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READ2025-08-15 03:51:57
하룻밤의 시간이 전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사랑
영화 <비포 선라이즈> 리뷰
영화 <비포 선라이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에단 호크, 줄리 델피 주연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제시와 셀린. 알 수 없는 감정에 끌린 두 사람은 아무런 일정도 없이 기차에서 하차한다.
그리고 단 하루, 꿈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난 우리가 지금 마치 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짧은 하루의 우연은 영원이 된다.
<비포 선라이즈> 속, 파리로 향하고 있던 학생 셀린이 대뜸 말을 건 옆자리 남자, 제임스(제시)를 따라 파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에서 내린 이유는 단순하다. 그 순간, 제시에게 이끌렸기 때문에. 호텔 숙박비도 없이 하루 동안 거리 곳곳을 오가면서 그들에게 벌어지는 사건은 딱히 스펙타클하지 않다. 갑자기 지갑을 도난당한다거나, 마약 밀매 사건에 휘말린다거나,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된다거나, 그런 '영화 같은' 사건은 없다.
이들은 오로지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할 뿐이다. 나이 든 노파와 같은 셀린과, 열세 살 꼬마와 같은 제시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 영화 속 사랑이 정말 영화 같다고, 그리고 운명 같다고 느낀다.
제시는 셀린을, 셀린은 제시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이들이 아는 건 이들이 각자 털어놓은 '이 순간'의 정보들 뿐.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감정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그리고 꽤나 대담하게 행동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 또한 잘 모르는 이곳에서.
순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내 감정을 이끈 상대와 함께.
와인잔을 몰래 가져오고, 앉아 있다 손금 점을 보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두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옛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커다란 사건 없이도, 그리고 상세한 정보 없이도 그들은 '지금 이 순간', 함께하고 있는 서로를 바라보며 운명과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야 하는 제시, 그리고 유럽으로 가야 하는 셀린. 이들이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느껴질 만큼 먼 그들의 거리. 제시와 셀린은 서로 다시 함께할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야말로 정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다가오는 아침을 아쉬워한다.
떠나는 기차에 타기 전, 셀린과 제시는 급히 서로 진짜 마음을 고백한다. 사실,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오늘이 우리의 끝이 아니길 바란다고. 이때 이들이 다음을 기약하는 방식은 꽤나 낭만적이다. 5년 뒤, 아니, 1년 뒤, 아니, 그보다 더 빠른 6개월 뒤,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서로를 보러 오자는 구두 약속. 디지털 시대 속 관객들에게는 당혹스러울 만큼 아날로그적이고 막연한 일정 잡기다.
그럼에도 그들은 편지도, 전화도 하지 않고, 그 순간 서로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각자의 길에 오른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의 하룻밤, 운명적 만남과 사랑을 지켜본 관객의 마음속에는 몽글거리는 사랑에 대한 꿈이 가득 차오른다.
그래서 <비포 선라이즈>는 다시금 관객이 이 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내 연고지가 아닌 낯선 곳, 낯선 상황, 낯선 사람. 그 순간 우연히 만난 옆자리 여행객에게 끌린다면, 나는 그 순간 어떻게 행동할까? 어쩌면, 그곳으로 여행을 가면 이런 운명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고전 영화 속, 때묻지 않은 낭만과 운명. <비포 선라이즈> 속 그들의 사랑에는 그런 요소들이 담겨 있다.
만난 지 채 하루도 안 됐는데 키스를 하고, 끌어안고 잔디밭을 뒹굴고, 서로의 미래에 대해 감히 말을 얹어보고, 와인 외상을 하고 와인잔을 훔치는 모습들까지도. 낯선 순간이기 때문에, 낯선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6개월 뒤의 만남을 기약하며 각자의 기렝 오르는 두 주인공을 보며 생각한다.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미래는 막연하고 어쩌면 우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과거는 이미 벌어진 일. 숨기든 꺼내놓든 바꿀 수는 없는 순간들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생각도, 과거를 이름표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상태도 아닌 그 순간, 제시와 셀린은 본능을 따라 감정적으로 행동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다른 선택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유한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 순간, 후회 없이 오늘을 보내려는 듯이.
우리는 이따금 낯선 무언가를 갈망한다. 낯선 곳 여행, 낯선 것 경험, 낯선 이와의 만남. 그 대상을 마주했을 때, 반복적이고 안정적인 일상을 벗어나 또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비포 선라이즈>는 여행객, 혹은 방랑자처럼도 보이는 두 주인공을 내세워, 일상 속 작은 틈을 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의 내면에 낭만을 심어준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날로그적 낭만이 남는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보고 싶고, 당장 아무 기차나 타 보고 싶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보고 싶다는 낭만.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서 어떤 운명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비포 선라이즈>는 그 순간의 낭만을 온전히 보여주었다.
하룻밤만에 사랑을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조금은 막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어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타오르기도 한다. '사랑'에 대해 각자 정의하고 그 단어를 발음해보는 동안, 함께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쳐다보고 시선을 얽는 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빠르게 그들을 감싸안는다. 그리고 비로소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보며 사랑을 말한다.
시간이 지나도 <비포 선라이즈> 속 인물들이 내뱉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이 영화를 찾는 것이다. 해가 뜬 뒤의 일보다 해가 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이들의 낭만을 지켜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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