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07 13:42:55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진 마블, 사라진 토르에 대한 존중.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
주인공이 바뀐 듯 마블 영화 같지 않은 시작과 내가 바라던 토르의 모습과는 다르게 펼쳐진다. 영웅으로 살수록 공허해지는 마음이 토르에게 있어서 이때까지 보여주었던 토리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걸까. 넓어질수록 기대감을 높였지만 얕아지는 캐릭터들로 인해 한없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웃음도 스토리도 놓쳐버린 영화는 토르는 실없는 바보가 되어 알몸으로 영화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부끄러움은 관객의 몫이다. 겉모습이 낯설게 바뀌어도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토르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담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반영한 듯 토르에게 사랑을 주입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꽉 낀다. 영화에 계속해서 흐르는 음악이 과하게 제멋대로 흐르는 것처럼 이 영화도 제멋대로 만화에서 튀어나온다. 상실을 바탕으로 한 치유가 정신없고 산만한 형태로 다가와 진지함이 다소 사라진다. 마블이 그릴 앞으로의 MCU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신의 오만함으로 인해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고르의 분노는 다른 신을 향해 솟구친다. 다른 신을 해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뉴 아스가르드를 습격하여 아이들을 납치한다. 갑자기 나타난 옛 애인과의 재회도 잠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토르는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광란의 파티’에 참여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옴니포턴스를 탈출하고 어둠의 도시 섀도 텔름에 가 아이들과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갖은 힘을 쓴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광란의 액션은 움직임보다는 번쩍이는 것에 집중하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안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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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멈출 수 없는 투쟁, 실패라 말할 수 없기에 더욱 숭고했다.
시놉시스
2024년, 수배자 신분이었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기리시마 사토시는 병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긴 뒤 사망했다. <도주>는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이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아다치 마사오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병치시키면서 기리시마의 번민과 투지를 묘사한다.
영화정보
아다치 마사오 ADACHI Masao
Japan
2025
114min
DCP
Color
Fiction
12세 이상 관람가
International Premiere
영화리뷰
아다치 마사오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도주>는 기리시마 사토시의 이야기를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기리시마 사토시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소속의 테러리스트이자 지명수배자였다. 그는 50년간 도주하여 생을 마감하기 전 병원에서 자신의 이름을 남긴 뒤 사망했다. 실제 이야기를 각색한 만큼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도주를 선택한 삶의 무게, 결정의 대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투쟁을 위한 도주가 지금 바로 시작된다. 위 영화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스 섹션에서 상영된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과거 일본이 한국, 중국, 대만을 포함한 여러 동아시아 국가를 식민지화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그를 도왔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 중공업, 오리엔탈메탈사, 한국산업경제연구소를 테러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크게 늑대부대, 대지의 어금니 부대, 전갈 부대로 나뉘어 각자의 임무를 맡았다. 비밀스럽고 신속하게 ‘테러’ 후 범죄를 도운 이들을 처단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 인해 앞으로의 활동도 쉽지 않아보였다. 명백한 실패라고 생각했기에 작전을 종료하려 했으나 반성 후 다시 투쟁해야 한다는 일념하에 이들은 ’테러‘를 감행한다.
이들도 ’실패’라는 것을 인지했듯이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이들의 행보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들에겐 투쟁이었지만 그 내막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테러에 불과한 행위라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각 부대의 리더들이 체포되었고 남은 조직원들도 체포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기리시마는 ’도주‘를 결심하지만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했던 탓에 막막하기만 하다. 친하게 지냈던 동기와 헤어지며 매년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간 그 자리에서 다시 보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세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선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체포된 소식을 듣게 된 기리시마는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과연 기리시마는 어떤 결말을 맞게될까.
기리시마는 ‘도주’를 곧 ’투쟁‘으로 생각했다. 체포된 동지들을 위해 잡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오로지 숨고 도망치는 것에 열중했다. 모든 것을 경계하고 의심의 여지가 있을 경우에는 또 다른 곳에 가는 등 치밀하게 행동했다. 그는 번뇌가 찾아올때마다 도주하는 것이 투쟁이며, 잡히지 않는 것이 곧 투쟁을 지속하는 것이라 되뇌었다. 하지만 투쟁에는 끝이 없었고 고독을 홀로 삼켜야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끝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투쟁의 이름으로 도주했고, 그 끝에서 자신의 존재를 되찾는다. 외롭고 고된 길이었지만, 동지들의 꿈과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도주‘였던 것이다.
혁명을 위해 그리고 함께한 동지들을 위해 자신의 욕망은 잠시 접어두고 오로지 투쟁을 위해 도주했다. 문장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사투였다. 투쟁은 짧고 도주는 길었다. 주인공은 어떻게 신념 하나만으로 혁명의 길을 계속해서 가게 되었을까? 그는 테러행위로 인해 죽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비난 받기도 하고, 과거의 자신에게 몰아부쳐지며 끊임없이 자신의 번뇌와 싸우게 된다. 자신이 바라왔던 진정한 투쟁과는 거리가 먼 ‘도주’의 삶으로 인해 ‘투쟁’의 의미가 희미해져갈때마다 자신을 꾸짖는다. 그만큼 엄격하고 반성하는 그 태도야말로 숭고한 정신을 보여준다.
영화 <도주>는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새겨주는 작품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그후에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를 꾸짖을 ’갈’한다. 과거 독일 나치의 전쟁범죄로 인해 지금까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반면,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고국이 저지른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그 역사에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본에 의해 피해국이었다고만 생각했던 우리의 시선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마주하며 다시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반성하고 있었는가. 상대적으로 힘의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든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시점으로 이동하는 영화의 시선에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만큼 흥미로움을 유발한다. 시간의 틈 사이로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건 좀 엉뚱한 상상이지만 영화 속에서 미래의 나, 과거의 나를 만난 것처럼 나도 나를 그렇게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불안을 걷어내주고 확신을 심어주는 존재를 만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존재는 다름아닌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나’이기 때문이다.
상영시간표
2025.05.01
2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2025.05.02
18:00
CGV 전주고사 5관
2025.05.03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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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리 갱> - '거짓과 진실을 거둬낸 네드 켈리의 이야기'
켈리 갱 (True History of the Kelly Gang, 2019)
개봉일 : 2021.08.31 (한국 기준)
감독 : 저스틴 커젤
출연 : 조지 맥케이, 러셀 크로우, 니콜라스 홀트, 에시 데이비스, 토마신 맥켄지, 찰리 허냄, 션 키넌
거짓과 진실을 거둬낸 네드 켈리의 이야기
혹시 Ned Kelly(네드 켈리)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편의상 호주로 표기)에서 활동했던 은행강도인 네드 켈리. 네드 켈리가 왜 유명한가 하면 그는 단순한 도둑이 아닌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핍박하는 자들의 물건을 훔치던 의적이자 공권력에 저항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의 막강한 힘에 눌려 폭력과 불평등함으로 점칠 된 사회에서 시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저항했던 영웅이자 공권력이 가장 제거하고 싶어 했던 범죄자 네드 켈리. 그는 호주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홍길동과 임꺽정과 같은 인물이라고 한다.
교과서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네드 켈리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조지 맥케이 배우 덕분이었다. 그가 영화 <1917>의 히로인으로 주목받던 해, 자연스레 조지의 진중한 연기에 빠져들어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던 중, 내 시선을 순식간에 빼앗은 작품이 몇 개 있었다. 거친 표정과 단단하게 다져진 몸, 날카로운 눈빛. 지금껏 봐왔던 조지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라 강렬하게 다가온 네드 켈리의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온갖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대체 어떤 영화일까.”, “네드 켈리란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알았을 땐 영화가 국내에 수입되지 않았던 때였고, 솔직히 무자막으로 볼 용기는 또 없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사진들을 찾아보며 속칭 존버-를 했다. 그리고 존버는 승리한다더니, 2021년 여름의 끝자락. 네드 켈리를 만났다.
<켈리 갱>엔 위에서 소개한 인물, 네드 켈리의 불안정했던 유년시절과 저항 정신을 가득 담은 켈리 갱을 창설하고 마지막 전투를 벌이던 26살까지. 그의 생애가 담겨있다. 투박한 글체로 적어내려간 네드 켈리의 편지를 바탕으로 재해석된 소설 <켈리 갱의 진짜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우선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딘가 아쉬웠다. 아무래도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소설과 2시간으로 일부 압축된 영화는 근본적인 정보량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영화 <켈리 갱>은 초반부에 비해 후반부의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조지 맥케이의 내레이션과 함께 천천히, 아주 깊게 훑고 지나간 유년시절 부분까지는 정말 좋았다. 어린 네드 켈리를 연기한 배우 올란도 슈워드의 연기도 훌륭했으며, 그 위에 얹어지는 조지 맥케이의 정갈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매력에 빠진 채 “이제 그토록 궁금해했던 네드 켈리의 이야기를 듣는 건가.”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초반부를 감상했다. 하지만 네드 켈리가 성장하고 각성하는 계기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졌고 그의 전투엔 비장함과 결의보단 흥분이 조금 앞서는 느낌이었다.
지배받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 지배자들에게 억압을 받으며 슬픔과 분노를 안고 자란 아이가 어떠한 계기로 각성을 했다기보단 갑자기 어느 날 폭발해버린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별로였다, 재미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네드 켈리라는 인물을 만들기 위해 공들인 티가 역력했고, 배우들 또한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롭고 놀라운 액션들을 보여줬으며 카메라 안에 담아낸 광활한 배경 또한 정말 멋졌다. 결말까지도 참 좋았는데, 많은 기대를 해서 그런지 기승‘전’.. 전에 해당하는 그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만일 이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네드 켈리라는 인물 또는 시대 배경에 대한 정보를 조금 훑어보고 가는 걸 추천한다. 그가 왜 이토록 분노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포인트를 미리 알고 간다면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억압의 시대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평범한 시민이 되기 위해 거칠게 저항한 네드 켈리.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전설처럼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켈리 갱>은 용감한 시민 네드 켈리와 그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박수갈채를 담은 작품이다.
아쉬운 시점을 지나고 나면 약간의 벅찬 감정이 밀려오는데, 그 순간 정말 희한하게도 아쉬웠던 감정이 모두 날아가 버렸다. 아쉬운 점은 분명 있었지만 조지 맥케이, 러셀 크로우, 니콜라스 홀트, 에시 데이비스와 같은 굵직한 배우진들의 연기 조합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누군가에겐 범법자로 낙인 되었던 그의 거칠지만 용감하고 진실된 일대기가 궁금하다면, 조지 맥케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다면 <켈리 갱>을 추천한다.
켈리 갱 시놉시스
폭력과 부패로 가득했던 시대
온갖 범죄로 세상을 더럽히는 무법자 ‘해리’와 부패경찰 ‘알렉스’에 맞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악인들을 단죄한 전설적 영웅이자 세상이 버린 위대한 범죄자 ‘네드 켈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이야기는 1867년 호주. 네드 켈리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진실과 거짓으로 뒤섞여 범법자 또는 영웅으로 불리는 그의 일대기에서 진실과 거짓이란 이분법을 거둬낸 후 깨끗하게 다듬어 내놓은 인생의 시작점은 다소 휑하고 뻐근하게 다가온다.
나의 비를 막는 지붕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 엘렌은 아무리 파내려 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해리 파워에게 네드를 제자로 팔아넘겼고 해리 파워와 함께 다니며 이 넓은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자는 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버린 네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마리 짐승 같은 남자로 자라게 된다.
무능하게 살다 감옥에서 갑작스레 생을 마감한 아버지, 여러 남자들을 거치며 서서히 네드를 지키길 포기한 어머니. 아직 어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동생들. 먼지만 날리는 땅에 살고 있는 네드 가족을 억압하는 영국 경찰들까지. 어린 네드가 감당하기엔 세상은 너무 거칠고 불공평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빠르게 막을 내렸고 희망 또한 보이지 않았다.
신이 버린 땅에서 아버지를 잃고, 남은 가족들의 일부는 볼모로 잡힌 채 공권력 밑에 무조건 수그려야 하는 불합리한 삶. 네드는 이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억압된 사회의 진실을 감추면 숨이 막힐 것이고 편안한 길을 찾아 거짓을 숨기면 삶이 서서히 부패할 것이니 그는 진실된 사회를 되찾기 위해 거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네드는 원망스럽지만 잊지 못했던 가족들과 사랑에 빠진 여인 매리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들의 삶을 위협하는 경찰들에게 대항한다. 그는 어릴 적에 발견한 아버지의 드레스에 담긴 저항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동생 대니와 친구 스티브, 오래된 절친 조니와 함께 흐드러지는 드레스를 입고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명의 청춘들은 이 조직의 이름을 ‘켈리 갱’이라고 명했다.
네드는 부패한 공권력 대신 진실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지만 소수의 힘으로 거대한 권력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끝없는 도망 대신 맞서 싸우기를, 조용히 입을 닫기보단 우리의 역동적인 삶을 글로 남기기를 선택한다. 그는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 자신들의 피로 쓴 역사를, 신이 버린 땅이라지만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소중한 땅을 되찾기 위해 겪어야 했던 거친 여정을 틈틈이 적어나간다. 네드는 두서없고, 문법과 문장 규칙 따위는 하나도 배우지 못한 티가 역력하지만 후세에 전달할 가치가 있는 이 글을 자신의 미래인 아이에게 바친다.
광기와 날것의 분노가 가득했던 마지막 전투를 마친 네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 후 사람들은 네드가 남긴 기록을 보며 손뼉을 치고, 형장에 매달려 있는 네드의 모습에 박수 소리가 얹어진다. 이 박수는 네드의 후손들이 네드와 그의 삶에 보내는 박수갈채를 의미하려는 연출이 아니었을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남겨주고 싶었던 남자 네드 켈리. 거짓에 물들지 않은 진실된 그의 삶은 예상보다 더욱 거칠었고 어쩐지 버거워 보였다. 그는 자신이 남긴 기록이 후손들에겐 낯선 이야기가 되기를 바랐다. 핍박받던 나의 삶이 나의 후손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라면, 이 억울하고 답답한 현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어져선 안될 역사지만 여전히 잊히기만 하고 사라지진 않고 있는 강자의 압제와 폭력들. 안타깝지만 그가 원하던 세상은 아직 완전하게 도래하지 못한 것 같다. 남은 건 그가 미래라고 칭했던 우리의 몫이니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로 물든 저항의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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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없는 농담에 가려진 소비와 환경에 대한 메시지
사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편견이 있다. 철학을 논한다는 명분 아래 귀신 씨나라까먹는 소리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영화도 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다분히 주관적이고 편견 가득한 말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면 그저 한 사람의 궤변이 될 수 있고, 누군가 정의를 외치며 극단적으로 도덕을 들이밀게 된다면 그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떼쓰는 어른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의로운 명제일지언정 현실 사람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외침이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프랑스 영화들은 수많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게 하는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있다. 환경 문제, 채식, 인종차별, 젠더갈등 등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고민하게 되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가끔 딱히 서사가 있지 않으면서 대사에 온갖 철학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내용의 영화를 볼 때의 길을 잃어버린 내 눈동자는 어떻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간만에 적당한 유머와 함께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3명이다. 대출빛에 허덕이며 가족들에게 짐 취급 받고 있는 브루노와 알베르 그리고 과도한 소비를 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으며 인간의 소비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주도하는 비영리단체장인 캑터스다. 인간의 과도한 소비의 결과를 대표하는 두 남자와 극단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캑터스의 상반된 모습이 의외로 웃기다. 당장 돈이 없으니 온갖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어쩌면 비굴해 보일만큼 살아가는 두 남자에 반해, 넓은 집에 살면서도 흔한 소파와 의자 마저 없어 바닥 생활을 하는 캑터스를 보고 있자면 정말 세사람 다 별나다 싶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장 밥먹을 돈도 없어서 비영리단체를 돕고 있으면서 이 와중에 알베르는 캑터스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참 이 남자 살만한가 싶었다. 철이 없는 것인지, 즉흥적이라고 해주어야 할지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막판에 귀여워보이기까지 한다. 참 한심하다 싶다가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지켜보게 된달까. 그 장단을 브루노가 맞춰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두 사람 죽이 잘 맞는 커플 같아 보인다. 러브라인은 알베르와 캑터스가 그리고 있는데, 왠지 내 눈에는 이 두 남자가 찐사랑이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웃긴 장면을 꼽아보자면, 두 남자의 채무 면제를 도와주는 남자 마저 알고보니 도박 중독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다는 설정이다. 매번 카지노에 입장 금지 당하면서도 끝까지 들어가보려고 온갖 변장을 하는 모습이 꽤나 코믹하다.
캑터스 캐릭터도 참 특이하다. 인간의 소비로 인한 환경 문제를 꼬집는 사람인 만큼, 극단의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 개인적으로 캑터스는 아예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게 캑터스의 맹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미니멀리스트를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는 물건을 하나 구매하고, 그 하나를 잘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나로서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편견에 가득찬 주관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충족하고 사는 것도 인간다움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캑터스의 논리는 환경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인간의 기본적인 취향 찾을 권리 조차 묵살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인간의 과도한 소비는 환경을 망친다는 대전제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의 소비자들을 막아가며 돈 쓰지 말라고 앞을 막는 행위는 도를 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정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을 지도 모르는데, 무조건적으로 소비는 나쁘다고 규정짓고 당신들도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강력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느 나라든 환경운동이든 젠더 갈등이든 도덕적 잣대로 내가 맞네, 네가 맞네 끊임없이 토론하게 되는 운동들을 주도하는 운동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격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동요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다면, 극단성에 있지 있나 생각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환경 문제의 경우,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큰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환경을 지켜보겠다고 이미 만들어진 제품들을 사지 않고 극단적으로 소비 지출을 줄이라는 요구에는 응해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캑터스가 진두지휘하는 이 비영리단체에서 정말 환경운동만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브루노, 알베르 외에도 다른 한 명의 회원도 캑터스를 좋아해서 맴돌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 관계가 아닌, 사각관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캑터스만이 진심이고, 모두가 약간의 군중심리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장면도 있었다. 인간의 신념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신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 신념은 몇 명이나 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스쳤다.
무엇보다 빛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은행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두 남자의 허술함이 참 웃기다. 그 사기를 칠 머리로 돈을 벌었다면 진작에 갚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알베르가 돈이 궁해서 공항에서 압수된 중고 물품을 파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았겠구만 싶은데, 또, 프랑스 은행에서 공적 문서의 중요 정보를 화이트로 지우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내가 괜한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다' 싶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와 했던 말이,
'영화 속의 인물이니 웃고 재밌어하지, 실제로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미쳐 돌아버리고, 끝내 손절치지 않았겠냐'였다. 이런 사람들은 픽션에서만 엮였으면 좋겠다.
총평
가끔 심각한 서사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가벼운 영화를 찾게 된다. 킬링타임으로 적당한 영화다. 그리고 캑터스 역의 여배우가 예쁘게 나온다. 이 배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현대물에서보니 새롭고, 자연스럽게 예뻐서 보기 좋았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만은 않게, 토론을 유발하는 적당히 괜찮은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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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로서 드러내라, 예술가로서 저항하라
영화를 볼 때, 저는 자주 영향적 감상에 빠지곤 합니다. 영향적 감상은 '나를 변화시킬 만큼 큰 영향을 주는 영화 감상'이라는 뜻인데요. 영화에 감명을 받고 마음을 다잡는 일이 너무 많아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습니다. 사진을 아끼는 사람이기에 이번 영화는 제게 특히 더 많은 영향을 주었죠.
사진의 힘은 위대합니다. 사진을 훑는 것만으로 기억의 파편들은 이야기로 재생됩니다. 그리고 여기,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의 파편들을 사진으로 담은 한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2024년 5월 15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All the Beauty and the Bloodshed
Summary
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사진은 나의 유일한 언어였다. 나는 생생하게 반짝이는 뉴욕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포착했고, 있는 그대로의 내 얼굴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이제는 내 모든 명성을 걸고 거대 제약회사에 맞서 싸운다. 생존과 투쟁의 기록이 담긴 나의 일기장을 당신에게 펼쳐 보인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로라 포이트라스
명성을 이용해 폐단을 무너뜨리다
낸 골딘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입니다. 거장이나 대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엄청난 분이죠. 그런 그가 미술관을 돌며 시위를 벌입니다. 그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했던 미술관도 있고, 곧 자신의 회고전을 열 미술관도 있습니다. 낸 골딘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미술관 바닥에 약통을 뿌리고, 바닥에 드러누워 죽은 시늉을 합니다.
그의 저항 운동은 제약사 퍼듀 파마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 가문을 향합니다. 퍼듀 파마는 '옥시콘틴'이라는 진통제를 만든 회사입니다. 옥시콘틴은 가벼운 고통을 느끼는 환자에게도 의사가 쉽게 처방해 주던 약이었죠. 하지만 이 약은 퍼듀 파마가 매출을 높이기 위해 만든 마약성 진통제였습니다. 퍼듀 파마는 부작용을 은폐하고, 거짓 광고로 현혹하고, 공격적인 영업으로 판매를 촉진했죠. 옥시콘틴을 처방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약에 중독됐습니다. 옥시콘틴은 판매가 금지되기 전까지 무려 720억 정이 팔렸으며, 이로 인해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퍼듀 파마를 운영하는 새클러 가문은 옥시콘틴으로 벌어들인 돈을 예술계에 후원함으로써 이미지를 세탁했습니다. 전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기부금과 후원금을 제공한 덕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구겐하임 뮤지엄, 루브르 박물관 등 유수의 미술관에 이른바 '새클러 갤러리'라는 이름을 건 전시관이 개관했습니다. 예술을 방패 삼아 탐욕의 벽을 쌓아 올린 새클러 가문의 악명을 알리기 위해서는 내부자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예술계를 움직이는 내부자의 힘, 이를 발휘한 사람이 바로 낸 골딘이었죠.
낸 골딘은 사진작가로서 쌓아온 자신의 명성을 이용했습니다. 위대한 사진작가의 전시를 유치해야 하는 미술관의 입장에서 그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었죠. 미술관들은 하나둘 새클러 가문의 후원을 거부하고, 갤러리에서 새클러의 이름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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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그 자체로 예술
낸 골딘이 새클러 가문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은 그 역시 옥시콘틴을 복용했다가 약물에 중독된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성까지 거침없이 이용하는 그의 저항력이 오직 당사자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중첩되어 온 그의 과거가 저항력의 힘과 크기를 키운 것이었죠. 영화는 낸 골딘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강력한 저항력의 출처를 탐색해 나갑니다.
언니의 자살 이후, 어릴 때부터 바깥 생활을 전전해 온 그는 소외된 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베스트 프렌드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터부시되던 성소수자였고, 그 역시 그랬습니다. 낸 골딘은 무언가를 억지로 꾸며내 프레임에 담기보다는 자신의 일상을 고스란히 포착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사진은 표현의 두려움을 대신할 도구이자 해방처이기 때문이었죠. 낸 골딘은 일상의 모든 아름다운 면과 유혈사태를 가감 없이 사진에 담아냈습니다.
내밀한 일상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소외된 자를 드러내는 예술적 표현이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예술과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저항을 실천해 온 셈입니다.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사회에서 바뀌지 않는 것을 바꾸는 것. 정해진 답을 따르는 것은 예술가의 행보와 어울리지 않지만, 낸 골딘이 포착한 기억의 파편들을 보다 보면 '예술가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씬 밀려옵니다.
어떠한 행운 또는 불운의 결과로 제게도 권력이 생긴다면, 저도 낸 골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쌓인 기억의 파편으로 저항력의 힘과 크기를 키운 사람,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메시지에 힘을 더하는 사람, 권력을 권력답게 쓰는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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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자주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지만, 항상 예쁘고 멋진 순간만 포착하려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낸 골딘이 그러했듯이, 있는 그대로의 일상에서 숨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어졌습니다. 영향적 감상 끝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가방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넣어봅니다.
One-Liner
예술의 가치는 표현의 자유에서 오고, 표현의 자유는 예술을 저항의 도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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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2020)> 리뷰
고백한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우뚝 솟은 마천루에 온갖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어쩐지 내 안의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것만 같은 세계적인 도시. 괜히 맥북이나 고풍스러운 책 한 권을 들고 센트럴 파크에 앉아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곳.
온갖 정보가 발달해 사실 뉴욕 지하철은 한국의 것보다 못하고, 뉴욕이든 서울이든 결국 서양화된 도시이기에 생각보다 ‘그럴싸한 건’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음에도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적 이미지는 내게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 속 주인공 조안나(마가렛 퀄리)는 어떨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개봉한 시점에서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미국에서 자란 조안나는, 더군다나 작가 지망생이기까지 하다. 좁은 플랫에서 원고와 싸우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친구들과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청춘을 개척하고픈 열망을 지닌 청춘. 그에게 뉴욕이 어떤 의미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 역시 일정 부분 그런 꿈이 있기에, 더욱더.
조안나가 뉴욕에 있게 된 건 우연과 운명의 합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안나가 이토록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조안나도 그의 친구 제니(세아나 커스레이크)도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머물고자 했던 뉴욕이었으나 조안나는 안정적이되 심심하기만 한 버클리에서 뉴욕으로 아예 거처를 옮긴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던 듯 보이나 그는 빠르게 적응한다. 다만, 많은 이들이 오가는 대도시는 이방인에게 열린 공간이지만, 열려있다는 것이 늘 환대의 의미와 동일하진 않다는 것을 조안나가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듯 마이 뉴욕 다이어리(원제: My Salinger Year)는 주인공 조안나의 여정을 따라가는 성장 드라마다. 평범한 건 싫고, 특별해지고 싶다는 치기 어린 소망을 품은 주인공이 마주한 뉴욕이라는 흥미로운 공간. 그는 새로운 사랑을 찾기도 하고, 일자리를 구하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으로 렌트를 구한 집은 어딘가 어설프고, 작가를 꿈꾸는 그가 하는 일은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답장을 보내는 일에 불과하다. 이윽고 조안나는 결심한다. 진심이 담긴 팬레터에 'JD 샐린저 씨는 팬레터를 받지 않습니다, ' 따위의 무의미한 대답을 타이핑하는 일을 지속할 수 없다고. 그러자 언뜻 잔잔해 보였던 일상에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조안나가 일하게 된 곳은 마가렛(시고니 위버)의 작가 에이전시다. 마가렛은 조안나를 고용하는 순간부터 단호하게 말한다. 작가(지망생)는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지 않는다고. 조안나는 김이 샐 법도 한데, 복도에 걸린 애거서 크리스티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진에 전율을 느낀다. 실망도 하지만, 조안나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마가렛이 자신을 알아봐 주고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아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조안나는 자신이 읽어본 적도 없는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매혹된 이들에게 경직된 답장을 쓰던 중 그들의 진심에 성심성의껏 답하기 시작한다. '홀든'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제법 그럴싸하게 쓰기도 하고, 절박해 보이는 학생에겐 교훈적인 답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답장을 받은 이가 뉴욕 사무실까지 찾아와 되묻는다. 내 진심이 담긴 편지를 멋대로 읽어본 당신의 답장이 규격화된 답장보다 더 나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조안나 래코프라는 이름이 소녀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라고 했다. 빈정거림이 분명한데도 조안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자신은 허락되지 않은 대화에 끼어든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사라지고 조안나는 복도를 걷는다. 조안나의 소망 중 하나가 '특별해지는 것'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그는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작가라는 단독자가 되고자 버클리의 삶을 버렸고 버클리에서 만났던 남자 친구와는 연락을 줄였다. 그러나 조안나의 손에 남은 건 무엇인가? 그는 등단한 시인이라는 것을 감췄고 영혼에 반하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다. J.D. 샐린저가 그에게 당신은 작가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시인이라고 얼떨결에 대답했던 조안나는 하루에 15분씩 자신만의 글을 쓰긴커녕 타인의 삶을 흉내 내어 답장하는 일만 지속하고 있었으며, 상사인 마가렛에겐 조안나라는 유능한 비서로 인식되기보단 '샐린저에게 익숙한 환경'으로 인식될 뿐이었다.
조안나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뉴욕에 와서조차 오래도록 읽지 않았다는 건 적지 않게 흥미롭다. 업무를 진행하며 왜 샐린저의 팬들이 이 책에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했을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이야말로 지금껏 조안나의 성장이 지연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 심장부로 파고들지 않았다. 워싱턴으로의 짧은 귀향과 돈(더글라스 부스)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야 조안나는 자신이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니얼(콤 피오레)의 죽음을 통해서야 조안나는 인간 마가렛을 알게 된다.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것과, 뉴욕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은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작가라는 꿈을 이뤄주진 못한다. 꿈은 외면을 모방하는 것만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본 조안나는 우울을 떨치고 나아갈 동력을 얻었다. 친구 제니가 뉴욕을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연인이었던 돈과 동거한 공간을 떠나지만, 그것이 버클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후임자가 나타날 때까진 맡은 업무를 모두 하겠다고 말한 만큼, 조안나의 출근은 순식간에 중단되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원고를 소중히 든 조안나를 똑똑히 비춘다. 뉴요커 건물에 도착한 조안나의 원고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우리는 모르지만, 감독은 스크린을 통해 조안나를 작가로 호명했다. 그렇기에 관객은 알 수 있다. 샐린저가 말했듯 조안나는 이제 매일같이 자신만의 글을 쓸 것이라는 걸.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자전적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기에, 영화의 마지막은 너무나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영화 곳곳에 녹아 있는 인간적인 유머와, 90년대의 뉴욕을 겪어본 적 없는 나까지 향수에 젖게 만드는 따뜻한 스크린의 색감 때문이 아닐지. 무시무시하고 악랄한 악역이나,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의 끔찍한 사건 없이도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한다면, 우리 역시 조안나처럼 20대를 따스하고 애틋하면서 한편으론 엉뚱하고 우습기도 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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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떠나야 하는, 떠나고 싶은, 떠나길 주저하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인구 200만이 채 안 되는 다민족 국가 코소보(Kosovo), 그저 ‘포효’하는 것이 최선인 세 암사자들 삶을 담아낸 영화 <암사자들의 포효하는 언덕>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감히 엿보려 한다.
ⓒ IMDb
영화는 제목처럼 스스로를 ‘암사자들’이라 칭하는 세 명의 여성이 포효하며 시작된다. 이들이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코소보’의 한 작은 외곽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들 각자의 삶을 통해 뒤이어 보여진다. 영화에 직접 드러나진 않지만, 가정 내 성폭력을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예타’와 가부장적 남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가정에서 동생을 지키며 살아가는 ‘체’, 그리고 언뜻 화목한 것처럼 보이는 가정 속에 살아가며 현실에 순응해버린 ‘리’는 코소보 수도에 위치한 대학에 진학하여 각자의 가정을, 마을을 떠나고자 한다.
이들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가족의 집에서, 본래의 의미를 잃은 버려진 수영장에서, 길가의 거친 언덕에서 만나 일상을 보낸다. 하릴없는 일상을 보내던 이들 앞에 파리 출신의 또래 여성 ‘레나’가 나타난다. 할머니 집 마당에서 그녀가 평화롭게 읽고 있는 책은 ‘행복을 맛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의 '행복'을 맛보지 못한 이들은 현실을 벗어날 유일한 수단,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결국 "암사자들"이라는 이름의 갱단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과 함께 마치 한 마리의 사자처럼 담을 기어오르는 이들의 모습은 그 어떤 사자보다 대담하고 강렬하다. 마을 여성들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매춘’을 택하지 않은 것 역시 이들의 투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대범하고도 무모한 ‘갱단’ 활동을 통해 세 명이 떠날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이 모였다. 그들은 이제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리’는 그 돈으로 마을에서 수근거릴 법한 고가의 차량을 구입한다. 마치 떠나길 주저하는 듯하다. 이들은 ‘리’가 무책임하게 구입한 재규어를 타고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꿈이었던 세계 여행은 ‘상황극’으로만 펼쳐질 뿐이다.
우리는 ‘암사자들’의 끝을 영화 초반부터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의 자유, 행복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이들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갱단’을 결성하고, 마트에서 카트를 타고, 달리는 차 안에서 바람을 맞는 등의 행위가.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 말하는 ‘예타’와 어디든 여기보다 나을 거라 말하는 ‘체’, 역시 돌아올 거라 말하는 ‘리’. 떠나야 하는, 떠나고 싶은, 떠나길 주저하는 세 암사자들은 포효하는 잔상만 남긴 채 다시 '무리'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코소보의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다른 영화였다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결혼식 장면이 코소보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예시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한 여성이 식장으로 에스코트 당하고 있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있는 결혼식장은 마치 동네 축제 같다. 코소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결혼식 현장은 코소보의 현실임과 동시에, 주인공들의 미래임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코소보의 현실의 굴레는 코소보인들은 ‘비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TV를 보고 편한 얼굴로 잠을 자는 모습만 비춰지는 ‘리’의 남동생들과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는 ‘예타’의 여동생을 통해, 이 현실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같은 시대의 다른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개봉한 <풀타임>은 24/7 투쟁하며 살아가는 ‘쥘리’의 삶을 통해 프랑스의 현실을 보여주었고, <멋진 세계>는 감옥에서 출소한 야쿠자 ‘미카미’가 사회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통해 차별이 가득한 현실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슬픈 사실은 우리가 이를 직시하지 않는 이상, 이 현실이 곧 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창'이기도 하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매분 매초 만들어지는 국가와는 달리,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의 배경이 되는 '코소보'와 같은 국가의 창은 희소하며 그 크기도 작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배우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2001년생의 젊은 감독의 첫 장편 <암사자들이 포효하는 언덕>를 통해 우리는 드디어 문제를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은 그녀가 보여주고자 한 현실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며, 코소보 혈통의 그녀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르와나 바즈라미
코소보, 프랑스 | 2021 | 84min | 15 + | DCPcolor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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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우렌의 결혼 - 완성도보다는 힐링과 성장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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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꿈꾸며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연출 ‘승주’. 하지만 현지의 고려인 감독 ‘유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예정된 결혼식을 놓치게 되며 다큐멘터리 촬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연출을 해서라도 다큐를 완성해 오라는 압박을 가하는데... 이때 ‘승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던 ‘유라’ 감독의 삼촌 ‘게오르기’는 가짜 신랑, 신부를 구해서 결혼식을 찍자고 하며 ‘승주’가 신랑 ‘다우렌’이 된다. “지금부터 가짜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다큐 찍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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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슈퍼노바> 메인 예고편
여기, 우리의 별이 머물렀다.
오랜 시간 서로의 구세주이자 사랑하는 연인,
그리고 최고의 친구로 지내온 ‘샘’(콜린 퍼스)과 ‘터스커’(스탠리 투치).
기억을 잃어가는 ‘터스커’와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샘’은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된다.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여행이 끝나갈수록,
그들의 감정은 점차 고조되는데…
차마 사라지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 마음의 파편,
그곳에 가장 빛나는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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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 30초 예고편
'니키'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동의하고 별거 중인 '데이빗'은 우연히 아내의 연인 '데릭'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한편 결혼과 육아로 단절되어버린 꿈을 이루기 위해 로펌에 취직한 '니키'는 같은 건물에 근무하는 '데릭'에게 점점 호감을 갖게 되고 '니키'와의 관계를 보다 발전시키고픈 '데릭'은 밤마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픈 욕망을 키워간다. 서로의 곁에 머물고 싶은 세 연인의 욕망은 그들을 위태로운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