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자까2025-07-23 17:09:31
이제, 엄마랑 아빠가 같이 안 산대요
영화 <이사>
1993년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이사>가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32년 만에 국내 극장에 걸립니다. <괴물>, <어느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으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를 보고, 소마이 신지를 "넘어서고 싶은 단 한 명의 감독"으로 칭하기도 했는데요. 1980년대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감독이었던 소마이 신지의 작품들이 거의 반세기를 뛰어넘어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거장과 걸작은 시대를 뛰어넘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21세기의 우리에게 도달한 20세기 소마이 신지의 대표작 <이사>를 리뷰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이사>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이사>는 2025년 7월 23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이사
Moving
Summary
화목한 가정을 자부하던 6학년 소녀 '렌'. 어느 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이혼을 선언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싸워도 참았어. 근데 왜 엄마 아빠는 못 참는 거야?” 엄마가 만든 ‘둘을 위한 계약서’도 싫고,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까 두렵다. “엄마, 부탁이 있어. 이번 주 토요일 비와 호수에 가자.” 몰래 꾸민 세 가족 여행, 엄마 아빠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출처: 씨네21)
Cast
감독: 소마이 신지
출연: 타바타 토모코, 나카이 키이치, 사쿠라다 준코
가족의 해체 앞에 선 어린아이
어느 날, 초등학생 '렌'의 일상에는 낯선 균열이 생깁니다. 갑작스레 아빠 '켄이치'의 이사가 결정된 겁니다. 어른들이 아무리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일지라도, 어린아이인 '렌'에게는 그저 갑작스러운 통보일 뿐이죠. '렌'은 화목했던 우리 가족의 와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아빠가 집을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모녀 사이의 새로운 규칙들을 정해버린 엄마도,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사진을 태워버리는 아빠도 밉습니다. 엄마 아빠가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고 싸우는 것도 싫습니다. "이럴 거면 왜 낳았어?" 벌컥 짜증도 내보지만, 이대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렌'은 가족의 연결고리를 다시 이을 가족여행을 기획합니다.
외동으로 자라난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딱 3명뿐이니까, 누구 한 명의 마음만 틀어져도 금세 무너질 수 있겠다.' 특히 부모님의 사이가 안 좋아 보일 때면 누구의 편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양쪽의 눈치를 보느라 가슴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의 오프닝 신에는 그런 아이의 불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안정감을 주는 둥글거나 네모난 식탁이 아닌, 삐죽한 삼각형 모양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세 가족. 삼각형 식탁에서도 가장 좁은 변에 앉아 괜한 말들을 쫑알거리며 엄마와 아빠 사이의 불안과 긴장을 해소해 보려 하는 아이. 하지만 날카로워진 엄마와 아빠의 사이는 완만해질 기세가 없어 보이죠.
'렌'은 여러모로 가족의 봉합을 위해 애쓰지만, 카메라는 다양한 미장센과 구도를 활용해 회복과 점점 멀어지는 어른들의 상태를 비춥니다. 비가 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는 아빠 '켄이치'의 뒷모습에서는 공허함이, 시위 투쟁을 벌이는 딸의 방문 앞에서 담배를 태우는 엄마 '나즈나'의 옆모습에서는 무력함이 느껴지지요. 엄마와 아빠, 부모와 자식 사이를 가르는 선들도 프레임에 자주 담깁니다. 행복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가족여행을 떠나보지만, 가족을 지킬 힘을 완전히 잃어버린 부모를 마주한 아이는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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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끝의 외침, '축하합니다'
영화 <이사>는 그렇게 성장을 향한 '렌'의 로드 무비로 방향을 전환합니다. 아이는 예전부터 가족들과 함께 놀러 오곤 했던 시골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히마츠리(불 축제)를 구경하고, 뒷동산 여기저기를 방황합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 마을 주민을 만나 잠시 쉬어가기도 합니다. 자신을 걱정하며 찾아다니는 엄마에게는 "빨리 클게!"라며 소리칩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렌'은 조금씩 가족의 해체를 받아들이죠.
걷다가 어느 강가까지 도달한 '렌'은 그곳에서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지난 추억을 재생해 봅니다. 강물에 몸을 담그고 가족끼리 함께 웃고 즐기던 시간입니다. 그러고는 기억에서 그 추억들을 태워버리기 시작합니다. 히마츠리에서 액운을 씻어내고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신성한 가마를 태워버리듯이 말입니다. 어느 마을 주민으로부터 배운 '손에 꼽을 정도의 추억만 있다면 충분하다'라는 말을 마음에 새긴 '렌'은 타오르는 추억의 불길을 바라보며 소리칩니다. "축하합니다(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아마도 그 외침은 부모의 새출발을 응원하는 축하이자,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자신의 성장에 대한 축하일 테지요. 그렇게 '렌'은 이번 여름의 일을 '우리 가족의 이사 소동'이라는 추억으로 마음속에 새롭게 저장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을 태워버리는 상상 속 장면은 일종의 수미상관 구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교실에 부모의 이혼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렌'이 알코올램프를 던져 반에 불을 내는 장면이 있는데요. 바로 그때 점화된 마음속 소요가 히마츠리의 불로 소화되며 끝나는 것이죠. 이 밖에도 <이사>는 이야기의 상징물로서 불을 다양한 방식(화재, 불꽃놀이, 히마츠리 등)으로 활용하고 있어, 이 점을 유념하며 관람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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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사에 대한 결정권은 없어도, 가족 간의 역학관계에서 절대로 발을 뺄 수는 없는 자식의 이야기. 이 영화가 강산이 세 차례 바뀐 오늘날에도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러한 역학관계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어른은 가족의 형태와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역시 여전히 미숙하지만, 적어도 어른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불필요하게 큰 상처를 입지 않도록 책임과 배려의 마음을 더 발휘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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