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2025-08-31 18:34:38
기왕 썅년일 거면 간지나는 썅년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애마> 리뷰
1980년대 초, 노출 연기로 주목받고 톱스타가 된지 어연 10년 정도가 된 희란은 진짜 ‘연기’와 진짜 ‘영화’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배우들을 벗기기만 하는 각본들에 신물이 나던 중, 거장 작품 <육식의 밤>을 읽게 되고, 간절함에 눈을 반짝이게 된다. 신성영화사에서는 새 작품을 위해 신인 오디션을 개최한다. 그리고, 밤무대에서 활약하던 신주애는 본격 성애 영화 <애마부인>의 주연으로 발탁된다.
희란과 주애, 그리고 미나
3S, Sports, Sex, Screen이라는 정부의 정책에 맞게 영화계에선 성애 영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배우들은 해방을 느낄 수 있는 연기에 진심이었으며 식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꿈에 발을 디딜수록 어찌할 수 없는 권력에 좌절할 뿐이다.
에로 그로 넌센스, 에로틱하면서 그로테스크한 풍자.
<애마부인>을 본격 성애 영화가 아닌, 본격 예술 영화로 만드려던 감독과 희란, 주애의 바람과 달리 구중호에 의해 그저 유희거리에 그치는 편집본으로 개봉한다. 주애는 모든 걸 다 바쳤음에도 친구들에게 부끄럽다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훔친다. 한편, 첫 개봉 편이 대히트를 치자 본 편집본인 <애마부인: 오리지날레>의 개봉을 약속받은 감독이 희란에게 기쁘게 이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희란은 다른 결심을 했다.
계약과 접대
신성영화사는 정부에서 열리는 남모를 연회에 여자 배우들을 제물로 바쳤다. 온갖 약과 술, 섹스가 난무하는 현장에 입을 여는 사람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서. 주애가 영화 기자 접대 판을 깽판 치고 오자, 곧바로 ‘밤무대 출신, 손님들과의 만남’이란 타이틀로 신문이 도배된 것은 큰일조차 아니었다.
미나는 이런 구조적 악습에 길들여져버린 피해자이다.
희란과 같은 멋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에 온 미나는 제작사 대표 구중호와 동거한다. 그렇게 약과 술, 그리고 관심을 갈망하며 살았다. 그저 성적 착취를 당하며 촬영장이 아닌 연회에만 투입된 미나. 어느 순간엔, 자신을 왜 파티에 부르지 않냐며 조르기에 이른다. 그렇게 참석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죽게 된다.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않던 그녀가 그날 섭취한 건 대마초가 아닌 코카인. 하지만, 신문에선 그저 우울증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말한다. “나 여배우야.”는 그녀가 뱉었던 말 중 가장 진실된 한 마디었을 것이다.
미나의 죽음으로 분노 스위치가 켜진 희란과 주애. 희란은 이 더러운 악습을 폭로하겠다는 다짐으로 ‘대종상 영화제’에 참석한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까발린 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주애의 말에 함께 올라타 자리를 뜬다.
살아남으려면 멋진 썅년이 되어야 했던 그녀들. 주애는 희란의 응원으로, 더 단단한 여배우로 승승장구하고 희란은 영화계에서 사라진다. 시리즈를 다 본 후에 끝끝내 <육식의 밤>을 찍지 못한 희란이 안쓰러울 것이다.
Relative contents
-
-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생각하면
수많은 영화 중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어요
바로,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인데
여기서 조정석의 코믹한 연기와 신민아의 러블리한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며 더욱더 재미있게 봤던 영화인데요
그럼,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리뷰 시작해 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로맨틱 코미디
감독 : 임찬상
각본 : 김지혜
출연진 : 조정석, 신민아
개봉일 : 2014년 10월 08일
평점 : 8.39
스트리밍 : NETFLIX
기획 의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
정말 결혼하면 다 이래?!
4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대한민국 보통 커플,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던 달콤한 신혼생활도 잠시 사소한 오해와 마찰들이 생기며
'결혼의 꿈'은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하는데...
이 결혼, 과연 잘 한 걸까?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철부지 남편 '영민' 사사건건 잔소리만 늘어나는 아내 '미영'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상상하고 꿈꿔 온 결혼,
그 이상의 ' 속'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담
영화<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1990년 박중훈, 최진실 주연의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최적화되어 있는
조정석의 믿고 보는 연기력과 신민아와의 러블리한 조합은 상상 이상으로 케미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결말
미영(신민아)와 4년차 연애 중인 영민(조정석)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며 행복한 신혼의 맛을 본다.
알콜달콩만 할 줄 알았던 결혼 생활에서
영민은 시인이 되기 위해 더더욱 글쓰기에 매진하며 미영에게는 무뚝뚝해지기만 해진다.
미영은 배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다행히 큰 병은 아니었지만 영민에게 화가 난 미영은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 그러다 영민과 미영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서로 화해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풋풋하고 달콤한 이야기만 있어야 하는 신혼 생활에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너무 현실 그대로 잘 반영하여 녹여낸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이다.
재미있게 울고 웃고 싶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찾는다면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추천하고 싶다.
8점 대의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조정석의 능청스러운 초반 연기력에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한줄평 : 사랑해 미영, 미안해 미영
-
- 이름값하는 재난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잠에서 깬 남편 '클레이'(에단 호크)에게 '아만다'(줄리아 로버츠)는 선언한다. 빌라를 빌렸으니 당장 그곳에서 휴가를 보낼 거라고. 그렇게 클레이와 아만다, 아들 '아치'(찰리 에반스)와 작은 딸 '로즈'(파라 매캔지)는 여행길에 오른다. 기대 이상으로 호화로운 빌라 덕분에 갑작스러운 휴가는 꽤 즐거워 보인다. 자녀는 수영장을 즐기고, 부부는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해변에서부터 휴가가 꼬인다.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던 도중 거대한 유조선이 해수욕장을 덮친 것. 급히 빌라로 되돌아 오지만, 와이파이와 핸드폰 데이터, 심지어 TV까지 먹통이 되면서 아만다는 점점 당황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자신을 빌라 주인이라고 소개한 'G.H.'(마허샬라 알리)와 그의 딸이 불쑥 찾아오기까지 한다. 그렇게 아만다의 휴가는 재난이 되기 시작한다.
재난 영화의 클리셰에 도전장을 던지다
건물과 다리가 무너진다. 검은 연기가 치솟고, 차들은 물에 잠기며,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군인과 경찰의 무의미한 고함이 사이렌과 헬기 소리 사이에 갇힌다. 자유의 여신상도, 타워 브리지도, 에펠 탑도 논외는 아니다. 성 베드로 성당이 갈라지면 확실해진다. 신조차 사람을 외면했다고.
재난 영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2012년처럼. 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영화는 없다. 이야기 구조도 공식화되어 있다. 재난을 예측한 인물은 정부나 기관에서 외면받는다. 일부 음모론자만 위기를 눈치챈다. 동물들이 이상 행동을 보일 때는 이미 늦었다. 이처럼 클리셰가 반복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뻔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실패하지 않으니까. <2012>가 그랬고, <투모로우>가 그랬다. <해운대>나 <타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강력한 권위는 도전을 유발하는 법. 클리셰에 도전하는 영화도 적지 않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도 그중 하나다. 샘 에스마일 감독은 미국 정부가 붕괴하고 뉴욕이 파괴되는 재난을 그려냈다. 하지만 자극만을 위한 이미지 전시는 찾을 수 없다. '세상을 등진다'는 제목대로다. 대신 사람을 비춘다.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재난을 맞닥뜨린 사람들을.
현실로 튀어나온 재난 영화
물론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가 재난을 아예 안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재난을 다룬다. 판에 박힌 재난 영화에서 벗어나겠다는 포부를 표한다. 극 중 재난은 디지털 재난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네트워크가 차단되면 일어날 수 있는 사건과 상황을 하나씩 선보인다. 특히 매 순간마다 익숙함을 거부하는 전복적 아이디어가 인상적이다.
유조선 장면이 대표적이다. 자동 항법 시스템이 고장 난 유조선이 해수욕장을 들이받는다. 이 장면에서는 영상과 음성의 불일치가 돋보인다. 영상은 평화로운 휴가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아만다와 클레이는 일광욕을 즐기고, 아치는 썸녀랑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로즈의 시점에서 유조선이 점점 커지자, 음산한 배경 음악이 서서히 존재감을 내뿜는다. 충격적인 이미지 없이도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자연스럽게 일깨워진다.
비슷한 아이디어는 다른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뉴욕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차들로 막혀 있다. 일반적인 재난 영화라면 사람들이 차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에서는 다르다. 막 출고된 테슬라 전기차들이 자율 주행 중에 통제권을 잃고 충돌한 결과 길이 막혔기 때문. 이 발상의 전환 덕분에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재난은 더 현실적이고, 생생하다.
이러한 장면은 관객의 태도를 바꾼다. 많은 재난 영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강조한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광경 앞에서 관객과 영화의 거리는 멀어지고, 관객은 영화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으므로. 재난은 그저 눈요깃거리인 셈이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다르다. 부조화와 발상의 전환으로써 거리감을 좁힌다. 넷플릭스 작품임을 고려하면 특히 인상적이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재난을 맛볼 수 있으니까.
가짜 고립과 진짜 고립
스크린으로부터 일상으로 디지털 재난을 옮겨온 덕분에,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이야기도 설득력이 높아진다. 영화는 재난이 초래한 고립을 미시적 관점에서 파고들며 진짜 재난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 질문은 오프닝에서부터 암시된다. 아만다는 가족 휴가를 선언한다. 사람들이 싫어졌으니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다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가득한 도시에 지쳤다면서.
이 장면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연출이 돋보인다. 아만다는 제4의 벽을 넘듯이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본다. 자기가 얼마나 도시에서 지쳤는지, 사람들이 싫어졌는지 제발 알아달라고. 제목대로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결심이 결코 허황되거나 과장되지 않았다고. 그런데 카메라도 지지 않고 아만다의 얼굴, 그리고 눈을 연이어 클로즈업한다. 마치 "진짜로 세상을 등진 채 고립되고 싶어?"라고 되묻는 듯이.
그 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녀의 결심이 얼마나 미약했는지 보여준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고립을 자처했지만, 아만다는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진정한 고립의 실체를 마주한 후에야 꿈꾸던 휴가가 가짜 고립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와이파이와 데이터가 먹통이 돼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그녀는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빌라 주인인 G.H.가 딸과 함께 찾아왔을 때 그녀의 무력함은 극대화된다. 메일도 볼 수 없어서 그들의 신분을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자, 그녀는 극도의 불신을 숨기지 못한다. 도시가 이미 정전됐고 마비되었다는 G.H.의 증언을 무시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도시로 돌아가기로 결정할 정도로.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도 세상을 등지고 싶어 하던 사람이 누구보다도 세상과 다시 연결되고 싶어 한다.
진정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법
따라서 남은 이야기가 세상과 연결되는 법을 보여준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다. 특히 아만다와 가장 반대되는 캐릭터가 가장 세상과 적극적으로 연결된다는 지점이 흥미롭다. 바로 로즈다. 그녀는 일견 젊은 세대의 단점만 보여주는 인물 같다. <프렌즈>를 보지 못해 불안해하고, 태블릿과 TV가 안된다고 보채는 모습은 과장 보태 중독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그녀는 극 중 유일하게 뭔가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유조선도 가장 먼저 발견했고, 동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니 그들을 추적하자는 것도 그녀만의 발상이다. 다들 집에서 상황을 기다려 보자고 할 때 유일하게 집 밖으로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기도 한다. 그 결과 그녀는 지하 벙커를 찾아내고, DVD로 그토록 염원한 <프렌즈> 마지막 회를 보는 데도 성공한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가 진정으로 보여주려는 재난과 연결 지어 생각하면 로즈의 행적은 꽤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연결이 끊긴 상황 그 자체를 재난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유조선 오작동, 자율 주행차 충돌, 비행기 추락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클레이, G.H., '대니'(케빈 베이컨)의 삼자대면에서 볼 수 있는 양극화가 그 재난이다. 정보의 바다에서는 정보를 갖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존 여부가 갈릴 수밖에 없으므로.
실제로 수동적인 가족과 이웃은 재난을 악화한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겠다는 아만다의 결정이 시작이다. 새로운 정보가 생길 때까지, 세상과 연결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선택도 마찬가지다. "안전한 집에서 기다리자"는 대사는 스스로 괴사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무력하게 정보를 기다릴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비로소 실마리가 보일 테니. 로즈가 벙커를 찾아내듯이.
마지막 단추만 잘 뀄더라면
이처럼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형식도 내용도 신선한 재난 영화임이 확실하다. 다만 마무리가 아쉽다. 우선 미스터리를 클리셰로 채우는 선택이 문제다. 영화는 중국이나 이라크가 배후에 있는 테러로 인해 미국 사회가 정지되었음을 암시한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우주에서 지구를, 달에서 지구를 비추며 극도로 끌어올린 긴장감을 재난의 정체나 뒷배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듯싶다.
숨은 정보를 안일하게 알려주는 방식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애널리스트인 G.H.의 입을 빌려 시청자가 궁금해할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의 말만 있을 뿐, 믿을만한 추가 정보나 증거는 없다 보니 착실히 쌓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는 무너진다. 차라리 세 번째 인물인 대니를 만나기 전까지 그 어떤 확답을 내놓지 않았으면 마지막까지 재난의 실체를 감추며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연결성도 떨어진다. 영화 중간에는 의문스러운 장치가 많다. 빌라와 헛간을 둘러싸고 바라보는 사슴 떼, 수영장을 점령한 홍학이 대표적이다. 중간중간 귀를 찢는 듯한 굉음, 아들의 병을 유발한 벌레도 있다. 이들의 등장은 작위적이다. 필요한 순간에 등장해 분위기를 환기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큰 그림은 끝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두 마디 단편적인 대사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 몰입도에 비해 전체적인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남을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시작에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대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드러난다.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그렇지 않다. 독특한 장치로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 간의 그물을 만드는 데는 끝내 실패했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그랜드슬램으로 시작해 블론세이브로 끝난 한 판
-
- 7월 셋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7월 3주차의 극장가를 달군 영화들과 박스오피스 다함께 알아볼까요?
.
.
.
[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7월 셋째 주, 1위를 차지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그 뒤를 잇는 굳건한 <엘리멘탈>은 역주행을 넘어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대표작은이 되면서 꾸준한 관객들이 호평 속 기분 좋은 흥행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주말 관객수 120만명을 넘기면서 5일째 누적관객수 170만,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인공지능 '엔티티'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에단 헌트의 활약을 그린 영화로, 완성도 높은 액션으로 호평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시리즈에서는 시속 100km로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악당과 맨몸 액션을 선보이고 이후 등장하는 절벽 추락씬등 짜릿한 톰크루즈의 도전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엘리멘탈>은 428만 관객 돌파와 함께 역대 픽사 영화 중 국내 매출 1위까지 달성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주말을 지나 누적 관객수 428만 명을 돌파해 멈출 줄 모르는 흥행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엘리멘탈>의 흥행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이목이 집중되고있습니다.
재개봉 첫날 6위로 출발했던 '여름날 우리'는 재개봉 3주차에 오히려 순위가 두 계단 상승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세웠습니다. 두 청춘스타 허광한과 장약남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첫사랑의 모든 순간을 완벽한 케미로 그려내며 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여성 관객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누적 관객수 20만 명을 돌파하며 경이로운 역주행 신화를 작성해 나가고 있는 <여름날 우리>의 흥행 추이에 이목이 집중이 됩니다.
<범죄도시>의 흥행으로 전체 매출액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6월 한국영화 매출액에서 92.8%를 기록했다고하며 팬데믹 이전 한국영화 97.3% 수준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눈 뗄 수 없는 CG 액션, 릴 웨인, 에이셉 라키 등 레전드 힙합 뮤지션들이 다수 참여한 강렬한 ost들로 채운 힙한 영화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가 5위를 차지하며 누적관객수 87만을 기록하며 점점 순위권에서 밀리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7월 셋째주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 북미 박스오피스1위를 차지했습니다. 아동 성노예와 구출 이야기를 다룬 <Sound of Freedom> 2위, <인시디어스: 빨간문>이 3위 <인디아나존스: 운명의 다이얼>이 4위를 기록했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데드레코닝 PART ONE>은 북미 공개 첫 주말 매출액 5600만 달러를 넘기며 박스오피스 1위로 출발했습니다. 이 수치는 해당 시리즈 중 3번째로 높은 기록으로 영화 제작비에 가까운 수익을 첫주에 내면서 성공적으로 시리즈를 기록하였습니다.
-
- 무파사: 라이온 킹 | 새 시대의 사자왕 즉위식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피아'(아니카 노니 로즈)와 함께 초원을 누비던 아기 사자 '무파사'(애런 피에르).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비 덕분에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그는 돌연 밀려 온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그 이후 홀로 야생을 떠돌던 무파사는 왕의 혈통이자 예정된 후계자 ‘타카/스카’(켈빈 해리슨 주니어)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타카와 의형제가 되고, 타카의 어머니 '에쉐'(탠디 뉴턴)로부터 사냥법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 중이던 무파사와 에쉐는 모든 사자를 굴복시키려는 백사자의 무리의 왕 '키로스'(매즈 미켈슨)에게 기습당한다. 이에 무파사와 타카는 가족을 떠나 전설의 땅 '밀레레'로 향한다. 타카는 왕의 혈통을 지키고, 무파사는 왕이 될 형제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두 형제 모두 첫눈에 반한 암사자 '사라비'(티파니 분)와 환영을 보는 원숭이 '라피키'(카기소 데리가)가 등장하면서 두 형제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의도는 좋았다
2019년 여름, 큰 기대 속에 개봉한 <라이온 킹> 실사영화는 실망스러웠다. 가장 큰 문제는 CG였다. 동물을 현실 모습 그대로 묘사한 결과, 주인공들의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영화는 마치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에 더빙만 입힌 듯 기괴했다. 스카의 주제곡인 'Be Prepared' 등을 편곡한 OST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원작 애니메이션이 개봉한 지 25년 만에 나온 실사영화인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실망은 더 컸다. 그간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실사화할 때 다양한 시도를 했다. <말레피센트>는 악역의 시점을 취했고, <알라딘>은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할 노래를 삽입해 캐릭터를 재해석했다. 그에 반해 <라이온킹> 실사 영화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기존 주제를 강조할 대사와 장면을 추가했을 뿐이었다.
애니메이션 탄생 30주년 기념작이자, 실사영화의 프리퀄 속편인 <무파사: 라이온 킹>(이하 <무파사>)은 전편의 문제를 직시했다. 이에 배리 젠킨스 감독과 린 마누엘 미란다를 데려와 전편의 실망감을 놀라움으로 바꾸려 노력했다. CG에 생동감을 더하고, 이전과는 다른 음악을 들려주고, '생명의 순환'이라는 주제를 재해석했다. 그러나 완성도가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 나머지 <무파사>는 기대 이하의 실사화에 그쳤다.
CG는 OK, 음악은 글쎄
우선 <무파사>는 기술적으로 진일보했다. 이번에는 캐릭터의 표정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다. 무파사와 사라비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거나 그런 그들을 보면서 타카가 배신감에 치를 떨 때, 사자의 얼굴에 쓰인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 덕분에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돼도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의형제였다가 적으로 갈라서게 된 무파사와 타카의 얄궂은 운명을 감성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반해 음악은 기대 이하다. 린 마누엘 미란다가 참여했는데도 귀에 감기는 멜로디가 많지 않다. 이번 음악은 리드미컬하면서 통통 튀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엔칸토>나 <모아나>의 음악을 아프리카 풍으로 편곡한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라이온 킹> 특유의 웅장한 분위기에 잘 섞이지 않는다. 중간중간 한스 짐머의 스코어가 흘러나올 때마다 새 노래들이 잊히는 게 그 방증이다.
그 결과 <무파사>의 스코어나 넘버는 전반적으로 전편의 하위호환 같다. 무파사와 타카가 함께 놀 때 흘러나오는 'I Always Wanted A Brother'는 전편에서 심바와 날라가 자주를 따돌릴 때 부르는 'I Just Can't Wait to Be King'을, 무파사와 사라비가 사랑에 빠지는 'Tell Me It's You'는 심바와 날라가 재회할 때 부르는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의 아성을 넘지 못하는 식이다.
이에 더해 새 캐릭터를 소개하는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키로스의 주제곡 격인 'Bye Bye'가 대표적이다. 키로스는 감히 맞서 싸울 사자가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잔인하며, 위압적인 빌런이다. 그런데 그의 노래는 강압적인 분위기보다는 부드럽고 가벼운 사악함을 부각한다. 결국 키로스는 일관된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못한다. 마치 실사영화 속 스카와 애니메이션 속 스카가 한 데 뒤섞인 모양새다.
새 시대의 '생명의 순환'
한편, 서사적으로는 원작을 답습한 전편과 확실히 선을 긋는다. 특히 <라이온 킹>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뛰어넘으려 노력한다. <라이온 킹> 속 '생명의 순환'이라는 교훈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사자만이 다른 동물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기존의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고, 무파사에서 심바로 왕위가 계승돼야 한다는 당위는 기득권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생명의 순환'이 사회적 소수자를 타자화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메시지라는 비판도 있었다. 하이에나처럼 무파사와 심바의 지배 질서 밖에 속한 존재는 빈곤하고, 사악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 약자처럼 주류 질서 안에 있기보다는 주변화되기 쉬운 집단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사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악마화한다는 우려를 샀다.
<무파사>는 위 맹점을 보완하려 한다. 그 중심에는 '외부자'라는 모티브가 있다. 무파사를 타고난 왕이 아닌 떠돌이 사자로 설정하면서 '생명의 순환'을 재해석한다. 떠돌이 사자였던 그는 프라이드 랜드의 왕위를 그저 물려받지 않았다. 그는 전설 속 장소로 치부받던 밀레레를 찾아냈고, 밀레레에 살던 동물들을 단결시켜 키로스의 습격으로부터 모두를 구해낸 공헌을 인정받아 왕으로 거듭났다. 왕의 혈통인 타카를 제치고서.
이렇게 보면 '생명의 순환'은 더 이상 사자의 지배와 약육강식 계급 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무파사와 다른 동물들은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서로 목숨을 걸고 연대한 동료에 가깝기 때문. 프라이드 랜드의 왕은 군림하되,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존재가 아닌 셈이다. 따라서 이제 '생명의 순환'에는 주어진 운명과 질서에 순응하는 대신, 외부자와 약자가 연대하여 새로운 질서를 빚어낼 수 있다는 함의가 깃든다.
새 시대의 사자왕
이에 힘입어 <무파사>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관점에서 사자왕이라는 상징도 새롭게 그려낸다. 사실 <무파사>는 외부자 대 외부자, 소수자 대 소수자의 대립을 다룬 이야기다. 당장 무파사는 물론, 키로스 때문에 무리를 떠난 타카와 사라비, 남들과 달리 환영을 본다는 이유로 동족으로부터 추방당한 라피키는 모두 외부자다. 키로스의 백사자 무리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피부와 갈기가 하얀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다.
<무파사>는 같은 처지인 이들이 '생명의 순환'이라는 가르침을 이해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키로스는 그 순환을 철저히 배타적으로 이해한다. 백사자만이 빛 닿는 모든 땅을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에 충실하다. 그에 반해 무파사는 '생명의 순환'을 포용적으로 받아들인다. 같은 처지의 사자는 물론, 원숭이와 기린을 비롯한 온갖 동물들과도 가족과 친구로서 지내며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다.
일신된 사자왕의 이미지는 배리 젠킨스가 <무파사>의 감독이 된 이유처럼도 보인다. 그의 전작인 <문라이트>나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를 놓고 보면 그는 <라이온 킹>에 어울리는 감독이 아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흑인 서사로 가득하니까. 그런데도 배리 젠킨스가 <무파사>의 메가폰을 잡았다면, 상술한 메시지를 디즈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라이온 킹>에 녹여내기 위한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부메랑이 된 액자
다만 <무파사>가 재해석한 메시지는 관객석까지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영화의 구조가 잡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파사>는 극 중 극, 액자식 구성을 취했다. 심바와 날라가 둘째 출산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라피티, 티몬, 품바는 첫째 키아라를 하룻밤 돌보면서 무파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러한 구조는 다음 세대인 키아라를 소개하고, 프리퀄 다음에 키아라를 주인공으로 하는 시퀄을 암시하는 의도처럼 읽힌다.
그런데 영화가 키아라와 무파사를 자꾸 오버랩시키는 과정에서 액자식 구성은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노출한다. 물론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전 세대인 무파사와 다음 세대인 키아라를 겹쳐 보게 하면서 <라이온 킹>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새 시대에 맞게 리모델링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키아라가 무파사의 이야기를 회상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 새끼 사자답게 폭풍이나 천둥을 두려워한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그녀에게는 특별한 서사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더 이상 폭풍이 무섭지 않은 키아라의 포효가 왕으로 거듭난 무파사의 포효와 오버랩되는 결말은 되려 무파사의 즉위식 감흥만 까먹는다. 액자 외부와 내부 이야기가 같은 층위와 차원에서 호응되지 않아 파국에 이르고 만다.
시리즈의 무게에 짓눌리다
더 나아가 <무파사>는 프리퀄이라는 본질적인 속박도 벗어던지지 못했다. <무파사>는 전편과의 연관성을 영화 한 편에 전부 집어넣으려고 한다. 무파사와 라피티가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 무파사와 사라비가 사자 무리를 어떻게 이뤘는지, 프라이드 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을 일일이 설명하려 든다.
그 결과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중심을 잃고 흔들린다. 무파사와 키로스의 대립 구도는 희미해진다. 사라비가 다른 사자들을 설득해 키로스 무리와 맞서 싸우고, 무파사의 연설에 공감한 다른 동물들이 백사자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무파사와 키로스의 결투 중간에 끼어들어 흐름을 끊기 때문. 실제로 마지막 전투 시퀀스에서는 카메라가 캐릭터 하나하나를 쫓기 버거워하다가 끝내 앞뒤 장면이 연결되지 않는 난국을 목격할 수 있다.
그래도 관객이 가장 궁금할 연결고리, 타카가 스카로 타락하는 과정은 다행히도 놓치지 않았다. 전편이 암시한 무파사-타카-사라비의 삼각관계와 어릴 때부터 타카가 무파사에게서 느꼈던 열등감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덕분이다. 이에 더해 스카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빚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도 흥미롭다. 타카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교훈, 진정한 왕은 기만할 줄도 알고 권력을 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종합하면 <무파사: 라이온 킹>은 지난 실사영화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원작 애니메이션의 그림자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작품이다. 물론 애니메이션의 외피를 실사로 바꾸기만 한 전편보다는 고민한 지점이 눈에 띄고, 무파사와 스카의 과거를 처음 보는 신선함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음악도, 이야기도, 볼거리도 원작 애니메이션의 위용에는 끝내 미치지 못했다.
Acceptable 무난함
여전히 원작 애니메이션 그림자 아래에서 허우적
-
- [JIFF 데일리] 필름 속 우리 일상은
OVERVIEW
다니엘라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그리고 어디에서 살지에 대해 고민이 많다. 미아는 즉흥적으로 시작했던 석사 학위가 끝나가는 단계에 있다. 비엔나로 이주를 생각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인 나타샤까지. 이들은 떠돌며 이야기를 나눈다. 불면증에 걸린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
REVIEW
수면장애를 겪는 다니엘라는 주기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린다. 그녀는 다른 도시로 떠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들과 책과 논문, 인간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교류한다. 서로의 깊은 역사와 삶의 맥락은 모르지만 그들은 방을 나눠 쓰고 함께 파티에 가며, 헤어진 남자의 집에 남겨진 물건을 대신 받아주면서 서로의 현재를 공유한다. 디지털 시대에 유목민처럼 사는 이들은 공원을 걷고 얼굴을 마주 보며 나누는 대화를 선호해 언뜻 구식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방식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영적인 실천으로 보인다. 우연한 관계들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게 시작과 끝을 알리고, 도시와 환경은 변하지만 그들의 삶의 방식은 지속된다. 세상이라는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그린 <아웃사이드 노이즈>의 자연스럽고 사실성 높은 대사는 비전문 배우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아날로그 질감의 16mm 이미지와 방황하는 인물을 내세워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온 테드 펜트 감독의 세 번째 장편이다. (문성경)
프로그래머의 노트를 읽자마자 생각했다. 이 영화를 봐야겠다고. 이유는 단 하나. 그냥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흘려 보낼, 그런 무위의 시간. 영화 속 미아가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했다는 것처럼 읽고, 일기를 쓰고, 그냥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무심히 보아 넘기고 싶었다. 도시의 익명성이 허락하는 가장 단순하고 짤막한 휴식인데, 그나마도 여의치 않을 때가 너무 많다. 친구를 만나 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영화를 골랐다.
실제로 영화 속 다니엘라, 미아, 나타샤 등 인물들은 만나서 별거 아닌 대화들을 나눈다. 사실 대화의 양상이 내가 친구들과 하는 내용과 너무 비슷해서 놀란 때도 있었다. 그냥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어. 요즘 잠을 잘 못 자. 푹 자고 싶은데 모르겠어. 요즘 이런 책을 읽었어.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 이런 사람이 있어. 멋지지.
걷고. 의자가 아닌 곳에 대뜸 걸터앉아 일기를 쓱쓱 쓰고. 차를 마실 거냐고 묻고, 책장을 비우고...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햇살 아래 반짝거리는지를 멀거니 바라보는.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일이.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슷한 대화 끝에 이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행동을 할까.
이들의 대화는 나직하고 부드럽지만, 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매끄럽지 않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 온갖 일이 정신없이 벌어지는 도시. 떠나고 싶어지는 도시. 그러나 결코 떠날 수 없는 도시. 다니엘라가 말하는 도시의 삶은 나의 서울과 닮아 있다. 어쩌면 그래서, 그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영화제를 부지런히 찾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잠시 떠나 굳이 남의 일상을 지켜보는 데에는, 결코 나의 일상을 놓을 마음이 없지만 그 일상 속에서 잠들지도 못하는 사람의 비애가 묻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영화에서 갈등은 중심 소재가 된다. 정작 현실에서는 수많은 내적 갈등과 고민들이 가닥가닥 엉켜, 어떤 것도 삶의 중심 소재가 되지 못하고 복잡하게 정신만 빼놓는다. 이 영화는 그런 현실을 닮았다. 직장에 대한 고민을 하고 면접을 가면서도 친구가 읽은 책의 이야기에 세심히 귀를 기울이고 나란히 앉아 와인 잔을 부딪는다. 두 사람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둘이 앉아있는 거실로 햇빛이 밝아졌다 사그라들고, 그 아래 먼지가 반짝 흩날린다.
영화 속 인물들이 “너무 무거워서 몇 줄 읽고 내려놔야 했다”는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책은 <삼십세>다. 나도 몇 줄에 한 번씩 밑줄을 그어 가며 감탄하고 읽었지만, 아직도 완독을 못했다. 삼십세가 될 때 꺼내 읽으려고 이십대 후반에 미리 사두었는데, 삼십을 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펴보지 못했다. 밀도가 너무 높은 책은 종종 그렇게 된다. 감탄하면서도 쉬이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일상이 그렇지. 해야 할 일들은 널려 있는데, 정신은 없는데,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그 모든 것이 뒤엉켜 하릴 없이 잠만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일상도 찍어 놓으면 영화가 될까. 불안하고 막막한 날들도 자글자글한 필름의 질감에 담아 놓으면 부드러운 색감으로 빛이 날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을 헤아리고, 서로를 걱정하고, 책장에 꽂혀 있는 책에 대해 그렇게 알게 된 누군가의 멋진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연히 본 그림에 갑자기 감동을 받은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고, “깊게 온전히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찾아 헤맨 경험을 서로 나누고, 가방을 질끈 동여매고 씩씩하게 집을 나서고, 친구와 밖으로 나가 걷고. 그런 일상의 장면도, 저 멀리서도 똑같구만 싶어 웃음이 나왔던 그런 모습들도.
문제가 직장이든 돈이든 순식간에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각자가 탐구하는 삶의 세계를 나란히 나누고, 듣고, 그러면서 우리의 이야기는 확장되어 갈 것이다. 이 영화처럼 슴슴한 빛 안에서 먼지처럼 빛나면서. 비록 흐릿한 날이 더 많을지라도, 16mm 필름을 장착한 시선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친구를 만나고 싶어졌다. 이 영화 속 인물들처럼.
2023. 04. 30. 19: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359)
-
- 블랙스완 (2011)
-이 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블랙스완>은 이야기 자체의 매력보다도 이야기를 영상으로 다루는 방식이 강렬한 영화다. 영화 <블랙스완>은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과 고뇌, 그리고 자아의 분열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압도적이다. 믿을 수없는 화자를 내세워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하는 한편, 16mm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후 디지털화하여 영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상의 노이즈들과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는 웅장한 ‘백조의 호수’, 흑조와 백조를 오가는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한데 섞인 이 영화는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기괴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듯 압도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영상으로 짜여진 이 영화는 그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완전히 영화의 매력에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블랙스완>은 예술가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단순히 그려내는 것을 넘어 곁에서 체험시키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다루는 강렬한 방식이 눈에 띄는 영화로, ‘완벽’이라는 허상의 것을 좇는 개인의 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다소 앞서가는 것이거나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는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서 완벽주의에 대해 글을 쓰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너무도 강해서 이 영화의 지엽적인 메세지에 불과한 완벽의 추구와 그 허무에 관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화두를 뜯어 고치지는 않겠지만, 다소간 확장시키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보이지 않는 고통들을 드러내는 <블랙스완>.
영화 <블랙스완>이 다루는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내적 고통은 ‘나탈리 포트만’이 <블랙스완> 시사회 인터뷰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발레 무용수들이 겪는 내적 고통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발레 무용수들의 무대 위 모습과는 달리, 토슈즈를 벗으면 드러나는 성하지 못한 그들의 발과 한번의 무대를 위한 압도적인 연습량으로 닳고 닳은 깡마른 그들의 몸은 그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들이다. 한편, 예술가들이 하나의 보기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쥐어짜내는 고통 역시 보이지 않는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고통을 모두 짊어진 ‘니나’를 통해서 두 개의 고통을 포개어 놓는 것으로 그 고통의 상징성을 강화한다. 이렇듯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발레와 예술가의 내적 갈등으로 상징되는 두 개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중첩시켜 영화속 ‘니나’가 겪는 고통은 배가된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서 모티브를 받아 구상되었고, 감독의 누이가 발레 무용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예술가와 발레 무용수의 화려한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고통’의 상징을 함께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연치 않게 두 가지의 상징이 구성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데, 우연이고 필연이고를 떠나서 상징을 중첩시켜 인물의 고통을 강화한 이 영화의 각본은 굉장히 현명했고, 특별하다.
1-2. 분신(Dvoinik)과 분열된 자아.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 Dvoinik>을 모티브로 제작되었으나, 그것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 <분신>속 자아의 분열은 결과적으로 한 인간의 덧없는 파멸만을 그려내어 탐구가 다소 얕은 반면, 영화 <블랙스완> 속 분열된 자아는 완벽주의에 이르고자 하는 예술가의 심리적 고통과 함께 파멸과 성장의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주체의 역할을 맡은 ‘백조’는 그동안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 두 자아 모두가 니나의 자아라는 점이다.
영화는 발레무용수가 자신이 가진 것 이상(以上)의 연기를 소화해내기 위해 이제껏 가져왔던 자아를 버리고, 백조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자아를 꺼내어 자신의 이상(以上)에 이르고자 한다. 물론 그 이상(以上)의 상태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적인 상태는 아니기에, 이 발레 무용수는 완벽한 예술을 위하여 이전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혼란스러워한다. 결과적으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는 예술가의 욕망(흑조)과 이전까지 유지해온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백조)은 두 가지의 자아로 나타나며, 두 자아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백조’는 니나가 추구해온 완벽하고 순수하며 순종적인 자아인 반면, 주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열된 자아이자 분신인 ‘흑조’는 저항적이고, 본능적이며, 불완전한 자아다.
영화 <블랙스완>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두 자아의 대결을 다루며 이야기의 장력을 팽팽하게 유지한다. 또 한편으로 ‘니나’의 자아가 분열되어가는 모습을 ‘거울’을 통해 여러 차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시각적 긴장감을 더하여 ‘시각매체로서’ 영화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
2. 완벽이라는 이름의 허상
지금 현재, 존재하는 존재들은 모두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들은 정해진 운명이 없기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가진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관한 이론으로 현존재를 해석하자면, 지금 나의 무수히 많은 선택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무수히 다른 나를 만들기 때문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 중 우위성을 차지할 수 있다. 반면, 시간에 얽매어있는 현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가능함이라는 결과 자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시간대에 놓인 무수히 많은 선택지중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면, 다른 모든 선택지가 닫혀버리기 때문에, 현존재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얽매어있는 존재의 성질 탓에 현존재는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 우위에 있음에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을 뜻하는 단어 Perfect {per(모두) + fectio(하다)} 는 시간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들은 도저히 이를수 없는 허상의 단어이다. 때문에,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간은 헛된 일일 수밖에 없으며 완벽을 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거짓이자 자기 기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지나친 완벽의 추구는 허상의 것을 끊임없이 좇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니나’가 보여주듯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 겪는 고통과 자멸, 그리고 전락을 암시하는 결말은 허상의 것을 추구하는 행위의 덧없음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고통을 엿볼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을 추구하는 일이란 결과적으로 한없이 허무할 뿐인가?
3. 완벽이라는 환상의 추구와 그 당위성없는 행위의 당위성.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은 우리가 짊어진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해소되지 않을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결코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가 완전해지고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가는 것, 그 것이 결과론적으로 허상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마저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 수메르의 바빌로니아에서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여행을 떠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동시대 바빌로니아인들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왕이자 “깊은 곳을 본”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여정이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해도, 그 과정자체에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앞서 말했듯이 완벽은 허상의 것이다. 그렇다면, 완벽의 추구. 절대로 구해지지 않을 것을 구하는 이 일은 어떤 당위성을 얻게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삶의 당위성을 그 목적지에서 찾는 그 전제가 애초에 들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시작하자. 삶의 목적지는 결국 죽음이다. 완벽한 끝. 삶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목적은 그저 ‘완벽한 끝’이므로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삶의 의미는 목적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오해되는 전제를 깔아놓고, 결말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모든 행위는 당연 무의미하고, 당위성을 잃는다. 그렇기에, 완벽의 추구 또는 이상의 추구,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이룰수 없는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 당위성 없는 행위의 당위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므로, 나는 다만 삶의 의미란 의미를 찾아가는 삶속에 있다고 말할 수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을 단순히 추구하는 것이 아닌 집착하는 것이다.
4. 추구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랙스완>의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기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지만, 그 과정속에서 “깊은 곳”에 닿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니나가 완벽한 흑조가 되어 마주하는 것들은 혼란과 고통, 전락, 그리고 결과에 대한 구체적이지 못한 자기만족―나는 완벽했어, 그 모호한 한마디―에 그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결과적으로 완벽에 집착할 뿐인 광적인 예술가의 군상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보자면, 그녀는 흑조가 되기 이전부터 기술적으로 완벽한 무용수였고, 이미 ‘백조’의 순수함과 순종 결백 등에 집착하고 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다 큰 그녀가 어머님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나 지나치게 순수한 모습들은 그녀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흑조의 날개가 자라나는 환각을 보는 장면이나, 자신의 피부에서 흑조의 깃털이 돋아나는 환각을 보는 것은 백조의 이미지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자아와 의지를 억누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이미 백조에 대한 심한 집착과 몰입을 보여준 예술가 니나가 ‘흑조’ 역할을 맡으며 흑조에게 집착하고 결과적으로 그 자아에 또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문제는 니나가 예술가로서 완벽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무대는 완벽했다. 하지만, 백조의 추락과 백조의 죽음을 의미하는 마지막 엔딩씬은 광기어린 무용수의 집착이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파멸을 야기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이전까지 니나를 가두었던 백조의 이미지가 죽어버리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 니나가 ‘성장’한 것처럼 읽힐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게 감독의 의도이고, 옳은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존재의 공허함을 채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미숙한 자신을 살해하는 것이 완전한 존재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존재의 결핍된 모습들마저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결핍된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채워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니나가 백조를 자신 안에서 완전히 살해하고 흑조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은 니나 자신을 가두는 백조의 틀을 깨버리는 일인 동시에 니나의 미덕이었던 백조의 모습들마저 버리는 것으로, 흑조로 성장하기보다는 흑조로 ‘변이’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니나가 매번 이렇게 변이만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끊임없이 이전의 자신을 살해하는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내야만 할 것이고, 이 편집증적 고통은 성장통의 고통과는 다르다. 그 고통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동반한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스완>은 한 예술가가 성장해가는 서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블랙스완>의 니나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광적이고 고통스러운 집착일 뿐이다. 다만 <블랙스완>이 다루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상관없이 영화는 정말 잘 만들어졌으니, 이 영화의 이야기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작품의 완성도는 아주 높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데미안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 영춘권의 고수 견자단 이번엔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 엽문3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3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
-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 30초 예고편
손에 땀 마를 날 없는 ‘다한증’ 춘희는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로 수술비를 모으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별로 안 좋아한다며 홀로 살아가던 씩씩한 춘희,
부끄러움과 외로움이 전부였던 그에게 봄처럼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
-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3차 예고편 - 현실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