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7-22 07:59:04
변태만이 감각할 수 있는 찌르르한 전율의 영화
영화 〈미세리코르디아〉
도입부에서뿐만이 아니다. 〈미세리코르디아〉에는 구불구불한, 포장되지 않은 산길과 시골길을 달리는 운전자의 시선 장면이 곳곳에 들어 있다. 길이 올곧지 않고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다는 건 목적지가 불분명하거나 다다르기에 쉽지 않은 곳이란 의미일 테다. 나아가 시도 때도 없이 운전석에 앉아 어딘가로 향해야 한다는 건 어쩌면 운전자 자신조차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를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다. 그리고 이 미로의 끝에서, 우리는 욕망이라는 두꺼운 커튼이 만들어준 안전한 가림막의 뒷공간을 마주한다.
제레미는 자신이 일하던 빵집 사장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온다. 제레미는 장례가 끝나고도 마을에 계속 머무는데, 그를 향한 고인의 아들 뱅상의 시선이 곱지 않다. 제레미의 옛 친구이기도 한 뱅상은 제레미가 어머니의 침대 옆자리, 즉 자기 아버지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의심한다. 그래서 자꾸 제레미를 윽박지르고, 남몰래 해코지한다. 그러던 중 뱅상과 몸싸움을 하던 제레미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의 시신을 몰래 매장한다.
사라진 뱅상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탐문과 취조가 시작된다. 경찰, 신부, 뱅상의 어머니, 또 다른 친구 왈테르. 제레미는 마을에 머물며 이들과 조우를 이어가고, 점점 압박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에게 ‘자비(miséricorde)’의 순간이 찾아온다. 뱅상의 어머니는 제레미를 의심하면서도 그가 계속 자기 집에 머물기를 바란다. 종내에는 그에게 자기 침대 옆자리를 허락한다. 왈테르는 죽은 빵집 사장을 욕망했으나(제레미는 수영복을 입은 젊은 시절의 고인 사진을 하염없이, 여러 번 쳐다본다) 고백하지는 못한 게이인 제레미에게 동성애자로 오인당해 불쾌하지만 동시에 묘한 쾌감도 느낀다. 무엇보다 제레미가 뱅상을 살해한 것을 목격한 신부는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제레미의 비밀을 감춰주고 그에게 ‘사랑’을 베푼다.
뱅상 어머니와 신부 사이의 묘한 질투가 특히 인상적이다. 뱅상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한때 자기 남편을 욕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죽은 남편의 옷을 입히고, 남편이 남긴 빵집의 인수를 제안한다. 한편 신부는 경찰에 쫓겨 곤란에 빠진 제레미와 발가벗은 채 자기 침대에 누워 제레미에게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도대체 왜 신부는 이렇게까지 제레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정말 그만큼 대단한 걸까? 아니다.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다 벌떡 일어난 늙은 신부의 성기는 분명 딱딱하게 앞으로 뻗어 발기된 상태다. 거룩한 종교적 사랑은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부분적일 뿐이다.
뱅상의 어머니와 신부의 육체적 욕망은 모두 제레미를 향해 있고, 제레미는 두 욕망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안주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각자 살인 사건 피해자의 유족, 도덕의 수호자인 두 사람이 ‘용의자’와 ‘동성애자’를 욕망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기에, 이들의 욕망은 그 자체로 제레미가 경찰의 취조에서 몸을 숨길 공간이 되어준다.
감독의 또 다른 걸작 〈호수의 이방인〉에서 본 그대로다. 게이 사우나의 문법을 어느 한적한 프랑스의 자연 휴양지에서 그려내 보인 이 놀라운 작품에서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숲속에서다). 그리고 경찰이 온다. 하지만 경찰은 이 공간의 문법, 즉 욕망의 문법에 무지하다. 어떤 욕망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욕망의 규칙이 마련되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경찰은 ‘이해 못 할’ 욕망 대신 더 넓은 세상의 규칙과 관습을 등에 업고 ‘범죄자’를 추적한다. 즉 단속하는 힘을 가진 자다. 이런 경찰 앞에서 기이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회로와 규칙은 종종 위태롭다. 하지만 경찰이 결코 알지 못할 방식으로 ‘내부자’를 지켜주기도 한다. 〈호수의 이방인〉에서 프랭크가 미셸을 지켜줬듯이. 〈미세리코르디아〉에서 뱅상 어머니와 신부가 제레미를 지켜줬듯이.
이렇게 본다면, 알랭 기로디가 거대한 권력과 소수자의 ‘기괴한’ 욕망을 대립시켜 후자에게 늘 도망칠 수 있는 샛길을 마련해주곤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수자 욕망을 다루는 기존 영화가 대개 그것이 가진 폭발적이고 내재적인 힘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기로디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가 공권력의 추적을 무력화할 정도로 교묘하고 정교하며 깊다는 점을 결코 잊지 못할 방식으로 일러준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찌르르한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안주하는 어떠한 소수자 욕망의 네트워크가 그가 그려낸 세계 속 어딘가와 깊은 곳에서 접선하기 때문일 것이다. ‘변태들의 네트워크’가 아닌 관점에서 이 영화를 상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할 무언가를 두고 번지르르하게 변죽을 울리며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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