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6-06 13:34:29
바다의 날 특집: 한국의 바다가 담긴 영화 5편
5월 3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 바다 앞에서, 우리 마음도 물결처럼.
5월의 마지막 날, 무슨 날인 지 아셨나요?
바로 바다의 날입니다!
파도 소리, 해풍, 조용한 섬마을까지-
한국의 바다가 담긴 영화 5편을 모았어요.
일상에 잔잔한 물결이 필요한 주말
영화를 머금고 있는 바다로 떠나보세요✨
🎬
❶ <헤어질 결심> 삼척 부남해수욕장
❷ <자산어보>, 신안군 도초도
❸ <집 이야기>, 서귀포시 남원읍 공천포구
❹ <파이란>, 고성군 대진항
❺ <인어공주>, 제주시 검멀레 해수욕장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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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한 남자의 비리 사건이 터진다. 이 남자는 죄책감 때문인지 회피하고 싶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족들을 남겨두고, 죽어버린다. 유일하게 집에 남은 딸아이는 경찰의 표적이 되어 중요한 참고인이 된다. 경찰은 아이가 아버지의 남은 비리 재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이를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감시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미성년자이지만 이미 다 커서 알 거 다 아는 어른 이임을 감안하고 이 아이에게서 아버지가 남긴 남은 지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아이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그런 그 아이는 자살을 기도하고, 그 자살사건에 현수가 투입된다. 그런데 과연 이 아이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이 답을 하기 전에 우린 이 18살을 더 자세히 이해해보아야 할 것 같다.
1. 어른 아이, 18세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대사가 있었다.
"18살이면 다 큰 거죠."
"아직 어린애잖아요."
비리 사업가의 딸을 두고 내린 상반된 평가. 과연 이 아이는 정말 다 큰 걸까.
요주의 아이, 세진은 경찰의 시선으로는 다 큰 아이로 간주되어 어른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경찰은 세진을 다 큰 아이로 간주되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로 인해 어른에게 물어보듯이 취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진에게 뭔가 더 확실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세진이 머무는 집 곳곳에 cctv를 심어놓았다. 하지만 세진은 사생활 침해라며 항의했지만 정보가 더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진의 이런 항의는 세진에 대한 의심만 더 높아지게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세진을 섬으로 보내 요양도 시켜주고, 원하는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cctv 단 거 가지고 항의를 하는 세진이 정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참고인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다 커서 알 거 다 알만 틈 성장한 세진이 어린 나이를 내세워 미운 어린아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진이의 자살 소식에 태풍을 핑계로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귀찮은 아이니 빨리 사망 처리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아이가 죽은 이유에 경찰의 지분이 아예 없지 않음을 경찰 집단이 이미 빨리 간파하고, 이 아이의 잔상을 빨리 잊고 싶은 진짜 다 큰 어른들의 비정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어른들은 고등학생 나이 때의 아이들의 성장을 평가할 때, 어른 특유의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는 식의 관점과 함께 상황적 요소와 자신의 주관을 섞어 평가한다. 예를 들면, 집안의 웃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혹시 웃어른이 유산 상속자를 18세 미성년자 손자에게 몰빵하셨을 때, 18세 아이에게 무엇인가 설득하려는 주위 친척 어른들이 이 아이를 회유하는 타이밍에 잘 나오는 멘트 중에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 거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멘트를 날리시는 분들이 있다. 요맘때 학생들이 주요하게 쓸모가 있을 때에는 머리는 커버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임을 어른들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세진이를 두고 보이는 경찰의 태도를 두고, 이 미성년자가 필요한 존재일 때에는 어른 취급을 해주며 존중하는 척해주다가도 아이의 쓸모가 다하면 버려버리는 모습에서 아직 완벽하게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어른에게 느꼈을 환멸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세진을 아껴주던 형사 형준마저 자신을 이용했고, 새엄마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18세 아이가 느꼈을 좌절을 그 시기를 거쳤지만 그 시기에 대해 잊어버린 어른들은 이해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른들의 비정함과 다 컸지만 아직 어른이 되진 않은 18세의 연약함을 비교하게 만들어 준다.
필요에 의해 어른들은 18세 미성년자를 다 컸으니, 어른의 세계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 다 큰 아이는 여전히 아이였고, 어른이 요구하는 덕목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어른들은 ' 다 컸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 본인이 18세였던 시기를 망각하고, 세진을 다 큰 '아이'임을 무시해 버렸고, 그 무시의 결과는 아이에게 더한 못을 박았음을 세진의 경찰에 대해 표시한 반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아무것도 몰랐냐는 말의 비정함
이 영화에서 세진과 그녀의 죽음을 쫓는 경찰, 현수는 비슷한 심리적 상태를 보인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자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정신을 차려보려고 하고, 악몽을 꾸면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고, 허한 동공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진을 통해 현수는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래서였는지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다른 경찰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찰이 혹할 만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오빠가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만 살아온 자신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음을 알았다.
"너는 내가 어떻게 남편이 그렇게 오래 바람나도록 아무것도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근데 있지,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다. "
이 현수의 대사에서 정말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냐는 상식 가득한 주변인의 대사는 참으로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내 바보 같음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거니와 해맑게 살았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반추하게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진의 경우도 같았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오빠가 감옥에 갈 만한 일을 저지르는 줄도 모르고 나만 행복하게, 해맑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어린아이가 얼마나 자책을 하고 살았는지 세진의 cctv 속 얼굴과 팔에 상처가 그 시간의 암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새엄마는 세진의 연약함을 잘 알았지만 본인의 상황의 불안정함을 이겨내는 데에 치중하느라 세진은 잠시 뒤로 미루어진 존재였다. 오히려 마주한 적도 없는 현수만이 세진의 외로움, 자책감, 무력감을 이해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을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데, 다 큰 사람 취급을 당한 아직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배신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 것인지 우리도 예상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공감까지는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는 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은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된다. 당하고만 있었던 나의 바보 같음을 저주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의 위로라는 가면을 쓴 팩트 폭력들은 생각보다 위로가 안된다. 이처럼 다른 이들이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서 기반한 편견이 담긴 팩트 폭력은 전혀 상처 받은 이에게 위안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현타를 얻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사람에게는 각자의 상식을 담은 충고, 조언보다는 그저 입을 닫고,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 혹시 당신의 인생에도 아무 충고, 평가도 없이 밥 먹자고 끌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내 사람이니, 붙잡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 내 몸에 흐르는 피를 확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수와 세진 모두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자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타인이 바라볼 때, 팔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자살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놓고, 자신의 몸을 해하는 정신병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수의 대사를 보면, 자해성 행위의 또 다른 정의를 고려해보게 된다.
"넌 내가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 징계 피하려고 내 팔을 그렇게 찧었던 것 같아? 아니, 일이라도 해야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데, 마비 때문에 일까지 못하면 나 진짜 어떻게 될까 봐. 제발 마비가 풀렸으면 해서 그랬어. 죽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랬다고. 그 애도 그랬을 텐데, 아무도 없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몸을 해하는 일은 죽을라고 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을 해하는 이유 중에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봐서라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래도록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공허함에 시달린 이에게, 자해를 할 때의 고통과 피가 흐를 때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적인 감각들은, 마치 살아있음을 깨닫는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마치 죽은 듯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스스로를 상처 내고 다치게 하는 행위,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행위로 인한 자극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자각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출처] 내 몸에 피가 흐르면,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요.; 자해 속에 숨겨진 마음|작성자 두두
그리고 비슷한 예시로, 일본 소설 중에서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야구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만 눈동냥으로 배운 기억을 되살려서 가슴을 공이라 상상하고 있는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방망이는 쩍 인지 철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멋지게 가슴 위를 떄리고 정확히 턱에서 멈췄다.
“으아아아아아아!”
덜커덩덜커덩, 침대 채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거칠게 몸부림쳤다. 왼쪽 가슴은 한입 베어 먹은 토마토처럼 살덩이가 쑹덩 날아가고 없었다.
환호성과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색이었다. 나도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출처]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데쓰야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를 때에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현수와 세진은 자신의 몸을 해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그 반대로 살인자가 사람을 죽일 때에 느끼는 쾌감의 근원이 피를 보고, 피의 색깔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현수와 세진이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현수와 세진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점과 몸을 해쳐서 피를 보고서라도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 살인자가 피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이나 자신의 몸을 해쳐야만 볼 수 있는 피라는 존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색깔 때문인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을 죽이는 일이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수와 세진은 희미해져 가는 맨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피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낸 거라면, 살인자의 경우, 피를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점이 다르다. 현수와 세진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면, 살인자에게는 쾌락의 도구인 것이다.
4. 그럼에도 살아가다.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이 대사가 결국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다. 인생이 잠시 망가졌을지언정 당신의 전체 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자신이 문제 생겨 곪아 터질 때까지도 해맑게 모르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다른 이에게 맞설 힘을 길러야 함을 이 영화는 외치고 있다. 내가 나를 해하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드는 문제는 분명 나만 잘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 탓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해할 만큼 자책만 하는 것도 결코 손뼉 쳐 줄 일은 아니다. 자책하고, 자신을 해할 시간에 문제를 이렇게 만든 다른 인간들을 응징하거나 문제를 말끔히 잊고 살아갈 깡, 패기, 똘끼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함께 만들어낸 문제에 본인만 파괴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나에게 해를 끼쳐 존재 이유를 찾지 말고, 이젠 소소하더라도 꾸준한 성과로 존재 이유를 찾으시길. 우린 아직 죽을 이유보다는 살 이유가 더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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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공포증인 그녀가 집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
누구나 어떤 것에 대한 공포는 조금씩 가지고 있다. 유령이나 괴물 같은 특정한 존재를 두려워하기도 하고, 어떤 상황을 무서워하기도 한다. 이런 공포심은 어떤 사고나 특정 상황에서의 일을 경험하고 나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 공포라는 감정은 사람을 위축되게 해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작용으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일상생활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특정 상황에 공포를 많이 느끼는 사람은 과거에 그저 마음 약한 사람 정도로 치부되었었는데 최근에는 무언가에 심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에 대해 의학적으로 접근하여 정신과 치료를 하기도 한다.
어떤 것에 대한 공포심 또는 피하고 싶은 것을 영어로는 포비아(phobia)라고 한다. 특정 상황이나 대상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혐오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포비아를 겪고 있다.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좁은 공간에서 공포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공포를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최대한 그 상황을 만들지 않거나 피하게 된다. 조금 증상이 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공포에 처하는 상황이 되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치료를 병행하긴 하겠지만 가급적 그런 상황 속에 들어가지 않도록 사전에 실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요인들을 차단하면서 공포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광장 공포증을 가진 애니의 이야기
영화 <우먼 인 윈도>는 특정 상황에 대한 포비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애나(에이미 아담스)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인물이다. 굳게 문을 잠그고 창문을 통해 밖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고, 멍하니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정신과 의사로 부터 받는 심리 상담도 의사를 집으로 불러 진행한다. 최대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고, 필요한 무언가가 있으면 누군가에게 부탁하여 전달 받는다. 만약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가 맞닥뜨리는 공포때문에 주저하다 결국 포기하고 만다. 꽤 심각한 포비아를 앓고 있는 그는 건너편에 새로 이사 온 한 가족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고 인사차 건너온 그 가족의 아들인 이슨(프레드 헤킨저)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애나는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데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이와 떨어져 생활하고 있다. 딸이나 남편과 통화하는 장면에서 애나의 표정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그가 만나는 사람은 지하에 세 들어 사는 데이비드(와이어트 러셀)와 건너편 이웃의 아이 이슨이 유일하다 그러다 이슨의 엄마인 제인(줄리안 무어)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제인의 남편 엘리스테어(게리 올드만)와 그 가족에게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후 창문을 통해 건너편 이웃집을 보고 있던 애나는 제인이 칼에 찔리는 모습을 보게 되고 본격적으로 그 일을 바로잡으려 애쓴다.
애나는 소아 정신과 의사다. 그 자신이 정신과 상담을 해주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다른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가진 포비아를 치료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만 우울한 기분에 늘 와인을 같이 마시고 있는 그는 약기운 때문에 가끔은 혼잣말을 하거나 멍하니 앉아있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마주하게된 건너편 이웃집의 살인사건은 그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 그를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상황으로 만든다. 애나가 만난 이슨의 엄마 제인이 칼에 찔리는 모습은 그 가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인과 이슨을 도와야 겠다는 마음을 일깨우고, 그것이 결국 애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즉, 애나가 강제적으로 광장 공포증에 맞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스릴러 장르이고,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군지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우먼 인 윈도>에서 긴장감을 만드는 건 그 사건의 범인이라기보다는 애나의 상태다. 애나는 약기운과 술에 적당히 취해있는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과연 진짜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보는 관객들도 그의 행동과 판단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무조건 현관문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애나의 모습 자체가 이 영화에서 긴장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치다.
살인범으로 인한 것 보다는 애나의 태도와 심리상태로 만들어내는 스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인공 애나는 영화 전반부 내내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관객들의 시각에서는 애나는 믿음을 주는 주인공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애나가 타인, 특히 아이 이슨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신뢰감을 형성하려고 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초반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애나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지만 중반의 특정 사건 이후에 그 믿음은 흔들린다. 또한 영화는 좋은 배우들을 이용해서 관객에게 혼선을 주는데, 건너편 이웃의 남편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과거에 그가 맡았던 악역 연기로 공포심을 높여주고, 줄리안 무어는 조금은 가볍지만 비밀을 가지고 있는 제인을 연기해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
지난주 넷플릭스에 공개된 <우먼 인 윈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객들에게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후반부의 갑작스러운 반전과 범인의 등장이 설득력이 없고 너무 급작스럽게 흘러간다는 의견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범인을 파악하는 스릴러가 아니라 한 인물이 자신이 가진 포비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심리 스릴러로 본다면 영화에 대한 판단은 바뀔 수 있다. 전반적인 영화의 전개를 볼 때 대부분의 긴장은 범인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애나의 심리 상태나 그가 공포를 가지고 있는 광장으로 나가야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결말부도 결국 애나가 광장에 나가서 어떤 태도를 보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생활을 해나가게 되는지가 보인다.
<우먼 인 윈도>를 연출한 조 라이트 감독은 <오만과 편견>(2006)이나, <어톤먼트>(2008) 같은 잔잔한 영화를 감독하거나 <다키스트 아워>(2018) 같은 연기력이 돋보이는 영화를 연출해왔던 감독이다. <한나>(2011)나 <팬>(2015) 같은 액션 영화 연출도 해본 적이 있으나 성공적인 도전은 아니었고, 스릴러 장르는 이번이 첫 도전이다. 일단 이번에 연출한 작품은 정통적인 스릴러 장르의 틀을 가지고 있지는 않고 주인공의 심리적인 부분에 보다 집중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원작은 A.J. 핀의 2018년 출간된 소설이다. 원작 소설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연출되었으며 일견 히치콕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보여주고자 하는 방향 자체는 다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다른 어떤 배우보다 에이미 아담스가 중심이 된다. 그는 공포 상황을 최대한 만나지 않는 방향으로 상황을 통제하려고 노력하지만 우울한 인물을 혼란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나 그가 꼭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에이미 아담스의 얼굴에 비치는 망설임과 해야만 한다는 어떤 결의가 화면 속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에이미 아담스의 뛰어난 연기와 조금은 결이 다른 스릴러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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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감정들이 불타지 않고 사그러든다
디즈니의 대표적인 고전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백설공주>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1937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관객들에게 ‘하얀 피부에 순수함을 지닌 공주’와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는 여왕’이라는 대비를 각인시켰다. 이 이야기는 사실 독일의 그림 형제 동화를 기반으로 하며, 옛날부터 ‘권선징악’과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된 <백설공주>는 디즈니 고유의 색채와 어우러져, 뮤지컬적 요소와 마법같은 판타지가 더해져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 디즈니가 과거 애니메이션들의 실사화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 이번에는 <백설공주>가 그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다양한 논란이 있었듯, 원작과 달리 백인이 아닌 라틴계 배우(레이첼 지글러)가 백설공주 역을 맡았고, 마녀 여왕은 기존과는 다른 이미지의 갤 가돗으로 캐스팅되었다.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라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들은 “이 캐스팅이 과연 어울릴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무엇보다 <백설공주>라는 고전 서사가 가진 익숙함이 이미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이 실사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감정을 전달하는지가 관건이 됐다.
[첫번째 감정] 여왕의 욕심
이번 영화에서 백설공주(레이첼 지글러)는 새로 등장한 여왕(갤 가돗)과 대립 구도를 이룬다. 그러나 과거 애니메이션에서 여왕이 가진 욕망이 ‘왕국을 넘어 더 큰 세상까지 지배하겠다’는 식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실사판에서 여왕의 욕심은 의외로 꽤나 좁게, 사적인 영역에 머무른다. 여왕은 왕에게 접근해 미모를 무기 삼아 결혼에 성공하고, 결국 왕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왕국을 쥐락펴락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말 사악한 인물”이란 인상을 주지만, 커다란 비전을 가지기보다는 지금 손에 쥔 왕국과 아름다움만을 지키려는 데 급급하다.
이 때문에 여왕의 행동은 치졸하고 쪼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백설공주가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든다든가, 성에서 내쫓는 장면은 ‘저게 전부인가?’ 싶은 의문을 남긴다. 물론 동화 속 원전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은” 여왕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영화 속에서 조금 더 깊은 내면이나 거대한 야망이 드러났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갤 가돗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맡았기에, 여왕의 욕망을 좀 더 웅장하게 그려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전반에서 여왕은 끈질긴 악의를 유지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스케일이나 동기에 있어 확장성이 부족하다. 미모 유지에만 집착하고, 백설공주를 질투하는 모습은 너무 전형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캐릭터성이 관객에게 통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는 의문만 남기고 만다. 조금만 더 과감한 설정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역학을 보여줬더라면, 여왕이 가진 욕심이 제대로 살아났을 텐데 말이다.
[두번째 감정] 조나단의 당당함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왕자가 백설공주를 구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면, 이번 실사판에서는 조금 다른 감정적 구도가 펼쳐진다. 백설공주의 호감을 얻는 인물은 조나단(앤드류 버냅)이라는, 다소 의외의 캐릭터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인물로, 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 여왕의 음식을 훔칠 정도로 소신 있고 선량하다. 용기와 선함을 겸비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고 자신도 산 속에서 도적 생활을 하는 처지이다 보니, ‘진정한 리더’로 나아가기엔 장애가 많은 캐릭터다.
백설공주가 조나단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그의 ‘당당함’ 때문이다. 이는 기존 원작에 비해 변화된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 속 왕자는 다소 수동적으로 백설공주와 ‘운명적 사랑’을 맺었지만, 실사판의 조나단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필요한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안다. 그래서 백설공주가 힘들어할 때도 말없이 곁에서 지탱해주며, 사실상 그가 ‘동화 속 왕자’의 역할을 대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당당한 성격 덕분에 조나단은 백설공주가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결정적인 활약을 보인다. 여왕의 위협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는, 기존 ‘백마 탄 왕자’ 서사를 약간은 새롭게 변주해 낸다. 다만, 도적 신분이라는 설정 때문에 “과연 그가 왕이나 귀족에 비해 충분히 매력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영화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당당함과 선함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새로운 ‘남성 캐릭터상’을 제시한다.
[세번째 감정] 백설공주의 배려심
이번 실사판의 핵심은 역시 백설공주라는 캐릭터다. 과거 작품들에서 백설공주는 순수하고 착한 인물로만 부각되었다면,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을 기억하고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점이 크게 강조된다. 일곱 난쟁이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 심지어 적대적인 존재에게도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볼게” 같은 시선을 보이니, 그 선함의 폭이 훨씬 확장된 셈이다. 사실상 백설공주가 지닌 가장 큰 무기는 ‘배려심’이며, 주변 인물들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후반부를 보면, 백설공주는 여왕과 대결 구도에 서게 된다. 다만 힘이나 마법으로 압도하기보다는, 그녀의 배려심과 공감 능력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의외로 여왕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계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정도로 끝나나?” 하는 허전함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화적 감수성을 생각하면, 백설공주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선함이 “정의로운 벌” 못지않은 힘으로 여왕을 몰아붙인다는 설정을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배우 레이첼 지글러가 이 배역에 완전히 어울리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으로 비추며 감정선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워낙 백설공주의 ‘백인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이 많을 듯하다. 레이첼 지글러가 나쁜 연기를 펼친 건 아니지만, 캐릭터 해석과 비주얼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상을 준다. 이는 어디까지나 관객 개개인의 선입견과 기대치가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애니메이션 원작을 완전히 뛰어넘진 못하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실사화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백설공주> 실사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기본 줄거리는 애니메이션과 동일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뻔한 전개를 다시 보게 된 느낌이 강하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캐릭터 설정이 조금 바뀌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노래들이 추가되었다는 정도다. 하지만 디즈니가 의도한 혁신적 변화라고 하기엔, 이야기 자체가 이미 너무 익숙해 긴장감이나 신선함을 크게 찾기 어렵다.
이번 캐스팅에 대해 반감이 있는 사람들은 “백설공주가 왜 백인이 아니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일곱 난쟁이가 실사로 표현된 어색함까지 지적한다. 실제로 난쟁이들이 전부 ‘작은 키를 가진 배우들’로만 구성되지 않았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오가는 모습에서 몰입이 깨진다는 반응도 꽤 많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 조합이 어색한 지점이 존재하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연출을 맡은 마크 웹 감독은 과거 <500일의 썸머> 같은 작품에서 아름다운 화면과 섬세한 감정선을 잘 살려낸 바 있다. 이번에도 화사한 색감과 동화적 분위기를 적절히 배치해, 시각적으로는 꽤 매력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문다. 영화 전체의 매력을 완전히 끌어올리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고루하고, 캐릭터 간 호흡 역시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백설공주> 실사판은 디즈니가 최근 시도해온 실사화 프로젝트 중에서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작을 사랑했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기엔 부족하고, 캐스팅 논란이나 난쟁이 표현 문제로 인해 호불호도 극명해질 듯하다. 물론 뮤지컬적 요소나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굳이 추천하고 싶을 만큼 눈부신 성취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래된 감정들로 가득한 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라져버린 느낌이 짙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러 갈지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거창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디즈니의 과거 명작을 실사로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혹은 백설공주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시도해볼 만하겠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놀라움은 찾기 힘들다. 일상의 무거움을 잠시 내려놓고, 화려한 색감과 노래가 있는 동화 한 편을 보고 싶을 때 정도에나 가볍게 즐기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래된 감정들은 더는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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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K로 담아낸 거대한 무의미
다큐멘터리에 스포일러랄 게 있겠으나, 그래도 스포일러를 포함한다고 미리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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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은 비현실적이다. 비현실적이라 함은 현실이 아닌 것일진대, 현실은 참으로 지난하고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현실적인' 고민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현실적으로 먹고 살 만한지, 현실적으로 내 수준에 맞는 사람은 누구인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투자하는 게 옳은지. 나아가 '현실적인 조언 구합니다'라는 게시판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현실적인'이라는 말이 앞에 붙는다는 것은, 극대의 행복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만고만한, 내 능력 한에서 최대로 가능한 정도를 말하는 게 대부분이다. 턱걸이 같다. 턱걸이를 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고군분투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의미는 턱걸이를 할 철봉 위에 있다. 그것을 넘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요즘은 주식에, 부동산에, 코인에, 그러니까 돈이 곧 의미다. 자산을 증식하지 못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므로 행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이라는 아름다운 착취 속에서 삶의 의미를 부지런히 찾아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의미한 건 무엇인가. 모이지 않는 월급, 오르지 않는 노동가치, 그러므로 살 수 없는 부동산, 애프터 없는 소개팅에서 지불한 돈, 건설적이지 않은 잡담, 뭐 그런 것들일까.
의미와 기호로 가득한 세상 너머, 해발 1,500미터 고지에 '오제'라는 습지가 있다. 그 습지는 인간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지 않고, 인간 역시 그 무엇도 앗아가지 않는다. 박혁지 감독은 <행복의 속도>라는 제목으로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다. 아니, 그 속에 살고있는 사람을 담았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카메라가 집요하게 쫓는 대상은 대략 80kg의 짐을 지게에 싣고 걸어서 산장까지 가는 '봇카' 이가라시, 이시타카이다. 박혁지 감독은 광활한 습지를 4K의 해상도로 보여주고, 봇카들의 걸음을 뒤쫓는다.
나는 자본주의와 얼마간의 거리를 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영화 초반 그들이 80kg를 지고 산을 오르고 걷는 걸 보면서 '모노레일을 깔면 안 되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나라는 산 곳곳에 모노레일이 깔려 있어 필요한 짐이며 도구들을 실어 올린다. 모노레일을 깔면 무거운 짐들을 금방 보낼 텐데. 게다가 '몸빵을 하면 돈은 많이 벌겠지?' 라는 생각까지.
그러다 후반부에 가서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자본주의적이며 포드주의 비슷한지를 생각했다. 히말라야도 아닌 산을 걸어서 짐을 옮기는 행위를 경제적이지 않다, 즉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그만 자본과 연결시키며,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도 역시 이 체제 속의 인간일 뿐이었다.
영화는 이가라시와 이시타카의 차별점을 조명한다. 둘 다 봇카이지만 둘은 꽤 다르다. 우선 이시타카는 '일본청년봇카대' 회장으로서 봇카를 널리 알리고자 하는 활동가이다. 겨울이 되어 오제의 산장도 문을 닫고, 봇카도 할일이 없어졌을 때 도시로 나가 봇카를 홍보한다.
이시타카가 걷는 도시의 거리는 오제의 속도와는 정반대다. 다급하게 점멸하는 신호등, 그에 맞추어 발걸음을 재촉하는 행인들, 다급한 발걸음 사이에 이시타카가 서 있다. 사람들은 봇카 일에서 어떤 보람을 얻는지 묻는다. 이시타카는 말한다. 산장이 있음으로써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산장이 있음이 좋다고.
행위에 보람이든, 의미든, 뭔가가 있어야 하는 걸까?반면 이가라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도 모자라 목에 카메라까지 걸고 걷는다. 오제의 풍경을 카메라에 섬세하게 담는다.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큰아들을 데리고 짐을 가져다 주던 산장에 가기도 한다. 잠자리를 잡고, 뛰어놀고,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이가라시의 아내는 농장에서 일한다.
때는 설이다.
이시타카와 이가라시 가족 모두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시타카의 부모는 몸으로 하는 일인데 몸이 상하면 어떻게 할 건지, 그때 되면 어떻게 먹고 살건지를 묻는다. 물론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지만 이시타카의 표정은 어둡다.
이가라시는 노모에게 봇카를 하면서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노모는 마치 아이처럼 그 풍경을 반긴다. 이제 가기 힘들어진 그곳, 그 나무, 그 꽃들. 계절과 햇빛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탄한다.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가라시는 대답한다. 누가 기다리고 있고, 시간이 정해져있다면 힘들었겠지만 자기 속도로 걷다 보면 도착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고.
생각해 보면, 등산을 할 때 나 혼자 느릿느릿 걸어가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다. 그런데 여럿이 갔을 때 무리의 제일 끝에 산을 올라가면 그보다 힘들 수가 없다. 그때부터는 산의 풍경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는다.
여기서 질문할 수 있겠다. 우리는 왜 힘든가.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남들보다 빨리 걷기 위하여, 남들보다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바삐 움직여야만 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인들이 등에 지고 있는 짐과 봇카의 짐 중 무엇이 더 무겁다고 말하기 쉽지 않을 거다.
카메라는 봇카들의 가쁜 숨, 무거운 발걸음을 집요하게 담다가, 그들의 가정으로 이동했다가, 또 오제의 광활한 자연을 비추기도 한다.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MSG를 치지 않은, 그래서 맹맹하고 심심한 그들의 일상이다.
초반부에는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계속 이렇게 걷기만 할 것인가 생각했다. 기승전결도 없고 문제도 없으며, 변화라고는 오제에 찾아오는 계절 뿐인데. 114분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봇카들이 걸음을 거듭하고, 나는 봇카들의 걸음을 눈으로 좇으면서 나는 어디로 걸어가고 있고, 어떤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는지, 그 의미는 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왜 내 눈에 아름다운 오제에 모노레일을 깔지 않는 저들이 이상했는가.
저들의 행위가 무의미하고 현실적이지 않게 보인 거지. 저렇게 힘든 일을 할 거면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게 좋지 않을까, 같은 너무나도 현실적인 생각.
그래서 행복의 속도는 무엇일까.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는 말은 사실 틀린 말이다. 속도는 방향을 포함한 벡터값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속도란 행복의 속력과 방향을 내포한 제목일 것이다.
느림이 마냥 행복할 수는 없다. 속력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가는지가 더 중요하겠다. 사물에서, 사람에게 덕지덕지 붙은 의미와 상징과 기호들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그것 자체가 보인다.
봇카들은 오제에 거대한 의미를 두지도 않고, 그들이 하는 일에서도 역시 내일은 더 빨리 가야지, 내일은 더 무거운 짐을 들어야지 하고 포부를 갖지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 자기 속도로 걸어갈 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어쩌면 너무 뻔하게도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떠올랐다.
우리들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어쩌면 지난하고 외로울 길을 각자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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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1초 앞, 1초 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1초 앞, 1초 뒤(One Second Ahead, One Second Behind), 2024
일본, 로맨스, 판타지 등 119분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1초 앞, 1초 뒤>
시간이 방대하게 축적된 추억을 연료 삼아 흐를 때, 기억은 위대함과 무력함이 공존하는 대자연의 힘으로 몸집을 키운다. 시간을 소유하고 싶은 염원은 망각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소망과 다를 바 없고, 기억을 되찾고 싶다는 말은 언제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만큼 기억과 시간의 거리는 가깝다. 아니, 하나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둘 사이는 깊고 밀접하다. 여기서 밀접함은, 서로에게 충분히 충족된다는 의미다. 두 개의 원이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도 반드시 겹쳐있다는 점, 다르게 불리고 굴러가는 방식도 다르지만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기억)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동이 걸려 때때로 멈춤 현상이 발생하지만, 끝없이 흘러가고 이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완전한 거부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 강력한 힘을 기억(시간)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삶을 흐르게 하는 바퀴가 고작 두 개일리 없고, 나아가 겹친 수가 겨우 두 겹뿐이겠는가. 시간과 기억, 그리고 무엇과 또 다른 어떤 것들. <1초 앞, 1초 뒤>는 여기에 ‘관계’를 겹쳤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관계, 너와 나의 사이, 우리와 그들의 차이, 거기서 발생하는 이야기. 영화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개인사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지막엔 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다. 끝엔 합쳐진 이야기가 계속 흘러갈 수 있도록 붙잡지 않고 풀어놓음으로써 해피엔딩을 완성한다. 남들과 달라 늘 혼자였던 두 인물이, 그 다름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서로를 기억해 내고, 마침내 서로의 품에 녹아들며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 시작은 남보다 1초 빠른 하지메의 속사정으로 출발한다.
교토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하지메는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과 함께 자랐다. 생강을 사러 간 아버지의 실종도 문제였지만, 태생적으로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사는 삶이 그를 결정적으로 혼자가 되게 만들었다. 달리기 시합을 하면 늘 먼저 출발했고, 말과 행동은 지나치게 많고 빨랐으며, 사진을 찍으면 셔터 속도보다 빨리 반응해 항상 눈을 감은 채 찍었다. 웃음 포인트 역시 반 박자 앞서서 본의 아니게 스포 빌런이 됐고, 우정은 물론 사랑 방식도 타인보다 급해 상대에게 먼저 차이기 일쑤였다. 성인이 된 후 집배원으로 일했지만, 속도위반을 밥 먹듯이 해 ‘분노의 질주남’ 별명과 함께 사무직으로 재배치됐다. 현재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조금의 여유도 허용치 않는 그의 업무 속도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보통 이들이 그렇듯, 일을 적게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아예 하지 않는 건 또 꺼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하지메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레이카 역시 속도만 다를 뿐 하지메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어릴 적, 시험을 봐도 긴 이름을 쓰느라 문제를 반 이상 풀지 못했다. 느린 탓에 모기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고,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움직이는 피사체를 순간 포착하는 건 버킷 리스트가 된 지 오래다. 웃음 포인트도 스포 빌런과 준하는 뒷북 빌런으로, 모든 사람이 웃고 넘어간 지점을 꼭 뒤늦게 밟아 매번 난처하다. 대학을 7년째 다니고 있고, 집 대신 사진 동아리 방에서 숨어 살고 있다. 현실이 팍팍하고 지난하지만, 죽은 아빠가 남긴 카메라로 세상을 찍으며 외로움과 슬픔을 조금씩 덜어내며 산다.
1초의 횡포도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던 두 사람은, 새로 생성된 관계들로 인해 충돌하듯 재회한다. 길거리 가수와의 연애로 30년 만에 행복을 느끼는 하지메와 그런 그의 시야에 레이카가 처음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사실 레이카는 하지메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과거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위로해 준 소중한 친구를 잊을 리 없었다. 두 아이는 헤어지기 직전 레이카 고모의 우편함 열쇠를 나눠 가지며 꼭 편지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꼬꼬마들의 소꿉놀이는 잊혔고, 시간 탓을 하든 기억 탓을 하든 둘이 다시 만나 서로를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레이카가 그날, 그때, 버스 하차 벨을 늦게 누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1초 느린 여자가 1초 빠른 남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고, 레이카는 그날부터 하지메에게 우표를 사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가 날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메에게 잊힌 시간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삶을 산 기간이 더 길었으니까. 무엇보다 레이카는 하지메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이 위로받고 있었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하지메와 가수, 가수와 레이카, 하지메와 실종된 아버지, 하지메와 가족, 레이카와 하지메까지, 둘의 이야기는 포개지는 관계들의 영향력으로 특별한 반전 없이 흘러간다. 하지메의 돈이 목적이었던 가수의 못된 심보가 레이카에 의해 밝혀지고, 돈 봉투를 챙겨 가수를 만나러 가던 하지메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를 잃는다. 그가 잃은 하루는, 자기도 모르게 무수히 많은 1초를 저장해 왔던 레이카의 1일이었고, 레이카는 멈춘 하지메를 데리고 바다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다. 그녀와 같은 1일 무료 사용권을 가진 버스 기사의 도움으로 말이다. 하지메의 아버지도 집을 나간 날 세상이 멈추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하고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었다. 그는 레이카 덕에 아들과 사진도 찍고 가족들에게 못했던 미안하단 말을 하고 떠난다.
다음 날, 깨어난 하지메는 잃어버린 하루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속된 우연으로 우편함 열쇠까지 찾아내 레이카가 그동안 보냈던 편지(사진들)를 발견하면서, 덮어뒀던 그녀와의 추억을 찾는 데 성공한다. 매 순간 어긋나기만 했던 둘의 시간이 딱 맞춰지는 그때, 늘 빠르기만 했던 하지메는 레이카를 기다리고, 늘 느렸던 레이카는 하지메를 위해 빠른 걸음으로 우체국 안으로 들어간다. 서로를 마주 보고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트리는 두 사람, 영화는 잊지 않고 둘의 치유 과정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게 놔둔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1초 앞, 1초 뒤>는 진옥훈 감독의 <마이 미씽 발렌타인>(2010)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굳이 원작을 언급한 건, 본 작품을 원작과 함께 음미하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주인공의 성별(원작은 여자가 빠르다)이 바뀌었고,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로 등장한다. 둘째, 주인공이 잃어버린 하루가 밸런타인데이에서 커플 대회가 열리는 날로 변경됐고 하루 삭제가 가능하게 된 이유도 나름 보충됐다. 셋째, 인물들의 서사에 집중하면서도 배경(일본의 교토)을 보여주는 데 힘썼다. 세 가지 차이점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바뀌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화의 기본 시각과 주제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두 작품은 ‘1초’를 활용하는 방식과 1초에 숨은 ‘기억’을 다루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로 인해 관객에게 각각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출처: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 스틸컷 (다음)
<마이 미씽 발렌타인>은 시간과 기억에 ‘방황하는 나’를 겹쳤다. 1초 빠른 여자와 1초 느린 남자는 군중 속 외톨이였다. 따라서 홀로 내면의 힘을 기르고 지키는 일이 먼저였다. 그런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상하게만 느꼈던 내가 사실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더는 혼자가 아님을 확신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다. ‘자신을 사랑하라,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에서 ‘자신을 사랑하라,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로 바뀌는 자막도 한몫한다. 따라서 원작에서 ‘1초’는 인물들의 단순 ‘기질’로 표현된다. 여자 주인공은 말과 행동, 생각까지 타인보다 급한 성격을 가진, 그리하여 남보다 시간을 더 쪼개 쓰는 사람이지 <1초 앞, 1초 뒤>의 하지메처럼 특별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리메이크작의 차별화된 방식에 있다. <1초 앞, 1초 뒤>는 제삼자의 시점으로 하지메와 레이카의 평범할 수 없는 삶을 소개한다. 관찰자의 목소리는 원작의 코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줬던 ‘연민’이란 감정 외에, 하지메와 레이카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환상’을 덧입힌다.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사는 ‘외톨이들의 웃픈 사랑’ 이야기가,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으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시간이 멈춰 하루를 잃는 판타지적 요소도 <마이 미씽 발렌타인>에선 이야기 중반에 갑자기 튀어나오지만, <1초 앞, 1초 뒤>에선 처음부터 하지메와 레이카를 통해 풍기며 등장한다. <마이 미씽 발렌타인>의 도마뱀 인간(정령?)이 <1초 앞, 1초 뒤>에선 생략된 이유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원작이 끝까지 집중한 한 겹은 ‘남들보다 유별난 나(자아)’이고, 리메이크작의 한 겹은 ‘태생적으로 조금 특별한 삶을 사는 우리(관계)’다. 일상 속의 나와 판타지 속의 우리. 사건 해결의 결정적 추도 ‘나’와 ‘우리’로 각자 진행된다. 원작의 인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개인의 몫으로, 리메이크작의 인물들은 모두의 영역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결말의 형태는 같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인물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러나, 결말이 주는 의미는 다르다. 원작의 끝엔 유별나도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나와 네가 있고, 리메이크작의 끝엔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을 버텨온, 서로에게만 각별한 연인이 있으니까.
두 작품 모두 재미있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이지만, 다른 작품으로 봐도 좋다는 얘기다. 똑같은 로맨스 판타지 장르지만 각자 발산하는 매력이 다르다. <마이 미씽 발렌타인>의 맛이 서툰 삶과 풋풋한 첫사랑에 있다면, <1초 앞, 1초 뒤>의 맛은 순수함과 첫사랑을 향한 불가항력(초능력)에 있달까. 이는 대만 영화와 일본 영화가 가진 각각의 특색과도 연결돼, 보는 맛이 더 다채로울 것이다.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우린 매일 어떤 것이 어떻게 겹친 줄도 모르고 삶을 굴리고, 동시에 굴려지며 그렇게 물 흐르듯 산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하루를 더 보상받거나 하루를 잃고도 이를 전혀 모르고 사는, 그런 발칙한 정체 구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낙이라면, 분명 흐르는 데 좋은 연료로 쓰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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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기다리며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으로 30년 종사한 딸, 커스틴 존슨이 아버지 딕 존슨의 죽음을 다양하게 연출하며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픽션(Fiction)과 논픽션 (Nonfiction)을 오가며 촬영된 영상은 아버지의 죽음, 더 나아가 '죽음'이 가져온 남은 자들의 상실과 아픔을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냈다.
다큐멘터리 속 딕 존슨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다. 길을 걷다 누군가가 떨어트린 모니터에 머리를 맞아 죽거나, 공사장 인부가 휘두른 자재에 맞아 피 흘리며 죽는다. 그 외에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고, 자전거에서 떨어지거나, 심장마비로 죽는다. 이렇듯 죽음은 늘 예기치 못하게 그것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스틴이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게 된 이유는 알츠하이머로 떠난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다. 커스틴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찍은 짧은 영상만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큰 후회를 했다. 그녀는 죽음이 주는 상실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그러한 상황 속 딕 존슨 또한 점차 기억을 잃는 일이 잦아진 것을 커스틴은 깨닫게 된다. 이제는 죽음이 주는 상실의 아픔에 덜 괴로울 수 있도록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을 연습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딕 존슨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 연습하기 영상은 매우 개인적인 내용이면서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존슨 집안은 예로부터 안식교를 믿었다. 안식교에서는 술, 춤, 영화를 금지한다. 그러나 딕 존슨은 안식교의 규율을 거부하고 자녀와 <영 프랑켄슈타인>을 보러 가는 등, 그에게 천국은 아이들과 함께 이 땅에 있는 것일 뿐 안식교에서의 규율은 중요하지 않았다. 딕 존슨은 자녀들을 아끼고 주변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알츠하이머의 전조가 보인 일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알츠하이머는 자신을 점점 잃게 만들고 주변 사람도 하나씩 잃어간다. 나를 구성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다.
"제가 남편이 죽었을 때도 딕에게 제일 먼저 연락했어요. 근데 마음이 아팠던 게 며칠 후에 딕을 만나 절 따뜻하게 안아주셨는데 5분 후에 저에게 남편의 안부를 물어보셨어요.
전 그게 또 다른 상실임을 알았어요. 기억 상실이죠.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한 딕의 기억은 제 안에 있다는 거예요."다큐멘터리 속 연출된 장면들은 죽음에 대비하는 연습의 과정을 담아냈다. 딕 존슨이 죽고 나서 가게 될 천국을 연출하거나 딕의 친구들을 만나 죽음을 이야기하며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딕의 장례식이다. 장례식은 엄중하고 슬픈 분위기로 가득하다. 친구는 추모사를 읊으며 슬픈 눈물을 흘리며 그를 추억한다. 그러나 딕은 장례식이 열린 교회 강당의 문밖에서 그 상황을 보고 웃고 있다. 그렇다. 이것은 딕의 가짜 장례식이다. 딕은 추모사가 끝난 장례식장의 문을 열고 자신을 추모한 사람들 속으로 걸어가 인사를 나눈다.
죽음을 연습한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준비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가져다주는 슬프고 무서웠던 기억에 웃음을 가져다주는 여유를 덧대어 준다. 물론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딕 존슨의 죽음’은 언젠가 일어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스틴 존슨은 벽장에 들어가 핸드폰에 한 문장을 반복해서 녹음한다. “딕 존슨은 죽었습니다.” 한 문장을 계속 되뇌며 커스틴은 딕 존슨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녹음을 마친 뒤 벽장 문을 열고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닉 존슨을 끌어안으며 다큐멘터리는 끝이 난다.
'Dead'
죽음이란 단어는 쉽게 꺼내는 주제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죽음은 정말 무서운 것이고 피하고 싶은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느꼈다. 누군가에게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기억은 없다. 그저 어른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길 꺼렸으며 터부시했다. 영화, 소설, 드라마, 책 다양한 매체에서도 죽음은 ‘나’라는 존재의 상실이자 끝이었다. 또한,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픔을 가져 왔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죽음은 최대한 피해야 하고 말하면 안 되는 금기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늘 후회로 가득하다. 죽은 자에 대한 제대로 된 배웅을 하지 못해 후회하고, 죽은 자신에 대한 위로를 건네지 못해 후회한다. 나의 죽음만이 아닌 타인의 죽음, 우리는 죽음 연습이 필요하다. 죽음은 누구나 단 한 번 겪는다. 누구든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죽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연출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익숙해진다고 해서 모든 아픔과 후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아픔과 상실 또한 삶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기에 조금은 덜 아플 수 있도록 연습을 해야 한다.
“유년기가 죽으면 청년기가 오고, 청년기가 죽으면 노년기가 오고, 어제가 죽으면 오늘이 오고 오늘이 죽으면 내일이 온다.”
몽테뉴의 얘기처럼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의 연속이며, 처음부터 삶 안에는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인생에 행복한 일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헤어지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지 않을까? 그래서 딕은 기억은 점점 잃어가지만, 딸과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지금을 천국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죽음을 마주 보았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 보며 딕은 연출된 자신의 죽음을 보며 천국이 그려진 세트장을 보며 웃는다. 이 웃음이야말로 딕 존슨이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천국에서 만난 아내와 이소룡과 버스터 키튼, 프리다 칼로와 함께 있는 힘껏 웃고 즐기면서 말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만 준다면 참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면 서로를 잃는 고통도 마주해야 한다. 상황이 나빠지면 우린 서로 꼭 껴안는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짧은 기쁨에 감사한다."
감독: 커스틴 존슨 (Kirsten Johnson)
장르: 다큐멘터리 / 드라마 / 코미디
제작국가: 미국
러닝타임: 약 8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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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남자 영직남의 "아이맥스: 물의 길"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네요.
*아이맥스관에서 3D로 보실 분들은 3D 안경(재사용)이 깨끗이 안닦여 있는 경우가 있으니
안경을 닦을 수 있는 휴지 등을 준비해 가시면 좋을 듯합니다. 즐영하시길요!! ^^

- 영화 <야쿠자 어쌔신> 예고편
후카미 아키라는 아버지 미쓰오가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이후 일본 지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마지마 그룹의 요시키 회장에 의해 길러졌다. 그는 조직의 특급 암살자로 활동하며 평소에는 회장의 딸 유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며 비밀리에 그녀를 경호하고 있다. 어느날 조직 내 반란이 일어나고 회장은 후카미에게 숨겼던 과거를 알려준다. 그리고 유이를 지켜달라는 최후의 업무를 맡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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