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2023-11-30 14:01:30
관객을 끝까지 속이는 스릴러
당신이 천재인지 궁금하다면 꼭 봐야할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 리뷰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나에겐 일상의 환기의 영역이 크다. 영화를 보면서, 쉬거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는 게 영화를 관람할 때 첫 번째 포인트이기 때문에, 긴장하면서 봐야 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언제나 마지막 선택이 되었다. 아름다운 것만 봐도 모자란 시간에 두려움에 떨거나, 피가 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소 확고한 영화 취향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용기를 내어 보게 만드는 건, 잘 만들었다고 소문난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다. 불안하고 긴장이 되어 조마조마한 기분을 계속 느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촘촘하게 설계된 이야기 구조의 놀라움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장르니까. 세상에 천재가 많구나 하는 감탄과 동시에 뇌가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 다른 의미로의 일상의 환기가 된다.
이 감독 천재인가? 이 작가 천재인가? 리스트는 한 둘이 아니지만, 나에게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장르의 매력에 눈 뜨게 해준 영화는 <인비저블 게스트>이다 (이상하게도 넷플릭스에만 ‘세 번째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성공적인 사업가 아드리안은 누군가의 지시로 호텔에서 내연녀 로라와 만난다. 의문의 습격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 보니 로라는 죽어 있고, 들이 닥친 경찰에 체포된다. 밀실살인사건이니 만큼 아드리안은 유력한 용의자가 되고 만다. 한번도 패소 해 본적이 없다는 변호사 버지니아를 선임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고 하고, 검찰 측 증인이 나타나 3시간 후면 아드리안이 법정으로 소환될 상황이 되어, 그 시간안에 사건을 재구성하기로 한다.
인비저블 게스트는 한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다른 사건들이 연관되어 나타나며 이를 엮어서 이야기진행시키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쓰고 있다. 사실 이런 구조 자체는 특별히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추측할 만한 등장인물은 그리 많지 않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야기의 흐름이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며 제한된 인물들 가운데, 범인을 추리 하도록, 그리고 진실에 대해 궁금증을 일으키도록 끝까지 끌고 가도록 하는 힘이 좋았다.
매력적인 스페인어와, 으슬으슬한 겨울 공기 마저도 이 영화의 조연처럼 느껴지는 연출, 긴장된 공기 속에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 있는 말투로 같은 사건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드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결말이다. 범인은 바로 너 ! 추리 꽤나 한다는 나도, 함께 본 지인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마지막 장면을 향해 달려 간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영화속의 많은 장면들이 다시 플래시백으로 관객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며, 뒤늦게 아 –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영화.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추리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지 끝까지 보길. 그리고 이 결말을 맞춘 천재가 있다면, 널리 널리 자랑하길. 마음을 다해 감탄하고 부러워할테니.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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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회귀의 시간이 써 내려 간 신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행을 계속하기 위해 진급을 거부하고 현역 파일럿으로 남은 '피트 매버릭 미첼(톰 크루즈)' 대령. 그는 최신형 전투기 다크스타의 시험 비행 도중 독불장군답게 사고를 저지르고, 자신이 졸업한 탑건 학교의 교관으로 전출을 간다. 오랜만에 도착한 학교에서 우라늄 시설 폭격 작전에 투입될 12명의 파일럿을 훈련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옛 연인인 '페니(제니퍼 코넬리)'를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과거에 순직한 동료의 아들인 '루스터(마일즈 텔러)'가 12명의 파일럿에 속한 것을 알게 된 후 그의 훈련은 난항을 겪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빨라진 작전일자 때문에 매버릭과 그의 파일럿들은 더욱 패닉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이 가르친 동료들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본인의 목숨을 걸고 그들을 생환시키기 위한 비행에 나선다.
톰 크루즈와 함께 36년 만에 돌아온 <탑건>의 속편 <탑건: 매버릭>. 'Top Gun Anthem'과 케니 로긴스의 'Danger Zone'이 들리는 가운데 함재기들의 이착륙을 비추며 시작한 영화는 곧장 매버릭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신형 극초음속 전투기 개발 사업인 '다크스타'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던 매버릭은 마하 10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로젝트가 폐기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독단적으로 마하 10 시험 비행을 하고, 멋지게 성공하며 다크스타 프로그램의 가치를 증명해낸다. 매버릭의 행동에 격노한 '케인(에드 해리스)' 소장은 그를 탑건 학교로 전출시켜버리면서 그의 노력도 무의미하다고 일갈한다. 어차피 드론이 파일럿을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매버릭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은 아닙니다."
전편의 오프닝을 고스란히 옮겨 온 오프닝 시퀀스와 뒤따라 나오는 이 짧은 대화는 긴 세월을 기다린 속편이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이고 동시에 단독 작품으로서의 <탑건: 매버릭>을 설명하는 완벽한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에는 아날로그적 액션이 그 어느 때보다 박력 넘치고 강렬한 이유,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속편이 향수와 동시에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로 무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모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입부는 매버릭이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본인이 원하면 별도 두 개는 족히 달았을 미 해군의 전설적인 파일럿. 그러나 그는 수많은 훈장이 방증하듯이 과거의 영웅이다. 케인 소장의 지적처럼 명령에 불복하는 파일럿보다 더 충실한 드론이 등장한 시대에 과거의 영웅이 있을 자리는 이제 없다. 그래서 다크스타를 몰고 마하 10에 도달한 것이 전설의 건재함을 보여준다면, 마하 10 이상에 도전했을 때 전투기가 폭발하는 것은 과거의 유산이 서 있을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런데 매버릭의 위기는 사실 그저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래에 뒤처진다는 이유로 존재와 의미를 부정당하는 과거의 유산은 현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매장에서 직원의 자리는 키오스크가 대신하고, 종이 영수증이 있어야 할 자리는 메신저 알람이 대신한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에서 과거의 모습을 철저히 지우고 새로운 것으로 가득해진다. 이는 사람들이 시간을 선형적으로 이해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과거를 폐기할 때 현재가 등장하고, 거기서 한 발짝 더 진보할 때 미래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버릭과 케인 소장의 충돌은 단지 유인 전투기와 드론 사이의 논쟁과 대립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더 넓은 관점에서 과거와 과거의 유산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에 <탑건: 매버릭>은 일반적인 통념을 벗어난 답을 내놓는다. 영화는 과거를 폐기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야 한다고 말한다. 매번 반복되는 과거를 직시할 때 비로소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다는 주제 의식으로 무장한다. 마치 "시간 자체도 하나의 둥근 고리"라며 순환론적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니체의 영원회귀 신화처럼. 그래서 영화는 2막의 시작과 동시에 매버릭을 그가 30여 년 전에 졸업한 탑건 학교로 보낸다. 과거로 되돌아가고, 과거를 새로 겪으면서 그가 미래에도 유의미해질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만든다.
그래서 <탑건: 매버릭>은 전편의 구조, 장면, 상황을 되풀이한다. 시간대만 달라졌을 뿐 사실상 동일한 상황 속에 매버릭을 던져 놓는다. 사고를 친 후 탑건 학교로 좌천되고, 탑건 학교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깊이 좌절하지만, 끝내 극복하고 실전에 투입되는 흐름이었던 전편의 구성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것이 대표적이다. 시실 오마주로 가득한 구성은 자칫 영화 전체를 진부한 클리셰 덩어리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은 전편의 내용과 과거의 사건을 반복하는 이야기를 파일럿으로서의 매버릭, 인간으로서의 매버릭으로 나누어 보여줌으로써 그 함정도 피해 간다.
우선 파일럿으로서의 매버릭은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 직면한다. 교관으로 불려 와 적국의 우라늄 원자로를 파괴하는 작전을 12명의 파일럿에게 교육해야 한다는 임무를 알게 된 매버릭. 그는 이 작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이 본인이 실전에서 직접 경험해 본 사건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훈련 과정에서도 그는 자신의 과거를 조우한다. 그는 최고 중의 최고만 모인 파일럿들에게 기초적인 도그파이트 훈련부터 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30여 년 전 자신이 그랬듯 윙맨을 희생해 적을 격추하는 전술을 구가하는 파일럿을 오래간만에 상대한다.
한편 그의 훈련은 반복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는 2분 30초라는 시간제한이 있는 작전을 수없이 반복 학습시키며 파일럿들을 숙달시킨다. 실제 작전과 같은 상황 계획 속에 그들을 거듭 던져 놓는다. 이미 겪었던 상황을 다시 출발점에서 경험하도록 만들고, 결승점에서는 이전과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게 훈련시킨다. 누군가는 처참히 실패하고, 누군가는 팀원과의 불화로 실패하고, 누군가는 신체적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지만 같은 훈련을 반복하면서 파일럿들은 조금씩 차이를 만들어낸다. 또 각자의 자존심만 내세우던 파일럿들이 한 팀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전편의 비치발리볼 장면을 비치 풋볼로 바꿔서 등장시킨다.
한 인간으로서의 매버릭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돌아올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던 탑건 학교에 귀환한 그는 학교 근처 바에서 ‘페니’ 벤자민을 만난다. 전편에서 헤어진 여자 친구로 언급되었던 그녀와의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나간다. 매버릭 특유의 미소를 짓지 말라는 페니와 그런데도 굴하지 않는 매버릭의 모습은 이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페니는 전편의 여주인공이었던 쿠거가 그랬듯이 좌절에 빠진 매버릭을 수렁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매버릭은 몇십 년째 그를 괴롭히던 트라우마를 루스터의 모습으로 마주한다. 전편에서 전투기를 탈출하던 도중 윙맨이자 절친이었던 구스를 사고로 떠나보내야 했던 매버릭. 그는 구스를 똑 닮은 그의 아들 루스터가 훈련받을 12명의 파일럿 중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페니의 바에서 아버지 구스의 애창곡이었던 "Great Balls of Fire"를 부르는 루스터를 지켜보면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생생하게 대면한 매버릭. 그는 오랜 기간 그래 왔듯이 루스터를 보호기로 결심하고, 작전의 성공만큼이나 생존하여 귀환하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트라우마가 매버릭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것. 아버지를 잃은 루스터는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했던 매버릭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을 지켜주려는 매버릭의 관심을 외면한다. 이렇게 과거의 트라우마 안에 함께 갇힌 이들의 골은 훈련 중 함께 추락하는 듯한 장면만큼이나 깊어진다.
이처럼 수없이 등장하는 오마주, 곧 과거의 사건들은 훈련 교관이었던 매버릭이 끝내 작전의 한가운데에 서는 것에서 눈치챌 수 있듯 영화의 3막인 실제 작전에서 한데 얽히고설킨다. 그래서 <탑건: 매버릭>의 박력 넘치는 액션 시퀀스는 단지 눈 호강일 뿐만 아니라 가슴 벅차오르는 뜨거운 드라마를 만들어 낸다. 물론 20여 분간 쉼 없이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다. 줄곧 연습하던 작전을 실제로 실행하는 그 순간의 가슴 멎을 듯한 긴장감, 작전 이후 뒤따르는 지대공 미사일과의 목숨을 건 사투, 그리고 성능의 차이가 큰 전투기 간의 살 떨리는 도그파이트 장면까지. 고막을 때리는 굉음과 눈을 사로잡는 회피 기동과 폭발이 한데 뒤엉키기 시작하면 좀처럼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션은 화려한 포장지일 뿐, 그 알맹이는 매버릭과 루스터의 트라우마 극복기라고 할 수 있다. 매버릭은 구스처럼 죽을 위기에 빠진 루스터를 구하고, 루스터는 생각하지 말라는 매버릭의 조언을 받아들여 본능적으로 전투기를 비행하고 매버릭을 구한다. 또 생환하기 위해 2인 1조로 전투기를 조종하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오래전 매버릭과 구스의 팀플레이가 겹쳐 보인다. 이러한 액션씬은 결국 과거는 반복되기 마련이고 인간은 시간이라는 고리 안에서 특정 순간으로 계속 되돌아오지만, 영원 회귀하는 시간 안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 사건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순간의 무게와 책임을 견뎌낼 때,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초인'이 되어 과거와 트라우마의 늪에서 벗어나 새 미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같은 사건을 마주해도 다르게 채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매버릭의 오랜 동료인 아이스맨이 남긴 "과거를 잊을 때가 되었다"라는 충고의 진의일 것이다.
적군의 F-14 톰캣을 탄 채 귀환을 시도하는 둘의 모습은 이러한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해준다. F-14 톰캣은 성능만 놓고 보면 적군의 5세대 전투기를 이길 수 없는 고물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미래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되풀이되는 시간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이 도그파이트에서 중요한 것은 전투기가 아니라 파일럿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두 파일럿은 시간의 흐름에 압도되지 않고, 시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최신 전투기와 치열한 싸움을 펼칠 수 있다. 이는 영화의 결말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된다. 1950년대에나 쓰던 P-51 머스탱을 함께 타고 노을 지는 현재를 즐기는 매버릭과 페니. 이처럼 다시 만난 옛 연인과 과거의 유산 안에서 미래의 사랑을 꽃피우는 장면은 도입부에서 던진 물음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는 단지 주인공인 매버릭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에도 해당된다. 달리 말해 <탑건: 매버릭>은 자신을 둘러싼 의구심에 맞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먼저 개봉한 미국에서 들려온 극찬 덕분에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실 제작이 발표됐을 때 이 영화를 둘러싼 걱정은 상당했다. 오마주로 가득한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의 리메이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나 과거의 명작을 미래에 맞게 일신한다는 목적으로 과거를 부정하다가 결국 실패를 맛본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탑건: 매버릭>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굳이 시대에 맞게 무언가를 바꾸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저 과거에 좋았던 점들을 더 멋지게 만들어서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영화는 좋아진 기술력을 자랑하는 만큼이나 오래전 감성으로 가득하다. 누르스름한 시각적 묘사와 영화의 느낌을 고스란히 살린 장면들은 80년대의 흐름과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해내며, 이는 노을 속에 올라오는 토니 스콧 감독을 향한 추모의 메시지로 완성된다.
대신 과거의 매력을 접하는 이들이 알아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고 즐기도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탑건: 매버릭>은 그저 추억을 되풀이하는, 향수를 자극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과거를 폐기하지 않는 대신 반복하는 현재가 얼마나 가슴 뜨거울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며, 다음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하고 자연히 꿈꾸게 만든다. 이렇게 영원 회귀의 시간 속에서 <탑건: 매버릭>은 할리우드의 힘을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한 편의 신화를 써 내려간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응축된 과거의 반복이 써 내려간,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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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숨어야 할 자는 누구인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반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출처 : 왓챠피디아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
빌 펄롱은 석탄을 팔며 아내, 다섯 딸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지역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빌 펄롱은 숨겨져 있던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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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가 아니면, 혹은 작품성이 너무 뛰어나 흥미를 이끄는 작품이 아니라면, 대대적으로 명작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 외에는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또한 처음에는 내 취향과 멀리 떨어진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친구의 정성 넘치는 후기로 인해, 킬리언 머피가 그토록 원작도서를 영화로 제작하는 데 힘썼던 이유를 알아볼까 싶었던 사소한 호기심이 확실한 흥미로 번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배우 킬리언 머피의 연기력에 대한 신뢰는 상당하지만, 작품을 직접 다듬어 가는 감각이 어느정도일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가 전무한 채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극장에 들어섰다. 다만 홍보 포스터나 메인 예고편으로 접한 극중 전체적인 톤은 차갑고, 무겁고, 차분했다는 이미지만 기억 속에 있었다. 그리고 줄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 예고편을 훑어봤을 때는 어떠한 사건, 미스터리하고 조금은 충격적일 수 있는 문제가 크리스마스와 함께 다가와서 주인공이 그걸 해결해야 하는 건가? 싶은 궁금증이 조금 들었다.
포인트1. 이처럼 모호한 것들
출처 : 왓챠피디아
클레어 키건의 원작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봤을 때, 주인공 '빌 펄롱'의 감정선이 다소 모호하다고 느껴졌다. 특히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플롯은 현재에서 주인공 '펄롱'이 석탄을 팔고 나르는 업무에 성실히 임하다가 우연히 수녀원의 부조리한 일을 목도하고, 과거에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순간순간들이 자연스레 엮여 떠오르면서 고요했던 감정에 파동이 생기고 끝없는 고민을 반복하며 수녀원의 깊은 부분까지 관여하게 되는 것인데, 일련의 과정이 모두 명확하지 않게 표현되었다. 이에 더해, 시퀀스 진행 또한 비교적 루즈하게 진행되어 그렇게 길지 않은 러닝타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지기도 했다.
펄롱의 어머니와 아버지 / 출처 : 왓챠피디아
과거에, 펄롱은 어머니와 함께 큰 저택의 주인분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집주인은 매우 사려 깊은 편이었고 일반적인 가정에서 느낄 법한 따뜻한 애정과 선물이 두 사람에게 오고 갔다. 그러나 당시의 펄롱은 아직 너무 어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떤 것을 감내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사소한 것들에 속상했고 어머니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리고 유약한 '아이'인 자신을 보살펴주는 상황 속에 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왜 혼자 펄롱을 키우고 계셨는지, 갑자기 왜 운명을 달리하셨는지, 아예 두 인물의 주변에 없는 듯했던 아버지라는 존재가 사실은 마지막에 어머니와 같이 저택에 서 있었던 남자임을 암시하는 등 모호하게 제공된 정보들은 극을 구성하는 데 꽤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펄롱이 이끄는 스토리에 몰입하고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현재에서는, 과거를 이끌어낼 정도로 펄롱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수녀원의 실체와 아이들이 위험에 처한 정도가 굉장히 절제되어 드러났기 때문에 그 실상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평범하고 반복적인 루틴을 절대 어기지 않았던 펄롱이 하나 둘 자신만의 규칙을 어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면, 관객도 어느정도의 감정적인 영향을 받고 펄롱의 사소한 변화에 이입할 수 있도록 연출적으로 조금 더 이끌어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철저히 그의 시선을 따라 객관적인 정보들만 제시할 뿐, 수녀원에 대한 더 깊은 비리와 그 안에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바깥공간과 철저히 분리되어 조그마한 징후들만으로 수녀원에 부딪쳐 누군가를 구해주려는 개인의 용기를 다루고자 했다면 그 연출의도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한 작품의 결말은 주인공의 심사숙고한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인만큼 관객으로서 강한 여운을 느껴야겠으나 아쉽게도 그러한 강렬함은 없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포인트2. 주요 장면, 그리고 '리틀 나이트메어'
(왼) 출처 : 왓챠피디아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단연 최고의 장면은 새벽에 잠 못들던 펄롱이 수녀원에서 다시 갔다가 창고에 갇혀 있던 아이를 발견하고 함께 수녀원에 들어가 원장수녀님과 긴 대화를 나누고, 해가 뜸과 동시에 수녀원의 아이들이 군대와도 같은 정렬을 맞추어 하루 일정을 시작하는 순간과 그 옆을 지나쳐가는 외부인 펄롱의 동선이 드라마틱하게 엇갈리는 씬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듯했던 원장수녀님의 집무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공장 돌아가는 기계 소음,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기척들, 세탁실 특유의 꿉꿉한 온도가 느껴지는 것 같은 효과음들이 모두 차례대로 몰아치면서 느껴지는 은근한 리듬감이 굉장한 위압감을 가진다.
출처 : Steam 'Little Nightmares'
더 나아가 집합하는 아이들, 그러한 집단의 변수 그자체인 펄롱이 맞닿아 엇갈리는 장면은 공포게임 '리틀 나이트메어'를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리틀 나이트메어'는 특유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반대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NPC들의 인기척과 기계음들이 마음 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불안감을 일깨운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또한 그렇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첫 한 발자국만 들어왔을 때 마주하는 로비는 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수녀원에 조금만 더 들어갔을 뿐인 펄롱은, 심리적 위압감을 느낀다. 실제적인 폭력이 행사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펄롱 앞에서는 따뜻한 차와 달콤한 케이크를 내어준다. 상냥하다. 의례적인 인삿말과 함께 펄롱에게 주어지는 평범한 돈봉투가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마음 속 저 편에서부터 올라오는 본능적인 불쾌감이 수녀원의 불편한 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 왓챠피디아
원장수녀님이 '무엇을 봤든 이 곳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고 당신은 조용히 하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라는 의미를 에둘러 표현하는 대화 속에서 펄롱이 "저는 엄마 성을 따랐는데 아무 문제 없었어요"라고 맞받아치는 단말마의 대사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위 사진의 원장수녀님께서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에 나오는 등장인물 '엄브릿지'와 매우 닮으셔서 무의식적으로 더 압도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품에서 연기하시는 걸 보면 외모 뿐만 아니라 대사를 내뱉는 특유의 억양도 굉장히 닮아 있어서 해리포터를 관람하셨던 분들은 약간의 기시감을 느끼셨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포인트3.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
출처 : 왓챠피디아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사건들이 존재한다. 전쟁통에 이루어졌던 수많은 학살, 고문 등 엄중한 사건들부터 살인, 납치, 강도 등 개인이 저지른 사건들까지. 개중에는 특정 장소에서 사람들이 실종된다든지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한 사건들도 사이에 끼어 있다. 여러 사건들의 개요를 이해하다보면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한 흥미를 넘어 시야를 넓히기 위해 일부러 검색해보기도 했으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배경이 된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은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꽤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세상에 만연해 있는 문제점들을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은 최소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권 유린 사건이다.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 출신으로서 자신의 국가가 겪은 역사적 고통을 가시화하는 데 집중하며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배우인만큼 이 작품을 왜 영화화하고자 했는지 그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심지어 조직적으로 강도 높게 이루어진 착취, 폭행 등의 만행들을 제대로 다룬 영화가 이전까지는 단 한 작품 뿐이었다는 걸 미루어 보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갖는 의의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 왓챠피디아
자본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집단이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면 같은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행동이 무엇인지 분명히 일깨워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작품 속 수많은 인물들이, 사소한 변화로 커다란 선택을 한 펄롱이 더욱 돋보일 만큼 어리석은 언행을 남발한다. 수녀원이 마을의 모든 일에 연관되어 있으니 가정을 잘 건사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봤든 조용히 넘어가자고 하는 동료, 펄롱의 최측근에서 그의 고민을 함께 감당하기 보다는 침묵과 방관을 당당하게 선택하고 유도하는 아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고 자본을 얻고자 하는 이유로 악행을 무관심하게 받아들였을까? 올바른 인간성을 터득한 사람이라면, 진정한 사회성을 학습한 사람이라면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직시하고 고쳐야만 한다. 진정으로 숨어야 할 자는 펄롱도 아니고, 수녀원에 피해 당한 여성들도 아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는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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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로스트 도터>는 숨겨진 명작으로 입소문 난 HBO 시리즈 <나의 눈부신 친구>의 원작자이기도 한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중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더 파더> 등 굵직한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 올리비아 콜먼과 감독으로서 처음 연출을 맡은 매기 질렌할의 만남만으로 영화는 화제가 되었다.
신선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드라이브하는 주인공. 그리스의 한적한 해변 마을로 휴양 온 이 여성은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한 비교문학 교수 '레다'이다. 해변가에서 한가로이 홀로 휴가를 즐기던 그녀 앞에 보트를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대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요란스러움에 눈살을 찌푸리던 레다의 눈에 '니나'가 눈에 띈다. 어린 딸아이를 안고 있는 니나의 모습을 찬찬히 그리고 집요하게 살피던 레다의 시선 끝에는 너무나도 매혹적인 여성과 완전히 지쳐버린 엄마 니나가 충돌한다. 그리고 레다는 자신의 과거를 그 위에 겹치기 시작한다.
언뜻 딸을 잃은 어머니의 처절한 드라마를 상상하게 하는 제목과 다르게 영화는 레다의 감정선을 좇으며 시종일관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사라진 니나의 딸을 찾아 그녀에게 안겨주다가도 아이의 애착 인형을 몰래 훔쳐 모두를 괴롭게 하는 등, 도통 저의를 알 수 없는 강박적이고 충동적인 행동과 편집증적으로 양극단을 오가는 레다의 무질서한 감정선을 쉽게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레다의 현재와 과거의 회상을 오가는 서사 전개는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니나를 통해 자신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 주인공의 양가적 감정을 그대로 좇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촉망받는 예이츠(W. B. Yeats) 연구자였던 레다에게 두 딸은 마냥 사랑스럽지많은 않은, 마치 신발 속의 돌멩이 같은 존재다. 자연스러운 아이들의 성장기가 레다에게는 중압과 속박으로만 느껴진다. 매 순간 자신의 연구에 집중할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하면서 동시에 그녀는 죄의식에 움츠러든다. 염증이 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학계에서 만난 저명한 학자와의 학문적, 성적 교류다. 그리고 결국 레다는 어머니로서, 어머니의 장소로 대변되는 가정의 울타리에서 머물러야 하는 자신의 파편화된 삶을 뒤로하고 딸들을 떠난다.
이러한 레다의 이면과 내재된 모순적 충동을 자극하는 것이 니나와 그 딸이다. 영화는 '날 것'의 레다를 통해 그동안 직시하지 않았던 여성과 모성성의 간극에 대해 토로한다. 딸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거워하는 니나에게 레다는 3년 동안 아이들을 떠나 있을 때 느꼈던 희열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터뜨린다. 질식할 것 같은 삶에서 빠져나와 레다는 그녀의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로서의 무게가 영영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잉태하는 그 순간부터 부여되는 모성의 이름은 희생적인 어머니의 서사를 강요한다. 사회적으로 날조된 모성의 신화는 어머니의 자격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에 반하는 수많은 모체의 삶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죄의식이라는 상흔을 남긴다. 여성으로 태어나 어머니가 된 이들에게 부과되는 모성의 신화가 사회적 숭배와 혐오 사이에서 개개인의 정체성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내적 충돌이 우리에게 드러난 순간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기괴한 육체만이 남게 된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이는 레다이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다가오는 이들을 자신의 경계 밖으로 내몰았다가도, 누군가의 삶에 불쑥 끼어들기도 하는 레다를 보며 관객은 그녀의 널뛰는 감정에서 무엇이 진심인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며 이 같은 양가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감정들이 모두 레다의 것으로 타당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라는 이름이 덧붙여졌을 뿐, 누구나 이 같은 관계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럴듯한 부연을 늘어놓으며 이 혼란함을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섬세한 표현이 불친절하지만 필요한 인물 서사의 공백을 적절히 채워 놓는다.
이를 담아내는 질렌할 감독의 세심한 연출 역시 돋보인다. 말로 전달되지 않는 내면의 충돌은 다양한 영화적 장치를 통해 표면화된다. 예를 들어, 푸른 바다에 몸을 맡긴 레다를 담는 쇼트에서 그녀의 몸은 반쯤 잠겨있다. 수면 위로 드러나는 평화로움과 다르게 물 밑의 감춰진 레다의 다른 한쪽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레다가 숙소에 놓여있는 과일을 먹기 위해 들춰보는 장면도 유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다. 노랗게 잘 익은 과일 하나를 들어 올리자 겉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새까맣게 썩은 뒷면에 구더기가 득실 거린다. 레다는 과일을 내다 버리지 않고 바구니가 놓여 있는 테이블을 통째로 눈앞에서 치워버린다. 그러나 한 번 폭발한 감정의 덩어리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훔쳐온 인형을 찬장 깊숙이 숨겨놓은 레다 앞으로 수 십 장의 인형 사진 전단지가 뒤덮이고 인형 입에서는 꿈틀거리는 벌레가 기어 나온다. 레다 안에 깊숙이 감춰 둔,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이 그녀를 잠식한 어떤 잠재의식이 아브젝시옹의 이미지로 그녀를 집요하게 좇는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 관객은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니나에게 선물 한 모자 핀은 레다의 배에 상처를 남겨 놓는다. 배꼽 바로 옆쯤 생긴 천공에서 피가 묻어 나온다. 레다는 그대로 앉아 아이들이 좋아했던 방식대로 오렌지 껍질을 깎으며 이제는 성인이 된 딸들과 통화한다. 뱀의 표피처럼 끊기지 않는 오렌지 껍질은 마치 모체와 태아 사이를 이으며 마지막까지 그 흔적을 남겨놓는 탯줄과 같이 이어진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개인의 서사가 발화하기 작하는 근래, 영화는 오랜 시간 걸쳐 만들어진 모성의 신화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한다. 어머니로서의 의무감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들에게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틈새를 열어 놓는 것이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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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부른다는 것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불친절하게 마구잡이로 들어 있습니다.
짙은 녹색이 산마다 성큼성큼 내려앉던 여름 내내, 그 폭염 속에서 어쩐지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내가 그 영화를 본 건 4월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마음에 몇 달씩 이어지는 그림자를 남길 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한 영화였다.
1983년 여름날, 이탈리아에 있는 별장에서 엘리오(티모시 살라메)는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교수인 아버지, 여러 가지 언어를 섞어 말하는 가족들... 상당히 지적인 분위기에서 엘리오 또한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고 수영도 하면서 나른한 여름을 하루하루 채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도울 연구원으로 올리버(아미 해머)가 찾아오고, 한 계절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이 전개된다. 그러는 내내 등장하는 건물이며 호수, 햇살과 나무, 교수인 아버지 때문에 등장하는 슬라이드, 녹슨 유물들... 영화에 쓰인 소품이나 배경이 풍겨내는 아우라는 어마어마하게 우아하고 압도적이어서 보는 마음에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아미 해머의 얼굴은 80년대 화보에서 튀어나왔다 싶을 만큼 아름다웠고, 티모시 살라메에게서는 옛 유럽 명화를 볼 때 들었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비단과 진주, 모피와 비싼 물감 재료 같은 것들이 오가는 곳에서 초연하게 앉아 있을 것 같은 귀족적인 분위기.
영화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 로맨스가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배경이었고, 다소 짓궂은 성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고고해 보이게끔 하는 힘이 있었다. 영화가 여성 배우를 다루는 방식을 비롯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몇 개나 꼽을 수 있는 내 마음에조차, 아름다운 풍경과 선명한 상징들이 움푹 자국을 남기는 영화였다.
그러니 여름 한 철의 열매처럼 부드럽게 익었다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릴 첫사랑의 조각이 내 마음도 스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계속 윙윙거리던 파리가 마지막까지 티모시 살라메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것처럼, 극중 엘리오의 마음만큼이나 내 마음에도 이 영화는 진득하게 윙윙거렸다. 영화에서 느껴지던 여름의 열기를 현실에서 느낄 때면, 그 여름 한가운데서 어느 책이든 책 한 권을 펼칠 때면 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곤 했다.
고요하지만 깊이 파고든 엔딩 장면만큼이나 마음을 건드린 부분은 영화 제목이기도 한 "네 이름으로 날 불러, 난 내 이름으로 널 부를게." 라는 대사였다. 엘리오와 올리버, 올리버와 엘리오. 어딘가 비슷한 음운이 많이 들어있는 두 이름이 부드럽게 섞이는 것도 좋았다. 이름이란 얼마나 그 사람을 다 담고 있는 것인가. 이름을 주는 것이 마치 다 주는 것처럼 여겨져서, 미성년자 건드린다고 언짢아하던 와중에도 그 대사에서만큼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름을 준다는 것에서 심장이 내려앉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분명 이름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반대로 정체성을 빚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가 작명소에 돈 주고 지어 왔다는 내 이름이 정말 싫었다. 민지, 지혜, 유미 같은 이름들처럼 주변에 많이 보이면서 나긋나긋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유니크한 이름도 아니었다. 주류에 속하지도 홀로 고고하게 서 있지도 않는,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 정말로 나 같이 느껴져 더욱 싫었다. 내 이름을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된 건 내 나름대로 의미 부여를 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 이름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이름으로 대표되는 나의 세계 어딘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비단 과거의 나만은 아닐 것이다. 어디 가서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라면 거의 인류 보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흔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 흔한 사춘기를, 흔한 경험을 반짝거리는 이야기로 묶어낸 이름이 <레이디 버드>다.
특이한 경험을 그려낸 영화를 낮잡아보자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세상 어딜 가도 두 번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독특한 사건이란 극보다 더 극적이어서 그 사건 자체만으로도 쉬이 눈길을 끌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이야기를 묶으면서도 사랑스럽고 눈에 띄게 그려낼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재능이 아닐까? 훌륭한 배우, 훌륭한 극작가에 이어 훌륭한 감독으로도 이름을 올린 그레타 거윅은 본인 경험과 배경을 상당수 녹여내면서도 인류 중 상당 비율이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시얼샤 로넌이 분하는 "레이디 버드"는 누가 봐도 절대 본명이 아니다. 크리스틴이라는 멀쩡한 (그리고 아마 어른들이 "분별 있는 이름"이라 하실 법한) 이름을 두고 스스로의 이름을 만든다. 실제로 레이디 버드가 재조립하고자 했던 건 이름뿐 아니라 그 이름 뒤에 있는 생활 그 자체였다. 자신이 사는 동네, 가족의 자산 규모, 학교에서 자신의 위치, 어머니나 친구나 다양한 주변인들과의 관계... 영화는 레이디 버드라는 단 한 사람의 주인공을 세우고, 주변인과 그 동네를 촘촘하게 보여주면서 레이디 버드의 세계에서 우리의 10대를 끌어낸다.
지루한 고향을 떠나 어딘가로 떠나기를 동경하는 삶,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어지는 순간. 빚부터 직업까지 수많은 역할들로 짓눌려 있는 엄마의 삶을 볼 때마다, 도저히 저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오빠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다니는 가톨릭계 학교의 면면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하이틴 로맨스 주인공과 친구처럼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 자신과 친구를 볼 때마다, 레이디 버드는 격렬하게 반응한다.
차에서 뛰어내리고, 이름을 지어내고, 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고, 여러 가지 거짓말을 타래로 엮어가며 자기 눈에 반짝거리는 것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 자신만의 성(城)을 쌓아 올리는 소녀의 모습은 분명 허영에 가깝지만 딱히 얄미울 것도 심각해질 것도 없다.
왜냐하면 딱히 심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는 0으로 수렴하는 수학 점수를 받으면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겠다고 한다든지, 온통 수녀님뿐인 선생님 차를 신혼여행 떠나는 웨딩카처럼 장식한다든지, 의외로 보기보다 대담하게 사고를 계속 쳐대면서 도저히 이 곳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10대의 학교에 선생님으로 계신 수녀님의 눈에는 보인다. 레이디 버드가 실은 새크라멘토를 꽤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물론 레이디 버드 본인도 아직은 모르는 일이다.
시얼샤 로넌, 그레타 거윅영화의 배경인 새크라멘토가 그레타 거윅 본인의 고향인 데다가 레이디 버드의 본명인 크리스틴은 그 어머니의 이름이라고 하니,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레타 거윅은 본인과 본인의 고향을 참고해서 만들었을 뿐 자전적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는 나오면서 "그냥 창피해서 그렇게 말한 거 아니야? 본인 얘기 맞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분명 레이디 버드가 하는 행동들은 보편적인 누구의 경험이라기엔 좀 특이하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인간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 같다.
결국 다른 우리 모두처럼, 즉 어른이 된 과거의 소녀들처럼 레이디 버드 또한 벗어나려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프롬 파티에 함께 갈 멋진 남자친구와 학교에서 제일 "쿨한" 친구 대신, 파티 날 집에서 울적하게 앉아있던 친구와 만나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파티를 즐긴다. 집을 떠나 멀리까지 대학을 가지만 결국 그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본 후에 전화를 거는 곳은 집이고, 전화해서 하는 첫 마디는 "나 크리스틴이야"라고 자기 이름을 밝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 중에는 자기의 것들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는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벗어나려는 자신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주는 끈을 촘촘히 확인하려는 마음도 있다. 너무 사랑하고 또 너무 가까운 이들과 나 사이에는 그런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한다. 엄마에게 쾅쾅 소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히, 지금 이 모습이 나의 베스트라고 해도 나를 사랑할 거냐고 빤히 묻는 레이디 버드의 눈에는 그 마음이 정직하게 어려 있다.
원심력과 구심력은 힘의 크기가 같아서, 어느 하나가 이기는 일이 없다. 우리 모두와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레이디 버드의 사춘기도 그렇게 팽팽한 원을 그리며 지나가지만 그런 날도 언젠가는 느슨하게 풀어진다. 조수석에서 짜증을 내다 차에서 뛰어내리던 레이디 버드가 운전석에 올라보고서야, 엄마가 운전할 때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풍경을 바라보았을지 톺아보듯이. 그렇게 새크라멘토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꼭 닮아 있는 엄마와 딸의 얼굴이 나란히 스크린 위에 그려지듯이.
비로소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는 레이디 버드처럼 나도 내 이름에 나름의 의미를 붙이고, 입 속의 혀처럼 너무 당연하던 주변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는 마음이 든 후에야 나를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돌아와 일기에 다정하게 내 이름을 괜히 한 번 써보았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이름 하나에는 나를 둘러싼 이들의 애정이 들어있고, 타자이면서도 나 자신 못지않게 가까운 위치에서 애정을 보내주는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내 자리를 찾아 헤맸던 어린 시절이 들어 있었으므로. 레이디 버드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이름이다.
너를 사랑해, 레이디 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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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 나의 올드 오크 (2023)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카메라를 든 시리아 난민 소녀 야라의 사진 컷들로 시작된다. 같은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은, ‘사망한’, ‘무고한’, ‘망명에 끝내 실패한’ 난민의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했다. 10대 후반의 야라는 살아있으며, 망명에 성공한 10대 소녀다. 그녀는 카메라 시선 아래 대상화 되지 않는다. 되려 새로운 정착지인 영국의 한 폐광촌 마을을 자신의 관점으로 카메라에 담는다.
TJ가 운영하는 펍 '올드 오크'는 마을의 유일한 공론의 장으로, 영화 안에서 직접적으로 명시된다. 이 펍은 경계를 두고 '바깥의 장소'와 '안의 장소'로 나뉜다. 그중 안쪽은, 과거 연대의 기억이 아카이빙 된 장소다. TJ의 아버지 세대에 광부들의 파업이 그것이다. 하지만 끝내 광산은 폐업하고, 상처로만 남은 기억은 환부처럼 숨겨져 있다. 그리고 난민이자 새로운 이주민 야라가 카메라를 들고 그 환부를 파고든다.이 공간을 다시 연다는 것은 희망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희망을 위해서 열 것인가가 쟁점이 된다. 크게는 기존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공론의 장으로 쓸 것인지, 새로운 식구들인 난민들과 밥을 굶는 아이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할지이다. TJ가 후자를 선택하며, 올드 오크는 두 진영의 대립으로 첨예하게 나뉜다.
다음으로는 회생에 대한 비용의 문제다. 마치 야라의 카메라를 고치기 위해 오래된 카메라 2대가 들어가듯, 올드오크의 주방은 유지비도 많이 들고, 수리비도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여기서, 이민자(난민) 출신 기술자들의 노동력을 빌리며 두 집단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야라는, 외부인이자 동시에 내부인으로서 공동체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사진 전시회). '힘, 연대, 저항(Strenghth, Solidarity, Resistance)'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두 공동체는 점차 연대하지만, 일부 주민들의 자국민 우선주의 그리고 인종차별과 혐오주의로부터 시험을 받는다. TJ의 강아지 ‘마라’의 죽음은 과거 공동체를 지탱하던 상식과 공감, 신뢰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는 절망감을 더한다.
TJ와 일부 지역주민들은, 교회의 지원을 받아 무료 배식을 한다. 이것은 광부들의 폐업에서 모여 식사를 했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TJ의 아버지는, 교회가 노동자들의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귀속된다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연대가 실패하자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야라의 새로운 관점과 더불어, TJ는 과거 노동계급(교회)과 미래의 노동계급(난민, 이민자)의 연대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과거가 아닌) 현재의 노동자 계층과, 난민 수용으로 이뤄진 미래의 노동 계급 간의 연대가 몇 순간의 마법 같은 이벤트, 예컨대 사진 전시회나 무료 배식으로 성사된다는 주장은 어딘가 헐거웁다. 동네 대다수의 주민이 야라의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들고, 거리 행진으로까지 이어지는 이들의 공통된 동기가 무엇인지는 되려 설득적이지 못했다.
<미안해요, 리키>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위시한 전작들에서는, 인물들의 행동 이면에 깔린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토대가 촘촘하고 견고했고, 무엇보다 시스템적인 부조리를 꼬집었기에, 이 부분에서 거장의 은퇴작에 아쉬움을 더 진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이 영화는 경제성장 둔화, 지방인구 소멸, 노동 허가제 안의 수많은 불평등적 요소, 급변하는 국제정세 가운데 난민을 어떻게 이 시대에 맞게 재정의하고 지역사회에 수용하는가의 문제… 등등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주지하듯이 '올드 오크'는, 브렉시트 이후 노동력 부족과 물가상승,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영국의 국가적 현실을 보여주는 스케치이기도 하다.
<나의 올드 오크>는 상식과 공감, 연대 의식을 잃어버린 분노 어린 개개인의 얼굴을 전시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분노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이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이 도덕적 의무감에서, '힘, 연대, 저항'이라는 가치에 공감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본다는 주장은 어딘가 명확하지 않고, 공허하다. 자선, 혹은 온정주의에 기대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다음의 한 챕터가 더 필요했다고 생각된다. 거장이 그 챕터를 마치기 위해서라도, 다른 작품으로 극장으로 한번 더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Eurofilm 12. 영국, 프랑스, 벨기에]
- 이미지 제공 : 씨네랩
2023년 12월 8일 감상 / 2023년 12월 1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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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색 지대에서 던지는 질문
<플랜 75>의 이야기는 한 가지 위험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 대상이 확실한 죽음. 그리고 특이하게도 제목의 의미를 곧바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바로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죽음을 선택한 권리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지원금이 있고, 원하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다. 죽음이 허용된 근미래의 사회를 배경으로 <플랜 75>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플랜 75’는 언뜻 보면 꽤나 설득력 있고 괜찮은 정책처럼 보인다. 원치 않는 인생을 중단할 권리, 존엄사를 향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사람들은 계속 있어 오지 않았나.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고통 없이 숨을 거둘 수 있고, 원하면 중단할 수 있고, 또 미리 고심할 시간도 충분할 것 같다. 노령인구는 줄어들 것이고, 어쩌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극화된 세상에서, 흑과 백 사이 회색 지대에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불현듯 떠오르는 이 생각을 한쪽 극단으로 만든다. 각자 대변성을 지닌 훌륭한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세심히 설계되었고, 그들이 가진 세상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맞닿게 하면서 질문들을 가운데로, 또 가운데로 밀고 나간다.
<플랜 75>는 러닝타임 전체에 걸쳐서 이 제도를 소개한다. 그럼에도 제도 안에 있는 다양한 배경과 연령의 인물을 배치하면서 세계관을 소개하는 데에 그친 미완의 작품이 아닌 ‘이야기’로서의 힘을 획득한다. ‘플랜 75’가 ‘괜찮은 정책’처럼 보인다는 점이 위험한 이유는 죽음을 복지서비스처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 정책 뒤에 있을 긍정적인 효과만을 바라보는 동안, 변화하는 인식은 고려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냈고 그래서 통제와 관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은, 정책이 곧 개인의 인식과 관념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완전히 간과한 결과이다. 홍보 문구를 걷어낸 ‘플랜 75’의 실상은 죽음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고 또 죽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이미 75세 이상이 되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존엄사가 지향하는, 삶과 죽음,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품위있게 삶을 마감하길 원할 만큼의 고통에 대한 고심 끝에 이루어지는 복지라는 점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이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이 그린 근미래의 일본에서, ‘플랜 75’의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죽어도 된다’는 생각은 결국 노인에 대한 혐오를 허용하는 현상까지 나아간다. ‘괜찮은 정책’의 반대 급부는 바로 여기이다.
이 작품의 특별한 점은 영화 내내 제도를 소개하고 있지만 결코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는 점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 살고 노동하는 모습을 모두 보여주면서 영화는 자신의 역할만을 완수하고, 생각은 관객 스스로가 하도록 한다. 그러자면 이 제도 내에 있는 인물들이 각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보인다. ‘플랜 75’는 직접 여기에 참여해 죽음을 선택하려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인물, 노인들과 직접 소통하는 인물, ‘플랜 75’가 시행되는 시설의 노동자의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꽤 괜찮아 보이는 복지 정책조차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음을 제시한다. 정책이 시행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배제되는 것처럼, 일자리 창출이라는 멋진 현상은 ‘사람을 죽여주는 직업’이라는 실상을 가린다. 청년들은 결국 노인들과 상담하면서 죽음을 장려하는 사람이 되고, 시설에서 사체를 관리하고 유품을 처리하는 일은 또 다시 저임금 노동을 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맡겨진다. 이런 방식으로 <플랜 75>는 회색 지대에 안착한다.
관객을 매혹하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미지와 치밀하게 설계되어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모두를 휘두르는 영화들이 있는 반면, 가만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오래도록 사유하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관객들이 수많은 생각과 질문을 극장 밖까지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바로 그것이 <플랜 75>가 영화로서 가지는 힘이다.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자주, 계속 필요한 서술일 것일지도 모른다.
* 본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아 참석 및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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