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파2025-04-15 00:58:45
용의자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인물이 있을 뿐
넷플릭스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 리뷰
* 범인 스포 없음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한 최악의 선택이다.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이걸 정주행하느라 이틀을 버렸다.
내가 많은 추리물을 본 것은 아니지만 최근 본 추리물 중에서는 가장 재밌는 추리물이다.
#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백악관의 총 관리자였던 윈터가 살해된다. 그를 중심으로 두고 백악관의 직원, 대통령, 유명 인사들의 관계와 그들의 진술들을 풀어나간다. 누구는 그에게 약점을 잡혔었고, 누구는 그가 재수 없어서 싫고 등등. 여러 증거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대통령의 친구나 대통령의 말썽쟁이 가족들, 백악관의 직원들이 이 드라마의 용의자와 목격자가 되어 주기에 미국 정치 풍자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미국식 농담 개그들도 함께 이 추리물에 곁들어 있다. 사치와 패악을 부리는 낙하산 관리자들과 고통받는 직원들. 그들의 무능함이나 혹은 무례함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웃음 포인트들이 된다.
또 기득권층을 가득 채우는 백인 남성들에 대한 풍자 개그들도 더러 있다. 아무것도 못하고 여성 탐정을 닦달하는 FBI, 경찰, 고위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의 추리를 그냥 통째로 무시해버리는 세계 최고 탐정의 우아함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 드라마의 연출

드라마의 연출이 상당히 신기하다. 추리물을 많이 본 편은 아니지만 보통 추리물은 탐정의 시선을 따라서 현재 탐정이 초점에 둔 사건 혹은 인물의 뒤를 캐면서 진행된다. 내가 보았던 나이브스 아웃이나 오리엔탈 특급 열차나 혹은 다른 추리물들도 비슷했다.
다만, 이 드라마는 마치 따지고 보면 미국 시트콤이나 혹은 다큐멘터리의 진행 방식과 닮았다.
어느 인물이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사건에 관련 있는 모두가 사건에 대해 진술하는 방식이다. 탐정이 인터뷰나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를 타임라인으로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진술들을 퍼즐처럼 맞추어가는 형태다. 그렇기에 그전의 사건이 어땠는지를 시청자인 우리도 생각하며 보게 만든다.
또 이 드라마는 사건 현장인 백악관뿐만 아니라 청문회와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백악관에서는 탐정이, 청문회에서는 탐정에게 취조 받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건이 조금씩 해결되는데 탐정은 어디 있는지? 이 청문회 장면은 왜 나오는 건지? 이 또한 시청자들이 기다리고 볼 몫으로 남겨진다.
# 매력적인 탐정
코델리아 컵 탐정, 흑인 여성 탐정이고 위에서 말했듯 상당히 우아하다.
조류 관찰자? 탐색가?라서 탐조하는 것이 취미고, 수사 방식부터가 새들의 사냥 방식 혹은 생존방식에서 영감을 얻는다. 내가 추리물을 많이 안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보통 잘난 탐정이 서민들을 무시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 퍼즐을 맞춰놓고 이것도 몰랐냐? 이 바보야? 하고 농락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탐정이 누누이 말한다.
"용의자는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건 혹은 인물이 있을 뿐이죠."
그 말처럼, 탐정의 수사 방식은 한 사람 혹은 증거에 꽂히는 것이 아니다. 탐정은 최대한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은 사람과 만나며 그들의 진술을 기억한다. 설사 그들의 진술이 도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하는 것들도 많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신중한 성격이어서 항상 문을 닫고 얘기를 했다든지, 대통령의 장모님이 술 중독이라든지, 그날 오기로 했던 가수가 안 왔다든지. 그러한 진술들을 자신의 노트에 차곡차곡 기록해둔다. 그들의 인상착의, 말하던 말투, 특기, 하다못해 방 안의 그림들까지.
팀장은 침착하고 그리고 우아하게 사람들을 심문한다. 탐정이 자주 쓰는 방식은 "침묵"인데 사람들 앞에서 침묵을 통해 그들이 찔려 하는 부분을 술술 불게 만든다. 반은 변명이고 반은 거짓말이지만 탐정은 그러한 거짓말 또한 차분히 들어주며 하나의 조각으로 삼는다.
맨 마지막에 가서야 처음에는 상관없어 보였던 모든 조각들이 모인다. 탐정은 그것을 천천히 맞춰나간다. 우리가 천 피스 퍼즐을 사서 바닥에 풀어놓으면 꼭 안 이어질 것 같은 퍼즐들이 난잡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조금 느리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정석적인 추리처럼 느껴졌다.
# 추리물이란
나는 추리물에 대한 편견이 좀 있다. 어릴 때 봤던 코난도 그렇고 조금이지만 봤던 셜록도 그렇고 전혀 모르겠는데 그들은 나름의 "트릭"을 발견했다며 기가 막히게 사건을 해결한다. 꼭 "저기 창틀에 물방울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마 어제 새벽에 비가 왔는데 그때 미처 재킷을 털지 못한 스미스 씨가 아침에도 그것을 입고 와서 바쁘게 일을 하느라 미처 못 닦았던 그 물방울이겠죠?" 식으로 진행되니 그다지 명석하지 못한 내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다.
다만 이 사건은 조금 친절하게 그리고 천천히 진술을 모으면서 진행된다. 또한 추리물보다 코미디인가 싶을 정도로 캐릭터들이 웃기고, 또 누구 하나를 용의자로 선택하지 않아서 오히려 덜 긴장한 상태로 보게 된다. 이 드라마의 흐름에 나를 맡기다 보면 어느새 퍼즐이 모아져 있다. 아마 추리물의 놀라운 트릭이나 그들의 명석함, 혹은 천재적임을 기대했다면 코델리아 컵 탐정의 천재력은 조금 아쉬울 수 있으나 함께 풀어나가는 문제 풀이식 추리물 + 코미디를 원했다면 상당히 좋은 선택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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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사람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면 웃음이 나온다."
Cast
Walter ASMUS
Director
Declan CLARKE
시놉시스
20세기 연극의 지형을 뒤흔든 혁신가라는 평을 듣는 부조리극의 대표작가 사무엘 베케트와 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가장 잘 연출하는 연출가로 알려진 발터 아스무스와의 깊은 동료애와 우정을 보여준다.
들어가며
최악의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올까? 말이 안되는 말이지만 어쩌면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는 상황일 것이다. 기쁠 때 눈물이 나듯, 절망할 때 인생의 놀라움에(negative) 웃음이 터져본 사람만이 인생을 입체로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부조리’는 단순하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아니라 세상의 다채로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 있는 인간이 가진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현존하는 영화중 가장 ‘베케트적’ 영화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극적인 재미가 있는 영화는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습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그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진짜 초목표를 찾고 갈등을 해결하는 류의 드라마가 없다. 거기다 영화엔 그 흔한 음향효과도 없고 줌인이나 줌아웃도 없으며 대사도 없다. 설명은 최소한의 나레이션과 자막으로 대신하는 것으로 인위적 연출을 최소화했다. 오직 영화에 쓰인 모든 편지, 대본자료를 제공한 ‘발터 아스무스’를 제외하고는 움직이는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다보니 이걸 영화라고 부를 수 있나 의문이 들때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다. 이 모든 반응은 내가 ‘부조리극’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느낌과 정확히 일치했다.
재미는 없어도 의미는 있을 수 있잖아?
부조리극은 극도의 미니멀리즘, 형식을 파괴함으로써 형식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연극의 사조다. 역사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이후 등장하여 우리가 상실한 인간성, 소통의 가능성, 세계와의 관계에 주목하며 실존주의와 함께 다뤄지곤 한다. 영화의 모든 관습을 거부하고 아카이브의 힘으로 재현된 데클란 클라크의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베케트와 아스무스의 오랜 우정을 다룰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우리가 익숙하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부조리 사조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었다.
영화가 이어붙이는 베케트와 아스무스의 편지와 사실에 근거한 자료들을 보고 있다보면 사실 편집과 연출을 거친 영화야 말로 인위적인 진실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자연이 그러하듯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깨달음에 도착하게 된다. 화려한 편집과 각색 대신 고도로 절제된 효과, 침묵, 리듬, 존재의 본질을 살린 미니멀리즘으로 말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안에 딱딱하게 자리잡고 있던 부조리극 사조의 정의 역시 바뀐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한 마음먹기였다. 동시에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도 풀린다.
“내가 넘어져도 내버려둬.”는 넘어져도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꼬장꼬장한 예술가의 아집이 아니다. 매번 넘어지지만 스스로 일어나는 힘이 사실 우리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라는 묵묵한 응원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최악의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우리는 사실 얼마나 강한 존재인가?
[Schedule in JIFF]
2025.05.01(목)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140]
2025.05.04(일) 1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상영코드 414] GV
2025.05.06.(화) 17: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656] GV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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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제된 감정 표현의 프랑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스릴러 장르에서 소개되어 있어서 기대를 하고 봤던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스릴러와 프랑스의 스릴러의 개념을 조금,,, 아니 많이 달랐던 듯 싶다. 사라진 그녀가 부제인만큼 사라진 대상을 추적하면서 그 스릴을 느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런 스릴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시놉시스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는 한 부유한 은행가의 부인이 갑자기 실종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밖에서 기다리겠다던 부인은 사라지고 남편은 부인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납치되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부인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처음부터 밝히고 시작한다.
납치범과 부인이 한 통속이 되어 남편을 속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납치범이 아지트로 돌아왔을 때는 부인은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어 있었다. 졸지에 납치살인범이 되어버린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암매장을 시도한다.
불안감에 떨던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남편을 미행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부인이 실제 은행장의 부인인 이리스가 아니라 은행장의 내연녀임을 알게되며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자작극이라는 설정은 좋긴 한데,,, 스릴은?
처음에 영화가 진행될 때 아내가 납치되는 것이 자작극임을 밝히고 들어가서 굉장히 스릴 넘치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 자작극이 어떻게 끝이 날지, 또 자작극을 해서라도 얼마나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굉장히 지루했다. 납치 과정을 추적하고 자작극의 이유를 찾아가야 하는데 굉장히 부산스럽다. 납치와 자작극이라는 서사 아래 너무나도 자질구레한 각 캐릭터별 서사가 갑자기 군데군데 들어와서 몰입에 굉장히 방해가 됐다.
납치된 이리스를 찾는 과정에서 동료 경찰들이 서로 원나잇한 이야기하며 비서의 맥락에서 벗어내 대사하며 부분 부분의 요소들이 전체 서사에서 너무 튀어서 도대체 저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하는 감정이 들었다.
프랑스 영화는 이런 것일까?
프랑스 영화를 간혹가다가 보는 편이기도 하고, 또 그렇게 챙겨보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를 보고 일반화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본 프랑스 영화 작품들은 대체로 배우들의 감정이 굉장히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에서 부인이 납치되었다는 것 역시 남편과 내연녀의 자작극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비서도 있고 경찰도 있으니 납치를 당한 피해자로서의 감정 연기를 해야되는데 나는 무슨 버스 놓쳐서 지각한 사람이 ‘아,,, 안타깝다’하는 식의 감정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아서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주로 보는 한국영화나 영국 미국 영화의 경우에는 인물의 표정 변화나 억양이 드라마틱하게 변해서 오히려 과장이 좀 심하다는 느낌이 드는 편인데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에서는 어쩜 저렇게도 절제를 할까?하는 생각이 들드보니 영화의 스릴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반전을 조금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부인의 자작극인 줄 알았지만 납치범 막스가 알고 있던 부인은 은행장의 부인 이리스가 아닌 내연녀였다. 은행장과 내연녀가 자신을 이용한 자작극이라는 것을 막스가 알게 되는 장면이 이 작품의 흐름이 크게 변화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을까? 퇴폐적인 클럽에서 죽은 줄 알았던 내연녀가 춤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반전의 요소를 줄 수 있는 방법이 굉장히 많았을텐데 하다 못해 청각 효과라도 조금 넣어주지,,, 솔직히 처음에는 몰랐다. 인식 자체가 되지 않았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절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이 반전이다~하고 알려주는 장치도 따로 마련이 되어 있지 않고, 온전히 스토리 전개를 통해 파악을 해야되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그 스토리가 완벽하게 자작극에 맞춰진게 아니라 쓸데없는 캐릭터들의 TMI가 널러있는 상황이다보니 반전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웠다.
절제된 감정선의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스펙타클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그닥 좋지 않았던 영화 《이리스: 사라진 그녀》. 프랑스 영화는 아무래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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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 울리는 사진 한 장, 그리고 하나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2000
드라마 / 대만, 일본 / 173분
감독: 에드워드 양
가슴 울리는 사진 한 장, 그리고 하나
사람들은 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무한정 허비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뿐더러 대부분 어른에게 고민은, ‘결과적으론 다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어린 양양의 사진을 통해 세상을 한쪽 눈으로만 보는 이들의 두 눈을 뜨게 하고, 그동안 외면하기만 했던 진실을 깨닫게 한다.
주인공 양양은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선 앞과 뒤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보이는 것이 곧 전부인, 순수한 아이 덕에 가족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이면을 알게 된다. 결국 우린 아이에게서 삶의 철학을 배우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관객까지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영화다.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아빠가 보면 내가 못 보고, 내가 보면 아빠가 못 봐요. 그럼 우린 반쪽짜리 진실만 보는 건가요?
양양의 삼촌은 길일에 결혼식을 올린 이유만으로 자신의 인생에 좋은 일만 가득할 거라 믿는다.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는 그의 노력엔 가장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그 점을 양양이 사진으로 찍어 그의 손에 쥐여준다. “삼촌은 뒤를 못 보니까 내가 찍었어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제때 쓰레기봉투를 버리지 않아 할머니가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양양의 누나, 팅팅에겐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팅팅에겐 참고 견디는 것이 그녀의 완전하고 진실한 삶의 자세다. 그러나 그녀 역시 고작 앞만 보고 있을 뿐이다. 누가 그녀에게 그런 자세를 강요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팅팅에게 자신의 뒤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녀가 하루아침에 당당하게 진실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본인이 아는 것도 직접 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음에도 훈수를 두고, 핀잔을 주는 양양의 선생님 같은 어른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아빠(NJ)의 30년 전 실패한 첫사랑과 팅팅의 설레는 첫 연애가 교차편집되는 이유를 감독에게 묻지 않아도 관객은 알 수 있다. 옷깃만 스쳐 간 사랑도 사랑이라 했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후회는 찾아온다. 후회는 삶을 되돌리기 위한 발판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이자 기회다. 과거의 선택이 다시 주어진다 해도, 우린 꺾이지 않고 곧게 나아가야 한다. 유독 밝은 곳만 눈에 담으려는 몹쓸 고집들이 있기 때문이다.
깨어나지 않는 엄마를 앞에 두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양양의 엄마나, 가족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지 못해 자꾸 거짓된 사랑만을 느끼는 옆집 소녀 리리의 뒷모습엔 어둠에 짙게 깔려있다. 우린 모두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싶은 뒷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뒷면을 본인까지도 외면해 버린다면, 당신에게 완전한 ‘하나’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깨달은 건, 사는 게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거야. 왜 그걸 전엔 몰랐을까.”란 양양 엄마의 말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양양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각자가 가진 ‘모든 내면’이다. 반쪽짜리 진실만 갖고 타인을 비난하고,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고, 쉽게 절망하는, 즉 한 인간이 가진 ‘수많은 나(자아)’ 말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다양한 인생을 담고 있다.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만 치우쳐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들의 삶의 굴곡을 하나의 큰 이야기로 엮어 천천히 풀어나간다. 감각적인 영상미부터 배우들의 명대사까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다. 170분이 넘는 상영시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영화 <하나 그리고 둘> 중
귀여운 나비넥타이를 하고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 서서 편지를 읽는 양양의 모습은 <하나 그리고 둘>의 명장면이다. 그의 모든 말이 기억에 남지만, 특히 이 말 한마디가 여전히 웃음을 나게 한다.
“… 아, 나도 이제 다 컸나 보다.”
많은 이가 꼭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 아직도 우린 양껏 크지 못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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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죽었다 | SNS 사이로 진짜 범인을 찾아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객이 맡긴 열쇠로 남의 집을 훔쳐보는 취미를 지닌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 그는 우연히 편의점에서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를 만난 후 그녀의 삶을 지켜본다. 소시지 핫바를 사 먹으면서 비건 샐러드 사진을 포스팅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꼈기 때문. 때마침 이사를 결심한 한소라는 구정태에게 집 키를 맡기고, 구정태는 자유로이 그녀 집을 드나든다.
그러던 어느 날, 구정태는 소파에 죽은 채 늘어진 한소라를 발견한다. 그는 의심스러운 자기 행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지만, 약점을 쥔 범인이 자기를 협박해 오자 그는 패닉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강력반 형사 ‘오영주’(이엘)의 수사망도 그를 향해 좁혀진다. 이에 구정태는 억울함을 밝힐 증거를 찾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소라의 SNS 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바뀐 시대와 인간을 담은 스릴러
스릴러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부터 <추격자>와 <끝까지 간다>, 그리고 <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객을 사로잡았다. 다만 높은 인기만큼 스릴러는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하다. 서스펜스가 중심인 플롯만 있으면 스릴러의 자격이 있으니까. 그나마 도망자 대 추적자의 구도가 한 기준점이 될 뿐이다.
이처럼 구분이 애매하다는 말은 곧 범용성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스릴러는 신선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다루지 않은 사건, 인물, 구도와 전개가 없으므로. 그래서 가장 쉽게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임시완과 천우희 주연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나 손석구의 <댓글부대>처럼.
<그녀가 죽었다>는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 작품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SNS의 영향력을 활용한 범죄 사건을 중심에 둔 스릴러다. 특히 단순히 범죄 수단이나 도구의 변화뿐만 아니라 시대에 발맞춰 달라진 사람들의 심리와 내면까지 통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덕분에 <그녀가 죽었다>는 기시감과 개연성 부족 등 적지 않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힘 있게 달리는 데 성공했다.
내가 만든 '나'를 지키는 싸움
SNS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주는 내 모습대로 '가상의 나'를 꾸며낸다. 때로는 '현실의 나'보다 '가상의 나'를 가꾸고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허상은 내 본모습을 대신하기도 한다. 현실의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인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진다.
<그녀가 죽었다> 속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몸을 팔아 하루하루 살던 한소라는 선행으로 가득한 SNS 피드가 관심을 끌고,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유기견과 길고양이 입양, 보육원과 요양원 봉사로 피드를 가득 채운다. 실상은 후원금을 빼먹는 사기꾼이지만, 그녀는 점점 그 허상 속에 빠져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이 자기를 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는 피해자라고 굳게 믿으면서.
구정태 역시 방패막이를 앞세워 본모습을 숨긴다. 그는 대한민국 최대의 부동산 카페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강사로서 받은 관심을 먹고 산다. 공인중개사로서 뛰어난 평판은 그가 범죄를 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키를 맡기는 집주인이 많아질수록 집에 침입하기 쉬워지니까. 그래서 그는 평판과 겉모습을 유지하는 데만 애쓸 뿐, 자기 취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죽었다>는 각자가 꾸며낸 세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관심을 받기 위해 활짝 열어둔 문은 자기 인생을 파괴할 지름길이 되니까. 남을 향한 관심은 자기를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오고. 구정태와 한소라 둘 다 결국에는 자기가 판 자기 무덤에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칠 뿐이다.
붕 떠버린 캐릭터
다만 <그녀가 죽었다>가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힘은 충분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캐릭터가 핵심이다. 그들이 돋보일수록 갈등도 분명해진다. 각 인물의 세계에 관객이 공감을 많이 할수록, 그들에게 SNS와 타인의 관심이 갖는 의미나 그 세계가 무너질 때 닥쳐오는 위기감이 명확히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런데 영화는 정작 캐릭터에게 그리 공을 들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콘셉트만 있을 뿐, 콘셉트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부족하다. 자연히 주연을 포함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생동감이 없다. 그나마 개인사가 일부 밝혀진 한소라의 행적은 따라갈 수 있다. 피해망상이 섞인 사이코패스라고 본다면 큰 문제가 없다.
반면에 구정태라는 캐릭터는 최소한의 설명도 없다.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관음증 환자, 스토커를 한 인물에게 몰아준 설정만 있는 격이다. 그가 자기 기질을 깨닫게 된 계기나, 악취미를 갖게 된 동기 등은 조금도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구정태라는 인물은 그가 소유한 거대한 창고만큼이나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마지막에 얻은 깨달음이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닝타임 내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 의도와는 달리 몰입을 방해하는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레이션은 두 주인공이 자기가 만든 세계와 현실 간의 괴리를 합리화하는 기제를 보여준다. 구성태와 달리 한소라가 자기 문제를 끝내 깨닫지 못하는 모습도 내레이션의 온도 차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캐릭터가 설득력이 없다 보니, 특히 구정태의 내레이션은 붕 뜬 채 영화 분위기와 좀처럼 융화되지 않는다.
미처 지우지 못한 기시감
몰입감이 떨어지는 대목에서는 애써 감추려던 기시감도 흘러나온다. 예를 들어 <그녀가 죽었다>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와 매우 흡사하게 전개된다. 두 주인공의 관계나 직업만 다를 뿐, 피해자가 사실 가해자라는 플롯은 다를 게 없다. 자연히 <그녀가 죽었다>가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한계가 따른다. 스릴러를 좋아할수록, 예상이 쉽기 때문이다.
경찰을 활용해 한계선을 늘리려는 시도는 엿보인다. 영화는 피해자 한소라까지 의심하는 오영주와 기존 수사 관행에 의지하는 다른 경찰 간의 갈등을 은연중에 거듭 암시한다. 가리키는 방향이 충돌하는 가설과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조금이라도 더 현혹하고, 반전의 충격을 키워보려는 노력인 셈이다. 다만 경찰에게 주어진 분량이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큰 효과는 없다.
반면에 예측가능한 전개 덕분에 오히려 세밀하고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힘을 발휘하는 대목도 있다. 공인중개사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거나 열쇠를 맡기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일이지만, 범죄에 활용될 수 있다며 신뢰를 잃는 순간 이는 예상 못한 스릴로 전환된다. 딥페이크와 유사한 범죄가 스쳐 지나가는 대목 역시 같은 맥락에서 꽤 흥미롭다.
배우의 힘
또 신혜선과 변요한, 두 주연 배우의 힘을 빌려 단점을 순간적으로 감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소라가 피해자 행세를 하며 광기를 발산하거나, 어머니 유골함에서 범인이 숨긴 증거를 꺼내며 구정태가 오열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는 두 캐릭터의 시점으로 나뉜 편집에도 힘을 불어넣는다. 각 파트를 책임진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겹쳐지는 지점에서의 폭발력만큼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덕분에 <그녀가 죽었다>는 숱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SNS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릴러로서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Acceptable 무난함
인생샷과 댓글 사이로 '나를 찾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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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최초 힙합영화
- 줄거리
줄거리라고 할 게 있는지 사실 모르겠다.
- 느낀 점
학생의 입장으로서 걱정이 되었다. 실제로 힙합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고, 랩을 좋아하는 학생들도 다수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는 한 명은 부유한 집안 외동아들, 한 명은 가난한 집안이지만 양아치 무리 중 한 명으로 캐릭터를 잡았다.
이로 인해서 현실에서 랩을 좋아하는 학생들을 모두 안 좋은 이미지로 바라볼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영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현재의 학생들을 잘 알지 못하거나 질이 안 좋은 학생들 말고 만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사에 욕이 많이 나오는 부분 또한 랩하고 힙합 하는 애들은 다 그럴 것이라고 작가가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나 싶었다.
중학생이라는 설정을 잡은 것 같은데 캐스팅된 배우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고등학생으로 설정을 했어야 알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들의 이미지 말고도 극 중에서 나오는 대사나 상황들을 보았을 때 중학교 3학년은 극에 이입하기에는 깨는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운전을 한다, 칼을 들고 다닌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동아리와 함께 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송주는 갑자기 마이크 스탠드를 고치러 간다.
근데 이 전에는 송주가 마이크 스탠드 근처에 가거나 그쪽을 쳐다보는 장면이 없어서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서 스탠드를 고치는 게 진짜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왜 이 이야기가 들어갔는지, 왜 이 장면이 나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 영화감독이 하고 싶은 건 많고 담고 싶은 건 많은데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다 감상하고 나서는 내가 뭘 본 건지도 모르겠고, 뭘 느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헷갈리고, 누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저 등장인물이 왜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졌고, 이 이야기는 왜 들어간 것이며 엔딩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면 불편하게 느껴졌던 장면들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 영화가 끝나고 나니 대체 그 부분들이 왜 들어간지도 몰라서 그냥 불편했다.
(+주연 와 송주가 햄버거를 만들 때 장난치면서 했던 대사들, 전체적으로 많은 욕, 오토바이 교통사고, 중3의 운전 등)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고, 시나리오가 좋아야 한다는 이유 또한 알게 되는 경험이 되었다.
파노라마_테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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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작은 시인에게> - ‘너를 위해서라는 가장 단단한 변명’
나의 작은 시인에게 (The Kindergarten Teacher)
개봉일 : 2019.04.04 (한국 기준)
감독 : 사라 코랑겔로
출연 : 메기 질렌할, 파커 세바크,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마이클 체너스, 로사 살라자르
‘너를 위해서라는 가장 단단한 변명’
꿈을 꾸었지만 양지가 아닌 음지에 내려앉은 사람에게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유치원 교사 ‘리사’와 가만히 있다가도 별안간 아름다운 시를 읊어내는 5살 소년 지미의 이야기다. 크게 성공하지 않는 이상 돈을 벌기 힘든 ‘작가’라는 꿈 대신 유치원 교사가 된 리사는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바쁘게 일을 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고등학생 졸업반까지 키우고 나니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릴 틈이 난다. 리사는 이제야 깊게 한숨을 내쉬어본다. 그리고 그녀의 한숨 속으로 짙은 공허함이 파고든다.
남편은 바쁘게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도 아이들은 또래와 어울리기 바쁘다. 리사는 붕 떠버린 시간과 접어두었던 꿈을 붙잡기 위해 글쓰기 수업을 등록하지만, 리사의 글에 대한 수업 교사와 동료들의 반응은 영 시원찮다. 열의는 있으나 딱히 눈에 띄진 않는 실력.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과 센스’는 없는 사람인 리사는 어딘가 모자란, 아쉬운 글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마치 신이 보낸 신호 같은 천재 소년 지미가 나타난다.
힘없는 걸음을 떼다가도 별안간 감정을 담은 시를 창조해내는 소년. 리사는 지미를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자 자신이 가공해야 할 의무를 진 소중한 원석처럼 느끼게 된다. 부러움과 질투, 애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집착. ‘너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너를 지키기 위함이야’라는 단단한 변명과 함께 시작된 리사의 엇나간 애정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집착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천재성을 타고난 아이를 대상으로 질투와 집착을 느낀다?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지만,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면 반쯤은 이해가 갈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빛나는 것을 가진 아이. 그 반짝임은 누군가의 눈을 멀게 만든다.
사회의 그늘에 가려져 꿈을 빛내본 적 없는 어른이 재능을 가진 아이를 만나며 대리만족에 대한 집착, 질투심을 느끼는 과정이 지나치게 인간적이라 더욱 슬프고 애잔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되바라진 집착을 가진 어른 한 명마저도 없어진다면 아이의 재능을 마음에 담아줄 어른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 사회의 모습에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 시놉시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리사’는 따분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를 통해 예술적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지만 재능이 따라주지 않는다. 우연히 자신의 학생 다섯 살 ‘지미’가 시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아이의 시를 자신의 시수업에서 발표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나 자신을 더 투영해야 해.”
영화의 주인공 리사는 이제라도 꿈을 이뤄보겠다고 다짐하며 시 쓰기 수업을 신청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어딘가 모자라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어디선가 들어본 그럴싸한 단어의 집합. 딱 거기서 그쳐버리는 애매한 시. 그게 리사의 시다. 본인도 알고 있다. 나의 시가 어딘가 부족하다는 것을, 당당하게 손을 들고 발표할만한 대단한 시는 아니라는 것을. 열정과 꿈을 안고 수업에 들어왔지만 리사에게 수업은 즐거움과 두근거림이 아닌 새로운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명분, 딱 그 정도로 느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지미라는 아이가 리사의 눈에 들어온다. 좀비처럼 어슬렁 어슬렁 걷다가도 감정이 가득 담긴 시를 읊조리는 5살 아이. 태양의 반짝임과 사랑의 두근거림을 담아낼 줄 아는 5살 아이라니. 사랑이 뭔지는 알까? 싶은 나이지만 지미의 시는 그 안일한 생각을 모두 물리칠 만큼 아름답다. 리사는 지미의 시를 적어 수업에서 발표한다. “정말 좋았어요.” 리사를 향해 여러 형태의 칭찬들이 쏟아진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시에 대한 칭찬. 내가 쓴 것이 아님에도 알 수 없는 뿌듯함이 몰려오는 순간이다. 리사는 그 아름다운 시를 어떻게 썼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떻게 만들어내야 할진 알고 있다. 작은 시인, 지미를 통하면 된다.
그 후로 리사는 지미에게 더 큰 기대와 집착을 갖게 된다. 새로운 시선으로 글을 써야 할 땐 지미를 번쩍 들어 높은 곳에서의 시선을 만들어주고, 지미가 나쁜 말을 쓸 때면 아이의 언어습관을 관리한다. 낮잠을 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옅은 집착과 열망의 냄새가 풍겨온다. 리사는 아이를 위해 시를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녀의 행동이 지미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분명 리사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떳떳한 행동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시가 떠오르면 보모인 베카에게 말하지 말고 나에게 말하고, 휴대폰 번호를 저장해 주겠으니 전화하라는 약속. 그리고 이름 전체가 아닌 L로 저장된 전화번호. 보모의 자격을 얻기 위해 꿈이 있는 젊은 보모를 몰아내려 행한 이간질. 리사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어른들로부터 아이를 지키겠다는 괘변 아래 자신의 집착을 합리화한다.
무대 위 마이크보다 작은, 너무도 여리고 작은 나의 시인. 리사는 지미의 빛나는 재능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지미의 아빠는 밤낮없이 바쁘게 일하고, 가족들은 아이에게 무관심하다. 모차르트급의 천재적 재능이 있는 아이지만 그 누구도 아이의 재능을 알지 못하고, 발견하려 하지도 않는다. 무관심한 세상 속에서 아이의 재능은 언제 지워질지 모른다. 리사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지미의 재능을 빛내주기 위해 낭독회에 지미를 데려가지만 지미의 아빠는 아이의 재능엔 관심이 없다. 물론 리사가 아빠의 의사를 제대로 묻지 않고 아이를 데려간 것부터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세상이 널 지워버리려 해. 나 같은 그림자가 되면 안 돼.”
리사가 지미를 향해 처음으로 가진 감정은 놀라움이었고 애정이었다. 그리고 선을 넘은 애정은 집착이 되어버린다. 지미의 등굣길을 뒤따라간 리사는 잠겨진 문을 열고 아이를 품에 안는다. 그녀는 철창 안에 갇혀있던 작은 시인을 품에 안고 드넓은 호수로 향한다. 불안감이 가득 차오르는 오후를 보내고 몸에 붙은 것들을 씻어내는 순간. 지미는 기지를 발휘해 욕실의 문을 잠근다. 리사는 욕실 문에 붙어 앉아 지미에게 가졌던 애정과 집착을 풀어낸다.
아이와 어른이기 이전에 같은 시를 창작해내는 사람으로서 리사는 지미를 질투하고 또 사랑했다. 리사는 지미의 입을 떠나 공중에서 분해되는 아름다운 시들을 받아 적으려 노력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미의 주변 어른들은 지미의 시를 그저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또는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뱉어내는 몇 마디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리사는 달랐다.
“시가 떠올라요”
지미는 리사를 만나고 “시가 떠오른다”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새로 떠오른다 한들 누군가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던 작은 시인의 시. 그것을 진심으로 존중해 주는 사람은 리사뿐이었다.
리사는 지미의 재능에 집착한 유치원 선생님이자 납치범이지만 그녀만큼 지미를 진심으로 바라보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납치범을 벗어나 안전한 경찰차 안에 앉게 된 아이가 말한다. “시가 떠올라요. 시가 떠올랐다고요.” 하지만 경찰은 아이의 말을 궁금해하기보단 아이스크림을 갖다주겠다며 무심하게 차 문을 닫는다. 두꺼운 유리창을 뚫지 못한 아이의 말은 그대로 분해되어 사라진다. 그 자리에서 지미가 아름다운 시를 읊는다 해도 그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순간 사라질 운명에 처해질 것이 분명하다.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마음속 어딘가에 묻어둔 깊은 열등감과 집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인물에 조금씩 동화되어 갔던 시간이었다. 빛나는 것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차가운 세상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리사는 나쁜 어른이었던 걸까. 완벽한 잘못도, 완벽한 애정도 아니었기에 더욱 인간적이고 마음 아픈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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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의 사랑법] 끝장리뷰 | 발(foot), 교회, 성경 상징 | 신발, 알비노 해석 | 가치판단의 딜레마
[대도시의 사랑법](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발(foot)과 교회
Chapter 2 가치판단의 딜레마
00:00 대도시의 사랑법
00:20 박상영 작가
02:36 발(foot)
05:15 성경, 기독교
07:36 가치판단의 딜레마
10:36 별점 및 한 줄 평
10:53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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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를 깨우는 바람> 예고편
“우리는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여성이 삶에서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빼면, 처음 보는 사람들마저 대뜸 그 여성의 비참한 미래를 예언한다. 여성의 삶은 '아내'나 '엄마'로 마무리 되어야만 해피엔딩이라는 낡은 믿음은 2020년이 된 지금도 건재하다.
2020년이 된 지금, 많은 여성들이 낡은 관습을 버리고, 자신만의 세상을 향한 비행을 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시간의 차이를 두고 비혼의 길을 걷고 잇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선택지가 둘이 되어 자유가 확장되고 그리하여 여성들의 일상이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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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 드리프터> 메인 예고편
최강의 질주 액션!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시작된다!우주를 수호하는 제미니 부대는 그레이 리더의 지휘 아래 에레보스 우주 전투에 뛰어든다.
간단한 보호 작전인 줄로만 알았던 미션은 어마어마한 대전투로 드러나고 설상가상,
제미니 부대는 모두 전멸하고 '아들러' 와 '헤이즐'의 함선은 어느 행성에 불시착하게 된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함선과 희박한 산소 그리고 그들을 추격하는 어둠의 그림자가 숨통을 조여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