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5-12 17:20:41
비 오는 날에는 멜로 영화와 함께
빗소리와 함께 감상해 보세요

추적추적 비 내리는 오늘 같은 날, 멜로영화 한 편 어떠신가요?
특히 비 내리는 장면이 유명한 영화들을 소개해 드리니, 빗소리와 함께 감상해 보세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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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좌수사 이순신 그의 난중일기
책 한 권을 빌렸다. 바로 호란과 임진왜란에 대해 조사한 책이었다. 갑자기 자타공인 역덕이 되고 싶은 나. 냅다 깊게 파는 나의 역사덕후적 호기심이 빛을 발한다. 아니. 역사 이야기 능수능란하게 푸는 사람들 멋있지 않아? 어느 년에 뭐가 일어났고 어떤 것 때문에 발생했고 이런 거 줄줄줄 설명하면 왠지 모르게 멋지다. 역사가 약하다는 말은 사실 거의 모든 것이 약점이라는 말을 한 누군가의 명언이 생각난다. 그래. 맞는 말인 것 같아. 왠지 이 부분을 파면 다 잘 풀릴 것 같다.
풀릴지 안 풀릴지는 미래의 내가 아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다. 어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굴러다니는 짤들 보다 책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이지 아닐까?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이 시대 지성에 그나마 다가가는 것이 민주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이 영화라는 문화예술도 사실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봐도 역사적 맥락과 관련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시대극 만들기 좋다. 위대하고 극적인 인물이 많이 나와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이 영화는 이 시대극 만들기 좋은 한국사를 소재로 했다. <외계+인> 1부에 이은 여름 대작 두 번째, <한산 : 용의 출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1달 후의 조선으로 가보자.
해저 괴물 복카이센
문제가 뭘까? 다 알 것도 같았다. 일본의 장수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전쟁. 이웃나라 조선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단 조금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답답함이 아쉽다. 갑자기 느닷없이 나타난 이순신이라는 존재에 머리가 아프다. 와키자카는 해저 괴물 복카이센이 전장을 휩쓸고 있다는 말에 여러 번 생각을 되뇌인다. 할 수 있어. 전염병 같은 두려움만 이긴다면.
‘해저 괴물 복카이센’을 이끌던 장수의 관점으로 돌아간다. 전쟁 중이었던 해전. 거북선이 일본의 배에 부딪혔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조선의 거북선. 일본의 배와 조선의 거북선이 붙은 상태에서 백병전이 열렸다. 거북선에서 배를 이끌던 장수 나대용은 방패 하나와 무기를 들고 들이받은 배의 일본 장수 둘을 제거하려 배의 위로 올라간다. 조총이 빗발치던 전장. 방패로는 한계가 있었다. 왼쪽 허벅지에 총알이 박힌 나대용. 위기의 순간, 일본 장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나대용을 구해줬다. 나대용을 구한 사람은 이순신이다. 처절한 전투 끝에 부하를 구한 이순신. 그렇게 임진왜란의 어느 전장을 보여주고 카메라는 1달 후를 비춘다. 이순신은 전투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심문하다 왜나라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이순신은 열세의 전장을 뒤집어 조선을 구할 수 있을까?
자주 봤었지
사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은 다들 알고 있다. ‘우리에겐 12척의 배가 있소’부터 시작해서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 우리나라의 위대한 전쟁영웅 하면 늘 들어가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라는 소재는 적지 않게 사용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들어갔던 것이 <명량>이다. 또 내 나이 또래라면 다들 기억하는 <불멸의 이순신>도 있다. 굳이 영상매체가 아니더라도 한능검이나 교과서에서도 임진왜란 이야기는 자주 본다.
전쟁영웅의 이야기라 봐도 봐도 좋은 이야기겠지만 이는 곧 창작의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떻게 관객에게 어필하지?를 생각해보자. 여러분과 내가 각본가라고 해보자. 이야기를 2시간가량으로 구성하고자 하면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1)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킴 2) 한산도, 노량, 명량 해전에서는 조선이 승리한다" 같이 두 결론을 내고 논리관계를 만든다는 것 자체도 충분히 어렵다. 근데 이에 틀어맞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난이도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이런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거 또 봤던 이야기 하는 거 아닌가? 또 전작 <명량>에서 흔히 말하는 ‘국뽕’ 마케팅은 이런 우려에 부채질을 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런 단점들을 적당히 잘 보완했다.
좋은 기획
일단 영화는 조선의 관점에서 풀지 않는다. 전적으로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영화의 간단한 배경과 결말은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바로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압승으로 승리한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일의 긴장감은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느껴진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버키와 캡틴이 맨몸액션을 벌인다. 둘 다 호각세의 능력자들이기 때문에 합을 주고받는 것이 어떤 결론으로 향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결과를 알 수 없음’의 서스펜스를 과감히 포기했다. 그 대신 후반부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최대한 반대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기획하고 싸운 전쟁영화임에도 주인공이 두 명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물리적인 분량은 와키자카 쪽이 더 많다.
이렇게 되면 갖는 이점이 생긴다. 앞에서 썼듯 왜 나라의 관점에서 이순신의 지략가적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이 덕에 같은 소재의 전쟁영화가 있더라도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보다 신선하다고 느끼기 쉬울 것 같다. 구체적으로 써보자면, ‘반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일어나는 게 반전이다. 당시 일본의 관점에서는 이 전쟁이 불가사의했다. 조선은 거의 준비가 안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는 대사도 나온다("전쟁은 금방 끝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전쟁 준비 잘해간다. 이를 일본 관점에서 풀어가니 그 준비성이 더 도드라진다. 그렇게 일본 장수 와키자카의 관점에서 철저한 전쟁 서사를 묘사하면 '와 이걸 어떻게 이기지?'싶은 의문점이 든다. 또 이순신에 대한 정보가 일본 내부에는 거의 없다 보니 와키자카에 몰입하게 된다. 마치 <어벤저스> 시리즈의 '타노스'같은 느낌? 영화 전체적으로 이순신을 깨러 가는 느낌이 강하다. 영화는 이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이순신에 대한 미스테리를 후반부의 해전 신을 위해 쓰고 있다. 이야기 구성에 있어 보다 신선한 접근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초중반까지 일본 내부의 권력투쟁과 첩보 대결만 봐도 이야기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이 영화가 전작 <명량>과 다른 지점이 있어 비교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 이 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또 '의'를 표현하기 쉬운 것도 이 영화의 형식의 강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일본 관점에서 전개해야 내적 논리의모순을 관객이 알 수 없다. 이를 통해 일본의 입장에서도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용이하다. 일단 영화 초반부에 왜 '의'가 중요한지 제시된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이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 '의'라는 것이 어디 쪽에 있는 걸까? 쉽다. 이순신에겐 있고 일본의 장수들에게는 없는 것이 이 '의'일 것이다. 흰 종이에 붓 한번 살짝 찍어보자. 그럼 그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 내부의 상황을 조명하다가 조선을 쨘하고 보여주면 두 나라의 내부 상황이 대조적으로 보일 것이다. 일본 장수들이 하는 말을 잘 보면 거의 명분이 없다. 누가 싫거나.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아래 군사들 죽든지 말든지 알바 아니니까. 거의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의가 없는 왜의 명분과 이에 물든 일본 장수들의 냉정함이 더 도드라지는 것이다. 전작 <명량>이 민족주의(속칭 '국뽕')를 위해 영화 전반적인 장면을 희생한 것과는 다르게 뾰족한 기획을 통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특별한 무언가를 위한 발상이 아니라 '이런 영화를 만들 거야!'라는 아이디어에 기반한 좋은 선택이었다.
이를 위해서
이 신선한 방식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면 역시 배우들이 영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박해일-변요한-김성규-박지환 네 배우의 극 이해도가 굉장히 뛰어났다. 일단 박해일 배우는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할 때 그 '기라성'을 담당하고 있는 박해일 배우. <살인의 추억>, <국화꽃 향기>, <연애의 목적>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 올해가 그의 경력 중 최고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영화에서도 그의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상대역의 변요한 배우가 섬뜩한 연기를 워낙 잘해서 좀 심심하다고 느끼는 분이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박해일 배우가 연기를 잘했다고 느낀 것이, 1) 가벼워 보이지도 않으면서 2) 뭔가 고뇌하고 있는 내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3) 조선 내부의 상황으로 인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심리상태까지 극의 배경이 되는 좋은 연기를 수행했다. 비교적 와키자카에 비해 물리적 비중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존재감이 후반부까지 느껴지는 이유는 박해일 배우의 눈빛, 표정, 발성이 이 영화에 잘 어울리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과 <명량>까지 참 좋은 배우다.
다음은 변요한 배우다. 앞 문단에서도 썼듯 이 와키자카가 영화의 진주 인공이다. 물리적으로 분량이 아마 제일 많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박해일 배우는 잔잔한 파도처럼 극을 이끈다. 이와 대조적으로 변요한 배우는 감정적으로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머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단 갖고 있던 감정선이 다양했다. 전쟁 준비는 또 착착 잘 되어가고 있다. 근데 반대쪽에서 승전보를 울렸던 이순신에게 묘한 열등감을 품고 있다. 또 이순신이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하다. 자신감까지 있다. 선조의 입장 변화를 위시한 조선의 내부 상황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또 일본 내부에서 권력 교통정리가 안 됐다. 이를 묘사하는 연기까지 해야 한다. 이렇게 전반부의 감정연기를 넘어가면 하이라이트가 있다. 중반부가 넘어가서 이순신과의 한바탕에서 이 사람의 처지는 여러 번 바뀌게 된다. 이때 분출했던 감정표현들이 선명해서 기억에 남는다. 자기가 주체로 이끄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변요한 배우는 정말 열 일했다. 아마 이 배우의 최고작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김성규-박지환 배우도 기억에 남는 연기를 했다. 두 배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조연이다. 이 역할을 살리는 좋은 연기였다. 일단 김성규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범죄도시> 시리즈였다. 그리고 <악인전>에서도 봤었다. 이 두 작품만으로도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악인전>에서는 뭔가 난잡한 이야기 톤 사이에서도 빛났던 기억이 있다. 이때 단순히 연기만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건 똑똑한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준사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임진왜란이 왜 일어났고, 어떤 점에서 이순신이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묘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리액션 연기가 좋아야 한다. 몸짓 하나, 눈빛 하나가 무언가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박지환 배우 역시 뛰어난 연기였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이수 캐릭터로 유명한 이 박지환 배우. 솔직히 영화 보면서 '내 아임다' 생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영화는 전반적으로 이 캐릭터를 경제적으로 활용한다. 이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연기만 딱 잘라서 보여준 느낌?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았던 게 아닐까 싶었던 캐릭터 연출법이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아
영화가 개봉하기 이전에 시사회 평을 몇 개 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건 '<명량>의 단점을 극복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기대 좀 하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극복하긴 했다'다. 영화에는 엄청 큰 단점은 없다. 그 대신 아쉬운 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역시 극 중에서 옥택연-김향기 배우가 연기하는 임준영-보름 역의 서사 전부다. 난 이게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일단 영화 안에서 스파이가 있어서 얻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이 스파이가 단지 <명량>의 프리퀄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당받는 게 그게 완성도에 도움이 되는가? 는 의문이다. 조선 측의 특정 인물과의 대비를 이루기 위해? 굳이? 일본의 스파이가 있는 것까지 대칭을 이룰 필요가 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중반부까지 이순신-와키자카의 전략적 선택이 재밌다가 임준영이 나오면 산만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는 배우의 퍼포먼스와도 연관이 있다. 음.. 잘 모르겠다. 이 배우를 캐스팅한 게 좋은 선택인지. <외계+인> 1부의 썬더가 생각나는 연기였다.
그리고 후반부 하이라이트 해전 신에서 CG 티가 난다. 아마 바다와 실제 배에서 찍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 그랬던 건 이해한다. 그런데 사람이 없는 신 정도는 실물로 찍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초중반부는 일본의 관점에서 전개하지만 중후반부는 조선의 학익진과 거북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전반부의 살짝 느리더라도 신선한 템포가 후반부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오잉? 호기심이 가는 이야기가 식상한 촬영기법으로 치환되니 뭔가 김샌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영화 전반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질척임이 있다. 분명 전작에서의 '국뽕'요소를 많이 뺀 것도 안다. 불필요한 사족 많이 쳐냈다. 근데 살짝 유치하고 예전 느낌이 나는 연출법이 장면 장면마다 보인다. 완성도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은 아니나 확실히 아쉬운 지점이다.
그래도 좋았어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좋다. 잘 만들었다. 일단 두말할 필요 없는 후반부 해전 신은 쾌감이 대단하다. 부분 부분마다 꼼꼼하게 동선을 잘 짜 놔서 보는 맛이 있다. 이 액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운드와 표정이 될 것이다. 적의 변수에 당황하는 일본군, 급변하는 전쟁 상황, 포격 소리까지 CG를 많이 사용한 만큼 소리에 집중해야 현실감이 든다. 이 현실감은 유효하게 작용한다. 후반부 전투 신에서 우리나라 말도 자막처리를 할 정도로 집중했던 소리 연출은 러닝타임의 반을 할애한 만큼 제 몫을 다한다. 티켓 가격이 많이 오른 극장가 이 액션신만 봐도 가격 값을 한다.
또 영화에서 묘사하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극에서 나오는 군사집단은 이순신의 수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특별한 존재들이 조선의 땅을 지키며 왜적과 항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주인공이 이순신 장군인 것도 맞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말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개하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제목이 한산이다. 이 한산도대첩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싸워온 만큼 이들을 조명하는 것도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좋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볍지 않은 톤으로 배우들의 연기까지 깔끔하니 임진왜란의 무게감에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극장가, 두 번째 여름 대작으로 부모님과 함께 가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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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폐허된 억압 풀기
감독: 키라 코발렌코
출연: 밀라나 아구자로바, 알릭 카라에프, 소슬란 쿠가에프, 케탁 비빌로프
시놉시스: 한때 광산촌이었던 북오세티야. 이다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숨 막히는 통제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오빠 아킴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가 하나둘 밝혀진다.
첫 장면에서 아다는 외투를 코까지 올려 입은 채 벽에 기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이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다의 입이 웃고 있을지 아니면 긴장에 떨고 있는지 모르겠고 궁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인상은 이 영화가 관객에게 아다를 보이는 방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아다가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은 집을 나갔던 오빠 아킴이다. 전사를 모른 채 재회하는 남매를 마주하게 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이들의 만남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아다는 집에 돌아온 아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데 그 관계가 남매 사이보다 남녀 사이로 느껴지는 부분이 더러 있다. 마찬가지로 아다의 동생 다코는 아다에게 지나치리만큼 의존한다.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다 아다 아버지가 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에게 집안일을 모두 하도록 시키면서 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모습이 매우 강압적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서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에게 특히나 동생을 챙기는 걸 강조하는데 동생은 한창 학생 또래의 나이로 보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아다도 그런 시기를 거쳐왔을 것임을 추측하게 만든다. 아다가 아프게 된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관객은 이런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단 하나 느껴지는 건 모두의 행동에 악의는 없다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아다가 겪은 일은 직접적으로 칭해지지 않고 아다가 인질 사건을 겪었다는 정도로만 묘사되는데 이 영화는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 사건(2004)을 겪은 후 북오세티야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 사건 당시 체첸 반군은 베슬란 초등학교에 무장 침입해 1000명 이상의 인질극을 벌였고, 체첸 반군과 러시아군 간의 총격전으로 330여 명이 사망한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 최악의 인질극으로 남은 사건 중 하나다. 아다가 어떤 상황에서 이 인질극에 처하게 됐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아다가 거의 성인이 다 됐다는 점과 배의 아문 상처는 사건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해도 비극적 사건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아다의 마을에는 사건 이후 폐허와 불안의 정서를 깊게 깔려있다. 아다 아버지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에서 친구의 결국엔 다들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아킴이 다시 고향으로 올 것이라는 말은 그 불안감이 아다 아버지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아다 아버지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끔찍이 여기는 아버지로 인정되고, 그런 아버지의 곁을 지키는 아다와 다코도 효심 있는 아이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비극을 겪었다 해도, 어떤 이유로든 아다 아버지의 아다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다의 아버지는 아다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다의 여권을 숨기고, 집 문을 걸어 잠갔다. 아다가 도망치는 날에는 어김없이 주변에 수소문해 그를 다시 찾아와 곁에 뒀다. 수술로 호전될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병원에 아다의 병에 대해 진단받으러 가지도 않는다. 결국 아다 아버지의 행동은 일종의 방치다. 아버지의 억압에 누구의 도움 없이는 도망칠 수 없었던 아다는 오빠 아킴이 옴으로써 다시 집을 떠나는 꿈을 꾼다.
결국 아다는 도망치려는 자신에 대한 충격으로 쓰러진 아빠를 그냥 두고 떠나려고까지 하게 되는데 결국엔 오빠의 도움으로 구조되긴 하지만,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아버지가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이 말할 수 있게 됐다며 소리치는 아다는 울분에 차있다. 자신이 더이상 억압할 힘이 없자 취하는 행동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지만, 아다 아버지는 결국 아다에게 여권을 내미는데, 그런 아버지를 아다가 껴안고 그 상태에서 경련이 와 그대로 굳는 아버지의 모습은 가부장제 억압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그럼에도 아다는 자신의 마을을, 아버지를 벗어난다. 아킴의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두 사람을 결혼 행렬이 뒤따르면서 영화의 카메라는 그 일행이 들고 있는 캠코더로 넘어가 거친 핸드헬드 촬영으로 바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흔들리며 카메라에 찍히고, 아다의 여권과 기저귀가 든 가방은 한쪽 끈이 떨어져 있다. 떨어진 끈을 잡고 있던 아다는 이내 그 끈마저 놓아 버리고, 가방은 도로에 뒹굴며 멀어진다. 내내 카메라의 시선에 머물러있던 아다는 그렇게 완전히 해방된다.
아다의 모든 순간을 연기하는 밀라나 아구자로바는 처음인데도 그 연기가 엄청난데 영화의 결도, 연기의 결도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안티고네>의 나에마 리치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다. <꼭 쥐었던 주먹 풀기>는 제74회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Schedule
2022-08-26 13:00-14:37 <꼭 쥐었던 주먹 펴기>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2022-08-31 13:30-15:07 <꼭 쥐었던 주먹 펴기>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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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담쪽이는 5천 년을 자서 신경이 예민해
봉인이 풀리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 가상의 왕국 칸다크는 인터갱이라는 군사 집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폭압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사건건 검열하는 군부에 주민들은 진절머리가 났다. 이 동네는 혁명이 필요하다.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혁명을 꿈꾸는 사람은 있었다.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 아드리아나는 팀을 이루어 전설로 전해지는 왕관을 손에 얻기 위해 모험 중이었다. 유적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한 아드리아나 일행. 노력을 기울인 덕에 왕관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왕관을 손에 넣자마자 인터갱이 들이닥쳐 아드리아나 일행을 공격하려고 한다. 위기일발의 상황. 아드리아나는 주문으로 왕관을 통해 칸다크의 수호신 ‘테스 아담’을 소환한다.
부활한 테스 아담. 엄청난 덩치에 카리스마까지 대단했다. 겁에 질리는 인터갱 군인들. 의문의 남자에게 발포한다. 신에게 총알이 통할 리가 없다. 총알을 맨손으로 잡고 ‘하찮은 마법이다’ 조롱하는 테스 아담. 순식간에 무덤(유적) 안을 이동한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람소리만 휙휙 날리며 가볍게 인터갱 군인들을 몰살하는 아담. 아담은 손으로 군사들을 지져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유적 내부의 병사들을 해치우고 밖으로 나온 아담. 무덤 밖에도 인터갱 군사들이 아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순식간에 전부 군사들을 태워버리며 손쉽게 1대 다수 싸움을 이긴 아담. 이 테스 아담을 제지할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칸다르를 죄다 부술 것 같은 테스 아담. 이 아담을 제지하기 위해 초능력자 집단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등장한다. 아담 일행과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만 대립하고 끝나면 다행일 텐데, 칸다르를 앞에 두고 거대한 빌런 집단이 이상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 과연 테스 아담은 블랙 아담이 되어 칸다르를 지킬 수 있을까?
지지고 볶고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액션이다. 2시간가량의 영화지만 체감상 1시간 10분 정도는 액션에 비중을 둔 것 같다. 또 그 와중에 이야기 전개도 성실하다. 가령 극초반부 블랙 아담이 등장할 때 병사들을 해치우는 신을 봐도 그렇다. 아담이 샤샤샥 하는 카메라 워킹에 인물의 전지전능함이 어떤지를 삽입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액션신을 쭉 하다가 이터니움으로 된 폭탄을 맞고 기절한다. 여기서 이터니움 폭탄 묘사도 극에서 어느 정도 중요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액션을 삽입한 느낌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먼저 깔고 액션을 삽입한 부분은 러닝타임 후반부까지 지속된다. 닥터 페이트라는 인물이 있다. 피어스 브로스넌이 맡은 역할이다. 이 인물은 이 <블랙 아담>에서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 이유가 영화 전체적으로 주요한 터닝포인트마다 배치된다. 캐릭터가 영화 동안에 살아 숨 쉰다고 느껴진 이유가 이 좋은 설계 덕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호크맨이라는 캐릭터도 이 영화에서 무조건 필요하다. 영화는 무자비한 안티히어로 '블랙 아담'을 조명한다. 그 뜻은 즉 아담의 악랄함과 선함을 양가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같은 액션을 넣어도 둘 다 성립할 수 있게 배치한 각본가의 큰 그림이 돋보였다.
또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는 번개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블랙 아담이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묘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번개를 주 무기로 사용하는 블랙 아담. 이에 걸맞게 번개를 활용한 시각화가 잘 들어갔다. 영화에서 드웨인 존슨이 그렇게까지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뚱한 표정으로 '나는 히어로가 아냐'라고 말하는 것이 영화의 1/2 가량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억에 블랙 아담이 남는 이때 활용했던 시각화 비주얼이 잘 뽑혔기 때문이다. 이 또 영화에서 이 히어로의 기원을 다루기도 한다. 그럼 과거의 칸다르도 나오고 그 나라를 지켜보고 있는 신(마법사)들도 제시돼야 한다. 전자 과거의 칸다르는 살짝 빛바랜 느낌으로 촬영하고, 후자 마법사들은 색마다 특이점을 부여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설득력을 갖게 만든다. 이 시각화는 후에 나오는 사이클론과 닥터 페이트에게도 강점으로 작용한다. 사실 사이클론과 스매셔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서 존재감 그렇게 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클론 캐릭터를 활용해 형형색색 아름답게 제시한 액션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인물을 활용한 시각화의 정점은 닥터 페이트다.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좀 아쉬웠다.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와 싸우던 그 닥스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한 음표 가지고 싸우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주인공이 닥스인데 마법사로서의 능력치는 완다에게 더 갔으니 후속작에서 주인공의 존재감을 묘사하는 것이 약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닥터 페이트의 마법 능력은 대단하다. 인물이랑 어울리기도 어울린데 진짜 멋있게 잘 뽑혔다. 주로 투명한 유리를 활용해서 액션 신을 보여준다. 엄청난 박력으로 히어로들을 요리하던 완다와는 다른 느낌의 마법이다. 가령 유리를 통해서 피사체가 여러 각도로 보이는 마법을 보여준다. 이 마법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닥터 페이트와의 캐릭터성과 어울리는 좋은 연출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이상한 캐릭터들
그렇게 눈요깃거리는 충분한 영화지만 사실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영화의 이야기 구성에 대해 말해 볼 수 있다. 이 영화에 모녀 두 사람이 나온다. 그중 아들이 말하는 대사 퀄리티가 아쉬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명대사들이 있다. <블랙 팬서>에는 '와칸다 포에버!' <캡틴 아메리카>는 'I can do this all day!'같은 것이다. 여기서 영화에서 소년이 대사를 치는 걸 보면 이 명대사 삽입을 지나치게 의식한 티가 난다. 대사가 삽입되는 방식이 좀 뜬금없기도 하고, 아들 캐릭터 자체가 이야기 전개에서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물리적인 시간이 많아 불필요하게 느껴져 이 지점이 두드러진다. 보통 이런 히어로들의 명대사들이 밈이 되어 유행이 되는 건 그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도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루 종일 무엇이든 할 수도 있다! 는 걸 전달하기 위해 뱉은 말이다. 그런데 극 중에서 블랙 아담이 내내 정색하고 있어서 유머러스하지도 않고 그 말이 영화에서 중요하지도 않다. 그냥 말장난일 뿐이다. 이 심심한 표정연기는 인물 전체를 관통한다. 뭔가 입체적인 모습이 있어야 이 사람의 개성이 살아날 텐데 내내 똑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만 한다. 내내 부수기만 하고 끝난다. 후반부로 간다. 이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이후 맨몸액션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오! WWE 전설의 경험치를 볼 수 있나? 내레이션만 기억나고 카메라를 계속 흔들어서 잘 안 보여준다. 그래서 블랙 아담이라는 캐릭터가 멋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내내 부수는 것만 보니 캐릭터의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다. 영화에서 테스 아담이 감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없지 않다. 충분히 나옴에도 불구하고 내내 정색한 표정으로 연기하니까 주인공이 등장하니까 1절 못하고 2,3절까지 계속되는 유머를 보는 느낌이다. 이 히어로의 철학도 맥 빠진다. 자유를 추구하는 건 좋다. 왜? 그냥 주인공이 세니까 칸다르는 자유를 찾아야 해? 단순히 자유가 왜 중요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냥 무작정 이상만을 좇는 캐릭터가 나오니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빌런 캐릭터를 설계하는 방식도 아쉬움이 있다. 전반부. 가장 첫 번째 시퀀스에서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칸다르 왕국과 그 나라를 지켰던 수호신에 대해 쭉 전달하는 영화. 살짝 길긴 하지만 친절한 전개 덕에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다시 러닝타임 중반으로 지나간다. 블랙 아담이 자기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내레이션이 한번 더 사용된다. 중후반부쯤으로 넘어간다. 그럼 최종 흑막으로 지목된 인물이 그동안 있던 일을 쭉 설명한다. 비슷한 연출 방식이 세 번이나 쓰였다. 2시간 동안 같은 말을 세 번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런 식의 연출을 세 번이나 써서 안 그래도 전체적으로 진부한 영화가 더 지루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또 그 사실이 빌런 개인의 입장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중요한 사실인데 후반부 잠깐 쨘 하고 나온 부분은 아쉽다. 이걸 초반부에 제시해서 빌런 캐릭터가 갖는 긴장감을 유지하면 좋았을 걸 중반부가 넘어가고 나서야 부랴부랴 보여준다. 염소 같은 빌런 디자인만 기억이 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몰개성한 작법으로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공조 : 인터내셔날>의 진선규 캐릭터가 연기했던 빌런 역이 생각난다.
이 아쉬운 캐릭터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맡은 닥터 페이트에도 이어진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캐릭터를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 없이 내내 부수기만 하는 블랙 아담 / 감정적인 호크맨 / 무계획으로 깔아뭉개는 아드리아나 모자 / 존재감 없는 흑막까지 내내 이성적이고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닥터 페이트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닥터 페이트의 행보는 글쓴이의 예상대로 전부 흘러갔다. 더 과장해서 말하면 '닥터 페이트'라는 캐릭터만 듣고도 이 사람의 행보가 예상될 정도다. 이는 닥터 페이트가 들어간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역시 전형적으로 설정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작용으로 이 인물이 이렇게 단조롭게 느껴졌다는 의미와도 상통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보다 마법은 멋있게 썼어도 그와 차이점을 못 느끼겠다. 이게 원작 코믹스는 닥터 페이트가 원조라고 한다. 그럼 오히려 오리지널리티를 더 살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전형적인 이야기 톤, 사려 깊음, 운명론이 남고 이 사람이 왜 멋있는지는 어떤 창의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브로스넌이 멋있는 자세로 앉아서 중저음의 톤으로 노년의 섹시함을 드러냈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건 피어스 브로스넌이 멋있는 거지 닥터 페이트가 멋있는 것이 아니다.
안전한 선택지만 골랐어
이런 아쉬운 점은 영화 전반적인 연출 방식으로도 이뤄진다.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연출 방식이 있다. 바로 슬로모션이다. 이 슬로모션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가령 사이클론의 캐릭터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인물의 동선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다. 또 블랙 아담이 광속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슬로모션 연출이 필요하다. 슬로모션을 넣어야 이 인물의 무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맥락에서는 슬로모션을 넣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한 1/10쯤 된다. 그렇지 않아도 될 부분에도 슬로모션이 들어가는 것은 아쉽다. 가령 사이클론에 슬로모션이 들어가는 방식을 보면 한 10번 이상은 쓰였다. 빠르게 회전해서 형형색색의 바람을 유발하는 사이클론. 여기서 사이클론이 몇 바퀴 돌고 정자세로 서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이 정자세로 서는 자세에 슬로모션이 반복해서 쓰인다. 이거 슬로모션으로 넣을 이유가 없다. 이 행동이 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그냥 없다.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넣은 것이다.
이 뿐일까? 전체적인 장면 구성이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따온 듯한 기시감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닥터 페이트 캐릭터의 사용법과도 이어진다. 다른 예로는 블랙 아담의 입장 변화에서 따올 수 있다. 블랙 아담의 첫 등장이 있다. 그리고 굴곡이 생긴다. 또 그 굴곡을 상회할 만큼 문제가 생겨서 다시 부활한다. 이거 <아이언맨> 시리즈에서 다 봤던 내용이다. 첩보물로 장르의 변주를 줬던 <캡틴 아메리카>나 코미디/스릴러로 장르를 병치시켰던 <앤트맨>과는 영 다른 느낌이다. 그래서 패턴이 전부 예상 가능하고 장면 구성도 거의 모든 시퀀스가 어디서 본 느낌이며 액션도 템포 조절 없이 강한 리듬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중반부로 방향키를 틀면 지루해진다. 볼거리는 많은데 진부한 영화처럼 느껴지는 것이다(이 글 쓰는 것도 어려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거 다른 영화에서 봤는데'만 생각나서). 예술가적인 창의성이 안 느껴지는 느낌? 이거 DC 코믹스의 영화다. 그럼 DC 코믹스 다운 전체적인 톤이 있어야 한다. 글쓴이는 그게 멋있는 시각화와 뭔가 어두운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에 유머(같이 느껴지는)와 모자 캐릭터 중 소년이 말하는 부분을 보면 딱히 그런 걸 노리고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닥터 페이트 / 호크맨을 제외한 두 히어로는 그냥 둘이 다른 영화 찍고 있는 느낌이었다. 청춘들의 로맨스를 넣을 거면 두 히어로를 주연으로 한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게 좋았을 텐데?
올해 5월 개봉했던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가 있다. 이 영화가 만듦새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어도 <블랙 아담>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닥스 2>도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런데 적어도 감독 샘 레이미의 인장과 운명론을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라는 주제는 기억에 남는다. 또 같은 DC 코믹스 영화인 <더 배트맨>은 이 <블랙 아담>보다 훨-씬 낫다. <더 배트맨>은 다 기억에 남는다. 반 폐인 같은 얼굴로 쓱 나타나서 악당들에게 맞기도 하고, 곤궁에 빠지기도 하지만 희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브루스 웨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난다. 리들러나 캣우먼 같은 캐릭터도 연출에서 힘을 줬던 지점이 분명해서 이 배역들의 특장점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어디서 통했던 것들만 그대로 갖고 왔다. 영화가 기억에 남아야 하는데, 드웨인 존슨과 피어스 브로스넌만 장점으로 기록될 영화가 돼버렸다.
성공적인 시행착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그래도 있는 편이고 몰입하기도 어렵지 않아서 친구들끼리 극장을 찾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쿠키 영상이 있다. 이 히어로의 행보가 오리무중에 있었기 때문에 DC 유니버스의 팬이라면 두 사람의 대결을 기다려 왔을 것 같다. 또 DCEU가 들인 돈에 비해 영화판에서 존재감이 없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선택지만 골랐다. 이에 따른 단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있어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2시간 동안 이 쿠키영상의 예고편이 된 건 아쉽지만 화려한 볼거리로 여러분의 시간을 불태울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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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데이빗 로워리의 필모그래피를 훑다보면 당혹스럽다. 일련의 영화들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차도 꽤 있는 편이라 한 감독 밑에서 탄생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 텍사스의 풍광을 중심으로 서사의 밀도보다 고독과 우울의 뉘앙스를 전면화한 멜로드라마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가족을 잃은 소년과 온순한 드래곤 사이의 가족애를 그린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피터와 드래곤>, 아내 곁을 부유하는 한 유령의 절절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 전대미문의 은행털이범을 범죄 코미디의 형식으로 느슨하게 전개한 <미스터 스마일>, 켜켜이 쌓아올린 상징의 구조와 초현실적 공간을 기반으로 신화적 모험담을 장엄하고 기이하게 풀어낸 <그린 나이트>에 이르기까지(심지어 그의 다음 작품은 <피터 팬>을 실사화한 디즈니 영화 <피터 팬&웬디>이다). 데이빗 로워리는 특별한 사조로 묶이거나 단일한 수사로 명명되길 거부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내밀한 특징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로워리만의 전략과 세계관은 서로 다른 외피로 포장된 필모그래피에 은밀히 내장돼 점차 확장되고 있다.
1.
로워리 영화의 도입부에는 서사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 순간은 항상 죽음의 얼룩으로 칠해져 있는데, 초기작의 경우 동료의 죽음(<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이나 가족의 죽음(<피터와 드래곤)>을 위시한 2인칭 죽음에서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신의 죽음(<고스트 스토리>)과 낯선 존재의 죽음(<그린 나이트>)이라는 (각각) 1인칭, 3인칭 죽음으로 확장된다. 일차적으로 로워리의 영화를 추동케 하는 것은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 그리고 그것이 지닌 매혹의 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죽음이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가정’처럼 주어진다는 점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로워리는 연인 관계인 밥과 루스가 어째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의 범행 계획은 어떻게 어그러졌으며 어떤 경위를 거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들의 동료 프레디의 죽음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프레디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밥은 경찰에게 체포되고 루스는 그와 떨어져 뱃속의 아이와 외로이 생을 보내야만 한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정보는 밥과 루스의 사랑이 꽤 깊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분리된다면 그 이후의 생은 어떻게 될지 질문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더욱 극단적인데, 시작과 동시에 피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자취를 감추고 사는 드래곤과 조우하여 유사 가족을 이뤄 살게 된다. 의아한 것은 차가 전복되어 성인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대형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의 피터는 별다른 상처 없이 살아남아 심지어 멀쩡히 숲으로 걸어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로워리에게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배합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일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인물을 수식하는 최소한의 수사를 제시한 다음, 죽음이라는 가정법을 통해 죽음이 낳은 이후의 삶과 그 영향 하에 흘러가는 시간의 뉘앙스를 시각화하는 데 관심을 둘 뿐이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의 죽음 또한 교통사고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덩그러니 제시되며, <그린 나이트>에서 상대에게 목 베임을 당하는 녹색 기사의 타살 퍼포먼스도 허무맹랑한 게임의 규칙으로 존재할 뿐 그 본질과 통하는 논리적 인과 관계는 부재하다. 그런 점에서 로워리의 영화를 ‘죽음의 가정법’이 추동하는 영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워리가 죽음의 가정법이라는 전략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워리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정황이나 뉘앙스가 우선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에는 캐릭터가 부재하다. 캐릭터라이징에 앞서 위에 기술한 가정법이 선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것은 가정법의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뿐이다. 때문에 로워리의 인물들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루스와 밥은 현실 세계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잊혀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속담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감행하는 수행자처럼 보이며, <피터와 드래곤>에서 피터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접점에서 두 세계의 공존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관찰자처럼 그려진다. 또한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놓고 떠난 자의 시간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영화적 존재처럼 기능하고,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은 위엄과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비루한 현실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탐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응답이다. 로워리는 이 성실한 수행자들을 통해 특정 명제나 세계, 혹은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고, 그것의 진실을 풀어내는 데 애쓴다.
2.
로워리는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질료 삼아 서사를 구축하는 시네아스트다. <고스트 스토리>, <그린 나이트>에는 무엇보다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영화 그 자체의 환유처럼 형상화된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스트로 환생한다.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른 괴이한 형상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자아를 체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행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이 오직 응시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얀 천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시종일관 현실의 대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때로 접시를 집어 던지고,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는 등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이며 소박하다. M이 바닥에 누워 C에게 선물 받았던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 머리맡으로 뻗힌 손이 고스트의 하얀 천과 거의 접촉되는 듯 보이는 쇼트는 그래서 외설적이고 신비롭다.
더불어 고스트는 줄곧 남겨진 아내 M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머무는 집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M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웃이 선물한 파이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긴 쇼트에서 프레임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지된 형상의 고스트는, 화면 내 유일하게 운동하고 있는 M의 처연한 몸짓과 대비를 이루며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한 고스트는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응시의 기회를 부여하고 시간성을 체감하게 해주는 ‘영화’와 유독 닮아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남자의 영적 멜로드라마처럼 보였던 영화는 의아하게도 중반부가 되자 그 둘을 완전히 떼어놓는다. 고스트는 집을 떠나는 M을 멀리서 바라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왜 고스트는 그 집에 남아야만 했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 그러니까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스트 스토리>는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의 숙명에 관한 영화다. 다만, 그 메시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고스트가 쪽지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일순 하얀 천만 남기고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완전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가 고스트로 분한 영화가 현실을 응시하며 그 물질적 조건에 대응하고 끝내 소멸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그린 나이트>는 비루한 기사 가웨인으로 대변되는 남루한 현실이 녹색 기사로 분한 성스러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긴 여정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수반되어야 할 덕목들을 탐구하고 점검함으로써 종국에 영화가 현실과 분리되어 독자화되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 이르러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무대 위에 서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사창가에서 유흥을 즐기는 게 일상인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왕은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을 하사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무대화된 스크린에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녹색 기사가 출연한다. 녹색 기사는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이 이에 동참하면서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된다.
녹색 예배당으로의 여정은 크게 네 개의 시퀀스로 구성되는데, 이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관문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요약하자면 (피해자에 대한) 연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상상력에 따른 생경함의 창조, 사랑의 윤리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다. 각 시퀀스들은 매번 출제자처럼 보이는 인물 혹은 대상, 이를 테면 소년병, 성 위니프레드, 환각의 버섯, 성주와 성주부인을 내세워 문제를 출제하고, 가웨인이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오가며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다다른 가웨인은 죽음 앞에서, 만약 지금 녹색 기사의 도끼를 피해 집으로 달아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상상 속 미래는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문제가 고스란히 발현되며 끔찍한 결과로 치닫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가웨인(현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현실은 소멸되고 영화는 독자화된다.
로워리의 세계에서 그것이 영화든 현실이든 서로에 가닿을 때 그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두 세계가 등가적 관계에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불완전함에 있다. 두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영원히 존속된다. <미스터 스마일>에서 전설적인 은행털이범 포레스트 터커는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신이 없을 때, 꼬마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아이가 노년이 된 현재를 자랑스러워할지 상념에 잠긴다. 그리곤 다행히 매일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그의 연인 주얼이 답한다. “하지만 절대 완전히 다다를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건 죽어서나 가능하니까.”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로워리의 시선은 이 대사로 명료히 설명된다.
3.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피터와 그래곤>은 이 믿음을 일차원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숲에 사는 드래곤을 본 적 있다고 주장하는 미챔은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 딸에게 “네가 못 봤다고 없는 건 아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는 그녀를 ‘눈앞의 것밖엔 못 보는’ 존재로 규정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자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실존을 믿는 자들 사이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이야기다. 다만, <피터와 드래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문제는 그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국한된다. 관객은 도입부에서 작중 현실과 화면에 이질감 없이 동화되어 있는 드래곤의 형상을 이미 보았고, 실사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익히 훈련되어 있는 탓에 그 존재를 구태여 부정할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스트 스토리>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화목했으나 잠시 아내 M과 사이가 냉랭해진 C는 돌연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뒤, 하얀 천을 머리에 쓴 고스트의 형상으로 느닷없이 부활한다. 관객은 그간 한 번도 학습되지 않은 고스트의 부활 장면과 그 괴이한 형상을 직시하며, 심지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하는 작중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방식을 관찰하며, 이 황당무계한 존재의 실존을 믿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작중 인물 간의 문제를 관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로워리는 이 구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존재가 추동하는 서사의 가능성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이 믿음의 유무가 영화의 존재 혹은 영화 제작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이라고 설파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남루한 현실적 존재인 가웨인이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에 가닿으려는 이행의 과정에서 가웨인과 성 위니프레드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녀는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듯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고 부탁한다. 두 눈에 명백히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두고 혼란에 빠진 가웨인은 묻는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심하고, 연못에서 그녀의 머리를 꺼내줌으로써 잃어버렸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렇게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영화의 근간으로 삼으며 이에 대한 공감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독창적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 <피터와 드래곤>의 미챔의 말을 빌리자면, 로워리는 관객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 같다. “그냥 마음의 눈을 열어보라고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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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연한 두려움이 일으킨 불안감의 파도.
- 500일의 썸머에 나왔던 그 영화를 보았다. 그 문제작(?)인 '졸업'은 1967년 마이크 니콜스의 미국 영화인데, 원작 찰스 웨브의 '졸업'을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썸머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과 톰이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겹치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톰이 이 영화를 오해하며 자랐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썸머는 '졸업'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울고 톰은 우는 그런 썸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정말 톰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극복한 운명적인 사랑의 영화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주변의 기대와 막연함으로 인해 내면의 불안감이 휘몰아친다. 그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그는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1차원적인 쾌락에 빨려 든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느새 그 욕망에 잠식되어 소거된다. 대화 없이도 충분한 잘못된 만남은 언젠간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만 익숙해진 시간으로 인해 전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된다. 금단의 관계는 그의 일부분이 얽히게 만들며 동시에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허비한 시막 간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고 물 위에 부유하던 벤자민은 일레인을 만나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매번 선택의 순간의 기로에 놓이며 '사랑'과 연관된 일레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끝내 쟁취하고도 벤자민의 공허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일레인의 모습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질 흔들리는 불안함을 500일의 썸머의 '썸머'는 그 감정을 느꼈기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자라왔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졸업이라는 묵직함으로 다가온 순간을 목도한다.
그의 방황에 휩쓸린 이들에게 밀려오는 불안감의 파도는 청춘이라는 막연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세대를 막론한 진정한 '졸업'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 큰 시험지 같다. 영화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가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약간의 아쉬움은 분명히 있지만 청춘의 막연함을 물에 비유한 방식이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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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을 가용당하는 사회속에서 여성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여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작품이라기에 작품성에 대한 기대를 많이 했던 영화 <로스트 도터>. 영화 속 장면들이 굉장히 타이트하고 흔들리는 장면들이 많아서 멀미를 선사했는데, 이 작품을 보게 된다면 부디 멀리서 보길 바란다
영화 <로스트 도터> 시놉시스
“집을 나왔어요. 그렇게 딸들을 버렸죠”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는 딸을 가진 젊은 여자 니나를 보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일 같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갑자기 니나의 딸이 사라지고 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로스트 도터>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흔들리는 컷들의 집합이랄까?
멀미를 한 이유를 말하자면 이 작품은 고정되어 있는 컷이 하나도 없다. 앞자리에서 봐서 그 흔들림이 더 눈에 잘 띄었던 것일수도 있지만 야속할 정도로 흔들렸다. 과도한 클로즈업과 인물이 걷거나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는 화면들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앉아있는데 출렁이는 배에 탄 것처럼 아주 멀미가 장난 아니었다.
이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흔들리는 장면들을 넣은 이유는 휴가를 온 레다의 혼란한 심경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한 니나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선택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혼란에 빠지는 레다는 장치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이성적으로는 굉장히 이해가 잘 됐는데 흔들리는 장면을 볼수록 컨디션이 점점 안좋아져서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모성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일까?
영화 <로스트 도터>는 모성에 대한 신화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자연스럽게 모성이 생기고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모성이라는 것이 바로 생기는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었다. 엄마라는 이유로 전적인 희생과 자애를 요구당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 여성들은 이기적인 엄마라고 지적하는 사회에 대해 물음표를 던진다.
한 가정에 있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의 커리어를 각자 쌓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성이 가정과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여성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핀잔을 받는다. 그에 반해 남성은 이기적이라는 말을 잘 듣지 않는 편이다. 사회는 모성을 강요하면서 부성을 강요하진 않는다. 모성은 보이는 행동은 당연한 것이고, 부성을 보이는 행동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점차 이러한 편견이 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러한 모습들이 종종 눈에 보여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 작품이 그런 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살아간다. 어떠한 선태긍ㄹ 하던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다. 영화 <로스트 도터>는 주인공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다. 레다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교수로서 성공을 하고 싶은 야망을 가진 여성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잠시 자신과 분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꿈에 그리던 교수직 제안을 받자 혼자 런던으로 향한다. 레다는 런던에서 다른 남성과 불륜을 저지르기도 한다. 불륜은 끝냈지만 레다는 가족을 버리고 교수라는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딸과의 관계는 져버리지는 않은 듯 하다. 연락은 지속적으로 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것이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비춰진다.
여자와 엄마, 아내라는 다양한 지위 속에서 과연 레다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일까? 이 영화는 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에게 이것이 만약 내 인생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해서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이었다. 여성의 입장에서 그녀의 선택이 단순히 이기적이라고 말하기 힘들었지만, 그녀의 선택이 과연 옳았는지에 대해서도 확언할 수 없었기에 많은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로스트 도터>는 가부정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압박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해볼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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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건2'는 2019년 7월 12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톰 크루즈가 직접 전투기를 몰기 위해서
촬영까지 중단하고 2020년으로 개봉을 연기했다고 합니다영화 역사상 최초로
배우가 직접 전투기를 몰게 되는데...
진짜 이 정도면 이 형은 기네스북은 물론이고
인간문화재에도 등재되어야 할 수준지금의 톰 크루즈를 있게 한 그 영화가
34년 만에 속편 "탑건:매버릭"으로 돌아옵니다
톰 크루즈가 34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제작진 및 출연진
감독: 조셉 코신스키
제작: 제리 브룩하이머, 데이빗 앨리슨, 톰 크루즈, 데이나 골드버그, 돈 그레인저
각본: 크리스토퍼 맥쿼리, 피터 크레이그, 저스틴 마크스, 에릭 워렌 싱어
출연: 톰 크루즈, 마일스 텔러 외
장르: 군사, 액션, 드라마
제작사: 제리 브룩하이머 필름, 스카이댄스 미디어, TC 프로덕션, 텐센트 픽처스
배급사: 파라마운트 픽처스
개봉일: 2020년 6월
촬영 기간: 2018년 5월 30일 ~ 2019년 4월 15일
음악: 해롤드 팔터마이어, 한스 짐머#탑건2 #탑건매버릭 #탑건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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