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4-27 10:11:13
마음을 다친 이가 보내는 혹독한 겨울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 리뷰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낚시를 하는 이들의 떠들썩한 웃음과 대화가 맴돈다. 인물들의 옷차림으로 미루어 계절은 여름. 가만히 앉아 바닷바람을 즐기고 농담을 내어놓던 그날의 장면은 짧게 지나가고, 관객이 마주하는 영화의 진짜 계절은 겨울이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는 보스턴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가 주인공이다. 쓰레기 정리를 하고 세입자들의 막힌 변기를 뚫어주며 건물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형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위독하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바닷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배들은 연안에 정박돼 있다. 영화의 공간적, 계절적 배경은 자연스럽게 인물의 내면과 맞닿는다. 발을 뒤덮을 만큼 쌓인 눈을 치우던 '리'는 겨우 근무 일정을 조절해 형이 있는 병원에 당도하지만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장례식 때까지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을 돌봐야 한다는 것과, 형이 죽기 전 자신을 조카의 후견인으로 정해 두었다는 것.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작은 마을의 실제 지명이다. 인구 1만 명도 되지 않는 이곳에서, ‘리’는 몇 해 전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흔에 그는 보스턴으로 떠나 살고 있었지만 형의 죽음과 조카를 둘러싼 여러 일들은 그를 다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부른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 그를 향해 수군거린다. 처음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돌아오던 순간부터 ‘리’는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지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의 내면을 영화의 카메라는 가만히 관찰한다.
'리'가 상실의 슬픔에 뒤늦게 휩싸인다고 해서 영화 내내 폭설이 내리거나 혹한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무심한 듯 인물의 곁에 머물기를 택한다.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도 한밤중 냉장고를 열었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고 마음이 아파오는, 매사 무뚝뚝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못 버티겠다"라고 간신히 말하는, 그런 사람들의 곁을 영화의 시선은 떠날 줄을 모른다.
‘리’가 손 봐주러 온 어느 집에서 집주인인 노인이 ‘리’가 챈들러 가의 아들임을 알아보며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어느 날 출항하셨는데 평범한 날씨에 대단한 사건도 없이 그냥 돌아오질 않으셨지. 구조 신호도 무전도 없었고 어찌 된 일인지 아무도 몰라.” 생각해 보면 나 이제 죽을 거라고 예고하고 떠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삶을 통째로 뒤흔들 대사건도 아무런 징조도 신호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곤 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이야기는 인물의 내면 변화를 날씨의 흐름처럼 관찰한다. 예측은 자주 어긋나고 영화 안에는 가끔 예기치 않은 유머까지 도사리고 있다. 소중한 사람의 상실을 두고도 밥이 넘어가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격랑의 순간에도 일어설 방법을 찾는, 그런 게 곧 인생일까.
상영시간 내내 한겨울인 영화에서 첫 장면이 과거의 어떤 여름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해 보인다. 겨울을 보내는 이들은 생각한다. 다시 여름이 찾아올까? 그 계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리’가 처음 치우던 눈은 거의 무릎까지 덮을 기세로 쌓여 있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많은 눈이 녹아 있다. 형의 장례식은 “땅이 녹을 때까지”로 유예되는데, 땅이 녹는다는 건 기온이 오른다는 것이며 그건 겨울의 문턱을 지나 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사실 자체가 영화의 모든 걸 결정짓지는 않는다. 날씨가 풀려도 내면은 여전히 혹독한 추위 한가운데 있을지도 모르고 겨울 내내 앓던 마음의 상처들이 눈 녹듯 금세 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되리라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말해주는 것 같다. 매 순간을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 같던 ‘리’는 언 땅이 녹을 무렵 조카 ‘패트릭’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 사람의 마음에도 날씨처럼 어떤 순리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입춘이 지나고 또 그러다 보면 결국 여름까지 우리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국내 메인 포스터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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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농구의 질감을 가지고 돌아온 슬램덩크
?Rabbitgumi 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습니다.
송태섭의 서사를 중심으로 북산과 산왕의 전국대회 경기를 보여주고 있죠.
산왕과의 경기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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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아름다운 날들> 예고편
“덩케르크를 그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후퇴로 남길겁니까?
마음에 불꽃을 지필 기적으로 남길 겁니까?”제2차 세계대전 속 1940년, 영국 정부는 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덩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선전 영화를 제작하라고 지시한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카트린(젬마 아터튼)은 모두의 반대와 현장에서의 고난 속에도
열심히 영화 제작에 몰두하지만, 코 앞으로 다가온 전쟁의 위협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1940년, 그들에게 영화는 영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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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웬디> 30초 예고편
‘피터팬’ 탄생 110주년 기념,
새로운 주인공, 새로운 시각의 All New ‘피터팬’!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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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은 이상하게 불안하다.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는 사츠키 가족의 트럭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이동을 편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지각적 특성을 고스란히 배반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캐러멜을 나눠먹는 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하나의 부재가 제시된다. 이 트럭엔 엄마가 없다. 그들의 엄마는 결핵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 엄마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이들 가족이 단체로 자전거를 탈 때에도 동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불안감 조성은 후반부 사츠키와 메이가 엄마에게 큰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의 심리를 탁월하게 증폭시킨다.
하지만 관객을 상대로 한 형식적 불안과는 달리 작중 인물들은 이러한 불안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천진난만한 자매 사츠키와 메이는 새 집을 탐방하며 ‘마쿠로 쿠로스케’라 불리는 검댕 벌레를 목격하지만 전혀 겁먹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아빠 쿠사카베는 “밝은 데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가면 마쿠로 쿠로스케가 보이는 거야.”라며 출몰 원인을 진단해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의미가 단순한 광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쿠로 쿠로스케는 이후 창문이 활짝 열린 2층 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 함유된 의미는 단순한 광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물질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사 온 시골집은 어두운 곳, 그전에 머물던 도시의 집은 밝은 곳으로 도식화된다. 그리고 마루코 쿠로스케는 물질적 감퇴의 징표이자 그 음울한 기운을 담은 불안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위에도 언급했듯 이러한 도식이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썩은 나무도 웃음의 대상이 되고, 청소와 빨래도 즐거운 놀이가 되며, 시골집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의 대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메이는 마쿠로 쿠로스케를 게임하듯 잡은 다음 언니에게 자랑하듯 뛰어간다. 이후, 그녀는 마쿠로 쿠로스케가 곧 사라질 거란 말에 “재미없어!”, “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며 섭섭함까지 내비친다. 그렇다면 마쿠로 쿠로스케의 출몰 동기는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쿠사카베 같은 어른의 사고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내의 간병과 건강을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는 사실을 이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이전이 어른의 세계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움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 <이웃집 토토로>는 어른과 아이의 표면적인 충돌은 전무함에도 그들의 정신과 내면의 층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충돌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른과 아이의 충돌 세계를 그리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쿠사카베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어른과 아이의 충돌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탁월하게 그렸던 스필버그와는 정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미지와의 조우>, <E.T>, <에이아이>와 달리 이 영화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정신적 긴장 관계의 시각적 표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나 환경과의 갈등도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웃집 토토로>의 서사는 지나칠 정도로 평평하고 평화롭다. 만일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어떻게 90분 남짓의 상업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수 있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를 성립할 최소한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다름 아닌 ‘토토로’라는 미지의 생명체. 그 친근하면서 동시에 기이한 존재를 향해 집중되는 단일한 미스터리. 그렇다면 토토로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존재는 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토토로의 정체와 존재론
이사를 온 날 밤, 사츠키 가족이 다함께 목욕을 즐길 때 목욕탕 바깥에서는 불안을 상징하던 검댕 벌레가 비상하여 녹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올라간다.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의 정령 ‘고다마’가 어느 나무를 향해 줄지어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주인공 아시타카는 그 나무를 보며 “너희 엄마냐?”라고 묻고, 고다마는 마치 그렇다는 듯 딸깍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이웃집 토토로>에 대입해 보면, 숲의 정령 토토로가 살고 있는 녹나무는 사실상 누군가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의 엄마인가. 메이가 작은 크기의 토토로를 따라가다 녹나무의 구멍에 빠져 얼마간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 긴 통로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자궁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 자궁에서 나온 인물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메이. 그렇다면 녹나무의 자식은 사츠키와 메이인 셈이며, 역으로 녹나무는 그들의 엄마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는 토토로는 누구인가. 사츠키와 메이의 엄마인 녹나무를 지키고, 그 안에서 포근히 쉬는 것을 즐기는 자. 즉각 떠오르는 이름은 너무 당연히 쿠사카베다. 숲의 정령 토토로가 숲을 지키며 그곳에서 쉬는 것처럼 쿠사카베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간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녀의 쾌유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자이다.
둘의 연결성은 위에 서술한 바 있는 목욕탕 장면에서 보다 명료하게 증명된다. 이 장면에서 쿠사카베는 거센 바람에 집이 흔들려 사츠키와 메이가 불안에 빠지자 돌연 악당 고릴라처럼 “하하하!” 웃더니 보디빌더처럼 상체를 부풀리고 이내 욕조의 물을 내리친다. 순식간에 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보인다. 이는 중반부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장면과 연계된다. 억센 비가 쏟아지자 사츠키와 메이는 우산을 놓고 간 아빠를 마중 나간다. 하지만 아빠를 실은 버스는 한동안 도착하지 않고 메이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요히 빗소리로 가득했던 버스 정류장에 발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토토로의 등장. 사츠키는 쿠사카베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져간 여분의 우산을 토토로에게 씌어준다(토토로는 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간다). 우산을 매개로 쿠사카베와 토토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후,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재미를 느낀 토토로는 목욕탕에서 쿠사카베가 그랬던 것처럼 큰소리를 내며 상체를 부풀려 점프를 한다. 일순 잎사귀에 맺힌 빗물이 소나기 쏟아지듯 떨어진다. 이윽고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퇴장하고, 곧이어 일반 버스를 타고 쿠사카베가 도착한다. 미야자키는 지금 명백히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토토로와 아빠, 녹나무와 엄마라는 도식은 미야자키가 즐겨 활용하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머물지만 그것을 떠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실체. 토토로는 아빠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고, 녹나무는 엄마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다.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일종의 돌봄 서비스다. 토토로는 어린 사츠키와 메이 옆에 보호자가 부재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본성이 함축된 비인간의 모습은 이미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죽은 부모를 대신하여 그들의 딸 시타를 지키는 거대 경비 병정으로 구체화된 적 있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아직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실존 인물의 영혼을 일종의 대리자로 소환하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동일한 주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사츠키와 메이가 토토로를 볼 수 있는 순간은 위에도 잠시 언급했듯 쿠사카베가 직무나 간병 등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다. 일에 몰두하다 어느새 영혼이 사라지고, 시간 개념이 없어져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훌쩍 시간을 점프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노동의 순간은 결국 사적인 시간의 부재를 뜻하고, 이는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병실에 있는 엄마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치료와 회복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가 애니미즘을 필요로 한 건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따뜻한 가족주의의 발현을 위해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강의 신 ‘하쿠’는 신발을 주우려다 물에 빠지게 된 어린 소녀 치히로를 구해준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강의 신체에 빠져버린 소녀를 강의 영혼이 구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애니미즘적 관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분노한 오무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뒤 부활하는 장면을 나우시카의 신체와 영혼의 분리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토로에게 나무 열매를 선물 받은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에게 마당 정원에 씨앗을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아 낙담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흐뭇하게 읽는 엄마의 얼굴이 드러난 다음 장면에서 싹이 나기 바라는 사츠키와 메이의 간절한 소망은 곧바로 실현된다. 토토로 가족이 의식을 치르고, 사츠키와 메이가 이에 동참하면 나무는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난다. 이후, 토토로는 그들을 팽이에 태워 창공을 날아오른다. 이때 “우리가 바람이 된 거야.”라는 사츠키의 대사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제국의 시민들과 나우시카가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바라던 반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황홀하게 각인시킨다. 나무초리에 앉은 사츠키와 메이는 그렇게 아빠와 엄마가 분한 영혼의 대리자들 곁에서 극진히 보살핌 받는다.
토토로는 실존하는가
꿈에서 깨어난 사츠키와 메이는 토토로와 함께 성장시킨 나무가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장면을 놓고 어쩌면 토토로를 그저 꿈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와 토토로의 첫 만남 시퀀스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은 그녀가 잠든 이후에 이뤄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월적이고 허황된 꿈의 잔영이자 환상의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토토로가 현실의 땅 위에 실존하는 존재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메이는 엄마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그녀의 병원을 찾아 헤맨다. 사츠키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길 잃은 메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자,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가 메이를 찾아달라며 애원한다. 이 장면에는 트릭이 없다. 꿈이거나 환상일 가능성이 배제된, 그야말로 현실의 장면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로는 어떻게 현실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두 가지 가설이 따른다. 하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결실이 토토로를 소환해 낸 것이라는 가설. 다른 하나는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는 미야자키의 소망 혹은 정말 그렇다고 여기는 강력한 믿음의 결과라는 가설(“이 신기한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살지 않습니다. 아마도.”라고 적힌 <이웃집 토토로>의 포스터 문구를 보고 미야자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신기한 생명체는 여전히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라고 바꾸라며 소리친 적 있다). 전자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특권적인 세계가 있으리라는 동심의 판타지를 품게 하고, 후자는 현실 세계에 긍정적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이상적 낙관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그러나 전자의 가설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토토로의 존재를 믿는 자가 사츠키와 메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쿠사카베는 토토로를 만났다고 하소연하는 메이에게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한단다. 숲의 주인을 만났나 보다. 운이 좋은 거야. 근데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란다.”라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한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초월적 존재와 조우한 적이 없다. 사츠키, 메이와 쿠사카베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이라는 나이의 차이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설에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이 어린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이 첨언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가설을 종합해보면, 미야자키는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거나, 정말 실존한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 된다.
플래시백의 부재
미야자키 하야오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플래시백의 잦은 사용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이전 작품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와 다르게 플래시백이 없는 최초의 영화다. 플래시백은 그의 세계에서 이후에도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제 의식과 서사에 가장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가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동경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어린 시절과 그때 비롯된 모험심과 낭만.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시간이 어른의 십 년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플래시백은 한 번도 긴 호흡으로 이어진 적이 없다. 파편적인 작은 기억. 하지만 그 작은 파편 하나가 어른의 십 년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그 작은 기억의 파편은 주제의 핵심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플래시백이 <이웃집 토토로>에는 없다.
그 이유는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선 세 작품에서 동경의 대상으로서 유럽을 배경 삼았던 것과 달리 1950년대 본인의 어린 시절, 심지어 자신이 살았던 실제 공간을 토대로 하여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에게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자 그가 평생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가장 현실 가능성 높은 모델이다. 도덕적인 아이들과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보호자들, 그리고 이타적인 이웃 주민들이 만들어 내는 협력 공동체. 더불어 이를 감싸는 포근하고 정겨운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이 영화의 감동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구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동의 이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웃집 토토로>의 감동은 유토피아와 같은 목가적 공동체의 일관된 도덕성에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했던,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겪는 엄마의 부재와 그로 인한 불안을 전부 도덕적인 주변 인물들이 해소시켜 준다. 위에서 언급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세계가 있다고 진짜 믿는 것 같다. 단순한 소망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메인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가 사츠키 같은 착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자 미야자키가 화를 내며 한 대답 “있어, 그게 나란 말이야!”는 그런 그의 믿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 배경, 동물들까지 모두 올바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엄마의 병원을 찾아 나선 메이가 어느 골목에서 염소를 만나는 장면이다. 엄마에게 선물할 옥수수를 염소로부터 지켜내는 메이의 결연한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지만 우리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염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염소를 언젠가 본 적 있다. 다름 아니라 미야자키의 극장 애니메이션 데뷔작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보았다. 소녀이자 공주인 후지코의 반지를 빼앗아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탐욕스런 백작은 마침내 그녀의 반지를 압수하여 자신의 반지와 그녀의 반지를, 시계탑에 양각되어 있는 염소 조각의 두 눈에 꽂는다. 보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백작은, 그러나 한곳으로 모이는 시침과 초침에 끼어 압사 당한다. 이내 시계탑이 무너지고 수문이 열리면서 성이 호수의 물로 채워진다. 이로써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기의 괴도 ‘루팡’은 아름다운 로마의 유적들을 가리켜 “모든 인류를 위한 진정한 보물이네. 내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탐욕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화의 물을 뿌리게 함으로써 전 인류에게 회복의 희망을 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염소가 뜬금없이 메이 앞에 등장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엄마의 부재 속에 그녀의 회복을 염원하는 한 어린 소녀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염소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장면은 메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넘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현실의 모든 아이들에게 보내는 미야자키의 따스한 포옹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의심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동이 정말 작중의 도덕적인 인물들과 미야자키의 선한 믿음에서만 기인하는 걸까. <이웃집 토토로>가 감동적인 가장 큰 이유는 도덕적인 인물들의 협력과 부모의 부재를 극복해 나가는 어린 아이들의 올곧은 간절함이 우리의 욕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 속에서 도덕적인 인간들과 협력하며 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웃집 토토로>의 탁월함은 사회의 무한 경쟁과 자본의 억압 속에 잠시 잊고 살았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을 찍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미야자키의 믿음과 우리의 욕망은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서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촘촘히 설계된 영화의 플롯이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모두 생채기 하나 없이 이상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우리의 선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투영하며 영화를 따라간 끝에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엔딩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싱그러운 음악이 우릴 축복해준다. 마치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기를 당부하는 것 같이. 그런 탓에 잠시 잊고 있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욕망이 사츠키와 메이가 심었던 나무 열매의 씨앗처럼 땅을 뚫고 무럭무럭 피어날 것만 같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적어도 선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심연에 잠재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과연 한 편의 영화가 이 이상의 가치를 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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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들의 공감을 200%로 끌어낸 영화 3편!
- 출처: 네이버 영화
청춘들을 위한 사계절 힐링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의 임순례 감독이 4년 만에 돌아온 작품으로 시험, 연애, 취업 등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멈추고 고향에서 새로운 봄은 맞이하기 위한 '혜원'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임순례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도시에 사는 모두가 지치고 피곤해 보일 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며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팔다 남은 도시락으로 연명하며 준비한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혜원은 몸도 마음도 허기져 고향인 시골 마을로 돌아온다. 혜원은 이곳에서 스스로 키운 작물들로 직접 제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오랜 친구인 재하, 은숙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 영화는 이 세 친구를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휴식과 위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천천히 가도 된다"고 이야기 해주기도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이십대 청춘이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숲'과 같은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기도해 많은 관객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좀 더 과감한 청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소공녀>는 전고운 감독의 장편 입봉작으로 2017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2018 부일 영화제 신입감독상, 2018 대종상영화제 시나리오상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작품이다. 영화 <소공녀>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소'에게는 단골 바에서 마시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이 삶의 위안이지만 새해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오르는 물가 때문에 취향을 고수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결국 어느 '취향'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집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친구 집을 전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월세빵을 빼고 과거 밴드를 함께했던 친구들의 집을 돌며 미소는 "집이 없는게 아니라 여행 중인거야.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 <소공녀>는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이야기를 통해 소확행, N포세대 등 청춘의 삶을 대변하는 영화로 주목받았다. 전 감독은 미소라는 캐릭터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선택하는 용감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미소라는 캐릭터에서 위안을 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요즘 우리가 처한 현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 <소공녀>는 긍정적인 캐릭터와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더해진 결과, 영화는 갑갑한 현실에 갇히는 대신 차별화된 시각을 제공해준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차가운 현실 속, 세 청춘이 만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 성장 드라마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세 청춘이 우연히 만나 자신들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재기발랄하게 담아냈다.
언제나 잔고 제로인 미생 '민규'는 자신이 마주한 세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이 이야기들에 공감한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피겨 유학을 떠났다가 은퇴를 하고 돌아온 '한나'는 인생 1막이 종료되었다는 것에 조금 우울해하지만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프랑스 입양인 '주희'는 그녀를 항상 괴롭혀 오던 친엄마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듯 냉혹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쉽지 않은 여정 속에서 밝게 피어나는 21세기 청춘들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냉혹하게만 보이는 한국 사회 속에서 꿈을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이 겪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회의 모습과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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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두 맛집인데 뒷맛이 이상해요
어디선가 먹어본 익숙한 만둣국 맛이다. 조금 더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추가돼 신선함도 있다. 그런데 계속 곱씹다 보면 이상한 맛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저것 많은 요소들을 '가족'이라는 만두피로 몽땅 담아내 영화로 빚어서다. 양우석 감독의 신작 '대가족'에 대한 간략 평이다.
'대가족'은 스님이 된 아들 함문석(이승기) 때문에 대가 끊긴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에게 세상 본 적 없던 귀여운 손주들이 찾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기막힌 동거 생활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호인'과 '강철비' 시리즈 등 휴머니즘 성격이 강하고 묵직한 소재를 담은 작품을 선보여왔던 양우석 감독은 '대가족'을 통해 코미디 드라마 장르에 문을 두드렸다. 초반에 코미디, 후반에는 휴먼 드라마를 배치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한국적인 휴먼 코미디 콘셉트로 구성했다.
과거 한 사건을 계기로 서먹하게 지내는 무옥-문석 부자 앞에 짠한 아이들 민국(김시우)-민서(윤채나) 남매가 짠하고 나타난다. 문석의 생물학적 자식이라고 밝히자, 행복을 되찾은 아버지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아들 극과 극 반응을 보인다. 비슷한 장르와 스토리라인으로 흥행했던 영화 '과속스캔들'이나 일일 드라마에서 볼법한 전개다.
다소 뻔해 보이는 스토리라인에 신선함을 곁들여 줄 킥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바로 민국-민서 남매의 '출생의 비밀'. 알고 보니 함문석이 대학 시절 하게 된 정자기증으로 탄생한 아이들인 것. 심지어 함문석의 정자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이 400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숨에 '정자왕'으로 등극해 웃음을 유발한다. '대가족'은 이 황당무계한 사연을 코미디에 녹여내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저격한다.
정자기증을 무기 삼아 영화는 문석의 생물학적 자녀 찾기를 비롯해 함씨 부자간 이야기,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 엉킨 실타래들을 천천히 풀어간다. 그러면서 양우석 감독은 후반부에 '가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저출산 문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 대안 가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영화 제목인 '대가족'의 '대'가 큰 대(大)가 아닌 대할 대(對)를 쓰는 것이고, 영화 영어 제목을 'About Family'로 작명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화법이 장벽이다. 화두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 만큼 세련되게 풀어내야 하는데 투박하고, 후반부에는 너무 교훈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 예로, 함문석과 큰스님(이순재)이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간이나 보는 이들에 따라 교조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자기증을 활용한 코미디로 에너지를 올렸더니, 올드한 감성을 담은 신파로 맥을 끊는다. 지나친 플래시백과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2000년에 개봉한 영화들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니 빚은 만두의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후반부 구성과 연출이 호불호 갈리긴 하나, 배우들의 역량만큼은 인정할 부분이다. '한국판 스크루지 영감' 함무옥을 연기한 김윤석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주며 웃음을 전한다. 동시에 자타공인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핏줄에 집착하는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김성령, 박수영은 '대가족'에서 뻔한 맛을 진하고 깊은 맛으로 우려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민국-민서 남매로 분한 아역배우 김시우, 윤채나는 힐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치트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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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과 무관심 사이의 애정 속 청춘들
데뷔작 ‘피노이 선데이’로 47회 금마장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호위딩 감독의 신작으로, 한 도시에 사는 네 청춘의 시선으로 각자 겪는 사랑과 이별, 삶의 변화를 바라보는 대만 영화 청춘시련 리뷰입니다.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30회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 34회 도쿄국제, 23회 우디네 극동, 공식 개막작으로 선정된 58회 금마장까지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청춘의 뜨거운 삶과 사랑을 진솔하게 선보였다는 평을 받은 기대작이지요. 더불어 스토리에 부합하는 금마장 남우 주·조연상을 수상한 린 바이 홍(임백굉)을 비롯해 넷플릭스 시리즈 ‘희생자게임’으로 신인상을 수상한 이목 등 대만의 라이징 스타가 캐스팅되어 주목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 속 귀요미를 맡았던 이목의 변신이 눈에 띄었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청춘시련 정보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항상 나를 떠났어요
시의원의 딸 위팡과 그녀의 남자친구 샤오장이 역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칼부림 당하는 사건을 당하며 시작됩니다. 괴한은 위팡과 같은 집에 살았던 밍량으로, 스스로 자수하며 자신이 그녀의 전 애인이라고 하는데... 연극배우 위팡과 같은 극단 배우이자 친구인 전직 포르노 배우 모니카, 위팡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샤오장, 그리고 부모를 여의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밍량까지 사건에 휘말린 네 명의 청춘을 돌이켜봅니다.
예고편│Trailer
원제: 青春弒戀 , 영제: Terrorizers
감독: 호위딩│각본: Natasha Sung, 호위딩
출연진: 이목, 임백굉(린 바이 홍), 진정니, 지크린(임철희), 요애녕 외 多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스릴러│상영 시간: 127분
국가: 대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평점: 기자·평론가 5.0, 로튼토마토 신선도 78%, IMDB 6.0
개봉일: 2022년 12월 1일
# 청춘시련 후기
애정이란 이름이 가진 양면성
극의 시작과 끝이고 가장 중요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을 알리는 기차역 피습 사건이 기다릴 틈도 없이 바로 전개되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시선으로 매듭을 풀어갑니다. 한낮의 역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칼부림에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부가 설명을 해주는 듯 과거를 돌이키지만, 그 설명은 단순한 실마리가 아니라 얽혀있는 네 사람의 시선을 관객에게 공유합니다. 위팡, 모니카, 밍량, 샤오장 차례로 오랜만에 보는 연극의 막처럼 이어진 플롯 구성은 떡밥을 회수하며 흥미로움을 던져주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장면, 다른 상황이 이어져 루즈해지는 분위기를 줍니다. 그리고 애초에 기대했던 대만 청춘 로맨스의 청량함과는 거리가 있는 담배연기 그득한 뒷골목의 우울함마저 묻어나 어떤 뉘앙스를 전달하려는지 의구심마저 듭니다.
마지막 밍량 파트가 되어서야 모든 문제가 풀리고 애정결핍과 과대망상에 시달린 그가 일으킨 파장에 인생에 꼬여버린 청춘 남녀들이 주된 맥락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몰래 찍은 영상을 유포하고 현실이 게임인 양 진검으로 칼부림을 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어떤 현실을 보여주려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죠. 현재 대만 사회의 문제인가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찾은 행복이 진짜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심심함이 묻어나서 뭔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저 부조리한 사회, 거지 같은 세상을 향한 감독의 외침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니까요. 그래서인 무언가 구체적인 목적이나 메시지, 교훈을 주기보다는 그저 인생의 한순간을 함께한 청춘들의 엇갈린 사랑, 그로 인해 찾아온 파국을 지켜본 것 같습니다. 무관심, 관심으로 위협해 공포로 몰아넣는 테러리스트를 떠올리면 될 듯한 뜻의 Terrorizers, 결국 애정의 양면적 모습에 고난, 상처, 시련을 겪는 청춘들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한 막의 시작과 끝을 연주곡입니다 :)
한 줄 평 : 무미건조한 망각에 상처 입은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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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말이 전부인 영화 5선
스포주의 | 절대 잊혀지지 않는 영화 결말이 있나요?
오늘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라스트씬의 대사들을 선정해왔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어떤 대사들이 남아있나요?
전 세계가 사랑한 거장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그 위대한 꿈의 시작! 난생 처음 극장에서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부터 영화와 사랑에 빠진 소년 ‘새미’(가브리엘 라벨). 아빠 ‘버트’(폴 다노)의 8mm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담기 위해 열중하던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진실을 비추는 필름의 힘을 실감한 새미에게 크고 작은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엄마 ‘밋지’(미셸 윌리엄스)의 응원으로 영화를 향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져만 가는데…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 영화의 모든 순간과 사랑에 빠진다!
5년동안 무고하게 감옥에 있었던 빌리 브라운(Billy Brown: 빈센트 갈로 분)은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1만 불짜리 내기에 지는 바람에 그와 같은 쪽에 내기를 걸었던 사람들 대신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냉혹하고 폭력적인 사내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내기 경기에서 진 스코트 우드(Scott Wood: 봅 왈 분) 탓으로 생각한다.
빌리는 한 가지 생각, 복수밖에 없다. 빌리는 부모에게 전화를 건다. 빌리의 부모는 그가 감옥에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아들 빌리와 빌리가 편지에서 자랑했던 새신부 웬디(Wendy: 로산나 아케트 분)를 몹시 보고 싶어한다. 혼자 갈 핑계가 궁해진 빌리는 댄스 연습장에서 나오는 젊은 댄서 라일라를 발견한다.
그는 그녀를 잡아서 강제로 차로 밀어 넣은 다음 자신의 아내 노릇을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이 우울하고도 낯선 남자에게 겁을 먹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력을 느끼는 라일라는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한다. 막상 집으로 갔으나 스포츠광인 어머니와, 잔인하고 우울증에 빠진 아버지는 빌리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반면 라일라는 빌리의 부모에게 즉각적으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라일라는 자신의 역할을 열정적으로 연기하면서 인질이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가족의 일원으로 자리잡는다. 빌리는 옛친구 군(Goon: 케빈 코리건 분)에게 전화하고 군은 스코트가 그 지역의 스트립쇼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빌리와 라일라는 부모의 집을 떠나 한 더러운 모텔에 투숙한다. 빌리가 아침이면 떠날 것을 아는 라일라는 그에게 함께 목욕하도록 설득한다.
그들은 서로의 품안에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밤을 보낸다. 다음 날 빌리는 스트립쇼 극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스코트를 찾는다. 빌리는 스코트가 한물 간 술주정뱅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처럼 외롭고 지친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빌리는 스트립쇼 극장에서 걸어나가면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 라일라.
“나는 완벽했어요.” 새롭게 해석된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순수하고 가녀린 백조와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흑조, 1인 2역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프리마돈나 ‘니나’. 완벽을 향한 그녀의 욕망은 집착이 되어가고 모두 자신을 파괴할 것 같은 불안감이 깊어질수록 점차 어두운 내면이 드러나는데… 흑조를 탐한 백조의 핏빛 도발이 다시 시작된다.
트루먼 버뱅크는 작고 조용한 섬마을에 사는 평범한 세일즈맨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범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등이 떨어지고, 어렸을 적 자신이 익사를 직접 목격했던 아버지가 살아오고, 또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등 상식 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나서부터였다. 평생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지냈던 일상이었지만 주변을 보니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다. 결국 자신이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확신을 하게된 트루먼은 첫사랑 실비아의 모든 것이 다 거짓라는 말을 되새기며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결심하게 되는데...
모두가 기다리던 여름방학. 하지만 마사오는 전혀 즐겁지 않다. 할머니는 매일 일을 나가시느라 바쁘고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다나 시골로 놀러 가버려 외톨이가 되었기 때문. 어느 날 먼 곳에 돈을 벌러 가셨다는 엄마의 주소를 발견한 마사오. 그림 일기장과 방학숙제를 배낭에 넣고 엄마를 찾아 여행길에 오른다. 친절한 이웃집 아줌마는 직업도 없이 빈둥거리는 전직 야쿠자 남편 기쿠지로를 마사오의 보호자로 동행시킨다. 왕복 600km의 여정. 그러나 그 여행은 마사오도 기쿠지로도 잊을 수 없는 생애 최고의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는데... 52세 철없는 어른과 9세 걱정많은 소년. 그들이 마침내 찾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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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축한 대지 위에 그려낸,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
나는 주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관람객이다. 하지만 종종 영화관을 나서며 타인의 존재가 간절해지는 때가 있다. 정리되지 못한 채 쏟아지는 서로의 언어를 갈구하게 하는 영화를 만나고 난 후, 상기된 얼굴로 나와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마주할 때 더욱 그렇다. 영화 <퍼스트 카우(First Cow)>는 바로 그런 영화다.
<와이드 스크린에 끝도 없이 펼쳐진 황야. 그 거칠고 메마른 땅 위를 고독하게 걸어가는 카우보이의 뒷모습. 뿌연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말에 올라탄 개척자들...> 이러한 영화적 풍광은 아마도 영화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상기시키는 관습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서부 개척사는 유럽 정착민들에게 역사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미국사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웨스턴 장르는 따라서, 의도적으로 '개척되어야 마땅한 서부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정당화한다. 웨스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馬)과 서부 영웅들의 존재감은 프런티어(frontier)를 확장하는 개척의 역사만을 포섭하는 주체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 이면에 감춰진 '타자화된 개인들'의 역사가 흐려지는 지점이다. 켈리 라이가트(Kelly Reichardt)의 '축축한 웨스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해나가기 시작한다.
"the bird a nest, the spider a web, man friendship"
(새에게는 둥지가, 거미에게는 거미줄이, 인간에게는 우정이)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는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지옥의 격언(Proverbs of Hell) 속 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새둥지와 거미줄. 그곳의 정주자들은 스스로 몸 뉘일 곳을 부지런히 쌓아 올려 삶을 일궈낸다. 그리고 한 시인은 인간의 우정을 그에 견줄 만한 것이라고 보았다.
영화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킹 루(King-Lu)와 쿠키(Cookie) 이 두 사람의 우정을 통해 잊힌 서부 '정착사'의 토대를 그린다. 뒤집힌 채 배를 보이며 바둥거리는 도마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쿠키는 모피 사냥꾼들의 요리사다. 숲 속에서 버섯을 줍던 쿠키는 발가벗은 도망자 신세인 킹 루와 조우하고 그에게 덮을 것과 잠깐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이후 정착민 마을에서 재회하는 킹 루와 쿠키 두 사람은 술과 거주 공간을 그리고 서로의 꿈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 나간다.
Cookie : You speak good English.. for an Indian.(인디언치곤... 영어를 잘하는군요)
King-Lu : I'm not Indian.(난 인디언이 아닌데요.)
Cookie : Oh.
King-Lu: Chinese.(중국인이죠)
Cookie : I didn't know there were Chinese in these parts.(이쪽에 중국인들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King-Lu : Everyone is here. Everyone wants that soft gold. It's why you're here, isn't it?
(모두가 여기에 있죠. 모두가 모피를(혹은 노다지) 원하잖아요. 당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닌가요?)(Google search : First Cow script, 의역이라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오가는 대화는(위) 서로 다른 얼굴과 언어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되며 이들의 목소리는 구별되지 않고 함께 들려온다. 부족의 언어로 인디언 사공과 소통하는 킹 루의 모습도 이질적이지 않게 다가온다. 이는 마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두 구의 백골이 스스로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출신지나 피부색, 언어가 지워진 채 땅 속에 묻혀 나란히 누워있을 뿐이다. 킹 루의 말대로 그곳에는 모두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로 그곳의 역사가 세워진 것이다.
(좌)<믹의 지름길(Meek's Cutoff)>(2019) (우)<퍼스트 카우(First Cow)>
영화적 발화자의 범위를 넓혀가는 라이카트 감독의 전작 <믹의 지름길(Meek's Cutoff)>의 첫 장면을 잠시 돌이켜보자.(위 그림, 좌) 감독은 '물'과 '소'의 이미지를 관객과 처음으로 소통하는 지점인 오프닝 시퀀스에 담기로 선택했다. 그의 웨스턴이 정주, 즉 '뿌리내림'이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를 품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독은 캐스팅을 위해 펼쳐놓은 수많은 소들의 헤드샷(headshots)을 검토하는 중에 가장 큰 눈을 가진 소, Evie를 만났다고 한다. 영화에서 Evie는 흐르는 강의 물결을 따라 유유히 정착민들의 땅을 향해 다가온다.(위 그림, 우) 삶을 일구는 기본적인 조건인 물과 함께 흘러와 이 땅에 첫 발을 들이는 젖소의 모습은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유목적 삶에서 벗어나 정착하기를 꿈꾸는 이들의 열망이 겹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경유해 장소의 정체성을 연구한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는 인간의 실존을 거주, 즉 '뿌리내림'에서 찾았다. 렐프에 의하면 장소란 우리 자신을 외부로 지향시키는 출발점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에게 '진정한 장소감'이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부에 속해있는 느낌이다. 렐프의 의견을 빌리자면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는 장소감은 정주함으로써 얻어진 공동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블레이크가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우정을 정주의 자리에 넣어놓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배경인 1820년대 킹 루와 쿠키가 도착한 곳은 새로 이주한 이들에게 뿌리내림의 역사가 부재한 곳이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상업적 자본주의의 논리다. 무엇이든 교환 가능한 것이 곧 가치가 되는 이곳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꽤나 낭만적이다. 서로를 향해 비스듬히 기대어있다는 안도감이 그들만의 교환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유한 자본가의 소유인 젖소의 우유를 훔친다. 그들의 완전한 정주를 가능하게 할 빵을 만들어 팔기 위해서다. 한국인들에게 갓 지은 쌀밥의 모락모락 한 김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향이 '집'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유럽인들에게 우유를 넣어 갓 구운 빵 한 조각은 떠나온 그곳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쿠키가 구워낸 빵의 온기가 그들의 작은 거주공간을 가득 채우고, 허기진 이주민들의 마음을 채우는 동안 불안의 기운이 덮쳐온다. 그들은 과연 이 축축한 자투리 땅 위에서 계속해서 빵을 구워낼 수 있을까?
변용된 ‘스파게티 웨스턴’이 공간적 배경을 저 멀리 구대륙으로 옮겨 놓았다면,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는 프레임에서 내뿜는 분위기(atmosphre), 냄새까지 바꿔놓았다. <믹의 지름길>에서와 마찬가지로, 4:3 화면비율을 고집한 감독의 선택과 더불어 피사체와 카메라 간의 밀착된 거리는 다른 향을 뿜는 서부극을 빚어낸다. 그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서부의 이미지가 양 옆으로 길게 뻗어 '점령하고 전복해야 할 황야'로 느껴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폐쇄적이고 빽빽한 감각이 프레임을 메운다. 그리고 그 안의 인물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서부의 메마른 모래먼지로 점철된, 가장 건조한 장르의 로맨스가 버섯이 피어나는 축축한 땅 위에 그려진다.
아직 역사가 기입되지 않은 그곳을 걸으며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History hasn't gotten here yet, "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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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농구의 질감을 가지고 돌아온 슬램덩크
?Rabbitgumi 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습니다.
송태섭의 서사를 중심으로 북산과 산왕의 전국대회 경기를 보여주고 있죠.
산왕과의 경기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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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빙 <아름다운 날들> 예고편
“덩케르크를 그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후퇴로 남길겁니까?
마음에 불꽃을 지필 기적으로 남길 겁니까?”제2차 세계대전 속 1940년, 영국 정부는 국민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덩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선전 영화를 제작하라고 지시한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카트린(젬마 아터튼)은 모두의 반대와 현장에서의 고난 속에도
열심히 영화 제작에 몰두하지만, 코 앞으로 다가온 전쟁의 위협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1940년, 그들에게 영화는 영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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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웬디> 30초 예고편
‘피터팬’ 탄생 110주년 기념,
새로운 주인공, 새로운 시각의 All New ‘피터팬’!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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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
<이웃집 토토로>의 시작은 이상하게 불안하다.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는 사츠키 가족의 트럭은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 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이동을 편히 받아들이는 인간의 시지각적 특성을 고스란히 배반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캐러멜을 나눠먹는 화목한 가족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하나의 부재가 제시된다. 이 트럭엔 엄마가 없다. 그들의 엄마는 결핵에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런 엄마의 병문안을 가기 위해 이들 가족이 단체로 자전거를 탈 때에도 동선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불안감 조성은 후반부 사츠키와 메이가 엄마에게 큰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려움의 심리를 탁월하게 증폭시킨다.
하지만 관객을 상대로 한 형식적 불안과는 달리 작중 인물들은 이러한 불안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 천진난만한 자매 사츠키와 메이는 새 집을 탐방하며 ‘마쿠로 쿠로스케’라 불리는 검댕 벌레를 목격하지만 전혀 겁먹지 않는다. 이때 그들의 아빠 쿠사카베는 “밝은 데서 갑자기 어두운 곳에 가면 마쿠로 쿠로스케가 보이는 거야.”라며 출몰 원인을 진단해주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말한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의미가 단순한 광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쿠로 쿠로스케는 이후 창문이 활짝 열린 2층 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이때 밝은 곳과 어두운 곳에 함유된 의미는 단순한 광량의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물질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사 온 시골집은 어두운 곳, 그전에 머물던 도시의 집은 밝은 곳으로 도식화된다. 그리고 마루코 쿠로스케는 물질적 감퇴의 징표이자 그 음울한 기운을 담은 불안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위에도 언급했듯 이러한 도식이 사츠키와 메이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썩은 나무도 웃음의 대상이 되고, 청소와 빨래도 즐거운 놀이가 되며, 시골집은 어두운 곳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의 대상처럼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메이는 마쿠로 쿠로스케를 게임하듯 잡은 다음 언니에게 자랑하듯 뛰어간다. 이후, 그녀는 마쿠로 쿠로스케가 곧 사라질 거란 말에 “재미없어!”, “난 무섭지 않아.”라고 외치며 섭섭함까지 내비친다. 그렇다면 마쿠로 쿠로스케의 출몰 동기는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쿠사카베 같은 어른의 사고에 맞춰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아내의 간병과 건강을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는 사실을 이내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이전이 어른의 세계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른에게는 부정적인 일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움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 <이웃집 토토로>는 어른과 아이의 표면적인 충돌은 전무함에도 그들의 정신과 내면의 층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충돌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어른과 아이의 충돌 세계를 그리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쿠사카베는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어른과 아이의 충돌을 대중적인 화법으로 탁월하게 그렸던 스필버그와는 정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미지와의 조우>, <E.T>, <에이아이>와 달리 이 영화에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물리적 충돌뿐 아니라 정신적 긴장 관계의 시각적 표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나 환경과의 갈등도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웃집 토토로>의 서사는 지나칠 정도로 평평하고 평화롭다. 만일 당신이 프로듀서라면 질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어떻게 90분 남짓의 상업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수 있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야기를 성립할 최소한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다름 아닌 ‘토토로’라는 미지의 생명체. 그 친근하면서 동시에 기이한 존재를 향해 집중되는 단일한 미스터리. 그렇다면 토토로는 누구인가, 그리고 이 존재는 왜 중요하게 다뤄지는가, 질문해 봐야 할 것이다.
토토로의 정체와 존재론
이사를 온 날 밤, 사츠키 가족이 다함께 목욕을 즐길 때 목욕탕 바깥에서는 불안을 상징하던 검댕 벌레가 비상하여 녹나무의 우듬지를 향해 올라간다. 마치 <모노노케 히메>에서 숲의 정령 ‘고다마’가 어느 나무를 향해 줄지어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주인공 아시타카는 그 나무를 보며 “너희 엄마냐?”라고 묻고, 고다마는 마치 그렇다는 듯 딸깍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이웃집 토토로>에 대입해 보면, 숲의 정령 토토로가 살고 있는 녹나무는 사실상 누군가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누구의 엄마인가. 메이가 작은 크기의 토토로를 따라가다 녹나무의 구멍에 빠져 얼마간 굴러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 긴 통로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의 자궁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그 자궁에서 나온 인물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메이. 그렇다면 녹나무의 자식은 사츠키와 메이인 셈이며, 역으로 녹나무는 그들의 엄마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곳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는 토토로는 누구인가. 사츠키와 메이의 엄마인 녹나무를 지키고, 그 안에서 포근히 쉬는 것을 즐기는 자. 즉각 떠오르는 이름은 너무 당연히 쿠사카베다. 숲의 정령 토토로가 숲을 지키며 그곳에서 쉬는 것처럼 쿠사카베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간병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녀의 쾌유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자이다.
둘의 연결성은 위에 서술한 바 있는 목욕탕 장면에서 보다 명료하게 증명된다. 이 장면에서 쿠사카베는 거센 바람에 집이 흔들려 사츠키와 메이가 불안에 빠지자 돌연 악당 고릴라처럼 “하하하!” 웃더니 보디빌더처럼 상체를 부풀리고 이내 욕조의 물을 내리친다. 순식간에 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어 마치 비가 내리는 듯 보인다. 이는 중반부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장면과 연계된다. 억센 비가 쏟아지자 사츠키와 메이는 우산을 놓고 간 아빠를 마중 나간다. 하지만 아빠를 실은 버스는 한동안 도착하지 않고 메이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든다. 그러던 어느 순간, 고요히 빗소리로 가득했던 버스 정류장에 발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토토로의 등장. 사츠키는 쿠사카베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져간 여분의 우산을 토토로에게 씌어준다(토토로는 이 우산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것인 양 가져간다). 우산을 매개로 쿠사카베와 토토로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후,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재미를 느낀 토토로는 목욕탕에서 쿠사카베가 그랬던 것처럼 큰소리를 내며 상체를 부풀려 점프를 한다. 일순 잎사귀에 맺힌 빗물이 소나기 쏟아지듯 떨어진다. 이윽고 토토로는 고양이 버스를 타고 퇴장하고, 곧이어 일반 버스를 타고 쿠사카베가 도착한다. 미야자키는 지금 명백히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
토토로와 아빠, 녹나무와 엄마라는 도식은 미야자키가 즐겨 활용하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머물지만 그것을 떠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실체. 토토로는 아빠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고, 녹나무는 엄마의 신체에서 빠져나온 영적 존재이다. 그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일종의 돌봄 서비스다. 토토로는 어린 사츠키와 메이 옆에 보호자가 부재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본성이 함축된 비인간의 모습은 이미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죽은 부모를 대신하여 그들의 딸 시타를 지키는 거대 경비 병정으로 구체화된 적 있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에서 영혼을 분리시킨다. 아직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살고 있는 실존 인물의 영혼을 일종의 대리자로 소환하는 것이다.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동일한 주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사츠키와 메이가 토토로를 볼 수 있는 순간은 위에도 잠시 언급했듯 쿠사카베가 직무나 간병 등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을 때다. 일에 몰두하다 어느새 영혼이 사라지고, 시간 개념이 없어져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훌쩍 시간을 점프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었을 것이다. 노동의 순간은 결국 사적인 시간의 부재를 뜻하고, 이는 아이를 보호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병실에 있는 엄마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치료와 회복이라는 노동을 하고 있다). 미야자키가 애니미즘을 필요로 한 건 부모 없이 남겨진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따뜻한 가족주의의 발현을 위해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강의 신 ‘하쿠’는 신발을 주우려다 물에 빠지게 된 어린 소녀 치히로를 구해준다.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강의 신체에 빠져버린 소녀를 강의 영혼이 구해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애니미즘적 관점을 극단으로 밀어붙인다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가 분노한 오무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뒤 부활하는 장면을 나우시카의 신체와 영혼의 분리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토로에게 나무 열매를 선물 받은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에게 마당 정원에 씨앗을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아 낙담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흐뭇하게 읽는 엄마의 얼굴이 드러난 다음 장면에서 싹이 나기 바라는 사츠키와 메이의 간절한 소망은 곧바로 실현된다. 토토로 가족이 의식을 치르고, 사츠키와 메이가 이에 동참하면 나무는 어느새 거대하게 자라난다. 이후, 토토로는 그들을 팽이에 태워 창공을 날아오른다. 이때 “우리가 바람이 된 거야.”라는 사츠키의 대사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폐허가 될 위기에 처한 제국의 시민들과 나우시카가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바라던 반성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의 동화를 황홀하게 각인시킨다. 나무초리에 앉은 사츠키와 메이는 그렇게 아빠와 엄마가 분한 영혼의 대리자들 곁에서 극진히 보살핌 받는다.
토토로는 실존하는가
꿈에서 깨어난 사츠키와 메이는 토토로와 함께 성장시킨 나무가 사라졌음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장면을 놓고 어쩌면 토토로를 그저 꿈의 형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와 토토로의 첫 만남 시퀀스는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끝맺음되고, 버스 정류장에서의 만남은 그녀가 잠든 이후에 이뤄진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월적이고 허황된 꿈의 잔영이자 환상의 조각에 불과한 것일까. 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토토로가 현실의 땅 위에 실존하는 존재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메이는 엄마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그녀의 병원을 찾아 헤맨다. 사츠키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길 잃은 메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수소문한다. 하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자, 사츠키는 토토로에게 가 메이를 찾아달라며 애원한다. 이 장면에는 트릭이 없다. 꿈이거나 환상일 가능성이 배제된, 그야말로 현실의 장면이다. 그렇다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토토로는 어떻게 현실의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여기엔 두 가지 가설이 따른다. 하나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의 결실이 토토로를 소환해 낸 것이라는 가설. 다른 하나는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는 미야자키의 소망 혹은 정말 그렇다고 여기는 강력한 믿음의 결과라는 가설(“이 신기한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 살지 않습니다. 아마도.”라고 적힌 <이웃집 토토로>의 포스터 문구를 보고 미야자키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신기한 생명체는 여전히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라고 바꾸라며 소리친 적 있다). 전자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어떤 특권적인 세계가 있으리라는 동심의 판타지를 품게 하고, 후자는 현실 세계에 긍정적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이상적 낙관을 상상해 보게 만든다.
그러나 전자의 가설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토토로의 존재를 믿는 자가 사츠키와 메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쿠사카베는 토토로를 만났다고 하소연하는 메이에게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한단다. 숲의 주인을 만났나 보다. 운이 좋은 거야. 근데 늘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란다.”라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공표한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 차례도 초월적 존재와 조우한 적이 없다. 사츠키, 메이와 쿠사카베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이라는 나이의 차이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설에는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이 어린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이 첨언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가지 가설을 종합해보면, 미야자키는 어린 아이들만을 위한 초월적 존재가 실존하기를 바라거나, 정말 실존한다고 믿고 있다는 말이 된다.
플래시백의 부재
미야자키 하야오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간과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플래시백의 잦은 사용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그의 이전 작품들,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와 다르게 플래시백이 없는 최초의 영화다. 플래시백은 그의 세계에서 이후에도 <붉은 돼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주제 의식과 서사에 가장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다. 그가 플래시백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그의 동경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어린 시절과 그때 비롯된 모험심과 낭만.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시간이 어른의 십 년보다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 적 있다. 그런 연유로 그의 플래시백은 한 번도 긴 호흡으로 이어진 적이 없다. 파편적인 작은 기억. 하지만 그 작은 파편 하나가 어른의 십 년보다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그 작은 기억의 파편은 주제의 핵심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플래시백이 <이웃집 토토로>에는 없다.
그 이유는 <이웃집 토토로>의 배경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플래시백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선 세 작품에서 동경의 대상으로서 유럽을 배경 삼았던 것과 달리 1950년대 본인의 어린 시절, 심지어 자신이 살았던 실제 공간을 토대로 하여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에게 그 자체로 동경의 대상이자 그가 평생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의 가장 현실 가능성 높은 모델이다. 도덕적인 아이들과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영혼의 보호자들, 그리고 이타적인 이웃 주민들이 만들어 내는 협력 공동체. 더불어 이를 감싸는 포근하고 정겨운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 이 영화의 감동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구축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감동의 이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웃집 토토로>의 감동은 유토피아와 같은 목가적 공동체의 일관된 도덕성에 있다.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로 기능했던,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겪는 엄마의 부재와 그로 인한 불안을 전부 도덕적인 주변 인물들이 해소시켜 준다. 위에서 언급했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세계가 있다고 진짜 믿는 것 같다. 단순한 소망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 그의 오랜 파트너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메인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가 사츠키 같은 착한 아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하자 미야자키가 화를 내며 한 대답 “있어, 그게 나란 말이야!”는 그런 그의 믿음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 배경, 동물들까지 모두 올바르고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엄마의 병원을 찾아 나선 메이가 어느 골목에서 염소를 만나는 장면이다. 엄마에게 선물할 옥수수를 염소로부터 지켜내는 메이의 결연한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럽지만 우리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염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염소를 언젠가 본 적 있다. 다름 아니라 미야자키의 극장 애니메이션 데뷔작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보았다. 소녀이자 공주인 후지코의 반지를 빼앗아 보물을 손에 넣으려는 탐욕스런 백작은 마침내 그녀의 반지를 압수하여 자신의 반지와 그녀의 반지를, 시계탑에 양각되어 있는 염소 조각의 두 눈에 꽂는다. 보물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백작은, 그러나 한곳으로 모이는 시침과 초침에 끼어 압사 당한다. 이내 시계탑이 무너지고 수문이 열리면서 성이 호수의 물로 채워진다. 이로써 호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고대 로마 도시의 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기의 괴도 ‘루팡’은 아름다운 로마의 유적들을 가리켜 “모든 인류를 위한 진정한 보물이네. 내 주머니에 넣기엔 너무 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염소는 탐욕의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화의 물을 뿌리게 함으로써 전 인류에게 회복의 희망을 전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염소가 뜬금없이 메이 앞에 등장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엄마의 부재 속에 그녀의 회복을 염원하는 한 어린 소녀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팡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염소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해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위의 장면은 메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넘어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현실의 모든 아이들에게 보내는 미야자키의 따스한 포옹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문득 의심이 든다. 이 영화의 감동이 정말 작중의 도덕적인 인물들과 미야자키의 선한 믿음에서만 기인하는 걸까. <이웃집 토토로>가 감동적인 가장 큰 이유는 도덕적인 인물들의 협력과 부모의 부재를 극복해 나가는 어린 아이들의 올곧은 간절함이 우리의 욕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 속에서 도덕적인 인간들과 협력하며 살고 싶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웃집 토토로>의 탁월함은 사회의 무한 경쟁과 자본의 억압 속에 잠시 잊고 살았던 ‘도덕적 올바름’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을 찍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미야자키의 믿음과 우리의 욕망은 정확히 일치하는 셈이다). 서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은 촘촘히 설계된 영화의 플롯이 아니라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모두 생채기 하나 없이 이상적인 결말을 맞이했으면 하는 우리의 선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투영하며 영화를 따라간 끝에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엔딩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도덕적 이상에 대한 욕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곧바로 싱그러운 음악이 우릴 축복해준다. 마치 우리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기를 당부하는 것 같이. 그런 탓에 잠시 잊고 있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욕망이 사츠키와 메이가 심었던 나무 열매의 씨앗처럼 땅을 뚫고 무럭무럭 피어날 것만 같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적어도 선해지고 싶은 욕망이 우리 심연에 잠재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진다. 과연 한 편의 영화가 이 이상의 가치를 넘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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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들의 공감을 200%로 끌어낸 영화 3편!
- 출처: 네이버 영화
청춘들을 위한 사계절 힐링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의 임순례 감독이 4년 만에 돌아온 작품으로 시험, 연애, 취업 등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멈추고 고향에서 새로운 봄은 맞이하기 위한 '혜원'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임순례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도시에 사는 모두가 지치고 피곤해 보일 뿐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며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리틀 포레스트>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고, 팔다 남은 도시락으로 연명하며 준비한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혜원은 몸도 마음도 허기져 고향인 시골 마을로 돌아온다. 혜원은 이곳에서 스스로 키운 작물들로 직접 제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오랜 친구인 재하, 은숙과 정서적으로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간다. 영화는 이 세 친구를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휴식과 위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천천히 가도 된다"고 이야기 해주기도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이십대 청춘이지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숲'과 같은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기도해 많은 관객들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좀 더 과감한 청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소공녀>는 전고운 감독의 장편 입봉작으로 2017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2018 부일 영화제 신입감독상, 2018 대종상영화제 시나리오상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작품이다. 영화 <소공녀>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소'에게는 단골 바에서 마시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이 삶의 위안이지만 새해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오르는 물가 때문에 취향을 고수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결국 어느 '취향'도 포기할 수 없어 대신 집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친구 집을 전전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월세빵을 빼고 과거 밴드를 함께했던 친구들의 집을 돌며 미소는 "집이 없는게 아니라 여행 중인거야.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말한다. 이처럼 영화 <소공녀>는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이야기를 통해 소확행, N포세대 등 청춘의 삶을 대변하는 영화로 주목받았다. 전 감독은 미소라는 캐릭터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선택하는 용감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며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미소라는 캐릭터에서 위안을 받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요즘 우리가 처한 현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 <소공녀>는 긍정적인 캐릭터와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더해진 결과, 영화는 갑갑한 현실에 갇히는 대신 차별화된 시각을 제공해준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차가운 현실 속, 세 청춘이 만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 성장 드라마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세 청춘이 우연히 만나 자신들의 꿈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재기발랄하게 담아냈다.
언제나 잔고 제로인 미생 '민규'는 자신이 마주한 세상을 진실하게 바라보고 이 이야기들에 공감한다. 어린 시절 캐나다로 피겨 유학을 떠났다가 은퇴를 하고 돌아온 '한나'는 인생 1막이 종료되었다는 것에 조금 우울해하지만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프랑스 입양인 '주희'는 그녀를 항상 괴롭혀 오던 친엄마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렇듯 냉혹하게만 느껴지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쉽지 않은 여정 속에서 밝게 피어나는 21세기 청춘들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냉혹하게만 보이는 한국 사회 속에서 꿈을 위해 노력하는 청춘들이 겪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회의 모습과 우리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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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두 맛집인데 뒷맛이 이상해요
어디선가 먹어본 익숙한 만둣국 맛이다. 조금 더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추가돼 신선함도 있다. 그런데 계속 곱씹다 보면 이상한 맛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저것 많은 요소들을 '가족'이라는 만두피로 몽땅 담아내 영화로 빚어서다. 양우석 감독의 신작 '대가족'에 대한 간략 평이다.
'대가족'은 스님이 된 아들 함문석(이승기) 때문에 대가 끊긴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에게 세상 본 적 없던 귀여운 손주들이 찾아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기막힌 동거 생활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변호인'과 '강철비' 시리즈 등 휴머니즘 성격이 강하고 묵직한 소재를 담은 작품을 선보여왔던 양우석 감독은 '대가족'을 통해 코미디 드라마 장르에 문을 두드렸다. 초반에 코미디, 후반에는 휴먼 드라마를 배치해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주는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한국적인 휴먼 코미디 콘셉트로 구성했다.
과거 한 사건을 계기로 서먹하게 지내는 무옥-문석 부자 앞에 짠한 아이들 민국(김시우)-민서(윤채나) 남매가 짠하고 나타난다. 문석의 생물학적 자식이라고 밝히자, 행복을 되찾은 아버지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아들 극과 극 반응을 보인다. 비슷한 장르와 스토리라인으로 흥행했던 영화 '과속스캔들'이나 일일 드라마에서 볼법한 전개다.
다소 뻔해 보이는 스토리라인에 신선함을 곁들여 줄 킥 하나를 집어넣었는데, 바로 민국-민서 남매의 '출생의 비밀'. 알고 보니 함문석이 대학 시절 하게 된 정자기증으로 탄생한 아이들인 것. 심지어 함문석의 정자를 통해 이 세상으로 나온 아이들이 400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숨에 '정자왕'으로 등극해 웃음을 유발한다. '대가족'은 이 황당무계한 사연을 코미디에 녹여내면서 관객들의 웃음을 저격한다.
정자기증을 무기 삼아 영화는 문석의 생물학적 자녀 찾기를 비롯해 함씨 부자간 이야기, 주변인들과의 관계 등 엉킨 실타래들을 천천히 풀어간다. 그러면서 양우석 감독은 후반부에 '가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저출산 문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 대안 가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영화 제목인 '대가족'의 '대'가 큰 대(大)가 아닌 대할 대(對)를 쓰는 것이고, 영화 영어 제목을 'About Family'로 작명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다만, 화법이 장벽이다. 화두를 담고 있는 이야기인 만큼 세련되게 풀어내야 하는데 투박하고, 후반부에는 너무 교훈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 예로, 함문석과 큰스님(이순재)이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순간이나 보는 이들에 따라 교조적으로 느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정자기증을 활용한 코미디로 에너지를 올렸더니, 올드한 감성을 담은 신파로 맥을 끊는다. 지나친 플래시백과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2000년에 개봉한 영화들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니 빚은 만두의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후반부 구성과 연출이 호불호 갈리긴 하나, 배우들의 역량만큼은 인정할 부분이다. '한국판 스크루지 영감' 함무옥을 연기한 김윤석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주며 웃음을 전한다. 동시에 자타공인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핏줄에 집착하는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김성령, 박수영은 '대가족'에서 뻔한 맛을 진하고 깊은 맛으로 우려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민국-민서 남매로 분한 아역배우 김시우, 윤채나는 힐링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치트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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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과 무관심 사이의 애정 속 청춘들
데뷔작 ‘피노이 선데이’로 47회 금마장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호위딩 감독의 신작으로, 한 도시에 사는 네 청춘의 시선으로 각자 겪는 사랑과 이별, 삶의 변화를 바라보는 대만 영화 청춘시련 리뷰입니다. 최우수 각본상을 수상한 30회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 34회 도쿄국제, 23회 우디네 극동, 공식 개막작으로 선정된 58회 금마장까지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청춘의 뜨거운 삶과 사랑을 진솔하게 선보였다는 평을 받은 기대작이지요. 더불어 스토리에 부합하는 금마장 남우 주·조연상을 수상한 린 바이 홍(임백굉)을 비롯해 넷플릭스 시리즈 ‘희생자게임’으로 신인상을 수상한 이목 등 대만의 라이징 스타가 캐스팅되어 주목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 ‘내 친한 친구의 아침식사‘ 속 귀요미를 맡았던 이목의 변신이 눈에 띄었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청춘시련 정보
모두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항상 나를 떠났어요
시의원의 딸 위팡과 그녀의 남자친구 샤오장이 역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칼부림 당하는 사건을 당하며 시작됩니다. 괴한은 위팡과 같은 집에 살았던 밍량으로, 스스로 자수하며 자신이 그녀의 전 애인이라고 하는데... 연극배우 위팡과 같은 극단 배우이자 친구인 전직 포르노 배우 모니카, 위팡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샤오장, 그리고 부모를 여의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밍량까지 사건에 휘말린 네 명의 청춘을 돌이켜봅니다.
예고편│Trailer
원제: 青春弒戀 , 영제: Terrorizers
감독: 호위딩│각본: Natasha Sung, 호위딩
출연진: 이목, 임백굉(린 바이 홍), 진정니, 지크린(임철희), 요애녕 외 多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스릴러│상영 시간: 127분
국가: 대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평점: 기자·평론가 5.0, 로튼토마토 신선도 78%, IMDB 6.0
개봉일: 2022년 12월 1일
# 청춘시련 후기
애정이란 이름이 가진 양면성
극의 시작과 끝이고 가장 중요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을 알리는 기차역 피습 사건이 기다릴 틈도 없이 바로 전개되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시선으로 매듭을 풀어갑니다. 한낮의 역사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칼부림에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부가 설명을 해주는 듯 과거를 돌이키지만, 그 설명은 단순한 실마리가 아니라 얽혀있는 네 사람의 시선을 관객에게 공유합니다. 위팡, 모니카, 밍량, 샤오장 차례로 오랜만에 보는 연극의 막처럼 이어진 플롯 구성은 떡밥을 회수하며 흥미로움을 던져주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장면, 다른 상황이 이어져 루즈해지는 분위기를 줍니다. 그리고 애초에 기대했던 대만 청춘 로맨스의 청량함과는 거리가 있는 담배연기 그득한 뒷골목의 우울함마저 묻어나 어떤 뉘앙스를 전달하려는지 의구심마저 듭니다.
마지막 밍량 파트가 되어서야 모든 문제가 풀리고 애정결핍과 과대망상에 시달린 그가 일으킨 파장에 인생에 꼬여버린 청춘 남녀들이 주된 맥락임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 몰래 찍은 영상을 유포하고 현실이 게임인 양 진검으로 칼부림을 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며 어떤 현실을 보여주려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죠. 현재 대만 사회의 문제인가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건이 종결되고 찾은 행복이 진짜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심심함이 묻어나서 뭔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저 부조리한 사회, 거지 같은 세상을 향한 감독의 외침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니까요. 그래서인 무언가 구체적인 목적이나 메시지, 교훈을 주기보다는 그저 인생의 한순간을 함께한 청춘들의 엇갈린 사랑, 그로 인해 찾아온 파국을 지켜본 것 같습니다. 무관심, 관심으로 위협해 공포로 몰아넣는 테러리스트를 떠올리면 될 듯한 뜻의 Terrorizers, 결국 애정의 양면적 모습에 고난, 상처, 시련을 겪는 청춘들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한 막의 시작과 끝을 연주곡입니다 :)
한 줄 평 : 무미건조한 망각에 상처 입은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