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3-19 14:38:02
오래된 감정들이 불타지 않고 사그러든다
- <백설공주> (2025)
디즈니의 대표적인 고전 애니메이션을 꼽을 때, <백설공주>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1937년에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관객들에게 ‘하얀 피부에 순수함을 지닌 공주’와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미모를 확인하는 여왕’이라는 대비를 각인시켰다. 이 이야기는 사실 독일의 그림 형제 동화를 기반으로 하며, 옛날부터 ‘권선징악’과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되어 왔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버전으로 재탄생된 <백설공주>는 디즈니 고유의 색채와 어우러져, 뮤지컬적 요소와 마법같은 판타지가 더해져 전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최근 디즈니가 과거 애니메이션들의 실사화를 적극 추진함에 따라, 이번에는 <백설공주>가 그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다양한 논란이 있었듯, 원작과 달리 백인이 아닌 라틴계 배우(레이첼 지글러)가 백설공주 역을 맡았고, 마녀 여왕은 기존과는 다른 이미지의 갤 가돗으로 캐스팅되었다.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라 설명하고 있지만, 정작 관객들은 “이 캐스팅이 과연 어울릴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무엇보다 <백설공주>라는 고전 서사가 가진 익숙함이 이미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이 실사화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감정을 전달하는지가 관건이 됐다.
[첫번째 감정] 여왕의 욕심
이번 영화에서 백설공주(레이첼 지글러)는 새로 등장한 여왕(갤 가돗)과 대립 구도를 이룬다. 그러나 과거 애니메이션에서 여왕이 가진 욕망이 ‘왕국을 넘어 더 큰 세상까지 지배하겠다’는 식으로 느껴졌다면, 이번 실사판에서 여왕의 욕심은 의외로 꽤나 좁게, 사적인 영역에 머무른다. 여왕은 왕에게 접근해 미모를 무기 삼아 결혼에 성공하고, 결국 왕을 죽음에 이르게하고 왕국을 쥐락펴락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말 사악한 인물”이란 인상을 주지만, 커다란 비전을 가지기보다는 지금 손에 쥔 왕국과 아름다움만을 지키려는 데 급급하다.
이 때문에 여왕의 행동은 치졸하고 쪼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백설공주가 조금 더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죽이려 든다든가, 성에서 내쫓는 장면은 ‘저게 전부인가?’ 싶은 의문을 남긴다. 물론 동화 속 원전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은” 여왕의 욕망을 보여주지만, 영화 속에서 조금 더 깊은 내면이나 거대한 야망이 드러났다면 훨씬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갤 가돗처럼 강인한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맡았기에, 여왕의 욕망을 좀 더 웅장하게 그려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전반에서 여왕은 끈질긴 악의를 유지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스케일이나 동기에 있어 확장성이 부족하다. 미모 유지에만 집착하고, 백설공주를 질투하는 모습은 너무 전형적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캐릭터성이 관객에게 통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하는 의문만 남기고 만다. 조금만 더 과감한 설정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역학을 보여줬더라면, 여왕이 가진 욕심이 제대로 살아났을 텐데 말이다.
[두번째 감정] 조나단의 당당함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왕자가 백설공주를 구하는 존재로 그려진다면, 이번 실사판에서는 조금 다른 감정적 구도가 펼쳐진다. 백설공주의 호감을 얻는 인물은 조나단(앤드류 버냅)이라는, 다소 의외의 캐릭터다. 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이 없는 인물로, 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기 위해 여왕의 음식을 훔칠 정도로 소신 있고 선량하다. 용기와 선함을 겸비했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고 자신도 산 속에서 도적 생활을 하는 처지이다 보니, ‘진정한 리더’로 나아가기엔 장애가 많은 캐릭터다.
백설공주가 조나단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그의 ‘당당함’ 때문이다. 이는 기존 원작에 비해 변화된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 속 왕자는 다소 수동적으로 백설공주와 ‘운명적 사랑’을 맺었지만, 실사판의 조나단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필요한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안다. 그래서 백설공주가 힘들어할 때도 말없이 곁에서 지탱해주며, 사실상 그가 ‘동화 속 왕자’의 역할을 대체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당당한 성격 덕분에 조나단은 백설공주가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결정적인 활약을 보인다. 여왕의 위협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태도는, 기존 ‘백마 탄 왕자’ 서사를 약간은 새롭게 변주해 낸다. 다만, 도적 신분이라는 설정 때문에 “과연 그가 왕이나 귀족에 비해 충분히 매력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영화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당당함과 선함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새로운 ‘남성 캐릭터상’을 제시한다.
[세번째 감정] 백설공주의 배려심
이번 실사판의 핵심은 역시 백설공주라는 캐릭터다. 과거 작품들에서 백설공주는 순수하고 착한 인물로만 부각되었다면,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을 기억하고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점이 크게 강조된다. 일곱 난쟁이는 물론이고, 마을 주민들, 심지어 적대적인 존재에게도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해볼게” 같은 시선을 보이니, 그 선함의 폭이 훨씬 확장된 셈이다. 사실상 백설공주가 지닌 가장 큰 무기는 ‘배려심’이며, 주변 인물들이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 후반부를 보면, 백설공주는 여왕과 대결 구도에 서게 된다. 다만 힘이나 마법으로 압도하기보다는, 그녀의 배려심과 공감 능력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의외로 여왕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계기가 되는데, 이를 보고 있으면 “정말 이 정도로 끝나나?” 하는 허전함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화적 감수성을 생각하면, 백설공주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선함이 “정의로운 벌” 못지않은 힘으로 여왕을 몰아붙인다는 설정을 납득할 수 있다.
문제는 배우 레이첼 지글러가 이 배역에 완전히 어울리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으로 비추며 감정선에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워낙 백설공주의 ‘백인 이미지’가 우리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이 많을 듯하다. 레이첼 지글러가 나쁜 연기를 펼친 건 아니지만, 캐릭터 해석과 비주얼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인상을 준다. 이는 어디까지나 관객 개개인의 선입견과 기대치가 크게 작용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애니메이션 원작을 완전히 뛰어넘진 못하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실사화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번 <백설공주> 실사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기본 줄거리는 애니메이션과 동일하다 보니, 관객 입장에서는 뻔한 전개를 다시 보게 된 느낌이 강하다. 그나마 다른 점이라면 캐릭터 설정이 조금 바뀌었고, 뮤지컬 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운 노래들이 추가되었다는 정도다. 하지만 디즈니가 의도한 혁신적 변화라고 하기엔, 이야기 자체가 이미 너무 익숙해 긴장감이나 신선함을 크게 찾기 어렵다.
이번 캐스팅에 대해 반감이 있는 사람들은 “백설공주가 왜 백인이 아니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일곱 난쟁이가 실사로 표현된 어색함까지 지적한다. 실제로 난쟁이들이 전부 ‘작은 키를 가진 배우들’로만 구성되지 않았고,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오가는 모습에서 몰입이 깨진다는 반응도 꽤 많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캐릭터 조합이 어색한 지점이 존재하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연출을 맡은 마크 웹 감독은 과거 <500일의 썸머> 같은 작품에서 아름다운 화면과 섬세한 감정선을 잘 살려낸 바 있다. 이번에도 화사한 색감과 동화적 분위기를 적절히 배치해, 시각적으로는 꽤 매력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각적 아름다움’에 머문다. 영화 전체의 매력을 완전히 끌어올리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고루하고, 캐릭터 간 호흡 역시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백설공주> 실사판은 디즈니가 최근 시도해온 실사화 프로젝트 중에서도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작을 사랑했던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흥을 주기엔 부족하고, 캐스팅 논란이나 난쟁이 표현 문제로 인해 호불호도 극명해질 듯하다. 물론 뮤지컬적 요소나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겠지만, 굳이 추천하고 싶을 만큼 눈부신 성취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래된 감정들로 가득한 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그라져버린 느낌이 짙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러 갈지 고민 중인 사람들에게, “거창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디즈니의 과거 명작을 실사로 다시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혹은 백설공주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싶다면 시도해볼 만하겠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놀라움은 찾기 힘들다. 일상의 무거움을 잠시 내려놓고, 화려한 색감과 노래가 있는 동화 한 편을 보고 싶을 때 정도에나 가볍게 즐기길 바란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래된 감정들은 더는 뜨겁게 타오르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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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X뮤지컬 <스위니토드> 악마를 보았나?
* 영화 및 뮤지컬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대학 가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위시리스트 중 하나가 조승우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을 보는 것이었다. 물론 돈이 있어도 쉽사리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이쯤 되니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좀 달랐다. 별 기대 없이 <스위니 토드> 좌석을 살펴보다가 덩그러니 나 여기 있소, 하는 자리를 발견했다. 취소표인 모양이다. 세상 살고 볼 일 아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한 순간이 온다니. 어느새 공연장에 그 티켓을 쥐고 앉아있었다. 감회가 새로운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다. 누군가가 오지 않기로 한 그 자리가 내가 올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자꾸 얘기하면 주책이 될 수도 있으니 1절만 하자. 소리를 듣자마자 귀가 즐겁고 저절로 지어진 웃음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름 세 글자로 기대하고 믿을 수 있고, 다른 이를 즐겁게 하는 건 대단한 능력이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를 기다리면서 살펴보니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이 유독 많았다. 왜 아니겠나. 막장 드라마랑 비교해도 보통을 넘는다. 벤자민 바커의 아내이자 조안나의 어머니인 소중한 루시를 강간하고, 그 조안나를 입양해서 심지어 아내로 들이려는 터핀 판사의 비뚤어진 욕망.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돌아와 복수가 잘 풀리지 않자 불특정 다수의 목을 긋는 적나라한 살인 방식을 선보이는 이발사(스위니 토드/벤자민 바커), 심지어 그 시체에서 나온 고기로 파이 수익 창출을 이끌어내는 가게 주인 러빗 부인. 그 사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앤소니와 조안나의 사랑인지 도피인지 모를 곁다리 이야기. 아, 러빗 부인이 말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도. 듣도 보도 못할 만큼 살벌하다. 터핀 판사와 비들,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 법조계의 독주를 막으려는 미용업계와 요식업계의 콜라보. 듣기 좋기보다는 불편하고 독특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음악에, 중반부터 결말까지 유혈이 낭자하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란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 어느새 붉게 물든 피가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오죽하면 왜 이렇게 자극적이고 보기 힘든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뤘을지 의문도 들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든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거나, 혹은 이중적인 사람의 모습을 다루는 게 극적이어서? 상상해보자. 복수를 꿈꾸는 연쇄 살인 이발사와 인육 파이를 파는 공범 파이 가게 주인. 공연으로 볼 때 우리는 그들이 마구 살인을 하기로 다짐하는 노래에 박수를 치고 N차 관람을 하고 있지만, 현실이었으면 우리는 세상이 미쳐 날뛴다면서 욕을 한 바가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스위니 토드 원작 이야기가 실화 바탕이라는 설이 있어서 그렇다. 당시 런던에 돌던 소문이긴 했다고 하고. 실화일 때와 아닐 때 와 닿는 느낌이 좀 다르다. 날카로운 이발사의 칼날이 내 목이라고 피해 갔을까 싶은 정도의 서늘함?
무대는 확실히 이런 이야기를 펼쳐도 안전하게 느껴진다. 여러 인물을 고루고루 중요하게 잘 다뤄주었고 유혈이 낭자한데도 그리 잔인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울한 이야기 속에서도 연기나 대사가 가볍고 재치가 있어서 부담감도 적었다. 풍자와 언어유희가 가득했고, 내용을 예측하지 못하고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Worst Pie in London이나 Pirelli's Miracle Elixir, A Little Priest 등의 가사가 흥미롭다. 여자 취향이 같은 터핀 판사와 스위니 토드의 오묘한 듀엣곡 Pretty Woman도 빼놓을 수 없고. 스위니 토드가 폭발하는 Epiphany, Wait과 By the Sea 등 러빗 부인의 몽환적인 넘버가 자주 생각난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 <스위니 토드>는 또 다르다. 뮤지컬과 전개는 거의 같지만 분위기가 무겁다. 차이점은 몇몇 넘버가 생략되거나 대체되었다는 점. The Ballad of Sweeny Todd, 첫 노래가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대체되었다는 것. (이발사의 탈을 쓴 악마라는 가사도, 간담이 서늘한 삑- 소리도 넘어갔다. 터핀 판사가 조안나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표현하는 넘버와, 조안나와 앤소니의 Kiss me, 터핀 판사와 비들의 Ladies in Sensitivities, 비들과 러빗 부인이 부르던 Parlour Song이 생략되었다. 거지 여인의 19금 대사도 날아갔고 가발 장수인 것으로 준비하는 과정은 줄어들고 정신병원에서 조안나를 구출할 때 정신병원 운영자를 애도하게 되었다. 조안나는 빠져나오고도 악몽에 시달릴 것 같다며 걱정했다. 통통 튀던 러빗 부인이 좀 더 차분해졌고 유머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특유의 암울함이 잘 살아난다.
영화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잊고 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 이야기가 가진 큰 장벽들. 정당화하기 어려운 지점.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선을 넘어 왜 수많은 불특정 다수까지 이유 없이 살인하기에 이르렀을까. 복수하고 싶은 터핀 판사나 비들 정도만 처리하는 게 더 깔끔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는가. 왜 모르는 사람들을 죽여 파이 재료로 쓰고 먹는단 말인가. 부가적인 의문은 복수의 방식. 꼭 스위니 토드가 직접 손으로, 친구 같은 이발용 칼로 해야 하는 것인가.
그 의문의 실마리는 영화와 뮤지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루시의 강간 장면. 루시는 추방당한 남편을 기다리다가 터핀 판사의 꼬임에 넘어가 가장무도회에서 강간을 당한다.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말리기는커녕 재미난 요깃거리라도 되듯 깔깔대며 웃어댔다. 스위니 토드(구 벤자민 바커)가 어떻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냐면서 탄식하는 부분이 실마리가 된다. 터핀 판사만큼이나 야속했던 건 무슨 상황인지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서로에게 관심도 없고 돕지도 않으며 남의 불행을 조롱하고 즐기기까지 하는데 소중한 존재일 리 없다. 인간이 인간답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니까.
이 아까운 기회를 놓쳤으니!
There's a hole in the world like a great black pit
And it's filled with people who are filled with shit
And the vermin of the world inhabit it
But not for long...
세상의 밑바닥 검은 구멍엔
똥만 먹는 버러지가 설쳐대
망할 씨발 새끼들의 썩은 내
다 집어치워
They all deserve to die
Tell you why, Mrs. Lovett, tell you why
Because in all of the whole human race
Mrs. Lovett, there are two kinds of men and only two
There's the one staying put in his proper place
And the one with his foot in the other one's face
Look at me, Mrs Lovett, look at you
죄다 죽어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여기 위대하신 인류의 역사엔
딱 두 종류의 인간뿐이네
하난 똥이나 처먹고 사는 놈
아님 남한테 똥을 사 먹이는 놈
No, we all deserve to die
Even you, Mrs. Lovett, even I
Because the lives of the wicked should be made brief
For the rest of us death will be relief
We all deserve to die!
우릴 봐 우리 꼬라지를 봐
죄다 죽어야 해
당신도 이런 나도 똑같아
추잡한 쓰레긴 꺼져줘야 좋고
우린 뒈져야 삶이 편안하고
죄다 죽어야 해
뮤지컬 Sweeney Todd - Epiphany 중
두 번째는 스위니 토드가 부르는 Epiphany 가사에서 볼 수 있다. 토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이다.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해 본 생각이다. 경제적인 계급이 있다면 사람은 크게 두 부류. 자기 자리에서 할 일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억압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단다. 아마 그 뒤에 가사를 하나 붙여주자면 후자가 훨씬 잘 산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토드는 순진하고 능력 있는 이발사 바커였을 때 전자에 속했지만 모든 것을 잃은 입장. 그가 한 발 더 나아간 건 죽음에 대한 생각부터였다. 어차피 사람은 죽지만 죽음이 두 부류의 인간 모두에게 필요하다. 나쁜 사람들은 일찍 죽어주는 게 이롭고, 선한 사람들은 죽음이 오히려 구원이 될지도 모를 만큼 힘들게 살고 있는 세상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니 행동으로 이루는 것 역시 본인의 몫이다.
칼 들고 살인을 논하는데 다정해보이는 요상한 투샷
TODD:For what's the sound of the world out there?
세상을 채우는 이 소리
LOVETT: What, Mr. Todd? What, Mr. Todd? What is that sound?
뭔 소리죠 뭔 소리죠 말해봐요
TODD:Those crunching noises pervading the air!
씹고 씹히는 경쾌한 소리
LOVETT:Yes, Mr. Todd! Yes, Mr. Todd! Yes, all around!
네, 맞아요! 네, 맞아요! 잘 들려요!
TODD:It's man devouring man, my dear!
서로 잡아먹는 인간들
BOTH:And [LOVETT: Then] who are we to deny it in here?
새삼 놀라울 것도 없잖아
TODD:The history of the world, my love --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LOVETT:Save a lot of graves, Do a lot of relatives favors!
말해줘요, 말해줘요, 어떤 거죠
TODD:Is those below serving those up above!
누가 먹히고 또 먹느냐지
LOVETT:Ev'rybody shaves,
So there should be plenty of flavors!
중간에서 잘하면요 살아남죠
TODD:How gratifying for once to know
정말 공평하지 누구나
BOTH:That those above will serve those down below!
결국 술 한 잔의 안줏거리
TODD:Have charity towards the world, my pet!
손님은 누구나 평등해
LOVETT:Yes, yes, I know, my love!
그럼요, 평등해
TODD:We'll take the customers that we can get!
누구든 오시면 감사하게
LOVETT:High-born and low, my love!
부자도 거지도
TODD:We'll not discriminate great from small!
우린 절대로 차별 안 해
No, we'll serve anyone,
Meaning anyone,
뭐 먹어도 좋고,
먹혀도 좋아
BOTH:And to anyone
At all!
어디 아무나
와 봐
뮤지컬 Sweeney Todd - A little Priest 중
그리고 문제의 인간 고기 파이가 나오게 되는 곡 <A little Priest>도 마찬가지다. 살인은 그렇다 치고 식인이라니 엄청난 장벽이긴 하다. 너무 먹고살기가 힘들어 고기 없는 고기 파이 집을 하던 러빗 부인에게야 굴러 들어온 덩치 큰 고기를 놓치고 싶지 않고 토드야 갖다 묻어버리는 것보다 돈도 벌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고양이 고기나 사람 고기나 같은 고깃값으로 쳐지는 걸 보면 돌아가는 상황이 알만 하다.
하나 신기한 건 왠지 모르게 파이를 사는 사람들 역시 공범이 되어버리는 듯한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다는 점. 맛있다면서 매일 가게를 찾아왔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사라진 것에 관심이나 있었을까? 파이 가게는 1층이고 이발소는 2층,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들어온 손님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이발소나 파이 가게나 모두 흥할 뿐이다. 미식가도 맛있다고 칭찬했다니까. 갑자기 왜 어디서 고기가 났을까란 의문은 없지만 본인에게 피해가 되는 악취 같은 것에만 민감할 뿐이다. 거지 여인도 아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애초에 보고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piphany>와 마찬가지로 <A Little Priest>에서도 후렴구에 계급에 관련된 이야기가 함께 나온다.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했을지언정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니 당사자들에게 신나는 부분이 생긴다. 사람은 위아래로 나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이 누구를 죽인다고 큰 문제라도 됐겠나. 토드와 러빗 부인의 쾌감은 자신들이 듣도 보도 못한 혁명을 시작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당연했는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기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가진 자들의 목숨으로 돈을 번다니. 그래 놓고 차별 없이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 모두를 면도+파이 세트 명부에 올려놓은 건 뜨악한 부분이다. 방금 전까진 차별당했다고 얘기한 것 아니었나? 왜 가지지 못한 자들까지 팀킬을?
하지만 여기서 가진 자들만 죽인다면 토드와 러빗 부인은 영웅이 되어버린다. 러빗 부인은 그러기엔 토드를 간절히 원하고 혼자만 한적한 삶을 누리려는 소박한 욕망이 있는 소시민. 토드는 개인적인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혔을 뿐만 아니라 인내심도 없다. 토드로 자칭 개명하면서 멘탈도 개조되었고 인간에 무관심해진 건 본인도 마찬가지. 과한 일반화 같지만 토드에게 루시를 험한 꼴 당하게 만들고 조안나를 돌봐주지 않은 그 나머지 사람들도 다 못된 사람들이다. 토드에겐 어차피 인간이란 한 부류인 셈. 아주 나쁜 가진 자들과 조금 덜 나쁜 가지지 못한 자들. 직접적으로 원한이 있는 자들과 간접적으론 없어져도 상관없는 자들.
러빗 부인 말대로 토드는 기다렸어야 한다. 터핀 판사와 비들의 목만 따도록 기다리면서 차라리 고양이 목이나 따면서 파이 가게 재료를 충당했어야 한다. 그의 정체를 알고 협박한 피렐리까지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말이다. 차라리 차별을 해서 죽였으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한쪽의 욕만 먹었을 것이다. 무차별한 살인, 동기 없는 살인, 선착순 살인. 둘의 칼이 목을 가리지 않겠다는 가사는 무섭고 노래는 신나는 저 곡을 기준으로 결말은 파국으로 가게 된다.
러빗 부인과 토드의 서비스 마인드가 드러나는 곡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은 저렇게 완전히 차별 없이 손님을 대하지 않았다. 혼자 온 사람들만 죽였고 동행이 있는 사람들은 보내주었다. 아, 무엇보다 성별적인 차별이 좀 있다. 이발사다 보니 등장한 손님이 대부분 남자였던 것. 어른은 죽이면서 아이에겐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중적인 면모도 있었다.
알고 보니 루시였던 거지 여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고, 그렇게 노래를 불러대던 조안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죽일 뻔한 건 토드가 혼자 있는 사람을 골라 죽이면서, 복수에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그렇다고 러빗 부인을 파이 가게 주인에 걸맞게 오븐에 던질 줄은 몰랐다. 면도칼로도 죽이지 않고 불에 타게 한 걸 보면 어지간히 러빗 부인이 루시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분노한 모양이다. 하긴 매일같이 같이 있어서 루시를 얼마나 찾았는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당신이 좋아서 그랬어요'라는 러빗 부인의 말이 더 소름 끼쳤을 수도 있다. 루시가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 알았다면, 조안나의 얼굴을 먼저 봤다면 토드의 분노가 다르게 펼쳐질 여지가 있었을까.
어리석은 이발사 벤자민 바커, 루시, 조안나
스위니 토드의 부제는 플릿 가에 사는 악마의 탈을 쓴 이발사(The Demon Barber of Fleet Street). 악마의 탈을 쓴 이발사라 하지만 정말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누구이고 무엇인가? 피를 묻히지 않았다 뿐이지 직권으로 가볍게 교수형을 내리고, 강간이며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용인되는 터핀 판사? 그의 옆에서 함께 즐기고 있었던 비들과 수많은 이름 모를 '윗사람들'? 악에 받쳐 어떻게 사는지 모를 "아랫사람들'? 멀리서 찾을 것 없겠다. 비들이 토드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갈 때, 터핀 판사가 토드를 찾아와서 콧노래를 부를 때 아, 원하던 대로 토드가 이들을 죽일 수 있을까 내심 응원했던 내 마음?
스위니 토드에서 본 악마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는 그 선에 있다. 위와 아래를 나누는 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나누는 선. 무관심과 소외, 억압과 착취, 돈과 권력의 남용으로 만들어진 부조리한 그 선. 그 선이 벤자민 바커를 스위니 토드로 만들고, 터핀이 루시와 조안나를 탐하게 했고, 루시를 거리에 나앉게 했으며, 벤자민의 오랜 친구 면도칼을 범행도구로 만들었다. 러빗 부인은 벤자민 바커의 죄를 어리석음이라고 했다. 사람을, 사회를, 세상을 모른 어리석음. 그걸 어리석음이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알면서도 입을 닫게 한 그 보이지 않는 선에 악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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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영화관이 아닌 IPTV를 통해 영화를 접했다. 당시에 영화를 보고, 단순한 생존 표류기 영화는 아닌 거 같고 도대체 무슨 결말인가를 고민한 기억이 난다. 2번째로 접한 지금, 아직도 이 영화가 말하는 주제를 명확하게 내리긴 힘들다. 하지만, 지금 느낄 수 있는 건 이 엄청난 CG 기술력과 장엄한 바다를 한 번도 영화관 스크린을 통해 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었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 네이버 스틸컷
기술력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바다의 CG 연출은 대단하다. 진짜 호랑이보다 더 사실적인 움직임과 무언가 감정을 표현하려는 듯한 표정은 소년 파이(수라즈 샤르마)가 리처드 파커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흥미롭게 하는 요소로써 영화에 몰입도를 더한다.
바다의 CG는 더욱 거대한 망망대해로 만들어 소년 파이와 리처드 파커 둘만이 있게 보이는 효과를 보인다. 또한, 햇빛에 반사되어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어지는 장면이나 해파리가 가득한 밤바다 풍경 속 갑자기 등장하는 고래 장면 등은 영화의 영상미와 그래픽의 화려한 연출이라고 볼 수 있다. 놀랍다.
그리고 중간중간 화면 비율의 변화에 따라 그 장면에 대한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가령, 날치 떼가 등장하는 장면일 때 1.85:1에서 갑자기 2.35:1 화면 비율로 바뀌어 수많은 날치 떼들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고, 구조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떠나버린 배를 보내며 망연자실한 파이네 배를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면 장면은 화면 가로 비율을 확 줄임에 따라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파이네 배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유유자적 움직이는 바다생물들의 여유로움이 빨리 이 바다를 탈출하고픈 파이의 심정과 대비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뉴슈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이자 파이가 믿고 있는 신들 중 한 명인 신이다. 비뉴슈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중요한 신으로 등장한다. 초반 어린 파이가 읽고 있는 만화책에서 비뉴슈 입에 있는 거대하고 찬란한 우주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중반부에서 파이가 바다에 표류하던 중, 해파리가 뿜는 빛이 바다에 퍼지며 마치 비뉴슈 입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우주를 연상케 하는 바다 장면이 등장한다. 초반 만화책에 등장하는 비뉴슈의 입 속 우주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식인 섬의 형상은 마치 사람이 누워있는 형상을 띠고 있는데, 이는 곧 비뉴슈가 누워있는 장면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식인 섬의 존재는 파이가 바다에 표류하면서 마침내 육지를 밟아 표류하면서 큰 도움을 준 파이의 구세주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밤이 되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섬이 되어 파이를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믿음
"신의 문제도 믿음의 문제죠"라고 말한 파이의 대답에서 신앙과 이성의 믿음, 종교와 과학의 믿음에 대해 영화를 본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후반부 장면에 파이가 사람 버전으로 말한 이야기와 전체적으로 말하고 있던 동물 이야기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영화를 보며 느꼈던 두 가지 버전 중 선택을 제시해 영화를 보고 자신이 느낀 믿음을 표현하게 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 믿음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생존과 죽음의 믿음, 공존과 분열의 믿음 등 어찌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선택의 기로로 얻은 부산물일 수도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그 믿음을 한번 더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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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에 관한 농담 ‘위 아 40’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인 시인 캐시 박 홍은 처음 시를 쓸 때 자신의 정체성 떨쳐내며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데뷔 이후 무슨 글을 쓰든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과 시 쓰기 사이의 거리에서 절망을 느끼던 중 스탠딩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리처드 프라이어는 흑인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고 그것을 코미디의 재료로 삼은 최초의 코미디언이다. 시인과 달리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프라이어는 자신의 인종적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백인 청중들을 당황시키며 웃기기도 한다. 그러나 프라이어의 공연을 필사한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말을 글로 적으니 그다지 우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라이어의 익살스러운 이야기 전달 방식이 빠지고 나니, 유머라는 용해제는 증발하고 분노의 소금기만 남은 것처럼 그의 말이 거칠고 둔탁하게 느껴졌다.’
40살에 갑자기 비트를 만나 랩을 하게 된 한물간 극작가의 이야기, 영화 <위 아 40>도 한 편의 스탠딩 코미디 같다. 한때는 30세 이하 30인의 극작가 상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았지만 지금 라다를 둘러싼 것은 이런 것들이다. 방음 안 되는 벽 너머 들리는 신음 소리, 창문 밖 노숙자의 볼일 보는 모습을 맞닥뜨리며 시작하는 아침, 체중 때문에 달고 사는 다이어트 음료, 그리고 10년 전 멈춘 라다의 경력을 무시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학생들. 여기서 벗어나려면 극을 무대에 올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유명한 백인 제작자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흑인의 빈곤 포르노를 상업화하려는 백인 제작자를 들이받고 온 날, 라다는 엉엉 울다 갑자기 창밖에서 들리는 랩 비트에 맞춰 신들린 듯 랩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여전히 집세 내기도 빠듯하고 겨우 닿은 기회마저 망쳐버렸는데 갑자기 랩까지 한다. 이쯤에서 나는 이런 결말을 쉽게 상상한다. 라다가 랩으로 인정받고 성공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야기. 아니면 <백 엔의 사랑>의 이치코가 서른에 갑자기 프로 복싱 선수에 도전했듯 극작가는 때려치우고 적어도 랩으로 끝장을 보는 이야기. 그러나 영화가 감독이자 주연인 라다 블랭크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라다 블랭크는 마치 비트라는 용해제를 사용해 스스로에 대해 농담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생리는 왜 안 터져?’로 시작하는 라다의 랩은 웃기고도 슬프다. 늘 종아리는 쑤시고 오줌은 자꾸 마렵고 10시만 되면 피곤해 쓰러지는 데다가 젊은 애들이 노인 취급한다. 라다는 ‘이게 40살 인생’이라고 외친다. 흑인이 성공하려면 빈곤 포르노를 팔아야 한다며 인종주의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도, 나중에는 적당히 타협한 스스로를 셀프 디스 하는 것도 랩을 통해서다. 라다에게 랩은 제작자의 검열 없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극작가를 하며 맛보지 못한 쾌감이다. 라다를 둘러싼 찌질한 상황과 스스로에 대한 농담이 웃길지언정, 전혀 우습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라다를 지켜보고 있자면 다시 <마이너 필링스>의 캐시 박 홍이 떠오른다. 캐시 박 홍은 프라이어의 공연을 접한 후로 시 낭독회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시작한다. 그는 항상 강연장에서 자신이 유일한 아시안이 아닌 척해왔는데, 사람들이 늘 자신을 아시아인 정체성과 연결 지어 생각한다면 이왕이면 내가 유일한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큰 목소리로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내 농담을 재미없다고 생각한다면, 기왕 망하는 거, 내 삶에 관해 농담하면서 장렬하게 망하고 싶었다.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고 싶었다.’
라다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해 농담하면서 망하길 택한다. 영화 내내 라다와 친구 아치는 40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40대에는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냐고, 비주류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내게도 ‘40’이라는 숫자와 관련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40살엔 꼭 자가용 몰아야지. 그때는 돈 좀 만지고 빠듯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기 암시이자 소망이다. 설마 40살의 내가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둘까 싶어 그때까지만 시간을 보류하기로 한다. 그때는 뭔가 달라야만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함께.
그러나 영화는 나를 보란 듯이 비웃고 40살의 라다에게 어떠한 매듭도 지어주지 않는다. 라다는 꿈에 그리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상황을 바로잡는다. 멈췄던 라다의 랩은 다시 시작된다. “네 목소리를 찾아.” 믹스 테이프도, 반짝이는 성공도 없다. 40살의 라다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은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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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토피아, 그리고 손쉬운 희망
장담한다. 디스토피아 장르는 앞으로 잘 팔릴 수밖에 없다고. 자극적인 소재를 버무리기 좋다는 것도 이유이긴 하나, 무엇보다 환경이 뒷받침해준다. 답답하고, 끔찍하고, 지긋지긋하고,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새로운 세상에 동화되고 싶은 마음. 평범한 주인공의 숨겨진 능력을 지켜보며 왠지 모를 기대감과 희망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테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갈수록 살 만한 게 아닌지라 현실 외의 세상, 특히 더 끔찍한 환경의 세상을 자꾸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그런 곳에선 악바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 디스토피아 영화의 무수한 주인공처럼. 이번에도 질문을 안고 <나이트 레이더스>를 보았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보고자 하는 대로 본다. 자신의 바람이나 욕망과 좀 더 맞닿은 지점에 눈길을 주고, 그 부분을 확장하여 생각한다. 영화나 드라마, 웹툰 등을 '해석'한 영상들도 같은 결이다. 타당한 이유와 논리적 근거가 덧붙여있다고 해서 사실인 건 아니니까.
관람자가 영화를 되새김질한다는 건 적어도 서너 번 이상 잘 만들었다고 인지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빠져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는 영화도 있다. 애석하게도 이번 영화가 그랬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경험이 그러하듯 쓸모없는 건 없다. 감탄할 만한 요소가 없다고 해서 할 말이 없지도 않다. 어떤 영화든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나이트 레이더스>는 그간 보았던 디스토피아 장르 영화와 겹치는 씬이나 설정들이 종종 보였다. 무슨 디스토피아 전문가는 아니라지만, 내 눈에 보였던 건 짚어내고자 한다.
짧은 줄거리
서기 2043년, 새로운 전쟁을 일으켜 대제국을 세우려는 국가 에머슨.인간병기를 양성하기 위해 모든 아이들을 납치하고,외딴 숲에서 칩거하던 '니스카'도 결국 사랑하는 딸을 빼앗긴다.10개월 후, 예기치 못한 비밀이 하나둘 드러나고,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니스카'는딸을 되찾고자 국가의 중심부를 습격하기로 결심하는데…*아래부터 스포일러
시작은 숲이었다. 버석하게 마른나무들은 왠지 모르게 으스스했고, 그곳을 거니는 여자 아이의 모습도 심상찮았다. 그 애는 작은 새를 공격하려는 듯 손에 쥔 새총의 겨누다가 힘을 푼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말을 뱉으며 손을 뻗었다. 말보다는 주술이었다. 새는 조종당할 것처럼 굴다가 날개를 가볍게 움직이며 날아갔다.
처음부터 보여준 것이다. 여기 나오는 이 아이, '와디즈'는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그게 지금은 통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때에 힘이 드러날 것이란 것쯤은 명백히 보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 대목에서 <유전>을 떠올렸다. 물론 기이하고도 서늘한 분위기는 다르긴 했으나, 비슷한 나이대의 주인공과 새, 그리고 능력의 복선이라는 점까지. <나이트 레이더스>도 스릴러 장르라는 게 한몫했으리라.
새를 잡지 않고 놓쳤다며, 와디즈의 엄마 '니스카'가 가볍게 핀잔을 준다. 먹을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씩씩대던 걸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덫에 걸린 와디즈의 다리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에게 위치가 발각돼 캠핑카 같은 집을 태우고 둘은 어디론가 떠난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덜컥 본 터라 이쯤 보았을 때 느꼈다. 세계관 설명이 부족하다고. 대충 이 사람들이 도망자 신세라는 건 알겠는데 '하필' 이 상황에서 다리를 다친 건 꼭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 같았다. 결과와 과정이 거꾸로라고 해야 할까.
인물에게 공감이 가면 근거는 이유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근거는 수단이 된다. 숲 속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사람들과 감시자들의 눈이 득시글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아직 뭐가 뭔지 파악이 덜 되었는데 장소가 휙 바뀌었다. 강가로.
이 장면에서는 <버드 박스>가 또렷이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역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과 그의 아들 딸로 나오는 두 명의 아이들도 이 상황과 비슷했다. 물결을 타서 멀리 도망가는 중이고, 당장이라도 비가 올 듯 하늘은 우중충하고,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이함이 깔렸다.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어떤 느낌만 주었을 뿐.
배를 거꾸로 엎어두고서 걷다 보니, 폐허가 되었다 해도 무방한 마을이다. 니스카는 와디즈의 얼굴을 눈만 빼고 꽁꽁 숨긴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애쓴다는 건 와디즈의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알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왜? 답은 곧 나온다.
그들이 어떤 집에 들어가려고 주변을 살피자마자 사람이 불쑥 나타난다. 잔뜩 경계한 니스카에게 남자는 안심하라는 듯 자신의 아들을 보여준다.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모양새다. 와디즈에겐 생전 처음 보는, 제 또래로 보이는 인간이었을 테다. 다만 영화에서는 그 새로운 상황을 주목해서 담지 않는다. 그 남자애 또한 일종의 수단으로 쓰였다.
4살이 된 아이들은 모두 아카데미로 보내진다. 그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볼 수 없다. 와디즈를 잃기 싫은 니스카가 단둘이서 숲을 전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몰랐다. 단순히 '앞으로 보지 못한다' 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아이들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날카로운 덫에 찔린 다리의 상흔을 약 없이 고치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니스카는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아카데미는 좋은 곳'이라는, 오랜 친구의 해맑은 믿음을 믿기로 한다. 와디즈를 제 딸이라고 밝힐 수 없어 '미성년자가 쓰러져있다'는 신고만 툭 던지고 자취를 감춘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다.
와디즈는 철창 같은 곳에서 묵묵히 나날을 보낸다. 아이들의 놀림과 비꼼을 무시하면서 건물의 구조를 몰래 파악해본다. 침대 틀 사이에 종이를 끼워두고 연필로 슬슬 끄적이는 와디즈. 꼭 이런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자는 난관을 묵묵히 헤쳐나가니까 와디즈는 이곳을 탈출해야 하고, 그러려면 나가는 길을 알아야겠고, 적당한 컷 하나를 넣어야지.
언젠가 <월요일이 사라졌다>를 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차했는데, 이와 비슷한 감상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설명한다. 그런데 설명이 모호하다. 문장으로 쓸 순 있는데 이해할 수는 없다. 인물의 감정이나 상태, 혹은 생각과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아서겠다. 그저 인물들은 무언가를 하고, 사건은 생긴다. 알맹이는 없는 채로.
니스카가 아카데미의 실체를 깨닫고, 와디즈를 꺼내려할 때 만난 건 크리족 사람들이다. 영어보다 훨씬 낯선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 특히 그들을 이끄는 여성은 자기 민족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 긍지가 보이는 말투와 표정이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던 니스카와는 정반대의 생활양식이었다. 무리를 지어 유대감을 키우고, 서로 돕고 지키는 관계라는 건. 이들이 영화 끝자락에서 나오는 게 꽤나 아쉬웠다. 조금 더 일찍 니스카나 와디즈와 만났더라면. 감독의 의도인진 모르겠으나 그들 주변 사람은 마치 일회성 역할인 것처럼 쉽게 죽음을 맞이했다.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려는 찰나, 죽음을 맞이하는 허무함.
그래서 크리족과 완전히 대비된 것이긴 하다. 다만 대조를 극명히 보여줌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와디즈의 초능력으로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던지라 다음 장면을 기대할 수 없도록 끝이 났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게임으로 만들면 훨씬 재밌겠다고. CG가 많이 나오니,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도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화에서는 와디즈와 니스카가 절반 비중이었는데, 와디즈의 시점에서 극이 전개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능력이 생기게 된 계기나 첫 발현, 엄마와 둘이 지내게 된 과정 등 사건 대신 흐름이 들어갈 여지가 많아질 듯하다.
혹은 사건을 섬세하게 다듬는 것도 방법이겠다. 척박하고 메마른 디스토피아의 배경과는 달리 주인공의 앞 날은 단순하기만 하다. 우리가 사는 현실보다도 가벼운 방식으로 끝을 낸 건 이 장르에서 가장 아쉬운 결말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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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춥고 두려운 감정을 이겨 내게 하는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
푸른 빛의 작업복을 입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공장에서 매트리스를 만들고, 퇴근 후 공장을 나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버건디 코트 깃을 여미며 자전거에 올라, 코 끝이 빨개진 채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로 어디론가 가는 주인공으로 시작되는 영화 <앵그리 애니> 영화 속에서는 오랜 시간을 지나 여러 계절을 지나가는데도, 이상하게 이번 겨울 코 끝이 싸하게 추운 기분이 들때면, 애니가 코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던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났다. 춥고, 두려운 감정의 끝에 만나는 따뜻한 누군가의 기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추위를 함께 이겨내는 작은 빛이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하면 아이는 셋을 낳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혼 7년차에 첫째를 낳고 4살 터울로 마흔 넘어 둘째를 낳고 나니,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예민함과 넘치는 에너지를 둘 다 소유한 둘째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노산의 엄마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농담 삼아 둘째가 첫째였다면, 나는 둘째를 낳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눈물이 또르르 떨어지던 그즈음 생리가 늦어지면 겁이 덜컥 나곤 했다.
‘셋째가 생기면 어쩌지.’
아이를 원해 결혼 후 5년 넘게 애태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뭐가 달라진 걸까? 그때보다 나는 오히려 아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에 대해 더 사랑을 품게 되었는데… 이런 마음이 들 수도 있구나.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이 함께 찾아왔던 경험이 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임신과 임신 중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순간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애니는 1974년 프랑스 교외의 한 작은 마을, 매트리스 공장에서 일하는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 몸에 밴 익숙한 손으로 바느질을 해 매트리스를 만든다. 그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어느 밤 자전거를 타고 한 서점을 찾아간다. 서점 한쪽 커튼을 젖히면 작은 공간이 나오고, 조용하고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사람들의 안내로 모임이 진행된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 중단은 불법이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신 중단을 결정한 여성들은 의료진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뜨개질바늘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잘한다는 아주머니’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애니가 찾아간 곳은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활동을 하는 곳으로, 의료진과 함께 안전하게 무료로 임신 중단을 할 수 있게 하는 단체다.
이들은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수술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수술 전 한 번 더 만나 수술 도구를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며 수술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해 준다. 은유나,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로 보여주는 영화적인 어떤 환상 같은 것은 없다. 마치 관객들도 알아야 한다는 듯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하나씩 천천히 과정을 이야기하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이제 애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함께 알아간다.
설명의 과정만큼이나 수술의 과정 역시 거의 리얼타임에 가깝게 상세히 묘사한다. 수술대 위에 오르는 애니의 긴장감이 그대로 전해진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함께 숨을 고르고 노래를 불러준다. 편안한 선율의 노래를 부르는 눈을 마주치며, 애니는 손을 잡고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지나간다. 애니에겐 출산 경험 보다 더 편안했던 순간이 되었다.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를 함께 키우던 옆집 친구가 임신을 중단하기 위한 비전문가의 시술 중 사망하게 되면서, 애니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MLCA(임신 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누군가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 어쩌면 그 누군가가 애니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게 애니는 따뜻한 커피를 만들고, 두려움으로 찾아온 또 다른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
임신 중단을 선택하는 사람의 사연은 다양하다. 낳고 싶지만, 남자친구가 안된다고 해서, 25살에 이미 다섯 아이를 낳아서, 이제는 더 이상 낳을 수가 없어서, 그리고 17살의 소녀까지. 두려움에 떨거나, 죄책감에 울부짖는 사람들. 임신을 중단하게 된다는 것은 영화 속 많은 여성에게, 두려움과 죄책감과 그리고 때때로 불쾌함과 고통이 뒤섞인 감정을 준다. 각자의 격동적인 감정을 애니와 활동가들은 가만히 안아준다.
“괜찮아. 내가 곁에 있어 줄게.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영화는 이런 사람들에게 임신 중단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누구를 비난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눈맞춤과 다정한 말, 그리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옆에서 함께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져야 하기에’ 다정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손을 잡아주는 애니를 보며, 이러한 연대는 그 어떠한 것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낙태’ 라는 엄청난 경험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 마음을 전해 받은 내가 바뀌고, 우리가 바뀌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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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트릭트9> -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잔혹한 시선'
디스트릭트9 (District 9)
개봉일 : 2009. 10. 15 (한국 기준)감독 : 닐 블롬캠프
출연 : 샬토 코플리, 바네사 헤이우드, 제이슨 코프, 데이빗 제임스
다른 것을 바라보는 잔혹한 시선
“디스트릭트9엔 비밀이 많죠.”평소와 같던 하루, 갑자기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커다란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우주선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지구인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떠있는 우주선이 위협적이라며 닫혀있는 우주선 문을 연다.
<디스트릭트9>는 SF의 옷을 입은 현 사회 비판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불공정 조약, 일부 인간들의 잔인함과 모든 생물들을 지배하고 그 위에 서야 한다는 폭력성까지. 외계인에게 붙인 이름 ‘프런’에서부터 그들이 외계인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고 혐오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상공에 머물러있던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공조의 손을 내밀지, 무기를 내밀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구인들은 선재적인 공격을 감행하며 외계인들을 우주선에서 끄집어내고 ‘구호한다’는 핑계를 대며 가두고 이용한다. 나보다 약한 존재 또는 나의 땅에 들어온 다른 존재에게 자비 없이 행해지는 폭력과 차별로 일궈진 지저분한 죽음의 땅. 그것이 외계인들의 구역 ‘디스트릭트9’이다.
사람들은 디스트릭트9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디스트릭트9을 넘어 말썽을 피우는 프런을 몰아내거나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뿐, 그들이 왜 날뛰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디스트릭트9>의 주인공 비커스도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디스트릭트9에 들어가 그들의 유기체를 맞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디스트릭트9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폭력의 힘. 그리고 새로운 생명체를 잔혹하게 학대하는 잔혹함. 유기체를 통해 프런들과 비슷한 존재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커스는 변화한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있다면 돕고 싶지만 어딨는지도 모르는걸요.”라는 식으로 진실을 외면하고있다.
<디스트릭트9>을 보면서 프런을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있는 어떠한 존재로 대체해 생각해 보았다.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어떤 미지의 땅에서 펼쳐지는 영화 한 편이 아니다. 어쩌면 바로 옆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디스트릭트9 시놉시스
남아공 상공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은 요하네스버그 인근 지역 외계인 수용구역 ‘디스트릭트 9’에 임시 수용된 채 28년 동안 인간의 통제를 받게 된다. 외계인 관리국 MNU는 외계인들로 인해 무법지대로 변해버린 ‘디스트릭트 9’을 강제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중 책임자 비커스가 외계물질에 노출되는 사고를 당한다.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면서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비커스. 정부는 비커스가 외계 신무기를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정부의 감시시스템이 조여오는 가운데, 비커스는 외계인 수용 구역 ‘디스트릭트 9’으로 숨어드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외계인들은 못 돌아갑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우주선의 존재에 지구인들은 공포에 떤다. 우주선은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지구인들은 머리 위에 드리운 그늘에 공포감을 느끼고 프런들을 통제한다. 처음엔 아사 직전인 외계인들을 구해주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지구인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그들에게 혐오와 실험 욕구를 느끼고 그들을 디스트릭트9에 가둔다.프런들은 지구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구해달라고, 우리와 함께하자고, 전쟁을 하자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구인들은 이미 프런들을 지구인보다 낮은 등급에 깔아놓고 ‘도움을 준다.’ ‘관리를 한다.’고 말한다. 지구인에게 프런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외계인들의 무기 기술을 탐내면서도 그걸 배우고 공유하기보단 일방적으로 빼앗고 싶어하고 통조림 한 캔을 던져주며 조롱한다. 디스트릭트9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디스트릭트9>은 디스트릭트9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잔혹한 실험을 통해 우리의 사회를 비판함과 동시에 디스트릭트9의 존재를 알면서도 진실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시선을 꼬집는다. 외계인 관리과 사람들에 의해 외계인의 알이 불에 타고, 외계인들이 학대나 괄시를 받는 장면, 주인공 비커스가 외계인의 팔로 실험을 당하고 쫓겨나는 장면 등에서 CCTV 또는 TV 너머 다큐나 뉴스 속보로 그 순간을 지켜보는 관점을 사용한다. 어느 정도 궁금증이 있고 렌즈 너머로 지켜보고는 있으나 현장에 달려가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진 않는 사람들의 무심한 시선이 그대로 느껴진다.
추후에 푼디수와(비커스의 동료)의 고발로 MNU(외계인 관리과)의 추악한 행태가 세상에 밝혀지지만 비커스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은 “돕고야 싶지만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다”라며 그의 행방에 대해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비커스가 행방불명되고 집에 홀로 남은 아내 타냐는 남편의 물건과 어느 날 문앞에 놓여있던 쇠로 만든 꽃을 보며 그를 떠올린다.
비커스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프런들을 혐오하긴 했으나 생체 실험에 살아있는 프런이 동원되었을 때 “살아있는 프런을 쏠 순 없다”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비커스의 어머니, 아내, 동료들의 증언과 영상에 남아있는 그의 말과 웃음을 보면 절대로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프런들의 유기체를 맞게 된 게 비커스여서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일 프런들의 무기를 탐내던 갱단이 유기체를 맞았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똑같아요.
비커스는 유기체를 맞고 프런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조금씩 변화한다. 비커스는 프런으로 변하는 자신을 혐오하기도 하고 3년의 치료 기간에 눈이 돌아 크리스토퍼를 배신하기도 하지만 결국엔 크리스토퍼를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배신’을 감행한다. (누군가는 비커스의 행동을 배신이라 칭하기도 했다.)처음 프런의 팔을 갖고 디스트릭트9에 갔을 때, 크리스토퍼의 아들은 비커스의 팔을 보며 “우리 똑같아요.”라고 말하는데, 비커스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손가락을 자르고 꺼지라고 욕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커스는 다시 인간이 되는 치료를 받기 위해 크리스토퍼를 이용하려고 했으나 MNU의 생체 실험 사실을 알게 된 후 받게 된 충격과 더불어 우리와 다르지 않은 프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프런들도 각자의 생각과 감정이 있는 소중한 생명체임을 느끼게 되고 그들을 돕게 된다. 팔과 눈, 등의 생김새가 프런과 동일해지고 DNA가 프런들과 비슷하게 변해가는 동안, 비커스의 혐오와 폭력성은 점점 사라진다.
<디스트릭트9>에서 외계인과 지구인은 다르지 않았다. 프런들은 지구인들과 같은 언어를 쓰며 소통할 수 있었고 비슷한 모양새로 걷고 행동했으며 가족애와 동료애, 고통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인과 달랐던 건 생김새뿐이었는데, 지구인들은 그걸 이유 삼아 프런들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죽인다. 결국 프런으로 변한 비커스가 고철들을 주워 꽃을 만들고 아내에게 선물한 마지막 장면은 이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어필한다. 프런으로 변했음에도 다시 아내에게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담아 꽃을 만드는 비커스의 모습. 그들도 사랑을 하고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또 다른 생명체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혹시 크리스토퍼도 먼 고향에서 “3년 후에 오겠다.”고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구인이지만.. 크리스토퍼가 다시 돌아와 디스트릭트10을 없애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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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표류단지> 공식 티저 예고편
<펭귄 하이웨이>로 제42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를 연이어 제작했던 스튜디오 콜로리도. 이들의 세 번째 장편 영화가 찾아온다.
초등학교 6학년인 코스케와 나츠메는 어릴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소꿉친구. 여름방학 중이던 어느 날, 철거를 앞둔 아파트 단지에서 놀던 두 아이는 어떤 신비한 현상에 휘말리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둘은 망망대해를 표류하고 있었다. 과연 코스케와 나츠메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 한여름의 이별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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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이저스> 티저 예고편
2063년, 극심한 지구 온난화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완벽한 우성 인자로 태어나 철저하게 격리 훈련을 받은 ‘30명의 탐사대원들’과
이들을 이끌 대장 ‘리처드’는 ‘휴매니타스호’에 탑승해 우주로 향하게 된다.
한편, 일부 탐사대원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떨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들의 생활 속에 밀접한 ‘블루’를 가장 먼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의심의 시작과 함께 비밀과 음모가 하나 둘 밝혀지게 되고
대원들은 곧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인류를 위한 새로운 행성까지 앞으로 86년,
과연 이들은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