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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바다2025-08-20 21:15:39

마이크 리가 전하는 관계의 회복에 대한 냉혹한 통찰

영화 <내 말 좀 들어줘(Hard Thruths)>리뷰

▷한줄평 : 관계의 회복이 얼마나 어려운지우리네 인생을 반추하는 잔혹한 통찰 

▷평점 : ★★★★  

▷영화 내 말 좀 들어줘(Hard Truths), 2025.8 

  본 글은 씨네랩(http://cinelab.co.kr초청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기 세상 모든 것이 못마땅한 한 중년 여인이 있다 

그냥 다 끝났으면 좋겠어.라는 그녀의 고백은 절망 속 깊이 빠져 있는 현재의 심리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과연 이 여인을 보듬어 줄 사람은 있기는 한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관찰자 시점으로 심리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 간극을 유지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불만으로 가득한 여인 팬지’ - “가족이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로워 

이 영화의 주인공 팬지(마리안 장 밥티스트)는 날선 독설가로 통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마트 계산원이든 치과 의사든,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녀는 날카롭고 거침없는 말로 상대를 공격하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거리에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초반부 내내 그런 팬지의 동선을 따라가며 그녀의 배설을 영상속에 채워 담아낸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팬지는 늘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우선 가장 가까운 가족들인 아들 모지스(트웨인 배럿)와 남편 커틀리(데이비드 웨버)가 타깃이다. 

깨끗하게 정리된 집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기면 잔소리와 힐난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식탁위에 식빵 부스러기를 깨끗이 치우지 않고 일어선 아들이, 먼지투성이 신발을 신고 집을 돌아다니는 남편이 불만족스럽다. 

그녀의 잔소리에 익숙해진 탓인지 가족들은 어떤 말대꾸도 하지 않는다. 무시하고, 회피하고, 도망치는 방법밖에 없다 

특히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너는 도대체 뭐하고 살래?’라고 다그치는 엄마의 목소리조차 차단하려는 듯  

아들은 방에 틀어박혀 헤드셋으로 세상을 가려버린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아들과 남편은 늘 그녀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집밖에서는 더욱 거침이 없다

이런 성정을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은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다 결국엔 그녀의 감정의 배설을 받아내는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가구점에서 소파를 둘러보던 팬지에게 점원이 다가와 뭐 필요한 게 있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박에 거절해버린다

소파에 앉아 있던 다른 손님들에게는 당신들의 지저분한 DNA가 묻은 소파를 사 가라는 거냐?’며 생트집을 잡는다

마트 계산원에게는 표정이 왜 그래? 얼굴 좀 펴!’라며 대뜸 공격해 대고

이를 말리는 뒷 손님에게는 타조같이 생겼다며 인신공격성 말도 서슴지 않는다

치과병원에 가서는 자신을 내버려 두고 장례식을 간 담당의사가 제정신이냐며 비난을 퍼 붓는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마트 계산원에게 독설을 남기는 장면

 

이쯤되니 그녀가 반사회적 편집적 인격장애를 가진 것으로 짐작된다

세상에 또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면서도 차츰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남모를 불안과 외로움을 안고 살얼음 위를 걷듯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진다.

 

기어이 내 주변에 있는 어떤 한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사소한 일에서조차 고집스러워지는 나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숨겨진 발톱을 한두번은 드러낼 때가 있지 않았던가

뭔가 정신과 진료나 심리치료가 필요해 보이던, 나와 아주 다른 성정의 팬지에게서 문득 숨기고 싶은 나의 정서적 결핍이 거울에 비춰지는 듯하다

어느새 툭 치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끊어져 버릴 것 같은 팽팽한 고무줄의 한쪽을 맞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젠, 그녀의 삶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아뿔싸, 감독 마이크 리의 전략에 걸려든 것 같다

집요하게 그려낸 그녀의 불안과 불평, 그리고 분노는 이제 심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스크린 밖 나와 정서적 연대를 이루었다

이젠 어쩌지? 아직 영화 초반이니 기대를 버리지 말아야겠다.

 

 

대화의 기술자 샨텔’ – “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해 

반면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는 샨텔(메셀 오스틴)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어주는 대화의 고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배려하는 대화의 기술이 몸에 깊숙이 배어 있다 

미용실에서는 손님의 머리를 매 만지면서집에서는 식탁에 앉아 그녀의 두 딸들과 깔깔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엄마를 닮았는지 딸들도 애써 직장에서 받은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직장 상사의 비난의 화살을 온 몸으로 받아 의기소침해져 있을 법하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넘쳐난다

 

지나칠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고 깔끔해서 오히려 경직되어 보이는 팬지의 집과 달리 

샨텔의 집은 비좁고어수선하지만 따뜻한 온기와 아늑함이 느껴진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샨텔은 두 딸과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눈다

 

샨텔은 언니 팬지가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지금 왜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에게도 불평, 불만을 쏟아내는 언니와의 대화를 피하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가려고 애쓴다

그래도 세상 하나뿐인 언니 아닌가.

 

5년전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을 맞이하여 그들은 함께 어머니가 안장되어 있는 묘지로 향한다 

몇번이고 함께 가자는 동생의 요청에 확답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당일에서야 못이기는 척 팬지는 동생을 따라 나선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기억은 서로 사뭇 달랐다

 

이 자리에서 팬지는 어린시절 자신이 겪었던 아픈 상처의 기억들을 격정적으로 토로해 낸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간직하고 있는 동생과 달리 

팬지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던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힘든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결국 묘비를 어루만지던 팬지는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무관심, 그리고 어린 나이에 짊어져야 했던 책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녀의 지금의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 보이는 행동과 말투는 긴 시간동안 퇴적되어 온 정서적 상처들의 표출일 뿐이었다

 

흐르는 눈물은 그녀가 짊어져온 무거운 과거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동생 샨텔은 그런 언니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웃음은 눈물로, 희망은 현실로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또 마지못해 참석하게 된 어머니의 날’. 샨텔의 집에서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여 앉았다 

즐거운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도 팬지는 왠지 낯선 이방인처럼 이 자리가 불편할 뿐이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온가족이 모인 모임에서조차 팬지는 불청객처럼 외롭다

 

그러던 중 아들 모지스가 어머니의 날을 맞아 집에 꽃을 배달해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팬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이어 큰 울음으로 변하고 만다. 만감이 교차하며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던 오랜 고립과 깊은 외로움 속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듯 싶다 

이제서야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억누르고 있던 깊은 슬픔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희망을 만끽하는 행복’한 가족 으로의 회복을 선물을 하려는 것일까?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팬지는 식탁에 앉아 물끄러미 거실 밖 안뜰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어두움으로부터 밝고 화사한 세상으로 나갈 것을 다짐이라도 한 듯 팬지는 아들이 사다 놓은 꽃을 꽃병에 담아 식탁위에 올려 놓는다

단정하고 깔끔한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소품을 직접 챙기는 모습은 어쩌면 팬지의 변화의 의지를 암시한다.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스틸컷 / 뭔가 실마리가 될 듯 싶었던 꽃은 끝내 버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뿌리 깊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법, 단 한번의 눈물로 일순간에 모든 것이 변할 수 없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간 사이, 남편은 식탁 위 꽃을  냅다 내다 버린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있기는 한거냐?’는 팬지의 독설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테리어 일을 하다가 허리가 삐끗하여 움직이기조차 어려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아내가 더욱 미워 보인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버린 서로의 간극은 더 이상 좁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날을 기점으로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이 해소되고 변화가 모색될 듯싶던 팬지의 가족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팬지는 침실에서 이불을 감싸고 웅크린 채 침묵을 응시하고, 남편 커틀리는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물을 삼킨다. 

 

마이크 리가 전하고 싶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통찰

어쩌면 근원적인 관계의 회복은 이제는 가끔씩 일이 있을 때에나 만나는 동생 샨텔이 아니라  

매일 함께 숨쉬는 공간에서 마주해야 할 남편 커틀리와 아들 모지스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샨텔과거의 가족이라면, 현재의 가족은 남편과 아들이다. 과연 이들은 미래도 함께할 수 있을까? 

 

이미 나락 깊숙이 떨어져 상할대로 상한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네 삶이라고 한다. 이 결말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현실이라면 현실이다 

그래서 영화의 원 제목은 ‘Hard Truths’ – 불편한 진실또는 냉혹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81세 나이의 거장 '마이크 리' 감독은 자신의 인생의 참혹한 통찰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영화 <내 말 좀 들어줘> 포스터

 

2025.8.17

작성자 . 제이바다

출처 . https://blog.naver.com/jeijsea?Redirect=Update&logNo=22397739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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