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2025-03-05 16:13:48
아무리 죽어도 죽는다는 건 두려워
주코를 기억하며
봉준호 감독의 6년 만의 신작 <미키 17>을 관람한 후, 다양한 생각들을 곱씹으며, 정리할 때 유독 한 단어가 머릿 속을 맴돌았다. ‘주코’
주코: 외계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외계 생명체 '주코'는 인간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코는 지구를 떠난 인간들이 니플하임에 정착하려 할 때, 그들의 탐사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크리퍼스라는 외계 생명체의 어린 개체다. 주코의 죽음은 영화 초반에서 끔찍하게 묘사되지만, 후반부에서 미키 17이 크리퍼스와 소통하면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죽었던 주코는 단순히 '크리퍼스1'이 아니라, 고유의 이름과 의미를 지닌 소중한 존재로 재조명된다.
영화는 <설국열차>나 <옥자>와 비교하여, 인간과 외계 생명체 사이의 관계를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인간과 동물 혹은 다른 계급과의 갈등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미키 17>은 크리퍼스와 인간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그려내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크리퍼스는 처음부터 공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인간과 교류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영화는 인간과 외계 생명체가 동등한 입장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을 가진 존재, 미키 반스
미키가 복제될 때마다 그는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린다. 마치 실험용 쥐에게 번호를 매기는 것처럼. 그러나 영화 속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를 확립하는 중요한 요소다. 크리퍼스라는 외계 종족 또한 처음엔 단순한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주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순간, 그는 익명의 괴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소중한 개체로 자리 잡는다. 결국, 미키도 숫자가 아닌 '미키 반스'로 남는다. 그는 미키 18처럼 용감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기로 한다. ‘걱정은 이제 그만하고 행복하게’—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태도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미키 17은 여러 번 복제되어 죽음과 재탄생을 반복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실험의 대상이자,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받으며 소모된다. 미키는 복제 가능한 '익스펜더블'로,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인격이 생성된다. 17번째 복제에서 태어난 미키 17은 과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그리고 끊임없이 죽어가는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는 인물이다.미키 18은 미키 17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시원시원하고 정의감을 갖춘 미키 18은 그의 성격이 더욱 돋보이며,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반면, 미키 17은 우유부단하고, 때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의 갈등과 고민은 영화에서 중요한 감정적 핵심을 이룬다. 미키 17의 존재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소모' 그리고 어디에도 대체할 수 있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부품처럼 함부로 이용되어지는 미키와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주변인들의 냉소적인 태도를 통해 인간 존엄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
<미키 17>은 인간 사회의 모순을 블랙코미디와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려내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일깨운다. 영화의 중반, 미키를 위해 나샤가 곁에서 함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장면은, 인간 본연의 따뜻함과 연대감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미키17을 미키 반스로 바라보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했다이러한 감정선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미래에서조차 인간성이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주며, 복잡한 사회적, 개인적 갈등 속에서도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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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은 스마트폰 속에 있지 않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로 시작하는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실렸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음악교과서에 빅뱅이 나온다는데...
다시 청춘. 청춘이라는 말은 때때로 면죄부가 된다. 조금 서툴러도 그러려니 해 주는 시기가 청춘이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기는 참으로 냉혹하다. 그러려니 해주면서도 봐주는 법이 없다. '네가 애냐'에서부터 '어린 놈의 자식이'까지. 그렇게 주변인인 채로 시간이 흐른다.
청춘시련. 청춘에 겪는 흔하고 공감되는 시련에 관해 말할 것만 같다. 누구나 지난한 청춘을 보내왔고, 저마다 자랑할 만한 어려운 시기들을 넘겼으리. 시기는 다를지언정 청춘은 개인의 것을 넘어 보편성을 가진다.
그러나 여기 이 청춘은 다르다. 청춘이라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고 붙여서도 안 되며, 청춘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청춘보다는 '시련'에 집중해야 하는데, 고난과 몹시 어려운 수행 같은 시련이 아니라 弒戀, 죽일 시에 그리워할 련이다. 연인할 때 연. 그리하여 영제는 Terrorizers.
유팡의 집에 같이 사는 밍량. 어느 날 남자친구와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괴한의 습격을 받는다. 그 복면 쓴 강도는 참으로 허술한데, 대낮에 장검을 휘두르고도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을까?
밍량은 VR로 혼자 검술을 연습했다. 검술이라고 하면 너무 고상하고, 평소 죽어라 하던 게임에서 캐릭터들을 칼로 찌르던 것에 과몰입했다고 보면 되겠다.
'찐따'라는 단어가 썩 좋진 않은데 그 단어를 대체할 말을 찾지 못했다. 밍량은 찐따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하는 건 핸드폰 게임과 av영상 보면서 자위하기 뿐이다.
그가 보는 av영상의 주인공은 모니카. 모니카는 돈 때문에 성인물을 찍게 된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모니카에게 준 것들을 다 뺏었기 때문이다. 모니카는 유팡의 연극 극단 동료라, 집에서 하루를 머문다. 밍량은 문틈 사이로 그들을 훔쳐본다.
밍량은 식당도 같은 곳만 간다. 그곳에는 선원요리사였지만 이제 땅에 터를 내리고 싶은 둥링이 있고, 식당 딸 키키는 코스프레에 완전히 과몰입한 오타쿠다.
키키는 게임 외에는 무신경한 밍량을 방으로 초대한다. 애니메이션 코스튬을 입고 밍량의 앞에서 코스프레를 하는데, 밍량은 키키를 덮치려든다.
'이런 옷을 입었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 어디서 들어봤더라.
밍량은 술취한 마사지사를 가게에 데려다준 인연으로 마사지사와 깊은 관계를 맺는데, 마사지사는 밍량의 말을 다 들어주고 믿어주는, 사실상 유일한 현실 인물이다. 마사지사에게 밍량은 "썸녀"에 대하여 자주 말한다.
밍량은 한 남자를 습격한다. 하지만 실력이 썩 좋지는 못하여 밍량도 팔에 부상을 입는다. 어쩌다 다쳤냐는 마사지사의 말에 밍량은 대답한다. 썸녀의 전남친에게 복수를 해줬다고.
밍량은 썸녀가 살던 아파트에 몰래 들어간다. 썸녀의 아파트에는 썸녀와 유팡이 함께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제 헤어져야 한다. 밍량은 그들을 '불법촬영'한다.
그리고 출국하는 모니카의 뒤를 쫓다가, 갑자기 다가가 사랑한다느니, 난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느니, 지켜주겠다느니. 모니카가 싫다고 하니 이제 한국에서 뻔한 레퍼토리가 나온다. "왜 안 만나주냐"는 거.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하는데 감히 네가 말 왜 안 만나주냐는.
경찰들에게 저지당한 밍량은 모니카의 아파트로 또 찾아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은 키키와 그의 친구가 촬영을 왔고, 촬영이라는 근사한 말 대신 우리나라의 경우 음란게시물 같은, 트위터의 노출 계정 비슷한 그런 일을 한다. 촬영자 역시 키키의 연기를 보고 키키를 덮치려 한다.
밍량이 하필 거기에 있으니 키키를 구해주긴 하는데 그놈이 그놈이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유팡과 둥링의 쓰임이 다소 아쉽기는 하다. 정치인의 딸, 이혼가정에서 버려진 자녀, 그래서 늘 애정을 갈구하는 역할. 그 애정의 방향이 둥링과 모니카에게 향하는데, 이야기는 모니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둥링의 존재감도 미미하다. 이 영화는 밍량만을 생각하는 것도 머리가 아프다. 청춘이라는 주제에 관한 고민보다는 오타쿠 문화나 동성애 같은 나름대로 핫한 소재에만 집중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왜 안 만나줘'를 이유로 폭력을 행하는 뉴스 기사들을 너무 많이 봐서 넌더리가 나는데, 대만에서는 이런 일이 청춘이라는 이름을 차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란 말인가. 찐따 오타쿠남이 음침함과 망상으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집에 찾아가 왜 안 만나주냐는 이유로 그 집에 사는 세 모녀를 살인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현실이다.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젊어서 할 수 있는 열정과 뜨거운 사랑과 방황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로, 매너있게 하자. 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은 가져야 하지만 우리는 리얼리스트여야 하지 않겠나.
청춘시련(Terrorizers)
감독 : 호위딩
출연 : 임백굉, 이목, 진정니, 요애녕
상영시간 : 127분
*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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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늙음에 대한 기록을 당신의 마음 속에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공포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점점 인생의 속도가 빨라진다. 누군가는 인생의 속도가 10대 때는 10킬로미터, 20대 때는 20킬로미터, 30대 때는 30킬로미터로 계속 늘어난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나이 먹는 것 자체가 공포라기보단, 내 몸의 변화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운동을 안 해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운동을 하지 않으면 군살이 빠지지 않는다. 전에는 하루 푹 잠만 자도 금방 회복되었는데, 이젠 영양제를 먹지 않으면 찌뿌둥한 몸이 풀리질 않는다. 아직까지 내가 느끼는 공포는 이 정도다.
순수한 시절은 한때에 불과하다. 젊음과 아름다움은 금방 사그라든다. 돈과 명예, 권력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렷했던 것들은 흐릿해지고, 확실했던 것마저 희미해진다. 우리는 그래서 죽음을, 늙어감을 두려워한다.
영화 [올드]는 이 두려움의 순간을 빨리 감기로 보여준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에는 아주 중요하고 느리게만 흘러갔던 시간들이,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희미해져 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일들은 나이를 먹고 많은 경험을 거치면서 사소한 일이 되어 버린다.
최근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이가 아파 치과에 갔는데 충치 치료 비용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말을 빌리자면 '가슴이 철렁'했단다. 내가 내 몸의 온전한 책임자가 된다는 것, 어떤 모든 순간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 우린 매 순간 발목에 새로운 책임의 족쇄를 찬다. 지금은 이토록 무거운 것들이 언젠가는 별것 아닌, 발목에 달린 족쇄 중에선 가장 가벼운 족쇄가 되겠지.
감독은 이토록 부질없는 개별적 삶의 순간일지라도 인간이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삶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와 손을 잡고 이 순간들을 마주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선택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나이를 먹을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낼지'를 더 고민해 봐야 한다. 인간의 삶은 결국 어떠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 또 다른 관계 속에서 저무는 것이기에.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근데 우린 시간이 없어."
시간은 우릴 기다리지 않는다. 저 혼자 멀리 앞서나갈 뿐이다. 모든 순간을 그저 과거를 돌아보는데 허비한다면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정하고 나아가는 태도야말로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든다. 그때야 비로소 우린 옆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낀다.
누군가와 함께 늙어가는 것, 내 늙음을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나이를 '잘' 먹는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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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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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로, 협상 결렬!
개봉일을 결정하는 데에 "설"과 같은 대목에 공개하는 이유에는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점도 있지만, 성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코로나19"에 촬영한 <교섭>의 제작비는 150억원으로 발표된 손익 분기점만 350만명이다. 분명히, "OTT"도 고려했겠지만 그만큼 잘 나왔다는 회사 사람들의 자신감이겠지? - 하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교섭>의 시선은 곱지 않다.
바로,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분쟁 지역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게 납치된다. 이에 "외교통상부"에서 교섭관 "재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국정원 요원 "대식"을 만난다. 서로의 방법은 다르지만, "인질을 구해야 한다"라는 목표는 같아 힘을 합치는데...
1. 계산서 좀 보여주세요.
영화 <교섭>을 보기에 앞서 이런 "협상"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의 가장 큰 원동력은 "가치"에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1998>를 시작으로 <마션, 2015>까지 구하는 데에 손실을 감수할 만큼의 가치를 관객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단적으로 "하정우"의 <터널, 2016>에서도 "도룡뇽 서식지"를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책정된 기준을 설명했듯이 본 작품 <교섭>도 이를 먼저, 말했어야만 했다! - 근데, 이를 객관적으로 말할 수가 있을까? 해당 사건을 말하자면, 여행 금지 국가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목적으로 23명의 교회 신도들이 납치된 게 주 내용이다.
물론, 이에 앞서 "정부"는 이들에게 경고를 했다! - 첫 티켓은 강제 취소도 했다...
그렇기에에 이들의 가치를 말하기엔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게 바라보기 힘들었을 거라 영화는 이를 배제한 채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영화는 "재호"와 "대식"의 원칙에 초점이 맞춘다!의사에게는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간호사에겐 "나이팅게일 선서"처럼 직업에 있어 갖춰야 하는 윤리관이 존재한다. 본 작품 <교섭>도 "해당 인원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말을 "재호"와 "대식"의 차이에서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소재를 떠나 괜찮았지만, 결국 앞에서 생성되지 못한 "가치"는 자꾸만 목에 걸린다!2. 소재를 떠나서...
무엇보다 영화 <교섭>의 이야기 패턴은 단순하게 반복된다. 하나의 위기 상황을 제시하고, 이를 마무리하려는 단계에서 엎어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관객들을 설득시킨다. 하지만, 이는 영화를 떠나 "실화"를 차용한 이야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자세이다. "실화"이기에 본 작품 <교섭>이 아니더라도 "신문"과 남들이 정리한 타임 라인만을 읽어봐도 결말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런 작품일수록 "과정"에 힘을 실어주어야만 한다. 이는 배우들의 혼연일체에 가까운 연기도 있겠지만, 이야기와 디렉팅도 적지 않는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 부분에서 "그럴 줄 알고!"와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무한 반복은 소재를 떠나 영화적으로도 흥미를 떨어트리는 선택이다.
그리고, 별개로 "대식"의 과거담도 살짝 언급되는 데 큰 비중 없이 사라져 크게 남겨지지 않아 캐릭터의 매력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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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말도 못하는 공룡 박사들, 미안해!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의 칸 영화제 수상 소식으로 영화팬들의 기대치를 한껏 끌어올렸듯이 아이들의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가 극장에 찾아왔다.
1993년을 시작으로 29년간 총 6편의 영화로 제작된 <쥬라기> 시리즈는 '공원에서 월드까지' 이름을 바꿔가며 스케일도 키워나갔다.
이 앞전 <월드>시리즈 2편의 총 수익 10억 달러를 가벼이 넘길 만큼 흥행에 대한 기대치는 남다를 것이다.
특히, 18년에 개봉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국내 기준 일일 관객수 118만명으로 당시 최고 기록을 경신했으니 국내에서의 성적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근데, <쥬라기> 시리즈의 후속작들은 그렇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2편과 3편을 제외하면, 모든 시리즈의 총 수익이 10억 달러를 넘겼으나 2편은 <쉰들러 리스트>의 조건부 영화였고, 3편은 "티라노사우루스(aka. 티렉스)"를 죽여버렸다!
이 결과로 <쥬라기 공원 3>을 마지막으로 14년 만에 <쥬라기 월드>로 리부트로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1. 공룡들은 다 좋아!
90년대생들에게 미의 기준을 세워준 <그리스 로마신화> 누구나 가정에 한 권씩은 구비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은 작품이었다.
근데, 갑작스레 그림체가 바뀌며 손이 가지 않았다. (전혀!)
그런 점에서 관객들이 생각하는 <쥬라기> 시리즈는 영화의 제목이자 극 중 "테마파크"의 명칭답게 '공룡들이 나온다'라는 점은 최고의 엔터테이닝을 선사한다.
특히, 대체불가의 마스코트 "티라노사우루스(aka. 티렉스)"를 '세대교체'라는 이유로 죽였으니 "스피노 사우루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있을까!그렇기에 <쥬라기 월드>는 대체불가한 매력을 계승하되 나를 비롯한 앞전 공룡 박사들의 노여움을 거둬내어야만 한다.
이에 새로이 선보인 "안도미누스 렉스"를 "티라노사우루스(aka. 티렉스)"에게 퇴장시켜 졸업한 수많은 공룡 박사들의 마음을 달래주었고, 이후 <폴른 킹덤>에선 "하우스 호러"를 빗대어 극장에서 이불을 찾게 만들 정도로 무섭게 만들기까지 해 "월드"가 "공원"보단 재밌음을 입증했다.2. 또 이러네?
극장 안을 가득 메운 공룡 박사들의 머리들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번 <쥬라기 월드: 도미니언>에 거는 기대치는 이전과 달랐다. (피하려고 일찍 갔는데, 참...)
서로 각자의 지식을 뽐내며, 격론을 펼칠 것만 같았던 극장은 이내 도서관으로 변했는데 이는 옆에 동석한 부모님 때문이 아니다.
관객들이 생각하는 오락과 다르게, 이번 <도미니언>은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인류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직면한 큰 변화는 "농경"으로 이는 소를 이용한 "우경" 등의 '목축'으로 발전한다. - 이는 1편에서 "오웬"이 "블루"를 비롯해 "랩터 조련"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발생되는 "잉어 생산물"은 '계급의 탄생'과 함께 '전쟁'으로 이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 6편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 "과도한 발전의 공포"는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적되어 새삼스럽게 느낄 수도 있다.
근데, 2편 <폴른 킹덤>에서 화산섬의 구조와 공룡을 풀어주는 장면으로 시리즈는 처음으로 "과학 발전의 공포"가 아닌 "공존"을 제시한다.3. 뭐, 이리들 어설퍼...
노선의 변화로 영화는 공룡이 아닌 사람 캐릭터들로 서사를 대신하지만, 설명이 진전되긴 할 정도로 <도미니언>의 이야기는 더디기만 하다.
이번 영화의 시작과 함께 "공존이 가능한지?"에 대한 뉴스가 나오며, 갈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에 "과도한 발전의 공포"를 직접 몸으로 느낀 구 시리즈의 주인공들까지 등장하며 이는 확신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첨예한 갈등보단 새로운 시리즈로의 협조로 돌아선다. (어찌 보면, <쥬라기 공원 3>의 "세대교체"가...)그리고 앞서 말한 "과도한 발전의 공포"는 이번 6편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의 악당들이 쓰는 지론이다.
재탕만 하더라도, 진부하다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혀진 무미건조한 악당으로 남겨진다. (비서의 배신을 눈치 못 챈다!, 아니 "말콤"은 알았잖아!)
물론, 1편에서의 "딜로포 사우루스"를 오마주하는 엔딩으로 이를 무마하려 하나 여러모로, 아쉬움이 생긴다.
이외에도 중간 보스로 나오는 "소요나 산토스"의 어설픈 액션까지 마지막이라고 예고한 것을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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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자신만의 블루스를 춘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우리들의 블루스 (2022)
편성 : tvN, 20부작 완결 │ 장르 : 한국, 드라마
연출 : 김규태, 김양희, 이정묵 │극본 : 노희경
출연 : 이병헌(동석), 이정은(은희), 김우빈(정준), 한지민(영옥), 고두심(춘희), 김혜자(옥동) 외
등급 : 15세 이상세 사람 이상이 추천하면 그건 봐야지
요즘 나는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드라마에 입덕하는 일이 잦다. 그중 하나가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였다. 이정은, 이병헌, 한지민을 비롯해 고두심과 김혜자 선생님까지 연기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드라마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아, 배경이 푸른 섬 제주라는 것도. 내심 속으로는 ‘그 출연진을 가지고 재미없으면 말이 되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 드라마를 본 주변 사람들이 그리도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하니 궁금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변에 세 사람 이상이 추천하면 재밌다’는 나의 법칙이 이번에도 통했다. 인물별로 나누어 에피소드를 진행한 점이 특히 독특하고 좋았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 대한 리뷰도 인상 깊었던 인물을 추려 인물별로 진행해보려 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한수와 은희 : 다시 잘 살아볼 기회를 주어 고마워
멀대 같이 크고 잘생긴 한수. 서울 사는 한수. 차승원이 연기한 ‘한수’는 제주 사람이 보기엔 그런 존재다. 학창 시절부터 때깔이 달라 결국 서울에 가더니 은행 지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제주로 내려왔다. 평생을 제주에서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 동창들은 그런 한수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걸 모른다. 골프 유학을 떠난 딸을 뒷바라지하느라 한수의 재정상태는 거의 파산 직전이고, 그런 이유로 지쳐있는 아내와도 썩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인다. 그때 눈앞에 ‘은희’가 나타난다. 학생 땐 그저 자신을 좋아하는 귀여운 여학생쯤으로 여겼던 은희는, 현재 자산만 10억을 지닌 알부자다.
멀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었으나 빚만 늘고 있는 한수에게, 생선 대가리를 자르며 많은 것을 일군 은희는 참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직업의 귀천은 무엇이고 잘 산다는 것은 어떤 걸까. 보이기 위한 삶과 진짜로 실속 있는 삶은 어떻게 다른 걸까.., 나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조여 오는 궁핍한 상황에 은희에게 돈을 빌리려던 한수는, 은희가 카카오톡 기프티콘 쏘듯 보낸 2억을 결국 다시 돌려보낸다. 은희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때문도 있었지만, 어쩌면 정말로 ‘잘’ 살아보려는 의지였을 수도 있다.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정말로 만족스럽고 실속 있는 삶이 무엇인지 은희를 보고 배운 덕이다. 한수는 골프 유학을 접고 돌아온 딸과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그때 그 가족은 그제야 처음으로 행복해 보였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인권과 호식 : 절친에서 앙숙으로 그리고 다시 절친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인권과 호식’을 꼽겠다. <범죄도시>에서 감초 같은 연기를 보인 배우 ‘박지환’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응급실 선생님으로 나왔던 배우 ‘최영준’이 각각 인권과 호식을 연기했다. 이들의 사연인 즉, 학창 시절부터 죽고 못 사는 친구지간이었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철천지 원수 같은 사이가 되었는데, 서로 얼굴만 봐도 으르렁대던 그들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복병은 바로 자식들이다. 인권의 아들 ‘현’과 호식의 딸 ‘영주’가 서로 좋아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을 하게 된 것.
아이를 지우고 서울대를 가겠다던 영주는 갈등 끝에 아이를 낳기로 하고, 산모와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현은 학업을 포기하고 중국집 배달부터 귤 따기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순대를 팔아 아들을 공부시키는 맛에 살던 인권의 마음은 무너지고, 마찬가지로 딸을 서울대에 보내 의사를 만들려던 호식도 망연자실한다.
그러나 별 것도 아닌 일을 계기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던 인권과 호식은, 두 아이들을 매개로 하여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원래의 친구 사이로 돌아가는데..., 과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진국이고 눈물 버튼이다. 드문드문 현실적인 나의 뇌는 ‘과연 영주와 현은 아이를 낳아 끝까지 잘 살았을까?’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내 인권과 호식을 보며 안심이 됐다. 엄마의 부재를 메꾸는 아버지의 사랑은 위대했고, 먼지를 털어낸 오래된 우정은 더 위대했으니.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스틸컷
정준과 영옥 : 어설픈 동정이나 위로 말고 정직함으로
한지민과 김우빈이 열연한 ‘정준’과 ‘영옥’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영옥은 육지에서 온 여자다. 서로 모든 걸 터놓고 지내는 제주 사람들과 달리, 좀처럼 자기 얘기를 꺼내지 않고 촐랑거리만 하는 영옥은, 같이 일하는 해녀들에게 눈엣가시다. 하지만 영옥이 그렇게 가벼운 것은 사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이었는데.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장애가 있는 쌍둥이 언니를 부양해야 했던 터라, 살아오면서 사람들로 인해 켜켜이 상처가 쌓여온 것이다. 많은 남자들이 달아났고, 고아나 장애라는 조건에 섣부른 동정이나 무례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말하지 않기와 무겁지 않음을 택했을 뿐이다. 영옥에게 호감을 느껴 다가온 정준 또한 영옥은 그런 이유로 밀어낸다. 어차피 너도 똑같고 날 떠나갈 테니,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자르겠다는 심보.
하지만 연애도 통계학이고 경우의 수다. 열에 아홉이 떠나갔대도 묵직한 놈 한 놈쯤은 나타날 수 있는 법. 영옥에게는 그게 정준이 아니었을까. 가시 돋친 영옥이 “(장애 있는 우리 언니 보고) 많이 놀랐나 봐?”라고 물으면 정준은 “미안해”가 아니라, “나도 장애 있는 사람을 처음 보는 거라 당황할 수 있잖아. 천천히 적응하고 친해질게요”하는 식이다. 선 넘은 동정도, 무례함도 없이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를 이해하려는 정직함 만이 있다. 말없이 생선살을 발라 영옥의 밥 위에 올려주던 정준의 어머니도 그랬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런 거지 싶다. 투박한 날 것이더라도 과장 없이 오로지 이해하려는 그 마음을 ‘정직하게’ 보여줄 때, 사람의 마음은 열리는 게 아닐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제주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바다 같은 마음
왜 배경이 제주여야 했을까 하고 처음에 생각했다. 외계어 같은 사투리도 잘 못 알아듣겠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쉬이 이해하기 힘든 ‘오지랖’ 심한 정서도 너무 강한 탓에, 처음에는 거북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제주여야 했음을 머잖아 깨달았다.
‘선아(신민아)’는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떠난 차가운 남편이 아닌, 만물상 하는 촌스런 제주 남자 ‘동석(이병헌)’의 오지랖에 치유를 하게 됐고, 남이 흉이라도 볼까 가면을 쓰고 다니던 영옥도 제주 남자인 정준을 통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웠다. 언제든 두 팔 벌려 안아줄 것 같은 제주 할망 ‘옥동(김혜자)’과 ‘춘희(고두심)’는 모든 이들의 엄마였다. 경쟁이나 물질만능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그곳 제주에는, 촌스럽지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할 줄 아는 선한 마음들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화해하며 끝나는 다소 진부한 결말이었음에도 이 이야기가 와닿는 건, 까끌해진 마음을 보듬는 따스한 인류애 때문일테다. 제주에서, 오지랖을 당하고 싶어진다.
인스타그램 @wood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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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결말포함]군필이라면 다 아는 그 영화 분대장 교육장에서 틀어주는 바로 그 영화
#군대영화#밀리터리영화#전쟁영화
영화 ' 위 워 솔저스 ' 2002년
구독은 여러분의 큰 힘입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Nqd...#무비워크 #영화리뷰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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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도그로 잃어버린 몸찾는 액션 스릴러!
윤계상 배우가 주연을 맡은 유체이탈자가 개봉했습니다.
12시간 마다 유체가 이탈하여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간다는 신기한 설정인데요.
게다가 다른 사람을 옮겨다니는 사람이 기억을 잃은 상태라 더욱 긴장감을 높이죠.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인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긴장감은 높습니다.
핫도그와 노숙자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가게 되는데요.
근접액션, 차량 액션, 총기 액션 등 다양한 액션이 포함되어 있어 볼거리도 많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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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walke starring actor Yoon Kye-sang has been released.
It's a strange setting that the fluid escapes every 12 hours and enters another person's body.
In addition, it raises tension even more because he who move around people have lost his memories.
The movie lead the story with limited space and limited characters, but the tension is high.
the main character track clues through hot dogs and homeless people.
There are many things to see as it includes various actions such as close action, vehicle action, and gun action.
Please refer to the video for detailed re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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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코드 404 시즌2> 공식 예고편
최첨단 기술로 AI가 장착된 채 되살아난 반인 반로봇 형사 메이저와 파트너 카버의 코믹 수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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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침범> 메인 예고편
2025년 가장 밀도 높은 심리 파괴 스릴러 #침범 3월 12일 개봉 확정 & 메인 예고편 공개👥 #somebody #곽선영 #권유리 #이설 #기소유 #심리파괴스릴러 #3월12일극장대개봉 #스튜디오산타클로스 #studiosantacla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