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7-05 23:23:46
[BIFAN 데일리] 애정의 물성, 물성의 애정
영화 <일시정지>

감독] 서원태
출연] 정윤철, 임필성, 임대형 등
프로그램 노트] 뉴욕에 5만 5천 점이 넘는 방대한 보유작을 자랑하는 ‘킴스 비디오’의 김용만 대표가 있다면, 광주에는 비디오 5만여 점과 책 5만여 권을 평생 수집해온 ‘호모 시네마쿠스’ 조대영 광주 동구 인문학당 디렉터가 있다. 그는 방위병으로 복무하던 1991년, ‘굿펠라스’라는 영화동아리를 결성한 이래 30년 넘도록 광주 지역 영화 운동에 몸담아왔다. 조대영의 방대한 VHS 비디오 수집품 중 약 2만5천 점을 2022년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원초적 비디오 본색〉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다. 이른바 ‘시네필’ 문화가 싹텄던 1990년대, 남한에서 VHS 비디오는 서구 시네마테크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대체하는 물리적 지지체였다. 〈원초적 비디오 본색〉 전시를 계기로 제작된 〈일시정지〉는 함께 모여 필름 대신 비디오를 보았던 또 다른 ‘굿펠라스’들이 들려주는 ‘비디오 본색’에 대한 이야기다. (신은실)
이 영화는 비디오를 처음 틀었을 때의 컬러 화면으로 시작한다. 순간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장면인지 얼떨떨한 동시에, 저 이미지 자체가 진작에 지난 세기의 것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비디오라... 유치원 시절을 떠올린다. 유치원이 마치면 차량 한 대가 아이들을 동네 별로 나누어 1호차, 2호차, 3호차 순서대로 태워 날랐고, 3호차를 탔던 나는 1호차와 2호차로 먼저 떠나는 아이들이 다음 장면을 궁금해할 때 느긋하게 앉아 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주로 디즈니 영화나 <호호아줌마> 같은 걸 봤고, 매일 유치원의 일상을 마치는 순간은 어떤 비디오를 틀지 고르는 시간이었다. 이따금 흥미 없던 로봇 만화 같은 것을 무감하게 보았던 기억도 난다. 일시정지를 눌렀을 때 화면에 은색으로 실금처럼 그어져 올라가던 노이즈도. 되감기, 빨리감기, 같은 글자와 그때의 소리들도.
생각해 보니 제목인 ‘일시정지’는 아직 존재하지만 영문 제목에 들어간 ‘rewind’, 되감기라는 단어도 이미 사라진 것 같다. “10초 앞으로” 혹은 “30초 뒤로”가 있을 뿐이다. 시간의 흐름은 그렇게 모든 것을 멀리 보낸다. 신기술은 옛 것이 되고, “첨단 사업 전람회장”을 담은 뉴스는 꼭 박물관에서 미디어 아트로 틀어줄 것만 같다. 비디오도 이미 그런 존재가 되어 있다.

이 영화는 비디오 세대를 기억하는, 통사적인 관점에서 비디오 시대를 말해줄 수 있는 여러 명의 감독 인터뷰를 꼼꼼하게 담았다. <말아톤>, <대립군> 등을 연출한 정윤철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었다. (옛날 이야기 맞지만.)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OTT 경쟁 시대인 지금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갖고 사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만 해도 사적인 상영 공간이란 부재하는 개념이었다. 80년대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집이 하나둘 늘어나고, 90년대에는 급부상한 비디오 플레이어와 함께 비디오 렌탈점이 성행한다.
비디오와 영화는 서로 영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성장한다. 비디오가 영화 필름의 질감을 담으려 노력했던 시절이 있는데, 필름과 필름 사이 자신의 무언가를 밀어 넣던 사람들의 노이즈 자글자글한 예술 세계가 있었는데… 이제 어디서 필름 생산을 멈췄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다 못해 캠코더조차 ‘레트로 감성’으로 인기몰이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계에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터뷰어들이 비디오에, 비디오 가게에 품은 그리움 또한 흥미로웠다. 유튜브만 뒤져도 전문가의 영화 추천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엔 비디오 가게가 장르적 추천 기능을 했고, 좋은 영화를 많이 추천해 주었다는 아르바이트생의 존재는 마치 ‘무림고수’처럼 느껴져 재미있었다. 영화 모임 기록도 있고. 서로의 영화 리스트를 직접 볼 수 있고, 얼굴을 맞대며 알 수 있었으니 사실 요즘의 모임들보다 더 솔직하고 흥미로웠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키워내기 딱 알맞은 자리였을 것이다. 좋은 영화를 서로 추천하고, 복제하고, 나눠 보고… 그러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태동했을 것이다. 1980년 광주 관련 영상물이나, 아직 일본 문화가 개봉되기 전의 <러브레터>도 그렇게 번졌다.

과거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이 영화가 과거를 위무하는 데만 그쳤다면 아쉬웠을 것이다. 과거를 위무하는 마음은 이후 세대에게 필연적으로 위화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들의 말에서도 나로서는 조금 위화감을 느꼈다. 90년대 ‘에로 영화’와 맞물렸던 비디오 문화의 성행을 말하면서, 에로 영화 사장 이유로 페미니즘과 성 인지 감수성만을 언급했지만, 매체의 변화와 궤를 같이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 인지 감수성과 페미니즘이 이유였다면 포르노 시장, 끔찍한 디지털 성범죄가 없었을 테니까. 우리 사회 성 인지 감수성이 뭐 얼마나 높다고 이럴 때만 “아쉬움”의 사유 자리에 놓이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불어 인터뷰어들 말대로 에로 영화 소비층의 존재가 기술의 발달에 기여한 점도 분명 있겠지만… 양으로만 기능할 수 있나? 음으로도 기능했다. 언급된 마틴 스콜세이지 같은 헐리우드 감독에 비해 과거 우리 나라 영화 감독을 디깅하는 문화가 잘 정착되지 않은 이유는, 과거 한국 영화의 이미지 브랜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성 인지 감수성”을 비롯해 다양한 감수성이 낮은 영화들과 맞닥뜨리거나, 그걸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아쉬움 타령 듣는 건 별로 재미있지 않아서.
그런 위화감도 잠시, 영화는 과거의 낭만과 풍요를 말하면서도 과거의 낭만만을 그리지 않고 나아간다. 유해환경 정화를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대통령의 “헌법적 능력”까지 써서 “불량 비디오”를 금지했던 시절도 있었다. 물론 청소년 보호구역에 성인 비디오 가게가 횡행하는 일은 지양해야 옳지만, 이외의 사적인 비디오에 관해서라면, 과연 관에 의해 이렇게 쓸어버리는 형태가 옳은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미풍양속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나, 관이 쓸어버리는 형태도 아름다운지.
그것도 다 옛 일이다. 이제는 물성으로 소유하는 것이 약해진 시대. 책도 영화도 모두 손에 잡히는 물성을 잃고 구독 경제의 사이클로 들어가 버렸다. 언제든 스크린에 띄워 볼 수 있지만, 구독을 해지하는 순간 스크린에 띄울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구독 경제에 저항감이 있었으나, 지금은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과 영화를 소유하지 않고도 언제든 볼 수 있으니, 구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이득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실제로는 ‘찜’, ‘보고 싶어요’만 바삐 눌러 놓으면서도.

그래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충격이었다. OTT에서 내려가면 그 영화를 더 볼 수 없고, OTT의 큐레이션은 대체로 작품성과 다양성보다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의 이득을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갈수록 자극적이 되어 가는 데 반해 인간에 대한 고민은 옅어져간다고 느꼈던 어떤 작품들을 떠올렸다.) 기술 발전만 보면 모든 것을 클라우드에 올려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현실은 오히려 물리 매체로 영화를 보던 시절에 비해 영화의 다양성이나 폭이 더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외로 그 사이 사라지는 영화들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은 내게 충격이었다. 그렇지. 기술의 발전이 꼭 우리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한복판에 살고 있으니, 자본의 논리를 완전히 제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영화 또한 자본 없이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세상에도, 지켜야 할 무언가는 있지 않을까. 비록 마이너해도, 많은 사람의 사랑과 선택을 받지 않아도, 자극적인 맛 하나 없이 슴슴하다 못해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그런 작품들의 자리를 작은 섬처럼 빼꼼 내어줄 필요 있지 않을까. 그 자리에서 안온하게 쉬어 갈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사람들이 또 있을 테니까. 인터뷰 중 나온 말처럼, 맥락 속에서 아카이브는 살아있을 것이다.

물성 없는 시대, 여전히 애정은 물성에 어린다. 비디오가 없는 시대는 굿즈 포화의 시대이기도 하다. 나는 영화 굿즈를 꼬박꼬박 모으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굿즈들은 집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 영화와 눈 맞춘 시간을, 영화가 내게 와 닿고 나를 바꿔준 지점을 기억하고 싶어서. 영화는 스크린 위를 흘러가고, 장면은 짧게 눈 맞춘 후 멀어지지만, 굿즈는 내 손에 남아 있으니까. 이 찐득한 애정을 물성으로 만져보곤 한다…고 얼마 전에 일기처럼 쓴 적이 있다. 언젠가 먼 훗날, 이들이 비디오를 추억하듯 나도 굿즈를 만지작거리며 애정의 물성을 이야기하게 될까.
2023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6/29-7/9) 상영시간표
7월 2일 20:00-21:02 CGV소풍 8관 (상영코드 443)
7월 5일 17:00-18:02 부천시청 판타스틱큐브 (상영코드 722)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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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는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곁에 있을거야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아 관람 후 작성했습니다. :)
노웨어 스페셜
존(제임스 노튼)은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창문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존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에게는 새로운 가정이 필요하다.
마당이 있는 넓고 좋은 집, 많은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는 집, 아이를 바라는 다양한 후보들 사이에서 존은 망설인다.
마이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결정을 자신이 내려도 괜찮을까. 마이클은 아빠의 죽음과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을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다.
훗날 자신의 부모를 궁금해할 마이클을 위해 ‘기억 상자’에 물건들을 하나하나 담듯이 영화는 존과 마이클의 마지막 여정을 한 장면 한 장면 소중히 눌러 담는다.
죽음을 말하는 방법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전작 <스틸 라이프>(2014)는 누구나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 삶과 사람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이번 영화 <노웨어 스페셜>은 예견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는다. 존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마이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죽음은 회색 하늘로 날아간 빨간 풍선과도 같다. “슬픈 게 아니라 그냥 없어”져서 보이지 않는 것.
마이클은 동화책과 빨간 풍선, 움직이지 않는 딱정벌레를 통해 죽음을 이해한다. 감독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삶에 더 집중한다.
<스틸라이프>가 죽음 이후에 삶을 되짚어 보았다면, <노웨어 스페셜>은 죽음의 앞에 선 채로 삶을 응시하고, 죽음 이후에 남는 것을 찾아내려 하는 영화다.
존의 희망
아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와 너무 일찍 죽어버린 아빠. 존은 마이클이 친부모를 잊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신을 "창문 청소부로" 기억하기를 바란다.
마이클을 위한 기억 상자에도 창문 청소도구는 빠지지 않고 담긴다. 창은 존재하되 보이지 않아야 한다.
존은 자신이 보이지 않더라도 마이클이 자신의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존에게 있어 유리창은 현실과 이상의 경계이다. 창의 존재조차 잊을 정도로 깨끗이 닦아낸 창문 너머의 풍경은 그가 닿을 수 없는 희망을 담고 있다.
창 너머의 단란한 가족, 장난감으로 가득한 아이의 방, 교복을 입은 아이. 창 너머의 삶과 행복은 존이 바라던 삶의 모습이다. 손에 닿을 듯 보이나 창문 너머로 갈 수는 없다.
존의 생일 케이크에 마이클은 서른네 개의 초를 꽂는다. 그리고 붉은색 초 하나를 존에게 건넨다.
존은 그 초를 꽂은 서른다섯 번째 생일 케이크를 볼 수 없지만, 마이클의 곁에 있기를 바란다.
타오르지 못할 붉은 초 하나는 기억 상자에 고이 담긴다.
마이클을 위한 기억 상자는 마이클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존의 희망이 담겨 있다.
For Michael, 마이클에게
존과 마이클은 서로를 깊이 바라본다. 서로의 모습을 한순간이라도 더 눈에 담겠다는 듯이 말이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사려 깊음이 묻어난다.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하면 카메라는 말을 끊지 않고 지그시 바라봐준다. 서로의 얼굴은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자세히 본다.
존의 수척하고 푸석한 얼굴과 마이클의 섬세한 표정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마이클은 존의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거칠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과 떨리는 손을 본다. 존은 마이클의 옅은 미소와 뾰로통한 입술로 표현되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응시한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는 정다운 투샷을 놓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모습을 소중하게 담아 간직하려는 것처럼.
존은 마이클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기억 상자에 담는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은 그 자체로 두 사람을 위한 하나의 앨범 혹은 '기억 상자'와도 같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서로를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시선으로써 서로의 기억을 존재 깊숙이에 각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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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뒤에 있는 이들이여~ 따봉! <스턴트맨>
라이언 고슬링, 에밀리 블런트, 애런 존슨, 해나 워딩엄, 테레사 팔머, 스테파니 수, 원스턴 듀크. <스턴트맨>의 주요 출연진은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과 함께 엔딩크레딧을 수놓은 이들 또한 주요 출연진이라 말한다. 더 나아가 한 작품을 위해 피, 땀, 눈물을 흘린 이들의 노고가 만든 결과물이라고 강조한다. 카메라 앞이 아닌 카메라 뒤에 있는 이들을 위한 헌사! <스턴트맨>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플롯 부분에 덜컹거림은 있지만, 끝내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한다. 그건 영화가 가진 그 진심이 와닿기 때문이다.
언제나 ‘따봉’을 추어올리며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는 스턴트맨 콜트(라이언 고슬링). 하지만 할리우드 액션 톱스타 톰 라이더(애런 존슨)의 대역으로 고난도 추락 액션 장면을 촬영하다 큰 사고를 당한다. 이후 그는 잠적한다. 촬영 당시 연인이었던 촬영 감독 조니(에밀리 블런트)의 연락에도 잠수를 탄 그의 새 직장은 한 레스토랑. 어울리지도 않는 발렛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그에게 프로듀서 게일(한나 워딩업)이 연락한다. 조디의 감독 데뷔작 <메탈스톰>에 스턴트맨으로 도움을 달라는 것. 그 즉시 호주 시드니로 향한 콜트. 조니와 운명적인 재회는 했지만, 싸늘한 기운만 감돌기만 한다. 한편, 게일은 콜트에서 실종된 톰을 찾아달라 부탁하고, 콜트는 조디의 첫 장편에 도움을 주기 위해 톰을 찾아 나선다.
<스턴트맨>의 원제는 <The Fall Guy>다. 1980년대 TV 시리즈 <The Fall Guy>(한국 방영 시 제목은 <스턴트맨>)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철저히 그 시대 만들어진 작품의 콘셉트와 분위기를 오롯이 가져온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바로 액션. <데드풀 2> <불릿 트레인>의 데이비드 리치 감독이 스턴트맨 출신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지만, 최대한 CG를 배제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뒹구는 리얼 액션을 보여준다.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와이어 추락 장면은 물론, 극중극인 <메탈스톰> 해변 차량 전복 장면, 도심 차량 액션, 후반부 <메탈스톰> 촬영지에서 벌어지는 카체이스 장면 등 그동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이제는 자주 볼 수 없는 리얼 액션을 선사한다. 중요한 건 액션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와이어 추락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면서 스턴트맨이 하나의 액션 장면을 촬영할 때의 긴장감은 물론, 다양한 감정선을 다룬다. 이처럼 액션 전에 전사를 삽입하면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로 인해 액션이 액션으로만 소비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한다. 그리고 액션을 통해 다양한 감정선을 전하는 데도 성공하며 몰입감을 증대시킨다.
이는 콜트와 조디의 재회와 관계 봉합 과정에서 도드라진다. <메탈스톰> 첫 와이어 액션 장면에서 조디가 가진 그동안의 서운함을 콜트에게 퍼붓는데, 그 방식은 계속 ‘컷’을 외치며 바위에 부딪히는 장면을 찍게 하는 것. 분이 풀릴 때까지 컷을 외치는 조디와 이를 수긍하면서도 힘들어하는 콜트의 모습은 액션으로 감정선을 전달하는 좋은 예로 보인다. 더불어 가라오케에서 콜트를 기다리며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를 부르는 조디와 그녀에게 가기 벌이는 콜트의 카체이싱 장면이 교차편집으로 보이는 장면도 영화가 추구하는 액션 기조를 잘 보여준다.액션만큼 중요하게 다룬 건 역시 멜로. 콜트와 조이의 관계를 보면 1980~90년대 <로맨싱 스톤> <전선위의 참새> 등 할리우드 액션 로맨스 영화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사랑하지만 오해를 거듭하고, 싸우고 하는 가운데에서도 절명의 위기에 진심을 고백하고, 끝내 찐한 키스로 사랑에 골인하는 이 공식을 영화는 그대로 차용한다.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분할 컷을 통해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조성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등 와해된 관계가 다시 좁혀지는 그 과정을 그린다. 물론, 배를 몰며 조이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콜트의 모습이 올드함을 주고,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이 이뤄지는 결말이 다소 식상하긴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절의 분위기를 잘 구현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스턴트맨>은 영화에 관련된 직업인들의 애환과 직업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콜트와 조이 등 주요 인물들은 카메라 앞이 아닌 뒤에 선 이들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영화라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한다. 관객들의 박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하나로 일을 하는 이들이다. 와이어 추락 사고 이후 콜트가 촬영장에 돌아가지 않는 건 일에 대한 자부심에 스크래치가 났기 때문이다. 부끄러움도 있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 콜트가 다시 촬영장에 돌아간 건 저버릴 수 없는 영화를 향한 사랑, 그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내며 얻는 그 기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열망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이를 ‘영화’로 바꿔 본다면 콜트의 이같은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더 나아가 감독은 후반부 영화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톰과 게일의 수난사를 통해 이를 부각한다. 이 장면은 조이의 전두지휘 아래 펼쳐지는 액션 장면처럼 보이는데, 카메라는 톰과 게일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스턴트맨 이하 스탭들의 모습을 담는다. 이들의 노력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극장에서 즐기는 영화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스턴트맨>은 마지막까지 이 메시지를 전한다. 성룡 영화 엔딩크레딧에서 자주 봤던 액션 NG 장면이 등장, 손에 땀을 쥐게 한 놀라운 액션의 비하인드가 나온다. 어찌 보면 그 촬영 현장들이 더 영화 같은 생각이 들 정도. <스턴트맨>은 세련되거나 차별화된 스타일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지만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건,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진심이 관객들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CG로 딥페이크로 구현할 수 없는 오로지 사람이 만드는 액션과 영화의 진심. 그 진심이 더 그립고 빛이 나는 시기에 우리에게 당도한 연서와도 같다. 가능하다면 그 진심이 많은 관객들에게 전해지길 바란다.덧붙이는 말: 콜드 역은 라이언 고슬링이 맡았지만, 고난도 액션은 총 4명의 스턴트맨이 담당했다. 드라이빙 대역은 로건 홀리데이, 격투 대역은 저스틴 이튼, 불에 타고 차에 치이는 장면 대역은 벤 젠킨, 낙하 연기 대역은 트로이 브라운이 그 주인공. 그들은 스크린 속 영웅이 아닌 스턴트맨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영웅이다.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있는 호쾌한 액션의 영웅들. 영화를 본다면 이들도 기억하길~~
사진출처: 유니버셜 픽쳐스
평점: 3.5 / 5.0
한줄평: 몸 하나로 만드는 액션 서사만으로도 따봉(엄지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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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비 알고리즘] 빛나고 행복했던 우리의 꿈, 나의 로봇 친구
[무비 알고리즘 Movie Algorithm]:
[무비 알고리즘]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을 하나로 묶어본다. 너무나 달라보이는 영화들. 하지만 영화 하나하나를 조금씩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에게서 어떠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이번 무비 알고리즘의 연결고리는 ‘로봇 친구’이다. 지금부터 로봇 친구라는 연결고리로 묶인 네 편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살펴보자.이른 아침, 나를 깨우는 기계 소리. 윙윙거리고, 철컥거리는 그 소리에 잠깐 놀라지만 이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그것의 목소리. “친구야, 일어나!” 녹슬지 않을까, 꺼져버리지 않을까, 늘 곁에서 보살피고 신경 써야 하는 나의 친구. 하지만 그 친구의 따뜻함과 사랑은 그 귀찮음과 수고를 이겨내게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나에게 가장 행복한 날들을 선물한, 평생의 친구. 나의 ‘로봇 친구’들을 소개한다.
<아이언 자이언트 The Iron Giant>
-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 (1999)
- 감독: 브래드 버드
- 출연진: 제니퍼 애니스톤, 해리 코닉 주니어, 빈 디젤 外
‘회색 빛 친구’
냉전시대가 한창이던 1957년, 미국의 한 시골 마을. 근처 바다 한가운데로 대형 고철 덩어리 ‘아이언 자이언트 (빈 디젤 分)’가 불시착한다. 마을에 사는 아홉 살 소년 ‘호가드 휴즈 (일라인 멜리언솔 分)’는 우연한 계기로 그 고철 덩어리를 만나 그를 구해주게 되고, 그에게 자이언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이렇게 그 둘은 친구가 되어, 즐거운 시간들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 요원 ‘켄트 맨슬리 (크릭스토퍼 맥도날드 分)’가 마을을 찾아온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이언 자이언트의 존재를 장군에게 알리면서, 두 친구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최강 우주병기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착하기만 했던 아이언 자이언트. 그리고 말썽꾸러기이지만, 아이언 자이언트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호가드. 과연 그들의 우정은 변함없이, 영원할 수 있을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영화는 작가 ‘테드 휴스’가 쓴 SF 동화 ‘The Iron Man’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거대 로봇과 소년의 우정이라는 원작의 설정만을 사용했을 뿐, 영화는 상당 부분 수정을 거쳐 탄생했다. 따라서 동화 같이 마냥 따뜻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원작보다 칙칙하고 현실적이어서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소년과 거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많이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거인이 아닌 거대 로봇이다. 이로 인해, 생명체의 따뜻함과 기계의 차가움이 느끼게 해주는 온도차와, 점점 더 가까워지게 하는 온기는 작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겉으로 보았을 때 차갑고 무서워 보였던 자이언트. 하지만, 기계인 자이언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열기인 것처럼, 그의 말과 행동은 뜨거운 온기를 내뿜는다.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해준 호가드와 초월적인 우정을 나누는 자이언트는 영화 내내 호가드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친구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언트의 대사 ‘슈퍼맨’은 수많은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통틀어 놓고 보더라도 상징적이고 기억에 남는 대사였다.
‘내가 되고 싶은 것’
영화는 실사 영화보다 공감이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며, 인물에게 몰입할 시간조차 부족한 짧은 러닝타임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감독 ‘브래드 버드’의 눈부신 재능은 작품에 관객들을 빠져들게 한 것을 넘어서, 무생명체인 로봇에게서 인간보다 더 깊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다. <토이 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 등 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감독이지만 그는 해당 작품을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아마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영화에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자신의 누나가 남편에게 총기로 살해당하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건을 겪고 “총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총은 자신이 총이 되고 싶지 않다면?”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감독의 아픔과 생각은 자연스럽게 자이언트에게 녹아 들었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사실 지구 침공을 위한 정찰기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작중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는데, 정작 자이언트 본인은 자신이 사람들을 해치는 총이 아니라고 말한다. "네가 무엇이 될지는 너 자신이 선택하는 거야”라는 ‘딘 맥코핀 (해리 코닉 주니어 分)’의 말.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자이언트는 결국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불태워 모두의 친구 슈퍼맨이 되었다.
<빅 히어로 Big Hero 6>
- 영화: 빅 히어로 (2014)
- 감독: 돈 홀, 크리스 윌리엄스
- 출연진: 라이언 포터, 스콧 애짓, 다니엘 헤니 外
‘너의 선물, 나의 선물’
샌프란소쿄에 살고 있는 14살의 천재 소년 ‘히로 (라이언 포터 分)’. 형과 유달리 가까웠던 히로는 형인 ‘테디 (다니엘 헤니 分)’의 죽음 이후,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테디가 만든 헬스케어 로봇 베이맥스와 우정을 나누며, 다시 이겨내게 된다. 결국 그들은 형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히로는 테디의 대학 친구들과 팀을 이뤄 ‘빅 히어로 6’를 결성하고, 테디의 원수인 ‘스푸키맨’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한다. 과연 그들은 테디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고 온전히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얗고 푹신푹신한’
해당 영화 역시 원작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마블 코믹스의 동명의 애니메이션이 그 원작이다. 그러나, 작품 속 베이맥스는 평소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마블의 슈퍼히어로들과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하얗고 푹신푹신한 힐링 로봇인 베이맥스는 정말 보기만 해도 귀여워 곡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저절로 갖게 만든다. 또한 필자는 베이맥스가 동그랗고 하얘서 히어로가 아닌 사랑스러운 곰인형을 보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 5살만 어렸다면 부모님께 사달라고 졸랐을 것 같은 정도였다.
작품에는 베이맥스뿐만 아니라, 테디의 친구들로 구성된 언럭키 어벤져스 느낌의 ‘빅 히어로 6’팀도 등장해 화려한 액션신 을펼친다, 이로 인해 슈퍼 히어로 영화의 느낌도 살짝 느껴진다. 또한 ‘샌프란소쿄’라는 이름의 샌프란시스코와 도쿄를 합쳐놓은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동서양의 문화가 만든 독특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특히 영화는 주인공의 이름이 ‘히로’인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볼 수 있던 연출과 오마주를 찾는 재미도 있다.
‘너만을 위한 나’
이렇게 시각적 재미를 뒤로 하고 스토리를 놓고 보더라도, 영화는 히로와 베이맥스의 우정을 전형적이지만, 단단하게 표현했다. ‘상실의 그림자 속에서 피어난 우정’ 이 말이 베이맥스와 히로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인듯 하다 사고로 형을 잃어 완전히 고립된 히로 앞에 나타난 베이맥스는 히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어딘가 뚝딱거리고 서투르지만 진심으로 히로를 걱정하는 베이맥스의 마음과, 베이맥스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활력을 되찾는 히로를 보며 우리를 미소 짓게 된다.
사실 포스팅을 위해 영화를 다시 보기 전에는, 내가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단순히 베이맥스의 귀여운 외모에 홀려 영화 전체를 미화하여 기억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중에서 슬퍼하는 히로를 위로해주기 위해, 베이맥스가 틀어주는 녹화된 형 테디의 영상 기록을 틀어주는 장면을 비롯해 섬세하게 쌓여가는 둘의 ‘친구되기’ 과정들을 보고 역시 <빅 히어로>는 따뜻하고 좋은 영화가 맞다는 확신을 했다.
영화 속에서 베이맥스는 히로에게 "나는 당신의 건강 관리를 위해 존재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베이맥스는 단순히 건강을 돌보는 로봇이 아니라, 히로의 마음을 치유하고 성장을 돕는 존재이다. 이처럼 "빅 히어로"는 우정이 단순한 친구 관계를 넘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성장하게 만들어 결국 모두를 ‘히어로’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와일드 로봇 The Wild Robot>
- 영화: 와일드 로봇 (2024)
- 감독: 크리스 샌더스
- 출연진: 루피타 뇽오, 페드로 파스칼, 캐러린 오하라, 빌 나이, 킷 코너, 마크 해밀 外
‘처음 널 만난 순간부터’
운송 중 사고로 인해 유니버설 다이나믹스社(사)의 한 로봇이 야생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 로봇의 이름은 ‘로줌 유닛 7134 (루피타 뇽오 分)’. 인간을 돕기 위해 설계된 최첨단 로봇이었다. 그렇게 야생에 떨어진 로줌은 야생의 생활을 익히던 중, 한 기러기의 알을 구하게 되고 그 알에서 기러기가 태어난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로줌를 따라다니는 기러기. 그렇게 로줌은 그 기러기의 엄마가 된다. 결국 로줌은 새에게 ‘브라이트빌 (킷 코너 分)’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를 돌보고 교육시키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입력시킨다
브라이트빌이 겨울 이주를 위해 비행법을 배우는 동안, 로줌은 여우 ‘핑크 (페드로 파스칼 分)’와 함께 동물들과 협력하며 섬 생태계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브라이트빌이 자신이 남들과 다른 것과 로줌이 자신의 부모를 실수로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로줌을 찾으러 유니버설 다이나믹스社(사)의 로봇들이 섬에 도착하는데, 과연 로줌과 브라이트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로봇 생존기’
대부분의 로봇이 나오는 영화가 그러하듯이 로봇 캐릭터는 낯선 곳에 도착해 경계 받는 미지의 존재처럼 등장한다. 해당 영화에서 로줌은 정말 특별한 환경에서 새롭게 살아간다. 로줌이 도착한 곳은 인간의 손길 하나 닿지 않은 자연이었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자연. 그곳에서 로줌은 모든 동물들의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고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최첨단 기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자연에 적응하는게 아니라 숲 속의 동물들은 그를 더욱 경계하고,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로줌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들의 지혜를 흡수하기시작했다. 먹이를 구하고, 집을 짓고,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을 익히면서, 로줌은 점차 야생에 적응해 간다. 동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로줌의 모습은 따뜻한 감동을 준다. 인간 혼자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도 이질감이 들 텐데 철로 이루어져, 반짝반짝 광이 나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로봇이 ‘자연에서 살아남기’를 찍듯 살아가는 모습은 어딘가 더 특별하게 보여졌다.
‘내가 되는 것’
작품은 ‘로줌, 핑크, 브라이트빌이라는 세 존재의 우정과 가족애’를 다룬다고 생각해도 좋지만, 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던 누군가가 자신만의 의지와 마음을 갖는 영화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입력된 값으로만 행동하고, 타인의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가던 로줌은 브라이트빌을 키우면서 점점 의지와 사랑, 모성애를 갖게 된다. 브라이트빌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로줌이 행복해지는 것은 결국 로줌이 다시 타자에 의해 행복이 결정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브라이트빌은 로줌에게 어느 순간 타자가 아닌, 가족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로줌을 졸졸 쫓아다니다가 사춘기가 되자 로줌과 다투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후회하며 다시 사과하려는 브라이트빌의 모습은 영락없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종을 초월한 두 존재의 교감은 우정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로줌과 브라이트빌은 모두 프로그래밍이 된 존재다. 로줌은 자신이 아닌 사용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야 했으며, 브라이트빌은 자신의 아픈 몸에 좌절하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둘 모두 입력된 한계를 이겨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가 곁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로줌에게 사랑으로 길들여진 여우 핑크, 로줌에게 로즈라는 이름을 선물한 브라이트빌. 어린왕자는 섬을 떠났지만, 장미는 섬에서 평생 어린왕자를 기다려 왔다. 그리고 계절이 지나 어린왕자가 다시 장미 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장미에게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그들은 서로의 소중한 관계를 다시 정의한다.
<로봇 드림 Robot Dreams>
- 영화: 로봇 드림 (2023)
- 감독: 파블로 베르헤르
- 무성 영화
‘손을 맞잡고’
어느 때와 다를 것 없던 조용한 밤, 오늘도 혼자 냉동식품과 TV 앞에 앉은 ‘도그’는 문득 옆집 창문을 보게 된다. 자신과 다르게 행복한 그들. 처량한 자신의 신세에 도그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이 때 TV에서 방송되는 한 광고. 도그는 광고를 보더니 홀린 듯이, 주문 버튼을 누르게 된다. 다음날 도착한 상자. 상자를 열고 헐레벌떡 그것들을 조립하니, 멀끔한 ‘로봇’ 하나가 눈을 떴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친구를 얻는 도그. 도그는 로봇과 함께 뉴욕 곳곳을 누비며 잊지못할 행복한 여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해변에 놀러가 물놀이도 하며, 여유를 즐기게 되는데 집에 갈 때가 되자 로봇이 물에 녹슬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혼자 로봇을 옮길 수 없었던 도그는 눈물을 참고, 로봇을 둔 채 집으로 향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수리 도구를 들고 돌아온 도그. 그러나 해변은 내년 6월까지 폐쇄되었다. 그렇게 이별하게 된 도그와 로봇. 과연 그들은 다시 만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함께 추는 춤’
<로봇 드림>은 앞선 로봇 친구들이 나오는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영화였다. 가장 큰 차이점은 로봇과 도그(인간)의 관계가 완전히 수평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었다. 로봇과 인물/생명체가 능력이든, 역할이든 차이점이 명확하였던 앞선 영화들과는 달리 로봇 드림 속 도그와 로봇의 관계는 정말 ‘친구’였다. 물론, 로봇을 처음에 조립하고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도그라고 할 수 있지만 작품 속에서 도그는 창조자나 사용자로 그려지지 않았다.
로봇이 사용자를 위해서 수직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본인 모두가 행복을 느끼는 존재로 묘사된 것은 작품의 큰 매력이다. 이러한 수평적 관계가 가능했던 것은 로봇과 도그 모두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 다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였고 영화 역시도 대사가 없는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에 한 인물이 일방적으로 표현하고 말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주인공 모두에게 우리는 최대한 공평하게 이입할 수 있었다.
‘녹슨 꿈에 빠져’
로봇 드림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필자는 로봇을 통해 도그가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이 이루고 싶어하는 꿈을 이루게 되는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꿈을 꾸는 대상은 도그가 아니라 로봇이었다. 추운 겨울, 홀로 해변에 남아 도그를 그리워하던 로봇. 다리를 하나 잃으면서도 계속해서 도그의 집으로 향해 도그를 만나는 로봇의 꿈들은 항상 슬픈 결말로 끝이 났다. 우정에 관한 영화이지만, 그들이 함께 있었던 시간은 9월이 전부였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없이 1년을 보냈고, 다시 9월이 되었을 때 그들 곁에 있던 것은 서로가 아니었다.
영화는 두 주인공을 분리시키고, 꿈과 상상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이렇게 물리적 거리를 고정하고, 둘의 마음과 생각에 온전히 빠져들게 하니, 오히려 둘 사이의 사랑은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영화는 현실과 꿈을 계속해서 반복시킨다. 오즈의 마법사 속 양철 나무꾼이 되어, 도그가 있는 뉴욕으로 향하는 꿈을 꾸는 로봇. 그가 그 꿈에서 걷던 걸음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로봇의 주위에는 수많은 꽃들이 함께 있고, 로봇의 목적지에는 빛나는 무지개가 떠있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꿈이 얼른 끝나 로봇이 그만 상처받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들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노래했던 <September- (Earth, Wind & Fire)>. 영화 초반 그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 공원에서 함께 추던 춤은 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서로가 없었다. 스쳐가는 인연을 다시 붙잡을 수 있지만 놓아준 그들. 로봇판 환승연애의 느낌으로 서로를 과거에 묻어두기로 한 그 결정은 모순적이게도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위하고 사랑하는지를 느끼게 했다.
행복했던 9월의 순간은 분명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그들은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 모든 걸 바쳤다. 그랬기에 언젠가 <September>이 거리에서 흘러나와 다시 그 순간을 생각했을 때 변함없이 미소 지을 것이다.
‘가장 따뜻한 너’
내가 다가가서 전원을 켜줘야 비로소 움직이는 로봇처럼, 우정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먼저 다가가는 것도 필요하다. 친구 사이에서 싸우고 또 멀어질 때도 있지만 어느 순간, 친구와 항상 잡았던 그 손이 그립다면 용기를 내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낸 작은 용기는 차갑게 식었던 나의 손과 너의 손을 금새 따뜻하게 만들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져 소홀해진 이후에 지나간 순간들을 뒤돌아 보지 말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늘 내 곁에 있던 너의 눈을 마주하고 말하자. “고마워. 서로의 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 너와 나, 그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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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모든 교사가 피눈물을 흘릴 심리 스릴러
티처스 라운지/The Teacher's Lounge
Germany/2023/99min
일커 차탁 감독/'월드 시네마' 섹션
〈티처스 라운지〉는 모든 교사가 피눈물을 흘릴 심리 스릴러다. 아니, 피눈물은 학교라는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동시대인 모두의 것일지도 모른다. 73회 베를린영화제 2관왕, 2024 아카데미 국제장편상 독일 출품작, 여러 유수 영화제 초청…… 영광스러운 이름이지만, 이 영화의 작품성·사회성·시의성·긴장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도대체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교사, 학부모, 학생은 학교에서 무엇을 하는가. 이들의 관계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왜 책임감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점차 고립되어 가는가.
젊은 교사 노박의 담당 학급에서 절도 사건이 발생한다. 반 대표를 불러 의심 가는 아이를 지목해달라고 한 후, 해당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별 근거 없는 오해로 밝혀진다. 이에 범인으로 지목된 아랍계 아이의 부모가 항의한다. 하필 자기 아이가 범인으로 지목된 것이 과연 우연이냐고. 이후에도 절도는 계속되고, 뜻밖에도 학교 직원이 범인이라는 게 밝혀진다. 그러나 그녀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고죄로 학교를 고발하겠다고 화를 내고 노박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노트북으로 영상을 녹화한 것이 사생활 침해라고 문제 삼는다. 파문은 점차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범인의 자녀는 노박 학급 소속 학생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학생들이 그 아이를 손가락질하고, 그 아이가 엄마는 무죄라며 항변하며 학급이 두 쪽 나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겠다며 엉뚱한 목소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교내 신문, 학급의 문제에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학부모, 노박을 거부하는 아이들, 왜 이리 문제를 키우느냐는 동료 교사의 질책……. 영화는 이 과정을 긴박하게 좇으며 과연 노박에게 이 문제를 다르게 해결할 방법이 있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몰아치는 질문에 의심과 거리두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영화의 전개에는 빈틈이 없다. 어마어마하다. 노박과 마찬가지로 호흡이 가빠지고, 종종 그녀처럼 깊게 심호흡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쉬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다.
노박은 매순간 어른과 선생이 가질 법한 최고의 판단력과 윤리 의식으로 문제에 대처해 나간다. 그런데 계속 무언가 어긋난다. 노박을 제외한 모두가 악인이어서는 아니다. 영화에서 악인은 분명 존재하지만 소수일 뿐이다. 노박을 몰아붙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요즘 우리가 자주 접하는 학교 뉴스에서 사건 개요와 사건 관계자 주장을 기술하는 건조한 문장들이 그러하듯이. 영화는 심리 스릴러 장르의 힘을 빌려 그 건조한 문장 이면에 담겨 있을 복잡한 맥락을 훑는다. 무엇하나 개운하게 답변되지는 않는다. 다만 단순한 답은 없다는 것, ‘사적 제재’와 ‘교권 강화’는 일시적 쾌감을 제공할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학교의 문제는 단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사회의 문제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비극은 우리가 이 문제를 천천히 들여다볼 마음과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모든 질문을 깊이 있게 마주할 수 없는 사회에서, 결국 ‘죄인’은 성숙한 어른이자 책임감 있는 어른인 노박이다. 주변 사람들이 받을 상처를 세심히 배려하고, 학교와 교육자의 역할을 고민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노박은 점점 고립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만의 합리성에 기대 큰소리를 칠 때, 온갖 복잡한 윤리적 고민으로 인한 노박의 침묵은 ‘죄’의 근거가 된다. 상식과 윤리가 죄가 되는 사회. 심리 스릴러로서 〈티처스 라운지〉가 갖는 장르의 압도적 재미는 여기서 생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기괴한 비극의 일부다. 과연 노박의 성숙함은 희망의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큐브를 맞추는 알고리즘 같은 것은 과연 존재할까. 학교 문제에 말을 보태고자 하는 성급한 욕망을 조금만 참아보자. 그보다 먼저 노박의 성숙함을 죄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을 응시해보자.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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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각자 크고 작은 상처를 품은 이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서서히 드러나는 악을 처단하러 함께 떠나는 여정은 늘 흥미롭기 마련이다. 이러한 퇴마사의 모험담이 사실 우리나라에도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90년대 한국의 오컬트 장르에서 독보적이었던 소설 <퇴마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당시 많은 독자들이 책장을 넘기며 익숙하게 만났던 이름들, 박신부, 현암, 준후, 승희의 이야기가 이제 애니메이션 영화로 재탄생했다. 이 작품은 소설 ‘국내편’의 첫 에피소드를 기반으로, 상처를 지닌 퇴마사들이 우연히 만나 ‘악의 교주’를 물리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첫번째 감정] 박신부의 상실감
영화에서 절대 악이 먼저 화면에 소개된 이후, 그 다음 장면부터 관객을 맞이하는 인물이 바로 박신부다. <퇴마록> 전체 서사에서 그는 리더 역할을 맡으며, 팀원들의 신뢰를 이끌어내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런 박신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상실감이 도사리고 있는데, 바로 과거에 구하지 못했던 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다. 악귀에게 빙의된 아이를 제때 구해내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그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이 사건 이후, 박신부는 ‘악을 처단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전부 바쳐가며 악령을 찾아다니는 사냥꾼이 되었다.
영화에서 이 상실감은 박신부가 다시 한 번 아이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게 되는 동기로 드러난다. 파면된 신부라는 낙인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동밀교의 스님 요청에 응하여 본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악령을 막고, 같은 상황에 처한 준후를 구해내려 한다. 결국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두 번 다시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간절함이며, 그 강인한 의지가 이번 영화에서도 핵심적으로 부각된다.
무엇보다 박신부의 상실감은 그가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칠고 처절한 기도를 올릴 때, 또는 심한 부상을 입고도 다시 일어나 방어막을 펼칠 때, 우리는 그가 겪은 슬픔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낀다. 이 애니메이션은 간결하면서도 묵직하게, 그의 고뇌를 스크린에 옮겼다. 그래서 박신부의 상실감은 단지 과거를 후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팀을 이끄는 진정한 동기가 된다. 이처럼 박신부는 아픔을 동력 삼아 누군가를 살리려는 ‘주체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이야기 전반에서 든든한 리더십을 보여준다.
[두번째 감정] 현암의 상실감
현암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다혈질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불같이 무공을 펼치는 ‘행동파’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의 강인함 뒤에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상실감이 자리하고 있다. 물에 빠져 죽은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물귀신’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집념은 그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그가 외형적으론 분노를 뿜어내지만, 사실 그 분노의 기저에는 상실감이 깔려 있는 셈이다. 무공을 배워나가면서 분노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지 몰라도, 동생을 잃었다는 사실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이런 감정적 배경 덕분에 현암은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정의감이 넘치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동밀교를 찾다가, 그곳에서 악령에 씌인 교주의 끔찍한 실상을 발견한다. 이때 우연히 마주한 박신부와 준후와 함께 ‘지금 당장 악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결의를 보여주며, 공략법을 논의하기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모습을 보인다. 불같은 성격 탓에 충돌도 자주 일으키지만, 결국 그의 저돌성과 능숙한 무공은 팀 전체에 큰 도움이 된다.
현암이 무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동생을 지켜내지 못한 상실감이, 누군가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그가 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이는 적에게도 거침없이 달려드는 것은 ‘누구 하나 더 잃을 수 없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현암이 분투하는 장면들은 관객에게 호쾌한 액션 쾌감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슬픔과 트라우마가 녹아 있음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 덕분에 현암은 단순히 ‘센 무공인’이 아니라, 깊은 상실감에 갇힌 채로도 정의를 위해 분투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완성된다.
[세번째 감정] 준후의 상실감
소설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준후는 무척 밝고 쾌활한 아이다. 어린 외모와 철없는 모습으로 인해, 보호가 필요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잠재력은 해동밀교 안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묘사되며, 특히 술법과 관련해선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그 능력을 어설프게 사용하며 일을 벌이기도 하는데, 이는 준후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상실감이 서서히 베일을 벗는다. 교주의 폭주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준후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물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토록 밝았던 준후는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던 강력한 술법을 폭발적으로 각성해낸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쏟아낸다고 해서, 잃어버린 이를 되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상실감은 준후에게 ‘내가 가진 능력이 때로는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결과적으로 준후는 가장 어린 존재이면서도, 누구보다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된다. 이는 단순히 슬프게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캐릭터가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암시하는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준후가 보여주는 철없던 표정이, 마지막 결투 장면에서는 비장함으로 물드는 대비가 인상적이다. 준후의 상실감은 아이 같은 순수함마저 침식해버리는 폭력적인 감정이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는 소중한 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결심으로 이어질 토대가 된다.
이게 바로 성공적인 영화화
<퇴마록> 애니메이션은 ‘정의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짧은 에피소드 안에 밀도 있게 담아낸다. 퇴마사라는 설정은 과장된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각 인물이 지닌 상실감과 트라우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고뇌를 반영한다. 박신부, 현암, 준후가 힘을 합쳐 교주의 폭주에 맞서 싸우는 과정은 곧, 이들이 스스로를 추스르고 더 큰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정의의 구현’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극복하려고 하는 악은 단순히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힘에 도취한 인간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사회적·도덕적 시사점을 던진다.
그렇기에 이번 애니메이션판 <퇴마록>은 원작 소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새로운 시청자에게도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작품들이 늘 그렇듯,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던 프로젝트지만, 이번 결과물을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퇴마록> 영화다’라고 평가해도 좋을 만큼 만족스럽다. 특히 긴 시간 동안 사랑받았던 캐릭터들이 애니메이션 특유의 화려한 작화로 되살아나, 각자의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꽤나 장쾌하고 감동적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그저 한 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기보다는,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준다. 원작에서 다뤄졌던 수많은 사건과 캐릭터의 서사가 이번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도 어떻게 풀려날지 궁금증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박신부, 현암, 준후 외에도 함께 맞설 승희의 활약, 그리고 더 거대한 악령들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직접 이 세계에 빠져드는 일이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오컬트 장르의 대표작 <퇴마록>을 추억하는 분들이라면, 그때의 감성과 긴장감을 다시금 되살려볼 좋은 기회다. 또 원작을 모르는 처음 관객이라도, 박신부, 현암, 준후가 보여주는 진솔하고 때론 처절한 사투를 통해 오컬트 판타지의 매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된 명작의 재탄생이 궁금하다면, 그리고 자신만의 트라우마를 품은 영웅들의 여정이 보고 싶다면, 이번 <퇴마록> 애니메이션을 적극 추천한다. 과연 이들이 어떤 식으로 상실감과 싸워나가며 앞으로 펼쳐질 시리즈를 이끌어나갈지,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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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미란 코미디 원맨쇼
* <정직한 후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정직한 후보 (2020)
감독: 장유정
출연: 라미란, 김무열, 나문희, 윤경호 등
장르: 코미디
상영시간: 105분
개봉일: 2020.02.12
진실의 주둥이가 불러온 기상천외 선거전
입만 열면 거짓말이 술술 튀어나오는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 그녀는 살아계신 할머니의 목숨까지 팔아 선거에 이용할 정도로 뻔뻔한 철면피다. 할머니의 이름을 팔아 설립한 재단을 앞세워 4선 도전도 무리 없이 진행되려던 찰나 손녀의 버릇을 고쳐놓고자 할머니 '옥희(나문희)'가 기도를 하면서 '상숙'은 하루아침에 거짓말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거짓으로 포장했던 속마음들이 마치 생리 현상처럼 입에서 주체없이 튀어나오게 되고, '상숙'의 선거전에 크나큰 차질이 생긴다. 보좌관 '희철(김무열)'이 물심양면으로 그녀의 곁을 지키며 어떻게든 리스크를 막아 보려 하지만 거짓말이라는 최고의 무기를 잃은 '상숙'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된다. 이대로 4선의 목표가 좌절되려는 순간, 과감하게 정면돌파를 택하며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유쾌하게 풀어 나간다.
뻔하지만 코믹한, 유쾌함에 충실
<정직한 후보>는 '짐 캐리'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라이어 라이어>를 표절한 의혹이 있는 브라질 영화 <O Candidato Honesto>의 판권을 구매해 리메이크한 작품. 원작의 '변호사'를 '정치인'으로 바꾼 것만 빼면 내용상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위선과 거짓으로 똘똘 뭉친 유력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다는 소재로 써 내려갈 스토리가 워낙 뻔하다보니 작품의 줄거리를 쉽게 예측할 수 있고, 실제 전개 역시 예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직한 후보>는 코미디 영화이고, 개인적으로 코미디 장르는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본질에만 충실해도 기본은 해냈다고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설정, 식상한 스토리라인을 차치하고서라도 혼을 빼놓도록 웃기면 그만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은 적어도 가볍고 유쾌한 유머를 날리는데 충실하다. 작품을 이끄는 '라미란'의 역동적인 코믹 연기는 SNL '라미란' 편 혹은 그의 코미디 원맨쇼라 할 정도로 평범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원톱 주연인 '라미란'을 서포트 하는 두 남자, '김무열'과 '윤경호'의 연기도 함께 돋보인다. '김무열'은 중후한 카리스마 혹은 냉혈한 빌런의 모습으로 더 익숙한 배우이지만 극중 열정 넘치는 해결사, 어딘가 부족한 허당, 어리광을 피우는 남동생 등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캐릭터로 완벽한 변신에 성공했다. 특히 '라미란'과 '김무열'의 케미스트리는 작품의 두 번째 시즌이 탄생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식 전개로 갉아먹은 장점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코미디의 색채는 옅어지고 신파극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뒷심이 부족했다. 중반부까지는 스토리가 엉성하더라도 '주상숙'이라는 캐릭터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방식들이 웃음을 주고, 작품에 속도감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상숙'이 개과천선을 하고, 과거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썩은 정치인들을 징악한다는 결말은 정치에 관한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한국영화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즉, 뻔한 줄거리의 코미디 영화에 고리타분한 한국식 결말까지 더해져 인물의 톡톡 튀는 캐릭터성마저 희미하게 만들어버렸다. 오히려 초반부의 B급 감성을 끝까지 밀고 나갔더라면 코미디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나선 배우들의 힘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 상의 비판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 본다.
라미란에 의한, 라미란을 위한
<정직한 후보>의 가장 큰 가치는 원톱 주연으로서 코미디 작품을 성공적으로 이끈 '라미란'의 역량과 내공이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여성 원톱 주연 영화는 활발하게 제작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고, 제작되더라도 흥행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김혜수'가 원톱 주연으로 출연해 200만 관객을 돌파했던 <굿바이 싱글> 정도가 떠오른다.) 그런데 <정직한 후보>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힘든 시국에도 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넘어섰고, 시즌2 제작도 안정적으로 착수했다. 이는 전적으로 수많은 코미디 작품에 조·단역으로 출연하며 자신만의 유머 코드를 개척한 '라미란'의 기량이 발휘된 결과이며 그녀가 괜히 '청룡영화제'에서 코미디 원톱 주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게 아니라는 것 역시님 증명했다. 그동안 남성 원톱 주연 코미디 영화는 수없이 제작되었고 흥행한 사례도 많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정직한 후보>가 작품성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성 원톱 주연 코미디 영화도 충분히 흥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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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틀린 집 - 집 구조를 잘못 지으면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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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이 집 뒤틀린 거.. 아세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딴집에 이사 오게 된 가족.
엄마 ‘명혜’는 이사 온 첫 날부터 이 집이 뒤틀렸다고 전하는 이웃집 여자의 경고와
창고에서 들리는 불길한 소리로 인해 밤잠을 설친다.
아빠 ‘현민’은 그런 ‘명혜’를 신경쇠약으로만 여기고
둘째 딸 ‘희우’는 가족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마주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던 어느 날,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잠겨있던 창고문을 열고 만 명혜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뒤틀린 틈에서 시작된 비극이 가족을 집어삼키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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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2022년 1월 1주 신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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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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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2> 파이널 예고편
소리 없이 맞서 싸워라!
실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의 공격으로 일상의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
아이들 대신 죽음을 선택한 아빠의 희생 이후 살아남은 가족들은 위험에 노출된다.
갓 태어난 막내를 포함한 아이들과 함께 소리 없는 사투를 이어가던 엄마 ‘에블린’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집 밖을 나서지만,
텅 빈 고요함으로 가득한 바깥은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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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글리치> 공식 티저 예고편
자친구가 지구에서 사라졌다.....?! 범인은 바로 외계인?! ????? 전여빈 X 나나의 찰떡 케미 200%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멀티장르 버라이어티 추적극 《글리치》 10월 7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