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댄2021-08-21 14:32:39
결혼은 '굴러가지 않는 유모차'를 함께 드는 것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개봉

▲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포스터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페셜 포스터 ⓒ 네이버 영화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고민은 결혼하고 나서도 계속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박강아름과 정성만은 타이머를 맞춰두고 사진을 찍는다. "보리야 이리 와"라며 들뜬 목소리로 딸의 이름을 부르는 아름의 모습은 달달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의 결혼은 아름의 표정처럼 달지 않았다. 가끔은 삼키기 힘들어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아름과 성만은 진보 정당 활동을 하다 만난 사이다. 당시 아름은 학교에서 영화 수업을 하며 영화감독의 길을 밟고 있었고 성만은 정당 활동가이자 식당 종업원이었다. 남는 시간 글을 쓰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사랑했고 결혼했으며 프랑스에서 예술을 배우고 싶다는 아내 박강아름에 의해 프랑스로 떠났다. 아름은 성만에게 "나는 영화를 공부하고 당신은 요리를 공부했으면 좋겠다"라고 제안했다.
성만은 아름을 만나기 전까지 대한민국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아름과 달리 성만은 프랑스로 날아가서 이룰 꿈이라는 게 애당초 없었던 것. 타의로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으로 간 개구리는 마치 소중한 서식지를 잃어버린 존재처럼 시들어간다. 박강아름은 그런 성만이 신경 쓰이지만 출산과 학교 생활로 지쳐 본인 몸을 돌보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경제와 행정 담당 아내 박강아름과 집안일과 육아 담당 정성만의 현실적인 결ㅁ혼 생활을 담아낸다.
집밥으로 만나는 집 밖 사람들

▲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 네이버 영화
아름은 우울증에 걸린 남편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외길식당'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요리사였던 성만의 특기를 살려 주말에만 한국식 집밥을 파는 식당을 열게 된 것. 부부의 식탁은 어느새 유학생이나 교포들에게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는 공유 식탁이 되었다. 성만의 우울한 마음은 집밥으로 만난 집밖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치유가 되는 듯했지만 그들의 경제 사정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만은 좋은 재료로 건강한 요리를 내놓는 걸 좋아했고 집안의 경제를 맡고 있는 가장 박강아름은 그 모습이 아니꼬왔기 때문. 첫 번째 '외길식당' 프로젝트는 오래 가지 못해 마무리됐다.
박강아름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고립된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외길식당' 프로젝트를 찍자고 제안했다. 영화의 초중반을 촬영하고 나서 성별의 역할이 바뀐 가부장제를 인식했다. 사실 매일 서포트를 받고 있는데도 영상 속에서 제가 '오늘은 나 서포트해줘야 돼'라고 말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라고 밝혔다. 아무리 덧칠하지 않으려 해도 어느 정도 본인의 시각이 가미됐을 카메라. 그 카메라가 자신의 가부장성을 담은 것이다.
아름은 가부장성을 인식한 이후에도 쉽게 본인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경제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에 따라 사회적 성 역할이라는 게 바뀔 수 있음을 두 부부는 그들의 일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주부우울증에 걸린 성만은 토마토 대신 체리토마토를 사왔다고 타박하는 아름의 말에 하루 동안 가사 파업에 들어간다. 흥청망청 돈을 쓰겠다고 다짐한 그는 겨우 3유로 커피 프라페를 마시며 마음을 달랜다.
또한 외관상 특별해보이는 그들마저 여느 부부처럼 끝없이 갈등한다. 아름은 결국 '외길식당'이 아니라 본인들의 결혼에 대해, 더 나아가 결혼의 의의에 대해 주제를 확장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외길식당>이 아니라 <박강아름 결혼하다>인 것. 박강아름 시각에서 장면들이 보이니 <박강아름과 정성만, 결혼하다>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정성만과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더욱 어렵다.
결혼, 그 막막함에 대하여

▲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 네이버 영화
비혼주의자였던 성만과 달리 아름은 원래부터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도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임신 초기 아름은 나흘 연속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며 속을 게워냈다. 막달에는 한 달 내내 변비에 시달려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고통은 계속됐다. 그는 용변을 볼 때 성기가 흘러내릴까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출산 후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몰라 내내 미역국과 쌀밥을 먹었다고 했다. 출산 직후 아기를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에 대한 책은 많았지만 출산 직후 여성을 위한 책은 없었다고 회의를 표했다. 꿈에서라도 가고 싶었던 암스테르담 영화제에 본인의 작품이 초정작으로 선정됐지만 그는 결국 가지 못했다. 영화가 상영되는 그 시각 아름은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결혼에 접근하기도 한 아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름 대신 육아를 책임진 성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다니던 어학원까지 잠시 휴학하고 아이를 돌봤다. 아름도 성만도 딸 보리를 사랑하지만 결혼과 마찬가지로 출산 또한 그들에게 유쾌하고 행복하기만 한 경험은 아닌 것이다.
지켜야 하는 생명부터 생활비, 챙겨야 할 서류까지 늘어났다. 아름은 끊임없이 결혼에 대해 고민한다. 두 번째 외길식당을 열고 다양한 커플들과 함께 그 답을 찾아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결혼과 팍스(PACS, 시민연대협약)의 차이는 뭘까. 본인의 꿈 대신 사랑만 선택해 해외로 이주한, 소위 '결혼망명'도 행복할 수 있을까. 대화가 오갈수록 질문들은 더 많아진다. 아름은 다시 연 '외길식당' 프로젝트를 실패라고 표현했다. 목이 붓도록 사람들과 의견을 나눠보지만 궁금증은 당최 해소되지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보며 고민해보는 것이다. 결혼 그 막막함에 대하여.

▲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 네이버 영화
쉬이 굴러가지 않는 유모차를 함께 드는 것
이 영화의 끝부분, 아름-성만 부부와 반려견 슈슈, 딸 보리는 덩케르크 해변을 찾는다. 아름이 본인의 카메라에 그 바다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부서지는 햇살과 청량한 파도는 없다. 파도는 무겁게 오간다. 유모차는 모래 위에서 매끄럽게 밀리지도 않는다. 성만은 몸이 아프다며 투덜댄다. 아름은 그래도 이왕 온 것이니 비를 맞으면서라도 바다 가까이에 가보자고 우긴다. 결국 그들은 보리가 탄 검은색 유모차를 함께 들고 기어이 모래를 밟는다. 사진을 찍고 돌아온다.
영화 출연은 물론 촬영부터 편집까지 담당한 박강아름. 그가 이 부분을 영화의 엔딩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 터다. 그는 쉬이 굴러가지 않는 유모차를 함께 드는 것을 결혼이지 않을까 짐작했을 것이다. 부부가 들어야 되는 건 유모차가 아닐 수도 있다. 생활비일 수도, 챙겨야 할 서류일 수도, 서로의 꿈과 인생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그건 보기보다 무겁고 손이 저린 일이다. 한 명이 독박 운반하는 것보다야 덜하겠지만 두 명이라도 쉽지 않은 행위인 것. 심지어 그게 진정 의미있는 일인가는 더욱 어려운 질문이다. 상황에 따라 몇 번이고 대답이 달라질 터다.

▲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스틸컷 ⓒ 네이버 영화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아름-성만 부부의 삶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개인의 일기이자 결혼에 대한 묵직한 물음이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냈다. "박강아름이 이기적인 거 아니야?", "내가 결혼하고 해외로 떠나자 해도 나 잡을 거야?", "결혼은 확실히 연애랑은 다른 것 같아", "팍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의 재미와 만듦새에 대해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지만 그래도 박강아름은 성공했다. 그들도 박강아름처럼 결혼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더 고민하기 시작했으니까.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오늘(19일) 정식 개봉한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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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행복의 속도
줄거리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며 일본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오제 국립공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이 통제되는 이곳에는 산장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봇카'들이 있다.
그들은 지게에 높은 짐을 쌓아올리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걸어나간다.
24년차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와 9년차 봇카 '이시타카', 두 사람이 걸어가는 '행복의 속도'는 과연 얼마일까?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숨은 의미 찾기
"속도"
영화는 봇카를 바라보며 속도에 주목한다. 당연해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봇카라는 직업을 통해 관심을 갖는 키워드는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추며 그야말로 입체적인 시각을 통해 '봇카'라는 직업을 우리네 보편적인 삶의 궤도에 올려 놓는다.
24년차 베테랑 봇카인 이가라시.
영화는 이가라시의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칭얼거리는 둘째 아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첫째 아들의 만화영화, 주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아내. 복작복작하고 정신 사나운 와중에도 가족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밥을 먹는다. 마치 제멋대로인 구성원 각자의 시간들이 식탁이라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은하수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가라시의 가족은 각자만의 고유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봇카를 하는 이가라시는 산장에 짐을 가져다주고 홀가분한 어깨로 오제를 내려올 때면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는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일을 끝내면 밭에 콩을 심고, 거실에 앉아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첫째 아들은 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고,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은 형의 리모콘을 빼앗아 엄마 주변을 맴돈다. 이렇듯 그들에겐 각자가 살아가는 루틴이 있고, 그것은 도무지 합치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한데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있어 각자의 시간이란 결코 침범당해서는 안 되는 존중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침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벽을 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첫째 아들과 함께 자신이 물건을 가져다주는 산장에 묵으며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온 가족이 가을길 산책을 나서서 잠자리를 잡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추억이라는 케이블 선으로 공유하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가족이 있다.
한편 9년차 봇카인 이시타카가 있다.
그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로서 봇카라는 직업을 널리 홍보하고자 애쓴다. 봇카 일이 없는 날이면 도시로 나가 관광업체와 미팅을 하는 등, 그의 일상은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일까, 그의 가정은 보다 이시타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항상 앞치마를 하고 밥상을 차리느라 바쁘고, 아이는 냉찜질을 하고 파스를 바르는 아빠 곁에 붙어서 하루를 보낸다.
이시타카는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남들에게 권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사실 그의 나이대를 생각했을 때,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들을 떠올려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도시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던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왜 봇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으므로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도심의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천천히 가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게에 주로 음식을 지는 이가라시와 달리, 이시타카는 가스통 같은 물건을 지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가족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아이, 집안을 돌보느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아내. 무릎과 발목은 점점 아파오는데 봇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젊은 이시타카로서는 어떻게든 봇카를 알리는 일에 미래가 걸려있다.
그는 봇카를 홍보하며 '도심의 속도에서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몸소 실천하고자 자신도 오제에 정착했지만, 자신 스스로도 여전히 도시의 무자비한 속도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런닝머신에서 뛰다가 막 땅으로 내려온 사람같이 빠른 걸음을 걷는다. 그것이 이시타카의 발걸음을 클로즈업했을 때, 이가라시보다 불안정한 이유다.
이들의 '시간'에 대한 구성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부모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시타카는 오랜만에 내려간 부모님의 집에서 잔소리를 듣기 바쁘다. 몸이 상하면 어쩌니, 회사원이 더 안정적이지 않겠니, 아내는 너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잖니... 이시타카와 그의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기보단, 그들 가족이 시간을 채워가는 방식이 불만스러운 듯 하다.
어쩌면 이시타카가 더욱 봇카를 알리는데 힘쓰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전 세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 더더욱 본인의 직업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띄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그에 반해 이가라시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다. 아무도 걷지 않은 아름다운 겨울의 오제를 보며 감탄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아들. 함께 눈싸움하는 며느리와 손주들. 더불어 어머니의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자랑처럼 벽에 걸린 아들의 사진까지. 이시타카와 달리 이가라시는 이전 세대로부터 자신의 시간을 존중받았기에, 인정받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봇카를 할 때, 더 틀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이가라시가 제설작업을 할 때 만난, 지금은 봇카를 은퇴한 선배는 이가라시에게 말한다. 자신들이 미안하다고, 자신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 봇카가 사라져서 남은 사람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미련한 사과다. 물론 이전 세대가 노력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짊어질 짐을 덜어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 때 제대로 된 틀을 잡아놨다고 해도 지금 봇카가 많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만의 속도가 있다.
헬기 회사의 경영 상황이 악화돼서 철수하면 봇카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있는 봇카들이 계속 짐을 나르는 이유는 무얼까.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봇카의 자식들을 바라볼 수 있다. 봇카의 자식들은 봇카가 될까? 그건 모른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자녀들이 도시로 내려갈지, 오제에 남을지는 본인들이 선택할 몫이다.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의 길에 결코 관여해서는 안 된다. 타임머신이 발명됐다고 해서 역사를 바꿔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현재냐, 미래냐에 있다.
이가라시에게 속도는 그가 딱 24년간 유지하고 있는 그 속도를 말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결국 자신에게 딱 알맞은 속도를 찾아낸다. 유독 이가라시 가족이 나올 때면 스크린에 자연경관이 가득하다. 이는 이 가족이 자연의 속도, 즉 계절의 흐름에 발맞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곧 행복임을 뜻한다. 그러니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그저 현재를 살아간다. 행복이 움직이지 않고 늘 발밑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가라시 가족에게 있어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에 비해 이시타카의 속도란, 조금 더 복잡하고 단계적이다. 그의 행복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나눠져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가라시를 보다가 이시타카를 보면 초조하고 급박한 마음이 든다. 이시타카가 원하는 행복은 앞서가고 있고, 이시타카는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결코 이시타카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걸음의 속도를 높이지만, 그가 지금 디디고 있는 땅에도 현재의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시타카에게 '위로'가 아닌 '격려'를 던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는 이시타카를 이가라시가 지켜보는 것이었다. 짤막한 이 장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가라시는 계속 휘청거리는 이시타카를 도와주지는 않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일어날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기다린다. 그가 일어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그러므로 이시타카가 미래를 위해 걸어가는 것은 이시타카 나름의 속도이다. 행복이 어떤 명확한 물체로 존재하지 않듯이 속도도 마찬가지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속도는 우리가 멈춰있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한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문구다. 백 명의 사람 앞에는 백 개의 길이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이 짊어질 무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 그 모든 것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 위를 걸어간다고 좌절하지 말자. 어쩌면 그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길일지도 모를 테니까.
그들은 왜 오제로 갔을까
감상평
"보통 베테랑 봇카는 몇 kg이나 매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관광객은 자연경관을 설명하는 이가라시에게 묻는다. 영화에서 이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르게 보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묵직한 무게감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들이 왜 오제에서 봇카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쩌다가 이런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들이 걸어가는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더불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 역시 속도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우리네 인생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롯이 하나의 메세지만을 던지는,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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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위도우, 가족의 의미를 깨닫다
진정한 가족은 그 각각의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태어나면서 자신의 가족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 동안 현재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실제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생물학적 부모와 강하게 이어져 있다. 부모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주는 우유를 마시고 그들의 품에서 잠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 바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아이는 강하게 연결되어, 그 관계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된다. 그렇게 지속되는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그 관계는 삶의 많은 순간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태어나서 바로 이어지는 관계지만 그들의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들 각자의 대화와 노력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원래의 생물학적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성인이 되거나, 기회가 있다면 제3자에게 입양을 가기도 한다. 고아원에서 자라든, 아니면 입양을 가서 생활을 하든, 그 모든 관계는 결국 다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관계다. 그들을 신뢰해야 할지, 그들에게 여러 부분에서 의지해도 될지를 결정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번 관계가 끊긴 경험을 한 아이들은 그 마음을 다시 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는 관계들에서도 그런 경향은 그대로 반영된다. 만약 오랜 시간 후 그 관계가 이어졌다면 그들 또한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닐지라도 그들 사이에서는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게 강한 신뢰로 이어진 관계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확대되면서 가족의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새로운 의미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 <블랙 위도우>
영화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도 최근 확대된 의미를 가지는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블 유니버스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로 등장했던 나타샤(스칼렛 요한슨)는 그동안 주변부의 인물이나 관계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나타샤는 초기에 굉장히 차가운 스파이의 이미지로 등장했고 다양한 모습의 역할로 변장할 수 있고 뛰어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그는 늘 혼자였고,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그나마 어벤저스에 속한 다른 영웅들과 신뢰를 형성하여 세상을 구하는 여러 임무들을 하기 바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사이 시점에서 전개되는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 캐릭터가 등장하는 마지막 영화이자 그의 과거 삶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영화 초반에는 나타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보인다. 여동생 엘레나(플로렌스 퓨)와 엄마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아빠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이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오하이오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나타샤의 조금은 무표정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저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다. 사실은 첩보 활동을 위한 위장 가족이었던 이들은 아주 어렸던 엘레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그것이 단순한 임무였고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족의 역할에서 행복해 보인다. 실제로 그 첩보 활동의 마지막 날에 엄마 멜리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3년이라는 시간은 나타샤와 옐레나가 한참 성장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생물학적 부모의 존재와는 거리가 있었던 그들에게 그 시기는 입양 후에 만들어진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고 부모 역할을 하는 두 사람도 아이들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 각자가 느끼기에 그 시간은 좋은 시간이었다. 영화는 오하이오의 첩보 활동이 끝나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는데, 영화 초반에 보여지는 나타샤와 옐레나의 유년기 시절은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기질과 관계를 만들어낸 시기다. 또한 그 시기 이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신뢰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깨지는 시점 또한 첩보 활동이 끝나는 시기와 동일하다. 가짜 가족이 깨지는 그 사건을 보고 나면, 그동안 마블 시리즈에 등장한 나타샤가 왜 그렇게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늘 혼자 힘든 짊을 지고 가려고 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깨져버린 어벤저스, 신뢰하지 못하는 가족
나타샤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기는 어벤저스 멤버들 간의 사이가 좋지 못할 때이고, 정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기다. 성인이 된 이후 나타샤가 가장 크게 마음을 열고 신뢰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어벤저스 멤버들일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깨진 상황에 처한 나타샤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둡고 외로워 보인다. 또한 가장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주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 시기에 그가 다시 만나게 되는 동생 옐레나는 이미 신뢰가 깨져버린 과거 가족의 일원이다. 이 두 인물이 영화 속에서 처음 만나서 가장 먼저 하는 건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대적인 전투다. 이 장면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신 그리고 상대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 칼을 뽑아 휘두르고 목을 조르며 한참을 다투던 그들은 이내 그 잔인한 행위를 멈추고 대화를 시작한다.
나타샤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부모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3년간 보냈던 가짜 부모인 멜리나와 레드 가디언에 대해서는 기억한다. 그 3년간의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들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버렸다는 배신감에 가득 차 있다. 반면 옐레나는 부모를 비롯해 나타샤까지 미워한다. 옐레나에게 나타샤는 그저 자신을 버리고 간 언니일 뿐이다. 영화는 네 가족의 관계가 변화되는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들이 어색하게 처음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나타샤와 옐리나가 다시 만났을 때 상대를 경계하며 원망을 담았던 것처럼 레드 가디언과 멜리나를 차례로 만나는 장면에서도 이들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원망이 담겼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따뜻한 기억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영화 후반부 엄마와 아빠, 나타샤와 옐레나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가 감정적으로 공들여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응어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차갑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출되는데 그들이 가짜 가족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가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비록 나타샤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차갑게 대하려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가진 진심을 느끼는 여러 짧은 순간들에 시종일관 흔들리는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시종일관 터프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옐레나도 마찬가지다. 그 식탁에 앉은 이후 옐레나는 말이 없어지고 심지어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만에 한 자리에 앉게 된 그들의 머릿속에는 가짜 가족생활을 했던 3년의 따뜻한 기억이 천천히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장면은 영화에서 던지고자 하는 영화의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낸 부분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는지 모른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 나타샤
영화에는 레드룸이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고아인 아이들을 데려와 스파이로 만들 수 있는 아이들을 추려내고 그들의 자궁과 난소를 드러내고 훈련시킨다. 그리고 정신을 조정해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하게 만든다. 그들을 구원하려 하는 건 나타샤와 옐레나고 그들 역시 레드룸의 피해자다. 즉 이미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다른 피해자들을 타인의 추악한 욕망 속에서 구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나타샤와 옐레나에게 그들은 일종의 유사 자매, 즉 가족의 일원으로 볼 수도 있다.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위도우들은 나타샤의 손에 의해 해방되는데 결국 나타샤가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넓은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위도우들을 해방함으로써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블랙 위도우>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으며 특히 가족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나타샤가 다시 그 믿음을 되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간의 마블 영화들을 보아왔던 관객들은 이미 나타샤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가 가진 과거를 궁금해하게 되는데 그의 과거까지 다 보고 난 관객들은 나타샤의 마지막 모습이 좀 더 뭉클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타샤에겐 과거의 가족도 유사 가족이고 어벤저스 멤버들도 일종의 가족이다. 나타샤는 과거의 가족을 다시 만나며 나타샤는 그 유사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언가 답을 찾게 된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현대인만큼 이 영화에서 나타샤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결국 그 유사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그것이 바로 현재의 사회 흐름이라는 것을 영화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다페스트 장갑차 추격신이나 높은 고공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마블 영화답게 박진감 넘치게 구성되어 있다. 태스크 마스터와 나타샤가 벌이는 격투 액션과 옐레나가 보여주는 격투 액션은 사실감 있게 담겨있어 긴장감을 높인다. 그래서 영화 <본 시리즈>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운 점은 나타샤가 잘하는 타격 액션이 많이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스크 마스터의 특성과 나타샤나 직접 격투하는 장면의 비중이 적고, 그 외에 나타샤가 보여주는 격투 액션이 많이 없어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액션 장면은 극장에서 볼만한 큰 스케일을 보여준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의 멋진 퇴장
마지막으로 나타샤를 연기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그 모습 자체가 블랙 위도우가 되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한 캐릭터로 활약해 온 그의 연기는 향후의 활약이 볼 수 없다는 점을 더욱 아쉽게 만든다. 그가 고공에서 착지할 때 보여주는 포즈는 옐레나에게 항상 놀림당하지만 블랙 위도우의 대표적인 액션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그 포즈를 그대로 따라 하는 옐레나의 모습은 그가 언니 나타샤를 이어 블랙 위도우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직 누가 나타샤를 이어 블랙위도우를 할지 확정된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누가 해당 역할을 이어갈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아찔한 십대>로 2004년 데뷔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로어>, <베를린 신드롬> 같은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이번 <블랙 위도우>를 연출하면서 마블 영화 중 최초로 단독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나타샤와 관련된 유사 가족들로부터 진심을 끌어내는 감정적인 연출도 잘 들어가 있으며, 액션 연출도 박진감 넘치게 들어가 있어 향후 다른 마블 영화의 연출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나타샤의 마지막 모습을 아주 멋지게 마무리했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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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위도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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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이 꼰대가 필요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을 매달 밧줄을 산 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오던 전기도 끊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오토’(톰 행크스). 정장을 차려입고 죽을 준비를 다 마친 그.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마다 이웃들이 그를 방해하기 때문. 새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룰포) 부부는 주차도 제대로 못해서 오토의 속을 뒤집어 놓고, 아무 때나 먹을 걸 가져다준 뒤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레이첼 켈러)'의 묘비 앞에 앉아 이웃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한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 원치 않았던 이웃들의 관심 덕분에 그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신작 <오토라는 남자>는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영상화한 코미디 작품으로, 인생 최대의 트라우마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의지를 되찾는지를 그려낸 착실한 드라마다. 동시에 건실한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떠나보낸 가족을 향한 오토의 사랑과 회한이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잔잔한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이 정공법은 꽤 성공적이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석에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웃음과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오토라는 남자>를 그저 준수한 코미디이자 가족 영화로만 남겨 두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주인공 오토를 연기한 배우 톰 행크스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자 '미국의 얼굴'이라 불린다. 그의 연기력이나 흥행력을 고려하면 미국의 송강호라고 해도 될 터. 그런 그가 소품이라고 불릴만한 영화에 출연했으니,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톰 행크스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물론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영화 속에도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오토라는 남자>는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특히 민주주의를 누리는 모두가 곱씹어 봐야 할 이야기에 가깝다.
웃픈 꼰대, 오토
<오토라는 남자>는 코미디로 시작한다. 오토의 괴팍함이 주재료다. 그의 하루 패턴을 훑으면서 그가 얼마나 괴팍한지 보여준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오토. 눈이 오는 날이면 자기 집 앞 인도까지 눈을 치운다. 눈이 오지 않으면 아침을 먹고 바로 동네 순찰에 나선다. 주차장에 주차증이 없는 차가 있는지, 도로와 주차장을 분리하는 문은 잘 잠겨 있는지, 쓰레기장 분리수거는 잘 되어 있는지, 자전거 보관대가 아닌 곳에 자전거를 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신문이나 광고가 동네 미관을 해친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한다. 오토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그 누구도 독설을 피할 수 없다. 새로 이사 온 이웃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도, 갈 곳 없는 길고양이도.
하지만 그가 괴벽해진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그의 괴팍함은 트라우마를 숨기려는 방어 기제다. 임신한 소냐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을 떠났던 오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오토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는 다행히도 무사했지만, 불행하게도 소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유산했고, 그녀의 하반신도 마비됐다. 오토는 뒤늦게 버스 회사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버스를 운행해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이는 마음속 깊은 흉터가 됐다.
그 후로도 오토는 자꾸 다친다. 장애인이 된 아내를 무시하고,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점차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예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졌다. 원칙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마트 직원이 로프 길이와 가격을 잘못 계산하면 크게 화내고, 회사에서 부사수가 상사로 임명되자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웃들이 혹시나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감시하면서 매일 순찰을 돈다. 그렇기에 오토는 더 이상 우습지 않다. 웃프다.
오토의 트라우마 극복기
동시에 <오토라는 남자>는 눈물을 자아내는 드라마다. 오토의 병든 내면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그가 치유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소냐와 사별한 뒤,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자 오토는 결국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덤에 가서 소냐와 대화를 나눈다. 조만간 당신 옆으로 가겠다고. 당신과 재회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오토는 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천장에 목을 매달기도 하고, 차 안에 가스를 채워서 질식사도 시도한다. 전철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에 총을 쏘는 것도 선택지에 있다. 그는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점차 죽어가면서 아내와 행복했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의 첫 만남,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 졸업식과 프러포즈, 신혼 생활까지. 오토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다.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오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다. 하루는 앞집에 이사 온 마리솔이 창문을 고치겠다며 사다리를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으나 사이가 멀어진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무 때나 찾아오는 마리솔은 대뜸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날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소냐의 제자, 말콤이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면서. 편견 없이 자기를 대해줬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왔다고. 새 가족도 생긴다. 눈 내린 날에 얼어 죽기 직전이었던 고양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오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오토는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자살하지 않아도 이승에서 죽은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깨닫는다. 이웃에게 베풀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소냐의 뜻을 이어가면 된다. 소냐가 말콤에게 그랬고, 마리솔이 자기에게 그랬듯이.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웃과의 협력 덕분에 그는 마침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죽음을 포기하고 아내의 유품도 정리한다. 그렇게 오토는 자기 삶을 살아간다. 덕분에 그의 장례식에서 동네 이웃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쁘게 웃을 수 있다. 자살을 꿈꾸던 그가 편안히 죽음을 마주한 건 그가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토 같은 꼰대가 필요한 이유
여기까지만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한 노년 남성이 평화를 되찾는 사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오토의 꼰대스러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 숨어 있는 사회적 함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고치면서 오토는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더 이상 사람들이 이웃들의 일에, 공동체를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각자 살기 바쁘다고. 실제로 오토가 순찰할 때 다른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웬 오지랖이냐는 식이다. 파편화된 시민의 모습은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살하기 위해 전철역을 찾은 오토. 그가 선로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먼저 선로에 떨어져 버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오토. 그러나 그는 주위 승객들의 반응에 더 놀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만 찍을 뿐 아무도 도우려 나서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공중의 쇠퇴를 경계했다. 그는 기술의 변화로 인해 다른 산업 구조가 등장하고, 사회가 거대해지고 조직화되면 사람들이 점점 비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작중 듀이가 전망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오토가 퇴사할 때, 같은 부서 직원 한 명은 축하 케이크 위에 그려진 오토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반으로 잘라버린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 필요한 가치나 조건, 그리고 공동체는 훼손된다. 개인은 많지만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오토 말고는 아무도 거리에 신경 쓰지 않고, 공동체가 합의한 규칙을 중시하지 않듯이. 중요한 의사결정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넘어간다. 건설 회사가 오토와 이웃들의 집을 불법적으로 매수하려 해도 그들은 권력자를 막을 힘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토의 꼰대스러움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거대해진 사회에 대응해 '거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듀이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한다. 듀이는 이웃 공동체, 지역 공동체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모인 이들끼리 서로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토와 이웃들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협력해서 루벤의 집을 지켜냈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위기도 타개할 수 있었다.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던 오토의 '순찰'에 힘입은 결과였다. 비록 예민하게 원칙을 따지고 방식이 거칠기는 했지만. 뒤집어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상이한 정체성 간에 대화 대신 갈등만 가득한 현재 미국 사회를 겨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원작 소설과 달리 이웃 주민의 인종이나 성 정체성이 수정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의 얼굴'인 톰 행크스가 오토 역을 맡은 건 꽤 의미심장하다.
물론 <오토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내용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452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내용 중 잘려나간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스웨덴에서 먼저 영화화한 <오베라는 남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스웨덴 버전은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분장상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호평받은 수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누구와 함께 극장을 찾든 간에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나면 옆 사람에게 감사를 전할 일이 생길 거라는 사실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 영화의 진가가 담겨 있다. 엔딩 크레디트는 오토와 마리솔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서툰 그림으로 가득하다. 또 홀로 사는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는 문구가 같이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관을 나설 때 마음이 따뜻해지지 따뜻해지지 않기는 어렵다.
A(Acceptable, 무난함)
오토의 순찰이 계속될 때,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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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년에게 돌 던질 자 누구인가.
이 글은 2023.05.03일 개봉 예정인 영화 [클로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오(에덴 담브린)와 레미(구스타브 드와엘)의 인생은 서로의 모습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성벽과도 같았다.
둘만이 할 수 있는 가상의 전쟁놀이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해 달아나고 숨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꽃이 가득한 들판을 숨이 헐떡일 때까지 달음박질치기도 했다.
견고한 성벽 안의 두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은 내달리고 온 날의 밤이면 잠 못 이룬 채 속살거리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셔야만 했다.
그런 레미를 위해 레오는 노래를 불렀다.
무리에서 떨어진 오리와 도마뱀의 노래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두 생명체이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듯한 레오의 노래를 들으며. 레미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치 두 소년의 모습도 영원히 그러하기를 바라는 꿈을 꾸면서.
하지만 누가 와서 두들겨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둘 만의 성은. 또래 친구들의 눈길 몇 번에 주저 없이 금 가기 시작했다. 성벽 밖에 선 채로 레오와 레미의 보호막을 와르르 무너지게 한 친구들의 얼굴이 무너진 성 안에서 보이던 순간. 레미는 늘 곁에 있던 레오에게 손을 뻗었지만. 레오는 성큼성큼 걸어가 친구들의 손을 잡고 멀리 떠나고 있었다.
레미는 깨달았다.
오리와 도마뱀은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도마뱀;살기 위해 꼬리를 잘라야 하는.
레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마뱀의 그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이 없어, 시시각각 변하는 한 아이의 감정을 얼굴 표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그것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레오를 향한 다각화된 마음이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들은 모조리 진심이었고, 레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감정 앞에 솔직한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레오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손을 놓고 자꾸 저 멀리 떠나가려는 듯했다. 레오는 더 이상 가상의 적군들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보려는 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레오가 성벽 밖으로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긴 그 무렵부터, 레미는 함께 달리는 레오의 옆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축구, 다음엔 아이스하키. 그리고 영원히.
레오는 효과적으로 레미를 멀리했고. 그렇게 레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엔 배가 아픈 것만 같았다. 레오와 멀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도 배가 아프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레미는 배가 아닌 가슴이 아픈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의 근원지는 몸과 가까우면서도 멀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존재했으며. 실존하지 않길 바랐지만 생생하게 존재하는 생전 처음 느낀 이 고통에 레미가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마뱀은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고 했다.
하지만 레미에게 레오는 꼬리 정도가 아니었고. 새로운 꼬리도 레미에게는 필요 없었다. 레오는 레미에게 모든 것이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널뛰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오리의 곁을 떠나기로 한 도마뱀은 주저 없이, 레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길을 선택했다. 영원히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생각했을 때. 레미는 다시 한번 배가 아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에게 둘러댈 때는 배와 가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지만.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오리;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발짓을 해야만 하는.
성 외곽이 무너지고,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친구들과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이미, 그것도 꽤나 멀어 보였지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순간. 레오는 레미의 손을 뿌리쳤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레미의 슬프고 상처받은 모습 정도는 기꺼이 나중에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집단 속에서 효과적으로 섞이고 난 뒤에는.
레오의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히 무리에 섞여 있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의 갈퀴 달린 발은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물을 움켜쥐며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레미와 처음 다툰 그날도. 점점 더 자신의 마음속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기를. 아니 숨기기 편해지는 레미를 향한 마음을 보면서. 레오는 괜히 레미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레오는 나중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무리에 속하고 나면. 그때는 레미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필사적인 발짓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애써 외면한 채. 그마저도 나중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레오는 얼굴에서 모든 감정을 지워버리고는 열심히 갈퀴질을 했다.
그러나 레오에게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못했다.
변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속죄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히 레오의 인생에서 레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문득 자신이 레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왜 하필 두 도마뱀도, 두 오리도 아닌, 도마뱀과 오리였을까.
왜 같은 종에 속하는 두 마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레오는 이미 레미와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레미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알게 되자. 그제야 레오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미는 배가 아프다고 했었다.
레오도 지금 만큼은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 싶었겠지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아픈 곳은 배가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시선;그리고 동일화
영화 속의 소년들은 시종일관 달린다.
때론 그 수단이 자전거이기도 하고, 자동차일 때도 있으며 달리기일 때도 있다. 레오와 레미는 그 어떤 배경을 두고서도 앞으로만 달릴 뿐. 절대 시선을 뒤로 주지 않는다. 허투루 낭비되어 공허함을 좇는 시선이 없다.
특히 레오의 시선은 레미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로 정면보다는 측면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아무런 표정, 감정도 없는 레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길 때마다 과연 레오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문득 레오를 바라보는 이 카메라의 앵글이 레미의 시선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미가 평생을 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생 후반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레오의 옆얼굴. 레미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잊히지 않고 존재감이 가득한 이유도 아마 이런 앵글 처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는 도마뱀과 오리는 처음엔 너무도 당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오가 눈물을 터뜨리는 말미에 가면 그 경계마저도 희미해진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했던 레미의 모습이 오리 같기도 하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꼬리정도는 뭐.라는 생각으로 레미를 밀어내는 레오의 모습은 도마뱀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달랐으며. 이로 말미암아 절대 넘을 수 없던 차이가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로의 처지가 완벽히 달랐음을 레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레미와 웃으며 상상 속의 적군들에게서 도망쳤던 꽃이 만개한 들판에서. 시종일관 앞만 보던 레오가 단 한 번 뒤돌아 보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라는 꼬리를 잘라내기 싫어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선택을 한 레미가 문득 생각난 듯. 레오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이 기꺼이 잘라낸 꼬리의 흔적을 슬며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었던. 혹은 계속 회피해 왔던 자신의 아픔과 레미의 아픔을 함께 이해한다는 듯이.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뒤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카메라의 앵글로 대변되는 레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며 결국 레미에게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면이자 뼈아픈 성장의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음을 알리는 순간을 이보다 고급스럽게 표현한 영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화장실 문을 보여준 채 머무는 단 몇 초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도 정확한 정보와 복잡한 감정을 한 아름 던져주었다.
느린 전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런 섬세함을 단 한숨도 놓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마다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그에 상응하는 숫자만큼의 상처를 영화 내내 마음속에 남겼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경험 속에서도 화면에서 눈을 감히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영화는 아름답고도 슬펐다.
과연 레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도 마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씨네랩으로 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의 TMI]
1. 독일어 공부는 잘하고 있습니다.
2. 공부하느라+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와서 다 내려놓고 잘 쉬었습니다.
3. 매우 많이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로즈 #씨네랩 #루카스돈트 #에덴담브린 #구스타브드와엘 #에빌리드켄 #레아드루케 #영화리뷰어 #munalogi #최신영화 #영화시사회 #브런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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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동키가 아닌 EO의 시대
출처 : 네이버 영화
귀여운 포스터로 관객을 사로잡은 <당나귀 EO>
당나귀 하면 '슈렉'의 동키만 떠올렸다면, 이제 당나귀 EO가 생각날 겁니다! 강렬한 포스터로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고 말하는 EO. 이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못참고 영화관으로 달려갈 여러분들을 위해 EO의 후기 및 기대 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
이 영화는 꼭, 무조건 영화관에서 봐야 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조하냐면, <당나귀 EO>는 제75회 칸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후 심사위원상과 사운드트랙상을 석권했어요. 영화는 풍부한 사운드로 보는 내내 EO에게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도 한몫 합니다. 가끔 현실인지 구분이 안가는 듯한 영상 연출이 영화 중간 중간 나오는데,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눈과 귀가 동시에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고 난 뒤
영화는 "제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라는 말에 걸맞게, EO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폴란드에 있는 서커스단에서 '카산드라'와 함께 연기하는 당나귀 EO. '카산드라'와 EO는 단순히 같이 일하는 동료, 그 이상이죠. 하지만 그런 카산드라와 EO에게 생긴 비극인 사건. 그들은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강제 이별을 하게 됩니다.
EO는 서커스단에서 나온 뒤 많은 일들이 생겨요. 길을 잃어 어두운 숲길을 걷기도 하고, 맛있는 당근을 먹기도 하고, 축구장에 들려 강제로 마스코트가 잠시나마 되기도 하고, 트럭에 갇히기도 하고.
EO는 마치 길 잃은 '사람'처럼, 여러 방황 끝에 결말을 맞이합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수상 후보였던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제치고 국제장편영화상 후보에 발탁되어 화제의 중심에 오르기도 한 '당나귀 EO'는 오는 10월 3일(화) 개봉한다고 합니다. 꼭, 영화관에서 관람하시길 추천드립니다!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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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머 필름을 타고! (2020)
썸머 필름을 타고!
감독: 마츠모토 소우시
출연: 이토 마리카, 카네코 다이치, 카와이 유미 등
장르: 로맨스, 청춘, SF
상영시간: 97분
개봉일: 2022.07.20 (국내 개봉일 기준)
걸작으로 남을 우리들의 여름
주인공 ‘맨발(이토 마리카)’은 청춘 로맨스에 열광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무협 시대극에 마음이 끓어오르는 여고생. 영화 동아리에서 자신이 쓴 <무사의 청춘>이 탈락하고 ‘카린’의 러브 스토리가 제작되면서 친구들과 함께 아쉬움을 달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극장에서 자신이 상상한 주인공의 모습에 딱 맞는 소년 ‘린타로(카네코 다이치)’를 발견하게 되고, 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절친 ‘킥보드(카와이 유미)’와 ‘블루 하와이(이노리 키라라)’, 그리고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재능을 갖춘 다른 친구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의문의 정체를 가진 ‘린타로’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맨발의 영화 제작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귀여운 청춘물에 SF 한 스푼
십 대의 청춘과 여름이라는 싱그러운 계절, 그리고 언제나 좌충우돌한 사건이 펼쳐지곤 하는 고등학교 동아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실패하기 어려운 조합이다. 2000년대 일본 하이틴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로도 볼 수 있는 뻔한 구성이기는 하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는 범상치 않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함께 몇 가지 장르를 함께 섞는다. 시대극 마니아인 주인공은 2020년대인 현재 완벽히 비주류로 자리잡은 사무라이 영화를 기획하고,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 소년은 영화가 사라지고 없는 먼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나타났다. 청춘 로맨스 소재에 시대극과 판타지적 요소가 섞이니 스토리가 정신 없어 지기는 했지만 난장판이기에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십 대 소년소녀의 이야기를 뻔하지 않고 다채롭게 그릴 수 있었다. 어디로 튈 지 가장 알 수 없으면서도 말도 안 되는 것도 과감하게 해낼 수 있는 시절이 아닌가. 물론 SF 요소를 대사를 통해서만 대강 해치우려는 연출이 미흡하기는 했지만 작품이 가진 귀엽고 통통 튀는 매력에 취해 그마저도 눈감을 수 있게 된다.
사랑은 영화를 타고
극중 맨발이 쓴 <무사의 청춘>은 우정과 갈등 사이를 오가는 두 사내의 이야기를 다룬 시대극이지만, 그 작품 속 주인공은 감독인 ‘맨발’의 삶과 맞닿아 있다. 맨발은 마지막까지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맺을지 정하지 못하고 끝없는 고민에 시달린다. 미래에 영화가 사라지게 된다는 ‘린타로’의 말이 그의 열정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 못지 않게 열정을 갖고 촬영에 임하는 린타로의 진심을 듣고 맨발은 라스트 신에서 두 명의 무사가 서로 싸우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는 다른 세계에서 온 린타로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그와 함께 계속 나아가고 싶은 맨발의 속마음과도 같다. 하지만 축제 상영회 당일, 영화의 엔딩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맨발은 상영을 중단해 버린다. 이제 와서 결말을 다시 찍고 싶다는 맨발의 의견에 따라 두 명의 무사가 최종 결판을 벌이는 장면을 다 같이 부랴부랴 준비한다. 그리고 감독이 아닌 또다른 주인공으로서 린타로 앞에 칼을 들고 맞서는 맨발. 이는 미래에서 온 린타로 때문에 벌어질 타임 패러독스를 막으려면 <무사의 청춘>의 파일을 삭제해야 하고, 린타로를 좋아하지만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맨발의 심리 변화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아픈 결투 끝에 성장하는 무사의 청춘처럼 맨발은 린타로에게 느낀 감정, 그리고 환상일 수만은 없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선다. 청명한 여름의 계절,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에 대한 열정을 모두 경험하고 성장한 ‘맨발’이 곧 한 명의 사무라이였던 셈이다.
필름을 타고 맺어진 ‘린타로’와 ‘맨발’의 사랑은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지만 영화가 맺어준 두 사람의 끈끈한 관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맨발의 첫 작품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게 큰 도움을 준 린타로는 훗날 맨발이 거장 감독으로 성장하게 될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주었고, 맨발은 영화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린타로에게 영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심어주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지만, 각자의 시공간에서 뜨겁게 교감했던 영화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데 그 감정을 한없이 쏟아냈을 것이다.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나 잠깐의 신기루 같았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자신의 꿈과 목표로 이어 나간다는 것이야 말로 건강한 청춘 로맨스가 아닐지.
영화 속 맨발에 빗대어 본 과거의 나
영화를 진심으로 애정하고, 동아리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맨발의 모습은 고등학교 시절의 내 모습과도 제법 닮았다. 나는 그 당시 방송부와 영상제작 동아리 소속이었고, 영화를 촬영해본 적은 없지만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한 영상들을 여러 편 찍었다. 맨발의 우당탕탕 영화 제작기를 보며 한 가지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무도 그에게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맨발의 팀원들은 대부분 영화와 거리가 먼 친구들이었지만 길어지는 촬영 시간에도, 같은 장면을 수십 번 촬영하는 감독의 태도에도, 제작비를 벌기 위해 시키는 이삿짐 센터 아르바이트에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리고 맨발 또한 자신을 도와주러 온 친구들에게 단 한 번도 미안해 하지 않는다. 나도 과거에 동아리에서 영상을 찍을 때 거의 대부분 주변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언제나 촬영 시간은 길어지고, 스케줄은 빡빡하기 마련이라 늘 친구들에게 미안해 했고, 같은 장면을 수차례 찍어야 할 때는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그 친구들 역시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다들 바쁜 시간을 쪼개 참여한 거라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맨발과 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얼핏 보면 맨발이 학교 안에서 아무나 스태프로 기용한 것 같지만, 사실 친구들의 재능을 미리 캐치하고 각자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역할만을 배분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영화에 미쳐 있는 것처럼 친구들 모두 야구, 조명, 천문학, 검도 등 다들 한 번쯤은 무언가에 제대로 빠져본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친구들은 자신과 비슷한 맨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본인들의 능력을 인정해 준 맨발에게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맨발 못지 않게 영화 촬영을 즐기고, 맨발 또한 친구들이 이번 여름의 청춘을 자신에게 완전히 빌려 주었음을 알고 있다. 맨발의 꿈과 열정을 존중하는 여러 친구들과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18세의 여름을 선물한 맨발의 우정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다. 물론 역할에 딱 맞는 친구들이 나타나준다는 것은 천운이기에 어느 정도 영화적 설정이 가미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나는 친구들을 섭외할 때 맨발처럼 세심한 접근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맛있는 걸 사준다든가 물질적인 대가를 제공하려 했을 뿐 내 진심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그들이 참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곁에 좋은 친구들을 둔 맨발이 부럽게 느껴지면서도 과거에 부족했던 내 자신의 모습을 왠지 모르게 되새겨 보게 된다.
영화의 종말,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씁쓸함
요상하게 생긴 타임머신을 타고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감독(맨발)의 데뷔작을 보기 위해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은 판타지 그 자체다. 하지만 미래소년 린타로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 더 이상 영화가 실존하지 않다는 것만큼은 생각보다 억지스럽지 않다. 2022년인 지금도 영상 콘텐츠의 트렌드는 점점 더 짧은 길이의 영상들로 변화해가고 있다. 사람들은 3분짜리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것보다 30초 남짓 되는 틱톡, 릴스 영상들을 즐겨 보고, 예능이나 드라마도 한 회를 통으로 감상하기 보다는 15~20분 정도의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짧게 감상한다. 주변을 살펴보면 지루함이나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유튜브 요약 영상을 통해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가 구식인 걸 수도 있지만, 고작 10여 분짜리 편집 영상을 봐 놓고는 어떻게 자신이 그 작품을 봤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이게 현실이고, 앞으로는 영상 트렌드가 더욱 짧아질 것이라는 의견에도 매우 동의한다. 몇 십 년 후 미래에서 온 린타로의 세계에서는 영화가 단 10초 길이에 불과하다는 설정은 다소 극단적일 수는 있어도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영화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영화에 대한 꿈을 놓지 않는 맨발 같은 사람도 있고, 영화가 사라진 세계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작품들을 보며 향수에 젖어 사는 린타로 같은 사람도 분명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이다. 대사는 '사랑해' 뿐인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더 잘 먹히는 2020년대에 시대를 역행하듯 흑백 사무라이 영화를 찍는 이들의 모습은 영화란 본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자들이 우리 곁에 계속해서 남아준다면, 영화의 종말이라는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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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마지막 기대작 준비.. [ 오징어 게임 시즌2 | 공식 메인 예고편 ] 리액션 & 리뷰 Squid Game Season 2 Official Trailer | 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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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초기대작 오징어게임 시즌2 메인 예고편 감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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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의 초상 리뷰 - 누군가의 혁신이 불법으로 되버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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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금지법 이후 6개월 간의 악전고투 이야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의 우버로 불리며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TADA).
출시한 지 9개월 만에 100만 유저를 확보하며 승승장구하던 중 택시업계의 반발로 법적 공방에 휘말린다.
뜨거운 논란 속 치러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날, 모든 팀원들은 함께 모여 ‘종이컵 와인 파티’로 자축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단 14일 뒤, ‘타다금지법’이 통과됐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려오는데...
그들은 이 최악의 위기를 뚫고 타다를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을까?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의 이야기로 세상에 공개되는
‘스타트업’에 대한 국내 최초의 다큐멘터리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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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샌드맨> 공식 예고편
위험한 꿈을 꾸어라. 《샌드맨》의 세계로 들어오라.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그곳은 바로 '꿈결', 꿈의 지배자 샌드맨(톰 스터리지)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두려움과 판타지에 숨결을 불어 넣는 곳. 하지만 예기치 않게 붙잡힌 '꿈'이 한 세기 동안 갇혀 지내게 되자, 여러 사건이 잇달아 벌어져 꿈결과 깨어있는 세계 모두가 영원히 바뀌어 버린다. 무너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여러 세계와 시간대를 여행하는 꿈. 그 여정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고, 오랜 친구 및 적과 재회하고, 새로운 우주적 존재와 인간도 만난다. 수많은 팬들의 사랑 속에 유수의 상을 수상한 닐 게이먼의 DC 코믹 시리즈를 원작으로 하는 《샌드맨》. 10개의 장에 걸쳐 꿈의 장대한 모험이 펼쳐지는 가운데, 신화와 어두운 판타지가 여러 캐릭터를 중심으로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스토리를 개발한 원작자 게이먼과 쇼러너 앨런 하인버그,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총괄 프로듀서로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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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이노 마이 프렌드> 특별 동영상
공룡 연구를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난 뒤 사라진
친구를 구하기 위해 용감한 인턴 요원 ‘우디’가 출동한다.
최강 초식 공룡 스테고사우루스부터
무시무시한 지배자 데이노니쿠스,
공룡의 제왕 티렉스까지 모인 그곳!
신세계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뜻밖의 위기에 빠진 ‘우디’는
꼬마 공룡 ‘샤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한편, 초식동물 마을을 탐내는 포악한 공룡 ‘디에고’의 등장으로
모험을 떠난 ‘우디’와 ‘샤샤’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맞닥뜨리는데..
과연, 두 친구는 위기에 처한 공룡 마을을 지켜내고
‘우디’는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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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행복의 속도
줄거리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며 일본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오제 국립공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차량이 통제되는 이곳에는 산장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봇카'들이 있다.
그들은 지게에 높은 짐을 쌓아올리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걸어나간다.
24년차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와 9년차 봇카 '이시타카', 두 사람이 걸어가는 '행복의 속도'는 과연 얼마일까?
멈추지 않는 것들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
숨은 의미 찾기
"속도"
영화는 봇카를 바라보며 속도에 주목한다. 당연해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봇카라는 직업을 통해 관심을 갖는 키워드는 '무게'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추며 그야말로 입체적인 시각을 통해 '봇카'라는 직업을 우리네 보편적인 삶의 궤도에 올려 놓는다.
24년차 베테랑 봇카인 이가라시.
영화는 이가라시의 가족들이 함께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칭얼거리는 둘째 아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첫째 아들의 만화영화, 주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아내. 복작복작하고 정신 사나운 와중에도 가족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밥을 먹는다. 마치 제멋대로인 구성원 각자의 시간들이 식탁이라는 중심점을 기준으로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은하수를 구성하는 것처럼.
이가라시의 가족은 각자만의 고유한 시간들이 존재한다.
봇카를 하는 이가라시는 산장에 짐을 가져다주고 홀가분한 어깨로 오제를 내려올 때면 카메라로 주변 풍경을 담는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일을 끝내면 밭에 콩을 심고, 거실에 앉아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첫째 아들은 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고, 아직 어린 둘째 아들은 형의 리모콘을 빼앗아 엄마 주변을 맴돈다. 이렇듯 그들에겐 각자가 살아가는 루틴이 있고, 그것은 도무지 합치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한데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룬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있어 각자의 시간이란 결코 침범당해서는 안 되는 존중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침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벽을 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름방학을 맞은 첫째 아들과 함께 자신이 물건을 가져다주는 산장에 묵으며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온 가족이 가을길 산책을 나서서 잠자리를 잡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한다. 이렇듯 각자의 시간을 추억이라는 케이블 선으로 공유하면서 행복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가족이 있다.
한편 9년차 봇카인 이시타카가 있다.
그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로서 봇카라는 직업을 널리 홍보하고자 애쓴다. 봇카 일이 없는 날이면 도시로 나가 관광업체와 미팅을 하는 등, 그의 일상은 쉴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일까, 그의 가정은 보다 이시타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전업주부인 아내는 항상 앞치마를 하고 밥상을 차리느라 바쁘고, 아이는 냉찜질을 하고 파스를 바르는 아빠 곁에 붙어서 하루를 보낸다.
이시타카는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남들에게 권유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사실 그의 나이대를 생각했을 때, 함께 맥주를 마셨던 친구들을 떠올려봤을 때, 그는 분명히 도시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던 한 명의 청년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가 왜 봇카라는 직업을 선택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에서 다루지 않았으므로 알 순 없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마구잡이로 내달리는 도심의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천천히 가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지게에 주로 음식을 지는 이가라시와 달리, 이시타카는 가스통 같은 물건을 지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가족을 부양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자라려면 한참 남은 아이, 집안을 돌보느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아내. 무릎과 발목은 점점 아파오는데 봇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젊은 이시타카로서는 어떻게든 봇카를 알리는 일에 미래가 걸려있다.
그는 봇카를 홍보하며 '도심의 속도에서 벗어나자'고 말하지만, 몸소 실천하고자 자신도 오제에 정착했지만, 자신 스스로도 여전히 도시의 무자비한 속도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런닝머신에서 뛰다가 막 땅으로 내려온 사람같이 빠른 걸음을 걷는다. 그것이 이시타카의 발걸음을 클로즈업했을 때, 이가라시보다 불안정한 이유다.
이들의 '시간'에 대한 구성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부모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시타카는 오랜만에 내려간 부모님의 집에서 잔소리를 듣기 바쁘다. 몸이 상하면 어쩌니, 회사원이 더 안정적이지 않겠니, 아내는 너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잖니... 이시타카와 그의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기보단, 그들 가족이 시간을 채워가는 방식이 불만스러운 듯 하다.
어쩌면 이시타카가 더욱 봇카를 알리는데 힘쓰는 것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는 이전 세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그래서 더더욱 본인의 직업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띄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그에 반해 이가라시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찍어온 사진을 구경하는데 여념이 없다. 아무도 걷지 않은 아름다운 겨울의 오제를 보며 감탄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아들. 함께 눈싸움하는 며느리와 손주들. 더불어 어머니의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자랑처럼 벽에 걸린 아들의 사진까지. 이시타카와 달리 이가라시는 이전 세대로부터 자신의 시간을 존중받았기에, 인정받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
"우리가 봇카를 할 때, 더 틀을 잡아놨어야 했는데."
이가라시가 제설작업을 할 때 만난, 지금은 봇카를 은퇴한 선배는 이가라시에게 말한다. 자신들이 미안하다고, 자신들이 제대로 하지 않아 봇카가 사라져서 남은 사람들이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미련한 사과다. 물론 이전 세대가 노력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짊어질 짐을 덜어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 때 제대로 된 틀을 잡아놨다고 해도 지금 봇카가 많이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만의 속도가 있다.
헬기 회사의 경영 상황이 악화돼서 철수하면 봇카들은 더 많은 짐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있는 봇카들이 계속 짐을 나르는 이유는 무얼까. 자신이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봇카의 자식들을 바라볼 수 있다. 봇카의 자식들은 봇카가 될까? 그건 모른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자녀들이 도시로 내려갈지, 오제에 남을지는 본인들이 선택할 몫이다.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의 길에 결코 관여해서는 안 된다. 타임머신이 발명됐다고 해서 역사를 바꿔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자신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도록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간이 현재냐, 미래냐에 있다.
이가라시에게 속도는 그가 딱 24년간 유지하고 있는 그 속도를 말한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결국 자신에게 딱 알맞은 속도를 찾아낸다. 유독 이가라시 가족이 나올 때면 스크린에 자연경관이 가득하다. 이는 이 가족이 자연의 속도, 즉 계절의 흐름에 발맞춰 걸어가고 있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곧 행복임을 뜻한다. 그러니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그저 현재를 살아간다. 행복이 움직이지 않고 늘 발밑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가라시 가족에게 있어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에 비해 이시타카의 속도란, 조금 더 복잡하고 단계적이다. 그의 행복은 현재와 미래에 걸쳐 나눠져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이가라시를 보다가 이시타카를 보면 초조하고 급박한 마음이 든다. 이시타카가 원하는 행복은 앞서가고 있고, 이시타카는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결코 이시타카를 동정하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의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 걸음의 속도를 높이지만, 그가 지금 디디고 있는 땅에도 현재의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시타카에게 '위로'가 아닌 '격려'를 던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무거운 짐을 지고 일어나는 이시타카를 이가라시가 지켜보는 것이었다. 짤막한 이 장면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가라시는 계속 휘청거리는 이시타카를 도와주지는 않지만, 그가 자기 힘으로 일어날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기다린다. 그가 일어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나아가는 길은 다르다. 그러므로 이시타카가 미래를 위해 걸어가는 것은 이시타카 나름의 속도이다. 행복이 어떤 명확한 물체로 존재하지 않듯이 속도도 마찬가지다.
걸어가든 뛰어가든 속도는 우리가 멈춰있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한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문구다. 백 명의 사람 앞에는 백 개의 길이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 자신만이 짊어질 무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 그 모든 것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 위를 걸어간다고 좌절하지 말자. 어쩌면 그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준비된 길일지도 모를 테니까.
그들은 왜 오제로 갔을까
감상평
"보통 베테랑 봇카는 몇 kg이나 매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관광객은 자연경관을 설명하는 이가라시에게 묻는다. 영화에서 이 무게가 아닌 속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대단하지만, 다르게 보면 현대인들이 느끼는 묵직한 무게감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들이 왜 오제에서 봇카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는 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쩌다가 이런 속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는 그들이 걸어가는 속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더불어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 역시 속도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왜'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우리네 인생으로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는 좋은 영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롯이 하나의 메세지만을 던지는, 잔잔하게 울려퍼지는 그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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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위도우, 가족의 의미를 깨닫다
진정한 가족은 그 각각의 관계들을 만들어가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태어나면서 자신의 가족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 동안 현재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실제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생물학적 부모와 강하게 이어져 있다. 부모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주는 우유를 마시고 그들의 품에서 잠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 바로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아이는 강하게 연결되어, 그 관계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된다. 그렇게 지속되는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도 그 관계는 삶의 많은 순간에 영향을 준다. 그들은 태어나서 바로 이어지는 관계지만 그들의 관계가 오랜 시간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그들 각자의 대화와 노력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원래의 생물학적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이 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거나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자라면서 성인이 되거나, 기회가 있다면 제3자에게 입양을 가기도 한다. 고아원에서 자라든, 아니면 입양을 가서 생활을 하든, 그 모든 관계는 결국 다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관계다. 그들을 신뢰해야 할지, 그들에게 여러 부분에서 의지해도 될지를 결정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번 관계가 끊긴 경험을 한 아이들은 그 마음을 다시 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만나게 되는 관계들에서도 그런 경향은 그대로 반영된다. 만약 오랜 시간 후 그 관계가 이어졌다면 그들 또한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닐지라도 그들 사이에서는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게 강한 신뢰로 이어진 관계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최근에는 그런 생각이 확대되면서 가족의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새로운 의미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영화 <블랙 위도우>
영화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도 최근 확대된 의미를 가지는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마블 유니버스 영화에서 블랙 위도우로 등장했던 나타샤(스칼렛 요한슨)는 그동안 주변부의 인물이나 관계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나타샤는 초기에 굉장히 차가운 스파이의 이미지로 등장했고 다양한 모습의 역할로 변장할 수 있고 뛰어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다. 그는 늘 혼자였고, 조금은 외로워 보였다. 그나마 어벤저스에 속한 다른 영웅들과 신뢰를 형성하여 세상을 구하는 여러 임무들을 하기 바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사이 시점에서 전개되는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 캐릭터가 등장하는 마지막 영화이자 그의 과거 삶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영화 초반에는 나타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보인다. 여동생 엘레나(플로렌스 퓨)와 엄마 멜리나(레이첼 와이즈), 아빠 레드 가디언(데이비드 하버)이 평범한 가족의 모습으로 오하이오에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나타샤의 조금은 무표정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저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다. 사실은 첩보 활동을 위한 위장 가족이었던 이들은 아주 어렸던 엘레나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그것이 단순한 임무였고 언젠가 끝날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가족의 역할에서 행복해 보인다. 실제로 그 첩보 활동의 마지막 날에 엄마 멜리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3년이라는 시간은 나타샤와 옐레나가 한참 성장하던 시기였다. 실제로 생물학적 부모의 존재와는 거리가 있었던 그들에게 그 시기는 입양 후에 만들어진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고 부모 역할을 하는 두 사람도 아이들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들 각자가 느끼기에 그 시간은 좋은 시간이었다. 영화는 오하이오의 첩보 활동이 끝나는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는데, 영화 초반에 보여지는 나타샤와 옐레나의 유년기 시절은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기질과 관계를 만들어낸 시기다. 또한 그 시기 이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신뢰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깨지는 시점 또한 첩보 활동이 끝나는 시기와 동일하다. 가짜 가족이 깨지는 그 사건을 보고 나면, 그동안 마블 시리즈에 등장한 나타샤가 왜 그렇게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고 늘 혼자 힘든 짊을 지고 가려고 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깨져버린 어벤저스, 신뢰하지 못하는 가족
나타샤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기는 어벤저스 멤버들 간의 사이가 좋지 못할 때이고, 정부의 추적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시기다. 성인이 된 이후 나타샤가 가장 크게 마음을 열고 신뢰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어벤저스 멤버들일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깨진 상황에 처한 나타샤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둡고 외로워 보인다. 또한 가장 신뢰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추적하고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주변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 시기에 그가 다시 만나게 되는 동생 옐레나는 이미 신뢰가 깨져버린 과거 가족의 일원이다. 이 두 인물이 영화 속에서 처음 만나서 가장 먼저 하는 건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대적인 전투다. 이 장면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와 불신 그리고 상대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 칼을 뽑아 휘두르고 목을 조르며 한참을 다투던 그들은 이내 그 잔인한 행위를 멈추고 대화를 시작한다.
나타샤는 자신의 생물학적인 부모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3년간 보냈던 가짜 부모인 멜리나와 레드 가디언에 대해서는 기억한다. 그 3년간의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들이 자신들을 이용하고 버렸다는 배신감에 가득 차 있다. 반면 옐레나는 부모를 비롯해 나타샤까지 미워한다. 옐레나에게 나타샤는 그저 자신을 버리고 간 언니일 뿐이다. 영화는 네 가족의 관계가 변화되는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들이 어색하게 처음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나타샤와 옐리나가 다시 만났을 때 상대를 경계하며 원망을 담았던 것처럼 레드 가디언과 멜리나를 차례로 만나는 장면에서도 이들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원망이 담겼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따뜻한 기억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영화 후반부 엄마와 아빠, 나타샤와 옐레나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은 영화가 감정적으로 공들여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과거에 대한 응어리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차갑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표출되는데 그들이 가짜 가족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가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비록 나타샤는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차갑게 대하려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가진 진심을 느끼는 여러 짧은 순간들에 시종일관 흔들리는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시종일관 터프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옐레나도 마찬가지다. 그 식탁에 앉은 이후 옐레나는 말이 없어지고 심지어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렇게 오랜만에 한 자리에 앉게 된 그들의 머릿속에는 가짜 가족생활을 했던 3년의 따뜻한 기억이 천천히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 장면은 영화에서 던지고자 하는 영화의 주제를 명징하게 드러낸 부분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아마도 그 자리에서 그들은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는지 모른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 나타샤
영화에는 레드룸이라는 집단이 등장한다. 어린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고아인 아이들을 데려와 스파이로 만들 수 있는 아이들을 추려내고 그들의 자궁과 난소를 드러내고 훈련시킨다. 그리고 정신을 조정해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하게 만든다. 그들을 구원하려 하는 건 나타샤와 옐레나고 그들 역시 레드룸의 피해자다. 즉 이미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다른 피해자들을 타인의 추악한 욕망 속에서 구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나타샤와 옐레나에게 그들은 일종의 유사 자매, 즉 가족의 일원으로 볼 수도 있다.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위도우들은 나타샤의 손에 의해 해방되는데 결국 나타샤가 가족의 의미를 깨닫고 넓은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위도우들을 해방함으로써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블랙 위도우>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으며 특히 가족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나타샤가 다시 그 믿음을 되살리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간의 마블 영화들을 보아왔던 관객들은 이미 나타샤의 마지막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그가 가진 과거를 궁금해하게 되는데 그의 과거까지 다 보고 난 관객들은 나타샤의 마지막 모습이 좀 더 뭉클하게 다가올 것이다. 나타샤에겐 과거의 가족도 유사 가족이고 어벤저스 멤버들도 일종의 가족이다. 나타샤는 과거의 가족을 다시 만나며 나타샤는 그 유사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언가 답을 찾게 된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의미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현대인만큼 이 영화에서 나타샤의 마지막 선택은 그가 결국 그 유사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로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편, 그것이 바로 현재의 사회 흐름이라는 것을 영화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다페스트 장갑차 추격신이나 높은 고공에서 벌어지는 액션 장면은 마블 영화답게 박진감 넘치게 구성되어 있다. 태스크 마스터와 나타샤가 벌이는 격투 액션과 옐레나가 보여주는 격투 액션은 사실감 있게 담겨있어 긴장감을 높인다. 그래서 영화 <본 시리즈>나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아쉬운 점은 나타샤가 잘하는 타격 액션이 많이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태스크 마스터의 특성과 나타샤나 직접 격투하는 장면의 비중이 적고, 그 외에 나타샤가 보여주는 격투 액션이 많이 없어 아쉽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액션 장면은 극장에서 볼만한 큰 스케일을 보여준다.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의 멋진 퇴장
마지막으로 나타샤를 연기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그 모습 자체가 블랙 위도우가 되었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한 캐릭터로 활약해 온 그의 연기는 향후의 활약이 볼 수 없다는 점을 더욱 아쉽게 만든다. 그가 고공에서 착지할 때 보여주는 포즈는 옐레나에게 항상 놀림당하지만 블랙 위도우의 대표적인 액션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그 포즈를 그대로 따라 하는 옐레나의 모습은 그가 언니 나타샤를 이어 블랙 위도우가 될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직 누가 나타샤를 이어 블랙위도우를 할지 확정된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누가 해당 역할을 이어갈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아찔한 십대>로 2004년 데뷔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로어>, <베를린 신드롬> 같은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이번 <블랙 위도우>를 연출하면서 마블 영화 중 최초로 단독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나타샤와 관련된 유사 가족들로부터 진심을 끌어내는 감정적인 연출도 잘 들어가 있으며, 액션 연출도 박진감 넘치게 들어가 있어 향후 다른 마블 영화의 연출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나타샤의 마지막 모습을 아주 멋지게 마무리했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블랙 위도우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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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이 꼰대가 필요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목을 매달 밧줄을 산 뒤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오던 전기도 끊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오토’(톰 행크스). 정장을 차려입고 죽을 준비를 다 마친 그. 그러나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드디어 죽을 수 있겠다 싶은 타이밍마다 이웃들이 그를 방해하기 때문. 새로 이사 온 '마리솔'(마리아나 트레비노)과 '토미'(마누엘 가르시아룰포) 부부는 주차도 제대로 못해서 오토의 속을 뒤집어 놓고, 아무 때나 먹을 걸 가져다준 뒤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오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소냐'(레이첼 켈러)'의 묘비 앞에 앉아 이웃들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를 못한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 원치 않았던 이웃들의 관심 덕분에 그의 삶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신작 <오토라는 남자>는 스웨덴 소설 '오베라는 남자'를 영상화한 코미디 작품으로, 인생 최대의 트라우마에 빠진 한 남자가 어떻게 삶의 의지를 되찾는지를 그려낸 착실한 드라마다. 동시에 건실한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떠나보낸 가족을 향한 오토의 사랑과 회한이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서 잔잔한 감동으로 마무리되는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준다. 이 정공법은 꽤 성공적이다. 러닝타임 내내 관객석에서는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웃음과 울음이 터져 나온다.
그런데 <오토라는 남자>를 그저 준수한 코미디이자 가족 영화로만 남겨 두자니 아쉬움이 남는다. 주인공 오토를 연기한 배우 톰 행크스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자 '미국의 얼굴'이라 불린다. 그의 연기력이나 흥행력을 고려하면 미국의 송강호라고 해도 될 터. 그런 그가 소품이라고 불릴만한 영화에 출연했으니,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체 톰 행크스가 왜 이 영화에 출연했을까?" 물론 이유는 본인만 알겠지만 영화 속에도 짐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오토라는 남자>는 단순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특히 민주주의를 누리는 모두가 곱씹어 봐야 할 이야기에 가깝다.
웃픈 꼰대, 오토
<오토라는 남자>는 코미디로 시작한다. 오토의 괴팍함이 주재료다. 그의 하루 패턴을 훑으면서 그가 얼마나 괴팍한지 보여준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오토. 눈이 오는 날이면 자기 집 앞 인도까지 눈을 치운다. 눈이 오지 않으면 아침을 먹고 바로 동네 순찰에 나선다. 주차장에 주차증이 없는 차가 있는지, 도로와 주차장을 분리하는 문은 잘 잠겨 있는지, 쓰레기장 분리수거는 잘 되어 있는지, 자전거 보관대가 아닌 곳에 자전거를 두고 가지는 않았는지, 신문이나 광고가 동네 미관을 해친 건 아닌지. 일일이 확인한다. 오토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그 누구도 독설을 피할 수 없다. 새로 이사 온 이웃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친구도, 갈 곳 없는 길고양이도.
하지만 그가 괴벽해진 이유를 알고 나면,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웃기지 않다. 그의 괴팍함은 트라우마를 숨기려는 방어 기제다. 임신한 소냐와 나이아가라 폭포 여행을 떠났던 오토.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오토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는 다행히도 무사했지만, 불행하게도 소냐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유산했고, 그녀의 하반신도 마비됐다. 오토는 뒤늦게 버스 회사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버스를 운행해서 사고가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 이는 마음속 깊은 흉터가 됐다.
그 후로도 오토는 자꾸 다친다. 장애인이 된 아내를 무시하고,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는 점차 마음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예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졌다. 원칙을 어기는 사람을 싫어하고, 비난한다. 마트 직원이 로프 길이와 가격을 잘못 계산하면 크게 화내고, 회사에서 부사수가 상사로 임명되자 곧바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이웃들이 혹시나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아닌지 감시하면서 매일 순찰을 돈다. 그렇기에 오토는 더 이상 우습지 않다. 웃프다.
오토의 트라우마 극복기
동시에 <오토라는 남자>는 눈물을 자아내는 드라마다. 오토의 병든 내면을 가감 없이 펼쳐 보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그가 치유되는 과정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소냐와 사별한 뒤, 트라우마가 더 심해지자 오토는 결국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덤에 가서 소냐와 대화를 나눈다. 조만간 당신 옆으로 가겠다고. 당신과 재회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오토는 죽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 천장에 목을 매달기도 하고, 차 안에 가스를 채워서 질식사도 시도한다. 전철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에 총을 쏘는 것도 선택지에 있다. 그는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점차 죽어가면서 아내와 행복했던 과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의 첫 만남,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 졸업식과 프러포즈, 신혼 생활까지. 오토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치유다.
이상한 일이 생긴다.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마다 오토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다. 하루는 앞집에 이사 온 마리솔이 창문을 고치겠다며 사다리를 빌려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으나 사이가 멀어진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아무 때나 찾아오는 마리솔은 대뜸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어느 날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소냐의 제자, 말콤이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부탁한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났다면서. 편견 없이 자기를 대해줬던 선생님이 생각나서 왔다고. 새 가족도 생긴다. 눈 내린 날에 얼어 죽기 직전이었던 고양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오토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오토는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연다. 자살하지 않아도 이승에서 죽은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깨닫는다. 이웃에게 베풀고, 그들과 삶을 공유하면서 소냐의 뜻을 이어가면 된다. 소냐가 말콤에게 그랬고, 마리솔이 자기에게 그랬듯이. 타인을 향한 관심과 이웃과의 협력 덕분에 그는 마침내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죽음을 포기하고 아내의 유품도 정리한다. 그렇게 오토는 자기 삶을 살아간다. 덕분에 그의 장례식에서 동네 이웃들은 슬퍼하기보다는 기쁘게 웃을 수 있다. 자살을 꿈꾸던 그가 편안히 죽음을 마주한 건 그가 트라우마를 완전히 떨쳐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토 같은 꼰대가 필요한 이유
여기까지만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한 노년 남성이 평화를 되찾는 사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오토의 꼰대스러움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영화에 숨어 있는 사회적 함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루벤의 집 라디에이터를 고치면서 오토는 이렇게 한탄한다.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더 이상 사람들이 이웃들의 일에, 공동체를 관리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각자 살기 바쁘다고. 실제로 오토가 순찰할 때 다른 이웃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웬 오지랖이냐는 식이다. 파편화된 시민의 모습은 다른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자살하기 위해 전철역을 찾은 오토. 그가 선로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다른 남성이 먼저 선로에 떨어져 버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오토. 그러나 그는 주위 승객들의 반응에 더 놀란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만 찍을 뿐 아무도 도우려 나서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는 공중의 쇠퇴를 경계했다. 그는 기술의 변화로 인해 다른 산업 구조가 등장하고, 사회가 거대해지고 조직화되면 사람들이 점점 비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작중 듀이가 전망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례로 오토가 퇴사할 때, 같은 부서 직원 한 명은 축하 케이크 위에 그려진 오토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반으로 잘라버린다. 그 결과 민주주의에 필요한 가치나 조건, 그리고 공동체는 훼손된다. 개인은 많지만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오토 말고는 아무도 거리에 신경 쓰지 않고, 공동체가 합의한 규칙을 중시하지 않듯이. 중요한 의사결정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넘어간다. 건설 회사가 오토와 이웃들의 집을 불법적으로 매수하려 해도 그들은 권력자를 막을 힘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토의 꼰대스러움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거대해진 사회에 대응해 '거대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듀이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한다. 듀이는 이웃 공동체, 지역 공동체처럼 신뢰를 바탕으로 모인 이들끼리 서로 자유롭고 직접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토와 이웃들은 솔직하게 소통하고 협력해서 루벤의 집을 지켜냈다. 그가 요양원에 들어가게 될 위기도 타개할 수 있었다. 이웃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가지고 있었던 오토의 '순찰'에 힘입은 결과였다. 비록 예민하게 원칙을 따지고 방식이 거칠기는 했지만. 뒤집어 보면 <오토라는 남자>는 상이한 정체성 간에 대화 대신 갈등만 가득한 현재 미국 사회를 겨냥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는 원작 소설과 달리 이웃 주민의 인종이나 성 정체성이 수정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의 얼굴'인 톰 행크스가 오토 역을 맡은 건 꽤 의미심장하다.
물론 <오토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내용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452 페이지에 달하는 원작의 내용 중 잘려나간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책을 스웨덴에서 먼저 영화화한 <오베라는 남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스웨덴 버전은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분장상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호평받은 수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누구와 함께 극장을 찾든 간에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나면 옆 사람에게 감사를 전할 일이 생길 거라는 사실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이 영화의 진가가 담겨 있다. 엔딩 크레디트는 오토와 마리솔의 아이들이 등장하는 서툰 그림으로 가득하다. 또 홀로 사는 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을 하라는 문구가 같이 등장한다. 그러니 영화관을 나설 때 마음이 따뜻해지지 따뜻해지지 않기는 어렵다.
A(Acceptable, 무난함)
오토의 순찰이 계속될 때,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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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년에게 돌 던질 자 누구인가.
이 글은 2023.05.03일 개봉 예정인 영화 [클로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레오(에덴 담브린)와 레미(구스타브 드와엘)의 인생은 서로의 모습으로 가득 찬 시간들을 벽돌 삼아 쌓아 올린 성벽과도 같았다.
둘만이 할 수 있는 가상의 전쟁놀이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적을 피해 달아나고 숨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꽃이 가득한 들판을 숨이 헐떡일 때까지 달음박질치기도 했다.
견고한 성벽 안의 두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은 내달리고 온 날의 밤이면 잠 못 이룬 채 속살거리며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알 수 없는 불안을 가셔야만 했다.
그런 레미를 위해 레오는 노래를 불렀다.
무리에서 떨어진 오리와 도마뱀의 노래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두 생명체이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는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듯한 레오의 노래를 들으며. 레미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마치 두 소년의 모습도 영원히 그러하기를 바라는 꿈을 꾸면서.
하지만 누가 와서 두들겨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둘 만의 성은. 또래 친구들의 눈길 몇 번에 주저 없이 금 가기 시작했다. 성벽 밖에 선 채로 레오와 레미의 보호막을 와르르 무너지게 한 친구들의 얼굴이 무너진 성 안에서 보이던 순간. 레미는 늘 곁에 있던 레오에게 손을 뻗었지만. 레오는 성큼성큼 걸어가 친구들의 손을 잡고 멀리 떠나고 있었다.
레미는 깨달았다.
오리와 도마뱀은 절대 함께할 수 없음을.
도마뱀;살기 위해 꼬리를 잘라야 하는.
레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도마뱀의 그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이 없어, 시시각각 변하는 한 아이의 감정을 얼굴 표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감정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그것이 혼자 오케스트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이기 때문에 오는 두려움이건. 레오를 향한 다각화된 마음이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마음들은 모조리 진심이었고, 레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데 있어 감정 앞에 솔직한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레오는 어쩐 일인지 자신의 손을 놓고 자꾸 저 멀리 떠나가려는 듯했다. 레오는 더 이상 가상의 적군들을 볼 수 없었다. 아니. 보려는 의지를 상실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레오가 성벽 밖으로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긴 그 무렵부터, 레미는 함께 달리는 레오의 옆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축구, 다음엔 아이스하키. 그리고 영원히.
레오는 효과적으로 레미를 멀리했고. 그렇게 레미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혼자 남게 되었다.
처음엔 배가 아픈 것만 같았다. 레오와 멀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버지에게도 배가 아프다고 말했지만. 기어코 그 말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을 때. 레미는 배가 아닌 가슴이 아픈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고통의 근원지는 몸과 가까우면서도 멀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지만 존재했으며. 실존하지 않길 바랐지만 생생하게 존재하는 생전 처음 느낀 이 고통에 레미가 과연 어떤 이름을 붙이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도마뱀은 살기 위해 꼬리를 자른다고 했다.
하지만 레미에게 레오는 꼬리 정도가 아니었고. 새로운 꼬리도 레미에게는 필요 없었다. 레오는 레미에게 모든 것이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널뛰게 하는 장본인이었다.
오리의 곁을 떠나기로 한 도마뱀은 주저 없이, 레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길을 선택했다. 영원히라는 단어의 무거움을 생각했을 때. 레미는 다시 한번 배가 아닌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어쩌면 아빠에게 둘러댈 때는 배와 가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을지도 몰랐지만. 그때만큼은 명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오리;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발짓을 해야만 하는.
성 외곽이 무너지고,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레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친구들과 몇 걸음이나 멀어져 있는지를 계산할 수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이미, 그것도 꽤나 멀어 보였지만.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순간. 레오는 레미의 손을 뿌리쳤다.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레미의 슬프고 상처받은 모습 정도는 기꺼이 나중에 위로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집단 속에서 효과적으로 섞이고 난 뒤에는.
레오의 모습은 겉으로 볼 때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완벽히 무리에 섞여 있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오의 갈퀴 달린 발은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물을 움켜쥐며 무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레미와 처음 다툰 그날도. 점점 더 자신의 마음속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기를. 아니 숨기기 편해지는 레미를 향한 마음을 보면서. 레오는 괜히 레미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레오는 나중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무리에 속하고 나면. 그때는 레미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허우적거리는 필사적인 발짓 자체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도 애써 외면한 채. 그마저도 나중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마음으로. 레오는 얼굴에서 모든 감정을 지워버리고는 열심히 갈퀴질을 했다.
그러나 레오에게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못했다.
변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속죄의 순간은 그렇게 영원히 레오의 인생에서 레미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문득 자신이 레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왜 하필 두 도마뱀도, 두 오리도 아닌, 도마뱀과 오리였을까.
왜 같은 종에 속하는 두 마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레오는 이미 레미와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결국 레미에게 상처를 입혔음을 알게 되자. 그제야 레오의 눈에서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레미는 배가 아프다고 했었다.
레오도 지금 만큼은 배가 아프다고 둘러대고 싶었겠지만.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레미가 그랬던 것처럼 아픈 곳은 배가 아니라 마음이었음을.
시선;그리고 동일화
영화 속의 소년들은 시종일관 달린다.
때론 그 수단이 자전거이기도 하고, 자동차일 때도 있으며 달리기일 때도 있다. 레오와 레미는 그 어떤 배경을 두고서도 앞으로만 달릴 뿐. 절대 시선을 뒤로 주지 않는다. 허투루 낭비되어 공허함을 좇는 시선이 없다.
특히 레오의 시선은 레미가 죽음을 맞이한 이후로 정면보다는 측면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아무런 표정, 감정도 없는 레오의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길 때마다 과연 레오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문득 레오를 바라보는 이 카메라의 앵글이 레미의 시선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미가 평생을 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생 후반부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레오의 옆얼굴. 레미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잊히지 않고 존재감이 가득한 이유도 아마 이런 앵글 처리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가장 큰 모티브가 되는 도마뱀과 오리는 처음엔 너무도 당연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레오가 눈물을 터뜨리는 말미에 가면 그 경계마저도 희미해진다. 무리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했던 레미의 모습이 오리 같기도 하고. 무리에 섞이기 위해서라면 꼬리정도는 뭐.라는 생각으로 레미를 밀어내는 레오의 모습은 도마뱀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달랐으며. 이로 말미암아 절대 넘을 수 없던 차이가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로의 처지가 완벽히 달랐음을 레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장면이 주는 울림은 매우 크다. 레미와 웃으며 상상 속의 적군들에게서 도망쳤던 꽃이 만개한 들판에서. 시종일관 앞만 보던 레오가 단 한 번 뒤돌아 보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라는 꼬리를 잘라내기 싫어 스스로를 내다 버리는 선택을 한 레미가 문득 생각난 듯. 레오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이 기꺼이 잘라낸 꼬리의 흔적을 슬며시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었던. 혹은 계속 회피해 왔던 자신의 아픔과 레미의 아픔을 함께 이해한다는 듯이.
그리고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뒤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카메라의 앵글로 대변되는 레미의 시선과 눈을 마주치며 결국 레미에게 온전한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면이자 뼈아픈 성장의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한 사람이 생을 마감했음을 알리는 순간을 이보다 고급스럽게 표현한 영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화장실 문을 보여준 채 머무는 단 몇 초의 시간은 그 어떤 영화에서 묘사된 것 보다도 정확한 정보와 복잡한 감정을 한 아름 던져주었다.
느린 전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런 섬세함을 단 한숨도 놓치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이 마음에 와닿을 때마다 수백만 개의 파편으로 흩어져 그에 상응하는 숫자만큼의 상처를 영화 내내 마음속에 남겼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경험 속에서도 화면에서 눈을 감히 떼어낼 수 없을 만큼, 영화는 아름답고도 슬펐다.
과연 레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레오도 마음의 허물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자라났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씨네랩으로 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의 TMI]
1. 독일어 공부는 잘하고 있습니다.
2. 공부하느라+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와서 다 내려놓고 잘 쉬었습니다.
3. 매우 많이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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