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4-11-25 16:07:38
위키드 | 뮤지컬보다 더 화려하게, 풍성하게, 날카롭게
<위키드>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초록색 피부와 마력을 타고난 마녀,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그녀는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따돌림과 차별 대우를 당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시간이 흘러 여동생 '네사로즈'(마리사 보데)가 오즈의 마법 학교인 쉬즈 대학에 입학하고, 다리가 불편한 동생을 돕기 위해 입학식에 동행했던 엘파바는 뜻하지 않게 교장 '마담 모리블'(양자경)의 눈에 띄어 같이 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서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며 외톨이로 지내던 엘파바. 하지만 그녀는 룸메이트가 된 것을 계기로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와 우정을 쌓아 나가고, 마담 모리블과의 마법 수업에 열중하며 마력을 갈고닦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엘파바는 어릴 적부터 롤모델이었던 '마법사'(제프 골드블룸)의 초대를 받아 글린다와 함께 에메랄드 시티로 향하고,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두 친구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뮤지컬과 영화 사이의 중용
2012년 겨울에 개봉한 <레미제라블>이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자 유니버설 픽처스는 본격적으로 유명 뮤지컬 영화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높은 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할리우드에서는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성공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뮤지컬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뤄졌으니, 그 반대로 접근하자는 아이디어는 어렵지 않게 떠올랐을 테니까.
다만 유니버설 픽처스의 프로젝트는 뜻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레미제라블> 다음 주자들은 영화와 뮤지컬이라는 매체의 차이점을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줄줄이 혹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 <캣츠>는 뮤지컬 무대를 스크린으로 똑같이 옮기려고 배우에게 CG로 고양이 분장을 덧입혔다가 기괴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몇몇 뮤지컬 넘버를 삭제한 <디어 에반 핸슨>은 원작과 달리 스토리 개연성 문제를 노출하고 말았다.
동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위키드>는 앞선 실패를 확실히 반면교사로 삼은 듯하다. 원작 팬과 영화 관객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곳곳에 드러나기 때문. 뮤지컬 넘버를 줄이지 않는 대신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눴고, 뮤지컬보다는 판타지 장르를 강조하면서 일반 관객에게 어필했다. 이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2부를 기대케 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만으로도 <위키드>는 목적을 충분히 이뤘다.
청각 대신 시각, 뮤지컬 대신 판타지
<위키드>는 뮤지컬의 1막 내용을 다루며, 그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엘파바가 서쪽 마녀로 거듭나는 'Defying Gravity'다. 문제는 이 노래가 1막 끝에 나온다는 것. 그러다 보니 <위키드>는 뮤지컬 영화인데도 노래만으로 영화 관객을 매료하는 데 한계가 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 높은 넘버가 부족하기에 'Dream' 같은 노래로 중간중간 분위기를 환기한 <레미제라블>과 같은 방식을 활용할 여지 자체가 없다.
그래서일까? <나우 유 씨 미> 시리즈 및 <스텝 업> 시리즈 연출 및 제작을 맡았던 존 추 감독은 노래보다는 노래를 보여주는 방식에 힘을 줬다. 특히 판타지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존 추는 <인 더 하이츠>와 같은 작품에서 진하고 다양한 색감, 선명한 영상, 리드미컬한 편집과 같은 특징을 선보였다. 이러한 기교는 불가해한 현상을 신비하고 경이롭게 보여줘야 하는 판타지 장르에 최적화되어 있다.
존 추의 기교는 엘파바와 글린다가 에메랄드 시티를 구경하는 'One Short Day' 시퀀스에서 빛을 발한다. 두 주인공의 시점에서 에메랄드 시티의 거리와 전경을 자유롭게 오가며 비현실적인 장면을 더욱 과장해 흥미롭게 풀어낸다. 원형으로 움직이는 도서관을 배경으로 한 'Dancing Through Life'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나유 유 씨 미 2> 속 카드 마술 시퀀스처럼 등장인물과 카메라의 다채로운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1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Defying Gravity' 시퀀스의 연출을 보면 <위키드>가 뮤지컬의 청각적인 즐거움보다는 판타지 영화의 시각적 쾌감에 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맨 오브 스틸>처럼 상하 움직임과 속도감을 강조한 엘파바의 활공 장면이 오즈의 화려한 산과 숲을 배경으로 펼쳐질 때, 노래와 가사 자체의 감동도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현실을 후벼 파는 판타지
이처럼 뮤지컬보다는 판타지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선택은 스토리와 메시지도 더 명확하게 만든다. <위키드>는 사람이 원래부터 악하게 태어나는지, 아니면 자라면서 악하게 되는지에 관한 오래된 논쟁을 다룬다. 이때 판타지라는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덕분에 차별과 분리주의에 대한 <위크드>의 풍자와 비판은 현실의 숨은 체계와 구조를 부드럽게 드러내는 데 성공한다.
<위키드>에는 크게 두 종류의 차별이 있다. 피부색과 동물 차별이다. 둘은 얼핏 보기에 다른 유형의 차별 같다. 전자는 사람들의 인식에 기반한 반면, 후자는 동물이 교수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등 정책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 실제로 극 중에서도 엘파바가 동물 차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는 두 종류의 차별은 별개로 자행된다. 그전까지 엘파바는 다르게 생겼을 뿐, 서쪽 마녀처럼 잔악한 인물로까지는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이 엘파바를 마녀로 규정하며 수배를 내리는 장면을 곱씹어 보면 두 차별은 결국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물 차별과 엘파바 수배 모두 마녀 사냥의 일환이기 때문. 특히 중세 유럽에서 자행된 마녀사냥은 진짜 마녀보다는 주류 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 탄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수 집단을 악마화하면서 공동체 질서를 강화하고 결집을 도모하는 전략적인 접근인 셈이다.
즉, <위키드>는 판타지 세상에서 마녀 사냥을 재현하면서 권력의 선택에 따라 누구든 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엘파바는 그저 피부색만 달랐지만, 인간 중심 질서를 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동물보다 더 악한 존재로 공표된다. 이처럼 동물과 엘파바 같은 사회적 소수자를 악인으로 낙인찍고 탄압하는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유대인과 집시를 절멸시키려 한 히틀러를 비롯해 여러 권력자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구조를 넘어서는 개인의 힘
현실의 구조를 지적할 뿐만 아니라 희망의 끈도 놓치지 않기에 <위키드>가 들려주는 서쪽 마녀 이야기는 더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이 있다. 극 중 글린다는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피부색을 비롯한 여러 이유로 소수자를 차별하면서도 그 행동이 차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즉, 그녀는 일반적인 집단, 사회적 다수에 속하는 이들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캐릭터다.
그렇지만 <위키드>는 개인의 양심이 깨어나면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엘파바를 놀리려고 마녀 모자를 선물하면서 파티에 초대한 글린다. 하지만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에 에워 쌓인 엘파바를 보면서 그녀는 자기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며, 엘파바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또 설령 본인은 마법사나 마담 모리블에 못 맞서도, 엘파바에게 망토를 둘러주며 그녀의 비행을 돕는 용기도 보여준다.
마법사의 성에서 추락하던 엘파바가 마침내 날아오르는 순간은 글린다의 응원과 조력 덕분에 단순한 쾌감 이상의 카타르시스로 가득하다. 마치 히틀러와 나치에 대놓고 저항은 못해도 남몰래 유대인을 돕던 사연을 보는 듯하기 때문. 특히 두 여성의 관계가 2부 내용 전개의 핵심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풍성해진 그들의 우정은 <위키드: 파트 2>에 대한 기대를 더욱 돋운다.
여전한 매체의 한계
다만 <위키드>가 뮤지컬과 영화라는 매체의 간극을 완전히 메우지는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원작의 구조를 유지하며 판타지 색채를 덧칠한 선택이 영화적 관점에서는 종종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 당장 연결이 어색한 시퀀스가 적지 않다. 2부에서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 사자, 양철인간, 허수아비 등으로 이어지는 중요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맛보기처럼 보여주는 대목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2부 전개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장면이지만, 1부의 중심 내용인 엘파바의 성장 서사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세밀한 스토리텔링이 어려운 장르이기에 엘파바와 '닥터 딜라몬드'(피터 딘클리지), 엘파바와 '피예로(조나단 베일리)' 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풀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의 서사를 보여주며 복선을 쌓는 과정은 곁가지이자 수박 겉핥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1부와 2부로 나눈 구성의 한계도 숨겨지지 않는다. '기승전결' 중 '승'까지 다루고 있으니 '기'의 단계가 특히 지루해진다. 물론 다양한 시도로 한계를 극복하려고는 한다. 엘파바의 학교 생활, 엘파바와 글린다가 친구가 되는 과정을 묘사할 때는 <해리포터> 같은 마법학교 배경의 판타지처럼 주인공들의 에피소드를 여럿 풀어놓는다. 여기에 노래가 더해지다 보니 마치 <하이스쿨 뮤지컬> 같은 분위기도 조성된다.
하지만 엘파바가 겪을 차별 대우나 사건이 예상 가능한 지라, 원작 넘버를 다 살리려고 분량을 줄이지 않은 선택은 중반까지의 흐름이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레미제라블>이 '아베쎄의 벗들' 분량을 줄였듯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남는 지점이다. 그 결과 16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절대적으로도 길지만, 체감상 더 길게 느껴질 여지가 충분하다.
마지막으로는 몇몇 기술적 단점이 눈에 띈다. 80년대 분위기가 나는 오프닝 자막은 <위키드>라는 작품의 위상과 규모에 비하면 성의 없어 보일 정도로 당황스럽다. 또 라이선스 공연의 가사를 참조하며 한국어판 가사에 맞추려 한 것은 알겠으나, 'Popular'나 'Unlimited' 같은 단어를 음역한 자막은 영화 관객을 배려하지 않는 듯 느껴진다. '뮤지컬'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라는 관점에서 가사를 번역하면 어땠을까 싶다.
Acceptable 무난함
판타지로써 뮤지컬 영화의 장단점을 기묘하게 상쇄시키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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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의 X가 파고드는 무수한 내면의 충동.
희망보다는 절규가 무수히 펼쳐지는 이 영화는 온통 공허한 소음으로 가득하다. 푸른 수염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음투성이의 영화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통해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흠집 가득한 잿빛의 건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잿빛의 건물에서 핏빛 가득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공통의 특성을 가지는 이 사건을 파헤치던 다카베는 이 의문에 깊숙이 파고들며 누군가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대면한다. cure(치료)라는 일념 하에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살인’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끔 만든다.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이 하고픈 이야기는 무엇인지, 아주 많이 사소하지만, 사람의 내면을 아주 깊고 면밀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걸까. 이름도 기억도 없는 그 남자는 집요하게 그 이상을 넘어 다카베에게도 끊임없이 질문을 내밀지만, 그 질문은 쉽사리 닿지 않는다. 마미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솔직한 그의 속마음까지 새어 나오게 한다. “당신은 저놈들과 달라. 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잖아.” 다카베는 해결되지 않은 큰 사건에 빠져들면서도 안과 바깥을 구분하며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간다. 와이프가 빨래 없이 돌린 텅 빈 세탁기를 끄고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건이 없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빌 것만 같은 그에게 진정한 편안함이 다가온다. 영원히 텅 빈 상태로 남아도 일시적 해방이 유일한 치료법이 된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지 않는 잘못된 방식을 전도사가 이용함으로써 이 망가진 세상의 망가진 치료제를 끊임없이 퍼뜨린다. 미지의 X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잠식하듯 무수한 공포를 가져다준다. 눈으로 보여주는 공포보다는 빠져들듯 관객을 장악하는 이 영화는 빛보다는 어둠에 너무나도 쉽게 스며드는 사회를 비추고 있다. 금방 찍은 듯한 느낌으로 특유의 서늘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배우들과 영화 전반의 이야기를 극대화한다. 구름 같은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스산함만이 존재한다. 끝끝내 사라지지 않은 치료법이 다시 다른 이에게 손을 뻗치며 또 다른 순간을 만들어내어 결국 스며들 수밖에 없는 마지막을 장식하며 모두의 목을 조여 온다. 찰칵-뚝뚝-치 이익,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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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재개봉 영화 모음 zip.
3월 재개봉 소식 전해드립니다.
개봉 10주년을 맞은 <위플래쉬>, <존 윅>부터 디렉터스 컷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문제작 <크래쉬: 디렉터스 컷>까지!
우에노 주리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는 <스윙 걸즈>는 현재 씨네픽 인스타그램에서 시사회 이벤트도 진행 중이니, 놓치지 마세요!
*재개봉 영화 목록 및 일정은 변경, 추가될 수 있습니다.
*극장별로 개봉영화가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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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청각 장애인 여성 복서.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영화 한 편이 그려졌을 것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클라이맥스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고, 희망찬 미소 혹은 결연한 눈빛 같은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 그러나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인가? 그렇다고 치더라도, 경기에 승리하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사실 장애 유무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이런 스토리에 속절 없이 약하다. 그러니까 신체의 한계까지 몰아붙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의 스포츠에,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펼쳐지는 누군가의 삶에 매번 감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를 더 보고 싶은지 물어보면, 좀 망설여진다. 보기 전에도 다 본 느낌이 들어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씨네21> 인터뷰에서 “수많은 권투 영화 명작이 있다. 그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건 큰 승리 이후에도 인생은 계속되고 시행착오 또한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 20대 후반쯤 되면 지금 삶의 방식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도 될 것인가 점검하게 되지 않나. 케이코 역시 권투로 정점을 찍고 난 후 권투를 계속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라고 밝혔으니까.
그 마음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메시지는 이를테면 분자 단위 정도의 크기로 잘게 곱게 분쇄되어 있었고, 영화를 보는 동안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게 내게 녹아 스며들었다. 연출도 연기도 모두 훌륭해서 그런가? 소리 없이 전해지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구나.
영화는 오가사와라 케이코라는 복서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하고, 우리는 어쩐지 ‘실화 바탕’이라는 말에 자꾸 집중하게 된다. 마치 거기에 단호하게 선을 긋듯이, 영화가 시작되면 오가와 케이코라는 복서의 기본 정보가 텍스트 자막으로 깔린다. 그리고 체육관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어쩐지 ‘여기까지 기본 정보는 줬으니, 이다음부터는 영화로만 집중해 줘’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 내리는 고요한 날, 체육관 바닥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낡은 운동기구가 삐걱거리고 줄넘기가 바닥에 탕탕 부딪는 소리가 우리를 영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필름의 질감 안으로. 남녀 탈의실조차 분리되어 있지 않은 낡은 체육관에서, 필담으로 훈련을 시작하는 케이코의 세상으로.
필름에 담긴 도시 외곽은 어쩐지 채도가 낮다. 곳곳에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불빛들만 담겨 있는 시간 케이코가 달리기를 위해 집을 나설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른 새벽의 전등들은 왜 그리 피로해 보일까? 밝지 않은 불들이 서서히 켜지는 어슴푸레한 새벽은 왜 스산해 보일까? 그 도시에서 케이코는 채도가 낮은 푸른색으로 표표히 존재하고 있다. 체육관에서 입는 티셔츠도, 성실하게 훈련 일지를 기록하는 노트 옆의 파란 얼음 컵, 한 번씩 덧바르는 짙푸른 매니큐어도.
영화는 케이코의 푸르스름한 세상을 유난스럽지 않게 펼쳐 보인다. 한겨울에 웬 선풍기일까 하고 보면 이내 그 선풍기가 핸드폰과 연동된 아침 알람임을 닫게 되고, 초인종이 울릴 때 집 안에서 플래시가 번쩍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일터에 수어로 말을 걸어오는 동료도 있고, 케이코에게 살가운 수어로 다가오는 남동생도 있지만, 케이코의 언어는 수어만이 아니다. 케이코에게는 다양한 소통의 수단이, 다양한 언어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싱이 그의 언어가 된다. 이 영화는 케이코가 복싱을 언어로 체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전은 혼자 할 수 없다
케이코에게 다양한 언어가 있지만, 케이코는 그 언어들을 적극 사용해 외부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케이코는 자기 세계가 뚜렷한 사람으로 보인다. 관장님 말대로 복싱에 재능은 없지만 (청각 때문이 아니라 “작고, 짧고, 주먹도 느리”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 왔다. 복싱은 원래도 개인 스포츠지만, 경기 중에도 아무 훈수를 들을 수 없는 케이코에게는 더더욱 철저하게 자기만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고민하는 중에도 케이코는 자신의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말하면 기분이라도 나아지지 않냐”는 남동생에게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며 말하지 않으려 하고, 사람은 결국 혼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고함이 케이코 나름의 강인함일 수 있을 것이다. 복싱은, 특히나 케이코의 복싱은 철저하게 혼자 하는 개인전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러나 아무리 자기 세계가 견고한 사람이라도 혼자 살 수는 없다. 개인전인 복싱도 사실 상대와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혼자 할 수 없는 스포츠이다. 케이코의 세계에도 이런저런 고민들이 들어온다. 프로가 된 것은 대단하지만 이제 그만하면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만류, 갑작스럽게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를 모든 체육관에서 기꺼이 받아주는 것은 아니므로, 케이코는 복싱을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관성과 타성을 뚫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지점이다. 진짜 계속할 마음이 있는지. 계속할 것인지. 계속할 수 있는지.
가끔은 그런 질문들이 삶에 벼락같이 찾아오는 일도 있다. 어쩌면 체육관이 갑작스럽게 문을 닫기로 한 것 또한 그런 순간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언젠가 올 날이 코로나19가 앞당겨 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도 있지만, 도시 외곽의 낡은 복싱 체육관의 경우처럼 이미 멀어져 가던 것들을 코로나19가 가속화한 것들도 있다. 마스크로 인해 입을 읽어낼 수 없어 언어 하나를 잃은 청각 장애인들의 일상도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케이코와 부딪혔을 때 무례한 언사를 펼치던 어떤 행인처럼, 누군가의 언어 하나를 틀어막는 일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던 방향성인지 모른다.
그러니 코로나19는 특수 상황이었다고, 이 바이러스가 한물갔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길 수는 없다. 코로나19 없이도 언젠가는 왔을 날이다. 관장님의 육체처럼, 낡은 복싱 체육관처럼, 모든 것은 언젠가 쇠잔해지니까. 우리 삶은 날마다 쇠잔해지는 가운데 우리에게 몇 개의 선택지 사이 고민을 계속 요구할 것이다. 완승하고 링 위에서 기뻐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링에 오르기 위해 땀 흘리는 날이 있으며, 때로는 그조차 막막해지는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어딘가에서
복싱은 무수한 반복이다. 고쳤다고 생각한 버릇을 또 고치고, 뛴 곳을 또 뛰고. 자꾸 힘이 들어가는 몸에 힘을 빼고, 심호흡을 하면서. 숨 하나씩, 주먹 하나씩, 쌓아 올리는 하루하루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힘들고 고단한 길이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이 영화의 엔딩이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눈 부릅뜨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리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훅 다가와서. 세상은 복싱이 사장되어 간다고 하고, 사실 필름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는 말을 많이 듣지. 그밖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어떤 것들 또한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한 면면들은 어딘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잠깐 지나가는 것 같았던 의사 역할을 나카무라 유코가 맡고 있어, 잠시지만 반가웠던 것처럼. 곳곳에, 어딘가에, 빛나는 면면들이 여전히, 있다.
영화 내내 도시의 불빛과 질감이 피로해 보이고 스산해 보이기만 했는데, 문득 그 불을 밝히며 하루하루를 쌓고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힘이 솟았다. 눈을 마주할 상대가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게 복싱이라는 스포츠의 가장 좋은 점인지도 모르겠다.
겁 많은 사람이 복싱을 하면 등을 보이고 도망갈 것 같지만 오히려 앞으로 뛰어든다. 몸을 숙여 피해야 하는데, 어쩐지 몸을 피하는 그 잠깐이라도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불안해, 피하지 못하고 주먹만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가곤 한다. 케이코는 프로 선수니까 나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점, 두려움으로 나아간다는 나쁜 습관 하나는 공통점이었다.
케이코가 배워야 했던 것은, 물러서지 않는 마음. 물러서지 않고 대신 가드를 든든하게 올릴 것. 세상에는 겁나는 일이 많지만, 도망치고 싶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진퇴양난에 빠지는 순간의 괴로움도 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물러서지 않기, 대신 가드를 올리기.
싸울 마음이 없으면 계속할 수 없는 게 복싱이다. 고민 끝에서 51:49의 아슬아슬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만드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삶에서 결정적으로 소중한 것들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눈물 고인 눈으로 주먹을 휘두르던 케이코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일 체육관에 가면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케이코가 몇 번씩 하던 콤비네이션을 연습해 보기로 다짐했다. 이 동작을 잘하려면 어퍼와 위빙 사이에 몸을 잘 틀어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한쪽 발은 계속 단단한 축으로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이다. 승패와 상관없이 마침내 계속 “할 마음(やる気)”이 생긴 케이코의 모습이 링 위에서 드러났듯이, 나 또한 한쪽 발을 단단한 축 삼아 또 계속해 보기로 한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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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크라운> 시즌 6 | 유종의 미를 가린 문제 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찰스'(도미닉 웨스트)와의 이혼 후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엘리자베스 데비키). 그녀가 파리에서 이집트 억만장자의 아들 '도디 알파예드'(칼리드 압달라)와 휴가를 즐기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엘리자베스'(이멜다 스턴톤)와 왕실은 위기에 휩싸인다.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내몬 냉혈한이라는 비난 속에서 대중의 지지라는 왕실의 기반이 흔들렸기 때문.
한편 '윌리엄'(에드 맥베이)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울함을 떨치지 못한다. 다이애나의 인기와 언론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자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악화일로다. 그가 왕손으로서의 의무만을 강조하고, '카밀라'(올리비아 윌리엄스)와의 재혼을 추진하기 때문. 그런 그의 앞에 '케이트'(메그 벨아미)가 나타나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면서 윌리엄은 숱한 풍파 속에서도 왕관을 지키는 할머니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리버스 <왕좌의 게임>, <더 크라운>의 끝
2019년 4월 14일. <왕좌의 게임> 시즌 8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공개됐다.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전 세계 팬들의 이목이 쏠렸고, 첫 화 북미 시청자수는 1,176만 명에 달했다. 그로부터 약 1달 뒤, 팬들은 분노에 가득 찼다. 모든 캐릭터의 서사는 붕괴됐고, 암시와 복선도 회수하지도 못한 채 막을 내렸으니까.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장 인기 있는 판타지 드라마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왕좌의 게임>의 끝은 실망스러웠다.
넷플릭스 <더 크라운>의 끝은 정반대다. <왕좌의 게임>이 HBO의 핵심 콘텐츠였듯이, <더 크라운>도 넷플릭스의 핵심 시리즈 중 하나였다. 에피소드 하나에 제작비 140억 원을 투입할 정도로 공들인 작품이었고, 영국 왕실과 갈등을 빚어 이슈를 만들기도 했다. 다만 마지막 시즌의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파트 1 공개 첫 주를 제외하면 넷플릭스 순위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내에서는 TOP 10에 한 번도 이름을 못 올렸다.
그러나 성적만으로 <더 크라운>의 마지막을 평가할 수는 없다. 피날레 결과물로 팬들을 낙담시킨 <왕좌의 게임>과는 다르기 때문. <더 크라운> 시즌 6은 첫 시즌부터 이어진 질문에 충실히 답하며 막을 내린다. 왕관의 무게를 확실하게 보여주며 영국 왕실을 비롯해 현대 사회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의의를 끝내 납득시킨다. 소재의 무게감만큼이나 품격 있는 퇴장이다.
모든 시즌을 관통한 미덕, 왕관의 무게
사실 영국 왕실은 수많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슈퍼 스타다. 그런데도 <더 크라운>은 유달리 인기를 끌었다.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우선 놀라운 싱크로율을 자랑한 영국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클레어 포이, 맷 스미스, 바네사 커비, 엠마 코린 등 신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막대한 제작비 값을 한 뛰어난 고증, 왕실의 비밀을 엿본다는 쾌감까지 고려하면 관심을 못 받는 게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더 크라운>은 화려한 재현 다큐멘터리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대신 <더 크라운>은 드라마로서 자기만의 미덕을 보여줬다. 핵심은 정반합이다.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이어진 전통을 유지하려는 이들과 그 전통에 회의를 표하며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의 충돌을 그려냈다. 자칫 화려한 포장지에 가려질 수 있는 영국 왕실의 헤겔적 행보를 제시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 방식이 때로는 인간적이고, 때로는 진중했기에 <더 크라운>은 흥미로웠다. 왕실 구성원은 어느 때보다 인간적이었다. 언니에게 가려진 영원한 이인자 마거릿 공주. 아내가 여왕이라서 자기 경력과 꿈을 포기해야 했던 필립 마운트배튼. 후계 1순위라는 이유로 부모의 사랑과 인정 대신 의무부터 배운 찰스 3세까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왕실에서 태어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이들의 고충이 잘 느껴졌다.
제도와 정책의 문제도 건드렸다. 시민, 언론, 총리의 입을 빌려 질문을 던졌다.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왕실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쇠락한 영국과 영연방에서 여왕의 역할은 무엇인지. 수십 년 된 왕실 요트 브리타니아가 퇴역하고, 마지막 식민지 홍콩도 반환된 가운데, 여왕의 존재의의는 무엇인지. 이처럼 보존과 개혁 사이 필연적 긴장을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수습할지 지켜보는 재미가 이 시리즈의 본질이었다.
명예로운 피날레
<더 크라운>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제를 활용해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해결책을 들여다본다. 다이애나의 죽음으로 시작된 극은 찰스와 카밀라의 재혼으로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 2세의 양위 문제를 거론한다. 대체 왜 여왕은 왕위를 넘기지 않는가?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왕실은 적당한 나이에 양위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왜 영국은 예외인가?
드라마는 마지막 시즌다운 방식으로 여왕의 고민을 드러낸다. 노년의 엘리자베스 앞에 중년 '엘리자베스'(올리비아 콜먼)가 나타난다. 그녀는 엄마로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여왕의 자책감을 상기시킨다. 나이 들고 지친 엘리자베스는 흔들리고, 이에 여왕은 양위를 결정한다. 하지만 곧이어 청년 '엘리자베스'(클레어 포이)가 여왕을 만류한다. 자기는 죽을 때까지 왕관에 봉사하기로 서약했으며, 따라서 양위는 곧 왕실의 붕괴를 뜻한다고.
이 과정에서 왕관의 무게가 비로소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다. 여왕은 인정한다. 왕관도, 군주도 무용하다고. 모두가 평등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권리를 주장하는 왕관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고. 그렇기에 신성함은 역설적으로 왕관의 전부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에서 왕관에 깃든 신성함이 없다면, 군주를 군주답게 만드는 어떤 권위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결국 엘리자베스는 양위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신의 대리자가 되겠다고 서약한 군주가, 스스로 서약을 포기하면 왕관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유일한 존재 의의를 잃으면, 더 이상 왕실을 지탱할 수 없으므로. 그래서 그녀는 인간적인 한계를 숨긴 채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다. 자기를 향한 모든 요구와 불평을 감내하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다. 이 해답은 실제 역사와 오버랩되면서 아름다운 퇴장으로 이어진다.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다
품격 있는 퇴장은 의문을 더 키운다. 여섯 시즌을 관통하는 질문에 품격 있는 답을 내놓은 드라마인데 왜 흥행 성적은 명성과 인기에 비해 부족한 걸까? 이 질문에도 여러 이유를 떠올릴 수 있다. 드라마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궁금한 사건이 없을 수도 있고, 드라마에 너무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다만 특히 두 개의 이유가 중요해 보인다. 하나는 각본이고, 다른 하나는 공개 방식이다.
<더 크라운> 시즌 6은 중반부터 새로운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다.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윌리엄 왕세자가 왕실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이 전개가 단조롭고, 표면적이다. 윌리엄의 성장은 동생 해리와의 갈등 속에서 드러난다. 다이애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아버지를 이해하는 윌리엄과 그런 형에게 실망한 해리. 이들의 관계는 엘리자베스와 마거릿의 갈등을 다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윌리엄의 서사도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드라마는 윌리엄과 캐서린의 로맨스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정작 윌리엄과 찰스 부자의 갈등, 윌리엄과 엘리자베스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몇 번 등장한다.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 3세가 서너 시즌에 걸쳐 대립한 것에 비하면 상당한 급전개다. 그러다 보니 왕실에 불만을 품었다가 조금씩 왕관의 의무를 깨닫는 윌리엄의 내적 변화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각본 문제는 전반부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에피소드 4까지는 다이애나의 멜로드라마가 다시 한번 펼쳐진다. 그런데 같은 내용은 이전 두 시즌에도 나왔고, <스펜서>를 비롯한 다른 미디어에서도 숱하게 다뤄진 바 있다. 설령 첫 화에서 다이애나가 죽어도 이해 못 할 시청자가 없을 정도로. 이처럼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다 보니 초반부는 루즈하고, 후반부는 정작 하고 싶은 말에 힘을 줄 시간을 잃어버린다.
넷플릭스의 전략적 실패
이에 더해 넷플릭스도 공개 방식을 잘못 판단한 듯 보인다. 넷플릭스는 최근 한 드라마를 두 파트로 나눠서 공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파트 1이 파트 2에 대한 기대감을 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 크라운> 시즌 6도 마찬가지다. 파트 1은 다이애나가 사망한 4회까지를 보여줬다. 나머지 에피소드 6개는 파트 2로 공개됐다.
문제는 상술했듯 파트 1의 내용이 지난 시즌과 비교해도 새롭지 않고, 다른 작품과 비교해서도 신선하지 않다는 것. 달리 말해 시청자 입장에서는 파트 1을 본 뒤 파트 2를 기다릴 이유를 찾기 어렵다. 파트 1 공개 후와는 달리, 파트 2가 공개 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점이 그 방증이다.
<더 크라운> 시즌 6은 일종의 헌정작이다. 사실 왜곡 문제 때문에 왕실과 줄곧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더 크라운>이기에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여왕의 심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왕실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와 지지가 높아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품격 있는 마무리가 작품 내적 문제와 잘못된 전략으로 인해 온전히 조명받지 못하는 게 옥에 티일 뿐이다. 리버스 <왕좌의 게임>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Acceptable 무난함
온전히 조명받지 못해 아쉬운 품격 있는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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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노란색을 설명해보라 한다면
!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감독) 야마다 요지
출연) 다카쿠라 켄, 바이쇼 치에코, 타케다 테츠야, 모모이 가오리
1977년 존 G. 아빌드센 감독의 <록키>가 세계적으로 흥행을 기록하고 있을 때, 일본에선 한편의 로드무비가 개봉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다. 이 영화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과 키네마 준보상을 휩쓸만큼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11년 드라마로 리메이크 될 정도로 오랫동안 회자된 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고, 드디어 올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아카데미상, 키네마 준보 ‘1위’
최근 <아노라>, <브루탈리스트>와 같은 미국 아카데미 후보작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품성이 보장된 영화들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아카데미상은 자국에서도 인정받는 권위 있는 시상식이며, <드라이브 마이 카>, <괴물> 등의 작품들이 수상하였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제 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총 8관왕에 올랐다. 키네마 준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잡지로, 1929년부터 매년 시상을 해왔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일본 국내 영화 1위에 선정되었고, 해외 영화 1위가 바로 앞서 언급한 <록키>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대중성,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로드무비의 매력을 한껏
우리가 드라이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빠른 속력으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 영화의 한 장르인 ‘로드무비’는 등장인물의 여정에 동참하여 그들이 지나치는 곳들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델마와 루이스>, <그린북>을 대표적인 로드무비로 볼 수 있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에서도 삿포로로 향하는 빨간 자동차를 볼 수 있는데, 익스트림 롱샷으로 촬영된 장면들을 보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연상되기도 한다. 로드무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인물들의 상황, 감정에 몰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극 속 인물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에 대해 알아가고,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를 내심 바라게 된다. 이 영화 또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전사(前事)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금세 좁힌다.
누군가 노란색을 설명해보라 한다면
‘열정, 사랑, 뜨거움’의 빨강. ‘냉혈, 우울, 차가움’의 파랑. ‘어둠, 악, 권위’의 검정. 색이 주는 느낌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노랑’을 설명하고자 하면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유채꽃’, ‘경고 표지판’ 등 사물이 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선 ‘노란색’이 핵심으로 다뤄지며, 정확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노란 손수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색을 강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색을 영화의 전반에 녹여내는 것과, 중요한 장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 후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후자에 가깝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노란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노란색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제목은 다시금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여태까지 멀리서 잡아왔던 익스트림 롱샷은 노란 중앙선을 비추는 시점샷으로 변화되고, 비로소 관객은 그들의 뒷좌석에 탑승해 함께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을 때, 노란 풍경이 주는 그 모든 것을 인물의 눈이 된 관객의 시선에 담아낸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듯이,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영화를 보고도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노란 감정에 대해 누군가 설명해보라 한다면, 대답은 이 영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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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SF 소설로 돌아오는 드니 빌뇌브
최근,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SF 영화 <듄>을 통해 국내 역주행의 신화를 쓴 '드니 빌뇌브' 감독이 또 다른 SF 작품의 메가폰을 잡게 되었습니다.
<듄>이 코로나19의 여파 속에서도 전 세계 3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였기에, 워너 브라더스사는 <듄 2>를 2023년 10월 20일에 개봉할 예정이라 밝힘과 동시에 '드니 빌뇌브' 감독이 후속편도 연출하게 될 것이라 전했는데요. 개봉까지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만큼,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전 인터뷰를 통해 2022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인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라 밝혔습니다. 이와 함께, <듄>이 SF 대서사시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이미 캐스팅 및 기타 다른 부분의 구상을 끝내놓은 상태이기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가능성을 내비쳤는데요.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또다시 좋은 소식을 알리며, 전 세계 영화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새로운 프로젝트는' 아서 C. 클라크'가 1973년 발표한 장편 SF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가 될 예정인데요. 앞서, 원작에 대한 판권을 '알콘 엔터테인먼트'가 따내며 영화화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알콘 엔터테인먼트'는 <블레이드 러너>의 판권을 가진 제작사로 '드니 빌뇌브' 감독과 <블레이드 러너 2049>를 통해 호흡을 맞춘 이력이 있는 제작사인 만큼, 다음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원제: Rendezvous With Rama)는 1973년 처음 출판된 소설로, 2130년대를 배경으로, 태양계에 진입하는 초대형 외계 우주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라마'라고 이름 붙여진 우주선의 내부를 조사하는 인간 탐험가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세밀하고 장엄하며 경이롭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요. 출간 당시, 휴고상, 네뷸러상, 캠벨상, 로커스상을 비롯해, 주피터상, 영국과학소설협회상 등 SF 분야의 상을 휩쓴 최고의 고전이기도 합니다.
'아서 C. 클라크' 작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연출한 SF 명작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원작 작가로도 유명한데요. '드니 빌뇌브' 감독이 꾸준히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꼽아온 만큼, 아서 클라크의 도 다른 걸작의 연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부분입니다.
현재, 요 네스뵈의 소설 <아들>을 원작으로 한 HBO 시리즈 제작에 힘을 쏟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새 영화를 기다리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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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벤져스의 가장 큰 두 축은 누가 뭐래도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다. 그러니 이 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심화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캡틴 아메리카가 지독한 중2병을 앓은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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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크리스마스로 불리는 소년> 티저 예고편
평범한 소년 니콜라스는 눈 덮인 북쪽을 향해 특별한 모험을 떠난다. 엘프가 사는 전설의 마을, 엘프헬름을 찾으러 떠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니콜라스 곁에는 든든한 순록 블리첸과 충성스러운 생쥐 친구가 함께한다. 불가능이란 없음을 보여주는 사랑스럽고도 재미있는 마법의 이야기. 그 속에서 니콜라스는 어떤 운명을 만나게 될까. 《크리스마스로 불리는 소년》, 곧 공개 예정. 일부 지역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