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5-01 14:50:51
공허함을 가진 루저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짭벤져스
– <썬더볼츠*>(2025)











삶에는 우울한 순간들이 있다.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그런 우울한 순간들을 만난다면, 삶의 방향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향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음 속에 답답함과 슬픔이 공존하게 된다. 그런 우울한 순간들이 쌓이면 마음의 응어리가 커지고, 그건 감정의 공허함으로 표출된다. 자신이 하던 일에 몰입하다가도 어느 순간 이게 다 무슨 소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영화 <썬더볼츠*>는 마블 영화의 분위기와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중심인물은 1대 블랙 위도우인 나타샤(스칼렛 요한슨)의 동생인 옐레나(플로렌스 퓨)다. 옐레나는 나타샤의 죽음 이후 암살자 일을 계속하며, 누군가를 살상하거나 다치게 하는 임무를 반복한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자신을 죽이려는 또 다른 암살자들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옐레나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그의 심리상태가 중심에 놓여 있으며, 특히 이번 영화의 빌런인 센트리/밥(루이스 풀먼)과의 연결을 통해 그 감정은 더 깊어진다.
[첫번째 감정] 옐레나의 공허함
옐레나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언니를 잃었다. 타노스의 블립으로 몇 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온 그는, 블립 기간 중 나타샤가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와 이별할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상실한 것이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밝았던 부분이 언니와의 관계였을지 모른다. 그 외에는 옐레나에겐 밝음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 같이 훈련받던 동료를 밖으로 유인해 죽게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그는 철저히 암살자로 교육받아 성인이 되었고, 그저 어둠 속에 숨어 살인을 수행하는 존재가 되었다.
정부는 옐레나를 언제나 암살자로만 대했고, 정의로운 일을 하는 히어로들과의 거리는 멀었다. 그는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전문가였지만, 그 가치는 세상에 드러날 수 없었다. 그 반복되는 인정받지 못함과 무력감이 결국 옐레나의 공허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아빠인 알렉세이(데이비드 하버)는 늘 엉뚱한 자기 자랑만 늘어놓았고, 나타샤의 죽음 이후엔 옐레나를 피하기까지 했다. 그는 의지할 가족조차 없었다.
그런 옐레나가 이번 영화에서 만난 건, 자신처럼 무너져본 사람들이었다. 존 워커(와이어트 러셀), 에이바(해나 존 케이먼), 버키(세바스찬 스탠), 그리고 밥은 모두 과거 루저였거나 현재 세상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다. 옐레나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처음으로 공허함을 공유하고, 공감받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어둠을 직시하고, 비로소 그 안에서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닫는다. 어둠 속에 내리던 그림자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감정] 밥의 공허함
밥은 영화 초반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아무도 그에 대해 아는 이 없이 등장한다. 사실 그는 과거 마약 중독자였고, 실험 지원자로 정부의 비밀 초능력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오랜 잠에 빠졌던 인물이다. CIA 국장 발렌티나(줄리아 루이스 드레퓌스)가 주도한 그 실험은 어벤져스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은 잔혹한 실험이었고, 결국 센트리라는 위험한 존재를 만들어냈다.
밥이 센트리로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가진 어둠이 드러난다. 그는 본래 순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된 공허함은 엄청난 초능력과 맞닿으면서 파괴적인 성향으로 변질된다. 센트리는 그 자체로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을 어둠의 공간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만든다. 결국 센트리는 밥이 만든 또 하나의 자아이자, 과거의 상처가 만든 괴물이다.
그 괴물과 싸우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건, 자신도 어둠을 품고 있는 옐레나와 썬더볼츠 멤버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완전한 영웅이 아니지만, 밥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과거가 어땠든,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 안의 어둠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밥은 그렇게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세 번째 감정] 루저들의 따뜻함
썬더볼츠의 멤버들은 사회로부터 버려진 존재들이다. 옐레나는 암살자였고, 존 워커는 캡틴 아메리카였지만 민간인을 살해해 사회에서 퇴출되었다. 알렉셰이는 레드 가디언으로 과거 러시아에서 슈퍼솔저로 활약했다. 과거 에이바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고스트 슈트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지키는 과정에서 빌런이 되었다. 버키는 오랜 세월 세뇌된 암살자 윈터솔저로 살았고, 자신의 의지로는 끊어낼 수 없는 과거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을 루저라고 생각했고, 세상 역시 그렇게 규정했다.
그들이 진짜 변하는 건, 부속품으로 쓰이던 자신들을 벗어나 서로의 공허함을 드러낸 순간부터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 썬더볼츠는 단순한 팀이 아니라, 서로를 보듬는 공동체가 된다. 영화에서 옐레나는 그 중심에 선다. 혼자 어둠을 통과했던 사람이, 다른 이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 변화가 영화의 감정을 이끈다.
무엇보다 <썬더볼츠*>가 특별한 건, 그 따뜻함이 조롱조차 품어 안는 데 있다. 영화는 스스로를 ‘짭벤져스’라고 비웃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어둠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큰 선물이다.
‘성난 사람들’ 감독이 만들어낸 새로운 분위기의 마블 영화
<썬더볼츠*>는 마블의 기존 세계관 안에 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액션보다는 심리적 서사에 집중한다.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어두움, 외면당한 트라우마, 그럼에도 서로를 위로하려는 따뜻함이 중심이다. 어찌 보면 히어로물보다는 심리치료 영화에 가깝다.
타노스 이후, 계속 힘을 잃어가던 마블의 흐름을 바꿔주는 영화로 볼 수도 있다. 플로렌스 퓨는 블랙 위도우라는 새로운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감정 연기의 폭이 넓고, 이 역할을 아주 설득력 있게 완성해냈다. 플로렌스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스턴트도 직접 해냈고, 그의 얼굴이 화면에 자주 등장하면서 심리적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세바스찬 스탠, 와이어트 러셀, 해나 존 케이먼, 루이스 풀먼도 자기 캐릭터의 무게를 단단히 지킨다.
이번 영화의 연출은 <성난 사람들>로 국내 팬들에게 인상 깊은 인장을 남겼던 제이크 슈라이어 감독이 맡았다. 과감하게 분위기를 달리한 이번 작품에서 그는 캐릭터의 내면과 심리를 차분하게 끌어올리며 이전 마블 영화들과는 다른 무드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블랙 위도우>와 <팔콘과 윈터 솔져>, <호크아이> 시리즈 등에서 활약한 에릭 피어슨이 각본을, <더 배트맨>, <듄> 등에서 감각적인 음악을 들려준 마이클 지아치노가 음악을 맡아 마블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도 감정에 집중한 새로운 결을 만들어낸다. 흔한 히어로 액션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물들이 다시 살아가려는 이야기로 무게중심을 옮긴 선택이 반갑다.
이 영화는 2개의 쿠키 영상으로 마무리되며, 이후 등장할 <어벤져스: 둠스데이>를 암시한다. 뉴 어벤저스라는 이름이 어색할 정도로, 이 팀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이고 진짜 같은 영웅들이 아닐까. 공허함과 상실, 어둠과 따뜻함. 이 감정들을 이토록 정밀하게 풀어낸 히어로 영화는 많지 않다. 공허한 마음에 묘한 울림을 남기고 싶다면, 이 ‘짭벤져스’의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Relative contents
-
- 양반의 칼은 백성에게, 백성의 칼은 적에게
과거 한국 사회는 양반과 노비로 철저하게 나뉜 계급 사회였다. 이런 계급적 대비는 많은 한국 영화에서 주요 소재로 사용되곤 했다. 예를 들어 <사도>는 왕과 그의 일족이 주인공이 되어 왕권의 억압과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다루며, <관상>은 다양한 계급의 인물들이 얽히며 당시 사회 구조의 이면을 드러낸다. 또 <변호인>은 권력자와 일반 국민의 대립을 현대적 맥락에서 보여주면서, 권력과 억압 속에서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억눌려 있는지 조명한다. 이런 계급적 대립 구도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을 기반으로 하여 관객들에게 친숙한 주제를 다루며,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극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전, 란> 역시 양반과 백성 간의 대립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불일치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양반과 노비의 갈등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양반과 노비가 서로 이해하고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도 포함이 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으로 서로가 섞일 수 있는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는 양반인 종려(박정민)와 노비인 천영(강동원)이 등장하여 그들의 관계가 변화해가는 과정을 통해 당시 임진왜란 시기의 복합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을 조명한다. 양반과 왕, 그리고 노비들이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서로 엇갈리는 모습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계급과 권력이 어떻게 얽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감정: 노비 천영의 허망함
천영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양인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어머니가 노비로 팔려가면서 천영도 덩달아 노비가 되고 만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압된 삶을 살게 된 천영은,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하면서 삶의 허망함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자라왔기에, 그가 느끼는 세상은 차갑고 무의미한 곳이었다. 모든 행동에 감정이 없는 듯 보이는 천영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쌓인 허무함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인물로 그려진다.
천영은 양반 계급에 대한 분노를 내면에 쌓아가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는 다른 노비들과 깊은 연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고 싶어하며, 자신이 노비라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과 허무함 속에서 끊임없이 어디론가 도망치고자 한다. 천영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를 통해 양반인 종려에게 무술을 가르치고 대신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천영의 내면에 있는 허망함은 더욱 커진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압박감을 느끼는 종려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이 종려를 왕의 최측근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면서 더욱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천영의 삶은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흘러간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수록 그 결과가 다른 사람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며 점점 더 깊은 무력감에 빠져든다. 천영에게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그의 허망함은 단순히 억울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이용당하는 현실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서 천영은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그의 내면은 점점 더 차갑고 어두워져 간다. 변해가는 그의 모습에서 점점 어둡고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일반 백성과 노비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두 번째 감정: 종려의 분노
종려는 계급적 위선이 없는 인물로, 천영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한다.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권력욕이 많지 않은 종려는, 백성이나 노비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과 공감하고자 노력한다. 영화 전체에서 종려는 양반 중에서도 비교적 순수하고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양반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비와 함께하고 싶어하며, 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려의 태도는 천영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며, 그는 천영을 단순한 노비로 보지 않고 진심으로 친구로 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대적 강요에 의해 종려의 삶은 달라지게 된다. 그는 원치 않게 벼슬을 가지게 되고, 왕의 곁에서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종려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는 권력자들의 위선을 보면서도 특별히 노비나 백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 대한 연민과 인식 개선을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점점 현실의 무게에 눌리게 되고, 그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노비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종려의 상황은 급격히 바뀐다. 반란 속에서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종려는 그 충격과 슬픔 속에서 결국 권력자들의 위선을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왜군이 쳐들어오면서 왕과 권력자들을 호위하며 도성을 떠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이 장면에서 종려는 처음으로 제대로 칼을 휘두르게 되는데, 그 칼끝은 모두 백성들을 향하고 있다. 분노에 사로잡힌 종려는 자신도 모르게 권력자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며, 백성들을 억압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그의 변화는 시대의 무게에 짓눌려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무리 선한 마음과 좋은 의도를 가졌던 인물이라도, 하나의 오해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세 번째 감정: 왕의 위선
<전, 란>에서 천영과 종려의 관계가 중심에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왕 선조(차승원)의 위선이다. 영화 속 선조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과 왜군의 침략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불타버린 왕궁을 다시 화려하게 재건하는 것이며, 백성들이 따르는 장군이나 영웅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이 자신 이외의 영웅을 따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 그는 백성들이 오직 자신만을 우러러보기를 원하며, 그들이 다른 누군가를 영웅으로 여기면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전쟁 중에도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몰두하며, 전쟁의 영웅들과 백성들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
왕의 모습은 전쟁 속에서 백성들을 위해 싸우는 다른 인물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천영과 종려가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왕은 오직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러한 왕의 위선적인 모습은 종려와 같은 양심적인 벼슬아치들조차 악당으로 변하게 만든다. 왕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가 있으면 쉽게 그들을 처형해버리며, 백성들을 위한 정치가 아닌 자신을 위한 정치를 펼친다. 이는 결국 권력이 어떻게 사람들을 변하게 만들고, 그 권력이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준다.
왕의 위선은 현재의 정치 상황과도 연결될 수 있다. 여전히 많은 권력자들이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모습은 과거와 다르지 않다. 영화 속 선조의 모습은 권력의 본질이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권력자들의 위선이 백성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권력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며, 관객들에게 권력의 본질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양반과 노비는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영화 <전, 란>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노비 천영과 백성들을 베는 양반 종려를 대비시키며, 역사와 사회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천영은 노비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회가 그를 그런 방향으로 몰고 갔다. 종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스스로 양반이라는 계급을 선택한 것이 아니며, 권력을 원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관직을 얻고, 계급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은, 마치 임진왜란이라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아무도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특히 천영과 종려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친구로서 서로를 바라보며, 그 관계는 매우 애틋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적이 되어야 했던 그들의 눈빛은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는 김상만 감독의 연출로, 당시 시대의 혼란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감정을 뛰어난 색감과 캐릭터 대비를 통해 잘 표현해냈다. 강동원과 박정민, 그리고 차승원 등의 배우들은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며,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액션 장면들은 그들 간의 갈등과 시대적 배경을 잘 반영하며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영화 속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시대적 상황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권력과 억압,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 간의 연대와 고뇌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역사적 배경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길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qTnCGpfnZI
-
- 멜로, 사랑의 형태를 넘어 성장으로
ⓒ넷플릭스
〈멜로 무비〉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지만, 그 속에는 단순한 사랑 이상의 감정들이 녹아 있다. 한 사람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법, 그리고 당연하게 여겼던 사랑을 다시금 상기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펼쳐진다.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흔히 기쁨과 설렘을 먼저 떠올리며, 사랑은 때때로 아프고 어려운 감정들을 동반한다는 것을 망각한다. 〈멜로 무비〉는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이 필요한 이유, 사랑을 추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어떻게 삶의 동반자로서 상처와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드라마이다. 또 '멜로' 무비라는 제목 때문에 연인과의 사랑만 담긴 것처럼 보이지만, 직장 선후배 사이의 사랑, 동창 / 친구와의 사랑, 형과 동생의 사랑, 엄마와 딸의 사랑 등 여러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말 안 해도 전달되지만, 굳이 말로 전하는 이유
가끔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순간들이 있다. 눈빛으로도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국 우리는 말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멜로 무비〉 속에서 무비 (박보영)가 차 안에서 겸(최우식)에게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하며 '전달'이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겸이가 불안했던 무비는 겸이를 다시 마주하며 혼자가 아니라고, 앞으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며 타이른다. 이 변화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위로를 건네고 싶지만, 위로하는 것조차 상대방에게 상처일까 봐 머뭇거리고 아무 말 못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것이 있지만, 말로 전해야만 더 확실하게 닿는 순간이 있음을 말해주는 장면 같았다.
ⓒ넷플릭스
사랑은 결국 이해와 존중
겸은 형 고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해 처음에는 화를 내고 원망했다. 형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것이 이기적인 행동이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겸은 형이 살아온 삶의 무게를 이해하게 된다. 형의 고통을 헤아리게 되면서, 그는 형의 선택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해와 존중이란 결국 상대의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걸, 겸은 형을 통해 배우게 된다. 또한 무비는 평생을 원망하던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아빠를 사랑하던 엄마의 마음과 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주던 엄마를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존중해 주는 것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선택을 존중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으나, 생각· 감정 · 경험이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그 사람이 왜 이런 선택을 이해하는 과정은 꼭 필요한 것 같다.
ⓒ넷플릭스
상실의 고통을 알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유
드라마에서 상실의 고통은 처음에 실감조차 나지 않는다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문득 그 사람이 이제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고통을 느낀다는 대사가 있다. 죽음이든 이별이든 사랑의 끝은 존재한다. 우리는 이 끝을 마주하기 두려워 사랑을 기피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상실을 견디는 것은 꼭 오롯이 혼자의 몫이 아니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을 나누고, 상실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다. 함께하며 서로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언젠가 상실을 마주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랑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사랑은 가슴 한쪽에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그 흔적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내 삶을 사랑하는 것
처음에는 서로에게서 사랑을 배웠지만, 결국에는 각자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비는 겸을 통해, 겸은 무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사랑이란 단순히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아니라,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때로 사랑을 하면서도 자신을 잃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타인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더라도 나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멜로 무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통해 성장하고, 이해하고, 결국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혹은 어쩌면, 바로 그렇게 때문에, 그 어떤 사랑도 영혼에 비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감상에 빠져 사랑을 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밤하늘 별들의 위대한 무심함을 사랑하듯이 내 조그만 잉크병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서〉 중 발췌
-
- 다양성과 연결, 마블의 분위기 전환
우리는 살면서 계속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처음 태어나 부모를 만나고 주변 가족들을 만난다. 그러다 자라면서 친구와 지인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는 관계는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존재로 변해간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멀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연결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한다. 가장 가까운 나의 가족을 만드는 일은 현재에는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와 강한 연결관계가 되어간다는 건 앞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고 각자가 서로 연결되어있을 때 그 힘은 막강해진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가까운 곳의 관계뿐 아니라 먼 나라의 사람들과 연결될 기회를 만들었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종과 여러 성향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먼 곳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과 가까워질 기회도 있다. 그 관계에는 높고 낮음이 없고 다른 인종이라고 할지라도 강한 연결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그렇게 다양한 연결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때다. 어려움이 있으면 연대하고 서로 연결된 관계 속에서 힘을 얻어 행동으로 이어나간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렇게 서로 연결된 힘이 있으면 쉽게 그것은 깨지지 않는다.
다양성과 연결에 대한 이야기
영화 <이터널스>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들의 연결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마블의 새로운 영화다. 영화 속 이터널스 주요 인물들은 포식자인 데비안츠를 막기 위해 지구로 온 히어로들이다. 7천 년 전 지구에 온 이후 주요 지역에 지구인과 생활하면서 주변에 나타나는 데비안츠를 사냥했고, 그 포식자들이 모습을 완전히 감춘이후에는 각자의 삶을 지구에서 보내게 된다. 그들은 우주와 이터널스를 창조한 '셀레스티얼'이라는 존재를 따르고 있으며, 지구로 와서 데비안츠를 사냥하는 것도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터널스 조직을 이끄는 리더인 에이작(셀마 헤이엑)은 셀레스티얼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 그의 말에 따라 지구에서의 생활을 리드한다.
<이터널스> 안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다양하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세르시(젬마 찬), 이카리스(리처드 매든)를 비롯해 테나(안젤리나 졸리), 길가메시(마동석), 킨고(쿠마일 난지아니), 마카리(로렌 리들로프), 파스토스(브라이언 다이리 헨리), 드루이그(베리 케오간) 그리고 스프라이트(리아 맥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숫자도 많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도 다양하다. 백인, 아시아인, 남미인 등 인종으로 구분할 수도 있고, 양성애와 동성애 같은 성향으로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 어떤 히어로 영화와 비교해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의 다양한 구성 자체에 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태계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성은 생명을 순환의 고리에 넣어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포식자들이 등장하고 때론 그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지만 여러 아픔과 복잡한 사건들이 벌어진 이후에 좀 더 나은 존재가 탄생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세상을 번성하게 할 아이디어들도 등장한다. 그래서 이터널스의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성은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되고 동기가 된다. 그들이 포식자가 된 데비안츠를 물리치는 일도 결국에는 지구 생명체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지구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지구로 온 이터널스
그들이 맨 처음 지구에 왔을 때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힘을 합쳐 괴물 데비안츠를 물리친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들은 함께하며 공통의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데 힘을 모은다. 그들이 가진 각자의 특성은 지구 안에 존재하고 있는 데비안츠들을 물리치는 일이 원활히 진행되게 만든다. 결국 지구 안의 데비안츠를 모두 물리친 이후 목적을 잃은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각자가 가진 의견이 달라졌고, 가고자 하는 방향도 달라졌다. 그렇게 따로 생활하게 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진 힘도 서서히 약해진다. 개개인의 능력은 여전할지 몰라도 이터널스라는 집단의 힘은 줄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 판단했을 때 자신들의 힘이 필요하지 않는 시기가 도래했고 이에 그들 스스로 자신의 힘을 내려 놓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데비안츠라는 파괴적 존재와 비교 했을 때 좀 더 나은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지구에 머물렀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이것은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힘을 주는 또 다른 근원이 된다.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을 그 애정은 지구인들이 싸우고 서로 칼을 찌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사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적인 존재인 그들이 지구인들을 돕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들을 이끄는 셀레스티얼은 지구인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는 지시를 한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잔인한 전쟁과 질병이 지구인들을 괴롭혀도 이터널스는 그것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 우주적으로 벌어졌던 이벤트인 악당 타노스의 악행에도 이터널스가 개입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영화는 이터널스 멤버들 간에도 지구인의 일에 개입을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 내내 멤버들은 하나로 뭉치는 모습이 아니라 계속 서로를 의심하고 밀어낸다. 영화 <이터널스>에는 셀레스티얼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등장하고, 어떤 이유로 엄청나게 진화해버린 데비안츠가 등장함으로써 기본적인 긴장감을 바탕에 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높은 긴장을 불러오는 것은 이터널스 멤버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때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도 이 구도는 계속 이어진다. 마지막까지 서로 간을 설득하며 연결을 시도하려는 모습은 마치 현재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사는 현실에서 다양성의 융합을 통해 힘을 극대화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닮아있다. 결국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수없이 발현된 다양성을 하나로 모아 융합하는 것이다.
영화는 과거에서 현재가 되기까지 각 구성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하나씩 보여주며 영화의 중반까지 진행해 나간다. 그들 각자가 가진 사연이 결국 후반부에 이어지게 되지만 그 시간 동안 그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봐야 하기 때문에 조금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다. 15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서 너무나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 모든 인물들은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기존의 히어로들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익숙해지는데 필요한 시간에는 한참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기존 마블 영화에 비해 그 안의 캐릭터와 공감하고 그들의 행동에 의한 감정적 울림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결말부 몇몇 캐릭터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기존 마블 영화와 차별화되는 이 영화의 메시지
하지만 이터널스 멤버들의 각기 다른 특성과 능력이나 그들이 향하는 방향 속에 포함된 영화의 주제의식은 다른 마블 영화에 비해서 또렷한 편이다. 여러 가지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나 캐릭터 행동의 변화 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터널스 멤버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그리고 향후 이어질 마블 영화가 어떤 주제의식 안에서 진행될지를 보여준다는 개괄적인 의미는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진 다양성과 그 다양성이 한곳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주제의식이고 그것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영화를 연출한 클로이 자오 감독은 <노매드랜드> 로 베니스 황금사자상, 골든글로브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는 등, 다양한 영화제에서 여러 수상을 했다. <노매드랜드>에서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 연결과 우정,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히 풀어줬는데, 그런 감독이 가진 자신만의 이야기가 영화 <이터널스>에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성향이 다른 두 영화지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에서 조금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마블 영화라는 조금은 특이한 영역에서도 클로이 자오 감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그가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마블 히어로 영화에서 오롯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이터널스> 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안젤리나 졸리를 비롯해 한국 배우인 마동석은 길가메시 역으로 등장해 그가 가진 특유의 타격감 있는 액션을 펼친다. 젬마 찬, 리처드 매든, 셀마 헤이엑, 쿠마일 난지아니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이 출연하여 그들이 가진 특유의 감성과 연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영화가 가진 주제와 맞닿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기존 마블 영화와 같은 밝고 오락적인 영화는 아닐지라도 앞으로 개봉할 마블의 다양한 영화들이 어떤 곳으로 향할지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마블의 분위기 전환을 기대하게 하는 영화다. 또한 아쉬움은 있더라도 영화에 포함된 다양한 액션 장면은 여전히 이 영화가 마블 영화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이터널스 리뷰>
-
-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작 만나보기
어젯밤 발표된 오스카 시상식 후보작 !
올해 96회를 맞이한 미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 오스카
씨네픽 유저분들이라면 수상작쯤은 쉽게 맞추시겠죠?
감독상 후보
작품상 후보
최다 노미네이트
-
-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1초 앞, 1초 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1초 앞, 1초 뒤(One Second Ahead, One Second Behind), 2024
일본, 로맨스, 판타지 등 119분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1초 앞, 1초 뒤>
시간이 방대하게 축적된 추억을 연료 삼아 흐를 때, 기억은 위대함과 무력함이 공존하는 대자연의 힘으로 몸집을 키운다. 시간을 소유하고 싶은 염원은 망각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소망과 다를 바 없고, 기억을 되찾고 싶다는 말은 언제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만큼 기억과 시간의 거리는 가깝다. 아니, 하나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둘 사이는 깊고 밀접하다. 여기서 밀접함은, 서로에게 충분히 충족된다는 의미다. 두 개의 원이 각자의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도 반드시 겹쳐있다는 점, 다르게 불리고 굴러가는 방식도 다르지만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시간(기억)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동이 걸려 때때로 멈춤 현상이 발생하지만, 끝없이 흘러가고 이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완전한 거부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 강력한 힘을 기억(시간)만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삶을 흐르게 하는 바퀴가 고작 두 개일리 없고, 나아가 겹친 수가 겨우 두 겹뿐이겠는가. 시간과 기억, 그리고 무엇과 또 다른 어떤 것들. <1초 앞, 1초 뒤>는 여기에 ‘관계’를 겹쳤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관계, 너와 나의 사이, 우리와 그들의 차이, 거기서 발생하는 이야기. 영화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의 개인사를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마지막엔 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다. 끝엔 합쳐진 이야기가 계속 흘러갈 수 있도록 붙잡지 않고 풀어놓음으로써 해피엔딩을 완성한다. 남들과 달라 늘 혼자였던 두 인물이, 그 다름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서로를 기억해 내고, 마침내 서로의 품에 녹아들며 ‘함께하는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 시작은 남보다 1초 빠른 하지메의 속사정으로 출발한다.
교토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하지메는 어렸을 때부터 외로움과 함께 자랐다. 생강을 사러 간 아버지의 실종도 문제였지만, 태생적으로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사는 삶이 그를 결정적으로 혼자가 되게 만들었다. 달리기 시합을 하면 늘 먼저 출발했고, 말과 행동은 지나치게 많고 빨랐으며, 사진을 찍으면 셔터 속도보다 빨리 반응해 항상 눈을 감은 채 찍었다. 웃음 포인트 역시 반 박자 앞서서 본의 아니게 스포 빌런이 됐고, 우정은 물론 사랑 방식도 타인보다 급해 상대에게 먼저 차이기 일쑤였다. 성인이 된 후 집배원으로 일했지만, 속도위반을 밥 먹듯이 해 ‘분노의 질주남’ 별명과 함께 사무직으로 재배치됐다. 현재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조금의 여유도 허용치 않는 그의 업무 속도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보통 이들이 그렇듯, 일을 적게 하는 걸 좋아하면서도 아예 하지 않는 건 또 꺼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의 하지메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레이카 역시 속도만 다를 뿐 하지메와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어릴 적, 시험을 봐도 긴 이름을 쓰느라 문제를 반 이상 풀지 못했다. 느린 탓에 모기를 한 번도 잡아본 적 없고,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지만 움직이는 피사체를 순간 포착하는 건 버킷 리스트가 된 지 오래다. 웃음 포인트도 스포 빌런과 준하는 뒷북 빌런으로, 모든 사람이 웃고 넘어간 지점을 꼭 뒤늦게 밟아 매번 난처하다. 대학을 7년째 다니고 있고, 집 대신 사진 동아리 방에서 숨어 살고 있다. 현실이 팍팍하고 지난하지만, 죽은 아빠가 남긴 카메라로 세상을 찍으며 외로움과 슬픔을 조금씩 덜어내며 산다.
1초의 횡포도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던 두 사람은, 새로 생성된 관계들로 인해 충돌하듯 재회한다. 길거리 가수와의 연애로 30년 만에 행복을 느끼는 하지메와 그런 그의 시야에 레이카가 처음으로 들어온 순간이다. 사실 레이카는 하지메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과거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자신을 위로해 준 소중한 친구를 잊을 리 없었다. 두 아이는 헤어지기 직전 레이카 고모의 우편함 열쇠를 나눠 가지며 꼭 편지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꼬꼬마들의 소꿉놀이는 잊혔고, 시간 탓을 하든 기억 탓을 하든 둘이 다시 만나 서로를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레이카가 그날, 그때, 버스 하차 벨을 늦게 누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1초 느린 여자가 1초 빠른 남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고, 레이카는 그날부터 하지메에게 우표를 사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가 날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하지메에게 잊힌 시간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삶을 산 기간이 더 길었으니까. 무엇보다 레이카는 하지메란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깊이 위로받고 있었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하지메와 가수, 가수와 레이카, 하지메와 실종된 아버지, 하지메와 가족, 레이카와 하지메까지, 둘의 이야기는 포개지는 관계들의 영향력으로 특별한 반전 없이 흘러간다. 하지메의 돈이 목적이었던 가수의 못된 심보가 레이카에 의해 밝혀지고, 돈 봉투를 챙겨 가수를 만나러 가던 하지메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를 잃는다. 그가 잃은 하루는, 자기도 모르게 무수히 많은 1초를 저장해 왔던 레이카의 1일이었고, 레이카는 멈춘 하지메를 데리고 바다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난다. 그녀와 같은 1일 무료 사용권을 가진 버스 기사의 도움으로 말이다. 하지메의 아버지도 집을 나간 날 세상이 멈추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하고 지금까지 숨어 살고 있었다. 그는 레이카 덕에 아들과 사진도 찍고 가족들에게 못했던 미안하단 말을 하고 떠난다.
다음 날, 깨어난 하지메는 잃어버린 하루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연속된 우연으로 우편함 열쇠까지 찾아내 레이카가 그동안 보냈던 편지(사진들)를 발견하면서, 덮어뒀던 그녀와의 추억을 찾는 데 성공한다. 매 순간 어긋나기만 했던 둘의 시간이 딱 맞춰지는 그때, 늘 빠르기만 했던 하지메는 레이카를 기다리고, 늘 느렸던 레이카는 하지메를 위해 빠른 걸음으로 우체국 안으로 들어간다. 서로를 마주 보고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트리는 두 사람, 영화는 잊지 않고 둘의 치유 과정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렇게 흐르게 놔둔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1초 앞, 1초 뒤>는 진옥훈 감독의 <마이 미씽 발렌타인>(2010)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굳이 원작을 언급한 건, 본 작품을 원작과 함께 음미하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다른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주인공의 성별(원작은 여자가 빠르다)이 바뀌었고, 새로운 인물들이 추가로 등장한다. 둘째, 주인공이 잃어버린 하루가 밸런타인데이에서 커플 대회가 열리는 날로 변경됐고 하루 삭제가 가능하게 된 이유도 나름 보충됐다. 셋째, 인물들의 서사에 집중하면서도 배경(일본의 교토)을 보여주는 데 힘썼다. 세 가지 차이점은 단순히 이야기의 구성요소가 바뀌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화의 기본 시각과 주제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두 작품은 ‘1초’를 활용하는 방식과 1초에 숨은 ‘기억’을 다루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그로 인해 관객에게 각각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
출처: 영화 <마이 미씽 발렌타인> 스틸컷 (다음)
<마이 미씽 발렌타인>은 시간과 기억에 ‘방황하는 나’를 겹쳤다. 1초 빠른 여자와 1초 느린 남자는 군중 속 외톨이였다. 따라서 홀로 내면의 힘을 기르고 지키는 일이 먼저였다. 그런 그들이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에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상하게만 느꼈던 내가 사실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며, 더는 혼자가 아님을 확신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다. ‘자신을 사랑하라,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니!’에서 ‘자신을 사랑하라, 누군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로 바뀌는 자막도 한몫한다. 따라서 원작에서 ‘1초’는 인물들의 단순 ‘기질’로 표현된다. 여자 주인공은 말과 행동, 생각까지 타인보다 급한 성격을 가진, 그리하여 남보다 시간을 더 쪼개 쓰는 사람이지 <1초 앞, 1초 뒤>의 하지메처럼 특별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인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리메이크작의 차별화된 방식에 있다. <1초 앞, 1초 뒤>는 제삼자의 시점으로 하지메와 레이카의 평범할 수 없는 삶을 소개한다. 관찰자의 목소리는 원작의 코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줬던 ‘연민’이란 감정 외에, 하지메와 레이카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환상’을 덧입힌다. 보통 사람들과 함께 사는 ‘외톨이들의 웃픈 사랑’ 이야기가,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으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자들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시간이 멈춰 하루를 잃는 판타지적 요소도 <마이 미씽 발렌타인>에선 이야기 중반에 갑자기 튀어나오지만, <1초 앞, 1초 뒤>에선 처음부터 하지메와 레이카를 통해 풍기며 등장한다. <마이 미씽 발렌타인>의 도마뱀 인간(정령?)이 <1초 앞, 1초 뒤>에선 생략된 이유다.
출처: 영화 <1초 앞, 1초 뒤> 스틸컷 (다음)
원작이 끝까지 집중한 한 겹은 ‘남들보다 유별난 나(자아)’이고, 리메이크작의 한 겹은 ‘태생적으로 조금 특별한 삶을 사는 우리(관계)’다. 일상 속의 나와 판타지 속의 우리. 사건 해결의 결정적 추도 ‘나’와 ‘우리’로 각자 진행된다. 원작의 인물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개인의 몫으로, 리메이크작의 인물들은 모두의 영역에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한다. 결말의 형태는 같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인물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함께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그러나, 결말이 주는 의미는 다르다. 원작의 끝엔 유별나도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나와 네가 있고, 리메이크작의 끝엔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을 버텨온, 서로에게만 각별한 연인이 있으니까.
두 작품 모두 재미있다. 원작과 리메이크작이지만, 다른 작품으로 봐도 좋다는 얘기다. 똑같은 로맨스 판타지 장르지만 각자 발산하는 매력이 다르다. <마이 미씽 발렌타인>의 맛이 서툰 삶과 풋풋한 첫사랑에 있다면, <1초 앞, 1초 뒤>의 맛은 순수함과 첫사랑을 향한 불가항력(초능력)에 있달까. 이는 대만 영화와 일본 영화가 가진 각각의 특색과도 연결돼, 보는 맛이 더 다채로울 것이다.
시간, 기억, 그리고 무엇들. 우린 매일 어떤 것이 어떻게 겹친 줄도 모르고 삶을 굴리고, 동시에 굴려지며 그렇게 물 흐르듯 산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하루를 더 보상받거나 하루를 잃고도 이를 전혀 모르고 사는, 그런 발칙한 정체 구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낙이라면, 분명 흐르는 데 좋은 연료로 쓰일 거다.
-
-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진 시리즈의 매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로부터 우주를 구한 후 당당히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슈퍼 히어로가 된 '스콧 랭(폴 러드)'. 그는 앤트맨으로서의 업적을 책으로 써내는 등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삶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콧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딸 '캐시 랭(캐서린 뉴트)'의 주도 하에 파트너 '호프 반 다인(에반젤린 릴리)', 그리고 은사인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이 미지의 세계인 양자 영역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것.
하지만 스콧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십 년을 양자 영역에서 보냈다가 간신히 지구로 되돌아온 '재닛 반 다인(미셸 파이퍼)'. 그녀는 기계를 보자마자 당장 파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녀도 기계가 오작동해 앤트맨 일행이 양자 영역에 빠지는 걸 막지는 못했고, 그들은 양자 영역을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사이, 양자 영역에 갇혀 있던 '정복자 캉(조나단 메이저스)'도 유배지에서 탈출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앤트맨 일행을 위기에 빠트린다.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매력적인 캐릭터, 뛰어난 기술력, 탄탄한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그럴듯함'이 있어야 한다. <스타워즈> 속 타투인이나 나부 같은 외계 행성이든, <반지의 제왕> 속 중간계든 그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느껴져야 한다. 이는 CG와 같은 시각적인 요소만 뜻하지 않는다. 영화가 디테일함으로 가득할 때, 비로소 실제로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시공간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빌뇌브 감독의 <듄>에서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스(티모시 샬라메)의 대련 장면을 보자. 이 장면 속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액션과 달리 찌르거나 베려고 하는 순간 속도를 급격히 늦춘다. <듄>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일정 속도 이상이면 무조건 튕겨내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호그와트, 버로우, 다이애건 앨리, 마법 정부 등에서 마법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는지를 세밀히 보여주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 세계의 매력을 각인시킨 바 있다.
즉, 사람들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이유와 맥락을 불어넣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인식한다. 달리 말해 그 이유와 맥락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과 특수 효과를 동원해 새롭고 다른 걸 보여준다고 해도 가상공간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 3>)가 공허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다.
양자 영역을 배경으로 모험을 펼치는 <앤트맨 3>는 시리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본래 <앤트맨>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하이스트 영화이자 유쾌한 가족 영화였다. 주인공인 스콧 랭의 특징 때문이다. 우선 스콧은 도둑이다. 애초에 행크 핌의 집에 강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콧은 앤트맨 슈트를 입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매 작품마다 앤트맨은 항상 어딘가에 침투하고, 무언가를 훔친다. 1편에서는 어벤져스 기지에 침투했다가 팔콘을 만난다. 옐로우 재킷과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생각한 것보다 더 몸 크기를 줄여서 상대의 슈트에 침투해 문제를 해결한다. 2편에서는 양자 영역에 잠시 들어가 빌런이었던 고스트를 위한 치료 입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빌 워>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잠시 뺏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다시 되찾아오기도 하고, <엔드게임>에서는 아예 시간을 강탈하자는 계획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한편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이다. 앤트맨 슈트를 벗은 그는 그저 캐시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신경 쓰는 평범한 사람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범죄에 손대지 않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다시 도둑질을 한 것도 캐시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비록 도둑질을 하다가 행크 핌에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행크의 요구대로 앤트맨이 된 것도 다시 한번 범죄에서 손을 떼고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즉, 기본적인 정의감은 지니고 있지만, 우선 가족부터 챙기고 지키려는 마음이 더 큰 바로 그 지점이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만의 매력인 셈이다. 그래서 <앤트맨> 시리즈는 항상 가족 영화로서의 분위기를 공유한다. 1편에서는 스콧과 캐시의 만남만큼이나 행크와 호프 부녀의 화해도 중요한 소재였다. 2편은 아예 행크의 아내이자 호프의 어머니인 재닛을 찾는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였다.
그런데 <앤트맨 3>의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과 다소 다르다. 유쾌함 대신 진지함이 가득하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까닭이다. 이번 작품은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로 나아갈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고, 타노스의 뒤를 이을 빌런 캉을 소개해야 한다. 그래서 <앤트맨 3>는 이전까지 맛보기로 등장했던 양자 영역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운다. 작중 양자 영역의 묘사를 보면 이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설정이다. 비록 물리적으로 지구 외부에 있는 우주는 아니지만, 외우주에 못지않은 스케일과 다양성을 자랑하는 소우주로 양자 영역이 등장하니까. 닥터 스트레인지가 멀티버스의 문을 열었듯, 이제 앤트맨은 숨겨진 우주를 탐험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는 가족 영화이기 이전에 새로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다 보면 거대해진 스케일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규모는 커진 반면, 이 넓고 새로운 우주를 어떻게 채울 지 고민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자 영역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모험은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양자 영역의 원주민을 만나 탈 것을 빌리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사막 같은 비주얼은 <스타워즈> 속 타투인 행성을, 헬멧을 쓰고 있는 유목민과 그들의 탈 것은 타투인에서 사는 '터스켄 약탈자'를 빼닮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캉의 군대는 스톰트루퍼를, 캉의 제국은 은하제국의 수도인 코러산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막에 숨어 있는 저항군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는 몇몇 신선한 요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양자 영역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맞다. 해파리나 브로콜리를 변형한 듯 보이는 생명체가 여럿 눈에 띈다. '자유의 투사들'의 일원인 베브도 민달팽이처럼 생긴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들은 이내 배경으로 밀려나고, '젠토라'나 '쿼즈'처럼 인간 형태의 조력자만 남아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로켓이나 그루트, <토르> 시리즈의 코르그와 미에크처럼 전향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베브와 살아 움직이는 건물들 정도가 임팩트를 남길뿐이다. 결국 <앤트맨 3>에서 양자 영역은 MCU의 지평을 한 차원 넓힐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정복자 캉이라는 새 빌런을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될 뿐이다.
그 결과 <앤트맨 3>는 시리즈의 본래 개성과 지향점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 보인다. 스콧이 정복자 캉에게 저항하는 양자 영역의 원주민들, 곧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전개만 봐도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자서전도 내고 사인회를 다니며 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누리는 스콧. 그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대신, 마침내 되찾은 가족과 일상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양자 영역에 빠지거나 정복자 캉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만난 후에도 얼른 집에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스콧은 끝내 다시 히어로의 길을 외면하지 못한다. 캐시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한다. 스콧이 좀처럼 설득되지 않자 독단적으로 캉의 군대와 싸우기도 한다. 이에 스콧도 결국 자유의 투사들 옆에서 캉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스콧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시리즈 내내 강조되었던 그의 부성애로부터 찾는다. 확률 폭풍 안에서 캐시의 외침을 들은 스콧의 모든 가능성들이 힘을 합쳐 진짜 스콧을 도와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스콧이 모든 선택의 기로마다 언제나 캐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스콧은 이번에도 캐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어벤져스와 캉이 멀티버스 속에서 펼칠 싸움을 암시하는 대목이기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멀티버스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나'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단 하나의 희망과 가치를 깨닫고, 이를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이제 앤트맨이 그러하듯이.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는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캐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스콧이 생판 남인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자유의 투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정복자 캉에게 맞서 자유를 갈망한다는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캉이 그들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양자 영역에 대한 설명과 상상력이 부재한 만큼이나 이들에 대한 설정도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캐시 랭을 가교로 삼아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는 모습에서는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 왜 앤트맨이 그들을 도와서 모험을 떠나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캉이 죽고 자유를 찾아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공유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덩달아 스캇 일행과 이들 간의 가교가 되어야 할 캐시의 역할도 애매해지고, 캐시를 따라 이들을 도와준 스콧의 이야기도 힘이 빠진다. 이처럼 양자 영역 안에서 <앤트맨> 시리즈는 본연의 매력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스콧 랭만 양자 영역에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MCU를 지탱할 빌런 정복자 캉도 헤매기는 매한가지다. 작중 캉은 다른 변종 캉들이 보기에도 너무 위험하기에 외부의 시공간과 분리된 양자 영역에 갇혀버린 인물이다. 어찌나 위험한 사상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재닛 밴 다인이 가족과의 재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캉을 양자 영역에 가두기 위해 수십 년 간 노력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캉이 과연 타노스만큼 위협적인 빌런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힘이나 능력이 인상적이지 않다. 개미 군단의 공격에 쩔쩔 매고, 앤트맨과 와스프에게 고전하기 때문이다. 인피니티 스톤 없이도 헐크를 무너뜨리던 타노스와 비교하면 더욱 평범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못하며 사상적으로라도 어벤져스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한다. 연출 상의 문제로 캉의 과거사나 그의 사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캉이 앤트맨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캉은 자기가 수없이 많은 어벤져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플래시백과 같은 연출 기법을 활용하는 대신 그저 캉의 설명을 고스란히 들려줄 뿐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과거사를 설명한 대목을 떠올려 보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캉과 겪었던 일을 털어놓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재닛, 행크, 호프는 한 테이블에 나란히 둘러앉아 있다. 재닛은 어떻게 캉을 만나고, 그의 우주선을 고쳤고, 그를 양자 영역에 가둔 이유를 몇 분에 걸쳐 설명한다. 나머지 둘은 그저 리액션을 할 뿐이다. 이처럼 설명을 위한 시퀀스가 계속되다 보니 자연히 영화는 지루해진다. 설명의 내용 역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캉이 등장하는 쿠키 영상에서도 그들이 딱히 무섭지 않은 이유다. 그들의 목적이나 사상, 대립 구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복자 캉의 데뷔전은 어떤 의미로든 만족스럽지 않다.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MCU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은 이제 새롭지 않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페이즈 4를 구성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혹평과 부진한 흥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의 어깨는 무거웠다. 시들어가는 관객들의 관심을 다시 점화하고 멀티버스 사가에 몰입할 유인을 제공해야 했다. <앤트맨> 시리즈로서의 재미도 선사해야 했다.
하지만 <앤트맨 3>는 실패했다. <앤트맨> 시리즈의 연장선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페이즈 5의 초석을 놨다고 하기도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의문을 더 키우는 것은 덤이다. "시끄럽던 옆동네 DC 확장 유니버스가 전면 리부트를 선언한 가운데, 과연 마블의 멀티버스 사가는 평탄히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을까?" 미래는 모를 일이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마블에게 남은 기회가 이제는 정말 많지 않다는 것. 개봉까지 두 달여를 남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로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P(Poor, 형편없음)
큰 그림도, 시리즈의 매력도, 빌런의 위압감도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지다
-
-
-
- 영화 <파리,13구> 메인 예고편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도시, 파리 13구.
낭만을 잃었다 생각한 그곳에서 불현듯 사랑을 만났다.
사랑을 원하는 에밀리
사랑이 두려운 노라
사랑이 값비싼 앰버 스위트
사랑을 몰랐던 카미유
흔들리고 불안했던 그 사랑이, 우리는 전부라 생각했다.
여전히 사랑을 믿는 도시
<파리, 13구>
-
- 티빙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공식 예고편
[2021년 7월 16일, 티빙 공개]
대가가 담긴 소원을 파는 마녀식당에서 마녀 희라(송지효)와 동업자 진(남지현), 알바 길용(채종협)이 사연 가득한 손님들과 만들어가는 소울 충전 잔혹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