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구름2025-06-13 20:08:02
허구와 현실은 이어진다.
결혼, 하겠나?
“영화는 일상의 지루한 부분들을 편집한 인생이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낭만적인 명언을 본 적 있었다. 어느 독립영화관 유리창에 붙어있던, 마치 그 말에 증명이라도 하듯 불규칙적이고 역동적으로 휘갈겨진 문구에는 큰 감동이 있었다. 그 자리에 서서 유리창을 한참 바라보며, 어둡고 차가운 유리창 너머의 현실을 동시에 느끼며 과거를 돌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고, 더욱 깊이 빠져들수록 영화는 현실을 위한 예술이자 그만큼 공부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가치는 조금씩 변질되어 이내 현실에서 도피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나를 최종적으로 기다린 것은 패기 있는 문구의 그림자가 씌어진 차가운 현실이었다. 특히나 대학교 졸업을 앞둔 현재 영화 속 인물들의 고민은 더 이상 허구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선택은 하나부터 신중해야 하며, 그 반대로 현실적인 고민은 유예 없이 불어나고 있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영화는 <결혼, 하겠나>였다.
<결혼, 하겠나>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가득 찬 영화다. <결혼, 하겠나>의 주인공 선우는 언젠가 교단에 올라설 것을 목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청년이다. 녹록지 않은 형편 속에서도 선우는 평생 사랑할 사람을 만났고 이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작은 것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는 그 둘은 상상으로나마 큰 것에서 큰 기쁨을 느꼈고, 상상이 망상처럼 불어나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이 웃을 수 있었다. 선우의 아버지가 급작한 뇌출혈로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이때부터 <결혼, 하겠나>는 자수성가형 이야기를 뛰어넘어 특정한 장르적 요소를 더해간다.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선우는 기초생활수급자 제도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제도에 선정되기까지 하나둘 차질이 생기며 웃음을 유발한다. 간발의 시간차 혹은 딱 하나 중요한 물건을 놓쳐서 차질이 생기기도 하고, 의식불명인 아버지나 첫째 바라기인 할머니와의 답답한 의사소통은 재미를 주면서도 동시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힘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웃음이 속 시원하게 나오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일종의 해학적인 웃음일 뿐, 영화 속 현실과 그 현실에 살짝씩 겹치는 나의 모습에서 그 웃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역설적으로도 <결혼, 하겠나>는 재난영화의 모습 역시 갖춤으로써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재난영화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몇 가지 꼽을 수 있다. 극단적 상황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 원인불명의 공포, 그리고 고유의 시각적인 경험까지 주로 언급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명과 암이 있기 마련이지만 재난과 같은 상황에서 입체적인 면모란 사치로 오해되기 쉽상이고, 되려 극단적인 사상이 극단적인 상황에 맞물려 힘을 얻고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타인의 색깔을 배척한다. 오랜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리고 그것의 성찰 역시 순환의 역사이듯 우리 모두 자유롭지 못하다. 일상적 재난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의 근간인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서로의 갈등마저 부추기는 태도, 소수자들은 목소리를 외치는 상황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 모든 이면을 담아낼 열정을 가진 예술인들은 가지가 잘려 나가고 있다. <결혼, 하겠나>는 그중에서도 ‘가난’이라는 재난에 주목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전제가 있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하고 자원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선택의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를 판가름하기 위해 무게를 재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뿐이고 우리는 갈등한다. 타인의 선택을 가로막으면서까지. <결혼, 하겠나>에서 다행이면서도 무서웠던 점이 있었는데, 작중에서 악인은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도 본인의 욕심 이상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음은 물론, 타인의 슬픔에 기꺼이 공감하고 그것의 무게를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난 앞에선 모두가 제 몫이라도 챙기는 데 급급할 뿐이다. 그 좁은 선택의 폭에서 타인이란 얼마나 중요할까. 마치 수년 전 우리가 직접 겪었던 팬데믹처럼. 재난영화 특유의 원인불명의 공포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등장인물들은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시달리듯 서로의 거리를 물심양면으로 유지한다. “모질지 못하면 계속 가난하게 산다”라는 선우의 큰아버지 대사처럼.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가 피해자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결혼, 하겠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여자친구 지은의 상상 속 결혼식이었다. 꽃이 가득한 언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둘러싸인 둘의 모습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고, 앞으로의 걱정 따위는 별일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듯 당당한 발걸음조차 너무나도 아름다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극이 시작될수록 현실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고 조금씩 웃음은 줄어들었다. 오히려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하고도 쓸쓸한 진리를 상기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결혼식 장면은 허구이다. 그 허구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고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었기에 영화를 다 본 시점에서 결혼식 장면은 비극처럼 보였다. 과연 허구란 망상일 뿐이고, 비극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우리는 허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허구는 현실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 심지어 허구의 그림자를 담은 이 영화조차 허구인데. 현실을 허구로 대체하려는 삶은 얼마나 위태로울까. 하지만 동시에 허구이기에 가능한 것들도 있다. 현실이 아니기에 부담 없이 꿈을 펼칠 수 있고 완벽한 목적지가 아니더라도 방향은 되어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그것이 예술이라면 큰 부담 없이 현실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렇게 세상의 다양한 각도를 경험하고 공감하며, 때로 비판함으로써 풍부한 자아를 갖추게 된다. 물론 이 모든 창작의 긍정적인 면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균형이 중요하다. 나의 삶과 예술의 균형, 상상과 괴리의 불의에도 당연한 이치라고 태연하게 넘길 수 있는 자세 말이다. 영화는 허구이지만 사회의 사각지대에 주목하려는 그 힘은 이 세상에 실존하고, 영화에 위로받고 공감하고 힘을 얻는 것 또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계절만 맞으면 쉽게 볼 수 있는 핑크뮬리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들에서도 그들은 다른 것을 보았다. 상상 속의 결혼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현실이 길을 가로막을지 결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꿈을 간직한 채 서로를 믿고 나아가기로 한다. <결혼, 하겠나>는 팍팍해진 삶 속에서 예술을 놓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를 포함해 불안한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젊은 세대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