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8-22 16:04:39
[INTERVIEW] “저는 단순히 영화는 영화,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라, 내 삶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크리에이터 '선이정'님 인터뷰
크리에이터 '선이정'님 인터뷰
방자까님에 이어 오랜 시간 씨네랩과 함께 해온 크리에이터 선이정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았습니다. 세상 곳곳의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선이정님의 일과 영화 그리고 글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볼까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네, 저는 씨네랩에서 ‘선이정’이라는 크리에이터명으로 글을 쓰고 있고, 본업은 NGO에서 해외 사업을 합니다. 시민분들께서 후원해주신 후원금으로 아프리카에 식수를 전달하거나, 학교를 짓거나, 여자아이들에게 생리대를 전달하는 등의 일이에요.
그동안 계속 궁금했었는데 크리에이터명을 ‘선이정’으로 짓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제 이름이 ‘선’으로 끝나요. 그래서 예전에 인도에 살 때 사람들이 저를 ‘Sunny’라고 불렀거든요. 그때 미국인 한 분이 잠깐 오셨었는데, 한글을 배우는 분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제 이름을 한글로 쓰면 ‘써니’라고 쓰는데, 이분은 항상 ‘선이’라고 쓰는 거예요. 그게 너무 귀여워서 사용하게 되었어요. 거기에 이제 성씨인 ‘정’을 더하면서, ‘선이정’이 된거죠.
NGO 단체에서 처음 일하게 되신 것도 인도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나요?
저는 원래 인도에 있을 때 NGO 파견 단원이었어요. 그래서 인도에서 귀국할 때 ‘NGO 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어요. 싫었던 건 아니지만 할 만큼은 한 것 같아서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하며 한국에 왔고, 수험생활을 한 1년 정도 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하나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거예요. 제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라서, 저한테 그 친구의 존재가 너무 당연했더라고요. 저에게는 처음 겪어보는 상실이었어요.
그 일을 겪고 우울한 시기를 보냈는데, 도저히 온 힘 다해 공부할 힘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진로를 고민하다가 인도에 살 때 그곳의 아이들을 위해서 일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비슷한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공부를 할 때 매일 국제 뉴스를 봤거든요. 그때가 한창 시리아 내전이 심할 때라서 뉴스마다 시리아 아이들 사진이 나왔어요. 울고 있는 것도 아니고, 멍한 표정의, 아이들이 지을 수 없는 수준의 절망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이 마음에 많이 남았어요.
마음이 힘들었던 차에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진로를 정하게 됐죠.
인도에서의 생활과 개인적인 경험 자연스럽게 현재의 일로 이끌었네요. 그래도 이 길을 걷고자 하신 지 꽤 시간이 지났어요. 그 사이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으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NGO 단체에서 일하게 되는 동력이 무엇인가요?
저도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기는 해요.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그래도 이 일을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다른 세상에 있는, 저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직업은 이야기를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 손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또, 후원자와 후원아동,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일들도 즐거워요.
(선이정님 추천작, <목소리들>(2025))
하시는 일을 통해 경험하시는 일들이 영화의 취향이나 선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할 것 같아요.
네, 엄청이요. 저는 영화제를 처음 다니게 된 계기 자체가 인도 영화 보기 위해서 였어요. 3년을 살았기 때문인지 인도가 가끔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영화제에 가서 인도 영화를 한두 편씩 봤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리아 다큐멘터리처럼 본업과 연관된 작품도 보게 되고 하면서 영화제를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지금도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나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영화, 그런 영화를 엄청 좋아해요. 제3세계 영화 있잖아요. 제작 국가에 국가 이름 5개 정도 들어 있는… 그런 영화 있죠? (웃음) 딱히 국가를 보고 고르는 건 아닌데 시놉시스를 읽고 고르면 국가가 그렇게 분포가 되어 있어요. (웃음) 또, 개봉 절대 안 할 것 같은 영화도 영화제에서 영화를 고르는 포인트 중 하나죠.
(개봉하는 영화는 나중에 봐도 되니까요. 영화제에서는 특히 여기 아니면 절대 못 보겠다 싶은 영화들이 있죠.)
네, 특히 영화제때 보면 난민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영화가 많잖아요.
이것도 일종의 자해라고 느껴질 때도 있어요. (웃음) 왜냐하면 다큐는 특히나 푸티지 자체가 정제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보기 힘들기도 하고, 폭력 상황은 배경도 비슷하게 보이거든요. 미얀마나 홍콩이나… 흔들리고, 최루탄 터지고 이러면 비슷한 장면들을 계속 보다 보면 멀미도 나고 힘들거든요. 그래도 약간 의리를 지키는 느낌으로 보러 가죠.
그렇게 일과 비슷한 부분이 많은 영화를 좋아하다 보면 피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계속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일을 하다가 힘들어지는 부분을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힘을 얻는 것 같아요. 영화를 보면서 동기부여를 얻기도,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는 거죠.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요. 그 말에서 저는 희망을 얻어요.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외로울 때가 있거든요. 요즘 누가 후원해? 아프리카 아동이 중요해? 자기 삶이 중요하지! 그런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릴 때가 있어요.
영화는 안 그렇죠. 각자도생을 주장하는 영화는 보통 별로 없잖아요. ‘영화’라는 매체 자체도 협업을 통해 완성되고, 영화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대부분은 희망을 말하고 싶어하죠. 그렇게 영화 사이에 담긴 희망을 발견하면서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힘을 내게 돼요.
관련해서 영화를 보고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소셜 모임도 하신다고 들었어요.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처음에는 영화 얘기를 하고 싶어서 만들었어요.
기존에 있는 활성화된 일반 영화 사교 모임을 나가기엔 에너지가 없고,
진짜 조예가 깊은 영화인들 모임에 나가기엔 그곳에서 제가 할 말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갈 수 있는 영화 모임은 어디일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영화 얘기는 뭘까’ 고민 했죠.
몇 년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시리아에서 탈출하여 난민이 되기 전까지의 과정들을 이야기로 담은 <전장의 피아니스트>(2022)라는 영화를 본 생각이 났어요.
그 영화를 보고 나와서 혼자 있는데, 너무너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영화가 개봉하고 동종업계 친구들 데려가서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눴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영화를 매개로 소셜 이슈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어요.
근데 모든 영화가 난민 같은 이슈를 주제로 하고 있지는 않잖아요. 그런 얘기만 하다 보면 한계가 있어서, 현재는 넓은 범위의 소셜 이슈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플랜 75>(2024)를 보고 나서 ‘우리는 과연 불안 없이 노년이 된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런 법안이 시행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런 얘기를 함께 나누죠,
하나의 영화를 보더라도, 함께하는 사람들 각자의 해결하고 싶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니까 전 방향으로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혼자였다면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그럼 소셜 모임의 처음과 지금, 선이정님에게 변화를 가져온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영화 얘기 같이 하고 싶어서 시작하긴 했지만 이 모임이 저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냥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좀 더 알게 되는 것 뿐이라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소셜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같이 하는 것. 또,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많아요.
거기에 영화가 진짜 좋은 매개체라는 걸 느끼죠. 정말 난생 처음 보는 사람끼리 이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의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영화를 매개로 하다 보니 인물에, 스토리에 기대 예민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게 되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느끼게 되었어요.
(선이정님 추천작, <되살아나는 목소리>(2024))
영화 질문으로 넘어가볼게요. 선이정님에게 삶의 이정표 같은 영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보고 싶은 영화가 혹시 있을까요?
음, 삶의 이정표까지는 아닌데 저는 마음이 힘들 때 <아멜리에>(2001)를 봐요.
쭉 한 번에 보지도 않아요. 그냥 틀어 놓고 밥 먹으면서 오늘 여기까지 보고, 그 다음 날 청소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보고 하는 식으로 보죠.
<아멜리에>를 보면 행복해져요. 주인공도 그렇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가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거든요. 그리고 혼자 살다 보니까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지친 감각이 아멜리에가 처음에 도시에서 느끼는 외로움, 그리고 사랑을 찾아 나서는 마음과 공명이 되더라고요.
또, 색감이나 이런 것도 예쁘니까 그냥 보고 있으면 저한테는 약간 행복특효약 같아요. 어떤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틀어 놓으면 행복해지는 영화예요.
그리고 제일 많이 본 영화는 <러브레터>(1995)예요.
<러브레터>는 영원히 사랑할 것 같아요. 작년에 오타루를 갔거든요. 홋카이도에서 오타루로 가는 기차에 올라 내리는 눈을 보며 OST를 듣는데, 진짜 첫사랑 만나러 가는 기분인 거예요. 진짜 첫사랑을 만나러 갈 때도 그렇게 설렌적이 없는데. (웃음) 내 첫사랑이 이 영화였구나 그 때 다시 한번 느꼈어요. (웃음)
음, 영화를 볼 때 이 작품 명작인 건 알지만 나의 5점을 줄 수 있는 영화는 다르잖아요.
4.5점을 주는 영화와 5점을 주는 영화의 차이점을 만드는 기준이 있을까요?
심장을 쳐야죠. 내 심장을 폭행했다. 그럼 5점이죠. 근데 그게 기준이 없어요.
그냥 얻어맞는 거예요. (웃음)
((웃음) 어떤 영화에 심장을 때려 맞은 건가요.)
작년에 개봉한 <되살아나는 목소리>(2024)라는 독립 다큐가 있어요. 박수남, 박마의 감독님이라고, 모녀가 같이 만드신 작품이에요. 그걸 보고 저렇게 살고 싶다, 저렇게 혁명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님 작품 중에 개봉 안 한 작품인데,
<천상의 육체>(2011)라는 작품이 있어요. 그게 또 제 심장을 치고 갔어요.
그럼, 일반적으로 영화를 볼 때 가장 주목해서 보는 지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저는 의외로 영화 속의 공간을 주의 깊게 보는 것 같아요.
사실 예산의 차이가 있으니까 예산이 작은 영화는 공간도 조금 어설플 수 있잖아요.
그래도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그 에너지가 저를 그 영화에 스미도록 만들면 좋다고 느껴요. 다큐 같은 경우는 공간을 고를 수 없으니까 조금 다르긴 하지만요.
(제일 좋아하시는 영화 속 공간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나는 건 <페인 앤 글로리>(2019)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워낙 원색 많이 쓰고 공간을 예쁘게 쓰잖아요.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 장면에 등장하는 공간이 따뜻해서 좋았어요. 진짜 ‘이거다!’ 싶은 공간은 지금 딱 기억이 안 나네요. (웃음)
아, 최근에 좋았던 영화는 <더 폴: 디렉터스 컷>(2024)이 생각나네요.
어렸을 때 봤을 때는 그 정서가 잔인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졌는지 말을 못 했거든요. 장면만 놓고 보면 더 잔인한 영화들이 많은데, 나는 왜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느껴지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커서 다시 보니까 그 ‘왜’가 제 안에서 언어화가 되더라고요. 절망에 빠진 사람을 절망의 끝까지 밀어 넣는 과정이 잔인했던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에서 빠져나오려 싸우는 모습이 지금은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죠.
저 주목하는 거 공간 아닌가 봐요. 그런 에너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웃음)
청춘 영화들도 왜, 그런 에너지 있잖아요.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그런 느낌의 에너지를 전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시작되는 영화들이요.
공간은 아닌 걸로, 그냥 허세의 답변이었던 것 같습니다. (웃음)
(공간도 좋고 에너지도 좋고 둘 다 중요한 것으로 하겠습니다.(웃음))
남들은 잘 모르지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영화도 있을까요?
아직 개봉 안 했어요. 아마 곧 개봉할 것 같은데 <호루몽>이라는 작품이에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다큐멘터리 작품인데, 자이니치로 살아가시는 분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헤이트 스피치와 싸우는 인물의 법정에서의 시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어>(2022), <카운터스>(2018) 하셨던 이일하 감독님 작품이예요.
저는 보면서 힘을 많이 얻었어요.
구성적 측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그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게 되잖아요. 그분이 에너지가 넘치고, 또 혐오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굉장히 많은 힘을 얻게 된 영화예요.
글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처음에 영화로 긴 글의 리뷰를 쓰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단순히 좋아서 시작했어요. 제가 어떤 영화를 봤는데, 제 눈에 이런 것들이 보였다는 게 너무 좋아서 시작했죠. 제가 초반에 쓴 글은 거의 그냥 줄거리 요약이에요.
그저 신나가지고 써서 인터넷에 올려놓았는데, ‘진진’에서 개봉하는 영화 시사회를 초대해 주신거예요. 신기했죠. 그렇게 보고, 쓰고 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쌓이고 쌓여서 여기까지 왔네요.
글을 쓰다 보면은 감상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런 경우가 가끔 있죠. 요즘은 영화를 볼 때 쓰면서 보거든요.
시사회나 영화제 같은 경우에는 리뷰를 제한된 시간안에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일을 하니까 하루 종일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영화를 볼 때 꼭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노트에 필기를 하면서 보는 거죠. 그래서 감상이 잘 변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있기는 해요.
쓰다 보니 더 좋아지는, 그러니까 볼 때는 감정만 있었다면, 쓰면서 좀 더 명확해지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글로 기록하는 것의 장점은 영화를 만든 사람의 시간에 대해 내가 애정을 갖게 되는데에 있는 것 같아요. 자세히 뜯어보면서 글을 쓰다 보면 만든 사람의 의도를 알아채고, 이해하게 되는 거죠.
(선이정님 추천작, <말없는 소녀>(2022))
보니까 거의 150개의 리뷰를 올리셨어요. 꾸준함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어떻게 계속해서 지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나요?
일단은 아직 좋아서 해요. 영화 보는 것도 좋고, 그걸 글로 쓰는 것도 좋아요. 게다가 씨네랩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계속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죠.
예전에는 제가 이걸 계속해도 될까 고민이 많았어요. 혼자 좋아서 하는데, 취미라기에는 들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거죠. 그쯤에 씨네랩를 만나서, 계속 새로운 기회들이 만나게 되었거든요. 이제 더이상 이걸 계속해도 될까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아요.
그럼, 안 써지는 글들을 쓰시는 노하우 같은 것도 있을까요?
없는데, 있으면 정말 배우고 싶네요. (웃음)
저는 만약 어떤 영화의 메시지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면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태풍 클럽>(1985)이 그런 작품이었거든요.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감탄하는 이유는 알겠지만, 저에게는 너무 불편했어요. 아주 옛날 영화라서 중간에 폭력적인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저한테 굉장히 힘들었거든요. 이 영화가 전하는 대단함이 저는 유쾌하지 않았죠.
이 감정에 대해 한참 생각을 하다가, 긍정적인 리뷰는 아니었지만 박경리 작가가 일본에 대해서 쓴 ⟪일본 산고⟫라는 책과 연결지어서 리뷰를 작성 했어요.
반대로 <서브스턴스>(2024) 같이 너무 좋은 감정에 압도되어서 정리가 안 돼서 못쓰는 경우들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도 다른 책과 연관 짓거나 해서 작성하죠.
결국 영화만으로 정리가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경우에는 책과 같이 다른 인풋이 많아야 글도 잘 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예전에 도움 많이 받은 말이 있어요. ‘정확하게 칭찬하는 글을 쓰고 싶다.’라는 신형철 평론가가 하신 말씀인데, 그 말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영화의 장점을 못 봐도, 이 영화의 장점이 분명히 있고, 그것들을 잘 찾아내고 싶다. 그저 단어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닌, 그 감정의 이유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할 때 그 말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씨네랩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 주셨어요. 계속 함께해 주시는 마음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요.
처음에는 멋 모르고 시작을 했어요. 계속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하이스트레인저 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그러면서 너무 이 영화 생태계에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영화 업계에 진짜 맑은 물 붓는 것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엔 긴장도 했죠. 그런데, 앞으로 성장해 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말씀해 주셨던 부분들, 시사회나, 영화제 프레스 같은 부분들과 같이 점점 뭐가 늘어나는 것을 눈으로 보이니까 더 함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오랜 활동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두 번의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 제천은 비도 많이 오고 처음 가본 곳이라 동선이나 시간을 정하는 데 미숙했다 보니 정말 힘들었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요. 두 번째 제천은 정말 행복해서예요.
둘 다 다른 의미로 강렬해서 잊혀지지가 않아요. (웃음)
첫 번째 제천은 기자단 활동을 함께한 방자까님과 한동안 제천 얘기밖에 안했어요.
그리고 그다음 제천에서는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님과 사진도 함께 찍고 해서, 제천이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때 인터뷰도 진행 하셨잖아요. 이번에 인터뷰 준비하면서 그 때 인터뷰를 진행해 주신 크리에이터분들의 대단함을 느꼈어요.
저는 직업상 종종 인터뷰를 할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주민들이나 아동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할 때가 있는데, 사실 되게 힘들거든요.
인터뷰를 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제가 원하는 답으로 유도하는 것처럼 될 수 있어서 질문을 잘 짜야 해요.
하지만 감독님들은 본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된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즐겁게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최근에 회사에서 영화 상영회 분기별로 진행해서 GV를 함께 하고 있거든요.
그것도 처음엔 정말 무서웠는데 세상에 완벽한 GV는 없다는 마음과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만 전달되게 하자고 마음으로 하고 있어요.
그럼, 선이정님께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영화들이 있을까요?
작년 8월에 개봉한 <이오 카피타노>(2023)라는 영화가 있어요.
사람들이 난민이 주인공인 영화를 생각하면 시리아같은 분쟁 지역을 생각하는데, <이오 카피타노>의 주인공 에드는 세네갈에서 왔어요. 거기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만 분쟁이나 어떤 특정한 사건이 있는 곳은 아닌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세네갈을 나와서 유럽까지 가는 여정을 담았어요.
이 영화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진짜 난민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세상에 내가 모르는 현실이 이렇게 있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영화예요. 국제개발협력 업계에 있는 제게도 너무 낯선 현실이었어요. ‘리비아 불법구금’이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걸 들어만 봤거든요. 그냥 불법 구금 하나 보다 했는데, 그 불법 구금이 얼마나 끔찍한 형태인지를 이 영화로 처음 본 거죠.
그리고 또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2022)인데요.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목소리를 내게 되는 일이 삶에 찾아올 수 있잖아요. 그들을 지켜줄 보호 장치가 없을 때 정말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죠. 그 상황에서 너무 아름다운 저항을 하는 영화였어요. 게다가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통해 고민하게 만드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와 같은 영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영화 리뷰를 쓰실 때 리뷰를 봐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쓰시기도 할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영화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영화의 숨어 있는 의미를 잘 찾는 사람도 아니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영화가 촉발한 감정을 적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이제 제 일과 관련된 영화일 때는 그것에 대한 설명을 좀 더 서술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 글을 읽는 사람들이 설령 본인이 이 영화에 대해 느낀 감정이 아니더라도, 제 글에서 묻어나는 감정을 읽고 ‘그래 이런 감정도 느낄 수 있지.’하고 공감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업에 관련된 영화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친절하게 정리된다고 느꼈으면 좋겠고요.
예를 들어 <신성한 나무의 씨앗(2024) 리뷰 같은 경우에는 제가 이란의 상황을 같이 정리해서 올렸거든요. 이런 내용이 영화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나누려는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인지 들어보면서 오늘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제가 살면서 겪어볼 수 있는 일의 총합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어떤 경우에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못할 때가 있잖아요. 힘든 일을 겪으면 힘들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 힘듦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이 보여지는 지 상상할 수 없죠.
영화는 살아본 적이 없는 삶을 간접적으로 상상하게 하고, 살게 하면서 내 안에 나도 몰랐던 나를 끄집어내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함께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좀 더 풍성해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힘이 더 좋아지는 거죠.
저는 단순히 영화는 영화, 내 삶은 내 삶이 아니라, 내 삶과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이 저에게 있어 영화의 가장 큰 의미인 것 같아요.
사람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을 살피는 선이정님의 따듯함을 느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영화를 사랑하는 한 명으로서 큰 힘을 얻은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을 연결하고자 하는 선이정님의 마음이 더 많은 분들에게 닿아 세상에 필요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선이정님이 추천하는 '몰랐던 세상을 알게 만들어주는 영화' 3편!
🎬 <목소리들> / 지혜원 감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을 아시나요? 그 책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입니다. 모든 분쟁과 재난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를 먼저 칩니다.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취약한 자리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기에 분쟁과 재난 앞에 더 민감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은 분쟁/재난이라기보다는 국가폭력사건이지만, 약자의 얼굴이 더 쉽게 지워진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김군> 볼 때도 느낀 건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사건이라고 해서 상처도 과거의 문장이 된 건 아니라는 걸... 이 영화에서 덜덜 떠시는 한 분의 모습 앞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 <되살아나는 목소리> / 박수남, 박마의 감독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이런 어마어마한 분의 다큐멘터리는 마음을 쉽게 떠나지 않아요. 기억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또 다시 기억이 되고, 그 사이 감상과 해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박수남 감독님의 탁월한 기억과 기록을 보며 “저런 삶이 가능하구나! 너무 멋지다!” 하고 무릎을 쳤어요. 이 영화를 스무 살에 보았다면 아마 다짜고짜 일본에 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록하는 삶이 얼마나 힘있는지, 제게 그 경계를 폭발적으로 열어준 영화입니다.
🎬 <말없는 소녀> / 콤 베어리드 감독
클레어 키건 소설 <맡겨진 소녀>를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원작 소설과 각색 영화가 결이 너무 일정해서 경이롭습니다. 클레어 키건을 좋아하신다면 꼭! 추천드려요.
제게 이 영화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돌봄의 객체일 뿐 아니라 돌봄의 주체가 되기도 해야 하는구나 느껴서예요. 우리는 흔히 돌봄 받지 못하는 아동들을 생각하고, 의무감이나 선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기 쉽습니다. 그러나 돌봄은 받는 사람 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요즘 세상에 너무 쉬이 잊힌 마음이지만, 제가 일할 때마다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나는 행복하였네라!“ (시 <행복>, 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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