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5-10 14:36:08
<분노의 질주>가 아니어도 박스오피스 1위한 이 배우
<캐시트럭>의 제이슨 스타뎀
액션 전문 민머리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작은 민머리를 맡고 있는 제이슨 스타뎀은 <트랜스포터> 시리즈부터 <메카닉>까지 액션배우로서 꾸준히 활동하던 중 2013년, 시리즈 제 6편인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에 합류하였는데요. 시리즈 제 6편은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흥행작이었고, 제이슨 스타뎀 역시 액션 스타로 완벽히 자리매김하며 ‘흥행 보증 수표’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의 질주> 스핀오프작인 <분노의 질주: 홉스&쇼>에서 드웨인 존슨과 완벽한 콤비를 선보이며 시리즈 한국 최고 관객을 끌어냈는데요. 하지만, 본편인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에는 출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2021년 여름, 다른 작품으로 극장가를 찾았다고 하는데요! 5월 7일 북미에서 개봉한 케이퍼 무비 <캐시 트럭>은 개봉주 주말에만 90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며 할리우드 여름 시장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당초, 북미 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여름 시장에 불을 지펴줄 것이라 기대했던 마블의 <블랙 위도우>가 7월로 개봉을 미뤄 아쉬움을 샀는데요. 2020년 이후 최대 기대작이라 꼽히는 <블랙 위도우>가 개봉하기 전, 5월 19일 한국에서 최초 개봉될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에 이어 5월 26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최초 개봉될 디즈니의 <크루엘라>, 그리고 6월 말 게 될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킬러의 보디가드 2>까지 많은 영화들이 여름 시장의 불씨를 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 미디어 분석가에 따르면, 할리우드의 여름 시장은 텐트폴 영화인 <크루엘라>와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개봉하는 5월 28일 이전까지는 크게 타오르기는 힘들 전망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팬데믹 이후 아직 회복되지 않은 박스오피스를 뚫어낸 <캐시트럭>의 약진이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특히, 이번 <캐시트럭>의 흥행은 미국의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5월 31일) 연휴 시장을 위한 도화선이 되어주었습니다.
백신 접종과 함께 뉴욕을 시작으로 L.A까지 점차적으로 규제가 완화되며 개봉을 미뤄오던 많은 신작들이 개봉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요. <고질라 vs. 콩>과 <극장판 귀멸의 칼날>의 흥행이 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액션 전문배우 '제이슨 스타뎀'의 복수극 <캐시트럭> (원제 : Wrath of Man)은 팬데믹 아래 개봉했던 워너브라더스의 <고질라 vs. 콩>과, 디즈니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이 각각 자사 스트리밍 플랫폼 HBO Max와 디즈니+에서 동시 개봉한 것과 달리, 전통적인 극장 개봉을 따랐는데요. 자체 스트리밍 플랫폼을 보유하지 않은 MGM사의 영화였기에, 극장에서 단독 개봉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제이슨 스타뎀'의 죽여주는 액션을 그리던 팬들은 자연스레 극장으로 향한 것입니다.
시네마스코어 A- 를 기록한 <캐시트럭>은 캐시트럭을 노리는 거대 강도 조직에게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현금 호송 회사에 위장 취업 후 처절한 응징을 예고하는 액션 영화로,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강렬한 복수 액션이 눈길을 사로잡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찐 액션배우와 허당 매력을 넘나들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제이슨 스타뎀과 <알라딘>으로 1200만 관객을 모은 가이 리치 감독은 데뷔작을 함께한 사이인데요. 1998년,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로 데뷔한 그들은 이후 <스내치>, <리볼버> 등 여러 작품에서 함께해온 '콤비'입니다. 이런 그들이 15년만에 뭉친 이번 영화는 5월 10일 중국 개봉을 통해 '대박'을 기대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국내에서는 <분노의 질주>보다 늦게 극장을 찾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캐시트럭>의 흥행으로 인하여 오랜만에 북미 박스오피스 순위 변동이 있었는데요. 3주동안 불타올랐던 <귀멸의 칼날>이 한 단계 하락한 2위에 안착했고, 한국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한 <모탈 컴뱃>이 3위를 기록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두 영화가 꾸준히 관객을 모으며, 2020년 3월 팬데믹 이후 북미에서 가장 큰 매출을 올린 영화 <고질라 vs. 콩>을 위협하고 있는데요. 역대급 흥행을 기록하며,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귀멸의 칼날>의 흥행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자료 출처 : BoxOffice Mojo, Comscore
극장이 조금 더 활기찬 여름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
- 영화 <숨>은 무엇을 찍고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 <숨>은 네 개의 이미지가 교차되며 시작한다. 타오르는 불과 드넓은 물(바다). 이제 막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떼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아기의 움직임과 이제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차갑게 식은 망자의 고정된 몸. 각각 생명력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교차하며 영화는 시작부터 삶과 죽음의 대비, 경계, 혹은 순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때 들리는 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이다. 이것은 생명력을 가득 머금은 소리 같기도 하고, 이제 막 그 호흡이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의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숨>은 그 시작에서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사이를 기필코 감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크게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있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노인과 장례지도사, 유품정리사. 폐지 줍는 노인의 주름진 몸과 느릿한 움직임은 이제 그는 삶의 시간을 대부분 정리하고 죽음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이 생활하는 집, 그가 잠에서 깨 일어나는 모습, 얼굴을 씻고 밥을 짓고 식사를 하는 모습, 하루에 천오백 원 남짓한 돈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는 모습은 그 어떤 장면보다도 ‘생’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늙고, 주름지고, 느리고 힘들어도 그는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고, 잠에서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는 것은 전부 생의 유지를 위한 일이다.
아쉬운 것은 그 생의 유지를 위한 활동과 움직임을 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숨>은 유재철 장례지도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똑같다고 말한다. 그 장면의 앞뒤로 이 노인을 배치할 때 <숨>의 태도는 과연 그 내레이션과 일치하는지 묻고 싶다. 이를테면 영화의 중반부, 노인을 비추며 감독의 목소리는 이렇게 내레이션한다. 이 폐지 줍는 노인은 한때 성공한 사업가였다고. 이 내레이션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것과 공명하는 건 김새별 유품정리사의 에피소드에서 나오는, 고독사한 누군가가 생전 받았던 장영실상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대단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좁은 방에서 사시다가 가셨을까, 하는 유품정리사의 혼잣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죽음 앞에서는 똑같고 좁디 좁은 관에 들어가면 모두가 똑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가 과연 그 말과 동일한 태도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냐는 의문 때문이다. 좁은 관에 들어가는 건 다 똑같다는 그 말. 하지만 ‘대통령의 염장이’ 유재철 장례지도사가 인도하는 그 관은 수많은 언론사의 카메라가 찍는 관이다. 한때 장영실상을 받았으나 결국 좁은 집에서 고독사로 생을 마무리한 그의 죽음은 유품정리사의 말처럼 “관공서 컴퓨터 안에 이름 세 글자”로 남는다. 그래서 나는 모든 죽음이, 모두가 죽음 앞에서 똑같다는 영화 <숨>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영화 <숨>이 자신의 태도를 일관적으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죽음을 더 존중했어야 한다.
*씨네랩 콘텐츠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다녀온 후 작성한 글입니다.
-
-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도 '다음 소희'가 나올까 두려워
생기발랄
헉헉대는 숨소리. 누군가가 숨 가쁘게 춤을 추고 있다. 안무실의 이 누군가는 선이 있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고등학생인 소희.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굳이 수능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취업이다.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담임선생님. 담임선생님은 소희에게 '대기업 일자리가 들어왔다'라며 좋은 소식을 알린다. 대기업? 진짜? 하청 아냐? 반신반의하는 소희. 하지만 '한국통신'이라는 이름과 담임선생님과의 신뢰를 믿기로 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소희. 사실 담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친구를 만났었다. 인터넷 방송 크리에이터인 친구. 같이 곱창을 먹고 있다. 친구와 단 둘이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런 애들이 뭘 알겠냐. 쟤들은 세금이나 내겠어?" 시비를 걸어오는 아저씨 둘. 그 아저씨의 말에 화가 나 소희는 싸움을 벌인다. 덩치가 있는 남자들과도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소희. 이렇게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던 소희는 성격이 점점 마모되기 시작한다. 왜? 담임선생님이 권한 '대기업 일자리 현장실습' 때문에.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영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극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이 대사. 사실 이 대사는 굉장히 합리적인 말로 보인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삶의 과정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둔다? 그것도 실습생이? 이거 그만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원래 회사, 그러니까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실습생 하나 빠진다고 해서 그렇게 큰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만둬도 알 빠 아니다. 또 어떤 관점에서 '네가 고른 회사'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그 논리를 완파한다. 인물의 선택지가 한정될 수밖에 없고 / 내적으로 그것만 골라야 한다는 것을 묘사하는 셈이다. 영화의 1,2부는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한 사건을 분기점 찍고 소희가 처해있던 상황에 대해 묘사한다. 이는 즉 또래집단 내지는 주변인들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10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영화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우선 첫째.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는 데 있어서 제약이 되는 인물이 있다. 이는 사실 초반부에 그렇게까지 두드러지는 사람이 아닌 듯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사실상의 흑막이 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캐릭터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물고 물리는 연출로 묘사한다. 이 연출은 쉬워 보이지만 아니다. 이걸 촘촘하게 설계해야 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를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했고, 2부에서 주인공 유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글로 쓴다면 초 강력한 스포일러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이 시스템 묘사가 어땠는지를 간략히 써보자면 글쓴이는 후반부 어떤 인물이 하는 말에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또 영화에서 가장 핵심으로 작동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 소희의 행적이다. 글쓴이가 봤을 때 극에서 강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소희가 하는 행동들이 이해하는 분들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철저할 정도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우선 소희의 인간관계를 가족/친구/학교/직장으로 단정 짓는다고 해보자. 가족 관계에 대한 묘사가 초반부에 나온다. 소희는 밥 먹다가 멍-하니 엄마를 쳐다보는 신이다. 이 장면은 정주리 감독이 소희 같은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한 듯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주변 사람에게 말하지' 싶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또 이 소희를 둘러싼 어머니/아버지의 리액션도 주목할 만하다. 소희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사실 이런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이 소희의 바뀐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나름 꼼꼼한 캐릭터 묘사로 잘 표현했다. 또 이 꼼꼼한 묘사는 극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이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구성된다. 다음은 친구다. 이 친구들은 보통 댄스학원에서 만나거나, 어릴 때부터 소희를 알거나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댄스학원에서 어떤 인물과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지, 또 한 사람은 어떤 관계이며 이 인물은 어떻게 묘사되는지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후자인 '전부터 알던 친구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소희랑 비슷한 입장에 놓이지만 어떤 차이점이 있어서 소희의 내면에 닿지 못한다. 이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넓어질 것이다. 미묘하고 사소한 지점이 소희에게 상처가 된 것이다. 다음은 직장이다. 직장에서의 일은 사실 살짝 아쉽다. 소희를 둘러싼 트라우마, 불안함이 직장에서 묘사되는 것은 좋았다. 좋은 소재였던 순위표가 두드러지는 연출이 2부에서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인물과의 관계는 너무 강한 템포로만 이야기를 전개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직장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직장의 두 인물은 영화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두 사람이다. 체감상 두 번째 인물이 좀 과하지 않았나 생각은 들기도 하지만 감상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실화 바탕
영화는 2014년에 전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다뤘다.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던 사건. 당시 이 학생이 일하던 곳은 살인적인 업무 환경과 현장실습생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진 임금 갈취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지금 이 문장만 읽어도 ‘얼마나 일이 고됐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런데 그 뚜껑을 열어보면 더 착잡해진다. 지금 당장 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를 찾아봐도 어렵지 않게 당시의 업무환경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학생이 일하던 부서는 ‘해지방어부서’였다. 실제 통신사가 이런 영업방식이 있다고 서서히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곳이었다(왜냐하면 글쓴이도 이 회사에서 다루는 고객들 중 하나였다. 물론 상담사분들에게 폭언은 한 적이 없다). 통신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보통 콜센터에 전화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막말하는 경우가 몇 있다. 요즘이야 이 노동자분들의 감정노동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이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오물 같은 폭언을 10대 소녀들이 다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소재가 갖는 특성들을 잘 살렸다. 우선 주인공 소희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수능을 준비하지 않는 소희. 이 소희만이 가지는 특성들을 잘 이용했다. 소희가 아무리 멘털이 세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반대로 어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묘사했다. 이 소희의 나이라는 특성을, 극에 상상력으로 부여한 것이다. 이 10대라는 특성은 역시 학교생활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글쓴이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인간관계도 그냥 그저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실 잘 모른다. 여기서 글쓴이와 같은 사람들이 소희의 서사에 몰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이를 10대가 갖는 성격적인 특성과 학교생활을 잘 결부시켰다. 이는 역시 2부에서 시너지가 있다. 이 2부에 등장하는 시너지는 극에서 반복되는 한 대사와 함께 영화의 진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정주리 감독의 직업윤리 의식이 빛난 부분이 크다. 후술 하겠지만 글쓴이는 살짝 아쉽다고 느낀 지점이 있다. 그러나 좋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야기를 1/2부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느낀다. 작년에 개봉했던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처음 보면 장르적인 쾌감으로 잘 이뤄진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불필요하게 가학적인 장면이 몇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그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이 쓸데없이 소상했다는 점이다. 실화 바탕이었다? 그거 치고도 너무 설명하는 건더기가 많았다. 여기서 만든 1/2부 구성은 앞의 작품과는 다르다. 소희가 겪는 스트레스 묘사를 좀 더 줄이고 2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에 있어 효과가 크다. 이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던 <더 글로리>가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해자 문동은이 겪는 아픔을 1화로 압축시켜 극에서 복수극에 집중시킨 것이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강약조절을 잘해놔서 소희가 그런 선택을 했던 실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그냥 돈 많고 부모님이 방치하니까로 퉁 친 것과는 다른 결이다. 두 번째로는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 장면 연출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게 잘 짰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최고 강점이다. 반대로 이 장면 후에 등장하는 한 시퀀스는 왜 넣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영화에서 어떤 사건이 두 번 반복된다. 소희의 주변인에 관한 일이다. 이 분의 선택이 실제 그 콜센터에도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영화에서 왜 반복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감상의 폭이 역시 넓어질 것이다. 이 반복되는 두 사건이, 정주리 감독이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처해있는 현 위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두 번째 강점이다. 그리고 1/2부 형식 자체가 역시 반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부에서는 2부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몇 개 있다. 이 두 반복을 차이점으로 표현하는 배두나 배우의 경험치는 역시 빛난다. 유진이라는 인물이 서사가 그냥 없는 수준인데 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배두나 배우 덕이다.
아쉽기도 해
그렇게 직업윤리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게 묘사하지 않았고. 인물 내면묘사 좋았고. 배두나, 김시은 배우 연기 좋았고. 딱딱 맞아떨어지는 쾌감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영화에서 작동하는 성적인 소재다. 몇몇 인물의 대사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냥 불쾌했다. 불쾌하라고 넣은 신 같긴 한데, 이건 좀 그랬다. 별 의미가 없는 느낌. 이 성적인 대사는 소희의 친구인 '태준 오빠'와도 관련이 있다. 너무 직접적인 대사가 초반부에 들어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주인공의 두 친구는 좀 아쉽다. 어떤 인물 중 '크리에이터'있다. 이 직업적 특성은 극 중에서 별로 효과가 없다. 후반부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냥 백수로 놔둬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 영화 자체가 젊은 영화다. 어린 학생들의 내면을 김시은 배우의 호연과 함께 잘 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좀 어색하게 유튜브라는 소재가 들어오면 뭔가 이상해진다. 이 소재가 살짝 올드하게 느껴졌다. 또 소희와 묘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 서사가 살짝 이해가 안 됐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이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난 지금 나라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또 영화의 후반부에 극에서 중요했던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 좀 아쉽다. 이 장면 바로 직전까지 유진은 관객의 분신으로서 활동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뭐가 실체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각본과 연출의 수혜자가 된다. 검정으로 칠했던 의상과 힙합 댄스라는 내적인 표현도구까지 이 감정표현에 좋은 도구가 된다.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던 게 인물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이유였는데 너무 말하는 느낌? 그리고 이 메시지에 대해서 살짝 반신반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하면 말하는 사람의 짐이 덜 것이고 글쓴이도 어떤 것이든 다 할 입장이지만 그때까지 쌓아놓은 서사와 흐름이 좀 안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는 영화 엔딩과도 이어진다. 한 3%쯤 부족해서 감정적으로 과한 느낌이 엔딩에서 더 두드러진다.
진짜 주인공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김시은 배우는 아주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좀 어색한 부분도 있긴 했다. 욕을 잘 못하지 않았나 싶다. 그 외에는 감정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사무실 안에서의 표정연기, '그 장면' 연출, 비빌 곳 없는 현실까지 답답함을 드러내는 연기를 잘 보여줬다. 이거 찍을 때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생 비주얼과 말투가 나오는 것 역시 영화를 보고 분노할 수 없는 이유를 잘 닦아놓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좋은 배우라고 느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김시은 배우가 맡은 소희가 아니다. 바로 영화에서 지독하게 반복되는 한 단어다. 이 단어는 인물의 동기부여도 됐다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묘사하는 도구가 됐다가, 극에서 가장 중요한 방점으로 쾅 찍히기도 한다. 이 단어는 특히 2부 후반부에서 '실체가 없다'라는 말과 조응한다. 실체가 없지만 그 무엇보다 굉장히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이 압박감을 여러분도 동의할 것이다. 이 압박감.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두렵다. 나도 이랬던 건 아닐까 싶어서. 정주리 감독이 이 부분부터 설계하고 인물을 짜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 제기가 기억에 남을 것 같은 건 이 덕이다. 아. 시각적으로 어떤 도표로 형상화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작은 상징에 불과하다.
이 진주인공. 몇 년 전부터 이게 문제라는 걸 봤던 것 같은데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에 멈춤이란 없다. 다음 소희?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정주리 감독 같은 멋진 분들이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글쓴이도 현장실습 일을 하며 부조리한 일을 겪었고,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때린다. 또 이 세상에 온갖 진상들은 많아서 여기서 겪는 괴롭힘과 스트레스는 사람을 좀먹기 충분하다. 글쓴이도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의 입장에서 이런 것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화가 난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라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멍청한 소리는 굳이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불합리하다. 이 압박감 때문에. 이 압박감을 두고 과연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글쓴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회에 부딪히는 이들에게 더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다. 버텨줘서 고맙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자로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사회에 부대끼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글쓴이도 앞으로 이 생활을 해야 한다. 두렵지만, 그래도 살아보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 다 우리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사슬처럼 이어진 폭력이 불러온 파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Die Bad)
개봉일 : 2000.07.15.
감독 : 류승완
출연 : 류승완, 박성빈, 류승범, 배중식, 김수현
‘사슬처럼 이어진 폭력이 불러온 파멸’
6500만 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지만 순식간에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여전히 ‘저예산 영화계’의 전설로 불리는 영화이자, 류승완 류승범 형제의 감독, 배우 데뷔작으로 날 것 그대로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그 당시 그들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영화. 그리고 “양아치 역할을 찾고 있었는데 집에 양아치가 누워있더라.”는 류승완 감독의 류승범 배우 캐스팅 비화(?)로 유명한 그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영화를 보면서 류승완 감독의 과감하고 거친 연출과 첫 출연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 류승범 배우의 힘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온갖 쌍욕과 폭력으로 점칠 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허망함과 무거운 절규가 보는 이를 깊이 찌른다.
류승완 감독은 최근 박스오피스를 접수하고 있는 <모가디슈>의 개봉과 함께 다시 큰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 시점에서 그의 처음과 이전작들을 다시 찾아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가장 궁금했던 작품 <짝패>는 이번 주말에 꼭 봐야겠다.
개인적으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맨발로 차갑고 딱딱한 공사장 바닥과 거친 모래 위를 걷고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영화였다. 거친 모래가 발바닥을 파고들 것만 같은 두려움에 힘을 잔뜩 주게 되는 것처럼, 위태로운 인물들의 처절한 무너짐을 상상하며 지레 겁을 먹고 나도 모르는 새 힘을 잔뜩 주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영화로, 폭력 밑에서 새로 태어난 폭력과 그 끝에 있는 파멸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공고 졸업생인 석환과 성빈은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시비가 붙은 예고생들과 패싸움을 하게 된다. 싸움을 붙인 석환을 말리던 성빈은 실수로 예고생 현수를 살해하게 되고 가깝게 지내던 두 친구의 삶은 전혀 다른 두 갈래의 방향으로 나뉜다. 하지만 둘은 여전히 어딘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성빈이 7년의 형을 살 동안 석환은 형사가 되어 성빈과 같은 범죄자들을 쫓는다. 단적으로 나누자면 석환은 사회의 선, 성빈은 사회의 악이다. 성빈은 출소한 후 석환에게 연락을 하지만 석환은 성빈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 둘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나나 싶지만,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서 뻗어 나온 인연은 다시 새로운 폭력이 되어 석환과 성빈을 붙잡는다.
2부 악몽에서는 성빈이 현수의 악몽에 시달리며 폭력의 세계로 들어서는 모습이 나오고 3부 현대인에서는 석환이 끈질기게 태훈을 검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태훈이 검거된 후 성빈과 현수는 피할 수 없는 좋은 놈(형사) vs 나쁜 놈(조폭)의 대립구도에 묶이게 되고, 석환이 쫓는 조폭 태훈과 석환의 동생 상환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놉시스
세상 참 X같지 않냐?
19살, 그 사건 이후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패싸움
공고 졸업생인 석환(류승완)과 성빈(박성빈)은 당구장에서 예고생들과 시비가 붙는다.
당구장 문이 잠기고 시작된 패싸움! 친구들의 싸움을 말리던 성빈이 실수로 예고생 현수를 살해하고 만다.
악몽
살인죄로 7년간 감옥에 있던 성빈이 출소했다.
하지만 사회와 가족, 친구의 냉대 속에 현수의 악령만이 매일 밤 찾아와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태훈(배중식)을 구하게 되면서 앞으로 주먹을 쓰며 살기로 결심한다.
현대인
폭력 조직의 중간보스 태훈 VS 강력계 형사 석환
지하주차장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죽기살기로 싸운다.
결국 태훈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석환! 하지만 거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야간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조폭이 되고자 형 몰래 성빈의 수하가 된 상환(류승범)
폭력배들끼리의 싸움이 벌어지던 날, 자신이 희생양이 된지도 모른 채 앞서 달려간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동생을 찾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간 석환은 성빈과 둘 만의 전쟁을 시작하는데…*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돈 많은 놈들은 돈 믿고, 없는 놈들은 깡다구 믿고 까부는 세상, 떡값 받을 사람은 있고 애들 사고 치는 거 막을 사람은 없는 세상. 석환과 성빈이 패싸움을 했던 당구장 주인은 세상을 이렇게 나눈다. 돈 많은 놈 / 없는 놈. 성빈과 석환은 굳이 따지자면 졸업하고도 동기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취업하지 못하고 있던 ‘없는 놈’에 가깝다. 두 친구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다 패싸움을 한 날 이후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싸움을 걸었던 석환은 형사가 되었고 석환을 말리던 성빈은 사회가 인정해 주지 않는 범죄자이자 조폭이 된다.
형사와 조폭의 세계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3부 현대인에서 석환과 태훈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일에 대해 말하는 장면을 보면 사회가 말하는 나쁜 놈이든 착한 놈이든 어찌 됐든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구나. 싶다. 석환 또한 강력범죄자들을 다루다보니 ‘내가 조폭인지 경찰인지 헷갈린다’고 생각하고, 석환과 태훈 모두 몸싸움에서 불리한 긴 머리와 넥타이를 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조폭들의 세계나 강력계 형사의 세계나 비슷한 애로사항과 불만, 그들만의 철칙이 있으며 두 사람 모두 무슨 일을 하든 결국은 비슷하다 생각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펜대 굴려갖고 돈 만지나, 주먹질해갖고 돈 만지나. 뭐가 틀려?”
상환은 아직 철없는 양아치 고등학생이다. 석환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일탈을 일삼는 동생을 걱정한다. 두 사람은 상관 말라며 소리 지르면서 싸우기도 하지만 이내 “형 괜찮아?”, “밥은 먹었어?”와 같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걱정을 나누는 우애 좋은 형제다.
상환은 펜이 아닌 주먹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석환도 상환의 나이대엔 싸움을 일삼았다. 하지만 나쁜 역할(?)을 모두 뒤집어쓴 성빈 덕분에 석환은 폭력의 세계를 벗어나 형사가 되었지만, 상환은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상환을 자비 없이 잡아먹은 폭력의 끝엔 처절한 절규와 죽음이 있었다.
석환이 시작한 폭력으로 성빈은 전과자가 되고 사회의 조롱과 악몽에 시달리던 성빈은 조폭이 되어 새로운 폭력을 만든다. 폭력을 또 다른 사회적 힘이라 동경하던 상환은 성빈 조직의 칼받이가 되어 죽는다. 분노한 석환은 성빈의 목을 조르고 피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시작한 폭력으로 인해 동생을 잃고, 친했던 친구를 잃고, 자신까지 잃게 된 석환은 처절한 울부짖어보지만 그의 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석환이 만든 폭력의 굴레는 그것이 처음 시작됐던 당구장에서 끝을 맺는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돈도, 빽도 없는 주먹만 가진 성빈, 태훈. 나름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취급 받는 직업을 가진 석환 모두 똑같이 폭력을 휘두르며 살아간다. 착한 놈, 나쁜 놈. 인정받는 놈, 무시당하는 놈. 있는 놈, 없는 놈. 따위를 나눌 필요도 없이 이들은 모두 폭력 앞에서 무릎 꿇는다. 폭력을 시작한 사람도, 폭력에 휘말린 사람도, 폭력을 동경하던 사람도. 모두 폭력에 의해 죽거나 혹은 나쁜 놈이 되어 살아남는다.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사람이든 폭력 앞에선 다 비슷하다. 죽거나 폭력을 휘두른 나쁜 놈으로 낙인찍히거나 그뿐이다.
-
- 어스름한 운명의 결박을 뒤흔드는 관능과 냉소의 퀘스트
※영화 〈그린 나이트〉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한번 해 보자. 소위 명망가의 집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으레 가족 중에는 속을 썩이는 아픈 손가락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다들 명석하고 현명해 가업을 이을 인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이 하는 대로 당장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는 인물로 커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천덕꾸러기 역할을 하는 사고뭉치가 없으란 법은 없다. 자식이 그런 역할일 때 부모는,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가나 굳이 대답을 듣기도 싫고, 딱히 뭐가 되어야겠다는 목표도 없어 보이는 저 아이를 어떻게 교화시킬지 고민이 많아진다. 그럴 때 몇 년이라도 더 살아 본 이웃과 주변인들은 자식을 키워 본 경험들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대로 기회가 찾아오듯 지금은 답답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잡고 제 구실을 할 것이라 위로한다. 하지만 그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기 위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걸 알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아마, 거대한 녹색의 형체에 도끼를 들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왜 기사가 되고 싶은가?
영화가 켜켜이 쌓은 은유와 상징은 여러 갈래로 해석할 통로를 만들어준다. 문학의 뿌리이자 시초를 선택해 새로운 변형을 가한 데이빗 로워리는 전환기의 문제작을 선택해 낯설지 않고도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중세를 지탱하는 정신이었던 기사도는 접근할 수 없는 흠모의 대상인 귀부인을 향해 미혼의 기사가 펼치는 거세된 욕망의 궁정식 사랑으로 유지된다. 중세 귀족 중심의 남성연대를 유지하는 기능을 했던 이 논리에 따르면 기사는 꿈에도 넘볼 수 없는 성주의 ‘소유물’인 귀부인에게 플라토닉 사랑을 표출한다. 조금이라도 성적 욕망을 드러낸다면 궁정식 사랑의 가치와 논리는 파괴된다. 여성은 욕망을 표출하는 대신 기사의 임무를 부여하는 대상으로만, 마치 게임 속 퀘스트를 전달하는 NPC로 존재한다. 당대의 기사는 원하는 목표인 전설과 명예를 차지하여 자기 정체성을 획득하는 여정의 복잡성을 귀부인이라는 도구적 존재로 스스로 만들어낸다. 외부적 상황에 따라 애초에 불가능한 귀부인과의 감정적 욕망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장벽을 세워놓는 셈이다. 실패가 예고된 관계인 가질 수 없는 여성의 사랑은 그 자체로 남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린 나이트〉의 원전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는 이러한 전통적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양난 이후 조선을 지탱하던 사대부 정신이나 봉건제 같은 가치관에는 근원적 동요가 일어난다. 문학에서도 이 흐름은 이어진다. 평민과 여성의 각성으로 사회비판과 현실주의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산문 문학이 발전하여 새로운 사조가 들어선다. 국가적 혼돈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며 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14세기 말 유럽, 인간의 탐욕은 총포를 만들었고 백년전쟁은 전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뿐인가. 유럽 전역을 휩쓴 흑사병은 무자비한 속도로 인명을 앗아갔다. 환란의 시기에 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제와 교회는 힘을 잃는다. 기사도 정신이나 궁정의 예법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예전 같은 강경함은 사라진다. 이후 기사의 도덕적 권위가 하락함과 동시에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문화예술도 예외는 없다. 14세기 말 쓰인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는 과거 아서왕 전설의 연장선상에서만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분명 서사의 진행은 기존의 문법인 궁정식 사랑과 기사의 영웅 서사를 따라간다.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면 인물의 태도와 분위기에서 확연한 변화가 엿보인다. 용기와 신의를 중시하던 원탁의 기사들은 녹색 기사의 게임 제안에 주저하고 서로 미룬다. 가웨인 역시 기사도의 덕목이라는 충성과 용맹, 겸허와 거리가 멀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었다면 기사의 게임 이후 일 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을 때 철저한 자기 계발과 조력자의 훈련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미 준비된 영웅이었다면 그런 과정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터. 하지만 가웨인의 일 년은 별 언급도 없이 생략되어있다. 그렇다고 그가 기사로서 완벽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얼떨결에 거대한 여정에 차출된 것처럼 떠나는 데다가 손쉽게 욕망에 휘둘린다. 이렇게 중세의 기사들이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여성 인물들의 태도는 과감하고 적극적이다. 현명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상황을 이해하며 능숙한 계략을 선보이기도 한다. 모르간 르 페이는 가웨인의 전 여정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주동자이며, 레이디는 자신의 욕망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는 시선의 주체가 된다. 가웨인과 레이디의 뒤집힌 구도는 새로운 해방의 지점을 부여하며 관습을 거부하는 시대적 변화를 나타낸다.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를 꼬집고 비판하는 수백 년 전 작품의 길을 2021년의 영화는 성실히 따라가면서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색깔을 마음껏 드러낸다.
데이빗 로워리가 펼쳐낸 가웨인(데브 파텔)의 여정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불안과 역경을 담아낸다. 아직 기사 작위가 없는 젊은 가웨인은 다른 기사들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당당히 내세울 멋진 전설 하나쯤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아서 왕(숀 해리스)의 이복남매인 모르간(새리타 커드허리)의 아들로 태어나 원탁의 중심에 앉을 수 있는 혜택과 기회를 지닌 ‘은수저’지만 딱히 내놓을 에피소드는 마땅치 않다. 크리스마스에 모두 모인 자리에서 삼촌 아서 왕은 굳이 그를 옆자리에 부른 뒤 장광설을 펼친다. 기사들이 겪은 무용담을 즐기는 아서 왕과 기네비어 왕비(케이트 디키)는 가웨인에게 너도 저런 모험담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를 은근히 압박한다. 명절마다 만나는 친척들의 달갑지 않은 질문 세례와 긴 조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때마침 불청객인 녹색 기사(랠프 아이네슨)가 찾아와 ‘목 자르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은 떠밀리듯 플레이어가 되어 그의 머리를 자르지만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 녹색 기사는 일 년 후 등가교환에 따라 ‘목을 잘리러 오라’는 통보를 한 뒤 방을 나선다. 준비도 안 된 가웨인의 갑작스러운 여정은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낯선 사회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청년들의 고민과 불안을 내포한다. 기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같은 모험은 삶의 첫 시련에 던져진 미숙한 인간이 어떻게 고난을 겪고 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기사가 스스로 차단한 욕망의 허들은 기존의 궁정식 사랑을 변용한 장르에서 종종 귀부인과 위험한 관계를 노출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다.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 남성의 페티시즘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이용하는 방식은 현대의 누아르와 로맨스로 구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웨인과 에셀/레이디(알리시아 비칸데르)의 관계에서 기사의 거세된 남성성은 여성의 욕망과 결합해 전복된 구도를 만든다. 사랑에 소극적이며 선택을 주저하는 가웨인에 비해 에셀은 자신의 감정과 소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나약한 남성이 홀로 유혹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카메라는 집요하게 그를 훑으며 욕망을 표출한다. 이 과정에서 가웨인을 향한 성적인 긴장은 레이디의 유혹에서 절정에 이른다. 우리는 원작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카메라가 모르간의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가웨인을 향한 성적인 함의가 농밀한 이 작품에 모르간의 존재는 곳곳에 드러난다. 영화 초반 녹색 기사의 행동과 교차하는 모르간의 의식은 모종의 계획을 암시한다. 처음 기사가 찾아왔을 때 아서 왕은 멀린을 쳐다본다. 잠깐의 붉은빛이 그에게 비춰오고, 왕을 향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왕의 마법사조차도 당해 낼 수 없는 힘, 혹은 이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안 모종의 거래가 의심되기도 하는 이 장면의 질문들 속 변하지 않는 사실은 모르간의 존재감이다. 버틸락의 성에서 가웨인 눈에만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눈먼 할머니와 눈을 가린 모르간, 그리고 한밤중 녹색 기사의 얼굴에 비치는 여러 얼굴 속 모르간처럼. 그렇다면 이 여정은 독립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한량 아들 가웨인을 험준한 사회로 내보내는 어머니 모르간의 시험이다. 스캐빈저와 성 윈프레드, 버틸락과 레이디의 내기 모두 모르간의 큰 그림 안에 포함된다. 원전에도 나오는 인형극의 인형처럼 가웨인의 모험은 퍼펫 마스터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
가웨인은 왜 길을 떠났나?
혈육의 갱생 프로젝트치고는 상당히 과격한 여정을 가웨인은 왜 떠나야 했을까. 죽음을 담보로 한 게임에 머나먼 녹색 성당까지 가는 머나먼 길에는 매 순간 목숨이 위태롭다. 그뿐인가. 이해할 수 없는 마법과 말하는 여우, 귀신과 거인, 중세와 어울리지 않는 사진 기법까지 등장하는 이 혼돈의 세계는 문명과 대비되는, 태초의 인간에게 익숙했던 녹색의 자연을 상징한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자연을 지배하려 했지만, 숭고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은 남아있었다. 동물성을 억압한 인간의 본성은 불확실과 혼돈을 넘나드는 설정으로 영화 전반을 지배한다. 특히 ‘교환’의 상징이 어긋나는 지점은 흥미로운데, 영화 속 어디에도 ‘공정하고 평등한’ 규칙은 없다는 점이 그러하다. 크리스마스 아침의 게임부터 그러했다. 상대인 녹색 기사는 목을 날려도 일어나는 미지의 존재지만, 우리의 불쌍한 가웨인은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이 확실하다. 처음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일어나는 관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스캐빈저(배리 케오간)에게 길을 물어보는 대가로 동전을 쥐여주면 우리는 서로의 거래가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캐빈저가 알려 준 실제 성당의 위치도 거짓인 데다 가웨인이 지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래는 끝난다. 영주 버틸락(조엘 에저튼)과 레이디 사이의 ‘획득물 교환 게임’에서도 가웨인은 버틸락에게 레이디와의 관계 그대로를 돌려주지 않는다. 그나마 대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윈프레드(에린 켈리먼)과의 거래도 일대일로 연결 짓기에 뭔가 석연치 않다. 이렇게 모험 내내 계속되는 비합리적인 교환의 연속은 영화에서 재신화화된 자연이 가진 혼돈과 대립, 거기에 나약한 인간을 대하는 냉정함마저 보여준다.
여기에 어머니라는 상징이 가진 자애로움마저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 가웨인의 방을 찾은 레이디는 그를 유혹하고, 이후 유사성행위를 암시하는 장면 이후 어머니가 짜 준 녹색 띠에 아들의 정액이 흩뿌려지는 장면의 결합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모든 과정이 어머니인 모르간의 의도와 설계에 의한 것이라면 관음의 시선인 카메라는 모르간의 것으로도 읽힌다. 거기에 레이디 역시 모르간의 휘하에 움직이는 존재라고 인지한다면 대상과 감시자 이상의 사회적 금기의 코드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법으로써 금지한 고대 시대 부족 내의 최초의 터부로 근친상간을 꼽았다. 특히 어머니와 아들의 근친상간은 태곳적 금기와 훈육의 산물로서 만들어낸 인위적 죄의식으로, 상징적 아버지에 의해 경계된 사랑의 범위이다. 다만 영화와 이론을 관통하는 이 도식화된 관계의 원천이 서양 중심의 문화적 코드라는 점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아버지는 의도적으로 존재를 소거한 문명과 제도라면, 영화는 남성-문명에 칼을 겨누는 여성-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들어선 인간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영화에 나오는 중심인물로 아시아인이라는 점은 동양과 신비로운 마법을 연결 짓는 오리엔탈리즘이면서 동시에 영화 속 유색인종인 가웨인이 유럽-백인 사회의 엘리트 중심 원에서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모르간이 짜 놓은 거대한 계획의 마무리는 아들이자 한 청년의 고난 끝에 찾아오는 값진 성장이라는 해피엔딩일까. 감독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 전반을 감싸는 비관적이며 냉소적인 시선은 몽환적인 사건들이 계속되며 한 청년의 불안에서 인간 전체의 죽음과 삶의 불안으로 이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그 냉소적 기운은 이미 드러난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저 멀리 집안에서 창문 밖으로 커지는 불길이 보인다. 가축들이 뛰어노는 아래는 평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벽에 기대 누워있는-아마도 모종의 이유로 의식을 잃어 보이는- 사람과 덩그러니 서 있는 말이 있다. 이후 담 밖에서 남자와 여자가 들어서고 여자는 말을 타고 남자는 칼을 빼 든다. 무기를 집어 들고 바삐 움직이는 두 사람을 통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음을 예측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끝내 설명해 주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전체 내용을 집약하면서도 결말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 나타난 인간의 본성은 폭력과 욕망, 그리고 혼란이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예수가 태어난 날, 축복이 가득해야 할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처음 봐야 할 것은 그렇게 성스럽지는 않고, 축복도 없는 인간의 실태이다. 그렇다면 이 모두를 바라보는 모르간, 그린 나이트,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자연’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이 세상을 바라볼까. 아마 저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파괴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웨인은 게임에서 살아남았을까?
크리스마스에 마을은 불타고, 범죄는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런 세상에서 가웨인은 원탁 앞에서 모험담을 당당히 자랑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는 가웨인이 세 번 죽는 장면을 바라본다. 첫 번째는 여정을 떠나기 전 인형극에서, 두 번째는 스캐빈저 일당에게 묶여 백골이 된 채로, 마지막은 게임을 포기한 채 어머니가 준 녹색 허리띠를 평생 차며 죽음을 피하다 종말의 순간 스스로 허리띠를 풀어내는 때이다. 사실 영화 혹은 녹색 기사로 현현된 자연은 가웨인을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이미 그의 죽음을 겨울이 오기 전부터 보았고, 시작조차 하기 전에 백골이 되어 끝나는 가웨인의 운명도 바라보았다. 영화는 어디로 기준을 잡는가에 따라 이후 벌어질 모든 서사가 실은 일어나지 않은 환상이라는 허무 의식을 심어놓는다. 그게 숲에 들어가기 전이든, 용기 없이 도망간 후든 말이다.
가웨인은 게임에서 살아남아 기사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실 잘못되었다. 가웨인은 애초에 기사가 될 수 없다. 그는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스캐빈저에 모든 것을 빼앗긴다. 윈프레드의 요청에 보상만을 바랐고, 환상 같은 거인에게 겁을 먹고, 녹색 기사와의 리벤지 게임에도 수차례 움찔거리며 몸을 사린다. 그는 교환의 논리에만 매몰되었고, 용기라고는 없으며, 성적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최소한 침대 위에서 레이디에게 굴복당한 이 장면을 기점으로도 전통적인 기준의 기사로서 가웨인은 실격이다. 그리하여 모험을 이겨내 기사가 되어 명예를 얻는다는 가부장적 남성성의 신화는 갈기갈기 찢긴다. 용기는 사라지고 욕망만 남은 가웨인의 도덕적 실패는, 남성연대 안에서만 통용될 모험담의 허상만 남아 인간-남성 사회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세 여자 형제의 손에 의해 정성껏 만들어진, 여성의 헌신과 노력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는 부적이나 전리품일 뿐이다. 마지막에 그 의미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다.
거기에 세상을 구원하러 온 예수와 가웨인이 오버랩되며 더 깊은 주제로 확장된다. 첫 시퀀스로 다시 돌아가,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카메라는 잠에 빠진 가웨인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냅다 물벼락을 맞는 그의 앞에 에셀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태어나셨어요.” 막 잉태되어 흠뻑 젖은 인간을 연상케 하는 이 모습과 에셀의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영화에 처음 등장한 가웨인의 모습을 겹쳐놓는다. 여러 고난을 거쳐 인간에서 신이 된 예수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연인인 에셀/레이디는 공교롭게도 한 배우가 연기한 1인 2역이다. 사창가의 창녀와 우아한 귀부인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연상하게 한다. 여성성의 이중구조를 투영해 남성의 페티시즘을 충족하는 존재로 취급되어 있지만 그의 진면모는 누구보다 현명하다. 에셀/레이디는 유혹과 회유를 거듭하고 질문과 정답을 말한다. 사랑에 용기 있게 대처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며, 인간 앞의 거대한 자연을 향해 언제나 겸허하여지라는 메시지를 줄곧 던진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 어떤 말도 대답하거나 수긍하지 않는다. 영화는 모르간과 에셀/레이디, 그리고 녹색 기사로 자연과 여성성, 즉 인간 문명과 신화에 객체로 존재했던 대상들을 앞으로 끌어낸다. 이들을 존중하지 않은 인간 사회의 최후는 ‘살아 있는’ 인간 중 가장 위대했던 그를 대표하는 것들의 몰락과 더불어 허위의식으로 꼿꼿한 인간의 목을 날려 버린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가장 강력한 인간의 상징을 내포한 존재도 결국 신화 속의 허상일 뿐이라는 도발적인 냉소를 자아낸다.
영화 후반부 가웨인이 맞닥뜨리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보고 누군가는 영웅의 성장을 만나겠지만 나는 뿌리 깊은 냉소를 본다. 어리석은 인간의 굴레는 끝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기억하고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도 여전히 목은 잘릴 것이다. 원작의 결말처럼 게임에서 살아남은 가웨인이 원탁 앞에서 녹색 띠를 두른 채 거대한 남성연대의 일원으로 들어갔을 때, 영화는 인간의 죄책감과 나약함이 만드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모험의 고난은 살아남은 인간의 자양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여정의 끝에는 거대한 녹색 기사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죽음만이 기다린다. 느리지만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덧없는 명예와 영광에 사람들은 손을 뻗는다. 쿠키 영상 속 가웨인의 딸이 왕관을 집어 드는 모습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의 감정에 관한 거대한 냉소주의적 시선이 읽히는 이유다.
-
- 영화로 개수작을 부리는 감독이 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로 쓸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만 한다. 정성일 씨가 와도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근데 막상 까 보면 타인의 것들과 별 다를 것 없다. 예를 들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리뷰한 글을 보자. 나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고 썼다.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와 진짜 전다. 내가 천재긴 해. 이거 아무도 생각 못할 듯.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쓴 거 읽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안 했다. 이미 알고 있거든. 영화 보고 느끼는 감정이야 사람들 간에 별 다를 바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걸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글은 별로 특별한 것 없을 거라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타인의 리뷰들을 읽지 않았다. 내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나는 찌질함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난 어디에서 자기 계발서를 대차게 깐 적 있다. 근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크게 보면 자기 계발서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라 느끼는 외로움이나 자아 찾기 뭐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책들 중 몇몇 권은 이런 것들을 토픽으로 삼지 않는가? 또 나는 1달 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소통능력이 구린 나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면서 양심에 심각하게 찔린 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고 주변인에게 칭찬했다. 이렇게 나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붙인다는 걸 뻔히 아는 것 역시 찌질함이라 부른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온 허튼짓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서 이 두 가지의 찌질함을 빼놓으면 시체라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찌질함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네 편에 세명의 주연인 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배우가 나온다. 지금이야 정유미-이선균 배우가 인기도 제법 있고 우리에게 친근하지만 이때의 이들은 풋풋한 모습이다. 풋풋함. 감독 홍상수는 이 풋풋함이라는 감정 머리 위에서 관객을 갖고 논다. 네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20대거나 대학 교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하는 건 초등학생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을 보자. 주인공 영화감독 진구는 송 교수에게 '당신 소문이 안 좋은 걸 아느냐?'라고 묻는다. 근데 곧이어 있을 GV에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내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을 듣는다. 전자 상황에서 진구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선 '이 상황에서 이 질문이 맞냐?'라고 역정을 낸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키스왕이다. 친구 옥희를 좋아하는 진구. 진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지만 아무튼 옥희가 좋다. 옥희는 이런 진구의 마음을 전해 듣는다.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옥희. 친구에게 송 교수와 함께 있을 때 즐겁다고 말해 이쪽을 택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진구와 함께한다. 엔딩부에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옥희가 진구에게 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나는 네가 착해서 좋아'라는 말에 '착할게'라고 답한다. 아무튼 나는 너를 위해 착해질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 쪽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세 번째. 폭설 후는 굉장히 짧다. 송 교수는 누구보다 수업에 진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학생이 안 오니 우웨엑 토와 함께 애정을 뱉어낸다. 이 단편에도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가 이뤄진다. 네 번째.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옥희의 영화>다. 주인공 옥희는 젊은 남자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이 든 남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옥희는 나이 든 남자를 고르지 않았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빼곤 별거 없었던 추억이지만 옥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이 보기엔 그냥 진구와 송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떠나가는 추억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특별했으면 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4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붙이며 인간이라면 있을법한 찌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타 감독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찌질함과 합리화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로남불'이 찌질함이라는 것의 본원이겠지.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은 이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소문은 근본적으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의 소문에 관해 들을땐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 근데 또 막상 믿기는 쉬워서 타인을 어렵지 않게 의심한다. 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 때 특정한 가치관 아래에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사나? 아닐 것이다. 내가 직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산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자기모순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이런 모순은 <키스왕>에서도 나타난다. 어쩔 줄 몰라 옥희의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진구. 이 앞에서 했던 말이 재밌다. '나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와 '착할게' 이 두 마디다. 이 말과 진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거면 성격이 잘 맞는 거고. 착할 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맞춰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으면 진구는 옥희를 배려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진구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그럴 것도 없이 옥희와 입을 맞춘다. 연애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진구의 이런 화법과 행동은 개연성을 갖긴 하지만 그냥 주인공은 무작정 옥희랑 사귀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앞 뒤가 다른 행동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지'같은 체계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소문의 속성과 짝사랑-연애로 이뤄지는 과정을 대치시킨 셈이다. 난 이 지점이 분명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원래 앞 뒤 다르다. 신나게 전 애인 험담하다 그들의 전화에 혹하는 게 우리 똑은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 아닌가? 또 남을 욕할 때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 험담하는 사람이라고 욕먹는 주위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타인과 갈등하거나 자기혐오의 빠질 때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살다 보면 이 경험들 한 번씩은 해봤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절대 별개가 아닌 이기심이란 감정을 일상의 에피소드로 표현해 공감을 얻는다.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큐어>를 썼고 봉준호 감독은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작품으로 <마더>를 만들어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면 홍상수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코미디를 그냥 배우 세명에 4천만 원 제작비가 든 4편의 단편영화로 끝내버린 것이다. 일상 속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화로 다가올 때 어떤 느낌인지를 500%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성인 셈이다.
이 천재성은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에서 더 뒷받침된다. 진구가 묻는다. '무얼 원하고 사세요?' 송 교수가 답한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과 내일의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썼던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바로 다음 장면에 '학교 때려치우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송 교수의 대사가 웃겼다.) 네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가 끝이다. 근데 이 등산과 하산만으로도 영화라는 예술의 전부를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그냥 에피소드인 이야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무언가와 비교한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골라 다른 것과 작별한다. 이걸 겉으로 드러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티를 내면 찌질함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을 보며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며 자위한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의 행동이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 상황이니까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외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우리라고 해서 꼭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찌질해서인지 그 영화의 장면과 과거의 에피소드 하나를 같다고 여기거나 '내가 저거보다 낫지'라며 조소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를 해 버리는 것이다. 또 내 어떤 것과 현재의 어떤 것을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네 번째 영화의 등산과 하산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왜 홍상수의 영화 내지는 영화라는 장르를 보며 공감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제목이 <옥희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의 답은 굉장히 쉽다. 우리는 대체로 못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고 모두에게 소심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거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라고 여긴다. 잠깐, 이거 우리 모르나?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상처를 호소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얻는다.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리화를 한 채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것들을 떠나보낸다. 무한 반복이다. 우리는 이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 속에 산다. 내가 찌질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 홍상수는 이렇게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포착해 또 네 개의 단편영화로 접근한다. '너 이런 거 내가 다 알아!'라는 말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닌 네 가지의 단편을 통해 전체로서의 의미는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공감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수작 같은 영화다. 사실 까고 보면 되게 별거 없는데 그저 이성을 꼬시기 위해 사용하는 개수작 화법인 셈이다. 영화 전면에 주제의식은 사실 별거 없고 느끼는 감정만을 따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그것마저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나 너희들 마음 다 알아.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고. 그러니까 내 영화에 의미 같은 거 찾지 마.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니들 이야긴 거 아니까 너희들 마음은 이미 내 거야.' 뭐 이런 식의 개수작인 셈이다. 우리 대부분의 영화 아니 문학작품은 메시지란 게 있지 않은가? 근데 홍상수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있어 보이는 말로 주류와는 다른 본인의 세계를 확고히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관객에게 주입시켜 '와 이 사람 전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는 이 논리에 설득당하는 바보들이다. 조명도 별로고 화장도 안되어있고 관통하는 서사도 심심하며 예산도 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꼬인 물고기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우리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무엇을 비교하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 홍상수는 우리에게 좋은 솔루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나도 그에게 설득당했다. 아마 신작을 우리 지역에서 볼 수 있다면 보게 될 것이다.
-
- 꿈결의 사랑에 기대어
SYNOPSIS.
뉴욕 맨해튼에서 홀로 외롭게 살던 ‘도그’는 TV를 보다 홀린 듯 반려 로봇을 주문하고 그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해수욕장에 놀러 간 ‘도그’와 ‘로봇’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휩쓸려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데··· “기다려, 내가 꼭 다시 데리러 올게!”
POINT.
✔️ 대사 없는 애니메이션인데, 대사 공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촘촘한 연출력!
✔️ 색감도 아름답고 음악도 귀에 딱 붙는 명작
✔️ 도그와 로봇의 관계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몽글몽글... 이건, 사랑입니다
✔️ 스페인 애니 낯설다고? 배경은 뉴욕 맨해튼! 감독 오피셜, 뉴욕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자 뉴욕 오마주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정서가 펼쳐져요.
✔️ 칸영화제 특별 상영에서 최초 공개되어, 지금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후보로 노미네이트! 쟁쟁한 기술력의 작품들 사이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작품을 만나 보세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는 순간, 보기도 전에 마음이 퐁당 녹았다. 따뜻한 관계와 갑작스러운 이별... 그 애틋함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모르니까. 뚜껑을 열어 보니, <로봇 드림>은 그런 기대를 기분 좋게 충족시키는 영화인 동시에, 뜻밖의 면면으로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어떤 사랑은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도그를 비롯해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동물로 표현되고 있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어렵지 않게 도그에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다. 차갑고 어두운 도시의 밤, 2인용 게임도 혼자 해야 하는 도그는 외로움을 감출 수 없는 캐릭터다. 창문으로 보이는 이웃집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부러워 하기도 하고, 레토르트 식품을 혼자 데워 먹기도 하면서, 그는 외로운 생활을 채워 가고 있다.
그러다 문득 텔레비전 광고 속에서 보게 된 한 마디. "외로우십니까?" 그리고 마치 홀린 듯이 '반려 로봇'을 주문한다. 그냥 지나치려면 지나칠 수도 있었을 광고를 보게 된 것, 그런 순간도 어쩌면 운명적 순간이라 할 수 있을까? 답은 광고 이후의 관계에 달렸을 것이다. 두 존재가 특별하게 맞닿는다면, 그 시작점이 어떻게 운명이 아닐 수 있겠어.
'친구'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Amigo/Amiga를 연상케 하는 (이탈리아어로 친구가 Amico/Amica이기도 하다) 로봇이 배달되고, 도그는 조립을 시작한다. 마침내 두 존재가 서로 눈을 마주쳤을 때, 둘에게는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어떤 사랑은 그렇게 눈 마주치는 순간 시작된다. 당연한 것처럼, 더없이 자연스럽게.
둘은 더없이 행복하다.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는 곧 둘의 주제가가 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도시의 주인공이다. 더이상 도그에게 어둡고 차가운 밤은 없다. "우리가 밤에 춤을 출 때 별들이 어두운 밤을 걷어가던 걸 기억하나요?" 노래 가사처럼 이제 그의 일상은 반짝거리고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리움은 사랑의 그림자
그러나 둘의 관계는 신나게 해변을 찾았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이별로 귀결된다. 이후 둘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장면 하나하나가 정서를 어찌나 고스란히 담아내는지, 내가 연애하다가 헤어진 기분이 들 정도로 도그와 로봇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꿈결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 어쩌면 꿈처럼 기묘하게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트라우마처럼 남은 꿈에도, 무지개와 꽃으로 아름다운 꿈에도, 서로가 어른거린다. 그리움은 사랑의 해질녘 그림자가 아닐까. 사랑이 긴 만큼 더 길고 검게 늘어져, 둘을 놓아주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은 돌봄의 방법을 아는 것
로봇과 도그는 서로의 유일무이한 친구로서 우정을 주고 받았을 수도, 아니면 독점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연인 같은 관계였을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거니와, 관계를 무엇이라고 명명하는지가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둘이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을 온전히 기쁘게 즐겼고, 헤어지고서는 깊이 그리워했다는 것. 웬만한 로맨스 영화보다 깊게 그 기쁨과 슬픔을 전달한 영화는 이내 결말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관계에서 배운다. 처음 로봇이 도그의 손을 너무 꽉 잡아 아팠지만, 이내 적절한 세기로 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만남을 통해서도, 만남이 지속되는 시간을 통해서도, 헤어짐을 통해서도, 헤어짐 이후의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는 배운다. 도그와 로봇이 주고받는 마음과 달라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내 사랑의 기쁨과 슬픔 사이에 하나를 슬며시 추가하고 싶어진다. 그건 돌봄이다. 서로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아는 것. 돌봄 없는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성 같다.
2시간 넘는 영화가 남발하는 세상에, 100여분의 산뜻한 러닝타임 안에서 영화는 그 모든 감정들을 고스란히 쏟아내고, 별사탕을 가득 받은 사람 같은 기분이 되어 기분좋게 영화관을 떠나게 만든다.
그런데 모두가 별사탕처럼 사랑스러운 것들만 끌어안고 있는 가운데, 나는 어쩐지 도그와 로봇에게서 자꾸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읽어내게 된다. 동물이 숱하게 유기되고 학대 당하는 사회에 살기 때문이겠지만, 서로를 기억하고 주고받는 감정은 분명 대등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한쪽을 구매하는 형태로 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 어쩐지 마음에 자꾸 남는다.
하긴, 반려동물과 주고받는 감정은 우정과 사랑 모두를 아우르는 커다란 마음이니, 그렇다고 해도 꼭 이상하지는 않겠다. 내게도 몇 년째 꿈결에 그리워하는 동물 얼굴들이 있으니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얼굴들을 생각하면, 로봇과 도그의 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헤어지지 말자. 이 위험한 도시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일상의 낭만과 행복을 들이마시자. 우리만의 노래를 틀자. 그리고 혹시 헤어진다면, 꼭 다시 행복해지자.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5] 순수와 희망에 관하여 (with. 김시진 감독)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00:00 인트로 01:12 [대부]이야기 04:12 작가로서의 삶 05:53 [바다 저 편에] 이야기 14:59 아역배우 연출에 대하여 17:29 희망에 대한 이야기 21:29 순수함에 대하여 28:47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 43:29 괜한 이야기를 하였나…? 46:16 앞으로 이야기 47:42 마무리
-
- 영화 캐시트럭 후기 / “제이슨 스타뎀” 2년만에 컴백 / 아들을 잃은 마피아 아버지의 복수 / 믿고 보는 “가이 리치” 감독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캐시트럭”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
- 넷플릭스 <코브라 카이 시즌 4> 공식 예고편
넷플릭스 코프라 카이 시즌 4 공식 예고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