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8-14 20:14:04
[JIMFF 데일리] 처음 그리고 계속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리뷰
처음 그리고 계속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리뷰
감독] 권하정, 김아현
출연] 권하정, 김아현, 구은하, 이승윤
시놉시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 최종 우승자이자 "장르가 30호"라는 수식어로 불리며 일약 스타가 된 이승윤이 유명인이 되기 직전, 우린 무명이었던 그를 찾아갔다. 우연한 기회로 그의 노래를 듣고 팬이 된 우리는 2년 뒤 무작정 그를 찾아가 뮤직비디오를 찍어주겠다고 했다. 뮤직비디오는 한 번도 찍어본 적 없는 무명인들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시작으로 우리들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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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예능을 좋아한다. 무대를 준비하는 가수들의 고생이 너무 느껴져서 미안할 정도지만, 아무튼 좋아한다. ‘무명 가수’들의 이름을 가리고 진행되었던 경연 프로그램 ‘싱어게인’도 열심히 봤다. 모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가수 이승윤의 우승 후, 이전에 그가 남긴 말들이 인상깊다는 말을 듣고 과거의 라디오를 찾아 들어보았다. 이루지 못했으면서 애초에 꿈꾸지 않은 척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올해 사활을 걸고 뭐든 할 것이라는 말을 미래에서 듣는 기분이 묘했다. 그가 사활을 건 결과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기에.
당시 내게 아무런 성장이 없는 듯해 괴로웠던 때였기에, 라디오를 듣고 일기를 썼다. 내 글이 읽히면 좋겠다고. 글쓰기를 자기만족만으로 한다는 건 내게, 사실 이루지 못했으면서 꿈꾸지도 않은 척하는 거짓말이라고. 지치지 않으면서, 즐겁게,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자고 일기장에 썼다. 그리고 지금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데일리에 글을 쓰고 있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지만, 아직 나는 지치지 않았고 또 행복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처음: 안녕 난 무명성 지구인이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힘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더없이 진솔하게 담았기 때문이다. 이 다큐멘터리가 촬영되던 시점을 기준으로 미래인 지금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무명실로 뭔갈 기워 가는데 그게 무언진 나도 잘 모르겠어” 노래했던 이는 ‘유명’ 가수가 되었고, 이 다큐멘터리는 다양한 영화제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했다는 것을. 그러나 카메라가 돌아가던 그때의 이들에게는 미지의 일이다.
이들은 아직 모든 게 처음이다. 영화를 전공하고 뮤직비디오라는 낯선 세계에 성큼 뛰어든 것도, 정성스러운 작업물을 받고 뮤직비디오 촬영을 협업하는 것도.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처음이라는 점에 기가 죽어 우려하기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더 적극적으로 일한다. 전문가들이 연신 말하는 ‘No’를 들어도, 코로나바이러스로 발이 묶여도, 어떡하지 싶은 순간에도 계속해서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이들은 서로가 다 처음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힘을 얻는다. 시작했고, 하고 있다는 자체로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이 된다. 각자의 처음을 나란히 어깨동무처럼 걸치고 더 힘이 되어주는 마음이다. 모두가 그런 마음이었기에, 이들이 ‘듣보인간’이든 ‘무명성 지구인’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툰 시작을 불안해하는 모든 이들이 참고할 법한, 다정하고 안전한 자세다.
계속: 힘든 길은 같이 올라가자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점은 뮤직비디오를 준비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협업이다. 옷을 입어보거나 비대면 회의 중에 오물오물 뭔가를 먹는 등 사소한 일상에서도 재미있는 것을 숨 쉬듯 발굴해 내고, 둥근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음식을 먹고,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신뢰하며, 의견을 경청한다. 자신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 때나, 마음이 복잡할 때, 부끄러울 때조차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털어놓은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여 주면서도 서로 다정한 말을 쌓아 올려준다.
‘영웅 수집가’라는 강렬한 곡을 데모 버전으로 받아 밑그림을 그리면서, 농담처럼 “이렇게 데모 받았는데, 나중에 어쿠스틱 돼 있고…” 하며 웃는 모습은 이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최종 완성본이 아니기에 다른 느낌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데모 버전 노래처럼, 이들이 하는 일 자체가 오락가락한다. 커졌다 작아졌다, 뚜렷했다 희미했다 반복하는 구불구불한 언덕길이지만 이들은 밝은 에너지로 웃으며 올라간다. “오르기 힘든 길은 같이 올라가자!” 외치면서. 설령 그 뒤에서 우황청심환을 먹거나 26시간째 깨어 있을지라도.
이들의 노력은 두 편의 뮤직비디오와 한 편의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열매를 맺었지만, 설령 열심히 한 프로젝트가 중간에 엎어졌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우리가 이들의 다른 열매를 만나볼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미 죽어버린 노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눈물이 났던 것 같”다던 이승윤의 노래가 우리 곁에 흐르고 있듯, 이들의 프로젝트 또한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찾아왔을 것이다. 꼭 세상의 성공이 기준일 필요는 없지만, 서로 다독이고 격려하고 신뢰를 주고받으며 ‘으쌰으쌰’ 애쓰는 이들이라면, 이런 사랑스러운 협업은 자랑스러운 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평생 이렇게 살래
열심 있게 시작해서 뚝심 있게 계속해 가도, 어느 선 이상으로 가면 지칠 수밖에 없다. 지쳤지만 일에 계속 몰두해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얼굴은 마치 아수라 백작처럼 일의 기쁨과 슬픔이 반반씩 묻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상태로 시장을 뒤져 소품을 준비하고, 몰드에 석고를 떠서 직접 소품을 만들고, 세트장을 조금씩 세워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승모근까지 뻐근하게 아파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들은 짜증이나 투정이 아닌 미소와 함께 말한다. “평생 이렇게 살래!” 비록 “하루 3~4시간씩 자면서 이렇게 일하는 거 되게 힘들다”는 말이 바로 딱 돌아오지만, 평생 이렇게 살겠다고 툭 내뱉은 권하정 감독의 얼굴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는 피로와 행복이 물씬 느껴졌다.
창작하는 마음은 결국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깊이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마음 끝에서 손을 움직일 때, 결과물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다. 처음 이승윤이라는 가수에게 제안을 보내기 위해 ‘무명성 지구인’ 뮤직비디오를 가내 수공업으로 만들면서, 스마트폰을 끼운 삼각대를 드르륵 밀며 어설픈 달리 인, 달리 아웃을 하던 이들이 이제는 뮤직비디오 현장에서, 제대로 레일을 깔고 달리 인, 달리 아웃을 하며 이승윤을 직접 찍은 것처럼. 아주 멀어 보이는 것들도 그렇게 한 걸음에서 시작되고, 그 한 걸음은 언제나 “평생 이렇게 살”아도 좋겠다는 깊은 애정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애정에는 전염성이 있다. 묵묵히 사랑해온 음악에 사활을 걸었던 이승윤의 음악이 두 감독에게 또 수많은 사람에게 전해진 것처럼. 두 감독의 영화가 수많은 사람에게 ‘처음’ 그리고 ‘계속’의 감각을 일깨워준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두 감독을 응원하게 되는 한편, 나도 무언가 시작하고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솟는 것처럼.
두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과 만나면서 “계속해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다. 그 “계속”이라는 말이 내 마음에도 와 박혔다. 두 감독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관객으로서 앞으로도 그들을 더 만나고 싶다. 더 이상 ‘듣보인간’이 아닌 이들의 또 다른 생존신고가 언젠가 유리병 편지처럼 동동 찾아오는 날을 기대해 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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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가족] 끝장리뷰 | 재규(장동건)와 자동차 사고 상징 | 결말해석 | 악의 기원 | 가족의 맨살
[보통의 가족](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재규(장동건)와 자동차 사고
Chapter 2 부모 - 자식, 악의 기원
00:00 보통의 가족
01:29 장동건 집중
03:17 자동차 사고
06:06 부모와 자식
07:16 악의 기원
09:46 별점 및 한 줄 평
10:02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의가족 #보통의가족영화 #보통의가족해석 #보통의가족리뷰 #영화보통의가족 #허진호감독 #장동건 #설경구 #김희애 #수현 #보통의가족후기 #보통의가족결말 #ANormalFamilymovie #ANormalFamily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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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주 최신 개봉영화(캔디맨, 나의흑역사 로맨티카, 로빈의 소원, 아하 테이크 온미, 종착역)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캔디맨 #나의흑역사로맨티카 #로빈의소원 #아하테이크온미 #종착역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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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굴뚝마을의 푸펠> 메인 예고편
새까만 연기로 뒤덮인 굴뚝마을에서는
1.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 것
2.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 것
3. 함부로 믿지 말 것
별의 존재를 믿고 있는 외톨이 ‘루비치'와
쓰레기에서 태어난 ‘푸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세상의 진실을 찾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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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리 홀리데이> 메인 예고편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 놓은 재즈의 초상 '빌리 홀리데이' 무대 위에선 모두의 박수를 받는 '레이디 데이' 였지만 무대 아래에선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끝없이 시달렸다. 도망칠 곳 없이 어둠으로 내몰린 삶 속에서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노래,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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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가 있진 않지만 일단 다 준비했어
<범죄도시 4>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물 형사 마석도(마동석)다. 수사 중인 마석도. 마약 유통업자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팀과 노력하고 있다. 딱 봐도 이상해보이는 남자를 쫓는 마석도. 열심히 달리니 도착한 곳은 어떤 건물의 옥상이다. 문을 열고 유통업자들의 본거지에 도착한다. 문이 철창으로 되어 있었다. 철창을 부수는 마석도. 악한들을 때려눕히고 나서 범죄자들이 쓰던 휴대전화를 관찰했다. 그 휴대전화에는 범죄자들이 마약을 유통하는 방식에 대한 힌트가 있었다. 어플을 개발해서 마약을 판매하던 업자들을 잡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동시에 마석도에겐 과제가 있었다. 어느 날 발견된 시체가 있는데 그 피해자의 어머니와 했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석도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마석도가 나쁜 놈들을 싹 쓸어버린다!
가장 처음으로 써볼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경찰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 고된 노고로 치안에 힘쓰는 경찰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좀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아니 ‘범죄도시’ 시리즈는 그냥 마동석이 나쁜 놈 때려잡는 게 전부 아니었어? 물론 맞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첫 번째 영화 <범죄도시> 1편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나고 나서 올라오는 자막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의 기억 상으로는 ‘모든 한국 경찰들을 응원합니다’였다. 실제로 <범죄도시> 1편은 경찰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전일만(최귀화)나 강홍석(하준)의 서사를 이야기 전면에 배치시켜서 캐릭터 무비로서 장점을 추가했다. 경찰이 우리 일상에서 푸근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편 <범죄도시 4>는 이 1편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오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기본, 그러니까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시리즈 1편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기존 시리즈의 계승과 그 변주를 통한 쾌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글쓴이는 이 부분, 그러니까 ‘계승과 변주’에 대해 써볼 것이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써볼 것. 이 영화의 사실상 진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장이수(박지환)의 존재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획의도와 닿아있는 인물이다. 코미디라는 장르적인 특색과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 캐릭터가 장이수다. 그 과제가 뭘까? 바로 관객의 관점에서 경찰의 노고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아예 낯선 캐릭터들이 많았던 <범죄도시 3>의 쿠키영상에 등장한 장이수. 이 장이수는 1편과 2편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4편에 다시 나타났다. 이 시리즈 중 4편 중 3편에 등장한 캐릭터는 마석도 제외 장이수가 유일하다. 이 특징은 곧 장이수가 우리들에게 친근한 캐릭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친근함을 바탕으로 영화는 인물의 시점에서 여러 장면들을 비춘다. 이 연출의 의도는 중후반부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 마석도가 장이수를 데려온 것 치고 둘은 따로 논다. 오롯이 장이수만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근거는 장이수가 플롯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글쓴이는 장이수가 이야기 내적으로 이 역할에 100% 걸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장이수의 설정이 본작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원래 경찰이 꿈'이나 '도박업체를 운영한 적 있다'라는 점을 4편이 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제시한다. 심지어 이 인물의 행보를 보면 마석도가 데려온 것 치고 주인공과 따로 논다. 하지만 이 장이수는 명예경찰이 되어 악당들을 소통하는데 기여하는 행보를 보여준다. 마석도와의 캐미보다 이 검거 과정을 감독이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의 화룡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이수의 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찰들 목숨 내놓고 사네!”다. 이 대사는 일반인이 경찰이 되어 겪은 경찰들의 노고를 관객에게 떠먹여 준다는 점에서 이 인물의 기획의도를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이 장이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변주를 둔 캐릭터에 속하는데, 바로 서울지방경찰청(권일융)의 등장이다. 이 캐릭터가 등장한 배경이 아주 흥미롭다. 마석도와 장태수(이범수)가 둘의 상사(정인기)를 만나 설득한다. 이번엔 1,2,3편과는 다르게 실패한다. 일단 이 상황 자체가 변주인데 그것이 한번 더 일어난다. 우리가 아는 실제 경찰이 영화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 자체도(권일융 교수의 발연기 때문이 아니라;) 변주지만 이 인물의 입에 나오는 대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이 범인을 잡는 시기가 예상보다 늦을 수 있다”는 말과 “경찰은 이런 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경찰청장. 글쓴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 경찰청장의 캐스팅이다. 그냥 모르는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런 대사를 해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굳이 권일융이라는 프로파일러를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영화 밖에서 찾을 수 있다. 권일융 프로파일러는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다. 이 인물이 대중매체에 자주 노출됐기 때문에 이 사람의 권위를 우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인물이 굳이 영화에 들어와 경찰청장을 연기한다. 그럼 당연히 경찰로서의 권위가 영화 안에서 맥락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현실과 영화 밖을 흐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방식은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느냐에도 근거가 있다. 마석도 역할을 맡은 마동석 배우는 현재 명예경찰 경위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에 힘입어 경찰청에서 명예직을 수여한 것이다. 이 마동석 배우가 ‘범죄도시’ 시리즈를 찍을 때 마석도를 연기하지 않나? 그럼 명예경찰인 배우가 경찰을 연기한다는 삼중 구조의 상황이 연출된다. 글쓴이는 이것을 경찰과 배우의 중간단계라고 생각한다. 이 마동석 배우를 기준으로 실제 경찰인 사람(권일융 교수)과 직업이 배우인 사람(정인기 배우)이 한 컷에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경찰이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연출은 곧 “영화라는 틀(배우)을 넘어 경찰 베테랑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문단을 종합하면 ‘경찰 베테랑의 입을 통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윗문단에 쓴 장이수의 활용법과 겹쳐지는 점이 있다. 인물의 활용이 현실의 관객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영화의 어떻게? 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에 있어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지수(이주빈)다. 이 ‘범죄도시’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어렵다. 이 시리즈는 마석도의 핵펀치로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 아닌가? 하지만 이 장점은 반대측면에서 단점으로 돌아온다. 여성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마 마석도와 여성 캐릭터가 맞대결을 펼치기엔 블랙 위도우정도는 돼야 싸움이 가능하다.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 특징은 치명적이라 영화가 다른 노선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단점과도 이어진다. 성별이 영화 밖의 맥락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자그마한 요소 하나로 이야기의 결은 아예 달라질 수 있다. 그럼 시리즈 중 하나의 배경에 여성 경찰이 등장할만한 일을 깔면 되지 않을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이 과제에 대한 답으로 사이버 범죄를 선택했다고 본다. 사이버 범죄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내지는 면대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물리력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다. 그럼 한지수가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한지수는 강남수(김신비)라는 부사수와 함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 이 필연에 근거한 캐릭터 한지수는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초반부에 마석도가 한지수에게 “방검복 입혀!”라고 말하자 그녀가 이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을 필두로 인물이 마냥 끌려가지는 않는 연출인 것과 동시에 직접적인 액션은 없이 인물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 영화의 악당들에 대한 부분도 영리하게 변화구를 둔 지점이 있다. 여러분은 권사장(현봉식) 캐릭터를 어떻게 봤는가? 글쓴이는 이 영화가 기존의 시리즈와 다르게 1대 다수의 구도를 만들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선택의 일환이 권사장이라고 느꼈다. 이 영화가 기존에 유지했던 1대 1 혹은 1대 2의 구도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 1대 3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권 사장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것의 첫 번째 근거로 물리적 비중을 이야기할 수 있다. 권사장이 사전에 광고된 바와는 다르게 물리적 비중도 크고 장동철(이동휘) 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영화가 중간에 광고된 것 그 자체라면 장동철이 판을 이끄는 흑막으로서 극을 이끌 것 같지만 백창기(김무열)의 곁에서 사건을 지휘하는 일은 권사장이 맡았다. 이 단적인 사실만 놓고 봐도 이 영화의 빌런은 2명이 아니라 3명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 안에서 이 빌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도 이 영화를 설명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전작 <범죄도시 3>을 생각해 보자. 리키(아오이 무네타카)와 주성철(이준혁)은 시시건건 대립한다. 그러다가 플롯이 하나로 정돈되며 마석도와 리키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지는데 길다면 길다고 볼 수 있는 액션 신을 통해 ‘외국인’과 ‘검객’ 빌런의 개성을 나름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권사장 역시 본작 <범죄도시 4>에서 3편에서 리키가 받은 대우를 오마주 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바로 마석도와의 대결 장면이 있는 것이다. 이 대결이 주먹 세 방에서 끝나서 그렇지 이 영화의 핵심인 ‘마석도와의 맞대결’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빌런으로 둔 변화구는 후반부 마석도와 백창기의 맞대결에서도 볼 수 있는 변주다. 백창기의 옆에 조력자로 나오는 캐릭터가 마석도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빌런의 물리적인 수를 통해서도 변화를 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윗문단에 적은 걸 보충하고 싶다. 이 영화는 현재 경찰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변주하고 또 계승한 것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계승과 변주는 하이라이트 액션이다. 원래 범죄도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액션은 합을 길게 주고받는다. <범죄도시 3>에서 주성철과 마석도는 넓은 경찰청 안의 방과 방을 움직이며 온갖 구조물을 부수고 다닌다. 본작에서도 비행기 안에서 공간을 바꾸는 액션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글쓴이는 마석도가 1,2,3편처럼 종합기술로 백창기를 제압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몇 대 더 때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왜? 연속기로 백창기를 두들겨 패면 그 전의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 그전 상황이 뭐게? 바로 백창기가 뛰어난 무력으로 마석도의 몸에 칼을 꽂는 장면이다. 또 2대 1의 구도를 맷집으로 버티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또 여기에 대사 한 줄을 더 추가한다. "외롭지"라는 대사다. 액션 신의 두 상황과 대사 한 줄을 덧붙이면 경찰 마석도가 직업인으로서 겪는 애환을 보여주는 셈이다. 혼자라서 알아주지도 않지만 위험한 일을 감수하는 경찰로서의 삶을 단면으로 잘라 보여준 것이다. 이 단면을 보고 느끼는 것. 혹시 이 전 장면에 마석도의 헌신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까? 조성재와 관련한 감정선이 영화에서 중요하기는 하다. 인물의 동기가 되니까. 하지만 전작처럼 그냥 나쁜 놈이니까 두들겨 패고 잡아넣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부상당하고 노력하는 마석도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납작하다 못해 평평한 마석도라는 캐릭터에 입체성에 부여해서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 선택이 됐다.
물론 영화는 이 '경찰의 헌신'이라는 소재를 마석도에만 국한 짓지는 않았다. 김만재(김민재)가 백창기와 대결을 펼치는 장면, 양종수(이지훈)의 팀이 필리핀에서 악당들을 체포하는 장면은 경찰들이 직업인으로서 '열일'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엔딩도 이 직업인으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마석도와 한태수가 팀을 이끌고 조성재 모녀를 추모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교통경찰이고, 그 인물은 장이수에게 "Police 지 Folice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영화의 마무리를 경찰로 끝내고 그 마저도 영단어의 스펠링을 보여주고 끝낸다는 건 분명히 이 장면을 강세를 두고 말하고 싶다는 의미겠지? 심지어 오프닝에서 경찰이 습격당해 죽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통일성까지 생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의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 그리고 그 자체를 강조했다는 것이 이 <범죄도시 4>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역설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따라오는 수많은 단점들은 이 선택에 따라 딸려오는 것들이었다. 글쓴이는 장이수의 등장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장점으로 언급한 부분은 반대로 돌아와 이 영화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 씬, 그러니까 필리핀 경찰이 "넌 왜 머리가 길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굳이 필요했을까? 더 나아가 FDA를 보고 장이수는 왜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았던 걸까? "마 형사"라고 대놓고 언급하는 장면을 겪고 나서도 마석도는 왜 장이수와 협업하지? 갑자기 틈입하는 '원래 꿈이 경찰'이라는 설정이 굳이 필요했을까? 이 설정이 인물의 동기에 있어 중요하기는 하지만 마석도가 다른 말로 설득했다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권일융 프로파일러가 경찰청장으로 나온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지 않은 관객을 세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서 그 장면은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어떤 장면은 특정 영화의 전체적인 퀄리티를 헤치기도 한다.
사이버 범죄라는 선택지를 골라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도 약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다. 글쓴이가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본 장면은 장이수와 합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한지수는 이주빈 배우의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여기서 하나 더 덧붙인다. 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것 같았지만 마석도가 "뻥이야"라면서 불필요한 대사를 친다. 이 두 장면은 여성 캐릭터를 고전적으로 사용했다는 점/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점에서 연출 의도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전자가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하더라도 한지수가 주체적인 모습이 없으니 여성 캐릭터가 그냥 존재만 하고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 캐릭터가 사이버 범죄 전문가라는 설정이 빛을 발하지도 않는다. 한지수가 뭔가를 하는 건 그 하는 것 자체만 보여주지 그 디테일은 장이수가 채우니 내실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점의 표면, 그러니까 '사이버 범죄'라는 기본적인 배경은 영화의 핵심과는 멀어 보인다. 물리적인 범죄가 아니다 보니 치밀한 수싸움을 기대하는 관객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은 우리가 아는 범죄도시 시리즈 그 맛이다. 이 무의미한 설정은 본 작의 코미디 요소와도 이어지는 단점인데 글쓴이는 '클라우드 동기화'같은 이상한 개그를 왜 들어야 하나 싶었다.
빌런으로 1 vs 다수의 구도를 설정한 것도 깊게 파면 단점이 많다. 가령 김무열 배우가 맡은 백창기만 봐도 그렇다. 김무열 배우가 굉장히 뛰어난 배우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백창기 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잘 안다. 특히 하이라이트 신에서 허허허허허 웃는 장면은 굉장했다. 하지만 이 연기력에 비해 물리적인 비중이 부족했다. 단지 돈 받고 말고 가 인물의 동기다. 1편의 장첸, 2편의 강해상과는 다른 행보다. 1편의 장첸은 동기를 예측할 수 없어서 무서운 놈이었고 2편의 강해상은 동기 같은 게 없어서 악함이 드러나는 빌런이었다. 그런데 본 작의 백창기는 그냥 사람 죽이고 건물 부수는 게 전부다. 심지어 중간에 굉장히 의아한 선택을 보여준다. 청소부 아주머니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글쓴이는 당연히 아주머니와 김만재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대중성을 선택하며 두 사람이 죽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 이 사건이 빌런의 악함을 대놓고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사람을 공격해야 후반부에 카타르시스를 더하는 것 아닐까? 단지 허허허허 웃는 게 빌런의 악함을 드러내는 방식인 걸까? 왜 이런 연출이 들어갈까 생각해 봤다. 왜?를 거세하고 그냥 현상 그 자체만 담기 위해 이런 각본이 들어간 게 아닐까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빌런으로 권사장을 등장시키는 선택지엔 사실 큰 위험부담이 있다. 장동철 캐릭터가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인물이 초반에 이야기를 이끌고 퇴장한 다음 후반부에 권사장이 이끄는 플롯에 쾌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장동철의 역할을 있는 최소화 시킨다. 이 최소화는 이야기의 흐름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장동철이 백창기가 사람을 언제든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대비를 부실하게 한다는 점이나 권사장과 백창기의 내통 가능성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의 얄팍함이다. 이 얄팍함이 단지 시리즈의 전통만 계승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경찰의 헌신'을 보여주는 방식의 문제다. 이 영화의 흐름은 전부 다 말이 된다. '왜?'를 철저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플롯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기획의도가 '실제의 경찰'에게 바친다는 점에서 두 특성은 상호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경찰서에 구금해 있는 범죄자를 수많은 배달원에 가려 죽게 놔둔다는 설정은 명백한 무리수다. 이것만 있을까? 갑자기 업체를 순식간에 후다닥 만들어진다는 설정, 특수경찰이라는 소재까지 영화는 생경한 것들로 가득 차 내내 삐끄덕거린다. 이런 설정들이 말이 아예 안되게 연출되는 것은 아니라 그냥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건 그냥 단지 이야기만의 문제지 현실로 끌고 오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지엽적인 이야기 흐름은 영화가 전체적으로 삐걱거린다는 점에 있어 치명적이다. 영화가 지나치게 대중성만 고려했다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메시지의 측면을 쭉 썼지만 사실 이 영화의 액션은 굉장히 훌륭한 편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석도의 액션이 아니라 백창기의 것이다. 이야기 중반에 건물 하나를 철거하며 보여주는 나이프 파이팅, 김만재와의 대결 같은 것들은 <아저씨>의 차태식(원빈)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액션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몸값을 톡톡하게 해낸다.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사운드와 촬영을 잡은 영화의 내실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액션이 아닌 나머지 부분에서 영화는 기술적인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중 최고는 편집이다. 이 편집은 영화의 두 번째 단점으로서 허명행 감독의 경험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가령 "뻥이야"같은 장면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길게 뺄 필요가 있을까? 어디 장면에서 어느 게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하지 못한 채로 그냥 무작정 이야기만 전개하려니까 완급조절에 실패한 것 아닐까?
글쓴이는 이 <범죄도시 4>가 이번에도 천만 관객을 넘길거라 생각한다. 단점을 적긴 했지만 나의 총평은 '재밌었다'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시리즈의 경고음을 울리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리즈의 매력을 재가공하는 것이 아닌 표면적인 것만 좇는, 지엽적인 영화의 태도가 아쉬움처럼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장점에도 불구하고 상기한 단점 때문에 5편에서 더 본질적인 변화를 두지 않는다면 지겹다고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시리즈의 최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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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처럼 되고 싶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것!
[들어가기 전에]
2024년 10월 10일, 제124회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은 한강 작가다.(짝짝짝!) 저절로 국뽕이 차오르는 이 소식은 수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예상을 깬 선정이었기에 놀라움이 더 크다. 온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베스트셀러 상위권에는 작가의 책이 이름을 올렸고, 11일 오전 유명 서점 기준 13만 부가 팔려나갔다. 미국 아마존도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서적 가운데 1,2, 4, 8위가 모두 한강 작품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 국가적 큰 기쁨과 흐름에 편승하고 싶어 한강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채식주의자> 리뷰를 올린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이 있어 조금 다듬고 추가했다. 아쉽게도 현재 OTT, VOD에서는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곧 OTT, VOD 플랫폼에 서비스되거나 재개봉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시 CGV아트하우스에서 <채식주의자>를 특별 상영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영혜(채민서)는 악몽을 꾼다. 그리고 채식을 결심한다.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한다. 그녀의 낯선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도 마찬가지다. 참지 못한 아버지(기주봉)는 억지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참지 못한 영혜는 칼로 손목을 긋는다. 이후 언니 지혜(김여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영혜. 한편, 지혜의 남편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민호(김현성)는 아내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는다. 슬럼프에 빠진 터라 새로운 영감을 찾던 민호는 아내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고민 끝에 그는 영혜에게 누드모델을 제안한다.
<채식주의자>는 하루아침에 채식을 결심한 한 여성이 남성주의 사회에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뒤로한 채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린다. 그녀의 채식 계기인 꿈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그 실마리를 전한다. 약하면 강자에게 고기로 먹힌다는 약육강식의 말처럼,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강압에 시달리며, 마치 강자에게 먹힌 고기처럼 살아온 셈이다. 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한 그녀는 육식 자체가 자신의 살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채식주의자를 선언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혜가 가진 거부감은 아버지, 남편 등 남자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
외관상으로 봐도 주변 사람들과 결이 다른 영혜는 순수성을 갖고 있다. 이는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으로 잘 나타나는데, 폭력으로 물든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로서 민호의 눈에는 영혜의 순수성이 보였을 터. 나무가 되고 싶은 그녀의 몸에 보디 페인팅을 하고, 비디오 작업을 통해 이를 담아내려 한다.
순수한 예술로서 그녀를 대하는 듯하지만, 민호의 행위는 영혜의 아버지가 행한 폭력과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민호는 욕망으로 가득차고, 형부와 처제사이라는 금기까지 넘어선다. 이처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명목아래 폭력을 눈감아주던 사회의 잔재는 멋진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목적아래 또 다른 폭력으로 전이된다. 이후 영혜는 이후 친언니의 돌봄을 받지만, 또 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영혜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들의 탐욕도 보인다.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려는 그녀는 곧 자연인 셈. 오로지 자신의 목적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녀를 착취하는 이들은 결국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원작인 한강의 동명 작품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감독은 이중 영혜와 민호의 이야기가 중심인 ‘몽고반점’을 다른 단편들 보다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온몸에 꽃을 그린 영혜와 예술이 아닌 욕망이 몸을 지배하며 그녀의 몸을 탐하는 민호의 모습은 글보다 영상 구현이 더 잘 맞아 보인다. 감독도 이런 강점을 알고 있다는 듯 비주얼 부분에 신경 썼고, 채민서는 감량, 김현성은 증량을 통해 각각 식물적, 동물적 느낌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오랫동안 빛을 발하지 못한다. 최대한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대화 지문과 상황 연출에 공을 들였지만, 캐릭터의 이미지를 너무 부각한 나머지 각 인물의 심리 묘사와 감정선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영혜는 앙상한 뼈마디와 온몸에 그려진 꽃의 이미지로 그녀의 심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역부족. 후반부 죽음보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열망도 온전히 와 닿지는 않는다. 후반부 금기를 넘어선 관계는 다소 선정적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강해 구성적으로 밀도가 높았던 원작의 팬으로서는 아쉬운 지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무가 되어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지혜처럼, 관객 또한 말라가는 영혜를 바라볼 뿐이다. 결국 인물과 이야기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완성도란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태생적으로 원작이 갖진 난해함과 비주류성의 늪에 빠진 듯한 느낌이다. 다만 원작을 읽은 이들이 상상 속으로 그려냈던 작품 속 이미지를 가시적으로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사진 제공: 스폰지
평점: 2.5 / 5.0
한줄평: 한강 작가의 텍스트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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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내 안에서 영화의 개념화는 서양, 특히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시절 영화를 제대로 전공해보자고 결심한 이후 처음 수강한 강의가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영화들로 모든 역사적 자취를 설명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했는지, 하다 못해 아시아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수업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가 설명되는 방식이 으레 그랬으며,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정보는 알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를 주제로 한 발표와 그 외 국가들에 대한 발표는 분량부터 차이가 났다. 유수한 영화제라 불리우는 국제영화제들은 모두 일부 국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영화를 더욱 넓고 깊게 소비하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 또한 변함 없이 몇 국가의 작품들과 그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다양한 국가영화를 접하고 싶던 차에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감독이 여성 주연들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눈이 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을 멀리서나마 접해왔기에 영화로 만나는 인도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지 하루 빨리 알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겐 해결되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
미리 말해두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성영화는 아니다.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주거공간을 꾸려 나가거나, 기혼/미혼/비혼 여성들의 각 가치관들이 모여 건강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관람하고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주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내에 만연한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뿌리 박힌 것들에 맞서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 여성'들에게 동일시되어야 조금 더 잘 보이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섬세한 작품임은 명확하다.
* 뭄바이를 느낄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
극의 첫 장면은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겪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들이 짧게 풀어낸다. 그리고 배경은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밤을 그대로 담아낸 샷들이 나온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가운데 수많은 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자동차 전조등, 조명, 기차 혹은 지하철이 뿜는 빛. 고스란히 빛을 받는 사람들은 어쩐지 지쳐보인다. 이렇다 할 주인공 없이 도시 그 자체를 담으며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흡사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복잡한 도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베트남 하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하노이에서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언어를 공부하며 영상도 제작하고자 했던, 도시를 마음껏 즐기다 떠나면 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문득 외로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도로의 소음, 즐비해 있는 길고 얇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도시의 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샷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성들의 사소한 일상 또한 상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초반부가 다큐멘터리 같았다면, 중반부는 실험영화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프라바'와 '아누'의 일상이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함께 독특한 편집으로 표현된다. 하루종일 좁디 좁은 사무실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아누'가 종종 나누는 문자 텍스트가 자막으로 화면에 보이는 호흡은 여느 극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힙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장난기 서린 음악이 본능적인 호감을 자아냈다. '아누'가 단독으로 나오는 사무실 몽타주는 아주 귀엽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는 주로 밤으로 표현되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바닷가 마을로 모인 세 주인공의 시간들은 대부분 낮으로 구성된다. 어둠에 잡아먹힌 도시와 달리 한적한 바닷가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주인공이 모인 장면에서는 ㅡ 알게 모르게 쌓아 두었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린 채 ㅡ 새까만 하늘과 밤바다 속에 별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비로소 그들의 주변 환경을 이루던 모든 빛이 한 데 만난 것이다.
다만, 극영화로서의 힘은 약하다. 각 등장인물의 서사는 미약하며, 접점은 모호하다. 현재진행형의 일상을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남편을 기억하는 '프라바'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누', 일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집이라고 인정 받지 못하는 '파르바티'. 각 사건들의 앞뒤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만큼 그들의 감정선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플롯 자체는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명확한 대사보다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탑승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수작이라고 판단했을 거 같다.
***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극중 '빅 클로즈업' 샷이 자주 사용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특히 얼굴, 그리고 얼굴 중에서도 눈 주위를 중심으로 샷을 잡는다. 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의 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눈은 항상 빛이 있다. 주인공 자체가 빛이기에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도 자연스럽게 빛이 옮기는 건지, 눈이 향하는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그대로 담아냈을 뿐인지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빛은 어둠이 있기에 인식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나자신 혹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빛 그 자체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이 바라보는 인도, 여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드러낼 줄 알고 그들의 우정이 존재하는 한, 그곳은 애써 빛을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희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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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광반조 혹은 부활의 서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를 죽인 후, TVA에 돌아온 '로키(톰 히들스턴). 갑작스럽게 생긴 타임슬립 능력 때문에 고생하는 와중에 로키는 TVA가 위기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시간선이 무한대로 증폭하기 시작한 나머지 시간 직조기가 파괴되기 직전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모든 우주가 붕괴할 테니까.
이에 '모비우스'(오언 윌슨), TVA 가이드북의 저자 '우로보로스/OB'(키호이콴)와 함께 시간 직조기를 고치기 시작한 로키. 그는 '렌슬레이어'(구구 음바타로)의 방해를 뚫고 계속 존재하는 자의 변종 '빅터 타임리'(조너선 메이저스)를 찾아내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실패를 맛본 로키는 마침내 깨닫는다. 운명의 딜레마 속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됐음을.
<로키 2>, MCU 드라마의 최고점
<완다비전>부터 <로키 2>까지 총 9편. MCU가 디즈니+에서 선보인 드라마 숫자다. 사실 MCU 드라마는 양에 비해 질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부속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메인 스테이지라면, 드라마는 사전 작업에 가까웠다. 실제로 <완다비전>은 <닥터 스트레인지 2>를, <팔콘과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4>와 <썬더볼츠>를, <미즈 마블>과 <시크릿 인베이젼>은 <더 마블스>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자연히 여러 설정을 설명하느라 바빠서 주인공 이야기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로키>만 해도 멀티버스 설정을 알리느라 바빠서 로키의 분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로키의 변종 중 하나인 실비와 나눠야 했으니. <변호사 쉬헐크> 역시 헐크와 데어데블에 밀려서 정작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선후배 케미가 돋보인 <호크아이>에서도 바튼보다는 케이트 비숍에게 비중이 쏠렸다.
따라서 <로키 2>에게는 과제 두 개가 있었다. MCU 드라마로서 독립적인 완결성을 증명해야 했다. 로키의 단독 작품으로서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해 달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로키 2>는 해냈다. 2011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로키의 성장 서사를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감동적으로 매듭지었다. 다만 물음표도 여전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처럼 <로키 2>도 MCU의 구원자라는 확신만큼은 주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로키를 사랑한 이유
2011년 <토르: 천둥의 신>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로 로키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MCU 빌런이었다. 본래 <토르: 다크 월드>에서 죽어야 했지만, 사전 시사회에서 관객이 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되살려야 했을 정도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도 죽음을 잔인하게 연출하고 몇 차례에 걸쳐 죽었다고 언급한 후에야 관객들은 그의 사망을 수용했다.
관객은 신의 결핍에 공감했다. 그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토르 주위에 친구가 가득한 것을 질투하고, 냉소하며, 비웃는 거만하고 까칠한 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외로웠다. 자기 종족이 아닌 이들 사이에서 길러졌고, 아버지에게서 버려졌으며,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따른 어머니가 죽는 발단을 초래했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토르가 자기를 동생으로 인정하길 바랐고, 기꺼이 형의 오른팔이 되었다.
동시에 로키는 자유의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패배자라는 운명을 이기려는 욕구로 가득했기에 그는 괴로웠다. 아스가르드의 두 번째 왕자이기에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2인자의 설움. 어떻게 해도 잘난 형 토르를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의 회한. 장난의 신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길 수 없는 운명을 수용했다. 세상을 재창조하며 신 노릇을 하려는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물론 로키는 토르 트릴로지, <어벤져스>, 그리고 <인피니티 워>를 통해 자기 약점과 결점을 모두 극복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드라마 <로키>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재등장한 2012년도 로키를 활용해 그 시절 팬들이 사랑했던 로키를 재소환해 두 번째 기회를 줬다. 자유의지를 발휘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그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장난의 신, 마침내 영광을 맛보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고, 시간 직조기는 폭증하는 시간선을 버티지 못하며, 모든 시간대가 파괴될 상황. 페이즈 1부터 혼자였고, 항상 자유를 갈망한 로키는 이제 딜레마에 직면한다. 겉으로는 우주와 TVA를 지키려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노력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실비의 지적대로 로키는 또다시 혼자가 되기 싫었다. 모비우스를 비롯한 TVA 동료가 본래 시간선에서 자기를 잊고 살아갈 때 외롭게 남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녀를 죽이면 신성한 시간선과 TVA를 모두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다른 모든 시간선의 붕괴도 지켜볼 수 없다. 함께 사라질 모든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래서 그는 타협점을 찾는다. 빅터 타임리를 찾아내 시간 직조기 수리를 맡기고, OB의 지식을 모두 전수받아 새 장치를 만든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로키는 결심한다.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변종을 죽이고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 모든 존재의 자유의지를 지켜주기로. 계속 존재하는 자의 역할을 대신해서 모든 시간대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기로. 언제나 자기를 괴롭힌 자유의지에 몸을 맡겨 자기 결핍을 채워내기로.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쓰기로.
그렇게 로키는 신성한 시간선과 멀티버스의 종말을 막았다. 비록 혼자 남았지만, 친구와 애인은 지켰다. 장난의 신이 아니라 이야기의 신이 되어 항상 떠들던 '영광스러운 목적'도 이뤘다. <어벤져스>에서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아 평화적인 질서를 이루겠다던 로키는 모든 이의 자유를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그렇게 13년에 걸친 그의 성장은 끝났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만나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적인 마무리다.
멀티버스 사가에 뿌리내리다
<로키 2>는 로키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도 위기의 MCU에 새로운 나무를 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영리하게 활용한 신화적인 모티브의 함의가 의미심장하다. 모든 시간선을 손에 쥔 채 왕좌에 앉은 로키. 수많은 시간선이 그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나무 같다. 북유럽 신화 속 우주의 중심에서 모든 세계를 연결하는 '위그드라실'을 닮았다.
위그드라실 덕분에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 이후 갈피를 못 잡던 MCU는 비로소 안정감을 갖는다. 위그드라실과 신성한 시간선의 차이 덕분에 비로소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 신성한 시간선은 직선적이다. 멀티버스 전쟁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모든 시간대(branch)의 자유의지를 파괴한 결과다. 위그드라실은 다르다.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branch)에는 각 우주의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 덕분에 MCU는 비로소 멀티버스 사가의 큰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앤트맨 3> 속 사건이 짧게나마 언급되듯이 로키가 살려두고 보호하는 자유의지로 인해 멀티버스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전쟁에서 로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로키 2>는 곱절로 감동적이다.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여태 흔들리던 세계관에 단단한 뿌리를 잡아주니까.
회광반조, 아니면 부활의 서막
다만 <로키 2>도 극복 못한 한계가 있다. 우선 결말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평균적인 완성도는 높지 않다. 특히 3화까지는 흡입력이 약하다. 빅터 타임리를 찾고 TVA를 구하려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이 대목의 전개가 다소 느슨하기 때문. 또 20세기 런던이나 시카고 박람회 정도를 제외하면 시즌 1과 달리 공간적 배경이 TVA와 시간 직조기 통제실로 한정적이다. 자연히 타임슬립의 재미가 떨어진다. 이를 만회할 액션씬도 부족하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MCU는 페이즈 4부터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인피니티 사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멀티버스 사가를 안착시킬 수 있는가?" 여태 답은 '아니요'였다.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모두 길을 잃었다. 스파이더맨도 기존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 그나마 성공적이었지만, 인피니티 사가의 에필로그에 가까웠다.
<로키 2>도 마찬가지다. 물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인피니티 사가에서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 중 하나를 빌려온 작품이기도 하다. <가오갤 3>처럼 인피니티 사가의 또 다른 에필로그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로키 2>가 멀티버스 사가의 회광반조일지, 아니면 부활의 서막일지는 아직 물음표다. <가오갤 3>의 다음 주자가 <더 마블스>인 걸 고려하면 더더욱.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자유 의지로 완성한 영광스러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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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과 낭만의 공생
도쿄에서 북쪽으로 150km 가면 오제 국립공원이 있다고 한다. 산에 둘러싸인 습지인데,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나무 널판으로 좁은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계절이 유독 선명한 곳, 그래서 다채로운 생태계를 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겨울이 오면 장설이 인간의 접근을 막는 곳이다. 다시 봄이 오면 관광객들은 꽃이나 새, 작은 동물들을 구경하며 습지를 걸어 오제 깊이 들어가고, 별빛 날리는 밤을 그곳의 산장에서 보낸다.
산장에 필요한 식자재와 짐을 나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봇카라 부른다. 영화 <행복의 속도>는 그 봇카들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남들은 여행지로 방문하는, 그들 눈에는 더없이 낭만적으로 보일 공간. 거기 사는 이들의 어깨에 오롯이 내려앉은 현실의 무게. 그러니까 그런 영화일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삶을 생각하게 하는, 내 어깨에 얹힌 것들의 은유로 그 짐을 보게 하는. 고개를 숙이고 팔을 모으고 마치 생각하는 사람처럼, 어쩌면 고행자나 수도승처럼 걸어가는 이들이 고스란히 묻어난 포스터를 보면 더욱 그럴 것 같았다.
그러나 슴슴한 맛을 기대하고 들어선 영화관에서 깊은 감칠맛을 주는 건 역시나 독립 다큐의 묘미다. <행복의 속도>는 더없이 매력적인 인물들의 손으로 삶의 본질을 가리킨다. 삶의 본질, 이렇게나 무거운 단어를 저렇게나 담백하고 담담하게.
70kg가 넘는 짐을 묵묵히 인력으로 나르는 봇카. '미래에 사라질 직업 10'에 그들이 꼽히지 않은 이유는 단지 10위권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마이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다소 중세적인, 잘 쳐줘도 근대 이후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직업이다. 언제부턴가 육체의 유희는 칭송할지언정 육체의 노동은 경시하다 못해 멸시하기 시작한 현대 사회에서 봇카는 분명 환하게 빛나기보다 초라하게 평가되기 쉬운 직업이다. 심지어 그나마도 겨울이 오면 못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검박한 삶은 아름답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이자 경력이 20년도 더 된 베테랑 봇카 이가라시 부부는 오래 전의 풍속화에 가져다 놔도 그렇게 살았을 것 같은 필치로 연신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 모습은 자연스럽다 못해 초연하다. 짐을 나르고, 무를 씻고, 콩을 심고, 식탁을 차리고, 아이의 웃음을 제때 바라보며 함께 걷는 것. 인간에게는 자연의 사이클이 필요하다.
삶의 고민은 영화에 담긴 이상으로 이들을 덮쳐 오겠지만, 이들의 대화는 무해하다 못해 말갛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흰밥과 가재미와 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꽃이 피고 지는 속도를 바라보고, 번데기의 안위를 궁금해하고, 별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눈을 꼭 감고 숫자를 세며 눈을 어둠에 적응시키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친다. 일상에 놓치기 너무 쉬운 것들을 이들은 자연스럽게 손에 쥐고 있다. 스스로 모를 수도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오제의 나무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은,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왜 나는 이러고 있지?'라는 질문을 한 번쯤 품어본 모든 이들의 삶과 닮았다.
그 길을 묵묵히 가는 건 어렵다. 현실은 늘 우리를 옥죈다. 그러나 그 길을 가지 않겠다는 선택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이가라시 부부는 그걸 알고 있는 듯하다. 스스로 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자연스럽게. 영화는 그 자리를 정확히 포착한다. 고요한 전원생활로 신격화하지도, 팍팍한 일상생활로 거칠게 담지도 않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두 사람의 초연함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그가 아들과 나누는 대화는 우격다짐으로 교훈을 주려는 일방적 흐름이 아니라, 두 인격체 사이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서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지 않는, 손을 뻗어 해하려 하지 않는 것. 어쩌면 오제라는 곳 자체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모래를 덮어 습지를 메우고 휘황찬란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대신, 겨울 눈과 바람을 전신으로 막아내느라 조금씩 낡아 가는 산장과 나무 길을 묵묵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다른 한 축, 이시타카 부부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현대사회 가까이에 있다. 이시타카는 봇카라는 직업을 조직하고, 현대화하고, 홍보하려고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이가라시처럼 초연하지도 못하고, 술잔을 내밀며 봇카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처럼 '속세'에 속하지도 못했다. 아이는 계속 자랄 텐데, 4대 보험이 되는 것도 아닌데...로 시작되는 다양한 걱정의 말을 들으면 얼굴에 먹구름이 낀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 봇카의 길을 묵묵히 간다. 과거는 잃어버린 것 같고 미래에는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라면 이런 이시타카와 비슷한 길 위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이가라시처럼 초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아주 혼자도 아니다. 눈이 덮여 길이 보이지 않는 어느 날, 습지로 들어간 후배가 돌아올 길뿐 아니라 발 디딜 때의 마음까지 헤아려 삽으로 눈을 툭툭 치워 길을 밝혀주는 선배. 앞날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런 선배도 있으니, 따라 하면서 나아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당당하게 반문하는 후배. '아빠가 쉬는 자리'라고 하니 '아빠와 아저씨들이 쉬는 자리'라고 힘주어 정정하는 아이. 누구나 1인분의 짐을 지고 각자의 길을 갈 뿐이지만, 꽃과 바람과 새만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각자의 방법대로 그 직업 본연의 역할에 애정을 갖고, 그 삶을 계속 살아가기를 담담하게 선택하고 있다는 점만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어떤 영화감독과 어떤 사무직 직장인의 공통점일 수도, 어떤 중학생과 어떤 뮤지션의 공통점일 수도, 어떤 운동선수와 어떤 주부의 공통점일 수도 있다. 요컨대 각자 다른 색깔과 채도로 빛나는 우리는, 남들의 삶에서 보이는 어떤 면을 안정이라 믿으며 이따금 부러워하는 우리는, 괴롭게 발버둥 치는 것으로 우리의 평형을 유지한다. 남들은 그 모습을 안정이라 부른다.
예전에 <고양이 집사>라는 영화를 보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고양이 나만 없어'를 외치며 고양이를 예뻐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지만, 자기 옆의 한 마리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들에게는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일 수 있다. 밖에서 보기엔 '남들 다 고양이 좋아하니까...' 싶어 손이 넉넉해 보이지만, 언제나 돕는 손, 쌓는 손, 지키는 손은 가까이에서 보면 다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 사실에 충격받지 않고 그냥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결국 한 마리 고양이를 지키는 일은 그의 몫이 된다.
그때 나는 좀 울컥했다. '고양이' 정도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할 만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오만하게 또 쉽게도 하던 즈음이었다. 나는 '고양이'가 아닌 그 어떤 것, 굳이 따지자면 이구아나의 발톱이나 타란툴라 거미의 털끝 정도라고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저렇게 온 세상이 좋아하는 곳에서는 풍요롭겠지. 따스하겠지. 남의 세상은 다 그래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러나 아무리 풍요로워 보이는 곳에서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몰랐다.
모든 일이 그러하다면, 봇카나 독립 다큐멘터리처럼 소위 '마이너'하다고 분류되는 직업의 세계를 걸어가는 이들의 마음도 그러할 것이다. 소설 <GV빌런 고태경>의 한 구절처럼, 정말 "재개발되고 있는 풍경들 사이에서 내가 멸종된 공룡처럼" 느껴지고, "유튜브 브이로그 시대에 두 계절 동안 돈 한 푼 벌 수 없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일을 다 빼앗아갈 것 같은 기계의 굉음 앞에서도 "우리는 우리 일을 하러 가자."라고 말하며 다시 발걸음을 떼는 사람의 마음.
그 끝에 대단한 꿈은 없을지 모른다. 사당오락 칠전팔기 대기만성 인간승리 이런 거 말고. 그렇게 버틴 끝에 끝끝내 뭔가 거대한 걸 이루어 전설처럼 회자될 사람들의 이야기 말고. 이 길 끝에 아무 후일담 남기지 못한다 해도 여전히 오늘 이 길을 걸어갈 보통의 우리들의 방향. 낭만의 바다에서 서핑을 할 수도, 일상의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할 수도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들의 속력. 소소한 일상에서 낭만을 찾고, 그 작은 낭만에서 힘을 얻어 일상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속도. 어쩌면 그것을 행복의 속도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 속도로 걷다 보면 일상과 낭만은 등 맞댄 반대말이 아니라 손 잡고 발맞추어 공생하는 짝임을 깨닫게 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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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의 침묵은 피해의 고발이 되어,
과거의 과오는 현재의 과실로, 가해의 침묵은 피해의 고발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한다. 평범한 대화인 듯 싶더니 점차 실랑이로 번진다. 앞뒤맥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혼란한 상황을 대변하는 듯한 카메라 워킹이 이어진다. 우리가 보고 있는 화면은 흐리지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명확하게 귀에 꽂힌다.
<케이 넘버>는 첫 장면부터 이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요약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이야기들이 어떤 장벽을 넘고자 하는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정보를 제공하여 돕는다. 대화의 주체는 '해외 입양인'과 '어느 기관의 직원'이다. 해외 입양을 갔던 사람이 자신에 대한 공적인 서류를 요구하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며 각종 변명을 댄다. 일처리가 수월하지 않다. 왜? 여느 국가들보다 공공기관과 빠른 일처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왜 우리 국민이었던 사람들을 적대시할까? 여기서부터 관객의 입장은 시작된다.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를 성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입양갔던 사람들에게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흔히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들 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 그들은 근본적인 부분부터 침해당하고 있었다. 이제서야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닿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온 소식은 처절한 고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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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erage of Korean
평범한 한국인들은 입양에 대해 알고 있나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어떻게 생각해? 영화에 등장하는 해외 입양인이 문득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자 ‘배냇(해외 입양인을 돕는 사회적협동조합)’ 활동가는 ‘평범한 한국인’이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해외 입양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 나와 같은 사람들. 사실 나는 해외 입양에 대해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다. 평소 여러가지 사건에 대해 파악하는 걸 좋아해서,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채널을 즐겨본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해외 입양인이 오랜 시간이 지나 본인의 친부모님을 찾고 싶어 관련 서류를 받아보러 한국에 들어와 여러 기관을 돌아다녀보지만 그들은 서류를 공개하지 않고 여러가지 변명을 대며 불친절하게 대응하다가 급기야 문을 열어주지 않고 없는 척 했다. 창문에 움직임이 얼핏 보이는데도 없는 척 하던 그들의 전화 너머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해외 입양인들의 ‘일부’가 향수로 인해 생부모를 찾는데 기관에서 협조도 안 해주고 인수인계도 제대로 안 하는구나, 싶은 얄팍한 감상 뿐이었다. 그들은 단순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적, 세계적 인신매매 희생자였음을 <케이 넘버>를 통해 비로소 알게된 것이다.
*케이 넘버 : 부랑자 청소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이름이 아닌 숫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코드처럼 해외 입양인들에게도 정체 모를 코드가 있다. 코드란, 이름을 불러줄 가치가 없으며 대량의 인물을 편리하게 다루기 위해 사용되고는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가 체계가 바로 잡히기 전, 혼란했던 시기에 그 어린 아이들에게 ‘케이 넘버’가 붙여졌다. 심지어 중간에 번호를 매기는 기준이 바뀌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던 사건, ‘형제복지원’에 대한 이야기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올림픽 시즌과 맞물려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감금, 폭행 등을 자행했던 부랑자 청소와 같은 개념으로 해외 입양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형제복지원에 아동방이 있었고, 아이들에게 입양 감사편지를 쓰게 만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이 비워지고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오는 목격담을 보아 입양센터와 연계가 있었음이 자명하다. 실제로 당시 해외 입양을 보내는 카테고리가 3가지 있었고, 그중 하나가 고아였다. 고아를 만들기 위해서 서류를 만들어내고, 머리 수 대로 돈이 떨어졌고, 한 명을 해외로 보내게 되면 당시 돈으로도 3천만원이, 기관의 한 직원의 연봉을 지급해줄 수 있는 자본이 마련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해외 입양'은 한국이 세계에 준 선물이다. 근본부터 잘못된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 해외 입양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어 그대로 해외에서 차용하기까지 이르렀다. 국가 차원의 이해관계가 어린 아이들을 빌미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교류가 활발했던 국가들 중 스웨덴과 덴마크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든 없든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국민이 있다면 그들에게 키울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줘야 했다. 그래서 한국의 입양아들을 원했다. 입양아들에 대한 수요는 계속되고 심지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아이에 대해 사랑을 줄 수 있는 구조도 구축되어 있지 않고, 미혼모에게는 모든 처벌을 내리는 사회 속에서 잘못된 처벌의 영향이 무고한 아이들에게 도달했다.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되는 박해와 차별을 온몸으로 받게 된 것이다.
*사과하라
올림픽 시즌과 맞물려 한국의 세계적인 위상이 낮아질 수 있다는 공식 문건이 제시된다. 화면에 나오는 해외 입양인 수를 합산하는 도표는 비공식 입양아까지 합쳐지며 숫자가 끝없이 올라간다. 우리가 감히 셀 수 없을 해외 입양인들은 항상 친부모들을 향한 레이더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보며 '혹시 생모가 살아 있을까?' '저 사람이 내 엄마아빠는 아닐까?' '혹시 저 노숙자처럼 살아가는 건 아닐까?' 불필요한 상상을 그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부모를 알아가야 하는 목표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해외로 매매되었던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아 돌아오고 있다. 한국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가서 돌아오지 않아야 할 존재이니까. 이후의 리액션은 예상에도 없었으니까. 이제 우리나라가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해외 입양인들이 당한 일들을 가늠해보면, 그들이 원하는 대응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행해졌던 불법 인신매매에 대한 인정, 현재까지 이어지는 서류 왜곡에 대한 개선, 친부모님 혹은 형제자매를 만나볼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한 마디를 강하게 내뱉었다. "사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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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은 분들, 혹은 영화를 보고난 분들은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열악한 환경에서 본인의 뿌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지? GV에서 같은 질문이 나왔으며 감독님, ‘배냇’ 대표님, 교수님은 각 입장에서 다양한 답변을 주셨지만 그 맥락은 같았다. ‘관심’이 필요하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갈수록 잔혹한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어떤 사건은 판도를 뒤흔들기도 하고 또 다른 사건은 아예 묻히기도 한다. 그 차이는 대중이 관심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내주느냐가 관건이다. 사건에 직접 개입되어 있는 분들은 우리, 대중, 관객들이 보이는 움직임에 힘입어 해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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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가족] 끝장리뷰 | 재규(장동건)와 자동차 사고 상징 | 결말해석 | 악의 기원 | 가족의 맨살
[보통의 가족](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재규(장동건)와 자동차 사고
Chapter 2 부모 - 자식, 악의 기원
00:00 보통의 가족
01:29 장동건 집중
03:17 자동차 사고
06:06 부모와 자식
07:16 악의 기원
09:46 별점 및 한 줄 평
10:02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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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주 최신 개봉영화(캔디맨, 나의흑역사 로맨티카, 로빈의 소원, 아하 테이크 온미, 종착역)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4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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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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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굴뚝마을의 푸펠> 메인 예고편
새까만 연기로 뒤덮인 굴뚝마을에서는
1. 하늘을 올려다보지 말 것
2.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말 것
3. 함부로 믿지 말 것
별의 존재를 믿고 있는 외톨이 ‘루비치'와
쓰레기에서 태어난 ‘푸펠'
친구가 된 두 사람이
세상의 진실을 찾는 거대한 모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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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리 홀리데이> 메인 예고편
팝 보컬의 예술을 영원히 바꿔 놓은 재즈의 초상 '빌리 홀리데이' 무대 위에선 모두의 박수를 받는 '레이디 데이' 였지만 무대 아래에선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끝없이 시달렸다. 도망칠 곳 없이 어둠으로 내몰린 삶 속에서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노래,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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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가 있진 않지만 일단 다 준비했어
<범죄도시 4>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물 형사 마석도(마동석)다. 수사 중인 마석도. 마약 유통업자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팀과 노력하고 있다. 딱 봐도 이상해보이는 남자를 쫓는 마석도. 열심히 달리니 도착한 곳은 어떤 건물의 옥상이다. 문을 열고 유통업자들의 본거지에 도착한다. 문이 철창으로 되어 있었다. 철창을 부수는 마석도. 악한들을 때려눕히고 나서 범죄자들이 쓰던 휴대전화를 관찰했다. 그 휴대전화에는 범죄자들이 마약을 유통하는 방식에 대한 힌트가 있었다. 어플을 개발해서 마약을 판매하던 업자들을 잡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동시에 마석도에겐 과제가 있었다. 어느 날 발견된 시체가 있는데 그 피해자의 어머니와 했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석도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마석도가 나쁜 놈들을 싹 쓸어버린다!
가장 처음으로 써볼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경찰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 고된 노고로 치안에 힘쓰는 경찰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좀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아니 ‘범죄도시’ 시리즈는 그냥 마동석이 나쁜 놈 때려잡는 게 전부 아니었어? 물론 맞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첫 번째 영화 <범죄도시> 1편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나고 나서 올라오는 자막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의 기억 상으로는 ‘모든 한국 경찰들을 응원합니다’였다. 실제로 <범죄도시> 1편은 경찰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전일만(최귀화)나 강홍석(하준)의 서사를 이야기 전면에 배치시켜서 캐릭터 무비로서 장점을 추가했다. 경찰이 우리 일상에서 푸근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편 <범죄도시 4>는 이 1편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오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기본, 그러니까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시리즈 1편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기존 시리즈의 계승과 그 변주를 통한 쾌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글쓴이는 이 부분, 그러니까 ‘계승과 변주’에 대해 써볼 것이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써볼 것. 이 영화의 사실상 진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장이수(박지환)의 존재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획의도와 닿아있는 인물이다. 코미디라는 장르적인 특색과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 캐릭터가 장이수다. 그 과제가 뭘까? 바로 관객의 관점에서 경찰의 노고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아예 낯선 캐릭터들이 많았던 <범죄도시 3>의 쿠키영상에 등장한 장이수. 이 장이수는 1편과 2편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4편에 다시 나타났다. 이 시리즈 중 4편 중 3편에 등장한 캐릭터는 마석도 제외 장이수가 유일하다. 이 특징은 곧 장이수가 우리들에게 친근한 캐릭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친근함을 바탕으로 영화는 인물의 시점에서 여러 장면들을 비춘다. 이 연출의 의도는 중후반부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 마석도가 장이수를 데려온 것 치고 둘은 따로 논다. 오롯이 장이수만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근거는 장이수가 플롯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글쓴이는 장이수가 이야기 내적으로 이 역할에 100% 걸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장이수의 설정이 본작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원래 경찰이 꿈'이나 '도박업체를 운영한 적 있다'라는 점을 4편이 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제시한다. 심지어 이 인물의 행보를 보면 마석도가 데려온 것 치고 주인공과 따로 논다. 하지만 이 장이수는 명예경찰이 되어 악당들을 소통하는데 기여하는 행보를 보여준다. 마석도와의 캐미보다 이 검거 과정을 감독이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의 화룡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이수의 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찰들 목숨 내놓고 사네!”다. 이 대사는 일반인이 경찰이 되어 겪은 경찰들의 노고를 관객에게 떠먹여 준다는 점에서 이 인물의 기획의도를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이 장이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변주를 둔 캐릭터에 속하는데, 바로 서울지방경찰청(권일융)의 등장이다. 이 캐릭터가 등장한 배경이 아주 흥미롭다. 마석도와 장태수(이범수)가 둘의 상사(정인기)를 만나 설득한다. 이번엔 1,2,3편과는 다르게 실패한다. 일단 이 상황 자체가 변주인데 그것이 한번 더 일어난다. 우리가 아는 실제 경찰이 영화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 자체도(권일융 교수의 발연기 때문이 아니라;) 변주지만 이 인물의 입에 나오는 대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이 범인을 잡는 시기가 예상보다 늦을 수 있다”는 말과 “경찰은 이런 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경찰청장. 글쓴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 경찰청장의 캐스팅이다. 그냥 모르는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런 대사를 해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굳이 권일융이라는 프로파일러를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영화 밖에서 찾을 수 있다. 권일융 프로파일러는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다. 이 인물이 대중매체에 자주 노출됐기 때문에 이 사람의 권위를 우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인물이 굳이 영화에 들어와 경찰청장을 연기한다. 그럼 당연히 경찰로서의 권위가 영화 안에서 맥락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현실과 영화 밖을 흐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방식은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느냐에도 근거가 있다. 마석도 역할을 맡은 마동석 배우는 현재 명예경찰 경위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에 힘입어 경찰청에서 명예직을 수여한 것이다. 이 마동석 배우가 ‘범죄도시’ 시리즈를 찍을 때 마석도를 연기하지 않나? 그럼 명예경찰인 배우가 경찰을 연기한다는 삼중 구조의 상황이 연출된다. 글쓴이는 이것을 경찰과 배우의 중간단계라고 생각한다. 이 마동석 배우를 기준으로 실제 경찰인 사람(권일융 교수)과 직업이 배우인 사람(정인기 배우)이 한 컷에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경찰이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연출은 곧 “영화라는 틀(배우)을 넘어 경찰 베테랑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문단을 종합하면 ‘경찰 베테랑의 입을 통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윗문단에 쓴 장이수의 활용법과 겹쳐지는 점이 있다. 인물의 활용이 현실의 관객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영화의 어떻게? 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에 있어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지수(이주빈)다. 이 ‘범죄도시’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어렵다. 이 시리즈는 마석도의 핵펀치로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 아닌가? 하지만 이 장점은 반대측면에서 단점으로 돌아온다. 여성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마 마석도와 여성 캐릭터가 맞대결을 펼치기엔 블랙 위도우정도는 돼야 싸움이 가능하다.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 특징은 치명적이라 영화가 다른 노선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단점과도 이어진다. 성별이 영화 밖의 맥락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자그마한 요소 하나로 이야기의 결은 아예 달라질 수 있다. 그럼 시리즈 중 하나의 배경에 여성 경찰이 등장할만한 일을 깔면 되지 않을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이 과제에 대한 답으로 사이버 범죄를 선택했다고 본다. 사이버 범죄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내지는 면대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물리력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다. 그럼 한지수가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한지수는 강남수(김신비)라는 부사수와 함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 이 필연에 근거한 캐릭터 한지수는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초반부에 마석도가 한지수에게 “방검복 입혀!”라고 말하자 그녀가 이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을 필두로 인물이 마냥 끌려가지는 않는 연출인 것과 동시에 직접적인 액션은 없이 인물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 영화의 악당들에 대한 부분도 영리하게 변화구를 둔 지점이 있다. 여러분은 권사장(현봉식) 캐릭터를 어떻게 봤는가? 글쓴이는 이 영화가 기존의 시리즈와 다르게 1대 다수의 구도를 만들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선택의 일환이 권사장이라고 느꼈다. 이 영화가 기존에 유지했던 1대 1 혹은 1대 2의 구도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 1대 3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권 사장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것의 첫 번째 근거로 물리적 비중을 이야기할 수 있다. 권사장이 사전에 광고된 바와는 다르게 물리적 비중도 크고 장동철(이동휘) 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영화가 중간에 광고된 것 그 자체라면 장동철이 판을 이끄는 흑막으로서 극을 이끌 것 같지만 백창기(김무열)의 곁에서 사건을 지휘하는 일은 권사장이 맡았다. 이 단적인 사실만 놓고 봐도 이 영화의 빌런은 2명이 아니라 3명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 안에서 이 빌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도 이 영화를 설명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전작 <범죄도시 3>을 생각해 보자. 리키(아오이 무네타카)와 주성철(이준혁)은 시시건건 대립한다. 그러다가 플롯이 하나로 정돈되며 마석도와 리키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지는데 길다면 길다고 볼 수 있는 액션 신을 통해 ‘외국인’과 ‘검객’ 빌런의 개성을 나름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권사장 역시 본작 <범죄도시 4>에서 3편에서 리키가 받은 대우를 오마주 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바로 마석도와의 대결 장면이 있는 것이다. 이 대결이 주먹 세 방에서 끝나서 그렇지 이 영화의 핵심인 ‘마석도와의 맞대결’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빌런으로 둔 변화구는 후반부 마석도와 백창기의 맞대결에서도 볼 수 있는 변주다. 백창기의 옆에 조력자로 나오는 캐릭터가 마석도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빌런의 물리적인 수를 통해서도 변화를 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윗문단에 적은 걸 보충하고 싶다. 이 영화는 현재 경찰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변주하고 또 계승한 것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계승과 변주는 하이라이트 액션이다. 원래 범죄도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액션은 합을 길게 주고받는다. <범죄도시 3>에서 주성철과 마석도는 넓은 경찰청 안의 방과 방을 움직이며 온갖 구조물을 부수고 다닌다. 본작에서도 비행기 안에서 공간을 바꾸는 액션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글쓴이는 마석도가 1,2,3편처럼 종합기술로 백창기를 제압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몇 대 더 때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왜? 연속기로 백창기를 두들겨 패면 그 전의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 그전 상황이 뭐게? 바로 백창기가 뛰어난 무력으로 마석도의 몸에 칼을 꽂는 장면이다. 또 2대 1의 구도를 맷집으로 버티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또 여기에 대사 한 줄을 더 추가한다. "외롭지"라는 대사다. 액션 신의 두 상황과 대사 한 줄을 덧붙이면 경찰 마석도가 직업인으로서 겪는 애환을 보여주는 셈이다. 혼자라서 알아주지도 않지만 위험한 일을 감수하는 경찰로서의 삶을 단면으로 잘라 보여준 것이다. 이 단면을 보고 느끼는 것. 혹시 이 전 장면에 마석도의 헌신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까? 조성재와 관련한 감정선이 영화에서 중요하기는 하다. 인물의 동기가 되니까. 하지만 전작처럼 그냥 나쁜 놈이니까 두들겨 패고 잡아넣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부상당하고 노력하는 마석도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납작하다 못해 평평한 마석도라는 캐릭터에 입체성에 부여해서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 선택이 됐다.
물론 영화는 이 '경찰의 헌신'이라는 소재를 마석도에만 국한 짓지는 않았다. 김만재(김민재)가 백창기와 대결을 펼치는 장면, 양종수(이지훈)의 팀이 필리핀에서 악당들을 체포하는 장면은 경찰들이 직업인으로서 '열일'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엔딩도 이 직업인으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마석도와 한태수가 팀을 이끌고 조성재 모녀를 추모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교통경찰이고, 그 인물은 장이수에게 "Police 지 Folice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영화의 마무리를 경찰로 끝내고 그 마저도 영단어의 스펠링을 보여주고 끝낸다는 건 분명히 이 장면을 강세를 두고 말하고 싶다는 의미겠지? 심지어 오프닝에서 경찰이 습격당해 죽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통일성까지 생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의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 그리고 그 자체를 강조했다는 것이 이 <범죄도시 4>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역설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따라오는 수많은 단점들은 이 선택에 따라 딸려오는 것들이었다. 글쓴이는 장이수의 등장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장점으로 언급한 부분은 반대로 돌아와 이 영화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 씬, 그러니까 필리핀 경찰이 "넌 왜 머리가 길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굳이 필요했을까? 더 나아가 FDA를 보고 장이수는 왜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았던 걸까? "마 형사"라고 대놓고 언급하는 장면을 겪고 나서도 마석도는 왜 장이수와 협업하지? 갑자기 틈입하는 '원래 꿈이 경찰'이라는 설정이 굳이 필요했을까? 이 설정이 인물의 동기에 있어 중요하기는 하지만 마석도가 다른 말로 설득했다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권일융 프로파일러가 경찰청장으로 나온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지 않은 관객을 세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서 그 장면은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어떤 장면은 특정 영화의 전체적인 퀄리티를 헤치기도 한다.
사이버 범죄라는 선택지를 골라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도 약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다. 글쓴이가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본 장면은 장이수와 합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한지수는 이주빈 배우의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여기서 하나 더 덧붙인다. 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것 같았지만 마석도가 "뻥이야"라면서 불필요한 대사를 친다. 이 두 장면은 여성 캐릭터를 고전적으로 사용했다는 점/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점에서 연출 의도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전자가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하더라도 한지수가 주체적인 모습이 없으니 여성 캐릭터가 그냥 존재만 하고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 캐릭터가 사이버 범죄 전문가라는 설정이 빛을 발하지도 않는다. 한지수가 뭔가를 하는 건 그 하는 것 자체만 보여주지 그 디테일은 장이수가 채우니 내실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점의 표면, 그러니까 '사이버 범죄'라는 기본적인 배경은 영화의 핵심과는 멀어 보인다. 물리적인 범죄가 아니다 보니 치밀한 수싸움을 기대하는 관객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은 우리가 아는 범죄도시 시리즈 그 맛이다. 이 무의미한 설정은 본 작의 코미디 요소와도 이어지는 단점인데 글쓴이는 '클라우드 동기화'같은 이상한 개그를 왜 들어야 하나 싶었다.
빌런으로 1 vs 다수의 구도를 설정한 것도 깊게 파면 단점이 많다. 가령 김무열 배우가 맡은 백창기만 봐도 그렇다. 김무열 배우가 굉장히 뛰어난 배우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백창기 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잘 안다. 특히 하이라이트 신에서 허허허허허 웃는 장면은 굉장했다. 하지만 이 연기력에 비해 물리적인 비중이 부족했다. 단지 돈 받고 말고 가 인물의 동기다. 1편의 장첸, 2편의 강해상과는 다른 행보다. 1편의 장첸은 동기를 예측할 수 없어서 무서운 놈이었고 2편의 강해상은 동기 같은 게 없어서 악함이 드러나는 빌런이었다. 그런데 본 작의 백창기는 그냥 사람 죽이고 건물 부수는 게 전부다. 심지어 중간에 굉장히 의아한 선택을 보여준다. 청소부 아주머니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글쓴이는 당연히 아주머니와 김만재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대중성을 선택하며 두 사람이 죽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 이 사건이 빌런의 악함을 대놓고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사람을 공격해야 후반부에 카타르시스를 더하는 것 아닐까? 단지 허허허허 웃는 게 빌런의 악함을 드러내는 방식인 걸까? 왜 이런 연출이 들어갈까 생각해 봤다. 왜?를 거세하고 그냥 현상 그 자체만 담기 위해 이런 각본이 들어간 게 아닐까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빌런으로 권사장을 등장시키는 선택지엔 사실 큰 위험부담이 있다. 장동철 캐릭터가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인물이 초반에 이야기를 이끌고 퇴장한 다음 후반부에 권사장이 이끄는 플롯에 쾌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장동철의 역할을 있는 최소화 시킨다. 이 최소화는 이야기의 흐름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장동철이 백창기가 사람을 언제든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대비를 부실하게 한다는 점이나 권사장과 백창기의 내통 가능성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의 얄팍함이다. 이 얄팍함이 단지 시리즈의 전통만 계승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경찰의 헌신'을 보여주는 방식의 문제다. 이 영화의 흐름은 전부 다 말이 된다. '왜?'를 철저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플롯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기획의도가 '실제의 경찰'에게 바친다는 점에서 두 특성은 상호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경찰서에 구금해 있는 범죄자를 수많은 배달원에 가려 죽게 놔둔다는 설정은 명백한 무리수다. 이것만 있을까? 갑자기 업체를 순식간에 후다닥 만들어진다는 설정, 특수경찰이라는 소재까지 영화는 생경한 것들로 가득 차 내내 삐끄덕거린다. 이런 설정들이 말이 아예 안되게 연출되는 것은 아니라 그냥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건 그냥 단지 이야기만의 문제지 현실로 끌고 오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지엽적인 이야기 흐름은 영화가 전체적으로 삐걱거린다는 점에 있어 치명적이다. 영화가 지나치게 대중성만 고려했다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메시지의 측면을 쭉 썼지만 사실 이 영화의 액션은 굉장히 훌륭한 편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석도의 액션이 아니라 백창기의 것이다. 이야기 중반에 건물 하나를 철거하며 보여주는 나이프 파이팅, 김만재와의 대결 같은 것들은 <아저씨>의 차태식(원빈)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액션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몸값을 톡톡하게 해낸다.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사운드와 촬영을 잡은 영화의 내실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액션이 아닌 나머지 부분에서 영화는 기술적인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중 최고는 편집이다. 이 편집은 영화의 두 번째 단점으로서 허명행 감독의 경험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가령 "뻥이야"같은 장면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길게 뺄 필요가 있을까? 어디 장면에서 어느 게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하지 못한 채로 그냥 무작정 이야기만 전개하려니까 완급조절에 실패한 것 아닐까?
글쓴이는 이 <범죄도시 4>가 이번에도 천만 관객을 넘길거라 생각한다. 단점을 적긴 했지만 나의 총평은 '재밌었다'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시리즈의 경고음을 울리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리즈의 매력을 재가공하는 것이 아닌 표면적인 것만 좇는, 지엽적인 영화의 태도가 아쉬움처럼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장점에도 불구하고 상기한 단점 때문에 5편에서 더 본질적인 변화를 두지 않는다면 지겹다고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시리즈의 최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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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처럼 되고 싶은 그녀가 벗어날 수 없는 것!
[들어가기 전에]
2024년 10월 10일, 제124회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은 한강 작가다.(짝짝짝!) 저절로 국뽕이 차오르는 이 소식은 수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예상을 깬 선정이었기에 놀라움이 더 크다. 온 국민이 약속이나 한 듯 베스트셀러 상위권에는 작가의 책이 이름을 올렸고, 11일 오전 유명 서점 기준 13만 부가 팔려나갔다. 미국 아마존도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10위 서적 가운데 1,2, 4, 8위가 모두 한강 작품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처럼, 국가적 큰 기쁨과 흐름에 편승하고 싶어 한강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채식주의자> 리뷰를 올린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썼던 글이 있어 조금 다듬고 추가했다. 아쉽게도 현재 OTT, VOD에서는 이 영화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곧 OTT, VOD 플랫폼에 서비스되거나 재개봉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년 맨부커상 수상 시 CGV아트하우스에서 <채식주의자>를 특별 상영한 바 있다. 다시 한 번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영혜(채민서)는 악몽을 꾼다. 그리고 채식을 결심한다.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남편과의 성관계도 거부한다. 그녀의 낯선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도 마찬가지다. 참지 못한 아버지(기주봉)는 억지로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참지 못한 영혜는 칼로 손목을 긋는다. 이후 언니 지혜(김여진)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영혜. 한편, 지혜의 남편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민호(김현성)는 아내에게서 영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는다. 슬럼프에 빠진 터라 새로운 영감을 찾던 민호는 아내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고민 끝에 그는 영혜에게 누드모델을 제안한다.
<채식주의자>는 하루아침에 채식을 결심한 한 여성이 남성주의 사회에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뒤로한 채 이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그린다. 그녀의 채식 계기인 꿈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그 실마리를 전한다. 약하면 강자에게 고기로 먹힌다는 약육강식의 말처럼,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강압에 시달리며, 마치 강자에게 먹힌 고기처럼 살아온 셈이다. 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한 그녀는 육식 자체가 자신의 살을 뜯어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이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 채식주의자를 선언한 것으로 파악된다. 영혜가 가진 거부감은 아버지, 남편 등 남자들에게 더 크게 나타난다.
외관상으로 봐도 주변 사람들과 결이 다른 영혜는 순수성을 갖고 있다. 이는 엉덩이에 남아있는 몽고반점으로 잘 나타나는데, 폭력으로 물든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가로서 민호의 눈에는 영혜의 순수성이 보였을 터. 나무가 되고 싶은 그녀의 몸에 보디 페인팅을 하고, 비디오 작업을 통해 이를 담아내려 한다.
순수한 예술로서 그녀를 대하는 듯하지만, 민호의 행위는 영혜의 아버지가 행한 폭력과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은 민호는 욕망으로 가득차고, 형부와 처제사이라는 금기까지 넘어선다. 이처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명목아래 폭력을 눈감아주던 사회의 잔재는 멋진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목적아래 또 다른 폭력으로 전이된다. 이후 영혜는 이후 친언니의 돌봄을 받지만, 또 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영혜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가족들의 이야기는 잠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는 한편,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인간들의 탐욕도 보인다. 음식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려는 그녀는 곧 자연인 셈. 오로지 자신의 목적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그녀를 착취하는 이들은 결국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원작인 한강의 동명 작품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감독은 이중 영혜와 민호의 이야기가 중심인 ‘몽고반점’을 다른 단편들 보다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온몸에 꽃을 그린 영혜와 예술이 아닌 욕망이 몸을 지배하며 그녀의 몸을 탐하는 민호의 모습은 글보다 영상 구현이 더 잘 맞아 보인다. 감독도 이런 강점을 알고 있다는 듯 비주얼 부분에 신경 썼고, 채민서는 감량, 김현성은 증량을 통해 각각 식물적, 동물적 느낌을 잘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오랫동안 빛을 발하지 못한다. 최대한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대화 지문과 상황 연출에 공을 들였지만, 캐릭터의 이미지를 너무 부각한 나머지 각 인물의 심리 묘사와 감정선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영혜는 앙상한 뼈마디와 온몸에 그려진 꽃의 이미지로 그녀의 심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역부족. 후반부 죽음보다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녀의 열망도 온전히 와 닿지는 않는다. 후반부 금기를 넘어선 관계는 다소 선정적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경향이 강해 구성적으로 밀도가 높았던 원작의 팬으로서는 아쉬운 지점이다.
영문도 모른 채 나무가 되어가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지혜처럼, 관객 또한 말라가는 영혜를 바라볼 뿐이다. 결국 인물과 이야기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 완성도란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태생적으로 원작이 갖진 난해함과 비주류성의 늪에 빠진 듯한 느낌이다. 다만 원작을 읽은 이들이 상상 속으로 그려냈던 작품 속 이미지를 가시적으로 보고 싶다면, 추천한다.사진 제공: 스폰지
평점: 2.5 / 5.0
한줄평: 한강 작가의 텍스트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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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내 안에서 영화의 개념화는 서양, 특히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 시절 영화를 제대로 전공해보자고 결심한 이후 처음 수강한 강의가 프랑스, 미국, 영국 등의 영화들로 모든 역사적 자취를 설명하는 커리큘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했는지, 하다 못해 아시아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수업을 탓할 수는 없다. 영화가 설명되는 방식이 으레 그랬으며, 눈을 돌려 관심을 가지더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정보는 알기 어려웠다. 서양 국가를 주제로 한 발표와 그 외 국가들에 대한 발표는 분량부터 차이가 났다. 유수한 영화제라 불리우는 국제영화제들은 모두 일부 국가들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그럴 만했다.
영화를 더욱 넓고 깊게 소비하게 되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나 또한 변함 없이 몇 국가의 작품들과 그 방식에만 익숙해져 있었고, 다양한 국가영화를 접하고 싶던 차에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날 수 있었다. 여성감독이 여성 주연들과 함께 연출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눈이 갔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으나 그들의 녹록치 않은 삶을 멀리서나마 접해왔기에 영화로 만나는 인도 여성들은 어떤 모습일지 하루 빨리 알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하는 게 어려워요”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 뭄바이,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에겐 해결되지 않는 사정들이 있다.
그러나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
미리 말해두겠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성영화는 아니다. '세 여자의 우정은 작은 빛을 만든다'라는 문장을 보고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수 있는가? 여성들이 모여서 함께 주거공간을 꾸려 나가거나, 기혼/미혼/비혼 여성들의 각 가치관들이 모여 건강한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본다. 그렇다면 해당 작품을 관람하고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남성과의 연애와 결혼이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주축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 내에 만연한 종교에 따른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뿌리 박힌 것들에 맞서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 여성'들에게 동일시되어야 조금 더 잘 보이는, 하지만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는 섬세한 작품임은 명확하다.
* 뭄바이를 느낄 수 있는 오프닝 시퀀스
극의 첫 장면은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는 듯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뭄바이'라는 도시에 대해서 겪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른 목소리들이 짧게 풀어낸다. 그리고 배경은 분주히 움직이는 도시의 밤을 그대로 담아낸 샷들이 나온다.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가운데 수많은 빛들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자동차 전조등, 조명, 기차 혹은 지하철이 뿜는 빛. 고스란히 빛을 받는 사람들은 어쩐지 지쳐보인다. 이렇다 할 주인공 없이 도시 그 자체를 담으며 꽤 긴 시간동안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는 흡사 다큐멘터리 영화 같기도 하다.
그만큼 도시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복잡한 도로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베트남 하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나는 하노이에서 잠깐 머물렀던 적이 있다. 언어를 공부하며 영상도 제작하고자 했던, 도시를 마음껏 즐기다 떠나면 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도 문득 외로움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버거운 마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지인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느낌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도로의 소음, 즐비해 있는 길고 얇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도시의 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샷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 여성들의 사소한 일상 또한 상세하게 묘사된 덕분에 그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극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 감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초반부가 다큐멘터리 같았다면, 중반부는 실험영화 같은 면모를 보인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프라바'와 '아누'의 일상이 리드미컬한 사운드와 함께 독특한 편집으로 표현된다. 하루종일 좁디 좁은 사무실에서 고객 응대를 하고 있는 '아누'가 종종 나누는 문자 텍스트가 자막으로 화면에 보이는 호흡은 여느 극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힙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직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장난기 서린 음악이 본능적인 호감을 자아냈다. '아누'가 단독으로 나오는 사무실 몽타주는 아주 귀엽고 익살스러운 연기가 매우 돋보인다.
시간을 훔치는 대도시는 주로 밤으로 표현되었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바닷가 마을로 모인 세 주인공의 시간들은 대부분 낮으로 구성된다. 어둠에 잡아먹힌 도시와 달리 한적한 바닷가는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차 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뻗어 나가는 빛줄기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화면에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 세 주인공이 모인 장면에서는 ㅡ 알게 모르게 쌓아 두었던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린 채 ㅡ 새까만 하늘과 밤바다 속에 별과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비로소 그들의 주변 환경을 이루던 모든 빛이 한 데 만난 것이다.
다만, 극영화로서의 힘은 약하다. 각 등장인물의 서사는 미약하며, 접점은 모호하다. 현재진행형의 일상을 제시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연락이 오지 않는 남편을 기억하는 '프라바'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도 숨겨야 하는 '아누', 일평생 살아왔던 공간을 집이라고 인정 받지 못하는 '파르바티'. 각 사건들의 앞뒤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만큼 그들의 감정선에 이입하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플롯 자체는 느리고 차분하게 진행된다. 명확한 대사보다는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비유적 표현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탑승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수작이라고 판단했을 거 같다.
*** 어둠 속 빛을 담는 여성들의 두 눈
극중 '빅 클로즈업' 샷이 자주 사용되는 특징이 눈에 띄었다. 특히 얼굴, 그리고 얼굴 중에서도 눈 주위를 중심으로 샷을 잡는다. 눈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사물의 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눈은 항상 빛이 있다. 주인공 자체가 빛이기에 바라보는 모든 사물들에도 자연스럽게 빛이 옮기는 건지, 눈이 향하는 모든 곳에 빛이 있었고 그대로 담아냈을 뿐인지 알 수 없다. 정확한 건, 빛은 어둠이 있기에 인식될 수 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만, 사실 나자신 혹은 어둠 속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빛 그 자체였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감독이 바라보는 인도, 여성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드러낼 줄 알고 그들의 우정이 존재하는 한, 그곳은 애써 빛을 상상하려 하지 않아도 애초부터 희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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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광반조 혹은 부활의 서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계속 존재하는 자'(조너선 메이저스)를 죽인 후, TVA에 돌아온 '로키(톰 히들스턴). 갑작스럽게 생긴 타임슬립 능력 때문에 고생하는 와중에 로키는 TVA가 위기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시간선이 무한대로 증폭하기 시작한 나머지 시간 직조기가 파괴되기 직전이고, 이를 막지 못하면 모든 우주가 붕괴할 테니까.
이에 '모비우스'(오언 윌슨), TVA 가이드북의 저자 '우로보로스/OB'(키호이콴)와 함께 시간 직조기를 고치기 시작한 로키. 그는 '렌슬레이어'(구구 음바타로)의 방해를 뚫고 계속 존재하는 자의 변종 '빅터 타임리'(조너선 메이저스)를 찾아내며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실패를 맛본 로키는 마침내 깨닫는다. 운명의 딜레마 속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됐음을.
<로키 2>, MCU 드라마의 최고점
<완다비전>부터 <로키 2>까지 총 9편. MCU가 디즈니+에서 선보인 드라마 숫자다. 사실 MCU 드라마는 양에 비해 질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부속물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가 메인 스테이지라면, 드라마는 사전 작업에 가까웠다. 실제로 <완다비전>은 <닥터 스트레인지 2>를, <팔콘과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 4>와 <썬더볼츠>를, <미즈 마블>과 <시크릿 인베이젼>은 <더 마블스>를 준비하는 단계였다.
자연히 여러 설정을 설명하느라 바빠서 주인공 이야기에 집중할 여력도 없었다. <로키>만 해도 멀티버스 설정을 알리느라 바빠서 로키의 분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그나마도 로키의 변종 중 하나인 실비와 나눠야 했으니. <변호사 쉬헐크> 역시 헐크와 데어데블에 밀려서 정작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선후배 케미가 돋보인 <호크아이>에서도 바튼보다는 케이트 비숍에게 비중이 쏠렸다.
따라서 <로키 2>에게는 과제 두 개가 있었다. MCU 드라마로서 독립적인 완결성을 증명해야 했다. 로키의 단독 작품으로서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집중해 달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로키 2>는 해냈다. 2011년부터 10년 넘게 이어진 로키의 성장 서사를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고 감동적으로 매듭지었다. 다만 물음표도 여전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처럼 <로키 2>도 MCU의 구원자라는 확신만큼은 주지 못했다.
그 시절 우리가 로키를 사랑한 이유
2011년 <토르: 천둥의 신>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로 로키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MCU 빌런이었다. 본래 <토르: 다크 월드>에서 죽어야 했지만, 사전 시사회에서 관객이 좀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되살려야 했을 정도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도 죽음을 잔인하게 연출하고 몇 차례에 걸쳐 죽었다고 언급한 후에야 관객들은 그의 사망을 수용했다.
관객은 신의 결핍에 공감했다. 그는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토르 주위에 친구가 가득한 것을 질투하고, 냉소하며, 비웃는 거만하고 까칠한 신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외로웠다. 자기 종족이 아닌 이들 사이에서 길러졌고, 아버지에게서 버려졌으며,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따른 어머니가 죽는 발단을 초래했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토르가 자기를 동생으로 인정하길 바랐고, 기꺼이 형의 오른팔이 되었다.
동시에 로키는 자유의지 때문에 누구보다도 인간적이었다. 패배자라는 운명을 이기려는 욕구로 가득했기에 그는 괴로웠다. 아스가르드의 두 번째 왕자이기에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2인자의 설움. 어떻게 해도 잘난 형 토르를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의 회한. 장난의 신은 죽을 때가 돼서야 비로소 이길 수 없는 운명을 수용했다. 세상을 재창조하며 신 노릇을 하려는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물론 로키는 토르 트릴로지, <어벤져스>, 그리고 <인피니티 워>를 통해 자기 약점과 결점을 모두 극복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드라마 <로키>의 영리함이 드러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재등장한 2012년도 로키를 활용해 그 시절 팬들이 사랑했던 로키를 재소환해 두 번째 기회를 줬다. 자유의지를 발휘해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그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장난의 신, 마침내 영광을 맛보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고, 시간 직조기는 폭증하는 시간선을 버티지 못하며, 모든 시간대가 파괴될 상황. 페이즈 1부터 혼자였고, 항상 자유를 갈망한 로키는 이제 딜레마에 직면한다. 겉으로는 우주와 TVA를 지키려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노력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실비의 지적대로 로키는 또다시 혼자가 되기 싫었다. 모비우스를 비롯한 TVA 동료가 본래 시간선에서 자기를 잊고 살아갈 때 외롭게 남고 싶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실비가 계속 존재하는 자를 죽이기 전에 먼저 그녀를 죽이면 신성한 시간선과 TVA를 모두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다른 모든 시간선의 붕괴도 지켜볼 수 없다. 함께 사라질 모든 자유의지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래서 그는 타협점을 찾는다. 빅터 타임리를 찾아내 시간 직조기 수리를 맡기고, OB의 지식을 모두 전수받아 새 장치를 만든다. 그러나 끝내 실패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서 로키는 결심한다. 신성한 시간선을 지키기 위해 다른 변종을 죽이고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 모든 존재의 자유의지를 지켜주기로. 계속 존재하는 자의 역할을 대신해서 모든 시간대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기로. 언제나 자기를 괴롭힌 자유의지에 몸을 맡겨 자기 결핍을 채워내기로.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자기 이야기를 새롭게 쓰기로.
그렇게 로키는 신성한 시간선과 멀티버스의 종말을 막았다. 비록 혼자 남았지만, 친구와 애인은 지켰다. 장난의 신이 아니라 이야기의 신이 되어 항상 떠들던 '영광스러운 목적'도 이뤘다. <어벤져스>에서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빼앗아 평화적인 질서를 이루겠다던 로키는 모든 이의 자유를 수호하는 신이 되었다. 그렇게 13년에 걸친 그의 성장은 끝났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로 만나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감동적인 마무리다.
멀티버스 사가에 뿌리내리다
<로키 2>는 로키의 이야기를 끝맺으면서도 위기의 MCU에 새로운 나무를 심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특히 영리하게 활용한 신화적인 모티브의 함의가 의미심장하다. 모든 시간선을 손에 쥔 채 왕좌에 앉은 로키. 수많은 시간선이 그를 감싸고 있는 모습은 마치 나무 같다. 북유럽 신화 속 우주의 중심에서 모든 세계를 연결하는 '위그드라실'을 닮았다.
위그드라실 덕분에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 이후 갈피를 못 잡던 MCU는 비로소 안정감을 갖는다. 위그드라실과 신성한 시간선의 차이 덕분에 비로소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 신성한 시간선은 직선적이다. 멀티버스 전쟁을 막는다는 미명 하에 모든 시간대(branch)의 자유의지를 파괴한 결과다. 위그드라실은 다르다. 온갖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가지(branch)에는 각 우주의 자유의지가 깃들어 있다.
그 덕분에 MCU는 비로소 멀티버스 사가의 큰 그림을 어렴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앤트맨 3> 속 사건이 짧게나마 언급되듯이 로키가 살려두고 보호하는 자유의지로 인해 멀티버스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전쟁에서 로키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로키 2>는 곱절로 감동적이다.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여태 흔들리던 세계관에 단단한 뿌리를 잡아주니까.
회광반조, 아니면 부활의 서막
다만 <로키 2>도 극복 못한 한계가 있다. 우선 결말의 임팩트와는 별개로 평균적인 완성도는 높지 않다. 특히 3화까지는 흡입력이 약하다. 빅터 타임리를 찾고 TVA를 구하려는 내용이 펼쳐지는데, 이 대목의 전개가 다소 느슨하기 때문. 또 20세기 런던이나 시카고 박람회 정도를 제외하면 시즌 1과 달리 공간적 배경이 TVA와 시간 직조기 통제실로 한정적이다. 자연히 타임슬립의 재미가 떨어진다. 이를 만회할 액션씬도 부족하다.
작품 외적으로는 여전히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MCU는 페이즈 4부터 같은 질문에 시달렸다. "인피니티 사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멀티버스 사가를 안착시킬 수 있는가?" 여태 답은 '아니요'였다. 토르,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블랙팬서 모두 길을 잃었다. 스파이더맨도 기존 프랜차이즈의 인기에 힘입어 인기를 끌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가 그나마 성공적이었지만, 인피니티 사가의 에필로그에 가까웠다.
<로키 2>도 마찬가지다. 물론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로키>는 멀티버스 사가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인피니티 사가에서 가장 사랑받은 캐릭터 중 하나를 빌려온 작품이기도 하다. <가오갤 3>처럼 인피니티 사가의 또 다른 에필로그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로키 2>가 멀티버스 사가의 회광반조일지, 아니면 부활의 서막일지는 아직 물음표다. <가오갤 3>의 다음 주자가 <더 마블스>인 걸 고려하면 더더욱.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자유 의지로 완성한 영광스러운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