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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7-21 21:37:43

자기 세계를 빚어가는 사람에게

영화 <비밀의 언덕> 리뷰

DIRECTOR. 이지은

CAST. 문승아, 임선우, 장선, 강길우, 장재희 외

SYNOPSIS.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에요"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5학년 소녀 ‘명은’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하는, 그 시절 나만 아는 이 여름 우리가 꺼내 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


POINT. 

✔️ 유년기를 담은 성장영화로 한국 영화 계보에 길이 남을 사랑스러운 수작 

✔️ 주인공 명은을 맡은 문승아 배우부터 엄마아빠의 장선/강길우 배우, 선생님 임선우 배우... 세상의 톤을 말갛고 자연스럽게 영화에 투영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나 훌륭합니다

✔️ 들꽃영화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부일영화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과 각본상을 쓸어담은 이지은 감독의 다음 또한 너무나 기대됩니다. 어떤 장르의 어떤 작품으로든 멋지게 뻗어나갈 수 있을 힘!

✔️ 자기 이야기로 자기 세상을 쌓아 올린,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영화입니다. 조 마치, 빨간머리 앤, 주디 애버트, 마틸다, 레이디 버드... 그리고 명은이!

 

명은이에게.

 

명은아. 그거 알아? 수전 손택이라는 작가가 있어. 미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엄청난 작가거든.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그냥 사진만 봐도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야. 이런 사람은 위대하게 타고나는 걸까 싶을 만큼 카리스마가 넘쳐. 근데 그 작가가 뭐랬게. "일기에서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한다"라고 했대. 그토록 위대한 작가조차, 사실 '보여지는 내 모습'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거야. 책에서 그 얘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좀 웃었어. 이렇게 멋진 말을 잔뜩 하고, 현실 세계에 대해 자기 해석을 거침없이 내놓은 작가도... 사람이구나 싶어서.

 

네 이야기를 보고 나는 너에게 꼭 수전 손택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어마어마한 작가도, 오늘 하루 멀쩡한 어른처럼 사회 생활을 끝내고 집에 온 나도 (이 점은 너희 선생님도 같지), 너도... 다 그래. 발돋움을 해서라도 더 좋은 자신이 되고 싶어서, 내 이야기를 척척 쌓아 올려 내 세상을 빚어가는 사람들은 다 그래.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이야.

 

 

너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알아. 어린 시절부터 늘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왔어. <작은 아씨들>의 조, <빨간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마틸다>, 몇 년 전에는 <레이디 버드>도 만났고... 그리고 너를 만났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내가 너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정보다 감탄이 더 많이 섞였는데, 그건 네 어마어마한 결단력과 실행력 때문이야.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더 예쁜 선물을 드리고 싶고, 학교에서 배운 이상적인 내용을 잘 갖추고 살고 싶고,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도 보내고 싶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을 자꾸 깨닫게 만드는 엄마아빠의 말들이 싫게만 느껴지고, 그런 자신이 비참해 보여서 감추고 싶고... 그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많지만, 거기서 너처럼 결단력 있게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거든.

 

 

근데 있잖아, 명은아. 크면 알게 된다. 젓갈이 얼마나 비싸고 좋은 음식인지도, (네가 젓갈 버릴 때 나 눈물이 났다...) 마냥 게을러 보였던 아빠가 나름대로 너희 남매의 등하교 패턴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도, 가족들이 서로에 대해서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 역할 분담 안에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이었다는 것도.

 

근데 사실 너도 이미 조금 알지? 할아버지와 삼촌의 대화도 다 들었잖아. 누구에게나 장점도 단점도 있다는 걸, 그리고 삶은 결코 방학 숙제로 그린 원형 계획표대로 쳇바퀴 구르듯 굴러갈 수만은 없다는 걸. 살아가다 문득 삶이 갑자기 너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네 계획이 다 무력해지는 순간을 한 번은 맞닥뜨리겠지. 그때 비로소 빛이 날 거야.

 

 

엄마의 억척스러움, 아빠의 빤들빤들함... 네가 싫어했던 그런 면면들이 언제나 지켜준 일상의 씨실과 날실이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는 날도 거야. 엄마아빠가 만들어준 씨실과 날실 위로, 네가 부지런히 코를 뜬 일상이, 그렇게 쌓아온 것들이 너를 지켜주는 날이 올 거야.

 

거기서 시간이 더 흐르면 네 시각이 달라질 거야. 서로 달라 티격태격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을 조금 이해할 있는 날이 오고, 그런 엄마아빠 모습이 문득 귀여워 보이는 날이 오고, 그러다 눈물 나게 그리워지는 날도 오겠지.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브러쉬 업 라이프>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알게 된 건데 말이야. 그 정도 나이일 때 누구나 한 번쯤 자기 가족이 싫어지기도 하나 봐. 어쩌면 호르몬 아닐까. 오래 전 인류는 십대 중반쯤이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했을 테니까. 가족을 사랑하고 싶고 착한 아이가 되고 싶고 잘 하고 싶은데, 엄마아빠가 날 위해 애써주는 걸 너무 잘 아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불편한 날들이 쌓이는 건, 어쩌면 그 시절의 불가항력일 수도 있어.

 

시간이 지나면 또 달라질 테니까. 지금은 그냥 너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 너만 그런 게 아니라, 나만 그랬던 게 아니라, 네 친구들도, 내 친구들도, 네 눈이 너무 눈부셔 보이는 사람들, 부족함 없이 당당해 보이는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그런 시기를 겪게 되나봐. 그러니까 우리 내일부터는 우리를, 또 주변을 조금 더 너그럽게 볼 수 있게 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또 하루 열심히 잘 살아가 보자. 

 

 

물론 매일 어렵겠지. 어떨 땐 솔직한 게 유리하고, 또 어떨 땐 솔직이 능사도 아니야. 고마움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숨기는 게 방법일 때도 있는 것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솔직함이 무기처럼 쓰이는 것처럼. 갈팡질팡하다 보면 내 마음을 전혀 돌보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르기도 하고, 가족을 배려하지 못한 채 할퀴는 말이 툭 나올 때도 있어. 우리는 그렇게 갈지자로 휘청휘청거리면서 균형을 잡을 듯 말 듯 살아가겠지. 그건 말로 포착되기 정말 오묘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던 너처럼.

 

앞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휘청거릴 거야. 실수도 하고 상처도 낼 거야. 더 좋은 자신이 되고 싶어서 까치발을 들지만, 누구도 평생 까치발을 든 채 살아갈 순 없다는 걸 깨닫고 눈물로 무너지는 날도 있지.

 

그래도 괜찮아. 시간을 따라 부지런히 걷다 보면 그런 날들은 어느새 저기 멀리 모자이크화의 한 조각처럼 작아져 보일 거거든. 그렇게 언덕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그 언덕이 꽤나 완만하고 다정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멀리서 볼 땐 너무 높아 보였던 언덕이더라도.

 

 

그리고 명은아. 헤맨 만큼 땅이 되는 거래. 네가 오르내린 언덕은 네 거야.

 

너 자신에 대해 거침없이 쓸 수 있었던, 자신감으로 빛나던 네 얼굴. 거기서 보였던 맑은 기쁨이 어떤 감각인지 나도 알고 있어.

 

나는 길들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렀고, 그렇게 너를 만났어. 너는 길에서 무얼 만날까?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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