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평2025-05-05 16:14:41
[JEONJU IFF 데일리] 기록이 다큐멘터리의 본질일까, <저항의 기록>
영화 <저항의 기록> 리뷰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또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저항의 기록>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영화의 정의’에 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즉 문서화와 기록화에 중점을 둔 장르의 영화들은 여전히 국내에서 명확한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기록할 것인가. 제작자의 관점이 개입된, 설득을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실을 활용할 것인가. 그 질문 위에서 저마다의 필름을 찍어냈던 수많은 다큐멘터리 상영작의 감독들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답을 내린다. <저항의 기록> 또한 그렇다.
저항의 기록
Resistance Reels
Cast
감독: 알레한드로 알바라도 호다르, 콘차 바르케로 아르테스
시놉시스
페르난도 루이스 베르가의 유일한 연출작 <로시오>(1980)는 민주주의 초창기 법적 검열의 대상이 된 후 많은 이들에게 저주를 받은 다큐멘터리다. 베르가는 그 이후 다른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우리는 이 실현되지 못한 영화들이 저항의 몸짓으로서 현재에서 생명을 얻기를 꿈꾼다.
<저항의 기록>은 파편화에 그쳤을까
이 영화는 베르가 감독이 끝내지 못한, 기획 단계에서 머무르다 피지 못한 이야기들을 그 뒷선에 선 감독들이 피워내는 것을 중심으로 한다. 가장 큰 의미 관계의 대립으로 보이는 것은 저항과 그 반대에 선 이들이다. 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다. 베르가 감독이 만들었던 <로시오>를 비롯해 기획 단계에서 그쳐 버린 모든 이야기는 어쩌면 그 저항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을 이 영화가 신중히 담아 정리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다큐멘터리의 정의,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의문은 바로 <저항의 기록>이 가지는 특징에 있다. <저항의 기록>이 러닝타임 동안 보여주는 모습은 어쩌면 파편화에 가깝다. 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잡동사니처럼 흩어져 있던 서류철들을 정리함에 꽂아 정리한 것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 관객들의 부정적인 평이 있었다.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고, 설득하는 힘이 부족하며 이야기가 파편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중론으로 보인다.
짚어볼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영화는 베르가 감독이 구상 단계에 그쳤던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후발주자 격인 감독들이 ‘구현’하는 과정이다. 다큐멘터리의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영화가 담아내야 할 이야기가 대단히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품이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베르가 감독의 일생도 짚어야 할 것이고, 탄압에 관한 베르가 감독의 시선이 담긴 영화를 구현해내고 그것을 보여주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제목을 <저항의 기록>이라고 정해둔 것은 아닐까. 일일이 영화 내에서 마치 ‘챕터’의 개념처럼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닐뿐더러 모든 이야기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애초에 제작 과정에서 염두에 뒀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기록에 그 무게를 두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 영화가 지니는 의의 또한 작품의 제목에서 미루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항한 이들을 기록하는 게 중점이었던 것은 아닐까. 베르가 감독과 감독이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구현된 다큐멘터리 속에서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은 모두 저항한 이들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한 이들이다. 챕터들마다 등장하는 이슈들, 그리고 인터뷰이들이 저항했던 모든 것은 면담과 사실 기록으로 구체화된다. 베르가 감독이 해내지 못했겠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이런 것들이었을지 모른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이 전한 평가 중 ‘번잡스러움’에 관한 지적은 그럴듯하다. 충분히 그 지적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별개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아 전하는 것은 큰 부담이 따른다. 말 그대로 번잡스러워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감독들은 그 부담을 짊어지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번잡스럽더라도, 베르가 감독이 하고자 했던 것을 이렇게나마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서류 정리함에 정갈하게 꽂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일종의 애도에 관한 개념으로 확장된다.
기록에서 애도까지의 확장
저항을 기록하는 것은 애도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저항의 역사는 뿌리 깊다. 민주화를 위한 항쟁과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수차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국민이 쓰러졌다. 국가 권력이 행한 국가 폭력에 의해서다. 그렇다면 그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과거가 있었다는 그 사실을 영상화하는 것은 일종의 애도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저항의 기록>은 ‘애도하는 기록’인 셈이다.
이는 또한 베르가 감독을 애도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베르가가 일생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탄압받으며 구차한 삶을 살다 끝내 생을 마감한 것은 일종의 저항이었다. 그런 베르가의 미완성된 작품들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만으로,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저항이며 애도가 된다.
그런 관점에서 이 <저항의 기록>은 가치를 지닌다. 저항하는 이들을 담아내고, 저항의 순간들을 기록해냈으며 그와 동시에 애도해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시간의 흐름에 묻혀 그 생명을 잃었던 저항의 순간들이 되살아나기에 이른다.
다큐멘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단순히 사실들을 기록하고 나열하는 것은 진정으로 가치가 없는 것일까. 다큐멘터리는 모호한 존재다. 영화의 영역과 저널리즘의 영역까지 모두 아우르게 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가 다른 극영화처럼 영화로서 그 가치를 더 무겁게 지닌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적 가치를 더욱 가지고 있다고 느껴진다. 저널리즘은 그 사실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에 주목한다면, 그 가치가 가장 중시된다면 <저항의 기록>은 그 자체로 가치 있을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저항의 기록들은 이제 베르가의 손아귀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만났다. 호다르, 아르테스 감독은 그 기록들에 마침내 생명을 주었다. 그 생명이 관객들 앞에서, 어떤 힘을 가지게 될지는 관람하는 관객들의 손에 달렸다. 평가의 여지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득력인가, 사실에 관한 기록인가.
상영 일정
2025. 05. 01(목) CGV전주고사 7관 21:30
2025. 05. 04(일) CGV전주고사 7관 14:30
2025. 05. 06(화) CGV전주고사 7관 14:30
전주국제영화제는 4월 30일~5월 9일 동안 개최됩니다. 자세한 일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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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9] 실망스러운 리메이크 액션영화-모탈컴뱃
영화 모탈컴뱃이 리메이크 되어 개봉했어요.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1편과 2편은 그 당시 먼저 등장했던 격투게임을 기반으로 했는데요.
실사로 찍어 표현했던 게임 상의 액션 모습이 사실감이 있어 인기를 끌었죠.
영화는 CG로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해서 이야기는 매력이 없었죠.
그 당시에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늘 주로 기용해 만들었었는데 이번 리메이크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을 내세워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성공적인것 같지는 않네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좋지 않았어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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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링컨의 딜레마> 공식 예고편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또 다른 모습. 데이비드 S. 레이놀즈의 원작에서 영감을 얻은 '링컨의 딜레마' - Lincoln's Dilemma가 2월 18일 Apple TV+에서 공개됩니다. apple.co/_LincolnsDilemma 4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링컨의 딜레마' - Lincoln's Dilemma는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희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대한 해방자'라고 불리는 링컨을 미묘하게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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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쁘띠 마망> 메인 예고편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마리옹’과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온 ‘넬리’.
어린시절 엄마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서
‘넬리’는 엄마와 이름이 같은 동갑내기 ‘마리옹’을 만나게 된다.
단숨에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는 ‘넬리’와 ‘마리옹’!
하지만 ‘넬리’는 이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반짝이는 비밀을 알게 되는데…
“나 비밀이 있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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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 구경거리 악동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슈퍼스타
Lord, I'm doing all I can, To be a better man.
Robbie Williams - Better Man
안녕하세요! 지난 3월 20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배러맨>을 개봉 전 관람하게 되어 후기를 작성해보려 합니다.
<배러맨>은 뮤지컬 영화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로, 국내에서는 <위대한 쇼맨>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그레이시(Michael Gracey)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또한 로비 윌리엄스가 직접 로비 윌리엄스 역의 목소리 연기를 수행했다는 점도 알고 계시면 좋을 관람 포인트입니다.
<배러맨>은 "영국 앨범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국인 솔로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로비 윌리엄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합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선 팝스타의 모습과 동시에 그의 성장, 방황, 중독과 불안의 과정을 비추며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무대 아래에서의 시간들을 보여줍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어린 나이에 5인조 밴드 테이크 댓의 보컬로 가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팀의 막내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던 그는 갖은 논란과 잦은 갈등으로 인해 결성 6년 만에 팀에서 탈퇴합니다. 이후 도전한 솔로 활동에서 그는 크게 성공했고, 마침내 인생의 목표였던 넵워스에서의 공연까지 성취하게 됩니다. 멋대로 살아도 성공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인생 이면에는 끊임없는 자기혐오와의 싸움이 있었는데요. 작중에서는 섬세한 심리 묘사로 이를 다루어냅니다.
<배러맨>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인 로비 윌리엄스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했다는 점이었는데요. 영화 속 모든 장면이 거의 실제와 유사하게 연출되어 있는데, 오로지 로비 윌리엄스만이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냅니다. 그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가면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밝은 조명들이 집중된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의 구경거리로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과 갈등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죠. 그가 어떤 상태고 무엇을 느끼는지와는 무관하게 늘 동일한 얼굴로 무대 위에 올라야 했으므로, 어쩌면 그는 스스로가 마치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요. 감독이 로비 윌리엄스에게 스스로 어떤 동물처럼 느껴지냐고 묻자, 그는 스스로가 공연하기 위해 무대에 끌려나온 원숭이 같다고 답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IV1QljKILs
<배러맨>에선 로비 윌리엄스를 그리 대단한 위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어디서든 눈에 띄는 끼를 지닌 능청꾸러기로 묘사했죠. 그렇기에 관객들은 그저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스타의 길을 걸으며 느꼈던 거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에 더 공감하고 이입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종일관 그를 연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로비 윌리엄스의 반성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을 포함하며, 좀처럼 미화하거나 호소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영상과 대비되는 담백하고 진솔한 스토리. <배러맨>이 매력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뮤지컬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화를 관람하며 <보헤미안 랩소디>가 떠올랐습니다. 로비 윌리엄스의 히트곡들로 펼쳐지는 뮤지컬의 장면들은, <위대한 쇼맨>을 통해 기대감을 가진 채로 <배러맨>을 관람할 관객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줍니다. “테이크 댓”의 무대 의상을 그대로 구현한 의상들이나 역동적인 장면들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긴 설명을 읽는 것보단 역시 직접 관람하는 것이 더 확실히 느껴지겠죠?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작품은 <배러맨>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3년 넷플릭스에는 <로비 윌리엄스>라는 이름의 4부작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습니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작품으로, <배러맨>을 통해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해당 다큐멘터리를 영화 관람 전 미리, 혹은 관람 후에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 진가를 발휘하는, 울림이 있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90년대 영국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 로비 윌리엄스에 대해 아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영화, <배러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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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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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다.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 나도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노래처럼 내가 요절할 천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상, 랭보, 모짜르트, 에곤 쉴레처럼. 어쩌면 나도,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나도 사실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일지 모르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이제 요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젊지도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기가 막히게 똑똑하지도,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내가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참 쉽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듣고 자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반드시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남들 만큼 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지겨운 레토릭이 아직까지도 반복되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내가 실망스럽다가, 때로는 남들보다 못한 내가 서러워 남들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싶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 싶을 때, 우리가 찾는 건 바로 기적.
나 빼고 다 특별한 세상
엔칸토는 이민자 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평화로운 마을의 중심에는 마드리갈 가족이 있는데, 마드리갈 가족은 모두 한 가지씩 특별한 마법을 쓸 줄 안다. 딱 한 사람, 미라벨만 빼고.
미라벨은 힘이 세서 무엇이든 들 수 있는 루이자, 꽃을 피워내는 이사벨라,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돌로레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카밀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페파 이모, 음식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해주는 엄마, 그리고 마법은 못 쓰지만 마드리갈 가족과 결혼한 친인척들과 함께 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문이 열리고 방이 생기는데, 왠일인지 미라벨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미라벨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 가족에게 새로 마법을 받게 될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라벨과 아기방에서 같이 지내던 안토니오다. 안토니오가 문을 열자 넓고 넓은 자연이 펼쳐진다.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생긴 것. 미라벨은 침울해진다.
그때 미라벨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집(까시타)이 갈라지며 흔들린다.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할머니 알마는 미라벨이 마법을 받은 안토니오를 시샘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렇게 미라벨은 모두가 특별한 세상에서 소외된다.
배척의 기억
까시타가 흔들린 뒤 미라벨은 루이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캐치한다. 사실 루이자는 사실 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언제나 불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자의 능력은 은유적이며 수많은 K-장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이다. 예쁜 꽃을 피워내며 뭇 마을 남성들의 이상형, '완벽한 여성' 이미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사벨라도 루이자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실망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알마가 처음 엔칸토에 들어와 살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알마와 남편 페드로는 전쟁 때문에 세쌍둥이 아기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선다. 어쩌면 첫 번째 배척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은 이민자이고, 본토에서 쫓겨나는 신세이니 이미 수차례 배척받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적군에게 쫓기는 이들은 가시적이고 확실한 배척을 경험한다.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알마에게 마법의 힘이 생긴 것은 힘이 있는 자를 쉽게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터. 알마는 이 힘을 마을(이민자들이 모여 사는)에 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 마음도 처음에는 선의였으나 점차 강박적으로 바뀐다. 안토니오가 동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자 '이 능력을 어떻게 쓸지'부터 생각하니 말이다.
마을의 운명이 마드리갈 가족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배척받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마을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가족을 위하여'라는 알마의 집착은 능력을 가진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내려온다.
거시적으로는 국가적인 배척에 대한 공포이지만 미시적으로는 가족 내 배척에 대한 공포이다. 힘들어도 마을의 궂은 일을 다 해내는 루이자, 언제나 웃으며 꽃을 피워주어야 하는 이사벨라, 맑은 날을 유지하기 위해 기분을 통제해야 하는 페파 등 모두가 그렇다. 마법 능력이 없는 미라벨은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배척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기 딱 좋은, 약간 정신이 나간 모양새의 브루노.
브루노에 대해 말하면 안 돼
브루노는 마드리갈 가족의 유일한 우환이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는데도 마드리갈 가족은 쾌활해 보인다. 비결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는 것. 프로이트 식으로 보면 '억압'한다. 아예 모르는 척 해버리면 편하다.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브루노는 가족 내에서 잊힌(이라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브루노의 능력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신내림 같다. 신내림이 과학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병을 앓을 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고,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적으로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 같다는 의미이다. 엔칸토의 배경이 남미의 어느 지역이니 카톨릭 문화에서는 악마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람이 있는 가정은 배척당하기 쉽다.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은 가족 내에서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장애인 시위의 정당성이 도마에 올랐다. 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느냐는 비난이 난무했다. 그동안 장애인 집회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게들 원하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격한 시위는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우리나라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브루노는 자발적으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브루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거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로,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다.
마법은 못 써도 궁금한 건 많은 미라벨은 가족들 몰래 브루노의 방에 간다. 수많은 계단과 무시무시한 동굴을 헤쳐 나간 뒤 발견한 환영 속에서는 무너져내리는 까시타와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브루노 역시 까시따가 무너지는 환영을 봤다. 미라벨의 말이 묵살당하듯 그 누구도 브루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정신 나간 형제이고 미라벨은 재능 없는 자식이다.
우리가 찾았던 기적
미라벨은 까시타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한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고, 브루노와 함께.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두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이 마법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자아를 깨달아갈수록 까시타는 위태로워진다.
결국 브루노의 예언은 이루어진다. 까시타는 무너지고, 가족들은 마법의 힘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미라벨은 집을 나간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못나고 부족한, 가족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자신 때문에.
마드리갈 가족은 엔칸토를 이끌어갔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마법이 그들의 모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동안 마드리갈 가족의 신세를 져 왔던 엔칸토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합심하여 마드리갈 가족의 집을 짓는다. 루이자의 괴력을 쓰지도, 이사벨라가 예쁜 꽃으로 집을 꾸미지도 않고 그저 서로의 힘으로. 더 이상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집이 다 지어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이 열린다.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미라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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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수많은 실패들을 해 왔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실패 그 자체이기 보다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싶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거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기다렸던 기적이 무엇이었을까. 로또 당첨이었나.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지금 무사히 살아있고 내일도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사실이 기적인가 싶다. 순순히 열려 주지 않았던 문을 미라벨이 스스로 여는 것이 기적이고, 특별한 능력이 있든 없든 환대하는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아서,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모든 보통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다.
관람 포인트
스토리나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OST가 당신의 마음을 훔칠 것이다. 루이자가 힙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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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1 / American Horror Story season1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1 / American Horror Story
와이우먼킬 이후로 정붙일만한 미드를 못찾아서 'YOU'만 3-4번째 보던 중
유튜브에서 우연히 아호스 시즌8 소개영상을 보고 궁금해져서 보게된
아호스 시즌 1.
진짜 정말 재밌고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 대략적인 줄거리 /
가운데 있는 남편 하먼이 바람을 피운 현장을 보게 된 왼쪽에 있는 와이프 비비안.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잘하겠다고 빌며,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로 엘에이로 이사를 가자고 한다.
그들이 이사온 집은 다른 집보다 싸게 나온 1920년대 풍의 고오급 주택으로
새로 시작하기에 적합한 집이었다.
근데, 여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웃집 사람들도 이상하고, 막 모르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집에 들어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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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
(개인적으로)
1. 특색있는 캐릭터들
2. 계속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
( 새로 누군가가 나타나면 "쟤는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
3. 이 집에 얽혀 있는 미스테리한 이야기들이 궁금증을 자극함
4. 비비안의 아기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5. 테이트와 올리비아의 관계
6. 그래서 결말이 뭔데? (이게 너무 궁금해서 계속 보게된다)
이 드라마에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참 많은데
그 중 당연 최고는 테이트다.
테이트는 주인공 하먼박사한테 상담받는 고등학생이다.
싸이코적 기질이 있지만 하먼의 딸인 바이올렛과 친해지며
본인이 그 기질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테이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이코적 기질 뒤에 숨어있는 따뜻함때문이랄까,,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으니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드라마를 통해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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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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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SYNOPSIS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도경을 잃고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난 명지, 같은 사고로 동생을 잃은 지은, 단짝 친구와 이별한 해수. 남겨진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상실의 슬픔 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따뜻한 희망의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동명 소설 원작.
PROGRAM NOTE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문학적 기품을 바탕으로, 언어가 중요한 영화다. 이는 설혹 원작 정보를 알지 못한 채 작품을 접한 관객일지라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바, 중심인물들부터가 글쓰기 혹은 책과 관련된다. 하지만 그들조차 좀처럼 언어화하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편지라는 형식으로나마 그들이 가까스로 발화에 이르는 과정이 영화의 얼개를 이룬다. 여기에 마비 내지 부동의 자세에서 활강에 성공하기까지 점증하는 신체들의 이미지가 대구 된다. 허리께에서 시작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발진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처럼 일견 관념적으로도 느껴지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광주와 바르샤바라는 구체적 지명과 풍경이 제시되고, 마침내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발화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지난 10여년 간의 한국 상황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특정한 어느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터, 관객과 영화 속 인물들 간의 연결이 감정이입을 넘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장소와 시대와 디에게시스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트라우마들의 아픔을 공유한다는 감각이 뚜렷하게 환기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태양을 바라보는 인물들이 교차편집되며 서로 간 동시성이 확보되고 이를 목도하는 관객 또한 그들의 애도와 회복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연대라는 것은 이렇게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이유미]
명지(박하선)가 사는 아파트로, 두 개의 소음이 동시에 날아든다. 전화를 알리는 휴대전화의 진동 소리와, 아파트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도난 경보음. 경고음과 함께 들려온 소식은 부고를 알렸다. 경고음은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소리 또한 인생에 갑자기 날아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전혀 다른 곳이 되게 한다.
남편의 생명을 삼킨 물을 욕조에 받았다가 흘려보내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챙겨주시는 반찬은 냉장고에 그냥 쌓이기만 하면서, 명지의 세계 또한 달라져 있다. 영화 초반의 이러한 장면들은 짧은 호흡으로 뚝뚝 끊긴다. 이것은 상실 이후의 일상과 닮아 있다. 긴 호흡으로 뭘 하기 어렵다. 아니, 그냥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조차 긴 호흡으로 하기가 어렵다.
아주 작은 연결고리만으로 일상이 툭툭 끊어지기 때문이다. 잔뜩 삭아버린 실처럼. 초코 아이스크림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던 어떤 날을 떠올리고, 테이블 모서리만 어루만져도 따뜻한 기억을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내내 명지의 아파트 조명은 꺼져 있어, 따뜻한 빛으로 가득했던 과거와 더욱 대비된다. 불이 꺼져버린 집처럼, 영혼 어딘가의 불이 꺼진 것처럼.
조금이라도 연결고리가 적게 느껴질 곳으로, 명지를 불러낸 사촌언니의 다정한 초대를 받아 폴란드 바르샤바로 향하지만, 명지가 가는 모든 곳에 명지의 상처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날아들었던 비보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원인불명의 발진이 몸에 붉게 자라난다. 우리 삶에 원인불명으로 찾아오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원인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 같지만, 우리는 또렷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더욱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 속에서, 가장 황홀한 꿈은 그만큼 가장 슬픈 꿈이 된다. 부재한 누군가가 등장하는 꿈은 다 그렇다. 그런 세상에서는, 잘 지내냐는 짧은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도 있다. 전화를 해보자는 별 거 아닌 말이, 작고 유쾌한 말이 폐부 깊숙한 곳을 푹 찌를 수도 있다.
이들의 세상은 지독한 상실의 아픔에 둘러싸여 있어서다. 이건 어쩌면 물에 빠지는 것과도 비슷해서, 머리칼 올올이 깊숙한 곳까지 온통 나를 적시고 도저히 숨을 쉴 수 없게끔 괴롭힌다. 도경과 지용이 떠난 세계에 남겨진 이들은, 도경과 지용의 마지막을 앗아간 것과 비슷한 고통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인물들은 움직인다. 모든 단어에 추억이 묻어 있고, 딱 그만큼의 슬픔이 묻어나는 세상에서도. 명지가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듯, 지용을 잃은 지은과 해수도 자기 자리에서 힘차게 움직이려 애를 써본다. 인물들이 이처럼 상실 너머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진다. 해일처럼 밀려와 관객을 덮는다.
왜 하필 폴란드 바르샤바였으며, 왜 하필 광주였나? 죽음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도시. 죽음을 잘 기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상실 이후의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임을 잘 아는 사람들의 도시. 충분히 위로되지 못한 슬픔은 끝까지 그 눈을 뻣뻣하게 부릅뜨고 살아 나를 따라온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버린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의 무수한 슬픔에 시선을 보내는 곳.
그곳에서 만난 현석(김남희)과 명지 사이, 덩그러니 질문 하나가 놓인다. “그때 그 손을 놓지 않았다면 우린 지금 같이 있을까?” 현석이 명지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명지가 도경을 생각하며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원인불명의 상황에서, 남겨진 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말 중에 이 질문이 있다.
이 질문은 웅덩이가 되어, 인물들이 겪은 제각각의 상실이 여기에 고인다. 그리고 거기서 이들은 만난다. 명지는 이 질문이 도경과 지용 사이에도 놓여 있었음을 깨닫는다. 놓친 손이 있지만, 또 힘차게 움직여 닿으려고 애쓰는 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편지를 통해 지은과 명지의 손이 마주한 순간, 명지도 손을 움직여 메일을 써 본다. 부치지 못해도 괜찮다. 너무 어려워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조금은 괜찮다. <벌새>의 영지 선생님처럼 말해 본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만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고.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시리가 남긴 그 새삼스러운 질문은 어쩌면, 말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끝에서, 명지는 마침내 햇빛을 마주본다. 밖에서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 외에는 좀처럼 밝아지는 일 없는 어둑한 집에서, 오렌지색 노을과 눈을 마주친다. 슬픔은 여전하겠지만, 명지의 아파트가 이전처럼 밝고 따뜻한 빛으로 차오르려면 한참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몸으로 마음으로 상실을 겪어내고 있는 지은도 명지도, 살아서 그 빛과 눈을 마주한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추고, “아름다웠던 그 기억에서 만나” 또 손을 뻗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3.08.27. 16:00-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3관 (상영코드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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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보다 포용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것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부딪히는 순간에 받았던 충격을 기억한다.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제도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분노했다. 나는 결혼과 출산이 생애주기 중 꼭 거쳐가게 되는 어떤 대단한 경험이나 의무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신중단’이라는 단어는 임신이 여성 신체에 일어나는 어떤 일시적인 현상임을 시사한다. 나의 신체를 사회가 아닌 나의 시점, 내가 통제할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 순간 알게 되는 것들은 어떤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화가 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정치의 힘이, 여기 바로 이 자리에 살아있는 나의 신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앵그리 애니>라는 제목은 분노의 감정을 많이 표현하지 않는 영화 속 애니와는 다소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손을 뻗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배신감과 너무나 많은 질문은 나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로르 칼라미 감독의 <앵그리 애니>는 이미 두 아이를 키우고 있어 임신을 원치 않고, 그래서 낙태 시술을 받으러 온 애니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병원이 아니라 서점에 들어선 그녀는 의사와의 면담 대신 ‘모임’ 참석 안내를 받고 뒷방으로 들어선다. 알음알음 정보가 공유되는 듯한 이 모임은 낙태 시술의 합법화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누구에게나 무료로 의사가 집도하는 낙태 시술을 제공한다. 그리고 활동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비밀 유지도 필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과정, 그러니까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임신중단 이후의 이야기에 무게를 두었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후 애니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은 친구가 낙태 시술 도중 사망하는 사건에 직면한다. 너무나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과 같은 문제를 마주했지만 정보와 환경적 조건의 부재로 인한 죽음을 마주한 것이다. 그래서 애니는 분노에 그치지 않고 합법화를 위한 활동에 동참하기로 한다. 그렇게 <앵그리 애니>는 대양에 홀로 된 섬처럼 동떨어진 개인적 경험인 줄로만 알았던 임신중단이, 사실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이 있는 문제라고 말한다.
<앵그리 애니>는 처음 제목을 알았을 때 어떤 내용인지 유추하기가 다소 어렵다. 언뜻 생각하면 ‘애니’라는 인물의 드라마나 성장담을 다룬 영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애니는 왜 화가 났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보기 시작한 영화는 반대로 현실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가령 옆집에 살던 친구가 애니와 같은 이유로 허망하게 죽게 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울지언정 임신중단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선택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전달한다. 인력이 부족할 만큼 많은 여자들이 모임에 찾아오기 시작해 서점에 발 디딜 틈도 없게 되는 상황에서는 ‘정말로 저렇게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임신중단을 선택할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말 ‘다양하고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죽고 있다. 제도화를 하면 의료 시술이 서비스처럼 변질될 것이라는 핑계는, 그 여성들의 존재를 가린다. 제도가 없으면 보호도 없고, 위험한 방식으로 임신을 중단하는 시도는 계속된다. 여성들은 과거에도 그렇게 죽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고, 현재에도 통계 속 숫자로만 겨우 대변할 수 있는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스펙터클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주지 않고도, <앵그리 애니>는 관객의 현실까지 뒤따라온다. 그리고 종결이 아닌 확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관객 각각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 임신중단을 다루는 다른 영화들처럼 임신중단을 간절히 원하는 여성 주인공의 등 뒤에 붙어 그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을 담아내기보다는 공동체 안에 들어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임을 알도록 해준다. <앵그리 애니>는 그렇게 자신만의 따스함과 포용력으로 관객의 현실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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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9] 실망스러운 리메이크 액션영화-모탈컴뱃
영화 모탈컴뱃이 리메이크 되어 개봉했어요.
9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1편과 2편은 그 당시 먼저 등장했던 격투게임을 기반으로 했는데요.
실사로 찍어 표현했던 게임 상의 액션 모습이 사실감이 있어 인기를 끌었죠.
영화는 CG로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해서 이야기는 매력이 없었죠.
그 당시에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늘 주로 기용해 만들었었는데 이번 리메이크도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을 내세워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성공적인것 같지는 않네요.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좋지 않았어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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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링컨의 딜레마> 공식 예고편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또 다른 모습. 데이비드 S. 레이놀즈의 원작에서 영감을 얻은 '링컨의 딜레마' - Lincoln's Dilemma가 2월 18일 Apple TV+에서 공개됩니다. apple.co/_LincolnsDilemma 4부작 다큐멘터리 시리즈 '링컨의 딜레마' - Lincoln's Dilemma는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견해와 희귀한 자료를 바탕으로 '위대한 해방자'라고 불리는 링컨을 미묘하게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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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쁘띠 마망> 메인 예고편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엄마 ‘마리옹’과 함께 시골집으로 내려온 ‘넬리’.
어린시절 엄마의 추억이 깃든 그곳에서
‘넬리’는 엄마와 이름이 같은 동갑내기 ‘마리옹’을 만나게 된다.
단숨에 서로에게 친밀함을 느끼는 ‘넬리’와 ‘마리옹’!
하지만 ‘넬리’는 이 우연한 만남 속에서 반짝이는 비밀을 알게 되는데…
“나 비밀이 있어.
내 비밀이면서, 네 비밀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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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회] 구경거리 악동이 아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슈퍼스타
Lord, I'm doing all I can, To be a better man.
Robbie Williams - Better Man
안녕하세요! 지난 3월 20일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배러맨>을 개봉 전 관람하게 되어 후기를 작성해보려 합니다.
<배러맨>은 뮤지컬 영화이자 영국의 전설적인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전기 영화로, 국내에서는 <위대한 쇼맨>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그레이시(Michael Gracey)가 감독을 맡았습니다. 또한 로비 윌리엄스가 직접 로비 윌리엄스 역의 목소리 연기를 수행했다는 점도 알고 계시면 좋을 관람 포인트입니다.
<배러맨>은 "영국 앨범 차트 역사상 가장 성공한 영국인 솔로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로비 윌리엄스의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합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선 팝스타의 모습과 동시에 그의 성장, 방황, 중독과 불안의 과정을 비추며 사람들이 알지 못했을 무대 아래에서의 시간들을 보여줍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어린 나이에 5인조 밴드 테이크 댓의 보컬로 가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팀의 막내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리던 그는 갖은 논란과 잦은 갈등으로 인해 결성 6년 만에 팀에서 탈퇴합니다. 이후 도전한 솔로 활동에서 그는 크게 성공했고, 마침내 인생의 목표였던 넵워스에서의 공연까지 성취하게 됩니다. 멋대로 살아도 성공이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인생 이면에는 끊임없는 자기혐오와의 싸움이 있었는데요. 작중에서는 섬세한 심리 묘사로 이를 다루어냅니다.
<배러맨>에서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인 로비 윌리엄스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했다는 점이었는데요. 영화 속 모든 장면이 거의 실제와 유사하게 연출되어 있는데, 오로지 로비 윌리엄스만이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의문을 자아냅니다. 그를 원숭이의 모습으로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가면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로비 윌리엄스는 밝은 조명들이 집중된 화려한 인생을 살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어린 나이부터 사람들의 구경거리로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과 갈등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죠. 그가 어떤 상태고 무엇을 느끼는지와는 무관하게 늘 동일한 얼굴로 무대 위에 올라야 했으므로, 어쩌면 그는 스스로가 마치 동물원 우리 속의 원숭이처럼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로비 윌리엄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데요. 감독이 로비 윌리엄스에게 스스로 어떤 동물처럼 느껴지냐고 묻자, 그는 스스로가 공연하기 위해 무대에 끌려나온 원숭이 같다고 답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IV1QljKILs
<배러맨>에선 로비 윌리엄스를 그리 대단한 위인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어디서든 눈에 띄는 끼를 지닌 능청꾸러기로 묘사했죠. 그렇기에 관객들은 그저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그가 스타의 길을 걸으며 느꼈던 거대한 부담감과 불안감에 더 공감하고 이입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종일관 그를 연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로비 윌리엄스의 반성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을 포함하며, 좀처럼 미화하거나 호소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영상과 대비되는 담백하고 진솔한 스토리. <배러맨>이 매력적인 이유일 수도 있겠습니다.
뮤지컬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죠! 영화를 관람하며 <보헤미안 랩소디>가 떠올랐습니다. 로비 윌리엄스의 히트곡들로 펼쳐지는 뮤지컬의 장면들은, <위대한 쇼맨>을 통해 기대감을 가진 채로 <배러맨>을 관람할 관객들을 충분히 만족시켜 줍니다. “테이크 댓”의 무대 의상을 그대로 구현한 의상들이나 역동적인 장면들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긴 설명을 읽는 것보단 역시 직접 관람하는 것이 더 확실히 느껴지겠죠?
로비 윌리엄스의 삶을 다룬 작품은 <배러맨>이 처음은 아닙니다. 2023년 넷플릭스에는 <로비 윌리엄스>라는 이름의 4부작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었습니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작품으로, <배러맨>을 통해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해당 다큐멘터리를 영화 관람 전 미리, 혹은 관람 후에 한 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 진가를 발휘하는, 울림이 있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90년대 영국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 로비 윌리엄스에 대해 아시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영화, <배러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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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위한 기적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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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랬다. 스무살 남짓하던 시절, 나도 체리필터의 'Happy day'라는 노래처럼 내가 요절할 천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이상, 랭보, 모짜르트, 에곤 쉴레처럼. 어쩌면 나도,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나도 사실 세상이 몰라주는 천재일지 모르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이제 요절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젊지도 않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기가 막히게 똑똑하지도,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걸 안다. 내가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참 쉽게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듣고 자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반드시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남들 만큼 해서는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는 지겨운 레토릭이 아직까지도 반복되므로 우리 삶의 목표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내가 실망스럽다가, 때로는 남들보다 못한 내가 서러워 남들만큼이라도 살았으면 싶다.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럴까 싶을 때, 우리가 찾는 건 바로 기적.
나 빼고 다 특별한 세상
엔칸토는 이민자 가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이 평화로운 마을의 중심에는 마드리갈 가족이 있는데, 마드리갈 가족은 모두 한 가지씩 특별한 마법을 쓸 줄 안다. 딱 한 사람, 미라벨만 빼고.
미라벨은 힘이 세서 무엇이든 들 수 있는 루이자, 꽃을 피워내는 이사벨라, 무엇이든 들을 수 있는 돌로레스,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카밀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페파 이모, 음식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해주는 엄마, 그리고 마법은 못 쓰지만 마드리갈 가족과 결혼한 친인척들과 함께 산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문이 열리고 방이 생기는데, 왠일인지 미라벨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
미라벨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고 평화로운 이 가족에게 새로 마법을 받게 될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미라벨과 아기방에서 같이 지내던 안토니오다. 안토니오가 문을 열자 넓고 넓은 자연이 펼쳐진다. 동물과 의사소통하는 능력이 생긴 것. 미라벨은 침울해진다.
그때 미라벨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다. 집(까시타)이 갈라지며 흔들린다.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할머니 알마는 미라벨이 마법을 받은 안토니오를 시샘한다고만 생각한다. 그렇게 미라벨은 모두가 특별한 세상에서 소외된다.
배척의 기억
까시타가 흔들린 뒤 미라벨은 루이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캐치한다. 사실 루이자는 사실 힘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무거운 것을 들지 못할까봐, 실수할까봐 언제나 불안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자의 능력은 은유적이며 수많은 K-장녀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사벨라도 마찬가지이다. 예쁜 꽃을 피워내며 뭇 마을 남성들의 이상형, '완벽한 여성' 이미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이사벨라도 루이자와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실망할까봐' 전전긍긍한다. 원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까지 해야 할 판이다.
알마가 처음 엔칸토에 들어와 살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알마와 남편 페드로는 전쟁 때문에 세쌍둥이 아기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선다. 어쩌면 첫 번째 배척이 아닐 수도 있다. 이들은 이민자이고, 본토에서 쫓겨나는 신세이니 이미 수차례 배척받은 역사가 있을 것이다. 적군에게 쫓기는 이들은 가시적이고 확실한 배척을 경험한다.
남편을 잃고 오열하는 알마에게 마법의 힘이 생긴 것은 힘이 있는 자를 쉽게 쫓아내지 못하기 때문일 터. 알마는 이 힘을 마을(이민자들이 모여 사는)에 써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 마음도 처음에는 선의였으나 점차 강박적으로 바뀐다. 안토니오가 동물과 대화하는 능력을 얻게 되자 '이 능력을 어떻게 쓸지'부터 생각하니 말이다.
마을의 운명이 마드리갈 가족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너무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배척받음'이라는 트라우마는 가족과 마을을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가족을 위하여'라는 알마의 집착은 능력을 가진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내려온다.
거시적으로는 국가적인 배척에 대한 공포이지만 미시적으로는 가족 내 배척에 대한 공포이다. 힘들어도 마을의 궂은 일을 다 해내는 루이자, 언제나 웃으며 꽃을 피워주어야 하는 이사벨라, 맑은 날을 유지하기 위해 기분을 통제해야 하는 페파 등 모두가 그렇다. 마법 능력이 없는 미라벨은 마법을 못 쓴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배척된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기 딱 좋은, 약간 정신이 나간 모양새의 브루노.
브루노에 대해 말하면 안 돼
브루노는 마드리갈 가족의 유일한 우환이다. 집안에 걱정거리가 있는데도 마드리갈 가족은 쾌활해 보인다. 비결은 그것에 대해 함구하는 것. 프로이트 식으로 보면 '억압'한다. 아예 모르는 척 해버리면 편하다.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브루노는 가족 내에서 잊힌(이라고 하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브루노의 능력은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신내림 같다. 신내림이 과학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신병을 앓을 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하고, 그렇지 않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회통념적으로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 같다는 의미이다. 엔칸토의 배경이 남미의 어느 지역이니 카톨릭 문화에서는 악마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미친 사람이 있는 가정은 배척당하기 쉽다.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은 가족 내에서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얼마 전 장애인 시위의 정당성이 도마에 올랐다. 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느냐는 비난이 난무했다. 그동안 장애인 집회는 꾸준히 있어 왔다. 그렇게들 원하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격한 시위는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우리나라는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 브루노는 자발적으로 사라진다. 그 누구도 브루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거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로,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다.
마법은 못 써도 궁금한 건 많은 미라벨은 가족들 몰래 브루노의 방에 간다. 수많은 계단과 무시무시한 동굴을 헤쳐 나간 뒤 발견한 환영 속에서는 무너져내리는 까시타와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브루노 역시 까시따가 무너지는 환영을 봤다. 미라벨의 말이 묵살당하듯 그 누구도 브루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정신 나간 형제이고 미라벨은 재능 없는 자식이다.
우리가 찾았던 기적
미라벨은 까시타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혼자 동분서주한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고, 브루노와 함께. 공동체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두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들이 마법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질수록, 자아를 깨달아갈수록 까시타는 위태로워진다.
결국 브루노의 예언은 이루어진다. 까시타는 무너지고, 가족들은 마법의 힘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라 여긴 미라벨은 집을 나간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못나고 부족한, 가족들에게 피해만 입히는 자신 때문에.
마드리갈 가족은 엔칸토를 이끌어갔지만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마법이 그들의 모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그동안 마드리갈 가족의 신세를 져 왔던 엔칸토 마을 주민들이 모두 합심하여 마드리갈 가족의 집을 짓는다. 루이자의 괴력을 쓰지도, 이사벨라가 예쁜 꽃으로 집을 꾸미지도 않고 그저 서로의 힘으로. 더 이상은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집이 다 지어지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이 열린다. 문을 연 사람은 바로 미라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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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수많은 실패들을 해 왔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그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실패 그 자체이기 보다는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싶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나 자신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눈 앞에서 문이 닫히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거다.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기다렸던 기적이 무엇이었을까. 로또 당첨이었나.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지금 무사히 살아있고 내일도 기적적으로 살아있어 밥을 먹고 일을 한다는 사실이 기적인가 싶다. 순순히 열려 주지 않았던 문을 미라벨이 스스로 여는 것이 기적이고, 특별한 능력이 있든 없든 환대하는 마음이 기적을 만든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그 어떤 문도 열리지 않아서, 차라리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모든 보통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다.
관람 포인트
스토리나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OST가 당신의 마음을 훔칠 것이다. 루이자가 힙합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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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1 / American Horror Story season1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1 / American Horror Story
와이우먼킬 이후로 정붙일만한 미드를 못찾아서 'YOU'만 3-4번째 보던 중
유튜브에서 우연히 아호스 시즌8 소개영상을 보고 궁금해져서 보게된
아호스 시즌 1.
진짜 정말 재밌고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 대략적인 줄거리 /
가운데 있는 남편 하먼이 바람을 피운 현장을 보게 된 왼쪽에 있는 와이프 비비안.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잘하겠다고 빌며,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로 엘에이로 이사를 가자고 한다.
그들이 이사온 집은 다른 집보다 싸게 나온 1920년대 풍의 고오급 주택으로
새로 시작하기에 적합한 집이었다.
근데, 여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웃집 사람들도 이상하고, 막 모르는 사람들이 불쑥불쑥 집에 들어오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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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
(개인적으로)
1. 특색있는 캐릭터들
2. 계속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
( 새로 누군가가 나타나면 "쟤는 또 뭐야?"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
3. 이 집에 얽혀 있는 미스테리한 이야기들이 궁금증을 자극함
4. 비비안의 아기가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
5. 테이트와 올리비아의 관계
6. 그래서 결말이 뭔데? (이게 너무 궁금해서 계속 보게된다)
이 드라마에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참 많은데
그 중 당연 최고는 테이트다.
테이트는 주인공 하먼박사한테 상담받는 고등학생이다.
싸이코적 기질이 있지만 하먼의 딸인 바이올렛과 친해지며
본인이 그 기질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테이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사이코적 기질 뒤에 숨어있는 따뜻함때문이랄까,,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으니 그가 매력적인 이유는 드라마를 통해 확인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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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쿵푸팬더는 퀴어 영화인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등장으로 평가되는 1편, 매력적이고 유머러스한 빌런이나 주연들 간 깊어진 친밀감에 정들었던 2편. 그러나 많은 시리즈물이 그러하듯 <쿵푸팬더> 역시 편수가 늘수록 초기 영광을 따라잡지 못하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 시리즈의 전략은 언제나 간단하고 명확했다. 주인공만큼이나 매력적인 빌런들에게 주인공이 해내지 못하는 걸 죄다 맡겨버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
주인공 포에게 극단적으로 발랄한 성장 서사를 부여해 기존의 성장형/먼치킨 히어로 영화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지만, 그 부작용으로 무거운 원숙미가 극단적으로 부족해진다. 포는 입양아라는 사실도 생각 외로 잘 받아들이고 새로 찾은 친아빠와도 1초 만에 친해지는, 사실상 대디 이슈가 없어 더 드문 남성형 히어로다. 포를 대신해 타이렁과 솅 공작의 애증 어리고 가슴 아픈 개인사가 그 무게를 짊어진다. ‘기’를 운운하며 이야기를 포의 뿌리가 되는 팬더 마을과 영계까지 끌고 간 3편부터 약간 길을 잃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나마 우그웨이 대사부의 숙적인 카이를 등장시켜 ‘사연 많은 빌런’의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니 4편의 가장 큰 문제는 빌런의 존재감이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란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카멜레온의 속성을 차용한 디자인까지는 기존의 맹수들과 달랐던 2편의 우아한 솅 공작을 떠올리게 해 기대가 컸지만, 구멍이 많아도 너무 많은 카멜레온의 백그라운드 탓에 관객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카멜레온은 한미하고 천한 출신과 여자라는 점, 그리고 ‘작은 몸집’ 때문에 쿵푸 수련원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스터 시푸와 오인방의 맨티스가 있는데 정말로 작은 몸집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타이그리스와 바이퍼가 있는데 (물론 성비는 또 당연하게 구색 맞추는 척만 했지만) 여성으로서 쿵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게다가 그가 영계에서 불러낸 전작의 빌런들 중에는 분명 의미없이 소진된 캐릭터들이 있다. 일찍이 제 입으로 “쿵푸 실력으론 대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화력을 메꾸기 위해 제국주의 시작점의 상징인 대포를 택했던 솅 공작이나, 포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말미암아 영혼_삭제_진짜삭제_휴지통에서삭제 된 줄 알았던 카이가 ‘빌런 쿵푸 마스터’로 재등장하는 건 의아함만을 남긴다.
‘동아시아계’ 감독을 기용해 시리즈 자체의 전제가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던 노력도 무화되고, 포의 새로운 여정은 마치 바이킹처럼 배를 타고 먼 이국으로 나아가는 침범의 궤적을 따른다. 심지어 항구에서의 출항이 가능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쉽게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긴 러닝타임을 할애하는데, 이 이야기 구조는 전형적인 호메로스식 오디세이의 전통을 따른다(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오디세우스는 젊음 20년을 바치고서야 ‘출항’할 수 있었다).
그간 할리우드에서 뒤늦게 주목받기 시작한 아시안 배우들이 대거 기용되어 주연 자리에 앉긴 했지만, 결국 4편의 전반적인 얼개는 앵글로 아메리칸 관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설화로 ‘회귀’한 것이다.
아쉽고 부족한 개연성을 채워주는 건 이 영화를 퀴어 애니메이션 영화로 읽어볼 수 있다는 상상이다. 어쩌면 1편부터 차근차근 전개되어 온 퀴어 코드는 4편에서 포의 두 아버지들 - 양부 국수 장인 거위 핑과 살찐 판다 친부 리 아저씨 -의 기이한 동행으로써 드디어 만개하는데, 이들의 ‘함께 함’에 대한 포의 자연스러운 수용은 어쩐지 게이 부부가 사랑으로 키운 아들의 반응을 연상시킨다.
생각해보면 쿵푸팬더엔 처음부터 애들 보는 영웅 애니메이션과 사뭇 다른 무언가가 존재했다. 시작점에선 나 역시 자각 없는 초등 꼬꼬마였기에 ‘여전사’ 타이그리스에 기이할 정도로 끌리고 동일시하려는 나 자신을 좀 민망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16년 지나 추억의 애니메이션에서 ‘동족의 흔적‘을 비로소 발견했다고 느낀 퀴어 당사자로서 기쁘게 읽어낸 네 가지 증거들로 이 시리즈의 퀴어함을 논증해보고 싶다.
1. 쿵푸팬더에는 명시적 러브라인이 없다.
아픔을 딛고 성장해 마을, 국가, 세계의 영웅으로 차츰 몸집을 불려나가는 영웅의 서사엔 언제나 그의 애인(들)이 있다. 순애보거나 아니거나의 차이만 존재할 뿐. 에반게리온에도 이누야샤에도 배트맨에도 있는 사근사근하지만 강단 있는 여성 애인과 결정적일 때 터프한 남성 영웅의 조합이 <쿵푸팬더>엔 없다. 오히려 시종일관 터프한 타이그리스와 순둥하고 멍청한 포의 역전적 조합이 있긴 하지만, 2편에서 크레인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둘의 포옹을 ‘사랑의 시작점’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포옹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오해되던 타이그리스가 ‘도무지 진지할 수 없’는 조증 같던 포의 성장과 우정을 그리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포의 슬픔과 고뇌를 타이그리스가 진심을 담아 위로하며 서로의 영혼을 제대로 응시하기 시작한 장면이지, 안젤리나 졸리와 잭 블랙이 탈 쓰고 연기하는 동물들이 서로의 페로몬을 감지한 장면이 아니다.
게다가 ‘접촉’을 ‘독점적 연애’의 시작점으로 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헤테로-모노아모리-이성애적 세계관이 <쿵푸팬더>의 길거리엔 부재한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부부는 가끔 목격되지만 그들 사이 손잡거나 입 맞추는 애정행각이 단 한 번도 없고, 젊은/미혼의 커플로 보이는 이들이 없고, 실수로 서로를 터치했다가 얼굴 붉히며 가까워지는 클리셰적 썸의 단계가 없단 뜻이다. 아주 친밀해 보이는 동종의 동물 주민들의 젠더는 대부분 판별되지 않는다. 일단 크기부터 그들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고 서넛 이상의 친구 혹은 파트너들이 군집을 이뤄 몰려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여러 ‘분류’를 위한 경계는 의도적으로 흐려져있다. 반대로 모든 성애적 관계가 너무 표백된 탓에 이 풍경을 거의 무성적/무성애적 마을이라고 멋대로 희망회로 돌려 해석해도 좋을 지경이다.
헤테로 이성애 외의 모든 것을 비가시화시키는 미국발 애니메이션의 전통에 빗대어보자면 1편부터 꾸준히 모든 성애를 비가시화시켜온 쿵푸팬더의 때이른 시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2024년에 이르자 4편까지 나온 장수 시리즈는 도리어 ‘가장 PC한’ 그림을 ‘미리’ 준비해둔 선구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2. ‘커플’의 부재에 비해, ‘아빠들’ 사이의 퀴어한 동거/동행은 점점 더 도드라진다.
거위 핑과 팬더 리의 관계는 3편 막바지의 화해를 이룰 때부터 조금 묘했고, 4편 등장부터 본격적으로 묘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포는 양부와 친부를 통틀어 ’dads’라고 애정을 함뿍 담아 부르는데, 영미권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이라면 이 복수형 호칭이 그간 지칭해온 시트콤 속 나이 든 게이 커플을 즉각 세 쌍 이상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번 흠칫하고 이들이 영위하는 일상이 좀 과하게 노부부 바이브라는 데에서 두 번 흠칫하게 된다. 핑은 여느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 팔고, 리는 이걸 조금 돕긴 돕는데 철없고 느려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듯하고. 핑은 리를 면박주고 불안해하며 포를 걱정하고, 리는 핑의 호들갑을 유들유들 달래며 별일 없을 거라 하고. 당연히 스킨십은 없지만, 왜인지 길거리의 토끼 혹은 돼지 커플이 훨씬 더 담백해 보일 정도로 핑과 리 사이 거리감이 박살나있다.
슬슬 대놓고 장르 전환을 시도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이제 너무 썩어버린 동성애꾼인가 눈을 의심케 하는 평화로운 국수 가게 시퀀스가 지나고 나면 ‘아빠들’은 점점 더 의뭉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바로 다 큰 아들을 여전히 공동 걱정, 공동 양육, 공동 구원하기 위해 멀고 위험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 길 위에서 그들은 서로를 구해주고 투닥대며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포에 대한 애정으로 결속된 대안 가족이지만 이제는 포 없이도 포를 생각하며 즐거운 2인 관계를 유지하는 아빠들. 항구 위 벼랑의 술집에서도, 주니퍼 랜드의 위험천만한 성벽 위에서도 아빠들은 아들만큼이나 서로를 챙기는데, 역시 최소 50년을 함께 한 파트너 같은 신뢰와 과감함으로 빚은 액션이 반복된다.
포와 젠만큼이나 핑과 리의 버디무비가 이번 영화의 주요한 플롯이고, 두 아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와 할애된 시간이 주인공 못지않다는 걸 생각하면, 혹시 이 둘의 (변화해가는) 관계성에 관객이 그만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닐지?! ㅎㅎ(제발요)
3. 영화의 사제 관계는 언제나 사제 이상의 내밀함과 애틋함을 내포한다.
누구나 1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을 만한, 타이렁과 시푸의 벼락으로 시작해 마지막 일격으로 끝나는 비극적 재회. 그 시퀀스에서 타이렁은 몇십 년간 지하 감옥에 묶여 저주했다던 스승을 때리며 거의 눈으로 핥고 있고, 시푸는 갓난아기부터 먹이고 키운 ‘그 애’를 힘껏 사랑했던(하는) 기억을 떨칠 수 없어 치명타를 모조리 맞아주며 애달파한다. 쓰러진 시푸가 후회를 말하자 타이렁은 아주 크게 흔들리고, 바로 다음 순간 타자의 개입이 없었다면 시푸를 거의 용서할 뻔한다.
유서 깊은 중국 무협지들이 웬만한 BL 뺨을 후드려갈기는 남남 간의 우정 아닌 사랑 같은 우정을 얼마나 고전적으로 묘사했는지, 그 명맥을 이은 근현대 작가들 역시 예술적으로 섹슈얼하고 질척이는 동성의 나이차 많은 사제 관계를 놓지 않고 무협BL이란 혼종까지 만들어낸다. 그리스에 사제-스폰서-유사 부자 관계를 맺는 미소년과 중년 남성이 있었다면 중국에는 무협 게이가 있었던 셈인데, 쿵푸팬더의 요상하게 질척이는 사제/유사 부모 관계는 이 두 갈래 문화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일 거라고 혼자만의 사교적 해석을 해본다.
카멜레온과 젠, 젠과 한의 삼각관계 역시 만만치 않다. 스토리텔러의 역량이나 시간 배분에 조금 부족함이 있었을 뿐 두 스승 역시 ‘악한 짓을 영원히 같이 해줄 줄 알았던 너’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제자 젠에게 못마땅함을 표한다. 젠은 둘 다에게 죄책감을 포함한 복잡시러운 감정을 품고 있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린다. 첫 편에서 시푸와 타이렁이 보여준 아주 끈적하고 집착적인 애증이 4편에선 카멜레온과 젠과 한을 통해 재연된 것이다.
특히 카멜레온과 젠을 통해, 몇천 년 간 남성 중심적이었던 무술 세계와 그에 대한 문헌/미디어 묘사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또한 남남 간 호모섹슈얼한 우정의 배타성과 상투성에서 벗어나, 여성과 여성의 상호 협력/배신/질시와 애착을 다루려 했다는 점을 조금 더 높이 쳐주고 싶다. 16년 된 시리즈가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고 (남의 나라 거 죄다 베껴왔으니 응당 그래야겠지만) 최선을 다해 올바른 트렌디함까지 챙긴 모범 사례로 볼 수 있겠다.
4. 한이라는 젠더뉴트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쿵푸팬더>의 주연급 동물들은 대체로 성별이 잘 구분되는 외모/목소리 지표를 가졌지만, 젠의 길거리 스승이자 좀도둑 소굴의 왕인 아르마딜로 한은 도통 성별을 패싱할 수 없는 외관이다. 때문에 목소리나 젠과 맺는 관계를 보고 여성 인물로 어림짐작했다. 이 캐릭터의 성우가 키호이콴이라는 사실을 읽기 전까지는… 영화 보는 동안엔 아주 잠깐의 혼란 끝에 그를 중년 여성으로 추측하곤 카멜레온-젠 다음 하나의 지렛대를 더 끼워 넣어 레즈비언 삼각관계;로 냠냠쩝쩝 해독할 결심에 신나 있었는데 이럴 수가… 하지만 결론적으론 키호이콴의 높고 짹짹대는 목소리가 한이라는 캐릭터의, 이 영화의 (조금은 허술한) 텍스트를 풍부히 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수수께끼 같은 젠더/섹슈얼리티의 소유자인 한은 1편부터 꾸준히 거슬렸던 몇몇 여성 캐릭터의 디자인에 대한 아쉬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준다. 바이퍼의 속눈썹과 머리 꽃 장식,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3편 팬더 마을의 메이메이의 전형적인 꾸밈이나 ‘여성스러운’ 모션들, 이번 4편의 젠이 보여준 - 어느 정도 <주토피아>의 닉&주디를 반분해 섞은 듯한, 그러나 - 허리만은 잘록하다거나 역시 속눈썹은 길다든가 하는 전형적인 여성 신체 이미지의 재현. 더 나아간다면 루시 리우와 안젤리나 졸리라는 할리우드의 대표적 아이콘들이 그간 고수해온/기대받아온 이미지(그들이 이 시리즈에 0순위로 캐스팅된 이유기도 한)를 조심스럽게 파쇄하는 가능성으로 이 젠더플루이드적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한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목소리는 아콰피나가 녹음한 젠의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와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물론 <쿵푸팬더> 시리즈가 대놓고 ‘퀴어를 긍정’한다거나 정치적으로 정교하고 선명한 의도를 가진 영화는 아니다. 다만 이 시리즈는 (마치 일틱이란 ‘칭찬’ 들으면 어쩔 도리 없이 안도하는 퀴어들처럼) 은은하게 또 자연스럽게, 퀴어를 퀴어같지 않게, 그냥 섞여든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데에 열심이라고 느꼈다. 정신 산만하게 만드는 말재주와 푸짐하게 스크린 반 이상을 채우는 비주얼이 장점인 포가 제공하는 화려한 액션에 넋놓다 보면, 달리는 포 옆에서 손잡고 걸어가다 깜짝 놀라는 선량한 돼지 주민 1&2가 둘 다 남자로 패싱되는 차림새든 말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날 버렸녜 어쨌녜 서로 지지고 볶고 울고 짜는 젠더리스한 조연들이 연인보다 훨씬 점성 높은 애착을 주고받든 말든 별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아주 은근한 암시. 이 시리즈의 역할은 어쩌면 딱 거기까지인 것 같다. ‘쿵푸’와 ‘기’라는 중국사적으로도 소중하고 두께가 엄청나기도 한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그냥 할리우드식 ‘귀여운’ B급 성장형 히어로 클리셰 액션 뽕빨물로 한데 섞어버린 것처럼, 퀴어 역시 적절한 농도의 - 우정 그리고 (공동) 양육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 당연한 사랑과 애착으로 자리 잡고 ‘일반’과 함께 한데 섞여 있다.
혹은, 머나먼 이국에서의 문제/악당을 처리하고 ‘내 영토’로 돌아와 새로 찾은 완전한 이방인인 후계자에게 권좌를 물려준다는 4편의 작법을 고려한다면, 이 이야기의 퀴어함은 20세기 반역적 퀴어함 혹은 21세기 힙하고 소비적인 퀴어함보다는 그리스 신화 시기의 남성애에 여전히 더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내게는 다같이 끓여먹는 은은한 퀴어 단추수프(특: 뭐가 들어갔는지 넣은 사람도 모름)... 은은하게 주입하는 퀴어 조기교육처럼 느껴지는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래서 허술하더라도 곱씹을수록 더 귀엽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쿵푸팬더 5는 제작이 불분명하다고 하고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나 희망적으로나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오래된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이제 여기서 그만해도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 실은 3편부터 - 계속 품고 있기는 하지만. 만약에 이 모든 추측, 자기최면, 설득, 착즙이 단 5%라도 사실과 맞닿아있다면, 이 말썽쟁이 시리즈가 덜그럭덜그럭 순조롭게 진행돼서 속편을 가져와줬으면 좋겠기도 하다. 유소년기 퀴어에게 혁신이었고 어쩌면 자각의 출발점 중 하나였던 영화가 생명력을 쥐어짜내서 나아가는 ‘진짜 끝’을 좀 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