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025-06-30 12:42:02
흐릿한 세상을 또렷이 사랑하는 방법
아녜스 바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2018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영화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사진
작가 JR이 함께,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사진에 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둘은 함께 여행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과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저마다의 아주 크고, 사소한 이야기들에 사진을
찍어 붙여 표지를 만든다.
바르다와 JR의 프로젝트는 우리 곁에 있을, 평범한 누군가의 일상에 확성기를
대준다. 작고 사소한 목소리들을 들려주는 작품. 영화 <국외자들>처럼, 루브르
박물관을 질주하며 만난 보티첼리, 라파엘로, 아르침볼도의
예술은 아름답다. 그리고, 항만노동자들의 아내들, 철거 직전의 탄광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주민, 병뚜껑을 모아 자신의
집을 꾸미는 포니의 얼굴과 이야기도 아름답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나를 지나쳐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있다. 그들이 가진 평범한 일상과, 노동, 조명 되지 못한 여성들 속에. 바르다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들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넓어서, 도저히 이 감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둘의 여정은 우연을
따라 가고, 노르망디 해변에도 닿는다. 바르다는 해변에 있는
한 벙커에 자신과 함께 작업했던 모델의 젊은 시절 사진을 붙이며 그를 추억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사진이 파도에 씻겨져 내려가버린 사실을 확인한다. 결국 사라질
순간들을 기록하고 남기는 일. 영화 내내 바르다는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다. 점점 보이지 않는 눈과, 힘껏 달릴 수 없는 다리. 그녀는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절대
명랑함을 잃지 않는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바르다의 발과 눈을 찍어 기차에 붙여 보내는 것이었다. 바르다의
삶이 끝나더라도, 그녀의 여정은 계속 될 것이다. JR의
말처럼, 이 사진들이 바르다가 직접 갈 수 없는 곳들까지 그녀를 데려다 줄 것이고, 결국 이가 나에게까지 와닿았다는 게 기뻤다.
내내 선글라스를
벗지 않던 JR이 바르다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 흐릿한 시선이, 사랑스럽고 총명한 할머니가, 그녀는
떠났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많은 작품들이 오래도록 남아 모두에게 위로를, 영감과 성찰의 시간을 건넬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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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시절 여름방학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톰보이
톰보이
감독 셀린 시아마
배우 조 허란, 말론 레바나, 진 디슨
네이버 평점 : 8.91 / 10 (네티즌 평점 기준 참여인원 58명)
왓챠 평점 : 3.8 / 5 (참여인원 8,905명)
개인 평점 : ★★★★☆ (4.5 / 5)
톰보이 리뷰 3줄 요약
1. 극 중 동생 역할로 나오는 잔이 너무 귀엽다.
2. 한 아이의 어린 시절을 살짝 훔쳐보는 영화.
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감독 셀린 시아마 각본, 연출 작품
<톰보이> 메인 포스터, 캐릭터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톰보이> 캐릭터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 상을 휩쓰는 감독 셀린 시아마
<톰보이>는 프랑스 영화로 셀린 시아마라는 아주 핫한 감독의 2번째 연출작이다.
셀린 시아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으로 영화제 상을 휩쓸면서 국내까지 알려졌고, <톰보이>는 그 이후 감독의 유명세를 타고 2020년 5월에 뒤늦게 개봉하였다.
프랑스에서는 2011년에 개봉한 작품이었기에 국내 개봉 전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뒤늦게나마 국내까지 들어와서 기쁜 마음으로 관람했다.
다시 감독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셀린 시아마는 데뷔작부터 꾸준하게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여성 영화 전문 감독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비롯한 2관왕을 수상한 이력이 있으며,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연출작에서 작은 상이라도 항상 받아온 대단히 촉망받는 감독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아마 본 사람들이라면 <톰보이>도 재미있게 보지 않을까 싶다.
- Tomboy의 뜻
영화 제목인 <톰보이>는 남자처럼 행동하는 여자아이라는 뜻의 단어이다.
단어 사전에 말괄량이로 적혀있기도 하다고 하는데 그보단 ‘보이시한 매력을 가진 멋진 여자애’ 정도가 맞는 해석인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을 의미하는 제목이자 이 영화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포스터 속 아주 멋진 주인공은 바로 로레이다.
아니 아마도 포스터 속 이름은 미카엘 일지도 모르겠다.
미카엘은 로레가 남자아이처럼 행동하면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영화는 로레의 삶 속 잠깐 스쳐 지나간 미카엘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톰보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찰떡같은 배우 캐스팅
핵심 주연이 모두 아역인 작품인 만큼 약간은 걱정이 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연기력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특히 주인공 자매를 연기한 조 허란과 말론 레바나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미카엘과 로레 역의 조 허란은 중성적인 분위기를 너무도 잘 담아냈으며 귀여운 동생 잔 역할의 말론 레바나는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 둘 다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이 두 자매를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톰보이> 스틸컷,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여름방학 그 자체인 영화
<톰보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나는 단언컨대 "여름방학"을 말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름방학에 일어난 일이면서 그 방학을 너무 잘 표현한 영화가 2개 있는데
첫 번째가 <톰보이>이고 두 번째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실제로 영화 속 시간 배경이 여름방학이라는 것이고, 둘 다 잠깐의 마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퀴어 영화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마법 같은 부분이 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소와 다른 일상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마법 같음이고, 여름이라는 배경을 제외한다면 <라라 랜드>나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들 역시 마법 같은 시간을 담은 영화들이라 할 수 있겠다.)
지나고 보면 마치 꿈같았던 그 반짝거리는 순간의 분위기가 너무 잘 담겨 있다.
두 영화의 차이점이라면 <톰보이>는 조금 더 풋풋한 초여름의 분위기라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쨍쨍한 한여름의 분위기라는 것이랄까...?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 봐도 여름방학이 1년 중 가장 즐겁게 놀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한 달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막상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대단스러운 일을 했던 적은 없었지만 시작은 항상 거창했었던 것 같다.
<톰보이>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 자연스러운 메시지
<톰보이>는 꽤나 영화 주제나 제목만 보더라도 명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영화를 보면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매우 자연스럽게 스토리의 한 부분처럼 흘러간다.
이는 극 중 어느 캐릭터도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용도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메시지가 명확한 영화들은 단순히 메시지 강조를 위해 역할들이 소모되는 경우가 있는데, 약간만 과하게 들어가도 오히려 관객 입장에선 생각을 강요당한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톰보이>는 감독이 어느 쪽으로도 힘을 더하지 않고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각 인물들의 생각을 담아낸다. 그러다 보니 모든 인물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 톰보이 메인 예고편
<톰보이> 메인 예고편 [출처: 씨네큐브 유튜브]
*여기부터 스포일러 포함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로레와 잔의 케미가 톡톡 터지는 장면들이다.
서로를 진정으로 아껴주고 챙겨준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빠질 수 없는 소소한 투닥투닥까지 완벽한 티키타카!
영화 속에서 잔만이 유일하게 로레와 미카엘을 나누지 않는 인물이다.
물론 마지막에 리사 역시 새롭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리사는 새롭게 알아가기로 결정한 인물이라면 잔에게는 로레가 언니였다가 든든한 오빠일 수 있다는 점에서 로레를 진정으로 좋아해 주는 잔의 순수한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저 같이 놀아주기만을 바라는 잔의 모습이 몹시 귀엽다.
영화 마지막에 엄마가 선택한 방법은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물론 방학의 끝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로레의 거짓말이 오래가지 못함은 당연하고
이를 방치할 수 없는 것도 맞지만 꼭 원피스를 입혀서 데려가야 했을까...
부모는 아이를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교육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 외에도 학교, 친구, 인터넷 그리고 스스로 고민을 통해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자라난다.
아이가 가는 방향과 부모가 바라는 방향이 다를 때
아이의 첫 행보, <톰보이>에서는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행동이 부모에게는 첫 일탈로 다가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잡는 부모는 교육 중인 걸까? 교정 중인 걸까?
우리는 가족에 대한 이해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
최근 들어서 기술의 변화나 사회적인 변화가 급격하기 때문에 더더욱 세대 차이나 생각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선 세대의 교육이 항상 옳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특히 개개인의 특성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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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을 수 없는 당신의 눈빛, 표정, 그리고 마음.
한정적인 공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답답하면서도 그러지 아니한 감정들을 표현한다. 영화 곳곳에서 묻어 나오는 숱한 감정은 무력하면서도 은은하게 감도는 따뜻함으로 뒤덮인다. 행복한 기억이 담겨있는 바다처럼 흐르는 감정은 전개되기에 4:3의 화면비가 결코 답답하지 않게 느껴진다.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의 혼신이 담긴 연기와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연출이 맞물려 모순투성이인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영화 '더 웨일'은 3월 1일에 개봉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스스로를 고립하게 되었는지에 집중하면 조금씩 스며들게 된다.
거구의 몸무게와 울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찰리는 걱정하는 친구의 말에도 병원을 가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인해 그는 자신을 고립되게 만들었을까. 인생의 말로에 그가 남겨둔 것들을 돌아보는 일주일의 시간이 시작된다.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찰리의 내면은 8년 만에 마주한 딸을 보며 더욱 크기를 부풀려간다. 사랑으로 인해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소중한 존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동시에 자신 또한 구원되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온전한 삶에 대한 허구일지라도 존재만큼은 거짓되지 않았다.
주어진 환경과는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구원에 의해 앞으로의 길을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길로에 마주 서게 하고 선택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간다. 사람을 살아가게도 죽어가게도 만드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 바로 종교지만 종교를 믿는 것이 사람이기에 이러한 모순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선택을 개인에게 내어주지 않고 강요하는 순간 생기는 어긋남이 더 깨어진 것을 표현하고 배타적인 종교의 성질이 개인을 배제한다. 신이 존재하든 아니든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는 실체의 부정으로 인해 무가치함을 극대화한다. 지나친 믿음을 밀어내고 본연의 감정을 풀어내어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최선일 수 있는 존재의 의미만이 남아있었다.
무언가에 대한 생각은 어쩌면 나에 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말은 생각의 거울이며 나의 내면으로서 드러나는 분출구나 다름없다. 비록 세상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솔직하길 바라지만 나부터가 솔직하지 않은 모습에 실망하고 후회하고 또 원망한다. 그 마음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되어 자신을 숨기는 데에 능숙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고 나서야 솔직해지는 순간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불가능함에 도달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를 느끼면서도 새삼 인간다움에 대한 감탄을 느끼는 순간의 연속이다. 내가 바란 건 새로운 누군가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솔직함으로부터 오는 위대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단어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그 단어가 어색해질 때가 있다. 생각으로 인해서 그럴지는 몰라도 그 어색함을 넘어서면 끝내 마음에 닿아 온몸에 퍼지는 순간이야말로 황홀함의 극치이다. 그리고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표현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그 고난을 이겨내 마침내 글로 풀어냈을 때의 그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조차 없이 경이롭다. 이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잘 표현하는 영화가 또 있을까.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는 감정이 하나라도 성공한 것이 있길 바라는 마음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다시 풀어내며 그가 진정한 구원을 맞이하는 순간으로 변모한다.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둠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빛나는 공간은 흔적도, 향기도 추억도 그대로다. 관심과 따뜻함을 상징하는 피자, 교회, 친구, 딸은 일시적인 관계에 의한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자리에 놓여있는 시간과 다름없었다. 깨진 마음, 깨진 관계, 깨진 신뢰마저도 어떤 것에 갇히지 않게 우리는 추억하고 그 과거에 젖어 앞으로 나아간다. 희망에 가득하다가도 절망으로 금방 젖어들고 마는 그 많은 시간은 빨리도 찾아온다. 마침내 그의 미소를 볼 때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다 못해 날아가는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없었다. 혹여나 빗나갈까 봐 흠칫거리는 그 움직임과 미안하다는 그 말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자체로 파괴적이었던 그의 삶은 누군가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늘 찾던 삶의 의미와 마침내 구원을 맞이하며 담담하게 죽음을 바라본다.
"알아야겠어.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단 걸!"
삶과 모든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찰리는 감정이 출렁일 때마다 모비딕에 대한 한 에세이를 끊임없이 되뇐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지 조차 알 수 없는 망가진 삶 속의 찰리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슬픔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과 부딪히며 결국 자기 파괴에 이르는 모습을 보인다.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동을 혐오하면서 반복된다. 스스로 역겹다는 생각과 그 물음은 절망에서 비롯되었지만 희망을 찾기 위한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그 마음은 일련의 시간들이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속마음을 내비친다. 모비딕에 대한 에세이를 끊임없이 되뇌는 찰리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끝내 나의 눈물샘을 적시고 만다. 찰리의 눈물과 남아있는 이들의 얼굴이 짙게 남아 마음속 깊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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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치의 투명함
<힘찬이는 자라서>(2022, 김은희)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김진화)
<세기말의 사랑>(2023, 임선애)
<살인자ㅇ난감>(2024)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손수현을 보기 위해 재생한 단편 <힘찬이는 자라서>, 노재원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주인공 정희의 친구의 남편 강석, 적당히 내향적이고 친절한 남자인 그는 대화의 주제가 달랐다면 예의바른 미소로 일관하다 퇴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영화가 만들어질 까닭도 없었겠지.) 정희가 쓰는 시나리오가 테이블에 올라오며 두 사람은 부딪힌다. ‘이퀄리스트’적 논리를 따박따박 나열하는 강석의 언행에 딱히 악의는 없다. 그는 모르고 또 알려 하지 않으므로 ‘억울’해 하는 게다. 강석은 현실을 반영해 구성된, 특정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인물이었다. 배우는 역할에 충실했고, 나는 강석이 밉고 갑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직설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리도 솔직한 표정을 짓는 저 배우는, 주어진 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저이가 정희의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럴 것 같다. 그건 노재원의 연기를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어졌다는 신호였다.
첫 만남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서서히 스며들게 되는 이도 있다. 노재원은 말하자면 후자였으나, 어느 정도 전자이기도 했다. 타 배우를 염두에 두고 관람한 작품들에서 그를 목격할 때마다, 매번 새로이 놀랐다.
자주 길을 잘못 들거나 가다 멈추곤 하는 로드무비 <윤시내가 사라졌다>. 운시내=준옥은 완벽한 두 번째 만남이었다. 반짝이는 재킷을 걸친 그가 카메라에 잡힌 순간, 노재원의 이름을 기억했고,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예감했다. “원조 가수랑 똑같기만 하면 매력이 있나, 저는 그냥 저 마음가는 대로 부르거든요. 그래서 일이 안 들어와요.” 그 자조 섞인 담백한 대사에 준옥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그의 공연은 본인의 설명대로다. 힘주지 않아도 깊이가 느껴지는, 차분한 ‘엣지’를 품은 목소리. 섬세한 선을 그리는 움직임. 노재원은 단지 노래를 할 줄 아는 것을 넘어- 음으로 관객의 심장을 울릴 줄 아는 공연자였다, 꼭 운시내처럼. 무대 위의 옅은 웃음기는 후에 화장을 지우고 거울을 보며 짓는 미소와 닮아 있다. 미묘한 카타르시스. 겸손함, 당당함, 자만하지 않는 자신감.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운시내’가 노래하는 자세는 ‘정준옥’이 살아가는 자세와 닮았다. 식탁 밑에 있는 하다(=처음 보는 사람)를 동그란 눈으로 응시하다 한쪽 이어폰을 슥 빼 제 귀에 끼우는 그 독특한 붙임성. 당황한 하다가 식탁에 머리를 박자 튀어나오는 진심어린 감탄사 “아이고.” 그 마주침부터 줄곧, 하다는 무례하고 준옥은 스스럼없다. 준옥의 친절은 형식적 예의 이상이다. 어머니 뻘인 순이를 ‘친구’라 부르며 벽없이 훅 다가가는 그는 하다의 말처럼 “선을 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단 ‘선을 잘 넘는 법을 아는’ 이였다. 꿍꿍이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내면의 깊이마저 갖춘. 그 넓은 마음 씀씀이는 절로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스스로 투명하므로 타인의 속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걸까. 그는 하다의 셈과 위악을 어느 정도 간파하면서도 섣불리 평가해버리지 않고 조용히 지켜본다. 은근히 끼고 싶어하는 속내를 눈치채고 보내는 눈웃음, 삐딱한 행동을 관찰하는 진지한 눈길. 준옥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인형과 함께 모녀의 갈등을 터트린 것은 글쎄, 아마도 의도적이다. 가운데 끼어 욕을 먹고 눈치를 보며 기어이, 중요한 이야기를 던지고야 만다. 하다의 케케묵은 감정을 자꾸만 건드린다. 일부러 걸림돌이 되고 기꺼이 거슬린다. 노재원의 자잘하고 천연덕스러운 제스처들은, 준옥의 신묘한 중재자(!)적 능력을 의심케 했다.
그런 그가 살짝이라도 차가워지면 이쪽에서 눈치를 보게 되고, 단호해지면 더욱 귀기울이게 된다. 준옥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고 그의 조언은 불쾌한 맨스플레인이 아니다. 그가 ‘실패한’ 과거를 꺼내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와닿았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진심을 체화한 노재원, 그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드문 종류의 것이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굳이 말하자면 하다와 순이의 영화이기에, 준옥은 도중 하다에게 버려지며 화면을 빠져나간다. 화내거나 패닉하는 대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마는 것마저 그답다 싶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퇴장하는 그를 ‘메시지의 의인화처럼 보이는 존재’라고 해버리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리 갈무리하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노재원을 만나 생명력을 얻은 준옥, 그의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안 정도는 빌고 싶어진다. 한편으로는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그는 잘 살아가리라 짐작하게 된다. 법 없이도 살 듯한 남자. ‘관종’과 ‘짝퉁’들의 언더월드에서 운시내=준옥은, 우아한 미스핏, 골목길의 귀인,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도인이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여기 ‘법 없이도 살 듯한 남자’가 또 있다. <세기말의 사랑> 속 도영이다. 모순된 묘사로 들릴 것이다, 그는 회사 돈을 횡령한 범죄자이니. 가출한 조카가 위장결혼한 와이프 명의를 도용해 만든 카드값을 혼자 메꾸려다 그렇게 되었다. 앞 두 문장의 설명은 틀리지 않았으나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니다. ‘위장결혼’의 자간에는 사랑과 배려가 묵음처리돼 있다.
영미와 도영은 조금은 동족이다. 사랑하는 이의 범죄를 덮으려 밤새 부업을 하고 형까지 산 영미, 기다려달라는 영미 말을 따르다 그런 건지 뭔지 자수도 못하고 체포된 도영. 뒤늦게 꼬박꼬박 돈을 갚는 그를 미워할 수 있는 관객은 별로 없었으리라. 캐릭터의 사연도 성격도,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세기말의 사랑>, 도영의 껍질은 투명했다. 스쳐 지나갈 법한 소재를 클로즈업해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순간은 도영과 만나 유독 빛났다. 비엔나 소시지에는 타인에게 일말의 불편함도 남기지 않으려 애쓰는 배려심이 묻어 있었다. 모기 물린 자국에 찍은 십자가에는 살짝 엉뚱한 유머감각과 순수한 설렘이 눌려 있었다. 도영의 스크린 타임은 짧았으나,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유진과 도영이 마주하는 시퀀스는 겨우 둘이었고 개중 하나는 화상면회 씬이었으나, ‘위장 결혼 상대’를 향한 도영의 사랑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좋아해요”를 뱉어버리고는 웃음기가 사라지는 입가에, 호텔 창문 너머 반짝이는 관람차를 보며 (혹은 보지 못하며) 섬세하게 일그러지는 뺨에, 작품이 생략한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도영은 그럴듯하게 멋져 보이는 법을 모르는 듯한 사람이었다. 어쩐지 노재원도 그런 사람일 것만 같았다. 수줍은 손끝과 내리깔린 눈꺼풀, 자주 흐리는 말끝에 가득 담긴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도영에겐 그런 드문 자질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고, 노재원은 이상한 배우다.
<세기말의 사랑>(2023)
최근 노재원은 넷플릭스를 누비며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D.P> 시즌2에 군복을 입은 실루엣을 비추었고, 최근에는 <살인자ㅇ난감>에 출연하며 ‘범위’를 증명했다. ‘하상민 역에 노재원’이라니, 뜻밖의 캐스팅이었다. <힘찬이는 자라서>까지를 포함해도, 앞뒤가 다른 하상민은 그가 이제껏 보여준 이미지와는 한참 먼 캐릭터로 느껴졌다. 허나 곧 (정이서와 더불어) 꽤나 영리한 캐스팅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노재원은 어떤 전형을 따라하는 대신 저만의 스타일로 보통의 악인을 소화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가 극에 더욱 몰입하도록 도왔다.
움츠러든 어깨, 차마 피하지 못하는 눈, 머뭇거리는 말투, 하상민은 매혹적인 젠틀맨이 되기보단 유약함과 무해함을 가장해 상대의 경계심을 해제한다. “혹시 연락을… 해도 되나?” 수락을 해도 반대로 거절을 해도 괜찮을 듯한 톤이다. 그 탁월하게 균형잡힌 딜리버리에 감탄했다. 경아에게 ‘너는 나와 동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 꾸며낸 피해 서사 자체보다는 그것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배우의) 태도이고 마스크다. 악의라곤 없어 보이는 노재원의 눈빛에, 원작의 전개를 알고 있음에도 속아넘어갔다. 거울 앞에서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하상민에게 이유있는 싸함을 느끼면서도, 거기 속셈은 없다고 믿고 싶었다. ‘이번엔 믿어봐도’ 될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최우식과는 또다른 방향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남성성’을 두른 배우. 그렇게 노재원은 성공적으로 경아와 시청자의 의심을 풀었고, 배신감을 극대화했고, 최후의 순간에는 이희준과 만나 더없이 보잘것없어졌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평범하여 더 유해한 비겁자 하상민. 송촌 앞에서 벌벌 떨고, 울며 애원하고, 먹어 들어가는 발성으로 죄를 고백할 때보다- 경아에게 욕하고, 소리지르고, 이내 이성을 잃고 목을 조를 때, 그는 가장 약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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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행이었다, 그 직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시청한 것은. 노재원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이 작품을 최근에야 보게 됐는데, 이미 목격한 매력과 범위를 놀라운 형태로 재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서완은 일단, 조심스럽고 순하고 해맑다. 날카로운 눈매와 맑은 눈동자가 안경과 만나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쭈뼛거리는 눈가와 입가, 어깨. 말투는 정중하고, 발걸음은 자유롭다. 스토리텔링을 장황하게 늘이다 끝을 흐리는 점, 몸을 슬며시 뒤트는 점, 시선을 허공이나 바닥에 두는 점, 그러한 디테일은 대사와 맞물려 서완의 ‘컨디션’을 암시한다. 허나 캐릭터성 또한 나타낸다. 그 흐름에는 개성이 있다. 다은이 떠온 “암브로시아”를 공손히 받아드는 제스처에 뱃속이 간질간질해 진 이는 (이미 배우를 좋아하는)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작품은 서완의 스크린 타임을 영리하게 조절했다. 은은한 잔상을 남기고 박보영과 연우진에게 포커스를 넘기며 슬금슬금 퇴장했다가, 동네 주민처럼 가끔 얼굴을 비추며 독보적인 그림자를 흘리는 서완. 인자하고 어색하게 유유자적하던 그는, 자신의 견고한 세계가 외부 자극에 의해 깨질 위기를 감지하자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노재원은 그 간극을 설득하고, 인물의 사연을 더 궁금하게 만든다. 4화에선 조심스러운 선의로 주위를 밝히고, 5화에선 시청자의 심장을 잔뜩 졸인 끝에 허탈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 다음 화에서, 우리는 서완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그를 떠나보내게 된다.
자신이 구성한 판타지 월드 안 서완은 지쳐 있지만 단단하다. 발음과 말씨도 분명한 편이다. 그 세계가 스스로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는 서늘한 눈동자엔 공허가 있다. 고요하고 무기력한 수긍이 이어진다. 유하고 공손한 그의 언어가 날카롭게 꽂히는 유일한 대상은 자기 자신. 입원 전, 속상할 만큼 이성적인 자각을 털어놓는 상태와, 병 인지 후 조바심과 자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상태는 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은의 멍든 손을 보고 제가 더 아파하는 이다.) 노재원은 누르고 파고들고 덜어냄으로써, 공시를 준비하던 서완의 마음을 드러냈다. 참고 참아 무뎌져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 성마른 입술을 통해 뱉어내는 자조에 여러 해에 걸쳐 어마어마한 밀도로 압축된 응어리가 언뜻 비쳤다. 노재원은 쌓이고 뒤엉켜 본래의 색을 잃은 인물의 내면을 신중하게 내보이는 법을 아는 배우였다.
저마다 개성있고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로 가득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노재원은… 조금 달랐다. 무엇이 더 낫다고 비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조금 달랐’다. 엉망으로 울게 했고, 기습적으로 웃게 했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리고 서완의 마지막 순간, 노재원은 모조리 비워냈다. ‘차 한 잔’을 청하던 떨리는 목소리가, 허탈하고 자유로워 보이던 미소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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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기말의 사랑>을 관람하며, <힘찬이는 자라서>를 돌이켰다. 노재원에게 받은 첫인상과, 현재 머릿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이미지를 번갈아 떠올렸다. 각이 예리하게 두드러지는 얼굴은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채롭게 변했다. 그는 부드러운 피부를 입고 단단한 중심을 잡을 수 있었고,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한없이 약해질 수 있었다(하상민). 전부 내려놓거나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무던한 듯 통통 튀는 손수현, 예민함과 유함이 공존하는 노재원. 두 배우의 에너지가 보다 친밀하게 엮이는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이주영, 이유영, 스치듯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까지- 관심을 보다 먼저 두었던 배우들과 노재원이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얽히는 모습을 은근히 그려보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남자 배우가 선뜻 내보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이미지를 노재원은 스스럼없이 둘렀다. 힘주지 않고 깊이를 담는 연기자. 노재원의 인터뷰들을 읽으며, 자주 준옥이 겹쳤다. 일에 대한 사랑과 겸손한 자신감이 진중하고 솔직한 언어에 실려 있었다.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스포츠경향]는 그는 현명한 걸음을 저답게 내딛고 있다.
“당신의 다정함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일본 TV 시리즈 <그래도, 살아간다> 속 대사다. <세기말의 사랑>, 도영을 보며 그 문장이 떠올랐다. 도영만이 아니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의 준옥,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서완, 그들은 웃는데 이쪽은 자꾸 울먹이게 됐다. 이들의 살갗에 안착한 배우가 노재원이 아니었다면 내 눈물샘이 이토록 왕성하게 활동할 일은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노재원은 이상하고 소중한 배우다. 그가 수줍게 뿜어내는 무해한 아우라에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영제는 “Daily Dose of Sunshine하루치의 햇빛(멋대로 의역. 배경이 병원이니 ‘복용량’을 살려 번역하는 게 더 맞을 테다.)”. 스크린 위 노재원을 보면, 하루치의 투명함을 보충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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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 vs 시민’ 구도에 관한 홍상수의 관찰
8★/10★
내가 본 첫 홍상수 영화는 2023년 작품인 〈물안에서〉였다. 그가 예술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방식에서 긍정적인 의미의 큰 충격을 받았다. 예술, 현실, 윤리의 경계를 지우며 포개는 그의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예술가 vs 시민’의 익숙한 구도를 고루하게 반복한 〈여행자의 필요〉는 실망스러웠고, 예술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변명이 뒤섞인 〈수유천〉은 아리송했다. 최근 개봉한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는 이 계보의 연장에서 다시 한번 예술가, 예술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삼십 대 중반의 시인 동화가 애인 준희를 집에다 바래다준다. 낡디낡은 중고 프라이드를 타고서. 동화는 교외에 번듯하게 자리 잡은 준희의 집에 놀라고, 얼결에 준희의 가족을 마주하게 되어 집으로 초대받는다. 이러저러한 탐색의 시간이 전개되는 동안, 영화의 핵심 구도가 서서히 부상한다. 유명한 변호사의 아들이지만 독립한 채 가난하게 시를 쓰는 동화, 웨딩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으로 필요한 돈만 버는 동화, 준희와 결혼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준비가 안 된 동화……. 동화와 준희 가족 사이에는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흐르고 결국 갈등은 폭발한다. 동화가 준희의 가족에게 ‘삶에 필요한 기술’을 갖추지 못한, ‘책에서 읽은 내용’으로 삶을 사는 사람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술에 취해 언성을 높인 다음 날, 동화는 도망치듯 준희의 집을 빠져 나가다 결국 차가 퍼져버린다. 동화는 작게 혼잣말한다. “이 차는 좀 팔아야겠다….”
동화가 기른 수염은 준희의 가족에게 그가 ‘일반적’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 표지다. 한편 동화는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안경을 쓰지 않는다. 준희의 아버지는 왜 앞이 흐릿하게 보이는데도 그가 안경을 쓰지 않는지 의아해하고, 준희의 언니는 동화가 잠깐 안경을 쓰자 안경이 잘 어울린다며 칭찬한다. 동화의 좋지 않은 시력은 동화가 세상 물정 모른다는 의미고, 안경은 이를 교정해주는 도구다. 세상을 또렷하게 보지 못해 안경이 필요한 사람. 시인(예술가)에게 따라오는 숙명적인 평가일 터다. 결국 처음에는 점잖게 경제생활에 관한 질문을 우회적으로 던지던 가족들은 준희 언니가 동화에게 ‘변호사 아빠 빽’ 발언을 건넨 이후 술에 취한 동화가 언성을 높이자 표면적인 예의마저 거둔다. 동화는 자기의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 항변하지만 술에 취해 예의를 어기고, 술 취한 채 산책하다 넘어져 상처가 생기며, 도망치듯 빠져나와 가는 길에 차마저 퍼진다. 준희네 집에서 나오기 전, 동화는 준희에게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꽉 끌어안는다. 동화는 어젯밤 일로 준희에게 버림받을까 무서운 것 같다.
그리하여 차를 팔아야겠다는 동화의 혼잣말은 세계에 대한 예술가의 패배 선언일까? 예술가와 시민의 대립 구도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예술가의 편에 선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은 어느 한쪽의 편에 분명하게 서지 않는다. 이 긴장감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한다. 예술가와 시민이라는 길항하는 두 세계에서 때로는 성공적으로(〈물안에서〉), 때로는 실망스럽게(〈여행자의 필요〉) 예술가를 옹호하던, 그리고 〈수유천〉에서 아리송해서 매혹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갇힌 덫을 그려낸 홍상수가 이번에는 이 구도 자체를 한 걸음 물러나 관찰함으로써 또 하나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놓은 느낌이다. 영화에서 무척이나 자주 나오는 뒷모습 대화 씬도 ‘관찰자’로서 예술가와 시민의 대립 구도를 살펴보겠다는 그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제7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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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픈 트리거 남발에 실패해버린 드라마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물랑 루즈〉(2001), 〈위대한 개츠비〉(2013)를 연출한 바즈 루어만은 화려한 비주얼과 극적인 드라마를 결합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감독이다. 그런 그가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이자 로큰롤의 제왕으로 불렸던 엘비스 프레슬리를 스크린으로 소환한다니 당연히 많은 영화 팬이 그 결과물을 기대했을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2018), 〈로켓맨〉(2019), 〈주디〉(2020) 등 가수·배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근래에 계속 제작되어왔다는 점도 호재였다. 이전 작업을 비판적 참조물 삼아 자신만의 개성인 더 화려한 볼거리, 더 진득한 드라마를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물은 기대 이하였다. 〈엘비스〉는 엘비스와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는 배우 오스틴 버틀러를 캐스팅해 엘비스의 노래와 춤, 비주얼 등을 재연하려 고군분투한다. 그리하여 엘비스를 다시 무대로 올려놓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다. 하지만 바즈 루어만의 또 다른 장기인 드라마의 농도는 형편없다. 〈물랑 루즈〉와 〈위대한 개츠비〉는 화려한 비주얼과 치명적 드라마를 적절히 맞물리게 연출했기에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여러 등장인물 간의 갈등, 사랑, 우정 등 다양한 요소를 가장 본질적이고 주가 되는 드라마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해 영화의 핵심 감정선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엘비스〉가 실패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이 영화에는 여러 드라마 요소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을 뿐이어서 무엇이 메인 드라마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각각의 요소가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자기주장만 하다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영화는 내레이터의 대사로 어떻게든 여기저기 널린 드라마 요소를 갈무리하려 하지만 유기적 연결 없이 대사만으로 이들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자신의 산만함을 자백하는 꼴이다.
영화가 최종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드라마는 팬들을 향한 엘비스의 사랑인 듯 보인다. 죽기 얼마 전까지 무대에 올라 열창하는 엘비스, 가족의 친밀감보다 공연할 때 팬과 호흡하며 느끼는 감정들을 더 아끼는 엘비스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상업주의적 착취를 거스르는 엘비스의 열정과 의지, 사랑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는 끝내 메인 드라마와 결합하지 못한 다양한 드라마 요소가 남아 있다. 엘비스의 재능(혹은 ‘상품성’)을 알아보고 매니저가 되어 그를 착취하는 톰 파커, 러브 스토리, 극적인 상승과 하강, 사치와 약물중독, 흑인 뮤지션과의 관계 등등. 이 중 몇몇은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와 어우러지지만, 대개는 다소 튀는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지한 대사를 하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까 싶었는데 그 부분은 살짝만 비추고 다시 쳐다보지도 않는 식이다. 이와 같은 유기적이지 못한 이야기의 반복은 영화 중반부에서부터 내내 반복되어 집중력을 떨어트린다. 많은 이야기와 드라마 요소를 갖추었다고 감동이 더 커지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밀도와 농도다. 영화의 헐거움은 자신이 발견한 엘비스의 모든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 한 바즈 루어만의 욕심이 패착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물랑 루즈〉와 〈위대한 개츠비〉 속 인물들의 얼굴과 대사가 떠올라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다.
엘비스가 흑인 음악과 맺었던 긴장 관계를 재현하는 영화의 방식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가정 형편상 흑인 마을에서 자란 엘비스는 어릴 때부터 흑인 커뮤니티에서 그들 음악의 수혜를 입으며 자랐다.* 백인 가수 중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흑인 음악 로큰롤을 부른 엘비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한편에는 영화 〈드림걸즈〉(2006)에 나오듯 엘비스가 흑인 음악을 도둑질해갔다며 잔뜩 분노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그가 아니었으면 흑인 음악이 주류로 부상하지 못했을 거라며 엘비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의구심이 들었던 건 엘비스가 보수주의적 검열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장면을 인종 정의와 연결한 연출이었다. 바즈 루어만은 엘비스를 흑인을 위해 싸운 투사로 만들고 싶었던 걸까? 엘비스가 인종 간 교류 등 변화하는 시대의 정수를 체화하여 보수적 연예계에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불러왔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를 엘비스의 의식적 선택이라고 주장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엘비스의 문화정치적 의미는 그가 흑인 음악을 차용해, 딱 달라붙는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선정적인’ 춤으로 소화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엘비스를 인종 정의를 위한 활동가로까지 만들었을 필요는 없단 소리다.
영화에는 엘비스가 ‘발이 없어 땅에 앉지 못하는 새’와 같았다는 대사가 나온다. 끊임없는 날갯짓은 새를 더 높은 곳에 올려주기도 하지만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 엘비스의 삶을 잘 압축한 표현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탁월한 비유에 맞춰 엘비스 삶의 다양한 요소를 조율하지 못한 채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의 과잉 나열에 그치고 만다.** 아무래도 이 영화는 바즈 루어만의 다른 히트작과는 달리 어설픈 트리거 남발에 실패해버린 드라마로 기억될 것 같다.
*엘비스는 당시 보수적인 백인들이 ‘여성스럽다’고 느낄 만한 패션과 몸짓을 체화한 자이기도 했다. 엘비스의 흑인성과 여성성은 곧 그의 ‘상품성’이 되었다.
**영화를 본 후 찾아보니, 로튼 토마토에 비슷한 평이 있었다. 평론가 Marcelo Stiletano는 “루어만은 모든 실존적 디테일에 큰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끝내 허위의 제단에 희생되었을 뿐이다(Even though Luhrmann seems really interested in all the existencial details, they end up sacrificed on the altar of pretension)”라고 이 영화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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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이면서 자살이자 동시에 사고인 것은?
빌어먹을 인연
독일인 작가 부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다. 어느 독일의 외딴곳에 사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아들 다니엘(밀로 다차도 그리너), 강아지 스눕과 함께 살고 있다. 귀여운 다니엘과 대학교수인 사뮈엘, 또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산드라를 보면 이 가족은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주 다투는 산드라와 사뮈엘. 이 감정싸움은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역시 이어졌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산드라와 조에의 대화를 방해하는 남편 사뮈엘. 산드라는 이제 따지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 대학생에게 ‘다음에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그녀를 보낸다. 각자의 시간을 갖는 두 사람. 아들 다니엘은 이런 부모의 관계가 익숙하기라도 한 듯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눈 밭을 몇 분 돌아다니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강아지 스눕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준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달려가는 스눕. 다니엘 역시 스눕에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 강아지를 쫓아간다. 강아지가 이끈 곳에는 아버지 사뮈엘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로 발견된 사뮈엘. 그리고 유력한 피의자가 된 산드라. 산드라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드). 이 세 사람과 강아지 스눕은 길고 긴 법정싸움을 맞이한다. 과연 이 추락의 전말에는 어떤 이면이 깔려 있을까?
우리가 아는 법정영화는 아니야
이 영화를 두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기생충>과의 공통점이다. 글쓴이가 <기생충>을 예시로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특징은 <추락의 해부>가 전형적인 범죄/스릴러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생충>이 전형적인 장르물을 표방했다면 문광 부부의 존재가 그렇게 입체적이지 않을 것이다. <기생충>은 문광 부부를 통해 계층 구분을 박살 내며 이 사회에 도사린 문제를 탐구한다. 이 점에서 <기생충>은 목표를 충실하게 이룬 성실한 영화가 됐다고 생각한다. 본작 <추락의 해부> 역시 이와 비슷하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한 남자의 살인사건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과 변호사를 보여주면서 포문을 연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내가 피의자로 재판대에 선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일반적인 범죄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화시킨 토대를 바탕으로 어떤 것을 탐구한다. 이 떡밥은 첫 장면부터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화는 원활하지 못한데,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플롯을 받아들이면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체감할 수 있다. ‘이 것’이 <추락의 해부>에서 유달리 방해받는 느낌이 강한데 이는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형식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다.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 자연스럽게 인간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전형적인 장르물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를 다방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떤 관점에서 읽어도 합리적이다. 살인일 수도 있고, 타살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이 <추락의 해부>의 각본은 이 세 죽음의 구분선을 흐려놓는 연출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법정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이 이 사뮈엘의 죽음을 다층적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요소다. 빠르게 전개하고 싶었으면 전형적인 법정물처럼 더 쉽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실제 법정을 보는 것처럼 느릿느릿하다. 왜? 재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물의 감정선을 폭넓게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를 비춘다. 이 유별난 관계는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불완전한 관계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여러 소재가 빛을 발한다.
<결혼의 풍경>과 <살인의 해부>
사실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노아 바움벡의 <결혼 이야기>다. 이 <결혼 이야기>의 감독이 1973년 잉베르 베리만이 만든 <결혼의 풍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이 <추락의 해부>는 <결혼의 풍경>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결혼의 풍경>과 <결혼 이야기>는 협력과는 저 멀리 떨어진 부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 <추락의 해부> 역시 함께 같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부부가 등장한다. 이 부부를 둘로 가르는 소재가 흥미롭다. 이 두 사람이 갈리는 계기도 앞에서 쓴 <결혼의 풍경> 같은 영화를 인용한 흔적이 난다. 하지만 원작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향을 풍기고 있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글쓴이는 두 주인공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에서 ‘고전적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가 편집이나 음향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나지만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 섬세하다고 느낀 것이 이 지점이다.
또 이 영화에 느껴지는 고전적인 향기는 <살인의 해부>라는 영화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살인의 해부>는 1959년에 발표된 영화다.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유사하게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법정극을 통해 <살인의 해부>는 말 그대로 살인(자)과 관련된 일들을 나노단위로 분해하면서 인간의 한계와 사법제도의 단점을 폭로한다. <추락의 해부>는 <살인의 해부>가 사법제도를 비판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해 역설한다. 논리가 뭘까? 주장은 또 뭘까? 논증은 뭘까? 이 많은 것들을 통해 어떤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지 않을까? 안다는 건 뭘까? <추락의 해부>는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의 인지단계를 해부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각본 능력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영화를 담기 위해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역시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선택한 좋은 수였다. 만약 살인사건이 아니라면 이 영화가 다루다 못해 병치시킨 두 가지 소재가 구현되지 않았을 것 같다.
쫓아가는 카메라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것은 촬영이다. 이 영화에서 앞/뒤/좌/우로 마치 틀이 있는 것처럼 오고 가는 카메라는 마치 관객을 법정으로 초대한 것처럼 움직인다. 이는 이 영화의 법정에서 산드라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적절한 촬영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법정 밖에서도 그대로 이어간다. 글쓴이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관객과 다니엘을 일치시킨다고 느꼈다. 다니엘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걸 안다'는 건 본디 불안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획 돌려서 시체가 발견된다거나 어머니 산드라의 얼굴이 어두컴컴 해진다던가 하는 장면이 몇 보인다. 이런 것들은 영화의 핵심인 인식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보다 용이하게 끌고 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어
글쓴이는 이 영화에 있어 '스눕'이라는 개가 의미심장했다. 이 스눕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적는다면 굉장히 큰 스포일러가 되니 다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써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인식론을 떠나 여성영화로서의 측면도 있다고 글쓴이가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단 스눕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건 구도만 봐도 이 영화가 가진 여성서사로서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진 풍부한 함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추락의 해부>가 그냥 1차원적인 여성영화인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여성 영화로 읽을 수 있는 측면을 인물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깔아놓고 있다. 주인공 산드라의 행적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가 가진 입체적인 특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여성영화로서의 맥락은 이 작품의 엔딩과도 관련이 있다. 많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의문점이 많을 것 같다. 이렇게 쭉 달려와서 도착한 결론이 명확하게 끝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괴물>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는 엔딩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사실상 이 <추락의 해부>가 끌고 가는 핵심 사건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원형처럼 돌고 돈다. 산드라를 둘러싼 환경을 구도로 비유한 것이다. 이것을 한 여성 캐릭터가 당당히 주체적으로 서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영화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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