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11-05 23:46:42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꽃다발의 의미
-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 이어폰과 함께 듣는 음악의 의미
- 엔딩 결말 해석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We Made a Flower Bouquet, 2021)
시듦을 인정하며 완성되는 사랑
개봉일 : 2021.07.14.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로맨스,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도이 노부히로
출연 : 아리무라 카스미, 스다 마사키, 키요하라 카야, 호소다 카나타, 오다기리 죠, 토다 케이코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각자 다른 꽃을 꺾어 이리저리 배치하고 꾸미면 예쁜 꽃다발이 하나 완성된다. 색, 질감, 가지의 길이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다발 안 꽃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것들이 원래부터 하나의 덩어리였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이런 꽃다발처럼 보이는 사랑을 한 청춘 남녀의 이야기다.
무기와 키누는 막차가 임박한 지하철역 앞에서 처음 만난다. 서로 부딪히며 삐끗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막차를 놓치고, 어쩌다 보니 개찰구 앞에 있던 직장인 두 남녀와 함께 바에서 첫차를 기다리게 된다. 무기는 딱히 공감할 수 없는 직장인 남녀의 대화를 불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키누는 무기의 말과 표정에 흥미를 느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각자의 길로 찢어지려던 찰나. 공통점 하나로 말문을 트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운명임을 직감한다.
무기와 키누가 생각하기에 둘은 서로 공통점이 너무도 많았다. 처음 만난 날 같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같은 작가를 좋아하고 같은 책을 읽었고, 같은 뮤지션을 좋아했으며 같은 날의 공연 표를 사놓고 가지 못한 것까지 똑같았다. 두 사람은 첫차가 올 때까지 쉼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고 다음을 약속한다. 그리고 상대의 사소한 행동에 설렘과 특별함을 느끼며 연인이 되고 나의 일부를 꺾어내 ‘똑닮은 우리’라는 하나의 꽃다발을 만들어간다.
무기와 키누는 이 꽃다발이 조화롭고 완벽하다고, 이대로 평생 가슴에 품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뿌리를 내리며 자라나는 화분 속 꽃과는 다르게 흙도 뿌리도 없는 꽃다발 속에 자리 잡은 꽃들은 각자의 속도로 시들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시들어가는 우리를 느끼며 이별을 생각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다발,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말을 이렇게 오목조목 곱상하게 펼쳐내는 영화는 생각보다 흔치 않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누군가의 이상행동, 문제를 만드는 제3자, 슬픔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잉 감정 등 호불호 포인트가 될만한 것들을 싹 배제한 채 최대한 담백하게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그린다.
시간의 흐름에 올라탄 연인
달라진 신발과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장
아르바이트와 학교 성적 유지 정도의 비교적 무겁지 않은 책임만 주어지는 나이에 만난 두 사람은 시간이라는 불안정한 흐름에 함께 올라탄다. 이들은 키누가 학교를 졸업할 때쯤, 부모님의 압박과 취업 문제, 작은 경제적인 문제를 맞이하지만 그것 또한 나름의 로맨스로 승화한다.
취업을 못해 집안에서 눈엣가시가 된다면 집을 나와 함께 살면 되고, 집이 역에서 멀면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행복한 데이트 코스로 만들면 된다는 식으로.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는 점점 깊어지고 무기와 키누는 연인을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잠시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몰두하게 된다.
취업만 성공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더 멀리 벌어진다. 두 사람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기는 장면들이 점점 줄어들고 키누는 거실 창문 너머에, 무기는 방 창문 너머에 담기는 장면들이 많아진다. 말하지 않아도 늘 함께 신었던 흰색 스니커즈는 문 안을 바라보다 문 바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끝내 사라져버린다. 흰색 스니커즈가 있었던 자리엔 다른 모양새의 구두 두 켤레가 어색하게 자리하고 있다.
무기는 ‘돈이 없으면 키누에게 밤일을 시켜보라’는 선배의 말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취업을 준비했지만 막상 취업을 하고 나선 키누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키누에게 상처를 줬던 딱딱한 면접관을 욕하던 그는 어느덧 그 면접관처럼 이마무라 나츠코의 ‘소풍’을 읽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키누에게 상처를 준다. 일에 휩쓸리던 무기는 학생 때처럼 영화, 책, 게임을 사랑하는 키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몇 번의 갈등이 생긴다. 이때 각자의 자리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엔 한때 즐거운 마음으로 공유했던 거대한 책장이 버티고 있다.
키누는 새로 나온 만화책이나 함께 보기로 했던 연극 등 예전에 무기가 좋아했던 것들을 주제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려 노력하지만 무기는 키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일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키누는 이런 무기 앞에 앉아 빨래를 개고 옷장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빨래와 함께 섭섭한 마음도 함께 접어 넣는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이 완성되는 과정
하나의 이어폰을 나눠 쓰던 두 사람
오프닝신에 나온 무기와 키누는 “이어폰 하나를 나눠 끼고 듣는 건 둘이 다른 음악을 듣는 일”이라며 분개한다. 음악은 최소 스테레오 채널(2채널)로 구성되어 있는 콘텐츠라 왼쪽, 오른쪽에서 나오는 각자 다른 소리를 같이 들을 때만 그 음악을 제대로 들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모노 채널이 아니다. 연인이라 하여 사랑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할 순 없다. 다른 채널에 있는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노력한 것만 이야기한다면 그 사랑은 온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처음 고백하던 날,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을 끼고 레스토랑 점원 포린의 음악을 듣는다. 어렸던 무기와 키누는 한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고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똑같은 꿈을 꾸며 노력한다.
무기는 키누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회사에 취업한다. 키누도 무기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취업을 하고 무기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취미 생활을 공유하려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이 어떤 사랑을 원하고 있는지, 그가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진 헤아리지 못한다.
무기와 키누는 첫 만남부터 수많은 공통점을 공유했기에 자연히 연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기보단 무기는 키누가, 키누는 무기가 취업, 지인의 죽음, 시간이라는 변화 앞에서 자신과 같은 태도를 취하길, 같은 결말을 바라길 기대한다.
하지만 무기와 키누는 많은 부분이 닮은 타인일 뿐,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무기는 키누가 열광했던 미라전을 무서워했다. 미라전을 보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눌 때, 키누는 전시회 도록을 펼치며 흥분한 듯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무기는 애매한 표정으로 키누의 말을 듣다가 점원이 오자마자 재빠르게 미라로 가득한 도록을 덮어버린다. 키누는 무기의 가스탱크 영상을 보다가 깜빡 잠들어버린다. 무기는 키누가 가장 재밌는 장면에서 1시간 동안 잠들었다며 아쉬워한다. 두 사람은 이러한 사소한 다름을 알아채지 못하고 나와 다른 연인에 오래도록 실망하고 슬퍼한다.
무기와 키누는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이별을 결정한다. 그리고 ‘똑닮은 우리’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라전과 가스탱크에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지금껏 듣지 못했던 다른 채널에 담긴 소리를 들으며 ‘무기와 키누의 사랑’이라는 꿈의 마지막 소절을 완성한다.
시간이 지나며 무기와 키누의 꽃다발은 싱그러움을 잃어갔지만 그 과정은 전혀 추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르고 시들어갔다기보단 완성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말이다. 두 사람은 아름답게 말라붙은 우리라는 꽃다발과 함께 펼쳤던 베란다 커튼을 뜯어 정리하고 각자의 길로 향한다.
이별 후 두 사람은 각자의 이어폰을 통해 음악을 듣고 다른 이와 각자의 연애를 이어간다. 현재의 연인은 음악을 듣는 방법부터 나와는 다른, 옛 연인처럼 나와 똑 닮았다고 말할 순 없는 사람이지만 무기와 키누는 그들을 통해 조금 더 성숙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찾는다.
사랑한다고 꼭 하나의 이어폰을 갈라 같은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연인과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목표점을 가진 사랑을 하더라도 나의 것을 그에게 들려주고 그의 것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 그것 또한 사랑임을. 무기와 키노는 어린 사랑의 끝에서 그것을 깨닫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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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목적인 믿음에 던지는 물음표 - 누구를 향한 믿음인가?
영화 <계시록>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실종 사건 담당 형사가 각자의 믿음을 쫓으며 벌어지는 이야기
1. 종교와 욕망, 누구를 위한 믿음인가?
눈에 보이는 것, 즉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들은 '증명'이 가능하다. 무엇을 샀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에 대한 증명. 그러나 '믿음'은, '종교적 믿음'은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내 눈 앞에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고, 신자들은 그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절대자인 신이 신자에게 내리는 '계시'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를 다루는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종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신은 존재하는가?'로 모인다. <계시록>의 민찬 또한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고, 신과 신자들을 위해 찬송가를 부르고, '계시'를 받기를 기다린다. 신을 믿는 자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제가 잘 되게 해 주세요, 제 아들이 취업을 잘하게 해 주세요, 저 사람보다 제가 성공하게 해 주세요. 결국 간절히 바라는 기도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성취와 욕망 충족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계시록>은 이 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지방의 작은 교회 목사를 맡고 있는 민찬은 동네에 대형 교회가 들어선단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교회 목사가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기도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한다는 것은, 그리고 어떤 대상에게 기대어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는 신이라는 존재가 위안이 된다면, 그리고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면 설령 신이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으로써 기능을 다한 것이므로.
그러나 <계시록>의 민찬은 자신의 욕망을, 그리고 충동을 '신의 계시'라고 스스로 세뇌하고 위안하는 인물이다. 이는 교회에 찾아왔던 낯선 남자, 양래가 성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부터 얽히는 사건들 사이에서 드러난다. 하원하는 딸을 데리고 오는 걸 깜빡한 사이, 웬 낯선 남자가 딸을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민찬은 자연스레 양래를 의심하고 만다. 양래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양래에게 '신은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건넨 것과는 달리, 일이 일어나자마자 자연스레 '그럴 것 같은' 인물로 양래를 떠올린 것이다.
딸을 찾기 위해 양래의 집 앞으로 간 민찬은 우연히 양래의 수상쩍은 행동을 보게 되고, 양래를 쫓아 산 중턱까지 갔다 양래와 몸싸움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밀려 굴러 떨어진 양래는 정신을 잃고 만다. 돌에 머리를 부딪힌 채 쓰러져 있는 양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민찬에게 걸려오는 전화. 딸을 찾았다는 전화다. 양래는 딸의 실종과는 관련이 없었고, 이미 양래는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다. 이제, 민찬은 어떻게 해야 할까.
2. 구도의 전복과 새로운 역할 부여, '신의 대리인'과 '범죄자' 사이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 민찬만이 엇나간 욕망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래는 민찬의 딸을 유괴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그날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했고, 민찬이 있는 교회에 다니던 여자아이, 아영을 유괴했다. 이 때문에 민찬이 범죄를 저지른 대상은 '완전무결한' 자도, '과거를 청산하고 지금은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도 아닌 채 서 있다. 경찰들은 양래에게 범죄를 저지른 대상을 쫓는 게 아닌, 전자발찌를 끊고 도주한 양래를 쫓는다.
아영을 찾기 위해서는 양래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민찬은 경찰들이 양래를 찾도록 가만히 둘 수 없다. 양래를 찾게 되는 순간, 양래의 범죄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될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순간 민찬의 내면에서 민찬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신의 계시를 받고 '범죄자를 단죄하는' 일을 하게 된, 신의 대리인이 된다. 그 순간부터 일을 수습하기 위해 민찬이 벌이는 일들은 꽤나 흥미롭다. 민찬이 불안함을 애써 지우기 위해 택한 방식은 '계시'다.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도, 다시 살아난 양래를 발견하게 되어 2차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도, 모든 것들이 신이 계시를 준 것이라는 뜻이다. 경찰 대신, 그리고 피해자 대신 신의 계시를 받은 자신이 양래를 단죄할 것이며, 그 단죄의 방식으로 양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
범죄를 숨기느라 바쁜 민찬에게, SKY평안교회 담임목사인 국환은 동네에 들어설 교회의 목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한다. 원래 내정자였던 국환의 아들이 신자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 공론화가 되면서, 새로운 담당 목사가 필요해진 것. 신을 향해 욕망을 내비치고,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어온 민찬에게 이는 확신을 주는 소식이 된다. 자신이 옳게 행동하고 있다는, 신이 자신에게 계시를 준 것이 맞다는 확신.
다시 발견한 양래가 '아영이 아직 살아 있다'며 자신을 죽이면 아영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한 순간부터 민찬의 욕망은 확실히 엇나간 모습을 보인다. 되레 양래가 '경찰을 부르라'고 말하며 민찬을 '미쳤다'고 비난하고, 민찬은 양래를 납치한 채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의 순간에 서 있다. 민찬과 양래의 피해자-범죄자 구도는 이때 완전히 전복된다. 사실상 민찬은 양래에 의해 피해를 본 게 없음에도(딸이 유괴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으므로), 민찬의 오해에 의해 시작된, 뒤바뀐 범죄자-피해자 구도가 이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모두가 양래를 범죄자라고 가리키며 쫓고 있을 때, 민찬은 그 범죄자의 숨을 끊기 위해 쫓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서. 피해자를 생각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면서, '신의 계시'라는, 범죄자를 단죄하는 것이라는 자기위안을 품은 채로.
3. 새로운 히어로의 등장, 우연성 짙은 사건의 마무리
계시록은 그 욕망 아래 벌어지는 사건들, 그리고 범죄자-피해자 구도의 전복을 눈여겨 보았을 때 흥미로운 작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여성 인물들의 활용은 아쉽게 느껴진다. 민찬의 아내는 오직 '신을 믿지만 바람을 피운', 그래서 민찬이 속죄하도록 만드는 인물로만 소비된다. 연희는 과거 같은 성범죄자에게 피해를 입은 여동생의 환영을 보는 경찰로 등장하는데, 과거 얽혀 있는 서사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침착하며, 경력이나 활동 비중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우연히' 발견하는 것들이 많다.
민찬의 수상쩍은 낌새를 파악하는 것도 우연히 민찬의 흙 묻은 신발을 봐서, 양래를 찾게 되는 것도 혹시나 싶어 찾아간 교회 앞에서 우연히 민찬의 타이어에 묻은 오디를 발견해서 이루어진다. 우연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민찬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방식은 '계시'를 받은 것이 민찬이 아니라 연희라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경찰이 된 인물이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같은 입장에 놓여 있는 어린 피해자를 구하게 되는 구도까지도 그 느낌이 해소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인물 각자가 가진 욕망의 정도로만 비교했을 때 엇나간 욕망을 더욱 드러낼 수 있는 건 민찬이 아니라 연희다. 새 교회의 목사가 되고 싶다는,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찬의 욕망에 비해 연희의 욕망은 긴 시간 끌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동생의 환영을 보며 계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리던 연희가, 양래가 잡힌 뒤 여동생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양래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을지를 알아보는 모습은 침착하다 못해 건조하게까지 느껴진다. 여동생과 관련된 서사는 '피해자 간의 연대'를 위해서만 쓰이고, 이외의 모든 순간에서 연희는 우연히 단서를 발견하는 경찰 히어로에 가깝게 등장한다는 점은 아쉽다.
4.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다만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에서 이렇게 신과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작품들은 그 작품들이 드러내는 인물들의 욕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느끼도록 만든다. 민찬의 욕망을 쫓다 보면 민찬의 행동이 억지스럽다고 느낄 수 없고, 연희의 욕망을 쫓다 보면 연희가 과하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이는 모두 그들 각자에게 부여된 서사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욕망 아래 발생한 사건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갈무리지을 것인지에 따라 그 욕망이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가 달라질 뿐이다.
한 대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절대자인 신으로부터 온 답신, '계시'. 누구도 해석해줄 수 없고, 누구도 실체로써 존재하는 증거물을 내보일 수 없다. 그래서 이 계시와 답신은 더더욱 그 믿음과 해석에 의해 다르게 읽힌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는 신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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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쇼맨? 위대한 베러맨!
!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감독) 마이클 그레이시
출연) 로비 윌리엄스, 조노 데이비스, 스티브 펨버튼, 앨리슨 스테드먼
영국을 휩쓸었던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로비 윌리엄스’가 영화로 돌아왔다. 그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베러맨(BETTER MAN)>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위대한 쇼맨>의 감독 ‘마이클 그레이시’가 메가폰을 잡았으며, 제 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시각효과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을 정도로 작품성 또한 인정받은 작품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을 통해 ‘프레디 머큐리’, <컴플리트 언노운>을 통해 ‘밥 딜런’을 알게 되었다면 <베러맨>은 ‘로비 윌리엄스’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침팬지가 주인공이라고?
로비 윌리엄스가 주인공인 영화로 알고 온 관객들은 ‘내가 관을 잘못 들어왔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주인공이 침팬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연출이라고 한다. 로비 윌리엄스는 스스로를 원숭이라고 지칭해왔으며, 그것을 영화 속에 녹여내는 대담한 시도를 한 것이다. 따라서 처음 침팬지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혹성탈출>이 떠올르는 비주얼에 당황할 수 있지만, 극이 점차 진행될수록 그것은 하나의 캐릭터로 자리잡아 그의 개성을 드러내며 극의 몰입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나면 왜 스스로를 침팬지라고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른다.
끝내주는 뮤지컬 씬
감독의 전작 <위대한 쇼맨>을 본 관객들이라면, 영화 속 음악과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감이 높을 수밖에 없겠다. <베러맨>은 관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했다. 로비 윌리엄스의 음악과 마이클 그레이시의 연출력이 만나 끝내주는 뮤지컬 씬을 선보인다. 특히 공간감을 굉장히 잘 살렸는데,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카메라 워킹은 마치 영화 속 현장에 놓이게 된 것만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또 ‘시각효과’에 있어 인정받은 영화인만큼 영화 속 때깔과 특수효과들이 눈에 띈다. 마치 영화 자체가 하나의 무대를 보는듯하다. 그만큼 큰 화면으로, 빵빵한 소리와 함께 관람한다면 영화 속에 즐겁게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삶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비 윌리엄스의 자전적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성장 과정, 가족, 꿈, 사랑, 자기혐오 등 보편적이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십 만명 앞에서 노래하는 예술가도 결국 무대를 내려가면 하나의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타’를 더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더 나은 사람, ‘베러맨’이 되기를 바랬던 그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영화를 통해 확인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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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SYNOPSIS.
‘예분’은 손녀 ‘수정’을 사고로 잃은 뒤 삶이 1년 전 그날에 멈춰버렸다.
손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매일 같이 강가에 나가는 ‘예분’ 앞에 손녀의 절친 ‘지윤’이 나타난다.
두 사람에겐 들어야 할 진실이 있고, 삼켜야 할 비밀이 있는데…
진실과 비밀 사이 깊은 슬픔이 일렁인다.
#각자의 물결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이 스쳐간 자리는 그 이전과 영영 같을 수 없다. 설령 떠나간 이가 나에게 아주 작은 조각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아주 작은 구멍이 난 유리창이어도, 깨진 곳 없는 유리창과는 같을 수 없다. 그 작은 구멍 사이로 바람이 숭숭 불어와, 누군가의 빈 자리를 절감하게 되는 날들이 있다. 아주 작은 순간일지언정.
하물며 이 이야기 속 예분과 지윤에게는. 손녀를 잃은 할머니 예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은 중학생 지윤. 이들은 다른 부위에 난 같은 상처를 안고, 매일 다른 물로 뛰어든다. 예분은 손녀를 삼킨 강에 금속 탐지기를 들고 나가 손녀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것을 매일 찾고, 지윤은 친구와 함께 있던 수영장에 매일 들어간다. 하나의 상실이 남긴 각자의 상처, 각자의 물결 속에서 이들은 매일 허우적거리고 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이들이 매일 뛰어드는 물 속의 축축함이 관객석까지 넘실넘실 전해진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문장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중간중간 교차하는 과거의 장면들을 보면서, 예분과 지윤의 시간을 순서대로 톺아볼수록 더욱 축축해진다. 그들의 과거와 그들의 현재, 그 사이 이들에게 있었을 무수한 감정들이 겹겹이 전해져서다.
#중첩되는 소리 속에서
이렇게 감정을 겹겹이 전달하는 데에는 소리가 큰 몫을 한다. 수정이 사고를 겪은 당일부터,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과 중첩되고 혼재되기 시작한다. 거센 빗소리, 경찰차 사이렌 소리, 수정을 잃은 엄마의 울음 소리...들이 어지러이 섞여들면서. 아주 거대한 슬픔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을 쉽게 삼켜 슬픔으로 중첩시키고,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예분의 금속 탐지기 소리처럼, 때로는 진실을 찾으려 날카롭게 세운 소리가 반대로 귀를 막기도 한다.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는, 할 만큼 했다는 말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헤매는 예분처럼.
사실 예분에게, 지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것은 진실을 드러내고 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깊고 진득한 자책을 덜어낼 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이를 잃어버린 빈 자리를 돌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인간에게는 꼭 필요하니까. 그토록 숱하게 죽은 몸을 어루만지고, 누군가의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살았던 예분이지만 정작 손녀의 죽음과 거기 어린 자기 감정들을 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토록 함께 뛰어들던 물 속, 그 익숙한 감각 안에서 친구를 잃은, 이어지는 상실 속에서 도저히 여유가 없는 지윤 또한 마찬가지다.
#물결도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이러한 두 사람이 부딪쳐 파장이 이는 자리마다 삶과 죽음이 물비늘처럼 몸을 뒤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치열하게 마주한 것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찾고자 혹은 감추고자 한 것이 정말 진실이었을까? 진짜 필요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을까? 가까워지고 다가서는 두 사람의 장면들을 통해, 두 사람의 거리 사이에서, 영화는 그 답을 조심스럽게 피워낸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뭐부터 버려야 돼요?" 묻는 지윤에게 "남길 것부터 정리해야지." 말하는 예분의 차분한 어투다. 그렇게 죽음의 대처법을 가르치고서는 정작 지윤을 데려가는 곳이 병원과 식당으로, 죽음에 앞서 삶부터 가르친다는 점 또한.
죽음과 삶은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맞붙어 있다. 삶은 애초에 그렇게, 무수한 이들의 삶과 죽음이 조각조각 물비늘처럼 맞붙어 강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하나의 물비늘, 그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지도. 그러나 설령 이 하나하나가 아무 것도 아닌 순간이라 해도, 강은 그런 식의 물비늘이 모여 반짝반짝 흘러 간다.
그렇게 끊임없이 몸을 뒤채는 만남과 헤어짐, 이해와 오해, 그 틈바구니 삶이라는 곳에 우리 그저 소리 없이 나란히 눕는다면. 다른 베개, 다른 이불, 다른 부위의 같은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그대로, 그저 같은 요 위에 나란히 눕는다면. 그때 비로소 이 마음에서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를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물을 반짝이게 하는 것은 사실, 모든 축축한 것을 마르게 만드는 햇볕이니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은 12월 6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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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여배우들, 한 곳에 모인다면 누가 이길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강렬한 여성 캐릭터들! 이 다섯명이 한 곳에 모인다면 누가 이길까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정신병원의 싸이보그 ‘영군’
“싸이코가아니라 싸이보그에요”
<헤어질 결심>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한 ’서래’
“한국에서는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친절한 금자씨> 죄를 뒤집어 쓰고 독기 품은 ‘금자’
“언니 이제 밥도 많이먹고 약도 많이먹고 빨리죽어”
<박쥐> 시모, 남편 뒤치다꺼지와 학대까지 당하다 뱀파이어로 변신한 ‘태주’
“저 부끄럼 타는 여자 아니에요”
<아가씨>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엄격한 보호아래 살아가는 귀족 ‘히데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박찬욱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여성캐릭터가 핵심적으로 등장합니다.
위의 영화들 말고도 <스토커>, <리틀 드러머 걸>에서도 여성이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이끌어가죠.
박찬욱 감독의 신작에는 손예진 배우가 출연한다고 하는데요.
또 어떤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보여줄지 너무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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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이 꼿꼿한 사람
SYNOPSIS.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POINT.
✔️ 초고령화 사회, 인간성을 잃어가는 듯 느껴지는 뉴스가 쏟아지는 지금, 볼 가치가 있는 영화
✔️ 주인공 ‘미치’ 역의 배우 ‘바이쇼 치에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 성우이기도 합니다. 극중에도 언급될 만큼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 난 이게 미치 씨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눈여겨본 단편 감독의, 첫 장편 작품. 봉준호처럼 현실 인식이 서늘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처럼 풀어가지만, 그보다 단단하고 무게중심이 낮은 느낌입니다. 차기작이 벌써 기대됩니다.
✔️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주목받은 작품
✔️ 2월 7일 개봉
오래 전 누군가에게 들은 적 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그러니까 처음 5-10분은 그 영화를 이끌어가는 내용이자, 나중에 돌아보면 그 부분만 봐도 영화를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런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적극 동의하는 동시에 소름이 끼칠 것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가 되는 ‘플랜75’ 정책은 결국 오프닝 시퀀스에 나온 사건을 아주 천천히, 공적인 탈을 쓰고, 풀어서 진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권리인가? 이 질문은 결국 존엄사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논쟁이 언제나 편치 않았는데, 누군가에게는 ‘존엄’을 지킬 선택이겠지만, 적어도 이 사회에서는 ‘죽음을 선택할’ 자리까지 떠밀린 사람들에게 마지막 버튼을 눌러 주는 것이거나, 의료라는 흰 베일을 뒤집어쓴 살인이 훨씬 많으리라는 기분 나쁜 예상 때문이었다.
유독 인물들의 뒷모습을 많이 담아낸 이 영화 속에서, 나는 마치 서래를 본 해준처럼 생각했다. 미치 씨는요… 몸이 꼿꼿해요. 난 그게 미치 씨에 대해서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꼿꼿한 등처럼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다. 꼼꼼하게 일하고, 퇴근해서 장 본 식재료를 정리하고, 베란다에 걸어 두었던 옷을 다시 들여놓는 사람. 퀴즈 쇼에 도전하고 상품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도 그는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정갈한 식사를 한다. 호기로운 도전이나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 같은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정하고 알뜰한 일상.
그러나 국가는 이러한 미치의 일상을 보지 않는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예산 들어갈 곳’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존엄사 신청을 받는 국가에게, 미치는 그저 75세를 넘은 노인일 뿐이다. 국가가 국민을 죽이는 방법으로 명맥을 유지하다니. 누군가의 미래를 짓밟아서 도달하는 곳을 우리가 감히 미래라 불러도 될까.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미래는 무엇인가. 영화는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좋은 영화가 으레 그렇듯, 무거운 질문에 답안이 될 수 있을 여러 가지를 그저 보여준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아도 자기 일과 머리 누울 집이 있던 미치에게서, 국가는 그의 세상을 하나씩 잘라내고 몰아낸다. 죽음이 아니면 선택할 수 없는 자리까지 사람을 몰아세우는 느낌마저 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노인의 가난을 단지 그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책 <가난의 문법>이 생각났다. 나아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의 상관관계를 떠올리며, 노인 자살률이 OECD 압도적 1위라는 한국의 통계치 또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과연 그러한 죽음은 ‘자’살인가? 미치를 끊임없이 몰아간 끝에, 라바콘 불빛이 경고등처럼 온통 붉게 번쩍거리는 어느 밤. 온통 빛이 번쩍번쩍하지만 온기는 없는 밤이 마치 이 사회 같았다.
온기 없이 휘황찬란한 세상에서, 미치는 계속해서 꼿꼿하게 걷고, 정갈하게 먹고, 조용히 배려하며, 더없이 예의 바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 중에서도 “신세(お世話)”라는 단어는 세 번 이상 쓴다. 이 단어는 사전에 “도와줌, 보살핌; 폐, 신세, 귀찮은 일”로 등장하데, 도움을 받으면서 폐를 끼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을 담을 때 쓴다. 꽃다발을 받으며 명예 퇴직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의 의미로, 플랜75 상담원과의 첫 통화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마지막까지 신세 지게 되네요”로 차차 등장한다.
기초 일본어 회화에서 배우는 문장인데, 퇴직하면서 마지막으로 사물함을 깨끗이 닦고 감사 인사를 남기는 미치의 성격상 자연스러운 문장인데, 유독 귀에 툭 걸렸다. 생각해 보면 이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단어들은 죄다 귀에 툭툭 걸렸다. 스스로에 대한 낮춤말이 존댓말 못지않게 발달한 일본어에서는 과히 이상할 게 없는 표현들인데, 왜 그 겸양의 표현들이 마음에 걸렸을까. 공적인 탈을 쓰고 무례한 죽음이 판을 치는 세상에 끝내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건 아닌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장애인에게도 이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문장만큼이나, 노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 또한 당연한 소리다. 너무 당연해서 흰소리처럼 느껴져야 하는, 힘주어 말할 필요 없는 문장이어야 한다. 당연히 노인은 ‘우리’와 ‘그들’로 나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하며, 사람이니까 당연히 다르지 않다. 그 모습이 무너진 세상을 표현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인간의 면면을 비춘다.
미치와 직장 친구들의 대화,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보면 젊은 직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 영화 속 젊은이들과 노인들은 여러 차례 같은 자리에 선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 차단봉 앞에 잠시 서는 것은 미치도 히로무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플랜75로 사망한 노인들의 짐을 정리하고 물건을 털어 보는 마리아와 동료의 모습에서는, 누구라도 아우슈비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서로, 그리고 현실의 어떤 면과 끊임없이 공명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다르냐고.
비슷한 스토리라인을 담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황혼의 반란>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남겼던 말, “너도 언젠가 노인이 될 게다”는 문장이 그렇게 이 영화에서도 우리에게 파고든다. 플랜75는 노인들에게는 죽음을 선사하지만, 히로무와 요코를 비롯한 젊은 세대에게는 더 큰 내상을 입히고 있음이 영화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 속 ‘플랜75’가 지향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성과로 들이미는 것은 “경제적 파급 효과”다. 그건 정말 좋은 것일까? 어쩌면 그건 군더더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부가 가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밭에서 “농작물 가격을 잘 쳐주지 않다” 수확할수록 손해가 나서 농작물을 갈아엎는데, 마트에서는 너무 비싸서 못 사먹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면, 이 ‘부가’된 것은 가치일까 군더더기일까. 그 군더더기를 만들기 위해 진짜 중요한 가치들을 버린다면, 그걸 어떻게 부가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팔을 베고 식탁에 엎드린 미치가 이내 응시하는 어둠. 낮잠에서 깨어난 마리아가 같은 자세로 팔을 베고 응시하는 어둠. 그 시선 끝에, 절대 자구책이 될 수 없는 군더더기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등에 이야기를 매달고
친구에게 몇 번씩 걸어도 도저히 가 닿지 않던 미치의 전화는, 역설적으로 플랜75 상담원과 연결되면서 그제야 전화기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비록 마음 주고받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상담에 타이머로 시간 제한을 걸고 있고, 우리가 아는 가치들에 붙었던 이름(예컨대 “용기”)을 뒤죽박죽 섞어 쓰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연결이지만… 그 연결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귀여운 하이파이브가 있고, 멜론 소다 아니 크림 소다의 추억이 있고, 지나간 시간이 한 결씩 곱게 펼쳐지고 겹쳐진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역할로 단단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모든 등장인물을 품었던 바에쇼 치에코의 목소리로, 꼿꼿한 등으로 해주는 이야기들은 어쩐지 자꾸만 더 듣고 싶어지는 이야기들이었다. 히로무 삼촌의, 어쩐지 지친 듯한 등과 방에 놓인 물건들의 이야기도… 어쩐지 더 듣고 싶어서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영화가 마지막에 가까워 갈수록, 어쩐지 나는 “생은 존엄이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영화 속 ‘플랜75’ 광고에서는 “태어나는 건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는 순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호기로운 광고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깨달음을 준다.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도 선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겨두어야 맞겠구나.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두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생의 본질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당신이 이 영화에서 무엇을 발견할지도 궁금하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마따나, 계속해서 흑백의 명확한 답을 요구하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은 회색 지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플랜75' 식이 아닌 답을 찾아내려면, 이 영화가 던진 무거운 질문에 우리 각자의 답을 하나하나 꽃다발처럼 풍성하게 엮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 내가 이 영화에서 엿본 것은, 정말 너무 무거워서 좀처럼 쓰고 싶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생의 존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 삶이 바닥을 쳐도 생은 존엄하다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삶의 어느 순간, 결기 어린 눈빛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있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식의 부드럽고 달콤한 말로 로맨스 영화처럼 혹은 청춘 영화처럼 갈무리할 수 없는 엔딩이라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꼿꼿한 등으로 서서, 나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 또 발걸음을 옮기면 그저 그뿐이다. 이 생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꼿꼿한 등에 이야기와 노래를 매달고 걷는 것뿐이다. 여전히, 저는 그게 많은 걸 말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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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의 cine pick
봉블리, 디테일 봉 등 수많은 별명을 갖고 있는 '봉준호 감독'은 세계에서 인정받은 말이 필요 없는 거장인데요. 최근 열린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인터뷰어로 나서, 100분에 달하는 영화 문답을 이어나가며 찐 영화광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저는 12살의 나이에 영화 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고, 이 트로피를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밝히기도 했는데요. 한국 영화계에 많은 충격을 안겨 왔던, 그리고 이젠 세계에 그 충격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이 지난 2019년, 북미 매체 인디와이어에서 발표한 '영화감독 35인' 중 한 명이 되어 그해의 베스트 무비를 선정하였습니다. 특히, 35명의 감독 중 유일한 한국 감독으로 자리를 빛낸 '봉준호 감독'은 그해 개봉작을 포함하여 총 8편의 영화를 선정하였는데요.
출처 : IndieWire
과연, 봉준호 감독이 선정한 최고의 영화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으며, 어떤 작품들이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을지 지금부터 같이 만나볼까요?
잇츠 CINE PICK!!
<아이리시맨> (2019.11.20 개봉)
범죄, 드라마, 스릴러 | 미국 | 209분 | 청소년 관람불가
감독 : 마틴 스코세이지 | 출연 :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 95% ? 86% (로튼 토마토)
전후 미국에 드리운 범죄 조직의 그림자.
이제 한 거물 암살자가 입을 연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선사하는 장대한 범죄 드라마.
봉 says : "영화 공부하던 시절, 책에서 보고 가슴에 새긴 말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바로 마틴 스콜세이지다."
<결혼 이야기> (2019.11.27 개봉)
코미디, 드라마 | 미국 | 137분 | 15세 관람가
감독 : 노아 바움백 | 출연 : 스칼릿 조핸슨, 아담 드라이버, 로라 던
? 94% ? 85% (로튼 토마토)
파경을 맞았지만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한 가족을
예리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봉 says : "올해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
<아사코> (2019.03.14 개봉)
드라마 | 일본 | 120분 | 12세 관람가
감독 : 하마구치 류스케 | 출연 : 히가시데 마사히로, 카라타 에리카
? 78% ? 72% (로튼 토마토)
I. 강렬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그렇듯…
첫사랑 ‘바쿠’와 함께하는 모든 날이 특별했던 ‘아사코’.
설레지만 불안하고 뜨겁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바쿠는
어느 날, 다시 돌아온다는 짧은 말만 남긴 채 아사코를 떠나갔다.
II. 편안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우연일까? 운명일까?
첫사랑 바쿠와 똑같은 외모의 ‘료헤이’를 만나게 된 아사코.
겉모습만 같을 뿐 공통점 하나 없는 모습에 혼란스럽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료헤이의 사랑으로
아사코는 다시 설레는 사랑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간 첫사랑 바쿠가 갑자기 나타나고
아사코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봉 says : "내가 불안의 감독이라면, 하마구치 감독은 확신의 감독"
<퍼스트 카우> (2021.11.04 개봉)
드라마 | 미국 | 122분 | 12세 관람가
감독 : 켈리 라이카트 |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 96% ? 63% (로튼 토마토)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봉 says :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답고 시적인 영화"
이외에도 <미드소마>, <강변호텔>, <언컷 젬스>, 그리고 드라마 [마인드헌터](시즌 2)까지 총 8편의 봉준호 감독의 pick이 앞서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처럼, 이후 개봉작 또한 기대되는데요.
코로나 이전 개봉작들을 돌아보며,
그리고 위드 코로나 시대 개봉작을 바라보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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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맨, 넷플릭스에서 보기 아까운 액션 영화
?Rabbitgumi 입니다!
마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감독인 루소 형제가 마블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죠.
이번에는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그레이맨이라는 영화로 돌아옵니다.
라이언 고슬링과 크리스 에반스가 출연하고 있는 액션영화인데요,
꽤 스케일이 큰 액션 영화여서 극장에서 선 공개 되었어요.
넷플릭스가 엄청난 금액인 2억 달러를 투자한 영화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https://rabbitgumi.stibee.com/
브런치는 아래 링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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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2차 예고편
“이건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
뚜렷한 꿈도 목표도 없이 지루한 삼수 생활을 이어가던 ‘영호'(강하늘),
오랫동안 간직해온 기억 속 친구를 떠올리고 무작정 편지를 보낸다.
자신의 꿈은 찾지 못한 채 엄마와 함께 오래된 책방을 운영하는 ‘소희'(천우희)는
언니 ‘소연’에게 도착한 ‘영호'의 편지를 받게 된다.
“몇 가지 규칙만 지켜줬으면 좋겠어.
질문하지 않기, 만나자고 하기 없기 그리고 찾아오지 않기.”
‘소희'는 아픈 언니를 대신해 답장을 보내고 두 사람은 편지를 이어나간다.
우연히 시작된 편지는 무채색이던 두 사람의 일상을 설렘과 기다림으로 물들이기 시작하고,
‘영호'는 12월 31일 비가 오면 만나자는 가능성이 낮은 제안을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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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1899> 공식 티저 예고편
- 장대한 항해의 시작. 한편, 이 여정에는 반전이 숨어 있다. 전 세계 평단에서 호평받은 시리즈 《다크》의 제작진이 1899년의 케르베로스호로 당신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