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4-10-09 20:38:45
[BIFF 데일리] 주저앉은 진심 사이 찾아온 죄책감의 그림자.
영화 <바늘을 든 소녀> 리뷰
매그너스 본 혼 감독이 연출한 <바늘을 든 소녀>는 제7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이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월드 시네마 섹션에서 상영된 영화이다. 연쇄살인마 다그마르 오베르뷔의 실제 사건을 각색한 작품으로 전쟁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통과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군수 물품을 생산하는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카롤리네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하루아침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 뒤 그의 소식은커녕 생사도 알 수 없었던 터라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다. 남편의 죽음을 짐작했던 카롤리네는 공장 사장이 관심을 가지는 마음에 이끌려 사랑을 나눈다. 그 후 임신을 하게 된 카롤리네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꾸지만 그녀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있던 그때, 카롤리네는 다그마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 희망을 다시 찾아가는데...
자신이 겪은 것이 쾌락에 가까운지 고통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녀는 결단의 순간, 비로소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그 과정을 그리는 방식이 극단적이라 느낄 수 있지만 처음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한다. 비로소 상처를 공유하게 된 이들은 온전한 사랑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거듭 희망을 갖고 자신의 삶의 변화를 꿈꾸지만 그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으며 세상은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진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죄책감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직 이 위기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의 선택을 감히 비난할 수 없다.

영화는 시대적 고통 속에서 개인이 내리는 선택과 그로 인한 비극을 깊이 있게 다룬다. 또, 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이 영화는 전쟁이 남긴 상흔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그 상흔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넘나들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묘사한다. 남성에게는 얼굴에 남은 상처를, 여성에게는 몸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는 식이다. 용기와 결단, 사회적 억압과 개인적 비극이라는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공통점은 그 누구에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성이 상실되는 시대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잔혹함과 그로 인한 고통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여성으로서 느끼는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는 용기와 결단이 드러나는 부분이 명확히 그려져 좋았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죄책감을 딛고 용기를 내는 부분이 마음을 울린다. 그러나 돌아온 남편의 이야기와 그의 상처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하게 다뤘다면 영화의 깊이가 더욱 풍부해졌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남편이 전쟁에서 돌아오면서 겪는 내적 갈등과 외적 상처는 단순히 전쟁의 피해자로서의 모습을 넘어 전후 사회에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 같다.
영화가 전개되며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초반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었던 부분은 후반부에 보여주지 않았던 것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온전히 들여다보기엔 다소 충격적인 모습이다. 마치 똑바로 현실을 바라보라며 바늘로 관객을 콕콕 찌르는 듯한 연출이 인상 깊었다. 잔잔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영화였다. 초반부와 후반부가 전혀 다른 반전이 인상 깊었던 영화였다. 그만큼 에너지가 폭발적이지만 관객도 따라서 진이 빠지는 빠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믿음은 양면적이면서도 모순적이다. 전쟁의 시작처럼, 모든 관계의 시작은 믿음과 신뢰지만 한 번에 무너지는 잔혹함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온다. 거듭 사람에 의해 배신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꾸려나가게 되는 것은 여전히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은 마치 결말이 정해진 것처럼 당연하게 시작됐다. 그 이름을 미리 알려줘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는 참혹한 시대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다소 잔잔한 흐름이다. 오히려 우울하기까지 하다. 초반에 기대했던 강렬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지만 충격적인 장면이 잔잔하게 가슴을 후벼 판다. 시대가, 사회가, 그리고 개인이 분열되는 그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이다.
영화 상영 정보
10월 3일 16:30 CGV 센텀시티 5관
10월 6일 20: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10월 10일 20:00 CGV 센텀시티 7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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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 '잿빛 도시를 향해 뿜어진 붉은 복수심과 광기’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Sweeney Todd: 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
개봉일 : 2008.01.17 (한국 기준)
감독 : 팀 버튼
출연 : 조니뎁, 헬레나 본햄카터, 앨런 릭먼, 티모시 스폴, 시챠 바른 코헨, 제인 와이즈너, 제이미 캠베 바우어
‘잿빛 도시를 향해 뿜어진 붉은 복수심과 광기’
잿빛으로 물든 세상에 빛과 구원은 없다. 파랗게 질려버린 하늘만 남아있을 뿐.이발사 벤자민 바커는 탐욕으로 가득 찬 터핀 판사에 의해 모든 걸 빼앗긴다.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볕 아래 아름답게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잃은 그에게 남은 건 복수와 악에 받친 광기뿐이다.
<스위니 토드>엔 팀 버튼 감독 특유의 음울한 색채가 가득 담겨있다. 권력에 의해 인생을 약탈당한 벤자민 바커는 ‘스위니 토드’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재를 뿜어내고 있는 새까만 도시로 돌아온다. 무채색에 가까운 낮과 밤. 스위니 토드가 바라보는 무채색의 도시엔 고유한 아름다움과 색을 뽐내고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갇혀있는 듯 정적이고 새까맣다. 하지만 그중, 유독 강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색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빨간색이다. 복수, 광기라는 단어와 빨간색이 합쳐지면, 이 색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략 감이 오지 않는가.
이 이야기는 마치 언젠가 유행했던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같다. 선혈이 낭자하고, 단단할 거라 예상했던 사람들의 신체가 한순간에 뭉개진다. 모자람 없이 기괴하다. 다소 잔인하기도 하며 허망하다. 소중한 사람을 되찾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으로 돌아온, 복수심만 남은 잔혹한 이발사의 이야기에 희망 따윈 존재할 수 없었던 걸까.
스위니 토드 시놉시스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함께 행복한 남자 벤자민 바커(조니 뎁). 그러나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악랄한 터핀 판사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그 후로 15년. 아내와 딸을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복수를 위해 스위니 토드로 거듭나 이발소를 연다. 그날 이후 수 많은 신사들이 이발하러 간 후엔 바람같이 사라져 나타나지 않고, 이발소 아래층 러빗 부인(헬레나 봄햄 카터)의 파이 가게는 갑자기 황홀해진 파이 맛 덕분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데. 그런데 스위니 토드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바커가 아냐. 그는 죽었어.”
아름답고 다정한 아내, 작은 숨을 내쉬고 있는 딸을 품에 안았던 벤자민 바커는 이제 없다. 벤자민 바커 가족이 떠나고, 그의 면도 칼이 2층 마루 밑에 묻힌 날. 벤자민 바커라는 인물은 사라진다. 터핀 판사에 의해 끌려간 감옥에서 지옥 같은 15년을 보낸 그에게 남은 건 스위니 토드라는 새 이름과 분노뿐이다. 다시 돌아온 런던은 15년 전 그날에 비해 더 진한 잿빛이 되어있었다. 어둠 속에 갇혀있던 면도칼과 이발 도구가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간 날 밤. 스위니 토드는 면도칼을 들고 이제 곧 루비처럼 새빨간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 말한다.
러빗 부인은 아내 루시가 독약을 먹었다며 스위니 토드가 떠난 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해 준다. 자신의 수모로도 모자라 사랑하는 아내를 농락하고, 거기에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어린 딸을 데려간 파렴치한이라니. 스위니 토드의 분노는 하늘 끝까지 치솟는다. 하지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아직 살아있는 딸을 만나기 위해, 저 위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터핀 판사를 한 번에 잡기 위해서.
스위니 토드는 때를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긋는다. 서서히 광기에 말려들고 있던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들킬 위기에 처하자 폭발해버린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물을 끓이고 있던 주전자로 피렐리의 머리를 내리친 순간, 15년간 쌓아왔던 분노와 원망, 광기가 터져 나온다. 한 번에 터져 나온 그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러빗 부인은 스위니 토드의 옆에 딱 붙어 그가 살해한 사람들로 파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육즙이 줄줄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파이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세상이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 그리고 어린 토비는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 러핀 판사와 그의 수족인 비들은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러핀 판사는 피고인보다 높은 판사석에 앉아 무심하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피고인은 어린아이였고, 진짜 범인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범인인지 확실치 않아도 어차피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 할 뿐.
러핀 판사는 높은 곳에 앉아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가진 거라곤 사랑하는 가족뿐인 벤자민 바커의 가정을 파탄 내고, 그의 아내를 미치광이로 만들고, 홀로 남겨진 딸, 조안나를 자신의 집에 가둬둔다. 그리고 악을 구원하겠다며 어린 조안나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은 어차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이니, 아랫놈이 윗놈을 잡아먹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면도를 하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간 남자들은 목이 그어진 채 건물의 지하로 떨어져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다. 아랫놈을 잡아먹는 윗놈에 대한 복수심으로 시작된 잔혹한 일이었다.
근데 이 복수가 참 아이러니한 게, 결국 스위니 토드의 손에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스위니 토드에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연고가 없는 남자들이다. 우아한 옷을 차려입고, 부채를 펄럭이는 아내와 함께 온 남자는 연고가 있다는 이유로 무사히 살아돌아가고, 그렇지 못한 남자들은 스위니 토드의 손에 죽게 된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함은 스위니 토드가 딸 조안나와 마주치는 순간과 루시의 목을 긋는 순간 절정에 이른다. 복수에 성공한 직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딸의 얼굴을 마주한 스위니 토드는 딸에게 내 얼굴을 잊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아는 사이지 않냐고 물어오던 아내의 목을 긋는다.
그토록 궁금하고 그리웠던 딸에게 건넨 유일한 한마디는 나를 잊으라는 명령이었고,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건 러핀 판사가 아닌 광기로 가득한 자기 자신이었다.
스위니 토드는 뒤늦게 사실을 알고 러빗부인을 오븐에 가둬 태워버린다. 복수는 모두 성공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나의 면도칼에 목을 베인 아내와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딸의 존재뿐이다. 스위니 토드가 토해낸 피는 루시의 얼굴을 타고 흘러 바닥에 닿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끈적하게 더러워진 바닥 틈새를 파고든다.
이 복수 계획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걸까. 라고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고귀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자의 피는 벽과 바닥을 타고 톱니바퀴 위에 떨어진다. 피는 톱니바퀴 사이를 파고들고, 톱니바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피는 흐르고 흘러 결국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 하수구를 타고 흐른다. 그들의 피는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를 돌리는 톱니바퀴 사이에서 사정없이 짓이겨지고 있다.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서 윗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피는 점점 더 아래로, 더 깊은 곳으로 흘러내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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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브스턴스>, 진정한 '억압받은 것의 귀환'
<서브스턴스>, 진정한 '억압받은 것의 귀환'
영화 비평을 하다 보면, 나와 관객 속 나를 분리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서브스턴스>는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좌석에 앉아 있는 한 여성으로서 나는 프레임 단위로 영화를 분석할 수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그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 그녀가 느끼는 혼란과 자멸감을 함께 느낄 뿐이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반짝이는 분홍색 별로 각인된 엘리자베스 스파클 이름이 점차 잊히고 더럽혀지는 간결한 씬은 영화를 관통한다.
그럼에도 한 번 더 요약해보자면 <서브스턴스>는 가장 날 것의 나를 들춰 눈앞에 들이미는 영화다.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심연에 묻힌 기억을 기어코 끌어내 관객석에 앉히는 영화다. 무심코 들어갔던 영화관 화장실 문에 붙은 다이어트약 랩핑 광고, 강남역 인근의 성형외과 버스 광고, 젊은 여성들이 MC로 대체되며 이어지는 프로그램 명줄. 자기 관리라는 이름 아래 깎아 만들어지는 수많은 육체들이 영화관 안팎을 걸어 다닌다. 영화는 이 모든 사실을 '고어틱'한 장면으로 고발한다. 기괴한 쇳소리로 소리친다. 그러니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리라고. 이것이 <서브스턴스>의 끔찍한 고어함이 영화의 주제보다 더 주목받지 않았던 이유다.
척추에서 탄생한 이상적인 아름다움
가장 끔찍했던 건 고어한 장면이 아닌, 척추를 찢고 나온 어리고 예쁜 엘리자베스인 수(마가렛 퀄리)가 익숙해졌을 때다. 혹은 포르노에 가까운 모닝 에어로빅 쇼 총괄 책임자의 입안으로 탱글탱글한 새우가 누런 이에 갈려 으깨 들어갈 때였거나. 스물다섯 살 전후로 매력적인 여성의 생명이 나뉜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장소, 레스토랑 식탁에서 스몰토크로 소모된다. 이 불합리함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노화된 피부와 처져버린 몸을 탓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출처가 불명확한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체내에 주입하는 데에 논리적인 사유를 친절히 다루지 않는다. 이젠 늙어버린 엘리자베스와 달라진 대우가 모든 이유를 대신한다. 서브스턴스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모습으로 일주일을, 다음 일주일은 또 다른 자신인 수로 지낼 수 있게 된다. 수는 이십 대의 얼굴과 젊고 탄탄한 몸을 가진 이상적인 여성의 외형을 띤다. 결국 형광빛을 띄는 노란 약물이 비극을 만들어내지만, 엔딩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는 이들이 한몫한다. 엘리자베스를 대신할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수의 외모와 관능적인 몸매를 보고 환호하는 대중들. 얼굴에서 귀가 떨어져 나와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수를 향해 오늘도 아름답다는 칭찬을 하는 관계자들. 이 맥락에서 영화는 기존의 호러 장르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혐오에서 파생된 피와 살
<서브스턴스>는 신체 변형을 소재로 한 '바디 호러' 장르이면서 동시에 질서와 규범을 파괴하는 위반의 호러 장르로써 자리한다. 으레 호러 장르에서는 억압하고 숨겨놓은 것들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과잉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가령 피해자로 그려지던 여성이 막강한 여귀로 등장하는 것이 있다. <서브스턴스>의 경우 엘리자베스가 나이 든 노인을 넘어선 징그러운 외형을 띈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공포를 자아내게 만드는 대상은 사실 우리가 배제하고 혐오해 온 결과물의 집합체라고. 영화는 혐오의 기반이 되어왔던 늙고 병든 여성의 몸으로 고발한다. 기괴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 피를 내뿜는 엘리자베스를 보여주는 엔딩씬이 필요했던 이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억압받아온 것의 귀환'이기 때문이다.
극중 배경은 미국이다. 그리고 <서브스턴스>는 국내 55만 관객 수 돌파라는 이례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이후 약 11년 만에 해외 청소년관람불가 예술영화가 사십만 이상 관객을 모은 쾌거다. 이것의 기반에는 젊은 여성 관객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대부분 여성 또한 외모 강박과 함께 자라났다. 너 좀 뚱뚱한 거 같아.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 말을 듣고 무리한 절식으로 한 달 만에 14kg가량을 감량했다.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은 성형외과 상담 예약을 했다. 한창 커야 할 여자아이들이 튼튼한 뼈를 갈아 마시며 '더 나은' 몸을 탄생시켰다.
서브스턴스는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중안부 정병의 시대다. 중안부가 길면 남상과 노안의 이미지가 강해진다는 주장은 설화가 되어 여성들의 입에서 눈과 손으로 전해진다. 중안부 커버 메이크업과 동안 얼굴형을 위한 성형 시술 영상이 유튜브에서 성행한다. 더 어려 보이기 위해서 귀 뒤에 테이프를 붙여 쫑긋 세우는 방법이 여성 출연자만의 비법으로 송출된다. 방금 영화를 보고 나와서 탄 지하철 옆자리의 여성이 코 수술을 검색하는 핸드폰 화면이 보인다. <서브스턴스> 속 장면들은 한국의 일상에서 철저히 치환이 가능하다. 지독하리만치 완전하게. 영화의 주요 대사였던 'REMEMBER YOU ARE ONE'은 서브스턴스 약물을 주입하지 않은 현실에서도 쉽게 성립될 수 없다. 단어는 바뀌더라도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디에든 수많은 엘리자베스가 살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척추를 짓이기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사랑받고 싶어서 울부짖는. 왜 너 따위가 나왔냐며 나를 향해 주먹과 발차기를 기꺼이 행하는.
나는 이들의 더없이 평범한 자유를 꿈꾼다. 약속에 나갈 때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수백 번 뜯어보며 화장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세월의 흔적이 담긴 자신의 몸을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하고 싶은 일을 예전과 같은 몸과 얼굴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만두지 않아도 되는 자유. 끝끝내 그 분노를 자신을 분열시켜 표출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녀들의 그런 자유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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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연쇄살인범이 설계한 범죄 다큐
일본 스릴러 영화가 개봉하면 눈이 가기 마련이다. 스릴러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29일 개봉한 <사형에 이르는 병>은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웰메이드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로, 감옥에 수감된 연쇄살인범과 그의 편지를 받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진실의 행방은 어느 순간 관객의 발목을 잡아끌고 비밀의 늪으로 데려간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 <사형에 이르는 병> 스틸 / 태양미디어그룹, 와이드릴리즈 제공
<사형에 이르는 병>은 연쇄살인범 야마토(아베 사다오)로부터 시작한다. 평범한 빵집 주인으로 지내며 7년에 걸쳐 24건의 살인을 저지른 연쇄 살인범 야마토. 그는 10대 후반 소년, 소녀만을 골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어느 날, 마사야(미즈카미 코시)는 야마토의 편지를 받는다. “마사야, 내가 저지른 일은 알고 있지? 다른 건 인정하지만, 마지막 살인만큼은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 않겠나?” 과거 야마토의 빵집에 자주 갔었던 마사야는 그 연으로 편지를 받은 것. 어렸을 적부터 우등생이었지만 삼류대학 법학과에 진학하며, 자신감도 삶의 목표도 상실된 채 살아간 마사야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달라는 편지를 확인한 후, 그 사건에 점점 빠져든다.
영화 <사형에 이르는 병> 스틸 / 태양미디어그룹, 와이드릴리즈 제공
콘셉트가 독특하다. 24건 중 단 1건의 살인을 부정한 연쇄살인범, 그리고 그를 대신해 진범을 찾아 나서는 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구미를 당긴다. 진실에 다가서려고 했을 때 맞닥뜨리는 마사야의 숨겨진 가족 이야기, 그리고 살해된 이들의 공통점(공부를 잘하고, 똑똑하며, 매사에 뭐든 열심히 하는 18~9세의 고등학생)이 오히려 진실로 가는 길을 흐릿하게 하면서 장르적 쾌감이 한 층 더 살아난다.
야마토가 제기한 이 살인사건의 비밀은 진짜 다른 진범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야마토의 감언이설에 마사야가 휘둘리는 것인지, 아니면 마사야 집안이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등등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한다. 특히 야마토가 왜 마사야를 찍어,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찾게 했는지 가장 궁금한데,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실이 숨겨져 있다.
영화 <사형에 이르는 병> 스틸 / 태양미디어그룹, 와이드릴리즈 제공
영화의 장르적 재미는 범죄 다큐를 보는 듯한 구성도 한몫한다. 마사야가 야마토의 범죄 사건을 파헤치면서 이어가는 구성은 야마토의 범행 동기와 살인 패턴 등 실제 범죄 사건을 방불케 하는 요소들이 연출되면서 그 매력을 살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결핍’이란 약점을 교묘히 공격하며, 결국 자신의 성취물로 여기는 연쇄살인마의 특성이 강조된다. 진행될수록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이 부분은 영화의 주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마사야를 통해 부각된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삼류 인생을 살아가는 마사야의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야마토의 부탁과 고마움, 칭찬으로 메워진다. 사건에 집중할수록 마사야는 점점 야마토를 닮아가게 되고, 이 모습은 어쩌면 범죄라는 건 전염병처럼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차별과 멸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누군가에게 쉽게 옮겨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건 배우의 힘. 특히 야마토 역을 맡은 아베 사다오다. <이름 없는 새>를 통해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는 선악이 공존하는 연쇄살인범의 연기를 소름 끼치게 연기한다. 동네 빵집 사장님처럼 푸근하고 선한 얼굴을 갖고 있다가도,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 광기에 어린 얼굴로 변하는 그는 영화에서 1인 2역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사형에 이르는 병> 스틸 / 태양미디어그룹, 와이드릴리즈 제공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건 배우의 힘. 특히 야마토 역을 맡은 아베 사다오다. <이름 없는 새>를 통해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는 선악이 공존하는 연쇄살인범의 연기를 소름 끼치게 연기한다. 동네 빵집 사장님처럼 푸근하고 선한 얼굴을 갖고 있다가도, 본색이 드러나는 순간 광기에 어린 얼굴로 변하는 그는 영화에서 1인 2역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사형에 이르는 병> 스틸 / 태양미디어그룹, 와이드릴리즈 제공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사야와 이야기를 나누는 면회실 장면.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서 마사야를 움직이게 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처럼 보인다. 특히 유리막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마사야의 얼굴과 겹칠 때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마사야 역을 맡아 진실을 찾아 헤매는 미즈카미 코시, 마사야 엄마 역으로 비밀을 간직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나카야마 미호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연기를 보여준다.
물론, 소재는 특이하지만 장르 문법을 오롯이 따라가면서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 야마토의 플래시백을 통해 보여지는 살인 및 고문 장면의 수위가 다소 높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친절한(?) 연쇄살인범이 설계한 범죄 다큐에 참여하는 건 관객의 몫. 편지는 이미 우리 앞에 도착했다.
평점: 3.0 /5.0
한 줄 평: 친절한 연쇄살인범이 설계한 범죄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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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가장 손쉽게 불안을 감추는 방법
<독립시대>는 인상적인 자막으로 시작한다.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공자의 다짐과 그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하냐는 제자의 물음. 곧바로 영화의 배경이 될 타이페이가 가난을 극복하고, 세계 부자 도시로 거듭났음이 텍스트를 통해 전해진다. 이어지는 이미지는 직전의 묵직한 말과는 상반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롤러스케이트를 비추는 클로즈업.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인물이 롱샷으로 비춰진다. 잘 나가는 연극의 연출가로 유추되는 한 남자는 롤러스케이트에 의지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며 기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다. 입도 발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 기자 또한 끝없이 몸을 움직인다. 언뜻 보기에 그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 보인다. 기자들과 함께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그의 불안을 읽었다. 정박된 카메라, 끝없이 움직이는 인물. 풍요를 맞이한 대만 사회는 평온해 보이나, 실상은 혼란스럽다. 제자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풍요, 그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다음 컷은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표절 의혹에 휩싸여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절망한 인물. 그의 친구인 몰리는 묻는다. “그런 비극적인 몰골로 희극을 하겠다고?” 거창한 공자의 말로 시작한 이 작품은 전례 없던 풍요의 시대에도 여전히 불안한 청년들의 일상을 비추며, 본격적으로 당시의 대만 사회로 시점을 이동시킨다.
이 작품의 시작을 장식하는 인물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버디이나, 사실 작품에서 그의 비중은 크지 않다. 대신 이 작품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몰리, 그녀와 약혼을 앞두고 있는 재력가의 아들 아킴, 몰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비서인 치치, 그리고 그녀의 보수적인 애인 샤오밍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이 작품을 얄팍하게 요약하기는 쉽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중심으로 흔들리는 네 사람의 일과 사랑, 그리고 우정의 이야기.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갈등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 이 정도로 이 작품을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 너머의 이야기가 있다.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치치다. 치치는 몰리의 비서로서 표절 사건의 해결사이자, 겉보기에 모난 데 없는 호감형의 인물로 모두의 환심을 사는 인물이다. 게다가 뛰어난 미모로 극중에서 말하는 ‘보조개 미소’를 항상 장착하고 다니는 치치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다. 언제나 친절한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은 관심을 표하고, 몰리를 비롯한 여자들은 그녀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런 다정한 성격 탓에 그녀는 수많은 갈등 상황의 중재자가 된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도 아닌 갈등 상황들에 휘말려 들어가는 그녀. 어느새 그녀의 매력적인 ‘보조개 미소’는 타인에 의해 ‘위선’적인 미소로 재단 당한다. 표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몰리의 형부에게 그런 가식적인 미소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정도는 그녀에게 익숙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한 친구인 몰리마저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건넨다. “그 미소로 눈길은 끌겠지만, 미소 속에 숨겨진 속은 모르겠어.” 사실 이런 치치의 태도는 영화의 태도와 닮아있다. 치치가 언제나 ‘보조개 미소’를 달고 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 잠깐 진지한 생각을 해볼라치면 그런 시간은 사치라는 듯 관객을 웃긴다. 물론 몰리와 치치, 치치와 샤오밍의 관계에도 어두운 면은 있다. 그러나 작품은 주인공들의 얽히고설켜있는 관계를 이용해 진지한 순간을 손쉽게 빠져나간다. 가끔 인물들이 자신들의 고뇌를 논하느라 진지해질 법하면, 아킴과 버디를 필두로 한 인물들이 등장해 웃음을 주는 식이다. 뼈가 있는 웃음이더라도 웃음은 웃음이다. 참으로 희극적인 영화가 아닌가.
웃음은 사실 불안을 숨기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나 또한 그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어떤 불행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능력, 심지어는 그 불행을 그저 웃음거리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나의 재능 중 하나다. 이렇게 불안을 끝없이 통제해 온 나는 내 삶이 내가 연출하는 영화이길 바랐다. 노력한다면 원하는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연극에 가까웠다. 아무리 불안을 웃음으로 감추어 봐도 변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등장하고 NG가 난다. 영화라면 다시 찍으면 될텐데 연극은 그렇지 못하다. OK컷만을 건져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자꾸 많은 것이 어긋난다. 오프닝 시퀀스에 버디는 말한다. “인생은 연극이고, 연극이 곧 인생이에요.” 그의 말은 단순히 연극인으로서 자신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연극이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를 감당하고 사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희극 같은 이 작품을 잔뜩 웃으며 즐기고 나면, 아름다운 엔딩이 우리를 반긴다. 서로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며 헤어짐을 말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얼굴에 아쉬움이라곤 없어 보인다. 치치는 말한다. “모두가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면 자기 자신은 누가 지키겠어?” 이때 실질적인 주인공인 치치가 어떤 ‘독립’을 하는 엔딩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아름답게 어긋난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샤오밍에겐 어쩐지 후회가 느껴진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 치치가 그를 반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산뜻하게 말하는 치치. 샤오밍은 그녀를 꽉 안는다. 꽉 닫힌 해피엔딩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엔딩은 영화 <아사코>의 엔딩과 겹쳐 보였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음에도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두 사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던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은 내치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구한 집의 베란다에 선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는 아름답다고 말했던 강을 보며 남자는 다른 말을 한다. “더러운 강이네.” 여자는 답한다. “그래도 아름다워.” <독립시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나아질까. 그것은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샤오밍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실패를 각오하고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서있던 두 사람은 최소한 지금만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하는 나이고, 우리이다. 그럼에도 함께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나는 실패에 대해서라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굴 것이다. 또 바보같이 능숙한 연기를 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문 앞에 서겠지. 풍요도 관계에 대한 갈증과 불안은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독립’ 없는 ‘독립시대’의 흥미로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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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서 보내온 빛으로 쓴 시
빛으로 시를 쓴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듯이 희망보단 절망에 가까운 대도시 뭄바이의 세 여성. 이들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아주 작은 빛으로 그들만의 삶을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을 이해하고 손을 맞잡는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발리우드 영화가 곧 인도 영화라는 고정관념을 확실히 깨뜨리는 작품인 동시에 더 나아가 지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인도 여성들의 고단함을 영화적으로 수놓는다. 그것도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인구 2,000만명의 대도시 뭄바이의 한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세 여성 프라바(카니 쿠스루티), 아누(디브야 프라바), 파르바티(차야 카담)는 저마다 말하지 못할 근심이 가득하다. 프라바는 독일로 일하러 떠난 남편과 1년째 연락이 되지 않고, 아누는 사람들 몰래 무슬림 남자와 연애를 즐긴다. 파르바티는 20년 넘게 살았던 집이 개발되면서 불법 거주가 신세가 되어 살 곳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은 반복되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상황에서 고향을 떠나 거대한 도시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서로를 위해 손을 내민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 부재한 것은 빛, 시간, 그리고 사랑이다. 밤이 찾아와도 빌딩, 야시장, 거리 등 불이 꺼지지 않는 뭄바이지만, 정작 세 인물에게 드리워진 빛은 찾아보기 힘들다. 낮에는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의 얼굴을 비추는 빛이라고는 고된 몸을 이끌고 타는 기차 안이나 집 안 조명밖에 없다. 영롱한 빛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들이 처한 환경은 불도 들어오지 않는 파르바타 집에서 핸드폰 조명에 기대 중요한 서류를 찾는 에피소드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이들에게 빛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극 중 뭄바이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로 표현된다. 그만큼 자신의 시간이 아닌 어느 누군가의 시간을 위해 살아가는 환경에서 세 여성은 묵묵히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들이 간호사 혹은 병원 식당 주방장으로 나오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챙겨야 하는 운명은 정작 자신을 위해 쓸 시간을 갉아먹는다. 더불어 이런 이들을 조금이나마 케어해줘야 하는 남편 혹은 가족은 부재하거나 내몰기에 바쁘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사랑 혹은 사랑의 자유가 없다. 프라바는 결혼은 했지만 남편이 없고, 아누는 사랑하는 이가 있지만 종교가 다르며, 파르바티는 이미 남편과 사별한지 오래다. 사랑할 대상이 없고, 그 대상이 있어도 종교의 벽이 가로막는 등 세 여성에게 사랑은 그저 사치이거나 쉬이 가질 수 없는 존재의 것이다.
서로 어울리지 못할 것 같은 이 세 여성이 가까워지는 건 앞서 소개한 것들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이들을 가만놔두지 않고 계속 고난과 역경을 주면 줄수록 이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때도 있지만, 결국 이들은 서로 연대하며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준 작은 빛을 서로에게 비춰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마치 시와 같다. 다소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대구를 이루는 장면 안에서 인물들의 모습은 이 작품을 시로 인식하게 만든다. 영화는 전반부인 뭄바이와 후반부인 파르바티의 고향인 어촌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두 공간 속에서 세 여성의 삶은 대구를 이룬다. 뭄바이에서 부재했던 것들은 어촌 마을에서 채워지는데, 특히 현실과 판타지 그 중간 어디쯤을 보여주며 점차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던 인물들의 내면이 비로소 빛을 받아 드러내는 듯한 느낌이랄까.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유려한 연출과 편집을 통해 묘한 쾌감까지 느껴진다. 여기에 에티오피아 뮤지션인 에마호이 체구에마리암 구에브로우의 음악에 영감을 받은 클래식컬한 음악은 인물들의 감정을 점진적으로 살린다. 참고로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아누와 남자 친구가 숲속 동굴 안에서 나누는 대화, 바닷가에서 의식을 잃은 남성과 프라바의 대화 장면은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제77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은 물론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인도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수상을 한 건 30년 만이다. 그만큼 이 작품이 평단의 지지를 얻은 다수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결국 사랑을 소재로 인도의 사회적 문제들을 끄집어내고, 이를 타파하는 것은 여성들의 연대라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본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도에서의 사랑은 매우 정치적입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할 수 있는가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죠. 카스트 문제, 종교 문제… 이것들이 당신의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 주제 중 하나인 ‘불가능한 사랑’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인 셈이다. 마지막 이들이 엮는 작은 연대의 빛이 초라하게 비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빛은 시작점에 불과할 수 있을 터. 인도는 인도의 여성들은 그리고 인도 영화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
평점: 4.0 / 5.0
한줄평: 어두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연대의 빛과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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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법 : 재차의] 초간단 3분 리뷰
줄거리
방법사 '소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어느덧 3년.
사회부 기자였던 '진희'는 3년 전 취재로 알게 된 '필성'과 함께 '도시 탐정'이라는 독립 뉴스채널을 설립한다. 책을 출간하고 인터뷰를 다니는 바쁜 와중에도 진희는 소진을 걱정하며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던 중, 3개월 된 시체가 살인을 저지르는 해괴망측한 사건이 발생한다. 급기야 그 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힌 자가 공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일이 일어나는데...시청 포인트
1. 드라마 [방법]을 보지 않아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재미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보는 것이 좋음.
2. 더 강해진 소진과 든든한 팀을 꾸린 진희의 만남.
3. 조종당하는 '재차의'들의 액션.감상평
드라마를 재밌게 봤던 1인이었기에 영화도 기대됐다. 방법 2편을 만들지 말지를 두고 tvN에서 투표를 했었는데, 그때 후속편을 만들어달라는 쪽으로 투표율이 많이 기울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의 투표가 영향을 미친 결과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의문점은 '더 끌어낼 이야기가 있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다음 편을 낸다면야 땡큐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드라마를 끝낸 마당에 더 할 이야기가 뭐 있다고. 애초에 독특한 소재였기에 신선한 이야기일 수 있었으니 재탕도 안 될 것이고. 처음부터 2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가, 상당히 의아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재차의'라는 소재만 빼면 전체적으로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전 편의 악당이었던 '진종현'이나 '진경'은 편을 들 순 없어도 매력적인 악역이었다. 게다가 소진과 대적하는 능력을 갖췄기에 대립 구도와 신선한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편에서는 '재차의'라는 소재에 집중하느라 인물들이 다소 진부해졌다. '진종현'은 권력자이자 주술사였는데, 이번 편에서는 권력자와 주술사가 두 갈래의 구조로 나누게 되면서 그 매력이 나눠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액션이 무쟈게 좋았냐, 그건 또 애매하다. 재차의들이 단체로 뛰어가고 계단을 오르다 뛰어내리는 장면에선 소름이 돋긴 했지만. 자동차에 달라붙어서 주먹으로 창문을 마구 내리칠 때 맥이 탁 풀리면서 웃음이 나왔다. 사실 아저씨의 원빈처럼 총을 쏘거나, 전우치의 요괴처럼 한 방에 창문을 깨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건데... 이건 그냥 내가 액션을 잘 안 봐서 그런 걸지도.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조금 더 섬세하게 다루려면 드라마가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각각의 인물들도 잘 살리고 전개에도 긴장감을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로 이 소재를 살리려니 최소한의 요소만 남기고 다 버릴 수밖에 없었겠지. 아쉽긴 하지만, 영화로 이 정도 살린 건 나름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내 느낌이지만 이번 편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한 중간 고리라서 힘을 빼고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끝에 '진경'의 조수였던 '천주봉'이 등장하면서 후속편을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히려 이 장면 하나가 재차의들이 뛰어오는 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다음 편은 왠지 드라마로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다.별점
★★★(3.5 / 5.0)
방법을 봤던 사람이라면 재밌게 볼 것이고, 아닌 사람도 무난하게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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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 영화 예고편 리뷰
서복 제목 의미 그리고 스토리 정리 및 예측CJ 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스튜디오 101, CJ 엔터테인먼트 제작
TPS 컴퍼니 공동제작감독 : 이용주
출연 : 공유, 박보검, 조우진, 장영남, 박병은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
그와의 특별한 동행이 시작된다!과거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전직 요원 ‘기헌’은 정보국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마지막 제안을 받는다.줄기세포 복제와 유전자 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실험체 ‘서복’을 안전하게
이동시키는 일을 맡게 된 것.하지만 임무 수행과 동시에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게 되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헌’과 ‘서복‘은
둘만의 특별한 동행을 시작하게 된다.실험실 밖 세상을 처음 만나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서복‘과 생애 마지막 임무를
서둘러 마무리 짓고 싶은 ‘기헌’은
가는 곳마다 사사건건 부딪친다.한편, 인류의 구원이자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서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선 여러 집단의 추적은
점점 거세지고 이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소개된 서복 역사는 학계의 주장 중 하나일 뿐,
지나친 맹신은 금물입니다
#서복 #서복_리뷰 #서복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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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강의 잠들어 있던 킬러 본능을 깨운자는 누구인가...! 짜릿한 액션 쾌감으로 7월 관객 취향을 저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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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미니센스> 1분 예고편
해수면의 상승으로 도시의 절반이 바다에 잠긴 가까운 미래.
과학자 닉은 과거의 기억 일부를 선택해 다시 체험할 수 있는 기억 탱크를 개발한다.
좋았던 시절을 잊지 못해 닉을 찾는 고객들 중 하나인 메이는 닉과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어느 날 메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닉은 기억을 추적한 끝에 메이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