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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us2025-05-31 12:45:45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해피엔드를 봤다.

영화 <해피엔드> 리뷰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해피엔드를 봤다.

 

해고를 당했다. 일상을 갈아 넣고 내신 기간을 감당한 결과였다. 강사 경력은커녕 학생으로서도 학원에 안 다녀본 나로선 처음 적응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지만, 노력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상쇄했다고 생각했는데 ‘내신’이라는 새로운 장애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학원에서의 내신 기간은 특정 학교의 시험을 앞두고 약 한 달 동안 학생의 시험 준비를 도와주는 시간이다. 그 기간 나는 학교 교과서로 수업하는 것은 물론 해당 학교의 기출 문제를 분석하고, 외워야 할 내용을 정리해 시험을 보는 등 시험공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옆에서 보조해야 했다. 


과다한 업무량만 문제였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나를 괴롭히는 건 순수하게 공부를 좋아하는 내가 아이들에게 시험 잘 보기를 강요해야 하는 일이었다. 생각이 깊은 아이에게 불필요한 생각은 시험에 방해된다고 하고, 버거워하는 아이에게 주어진 숙제에만 집중하라고 말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깎여나가고, 내가 나를 포기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만큼이나 나에게도 보상이 필요했다. 모든 내신 일정이 끝나는 날 저녁, 좋아하는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해피엔드>를 예매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게 나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나를 덮쳤다. 간신히 업무를 마친 내게 원장이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열심히 노력한 것도, 태도가 성실한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신입이 성장하기를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 미안하지만 이번 주까지만 근무하도록 해라.

 

그러니까 나는 태도가 불성실한 것도 아니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그저 학원이 원하는 속도에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잘린 것이다. 기다려줄 여유가 없다고? 이제 겨우 첫 내신을 겪었는데 뭘 기다려줬다는 거지?

 

나를 해고한 학원은 나 한 사람의 특수성을 존중해주기엔 이미 견고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최대한 그 구조에 나를 끼워 맞춰보려 했지만, 집단은 나를 기다려줄 수 없었다. 정말 슬펐던 건 그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를 내친 건 악의가 아니라 순전히 구조 탓이었다. 그들이 딛고 있는 시스템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건 사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노력과 성실함으로 어떻게든 극복하려 한 건 결국 오기였다. 그들에겐 성실한 사람보다 집단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 더 필요했다.

 

얼떨떨한 상태로 영화관에 가면서 미리 <해피엔드>를 예매한 나의 선택에 감사했다. 이런 일정마저 없었다면 오롯이 혼자서 이 충격을 감당해야 했을 테니 말이다. 당연히 초반 몇 분에는 집중이 안 됐다. ‘내가 뭘 잘못했지?’. ‘내가 그렇게 부족했나?’, ‘너무 순순히 물러섰나?’ 등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러다 영화의 감각적인 연출에 먹구름처럼 드리웠던 생각들이 서서히 걷히고 영화에 몰입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만 드는 기시감에 소름이 돋았다. 좋은 예술 작품은 좋은 타이밍을 만날 때 빛을 발한다. 개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집단의 이익 관계에 따라 가차 없이 버려진 그날, 내가 <해피엔드>를 본 건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회피와 분노, 그 뒤에 찾아오는 먹먹함


 


 

 


<해피엔드>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영화다. 주인공인 코우와 유타는 유치원 때부터 함께한 죽마고우로 음악 연구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이다. 둘을 포함한 동아리 회원들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교장을 골탕 먹이기 위해 그의 외제차를 세로로 세우는 장난을 친다. 다음날 이를 발견한 교장은 범인을 잡지 못하자 학교 전역에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근미래 배경답게 감시 시스템도 최첨단이다. CCTV가 교칙을 위반한 학생을 감지하면 그 자리에서 자동으로 벌점이 부과된다. 치기 어린 일탈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그들의 장난은 감시 시스템의 도입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고, 평생 견고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관계도 달라지기 시작한다.


재일 한국인 4세인 코우와 유복한 환경의 유타, 집에 있으면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유타와 믿음직스러운 아들로서 지지받는 코우. 오랜 시간 끈끈한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은 감시 시스템과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우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을 느낀다.



 

<해피엔드>가 유독 먹먹한 이유는 두 친구의 우정이 일방적으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유타는 관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하지만, 코우는 언제까지고 ‘지금처럼’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유타가 철없다고 느낀다. 관계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에는 두 사람의 핵심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타의 핵심 정서는 ‘회피’다. 유타의 핵심 논조는 ‘어차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차라리 쾌락을 만끽하는 게 낫지 않느냐’이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매 순간 존재를 부정당하는 코우의 눈에 비친 유타는 아무 생각 없는 온실 속 화초일 뿐이다. 영화는 코우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유일한 안식처였던 친구들을 하나둘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유타의 감정선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관객에게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한다.

 

<해피엔드>의 배경인 근미래 일본의 핵심 키워드는 ‘통제’와 ‘배척’이다. ‘통제’는 권력자가 공동체를 이끄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고, 수월하게 다수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전체의 특성에 어긋나는 모난 돌을 빼내는 게 좋다. 유타는 무리 없이 전체에 수용되지만, 코우는 어딜 가든 모난 돌 취급을 피할 수 없다. 코우와 같은 모난 돌은 계속해서 외친다. 우리를 배척하지 말라고. 차별하지 말라고. 존재를 지우지 말라고. 그러나 이 외침은 모두의 안전을 위한다는 주장 하나로 가볍게 묵살된다.

 

안전. 근미래 일본이 아닌 지금의 한국을 사는 나에게도 귀에 딱지가 앉게 자주 들리는 말이다.

 

 

욕을 먹었다. 그리고 해피엔드에 관해 쓰고 있다.

 

욕을 먹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겸했는데, 한 달 넘게 같은 지적을 듣다가 정신력이 한계치에 다다랐다. 내가 반복해서 듣는 말은 이거다. 안전을 위해 애들 통제에 주의해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하게 한 아이가 큰 부상을 입으면서 현장에 비상이 걸린 탓이었다. 한 명이 여러 아이를 지도하면서 사건·사고를 피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학교가 택한 방법은 아예 문제의 싹을 자르는 것이었다. 사고 현장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할 것. 돌발 행동은 적극적으로 통제할 것. 문제는 내가 통제해야 할 이 아이들이 발달 과정에서 활발히 움직여야 하는 시기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해피엔드>의 핵심 소재인 AI 감시 시스템의 문제점은 사생활 침해는 물론이고 타협의 여지가 없고, 오류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착한 행동과 나쁜 행동은 기계가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저마다의 맥락을 고려해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해야 한다. 기계의 무자비한 징벌은 당사자도 모르게 벌이 주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에서는 사소한 행동이 숨겨진 눈에 의해 ‘잘못’으로 감지되고, 억울하게 벌점을 받아도 이를 해명하다가 더 큰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소통이 배제된 감시와 처벌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아이들에게 반박하는 논리는 단 하나다. 이 정도 불편은 안전을 위해 감수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안전해야 하는 걸까? 육체만 보전하면 되는 걸까? 폭력에 노출되는 동안 지쳐가는 정신은 방치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는 정말 안전한가? 애초에 안전이 제일 중요한 가치가 맞는 건가? 안전을 위해 희생된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가?


아이들을 통제하라는 지시에 일부러 반항한 적은 없었다. 나 역시 안전이 중요하다는 의견엔 동의하는 바였다. 그런데도 지적은 계속 들어왔다. 내가 행하는 통제가 그 집단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활동을 박탈당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조차 납득할 수 없는 통제가 아이들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나 자신에게 수시로 묻곤 했다. 어른은 아이를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을까? 말 잘 듣는 게 정말 미덕일까? 보호 명목으로 세상을 인위적인 무균실로 만드는 게 옳은 걸까?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질문이 떠오를 때면 감시 카메라에 잡힌 <해피엔드> 속 아이들의 얼굴도 같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집단보다 큰 개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해피엔드>를 본 타이밍은 꼭 해고 사건이 없었어도 충분히 절묘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의 경험과 함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정상성을 갈망하는 집단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실감했다. <해피엔드>는 그렇게 집단의 이해관계에 짓눌린 개인 한 명 한 명을 호명하고, 그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떠한 평가도 없이 깊숙이 들여다본다.

 

영화를 다 보고 네오 소라 감독의 인터뷰를 읽다가 마음에 박힌 부분이 있었다.

 

“저는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으면 화를 안 낸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분노도 사랑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거예요. 사실 생각해 보면 화를 낸다는 건 엄청 피곤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화를 내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마땅히 필요한 일이겠죠.”

 

 

 

이 영화가 먹먹한 끝에 애틋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코우가 유타의 회피에 화냈던 건 사회에 부정당하는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코우를 사랑한 건 유타였고,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코우의 분노에 동참한다.

 

<해피엔드>의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안전하게 통제받기를 거절하고, 온 마음을 다해 서로를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은 분명 좋은 어른이 될 것이다. 삭막한 경쟁 사회 속에서도 끝내 존재감이 지워지지 않는, 집단보다 큰 개인으로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작성자 . ca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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