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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주2025-09-13 12:47:10

사랑에 대한 관점 • <머티리얼리스트>

  (스포일러 포함)

 

  <머티리얼리스트>가 홍보되었던 맥락은 여성 1인 남성 2인 구도의 전통적 삼각관계 구도와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사랑을 찾는다는 것이다. 루시(다코타 존슨)은 잘 나가는 커플매니저이며, 그녀는 가난해서 헤어진 옛 남자친구 존(크리스 에반스)과 '유니콘'이라 불리는 완벽한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런 플롯은 한 마디로 전형적이다. 우디 앨런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가지는 기대는 비슷한 류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 영화와 달랐는데, 셀린 송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알콜로 소독된 깔끔함 

  셀린 송 영화는 차분하고 조용하다. 셀린 송 영화의 남자들은 소리지르지 않는다. 여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다. 음악은 미니멀하고 그마저도 많이 들리지 않는다. 공간은 깔끔하고 세련되었다. 그러니까 군더더기가 없다. <머티리얼리스트>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존과 싸우다 대뜸 차 밖으로 나가버린 루시는 길 한복판에서 말다툼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씹히거나 저는 부분이 하나도 없고 관객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다 잘 전달된다. 다른 차들의 클락션 소리도 음소거되었다. 루시가 가장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격정이 없다. 루시가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자라, '가슴을 엘 만큼 부자인' 남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코타 존슨이 네포 베이비로 가난 없이 자랐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살아온 존슨의 얼굴빛과 몸짓과 말투와 눈빛이 루시라는 캐릭터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어떤 영화 속 인물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자랐다고 말한다면, 관객은 그것에 설득되어야 한다. 그런데... 설득이 되지 않았다.

 

  설득되지 않는 논거들

  영화를 구축하는 주요 사건들 중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의뢰인 소피가 당한 성폭행 사건이다.  모든 요소가 평범하게 우수하고 특별한 강점이 없어 데이트에 번번이 실패하는 의뢰인 소피는 루시가 가장 좋아하는 의뢰인이다. 그런데 소피는 루시의 중매로 만난 마크 P라는 남자에게 데이트 중 성폭행을 당한다. 루시는 이 사건으로 크게 무너지고 일을 잠시 쉬게 된다. 우선 데이트 중 성폭행은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성폭행이라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이 급전개(급 갈등 만들기)에 따라 붙는 질문을 차단하려고 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냉소와 염세의 화신 같아 보이는 루시에게 감정적 충격을 안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사건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키 크는 수술이다. 초반에 이 수술은 가볍게 언급되고, 여자들이 남자를 볼 때 빠지지 않는 조건이 키라는 것은 반복되고 강조된다. 루시는 해리의 상처를 보고 그가 키 크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남자가 아니었다. 루시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이별을 고하는데, 여태껏 느껴왔던 해리에 관한 기시감이 자신의 객관적인 상품 가치를 키우기 위해 노력해 왔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이별 통보의 타이밍은 해리를 상처주기에 너무나도 적절해서 경악스럽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내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던 해리라는 남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루시 앞에서 자신의 원래 키대로 다리를 굽히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키 수술이 성폭행 사건처럼, 다소 도구적으로 끼워넣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해리의 캐릭터가 더 자세히 표현된다면 설득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영화의 관심사가 아닐 터.

 

  그녀가 '딜'을 외칠 때

  루시가 커플매니저를 그만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며 결말이다. 그녀는 영화 내내 자기 의뢰인들의 '스펙'을 재며, 그에 대한 고충도 토로한다.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남자도 스펙 면에서 완벽한 해리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가리키는 존이다. 이런 관점 자체는 특별하달 것이 없다. 그렇지만 셀린 송이 수미상관으로 끼워 놓은 원시시대의 '최초로 결혼한 사람들'을 보면 송은 처음부터 이런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근본적, 근원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오프닝에서 원시시대 남자는 자루에 돌로 된 도구들과 풀꽃다발을 가지고 여자에게 다가간다. 결말에는 여자의 부른 배가 보인다. 행복한 두 사람의 얼굴. 현대의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건 나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깔끔하고 세련된 영화는 의외로 처절한 질문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왜 그는 나를 선택했는가?’ <머티리얼리스트>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다. 루시와 해리는 고급 식당의 원형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아 있다. 루시는 돈도 많고, 화도 내지 않고, 잘생겼고, 몸도 좋으며 어디 하나 걸리는 부분이 없는 완벽한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궁금해 한다. 그녀는 거래 전 체크해야 할 사항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당신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이 25살과 만난다면 10년 후에도 그녀는 지금의 내 모습일 거에요.” 그녀가 판단했을 때 이 계약은 한 쪽에게 너무 수지가 맞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계약을 고집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이라는 상품의 실제 가치를 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정당하니까. 사모펀드 매니저인 해리는 더욱 가관인 답변을 내놓는다. “나는 당신의 무형 자산을 보고 투자하는 겁니다. 잠재력이 아주 큰.” 이 ‘무형 자산’이라는 말은 루시의 취향, 경험, 역사를 의미할 것이다. 루시는 그가 사랑에 대하여 그녀와 같은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거래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점은 후에 루시가 해리를 차 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인상적인 장면은 어느 정도는 우울하도록 계산되었다. 회색이 한 방울 섞인 파랑의 느낌이다. 음악은 아주 간결하고 비관적인 느낌마저 든다. 영화의 주인공인 두 남녀가 연애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인데도 말이다. 기존의 로맨틱코미디 장르가 소재로 삼은 ‘계약 연애’, 혹은 ‘연애 계약’의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이런 것들이 셀린 송의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패스트 라이브즈>도 즐거운 사랑 영화가 아니었다. 그 영화는 잃어버리고 떠나온 것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머티리얼리스트>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 한 사람이 돈이 아닌 다른 의미를 향해 다가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작성자 . 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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