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usmesentez2025-04-21 15:56:35
복수는 정말 달콤할까?
1. 복수의 아이러니 -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
가장 완벽한 복수는 무엇일까.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 보란듯이 잘 사는 것? 아무래도 받은만큼 돌려주는 쪽에 마음이 동한다. 내가 아팠던만큼 상대도 아파야 평등한 것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한 자는 눈을 멀게 한다는 동태(同態)복수 원칙을 명시했다. 암 역시 그렇고 말고. 그렇지만 이 원칙이 개인적 복수의 당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를 끝마친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로 법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 가장 정의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다시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안타깝게도, 복수는 위임된 권력이 대신 행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칼날은 제자신에게 돌아온다. 복수는 달콤한만큼 유독하다.
복수의 유독성이 가장 강력하게 분출하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복수가 성공하는(혹은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의 이중성을 잘 담고있다. 복수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 한 남자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했고, 다른 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멈췄지만 영원히 구속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가 평생 수습하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며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15년 간 그를 감금했다. 오대수가 함부로 혀를 놀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이수애(이우진의 누나)와 이우진이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했고, 친구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수애는 학교에서 깨끗하지 못한 여자로 소문이 났고,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이우진은 오대수를 몹시 증오했다. 그래서 좁은 골방에 가두고는 군만두만 먹였다. 심지어는 오대수의 부인을 살해하고 그가 범인인 것처럼 꾸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우진은 최면을 걸어 오대수와 미도가 서로 사랑에 빠지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두 사람이 부녀관계였음을 폭로한다. 오대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우진의 복수는 평등해졌다. 이우진은 자살함으로써 한 발 더 나아간다. 오대수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채 혀를 자름으로써 인과응보를 받아들인다.
"누나하고 난 서로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간 감금한 것은 더 '잘' 복수하기 위해서다. 오대수를 죽이거나 그의 딸 미도를 해코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오대수와 미도가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부녀 관계임을 밝힘으로써 마주하게 될 죄책감과 수치심을 온전히 느끼기 바랐기 때문이다. 오대수가 이우진을 일찍이 죽이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금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복수의 명분을 밝히기 위해서 게임에 끝까지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붕괴는 시작된다. 오대수가 감금의 이유를 알아내고 의기양양하게 이우진을 몰아붙이는 순간, 알고보니 모든 재앙이 스스로 몰고 온 것임을 인식한다. 오대수가 혀를 잘라냄과 동시에 이우진은 일생의 후련함을 느끼지만, 이내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자살한다. 복수가 달콤함 뒤에 숨겨둔 독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모두 복수의 피해자다.
이우진은 멈출 수 없었다. 누나를 잃은 뒤로 삶은 피폐해졌고 오직 복수만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복수에 중독되고부터 어쩌면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자결로써 복수를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대수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5년의 세월을 빼앗아 간 이우진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을 잃었고, 삶의 추동을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증오했던 이우진이 죽음으로써 살 이유가 사라졌다. 다만 그에게 남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감내하는 일 뿐이다.
복수에서 승자는 없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삶을 멈추게 된 이우진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복수에 실패한 오대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복수의 달콤함은 끝내 두 사람에게 독이 됐다.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상처의 근본적 해결은 환부를 치료하는 것이지, 남에게 똑같이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멈추고 용서를 한 자만이 자유롭다. 용서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과연 그 자유는 정말 행복할까? 다음 편에서는 용서라는 덫에 빠진 한 여인, 이신애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Relative contents
-
-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불온한 공동체를 지탱하는 온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2018) 비평
<앙: 단팥 인생 이야기>와 일련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출연하며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배우 기키 키린이 2018년 9월 15일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30대부터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할머니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녀는 유작 <어느 가족>에서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그녀는 “다들 고마웠어.”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실제 배우의 육체와 겹쳐 묘한 감상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죽음을 암시하는 배우의 신체와는 별개로 시바타 하츠에의 죽음은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을 차근히 밟아온 나에겐 다소 의문스러운 죽음이다. 이전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 사망한 가족의 자장을 좇거나, 결말부에 가족 구성원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담아왔다. <어느 가족>의 하츠에처럼 서사 중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은 그의 영화 목록에서는 이례적이다. 특히 그 대상이 그간 그의 가족들을 정신적으로 지탱해온 어머니라는 점에서 더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면 하츠에는 왜 영화 중간에 죽어야 했으며, 왜 하필 그녀가 죽어야 했는지 영화 전반을 둘러보며 그녀의 사인을 밝혀보자.
히로카즈 감독은 국내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어로 ‘만비키’(万引き)라는 ‘shoplifters’는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라는 뜻과 동시에 ‘그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도둑질을 당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있다.”(<씨네21>, 2018.5.30.)라고 밝혔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원제 <万引き家族>은 ‘훔쳐진 가족’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쳐진 가족인가. 시바타 가족은 혈연이 아닌 사회 혹은 실제 가족에게서 버려진 구성원들로 이뤄진 유사 가족이다. 유리(사사키 미유)와 쇼타(죠 카이리)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를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부르진 않지만, 가족 외부의 사람은 쇼타와 함께 거리를 지나가는 노부요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가족의 형상을 충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설프게 형태만 충족한 이 가족은 사회 시스템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진다. 사회는 영화 종반부에 그들을 프레임 속 각자 다른 자리에 불러 세우고 유사 가족의 무능을 지적하면서 시바타 가족을 해체한다. 즉, 사회는 혈연이 아니라는 명분으로 유사 가족을 훔쳐낸다. 그런데 그 역도 성립한다. 시바타 가족은 동기의 무고함을 차치하고 보면 진짜 가족에게서 구성원들을 훔쳐 온 가짜 가족이다. 오사무는 차에 방치된 쇼타를 주워오고, 노부요는 유리에게 폭력을 가하던 진짜 가족에게서 아이를 법적 절차 없이 입양한다. 하츠에 역시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전 남편의 손녀인 것을 알면서도 아키의 가족에게 묵인하고, 시바타 부부도 오사무가 노부요에게 폭력을 가하던 남편을 죽인 뒤 사회적 계약 없이 맺어진 관계다.
그런데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집으로 들인 사연은 불투명하다. 단지 하츠에가 그들을 선택했다는 대사만 주어질 뿐 구체적인 동기는 말해지지 않는다. 하츠에는 전 남편이 죽은 뒤에도 그가 재혼하여 낳은 아들을 찾아가 위자료를 받아내는 속물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연금을 목적으로 집에 얹혀살며 그녀의 돈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시바타 부부를 가족으로 선택한 이유가 의뭉스럽다. 하츠에의 진짜 아들은 그녀에게 연락 한 통 없는 무심한 아들이고, 그녀는 보험을 들어서라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고를 전하고 싶어 한다. 정황상 그녀는 자신의 노후를 함께 해줄 가족이 필요했던 인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가짜 가족에게는 '워크셰어(Workshare)'라는 공동의 규칙이 존재한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하는 “유리도 뭔가 도움이 되어야 같이 살기 편하지 않겠어?”라는 발언에서 시바타 가족은 암묵적으로 그 공모를 준거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금으로 경제적 자족성을 갖춘 하츠에가 시바타 부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시바타 가족의 속물적인 규칙과 어긋난다. 이 불균질을 감수하고서라도 히로카즈 감독이 그녀를 유사 가족 안에 편입시킨 이유가 뭘까.
하츠에는 이름의 존재에서도 다른 가족들과 궤를 달리한다. 하츠에를 제외하고 시바타 가족의 구성원들은 가족 외부에서 불렸던 이름과는 다른 가명을 하나씩 갖고 있다. 유리를 찾는 TV 뉴스를 보고 그녀를 몰래 키우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유리에게 ‘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그녀를 숨긴다.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보다 전이지만, 친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쇼타 역시 오사무로부터 그의 본명인 ‘쇼타’라는 이름을 이어받았다. 시바타 부부와 아키 역시 본명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쇼타-오사무, 유코-노부요, 사야카-아키. 숨겨야 하거나 숨기고 싶은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본명이 사회와 진짜 가족에게서 밀려났을 당시의 이름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명을 지어 과거의 이름을 숨기려 한다(가족이 해체되는 취조실에서 사회로부터 숨겨진 이름이 끄집어내지는 귀결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하츠에로부터 이어진 ‘시바타’라는 성으로 묶인다. 즉, 과거의 이름들을 은닉하기 위해 지은 새로운 이름들은 하츠에의 성을 받아 온전한 이름으로 기능한다.
이름 외에도 아이들은 어른으로부터 무엇인가 유전된다. 쇼타와 유리는 각각 가족을 부양하려다 다친 오사무의 오른발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노부요의 상처가 유전처럼 전해진 아이들이다. 오사무는 공사현장 텅 빈 공간에서 “다녀왔어” “어, 쇼타”라고 자문자답한다. 오사무의 본명이 쇼타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관객들은 그가 불이 꺼진 곳에서 자신을 반겨줄 누군가를 바라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빠라는 호칭에 집착하던 오사무는 버려진 아이를 어린 시절 외로웠던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어, 쇼타”라고 반겨줄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남편에게서 폭력을 당한 기억이 있는 노부요는 유리가 친부모에게서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의 상처와 닮은 유리의 상처를 보고 아이를 끌어안아 몸에 품는다. 어쩌면 시바타 부부는 아이들에게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비가역적인 가족력처럼 쇼타는 다시 고아가 되고 유리는 다시 폭력적인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은 하츠에로부터 아키에게는 무엇이 유전되었을까. 쇼타와 유리가 다시 시바타 가족이 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키는 아무도 없는 하츠에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섹스 노동을 할 때 가명으로 동생의 이름을 쓰는 것으로 보아, 아키는 동생에게 악감정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녀는 하츠에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금전적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진짜 가족이 아닌 하츠에의 집에 다시 돌아올 정도로 실제 가족에게 감정의 골이 깊다. 그래서 그녀는 하츠에와 같이 실제 가족이 존재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가려 한다. 애정결핍이 있고 속물적인 가족의 규칙에 반감을 표했던 아키는 하츠에에게서 집을 이어받아 새로운 대안 가족을 만들어 하츠에의 자리를 대신할 혐의가 있다. 즉, 집의 소유주이자 재개발을 넌지시 바라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집을 사수하는 하츠에는 아키에게 다른 가짜 가족이 거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집을 물려준다.
<어느 가족>에서 버려질 법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집의 풍경은 마치 버려진 시바타 가족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본 가족영화의 뿌리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다미방처럼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집은 미학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가족은 그 단어의 피상적인 뜻처럼 집으로 묶인 집단이다. 따라서 사회 시스템 속 가족의 형성과 위기를 탐구해온 히로카즈의 영화적 관심사에서 집은 포기할 수 없는 무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사회의 공간과 대비하여 의미를 형성해왔다. <어느 가족>의 집도 사회와 시바타 가족을 구분하는 경계처럼 존재한다. 영화 초반부 집 내부는 가족의 형성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형형한 공간이다. 오사무의 자상한 얼굴과 노부요의 모성은 관객에게 시바타 가족 사이에 복류하던 도덕적 균열을 가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그들은 관계에서부터 사회의 윤리를 비껴가지만, 외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집 안에서는 문제없는 가족처럼 보인다.
과거를 숨기려는 이름들에 성을 주고 가족을 사회와 경계 지어주는 은닉처를 제공하는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 구성원들에겐 집과 같다. 그래서 집 밖의 공간인 해수욕장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으며 가족이 되려는 그들을 보면서 하츠에는 마치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안녕을 고한다. 그 이후 집에 묻힌 하츠에는 시바타 가족이 사회로부터 해체되는 취조실 시퀀스 도중 그녀 역시 집에서 꺼내진다. 하츠에가 집이고 그 집이 사회로부터 시바타 가족을 지키는 울타리였다면, 하츠에의 죽음으로부터 가족이 사회에 노출되는 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어느 가족>은 집 내부에 편재했던 따스한 온기를 결말까지 안일하게 이어가지 않는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이후, 피가 아닌 마음과 유대로 연결되었다고 말하던 가짜 가족들의 옆구리 바짝 서늘한 공기를 밀어 넣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는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녀를 묻기 위해 욕실 바닥을 판다. 양심의 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은 벽 너머로 할머니의 시체를 쓰다듬는 아키의 슬픈 손짓과 대비되어 섬뜩하다. 뒤이어 시바타 부부는 하츠에의 유산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아이들을 방치한 어머니를 악인으로 비추지 않음으로써 사회 시스템의 부재를 지목했던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선 어른을 포함한 가족 안으로 카메라를 끌고 와 문제를 가족내부에서도 진단한다. 단순히 사회를 적으로 두고 투쟁하는 가족을 숭고하게 그리지 않고 가족 내에 산재한 위태로움을 기어코 들춰내는 이 영화는 가족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유사 가족의 나체는 아이 쇼타에 의해 드러난다. 늙은 하츠에가 불온한 가족을 지탱하는 온기였다면 어린 쇼타는 태만한 가족의 폐부를 찌를 냉기다. 홍수정 비평가의 “누군가는 가족 모두를 경찰 앞에 불러모으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영화가 한 세계의 문을 여는 방법이 진정 어린아이의 몸에 상처를 새기는 것뿐인가."(<씨네21>, 2018.08.16.)라는 의견에는 함께할 수 없다. 쇼타는 도덕적 규범에 게을렀던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가족 외부에 호기심을 피력하는 인물이다. 하츠에가 죽자 그녀가 가려주던 가족의 불온을 감지한 쇼타는 유리에게 도둑질의 전이를 한 차례 막아준 문방구 주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래서 이제 아이는 두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선다. 마트에서 유리의 도둑질은 들키지 않았지만, 쇼타는 양파를 들고 도망치며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해, 쇼타는 유리가 걸릴 걸 두려워한 게 아니라 도둑질하는 행위 자체를 막기 위해 도망친다. 그는 길 위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자문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가짜 가족의 집이 아닌 막다른 다리를 선택한다. 홍수정 비평가의 의문이 생긴 이유는 상처를 피해의 흔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쇼타의 상처가 시바타 가족이 편안하게 이어가던 잘못된 내력에서 절연하려는 결연한 성장통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가족을 예비할 어린아이 손에서 이뤄져야 한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쇼타의 환부다. 영화는 쇼타가 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발을 오사무의 다친 발과 같은 오른발로 슬며시 겹쳐둔다. 오사무의 발은 사회 서비스인 산재보험에 적용되지 않는다. 반면, 쇼타의 다친 발은 쇼타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방치된다. 그들의 환부는 부위만 같을 뿐 각각 사회와 대안 가족에 의해 곪아간다. 즉, 영화는 쇼타와 오사무의 환부에 외면하는 방관자를 다르게 지목한다. 이 뒤바뀐 진술 사이에 하츠에의 죽음이 있다. 사회 시스템의 부재가 가족의 내부결함으로 도치되는 경계에서 가족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주던 집으로서의 하츠에가 사라지는 건, <어느 가족>이 함께 지목하려 했던 두 의문을 스크린 위에 세우기 위한 서사적 결단인 셈이다.
유사 가족의 무력함 이전에 가족 내에 떠돌던 생기를 목격했던 나로서는, 취조실의 조사관이 시바타 가족에게 묻는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킨 게 양심에 걸리지 않았나요?”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해요.”와 같은 선명한 발언들이 시바타 가족에게 심정적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 같아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조사관의 물음은 언젠가 시바타 가족이 스스로 물었어야 하는 지연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오사무의 “가르칠 게 도둑질밖에 없었다.”와 노부요의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워왔을 뿐이다.”라는 답변이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오사무가 아버지로서의 해야 한다고 믿었던 역할이 오인된 착각이었고, 자신의 상처가 아이에게 이어지지 않게 하려던 노부요의 애처로운 자기방어였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끝끝내 가족으로 불리지 못하고 다시 부모를 잃어버린 쇼타와 아파트 난간으로 내몰린 린의 얼굴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가족의 형성과 해체만 보여줄 뿐 아이들은 시작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이 막을 내린다.
<어느 가족>의 돌아온 결말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략된 세계를 보여준다. 시바타 가족은 쇼타를 버리고 도주하려다 한 빛에 포착되는데, 조명을 든 주체가 등장하지 않아 마치 객석에서 뻗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마치 쇼타를 버리려는 시바타 가족의 이기심이 관객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에 이어서, 취조실 장면에서도 시바타 가족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흡사 그들이 관객에게 답변하는 듯 보인다. 사회와 유사 가족, 두 집단 모두의 불완전함을 전시하며 끝나는 영화는 막연한 낭만주의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시작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리가 침묵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고 스스로 난간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쇼타가 이제는 아빠를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유리를 구해줄 새로운 가족의 부재와 쇼타의 속삭임이 오사무에게 닿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벽하진 않지만, 쇼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유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목격자로서 관객이 존재한다. 시바타 가족의 자기변호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언급한 영화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유리와 쇼타가 자라 오사무와 노부요가 될지도 모르는 심증만 남은 재판에서 유일한 증인인 관객이 발언할 차례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헤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말 없는 주인공은 흥행 보증 수표?!
대사 없는 주인공을 내세워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이 있다.
<늑대소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그리고 <소리도 없이>는 말 없는 주인공으로 흥행에 성공해 주목받은 작품으로, 대사 없이 캐릭터의 표정과 몸짓으로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준 캐릭터들에 대한 호평도 쏟아졌다.
대사 대신 더 다양한 눈빛과 표정 연기, 때로는 절제된 감정선 등을 녹여 더 입체적인 캐릭터를 그려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 영화 3편의 주인공을 알아보자.
<늑대소년>의 '철수'
2012년 개봉해 700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늑대소년>은 순수한 시골 소녀 ‘순이’와 늑대소년 ‘철수’의 아름답고 깨끗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극 중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습득하지 못한 ‘늑대소년 철수’를 맡은 송중기는 대사 없이 눈빛으로 표현하는 연기가 힘들게 느껴졌지만, 늑대소년을 표현하기 위해 마임을 배우면서 늑대의 움직임과 호흡을 연구하고, 영화 <반지의 제왕>부터 <동물의 왕국>까지 수십 번 반복하며 탐구했다고 한다. 많은 탐구와 노력으로 거칠고 야생적이면서도 속은 순수하고 여린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흥행에 힘을 더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엘라이자'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거머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목소리를 잃은 청소부 ‘엘라이자’와 비밀 실험실에 갇힌 괴생명체와의 만남을 그린 로맨스 판타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환상적인 연출과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애틋함을 섬세하게 표현한 배우 샐리 호킨스의 열연으로 국내 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소리도 없이>의 '태인'
<소리도 없이>에서 유아인이 연기한 소리 없는 청소부 ‘태인’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말을 하지 않는 인물로 배우 유아인이 연기 인생 최초로 대사 없는 캐릭터에 도전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태인의 생활 연기를 위해 삭발을 하고 15kg 증량을 감행하며 캐릭터를 완성시키는데에 많은 열정을 녹여낸 배우 유아인은 어쩌다 맡은 의뢰로 계획에도 없던 범죄에 휘말리게 된 ‘태인’의 복잡하고도 혼란스러운 감정을 단 한마디의 대사 없이 오로지 눈빛과 몸짓만으로 200% 표현해 내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
- ‘클수록 좋다’의 늪에 빠진 24년만의 속편
시대는 바뀌었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콜로세움에서는 차세대 검투사가 등장, 보다 크고, 강하며 잔인한 적들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 24년 만에 귀환한 <글래디에디터 2>는 웅장하고, 퇴폐미 가득하며,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공허하다. 마치 극 중 배경인 칼리굴라 시대의 로마처럼 풍요 속 빈곤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24년이 지나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막시무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막시무스(러셀 크로우)가 전설이 된 지 20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로마는 쌍둥이 황제 게타(조셉 퀸)와 카라칼라(프레드 헤킨저)라는 또 다른 폭군이 등장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을 이끄는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 장군은 왕들의 명을 받들어 전쟁을 계속한다. 그가 이끈 군대에 대패 후 노예로 전락한 루시우스(폴 메스칼)는 권력욕에 사무친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의 눈에 띄어 검투사의 길을 걷는다. 자신과 악연이 된 아카시우스의 목에 칼을 겨누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콜로세움에 입성, 쌍둥이 형제가 연 경기에 참여한다. 목숨을 건 대결을 펼친 그는 출생의 과거와 자신이 진자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결전의 날을 맞이한다.
속편의 속성이 있다. 1편의 성공 사례를 밑바탕으로, 전편보다 크게 만들면 된다는 논리.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특히 긴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속편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글래디에이터 2>의 가장 아쉬운 지점은 ‘클수록 좋다’는 속편 논리에 너무 기댄 점이다. 1편의 대대적인 성공을 앞세워, 제작한 속편은 더 많은 인물, 더 커진 액션 시퀀스를 내세운다. 폭군은 전편보다 배가 되었고, 여기에 진짜 빌런인 마크리누스가 추가된다. 더불어 해상 전투를 시작으로 콜로세움 내에서 벌이는 해전 등 기존 1편의 액션보다 다르고, 더 커진 장면을 깔아놓는다.
이런 외형 구조를 키워 놓은 것만큼 새로운 인물과 서사가 함께 잘 따라가느냐가 중요한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인물이 너무 납작하다. 입체감이 너무 떨어진 나머지 특색이 없어 관객이 그들의 감정을 비집고 들어가 틈이 없다.
극 중 막시무스의 바통을 이어받은 루시우스의 매력은 극을 이끌고 갈 카리스마도, 큰 일을 해야 하는 당위성도 부족하다. 폴 메스칼의 연기 때문은 아니다. 막시무스의 그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캐릭터가 짊어져야 하는 분노가 너무 많다.
막시무스의 경우, 가족을 죽인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를 향한 응어리진 분노를 갖고 끝까지 달렸다면, 루시우스는 아내를 죽인 원수인 아카시우스, 자신을 버린 줄 알았던 엄마 루실라(코니 닐슨), 그리고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마크리누스 등 분노의 대상이 너무 많다.
이 모든 분노를 동력 삼아 달려가기엔 루시우스가 너무 벅차보인다. 과거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 한순간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할 인생의 굴곡, 울분 등도 플래시백으로 보이지만, 관객이 그의 감정을 이해하기엔 너무 제한적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막시무스가 열어놓은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 나가기 위해 등장한 인물로만 보인다. 그나마 입체적으로 보이는 건 마크리누스다. 그는 악마적인 책략가로서의 이중성, 그리고 그가 왜 그런 야망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사가 나오면서 그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된다.
이렇다 보니 어느새 영화의 주인공은 막시무스가 된다. 극 중 인물들의 입에서 나오는 전설이 된 그의 이름, 콜로세움 지하에 놓인 그의 물건들이 나올 때 마치 막시무스가 살아 돌아온 느낌을 받는다.
이렇듯 영화는 막시무스의 자장 안에 머문다. 최고의 검투사이자 영웅의 유산을 적절히 활용하고, 이를 도약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야 하지만, 정작 영화는 머무는 길을 택한다. 1편과의 유사성은 둘째 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 시간이 갈수록 흥미는 떨어진다. 이럴 거면 막시무스가 환생해 나오는 게 더 나을 뻔했다.
그럼에도 리들리 스콧 감독이 펼치는 웅장한 스펙터클은 이 영화를 간신히 끌어올린다. 전편과 다른 해상 전쟁, 유혈 낭자한 콜로세움 결투, 로마 시대를 구현한 미술 등 볼거리는 충족시킨다. 마치 이런 영화는 큰 스크린에서 봐야한다는 감독의 말을 전하는 듯한 느낌이다. 물론 1편보다 강렬함을 덜하지만 그럼에도 볼거리는 충족한다.
전편을 넘는 속편이 나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게 리들리 스콧 감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4년 만에 돌아온 검투사 이야기가 반갑기는 하지만, 그냥 전설은 전설로 남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냥 보리밭을 손으로 느끼며 걸어간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가 그립기만 하다.
덧붙이는말: IMAX 시사회로 관람했는데, 비율 자체가 IMAX 화면에 꽉 차지는 않아서 아쉬움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돌비시네마 또는 스크린X로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사진 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2.5 / 5.0
한줄평: 막시무스가 보고 싶다!
-
- '샹치'의 흥행이 이터널스에 미치는 영향
마블의 첫 아시안 히어로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북미 개봉주 주말 3일 동안 7,140만 달러 (한화 약 830억)를 벌어들이며 고전 중이던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9월 첫째 주 월요일 노동절 연휴까지 끼어있어 ‘샹치’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기록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러한 흥행은 여태까지 헐리웃 내에서 ‘아시안’ 영화에 대한 장벽을 무너뜨린 흥행이라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개봉주 주말 3일간의 성적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 하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인데요. 1위 <블랙 위도우>의 8,030만 달러를 뛰어넘진 못하였지만, 흥행 시리즈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F9)의 7,000만 달러는 뛰어넘으며 새 기록을 쓸 수 있었습니다.
디즈니+와 극장 동시 공개를 택한<블랙 위도우>와 달리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현재 극장에서만 상영되고 있는데요. ‘샹치’의 흥행이 디즈니가 코로나19의 영향 아래에 있는 디즈니-마블 영화의 개봉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디즈니는 현재 <프리 가이>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그 이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개봉 방식’에 대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요. 가장 근래에 개봉할 영화 <이터널스>가 과연, <블랙 위도우>의 선례를 따를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선례를 따를지 또한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샹치는 북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흥행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한국 시장에서의 흥행이 특히 돋보입니다. 중국 개봉이 불발된 ‘샹치’의 동아시아 성적이 매우 중요한 가운데, ‘샹치’는 한국에서 9월 1일 개봉 이후 주말 3일 동안 관객 수 53만 명을 모으며, 55억에 달하는 매출액을 달성하였는데요.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로 가득 찬 국내 극장가에서 ‘마블’의 저력을 볼 수 있는 주말이었습니다. '샹치'의 이러한 흥행이 추석까지 이어질 지 또한 주목되는 가운데,
과연, 디즈니가 ‘샹치’의 흥행에 어떠한 결정을 내릴지
<이터널스>를 극장에서 먼저 볼 수 있을지
그리고 <이터널스>가 코로나 시대의 새 역사를 쓸 수 있을지 같이 지켜봐주시길 바라며,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
-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오늘의 영화는 바로,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입니다.
ⓒ 네이버 영화
정보
개요 드라마 | 한국 | 19분
감독 정가영
출연 정가영 등
줄거리
영화감독 가영은 조인성을 캐스팅하고 싶다. 아직 시나리오는 없지만.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의 T.M.I
ⓒ 다음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 속 조인성 ?
조인성 배우가 캐스팅 된 과정은 영화와 비슷하다. 정가영 감독은 소속사에 시나리오를 보냈고,
조인성 배우가 직접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게다가 조인성 배우는 영화에
노 개런티로 출연을 했다고 한다.
촬영 날 감독과 통화 하면서 음성을 동시 녹음을 했는데, 조인성 배우가 네 번의 테이크를 가면서 각 테이크마다
다른 애드립을 해줬다고 한다.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
ⓒ 네이버 영화
연출자라면 누구나 꿈 꿔 봤을 상황. 그러한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이 영화로 실현이 되었을 때,
그 쾌감이 얼마나 컸을까.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정가영 감독의 신선한 상상력에 더해 발칙한 대사의 향연이 영화의 매력을 배로 늘렸다.
"한정적이지만"
ⓒ 네이버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를 보면 여러 방면에서 한정적인 요소가 많이 눈에 띄었다.
한정적인 공간, 한정적인 매개체, 한정적인 인물 등,
정가영 감독은 이러한 한정적인 요소에서도 다채로운 영화를 보여주었다.
19분이라는 짧은 시간 속, 원 로케이션을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몰입감 높게 전개했다.
"자연스러움"
ⓒ 네이버 영화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러한 생각이 들곤 한다. '이거 진짜 연기인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대사, 그리고 그 대사를 하는 연기톤 모든 게 너무 실제 같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제목처럼 조인성 배우에게 빠져들게 되겠지만,
사실 무엇보다도 정가영 감독의 팬이 될 것이다.
정가영을 좋아하세요
"이런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짧지만 강렬한 영화를 찾고 있다?
-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를 찾고 있다?
- 엄마 미소를 짓게 만드는 영화를 찾고 있다?
신선하고 발칙한 상상력이 가득했던!
지금까지 영화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이였습니다.
-----------------------------------------------------------------------------------------------------------
씨네랩 에디터 ria
-
- 이토록 끔찍한 연애
이토록 끔찍한 연애
넷플릭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정서가 불안정한 여자의 연애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메디다. 하지만 다른 많은 할리퀸 로맨스처럼 상처가 많고 정서불안인 여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행복해 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미친 전여친’ 장본인인 레베카는 다른 로맨틱 코메디의 여주인공들처럼 사랑스럽거나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드라마를 보다가 '레베카가 내 친구면?'이란 질문을 받는다면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것이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레베카가 정말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 첫 사랑을 우연히 만나 그것이 운명이라 믿고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버리고,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의 여자친구와 친해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갖은 노력을 다 한다.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들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 뒤에도 평화롭고 일상적인 연애는 불가능 하다. 자기파괴적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혼자 머릿속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백년해로까지 한 상태다. 그냥 평범하게 '정상적'으로 행동할 순 없는거냐는 의문이 들면서, 이런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 '정상이 뭔데?'
인간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사실은 어느 정도 미쳐 있다. 거기다 좋든 싫든 서로 섞여 살면서 매일 남의 못 볼꼴을 봐야 인간 사회에 나오면 다들 증세가 더 심해 진다. 매일 남들의 미친 짓을 코앞에서 강제로 구경해야 하고, 나도 남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은연 중 매일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상의 연속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연애 관계는, 이미 각자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이 1:1로 만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계다. 자연히 더럽고 치사한 꼴을 다른 관계보다 몇 배로 더 많이 볼 수 밖에 없다. 더 인간적이고 솔직해야 유지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모두 좀 더 미친 사람이 된다.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인간 관계는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부 미쳤다고 해서 우리가 맺는 관계가 다 가짜인 건 아니란 점이다.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상처를 주고 받는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자의 상처는 이미 받은 것이고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인간들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의 생채기를 멈추겠다고 모든 문을 닫고 그 어떤 인간과도 교류하지 않을 순 없다. 그것은 또다른 방식의 미친 사람이 되는 지름길일 뿐이다.
인간은 애석하게도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형식으로든 타인과 상호 작용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누군가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각자 결정해야만 한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인간에게 관계란 생존의 문제니까.
이 드라마를 시청하다가 레베카에게 진절머리가 나게 되는 이유는, 그녀가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모습을 스크린 속에서 여과없이 재연하는 캐릭터기 때문이다. 평소에 내가 정상적인 척, 감정 기복이 없는 척, 이성적인 것처럼 간신히 연기하며 살아 가다가 내가 애써 감춰 놓은 그 모습을 누군가 격렬하게 표출하는 걸 지켜보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레베카를 욕하고 그녀를 향해 탄식하면서도 계속 그녀를 지켜 보게 되는 건 그녀의 대처와 반응이 궁금해서다. 우리도 그렇게 애정을 구걸하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자기중심적 태도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자주). 레베카도 딱히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례 연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리뷰 - 내 청춘을 꽃 피워 줘서 고마워
#꽃다발같은사랑을했다 #일본영화 #로맨스영화
여기 누구보다 잘 맞는 한 커플이 있습니다
그렇게 설레는 시간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서로에게 아쉬움만 커져가는 연인들
이제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가장 화사하던 날의 사랑 이야기
7월 14일 개봉한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입니다
-
- K-스타일의 리메이크 / 말할 수 없는 비밀 / 판타지 로맨스 멜로 / 도경수, 원진아 주연 / 행복한 잔상의 수작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말할 수 없는 비밀"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
- 디즈니+ <최악의 악> 메인 예고편
숨을 멎게 하는 액션부터 예측불가 스토리까지! 지창욱X위하준X임세미 [최악의 악] 메인 예고편 공개 9월 27일, 오직 디즈니+에서
-
- 디즈니+ <에코> 티저 예고편
2024년의 시작, 마블이 선사하는 강렬한 액션 스타일? 고통과 분노에서 시작된 가장 잔혹한 대결의 서막 디즈니+ 마블 오리지널 시리즈 [에코] 1월 10일 디즈니+ 모든 에피소드 단독공개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