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5-03-26 20:42:37
백설공주 | 디즈니 성을 벗어나지 못한 재구성의 한계
<백설공주> 리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겨울밤 태어난 '백설공주'(레이첼 제글러). 그녀는 딸을 사랑하듯이 백성을 아낀 부모님처럼 왕국의 백성 모두를 아낄 줄 아는 모범적인 공주로 자라난다. 그러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등장한 '여왕'(갤 가돗) 때문에 백설공주의 삶은 역경으로 가득해진다. 백설공주의 아버지와 결혼한 여왕은 흑마법을 부려 왕위와 왕국을 찬탈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위협하는 백설공주마저 죽이려 든다.
이에 백설공주는 성을 떠나 마법의 숲으로 도망치고, 숲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난다. 신비로운 일곱 광부와 여왕의 통치에 저항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인 '조나단'(앤드류 버납)의 도움을 받아 경비대의 추격을 따돌린 백설공주. 그 과정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용기를 발견한 백설공주는 빼앗긴 왕국을 되찾기 위해 여왕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여왕 또한 눈엣가시인 백설공주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독사과를 준비한다.
재구성과 실사화 사이에서
<말레피센트>, <신데렐라>, 그리고 <정글북>을 연달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팬층이 두터운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재활용해 최대한의 수익을 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현대화였다. 동화에 충실했던 과거 애니메이션을 현대 사회의 변화에 맞게 각색하여 고전에 생동감을 불어넣고자 했다.
문제는 두 목적이 근본적으로 상충된다는 것. 전자의 목적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기존 팬덤이 새로운 실사영화를 소비해야만 이룰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목적은 기존 팬들을 영화관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그들은 더 화려해진 볼거리로 원작의 감동을 느끼고 싶어 하는 반면, 재해석된 실사영화는 원작의 감흥을 새로운 경험으로 대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은 호평받고, <인어공주>는 혹평받은 이유다.
1937년에 개봉한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실사영화로 리메이크한 <백설공주>도 같은 함정에 빠졌다. 새로운 <백설공주>는 원작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한다. 현대 사회의 분열을 지적하고,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희망을 보여주려 한다. 이를 위해 백설공주, 여왕, 독사과와 난쟁이와 같은 상징도 재구성했다. 캐릭터의 이미지는 유지하되, 사회적 약자나 기득권, 혁명가와 같은 의미를 새로이 부여한 셈이다.
문제는 그 의도가 스크린 위에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 강조하려는 현대적 맥락은 여전히 중세 왕국의 공주가 주인공인 고전적인 설정 앞에서 의미를 잃는다. 자연히 상징의 의미와 맥락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시도도 기존 이미지와 융화되지 못한다. 이에 더해 기대 이하의 볼거리와 완성도도 몰입을 방해한다. 그 결과 <백설공주>는 원작의 재구성이라 하기에는 애매하고, 원작의 실사화라고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막을 내린다.
'아름다움'으로 풀어낸 현대 사회의 문제
<백설공주>는 '아름다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여왕과 백설공주가 각자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차이를 부각한다. 여왕은 외모와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고, 타고난 자에게만 허락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반면에 백설공주는 따뜻한 심성과 같은 내적이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성정을 추구한다. 이 차이점 위에서 <백설공주>는 양극화된 현대 사회의 세태를 반영하는 고전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여왕은 아름다움에 집착하지만, 단순히 미모만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타고난 외모'를 갈고닦아 '부와 권력'을 추구한다. 그녀가 장미가 아닌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만 예찬하는 이유다. 또 여왕은 갈취한 권력과 재물을 외모와 같은 능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여기고,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을 멸시한다. 백설공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사냥꾼이 의문을 표하자 그를 인간적으로 모욕하는 여왕의 태도가 대표적이다.
여왕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현대 사회, 특히 능력주의 사회의 많은 엘리트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때로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성공'을 추구한다. 재능을 뒷받침한 사회와 환경의 역할을 간과한 채 자기 노력과 그 대가만을 강조한다. 그렇게 그들은 오만해지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자를 멸시하며, 성과를 나누지 않는다.
승자의 오만은 패자에게 굴욕감을 주고, 자존심에 상처가 난 패자는 반발한다. 명령을 내릴 때 누구 덕에 먹고살 수 있냐며 굴욕감을 주자 여왕의 명령을 어기고 백설공주를 살려준 사냥꾼이 대표적이다. 왕자와 일곱 난쟁이를 도적 떼의 대장과 일곱 광부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무시당하는, 러스트 벨트 주민 같은 노동자들이나 경쟁에서 밀려나 굴욕감을 느끼는 이들을 대변하는 각색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과와 독사과
<백설공주>는 사회적 문제만 지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해결책과 비전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중심에는 백설공주가 있다. 그녀는 여왕의 안티테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그간 여왕과 같은 승자가 갖추지 않은 친절과 실질적 도움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실제로 그녀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공주로 태어났지만, 여왕과는 달리 평민과 눈을 맞추고, 가진 것을 베풀고,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백설공주와 여왕의 대비는 사과라는 상징에 함축되어 있다. 백설공주의 사과는 사회적 존중을 뜻한다. 일례로 그녀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사과 파이를 만들어 성 안의 모든 백성과 나누었다. 사과에 담긴 존중과 친절은 사회적 연대로 이어진다. 여왕에게 모욕당했던 사냥꾼에게 백설공주가 사과를 건네자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그가 끝내 암살 명령을 어기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반면에 여왕은 독사과로 백설공주를 암살한다. 이는 단순히 백설공주의 미모를 질투한다는 뜻을 넘어서서,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회적 약자도 보듬어 달라는 백설공주의 간청을 끝내 거부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상징하는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백설공주의 죽음을 확신한 여왕이 모든 백성을 불러 모아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백설공주의 호명
그러나 백설공주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여왕에게 대적한다. 이때 그녀는 여왕의 경비대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면서 그들을 설득한다. 얼핏 보면 그저 백설공주의 착한 성품과 선한 내면을 강조하는 장면 같다. 여왕의 통치에 담긴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 그녀의 호명은 보다 진취적으로 느껴진다. 구체적으로는 근래에 간과됐던 사회적 존중과 연대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백설공주의 호명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무능력자나 패배자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에게 존중을 표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사냥꾼에게 사과를 건넬 때처럼 서로의 유대 관계를 회복하는 새로운 시작점인 셈이다. 그렇게 백설공주는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비엘리트로 양극화된 사회에 필요한 변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스노우 화이트 앤 헌츠맨>에서 갑옷 입고 기병대를 지휘한 백설공주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공동체의 연대감을 회복하자는 호명의 메시지는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백설공주는 광부들의 다툼을 중재하고, 말을 못 하는 덜렁이에게 휘파람 부는 법을 알려주면서 친구가 되어간다. 여왕의 경비대에게 추격당하는 백설공주를 조나단과 도적 떼가 구해주고, 그들이 경비대에게 포위되자 이번에는 백설공주가 그들을 도와주면서 동료가 되어간다. 공주와 도적의 로맨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펼쳐진다.
디즈니 성을 벗어나지 못하다
문제는 <백설공주>가 원작의 메시지와 서사만 재구성했을 뿐, 이미지와 형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 디즈니의 첫 번째 프린세스라는 상징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설공주>는 고전적이고 원형적인 틀을 가급적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메시지와 형식 간의 괴리만 부각되고, 현대 사회의 문제와 모순을 지적하려는 의도 또한 희석되고 만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와 여왕의 갈등은 결국 왕국의 정통성을 둘러싼 봉건적 투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애초에 능력주의의 폐해와 해결책까지 녹여낼 수 있는 서사가 아닌 셈이다. 그렇기에 <백설공주>는 지배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촉구하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탐하는 여왕과 돈이나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적 가치를 옹호하는 백설공주 간의 평면적인 대립과 교훈만 부각된다.
각색의 문제도 유사하다. '아름다움'의 의미를 재해석하면서 거울을 존치시킨 결정이 모순을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심성의 아름다움만 언급하는 듯하나, 후반부로 갈수록 외모와 내면을 구분하지 않는 듯한 묘사가 등장한다. 이는 여왕과 백설공주의 관계를 헷갈리게 만든다. 애초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아서 백설공주의 신념을 적대하고 경계하는 여왕이 마치 백설공주를 질투해서 죽이려는 묘사되기 때문이다.
피부색 논란도 다르지 않다. 라틴계 배우인 레이첼 제글러의 백설공주 캐스팅은 디즈니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으니 틀의 색깔을 바꿔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백설공주의 피부색만 바꿨을 뿐, 조나단도, 여왕도, 심지어 백설공주의 부모님도 모두 백인 배우를 캐스팅한 나머지 이 역시 유효한 변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백설공주>의 현대적 메시지는 디즈니 성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다
완성도도 메시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여왕의 등장씬이나 광부들이 마법을 사용해 보석을 채굴하는 뮤지컬 시퀀스 자체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다룰 플롯에 비해 분량이 짧다 보니 각각의 시퀀스가 갑작스럽게 전환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각 캐릭터의 서사가 얕아진 결과, 사과 같은 상징 간의 연결고리 또한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억지스럽거나 뜬금없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디즈니라는 대형 스튜디오의 작품치고는 소소한 볼거리도 아쉬움을 키운다. 경비대와 조나단의 도적들이 대치하는 대목, 백설공주가 성 내 백성들과 함께 여왕의 궁전으로 행진하는 장면에서는 등장하는 인원수가 적어서 긴박감이나 규모가 와닿지 않는다. 이에 더해 광부들의 집과 궁전처럼 한정된 배경만 오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스케일이 더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백설공주>는 어떤 관객도 온전히 만족시키지 못하는 듯하다. 새로운 각색을 기대한 관객 입장에서는 디즈니라는 틀을 유지하는 소극적인 변화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고, 원작의 감흥을 느끼고 싶은 관객이 보기에는 급격하게 달라진 메시지와 부족한 볼거리가 불만족스러울 테니까. 이처럼 원작의 재구성과 실사화 사이에서 길을 잃은 나머지 <백설공주>의 의도 또한 스크린 너머로 온전히 전해지지는 못했다.
Poor 형편없음
착공은 했지만 완공은 못 한 디즈니 성 리모델링
Relative contents
-
- 담는 그릇은 예쁘지만 정작 음식은 상해있는 느낌
피할 수 없던 공 하나
유달리 말이 없었다. 이경의 고등학교 생활.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 이어폰을 끼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왠지 자세가 굽은 이경. 그녀가 뭔가 기가 죽은 듯한 느낌을 풍기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날아온 공. 땅만 보고 가던 습관이 원인이 됐다. 안경이 부서졌다. 후다닥 달려오는 수이. "괜찮아?" 수이는 운동을 꽤나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피부가 까무잡잡했던 수이. 왠지 모르게 다가오는 듬직한 카리스마에 이경이의 마음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아본 두 사람. 거짓말같이 두 주인공의 인연이 시작됐다.
미안했던 것일까. 수이는 이경이를 자주 찾아갔다. 딸기우유를 가져갔던 수이. 그렇게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간다. 뭔가 첫 만남부터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두 사람의 직관은 금세 사실이 됐다. 사랑에 빠진 둘. 2002년 월드컵 전후의 시간적 배경에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아슬아슬한 첫사랑을 시작하는 두 사람. 사실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수이는 실업팀 축구선수를 목표로 하고 있고, 이경이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한다. 다른 길로 들어선 두 사람. 과연 둘의 사랑은 영원할 수 있을까?
소설 원작과 애니메이션
일단 영화의 가장 큰 특성 두 개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과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징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에 이 영화는 ‘쇼코의 미소’의 원작자 최은영 작가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고 볼 수 있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 전부를 읽어본 건 아니지만 ‘쇼코의 미소’는 기억난다. 섬세한 필체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동선을 형상화한 능력은 최은영만의 문장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영화 군데군데 이 최은영 작가의 시각화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있다. 영화의 각색이 이 인물 간의 내면묘사를 얼마나 잘 살렸는지는 별개로 두고, 이야기의 구성이 인물의 내면묘사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서사들이 전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었다면 섬세한 문장력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몇 개 있었다. 또 최은영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피드백을 받았던 걸까? 아쉬운 이야기 전개와는 반대로 반짝이던 대사 몇 줄이 있었다.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장르적인 특성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직접 그린 작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뭔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데 있어 시각적 쾌감을 전달하는 데 있어 모자람은 없다. 특히 영화 초반부 두 사람이 싹트는 과정에서 학교를 묘사하는 방식은 대단했다. 여름의 풍광을 보여주는데, 영화의 로맨스적 특성이 계절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정도다. 대사의 문장력만큼이나 큰 영화의 강점이었다. 물론 후반부에 겨울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전체적인 색감을 활용하던 것이 두 사람을 둘러싼 분위기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좋았다고 뽑을 수 있다.
두 사람
사실 글쓴이는 소설 원작이라는 점과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특성을 활용한 시각적 쾌감 말고 영화의 강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장점으로 느꼈던 것 중 몇 안 되는 것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왜 두 사람이 좋아하고 뭐 딜레마가 있고 가타부타 설명하는 것보다 본론만 딱 보여주는 전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로맨스 장르 영화에서 여운을 남겨주기 위해 이 부분을 디테일하게 묘사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핵심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난 다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부분에 사족을 붙이면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핵심 키워드 ‘소수자와 다양성’에 영향이 갈 수도 있다. 이야기의 응집력이 딱 안 붙는 것이다. 초반부 이후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별개로 두고 이 선택은 감독이 좋은 수를 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물 세팅에 대해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 영화는 퀴어 로맨스물이다. 퀴어 로맨스라는 장르적인 세팅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캐럴>이나 <해피 투게더> 같은 영화도 퀴어 장르로서 로맨스 걸작으로 우리의 곁에 남아있지 않나. 두 영화에서 퀴어 로맨스라는 인물 세팅이 강점을 가졌던 부분은 주인공들의 설정이다. <캐럴>에서 루니 마라와 케이트 블란쳇이 맡았던 역할은 입장차이를 보여주되 내적인 설정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특정 이미지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에 집중해서 인물을 보여줬던 느낌이었다. 특히 이 <캐럴>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하는 두 장면은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만 보여주고 이미지에 편승하지 않았다. <해피 투게더> 같은 경우는 보영이 약간 여성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후반부까지 가면 입장이 전복된다. 이는 영화의 핵심 소재인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소재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연출이었다.
이 <그 여름>은 좀 진부한 이미지들에 기대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원작이 그렇다? 원작이 그런 결이라고 해도 각본가에겐 각색이라는 것이 있어서 딱히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선 첫째. 수이는 운동선수다. 이경은 소심한 인물이다. 전형적으로 안경을 쓰고 더 패턴화 되어있듯이 자기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경. 왠지 우리가 아는 로맨스물의 캐릭터성을 그대로 쌓아가고 있다. 수이는 여성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던 스포츠 선수라는 점과 쇼트커트 헤어스타일로 남자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데 이경은 전형적으로 약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게 퀴어 로맨스에서 품을 수 있는 섬세함이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본다. 너무 대놓고 성격 특성을 강조해서 상투적으로 이야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성별만 여자로 설정하고 운동선수라는 세팅을 갖다 놓으면 여성성을 탈피하는 서사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 걸까? 두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보고 싶었던 관객이라면 이 부분을 아쉽게 생각할 만하다. 그리고 수이의 파트너 이경의 내면묘사 역시 평면적이라는 점이 아쉽다. 뭐랄까 이 영화가 다른 작품들과 차이점을 가질 수 있던 지점 중 하나는 이경의 감정선일 텐데 내내 영화 후반부까지 이 부분을 직접 설명하고 있어 느낌이 잘 안 산다. 이 내용도 문제지만 전달하는 방식도 아쉬웠던 것이다.
다 짜여 있는 듯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두 개는 수이와 이경의 사랑이야기이자 성소수자들에 대한 다양성 문제다. 이 중에서 영화에 배경처럼 깔려있는 연출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시선이다. 영화는 이경이가 대학을 가는 시점을 기점으로 찍고 1,2부로 이어져 있다. 이 다양성의 측면에서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문제는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소재들을 군데군데 넣어서 이야기에 종합시킨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영화의 메시지를 위해서 인물들이 약간 희생된 감이 있다. 우선 1부. 어린 이경이가 누군가에게 폭언을 듣는 장면이다. 이때 이 시기에 있던 사람들이 이 단어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알고 있냐?는 차치하고 나서라도 이 장면이 주는 전달력이 부족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그리고 고등학생 시절. 두 사람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작동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눈치’는 영화에서 소모적으로 툭 던져진 느낌이 강하다. 특히 수이의 경우 역시 이경처럼 전형적인 학교생활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많은 학생들 중에 그걸 다 짚어낼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높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2부로 넘어간다. 2부에서는 두 사람의 공간을 바꾼다. 공간을 바꿈에 따라 두 사람이 어떤 장소를 알게 된다. 여기서 연극이 벌어진다. 이 연극의 의미가 극 중에서 비중이 적지 않다. 나름 중요하게 보여주는데, 정작 여기서 제시되는 연극의 내용이 과연 영화의 핵심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엔딩이 약간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작 이 연극 파트가 없다고 해도 엔딩까지 가는 전개에 아~무 지장이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두 사람의 로맨스가 연극에서 다루는 토픽과 관련이 있을까? 아니다. 왜 이 부분이 들어갔을까? 영화에서 다루고 싶었던 것이 과연 선택과 집중을 골라 만들어진 것일까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다. 후술 하겠지만 각본 상에서 어떤 인물이, 또 특정 사건이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소모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게 로맨스의 장르특성이랑 아~무 관련이 없으니 이런 이면에 깔려있는 창작자의 관점이 몰입이 안 되는 작위적인 느낌만 든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아마 많은 분들이 가장 큰 단점으로 뽑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글쓴이는 이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배우들의 연기다. 목소리 톤이 다 천편일률적으로 다 똑같아지는 듯한 사운드 연출은 영화의 분위기가 축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경이와 관련된 목소리 연기는 안 그래도 평면적인 인물 연출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컸다.
빛을 잃어버린 이야기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다. 주인공 둘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품은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글쓴이가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이 부분이다. 과연 이 영화가 사랑 영화로서 뛰어난 인사이트를 보여주고 있을까?라는 점에서는 솔직히 전혀 이입되지 않았다. 영화의 엔딩부에 다다라서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결론 때문이다. 2부의 이야기가 내팽개쳐져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인물의 행보를 동성애라는 소수자 코드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냥 변명에 가깝다. 이 영화가 성소주자들에 대한 존중과 로맨스라는 두 가지 코드 다 놓쳤다는 나의 의견도 여기서 온다. 사랑이 왔다가 떠나간 자리는 로맨스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되어 왔다. <우리도 사랑일까>에서 장난과 관련된 시퀀스,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 삭제라는 소재, <팬텀 스레드>에서 습관과 사랑이라는 양면성, <박쥐>에서 ‘빨아먹어’야 이뤄지는 로맨스까지 이 부분이 로맨스 영화에서의 승부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61분이라는 러닝타임 때문인지 그렇게 둘이 행복했다는 몰입이 쉽게 이뤄이지 않는다. 러닝타임이 짧아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있지만 군데군데 조악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우선 이경이의 외적 부분에서 남들과 다른 특성이 있다. 이거 로맨스에서 중요할까? 전~혀 중요하지 않는다. 감정선이 얕은 것이다. 오히려 이와 관련된 인물 설정이 조악하다고 느껴본 적은 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소재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것이 이 사랑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책으로만 읽으면 유효타로 작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관련된 부분이 진부하다고 느껴진다. 또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공간이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 공간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경이가 살던 곳이 어디인가? 에 대한 논의가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까지 보고 나서 이 장소에 대한 딜레마가 굳이 없어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점은 아쉽다. 이 공간과 관련된 딜레마가 아니더라도 수이의 입장이 확 반전되는 사건이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의 리얼리티는 축구를 어느 정도 아는 글쓴이 입장에선 약간 갸웃거리게 되는 장면이었다. 이 폭력적인 장면이 굳이 들어가야 했을까? 영화의 기본 세팅을 깰 정도로? 이런 식의 ‘여성성이 아닌 것’에 대해 태클을 거는 사회 묘사가 한 번이 아니었다는 점은 말하는 방식의 조악함이 느껴졌다.
시도'만'좋은 것
글쓴이는 이렇게 이 <그 여름>이 장점보다 단점이 압도적으로 많은 작품이라고 봤다. 특히 참을 수 없었던 건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인 척한다는 셈이었다. 물론 이 영화가 전하려고 하는 말에 반대 입장을 펼치고 싶지 않다. 연극에서 다뤘던 소재는 한국에서 더 심화된 채로 논의될 필요가 있고, 성소수자라고 기본권이 파괴되는 일은 많이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여성성이라는 핑계로 사람의 역할이나 기댓값이 달라진다면 그 역시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영화가 아름다운 작화로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미학적 가치가 올라가고 그럴 일은 없다. 영화는 로맨스영화로서의 귀결이 약하기 때문에 메세지적인 측면의 설득력에 영향을 끼쳤고, 반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로맨스물로서의 장르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완성도에 금이 갔다. 이 영화들 둘러싼 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은데, 글쓴이는 <해피 투게더>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캐롤> 같은 걸작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친밀도를 높여놓은다는 점에서 작품이 갖고 있는 한계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단순히 그림체만 예쁘고 아름다워서 좋은 영화가 아닌 이야기의 구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작품이 탄생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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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
1.
<인셉션>(2010)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세계 속 시간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도구인 시간을 스크린 위로 불러내서, 영상 언어로서의 시간을 구축한다. 각각의 꿈속에선 단계별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편집 기법을 통해 시각화된다. <미행>(1998), <메멘토>(2000)에서 시작한 ‘플롯 게임’을 지탱하는 내러티브적 시간의 혼재된 배열이 <인셉션>에서는 다른 형태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대놓고 시간 흐름의 상대성을 논하는 <인터스텔라>(2014)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셉션>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이라는 관념을 향한 놀란의 집착이 후속작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2017)의 시간은 <메멘토>와도, <인셉션>과도 다르다. 이 영화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어선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어긋나는 세 시공간대를 과감하게 교차한다. 그간 놀란이 구상해 온 비선형적 플롯 구조 가운데 <덩케르크>만큼이나 비정형적인 사례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한 <메멘토>의 플롯조차도 컬러의 역순행과 흑백의 순행이 섞이는 최소한의 규칙을 전제로 하지만, <덩케르크>는 플롯을 연결하는 관습적인 규칙마저도 최대한 느슨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덩케르크>의 시간은 <인셉션>처럼 시각화된 물리량 변환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정의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물리적 길이가 다른 세 시간대를 교차하는데, 교차된 장면들 총합의 길이가 장편 영화 포맷의 러닝타임에 부합해야 하므로, 잔교의 일주일보다 민간 어선의 하루가, 어선의 하루보다 전투기의 한 시간이 영화상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편집될 수밖에 없다. 즉, 시간대 구간이 짧을수록 각 쇼트마다 더 많은 지속 시간을 할당받는다. 다시 말해 상대적 길이에 따라 재배치된 시간이 필름에 새겨진다. <덩케르크>는 수용자의 관습적인 지각 체계가 작동하기 힘든 영화이다. 관객은 마침내 편집을 통해 재구성한 비선형적 시간 개념을 인식한다. 몽타주로 피어나는 도상적인 운동감과 이미지 간의 리듬을 유도하는 새로운 시간적 개념 또한 동시에 정의된다.
<덩케르크>에서 정의된 영화적 시간은 그간 펼쳐왔던 놀란의 시간 게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테넷>(2020)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테넷>의 시간 여행은 다른 영화에서 표현됐던 시간 이동에 관한 무의미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1985) 등이 불연속적 시간 이동을 서사적으로 활용한다면, <테넷>은 시간의 역전이 형상화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에 쓰인 단순한 되감기 기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놀란은 역방향 촬영과 더불어 배우들을 거꾸로 연기하도록 디렉팅했다. <메멘토>에선 되감기 기술을 활용했던 놀란은 이번에는 촬영된 영상을 되감을 뿐 아니라, 피사체(주로 인물)가 직접 거꾸로 행동해서 시간의 역행을 재현하는 장면을 많이 동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재정의된 시간처럼 <테넷>도 관습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시간 순행과 역행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정의하려는 많은 작품이 있지만, 감각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 관계를 시각화하는 <테넷>의 실험만큼이나 생경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놀란 본인이 단편 <두들버그>(1997)에서 각기 다른 시간 선후 관계에 놓인 세 명의 남자(the man)를 동일한 공간에 중첩해서 표현한 점은 <테넷>의 전조로 볼 수 있지만, <테넷>은 분명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양상을 띤다.
'테넷'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2.
문제는 놀란 영화에서 포착되는 시간의 변주나 재정의가 목표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해온 놀란의 세계는 매번 부산스럽게 규모를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세계의 매혹적인 표층을 걷어내면, 근간에서 발견되는 건 지적 유희를 향한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뿐이다. 이토록 편집증적인 면모로 시간 재구성에 관한 영화를 생산하는 연출자가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놀란이 기획한 영화적 시간의 특징적 표지를 읽어내는 순간에 촉발되는 매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영화가 머금은 지적 유희를 탐닉하려는 수용자의 몸부림이야말로 놀란 영화가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가 형식을 통한 영상적 구현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례라면,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몇몇 영화들은 놀란의 다소 피상적인 결과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다. <보이후드>(2014)는 기술 자본을 등에 업고 욕망을 구현하는 놀란의 영화에서 절대 성취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를 12년 동안 연출했다. <보이후드>의 인물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은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삶의 순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실 태생적으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두기도 하고 확장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매체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의 기획은 현실과 영화의 시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재현 수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역시 주연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노화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시간성이 필름에 각인된 사례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적 시간은 곧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작가의 견해처럼 보인다.
영화적 시간을 사유하는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간성을 탐구하고 있다면, 펫졸드의 <트랜짓>(2018)은 과거와 현재를 중첩하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에 구속된 시간 논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펫졸드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역사의 흔적을 응시한다. <트랜짓>은 시공간성의 해체가 현대 사회에 산재한 이슈(난민 문제 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사유하는 작업이다. 펫졸드의 사유는 시간의 재구성을 넘어, 시공간성이 반영된 역사에 관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물론 <덩케르크>의 시간은 전쟁 현장에서 생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관객이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성의 무화를 유도하는 <트랜짓>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테넷>에서의 과시적 유희는 그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인셉션>은 <트랜짓>에 비해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가 매력적으로 구축된 작품이지만, 그 형식적인 틀이 <트랜짓>의 사례처럼 사회 문제나 현실 요소와 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3.
한편 형식적인 관점에서 왕가위의 시간과 놀란의 시간을 비교해보는 시도는 흥미로운 논점을 생산할 수 있다. 왕가위의 영화는 시공간을 필름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왕가위는 <중경상림>(1994), <타락천사>(1995) 등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형식의 층위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왕가위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의 공허함,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는 데에도 탁월한 센스를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주로 어긋나는 관계와 실패하는 사랑의 순간들, 공간을 맴돌거나 홀연히 떠나는 인물들, 기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왕가위가 주로 천착하는 소재들은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왕가위의 영화는 형식을 통해 작가적인 관점을 구현하려는 좋은 사례처럼 보이지만,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왕가위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지만, 놀란은 시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영화들도 유의미한 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는 <1917>(2019)의 의도된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영화적 시간을 현실로 전이시켜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7>의 기술적 성취만으로 서사 화법의 지위를 대체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놀란의 영화가 갖는 한계점과 유사하게, 채택된 기술의 당위성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 되감기의 변주 등을 동원한 <테넷>의 시간 역행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형식적 산물이지만, 그 목적성을 따지기 시작할 때 영화는 급격히 동력을 잃는다. 서사적 측면에서 되감기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한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은 <테넷>이 놓친 요소들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작품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와 다르게 <테넷>에서는 작품 내적 요소 간의 호응보다는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상화한 감독 자신의 가공된 욕망과 자의식만이 느껴진다.
4.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영화적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카메라로 시공간을 담아내는 영화예술의 태생적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분석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놀란의 작품들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구체화된 그의 욕망은 <덩케르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어냈지만, <테넷>에서는 기존의 매력마저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덩케르크>의 비선형적 시간 개념은 형식을 조작해서 관객의 지각 체계에 균열을 가한 뒤, 역사의 흔적과 영화와 현실을 매개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담론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테넷>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전제한 채 다시 한번 조작된 시간을 들이밀지만, 어쩐지 표층에만 머무른 채 심도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진 않는다.
놀란을 향한 상당수의 지적은 생각보다 가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놀란은 현대 영화 산업의 첨단에서 독특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거칠게 말하면 포스트-스필버그처럼 보이는 보기 드문 유형의 창작자이다. 그에겐 16mm 필름 대신 아이맥스 필름이 있고, 열악한 로케이션 현장 대신 특별 제작된 회전 세트나 폭발해도 상관없는 비행기가 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본주의적 연출가 놀란에겐 고삐 풀린 창작욕의 구현과 대중성 기반의 안정적 수익 구조의 창출이 모두 요구된다. 놀란이 영화 산업의 자본 논리에 종속된 이상, 자의식 과잉과 상업성 확보 사이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한다. <덩케르크>는 장르적 서사 코드를 마냥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메멘토> 이후 정체된 듯 보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재입증한 사례였지만, <테넷>의 실험이 만들어낸 산물은 영화사와 감독, 대중과 평단 사이의 다층적인 이해관계에 반영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놀란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간은 과연 <테넷> 이후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가 시간 실험을 지속할지 집착하던 소재에서 손을 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천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리는 일이다.
'인셉션'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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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미널 (The Terminal, 2004)
터미널 (The Terminal, 2004)
뉴욕은 그의 목적지가 아니다.
크로코지아에서 온 빅터 나보르스키 (톰 행크스)는 뉴욕행 티켓을 끊었다. 미국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 입국심사 도중 문제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발생 한다. 그의 나라 크로코지아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나라가 없는 사람으로 입국에 부적격 판정을 받게 되었고, 국적이 없는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고향이었던 크로코지아에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된다.
잠시 공항 터미널에 머무르도록 임시조치를 취해놓은 사람은 바로 딕슨, 승진을 앞둔 케네디 공항의 국장이다. 그는 자신의 승진을 위해 어떤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 빅터의 상황을 해결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둔다. 공항 관리가 아닌 나라나 법적으로 다뤄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어쩌다 공항에 하룻밤 묵게 된 빅터에게 푸드코트에서 이용할 수 있는 쿠폰과 호출기를 주고, 그는 폐쇄된 67번 게이트에서 잠을 자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 크로코지아의 전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빅터의 상황도 악화되었다. 국가가 없는 그는 홀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도 없고, 아무도 이 일을 해결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빅터의 할 일은 호출기의 알람을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 외교가 재개되어 비자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설상가상, 그는 꼬마를 도와주려다가 푸드코트의 쿠폰과 비자를 모두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 터미널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4년 작품이다. 늘 스펙터클한 SF 장르의 영화로 우리에게 알려진 스티븐 스필버그. 그는 영화계에서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영화 <죠스>, <이티>는 영화 비용이나 제작 측면에서 ‘스케일이 큰’ 작품들을 제작했다.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영화 <링컨>, <퍼스트맨>, <쉰들러 리스트>와 같은 인문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기획하는 등 마냥 스펙터클한 규모가 아닌 흔히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도 많이 해오고 있다.
(2003년, 2004년 연달아 <캐치 미 이프 유캔>과 오늘 소개한 영화 <터미널>까지 톰 행크스와 함께 했다.)
이렇게 그의 필모그래피를 쭉 살펴보니 그에게 할리우드란 영화적 스케일과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터미널>도 그런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왠지 겨울이 되면 따뜻한 이불속에서 다시 한번 보고 싶게 된다. 영화 <터미널>은 공항에 갇힌 빅터의 생활을 그린 영화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빅터의 삶을 함께 엿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큰 가치를 갖는다. 왜 그럴까,
(아래 내용부터는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빅터에게 공항은 그의 집이 되기에 충분했다.
공항은 의, 식, 주. 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이다. 빅터에게 이 곳은 뉴욕으로 나가는 문만 열지 못할 뿐이다.
크로코지아의 긴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는 터미널 67번 게이트에 자신의 생활공간을 만든다. 그리고 잃어버린 돈과 푸드코트 쿠폰을 대신할 돈을 벌기 위해 공항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잠옷을 입고 공항을 돌아다며 화장실에서 개의치 않게 머리를 감고 씻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가 돈을 벌기 시작한다. 공항 카트를 정리하며 동전을 벌어 끼니를 때우며 며칠을 지낸다. 이 모습을 본 딕슨은 그의 일자리를 빼앗으려 카트를 정리하는 공항 내 직원을 배치한다.
일자리를 뺏긴 그는 영어도 서툰 상태이다. 그는 우선 책을 통해 영어 공부를 하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매일 입국심사를 받으러 가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그는 이곳에서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입국심사를 진행하는 직원에게 매일매일 그녀의 관심사, 취미, 일상 등을 물어봐주고, 그녀를 좋아하는 공항 식품담당 직원 크루즈를 통해 음식을 얻어 지내게 된다. 빅터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불만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의 보금자리 67번 게이트에 변화가 생겼다. 창고 수준과 같았던 그곳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빅터는 누군가가 바르다만 벽의 마무리칠을 한다.
빅터는 누군가가 공사를 하다만 흔적을 본 발견하고 이내 솜씨를 발휘한다. 공항의 공사팀은 빅터의 솜씨를 보고 고용해, 그는 새로운 일자리를 또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동료(?) 직원의 연애를 도와주고, 좋아하는 여자와의 데이트를 위해 온갖 준비를 다하고,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외면하는 것들에 대해 나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무려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크로코지아의 전쟁도 끝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뉴욕으로 갈 수 없게 된다. 그 사이 승진한 딕슨은 빅터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라며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겠다고 한다.
공항 사람들에게 무시받고 없는 사람 같은 존재가 되었던 비터는 이미 공항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었고, 영웅이 되었다.
‘프렌즈’.
빅터가 열심히 연습하던 단어이다.
수많은 공항 사람들이 든든한 친구들이 된 빅터에게 딕슨은 더 이상 자신의 권력을 이용한 부조리한 일을 벌일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터미널에서의 9개월
터미널이라는 곳은 출발한 국가와 도착할 국가의 사이이다. 문을 열고 나와, 다시 다른 문을 열고 나가기 전의 장소. 과정의 장소이다. 그가 사랑한 여자는 늘 기다려선 안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만나는 남자의 연락을 7년째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고 말지만.)
그리고 빅터는 크로코지아에서 와서, 뉴욕을 향해 문을 열고 싶었다. 둘 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곳의 상징이 바로 ‘터미널’이 된다.
누군가의 요구나 지시 외에는 할 수 없는 곳, 어정쩡한 과정의 장소, ‘지나감’을 위해 존재하는 곳과 같았던 그곳에서도 빅터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억지스럽게 위로를 하려고 하지도 않고, 어떤 위인의 삶을 교훈처럼 주지도 않는다. 그저 빅터의 9개월을 보여준다. 그곳이 어디든 빅터는 자신의 할 일을 만들고, 사랑했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한다.
빅터의 9개월이 꼭 우리의 삶의 일부분, 혹은 전체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환경과 우리가 힘들어하는 그림자들. 빅터가 집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환경들이 있었지만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더, 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싶어 했다. 영화에서 빅터는 어떤 목적이 있다. 늘 지니고 다니는, 그리고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던 '재즈'가 들어있다는 빈 깡통 캔. 그것을 채워야 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루러 뉴욕에 가야 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터미널'에서의 9개월의 생활이 우리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가 이 영화를 보게 되던지, 분명 터미널 안을 전전하는 빅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진 출처: IMDB <The Termina (2004) > Photo Gallery
네이버 <터미널> 포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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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Neuf, The Lovers data-on The Bridge)
개봉일 : 1992.04.18 (한국 기준)
감독 : 레오 까락스
출연 : 줄리엣 비노쉬, 드니 라방
‘그저 사랑하는 연인들’
나에게 <퐁네프의 연인들>은 명작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왠지 ‘그날의 기분’에 끌리지 않아 밀려버렸던 여러 영화 중 하나였다. 크게 기대한 개봉작이 아닌 이상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영화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이 영화를 본 당일이 되기 전까지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겨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단 다가올 상실을 걱정하며 스스로 길거리에 나앉은 미셸과 길거리를 내 집 삼아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이어가는 노숙자 알렉스. 두 사람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만난다. 보수 공사가 한창이던 다리 위. 알렉스는 자신의 자리에 누워있는 미셸을 발견한다. 미셸은 알렉스가 사고를 당하던 날 밤 길거리에 쓰러진 그의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그리고 눈이 완전히 멀어버리기 전, 제대로 알렉스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보수 중인 불완전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결핍으로 가득 찬 알렉스와 미셸. 두 사람은 가진 게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길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처지인 두 사람에게 남은 게 있겠는가. 돈도 직업도 지금 당장 만날 인연도 없는 (미셸은 자발적으로 버리고 나온 것이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니. 또 다른 노숙자 한스는 알렉스에게 묻는다. “네 주제에 사랑을?”
현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연애, 즉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나를 가꿀 시간도 모자라서, 나를 건사하기도 벅차서. ‘가진 게 없어 연애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라고 말하며 사랑을 빠르게 포기하는데,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을 한다. 가진 것도 미래도 없지만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한다. 내가 상상하던 완전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분명 강렬한 빛깔의 로맨스였다. 퐁네프 다리 위에서 화려한 폭죽이 터지던 그 순간을, 알렉스의 물음에 미셸이 답을 내리던 그 순간을, 사랑을 잃을 수 없어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퐁네프의 연인들 시놉시스
파리 센느강의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사랑을 잃고 거리를 방황하며 그림을 그리는 여자 ‘미셸’, 폐쇄된 퐁네프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그녀가 삶의 전부인 남자 ‘알렉스’. 마치 내일이 없는 듯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사랑한 두 사람. 한때 서로가 전부였던 그들은 3년 뒤, 크리스마스에 퐁네프의 다리에서 재회하기로 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난 내 삶을 선택할 거야. 난 다리로 돌아갈 거야.”
알렉스의 삶은 퐁네프 다리 위에 있다. 알렉스가 언제부터 그 다리 위에서 살아온 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꽤 오랜 기간 길거리에서 불 쇼를 하며 하루하루를 이어왔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남루한 옷차림과 다듬은지 오랜 기간 지난듯한 몸. 그리고 자연스러운 절도 행위. 알렉스는 퐁네프 다리가 보수작업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다친 발을 이끌고 다시 다리로 돌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여성 미셸. 그녀는 육군 대령의 딸이다. 꽤 괜찮은 집안에서 자라왔을 걸로 예상되는 그녀는 그림 작가였지만, 헤어진 연인 줄리앙에게서 받은 상처와 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떠밀려 길거리를 떠돈다.
미셸은 총과 함께 줄리앙에 대한 미련을 품고 퐁네프 다리에 누워있다. 그녀는 역사에서 우연히 줄리앙의 첼로 연주를 듣게 되고 그의 뒤를 뒤쫓는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리고 마지막 기회라는 간절함이 미셸의 걸음을 빨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미셸의 뒤에는 사랑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남자 알렉스가 있었다.
미셸은 줄리앙에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총과 함께 미련을 버린다. 7발은 미셸이 7발은 알렉스가.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우리의 행운을 위해. 알렉스와 미셸은 음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번갈아 총성을 울리며 함께 미련을 지워버린다. 그 날밤, 두 사람은 둘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내일 아침 네가 날 사랑한다면 ‘하늘이 하얗다’고 해줘.”
하늘이 하얗고 구름이 검은 세상. 온 도시가 잠든 후에 시작되는 둘만의 시간. 불면의 밤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팔. 이런 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포근한 침대가 아닌 바람 부는 다리여도 상관없었고, 모래가 가득한 바닥은 포근한 매트리스가 되어 두 사람을 넉넉히 감싼다. 알렉스와 미셸은 사랑에 눈이 먼 사람처럼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사랑을 한다. 마치 갓 세상에 태어난 동물들이 첫 발걸음을 떼는, 본능을 따라가는 그 순간처럼. 그때까지만 해도 난 무엇도 알렉스와 미셸을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나에게 잊어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어.”
알렉스는 미셸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간절함은 지하철 역사를 헐떡이며 뛰게 만들었고 끝내 포스터가 들어있는 차와 포스터를 붙이던 사람 한 명을 불태우기에 이르지만, 미셸은 새로운 치료법을 찾았다는 소식에 알렉스를 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미셸이 갖고 있던 라디오는 선이 끊긴 채 방치되었고 알렉스는 미셸 몰래 숨겨뒀던 총으로 왼손 약지를 쏜다. 보통의 연인들은 왼손 약지에 껴둔 반지를 빼며 이별을 실감하는데, 알렉스는 커플링 대신 자신의 손을 쏘며 이별을 맞이한다. 무언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였다면 의미 있는 물건 하나쯤은 남을만한데, 가진 것 없이 이뤄진 둘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기에.
알렉스는 방화와 과실치사로 복역하게 되고 2년쯤이 지난 후 미셸은 알렉스를 찾아온다. 시력을 회복하면 모든 게 돌아올 거라, 잃었던 다시 세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미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 미셸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뜬 건 새로운 치료법을 찾은 순간이 아닌 알렉스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음을 그녀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랑을 했던 순간이, 모두가 잠든 후에 마음껏 도시를 누리던 그 순간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음을.
알렉스와 미셸은 서로를 처음 마주했던 퐁네프 다리 위에서 다시 만난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두 사람을 받아준 화물선 위에서 다리 위가 아닌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두 사람이 만일 다른 시간대에, 퐁네프 다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연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미셸이 절망감에 휩싸여 퐁네프 다리에 오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작은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안정적으로 등을 뉠 수 있었던 퐁네프 다리가 없었다면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겠지. 퐁네프에서 만난, 퐁네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퐁네프의 연인이 어쩌면 이 두 사람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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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내밀한 욕망으로의 여정
욕망: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본능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한다. 아니, 이 지구상의 생명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탐하고,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을 탐닉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며, 이러한 본능은 우리들을 헤아릴 수 없이 번화하고 다채로워지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욕망의 종류는 다양하다. 꿈을 향한 야망, 야욕, 야심이 있는가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의욕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을 말하는 애욕, 정욕, 성욕 등도 있다. 사실, 욕망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욕망은 무엇으로든 이름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많은 욕구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지만 가장 괄시 받는 것이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성욕을 꼽을 수 있겠다.
요즘은 꽤나 개방적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문화권에서는 성애를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성행위는 암묵적으로 '많은 수가 수행하고 있으나' '차마 발설되지 못할' 욕망으로 치부되며, 그것은 나아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 그 자체를 스스로 거세해 버리게끔 압박하기도 한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는, 가볍고, 방탕하고, 차마 상종 못할 '짐승'이 되기도 하고, '싸구려 인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이 바람직한 성이라면, 우리는 그 욕망을 반드시 억압해야만 할까?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이런 의문에 대한 재치있는 답을 담고 있다.
1. 인생이 재미 없는 여자, '낸시'
'낸시'는 삶이 재미없다. 종교학 선생인 그는 평생토록 학생들에게 그들의 욕망을 단속하기를 강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인생은 브레이크의 연속이었다. 이건 이래선 안돼. 이건 이렇게 보일 거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래, 나는 재미없어. 하지만 내가 ~할 순 없잖아. 이런 말들은 끊임 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그것은 족쇄가 되어 그의 삶을 지치고 지루하고 지난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대단한 오르가즘은 문턱에조차 다다른 적이 없었다.
남편을 잃고 선생 일도 은퇴한 어느 오십 줄. 그런 낸시는 오랜 결심 끝에 새로운 자유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방법이랄 것은 바로, 젊고 매력적인 남자인 '리오 그랜드'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2. 고지식함과 방탕함
그렇게 고심 끝에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시간을 샀는데, 낸시는 그럼에도 걱정할 것이 많다. 나이 들어 볼품 없어졌을 몸을 보이는 것도 걱정스럽고, 소위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수없이 갈등한다. 눈 앞에는 근사한 리오 그랜드가 앉아 있지만, 그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낯선 세계로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허둥지둥한다. 초보 운전수가 운전을 할 때 손에 땀을 쥐는 것과 같이, 누구나 처음은 녹록치 않다.
그러니 낸시가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인 리오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네 어머니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거 아시니?" 같은 고지식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 뿐이었으리라.
한편, 리오 그랜드는 아주 능숙하다.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산 사람들을 그 각각에 맞추어 즐거움을 선사하는 법을 알았고, 그것에 그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기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는 전문가답게, 조금 특별한 손님인 낸시를 차분히 기다린다. 이윽고 그는, 낸시와의 오랜 대화와 얼마쯤의 춤을 즐긴 끝에, 낸시가 바랐던 것을 선사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아름다우며,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욕망해도 좋다고.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3. 무심한 어머니와 상처입은 아들
그러나 그 대단한 리오 그랜드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끝없이 사적인 물음을 일삼는 낸시와의 대화를 통해 리오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아프고 쓰라린 기억을 자꾸만 떠올린다. 그는 어머니의 눈에 지나치게 방탕했던 탓에 미움 받았고, 그 탓에 많은 것을 숨기고 숨으면서 안전한 그만의 요새에 다다랐다. 그는 '리오 그랜드'라는 가면을 쓰고 손님들의 돈을 받음으로써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방탕할 수 있는 시간을 영위한다. 그곳에서 만큼은 그는 탕아가 아니라 전문가가 되므로, 그는 그 안락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 밖과 안을 철저하게 유리시키고자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리오를 그만의 '방'에서 끄집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낸시다. 리오가 자유를 되찾아준 바로 그 손님 말이다. 낸시가 과격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리오를 '커밍아웃'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한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있다. 바로 낸시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는 것.
리오에게 낸시는 손님이기도 하고, 저를 매정하게 저버린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낸시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 다시 말해, '리오 그랜드'라는 인물을 속단하고 고지식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이 만든 어떤 '틀'에 밀어넣으려고 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너는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낸시는 리오가 자신을 달래며 해주던 다정한 말들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낸시는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리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스스로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남의 욕망을 서둘리 재단하던 과거의 일들을 반성했다. 그 고지식하던 사람이, 비로소 진솔한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어쩌면 낸시가 리오에게 해준 말은, 그가 어머니, 혹은 그밖의 많은 모진 말을 던지던 이들에게서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3. 우리가 외면해왔던 내밀한 욕망에 대하여
꼰대와 탕아의 만남은 썩 어울리지도 않은데다가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낸시와 리오는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욕망에 충실한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낸시와 리오는 서로를 만남으로서 각자의 구원을 받았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의 짐을 벗어든 순간, 욕망을 마주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진다. 낸시는 마침내, 그가 50년이 넘도록 느끼지 못했던 오르가즘을 맞이한다.
4.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내내 말한다. 욕망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좀 더 스스로와 세상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거울에 자신의 맨몸을 비춰보며 미소짓는 낸시처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좀 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색안경을 끼는 일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유교걸이라 이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인 '매춘'(리오는 시간을 사고 파는 일이라고 했지만)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조금 더 고민된다. 이것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벗어 던져야할 족쇄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걸 차치한다면, 글쎄, 영화 자체는 즐거웠다. 엠마 톰슨은 귀여웠고, 데릴 맥코맥은 섹시하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했으면서도, 고루한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나의 욕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오래 고민해 볼까 한다. 혹시 아는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서 구원을 받거나, 그를 구원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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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이별은 없어요'라는 대사가 느닷없이 생각난다. <노매드랜드>에서 나왔던 대사였다. 떠나간 아들을 기리는 아버지의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대사는 나의 머릿속에서 오래오래 남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좋은 영화는 사람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는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 나는 사회복무요원 일이 끝나면 취직을 하고 또 자취를 하겠지? 그럼 나는 이 <노매드랜드>를 블루레이로 구매할 생각이 있다. 아니 그 이전에 그 DVD 트는 기기를 뭐라고 부르지? 그걸 구매하고 싶은 의향까지 있다. 적당히 넓은 집에 이불 덮고 누워서 금요일 밤에 그거 틀고 잠자면 행복할 것 같다.
그런데 가끔 이런 소소한 재미거리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난 그럼 방에 갇혀 사는 거야? 책 읽으면 되지. 근데 책도 못 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방구석에서 인스타그램을 끄적이며 사는 게 전부라면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심심하다. 그런데 내가 나답게 하는 것들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보이기 위해서만 산다면 그건 그야말로 빈 껍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다못해 이 삶이 TV 방송에서 생중계되고 있다면 더더욱 끔찍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외로운 날이 많아 카카오톡 대화창이 텅텅 비는 나다. 대화할 상대도 없이 그렇게 표류하면 외로워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한숨이 난다. 그런데 이런 어두운 현실 속에서 무조건 해야 할일이 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웃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10년 연속으로 해야 한다. 20대 동안 하는 것도 괴로웠는데, 결혼생활을 하고 난 후 내내 해야 한다는 건 정말 헛구역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근데 그걸 실제로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의 영국으로 가보자.
미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1990년대의 영국에는 '왕비'라는 단어를 실제로 듣고 산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 왕비이기도 했다. 이름은 다이애나 스펜서. 으리으리한 궁전 안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다. 왕비로 살아 아름다움과 부를 얻은 채로 살면 행복하지 않겠냐고? 아니다. 스펜서는 행복하지 않다. 무슨 축산업자처럼 매일 몸무게를 재고 있는 직원들과 아들이 바람을 피우건 말건 무관심한 시어머니까지 정신이 나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런 스펜서가 갖고 있는 삶의 낙이란 유일한 대화 상대 메기와 아들 둘 뿐이었다. 앞에서도 잠깐 썼지만 남편은 그냥 말로만 배우자다. 이런 비참한 현실 덕에 과거에 친구들과 놀던 시기를 떠올리기 일쑤인 스펜서. 그렇게 불행한 시집살이 도중에 왕실끼리 어느 별장에 놀러 간다는 말을 듣게 된다. 직접 운전해 도착하고 싶었지만 길을 잃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게 된다. 가던 길을 잃은 다이애나. 길을 잃던 도중 예전에 뛰어놀던 허수아비를 발견한다. 그 허수아비에는 아버지의 외투가 걸려 있었다. 안 그래도 미쳐버릴 것 같은 왕궁 생활을 겪고 있는 그녀. 아버지의 유품까지 오용되고 있는 현실 덕에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느낀다. 영화는 이 일을 기점으로 다이애나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묘사한다. 그리고 이런 고통 속에서 이뤄지는 그녀의 자아 찾기가 영화의 주요 소재다.
전기 영화 탈을 쓴 스릴러물
영화는 무서울 정도로 진절머리가 난다. 거의 스릴러 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하다. 그 이유는 스펜서의 일상 묘사 때문이다. 스펜서가 겪는 왕궁 생활은 관객들이 보기에도 답답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면, 극초반부에 주인공 스펜서의 몸무게를 재는 장면이 있다. 이때 왕실이 우리가 그냥 일반적으로 몸무게를 재는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족발집에 가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울 비슷한 걸로 몸무게를 잰다. 이게 실제 영국 왕궁이 이 도구를 사용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이 장면 연출은 '스펜서가 이 왕궁에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뿐만 아니라 남편 찰스와의 껄끄러운 관계나 시어머니와의 대화 내용까지 영화는 스펜서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영화는 좋은 연출법으로 다이애나에게 잘 이입하게 도와준다. 관객의 감상에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보다 더 꼼꼼하게
영화는 꼼꼼하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억양과 성격, 그리고 당시 왕궁 묘사에 힘을 많이 쓴 느낌이 든다. 이 영화를 관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국 왕궁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나 포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당시의 자동차나 입던 의상 코디까지 잘 짜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또 때깔도 좋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워낙 미인이라 뭘 입어도 잘 소화하는 측면이 있겠지만 입는 코디 - 왕궁 배경 - 낯/밤의 색 대비 - 진주 목걸이를 위시한 장신구까지 전체적인 톤을 잘 뺐다. 그리고 다이애나 스펜서의 실제 성격 묘사도 좋았다고 한다. 영화 보고 나서 다이애나 스펜서의 일대기를 찾아봤었다. 그때 그녀가 두 아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어머니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아들과의 대사들 속에서 애정이 보일만큼 영화는 작은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후반부에 한 장면이 있다. 이 영화가 꼼꼼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장면(설정)까지 귀결을 내기 위해 각본상의 허점 없이 딱 딱 맞아떨어지는 정교함 역시 영화의 장점이기도 하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 크리스틴 스튜어트
이제 다음 주면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이 작품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여우주연상에 올랐다. 나는 <타미 페이의 비극>을 보지 않아 제시카 차스테인이 어떤 연기를 보여줬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굉장히 유력한 후보라고 생각한다. 일단 섬세한 감정 묘사가 좋았다. 중반부 즈음에 나오는 아들 둘과의 대화 장면이나, 후반부 즈음에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실제 스펜서의 모습이 저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국 영어 악센트 묘사가 탄탄했다. 우리가 토익 시험장에서 들을 수 있는 영국 영어 톤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서는 불안함이다. 영화는 내내 스펜서를 괴롭힌다. 이 불안함이라는 정서는 부적응과도 관련이 있다. 왕실 분위기랑 영 안 맞는 스펜서는, 뭔가 피곤에 쩔어있는 듯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캐릭터성과도 잘 맞아 좋은 시너지를 낸다. 이런 그녀의 매력과 섬세한 감정연기가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루즈한 느낌이 충분한 영화를 후반부까지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의상, 음악, 촬영, 저평가는 서운해
물론 여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호연으로만 평가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좋았다. 실제로 다이이나 스펜서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나오는 머리 스타일이 그대로 옮겨졌다. 또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아웃핏에 맞는 드레스나 메이크업까지 영화의 미술은 아주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 음악도 기억에 남았다. 몇몇 분은 과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스펜서가 갖고 있는 정서불안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고 느꼈다. 그런데 음향상 축에 끼지도 못한 건 좀 의아한 부분이 있다. 또 촬영도 괜찮았다. 스펜서의 얼굴을 중심으로 클로즈업이 이뤄져 그녀의 리액션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촬영기법은 영화의 핵심 키워드인 '스펜서가 외부에 반응하는 방식'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아했다.
꼭 알고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이야기,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모르는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얼핏 들어서 알고 있다. 엄청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지만 그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정도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감정선이 더 깊게 느껴졌다. 마음이 아팠다. 운명의 얄궂음이 가혹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 다이애나 스펜서라는 인물의 실제 일대기를 알면 좋겠지만 모르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걸 알고 가면 더 깊게 느껴질 영화인 것은 충분하다. 그러나 영화는 스펜서의 입장 변화를 너무 섬세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끝난 후의 다이애나 스펜서가 관객을 기쁘게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꼭 스펜서의 일대기를 무조건 알고 갈 필요는 없다. 깊게 감상하고 싶다면 검색하는 쪽이 좋고 소프트하게 보고 싶다면 모르셔도 될 이야기다.
그 곳에서는 꼭 행복하길 바라겠습니다. 다이애나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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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과 함께2 인과 연, 존버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 영상엔 스포일러가 아주아주 가득합니다!
** 영화에 대한 '무분별한' 비하나 비난의 의도는 없습니다.
신과 함께2 : 인과 연이 개봉했습니다.
1편에선 신파 함께로 실컷 놀림 받았는데,
2편은 뜬금없는 쥬라기월드와 존버로 기억되진 않을까 걱정됩니다.그래도 이 영화는 성공할 겁니다.
그리고 3편이 나올...#신과함께인과연 #패러디 #신과함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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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ㄷㄷㄷㄷ 이 영화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습니다.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 아포칼립스z 종말의시작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배급사)의 사용 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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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취한다 채널에서 결말까지 볼 수 있는 영화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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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리포드 더 빅 레드 독> 30초 예고편
뉴욕의 아파트로 이사 온 12살 소녀 에밀리
새로운 학교에 고군분투하는 에밀리를 바쁜 엄마는
출장을 가면서 철없는 삼촌 케이시에게 맡기고 떠난다.
마법 동물 구조 센터를 지나던 에밀리는
운명처럼 작고 빨간 강아지를 만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함께하게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작고 빨간 강아지 클리포드는
하루아침에 3M가 넘게 커져버려 순식간에 뉴욕의 유명인사가 되어버린다.
엄마가 오기 전 클리포드를 되돌리려는 에밀리와
클리포드를 유전학 사업에 이용하려는 기업까지 뒤쫓으며
클리포드는 위험에 빠지고 마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빨간 댕댕이,
클리포드의 놀라운 모험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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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펜하이머> 메인 예고편
크리스토퍼 놀란이 각본 및 감독을 맡은 영화 '오펜하이머'는 IMAX®로 촬영한 에픽 스릴러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동시에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킬리언 머피가 J.로버트 오펜하이머로, 에밀리 블런트가 그의 아내이자 생물학자 겸 식물학자 캐서린 키티 오펜하이머로 출연합니다. 오스카 수상자인 맷 데이먼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 주니어 장군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창립 위원인 루이스 스트라우스를 연기합니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플로렌스 퓨는 정신과 의사 진 타틀록 역을, 베니 사프디는 이론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역을, 마이클 안가라노는 로버트 세르버 역을, 조시 하트넷은 선구적인 미국 핵 과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역을 맡았습니다. 또한 오스카 수상자 라미 말렉과 오스카 8회 후보에 오른 배우, 작가, 영화제작자인 케네스 브래너가 등장하며, 데인 드한, 딜런 아놀드, 데이빗 크럼홀츠, 올든 에런라이크도 출연합니다. 이 영화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책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저자 카이 버드, 마틴 셔윈)를 기반으로 하며, 엠마 톰슨, 아틀라스 엔터테인먼트의 찰스 로벤,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IMAX® 65mm 및 65mm 대형 필름의 조합으로 촬영되었으며, 최초로 IMAX® 흑백 아날로그 섹션이 포함되었습니다. '테넷', '덩케르크', '인터스텔라', '인셉션' 및 '다크 나이트' 3부작을 포함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50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으며 11개의 오스카상과 2개의 최고 작품상을 포함하여 36개의 후보에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