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2025-07-16 21:55:57
미숙해서 더 찬란했던 우리의 초록 시절
영화 <우리들의 교복 시절> 리뷰
* 이 글은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참석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교복을 입어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벌써 십 수 년은 되었으니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교복하면 또 소위 학창시절이라 불리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그때라고 하면 대한민국을 비롯한 모든 동북아시아 청소년들이 공유하는 트라우마적 기억, 입시 공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시험을 잘 봐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였던 시절, '그때로 돌아갈테면 그러겠느냐?'는 말에는 선뜻 예,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인생 최대의 경쟁에 뛰어들어 이른바 보이지 않는 계급차를 경험한 최초의 시기가 바로 그때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경쟁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이 끔찍하기만 했냐면 그건 아니다. 내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우린 서로가 가장 힘들 때 위로를 건네는 상담가였으며, 때때로 '노는 토요일'에 배달 음식을 시켜먹기, 야자 째고 나가 닭꼬치 사 오기, 선생님 몰래 교실 뒤편에서 화투치기 같은 소소한 일탈을 즐길 동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시절이 마냥 우울하지 않았다. 참 어렸지. 참 바보 같았지. 하고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소리다.
이러한 학창 시절의 정서는 꽤나 보편적이다. 적어도 입시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라면 어느 나라든 그럴 것이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입시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이 지속되어 온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대만 영화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한국에 사는 우리가 추억하는 그 옛날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영화다.
1. 내 나이 17세, 인생 참 쉽지 않다!
1999년 9월, 17세 펑원아이(이하 '아이')는 인생이 참 어렵다. '야간반이어도 좋으니 제일여고에 입학하라'는 엄마 성화에 못 이겨 제일여고 야간반에 입학하긴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는 입버릇처럼 '열심히 공부해 사범대에 들어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어쩐지 와닿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쳐 오던 탁구는 이제 공부를 해야 하니 그만두란다. 여동생은 틈만 나면 언니 일을 일러바치기 일쑤다. 하여간 마음처럼 되는 일이 없다.
아이는 자기 교복이 신경 쓰인다. 옆집 언니에게 물려 받은 초록 교복엔 은색 학번이 수놓여 있고, 아이는 그것이 야간반을 상징한다는 걸 안다. 주간반 학생의 찬란한 금색 이름표 옆에 서면 그게 얼마나 초라해 보일지도. 몇몇 사람들에게 '짝퉁' 취급을 받는 그 야간반 신세를 3년 동안 감당할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2. 교복만 바꿔 입었을 뿐인데.
제일여고에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그건 한 책상을 쓰는 주간반, 야간반 학생들끼리 서로 짝꿍이 되는 것. 아이는 운이 좋았다.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쿨하기까지 한 민과 짝이 되었으니 말이다. 주간반 애들은 잘난척쟁이에 깍쟁이이기만 할 것 같았는데, 민은 성격도 좋은데다가 놀 줄도 안다. 이것이 주간반 멋쟁이의 여유인걸까? 아이는 민의 삶이 근사해 보인다. 민이 하자는 것이면 무엇이든 하고 싶을 정도로.
우연한 계기로 민과 바꿔 입은 교복은 아이를 들뜨게 한다. 교복 하나 바꿔 입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 같고, 초라하기만 하던 내가 뭔가 특별해진 것 같다. 민을 따라 주간반 행세를 하면서 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멋있는 밴드 음악도 듣고, 잘나가는 애들이 다닌다는 수학학원도 다니고, 탁구장에서 만났던 잘생긴 제일고 남자애(루커)와도 썸을 타게 된다. 아이는 민이 짝사랑 상대가 루커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거부할 수 없다.
아이는 민의 주간반 교복을 더 오래 입고 싶다. 그걸 위해서는 그만큼의 땡땡이와 거짓말을 늘어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3.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민은 아이와 루커의 관계를 알아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의 폭로로 말미암아 루커도 아이의 정체를 알아버리고 만다. 오랫동안 쌓아온 거짓말의 탑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아이는 그 동안 외면해 왔던 주간반과 야간반 사이의 벽을 다시금 확인한다. 민과 루커의 곁에 아이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어 보이고, 아이는 더는 주간반 행세를 하지 않기로 한다. 주간반은 양, 야간반은 음이라던 선생님의 말씀처럼, 영원한 짝퉁, 은색 명찰의 세계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시련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엄마는 놀러다니느라 아이의 망한 성적표를 발견하고, 그 일을 계기로 아이와 엄마 사이의 냉전이 시작된다. 단골 탁구장은 문을 닫는다. 새 마음 새 뜻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무엇 하나 예전 같지 않다.
4. 우리 세상이 온통 흔들렸어.
그러던 어느날, 세상이 온통 흔들렸다. 1999년 9월 21일. 갑작스레 닥친 대지진은 건물이 무너뜨리고, 수 천 명이 죽였다. 그 생사의 갈림길, 모두가 공유한 어떤 공통된 시련을 통해 아이는 오랜 시간 자존심과 부끄러움에 가리웠던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원망할지언정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을 말이다! 아이는 엄마의 억척스러움에서 딸들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민과의 재회를 통해 둘 사이에서 정말로 중요한 건 주간반과 야간반의 차이가 아니라, 둘이 나누었던 진실된 우정이었음을 알아차린다.
5. 청춘의 이름으로 현실 깨부수기
이 영화는 펑원아이와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함과 동시에, 학벌주의와 계급주의가 만연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을 드러낸다.
동북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좋은 성적은 좋은 대학을 담보하고, 좋은 대학은 좋은 직장을 높은 확률로 보장하며, 좋은 직장을 가진다는 것은 곧 많은 돈을 벌게 되는 것이므로 계급 상승의 가장 손쉬운 수단이 된다. 이것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동북아의 많은 청소년들은 돈을 잘 벌기 위해 공부하는 셈이다. 그러나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소위 '잘 사는'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더 좋은 교육을 받은 아이는 더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높다. 이러한 환경에서 입시를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이른 나이부터 돈과 학벌 따위로 야기된 새로운 계급적 장벽을 마주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경쟁, 비난, 폄하를 수반한다. 펑원아이의 야간반이 '짝퉁' 취급을 받아온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신 계급주의와 학벌주의는 결국 정형화된 이상을 강요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다고(돈을 많이 번다고)' 알려진 직업을 가지라고 속삭인다. 이러한 사회를 사는 사람은 사회가 주입한 이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후천적 완벽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에 정말로 완벽한 사람은 없는 바, 사람들은 완벽을 가장하기 시작하는데, 펑원아이의 '주간반 노릇'이 그렇고, 민의 '재수생 시절'과 루커의 '부모님 불화' 따위 그렇다. 결국 아이들의 미숙함은 아이들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몸담고 있는 일그러진 사회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정형화된 틀 속에서 개인의 꿈과 욕망은 쉽게 거세당한다. 그리고 꿈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되냐고? 무료하고, 무력해진다.
펑원아이, 민, 루커를 비롯한 청춘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에 반기를 든다. 크고 작은 일탈을 감행하면서, 서로 실수하고, 상처 주고, 다시 화해하면서, 그들이 놓칠 수도 있었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바로 보고, 어른들이 쌓아놓은 '보이지 않는 벽'을 기꺼이 허문다.
민은 주야간반과 상관 없이 기꺼이 펑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루커는 펑원아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경쟁하기 위해 올림피아드라는 쉬운(?) 대학 입학 기회를 떠나보내고 대입 시험에 임한다. 그리고 펑원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 관객으로서는 그가 어느 대학의 어떤 전공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어른들의 기준에 휩쓸리기만 하던' 펑원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찾아 그 길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은 혁명의 길을 지난 사람에게 주간반과 야간반의 교복 중 무엇이 더 노란빛을 띠고 푸른빛을 띠는지, 왼쪽 가슴의 명찰이 금색인지 은색인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으리라.
아이와 친구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학에 붙고, 그들은 주간반, 야간반 상관없이 둘러 앉아 꿈을 논한다. 꽉 닫힌 해피엔딩이며, 가장 부드러운 혁명이 성공을 거둔 순간이다.
펑원아이와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친구일까? 어느쪽이든 나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혁명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삶을 개척해 나갈 것 같다. 그 언젠가 초록 교복시절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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