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9-01 21:21:11
서류 광탈, 면접 참패, 정원 외 전형
영화 <3670> 리뷰
DIRECTOR. 박준호
CAST. 조유현, 김현목, 조대희 외
SYNOPSIS.
"종로3가, 6번 출구, 7시. 여기서부터 시작이야"
자유를 찾아 북에서 온 ‘철준’에게는 탈북자 친구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어디에서도 속하지 못한 채 혼자만의 외로움을 견디던 ‘철준’은 우연히 만난 동갑내기 ‘영준’의 도움으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계와 마주한다. ‘영준’은 ‘철준’의 친구가 되어주고 ‘철준’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하지만 인기남 ‘현택’의 등장과 함께 ‘철준’과 ‘영준’의 마음에 묘한 파장이 일어나며 두 사람의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는데…
"너를 통해 우리가 될 수 있었던 시간들"
POINT.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관왕을 차지한 작품. 전주에서 <3670>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느껴질 만큼, 관객의 호응도와 관심이 높았던 작품입니다. 시사 현장 분위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 영화적 완성도가 높다는 말을 다양하게 쓸 수 있겠지만, 탈북자/성소수자라는 소수성의 소재를 착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띄었고...
✔️ 사랑은 역시 남의 눈에 더 잘 보이네요. 이런 순애를 담은 영화 오랜만이라 가슴이 뛰었습니다. 제 눈엔 모처럼 만난 잇몸 마르는 하이틴 (아닌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로맨스, 2025년 최고의 로맨스 영화였어요.
✔️ 게다가 사랑스럽고 정직한 인물들의 성장 서사... 안 좋아하는 법 몰라요...

이 영화는 가장 내밀한 스킨십과 그렇지 않은 관계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쪽 친구 아직 없어요?"라는 문장은 주인공 철준에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다. 성소수자 그리고 탈북자. 한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과 대조했을 때, 철준은 분명 이중의 소수자성을 가진 인물이다.
소수자에게는 연결되었다는, 내가 고립되지 않았다는 감각이 필요하다. 성소수자든 아니든, 탈북자든 아니든, '보편적'으로 흔히 소수자라 생각하는 특징을 가졌든 아니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디선가 소수자가 되기도 하기에 이 문장은 사실 인류 보편의 명제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소수자가 되는 경험을 상대적으로 적게 한 사람들은 이 점을 쉽게 잊기에, 더 자주 소수자 위치에 놓여 본 사람들이 그 감각을 기억하고 커뮤니티를 끈끈하게 유지한다.

소수자+소수자?
탈북자 커뮤니티와 게이 커뮤니티, 바로 그 이유로 끈끈해 보이는 두 커뮤니티 사이에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으로 철준은 외롭다. 탈북자 친구들은 여자와의 만남을 추천하고, 버스 속 사람들이 모두 이어폰이나 헤드셋으로 귀를 막은 모습을 보며 착잡해하는 얼굴을 보면 철준은 어플로 하는 일회성 만남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게... 단순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사람 찾기가,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고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가, 허심탄회하게 속 털어놓을 품이 되어 주기가, 그게 참 쉽지가 않지.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철준의 마음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시작은 이중의 소수자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철준의 이야기는 그렇게 그냥 한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전달된다.
이를 담는 제작진의 시각이 따뜻하고 둥글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커뮤니티는 모두 둥근 시선으로 담겨 있다. 게이 커뮤니티와 탈북자 커뮤니티의 공통점이 있다면, 희화화되거나 신파 처리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선정적으로 소구된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가 두 커뮤니티 중 어디서도 내부자가 아니라 고증 정도를 명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 지점을 피해, 그저 인간의 모임으로 그려낸다. 심지어 두 커뮤니티 입장에서 밉거나 떨떠름하기 쉬운 교회라는 집단마저, 그저 자기 일 하는 사람과 철준의 말에 인류애적으로 고개를 뜨덕이는 중립적인 인간 군상의 모임으로 표현되어 신기했다.

보편적인 사람
그리고 이 보편적인 인간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사랑스러운 연애담과 푸릇푸릇한 성장담으로 뻗어 나간다. 영준은 사는 곳을 밝히고, 자주 보자고 말하는 사람, 다음에 또 놀자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이로 소속감을 주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점을 만들어 주고, 커뮤니티의 생리를 알려주는 사람이다. 단톡방에 초대해 주고,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어떤 사이든 그냥, 그렇게 무리에 들여주는 다정한 사람이 필요하다. 쩍쩍 갈라진 땅처럼 애정이 메말라 있던 철준의 세상에 비처럼 부어지는 애정은 (극 중 연령대가 하이틴이 아닌데도 어쩐지) 하이틴 로맨스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 요즘 세상에서 정말 오랜만에 보는 풋풋한 로맨스 서사 같다. 그 안에서 철준은 성장한다. 자기의 언어를 가지고, 자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철준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네가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3년 전에 써서 교회마다 돌려 막듯 발표가 가능한 간증문의 서사만이 있을 뿐이다. 그 서사도 분명 철준의 서사지만, 유일한 서사는 아니다. 무리에 속하고 애정을 받아들이면서, 새싹처럼 그의 서사가 움튼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무리 안에서도 누군가는 외로움과 거절감을 느낀다. 소속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고 온전히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자기 문제는 자기 안에 고인다. 철준을 무리에 받아들이고 새로운 서사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영준의 자기소개서가 오히려 텅 비어 있었던 것처럼. 영준과 현택이 서로를 바라보던 마음들처럼.

서류 탈락, 면접 참패, 정원 외 전형
까놓고 보면 다 제각각의 콤플렉스가 있다. 탈북자, 성소수자, 이런 큼직한 덩어리는 오히려 쉽다. 안으로 들어가면 서류 탈락을 괴로워하는 사람, 면접 참패를 절감하는 사람, 언제나 정원 외 전형으로밖에 분류될 수 없는 사람... 제각각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지극히 보편적인. 그래서 이들이 투닥거리기도 하고 부딪기도 하는 장면들이 더더욱 청춘물로 느껴졌나 보다. 결국에는 내면을 말갛게 드러내고 맞부딪히며 성장하는 이야기여서.
각자의 과거, 각자의 상처가 현재의 발목을 붙잡지만... 씩씩하게,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참기도 하면서, 기꺼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상처 주고 사과하며, 회전목마처럼 둥글게 둥글게 성장 서사는 이어질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9월 3일 개봉합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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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심을 부르는 공포의 춤사위
제목부터 강렬한 <씬>은 정확히 <파묘>가 가져온 기류에 편승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컬트 장르의 외피 쓴 이 작품은 하나씩 진실이 밝혀지면서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관객을 이끈다. 결국 보기 좋게 빗겨나가는 이야기의 마지막 종착역은 ‘속았다’는 혼잣말을 하게 만든다. 과연 감독이 관객을 데려간 곳은 어디일까? 악령의 소굴일까 아님, 못다한 이야기를 펼쳐내려는 감독의 야심일까?
신인배우 시영(김윤혜)은 영화 촬영을 위해 지방에 있는 폐대학교로 향한다. 독립영화계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감독 휘욱(박지훈)의 신작 주인공이라는 설렘도 잠시, 그녀는 생각보다 더 열악한 환경을 마주한다. 이보다 더 안 좋은 건 사전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이상한 춤을 춰야 하는 상황. 게다가 예전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채윤(송이재)과 더블 캐스팅이라니. 일단 왔으니 준비한 건 보여줘야 하는 마음으로 시영은 기묘한 춤을 춘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을까? 평범했던 촬영장은 좀비처럼 날뛰는 이들로 인해 곧 아비규환이 되고, 시영과 스탭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곳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씬>은 강령술처럼 보이는 춤을 시작으로 악령을 불러와 살육의 현장을 보여준다. 영화 촬영 현장으로만 알았던 시영과 스텝들은 한순간 악령에게 저당 잡힌 좀비들의 먹잇감이 되고, 이곳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좀비들과의 사투를 그리는 영화는 오컬트와 좀비물의 결합처럼 보인다. 감독은 여기에 제목처럼 인간의 원죄에 대한 미스터리 구조를 심어놓으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후반부의 문을 연다.
<씬>이 흥미로운 건 진실의 빗장을 차례로 열어젖히면서 공포감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다. 알지 못했을 때 느끼는 공포의 진폭을 이용, 이 일이 일어난 이유, 이상한 것을 계속 보는 시영의 과거, 복면을 쓴 의문의 사람들 등 설명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를 계속해서 부여한다.
미스터리 구조도 한층 더 견고하게 가져가는데, 주요 인물의 이야기를 각 챕터로 구성하면서 보이지 않았던 진실을 조금씩 드러낸다. 진실의 실마리를 알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목마름을 조금씩 축이는 구성은 일단 합격점.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알던 인물들의 민낯도 공개되면서 오리무중이었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져 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숨겨진 진실이 공개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는 오히려 맥이 풀리는 순간을 전한다. 과한 숨김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고나 할까. 반전을 위해 흩어 뿌린 떡밥들은 오롯이 회수되지만, 그 과정으로 인해 영화의 집중력을 해친다.
여기에 후반부 감독의 야심이 느껴지는 부분이 나온다. 시리즈로서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려는 속내가 내비쳤을 때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느껴진다. 특히 죄에 대한 이야기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장르적으로 가볍게만 소비되는 건 아쉬운 구석이다. 반전 구성을 좀 덜어내고, 원죄에 대한 이야기에 더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아쉬움에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것은 배우들의 몫. 극을 이끄는 김윤혜는 물론 송이재, 박지훈, 이상아 등 각자 숨겨진 비밀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잘 그려낸다. 특히 초반부 김윤혜와 송이재의 기이한 춤은 <서스페리아>의 잔향이 느껴지지만, 그 자체로서 공포감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하다. 후반부에도 이 기이한 춤은 이어지니 비교해서 보면 좋을 것 같다.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한줄평: 겹겹이 쌓인 반전이 오히려 역효과. 그래도 뒤통수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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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그린 나이트>,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
활짝 열린 사각의 창틀 너머를 관망하던 카메라가 그 배면에 잠들어 있는 주인공의 얼굴을 담기까지,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는 <이창>(알프레드 히치콕, 1954)의 그것과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다. 두 영화의 카메라는 모두 누군가의 시점처럼 운용되다가 그 시점의 주체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환시킨다. <이창>에서 건너편 아파트 내부의 은밀한 공간을 훑으며 관객의 ‘훔쳐보기’ 욕망을 자극하던 카메라는 돌연 휠체어에서 잠을 자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추면서 해당 쇼트가 특정 인물의 시점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탄로한다. 이 쇼트는 다름 아닌 관객의 시점 쇼트였다. 그렇게 히치콕은 <이창>이 영화와 관계하는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다룬 메타 영화임을 드러낸다.
<그린 나이트>의 도입부에서 창틀 너머의 이름 모를 기사 부부와 가축들을 한동안 관조하는 쇼트는 마치 움직이는 그림을 감상하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형상화되어 있다. 불현듯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까지만 해도 특정 인물의 뒷걸음질로 여겨졌던 쇼트는 후진의 움직임을 계속하면서 그 주체가 작중 인물이 아님을 밝힌다. 동시에 바깥의 세계를 투사하는 틀이 스크린 모양의 사각 창틀이라는 점을 넌지시 드러내며, 여자 친구의 물세례를 받고 번쩍 잠에서 깨어나는 주인공 가웨인의 모습을 하나의 흐름으로 잇는다. 그렇게 카메라는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영화)처럼 표현된 예술 세계와 차가운 물의 성질을 즉각 몸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세계를 연계하며 두 세계의 물리적 단절과 내적 긴밀함을 동시에 암시한다. 현실에서 예술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세계를 흐릿하게 처리하며 온전한 현실로 돌아오는 카메라의 시점은 그런 점에서 감독 데이빗 로워리의 시점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투신하는 대상인 가웨인은 데이빗 로워리의 분신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린 나이트>에서 데이빗 로워리가 자신의 분신 가웨인을 경유하여 도달하려는 곳은 어디일까, 더 중요하게는 그곳에 가닿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가웨인과 녹색 기사, 현실과 영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서 왕은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무용담을 들려 달라 요청한다. 처음에는 그저 친분을 쌓기 위함인 듯 보였던 이 요청은 이내 원탁의 기사들을 두고 “무용담 하나 없이 어울려선 안 된다.”라고 조언하는 왕비의 말을 통과하면서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으로 변모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가웨인이라는 현실 앞에 나무 형상의 초현실적 존재 ‘녹색 기사’가 등장한다. 가웨인의 현실성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녹색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녹색 기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 시퀀스의 포문을 여는 주체가 카메라라는 점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앞에 서서 수직의 각도로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잡은 채 예배당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에 다다른 카메라가 내부의 어둠 속으로 점차 들어갈 때, 계단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문틀로 인해 그 움직임은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하강하는 듯 느껴진다. 그렇게 어둠은 기준점이 되어 이전의 쇼트와 이후의 쇼트를 분리하면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선언한다. 이에 조응하듯 곧이어 문이 열리고,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이 무대 위에 출연하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녹색 기사가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은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에 관한 메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왕위를 계승해야 하는 가웨인은 이 게임에 참가하여 녹색 기사의 목을 내려치고, 일 년 뒤 그가 기거하는 녹색 예배당으로 여정을 떠난다. 이로써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네 가지 시험
여정을 떠난 가웨인은 전쟁으로 참혹하게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머지않아 정체불명의 소년병과 조우한다. 소년병은 가웨인에게 다가가 전쟁으로 두 친형을 잃은 자신의 암담한 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그의 신세한탄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피폐해진 전장을 무감하게 지나치던 가웨인은 소년병이 녹색 예배당이 있는 북쪽 길을 안내하자 그제야 그에게 관심을 준다. 다만, 그것은 소년병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이 아니라 녹색 기사를 만나야 하는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결국 가웨인은 길을 알려준 소년병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지 않은 죄로 그의 무리에 포박당하고 소지품을 전부 빼앗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왜 소년병은 처음부터 강도 무리를 끌고 와 가웨인을 포박하지 않았을까. 만일 허허벌판이 아니라 우거진 숲에서 범행을 계획한 것이었다 해도 구태여 작은 친절을 바랄 필요가 있었을까. 또한 가웨인이 그것을 베풀지 않았다고 분노할 필요가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 장면은 일종의 시험처럼 느껴진다.
이 대목의 서두를 여는 자막 ‘작은 친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연민’일 것이다. 가웨인은 전쟁에 희생된 자들과 그 포악함의 절대적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소년병을 보고도 전혀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그런 점에서 포박당한 가웨인을 카메라가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을 오가며 360도 회전하는 쇼트는 백골이 된 미래의 형상과 복원된 현재를 교차함으로써 연민의 정을 하사하지 않은 가웨인에게, 그러니까 연민이 거세된 현실에게 가하는 카메라의 협박이자 경고는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녹색 기사와 재회하는 시퀀스를 제외하고, 이 여정을 구성하는 네 개의 시퀀스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들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한 탐구이자 점검일 테다.
이후, 가웨인은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간 빈집에서 정령처럼 보이는 의문의 여자 위니프레드를 만난다. 그녀는 가웨인에게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그녀 목에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얘기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가웨인은 물을 수밖에 없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위니프레드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고 있는 것이다(로워리는 전작 <고스트 스토리>에서 초현실적 존재인 ‘고스트’의 가시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을 믿어 달라 하소연한 적 있다). 다행히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정한다. 그는 위니프레드의 부탁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두개골을 건져 올린다. 시험에 통과한 가웨인은 그 보상으로 소년병에게 약탈당했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돌려받는다.
여정의 세 번째 시퀀스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이다. 가웨인은 이 기이한 시퀀스에서 여우의 하울링을 따라하는 인간 형상의 거인족을 보게 된다. 이는 그간 거쳐 왔던, 문제가 주어지고 그 난관을 헤쳐나가는 식의 시험 유형과는 사뭇 다르다. 이때 눈길을 끄는 건 거인족을 따라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가웨인의 뒤에서 느닷없이 180도로 몸체를 돌려 상하를 반전시키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다. 더 흥미로운 건 카메라가 상하를 완전히 뒤바꾼 다음 점차 전진해 나갈 때, 조금씩 희미해지던 거인족의 형상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화면이 180도 뒤집혔을 때 비로소 거인족이 지배하는 환상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카메라가 180도 회전하기 전의 화면은 온전한 환상인 것이다. 이와 연계하여 우리는 이 시퀀스의 도입부에서 가웨인이 환각의 버섯을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환각의 버섯은 앞선 두 시퀀스에서 소년병과 위니프레드처럼 일종의 출제자 역할을 한다. 시험지를 받아든 가웨인은 환각을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검증받는다. 그러니 엉뚱하게 튀어나온 거인족들은 가웨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영이다.
공교롭게도 이 환영들은 영화의 어떤 존재보다 컴퓨터 그래픽의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이때 방점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화면에 기입되면서 생기는 생경함에 있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로워리가 초월적 존재인 유령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하지 않은 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구현했을 때 생기는 간극, 말하자면 그로 인해 촉발되는 생경함이라는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건 디지털 기술 자체, 혹은 아날로그 자체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이다. 정리하면 가웨인이 치르는 세 번째 시험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생경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한 역량 측정이다.
가웨인이 여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마주한 대상은 기억 속의 여자 친구 에셀이다. 그는 에셀에게 받은 징표의 소리를 매개로 자신에게 청혼을 하는 그녀의 과거 모습과 대면한다. 그러나 가웨인은 수줍게 진심을 고백하는 그녀에게 어떠한 답도 건네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 에셀과 똑같은 얼굴을 한 성주 부인이 나타나 매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이때 성주 부인과 에셀이 신분의 격차로 구별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주 부인의 역할은 명료해 보인다. 네 번째 여정에서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시험을 치른다. 이 어려운 싸움에서 가웨인은 에셀이 준 징표를 두고 사랑의 징표가 아니라고 말한 뒤 이를 성주 부인에게 헌납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와 불온한 성적 관계를 맺는다. 가웨인은 사랑의 윤리에 관한 한 완벽한 낙제다.
다만, 이 장면에서 더 중요한 것은 성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가웨인이 성주 부인에 의해 욕정이 해소되는 과정은 성주 부인으로부터 녹색 허리띠를 선물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차고 있으면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고 영영 상처 입지 않는 녹색 허리띠는 죽음을 거스르려는 욕망이자 의지이다. 말하자면 현실은 욕망으로 팽창하지만 존재의 소멸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세계이다. 이때 죽음은 성주에 의해 사냥된 짐승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이 이미지는 가웨인이 성을 떠나기 전날 밤 자신이 사냥감으로 표현된 그림을 보는 장면에서 강하게 대두된다. 그는 그와 유사한 그림을 전에도 본 적 있는데, 그때 사냥감으로 채택된 대상은 여우였다. 그렇다면 가웨인과 여우는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 걸까.
여우는 가웨인이 두려움에 잠식될 때, 예컨대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황막한 숲속을 지날 때나 연못에서 위니프레드의 두개골을 건져 올렸을 때, 그리고 동굴 안에서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을 때, 녹색 예배당을 목전에 두었을 때 불현듯 등장한다. 말하자면 여우는 가웨인이 녹색 예배당에 당도하기 전까지의 모든 여정에 동참하며 네 번의 개별 시험과 별개의, 혹은 그 모두를 관통하는 시험을 내는 출제자다. 이 시험의 핵심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가능성이다. 성안에서 여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성주의 말대로 집은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가웨인이 성을 떠날 때, 성주가 그에게 여우를 선물하는 것은 그간 잡아두고 있던 그의 두려움을 다시 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필멸의 과정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당도한 가웨인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음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가웨인은 녹색 기사가 휘두르는 도끼를 계속 피하면서, 그곳에서 도망쳐 집으로 귀환한 뒤의 미래를 상상 속에 그려본다. <그린 나이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집으로의 여정’ 몽타주 시퀀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예컨대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부문에서 고스란히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을 벌이며 국민을 희생시키고, 여자 친구 에셀을 가혹하게 배반하며, 전쟁통에 끝까지 성안에 머물면서 홀로 쓸쓸히 죽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끔찍한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현실만이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린 나이트>는 <고스트 스토리>와 다른 과정을 거쳐 동일한 결론을 도출하는 영화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하며 영화 그 자체로 환유되던 고스트는 현실의 물질적 기반 위에 살아가는 아내 곁을 맴돌다가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현실의 진실)를 발견하곤 돌연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녹색 기사가 끝내 가웨인을 참수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영화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앞에서 무릎 꿇고, 현실은 영화 앞에서 무릎 꿇으며 자신의 소멸을 받아들인다. 어느 쪽이든 두 세계는 필멸의 과정을 거쳐 독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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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파이의 아내>는 NHK에서 방영된 TV 드라마를 영화의 형식으로 다시 제작한 영화다. 일본의 어두운 과거를 폭로하고 성찰하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투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영방송 NHK의 제작지원 하에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본래 8K 카메라로 촬영되고 NHK 자사의 4K/8K 채널에 한정적으로 방영 예정이던 드라마는 베니스 영화제 극장 상영을 위해 재작업하는 과정에서 화면비 변경(1.78:1->1.85:1)과 색보정 작업 등을 거쳐 2K로 변환됐다. 8K의 선명한 화질이 2K가 되면서 그 선명도가 떨어진 것임은 분명할 것이나 이 영화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예산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때문에라도 둘 사이의 화질 차이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받으며 이 영화는 더욱 회자되었고, 영화화는 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모던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 생각은 영화를 볼수록 독특한 영화라는 판단으로 확대됐다. 이 영화는 분명 1940년대 고베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인물들의 연극적은 대사 톤과 당시대를 옮겨 놓은 듯한 세트, 인물의 동선을 팔로잉하는 연극적인 촬영 방식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 이 영화가 전통적인 역사 내지 시대극의 형식이나 스파이 장르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느냐는 질문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이 말이 이 영화가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떠한 관점에 편향된 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이 영화가 구성되는 방식에 독특한 지점이 있다는 뜻이다.
먼저, 이 영화의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나. 보통의 정통 스파이물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방점은 제목대로 스파이보다도 '아내'에 찍혀있다. 보통의 스파이물이라면 범인 찾기 혹은 범인이 범인임을 들키느냐 마느냐 하는 데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파이가 누군지를 초장부터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의 초점 자체가 스파이가 아닌 그의 아내 사토코에게 맞춰져 있다. 영화는 대부분 사토코의 시점을 따라가고, 관객은 사토코의 심정에 이입을 하며 극을 따라가게 된다. 유사쿠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둘은 섬유무역회사를 운영하며 유복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의 집 내부를 보면 유사쿠가 서양의 문화를 동경하고 그에 매료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은 다가오는 전쟁과 함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날 유사쿠는 전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만주를 보고 오겠다며 급히 만주로 떠나고,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만주에서 돌아온 유사쿠는 달라져있다. 이상함을 눈치챈 사토코는 그를 추궁하고, 그가 만주에서 일본군이 병균으로 생체실험했고, 그로 인해 죽은 수많은 주검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미국으로 가져가 폭로하려는 그의 계획을 듣는다. 헌병대장이 되어 돌아온 사토코의 옛 친구 야스하루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이 시점부터다. 세 인물이 서로를 의심하며 빚어내는 갈등은 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해나간다.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의심할 만한 정보를 일부러 그녀에게 흘리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풀리지 않는 그의 행동에 점점 의심을 갖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은 '코스모폴리탄'이라며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유사쿠는 자국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려 하고, 사토코는 지금까지 유사쿠의 곁에서 누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토코는 처음엔 그를 배신한다. 남편의 금고에 있던 노트를 야스하라에게 가져가 조카 후미오가 체포되게 만들고, 자신의 남편 또한 의심받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남편을 택하고, 남편이 스파이라면 자신은 스파이의 아내다 되겠다 선언한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진실'을 밝힌다는 대의보다 사랑이었고,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사쿠였다. 그러나 대의가 동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남편이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사해 그가 보고 들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목격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미국으로 떠나는 날, 사토코는 유사쿠에게 배신당한다. 누군가 사토코의 행방을 고발해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 숨어있던 사토코는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붙잡힌다. 사실 그녀가 맞이하는 결말은 암시됐다. 그녀가 유사쿠, 후미오와 함께 찍은 필름에서. 바로 이 필름,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 안에서 사토코는 연인의 금고를 털다가 연인에게 들키고, 연인은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배신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달아나는 연인 사토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사토코는 그 총알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연인은 죽은 사토코를 안고 슬퍼한다. 이 필름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 다시 상영된다. 많은 일본군들 앞에서. 관객은 그때서야 사토코가 봤던 만주의 참상을 담은 영상을 재촬영한 필름의 일부를 보게 되며, 또한 거기에 입혀진 유사쿠의 필름을 다시 보게 된다.
필름이라는 매개의 의의는 사실상 이 영화의 핵심이다. 관객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생체실험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하고,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실험노트와 영상을 찍어온 필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된다. 진실을 밝히고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또한 필름은 사토코가 유사쿠를 적극 지지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단순 전달을 넘어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은 그가 그곳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들으며 찍어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영상물을 재촬영한 결과물이다. 그곳의 진실은 필름 안에 다시금 담겼고, 누군가가 그것을 그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알게 되도록, 그것에 대한 직시와 판단을 가능토록 만들었다. 유사쿠가 사토코와 함께 찍은 필름이 덧입혀진 필름을 일본군이 다 같이 보게 되는 것 또한 반대의 의미에서 이 영화의 중요 씬 중 하나다.
덧입혀진 필름에 당황하던 사토코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주 훌륭하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이어서 배를 타고 떠나며 유유히 손인사를 하는 유사쿠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배신했던 연인을 역으로 배신한 인물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으나,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수감된 사토코에게로 다시 초점을 맞춘다. 패전의 그림자가 고베에까지 드리웠을 때, 사토코가 불바다가 된 조국을 바라보며 뱉는 대사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미친 나라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되고, 미친 사람은 미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정상적이지 않은 조국의 패전은 그 비정상의 무너짐에 있어서는 기쁨이 되겠지만, 조국의 패배라는 면에서는 슬픔이 된다. 바닷가에 가 그제야 울분을 토하는 사토코의 모습은 그런 조국을 둔 개인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피할 수 없는 비극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사를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금의 일본이 가져야 할 양심과 반성 의식은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전쟁 중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시대물을 작업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자유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고, 국가 안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국가에 의해 어떻게 빼앗기게 되는지 그려낸다. 감독의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양심선언처럼도 느껴지는 이 영화는 군국주의의 잔재 속 극우주의가 만연한 일본에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같다. 지식인이자 예술인의 입장에서 자국의 과거사를 드러내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작금의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묻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성찰적 태도는 일본 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새로운 물결 중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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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스러운 꿈
영화 <유니콘 스토어>(2017)는 2019년 4월 5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작품으로, 배우 브리 라슨의 감독 데뷔작이다. 2017년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캡틴 마블>(2019)이 개봉한 뒤 넷플릭스 공개가 결정되기까지 <유니콘 스토어>는 마치 벽장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 이 엉뚱하지만 기발하고 동시에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영화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분명 믿을 거라 생각해 꺼내보기로 한다.
어릴 적 꿈을 포기하고 재능과 상관없는 일을 하는 주인공에게 어느 날 날아든 초대장.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살 수 있다'는 초대장의 내용에 이끌린 주인공의 눈앞에 펼쳐진 건 형형색색의 복장을 한 미스터리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유니콘을 파는 가게'. 여기까지만 읽자면 이렇게 짐작할 수 있다. 꿈을 잊고 살던 주인공에게 문득 찾아온 터무니없는 판타지 같은 일이 진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주인공은 회사를 뛰쳐나가 자기 꿈을 펼친다. 이 짐작은 영화에 대해 대략 절반은 들어맞지만, <유니콘 스토어>는 꿈에 관하여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다.
목표가 있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우리는 항상 그걸 이루지는 못한다. 꿈은 좌절될 수도 있다는 얘기. 다만 <유니콘 스토어>는 좀 더 작은 것을 들여다본다. 유년의 꿈. 유년의 판타지. '키트'는 반려동물 대신 곰인형을 안고 자랐고, 자신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친구'들에게 말을 걸며 자랐다. 그 친구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가끔은 비밀을 들어주기도 했던 그 유니콘.
사무엘 L. 잭슨이 연기한 '세일즈맨'은 '키트'(브리 라슨)에게 유니콘을 키우기 위한 여러 조건과 관문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유니콘이 살 만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은 '키트'의 마음이 진심인지에 대한 확신을 요구한다. '세일즈맨'의 역할은 마치 "착한 사람 눈에만 보여요"라고 말하듯 꿈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시험하는 캐릭터처럼 다가온다. 와중에 '키트'는 파트타임으로 취직한 진공청소기 회사의 업무들과, '유니콘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여러 재료들과 비용에 대해 생각하면서 자신이 진짜로 꿈꾸는 것,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돌이킨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영화의 조연으로 출연하는 사만다 맥킨타이어가 각본을 썼고 단역으로 출연하는 알렉스 그린왈드가 음악을 작곡했다는 것. 브리 라슨은 이미 2012년경 이 영화의 주인공 '키트' 역에 출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는 다른 감독이 연출할 예정이었고, 시간이 지나 브리 라슨의 작품이 된다.) 영화 오프닝에 삽입된 홈비디오 풋티지는 브리 라슨의 실제 유아 시절의 영상 자료를 활용한 것이다.
감독 데뷔작임을 감안해도 아주 잘 만든 영화라 확언하긴 어렵겠다. 그러나 쉽게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는 영화라는 점은 말할 수 있겠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진짜 유니콘이 있을까'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내게도 저런 꿈이 있었지' 생각하게 만드는. 탁월한 연출력은 아닐지라도 주연과 연출을 겸한 브리 라슨은 <유니콘 스토어>로 자신이 카메라 뒤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능히 증명한다.
<유니콘 스토어>는 브리 라슨의 자전이 담겨 있는 영화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의 (지난) 꿈을 당신에게 줄게요."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을 통해 수많은 유년들의 히어로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유니콘 스토어>가 꿈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도 이어질 수도 있음을 말하는 영화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요컨대 꿈을 떠나보내는 일도 꿈이 될 수 있음을 아는 영화. 조앤 쿠삭이 연기한 '키트'의 어머니의 "가장 어른스러운 일은 네가 아끼는 일에 실패하는 거야."라는 말이 영화가 끝나고도 귓전에 맴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김동진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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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어데블 | 자경단이냐, 변호사냐, 그것이 문제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슈퍼히어로의 도덕적 딜레마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는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말했다. 법은 외적인 행위에 대한 강제적 규범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율적이고 내면적 동기에서 기인하는 도덕의 영역 중 일부만 제한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과 도덕은 딜레마를 낳는다. 도덕적으로는 옳아도 법적으로는 규제돼야 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답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이 딜레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철학적 바탕을 이룬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는 기본적으로 현행법을 위반하고 폭력을 저지르는 범죄자다. 그렇기에 일부 시민, 경찰, 검사나 정치인은 그를 경계하고 통제하고자 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민들은 슈퍼히어로의 선한 의도를 믿기에 그가 옳은 일을 할 거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희망은 슈퍼히어로가 의심받고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영웅다운 일을 해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에 슈퍼히어로는 부상당하거나 강력한 적이 등장했을 때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 자신의 도덕적 동기를 의심하고, 주어진 법에 순응하려 할 때 그는 약해진다. <스파이더맨 2> 속 피터 파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브루스 웨인,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토르,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젊은 찰스 자비에까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정체성을 잃고, 위기에 처한다.
디즈니+로 공개된 MCU의 새로운 드라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이하 <데어데블>)도 마찬가지다. <데어데블>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넷플릭스에서 시즌 3까지 공개되었던 <마블 데어데블>의 후속작으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과 <변호사 쉬헐크>에서 먼저 카메오로 등장한 '맷 머독/데어데블'(찰리 콕스)의 MCU 복귀작 역시 역시 슈퍼히어로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다.
익숙한 고뇌
<데어데블>은 데어데블로서의 활동을 포기하는 맷 머독을 비추며 시작한다. 친구인 '포기 넬슨'(엘든 헨슨), '캐런 페이지'(데보라 앤 월)와 평온한 저녁을 보내던 와중에 맷은 '포인덱스터/불스아이'(윌슨 베델)의 기습을 받는다. 맷은 포인덱스터를 제압하는 데 성공하지만, 총에 맞은 포기가 사망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인덱스터를 옥상에서 떨어트려 죽이려 한다. 데어데블만의 불살주의를 지키지 못한 것.
포기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캐런마저 뉴욕을 떠나자 맷은 깊이 고뇌한다. 불살주의마저 지키지 못한 이상 데어데블이 과연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지, 폭력으로써 범죄에 맞서는 자경단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회의한다. 고민 끝에 그는 자기 내면의 규범이 아니라 외적 규범, 곧 법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데어데블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엘리트 맹인 변호사 맷 머독은 합법적으로 세상을 바꿀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맷은 경찰을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된 '헥터 아얄라'(카마레 데 로스 레예스)의 변호를 맡는다. 그는 헥터가 부패 경찰에 의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헥터가 사실 '화이트 타이거'라는 자경단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약자를 도왔다는 전력을 강조한 끝에 무죄를 받아낸다.
하지만 헥터가 무죄 판결을 받은 바로 그날 밤에 살해당하자 맷은 다시 한번 좌절한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선을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배신당하자 그는 데어데블 마스크를 다시 만지작거린다. 법이 무용하다면, 불법이라 해도 데어데블의 힘과 능력을 이용하는 게 도덕적으로 옳은 게 아닐까 자문하면서.
시의적절한 빌런의 등장
여기까지만 보면 <데어데블>의 서사나 메시지는 특별하지 않다. 다른 히어로들이 경험한 도덕적 딜레마, 정체성의 위기를 맷 머독도 똑같이 경험한다. 그러나 <데어데블>에는 두 가지 특이점이 있다. 첫 번째는 <호크아이>와 <에코>에 얼굴을 비추며 MCU에 복귀한 빌런, '윌슨 피스크/킹핀'(빈센트 도노프리오)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악역으로 묘사된 킹핀 덕분에 데어데블의 고뇌는 다른 히어로들과 다른 결을 갖추는 데 성공한다.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돌아온 MCU의 '블립' 사건 이후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진 뉴욕. 킹핀은 이를 데어데블, 화이트 타이거, 스파이더맨 같은 자경단의 탓으로 돌리면서 대중들의 불안함과 기대감을 공략한다. '레드 후크 부두'와 같은 우범지대를 재개발하고, 영장을 팔요로 하지 않는 초법적 권한을 가진 자경단 특별 수사대 출범과 같은 사이다 공약을 내세운 끝에 킹핀은 뉴욕 시장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
킹핀의 정치적 성공은 극우 정치인의 등장을 MCU에 맞게 각색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중의 사회적 불만과 불안함을 해소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의 지지에 힘입어 민주적으로 집권한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에는 합법적인 척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일례로 백악관에 재입성한 트럼프는 당선인 신분일 때 사적으로 발행한 밈코인을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위와 백악관을 동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부두 재개발 사업을 사업 확장과 탈세에 악용하려는 킹핀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특히 킹핀이 자기가 사주한 테러를 명분 삼아 뉴욕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순간, 맷 머독의 고뇌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불법적인 내용을 형식적 정당성으로 가리려는 킹핀의 독재를 합법적 수단은 막지 못한다. 이에 법과 도덕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맷은 데어데블의 길을 다시 걷기로 결심한다. 설령 위법하더라도 도덕적으로는 옳은 길을 선택해야 비로소 킹핀에게 맞설 수 있을 테니까. 이처럼 히어로의 정체성 회복 서사를 사회 정의를 바로잡는 공동체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하면서 <데어데블>은 차별화에 성공한다.
보여주지 않아서 부각되는 갈등
두 번째는 <데어데블>의 구조와 연출이다. <데어데블>에서는 히어로와 빌런이 좀처럼 만나지 않는다. 데어데블과 킹핀은 1화와 8화에서 각각 한 번씩 만나는 것을 제외하면 접점이 없다. 둘이 한 액션 시퀀스에 함께 등장하는 장면도 없다. 그 대신 드라마는 그들을 편집으로 이어 붙여서 킹핀과 데어데블이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방의 선택에 따라 다음 움직임을 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가시적 충돌을 보여주지 않는 연출은 오히려 그들의 신념을 부각하는 데 효과적이다. 윌슨 피스크가 뉴욕 시장과 킹핀 중 후자로 거듭나고, 맷이 변호사가 아닌 데어데블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점진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흥분으로 물드는 뉴욕의 밤거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는 킹핀과 혼란스러운 거리의 소음을 들으며 데어데블의 필요성을 깨닫는 맷 머독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더 나아가 드라마의 메시지도 구체화한다. <데어데블>은 다음 시즌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킹핀과 데어데블의 싸움을 예고하며 막을 내린다. 이때 카메라는 킹핀이나 맷 머독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바텐더, 전직 경찰, 변호사, 상담사, 기자와 같은 일반 시민들의 얼굴을 한 명씩 비추고, 그들이 킹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길과 맷을 도와 킹핀에게 맞서는 길 중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암시한다.
이는 시민의 역할, 곧 시민적 덕성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설령 법을 위반할지언정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실질적인 위법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시민에게 주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즉, 만약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에만 포커스를 맞췄다면 상대적으로 희미해졌을 사회적, 공동체적 차원의 메시지를 결말을 통해 다시 한번 환기하는 셈이다.
과정을 잊게 만드는 결과물
다만 킹핀과 맷 머독을 일부러 조우시키지 않은 선택은 일장일단이 있다. 서사적으로는 영리하지만, 장르적으로는 아쉬움을 남긴다. 히어로와 빌런이 좀처럼 만나지 않으니 절대적인 액션 분량이 줄어들고, 클라이맥스라고 할 만한 장면도 찾기 어려워지기 때문. 데어데블의 초인적 감각을 살린 고유의 액션 스타일은 건재하지만, 슈퍼히어로 장르의 쾌감을 살리지는 못한 것. 결국 다음 시즌을 위한 빌드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액션씬의 부재는 잡음이 많았던 제작 과정의 여파처럼도 보인다. <데어데블>은 본래 <마블 데어데블>과는 달리 법정물로 기획됐지만, 내부 시사회 평가가 좋지 않자 촬영 도중 작가와 감독들을 해고한 뒤 방향성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새롭게 추가된 에피소드인 1, 8, 9화에만 액션 시퀀스가 집중된 것은 그 방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데어데블의 MCU의 복귀는 아쉽더라도 충분히 성공적인 듯하다. 제작 과정의 난맥상을 고려했을 때 데어데블과 킹핀의 첫 발걸음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서사와 시의적절한 메시지로 꽉 차 있으니까. 이에 더해 '카말라 칸/미스 마블'의 아버지인 '유수프 칸' 같은 캐릭터를 활용해 MCU와의 연계도 있지 않았으니 <데어데블: 본 어게인>은 기존 팬들도, MCU 팬들도 모두 만족할 후속작 겸 복귀작처럼 보인다.
Exceeds Exectations 기대 이상
캐릭터 서사도, 현실적 맥락도 놓치지 않고 MCU에 안착한 헬스키친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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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도 목적없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좋아하던 드라마가 종영을 하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다.
좋아하던 드라마가 종영을 하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다.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 본방을 사수하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신랑에게 “조용히 해 방해하지 마”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8주가 흐른다. 나의 부모님이 열여섯 번을 만나고 결혼하셨음을 상기한다면 8주, 즉 16시간은 제법 긴 시간이 맞다.
최근에 나를 떠나간 드라마는 <그린 마더스 클럽>이었다. 세련되게 들려오는 이 제목을 한글로 바꾸면 바로 ‘녹색 어머니회’다. 꼬꼬마 초등학교 시절 횡단보도를 건널 때 초록색 조끼와 초록색 모자를 눌러쓰고 우리의 안전을 담당하셨던 아주머니들. 내 친구의 어머니들. 요새는 녹색어머니회라는 말 대신 그린 마더스라고 하는 건가? 뭐, 잘 모르겠지만 바로 이 녹색어머니회를 담당하는 연령대의 아이 엄마들이 주인공인 이 드라마는 여하튼 정말 진국이었다.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따뜻하기만 한 이야기는 어쩐지 가짜 같아서 싫다.
나는 오그라드는 드라마를 잘 못 보는 편이다. 쓸데없이 화기애애하다던지, 현실과 다르게 너무 이상적이라던지, 한 점 티끌도 없어 보이는 관계들이라던지 그런 거. 따뜻하기만 한 이야기는 어쩐지 가짜 같아서 싫다.
언제나 속절없이 빠져드는 이야기라면, 근거 없는 따뜻함보다는 냉정하더라도 현실적인 이야기. 추하고 노골적인 현실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한 줌의 따뜻함을 발굴해내는 그런 이야기다. <그린 마더스 클럽>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였다. 대놓고 따뜻한 아줌마들의 우정을 그렸더라면 난 애초에 본방사수를 하지도 않았을 터.
드라마를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간단 요약하자면. 드라마는 ‘상위동’이라는 학구열이 무지 높은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엄마들의 커뮤니티를 다루고 있다. 모든 교육정보를 줄줄 꿰고 있고 아이를 잘 케어하는 이른바 ‘돼지엄마’를 필두로 아이 엄마들은 삼삼오오 몰려다니는데, 그 돼지엄마가 춘희(추자현), 이제 갓 그 모임에 입성한 엄마가 바로 은표(이요원)다.
매우 날카롭고 속물기가 가득한 춘희와 그에 비하면 순한 맛인 은표는 처음에 서로 부딪히고 경계하기 바빴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아이 엄마들은 모두 종잇장처럼 얇은 관계들이다. 모두 서로의 이익(아이 케어)을 위해 만나고 흩어지는 사이일 뿐, 따뜻한 연대와 우정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이 드라마의 2화 제목은 ‘어른들은 목적 없이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였을 정도. 조금 변태 같지만 나는 이 제목이 너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곁을 주기 전에 열심히 간을 보는 어른들의 세계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어른이 될수록 감추고 싶은 특성이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좋은 드라마는 이러한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한 줌의 빛을 찾아내기 마련. 얄팍하고 잇속을 챙기는 어른들의 우정 안에서도 분명히 조금 더 나아가는, 깊은 우정은 존재할 터다. 드라마는 그 우정에 대해 조명한다.
사람에게는 타인에게 쉬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만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른이 될수록 더욱 그 특성이 짙어진다. 나를 다 꺼내 오픈하는 것이 관계를 해치거나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계속해서 터득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 비밀 저장고는 더 깊고 클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극 중에서 춘희는 타인에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과거를 가진 사람으로 나온다. 어려운 가정환경, 의료사고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이익을 위해 선택한 결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몰래 불법 의료행위를 벌였던 행적들. 춘희는 어두운 면을 감추고 사람들이 ‘좋아할’ 모습을 보이며 악착같이 살아왔다. 그러나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것들이 타의에 의해 낱낱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그녀의 곁에 있던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 저 여자 정말 최악이네. 상종하지 말자.
2. 잘못은 했지만 나는 저 여자의 진심을 알아. 이해해보고 싶어.
춘희를 둘러싼 아이 엄마들의 대부분이 1번의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게 어른들의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다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라는 게 있으니 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2번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게 바로 춘희에게는 은표였다. 세간이 뭐라고 떠들건, 나에게 보여준 그 사람의 진심만을 헤아리려고 하는 마음. 그런 은표의 마음은 나를 절절하게 했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좀처럼 쌓기 힘든 우정이기에.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정이 아닐까.
좋은 것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따뜻하고 평화롭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흠집 내지 않는다. 시댁 욕은 나눌 수 있지만 아픈 가정사는 나눌 수 없다. 보통의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모두 이런 우정을 유지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춘희와 은표 같은 우정으로 넘어가는 관계들도 때때로 생긴다. 당신의 어두운 면을 알지만 당신이 나를 좋아해 주는 마음이 좋아서 이어가는 마음. 완벽하거나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르게 이해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정이 아닐까.
물론 그런 우정을 발굴하기란 현실에서 쉽지 않다. 나에게도 10여 년 이상이 된 오랜 친구들 말고는 거의 모두가 피상적인 관계들이다. 적당히 감추고 좋은 것만 나누는 관계.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른의 세계가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그런 우정들 속에서 가끔은 피 튀기며 싸우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춘희와 은표처럼, 비 온 뒤에 더욱 단단해진 그런 우정을 느껴보고 싶다.
결국 <그린 마더스 클럽>의 메시지는, ‘어른들도 때때로 목적 없이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목적 없이 내 곁에 있을 친구, 내 모든 것을 알아도 떠나가지 않을 친구가 몇인지 헤아려본다. 단 한 명만 있다고 해도, 진정한 성공이리라.
JTBC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 스틸컷
글쓰는 우두미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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