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3-26 20:42:37
백설공주 | 디즈니 성을 벗어나지 못한 재구성의 한계
<백설공주>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밤 태어난 '백설공주'(레이첼 제글러). 그녀는 딸을 사랑하듯이 백성을 아낀 부모님처럼 왕국의 백성 모두를 아낄 줄 아는 모범적인 공주로 자라난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등장한 '여왕'(갤 가돗) 때문에 백설공주의 삶은 역경으로 가득해진다. 백설공주의 아버지와 결혼한 여왕은 흑마법을 부려 왕위와 왕국을 찬탈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백설공주마저 죽이려 든다.
이에 백설공주는 성을 떠나 마법의 숲으로 도망치고, 숲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신비로운 일곱 광부와 여왕의 통치에 저항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인 '조나단'(앤드류 버납)의 도움을 받아 경비대의 추격을 따돌린 백설공주. 그 과정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용기를 발견한 백설공주는 빼앗긴 왕국을 되찾기 위해 여왕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여왕 또한 눈엣가시인 백설공주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독사과를 준비한다.
재구성과 실사화 사이에서
<말레피센트>, <신데렐라>, 그리고 <정글북>을 연달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팬층이 두터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재활용해 최대한의 수익을 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대화였다. 동화에 충실했던 과거 애니메이션을 현대 사회의 변화에 맞게 각색하여 고전에 생동감을 불어넣고자 했다.
문제는 두 목적이 근본적으로 상충된다는 것. 전자의 목적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기존 팬덤이 새로운 실사영화를 소비해야만 이룰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목적은 기존 팬들을 영화관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그들은 더 화려해진 볼거리로 원작의 감동을 느끼고 싶어 하는 반면, 재해석된 실사영화는 원작의 감흥을 새로운 경험으로 대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은 호평받고, <인어공주>는 혹평받은 이유다.
1937년에 개봉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실사영화로 리메이크한 <백설공주>도 같은 함정에 빠졌다. 새로운 <백설공주>는 원작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한다. 현대 사회의 분열을 지적하고,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희망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 백설공주, 여왕, 독사과와 난쟁이와 같은 상징도 재구성했다. 캐릭터의 이미지는 유지하되, 사회적 약자나 기득권, 혁명가와 같은 의미를 새로이 부여한 셈이다.
문제는 그 의도가 스크린 위에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 강조하려는 현대적 맥락은 여전히 중세 왕국의 공주가 주인공인 고전적인 설정 앞에서 의미를 잃는다. 자연히 상징의 의미와 맥락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시도도 기존 이미지와 융화되지 못한다. 이에 더해 기대 이하의 볼거리와 완성도도 몰입을 방해한다. 그 결과 <백설공주>는 원작의 재구성이라 하기에는 애매하고, 원작의 실사화라고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아름다움'으로 풀어낸 현대 사회의 문제
<백설공주>는 '아름다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여왕과 백설공주가 각자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차이를 부각한다. 여왕은 외모와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고, 타고난 자에게만 허락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반면에 백설공주는 따뜻한 심성과 같은 내적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정을 추구한다. 이 차이점 위에서 <백설공주>는 양극화된 현대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는 고전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여왕은 아름다움에 집착하지만, 단순히 미모만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타고난 외모'를 갈고닦아 '부와 권력'을 추구한다. 그녀가 장미가 아닌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만 예찬하는 이유다. 또 여왕은 갈취한 권력과 재물을 외모와 같은 능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여기고,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을 멸시한다. 백설공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냥꾼이 의문을 표하자 그를 인간적으로 모욕하는 여왕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여왕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현대 사회, 특히 능력주의 사회의 많은 엘리트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때로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성공'을 추구한다. 재능을 뒷받침한 사회와 환경의 역할을 간과한 채 자기 노력과 그 대가만을 강조한다. 그렇게 그들은 오만해지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자를 멸시하며, 성과를 나누지 않는다.
승자의 오만은 패자에게 굴욕감을 주고, 자존심에 상처가 난 패자는 반발한다. 명령을 내릴 때 누구 덕에 먹고살 수 있냐며 굴욕감을 주자 여왕의 명령을 어기고 백설공주를 살려준 사냥꾼이 대표적이다. 왕자와 일곱 난쟁이를 도적 떼의 대장과 일곱 광부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무시당하는, 러스트 벨트 주민 같은 노동자들이나 경쟁에서 밀려나 굴욕감을 느끼는 이들을 대변하는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와 독사과
<백설공주>는 사회적 문제만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해결책과 비전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중심에는 백설공주가 있다. 그녀는 여왕의 안티테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간 여왕과 같은 승자가 갖추지 않은 친절과 실질적 도움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실제로 그녀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공주로 태어났지만, 여왕과는 달리 평민과 눈을 맞추고, 가진 것을 베풀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백설공주와 여왕의 대비는 사과라는 상징에 함축되어 있다. 백설공주의 사과는 사회적 존중을 뜻한다. 일례로 그녀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사과 파이를 만들어 성 안의 모든 백성과 나누었다. 사과에 담긴 존중과 친절은 사회적 연대로 이어진다. 여왕에게 모욕당했던 사냥꾼에게 백설공주가 사과를 건네자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가 끝내 암살 명령을 어기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여왕은 독사과로 백설공주를 암살한다. 이는 단순히 백설공주의 미모를 질투한다는 뜻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회적 약자도 보듬어 달라는 백설공주의 간청을 끝내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상징하는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백설공주의 죽음을 확신한 여왕이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백설공주의 호명
그러나 백설공주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여왕에게 대적한다. 이때 그녀는 여왕의 경비대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면서 그들을 설득한다. 얼핏 보면 그저 백설공주의 착한 성품과 선한 내면을 강조하는 장면 같다. 여왕의 통치에 담긴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녀의 호명은 보다 진취적으로 느껴진다. 구체적으로는 근래에 간과됐던 사회적 존중과 연대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백설공주의 호명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무능력자나 패배자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에게 존중을 표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사냥꾼에게 사과를 건넬 때처럼 서로의 유대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시작점인 셈이다. 그렇게 백설공주는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비엘리트로 양극화된 사회에 필요한 변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스노우 화이트 앤 헌츠맨>에서 갑옷 입고 기병대를 지휘한 백설공주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공동체의 연대감을 회복하자는 호명의 메시지는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백설공주는 광부들의 다툼을 중재하고, 말을 못 하는 덜렁이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알려주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여왕의 경비대에게 추격당하는 백설공주를 조나단과 도적 떼가 구해주고, 그들이 경비대에게 포위되자 이번에는 백설공주가 그들을 도와주면서 동료가 되어간다. 공주와 도적의 로맨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펼쳐진다.
디즈니 성을 벗어나지 못하다
문제는 <백설공주>가 원작의 메시지와 서사만 재구성했을 뿐, 이미지와 형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 디즈니의 첫 번째 프린세스라는 상징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설공주>는 고전적이고 원형적인 틀을 가급적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메시지와 형식 간의 괴리만 부각되고, 현대 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지적하려는 의도 또한 희석되고 만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와 여왕의 갈등은 결국 왕국의 정통성을 둘러싼 봉건적 투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애초에 능력주의의 폐해와 해결책까지 녹여낼 수 있는 서사가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백설공주>는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촉구하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탐하는 여왕과 돈이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백설공주 간의 평면적인 대립과 교훈만 부각된다.
각색의 문제도 유사하다. '아름다움'의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거울을 존치시킨 결정이 모순을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심성의 아름다움만 언급하는 듯하나, 후반부로 갈수록 외모와 내면을 구분하지 않는 듯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는 여왕과 백설공주의 관계를 헷갈리게 만든다. 애초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아서 백설공주의 신념을 적대하고 경계하는 여왕이 마치 백설공주를 질투해서 죽이려는 묘사되기 때문이다.
피부색 논란도 다르지 않다. 라틴계 배우인 레이첼 제글러의 백설공주 캐스팅은 디즈니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으니 틀의 색깔을 바꿔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백설공주의 피부색만 바꿨을 뿐, 조나단도, 여왕도, 심지어 백설공주의 부모님도 모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한 나머지 이 역시 유효한 변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백설공주>의 현대적 메시지는 디즈니 성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다
완성도도 메시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여왕의 등장씬이나 광부들이 마법을 사용해 보석을 채굴하는 뮤지컬 시퀀스 자체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다룰 플롯에 비해 분량이 짧다 보니 각각의 시퀀스가 갑작스럽게 전환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각 캐릭터의 서사가 얕아진 결과, 사과 같은 상징 간의 연결고리 또한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억지스럽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디즈니라는 대형 스튜디오의 작품치고는 소소한 볼거리도 아쉬움을 키운다. 경비대와 조나단의 도적들이 대치하는 대목, 백설공주가 성 내 백성들과 함께 여왕의 궁전으로 행진하는 장면에서는 등장하는 인원수가 적어서 긴박감이나 규모가 와닿지 않는다. 이에 더해 광부들의 집과 궁전처럼 한정된 배경만 오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스케일이 더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백설공주>는 어떤 관객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듯하다. 새로운 각색을 기대한 관객 입장에서는 디즈니라는 틀을 유지하는 소극적인 변화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고, 원작의 감흥을 느끼고 싶은 관객이 보기에는 급격하게 달라진 메시지와 부족한 볼거리가 불만족스러울 테니까. 이처럼 원작의 재구성과 실사화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머지 <백설공주>의 의도 또한 스크린 너머로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했다.
Poor 형편없음
착공은 했지만 완공은 못 한 디즈니 성 리모델링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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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그렇게 가족이 된다
감독 : 고란 스톨레프스키 Goran STOLEVSKI
출연 : Anamaria MARINCA, Alina SERBAN, Samson SELIM, Vladmir TINTOR, Mia MUSTAFA, Dzada SELIM, Sara KLIMOSKA, Rozafa CELAJ, Ajse USEINI
시놉시스 : 여기,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이들이 있다. 애인이 시한부 선고를 받자 여자는 졸지에 어린 딸 둘을 양육하는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방탕한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던 남자는 운명의 장난처럼 이들의 법적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 부문 출품작으로 선정된 <가족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가족이 탄생하는 이야기, 피를 나눈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연대하는 이야기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타이트한 화면비와 핸드헬드 촬영, 빠른 컷 편집과 사운드의 완급 조절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구성, 장치들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의 마음과 감정, 정서의 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더불어 (감독 스스로 GV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진 바흐나 쇼팽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소수자, 이민자들을 다룬 여타의 작품들과는 다른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결을 만들어 낸다.
25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 만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수 있었다는 감독은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쪽엔 경험 많은 배우가 없어) 연기 경험이 없는 다양한 출신의 배우들을 직접 찾고, 작업하는 과정에서 함께 부대끼며 ‘가족이 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배우, 스태프들과 동료 이상의 관계로 거듭나는 영화적 경험이 작품에, 그리하여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 느낌. 그의 차기작 또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상영 일정 : 10-05 11:0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 10-06 16:00 영화의전당 소극장 / 10-10 17:00 CGV 센텀시티 7관
작성 : 민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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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고요를 찾는 남데브 아저씨(Namdev Bhau in Search of Silence/2018/인도, 우크라이나)
- (이미지 출처: 네이버이미지)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남데브 바우는 인도 남부의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 산다. 식구는 남데브 부부, 장성한 딸, 그리고 그의 형 부부. 그의 형은 무엇엔가에 취해 살며 헛소리를 하고 아내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딸은 생각하는 것을 거의 모두 말로 쏟아내는 스타일. 그의 가정은 시끄럽고 산만하다.
좁아서 물건으로 가득한 아파트, 원색의 실내장식은 그가 느끼는 소음의 게이지를 높인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사정이니 집안이나 밖이나 소음의 차이가 별로 없다.
남데브는, 아마도 변호사로 보이는, 부유한 사내의 자가용 운전기사이다. 그의 고용주도 쉴새없이 말을 쏟아놓는 다변가.
그는 소음이 싫다. 그래서 침묵을 견지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침묵으로 반응할 뿐.
어느날 월급을 두둑히 받은 남데브는 아내에게 봉급 전체를 넘겨주고 평소에 가고 싶어하던 티베트로 훌쩍 떠난다. 그의 목적지는 "침묵의 계곡".
그러나 그의 여정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기차, 버스의 소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한적한 시골의 호텔에서조차 옆방의 투숙객 때문에 혼자 잠들 수 없는 형편에 놓인다.
차라리 노숙을 결심하는 남데브. 하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다.
목적지를 향해 점점 북으로 향하다가 역시 혼자 여행 중인 열 두 살 소년 알리크를 만난다. 계속 남데브 곁을 따라붙는 소년 때문에 남데브는 골치가 아프다. 소년의 목적지는 "붉은 성"으로 "침묵의 계곡"에서 멀지 않은 곳.
알리크가 쉴새없이 조잘대며 남데브를 괴롭게 하지만 묘한 구석이 있는 알리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마침내 다다른 "침묵의 계곡". 그곳은 이름난 관광지에 불과했다. 단체로 명소를 찾아온 학생들 때문에 남데브는 '고요'를 찾을 수 없었다. 화가 난 남데브에게 알리크는 그가 하고 있는 게임을 알려주며 "붉은 성"까지 같이 가자고 조른다. 소년은 그곳에서 부모와 만나기로 한 게임을 완수해야만 한다고 했다.
한편 TV뉴스로 우연히 알리크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남데브는 차마 어려움에 처한 어린 소년을 혼자 가게 할 수 없어 동행하기로 한다. 알리크의 비극이 너무 안쓰러워 "붉은 성"에 이른 남데브는 자기와 함께 살지 않겠느냐고 묻지만 알리크는 게임을 마쳐야 한다며 이별을 고하고 남데브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향한다.
<절대 고요를 찾는 남데브 아저씨>는 인도를 배경으로 하여 우크라이나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소음에 반응하는 표정 묘사는 유머러스하다. 남데브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소음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가 양미간을 찌푸리는 소음의 세계에 관객들도 같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보면 영화는 어느새 중반부에 이르러 있다.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인도 북부의 풍경은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시원하게 한다. 인적드문 숲에서 가방을 베고 눕는 남데브가 부러워질 지경이다. 하지만 후반부에 '명예살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면서부터 영화는 유머와 여유에서 멀어지고 슬픈 기운에 잠긴다.
언젠가 "명예살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가운데 아들 알리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게임을 만들고 메뉴얼을 작성한 알리크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인간에게 신분의 차이를 규정한 어리석음, 그 차이를 지속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살인. 그래서 부모 없는 인생을 살게 되고 만 어린 소년.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고요'를 찾아 떠났던 남데브는 자기 옆을 따라다니며 쉴새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알리크를 불교사원("붉은 성"은 절이었다.)에 남겨두고 오며 비로소 한없는 적막감을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
남데르의 소원은 그의 욕망에 갇혀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고 소년의 슬픔에 공감하고 마음을 내주었을 때에야 성취되었다.
"명예살인"의 부당함을 조용히 고발하는 다르 가이 감독의 속삭임에 관객은 갑자기 섬뜩한 '절대 고요'를 느끼게 된다(©2020.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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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도생이 된 야쿠자
〈야쿠자와 가족〉
감독 | 후지이 미치히토
출연 | 아야노 고, 타치 히로시, 오노 마치코
아버지는 마약에 손을 댔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가족이라고는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혼자였다.
내 이름은 겐지(아야노 고)다. 어느 날 친구들과 식당에 갔다가 야쿠자 조직 시바자키구미의 두목 히로시(타치 히로시)의 목숨을 구했다. 며칠 뒤 나는 다른 야쿠자 조직에게 끌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주머니에서 히로시의 명함이 나왔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갈 데는 있냐. 꼬맹이 겐”
얻어터져 찌그러진 얼굴의 나를 보며 히로시가 말했다. 나는 엉엉 울 뿐이었다. 갈 곳도 없고 살 궁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따뜻함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야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야쿠자가 ‘진짜 가족’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이었고 1999년이었다.
6년이 지났다. 스물다섯 살인 나는 중간 보스가 되었다. 경제가 회복하며 경기가 호황을 이룬다는 뉴스가 나온다. 술집 관리도 순탄하다. 클럽에서 알게 된 호스티스 유카(오노 마치코)와는 계속 만나고 싶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세력다툼을 하는 야쿠자 조직에게 동생 조직원이 살해되었다. 나는 조직을 위해, 가족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2019년이 되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희끗해진 나는 14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 높은 빌딩을 지나 도착한 시바자키구미의 건물은 그대로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떠났고 원로 몇몇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 놀랐다. 핸드폰을 주는 조직원 막내에게 핸드폰 정도는 나도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살 순 있긴 한데요. 조례 때문에 핸드폰 하나 사기도 지금은 좀 불편해졌어요.”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야쿠자라서요.”
야쿠자라는 이유로 은행계좌를 만들 수도 없고 보험에 들 수도 없으며 신용카드를 만들 수도 없다고 한다. 야쿠자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취업도 안 된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했다.
야쿠자를 가족으로 여기며 산 남자의 쓸쓸한 인생
이렇게 불쌍하고 처량한 야쿠자가 어디 있을까. 폭력집단인 야쿠자의 선악을 떠나 한 인간이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걸 본다는 게 개운치는 않다.
<야쿠자와 가족>의 야쿠자들은 얼마나 자신들이 세고 악랄한 지 경쟁하지 않는다. 조직 내 승진에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친한 사람을 챙겨주고 나이가 차기 전에 여자를 만나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 준다. 어쩌면 겉으로는 냉혹해 보이는 이 집단은 우리의 가족보다 더 따뜻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질문을 받는다. 조직과 가족을 위해 야쿠자로 헌신한 겐지가 야쿠자를 억제하는 규제와 세간의 눈초리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산다. 조직폭력단이므로 삶이 망가져도 괜찮을까, 아니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이들의 갱생할 기회를 줘야 할까.
전작 <신문기자>에서 미디어를 통제하고 댓글로 여론을 조작하려는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야쿠자와 가족>에선 쇠퇴하는 야쿠자 조직을 관찰자의 시선에서 사회문제로 끄집어낸다. 정부에서 폭력조직을 억제하기 위해 조례를 신설해 야쿠자가 먹고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진짜 있는 이야기다.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진 1999년과 경제 힘차게 뛰는 2005년, 그리고 야쿠자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2019년 야쿠자인 한 남자의 일대기를 야쿠자 출신 작가의 고증을 통해 스크린에 담았다.
19살과 25살, 39살의 겐지를 연기하는 아야노 고 덕택에 영화는 액션과 멜로, 드라마를 모두 아우른다. 두툼한 겨울잠바를 입고 노란 머리로 염색한 채 울분에 찬 눈빛으로 깡다구를 표현하다가도 쓸쓸하고 공허함이 무엇인지 표정과 몸짓으로 말할 줄 안다. 그의 깊은 연기에 관객은 긴장했다가, 마음이 풀렸다가 결국은 안타까움이 몰려올 것이다.
“야쿠자는 의리와 인정을 중시하고 남자의 심을 갈고닦아 남자의 길을 고집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야쿠자는 뭘 하느냐는 질문에 1999년의 한 조직원은 이렇게 답한다. 20년이 지난 시바사키구미는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언제나 든든할 줄만 알았던 의리와 인정이 배고픔 앞에서는 무너져버린 한 가족이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1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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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 (Wendy, 2020)
개봉일 : 2021.06.30 (한국 기준)
감독 : 벤 제틀린
출연 : 데빈 프랑스, 야수아 막, 게이지 나퀸, 개빈 나퀸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웬디>는 피터팬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피터팬이 아닌 웬디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네버랜드 모험기를 담은 영화다. 등장인물들과 아이들의 세상 네버랜드라는 공간,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라는 설정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원작 동화, 2003년작 영화 <피터팬>과 <웬디>는 닮은 점보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 재해석한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원작 그대로의 분위기나 동심과 환상의 나라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과 환상적인 모험을 바라는 소녀 웬디와 오빠 더글라스, 제임스. 그리고 해적이 될 거라며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순수한 소년들은 깊은 밤, 유령 기차에 올라탄다. 작은 식당 안에서만 지내던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에게 기차는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아이들은 피터팬과 함께 세상의 끝에 위치한 네버랜드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진 정말 환상적이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신나기도 하고.. 저 깊은 곳에 눌러뒀던 동심이 기차 기적소리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근데, <웬디>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험은 예상외로 현실적이고 험난하다. 이전에 봤던 <피터팬>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다녀도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네버랜드가 어째 환상의 나라라기보다는 길들지 않은 정글처럼 느껴졌고 소년들은 어딘가 어른들의 손길이 필요한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피터팬은 그런 아이들을 네버랜드로 이끄는데.. 이 모험이 환상적이고 특별하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웬디의 엄마처럼 로데오 타기에 대한 꿈을 버리고 아이들에게 모든걸 걸게 되는, 결국은 꿈을 잃는다는 의미인 걸까. 유난히 작은 그림자를 가진 소년 피터팬과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의 또 다른 모험이 담긴 이 영화가 반갑고도 아쉽게 느껴진다.
웬디 시놉시스
기찻길 옆, 작은 식당이 세상의 전부인 소녀 ‘웬디’는 내면에 차오르는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매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가 나타나고 ‘웬디’와 쌍둥이 형제 ‘더글라스’, ‘제임스’를 이끌고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로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어린이로 살 수 있는 신비로운 섬에 도착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대걸레와 빗자루 따윈 들지 않겠어!
기찻길 옆, 작은 식당에서 엄마를 도우며 새로운 모험을 꿈꾸는 소녀 웬디와 천방지축 쌍둥이 오빠 더글라스와 제임스는 깊은 밤, 소문으로만 듣던 유령 기차를 만나게 된다. 창문을 가득 비추는 붉은빛과 알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에 웬디와 더글라스, 제임스는 급하게 신발을 신고 기차를 따라잡는다. 유령 기차 위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팬이 누워있다.
눈에 빛을 품은 아이들은 그곳을 벗어난다.
아이들은 세상의 끝, 네버랜드로 떠난다. 네버랜드엔 피터팬과 그를 따르는 몇 아이들, 그리고 실종된 친구 토마스가 있었다. 작은 식당 속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해적이 되어 세상을 누비겠다던 꼬마는 웬디보다 먼저 기차에 올라타 네버랜드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있었다.
네버랜드는 어른들의 마을과 아이들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원작에서는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섬으로 표현되는데 <웬디>의 네버랜드는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화산과 거친 정글을 품고 있다. 사실 환상의 섬이라기보단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가까운 모습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절대 늙지 말자’고 다짐하며 밤낮없이 아이다운 놀이와 장난을 반복한다.
아이들은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다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오늘 밤은 어떤 자리에 누워 몸을 보호해야 할지.. 어른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고민같은 건 하나도 하지 않는다. 네버랜드에서는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갖는 순간 빠르게 늙어버리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머뭇거리거나 다시 생각하는 건 금지된다. 아이는 고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인 걸까.
네버랜드의 대장 피터팬은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이다. 그는 나이 드는 것을 안 좋은 것이라고, 어른들은 가까이해선 안될 존재라고 생각한다. 피터팬은 웬디가 오기 전,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어른이 되어버린 버조를 어른들의 마을로 내쫓고, 더글라스를 잃고 변해버린 제임스의 손을 가차 없이 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다 밑에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를 어머니라 믿으며 오랜 시간 네버랜드를 지켜온 <웬디>속 피터팬의 모습은 동화에 나오는 요정 같다기보단 다가온 위험과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고집쟁이의 모습과 가깝다.
사실 이 부분에서 내가 생각했던 ‘피터팬’의 이미지가 깨져버리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원작과 이전에 나왔던 영화들에서 비친 피터팬은 순수하며, 거칠고 공격적이기보단 어린 고집이 있는 소년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웬디>에서 만난 피터팬은 다소 독단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피터팬의 생각을 바꿔주는 사람은 바로 웬디다. 원작에서의 웬디는 피터팬에게 의지하고, 후크에게 잡혀가 피터팬이 구해주길 기다리는 인물이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조금 다르다. 피터팬은 아이들에게 닥친 문제를 외면하고 어른들을 피하기만 하지만 웬디는 제임스를 구하기 위해 어른들의 마을로 향하고 숨겨진 상상력을 발휘하라며 어른들의 손을 이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먼지 쌓인 바에서 어른들에게 상상 속 술을 내놓고, 춤을 추는 웬디의 모습은 어른이 된 후, 오래 묵혀두었던 상상력을 가볍게 자극한다.
상상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아이들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보단 옆자리에 앉아있는 다른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환상이 아닌 현실로 스며들며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게 된다. 피터팬과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늙어가는 건 상상력을 잃는 것이며 해적이 아닌 식당 주인이 되는 것이며 즐거움을 잃는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웬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웬디는 늙어가는 건 잘못이 아니며 나이와 상관없이 상상력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늙어가는 건 꿈과 상상력을 잃는 게 아닌 어릴 적 꿈과 상상력을 품고, 가끔은 아픈 감정도 함께 느끼며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피터팬과 아이들, 그리고 네버랜드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은 다 함께 기찻길 옆 식당에서 들었던 엄마의 자장가를 부르며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고 모든 동심과 상상력을 잃는 것이 아님을, 늙어가는 것 또한 위대한 모험임을 알게 된다. 원작에서는 요정을 믿는 것으로, <웬디>에서는 잊지 않은 자장가를 통해 어른들의 사라지지 않은 동심을 표현한다.
아이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어른이 되고, 빠른 시일 내에 오겠다고 했던 피터는 시간이 지나 ‘잠자리에 들기 전 읽는 동화 속에서 나오는 인물’로 변한다.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에 남았고, 웬디의 딸을 네버랜드로 데려간다. 네버랜드에서 몇 아이들과 피터팬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울 때, 피터팬의 그림자는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되는 장면이 있다. 실제 덩치는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피터팬의 그림자가 유난히 더 작게 표현된 건 피터가 가진 ‘늙지 않겠다’는 마음이 그만큼 강력하며 피터는 결국 네버랜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싶다.
아픔과 상실의 슬픔을 모르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유지하고 영원히 맑은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슬픔과 눈물, 망설임을 알게 되고 어른이 된다 해도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피터팬을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처럼 피터팬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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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친구였던 적이 있을까
-파수꾼-
"우리의 10대는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입니다. 넘치는 에너지에 비해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필요한 절제와 자성은 부족하기 일쑤입니다. 보통의 10대는 성숙한 말과 행동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친구 관계에서의 다툼도 많고 즐거움도 많은 시기, 10대 남학생들의 관계에서는 때때로 '힘의 논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적당한 사과만 해도 되는 친구, 사과조차 필요없는 친구,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하는 친구까지 친구마다 미묘하게 다른 관계의 차이는 대등하지 않은 힘에서 비롯되곤 합니다. 여기서 힘이란 무력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공부 잘하는 것, 집에 돈이 많은 것, 부모님이나 형제가 권력자인 것 등 다양한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내가 더 힘이 세니 내 말에 따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와 마주할지도 모릅니다. 영화 '파수꾼'의 기태(이제훈)처럼 말이죠. 영화 '파수꾼'은 10대의 마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는 영화입니다. 이제훈과 박정민을 비롯한 주조연들의 뛰어난 연기, 시간의 순서를 뒤섞으며 미스터리와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정교한 플롯 등 높은 완성도를 갖춘 윤성현 감독의 놀라운 데뷔작 '파수꾼'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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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경이 보여주는 멀티버스 액션! 이렇게 기발한 방법이 있었다니!!
?Rabbitgumi 입니다!
양자경 주연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개봉했어요.
멀티버스를 다루는 무척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블린이 다른 우주와 연결하면서 보게 되는 다양한 다른 버전의 자신을 보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요.
마치 인생의 갈래길에서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다양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액션도 좋고, 영화의 유머도 꽤 타율이 높아요.
무엇보다 예측가능하지 않으면서 묘하게 설득되는 이야기 전개가 무척 훌륭합니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배우 양자경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겠죠.
무척 따뜻한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어요.
이 영화 궁금하시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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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미니센스> 공식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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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정글 크루즈> 와일드 액션 60초 예고편
<캐리비안의 해적> 디즈니 제작! 이번엔 아마존이다!
미지의 세계 아마존에서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스릴을 선사하는
재치 넘치는 크루즈 선장 프랭크(드웨인 존슨).
고대 아마존의 전설을 쫓아 영국에서 온 식물 탐험가 릴리 박사(에밀리 블런트)가
의학의 미래를 바꿀 치유의 나무를 찾는 여정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하면서,
순탄치 않은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아름답지만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열대우림으로 함께 모험을 떠나고
수많은 역경과 초자연적인 힘을 마주하게 된다.
고대 나무에 얽힌 비밀이 드러날수록 릴리와 프랭크는 더욱더 커다란 위험에 처하고
인류의 운명도 위태로워지는데…
전설을 믿는다면 저주도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