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3-10 19:53:17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영화 <미키17> 리뷰
SYNOPSIS.
“당신은 몇 번째 미키입니까?”
친구 ‘티모’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지고 못 갚으면 죽이겠다는 사채업자를 피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미키’. 기술이 없는 그는, 정치인 ‘마셜’의 얼음행성 개척단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로 지원한다. 4년의 항해와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뒤에도 늘 ‘미키’를 지켜준 여자친구 ‘나샤’. 그와 함께, ‘미키’는 반복되는 죽음과 출력의 사이클에도 익숙해진다. 그러나 ‘미키 17’이 얼음행성의 생명체인 ‘크리퍼’와 만난 후 죽을 위기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다. 행성 당 1명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둘이 된 ‘멀티플’ 상황.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현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자알 죽고, 내일 만나”
POINT.
✔️ 봉준호 감독의 신작. 다른 말이 필요할까요?
✔️ 시작은 하이틴 스타였지만 어느새 모두가 믿고 보는 배우가 되어 있는 로버트 패틴슨. 그뿐 아니라 토니 콜레트,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애키와 스티븐 연까지... 매력 있는 배우들이 가득 등장합니다.
✔️ 감독의 전작 중 <마더>나 <살인의 추억>보다는 <옥자>와 <설국열차>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
✔️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수많은 노동자 특히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청년들을 언급했는데요. 막상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독재자 쪽을 실재와 많이 연결하는 분위기...�
*<미키17>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셔요.

봉준호가 '명징하게 직조'하는 세계
<미키17>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감독의 (영어 영화) 전작인 <옥자>와 <설국열차>를 떠올린다. 비록 입 안은 한강 <괴물> 쪽을 더 닮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옥자를 연상케 하는 친근한 외계 괴수가 등장하고, 망해가는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을 '개척'하러 떠난 우주선 내부는 어쩐지 얼음으로 뒤덮인 지구의 어떤 기차를 떠오르게 하니까. 한국 사회의 어떤 지점을 송곳처럼 좁고 집요한 시각으로 후비는 대신, 가상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범세계적인 주제를 두루두루 두드리는 작품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세계에서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계열의 영화들을 선호한다면, <미키17>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있다. 한결 독기가 빠진 느낌, 한결 초점이 여러 군데로 분산된 느낌에서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그가 후벼파는 세계는 너무 정확하고 그래서 너무 보기 괴로웠으므로 (이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는 마음에 공감성 수치 비슷한 마음을 뒤섞은 것이다) 한결 넓게 두드리는 세계를 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그가 '명징하게 직조'해낸 세계에서 다루는 주제 의식도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미키17>은 봉준호 감독 작품으로는 놀랍게도 사랑 영화다.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로 사랑 영화.

미키는 종이처럼 계속해서 재출력되는 '인간'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SPC 계열사) 제빵 기계에" 사고를 당한 이들을 말하며 "나열한 사건의 그 자리에 또 다른 분들이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미키가 복제되는 것이 판타지 같지만 김군 뒤에 박군이, 그 뒤에 윤양이... 일자리는 유지되고 인간이 계속 교체되"는 현실을 이야기한 바 있다.
친구와 마카롱 가게를 냈다가 쫄딱 망한 미키의 이야기는, 숱하게 유행 따라 깔렸다가 사라지는 가게 종목들 (<기생충>의 대만 카스테라는 물론, 그 이전에는 커피 번이나 슈니발렌 과자, 그 이후에는 탕후루가 있다.)을 생각나게 하는 동시에, 4대 보험도 되지 않는 다양한 일자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망한 자영업자이며, 플랫폼 노동자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고용주가 그 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작업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다.

미키1에서 미키15까지의 시간은 영화에서 매우 빠르게 처리되지만, 그래서 마치 우주선의 탐험 목적과 우주선이 부여받은 임무를 스케치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그 과정에서 미키가 인간이라는 감각은 점점 희석된다. 망한 자영업자이자 4대 보험 안되는 노동자였던 그에게, 생체 실험 피해자라는 타이틀이 추가된다. 이쯤 되면 그의 일은 더 이상 노동법상 분류하는 노동에 속하지 않는다. 지구를 빠져나간 우주선에게 법을 들이대는 것도 우습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되는... 근로기준법상 그렇다. 근로기준법 제2조 1항에서 "근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으나, 죽음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와 그의 노동 모두, 법 바깥의 무엇이 된다.
미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극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미키에게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는다. 제니퍼를 생각해서 머뭇거리면서도 어렵게 말을 꺼내는 카이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딱히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본 질문이 아니다. 존재와 노동이 모두 법망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 질문은 미키와 자신 사이의 선을 확인하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미키의 존재를 한 번 더 밀어내는 질문이다. 똑같은 우주선을 타고 있지만, 너는 여기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선포, 미키의 이름을 지워내는 명명(命名)이다.

여기서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키17은 필연적으로 무력하다. 절대 다수가 그에게 성원권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정체성 투쟁의 핵심에는 모욕에 대한 저항이 있"고, 모독은 ,"그들을 사물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모독(mortification)의 어원에 죽음mort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냐는 모욕 앞에 미키는 저항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짓눌려, 침묵으로 그 시간을 묵묵히 넘길 뿐이다. 이러한 폭력적 구조에 오랫동안 짓눌려온 미키는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구조에 억눌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며, 사회적으로도 계속 밀어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미키는 일종의 부관참시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말할 것도 없이 마셜과 일파 부부다. 사실 이들이 미키만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어쩐지 현실 곳곳에서 많이 본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제니퍼의 사망 앞에서 그들이 보인 반응은 '제니퍼'라는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게 아니라 '자궁을 가진 가임기 여성'의 죽음을 아까워 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생명체에게는 '크리퍼'라는 집합명사를 붙인다. 그들에게는 자기들 두 사람 외 모든 인물들이 집합명사로 존재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처럼, 이들은 우주선에서 타인의 이름을 들이마셔 때로는 지우고 때로는 악마화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미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나샤 그리고 미키18이다. 미키1에서 미키17까지의 우주선의 탐험 역사와 과제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관객이 이 모든 미키들을 한 사람으로 인지할 때,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 미키18이 등장한다. 마치 <서브스턴스>에서처럼 힘주어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고 말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색깔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미키17과 미키18 또한 한 사람이다. 체제에 순응해야 했고, 법 바깥의 존재인 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미키17과, 그런 미키17 안에 어딘가 쭈그러져 있었을 다른 마음이 전면에 나선 미키18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모든 미키를 순정으로 끌어안은 나샤가 있다. 특히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정말 아름다워 울컥했다. 나샤에게 있어 미키의 존재가 법 안에 포용되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미키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괴롭지 않았을 리 없음에도 그를 혼자 두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 아름다운 순정이어서.

인간성이 메마른 지옥도에서 우리를 구하는 건 결국 사랑이다. 그것이 독점적 연애 관계든, 무어라 정의 내리기 이전에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든,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이든. 오늘의 내가 하루를 살아가기 전에, 나를 끌어안고 내 아픔을 애정과 안타까움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 사랑이 있고. 오늘의 내가 되기까지 잘 먹고 애쓰며 살아낸 과거의 내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내가 다가오기를 미래에서 (조금을 나를 답답해 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을, 미래의 나도 있다. 이 모든 존재들의 사랑으로, 우리는 오늘을 산다.

인간이 인간 되는 힘, 상상력
하지만 모든 사람과 자기애 같은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 같은 깊은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인간성의 최소선을 우리는 도로시에게서 볼 수 있다. 나 자신과 연인.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제외하고 미키의 목소리, 더 나아가 크리퍼의 목소리까지 들으며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인물이자, 소통의 방식만 놓고 보면 마셜과 일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도로시는 크리퍼의 반응에서 그들이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인물이자, 미키를 인간으로 대하는 유일한 과학자다. 미키의 손이 잘려 나가도 '와 대박' 이러고 있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리 (그들에게 미키의 신체는 사물화되어 있다), 미키의 수명이 10분인지 15분인지까지 살뜰하게 신경 쓰고 있는 유일한 과학자다. 타인을 사물화하지 않는다는 건, 타인의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로시가 과학자로서 가진 가장 큰 힘은 아마도 바로 이 상상력이 아닐까. 가능성을 상상하고,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며, 지금 없는 것들을 그려 볼 수 있는 능력. 돌아보면 영화에서 마셜과 일파가 만든 세계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인물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다. 철저하게 '소모품'으로 대우받고 죽어가는 미키와 함께하는 매일을 상상하는 나샤도, 독재자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미키18도.

결국 사랑도 소통도 그런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다 보면 제일 끔찍한 것도 제일 애틋한 것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일 끔찍한 인간의 상태, 그저 인간성이 메말라 온 세상을 지옥도로 인지하는 상태를 벗어나려면, 소통이라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어디선가 다양한 의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코처럼 고함을 질러 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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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의 어느 구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연출: 김동령, 박경태 | 제작: 웃음과바늘, ㈜시네마 달 | 배급: ㈜시네마 달 | 출연: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누구보다 죽음을 많이 본 미군 ‘위안부’ 출신 박인순이 스스로 자신의 복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저승사자들에 맞서는 오드 판타지 영화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이 <거미의 땅>(2013)에 이어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나는 사전에 이 영화가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는 일에 꽤나 애를 먹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에 초청되었다고 하니 다큐멘터리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구의 인물들이 나와서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라 극영화로 볼 요소도 다분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두 감독은 아마 관객과 평단, 영화를 받아들이게 될 이들의 혼란을 일부러 유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기지촌 미군위안부는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자발적으로 벌어진 국가폭력이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이들의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접하기보다 새어나오는 일부의 선택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영화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듯 기지촌 미군위안부 박인순의 이야기를 더 많이 보여주려는데 애쓰기보다 오히려 허구의 이야기를 씌운다.
영화가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까지는 유효했다. 장르 자체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모호한 구분을 유영하지만 이야기 역시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질서에 의해 왜곡되어야 했던 기지촌 미군위안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어서 들어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력적이지 못한 이야기 자체의 문제와 연기에서의 아쉬움이 이 모든 형식적 도전을 영화에 착 달라붙지 못하게 하고 표류하게 만든다.
우선 난해한 구성의 이야기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빨아들이지 못한다. 뚜렷한 기승전결이 없고 박인순 주변의 등장인물들도 별다른 역할 없이 흩날려버린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제목이지만 영화에서 별 의미가 없고, 박인순이 모든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는 후반부도 뜬금없게만 여겨진다. 거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지나치게 인위적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놓인 영화의 불균질함이 잘 드러나서 오히려 좋아할 사람도 있겠으나 내게는 그저 인내하고 보기 어려운 연기들일 뿐이었다.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주류 중심적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형식적 시도를 장착했다. 그러나 이 창의적인 현대사의 어느 구전(口傳)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 영화가 영화 자체의 만족도를 주지 못할 때 그 작품이 지닌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도발적이지만 표류하고 만 형식적 시도 앞에 그래서 더 아쉬운 마음이 크게 느껴진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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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잎이 없는 것의 꽃의 이름
음악가 노부부의 집, 식사 도중 아내 앤이 갑자기 모든 행동을 멈춘다. 남편 조르주는 왜 그러냐고 묻지만 대답이 없는 앤을 보고 놀라 급히나갈 채비를 한다. 그러던 중 다이닝룸에서 다시 들리는 씽크대를 잠구는 소리에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다이닝룸에 있던 사람은 아내 앤뿐이었기에 소리를 낼 사람도 앤 뿐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으로 가려고 했던 조르주는 앤에게 왜 움직이지 않았냐고 묻지만 앤은 기억을 못한다.
앤과 조르주, 이들은 수십년을 함께한 노부부다. 샹젤리제 극장에서 연주하는 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던 앤의 노후는 이제 조금 달라질 것 같다. 그의 남편 조르주 역시도 말이다. 의사에 말에 의하면 앤은 경동맥에 이상이 생겨서 순간 모든 행동이 멈추고 기억이 없었다고 한다.
앤은 언제나 곧은 성격과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 신체가 마비되었다는 사실에 집중되는 것이 싫어 그의 제자 피아니스트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심지어는 딸 에바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조르주에게 집에 오지 말라고 대신이야기를 전한다.
병원이라면 질색을 하며 살아온 그녀는 조르주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병원에 넣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앤의 상태는 악화되고 딸 에바는 앤을 요양병원에 보내자고 하지만, 조르주는 간호사를 교대로 고용하며 앤을 보살피며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를 마음먹는다.
나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아무르>로 처음 접했다. 제목 그대로 불어로 'Amour', '사랑' 이라는 의미인데, 노년부부로 이야기를 만든이유가 특별히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의미하는 어떤 특정한 정의를 영화속에서 내리겠지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영화 속 부부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아주 느릿하고 서서히 진행된다. 영화에서는 수 많은 신(scean)을 리얼타임으로 보게된다. 감독이 반복해서 고집하는 이 연출법은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충분하게 준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이 영화를 구경할 수 없게 된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스스로 생각하게한다. 영화는 나름의 반전을 가지고 있는데, 이 반전에 우리가 놀람보다 어느정도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유 또한 감독의 지혜때문이다.
영화 <아무르>는 2012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꽃이라고 하면 피어난 꽃의 ‘송이’를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 꽃을 피어나게 하는 것은 뿌리와 몸통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피어난 꽃의 ‘송이’ 자체만 보고 많은 것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기 전에 조르주는 미리 꽃송이를 잘라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기획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새로운 관점에서의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궁금했다. 조르주가 앤의 숨을 끊는 모습을 보고 그 이전 수년동안 그녀를 간호한 그의 손길과 마음들은 모두 무산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또, 그는 왜이렇게 비둘기 잡는 것에 집착했던 것일까. 결국 놓아줬다고 했지만 그는 확실히 그 비둘기를 잡으려고 집 안에 모든 창과 문을다 닫기까지 한다. 나는 조르주가 꽃 머리만 자를 때, 비로소 감독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영화가 말하는 'Amour', 사랑이라는 정의는 송이가 잘린 꽃이다.
우리는 조르주의 행동이 함부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또 윤리적인 측면의 접근을 막는 것은 아마도 조르주의 행동의 결과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조르주의 희생의 시간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사랑이라고 말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무르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담은 꽃 잎 없는 꽃을 건네준다.
** 본 리뷰는 브런치 작가 '성실'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팀에서 업로드한 게시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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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주제, 3부작 시리즈 영화 모음 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하나의 주제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그린
3부작 시리즈를 제작한 감독의 영화를 추천해보려고 하는데요!
오늘 한번 정주행해보는 건 어떨까요?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3부작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낭만 3부작
ⓒ 다음 영화
자끄 드미 감독의 '낭만 3부작'
자끄 드미의 낭만 3부작은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현재 대부분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명칭이다.
1부는 1961년 작품 <롤라>, 2부는 1964년 작품 <쉘보르의 우산>, 3부는 1967년 작품 <로슈포르의 연인들>로 이어져있다. 세 작품 모두 뮤지컬 영화로 자끄 드미의 특별한 색감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거리 3부작'
ⓒ 네이버 영화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시작으로 약 10년에 걸친 프로젝트였다.
'길거리 위' 남자들의 주먹을 다루며,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처럼 제목 속에 '거리'가 겹쳐 '거리 3부작'이라는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1부는 2004년 작품 <말죽거리 잔혹사>, 2부는 2006년 작품 <비열한 거리>, 3부는 2014년 작품 <강남 1970>로 이어져있다.
세 작품 모두 싸움을 통해 이야기가 진행되며 <강남 1970>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평을 받았다.
'복수 3부작'
ⓒ 네이버 영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원래 기획되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친절한 금자씨> 이후 평론가 사이에서
'복수 3부작'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세 작품 모두 복수를 다루고 있어 '복 수 3부작'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1부는 2003년 작품 <복수는 나의 것>, 2부는 2003년 작품 <올드보이>, 3부는 2005년 작품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져있다.
앞서 말했듯이 세 작품 모두 '복수'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시사하는 바는 완전히 다른 영화이다.
오슬로 3부작
ⓒ 네이버 영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오슬로 3부작'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오슬로 3부작'은 노르웨이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1부는 2006년 작품 <리프라이즈>, 2부는 2011년 작품 <오슬로, 8월 31>, 3부는 2022년 작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로 이어져있다.
2000년대 부터 2010년, 2020년대까지 가장 오랜 시간 작업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
영화마다 오슬로의 아름다운 전경을 확인할 수도 있으며, 특히 아직 개봉안 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현재 관객들에게 화제를 모으며
기대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청춘 3부작'
ⓒ 네이버 영화
이준익 감독의 '청춘 3부작'
이전 3부작과 달리 이번 3부작은 감독이 직접 '청춘'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3부작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2016년 작품 <동주>를 시작으로, 2부는 2017년 작품 <박열>, 3부는 2018년 작품 <변산>으로 이어져있다.
<동주>가 청춘 3부작의 동기가 되었다고 밝혔으며, 이후 제작된 청춘 시리즈 모두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씨네랩 에디터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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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현실적인 디스토피아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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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은 서기 2027년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이 2022년이니, <칠드런 오브 맨>의 세계가 구현된다면 바로 지금이다. 출생자가 없으니 살아있는 자들이 다 죽으면 인류가 멸망하는 세상. 영화가 개봉되었던 2006년에는 픽션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반쯤은 논픽션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는 다니스 고렛 감독의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는 2043년이 배경이다. 20년 뒤에는 이 영화를 두고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고 말하게 될까. 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도 충분히 현실적이다.
제국주의 메타포
거대 독재국가 '에머슨'은 4살 이상의 아이들을 모두 아카데미로 보낸다. 이름은 아카데미이지만 사실상 군대라고 볼 수 있다. 에머슨은 전쟁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데, 살상무기가 바로 아이들인 것. 한 번 아이들을 아카데미로 빼앗기면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러니까 아이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이다. 그 국가가 조국도 아니다. 원래 살던 땅을 점령한 침략자이자 식민지 통치자들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있는 지금, 이 영화는 오히려 현실보다 덜 비극적여 보인다. "하나의 나라, 하나의 언어, 하나의 국기"를 표방하는 에머슨의 구호는 낯설지 않다. 러시아뿐인가. 중국 역시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고 있다. 영화는 마치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던 1492년처럼 구현된다. 흰 피부와 최첨단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토착민들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고 그들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에머슨은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드론으로 식량을 배급한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들은 드론이 떨어뜨리는 식량들로 연명하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죽어간다. 식량에 바이러스를 심은 것. 우리는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균 때문에 토착민들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어갔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디스토피아의 종말론적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재현에 가깝다. 실제로 토착민의 피가 흐르는 감독의 입장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였을지도 모르겠다. 연출을 맡은 타이카 와이티티 역시 뉴질랜드 토착민을 조상으로 둔다.
우리나라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기간과도 거의 유사하다. 일제의 대동아공영론이나 가상 국가인 에머슨의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언어를 말살하고 땅과 민족성을 빼앗는 것. 일제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통치 방식은 비슷비슷하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디스토피아는 새로운 것(외계인, 로봇 등)의 등장이라기 보다는 이미 존재했던 제국주의적 학살의 재현이다.
구원자 서사
영화는 내래이션으로 시작된다. 명상을 하면서 거대한 모기떼와 북쪽에서 구원자가 찾아오는 것을 보았다는. 니스카와 그의 딸 와시즈는 에머슨의 눈을 피해 숲속에 산다. 무려 11년이나 에머슨을 따돌렸다.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서, 새 사냥을 해야 하는데 와시즈는 새에게 말을 건다. 그의 말을 알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새는 날아 가버리고,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야 하는데다 설상가상 와시즈의 다리가 덫에 걸린다.
어쩔 수 없이 황폐화된 도시로 돌아간 모녀. 약을 구하고 싶지만 보건소에 가면 당연히 와시즈가 끌려갈 테고, 속수무책으로 친구의 집에 숨는다. 친구의 아들은 에머슨에 끌려가 군인이 되었다. 덫에 걸린 상처는 점점 깊어지고 열까지 끓어오르는 와시즈를 구하기 위해 니스카는 스스로 아이를 에머슨에 보낸다.
이렇게 되면 관객들이 예상할 수 있듯 영화는 '엄마의 딸 구하기' 양상으로 접어든다. 시장에서 말린 과일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니스카에게 접근한 남자는 같이 에머슨으로 가자고 제안하고, 또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크리족의 본거지로 가게 된다. 전개가 다소 갑작스럽고 불친절하다.
크리족은 공동체사회를 이루어 사는 토착민이다. 그들의 모습은 인디언과 비슷하다. 그들은 니스카가 북쪽에서 온 크리족이라는 걸 알고는, 그가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영화 초반에 나온 내래이션은 크리족의 예언인 것.
니스카가 할 일은 크리족 아이들을 데리고 빅스톤이라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면 딸 와시즈를 에머슨으로부터 구해주겠다는 딜. 알고 보니 크리족들도 아이들을 숨겨두었고, 그 아이들을 안전지대로 데리고 가야 했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니스카라는데, 한 부족의 운명을 맡길 사람을 너무 검증없이 믿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다.
에머슨의 이간질로 딸은 엄마가 자기를 버린 줄 알고 있다. 이간질과 세뇌는 상대편을 우리편으로 끌고 오기에 너무 좋은 수단이다. 상대가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클수록 효과도 커진다. 아무튼 와시즈는 와시즈대로, 크리족은 크리족대로, 니스카는 니스카대로 난관에 봉착한다.
거대한 국가주의와 힘없는 가족주의의 싸움에서는 필연적으로 소집단이 패하게 된다. 그때 소집단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구원자 신화이다. 영화는 힘없는 토착민들에게 구원자를 내려줌으로써 그들을 구하고자 한다. 니스카가 이들을 구하게 될까, 와시즈를 구하게 될까, 혹은 크리족이 이 모녀를 구하게 될까.
디스토피아는 왜 비슷한 모습일까?
타이카 와이티티의 (아직까지는) 대표작인 <토르-라그나로크>의 환상적인 영상과 <조조 래빗>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면, <나이트 레이더스>에서는 와이티티가 왜 자신만의 디스토피아를 구현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다. 기대했던 포인트가 와이티티의 연출이었는데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왜 모든 디스토피아는 회색일까.
눈이 내려 컴컴한 숲, 에머슨 시민권을 얻지 못한 자들이 사는 곳, 그들의 옷, 골목 등 모든 것이 회색이다. 디스토피아들이 대부분 회색으로 표현되는 것처첨, 이 영화는 한편으로는 지난 디스토피아 영화들의 답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과하게 화려하고 발랄한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는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 회색 디스토피아는 너무 많다.
요즘 2시간 반은 기본으로 깔고 가는 영화가 주를 이루는데, <나이트 레이더스>는 러닝타임 101분이라는 대단한 미덕이 있다. 러닝타임이 짧은 탓인지 전개가 갑작스럽거나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꽤 있었다. 세계관의 구현도 다소 아쉬웠다. 다른 디스토피아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변별점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은. 그러나 아직 작품수가 많지 않은 감독이고, 첫 장편이기에 앞으로의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나이트 레이더스>의 속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이 세계를 그리고 인식하는 방식이 좋다. 거대한 힘이 휘두르는 폭력 앞에 우리 모두는 패전국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힘이란 군사력뿐만 아니라 자본력도 포함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러시아가 있고, 신장 위구르 지역 및 기타 소수민족을 핍박하는 중국이 있다. 그뿐이겠는가. 우리나라 내에서도 폭력은 끝없이 자행된다.
<나이트 레이더스>에서 세상이 디스토피아가 된 원인은 외계인도,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도, 어떤 특별한 힘도 아닌 그냥 못되고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그럼에도 폭력에 굴하지 않는, 서로를 구원하려는 인간이 있는 한 이 세상이 쉽게 디스토피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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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세상 끝에서, 너와 나> 이야기를 하면서도 영화 제목에 대해서 한번 언급했는데, 나이트 레이더스... 나는 처음에 '밤의 전파'인가? 했다. 알고 보니 Rader가 아니라 Raider이니 '야간 침입자'인가... 알고 보지도 못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와도 사실 어느 쪽이 레이더스인지 모르겠다.
에머슨처럼 전 세계가 하나의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알고 보면... <나이트 레이더스>의 디스토피아는 이미 진행 중인 게 아닐까?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남기는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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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급형 넷플릭스 로맨스 콘텐츠
요새 영어공부를 슬금슬금 다시 시작했다. 시간이 참 많았는데 이제 시작하는 내 자신에 대해 한심함을 느끼면서도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더 늦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전문직 직종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따라가기 급급하기에 이지리스닝을 찾다가 이 드라마를 찾아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어공부라는 핑계로 계속 보긴했는데 두 번은 보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중간에 하차할 수도 있었는데 약간 막장드라마를 보는 심리로 봤는지도 모르겠다.
로맨스란 모름지기 배우의 얼굴이 곧 서사인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니 배우들의 얼굴에 대한 얘기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얼굴에 대한 취향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내 취향이네 아니네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콜의 역할은 참 2000년대에 많이 등장하는 나쁜 남자 클리셰의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엔 반항적이지만 마음은 참 여린, 그런 캐릭터. 그 옛날 린제이로한과 힐러리 더프 같은 배우들이 활발히 활동할 때의 그 남주 감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콜과 그의 동생인 알렉스의 여자 취향이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이 뇌절 포인트였다. 점점 보다보면 여기서 제일 문제는 재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누가봐도 콜에게 더 이끌리면서 알렉스와 사귀는 지점에서부터 불안하다 싶었는데 결국 결말을 보고 캐릭터에 정이 떨어졌다. 학교 날라리에게 관심이 가면서도 '나는 모범생이야'라는 프레임에 갖혀 자신을 옥죄는 모습이 저럴거까지 있나 했다. 뭐 내 말대로 했다면 사실 로맨스의 맛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을 누가 읽는다면 로맨스를 오래 보지 못한다면서 나름 열심히 봐놓고 이게 무슨 열폭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하
그저 넷플릭스가 잊을만하면 내놓는 그저 그런 스테디 셀러 카테고리의 작품이다. 예를 들면 '키싱부스'라던가 '엑스오키티'같은 장르 말이다. 가끔 넷플릭스를 보면 이런 오글거리는, 설렘이 과한 장르는 꾸준히 수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거 같다. 물론 선택해서 본 내 잘못이 크지만 보급형 넷플릭스 콘텐츠도 좀 신박한 로맨스 콘텐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장르는 한 번 보고 끝내는 장르라고 보는데 계속 곱씹을수록 좋은 대사가 있는 그런 로맨스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넷플릭스 입장에서 새로운 콘텐츠 소비도 중요하지만 재방문율도 중요한 지표가 아닌 걸까 의문이 드는 작품이었다. 아, 그래도 이런 장르가 신인들의 등용문이라는 점은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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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x책] 우진은 복수 후에 행복했을까? ;감정을 읽는 시간.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마!! 내애가 임마!! 간짜장이라도 갖고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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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무서움은 동의어로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구분해야 한다. 무서움은 구체적인 사건을 향하며 즉각적 도피, 회피, 방어 태도를 유발하는 기초 상태다. 따라서 무서움은 '실제 공포'라고도 칭한다. 반면 공포는 더 복잡한 부정적 감정으로 가상의 위험을 향한다.-56P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라고 붙인 이름을 가진 남자, 오대수는 이유도 모른 채 거나하게 취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어딘 가에 감금된다. 대충이라도 수습해야 할 그 오늘이 언제 인지도, 몇 평 남짓한 이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로. 늘 같은 시간에 주어지는 군만두 만이 어쩌면 자신이 세상과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절박한 안식처였을 것이다.
(군만두만 줘서 고문인 게 아니라 짜장, 짬뽕, 탕수육이랑 같이 안 줘서 고문인 게 팩트)그런 대수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가장 큰 두려움은.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위인 자살 마저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이라는 존재의 무능력 감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 들이 십오 년이라고 말해 줬다면 조금이라도 견디기 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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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심은 은밀히 자라나다가 결국 그 사람을 완전히 집어삼킨다.-210P
그 영겁의 시간과 감정과 체력을. 대수는 복수라는 이름으로 살기등등하게 채우기로 결정한다. 문신으로 시간을 체크하고, 벽에 그린 사람을 향해 주먹을 꽂는 것으로 자신이 피우기로 작정한 불을 마음껏 피워 댄다. 그러다 마치 마법처럼. 혹은 너무도 허무하게. 대수는 그토록 그리던 바깥세상으로의 탈출 역시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이, 엉겁결에 이루게 된다.
15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 같으면서 치열했을 중 장년의 허리를 베어간 그 놈을 위한 복수심 하나로 이뤄진 대수는 자신의 기억과 실낱 같은 단서들을 근거로 그 놈의 그림자 끝을 자박자박 밟아 나간다. 15년이나 먹은 사료 같았던 군만두의 기억을 시작으로, 대수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그 놈 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간다. 그와 함께 그 녀석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겠다 는 마음속의 분노와 복수심도. 더더욱 커져간다.
일 더하기 일은 귀요... 귓방맹이다 이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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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명확한 결과는, 정의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복수심도 강하다는 사실이다. -219P
그것이 정의라 생각했다.
나를 아무 이유 없이 가둬 둔 녀석의 시체를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도록 하는 것. 그 놈의 시체를 잘근잘근 씹어 먹어버리는 것. 존중받고 싶은 마음을 그 녀석에게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복수라고 생각했기에(213P), 대수는 그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험난한 기억의 끝에는, 자신이 스스로 지워버린, 혹은 외면해 버린 기억의 가련한 연인, 우진과 우진의 누나가 있었다. 고작 말 한마디로 자신을 15년 동안 가두었다니. 대수는 괘씸했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진이 내민 앨범의 끝에, 점점 성장해 온 자신의 딸이자 연인인 미도의 모습을 본 순간. 대수는 깨달았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게 신호야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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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가 가장 달콤할 때는 언제일까? 복수를 당한 사람이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다. 그가 후회의 뜻을 비치고 복수 행위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 말이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복수란 상대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상대에게 가 닿았는지의 여부이다. -223P
대수 자신은 존중받고 싶은 마음으로 복수를 시작했지만.
또 다른 복수를 하려는 사람인 우진은 대수가 근거 없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복수를 감행했다는 사실을 대수가 알아채는 그 순간이야 말로 우진의 복수가 완성되는 시점이었다.(213P)
우진과 대수의 복수가 부딪치는 그 순간에, 그렇게 대수의 하루는 영원히 수습되지 않을 것처럼 정점으로 치닫는다. 대수는 혀를 잃었고 우진은 복수를 얻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과 억울하게 죽음을 선택한 누이이자 연인이었을 것이다.
과연 너희는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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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극히 개인적인 삶과 연관 짓지 않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겁을 먹었는지, 슬픈지, 화가 났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혹은 어떤 경험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 아무리 자세한 뇌 영상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이다-12P
복수의 방점을 찍을 카타르시스는 안타깝게도 그 두 사람 중 어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혀를 잃은 아픔과, 딸을 만난 기쁨, 그리고 미도에 대한 사랑이 뒤섞인 지옥에서 울부짖는 짐승이 된 대수를 뒤로한 채 돌아선 우진은, 이내 엘리베이터 안에서 스스로의 머리를 권총으로 날려버린다. 이토록 성공적인 복수를 뒤로한 채로. 대수의 복수 과정 중에서 그의 연인을 떠올리고, 그리고 복수의 완성 지점에서 그녀의 최후 역시도 만나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녀의 죽음을 방조했던 최후였기에 더더욱 쓰라렸을 것이다.
과연 이 길고 긴 복수를 계획한 우진은. 단 한순간이라도 기뻤던 적이 있었을까? 그가 결국 복수하려던 대상은 어쩌면 자신이 아니었을까?
참고
1.감정을 읽는 시간(Chapter8 복수심;누구도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2.올드보이
추신. 솔직히 개봉한 지 7년이나 지났는데 스포일러라고 하지 말자.
복수 후에 행복했을까? ;감정을 읽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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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아래에선 시대의 폭력과 광기에 끝없이 시달렸다.
도망칠 곳 없이 어둠으로 내몰린 삶 속에서도
그녀가 포기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세상을 위한 단 하나의 노래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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