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4-03 14:21:25
기출변형에 당한 답정너
영화 [헤레틱] 리뷰
이 글은 영화 [헤레틱]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거짓말 같은 변신이 아닐 수가 없다.
한때 멜로영화의 남주(남자 주인공) 역을 휩쓸던 남자가 헤레틱(heretic, 이단)이 되어버렸다니.
만우절 이벤트라며 로맨틱이라는 이름으로 하루 이른 개봉을 할 때만 해도. 더 솔직히 얘기해서 여전히 뭔가 내게 해 줄 말이 있을 것만 같은 저 광고 속에서 촉촉하게 빛나는 눈을 볼 때만 해도. 뭐 끽해봐야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니? 정도의 대사를 내뱉는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영화관에 들어가서 지켜본 그의 모습은 광고에서 보던 스윗함(?)은 온데간데없고, 그가 만들어 낸 미궁의 집처럼 앞뒤 꽉꽉 막힌 답정너가 되어 숨통마저 막을 듯한 기세로 영화 속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물론 각본을 먼저 쓴 뒤였겠지만, 두 소녀와 한 중년남자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제작하려면 제약이 매우 많았을 것이다. 대립의 과정에서 액션적인 요소가 많지도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슬래셔 무비로 가자니 아직도 멜로 눈알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 이 남자는, 안쓰럽게도 간식 트레이 하나 드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역으로 캐스팅되어 버렸다.
덕분에 영화는 넓은 무대를 바탕으로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지도 않고, 점프 스퀘어가 난무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시종일관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물지도 않는다. 러닝타임의 절반은 미스터 리드(휴 그랜트)의 거실에서, 나머지는 골방(?)에서 진행될 정도로 세트 자체의 변경도 매우 단조로우며. 몸싸움이 아닌 말싸움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이 모든 숨 막히고 답답한 제약들은 어쩌면 공포영화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단점으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려 하는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장치가 된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끝없는 통제 속에서 살고 있는 구) 로맨틱 (서브) 남주가 믿음 하나만으로 뭉친 두 전도사에게 공포를 유발하는 방법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긁기"이다.
리드는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에 이스트)에게 시종일관 불쾌함을 유발하는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그저 타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소통방식에서 오는 의아함에서 시작하더니 점점 그 강도를 높여 나중에는 대답조차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질문들을 서슴지 않고 던진다. 게다가 분명히 처음에는 궁금함을 가장한 순수한 질문에서부터 나중에는 강압적으로 진술을 요하는 태도로 두 수녀들을 압박한다. 그것도 여전히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지탱한 채 유들유들한 말투로 빙긋 미소 지으면서.
불쾌함은 처음엔 향수처럼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나중엔 점점 쌓이더니 두터운 연기처럼 몸을 휘감는다. 어느새 주변에 가득한 연기에 당황하며 입을 틀어막는 순간부터는 이 모든 질문들이 쌓여 있는 공간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수녀는 안타깝게도 하나하나 설계된 이 공포 속에서 간신히 숨만 얕게 몰아 쉰 채 비상구를 향해 전진해야만 한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계시록]의 민찬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게 우연의 당위성을 책임전가 한다면. 마이크로 컨트롤을 사랑하는 이 남자는 그 믿음 자체가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주장하기에 민찬 보다는 나아 보이다가도. 신의 존재 자체를 현미경 위에 올려 부관참시를 해놓고는 결국 그 빈자리에 자신이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그리고는 외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해 스스로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리드는 두 수녀가 완벽하게 길을 잃은 순진한 양이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출구가 하나밖에 없는 미로에 집어넣으면. 반드시 그 통로로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면 자신은 또 한 번 신이 되어 우월감과 동시에 두 수녀에게 모멸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두 수녀는 기출변형에 가까웠고. 통제를 벗어난 뿔난 두 염소는 기세 좋게 그가 만든 세계를 박살 내며 리드에게 돌진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밑에 무릎 꿇고 고개를 떨어뜨릴 거라 생각했던 팩스턴 수녀는 스스로를 믿기로 마음먹은 채 그의 신념과 목에 배신을 찔러 넣었다. 게다가 거짓의 결정체라 생각했던 반스 수녀는. 거봐 네가 틀렸잖아.라는 듯 그에게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최후를 선물했다.
통제를 벗어나고 교리조차 소용없어지는 순간에. 리드는 자신이 그렇게도 우습게 보던 것들에 의해 고통 속에서 눈을 감았다. 참으로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마치면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그 어떤 A24의 영화보다도 호불호가 갈릴 영화다.
영화는 다소 설명적이며 수많은 개념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물론 설명하는 장면들에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데 있어 부담감은 없지만. 마치 이제 중학교 수준 영어 듣기를 마친 사람에게 아이엘츠 시험 리스닝을 들이미는 것 같은 속도감의 설명은 자칫 관객들을 피로하게 만들 수도 있다.
누군가가 땀 흘리게 쫓기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좌식 생활에 익숙해져서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날 것 같은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도 영화 중간중간에는 공포를 압도하는 밋밋함이 찾아오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채 버리지 못한 멜로 눈알을 굴리며 수녀들에게 서서히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휴그랜트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영화에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의 TMI]
1. 영화관에서 팝콘 안 먹기 3회 성공
2. 너무 피곤해서 영화 보고 오는 길에 종점까지 갈 뻔함.
3.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헤레틱 #스콧백 #브라이언우즈 #휴그랜트 #소피대 #클로에이스트 #미국영화 #스릴러 #공포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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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서트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콘텐츠
요즘은 신비주의보다 솔직함,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대중에게 더 호응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콘텐츠에서 비하인드 스토리를 주 소재로 풀어내는 걸 쉽게 볼 수 있다.
음악 프로그램<테이크 원>_넷플릭스
뮤지컬과 연극 등을 공연하는 공연장에서는 백스테이지 투어를 이미 예전부터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완성된 콘텐츠만을 보여주던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주 내용을 공연 준비과정으로 다룬 것이 독특하고 재밌다.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이 공연하거나 발매했던 곡 중 단 한 곡으로만 무대를 꾸미라는 미션을 준다.
제목인 테이크 원은 영상 촬영을 할 때, 슬레이트를 한 번 치는 것을 의미한다.
아티스트와 공연 크루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대를 단 한 번의 슬레이트로 촬영을 끝낸다는 것이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공연 준비 제한 시간이 있다.
어떤 곡으로 어디에서 공연할지, 무대는 어떤 식으로 꾸밀지, 관객은 어떤 분으로 모실지 기획해야 한다.
특히 조수미 아이스트의 무대 준비 과정을 담은 시리즈가 인상깊었다.
조수미 아티스트는 365일 중, 300일 가량을 고국인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서 보내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면, 한국 음식이나 문화보다 타국의 것이 더 익숙하고 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 하나의 공연을 준비할 때, 오페라에 한국 전통 음악과 의상을 접목시키려 노력한다.
오페라와 국악을 연결시키기 위해, 공부하고 연습하고 조율해가는 과정도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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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의 사랑 :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 하녀는 아가씨를 사악한 보호자의 손에서 구해 멀리 도망갔습니다.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셀린 시아마가 감독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관람한 관객이라면 아마 박찬욱의 <아가씨> 역시 보았을 것이다. 공통적으로 두 영화는 두 여자 사이의 로맨스를 다루며 '시대물'이고 두 인물 중 한쪽의 신분이 더 높다. 또한 두 작품에 등장하는 낮은 신분의 인물들은 비밀스러운 목적을 가지고 '아가씨'에게 접근했다 사랑에 빠지고 만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하 '불초상')은 그러나 <아가씨>와는 정반대의 끝을 맞고, 되려 이 결말은 토드 헤인즈의 <캐롤>을 떠올리게 하는 이별의 결말이다. 아가씨, 엘로이즈를 사랑하는 화가 마리안느는 함께 도망치자고 권하지 않으며, 엘로이즈와 함께 바다에 뛰어드는 대신 영원한 작별을 위로하기 위해 자화상을 그린다.
<불초상>에서 아가씨를 결혼시키려는 보호자는 아가씨를 해치려는 사악한 악당이 아니라 정해진 길 위의 행복을 건네주려는 어머니이다. 엘로이즈와 마찬가지로 얼굴도 못 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던 백작부인은 다시 고향 밀라노로 돌아가기 위해 결혼을 거부하는 딸(들)의 초상화를 그리려 화가들을 불러들인다. 웃을 일이 없는, 행복하지 않은 백작부인은 자신의 삶을 되물려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첫 번째 초상화가 망쳐지고 백작부인이 떠난 잠깐의 유예기간 동안 바닷가의 저택을 배경으로 평생 잊히지 않을 일들이 일어난다. 소피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조하는 역할인 하녀이나, 주연과 조연의 경계가 무너지고 소피의 이야기가 중심에 선다. 임신을 원하지 않지만 의사를 찾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소피의 임신 중절을 돕기 위해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해변을 달리는 소피를 독려하고, 임신에 해로운 약초를 찾고, 부엌 서까래에 매달리는 소피를 부축한다. 가능한 민간요법을 모두 시도한 후 벽난로와 양초의 어두침침한 빛으로만 밝혀진 방에서 엘로이즈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낭독한다. 소피는 끝내 뒤를 돌아보고 만 오르페우스에 분개하지만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것이 예술가로서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나, 마리안느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롱에 그림을 걸고 엘로이즈는 딸을 낳아 키울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두 차례, 살롱의 그림으로 한 번 그리고 비발디 연주회에서 한 번 재회한다. 그러나 이 재회는 두 번 모두 마리안느의 일방적인 조우이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시간, 둘이 사랑했던 시간 속에서는 화가가 모델을 볼 때 모델 역시 화가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의 그림 속 이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축제에서 마리안느가 모닥불 너머로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릴 때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를 보았다. 화답하는 사랑의 시간이 끝나고, 엘로이즈와 28쪽을 그린 그림을 감상하고 비발디를 들으며 울고 웃으며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엘로이즈를 멀찍이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응시는 일방적인 예술가의 시선이 되었다. 기성 살롱의 예술가가 된 마리안느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만 예술가와 뮤즈의 동등한 사랑과 응시가 끝났음을 알리고 더이상 지속되지 않아 다행일 뿐인 위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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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렇게 산이 되었다
간만에 마이너한 영화를 보았다. 정말 러닝타임이 긴 영화였는데, 그만큼 여운도 긴 영화였다. 한 남자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을 넘어 중년을 향해 가는 나이까지를 그린 영화인 만큼 꽤나 대서사시인데, 영화는 고요한 분위기를 놓지 않는다. 마치 우리네의 인생의 대부분은 별일없이 흘러간다는 듯이. 별일 없이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고뇌의 끈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의 치열함은 결국 그에게 삶을 선사했다. 비로소 만족할 만한 사람도 얻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도 생기는 희노애락 말이다.
1. 어릴 적 친구에 대한 기억이란
나도 10대때의 기억을 점령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 10대에 주된 기억에 그들이 남아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놀러오던 그들, 가끔은 쓸데없는 기싸움을 하기도 하던 그들처럼 피에트로에게도 브루노는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었다. 재미없는 도시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일이 가득한 자연에서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던 브루노는 피에트로에게 신기하고도 대단한 아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과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피치 못하게 헤어졌을 때에도 꾸준히 서로에 대한 기억을 놓지 못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고, 서로를 좋아했고, 헤어짐이 아쉬웠기에 기억이 오래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2. 사람에게는 각자의 때가 있다.
피에트로는 브루노와의 갑작스런 이별 이후, 많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석 엘리트 코스를 권하는 부모에게 반항을 하고, 내외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아버지의 죽고 나서야 집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불효자가 따로없다. 그 이면에는 친우였던 브루노의 인생에 함부로 개입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불만도 있었을 것이고, 틀에 박힌 길을 가고 싶지 않은 그의 모습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부모에게 본 때를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이 브루노와 피에트로, 그 둘을 다시 연결시켜 주었는데, 둘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았던 산 속 집을 지으며 다시 새로운 우정을 쌓아나간다. 그 과정에서 브루노는 본래 자신의 터였던 시골, 자연과 함께하며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낸다. 목장을 지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 생각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그다운 생각이었다. 거침없이 자신의 뜻을 펼쳐내는 그를 보며 피에트로는 조바심에 사로잡힌다. 아직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 친구에 대한 부러움 등이 그를 고뇌에 빠지게 하려던 찰나, 그는 브루노의 응원을 받고 다시 글을 쓴다. 그리고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찾아간 히말라야에서 사랑하는 여자도 만나고, 그의 인생에 화양연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참 인생은 간사하게도 피에트로에게 봄을 주면서도 브루노의 인생에는 겨울을 준다. 이번에는 브루노가 피에트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간다. 그 교차점을 보면서 '인간은 다 자신의 때가 있구나'라고 느꼈다. 브루노의 화양 연화, 피에트로의 화양연화, 그 시기가 같을 수만은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보면서 괜히 씁쓸했고, 가슴이 아팠다.
3. 산에게 던진 각기 다른 질문
피에트로는 산에서 자아를 찾았다면 브루노는 산에서 살고 있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세계 속 규칙에 맞춰 살려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져 버린 것이다. 둘 다 산에서 자신의 답을 찾았지만 산에게 묻는 질문이 달랐고, 그에 따른 답과 결과도 달랐던 것 같다. 피에트로는 산에서 아버지를 발견했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하며 자신의 한계를 뚫고 나갔다면, 브루노는 산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우물 안에서 허우적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도시 사람인 피에트로에게 산은 새로운 정답을 선사해 줄 수 있는 곳이지만 브루노에게 산은 고향이지만 자신이 뚫고 나가야 할 한계점이기도 했다. 브루노의 조상은 자연을 벗어나 본적이 없고, 도시 속 인간의 삶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기에 브루노에겐 그것이 더욱 익숙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도 자급자족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브루노는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기 위해 약간의 교육이 필요했고, 그 지점을 피에트로의 부모는 궤뚫고 있었지만 브루노의 아버지가 그 기회를 날린다. 그저 자연이 좋았던 어린 피에트로에게는 그런 부모의 행동이 브루노의 인생을 망친다고 생각했겠지만 피에트로와
브루노는 엄연히 입장이 달랐던 점을 생각하면 그들의 부모는 오히려 현명한 판단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둘을 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사람이 같은 곳에 있어도 누군가는 오답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정답을 도출해 낸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오답을 발견한 사람은 영원한 실패자일까? 아니다. 그 사람의 답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피에트로의 답이 산에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브루노의 답은 도시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4. 동네 산의 꼭대기를 정복해 산이 되어버린 브루노, 그를 기억하는 피에트로
피에트로는 브루노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그 오두막이 지어진 산을 정복한 자가 브루노고 자신은 그 산을 제외한 여덟개의 산을 정복한 사람이라면 둘 중 누가 더 우월할까를 대결한다. 이 대사가 이해될 듯 말 듯 했는데, 아무리 피에트로가 히말라야를 오르고, 명산에 올라도 그에게 있어 마음 속 에베레스트는 브루노와 놀고, 집을 함께 지었던 그 뒷산인 것이다. 그의 마음 속 에베레스트를 쥐고 흔드는 브루노는 다른 어떤 명산을 다녀온 그보다도 더 우월한 존재로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그는 다시는 그 뒷산을 올라가지 못하고, 다른 낯선 산들만을 해매고 다닐 것이다. 피에트로에게 그 뒷산은 곧 브루노이기에, 낯선 산들을 해매며 브루노를 향한 미안함, 슬픔을 게워낼 것 같다. 청년이었던 피에트로에게 아버지가 자아를 찾는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면, 중년에 나이에 다가서는 피에트로에게 브루노가 그의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피에트로 마음 속의 에베레스트, 마음 속 중심이 되어 그의 남은 인생 산행의 별빛이 되어 길을 밝혀주고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아, 이 영화는 산을 담아내는 카메라 무빙이 정말 장관이다. 보실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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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로드킬 동물에게서 자신을 본 여자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포스터
타국의 하늘(Foreign Sky)
US, Japan/2005/72min/금선희 감독 작품
당신이 길거리에서 로드킬 당한 동물을 본다면 어떤 행동을 할까? 눈을 질끈 감거나 고개를 돌릴 수도 있고,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타국의 하늘〉을 연출한 금선희 감독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한없이 동물의 사체를 바라봤다. 동물의 사체에게서 자기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운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금선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3세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그의 증조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먹고 살기가 낫다는 소문을 듣고 192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간도 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고 의심받아 수없이 살해당했지만, 증조할머니는 다행히 이 비극을 비켜 갔다. 해방 후에는 200만 명의 재일조선인 중 70만 명이 일본에 남았다. 남은 자들은 쓰레기장에서 살며 고철을 모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이 판 고철은 무기가 되어 한국전쟁 중인 남한에 수출되었다 한다.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 동족을 목숨을 겨냥한 지독한 아이러니로 이어진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특유의 근면함으로 ‘조선 특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본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재일조선인은 남한과 북한 중에서 국적을 선택하라고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의 국적은 사라진 나라 ‘조선’으로 표기되었다(심지어 일본과 대립했던 북한은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자녀도 ‘외국인’으로 남았다.
조선에서 왔고, 일본에서 정착했으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재일조선인에게 손을 내민 건 북한 정권이었다. 일본에서 학교 폐쇄 등의 탄압을 겪던 이들은 북한의 도움으로 학교를 건설하고 ‘민족’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 아이들이 ‘김일성이 영원히 젊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항상 차별만 받다가 10일간의 북한 여행에서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았다는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은 재일조선인이 기댈 유일한 구석이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의 북한에 대한 우호적 태도는 일본이 보도하는 악마화된 북한의 모습과 공존할 수 없다. 금선희는 지독한 혼란에 시달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인 학교 규정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던 그는 이중의 분노를 느꼈다. 첫 번째 분노는 치마저고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일본인을 향하고, 두 번째 분노는 여학생에게만 민족의 옷을 입힌 학교를 향한다. 금선희는 두 번의 분노로 ‘재일조선인’인 동시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고민은 그가 미국 유학을 택한 계기이기도 했다. 요컨대 금선희는 복수의 억압된 정체성에서 오는 지독한 소외를 자기 성장의 자원으로 삼았다.
이제 우리는 왜 금선희가 로드킬 당한 동물의 사체에서 자기 자신과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동시에 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금선희와 도로 위 동물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길 위에 던져진 연약한 존재다. 가해자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조차 못 한다.
때문에 동물의 사체를 도로 옆 땅에 묻어주는 금선희의 행위는 동물을 애도하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과 재일조선인 모두를 애도하는 일이다. 이제 남은 건 길을 만든 사람, 길 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몫이다. 가해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동안 피해자는 자신의 슬픔을 모두를 위한 윤리로 확장하여 질문을 던졌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동물의 사체는 길 위에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겼다. 동물의 사체가 길 위에 남긴 흔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글은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 받아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기자단으로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제는 9월 29일까지 이어지며 상영작은 온오프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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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짓기 세상에 등장한 AI라는 존재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린 종종 사람들 최대한 간단하게 구분해 보려 애쓴다. 남녀를 구분해서 성향을 쓰기도 하고, 혈액형 같은 이해하기 쉬운 구분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MBTI 같이 조금 더 세분화된 구분법을 이용해 각자의 성향을 내세운다. 이런 구분 짓기는 너무나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사람들을 조금은 편하게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의 성향을 대략 이해하고, 나 자신의 성향도 상대방에게 인식시킴으로써 불필요한 충돌이나 오해를 없애고 좀 더 빠르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생겨난 것일 것이다.
최근의 구분 짓기는 상대방을 좀 더 편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역사적으로 구분 짓기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나치가 유대인을 구별해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고 흑인과 아시아인들은 차별을 받았다. 여전히 이런 구분 짓기는 유효하다. 과거처럼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런 구분은 암묵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런저런 차별과 구분 짓기에 대한 뉴스를 보다 보면 듣는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구분을 짓는 걸 좋아할까. 같이 잘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구분 짓는 세계에 등장한 AI
영화 <크리에이터>는 AI의 등장 이후, 고도화된 AI를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가장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AI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는 AI를 적으로 간주한다. 미국 LA에 AI가 쏜 폭탄이 터지면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AI는 그들에게 적이 되었다. 반면 아시아 지역에서 AI는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AI를 받아들이면서 같이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간다. 사람 몸의 일부를 기계가 대체하기도 하고, 때론 몸 전체가 로봇이지만 기억이나 정신만 인간의 것을 쓰기도 한다. 그래서 아시아에는 AI와 인간의 혼합형인 시뮬런트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영화는 서두부터 서구와 아시아를 구분 짓는다. 이 구분은 전쟁이라는 극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서구는 AI의 창조자이자 리더인 니르마타를 찾으려 애쓴다. 아시아는 이 신적 존재를 최대한 보호하려 노력한다. 서구는 니르마타를 찾기 위해 특수부대 요원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를 니르마타가 있다고 확인된 아시아 지역으로 보낸다. 하지만 조슈아는 임무 중 만난 마야(젬마 찬)와 사랑에 빠지면서 스파이 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조슈아와 마야가 같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대립하는 집단을 대표하지만 그들은 외모나 추구하는 가치에 의해 그 관계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온전한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 중이었다. 그러니까 구분 짓지 않는 삶을 통해 평온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서구는 조슈아와 마야가 살고 있는 섬에 니르마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과감하게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이 둘의 평화는 깨져버린다. 다시 한번 강력한 구분 짓기 체제가 공생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조슈아가 수행하는 임무
영화는 이 일로 마야가 세상을 떠난 몇 년 후 조슈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그룹도 선택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아가는 그는 어느 날 서구에서 방문한 조직의 리더들에게 니르마타가 개발한 신종 무기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 만남에서 조슈아는 화면 속 마야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인물을 보게 되면서 다시 전장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조슈아는 이 임무에 참여하면서도 그 어떤 편도 들지 않았다. 외형적으로 서구의 무기와 옷을 입고 있지만, 머릿속은 자신이 사랑하는 마야만을 생각하고 있다.
서구의 군인들은 증오의 시각으로 아시아를 바라본다. 개개인이 겪은 경험도 과거 AI로부터 당한 상처나 희생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AI를 포용하는 아시아는 적국으로 간주된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침략하는 서구를 방어하기에 급급하고 가능하면 큰 확전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시아는 상대방을 적으로 생각하는 구분 짓기가 종료되고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서구와 아시아는 계속 강력하게 대립한다. 그래서 이들 간에 정치적인 합의점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AI라는 존재가 등장했고 그 기계인간 안에는 분명히 위험이 도사린다. 서구는 그 위험을 경험했고, 그것을 오롯이 AI의 탓으로 돌렸다. 만약 아시아에서 그런 위험을 경험했다면 구도는 AI와 인간의 구도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크리에이터> 속 세계는 AI를 적으로 보는 집단과 반대의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여기에 새롭게 개발된 새로운 AI는 더욱더 그런 대립을 키운다. 아이 모습을 한 고도화된 AI는 모든 전자제품을 직접 원격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각 집단은 그 AI를 무기로서 바라보고 한쪽은 제거하려 하고 한쪽은 그것을 이용해 전세를 역전시키려 한다.
그 구분 짓기에서 희생당하는 건 결국 수많은 일반 사람들이다. 전쟁은 멈출 수 없고 거기엔 수많은 자원과 목숨이 희생된다. 안정적인 경제 발전이나 사회 발전은 꿈꿀 수도 없다. 마치 지금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처럼 리더 집단들도 그 구분 짓기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다. AI라는 새로운 기술 혹은 인류의 등장은 그런 기술을 아직 인류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진중하게 자신의 말과 고민을 쏟아내는 영화
영화 <크리에이터>는 구분 짓기가 극대화된 사회를 보여주면서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AI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의 모습을 한 그 AI는 악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AI와 시뮬런트들의 모습에서 비도덕적이거나 악의가 있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모든 문제들의 시초는 바로 인간들의 구분 짓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구분 짓기의 비극은 이 영화 속 세계 전체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조슈아는 AI 아이를 통해 자신의 아내를 찾으려 하고 아이는 그것을 돕는다. 영화 속 주인공인 두 존재는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결국 인간이 개발한 AI와 인간이 같이 공생하는 것이 좀 더 나은 선택인지를 두 존재를 통해 되묻는 것 같다.
영화 <크리에이터>를 연출한 가렛 에드워즈 감독은 <고질라> 나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훌륭한 영상과 진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이번 <크리에이터>에서 등장하는 AI의 모습이나 거대한 우주선이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훌륭하다. 또한 이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도 좋다. 새로운 존재의 등장을 각 국가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구분 짓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금 느린 이야기 전개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화면에 담았다.
구분 짓기는 여전히 현대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꾸준히 인간은 세부적으로 상대방을 구분 지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구분 짓기로 인한 혼란과 대립은 현대에 계속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AI 기술은 우리가 그 새로운 존재들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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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색자>와 <택시 드라이버>의 비교 분석
필자는 과거, <수색자>와 <택시 드라이버>를 본 적이 있었다. <택시 드라이버> 시청 당시, 웰메이드 영화임은 분명했지만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있었는데 그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지나 보냈었다. <수색자>를 보았을 때도 약간의 비슷한 감정을 느끼긴 하였지만 <택시 드라이버>만큼의 불쾌감은 아니었다. 당시엔 두 영화의 관련성을 알지 못하였으나 수업을 통하여 두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의 비등함에 흥미를 갖게 되어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두 영화를 선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처음 <택시 드라이버>를 보았을 때의 불쾌함의 원인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1956년 존포드의 <수색자(The Searchers)>와 1976년 폴 슈레이더가 각본하고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을 맡은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두 영화에서 같은 주제를 다른 장르를 통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내러티브 구조를 중심으로 비교하고 의미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과 영화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본 후에 영화 속의 인물과 환경, 영화적 스타일 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
우선 영화 탄생의 시기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할리우드 시대에 서부극의 시작이자 기존 서부극의 컨벤션을 확립했던 존포드는 1956년, 기존의 30, 40년대 서부극과는 다른 수정주의 서부극을 만들었다. 분위기는 달라졌는데 이전과 같은 스튜디오에서의 고전 영화들이 더 이상은 통용되지 않게 된 50년대, 존 포드 또한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사회적 흐름 속에서 스스로 성찰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역사관, 사고방식에 변화가 있었고 수정주의 서부극의 시작이자 <수색자>를 감독이자 작가로서 개인의 예술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기존 서부극의 평면적인 인물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50년대의 관객의 변화 또한 <수색자> 탄생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선한 백인과 악한 인디언의 대립구도를 만들어 관객을 백인의 입장에 위치시키던 할리우드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전략의 전통방식을 무너뜨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개봉 당시보다도 1970년대 이후에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누벨바그, 뉴웨이브의 영향이 할리우드 쇠퇴기에 영향을 미치고, 새로운 작가주의적이고 개인적인 예술로서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서 완벽하게 영화적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부활하면서 누벨바그 영향을 받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찍는 개인적인 영화들이 많아지고 이는 영화 체제 변화에 변화를 줌으로써 고전 할리우드 영화를 재해석하는 장르적 만개가 일어난다. 고전 할리우드에서 B급 영화 취급을 받던 장르들을 누벨바그 감독들이 재해석하면서 자기 영화를 불러오게 된다. 이를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적용시키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알렌과 같은 뉴할리우드 감독들이 누벨바그 시대 감독들이 재해석한 고전 할리우드를 또다시 패러디하고 오마주 해내는 와중에 마틴 스콜세지는 존포드의 <수색자> 구조를 가지고 필름누아르식으로 변형한다.
주제 (내러티브 구조 분석)
1868년 미국 텍사스, 남북전쟁이 끝나고도 쉽게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황야를 떠돌던 이든 에드워즈가 어느 날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동생 아론과 결혼해 버린 마사와 그의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내 인디언(코만치 족)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가족들이 살해당하고 조카 데비는 인디언 추장 스카에게 납치된다. 이에 이든은 아론이 양아들로 키우던 인디언 혼혈남아 마틴 폴리와 함께 데비를 찾으러 떠난다. 광적인 열정으로 오랜 수색 작업 끝에 데비를 찾아내지만,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데비는 추장 스카의 아내가 되어 반 인디언의 상태였다. 이에 이든은 데비를 구하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죽일 생각까지 하지만 마지막엔 생각을 바꿔 데비를 구출한 뒤 마을로 데리고 돌아오고 그는 다시 마을을 떠난다.
베트남전에서 생사의 극한 경험을 하고 뉴욕으로 온 트레비스는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낸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그는 택시운전사로 취직하여 밤새워 근무를 하지만 여전히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근무가 끝난 아침엔 극장으로 가 포르노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뉴욕의 밤거리를 달리는 트래비스는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거리의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나날을 보내던 중, 공화당 선거운동캠프에서 일하는 베시에게서 본인을 구원해 줄 천사의 모습을 느끼고 다가가지만 첫 데이트에서 포르노 극장에 데려가면서 둘의 관계는 깨져버린다. 그런 상태에서 트레비스는 우연히 13살의 어린 창녀 아이리스를 만나게 되고 아이리스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다양한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정신이상자 수준의 망상에 빠진 상태로 대통령 후보를 암살할 계획으로 체력단련을 하고 총까지 구입하지만 이 또한 실패해 버린다. 그 길로 아이리스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이리스를 구하고 포주들을 살해한 뒤 본인도 자살하려 했으나 경찰에 체포되고 이는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그는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고 그는 다시 택시 운전사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내용으로 케네디 대통령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베트남전 패배 등의 사건을 통해 극심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던 7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이든이 남북전쟁에서 패한 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남군 장교로서 절망감과 외로움에 사무친 인물이라면 <택시 드라이버>의 트레비스는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절망감과 외로움에 빠져있는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서사적 구조를 보면 ‘사회의 쓰레기 제거'로 할리우드식 영웅전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수색자> 같은 경우는 평화로운 마을이라는 질서에서 코만치로 인해 무질서가 되고 회귀하여 다시 질서를 되찾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의 질서이다. 이를 <수색자>는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통하여, <택시 드라이버>는 필름 누아르라는 장르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50년대 이후, 작가주의적 성향이 더욱 깊어지면서 서브텍스트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평면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전사, 다른 인물들의 스토리 등 심층적으로도 볼 필요가 있다. <수색자>에서 이든과 마사의 관계에서 이든의 채울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이 이든의 분노의 원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재된 분노가 이든이 돌아오지 못하고 황야를 떠도는 이유를 더 깊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두 영화는 국가(남북전쟁과 베트남전)란 이름으로 불려 갔다가 돌아왔을 때, 이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복귀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자의 외로움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폭력성과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인물과 환경 (인물 분석)
<수색자>의 이든은 기존 서부극, 과거의 영웅적인 총잡이와는 다르게 문제를 가진 인물로, 극 중에서 데비에 대한 태도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깨지는 것을 발견한다. <택시드라이버>의 트레비스 또한 서부극의 총잡이 같은 인물이지만 실은 부정적인 인물로 같은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 시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영웅주의가 팽배하였지만 60~70년대로 넘어가면서 영웅주의를 깨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수색자>의 이든 또한 정의와 명예에 목숨을 걸었던 기존의 영웅적인 총잡이와는 다르게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떠난다(극 중에서 여자는 초반에만 등장하지만 이후에도 그러한 의미들이 등장한다). 동생과의 관계에서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돈으로 거래하는 관계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트레비스 또한 망상과 현실의 구분에서 혼돈하다 결국 극한에 이르러 폭발하는 인물로 그 폭발의 결정적 계기는 베시와 아이리스라는 두 여자로부터 받은 배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베시에게 거절당한 뒤, 구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영웅이 되고자 한다. 트레비스가 아이리스를 구해주려 하지만 거절하는 아이리스는 이미 인디언이 되어버려 자신을 구하러 온 이든을 경계하는 데비의 모습의 변주라고도 할 수 있다.
<수색자>에서 마틴에 대한 이든의 태도에서도 이든의 불완전함이 드러난다. 마틴이 자라면서 피부색이 어두워지자 ‘널 몰라보았다’며 이후 마틴에 대한 태도가 차가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하러 간 데비가 인디언의 여자가 되자 굉장한 적대심을 드러냄으로 이든의 인종차별적인 행동들을 볼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특징이기도 한 특징으로 트레비스를 굉장히 마초적인 남성으로 그려내면서 자신이 더러워진 도시의 구원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살인자이자 영웅으로 그려낸다. 이런 구조를 통하여 <수색자>는 영웅처럼 보이지만 비도덕적이고 문제 있는 인물로, 인물 자체를 통해 미국의 폭력성과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택시 드라이버>는 트레비스와 뉴욕의 상반된 거리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
영화적 스타일 (영화의 형식)
각 영화들이 어떤 영화적 스타일을 통해 주제를 드러내는지, 메타포와 촬영 기법 등을 통해 알아보겠다.
캄캄한 집 안에서 마사를 따라 문 밖을 나가 이든을 보여주는 도입부와 데비를 데리고 돌아온 이든을 반기는 사람들이 데비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갈 때 카메라도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가 황야에 홀로 남은 이든을 찍는 마지막 장면은 <수색자>의 형식상의 특징 중 그 형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수미상관의 구조를 취한 형태이다. 여기서의 ‘문’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영화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 ‘문’은 가정과 황야, 문명과 야생 등 문 안과 문 밖의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선과 악을 구별해 주는 이항대립 구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까지의 서부극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경계이기도 하다. <수색자>의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에서는 ‘문 안’이 가정이지만 문명화된 사회를, 밖은 야생, 즉 무질서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줄곧 문 안과 밖을 항상 구분시키도록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데비를 발견하고 끌어안으며(사진 1, 사진 2) ‘집으로 가자’는 장면도 동굴의 문 밖은 야생을 의미하며 데비와 이든은 문명으로 문 안에서 대화를 한다. 이와 같이 야생과 문명사회를 구분시킴으로써 미국의 이중성을 고발하는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에서는 뉴욕의 낮과 밤의 상반된 거리를 이중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는데, 조국을 위해 싸우고 돌아왔으나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며 그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에 야간 택시 기사로 근무를 하며 밤거리만을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수색자>의 도입부에서 남북전쟁이 끝나고 군복을 입고 찾아왔으나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고향으로 홀로 찾아온 이든과 대응되기도 한다.
트레비스의 군복 또한 의미가 있는데, (사진 3)의 일자리를 구하러 간 트레비스는 군복을 입고 있고, 후보를 암살하러 가는 장면(사진 4)에서도 군복을 입고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 <수색자>의 직접적인 변형이기도 하며 트레비스가 본인이 베트남전 군인이었음을, 인디언의 존재를 상기시킴으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폭력성을 그래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군복은 그가 그가 베트남전에서의 후유증을 더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진 3)은 뉴아메리카시네마의 특징 중 하나인 이중프레임으로 구성된 프레임이기도 하다. 체력 단련을 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그의 등 뒤의 큰 상처(사진 5)는 전쟁에서 얻은 것으로 짐작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포르노 극장(사진 6)에서의 첫 영화는 교육받지 못하고 홀로 살며 아무런 배경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여가 수단으로, 일상에 복귀가 어려움을 극대화시켜주고 있다. (사진 7)은 첫 데이트에 베시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간 뒤 베시에게 성토당하는 장면.
<택시 드라이버>가 야생에서 들어온 남자를 배척해 버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면 뉴욕이라는 도시는 미국사회 특수성을 대변하는 공간이자 서구 현대문명의 일면을 상징하는 공간이고 문화이며 경제의 중심이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뉴욕의 거리는 그런 뉴욕의 거리와는 다르다. 이러한 뉴욕의 거리의 상반됨을 강조하는 요소 중 하나가 베시가 근무하는 ‘공화당’ 캠프이다. (사진 8) 우연히 대선 후보와 비서를 태우는데, ‘공화당’은 트레비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천사가 일하는 곳이고 정치 행보상 미국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실상은 지저분한 썩어빠진 이야기들이었다. 이러한 사건과 총은 트레비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것이다. 트레비스는 낮-꿈꿔왔던 천사 같은 외모의 대선 캠프에서 일하는 여자-과 밤-13 살의 창녀, 포주화된 뉴욕의 뒷골목-을 떠돌며 미국의 이중성을 본 것이다.
(사진 9) 자신의 방에서 대통령 후보 저격을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을 하는 트레비스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며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들고 정작 암살에는 실패하고 도망치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영화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뉴욕의 택시 기사 트레비스는 뉴욕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관찰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충분하게 보여진다. 뉴욕의 밤거리를 보며 트레비스가 내뱉는 독백(사진 10)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대사라고도 볼 수 있다. 너무나 어둡고 쓰레기 같은 뉴욕을 보면서 ‘이 사람이 과연 무엇을 위해 싸웠나’에 대한 의심, 생각을 하게 만들고 소시민이 스스로 성찰하게 하는 얘기로 이 영화를 완성시켜 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는 ‘인간쓰레기’인 포주들을 죽이고 자신의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며(사진 11) 미소를 짓는다. 그의 미소에선 천사 같은 순진성과 악마 같은 잔인성이 공존하며, 여기까지 트레비스가 보여주었던 망상과 행동은 위기에 빠진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징후이자 절망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억눌리고 비틀린 한 외로운 인간의 내면적 광기를 탐색하면서, 베트남 전쟁 이후 영웅이 존재할 수 없는 세계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담고 있는 두 영화를 통해 단순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만 느껴져서 처음에는 느끼지 못하였던 것, 전쟁 이후 국가를 위해 자신은 내어 바친 개인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로 돌아온 인물들의 외로움이 이제야 조금은 감응되는 듯하다.
<택시 드라이버>는 고독감과 좌절감으로 망상에 빠져든 한 퇴역한 군인의 모습을 통해 70년 미국 사회가 앓고 있던 베트남 전쟁 후유증을 탁월하게 그려낸 사회 심리 드라마이지만 기존의 영웅물에만 적응하고 있었던 나에게 기존 영웅물들과는 다른, 비도덕적이고 문제 있는 인물을 그대로 표현한 인물설정으로 적잖이 당황하게 했다.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미국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필름 누아르의 표본의 영화임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택시 드라이버>가 서부극에서 필름 누아르가 되기 전에 이미 <수색자>는 서부극의 형태를 한 필름 누아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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