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6 03:09:35
세상에 축적되어온 기억과 소리들에 대한 길고 긴 탐구일지
<메모리아> REVIEW
2021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인 메모리아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크게 기대한 영화 중 하나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전세계에서 가장 독자적인 시네아스트임과 동시에 시네아스트의 상징과도 같은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씨네필이라면 누구나 그의 신작을 기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필자가 아피찻퐁 감독에 관심가지고 주목하고 있기는 하지만 집에서는 영화를 안 보는 스타일이고(아피찻퐁 감독의 영화가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더 감흥있는 영화들이라 더욱 그렇다), 스크린으로는 기회가 없어서 집에서 엉클 분미랑 메콩 호텔이랑 일부 단편을 본 게 전부이고 장편은 단 한번도 극장에서 못 봤는데,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드디어 처음으로 극장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장편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정말 느린 호흡과 전개, 때때로 (좋은 의미로) 당혹스러운 사운드와 스크린으로 관객들을 반겨준다. 롱테이크가 정말 전작들 보다 더 길어서, 이 씬은 언제 끝나는건지 당황스러운 적도 꽤 있었을 정도. 총평하자면 메모리아는 인간 뿐만 아니라, 먼 옛날 때부터 지금, 이 지구에, 축적되어온 기억과 소리들에 대한 긴 탐구일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반부의 한 장면은 (그 장면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정말로 강력한!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지만)아피찻퐁 감독이 한번 더 진보하고 변화를 일으켰다고까지 느꼈고, 앞으로도 아피찻퐁 감독을 더 주목하고 싶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필자가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들을 만나보았지만 메모리아 관람은 정말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이 되었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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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같은 순애의 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순애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최근 공개된 <폭삭 속았수다> 속 관식의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순애’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떤 시련이 닥쳐도 상대에게 아무리 상처를 받아도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관식의 사랑은 순애다. 그의 사랑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의 사랑으로 인해 관식이라는 캐릭터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니콘남’이라는 말이 덧붙기도 한다.
왜 사람들은 이토록 ‘순애’에 열광하는가. 신자유주의 사회 속 사랑이란 점차 별볼일 없는 감정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랑은 돈과 시간을 들여 타자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연애와 결혼은 투자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되었다. 20대에는 뻔한 사랑을 꿈꾸며 연애를 하던 이들도, 결혼적령기에 이르면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조건‘이 맞는 상대를 만난다. 이는 관계 맺기의 실패 확률을 줄이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계산적인 행위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구하는 콘텐츠의 양상은 다르다. 암청색의 액션 장르물이 즐비한 콘텐츠 업계에서도 단비처럼 찾아오는 멜로물에 시청자들은 반응한다. 스펙터클에 매몰된 영화계의 경우 멜로물을 기피하는 추세가 이어진지 오래이나, 드라마계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여전히 멜로는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을 사로잡는 장르이다. 그리고 그런 멜로물의 핵심에는 ’순애‘가 있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한 여자의 순애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킨야라는 한 남성이 주도하는 로드 무비다. 훌쩍 지겨운 삶의 터전을 떠나온 킨야는 우연히 아케미라는 여성을 만난다. 킨야는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만남에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또다시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시마라는 남성을 만난다. 아케미의 독촉에 가까운 독려에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한 대의 차에 오르고, 이들의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작품의 초중반부에 주로 다뤄지는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케미라는 단독자라기보다는 여자를 원하는 킨야는 서투르게 그녀에게 접근하고 실패한다. 그의 방법론은 현시대의 감각으로 읽어낸다면, 폭력적인 접근이라고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무조건 부정적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시마의 적절한 개입 때문이다. 남자라면 여성은 지켜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킨야의 아케미에 대한 감정과 행동을 비판한다. 반세기를 거쳐 현대에 도달한 작품에는 일정 수준의 시대 착오성과 그의 분명한 사랑에 대한 가치관이 함께 녹아 있기에 웃음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은 어떤 것이었는가. 킨야와 아케미의 짧은 관계는 순간에 불과하다 말할 수 있는 ‘순애’가 그의 인생에는 있었다. 거친 삶 속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나, 미성숙했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다. 그렇게 감옥에 가게 되고, 출소의 날 만난 것이 킨야와 아케미였던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아내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 교도소에서 먼저 이혼을 요청한다. 그렇게 그녀를 보지 못 한 지 몇 년. 수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는 그녀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사랑이 남았음에도, 미안한 마음에 차마 그녀에게 돌아갈 수 없는 시마. 그러나 그의 곁엔 킨야와 아케미가 있다. 아내가 여전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이 가정을 꾸렸던 공간인 유바리로 향한다. 아내가 자신을 영원히 떠났을까 너무나 두려워 고개를 숙이고 아케미가 대신 길을 본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깊은 기억은 네비게이션과 같은 능력을 준 것 같다. 수없이 되새겼을 그 길과 시간들을 경유하여 시마는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을 어제 온 듯 안내한다. 카메라를 통해 비춰지는 시마가 과거에 아내와 쌓아왔을 추억의 공간들. 동네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집을 킨야와 아케미는 쉽게 찾지 못한다. 그렇게 두 사람도 어느 정도 포기 상태에 이르른 순간, 노란 손수건이 가득 걸린 장대가 그들을 반긴다. 시마와 아내만이 아는 사랑의 약속과 상징이 담긴 노란 손수건.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아내는 사랑을 놓지 않고 노란 손수건을 달았던 것이다. 어쩌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뻔한 해피엔딩임에도 그녀의 순애에 나는 무력하게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젊은 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이야기의 주요 화자는 시마이다. 그러나 가장 깊은 ‘순애’를 보여주는 인물은 분명 시마의 아내이다. 시마의 기억 속에 아내는 미화되어 존재한다. 그럼에도 객관적인 사실도 있다. 시마는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순간만은 최선을 다했을지 모른다. 어떤 순간까지도 그는 분명 다정한 남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까지 벌인 것 또한 시마이다. 사실 시마는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킨야를 향한 설교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일 수 있다. 이런 남자를 사랑하고, 영원을 기다린 시마의 아내야 말로 순애를 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는 고전 멜로의 매력이 넘쳐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을 선택하는 마음. 나에게 상처를 주었고 다시 상처를 줄지 모르는 당신을 다시 한 번 믿어보는 마음. 그런 바보같은 마음이 고전 멜로의 핵심 요소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일까. 조금은 시대착오적이나, 그렇기에 더 마음이 끌리는 이 작품을 보며 사랑을 다시금 꿈꾼다.
*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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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니, 태어난 이상 너희들은 다 '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벨라 벡스터(엠마 스톤)이다. 한 여자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니 배 위에 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여자. 그 배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자를 다시 살린 건 독거노인 과학자 갓윈 백스터(윌렘 대포)다. 얼굴이 기괴한 과학자 갓윈. 외모를 보고 성격을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갓윈 박사는 어림없다. 성격마저 괴팍한 갓윈. 그에게 같이 사는 여자가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건 진실이다. 다시 태어난 여자 벨라 벡스터는 뭔가 특별하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벨라. 벨라는 마치 남자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건 죽어가는 여자의 뇌에 그녀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의 뇌를 이식해서 살려냈기 때문이다. 벨라는 아이의 뇌로 다시 태어났다. 이 말은 즉슨 벨라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의미와 통한다. 이런 벨라에게 남자 한 명이 접근한다. 남자는 갓윈의 제자 맥스(레미 유세프)다. 벨라를 짝사랑하는 남자 맥스. 소심하게 고백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소심하게 청혼을 건넸던 벨라와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눈 뜨고 코 베인 맥스. 카메라는 벨라와 함께 리스본 찍고 여기저기 모험담을 펼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기괴함이라는 정서에 있어 도가 튼 아티스트다. 스타일적으로 '뭔가 있어 보이기 위해'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위해 일반적으로 '란티모스'하면 떠오르는 장면부터 이야기해 보자. 굳이 마이너 한 예술영화의 세계까지 파지 않더라도 <킬링 디어>에서 배리 키오건이 파스타를 먹는 장면 정도는 오며 가며 사람들이 봤을 클립이다. 키오건이 훌륭한 연기자라는 사실에는 여지가 없다. 연기를 잘하니까 임팩트를 남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의 깊게 본 영화팬들이라면 '란티모스에게 이 장면만 있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괴함의 정점은 란티모스가 국제적으로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영화 <송곳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곳니>를 보면 신체 노출부터 시작해서 폭력묘사까지 이 세상 기괴함은 다 가져다 놨다. 갑자기 이 감독에서 봤던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더 떠오른다. <더 랍스터>에서 갑자기 총을 쏴서 직원을 죽이는 장면, <킬링 디어>에서 초반 심장 수술 장면, 니콜 키드먼이 맡은 안나가 길쭉하게 뻗어있는 모습이 그렇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방법을 아는 감독이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파스타를 징그럽게 먹는 것이나 <송곳니>에서의 가족에 대한 비유 같은 것들은 일상적인 것에서 조금 비틀어서 '인위적인 것'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쉽게 다들 알고 있는 '불쾌한 골짜기'를 영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볼 수 있는 <킬링 디어>와 <더 랍스터>에서 영화 이야기의 형식과도 이어진다. <킬링 디어>에서 영화는 어떤 대상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하다. 그냥 알고도 당하라는, 전지적인 목적을 가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을 괴롭힌다. 실제로 카메라는 마치 누군가를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부감 숏(천장에서 바닥으로) 찍는 것 같고 사운드는 관객을 내내 불편하게 만든다. 그냥 일반적인 카메라와 사운드로도 이 영화가 가진 인간의 굴레를 묘사할 수 있는데 내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비튼다. <더 랍스터>도 사랑에 실패하면 동물이 된다는 설정은 곧 '사랑이 억지로 되는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영화가 인간이 어떻게 사랑에 빠질까?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다. '억지로' '근거를 들어서'사랑에 빠지지 않는 인간의 단면을 잘라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보면 그는 인위적이라는 속성을 시각적으로, 또 플롯의 핵심으로, 장면 연출로 소화하는 아티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여운 것들>은 그 모든 것들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는 영화다.
가령 이 영화의 미술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이 영화의 세트장과 조명, 의상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란티모스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영화는 란티모스가 구축한 거푸집 아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응당 당연하게 골라야만 했던 선택지다. 그럼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무엇일까 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핵심을 '시스템'이라고 본다. 영화는 벨라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을 다룬 것이다.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다루고 싶어 하는 영화가 그 안의 세상을 통제하지 못하면 나사가 빠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반대측면에서 질서를 깨는 인물들의 모습을 스크린 안으로 갖고 오기에도 용이할 것이다. 이 인위성에 대한 부분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방식과도 이어진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후반부를 제외하고 다들 인형의 집처럼 뚝딱거린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의도가 있다.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세상을 비판하는데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문법으로 연기한다면 그 고지식함과 완고함이 체감이 안 될 수도 있다. 세계에 대한 인물의 대응을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서 이질감을 키우는 선택지를 둔 것이다. 공간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가 기괴한 동화로 연출한 이유가 분명하다. 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을까? 영화가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기의 톤으로 이 영화의 세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걸 보여준 것처럼 공간과 미술로도 이 영화의 핵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자의 속성이 전적으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뇌'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섹스신이 적나라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소재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핵심에 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뇌와 섹스라는 소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있어 큰 차이가 느껴지는 부분이 아니다. 왜? '뇌'를 이식한 인간의 실험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새로운 생명체다. 매춘 그러니까 성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역시 생명체다. 마찬가지로 갓윈 박사의 실험체는 그 나름의 시스템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내가 어떤 세상에 태어날지 고를 수 없다는 점에서 시스템에 일조하는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두 소재가 이야기의 맥락에서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벨라는 두 인위적인 행위를 직접 겪는 개체이기도 하다. 영화도 이 구분선을 일부러 흐린 것이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시스템에 대해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이 영화의 사운드 중 몇 음악은 거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시그니처라고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광각렌즈를 활용한 촬영방식도 이 영화의 기괴하고 독특한 에너지만을 강조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시스템에 대항하는 영화가 기존의 영화 만들기 관습에 편승해서 제작된다면 뭔가 모순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촬영이나 사운드보다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하게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편집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섹스신이 들어가는 방식은 뭔가 이상하다. 구체적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갈 때 맥스가 "나는 벨라가 무사하길 바란다"라고 말하는 장면 바로 다음으로 덩컨과 벨라의 성관계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나름대로 블랙코미디를 구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장면들과 비교했을 때 위 두 가지 사운드와 촬영을 활용한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전형적인 연출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에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섹스신을 느닷없이 보여주거나, "뜨거운 뜀박질"이 대사에 전면으로 나오더라도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나는 장면이 벨라가 어디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 후의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벨라가 덩컨에게 "우리 뜨거운 뜀박질을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여운 것들>이 이전에 수도 없는 섹스신을 보여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나오지 않을까? 싶지만 영화는 벨라가 신체를 노출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이 부분을 생략해 버린다(편집에 대한 부분은 아니지만 이후 벨라가 매춘을 하는 장면에서도 벨라가 노숙자에게 "갑자기 들어가면 안 된다"식의 대사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것은 영화가 이야기의 리듬을 섹스신을 활용해 변화를 준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기존 영화들이 유지해 온 흐름을 사운드와 편집, 촬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거부하는 형태는 곧 영화의 플롯과도 이어진다. 영화는 일부러 두 명의 흑인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왜? 이야기에서 벨라의 내적 성장을 이끄는 인물들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보도 영화에서 어떤 것들을 반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흑인 남자는 옆에 앉아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섹스를 안 한 지 20년 됐다니 딱하네요"라고 대놓고 면박을 준다. 글쓴이는 이 대사가 가스라이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 흑인 남성 캐릭터가 하는 대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코멘트를 보고 이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는 틀이 넓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다루며 정체성에 대해 다루지만 사실 이 틀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보여주는 건지를 암시하는 설정이라고 봤다. 이것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인물과 인물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와도 관련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난 건 '니체'에 대한 짧은 지식이었다. 니체가 인간의 몸을 조명했고 영화가 섹스를 다룸에도 이유가 있다. 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벨라 / 세상을 구분 짓는 구분선이 니체의 개체론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데 있어 정말 중요한 건 그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이 내가 알고 있는 니체의 개체론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근거하지 않나?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이 <가여운 것들>이 다루는 흑인 남성 캐릭터는 사실상 벨라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면서 '섹스 20년 동안 못한 여성을 비웃는'것이 인간이고 이 세상인 것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도 이 니체의 사상 하에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흑인 여성 캐릭터는 벨라에게 공감한다. 바로 정서적인 유대를 나누는 듯하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벨라에게 성적 행동을 한다. 단순히 이 흑인 여성 캐릭터가 무슨 목적으로 벨라에게 접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덩컨이나 매춘 노숙자들도 벨라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 흑인 여성과 노숙자는 동격에 놓이는 듯하고, 이 흑인 여성 캐릭터 역시 이 영화의 세상을 이룬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흑인 남성 캐릭터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거시적인 개념을 건드렸다면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유대감과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다룬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개체를 가지고 사회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줬다.
영화가 몇 소재를 인위성이라는 모티브와 함께 다뤘다는 것은 영화의 맥락과도 이어진다. 이 영화는 인위적으로 벨라의 분신을 만들어 여성 서사로서의 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벨라의 분신들이 여럿 등장한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 붙인 형태에 대한 부분이다. 개랑 닭을 이어 붙인 모습이나, 학과 얼룩말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 등장했다. 이것은 벨라부터가 여성의 몸에 남자의 뇌를 결합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런 분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건 펠리시티(마가렛 퀄리)다. 이 펠리시티가 이야기에서 큰 역할을 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펠리시티는 영화의 핵심인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해 중요하게 작동한다. 우선 돌연변이 동물들이나 펠리시티나 누가 만들었을까? 의 측면에서 그 근원을 따져야 한다. 이들을 만든 인물은 아마 갓윈으로 보인다. 갓윈은 영화 안에서 대놓고 '창조주'라 불리며 이 시스템을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남성 캐릭터가 세계관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었는데 그 생명체가 주인공이다라는 점은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벨라는 세상이 규정한 여성의 정의를 온몸으로 부수며 질주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여운 것들>이 인위성을 여성 영화로서의 맥락을 갖추기 위해서만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생명체를 만든 인물은 갓윈이고 남성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벨라는'상위 계층이 지켜야 할 윤리'에 전면으로 부딪히는 인물이다. 그럼 여성 해방 서사로 읽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성매매업자와 펠리시티, 그 옆의 하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업자는 여성이다. 이 캐릭터는 벨라에게 "누구와 성매매를 할지 넌 고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펠리시티와 하녀는 벨라에게 "몸 파는 여자"라며 극언을 입 밖에 낸다. 심지어 하녀는 벨라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성 안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이 둘은 여성의 주체성을 방해하는 인물인 것이다. 여성의 자유를 방해하는 3의 시선을 공고히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를 연출하는 사람이다. 여성을 둘러싼 고압적인 시스템을 묘사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런 요소들을 영화에 넣지 않을 것 같다.
이 페미니즘 영화의 틀을 반쯤 탈피한 것은 엔딩에서 더 크게 강조된다. 엔딩을 보면 블레싱턴 장군의 몸에 동물의 뇌가 이식된다. 뭐 여성에게 고압적이었던 인물이 응당 맞이해야 할 벌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봤다. 사실상 블레싱턴 장군과 벨라는 동격이 된 것이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여주지 않아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벨라가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 자체만을 보면 '다른 개체의 뇌'가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벨라가 유사 아버지였던 갓윈의 직업을 물려받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벨라는 새로운 생명체를 재창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갓윈처럼 세계의 기득권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버전의 <가여운 것들>이 블레싱턴을 주인공 삼아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영화가 단순히 1차원적인 페미니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영화가 남근주의적인 시대상만 조롱하는 것이 아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기득권에 서는 것'이 얼마나 따분한 짓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두 종류의 인간(남/녀)의 구분선을 흐린 선택은 벨라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을 따져봐도 다시 읽을 수 있는 맥락이다. 벨라는 자신의 몸을 팔았던 것, 그러니까 욕망에 직설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인물에서 더 나아가 영화도 이런 벨라를 부정하지 않는다. 벨라가 빅토리아일 때 어떤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연출부터 빅토리아보다 벨라의 편을 든 것이다. 이 연출에는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가 이식된다 한들 이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은 여전할 거라는 조소가 담겨있는 듯하다. 이는 가족이라는 소재로 당시 그리스의 기득권을 비판한 <송곳니>에서도 느껴졌던 서늘한 조롱이었고, '란티모스의 영화다!'라고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에 단점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본인이 쓴 모든 글의 내용에 대해 '영화는 그런 게 아냐!'라고 비판하는 평자가 있다면 그 나름대로 맞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고?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 <가여운 것들>과 저 멀리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자연스러운 것'을 우선순위로 두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죄다 인위적인 것투성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면에 성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고 있어서 어떤 관점에 있어서는 '여성해방이 곧 모험이고 섹스냐'라는 비판도 합리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작을 안 읽어서 이 문장에 확신을 담을 수는 없겠지만 후반부의 각색에 대해서는 원작 팬들이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친 것에 비해 후반부 문제를 해결하는 규모가 좀 작은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재밌었다. 이렇게 다층적이면서 선명하게 주제를 강조한 란티모스의 역량은 현재 최고의 폼을 구가하는 예술가 다웠다. 휘황찬란한 미장센에 눈이 즐겁고 기괴한 사운드에 청각적인 쾌감까지 느끼는데 이야기가 깊기까지 하니 보는 동안 '이 아침에 극장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추락의 해부>가 청각과 시각이라는 인지체계를 활용한 각본으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오펜하이머>에서 핵폭탄을 플롯처럼 만든 것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가 이야기를 고전적으로 만든 것처럼 연출과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섹시한 영화가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각색상은 <오펜하이머> 여우주연은 <플라워 킬링 문>의 릴리 글래드스턴, 작품상은 <오펜하이머>가 받을 것 같다. 아마 상 받아도 미술상이나 의상상이 가능성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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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하는 것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 (탕웨이)서래(탕웨이)의 그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은 마음에 영화관을 ‘마침내’ 다시 찾았다. 두 번째 관람은 ‘역시나’ 좋았고, ‘여전히’ 아팠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거야.”
해준(박해일)의 마음에 ‘미결’인 상태로 오래도록 남고 싶어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 서래. 그런 서래를 찾아 파도 속을 걷던 해준의 뒷모습이 어쩐지 슬퍼보였다. 철썩..철썩 치는 파도에 해준의 옷이 마치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축축해졌을 때, 해준은 그 슬픔을 감내하기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서래와 함께한 기억들이 파도와 동시에 그에게 덮쳐왔을 것이고, 그로 인한 아픈 마음은 번진 잉크처럼 지우지도 못한 채 그의 마음 한구석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붕괴된 채로 영영 남아, 해준은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일을.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
‘헤어질 결심’. 나는 이 제목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를 잊고 싶어 헤어질 결심을 한다는 것. 사랑은 결심을 하기도 전에 ‘빠져버리는 것’이기에 결심이 필요 없지만 헤어지는 데에는 결심이 필요하다.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만나지만 그를 잊지 못한다. 그를 보내주지 못하고, 헤어지지 못한다. 때로는 결심이라는 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힘들고, 사랑이라는 것은 더더욱 그러니까.
서래를 관찰하며 해준은 서래가 더 궁금해졌을 것이고, 서래와 점점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되면서 의심이 관심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깨달았을 것이다.
해준은 서래의 거친 손을 만지며 핸드크림을 발라주고, 서래의 상처를 보고 방수밴드를 건네주고, 눈을 감은 채 서래의 향을 맡는다. 서래의 칫솔에 치약을 짜주고, 서래가 찍힌 사진을 간직하고, 비 오는 날 함께 쓰는 우산을 들어주고, 서래가 하는 말에 웃음으로 대답한다. ‘사랑해’라는 말만 내뱉지 않았을 뿐, 그는 온몸으로 서래를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었다. 해준은 그렇게 차곡차곡, 서래를 향한 마음을 쌓아간다. 그렇게 해준과 서래는 ‘우리’가 된다. 결국엔 그 쌓아올린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 해준은 ‘완전히 붕괴’되지만 그는 사라져버린 서래를 다시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해준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하는 영화여서 더 좋았다. 언어가 그 마음을 채 담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사랑해’라는 말로도 부족한 사랑이 있고, 너무 사랑하지만 사랑한단 말을 차마 내뱉기 힘든 금지된 사랑도 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런 사랑은 ‘우리’를 붕괴시킨다.
서래를 바라보는 해준의 눈에는 진심이 묻어있고, “저 폰을 깊은 바다에 던져버려요”라는 해준의 말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던 모습들이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서로를 향한 눈빛, 행동, 표정은 ‘사랑해’라는 말을 대신한다. 애써 말로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마음들을 해준과 서래,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으로 탁월하게 연출해낸 박찬욱 감독님의 솜씨를 러닝타임 내내 만끽할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
멀리 떠나는 서래(탕웨이)
“날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서래사랑한다는 말만 안 했을 뿐. 모든 게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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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2020, SNS은 왜 혐오로 오염되었나?
[줄거리] 낯선 사람들과 함께 의문의 지역에 갇혀 영문도 모른 채 사냥 당하고 있는 ‘크리스털’(베티 길핀)이 자신들을 사냥하는 주체를 밝히고, 그들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1. 인간 사냥은 왜 벌어졌는가?
<헌트>는 모바일 메신저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관객들은 사냥을 하기 위해 저택에 모이는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시지는 영화의 사건보다 1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테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기업의 고위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가 유출되고 ‘매너 게이트(Manorgate)’라는 음모론화된다. 이로 인해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된다. 물론 아테네는 사내 감찰한 결과에서 여러 번 외도한 사실이 드러났고, 성기 사진을 담당의에게 보내고, 대통령을 비방하는 도덕적 해이를 저질렀다.
백수가 된 그들은 화가 나서 그들의 농담을 현실화시키기로 결정한다. 아테나와 그녀의 친구들은 그들의 핸드폰이 해킹하고 메시지를 유포시킨 음모론자들을 추적한다. 그들은 군사고문을 초빙해 몇 달 동안 군사훈련을 마치고 ‘가짜 뉴스 유포자’들을 크로아티아로 데려온다. 그리고 사냥을 개시한다. 이것은 해고당한 것에 대한 분풀이이자 가짜 뉴스를 퍼뜨린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2.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
양쪽 진영 모두 자신의 정치 성향과 지지하는 정당의 정책을 끊임없이 옹호하며 상대 진영을 비난한다. 사냥감이 된 도망자들은 총기 소유를 찬성하고 이민자와 난민 수용을 반대한다. 사냥감들은 미시시피, 와이오밍, 플로리다 출신이다. 바로 트럼프가 승리한 공화당의 텃밭이다. 작년 대선에서 스윙 보트 스테이트였던 플로리다에서 트럼프가 이겼다. 반대로 사냥꾼 자본가들은 바이든의 파리협약 재가입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상징한다. 기후 변화는 진짜라며 사냥감들에 일갈하고 아이티를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하거나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묘하게 모순된다. 우파 사냥감은 할머니 점원이 지적한 정당방위에 대한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유와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임에도 기차에서 만난 이민자와 난민에 대해 무턱대고 적대감을 드러낸다.
반대로 좌파 사냥꾼들도 입으로는 환경보호를 외치면서 최상급 오세트라 캐비아를 먹는다. 또, 인종차별에 반대하지만, 구체적인 구제책을 논의하기보다는 ‘아프리칸 미국인’이냐 ‘흑인’으로 불러야 하냐고 명칭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심지어 리더인 아테나는 평등과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 답지 않게 정치적 올바름을 무시한다. 그녀는 가짜 뉴스 유포자들은 ‘빌어먹을 레드넥’이 아니라 ‘개탄스러운 것들’이라며 싸잡아 비난한다.
3. 주인공은 진짜 크리스탈 메이였을까?
아테나는 ‘모두에게 정의를’라는 SNS 아이디를 사용하는 가짜 뉴스 유포자 크리스탈 메이를 쫓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자신은 동일한 지역에 살고 있는 동명이인이라고 항변한다. 증거로 우편물이 잘못 배송된다고 설명한다. 크리스탈과 아테나가 나눈 마지막 대화를 살펴보자. 숨을 몰아쉬던 아테나는 ‘모두에게 정의를’이 맞느냐고 묻는다. 크리스탈은 그것을 부인하지만 아테나는 그녀를 믿지 않는다.
크리스탈의 정체는 열려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주제를 고려해 볼 때 크리스탈은 진실을 말하고 있고, 그녀는 ‘모두에게 정의를’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다. <헌트>는 가짜 뉴스와 같은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감이 된 11명은 유출된 문자 내용과 아테나가 외딴곳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외 어떠한 증거도 없이 매너게이트 음모론을 SNS에 올렸다. 반대로 아테나와 사냥꾼 무리도 가짜 뉴스 유포자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사냥꾼 무리는 대강의 정보로 무턱대로 사람들을 납치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용사 동명이인을 잘못 잡아왔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이 몰살되는 계기가 됐다.
4. 동물농장과 스노볼이 의미하는 바는?
사냥꾼들은 크리스탈을 ‘스노볼’로 부른다. 크리스탈은 아테나가 왜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아테나는 크리스탈에게 조지 오웰의 소설<동물 농장>에 비유했다고 설명해 준다. 쉽게 말해 아테나는 크리스탈을 ‘돼지’취급했다. 하지만 크리스탈은 동물농장을 읽었을 뿐 아니라 아테나가 자신보다 스노볼과 더 비슷하다고 알려줌으로써 아테나를 놀라게 한다.
소설에서 스노볼은 유능한 리더이지만, 돼지가 다른 어떤 동물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믿고 있다. 그는 이상에 함몰되어 현실 정치와 멀어졌고, 결국 권력투쟁에서 패배한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정보가 포화상태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과다한 정보량에 의해 옥석을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그렇기에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함부로 판단한다. 이것이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증오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혐오한다고 <헌트>는 일갈한다.
5.<헌트>의 주제는 무엇인가?
피비린내 나는 풍자적인 방법으로 <헌트>는 오늘날에 존재하는 혐오와 가짜 뉴스의 위험을 담고 있다. 왜곡과 추정의 극단적인 위험들 말이다. 인터넷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소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그에 따른 엄청난 혜택이 있지만, 가짜 뉴스를 인해 얻는 정치적 이익, 부실한 이론적 근거, 불분명한 출처, 불순한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주관적인 편협한 의견이 곧 객관적 가짜 뉴스로 둔갑하기 때문에 결국 사용자의 해석에 좌우하는 만큼 왜곡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헌트>는 ‘정치적 올바름(PC)‘을 지나치게 받아들였을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것이다. PC 문화에서는 사람들의 주장과 동기에 큰 의미를 둔다. 소셜 미디어 덕분에 그 주장과 동기가 가져올 부작용과 악영향을 간과하기 쉽다. 이것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헌트>에서 묘사된 대로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6. 맨 마지막 장면의 ‘토끼’
주인공 어머니가 재해석한 <토끼와 거북이>를 기억하는가? 거북이처럼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절대로 지지 않는 토끼가 되어야 할까?라고 영화는 묻는다.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하나만 묻겠다. 여주인공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가? 그녀는 침착하게 바늘과 나뭇잎으로 나침반을 만들어 방향부터 확인한다. 그녀는 극중 유일하게 상대 진영을 비방하거나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선동당하지 않고, 홀로 큰 그림을 그려 사냥꾼 무리를 척살한다. 아테나처럼 소위 ’깨어있는 엘리트‘도 그 함정을 피해 갈 수 없었다. 토끼가 의미하는 바는 대략 이렇다. 현대사회는 정보량이 과다하고 현대인들은 이를 분별할 여력과 시간이 부족하다. 감독은 크리스탈을 통해 ‘자세히 관찰하기’, ‘심사숙고’, ‘비판적 읽기’, ‘출처 확인’ 등 비판적인 미디어 활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주방위군 출신 군사고문이 아프가니스탄 파병 용사 출신인 주인공에게 패배하는 장면은 이에 대한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말라는 직설적인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
다르게 보면, 여론에 휩싸이지 말라는 뜻이다. <헌트>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립한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양 진영에 속하지 않는 '중립자' 크리스탈이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수와 진보는 왜 우익과 좌익이라 불릴까? 날깨는 양쪽 다 있어야 날 수 있다. 그렇듯이 정치도 보수와 진보 모두 필요하다.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지 우리가 오해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다. 진보적 가치를 배제한 보수나 보수적 가치를 무시하는 진보는 편향적인 이념일 뿐이다. 보수든 진보든 개혁과 혁신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공존하면서 경쟁해왔다. 남북전쟁 당시 흑인 해방을 주도한 공화당이 현재는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정치란 생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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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체 | 인류를 포기하느냐 믿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입자 가속기 연구를 진행하던 물리학자 '베라 예'(베데트 림). 어느 날, 그녀는 입자 가속기에 투신하는 방식으로 자살한다. 행성방위이사회 요원 '클래런스'(베네딕트 웡)은 그녀의 죽음이 과학자 연쇄 자살 사건의 일부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녀의 주변인을 조사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베라의 어머니 '예원제'(로잘린드 차오)와 그녀의 친부 '마이크 에반스'(조너선 프라이스)에게서 의문스러운 점을 찾아내고, 그들을 추적한다.
한편 그녀의 제자이자 동료인 '사울'(조반 아데포)은 베라의 죽음에 의문을 품는다. 천생 물리학자인 그녀가 죽기 직전 신의 존재를 믿냐고 물었기 때문. 그는 이 의심을 옥스퍼드 동문 '오기'(에이사 곤잘레스), '진 청'(제스 홍), '잭'(존 브래들리), '윌'(알렉스 샤프)에게 털어놓고, ‘옥스퍼드 5인방’은 각자의 방식으로 베라의 자살 이유를 찾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류는 조금씩 '삼체'의 진실에 가까워지고, 절망에 빠진다.
인간 찬가에 반기를 들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인간의 특별함을 노래한다. 그는 인간과 별의 친연성을 말한다. 인간을 구성하는 원소는 별들의 탄생과 소멸 과정으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 예를 들어 별이 만들어지려면 수소가 필수인데, 수소는 물의 구성 원소이자 우리 몸의 70%를 책임지는 원소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별보다도 특별하다고 말한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 중력의 힘이나 행성의 크기, 별과 행성 간의 거리가 조금만 달라져도 지금의 인류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생명체가 등장했을 테니까. 마치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한다고 해서 같은 요리가 만들어지지는 않듯이. 그렇기에 '코스모스'는 천문학 책이지만, 결론만큼은 '인간 찬가'를 부르는 인문학 서적에 가깝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는 바로 이 대목에서 '코스모스'의 대척점에 있다. 칼 세이건이 인간을 예찬했다면, <삼체>는 "과연 우주에서 인간이 그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존재인가?"라고 반문한다. 물론 첫 시즌에서 완벽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류츠신의 원작 소설과 전개가 달라질 수 있으니 섣불리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다만 <삼체>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인간 불신'이라는 이름의 초대장
당장 인류와 외계인의 접점만 보더라도 <삼체>는 '코스모스'와 결이 퍽 다르다. <삼체>의 시작은 문화대혁명이다. 수많은 지식인을 정권의 적으로 규정해 공격했던 광풍이 예원제를 덮쳤다. 물리학 교수였던 그녀 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빅뱅 이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홍위병에게 맞아 죽었다. 그녀 역시 연좌제로 벌목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외계 문명과 접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원제.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를 직접 때려죽인 홍위병을 만난다. 그에게 참회할 의지가 있는지 묻는다. 그의 답은 명확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며 예원제는 뼛속 깊이 실감한다.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위선적이며, 희망이 없는 존재인지. 이에 그녀는 삼체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지구에 와서 인류를 정리해 달라고.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에서 시작된 결단이지만, 드라마는 예원제의 결단을 뒷받침할 여러 근거를 보여준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매개체 삼아 과학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인류의 의식 수준을 경계한다. "인류 모두를 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라는 일갈에도 불구하고 삼체 추종자들의 목소리에 나름대로 설득력이 깃든 이유다.
모범적인 변증법
질문의 의미를 확장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삼체>는 중반부터 인간 불신이 낳은 비극을 막으려 사투를 펼치는 여러 인간을 비춘다. 그들은 각자만의 개성과 능력을 무기 삼아 삼체에게 반격을 가하려 한다. 삼체가 인류를 벌레라고 비난하자, 벌레는 때려죽이거나 살충제를 써도 끝내 살아남는다며 희망을 잃지 않는 클래런스의 정신력이 대표적이다. 이 모습은 예원제의 확신과 정반대인 인간 찬가로 가득하다.
옥스퍼드 5인방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삼체의 게임 속에서도 사람을 구하려 애쓰는 진 청은 인간의 연민을,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우주와 자연을 궁금해하는 윌은 인간의 호기심을 상징한다. 어린아이까지 몰살하는 작전에 참여해 괴로워하는 오기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더 나아가 다섯 친구의 우정은 삼체의 계획을 파헤치고, 역공을 가할 계획을 짜내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다.
그와 동시에 <삼체>는 그 이면에 숨은 그림자도 거듭 암시한다. 삼체에 대항하는 계단 프로젝트의 책임자 '토마스'(리암 커닝햄)와 달 기지에서 우주 함선 건조 책임자로 임명된 '라지'(사머 우스마니)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외계와의 전쟁을 마주한 인류의 결연한 의지, 결단력, 책임과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 덕분에 인류는 첫 번째 위기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장점은 인류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토마스와 라지는 삼체를 막기 위해 그 어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일도 감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과 함께 일했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온 오기는 그들을 비난한다.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세가 또 다른 원자폭탄을 만들어 내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면서. 이는 <삼체>가 인간불신과 인간찬가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를 한 층 더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배경이다.
질문은 미스터리로, 반박은 첩보물로
질문과 반박을 장르적 쾌감으로 포장하는 <삼체>의 능력은 수준급이다. 전반부는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다. 클래런스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자살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된 옥스퍼드 5인방을 자연스럽게 조명한다. 그 덕분에 시청자는 그들의 시점에서 삼체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일환이 바로 게임이다. 진 청과 잭은 세 개의 물체가 중력으로 서로를 당기며 움직일 때 그 궤도를 구해야 하는 '삼체 문제'를 풀면서 삼체인들의 역사와 목적을 알아낸다. 이 일종의 VR 게임은 원작 소설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파트지만, 자칫 흐름을 끊는다고 여겨질 여지도 있었다. 이때 <삼체>는 이 게임을 자살 사건의 단서 중 하나로 소개하면서 유기적으로 극을 이어 나간다.
장르의 전환도 흥미롭다. 추리극의 끝에서 삼체인의 목적이 드러나자 <삼체>는 곧장 전쟁 영화, 첩보 영화로 돌변한다. 삼체를 추종하는 종교 집단과의 추격전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첩보 영화를, 삼체인의 침공에 맞설 작전을 고안하는 대목은 <오펜하이머> 같은 영화를 보는 듯한 인상도 준다. 파나마 운하에서 나노 섬유를 이용해 유조선을 공격하는 장면처럼 참신하고 기괴한 액션 장면 덕분에 장르적 쾌감이 특히 짙다.
첫 술에 배부르랴
물론 미처 다듬어지지 않은 순간도 적지 않다. 일단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초반 진행이 발목을 잡는다. 과거의 사연과 현재의 미스터리가 맞아 들어가는 순간은 분명 짜릿하다. 하지만 시점과 주인공이 자꾸 바뀌다 보니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집중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주인공이 나뉘다 보니 과거와 현실을 오가는 과정에서 감정선이 흐트러지기도 한다.
각색 과정에서의 무리수도 엿보인다. 일례로 현재 시점의 배경으로 영국을 선택한 결정은 의외다. 할리우드 영화에 중독된 결과물일 수도 있지만, 배경이 영국이라서 부자연스러운 지점이 있기 때문. 계단 프로젝트에 필요한 1,000개의 핵무기 중 300개만 구했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배경이었다면...?'이라는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주인공 5인방이 모두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다는 설정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삼체>는 기대와 우려가 반반이었다. 원작의 명성이 빛, 제작자 겸 각본가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B. 와이스는 그림자였다. 그들이 전작 <왕좌의 게임>에서 각색만 잘할 뿐 새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혹평을 받았기 때문. 다행히도 원작이 이미 완결된 <삼체> 프로젝트는 그들의 장점만 살릴 수 있는 환경이었던 듯하다. 그래서일까? <삼체>의 다음 시즌이 <왕좌의 게임>과는 다를 거라는 기대도 헛되지는 않아 보인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인간 본성을 걸고 외계 문명과 짜릿한 도박 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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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만 남긴, <파이어버드>
파이어버드 Firebird, 2021 제작
에스토니아, 영국 / 15세 이상 관람가 / 107분
감독: 페테르 레바네
흔적만 남긴, <파이어버드>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검은 가시와 장미, 미소와 눈물은 함께 태어나 같이 존재한다."
마치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처럼 인생이 인간에게 쥐여준 필연적인 균형에 대해 낮게 읊조리는 한 남자.
주인공 '세르게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파이어버드>는 배우 세르게이 페티소프의 회고록(로만 이야기)을 담은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얼마나 섬세하게 뚜렷한 목적을 영화 안에 녹여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왜' 실제 인물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지 묻기보다, '어떻게' 그의 삶을 조명하고 그려낼 것인지가 더 중요한 이유다. 감독이 여러 실화 혹은 사건 중 콕 집어 그의 기록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썼다면, 영화의 정체성과 세르게이의 신념을 대변하는 독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세르게이는 1970년대 냉전 시대 안에서 수많은 금기에 묶인 채 자기 삶의 목적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과 달랐다. 그들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했고,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됐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오는 것임을 터득한 뒤로는 친구들이 오늘 뭐 하고 놀까 생각할 때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찍었다. 단순한 피사체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표정에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힘에 관해 탐구했다. 이미 상실과 고통을 경험한 그에겐 반드시 해답이 필요했다. 물속에서 절친 디마를 영영 놓친 어린 세르게이는 성인이 된 후로도 여전히 그때의 사건을 악몽으로 꾸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 당시 '다른'이 아닌 '틀린' 형태의 사랑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사랑. 단순하고도 너무 얇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너무 깊고 단단해서 영원할 수밖에 없는 사랑. 대체 왜 그에겐 그런 사랑이 필요했을까. 세르게이는 검은 가시와 장미. 미소와 눈물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다르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를 맞다고 입 밖으로 내뱉으며 스스로 사각 틀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입을 닫고 말이다. 그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투쟁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조용히, 또 자연스럽게 자기의 풀리지 않는 길에 대해 치열하게 부딪칠 수 있는, 나만의 방법.
그의 열망을 카메라의 초점이 대신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연기자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꿈을 접고 의무 복무를 하기 시작한 날부터? 아니 삶이 처음 흔들렸던 사건? 아, 디마를 잃고 난 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그의 침묵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진으로 대체되었고, 지금도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협적인 현실을 투정하기보다 자신의 아픔과 본인이 바라는 것을 같은 선상에 두고 끊임없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한 결과이기도 하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그는 안전한 믿음이 필요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확신이 필요했고, 확신을 넘어선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길 원했다. 세르게이에게 사랑은 그런 의미였다. 문을 열고 집을 나간 순간부터 사람들이 원하는 자로 연기하며 살아도 좋으니 진짜 나란 자아를 확실하게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 답은 로만이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자기 사진에 담긴 격렬한 투쟁을 로만이 알아준 순간 세르게이는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그 순간을 평생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유로워진다. 로만이 준 비행기 모형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그때부터 꿈도 다시 꾼다. 의무 복무를 마치고 연기를 하겠다는 꿈, 그것은 분명 로만이 불어넣어 준 사랑의 결과물이 될 예정이었다. 세르게이는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 용기를 갖게 되면서 직접 사진 밖으로 나갈 아주 좋은 명분도 함께 얻었다. 그만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늘 친구들에게 현실 세계로 돌아오란 장난 섞인 진담을 들어야 했던 세르게이. 그럴 때마다 그는 "나중에-"라고 말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어나갈 것 같은 냉전 시대 속에서 로만과 세르게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더 단단하게 서로를 붙잡는다.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며 명심하고 또 명심했던 독백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잊어버린 건 세르게이만이 아니다. 로만이 숨겼던 가시를 드러낸 순간 <파이어버드>는 흔들린다. 군부대에서 혼자 카메라를 들고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담던 세르게이는 애초에 없던 사람이 되어버린다. 여자를 바라보는 강렬한 남자의 눈과 그의 뜨거운 신호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여자의 입가만을 틀 안에 담으며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또 기다렸던 세르게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남자의 눈과 여자의 입은 아무리 강한 압력에도 절대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세르게이만의 사랑 언어로서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나의 것'이었다. 동시에 <파이어버드>만의 독특한 색깔이었다.
로만과 세르게이에게 잇달아 주어지는 문제와 반복되는 우정과 사랑의 격돌은 구조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 카메라 렌즈 안에 갇히고 만다. 직접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또 아는 퀴어 영화의 상승과 하강 꼭짓점들을 그대로 밟으며 전개된다. 영화 속 인물은 가장 먼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의 매력을 결정짓는 것 역시 인물이다. 세르게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예측되는 그들의 다음 행위로 인해 <파이어버드>가 초반에 쌓았던 견고한 정체성은 무너진다. 특별하지도, 특색이 있지도 않은 무난하고 평범한 전개 방식을 그대로 표방해 초반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인물들은 이미지 몇 장으로 기록된다. 세르게이가 담담히 건넨 인생의 균형도 물거품으로 흩어지고 만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시점에서 벗어나, 영화 <파이어버드>가 남긴 건 무엇일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란 표면적인 주제를 제외하면 세르게이와 로만이 서로를 향해 혹은 자기 자신에게 했던 말들만이 남는다. 관객이 인물에게 깊이 공감하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연민의 지점(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끝내 실패해 흔적만 남은 대사들.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이 작품을 다 채우지 못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순 있다고 했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믿지만, 그들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었기에 <파이어버드>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 또한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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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0일, 곧 공개 예정. 크로노이드사의 야심작 AI 전투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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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용기와 마주하는 그 곳,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비행기 사고로 불시착한 미지의 섬에서 소년은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의 존재를 맞닥뜨린다.
그것을 피해 물과 식량이 풍족한 안락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우연히 날지 못하는 작은 새를 도와주고 친구가 된다.
그리곤 지도와 모터 사이클을 발견하게 되는데….
안락한 곳에서 안주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떠나야 할 것인가…
결국 소년은 작은 새와 함께 어둠의 존재로부터 벗어나 섬을 탈출하기 위해
모터사이클을 타고 거대한 산맥과 바다를 넘는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시시각각 엄습해 오는 어둠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소년의 불안과 공포일까?
그리고 소년과 작은 새는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