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5-03-07 13:16:22
봉준호 다운 캐릭터가 조화를 이루다
- <미키17>(2025)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우리에게 묵직한 사회적 함의를 던지는 이야기꾼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당시 수사 시스템의 허점을 통해 실체 없는 공포와 무력함을 그려냈고, <마더>에서는 극단적 모성애로 인한 폭주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기생충>에서는 계층 간 격차를 촘촘한 미장센과 인물 구도를 통해 묘사함으로써, 사회학을 전공한 감독 특유의 비판적 시선을 매섭게 드러냈다. 그 연장선 위에서 탄생한 신작 <미키17>은 우주라는 새로운 무대를 빌려, 우리의 현실 속 ‘계급’과 ‘정치’, 그리고 그 이면에 감춰진 인간의 본능을 극적으로 펼쳐 보인다.
영화는 우주 이주 프로그램에 참여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는 자신이 죽을 때마다 기억과 인격을 복제해 다시 깨어나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의 담당자로 설정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에 지원했을 뿐이지만, 반복된 죽음과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미키의 여정, 그의 연약함을 감싸는 나샤(나오미 애키)의 ‘사랑’,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을 악용하는 정치인 마셜(마크 러팔로)의 ‘욕심’이다.
[첫번째 감정] 미키의 두려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감정은 미키가 품고 있는 ‘두려움’이다. 지구에서 엄청난 빚을 지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던 그는, 결국 우주로 도망치듯 떠나는 결정을 내린다.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그를 몰아세웠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실험체나 다름없는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에 덜컥 지원한다. 이때 미키가 제대로 설명도 듣지 않고 서류에 사인을 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려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워 도피한 곳이 하필이면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 구역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미키는 이내 ‘복제’를 통해 계속해서 부활하는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 바이러스 테스트나 우주방사선 노출 실험처럼 잔인한 방식으로 소모되는 모습에서도, 그는 겉으로는 무감각해 보인다. 몸이 망가져 죽으면 또 다른 미키가 깨어나 동일한 기억을 잇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미키에게, ‘살아있음’ 자체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이기도 하다. “기억이 이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가?”
진짜 문제는 미키17이 ‘미키18’을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미키18은 기억과 외형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성향과 태도가 조금 달라 보이는 존재다. 그제야 미키17은 깨닫는다. 죽는 순간 자신이 ‘영원히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복제 기술이 완벽하다 생각했으나, 결국 매번 다른 개체가 나타날 뿐 ‘이전의 나’와 100% 동일할 수는 없다는 걸 체감한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질문을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이 던질 때, 그것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동안 답을 찾기 힘든 이 근원적 공포가, <미키17>에서 인간성을 탐색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두번째 감정] 나샤의 사랑
두 번째 감정은 미키를 헌신적으로 지켜보는 나샤의 ‘사랑’이다. 여러 차례 죽고 깨어나는 사이에서, 미키의 곁을 지키는 건 오직 나샤뿐이다. 그녀는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처럼 끔찍한 질문을 미키에게 묻지 않는다. 죽음의 상처를 굳이 후벼팔 필요 없음을,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감 능력은 미키가 가진 두려움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 만들어주고, 시종일관 곁에서 그를 안심시킨다. 영화 초반에는 이러한 관계가 단순히 ‘연약한 남성을 돌보는 강인한 여성’ 구도로 보일 수 있지만, 곧 나샤의 매력이 훨씬 깊고 다층적임이 드러난다.
특히 나샤는 ‘미키17’과 ‘미키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미키임에도, 성향은 조금씩 다른 두 사람을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을 나눈다. 이중적 존재가 생겨난 불안한 상태에서도, “네가 누구든 사랑하고 지켜주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그녀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이는 단지 연애 감정의 차원을 넘어, 이주 행성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생겨난 새로운 ‘존재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소통으로 품어내는, 그런 태도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테마로 자리한다.
나샤가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이주 행성에서 만난 ‘벌레’ 같은 생명체를 지키려는 결심을 보여줄 때다. 우주정복이나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자원을 갈취하려 드는 정치인 마셜 집단과 달리, 나샤는 ‘이 생명체들도 우리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녀의 시선은 결국 ‘사랑’과 ‘공감’의 확장판이다. 미키를 받아들이듯, 우주 생명체와도 대화하며 공존하려 애쓰는 나샤의 모습에서 우리는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타인(혹은 타종)을 소모하는 행태’에 대한 날 선 비판인 셈이다.
[세번째 감정] 정치인 마셜의 욕심
세 번째 감정은 마셜(마크 러팔로)이 상징하는 ‘욕심’이다. 그는 지구에서 정치적 입지가 별로였기에, 우주 이주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다. 본질적으로 무능력하기에, 늘 아내(토니 콜렛)에게 모든 결정을 위임하는 모습이 반복해서 비춰진다. 사업가이자 정치인으로서 그는 한편으론 교묘하게 대중을 현혹하고, 다른 한편으론 미키 같은 존재를 마음껏 써먹으려 든다. 익스펜더블 프로그램은 이주 중 만날 수 있는 위험에서 유용하게 소모될, ‘하나쯤 없어져도 괜찮은 인력’이라는 발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흥미로운 건, 마셜이라는 캐릭터를 보면 자연스레 한국의 정치 현실이 떠오른다는 점이다. 지지층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뭔가를 해내는 척’ 무대만 만들어 놓은 뒤, 실제로는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능력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권위자에게 줄을 서고 충성을 다하는 이들은 마셜의 비위를 맞춰주며, 그의 온갖 추한 면을 뒤처리한다. 그러나 막상 이주한 행성에서 어떠한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듣기 좋은 연설만 반복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몫의 이득 챙기기에만 급급한 셈이다.
결국 미키와 그 곁을 지키는 나샤, 그리고 우연히 교류하게 된 외계 생명체가 보여주는 ‘공존과 연대’야말로 마셜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힘이 된다. 봉준호 감독은 “작은 존재가 모여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여러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기생충>이 그렇고 <설국열차>도 그랬다. 이번에도 무심코 버려졌던 미키와 외계의 작은 벌레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화’가 정치적 거인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는 우리 사회 속 ‘무능한 리더십’이 불러올 참담한 결과를 예고하는 현실 풍자처럼 보인다.
<미키17>이 담은 봉준호 월드
한편, 마셜과 미키17의 대립을 ‘권력자와 청년 노동자’의 대립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마셜은 지구라는 기존 체제에서 기득권을 꽉 잡고 있던 권력자가 우주로 무대를 옮겨 권위를 재차 행사하는 인물이다. 반면, 빚 때문에 스스로 ‘소모품’ 역할을 떠맡은 미키17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기꺼이 위험한 임무를 감수하는 청년 노동자에 가깝다. 그들은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마셜에게 미키17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착취 구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고용시장과 권력자-피고용인의 위계 질서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봉준호 감독은 어김없이 약자들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부조리를 깨부수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키17>은 반복되는 죽음과 복제라는 소재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 이 질문은 동시대의 다양한 사회문제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흥미로운 건, 지구에서 이 우주로 떠난 이들은 대부분 생존의 위협이나 경제적 압박, 혹은 정치적 이유로 도피해 온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지구를 버리고 떠나온 자들의 새로운 세계에서, 과연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이란, 어디에서건 같은 고민과 탐욕, 그리고 소외 문제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영화가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결코 비관론으로 끝맺지 않는다. 미키와 나샤, 그리고 벌레라 불리는 생명체가 맺어가는 조화로운 관계는 ‘어울림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즉, 서로 다른 존재를 존중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태도가 바로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마셜처럼 권력을 쥔 자들이 제시하는 허황된 미래가 아닌, 작고 연약해 보이는 주체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로버트 패틴슨은 겁에 질려 우주로 피난 온 미키의 불안하고 나약한 면을 능숙하게 표현하면서도, 복제체를 마주하는 장면에서는 절묘한 차이를 두어 미키17과 미키18을 입체적으로 연기한다. 나오미 애키의 나샤는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인물을 섬세하게 그려내, 영화 후반부 ‘복수의 미키’를 모두 감싸 안는 장면에서는 강렬한 감동을 이끌어낸다. 마크 러팔로와 토니 콜렛 커플의 괴이하고 익살스러운 정치 드라마 역시 봉준호 특유의 블랙코미디 감각을 살려내며, 관객들에게 씁쓸한 웃음을 선사한다.
연출 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우주라는 넓은 무대 안에 좁은 계급적 공간을 다시 구축해냈다. 탁월한 미장센과 대사, 그리고 캐릭터 간의 긴장감으로 <설국열차>와 비슷한 계급 구조를 만들면서도, 이번에는 스스로 우주로 나아가는 세계관을 선보인다. 행성 밖 생명체와의 교류라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은, 결국 인류가 고집해왔던 ‘자기중심성’을 깨부수라는 요청처럼 보인다.
결국 <미키17>은 관객들에게 명쾌한 답을 내리기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나 자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죽음’ 자체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공포인가? 그리고 사랑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권력을 쥔 자들의 배신과 무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모든 물음은 비단 우주 이주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 주소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분명하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우주판 기생충’이라 불릴 만한 신선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흥미로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성에서 벌어지는 계급·정치·사랑의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죽음과 복제라는 철학적 소재가 어떻게 감각적인 장르 영화로 변주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미키17>을 꼭 극장에서 만나보길 바란다.
분명 그 안에서,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마주해야 할 근원적 질문들이 당신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나마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꿈꿔보게 될지도 모른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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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해빠진 데자뷔
이 글은 넷플릭스 [광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할 말 많음 주의.
사진출처:다음 영화/윌스미스 씨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해요
원작 살리기 진흥회가 있다면 나 같은 인간은 상무 정도는 했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매번 최악의 작품이라며 언급되는 작품은 안타깝게도 책과 동명의 영화인 [나는 전설이다]. 다행스러운 건, 원작이 책이건 웹툰이건 상관없이 2차 창작물인 영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고통받아야 했던 이 작품에게도 마침내 대관식(?)을 치를 때가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인 것은 이 불명예스러운 행사에 참석해 버린 내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는 점에 있겠지. 어휴, 신이시여.
당당하다 못해 윌스미스가 왕관을 씌워 주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냅다 왕관을 낚아채 머리에 얹어버린 넷플릭스발 작품 [광장]은, [나는 전설이다]가 답습한 두 가지 분노 포인트를 정확하게 표방(?)하고 있다. 하나는 원작의 이름과 모티프를 빌려가 놓고 완벽하게 다른 작품으로 해석해 버렸다는 점과. 원작을 안 보았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결과물이 “그저 그런”수준에 머무르는 작품이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원작을 본 사람이건 안 본 사람이건 가릴 것 없이 화나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가격 비교 사이트에 빠져버린 인간처럼 몇 번이고 원작과의 차이점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데 특효약이 아닐 수 없다. 참내.
사진출처:넷플릭스 공식채널
그렇다면 [광장] 이 첫 번째 분노 버튼인 “어떻게 원작을 본 사람들을 괴롭혔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원작이 가진 많은 임팩트의 지분은 사실 거의 맨 마지막 장면에 있다. 이 점은 이제 어엿한 패배자가 되어 버린(?) 원작소설 [나는 전설이다]도 그러하다. 무려 이 장대한 이야기의 제목을 할애한(혹은 부여한) 마지막 대사(장면)를 위해서. 처음부터 죽자 사자 달리며 쌓아두었던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 가서야 기폭버튼을 누르자 연쇄 다발적으로 터지는 지뢰처럼 사정없이 폭발하고 몰려와서 소위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감정을 맛보게 한다.
이런 경험이, 바로 작품의 제목만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마를 탁 치며 아 명작이지.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포인트이다. 그것은 액션신만 훌륭해서도, 몸값이 엄청난 배우가 나오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능력뿐만 아니라 터뜨려야 하는 지점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미친(positive)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렇다. [광장]은 실패한 각색과 디렉팅의 결과 한가득한 작품이며 원작에서 기대했던 그 어떤 것도(남기석 미모 제외) 눈앞에 가져오지 못한다.
사진출처:넷플릭스/남기석 씨.. 아 아니 아니 이준혁 씨 고맙습니다.
인물의 ”싱크로율‘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웹툰의 첫 회만 보더라도 기준(소지섭)의 분위기가 원작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챌 것은 분명하며, 앞서 말한 기석을 제외하고서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을 만큼 닮았다고 느낄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안타깝게도 기석은 넷플릭스가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페이지에도 특별출연이라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아주 잠깐만 등장하는 인물에게 극의 포커스마저 빼앗기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또한 김 선생(차영도, 차승원)의 등장에 대해 짚어보자면. 원작에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아님), 최근 차승원이라는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너무 겹치는 점이 많아서. 광장의 어느 한 장면에서라도 흐음... 서영락 대리.라고 말한다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 배우의 입장에서는 제2의 가능성을 타진해서 만들어진 캐릭터임에는 틀림없으나, 잘 묻어난다거나 연기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연달아 이런 캐릭터로 출연하는 작품들을 접하다 보니 그다지 차별점이 느껴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진 출처:보그 코리아
그렇다면 원작을 감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연 이 작품이 좋은 작품으로 남을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당연히 나의 대답은 아니오. 에 가깝다.. 가 아니라 그 대답 밖에 할 수가 없다.
우선 장르적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은퇴한 실력자와 관련된 모든 것, 그러니까 가족이라던가 옆집 꼬마라던가 강아지나 차 기타 등등, 을 건드리는 바람에 줄초상이 나는 영화는 이미 여러 버전으로, 게다가 유니버스 구축까지 잘 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마저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한 총격전으로 가득하다.
그런 쪽으로 이길 수 없다면 스토리의 진행이라도 긴박해야 할 텐데 금쪽이 구준모(공명)가 시리즈중반부에서 생을 마감한 후에는. 긴장감의 급격한 감소는 물론, 김 선생과 금손(추영우)의 지분 싸움으로 파워게임의 시프트가 이뤄진다. 그로 인해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미간 사이에 주름만 잡은 채 겨우 걸어 다니는 듯한 기준(소지섭)의 존재감은 그의 빛났던 명성에 비해 너무도 하찮게 뒤켠으로 밀린다.
그 결과 기준이 한껏 폼을 잡으며 자기가 시작한 일이라는 대사를 내뱉을 때마다 자의식 과잉이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은 물론, 진부하지 않은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던 마지막 회에서는 내가 이 시리즈에 줄 수 있는 마지막 관심은 끊이지 않는 헛웃음뿐이었다.
사진 출처:보그 코리아/허준호 배우 만세
영화가 원작과 전혀 다른 작품이 되어 버렸다면, 애초에 원작과 같은 제목(까지는 봐준다 치고)이나 모티프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원작에 대한 집착을 떼어놓고 작품을 만든다 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최선이었을지. 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에 남는다.
제작자는 그 두 가지 계약에 대한 약속을 모두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나는 흔해빠진 데자뷔로 잔뜩 점철된 시리즈 한 편을 눈앞에 둔 채 감흥 없이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이 글의 TMI]
1. 게다가 소지섭은 그렇게 얻어맞고 찔리고 심지어 총알 세례(?)까지 받는데 죽지도 않음.
2. 그리고 그렇게 목을 찔리면... 말을 못..... 기도(air way)가 식도보다 앞에 있어....
3. 놀랍게도 나는 가톨릭 신자다. 안 믿기겠지만 어쩔 수 없지(나도 안 믿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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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할 수 있는가
6★/10★
자기만의 방.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도 돌볼 필요 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가족과 함께 사는 여성들이 여간해서는 갖기 어려운 공간. 〈다섯 번째 방〉은 카메라를 든 딸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성이 집, 공간, 가족과 맺는 관계를 위태로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가족 고백과 함께 드러내 보인다.
딸(감독)은 조부모 때부터 50년간 산 2층 주택에서 자랐다. 엄마가 할머니의 양보로 집에서 가장 넓은 안방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빠가 사업이 망한 후 일용직으로 근근이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엄마가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서 안방으로 옮긴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얻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마는 집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사노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서 가사노동은 분담되지 않고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여겨진다. 프리랜서 상담가, 강사로 일하는 엄마는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 때문에 업무를 준비할 때조차 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늘 ‘얹혀사는 사람’,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 느꼈다. 집의 주인이자 (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할머니 명의로 된 집이 언젠가는 부부의 집이 되리라는 믿음이 엄마를 버티게 한다. 엄마에게 집의 상속은 단순히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 됨과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 나아가 오랜 시간 시부모를 모시고 가족을 부양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무너진다. 감독의 고모이자 엄마의 시누이 중 한 명이 할머니에게 집의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재 사는 집에서는 평생 ‘나’로서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엄마의 불안이 증폭된다.*
자기만의 방을 향한 엄마의 여정이 본격화된다. 모든 가족이 쉬이 오가던 안방 대신 2층으로 올라가 작업실을 꾸리는 것. 그러나 층의 분리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아빠는 이전처럼 수시로 엄마의 작업실에 드나들고 엄마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할머니가 가꾸는 2층 텃밭 한편에 허브를 심는 것조차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엄마에게서 결혼 후 쭉 살아온 집이라는 공간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엄마는 어느 순간 판단을 내린다. 이 집에서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다고.
1층 구석의 첫 번째 방, 경제력을 획득한 이후의 두 번째 방(안방), 작업실로 꾸민 세 번째 방(2층 방)에 이어 빌라로 이사해 네 번째 방을 마련하는 엄마.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짐에 여러 살림살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엄마가 단순히 상담실만 꾸리기 위해 빌라로 온 것 같지는 않다. 때때로 폭력적으로 구는 아빠를 달래고 중재하는 일에 지친 엄마는 직업 활동뿐 아니라 가족을 돌보고 중재하는 데 소모된 자기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네 번째 방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자기만의 방으로서 다섯 번째 방이 제시되지 않는 이유는 다섯 번째 방은 앞으로 엄마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방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서사는 오래됐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화두일 공간과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허나 더 흥미로웠던 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맡은 역할이었다. 영화의 빌런은 명백하다. 물질적, 감정적으로 엄마에게만 기대면서도 때때로 폭력적으로 굴고 엄마의 직업적, 인격적 경계를 수시로 침범하는 아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딸인 감독이 담아낸다. 집의 상속 지분을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모에게도 물려준다고 선언하는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엄마, 장인어른의 장례식장에서 만취해 다른 가족과 다툼을 벌이는 아빠를 다그치는 엄마, 가족회의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빠에게 그의 폭력적인 모습을 성토하는 순간 등등에 감독과 카메라는 함께 존재한다. 그가 카메라를 든 감독인 동시에 가족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는 수동적, 객관적 관찰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딸과 카메라는 하나가 되어 기록하는 동시에 개입한다. 딸/카메라는 엄마를 응원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는 어렵다. 영화에는 거칠게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하는 일에 대한 딸/카메라의 고민이 묻은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건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말다툼하는 아빠의 모습을 찍은 촬영본을 아빠에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빠는 그 장면을 보며 멋쩍게 웃으며 ‘네 영화에서 난 항상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딸/카메라가 아빠에게 객관적 성찰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딸/카메라에 영향받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다음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 매 단계에 딸/카메라가 함께한다는 데서 가족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엄마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을 거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딸/카메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아빠에게 성찰을 촉구하며,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촉진한다. ‘관찰하기만 하는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가 행위자 역할을 한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카메라의 역할과 능력에 관한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줄 영화다.
*고모의 생각과 입장도 궁금하다. 엄마가 집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는 데에는 남편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세 딸 중 한 명이 부모에게 집에 대한 권리 중 일부(25%)를 요구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이기만 할까 싶었다. 가부장적 가족관계, 상속 관계에서의 을들의 부딪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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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절대 미화되지 않을 기억
제75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공동 수상에 빛나는 '루카스 돈트' 감독의 매우 사적인 기억에 가까이 다가가볼 수 있는 영화 <클로즈>는 성정체성을 다룬 작품 <걸>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이번에도 역시 사회가 강요하는 틀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렇지만 너무나도 보통의 인물을 이야기한다.
작품의 배경이자 루카스 돈트 감독의 출신지인 벨기에는 2003년, 네덜란드에 이어 두 번째로 동성혼 합법화를 이뤄낸 국가이다. 인식은 제도를 뒤따르기 마련이고, 해당 제도가 갖춰진 지 약 20년이 흐른 현재 벨기에 국민의 82%가 동성혼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편견은 존재하며, 동성결혼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동성애에 관해선 거부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클로즈>는 꽃이 만개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두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치 박찬욱 감독의 작품 <아가씨>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들판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의 해방감이 느껴지는 두 소년의 질주는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을 것 만큼 강인하며 아름답다. 이렇게 서로가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이던 두 소년은 새 학기가 시작됨과 함께 사회의 그릇된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문제될 건 없지만 이상하다는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또래 아이들의 말과 행동은 칼이 되어 이 둘의 관계를 조각내고, '레오'를 고정관념이라는 틀 안으로 밀어넣고 만다. 그렇게 레오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아이스하키를 하는 등 사회가 남성적이라 규정하는 것들에 몰두하며 래미를 자신의 울타리에서 몰아내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래미의 세상은 무너져 내리고, 관계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청소년기의 한 소년의 삶도 함께 무너져버리고 만다. 레오는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에 나가고, 아이스하키를 하며 일상을 유지하려 하지만, 전혀 괜찮을 리 없는 레오는 다른 사람의 등을 보는 순간 감춰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고 만다.
한때 자신의 전부였던 친구는 떠났지만, 레오는 이 추억을 그대로 안고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끝자락에 레오가 혼자 들판을 달리는 장면에선 초반 들판씬에서 느껴지던 해방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잠시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레오'의 모습을 통해 이 소년이 잔혹한 세상을 결국 살아낼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질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갖고 결국 살아낼 것이며, 세상의 수많은 '레오'들 역시 살아내리라.
루카스 돈트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 2022 | 104min | DCP | Color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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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서치
더 서치
체첸을 침략한 러시아 군인의 만행과 체첸 사람들의 고통, EU 인권위원회 조사원의 이야기를 엮은 영화. 영화의 배경은 2차 체첸전쟁이지만, 이야기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1차 체첸전쟁에 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체첸공화국'은 아직 정식 국가가 아니어서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조지아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러시아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체첸공화국은 조지아와 국경을 맞댄 러시아 영토의 작은 부분이다. 인구도 적어서 불과 130만 명 정도이고 인구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고 있다. 이들의 종교로 알 수 있듯이, 체첸인은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속했었는데, 1830년 이후 러시아군이 오스만트루크와의 분쟁을 이유로 체첸 지역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1859년, 러시아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다.
체첸인은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고, 그 역사는 무려 6천년이 넘는다고 한다. 주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고, 소수민족이어서 이들이 독립국가를 만들 기회와 힘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연방공화국(쏘비에트)가 탄생하면서 체첸도 쏘련연방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1991년, 쏘련 연방이 붕괴하면서 1993년, 새로운 연방법에 근거해 '체첸 공화국'이 되었다.
쏘련 연방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1년, 체첸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전 쏘련군 장군인 조하르 두다예프였다. 그는 체첸공화국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내전에 휩싸인다. 체첸에는 독립 지지 세력과 친 러시아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이들이 내전을 일으킨 것이다. 이 내전을 계기로 러시아는 체첸에 병력을 보내게 되고, 이것이 1차 체첸전쟁의 시작이다.
1994년,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한다. 러시아 입장에서 체첸은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되는 작은 지역이고, 군대를 보내면 곧바로 싸우지도 않고 승리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의외로 1차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다. 이와 관련한 영화로 '연옥', '전쟁' 등을 참고할 수 있다.
1차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약 9만5천여 명이 참전했고, 체첸군은 4만명 정도였다. 러시아가 체첸을 얕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러시아군은 6천 명 가까운 전사자가 나왔고, 체첸군은 훨씬 많은 1만 5천명 정도가 전사했다. 하지만 이보다 체첸 민간인이 약 10만 여명 사망한 것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쟁은 1996년까지 이어졌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러시아군이 철수한 것으로 미루어 체첸군의 승리라고 해도 좋은 전쟁이었다.
2차 체첸전쟁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저지른 테러로 촉발되었으며, 1999년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이 다게스탄 공화국 국경을 침범하고, 러시아 영토에서 테러를 저지르자 러시아군은 1999년 9월 23일, 체첸을 공격했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시기, 1999년 가을, 러시아군이 체첸을 습격한 이후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가는데, 아홉살 소년 하지, 러시아군인 니콜라이, EU 인권활동가 캬홀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린다.
러시아 군인들이 체첸인을 심문하고 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평범한 주민에게 테러범이라며 시비를 걸던 러시아 군인이 갑자기 총으로 두 사람을 살해한다. 그리고 젊은 여성을 끌고 사라진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한 러시아 군인의 비디오 카메라에 담긴다.
아홉살 하지는 집안에서 창문을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본다. 부모님이 러시아 군인의 총에 맞아 죽고, 누나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집에는 갓난 동생만 있을 뿐이다. '하지'의 상황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도 내전을 겪었고, 하지와 같은 수만, 수십만 명의 어린이가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는 갓난 동생을 안고 집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길을 걷다가 러시아 군인이 보이면 몸을 숨긴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동생을 돌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지는 어느 집 앞에 동생을 내려 놓고 떠난다.
니콜라이는 러시아의 평범한 청년으로, 사소한 일로 경찰에 체포된 후 강제로 입대한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폭력조직이고, 폭력적인 인간들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니콜라이처럼 어리고 순진한 청년이 군대에서 당하는 폭력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자신도 폭력적 인간으로 변하는 것이다.
니콜라이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한 청년은 결국 자살한다. 부대장은 자살한 신병의 죽음도 '전투 중 사망'이라고 거짓 보고를 하는데, 이런 거짓과 기만, 폭력은 러시아 군대의 일상이다. 니콜라이는 전투 중 사망한 군인을 옮기고, 사망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다 전투요원으로 전출되어 체첸으로 향한다.
그 사이 니콜라이는 선임병들에게 심하게 폭력과 모욕을 당하고, 이런 경험으로 니콜라이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캬홀은 EU 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난민대피소로 몰려드는 체첸인을 대상으로 그들이 러시아군인에게 당한 폭력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범죄는 시대를 불문하고 군인보다 민간인에게 더 참혹하고 잔인한 피해를 안긴다. 전쟁은 인류가 가진 폭력성, 야만성, 악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현상이며, 원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쟁은 인간을 가장 참혹하게 만든다.
캬홀은 그런 전쟁범죄를 기록하고, EU 인권위원회에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지만, 정작 각 나라의 대표들은 캬홀이 말하는 심각한 전쟁범죄를 듣는둥 마는둥 하는 태도를 보인다. 전쟁은 결국 강자의 논리대로 흘러가고, 인권을 부르짖어도 그것은 형식적인 과정일 뿐이라는 걸 보여준다.
캬홀과 하지는 우연히 만나 함께 지낸다. 그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던 하지의 누나는 살아서 돌아와 하지가 어떤 집에 놓고 간 막내를 찾고, 하지를 찾아 나선다.
체첸은 러시아에서 분리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전쟁에 휘말렸다. 그들의 명분은 이해할 수 있지만, 소수민족이 겪는 슬픔과 고통이 독립한다고 사라질 것이며, 독립이 원하는대로 될 것인지, 현실적인 상황과 해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체첸 지도부는 분명 이 점에서 성급했다.
결국 수십만 명의 체첸인들이 죽거나 다치고, 아이들은 고아가 되었으며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체첸의 경험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다 겪었던 역사였고, 지금도 분단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체첸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우리는 남북한이 대치하고, 항상 전쟁의 위협 속에 살지만, 결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전쟁을 하는 순간, 남북한은 공멸하고 주변국들만 박수를 치며 좋아할 것이다. 체첸처럼 소수민족들이 세계에는 많고, 그들의 고통과 고난은 쉽게 끊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수민족은 아니지만, 약소국가에서 이제 조금씩 힘을 갖춰가고 있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영화는 그나마 희망을 말하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그들에게 미래는 희망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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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괴물화의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이유
넷플릭스 최고 히트작 중 하나, <스위트홈>.
내가 평상시 선호하는 장르(잔인함+ 폭력성+공포/ 크리쳐물)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왜 그렇게 <스위트홈>에 열광하나"하는 궁금증에서 올해 초 정주행을 시작했고, 그 여정은 2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편당 50분 정도의 분량이었지만, 체감상 10~20분 정도 되는 것처럼, 그야말로 '순삭'이었다.
이렇게 평상시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장르에 푹 빠진 것도 참 드문 체험이다.
<스위트홈>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전제들!
'정체불명의 원인으로(욕망으로 추정) 괴물화가 되가는 사람들'
누가, 왜 괴물이 되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욕망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그 욕망이라는 것도 비구체적이다. 욕망이 없는자가 있겠는가.
절망, 좌절을 심하게 겪은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작품 속에서 정말 멀쩡해보이는 사람도, 차분하고 의롭고 냉정해 보이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괴물이 된다. 아무 이유없이. 아무 맥락없이. 허무하게.
(그러고보니, 긴급속보를 발표하던 대통령도 생방송 중에 갑자기 괴물이 된다.)
<스위트홈> 속 괴물들 1
<스위트홈> 속 괴물들 2
결국, <스위트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 세계관은 이것이다.
괴물이 되는 자와 여전히 사람으로 남은자 간의 '차이점'이 없다.
모두가 '잠재적 괴물'이다. 누구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너도. 나도.어떤 블로그 리뷰에서, <괴물화가 되는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이 이 작품의 논리적 허점>이라고 쓴 것을 보았다.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괴물화가 되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괴물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은 절대 "괴물"이 안될 것이라 자신할 수 있는가.
별거 아닌 일에도, '나 지금 피곤하다, 나 지금 힘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물같은 모습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올 때가 있다.
특히 아이를 키우며 더 그렇다.
나에게도 "나쁜 어른, 나쁜 부모"의 모습이 종종 튀어나온다.
나도 모르게 아이를 대하면서 "괴물"같은 모습이 되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닌 일에 소리지르고 화를 내며 윽박지른다. 내가 힘들다는 핑계로.
뉴스 속 괴물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어" 라고 욕을 하면서,
나와 그 사람들을 구분지으면서, '에이,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하면서,
나는 괴물이 아닌 것처럼, 나는 마치 "성숙한 어른"인 것처럼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스위트홈> 속 '괴물'보다 더 악질인 '인간들'
<스위트홈>에도, 괴물보다 더 괴물같은, 진짜 악질 인간들이 등장한다.
여전히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나 그 속은 더이상 사람이 아닌 괴물들.
<스위트홈>에 내가 끌렸던 이유를 이해했다.
원인불명의 괴물화에 수긍한 이유.
'나'도 언제든 '괴물화'가 될 수 있으니까.
<스위트홈> 메인 주인공 '현수'는 '특수감염인'으로 분리된다. 괴물이 되긴 되었는데, 다른 괴물과는 달리 여전히 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는 존재! 괴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괴물의 무시무시한 힘과 사람의 자제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특수감염인.
나 역시 특수감염인이 아닌가.
코피를 쏟고 있는 특수감염인 '현수'
현수는 괴물이 되기 기전 폭포수 같은 피를 쏟는다.
'코피'는 중요한 상징이다. 코피가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은 그 사람이 '괴물화'가 되고 있다는 전조증상이다. 일종의 신호다. '너 곧 괴물된다!'
쏟아지는 코피를 보며 자신이 괴물화가 되고 있음에 충격을 받은 <스위트홈> 속 등장인물
특수감염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괴물이 될 때 '코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스위트홈> 속에서 주인공 현수가 '특수감염인'인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이, 현수를 방출할 것인지 남길 것인지 '투표'하는 장면은 참 의미심장하다.
현수를 방출할지 말지 투표하는 생존자 주민들
특수감염인 현수를 추방할 것인가 우리와 함께 지내게 할 것인가.
무서워서 당연히 현수를 방출시키자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으나, 그 결과는 의외였다.
팽팽한 접전! 추방시키자는 사람들, 남기자는 사람들이 반으로 나뉜다.
다들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도 언제든지 괴물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괴물은 무섭고 내쫓고 싶지만, 한편으로 그 내쫓겨지는 것이 언제든 내가 될 수도 있으니,
쉽게 내쫓지도 못하는 것이다.
누군가 갑자기 폭포수 같은 코피를 쏟아내면, 주변 사람들은 '저 사람도 괴물화가 되고 있군!'을 알아채고 겁을 먹겠지만, 사실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코피'를 쏟아내고 있는 중일지 모른다.
<스위트 홈> 살아남은 주민들은 괴물화가 되고 안되고의 여부를 떠나, 모두 자기만의 치부를, 자기만의 약점을, 자기만의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자국을 남긴다. 코피처럼 당장에 눈에 확 드러나는 자국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자국을 남기고야 만다. (신체적 언어적 폭력을 가하거나, 상대방에게 양보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 하거나, 상대를 근거없이 의심하고 비방하는 등의 모습들..)
그 코피 만큼이나 빨갛고, 선명하고, 무섭고, 자국이 강하게 남아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무언가를, 밖으로 쏟아내면서 그것이 괴물화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 수도.
나는 괴물이 아니라고, 괴물과 다르다고,
괴물과 나를 구분지으며, 내 코피를 슬쩍 슬쩍 닦아내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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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벽은 문이다.
이 글은 2023년 11월 1일 개봉 예정인 영화 [앵그리 애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세요.
말하기 힘든 것들을 입에 담아야 할 때가 있다. 게다가 그 주제가 금기에 가까워 혼잣말하는 것조차 천둥같이 울릴까 봐 움찔할 때가 있다.
영화 [앵그리 애니] 속 여성들의 고개도, 목소리도 한껏 바닥에서만 맴돌게 하는 그 "힘든 것"은 바로 낙태이다. 시행하지 않으면 현재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를 향한 암묵적인 동의에도 불구하고 쉽게 입술을 열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녀들에게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코트까지도 어깨 위에 하사한다.
그들의 굽은 어깨에 손을 얹어준 것은 생소하기 짝이 없는 MLAC(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 단체였다. 뜨개질바늘로 이뤄진 애니의 이전 낙태가 잘못되었으며 안전하게 이뤄져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다독여주는 통에. 애니는 걷잡을 수 없이 자신을 휘감던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따스한 손길에 마음을 녹인다.
여전히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두 번째 낙태 수술을 끝낸 애니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담은 눈물을 흘리며 그제야 미소 짓는다. 마치 축배를 올리듯 MLAC운동가들이 건넨 물을 마시며.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아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는. 그리고 그 변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자신처럼 임신 중절 수술을 받다 사망한 자신의 이웃 때문이라는 것도. 자칫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었던 그녀의 죽음 앞에서, 황망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느꼈던 애니는 좌시하지 않기로 한다. 아직 두려워 완전히 쳐다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저 벽을.
애니, 벽을 바라보다
사진 출처:씨네랩/다음 영화
애니는 고개를 빤히 들어 자신이 마주한 벽을 바라보았다. 등 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온전히 벽을 쳐다보기 까지도 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한다 했건만. 큰 용기를 가지고 마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벽은 바람 한 조각조차 통과하지 못할 것처럼 매정해 보였다.
자신이 직접, 그리고 혼자서 벽을 부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문에 잔뜩 끼어 있는 이끼라도 제거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문득 들었다. 마치 자신이 중절 수술을 받을 때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불러주었던 운동가처럼. 애니는 MLAC를 찾아오는 여성들의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투박한 손을 조용히 얹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중절을 원하는 그녀들은 하나같이 임신이란 문제에 있어서 가장 불안한 주체였으며. 죄책감마저도 오롯이 홀로 짊어진 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수많은 자기 검열을 뚫고 MLAC단체의 문턱을 어렵게 넘어섰다 해도, 그녀들은 최후의 순간에 종교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며 죄악이라 하거나, 그냥 낳겠다며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애니는 그녀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겁쟁이라며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이 모든 모습은 애니가 여성운동에 참여하기 전의 모습과도 정확하게 일치했고.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이런 모습이야 말로 자신이 마주해야 할 벽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토록 간단하고 별 것 아니었냐는 말과 함께 수술 후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는 여성을 보며. 애니는 깨닫는다.
결국 자신을 비롯한 모든 여성들을 떨게 했던 것은. 이 벽자체가 아니라 벽보다 더 큰 두려움을 자아내는 덕지덕지 붙은 이끼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끼 따위 제거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으려나.라는 일말의 의심마저도 말끔히 지운채. 애니는 이끼가 사라져 본모습을 볼 수 있게 된 문과 눈을 맞추며 되뇔 수 있었을 것이다.
바꿀 수 있다.라고.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해야만 할 때
사진 출처:씨네랩/다음 영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벽을 똑바로 바라본다 하여 무너져 내린다면. 목표를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테니까.
무엇보다 영화 속 여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그녀들의 남편들의 모습과도 같았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묻지도, 그렇다고 알아채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지레짐작으로 새 모카포트를 선물하는 무심함. 자신의 아내를 감시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눈먼 강경함. 그녀들이 하는 일 따위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무시에 더불어 여전히 수술의 주체인 여성들이 조금은 논의에서 빠져있는 듯한 안일함까지.
출산과 더불어 또 한 번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수술 앞에 싸우면서도. 애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양립할 수 없으면서 자신의 옆에 악착같이 붙어 존재하는 것들이 일으키는 마찰을 감당해야 했다.
비록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영화 속 애니의 선택에 대부분 박수를 보낼 수는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으며, 욕심을 내지 않았다. 흔히 이런 상황에서 비유되곤 하는 "외줄 타기"같은 현실에서. 애니는 이 좁고 험난한 길을 끝까지 걸어가기 위해 떨어뜨려야 할 것이 있다면 기꺼이 손에서 놓아버렸다. 자유낙하하며 자신과 멀어져 가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만을 마음속에 꼭 안은 채. 그녀는 다시 턱을 들어 길을 걸었다.
또한 이 과정 속에서 그녀는 알게 되었다. 손에 쥐어진 것이 불필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잘만 이용한다면 자신의 위태로움을 좀 더 잘 들여다보고 자세를 바로 잡을 기회가 된다는 것을.
마치 벽이 와르르 무너지기만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문이 되어 기꺼이 열고 다음 세계로 입장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식사, 다른 마음.
사진출처:씨네랩/다음 영화
영화 속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의무감에 불타올라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고. 당장 국회로 뛰어들어가 감정으로 호소하며 큰소리치지도 않는다. 비장한 음악을 깔며 어떤 이의 희생 앞에 눈물을 짜내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신격화해서 그 사람의 이름이 지구 밖에서도 들릴 것처럼 칭송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현재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을 용기 내어 남들 앞에서 꺼내 입 밖으로 내뱉는다.
또한 온전히 옳은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극의 중간중간 들어차 있는 토론들과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녀들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영화와 거리를 두게 되는 장면들도 있다. 옳음이라는 큰 갈래에서는 동의하지만, 소소한 것들에서 부딪치는 장면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영화는 소위 "극적인"요소들을 배제함으로써 현실감을 더하고. 현실 속에서 극복해야 하는 진짜 문제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물들에 대한 미움이나 반감이 생기기보다, 완벽하지 않고 흔해 빠진 "애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현 문제에 대해 화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으며. 연대를 형성해 힘을 보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임신 중절수술을 마친 후 함께 파스타를 나눠먹는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영화 [친절한 금자 씨]에서 거사 후(?) 케이크를 나눠먹는 장면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앵그리 애니의 식사 장면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가장 큰 다른 점이라 한다면. 자율성과 음식을 먹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 감독님은 그 장면이 제사 후에 음식을 나눠먹는 의식 같은 장면이라고(+그 케이크 혈액으로 만든 거 아님)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사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자율성이 조금은 배제되어 보였다. 약간은 입을 닫게 하기 위한 장치도 있었으며 분노를 쏟아내고 난 뒤에 다가온 식사에서도 살아남은 자 들을 기쁘게 하는 식사는 아니었다.(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님.)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식사 장면은 누군가를 기리는 것이 아닌 앞으로 자신을 위해 든든한 한 끼를 함께 한다는 점. 그리고 자원한 사람들이 모여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희망적이고 든든한 식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파스타 자체는 맛없어 보였다. 제발 뭘 좀 많이 넣어서 먹으라고.)
아주 작고 힘없어 보이는 연대에서 시작된 그들의 웃음이. 조금 더 확대되어 더 많은 사람을 위한 길이 되기를 기대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마치면서
세이브 박지원 대표님, 씨네 21 김소미 기자님
GV에서도 나온 이야기이지만.
나 역시 애니가 마지막으로 했던 선택을 바라보며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
과연 정규 의료인(으로 추정)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이. 근본적으로 애니가 가지고 있던 불만이나 두려움, 혹은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될 가장 확실한 방법일까. 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물론 잘 해낼 것이다.
애니는 영화 속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며, 과격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이니까. 살아남기 위해 앞만 보고 자전거 페달을 밟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주위를 둘러보며 자전거를 타는 그녀를 보며 울컥하고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시작을 앞둔 애니가, 자신을 바꾸고 움직이게 만들었던 계기만큼은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했다. 결국은 조금 더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을 조금 더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또 다른 애니들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되기를.
또한 애니에게도 그러했듯이.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의 모든 벽들이 다시 한번 문이 되기를 빌어보았다.
[이 글의 TMI]
1. 토마토카레에 꽂혀서 토마토 멸종시키는 중
2. 군고구마도 덩달아 씨가 마르는 중
3. 파프리카, 당근도 코끼리처럼 먹어치우고 있다.
4.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저처럼.(걸렸잖아)
#앵그리애니 #블란딘르누아르 #로르칼라미 #프랑스영화 #영화리뷰 #최신영화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영화리뷰어 #씨네랩
이 리뷰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영화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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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우렌의 결혼 - 완성도보다는 힐링과 성장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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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꿈꾸며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연출 ‘승주’. 하지만 현지의 고려인 감독 ‘유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예정된 결혼식을 놓치게 되며 다큐멘터리 촬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연출을 해서라도 다큐를 완성해 오라는 압박을 가하는데... 이때 ‘승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던 ‘유라’ 감독의 삼촌 ‘게오르기’는 가짜 신랑, 신부를 구해서 결혼식을 찍자고 하며 ‘승주’가 신랑 ‘다우렌’이 된다. “지금부터 가짜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다큐 찍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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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선언, 좋았는데 아쉬운 영화
?Rabbitgumi 입니다!
기대를 많이 모았던 작품이죠.
비상선언이 개봉했습니다.
관상, 더 킹, 연애의 목적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신작이죠.
배우진도 화려합니다.
송강호, 전도연, 이병헌, 김남길, 임시완 같은 탑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개봉 후 첫 주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리는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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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컨스피러시>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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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내일 지구가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티저 예고편
[2021년 6월 18일, 넷플릭스 공개]
국적, 다 다르다.
성격, 제각각이다.
외국인 학생들이 모인 한국의 한 대학 국제 기숙사.
이곳에서 그들은 우정을 쌓고, 사랑에 들뜨고, 세상을 배운다.
대부분 엉망진창 뒤죽박죽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