퀘어가 비교적 덜 식상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는 이 스콧 데릭센의 장기가 잘 들어가 있다. <살인 소설>을 봤다면 느껴지는 장면 장면들이 곳곳에 보인다. 약간 예전 비디오 돌려보는 듯한 시퀀스가 주요 장면마다 배치가 됐다. 또 사운드 연출이 인상 깊을 수밖에 없다. 이 영화의 제목은 <블랙폰>이다. 당연히 전화기가 중요한 소재다. 띠리리링 하는 전화 효과음 설정이나 역시 비교적 덜 식상하게 만드는 사운드 연출까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스콧 데릭슨이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영화의 연출 측면에서도 죽은 친구들과 피니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때 장면마다 죽은 친구들을 묘사하면서 피니에게 어떤 힘을 주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잘 묘사했다. <헤어질 결심>에서 볼 수 있었던 방법이 조금 바뀌었다. 그리고 인물의 시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잘 썼다. 이 턴에 이런 시점을 보여주면 영화가 박진감이 있고. 또 후술 할 에단 호크의 포스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이고. 이런 디테일을 잘 살렸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강점은 감독의 이런 연출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한 틴에이저
아마도 확실하게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지점이다. 이 영화는 중반부에 갑자기 장르를 비튼다. 철저하게 호러 톤을 유지하던 영화는 10대 소년의 내면이 주요 소재가 된다. 영화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공포는 두 가지다. 학교와 집에서 겪는 공포다. 이 공포는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 공통점이 있다. '대안이 없어도 된다'라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피니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도 주인공은 살 만하다. 아버지가 허구한 날 여동생 허리띠 때려도 피니는 외롭지 않다. 누구보다 든든한 여동생이 있으니까. 학교에서 미친놈들이 괴롭혀도 별 일 아니다. 로빈이 구해주면 되니까. 그러니까 피니는 괴롭긴 해도 자기 상황을 주도적으로 바꿀 필요도 이유도 못 느끼는 사람이다. 그런데 맞닥뜨리는 공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냥 이 상황이 익숙한 것이다.
극에서 제시되는 납치라는 설정은 이 익숙함을 광폭하게 비틀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전반적으로 이 두 공포가 병렬적으로 제시되며 피니를 괴롭힌다. 일단 여동생과 로빈이 없는 환경은 첫 번째 공통점을 가진다. 또 그래버가 피해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이 영화의 어떤 장면과 오버랩되는 것은 절대 그냥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피니가 겪고 있는 공포를 좀 더 색다르게 표현했다. 그래야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 닿아있다. 또 이렇게 설정을 의도적으로 대치시켜야 인물이 두 공포 중 하나만 극복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엔딩에 인물들이 고르는 선택지에 탄력이 생기는 셈이다.
물론 이 후반부의 장르 변화가 아쉽다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호러 분위기를 에단 호크의 카리스마와 점프 스퀘어가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이게 뭐가 공포영화나?'라고 생각할 분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김새는데 엔딩은 거의 기름을 붓는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호러 장르이기 이전에 피니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여 주신다면 감상이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니가 정말 겪어야 했던 공포는 자기 내면에 있다. 이렇게 찍어 누르는 세상 속에서 바꿀 생각을 않는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이 영화에 작동하는 굉장히 큰 공포일 지도 모른다. 이 공포야말로 소년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극복해야 했던 처음 관문이다.
앉아있기만 해도 무서워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에단 호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아저씨 연기 잘하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래버에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그래버가 납치 수법을 관객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신이 있다. 이때 뭔가 엉거주춤하는 자세와 낮게 깐 목소리톤으로 관객들을 장악한다. 이 연기에는 살짝 페널티가 있다. 바로 얼굴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빛과 표정연기로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시작한다. 가면을 잘 고른 감독의 공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에단 호크의 개인기가 빛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시퀀스는 그래버가 피니를 납치한 후가 중심이 된다. 이 그래버에게는 과제가 있다. 바로 극에서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그래버는 최소한의 동선으로 피니에게, 또 관객에게 공포감을 준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납치되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바로 먹는 문제가 걸릴 것이다. 이 음식 주는 장면도 에단 호크는 두렵게 소화한다. 굉장히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살짝만 비틀어서 호러 분위기를 조성했던 섬세함이 돋보인다. 또 영화를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익숙한 방식으로 연기하는 것이 잘 느껴진다. 바로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다. 카메라 워킹부터 목소리 톤까지 살짝살짝 바꿔가며 극을 이끄는 카리스마가 압도적이다. 이 영화가 10대 소년의 극복기를 다룬 것만큼이나 '호러 무드'를 품고 있는 이유는 이 배우의 충격적인 연기가 뒷받침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인물의 연기를 구경하는 것은 영화의 주요한 재미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더 배트맨>의 리들러가, 또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의 그린 고블린이 연상이 되는 엄청난 연기였다. 앉아있고. 서있고. 뭘 들고 있고. 내려놓고 있고. 뛰고. 몸싸움을 하고 단어 한 글자만 나열해도 장르가 되는 퍼포먼스 하나 만으로도 비싼 티켓값의 2/3은 구성한다고 보는 쪽이다.
굳이 옛날이야기를
영화를 보고 나서 느껴지는 뜨거운 무언가는 좋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1970년대 이야기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의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밀폐된 공간 탈출하 기다. 바로 호러영화의 근본으로 이어진다. 호러영화의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아미타빌의 저주>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피비 랜 나는 복수극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귀신 씐 집이라는 소재 <엑소시스트>까지 미국 호러영화의 전성기는 197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쭉 이어졌다.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가 생각나는 빌런이나 특정 장르에 무언가 쓰였다는 점까지 아마 감독이 당시 호러영화에 대한 리스펙트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점도 있어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점도 있다. 바로 여동생 캐릭터다. 여동생 캐릭터에 어떤 코드로 읽힐 수 있는 몇 가지 설정이 있다. 이 코드가 무엇인지 쓰면 스포일러가 된다. 그런데 극을 보고 나서 딱 알 수 있는 건 이 설정은 사실 없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냥 곁다리로 스윽 지나가는 느낌이다. 뭐 검은색-흰색의 색채 대비나 그래버가 쓴 가면이 영화의 특정 코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긴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굳이 여동생 서사에 그런 소재들을 넣어 집중을 깰 필요가 있었는가? 는 의문점이 든다.
또 피니의 설정이다. 피니 이야기 물론 좋았다. 관객들도 뿌듯할만한 충분한 이야기 구성이었다. 그런데 이 피니와 블랙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살짝 인과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극에서 중요한 것이 다른 부분이기 때문에 생략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헐겁다면 충분히 헐겁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마 여동생에게 부여한 설정 하나가 피니에게도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설명을 좀 더 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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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훈이 형은 은퇴할 수 있을까?
이 글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2]의 스포일러 및 전반적인 이 시리즈에 대한 제 개인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리뷰 1편을 읽고 오셔도 재밌습니다(??)
사진출처:한경 국제뉴
코스트코 회장은 한국 생각만 해도 좋아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고 했다. 당연하다. 사업가에게 매출이 잘 나오는 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넷플릭스 CEO가 오징어게임의 참가자가 입는 체육복을 기꺼이 입고 홍보영상에 나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단돈 300억으로(?) 1조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니.
그뿐만이 아니다.
에미상에서 비영어권으로는 처음으로 수상 및 6관왕 달성. 누적 시청시간 16.5억 시간(역대 최고). 94개국에서 53일간 1위(자료출처:한경국제뉴스). dalgona를 비롯해 오징어 게임에 나온 한국의 전통문화(놀이)들에 대한 외국인들의 친밀감이 생긴 것은 물론, 이 작은 나라의 콘텐츠는 두유노 시리즈에도 당당히 합류했고. 출연진 모두를 글로벌 인기를 얻는 배우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빨강머리 기훈이 다시 게임을 시작하려는 듯한 결연한 표정으로 공항에서 뒤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글로벌 팬들은 이 시리즈의 후속 편을 기다려왔다.
사진출처:보그 코리아
그러나 이 시리즈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 캐릭터의 소모적인 사용에 대한 목소리는 시즌2 캐스팅의 성비(性比)가 공개되면서 더더욱 심해졌다. 또한 한 출연자의 범법행위를 감싸는 듯한 반응에 시리즈의 후속 편을 기다리면서도 욕하게 되는 애증의 목소리를 키우기에 충분했다.
막상 공개된 시즌2는 전편에 비해 그다지 좋은 평을 듣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는 스스로가 세운 최초와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며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딱지맨의 하드캐리가 시즌2의 포문을 열었다면. 영원히 전재준으로 불릴뻔했던 박성훈은 이제 현주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다. (외국인들에겐) 새로운 전통놀이들은 이미 유튜브나 숏츠들에서 무한반복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남는다. 시즌2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자 그런 의문 혹은 찜찜함은 더 커진다. 시즌제 드라마, 혹은 (최근의) 마블 영화가 많이 들었던 혹평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바로 다음 편을 위한 발판 마련.이라는 평 말이다. 제작진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길어져서 시즌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곧바로 내가 [더 글로리]와 [외계인]을 떠올리게 했다.
사진출처:한국 경제시즌제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보통 시간적인 단절이 이뤄지거나 한 사건의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 마무리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더 글로리]의 경우는 그다지 끊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서 파트를 나누는 바람에, 후반부에서 시리즈 혹은 작가가 가진 단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후자인 [외계인]의 경우는 늘이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이야기를 두 편에 나눠 진행하며 제작비를 회수조차 하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는 아직 모든 파트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쪽에 속할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시즌2를 보며 느낀 점을 얘기하자면 외계인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계관이 넓어지며 캐릭터가 많아지다 보니 이야기가 풍부해지는 것은 좋으나. 그와는 별개로 이미 기훈의 이야기는 시즌 1에서 다 해버렸기에 기훈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시간도. 각각의 캐릭터에 이입할 시간도 줄어든다.
결정적으로 죽고 사는 것이 각 게임마다 긴장감을 갖게 하는 요소인데. 어차피 시즌3에서 다 결판이 날 테니 시즌2는 상대적으로 밍숭밍숭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시즌3은 "당연히"기다릴 수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시즌3이라고 해서 다음 시리즈의 발판이 되지 않으리라 속단할 수는 없게 되고. 결국 다이어트할 때 절대 찾아오지 않는 "내일"처럼 그저 질긴 생명만 유지하게 될 위험도 커질 것이다.
사진출처:한국 경제이런 현상은 내게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과연 오징어 게임은 시즌4 이상 나오게 될까?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의 시즌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즌3에서 만약 기발 씨훈이형이 죽는다면 당연히 시즌4에서는 새로운 인물을 찾아 메인에 내세워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시즌1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뉴비가 만약 이미 기훈처럼 시즌3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시즌2의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성기훈이 죽지 않는다 해도 이야기는 똑같다. 애초에 오징어 게임을 주최하는 세력 자체가 척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면서 게임이 다시 열린다 해도. 결국 움직여야 하는 것은 장기판의 말 같은 참가자들이므로. 위에서 말한 것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흐름으로 극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결국 글로벌한 인기를 불러일으킨 이 드라마는, 피곤하다 못해 아주 틀에 박혀버린 시즌제 드라마가 되어버릴 것이고. 이젠 당구마저 한국의 전통게임이라 우길 것이며, 기훈이 형은 영원히 은퇴하지 못한 채 "얼음"을 외치게 될 것이다.
사진출처:YTN
이럴 때마다 나는 사바하의 장재현감독을 떠올린다.
사바하 2편을 만들 것이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 혹은 마음은 있지만 지켜보겠다. 정도로 말했었다. 물론 후속 편이 나온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수요일 조조영화로 볼 사람에 속하는 나지만. 끝날 때. 혹은 맺음을 언제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남는 아쉬움을 쓰다듬을 줄 아는 것이 이젠 덕목이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밀려드는 작품의 홍수와 거의 모든 드라마가 시즌제화 되고 있는 트렌드 앞에서. 이제는 한 편에 온전히 모든 것을 담던 예전 영화들이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 화려한 문제작을 보면서도 머리 한편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피로감. 혹은 숙제로 남는 것만 같아 열심히 뛰어다니는 기훈이 형을 볼 때마다 안쓰러우면서도 덤덤해진다. 진심으로 기훈이 형이 은퇴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의 TMI]
1. 감기 너무 독하다.
2. 입으로 숨 쉬니까 더 힘들다.
3.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ㅠ
4. 하지만 그러기엔 난 이미 너무 잘 먹지. 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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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아톤리뷰/소개]초원이는 커서 고니가 됩니다. 조승우의 지리는 연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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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7월 4주 신작 영화
[WEEKEND CHOICE MOVIE] #왓챠영화 #왓챠신작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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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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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울>
나는 어떻게 '나'로 태어나게 되었을까?
지구에 오기 전 영혼들이 머무는 '태어나기 전 세상'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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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간귀도> 메인 예고편
간악한 음모를 파헤쳐라!
명나라 말, 염당 조직의 일원인 ‘형강봉’은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해
부현의 우두머리 격인 ‘조통’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며 살아간다.
살해 용의자 독룡방 방주를 처단하는 임무를 마지막으로 떠나려면 ‘형강봉’은
‘조통’과 그를 둘러싼 관리들이 관직과 재물을 탐하는 간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형강봉’은 자유를 위해, 백성을 위해 그들을 처단하기로 마음 먹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