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07-01 07:37:25
카메라는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할 수 있는가
영화 〈다섯 번째 방〉

자기만의 방.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도 돌볼 필요 없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 가족과 함께 사는 여성들이 여간해서는 갖기 어려운 공간. 〈다섯 번째 방〉은 카메라를 든 딸이 자기만의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여성이 집, 공간, 가족과 맺는 관계를 위태로울 정도로 솔직한 자기/가족 고백과 함께 드러내 보인다.
딸(감독)은 조부모 때부터 50년간 산 2층 주택에서 자랐다. 엄마가 할머니의 양보로 집에서 가장 넓은 안방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아빠가 사업이 망한 후 일용직으로 근근이 노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엄마가 집에서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서 안방으로 옮긴 엄마는 자기만의 방을 얻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마는 집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사노동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많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집에서 가사노동은 분담되지 않고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에게 ‘도움’을 주는 일로 여겨진다. 프리랜서 상담가, 강사로 일하는 엄마는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 때문에 업무를 준비할 때조차 일에 오롯이 집중하지 못한다.


엄마는 이 집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도 늘 ‘얹혀사는 사람’,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 느꼈다. 집의 주인이자 (시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을 갖지 못했다. 할머니 명의로 된 집이 언젠가는 부부의 집이 되리라는 믿음이 엄마를 버티게 한다. 엄마에게 집의 상속은 단순히 재산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 됨과 가족의 일원이라는 감각, 나아가 오랜 시간 시부모를 모시고 가족을 부양한 데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무너진다. 감독의 고모이자 엄마의 시누이 중 한 명이 할머니에게 집의 상속 지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현재 사는 집에서는 평생 ‘나’로서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엄마의 불안이 증폭된다.*
자기만의 방을 향한 엄마의 여정이 본격화된다. 모든 가족이 쉬이 오가던 안방 대신 2층으로 올라가 작업실을 꾸리는 것. 그러나 층의 분리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한다. 아빠는 이전처럼 수시로 엄마의 작업실에 드나들고 엄마의 답답함도 점점 커진다. 할머니가 가꾸는 2층 텃밭 한편에 허브를 심는 것조차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엄마에게서 결혼 후 쭉 살아온 집이라는 공간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엄마는 어느 순간 판단을 내린다. 이 집에서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다고.

1층 구석의 첫 번째 방, 경제력을 획득한 이후의 두 번째 방(안방), 작업실로 꾸민 세 번째 방(2층 방)에 이어 빌라로 이사해 네 번째 방을 마련하는 엄마. 영화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엄마의 짐에 여러 살림살이까지 포함된 것을 보면 엄마가 단순히 상담실만 꾸리기 위해 빌라로 온 것 같지는 않다. 때때로 폭력적으로 구는 아빠를 달래고 중재하는 일에 지친 엄마는 직업 활동뿐 아니라 가족을 돌보고 중재하는 데 소모된 자기감정을 지키기 위해서도 네 번째 방을 구한 것으로 보인다. 완전한 자기만의 방으로서 다섯 번째 방이 제시되지 않는 이유는 다섯 번째 방은 앞으로 엄마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의 방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려내는 서사는 오래됐지만 해결되지는 않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화두일 공간과 정체성의 문제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허나 더 흥미로웠던 건 영화에서 카메라가 맡은 역할이었다. 영화의 빌런은 명백하다. 물질적, 감정적으로 엄마에게만 기대면서도 때때로 폭력적으로 굴고 엄마의 직업적, 인격적 경계를 수시로 침범하는 아빠. 그런 아빠의 모습을 딸인 감독이 담아낸다. 집의 상속 지분을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모에게도 물려준다고 선언하는 할머니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엄마, 장인어른의 장례식장에서 만취해 다른 가족과 다툼을 벌이는 아빠를 다그치는 엄마, 가족회의에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아빠에게 그의 폭력적인 모습을 성토하는 순간 등등에 감독과 카메라는 함께 존재한다. 그가 카메라를 든 감독인 동시에 가족의 딸이기 때문이다.

이때 카메라는 수동적, 객관적 관찰자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딸과 카메라는 하나가 되어 기록하는 동시에 개입한다. 딸/카메라는 엄마를 응원하지만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하기는 어렵다. 영화에는 거칠게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공개하는 일에 대한 딸/카메라의 고민이 묻은 장면이 종종 나온다. 특히 인상적인 건 장례식장에서 엄마와 말다툼하는 아빠의 모습을 찍은 촬영본을 아빠에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빠는 그 장면을 보며 멋쩍게 웃으며 ‘네 영화에서 난 항상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딸/카메라가 아빠에게 객관적 성찰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딸/카메라에 영향받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다음 방을 찾아 나서는 엄마의 여정 매 단계에 딸/카메라가 함께한다는 데서 가족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엄마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을 거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딸/카메라는 엄마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아빠에게 성찰을 촉구하며, 엄마가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촉진한다. ‘관찰하기만 하는 카메라’가 아닌, 카메라가 행위자 역할을 한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서사의 동력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카메라의 역할과 능력에 관한 유의미한 참조점이 되어줄 영화다.
*고모의 생각과 입장도 궁금하다. 엄마가 집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믿는 데에는 남편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세 딸 중 한 명이 부모에게 집에 대한 권리 중 일부(25%)를 요구한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이기만 할까 싶었다. 가부장적 가족관계, 상속 관계에서의 을들의 부딪힘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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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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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이 만든 관계의 변수들
우리는 무심코 상상한다. 로또에 당첨되면, 당장 떠날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떨지. 생각은 여기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어 온갖 곳을 들렀다가 현실로 돌아온다. 이런 우연은 내게 벌어질 수 없다고. 어쩌면 영화 <우연과 상상>에서 하는 이야기의 출발점도 이와 비슷해 보인다. 초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게 조금 다를지언정. 이를 테면 오랫동안 보지 못한 옛 친구와의 재회,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나의 주변인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된 상황 말이다.
상상했던 대로만 일이 벌어지면 자신의 예측 범위 안에서 결말까지 맺어지리라는 착각이 든다. 그러나 여기,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한다. 우연. 우연히 만나거나 우연히 실수하거나 우연히 알아차리거나. 문득 이 우연과 상상을 적재적소에 쓴 넷플릭스 드라마가 떠오른다. <굿 플레이스>. 그 어떤 경우의 수를 만들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연히 벌어지는 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일종의 진리 같은 교훈을 내세우던 드라마였다. 이번 영화는 그보단 교훈적인 메시지를 덜하다고 느꼈다. 그저 일어나는 일을 관망하듯 보여주는 연출 때문인지도 모른다.
옴니버스로 연결된 세 영화를 이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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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세 작품의 전개 방식은 모두 대화였다. 눈에 띄는 건 대부분 두 사람의 대화였다는 점이다. 잠시 세 사람이 맞닥뜨리는 장면도 있기는 했다. 1막에서 벌어진 일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르는 삼자대면이었으니까.
어느 길거리. 그곳에서 주인공 메이코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 촬영에 임한다. 이때 카메라는 한 사람을 유독 보여준다. 메이코의 절친이면서 스타일리스트인 츠구미. 그렇다. 이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촬영을 마친 둘은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주제는 츠구미가 최근에 우연히 만난 남자.
츠구미는 그의 이름을 메이코에게 말하는 대신 애칭 같은 호칭을, 첫 만남에 가진 느낌을, 자신의 연애관을 들뜬 눈으로 조잘거린다. 종종 진지한 눈빛을 제외하고 츠구미는 내내 웃기만 했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그런 모습을 보는 메이코의 눈은 오묘하다. 츠구미와 눈을 맞출 땐 마주 웃지만, 츠구미가 말하느라 메이코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 혹은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적을 때 혼자 골몰한 표정을 짓는다.
관객 입장에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연애담,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연애담을 듣는 게 썩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컷 전환도 얼마 없고, 그마저도 어둡고 꽉 막힌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이때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바깥의 풍경과 빛, 마냥 좋아하는 츠구미와 이상하게 음침한 츠구미의 대조가 새로운 몰입을 불러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말이 밝혀진다. 그런데 아주 명확히, 원인에서부터 결과까지를 보여주는 게 아니다. 두 사람의 대화로 관객은 추측할 뿐이다. 예전에 메이코와 남자가 만나는 사이였고, 메이코가 바람을 피웠고, 남자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불쑥 찾아온 메이코를 뿌리 치려 하지만 메이코의 이런저런 말에 결국 시인한다. 여전히 메이코를 사랑한다면서.
이 대목은 <결혼 이야기>의 격렬한 싸움 씬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표현의 폭이 그들만큼 크지 않았으나, 사무실을 맴돌며 계속 위치를 바꾸는 메이코와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남자의 모습이 연출적으로 닮았다고 느꼈다.
파국으로 치달을 듯한 이야기는 의외의 끝을 맞이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세 사람. 메이코가 남자와의 관계를 다 밝히고, 츠구미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친구를 잃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이건 다 메이코의 상상이자 예측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메이코는 무난한 선택을 한다. 두 사람을 응원하며 자리를 비켜주기로.
이때 1막의 제목을 다시 본다. 마법 혹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보통 사랑은 마법 같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랑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 있을까. 보이지 않는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가장 좋은 것이라 명한다고 한들 끝에 다다를수록 질척이고 지저분하다. 끝을 기점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해도 잘 모르겠는 것이다. 나의 상상과 상대의 상태가 같을지. 이번엔 다를지. 알 수 없기에, 메이코는 알 수 있는 것을 택했다.
2막. 문은 열어둔 채로
가장 불쾌한 감상이 남은 2막이다.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오는 동기인 사사키와 파트너를 맺으며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미 결혼한 데다가 아이까지 있는 나오이기에 옳은 선택과는 거리가 멀다. 사사키도 이 사실을 알고 대놓고 약점으로 부리진 않지만, 학교에서 누구 하고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는 나오의 쓸쓸한 마음을 이용하려 든다.
바로 자신의 앞 길을 막은 세가와 교수의 명성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일. 정확히는 사사키가 그토록 피해자 행세를 할 일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른 교수들이 그러하듯 편의를 봐줄 거라는 생각으로 학점을 이수할 최소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융통성이나 동정심 있는 사람에게 통했을 부탁은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문을 활짝 열어두는 세가와 교수에겐 말짱 도루묵이다.
사사키의 머릿속에서 나온 방법은 나오를 이용 해서 세가와 교수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더럽고 옳지 않은 사람임을 녹음본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사키의 부탁대로 나오는 담당 교수인 세가와를 찾아 가 그의 신간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책 구절이 참 좋다며 몇 페이지를 천천히 낭독하며, 나오는 문을 스리슬쩍 닫는다.
그런 나오에게 다가온 세가와 교수는 문을 다시 열고 남은 문장을 마저 듣는다. 사사키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진 것 같을 때, 나오는 자신이 하려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힌다. 세가와 교수는 그에 분노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흥분한다. 낭독하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소장하고 싶었다며. 나오는 이상한 조건을 건다. 책 전체를 낭독해서 이메일로 보내는 대신 그걸 들으며 자위를 해달라고.
둘만의 비밀처럼 끝날 것 같던 일은 나오의 실수로 끝이 난다. 아이의 말에 대답을 해주며 이메일 수신인을 적다가 학교 관리인의 계정으로 잘못 보낸 것이다. 어찌어찌 사사키의 바람대로 세가와는 어그러졌다. 나오까지 수렁텅이에 들어간 건 예상 못했겠지만, 그건 사사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둘. 사사키는 버젓이 잘 살고, 결혼까지 앞둔 상태다. 나오는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피곤한 하루를 버틸 뿐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만 보일 수 있는 치기일까. 혹은 불륜의 굴레인가. 나오는 사사키에게 입을 맞추고 버스를 내린다. 이제 대학생 때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나오의 복수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3막. 다시 한번
꼭 다시 보고 싶은 사람과 우연히 만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3막이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던 나츠코는 건너편에서 올라가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다급하게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그를 뒤쫓는다. 20년 만에 만난 동창생, 아야를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꼭 맞잡은 둘은 부산스레 대화를 잇는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느라 도쿄에 들린 나츠코와 가정을 꾸린 아야. 아야의 초대로 둘은 아야의 집에서 대화를 마저 하기로 한다. 고등학교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무언가를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던 나츠코. 그러다 속마음을 드러낸다. 자신이 아야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20년.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시기인 만큼 애처로움이 가중될 것 같을 때에 사실이 밝혀진다. 아야는 아야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둘이 나온 고등학교도 다르고, 아야의 본명도 아야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고 서로 아는 사이로 착각한 것이다. 얼마나 보고 싶은 사람이었기에 똑 닮았다고, 그 사람이라고, 나츠코는 확신에 찼을까.
어정쩡한 기류는 아야의 아들이 들어오면서 뚝 끊긴다. 이제 가보겠다는 나츠코와 역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아야. 엄마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도 아들은 아무 대꾸 없다. 가정 내에서 별 다른 애정을 주고받지 못하는 아야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마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나츠코를 보고도 별 말 못 하고 받아준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둘은 다시, 그들이 처음 만난 지하철역까지 간다. 나츠코는 에스컬레이터를 다시 내려가고, 아야는 육교에서 뒤돌아 걷는다. 둘 중 한 사람이 용기를 냈으면 하는 마음이 그득해질 무렵, 나츠코가 처음에 그러했듯 등 돌려 걷는 아야에게 뛰어간다. 이미 놓친 인연이 있으니까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렇게, 안녕을 고한다.
원하는 사람을 다시 만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학생 시절 추억으로 존재하게 내버려 두고, 지금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찾는 게 좋다고 느꼈다. 추억은 추억일 때 가장 아름답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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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의 이야기가 모든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부분 부분 공감 가는 상황은 어느 막이든 있었다. 살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오늘 하루가 마냥 좋진 않아도 좋다고 꼽을 점은 늘 있으니까.
*씨네랩 시사회에 초청받아 참석 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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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하고 싱그러운 남녀의 성장 - <시시콜콜한 이야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로스쿨을 보고 이수경 배우의 연기가 너무 인상 깊어서 필모그래피를 훑던 중 보게 된 단편 영화이다.
로스쿨에서 비춰진 냉정한 모습이 아닌 따뜻하고 호기심 가득한, 그리고 이수경 배우만의 수수한하고 청초한 이미지가 너무나도 신선했고, 특히 엄태구 배우가 눈에 들어왔었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웃던 배우였나..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진지하고 무거운 역할들을 맡아서 그런지 영화를 보면서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영화 줄거리는 감독 지망생이자 시나리오 작가, 도환(엄태구 배우)과 대학생, 은하(이수경 배우)가 지인 추천으로 사설모임에서 만나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이다. 특히 둘은 공통으로 좋아하는 '글쓰기'란 소재로 서로에게 더 다가가면서 알아간다. 낯도 많이 가리고 옛 연인을 잊지 못한 채 계속 똑같은 시나리오만 쓰던 도환이었는데, 은하를 만나고 나서 별거 아닌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이어나가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던 옛 연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정리할 수 있었고 아예 새로운 테마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계기가 된다. 은하도 항상 궁금했던 '글쓰기'에 대해서 도환한테 '뭐 써요?, 무슨 내용이에요?' 등과 같은 질문을 통해 더욱더 도환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책하면서 또는 전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며 누구는 자신의 과거를 흔쾌히 떨쳐내는, 누구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다가오는 상반된 이미지가 연출되어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강했던 것 같다. 32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이었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 덕분에 산뜻하고 시원한 공간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서로가 천천히 밀고 당기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그래서 그런지 여운이 더욱더 남았던 것 같다.
32분이라고 못 느낄 정도로 보는 동안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갔고 알차고 편안하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제목 그대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한 층 더 발전된 인간관계를 형성하여 등장인물 모두, 그리고 시청자로서 보는 나 또한, 성장할 수 있는 영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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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힐 때
정소영 감독의 단편영화 「달이 기울면」 의 텍스트 분석을 하기에 앞서 먼저 트라우마(trauma)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트라우마에 의거한 불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란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한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이 많기에 이러한 이미지는 장기 기억되어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머리속에 이미지가 떠오르며 불안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영화에서 가장 독특하게 느껴지는 기울어진 집은 주인공 ‘재아’의 트라우마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기울어진 형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정성과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트라우마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불쑥 튀어나와 정신을 잠식한다. 그래서 주인공 ‘재아’ 또한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외부적 요인인 지진으로 인해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게 되자 기절하는 등의 장면이 나온 이유가 그러하다.
영화는 기울어진 형태를 주된 이미지로 잡았다. 그래서 영화 속 주된 공간적 배경인 집 자체가 기울어져 표현되는데, 기울어진 집안이 주는 이미지는 관객들에게 불쾌한 기분을 야기한다. 가장 안락해야할 공간이 기울어졌다는 것은 주인공의 삶이 밸런스가 무너지고 극심한 혼란 상태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트라우마를 형상화시켰을 뿐만아니라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기울어진 집에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집이 더이상 안락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닌 불안정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관객들은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어진다. 즉 낯익은 낯설음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영화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는 주인공. ‘재아’가 기울어진 집에서 부모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고 난 뒤 이웃 아주머니가 전해주는 과일을 받기 위해 어그러져 열리지 않는 문짝 대신 문 옆에 난 조그만 통로를 통해 물건을 주고 받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머니의 걱정스러운 우려와 자신은 이 기울어진 동네를 벗어난다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이제 기울어진 동네에 남아있는 사람은 주인공인 ‘재아’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재아’는 제사를 위해 촛대를 세우거나 사과를 올려 놓지만 기울어진 집 때문에 물건들이 구르거나 제대로 안착되지 못한다. 화나고 짜증나지만 이 곳을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 소식을 알 수 있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방사능 비, 홀로 사는 여대생을 노린 성폭행 범죄의 증가와 같은 안 좋은 소식들 뿐이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인 전화기에서는 돈을 재촉하는 오빠의 목소리만 들려온다.
제사를 준비 하던 중 ‘재아’에게 친오빠가 찾아온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오빠가 찾아오는 씬(Scene)의 분위기가 매우 공포스럽게 그려진다. 마치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처럼 말이다.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특징인 어두운 밤, 비가 거세게 내리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버려진 동네에 추적추적 발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어보려고 하는 데 문은 굳게 잠겨있기에 집을 돌아 창문으로 다가간다. 창문 밖으로 비치는 사람의 모습은 ‘재아’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재아는 칼을 들고 창문을 억지로 여는 사람을 찌른다. 그러나 그가 오빠인 것을 깨닫고 안심하게 되는데 이 부분만을 보자면 영화는 스릴러장르로 보인다. 그러나 미스테리(Mystery)한 인물은 ‘재아’의 친오빠로, 같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이는 맥커핀(Macguffin)으로, 맥커핀(Macguffin)이란 속임수, 미끼라는 뜻으로 영화에서는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고안한 극적 장치를 말한다.
극의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리는 일종의 ‘헛다리짚기’ 장치를 말한다. 관객들의 기대 심리를 배반함으로써 노리는 효과는 동일화와 긴장감 유지이다. 주목을 받는 대상을 맥거핀(Macguffin)으로 사용해 관객들의 김을 빼놓는다. 관객은 스스로의 믿음과 판단력이 조롱당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 때문에 불쾌함을 느끼기보다는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무가치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무지와 오해로 인한 아이러니한 세계를 형성한다. 히치콕은 헛다리짚기를 통해 동일화의 허구성을 체험하도록 만들었지만, 히치콕 이후의 감독들은 극적 재미를 위한 트릭으로 맥거핀(Macguffin)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감독은 ‘재아’의 자살기도, 친오빠의 등장을 맥거핀(Macguffin)으로 그려내어 영화의 재미를 높였다.
기울어진 공간에서 친오빠의 등장은 ‘재아’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주는 존재처럼 비춰준다. 그러나 친오빠와 같이 제사 준비를 해도 기울어진 공간에서는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과일들은 제대로 그릇에 위치하지도 못하고 선풍기 또한 기울어진 곳에서는 작동이 되지 않아 사용할 때마다 수평을 맞추어야 작동이 된다.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수평을 맞추어야 한다.
이 장면은 불안정한 사람이 제대로 사회에서 작동되기 위해서는 인위적으로 수평을 맞추어야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기울어진 공간은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하며 바깥세상 즉, 사회에서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기울어진 마음을 수평으로 맞추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야 제 기능을 하며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기울어진 공간에서는 억지로 수평을 맞추지 않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수평을 맞추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빠는 왼발은 의족을 차고 있고 오른발에 소리가 나는 발찌를 차고 있다. 이는 오빠에게는 족쇄이자, 재아에게는 트라우마의 청각화다. 오빠가 장애를 가지게 된 이유는 ‘재아’의 욕심 때문이다. ‘재아’는 어릴 적 서랍장 위에 있는 과자를 가져가기 위해 지진이 나는 상황에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빠는 그런 ‘재아’를 구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서랍장이 친오빠를 덮쳐 왼쪽발이 절단된 것이다.
오빠가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소리는 ‘재아’의 트라우마를 야기한다. 그리고 오빠에게 발찌는 족쇄이다. 집을 떠나온 뒤 3년 동안 자신이 가진 핸디캡을 딛고 살아보려고 했지만 의족을 착용한 오빠에게 던져지는 사회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 나름대로 막노동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지내왔지만 생활의 궁핍함과 차가운 사회의 시선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결국 막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오빠는 자신의 족쇄를 끊어내지 못하고 잠식된 모습을 그린다.
「달이 기울면」에는 동굴이 등장한다. 오빠가 제사를 준비하다가 물건이 제대로 안 세워지고 굴러 떨어지는 이 공간이 지긋지긋하여 땅을 파고 동굴을 발견한다. 동굴 안에서는 빛이 새어 나오고 기울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동굴안에서 ‘재아’와 오빠는 제사를 지내려고 한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 자궁과 같은 안락함도 느껴진다. 이 공간 속에서는 두 인물간의 트라우마를 직접 입밖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에 지진이 발생하고 기울어진 집은 점차 수평이 맞춰지게 된다. 수평을 맞춰지는 집을 보면서 ‘재아’는 자신이 오빠의 발을 다치게 한 사건이 떠오르고 재아는 기절한다. 다음 날 아침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문이 부서지고 ‘재아’는 오빠의 유품을 받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죽음 충동과 연결 지어 텍스트를 분석해 볼 수 있다. 여자 주인공 ‘재아’와 오빠는 죽음 충동에 빠져있다. 죽음 충동이란 프로이트가 제창한 정신분석학 용어로 죽음으로 향하려는 욕구를 말한다.
‘재아’가 자살기도를 하는 장면을 맥거핀으로 사용하면서 ‘재아’의 죽음충동을 그려내거나 오빠가 자신의 죽음을 동굴안에서 고백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기울어진 집 안에 구멍을 뚫어 동굴을 만들고 동굴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등장인물의 모습은 일방적인 공간(상징계)에서 동굴이라는 상상계의 틈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보여준다. 동굴은 죽음으로 가는 공간이다. 동굴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오빠가 자신의 죽음을 토로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크레딧에서 조그만 공간으로 빨려 가는듯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임상체험을 한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환한 빛이 나오고 그 빛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는 진술을 영상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시간으로서의 이미지란 공간 속에 과거, 미래, 현재가 혼용되어 있는 공간을 말하는데 불쾌한 공간의 고리를 끊고 싶은데 그 파편화된 이미지에서 과거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동굴에서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오빠가 자신의 죽음을 말하자 지진이 일어나고 파편화된 과거의 이미지를 통해 재아가 자신 때문에 오빠가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된 공간인 동굴은 시간으로서의 이미지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와 미래, 현재의 시간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단편 영화「달이 기울면」을 보고 나면 맥거핀, 죽음 충동, 시간으로서의 이미지등 다양한 이론들을 영화적으로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준 영화인 것 같다.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는 다소 무겁지만 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수평만 유지할 수 는 없다. 한 쪽으로 기울수 도 있고 불안감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트라우마(trauma)를 통해 잠식되는 불안감이라는 어두운 감정을 기울어진 공간 속 ‘재아’라는 인물을 통해 잘 드러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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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이 될 뻔한 두 개의 거짓
호주의 한 시골 마을. 극심한 가뭄이 들어 324일째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개울은 말라붙었고, 드넓은 땅은 쩍쩍 갈라졌다. 물이 부족해 샤워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건조함이 전해진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메말라가는 건 땅과 냇가뿐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도 타들어가고 있다. 마을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둔 가장 루크가 아내와 아이를 총으로 쏜 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인간관계가 촘촘히 엮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끔찍한 사건이다. 마을 사람들은 피해자와 가해자, 삶과 죽음이 뒤섞인 이 사건으로 인해 큰 혼돈에 빠진다.
능력 있는 경찰인 에런이 마을로 돌아온 건 이때다. 어린 시절에 루크를 비롯해 엘리, 캐더린과 함께 어울렸던 그가 엘리를 사망케 한 용의자라는 의심을 받아 마을을 떠난 지 20년 만에 루크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에런은 루크 사건을 다시 살펴봐달라는 루크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을에 머무르게 된다.
보통은 출세한 청년이 오랜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오면 환대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에런은 그렇지 못하다. 에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20년 전 사망한 엘리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여론이 좋지 않은 루크의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소문까지 나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런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일차적으로는 루크 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이 그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에게 엘리의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데 있다.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는데, 심지어 그 범인으로까지 몰린 상처가 루크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영화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두 죽음에 관한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은 빼어나다. 숨이 막힐 듯한 건조함, 20년을 거스른 두 번의 죽음, 가려진 진실에 냉철하게(그러나 동시에 간절하게) 접근해나가는 에런의 캐릭터는 훌륭한 앙상블을 이룬다.
하지만 잘 쌓아 올린 영화의 긴장감은 다소 맥없이 밝혀지는 진실과 함께 무너져버린다. 영화는 내내 두 사건 모두가 작은 시골 마을이라 가능했을 끈적거리는 인간관계에서 기인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엘리를 사랑한 에런, 다소 거친 성격으로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루크, 그리고 20년 후 에런에게 호감을 보이는 캐더린까지.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는 영화의 연출은, 늘 함께였으나 완전한 하나이지는 못한 채 관계의 미묘한 균열을 겪으며 성장한 네 청소년의 감정에 깃든 비밀이 무엇일지에 관한 관객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완성도 높게 쌓아 올린 두 사건의 비밀이 정작 엉뚱한 곳에서 해소되자 김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미스터리 추리극에서 예상을 빗나가는 결말은 재미를 위한 당연한 장치다. 하지만 작품이 쌓아온 서스펜스와는 별 관련이 없는 곳에서, 예측 불가능성만 강조한 사건 해결은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헤치는 법이다. 네 주인공의 감정 엇갈림을 밀도 높게 영상화한 영화의 성취가 못내 아쉽다. 그렇게 평범하고 통속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밝힐 것이었다면, 애초에 기대하게 만들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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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 보고 싶은 특별한 세계관을 가진 영화 TOP4!
특별한 상상력을 담아 지금껏 본 적 없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전세계 관객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애니메이션의 풍성한 이야기들! 코로나로 지쳐있는 분들을 위해 무의식의 세계부터 꿈속 세계까지 작품마다 고유한 세계관을 가진 영화 4편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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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만든 23 아이덴티티
23 아이덴티티(Split) / 2016
- bgm
Money (feat. Celeste Collins) by Pold
http://bit.ly/2PrkqnxBack Home by Ghostrifter Official
http://bit.ly/2PuYB6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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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 시사회 후기 - 메마른 관계일수록 불은 빨리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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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일로 고향을 떠났던 `에런`은
친구 `루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20년 만에 고향을 찾는다
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루크`
유가족의 요청으로 사건을 파헤치던 `에런`은
여자친구였던 `엘리`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묻혀있던 두 개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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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부니베어 : 애들이 줄었어요> 메인 예고편
어느 날 빅은 뭐든지 커지게 만드는 신비로운 기계를 구입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개미만큼 작아진 곰돌이 형제와 빅은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을 펼치게 되는데…
과연 그들은 무사히 과거로 돌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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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틀쥬스 비틀쥬스> 2차 예고편
그의 이름을 절대로 부르면 안돼..!!? 팀 버튼의 상상력에 다시 빠질 시간? [비틀쥬스 비틀쥬스] 2차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