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2-15 19:13:56
가능성의 우주 속 현대인의 우울, 그리고 자기혐오
다니엘 쉐이너트, 다니엘 콴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Ⅰ. 모든 것이 가능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2022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은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다중우주라는 SF적 요소를 통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전세계에서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면서, 명실상부 올해 ‘예술영화’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주·조연 배우 모두 동양인으로 가득 채운 신인 감독의, 난해하다면 다소 난해한 SF 영화가 이다지도 평론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것이 가능한’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가 겪는 멜랑콜리가 세대와 성별, 국적을 가로질러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관객의 마음을 관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차별이 철폐된 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의 물결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상정한다. 성별에 따라, 인종에 따라, 계급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노력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있다. 하지만 이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한다. 이들에겐 세탁기 속 옷처럼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아줄 그 어떤 대책도, 계획도, 보호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한병철 교수는 이러한 가능성의 사회를 ‘피로사회’ 규정하면서,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무력감, 자기 소진 등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긍정의 세계는 부정의 변증법, 즉 적대성을 전제하지는 않지만, 대신 ‘내재성의 테러’라는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를 좀먹는 새로운 폭력을 양산한다. 달리 말해,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아무런 주권도 지니지 못한 채,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따라서, 면역학적 도식 바깥에 존재하는 우울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웨이먼드를 따라가면 연을 끊겠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을 무시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지도 벌써 수십 년째건만, 오프닝 시퀀스 속 에블린의 삶은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다. 철저히 관찰자 시점에서 카메라는 국세청 세무 조사를 위해 책상을 모두 덮을 만큼 쌓인 영수증과 자꾸 대화를 보채는 남편, 아픈 아버지와 여자친구를 데려온 딸, 세탁소 손님들의 각종 요구를 응대해야 하는 에블린의 일상을 훑는다. 각박한 에블린의 삶은 젊었을 적 꿈꿨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멀어도 한참 멀지만, 에블린은 아버지에게 조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남편의 대화 요청을 무시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의 환상 속 정상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미 삐걱거리는 에블린의 가족상은 에블린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다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것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예하는 피로사회의 모습과도 닮아있지만, 동시에 ‘잔혹한 낙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다.
로랜 벌랜트는 “실현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하거나, 혹은 너무나 가능하여 중독성 있는 타협된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애착 관계”를 ‘잔혹한 낙관주의’라 명명하면서 애착 대상이 “심지어 자신의 안녕을 위협할 때조차 대상의 상실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잔혹하다”라고 설명한다. 에블린의 애착 대상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끊임없이 광고하는 신자유주의적 ‘아메리칸드림’이다. 에블린을 여태껏 버티게 한 이 환상은 아직 상실되지 않았지만, 상실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에블린의 삶 자체를 무너뜨릴 만한 강한 정동을 유발하기에 에블린은 ‘가능성’의 조건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자신의 환상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현실의 고통을 인내하지만, 세상은 에블린이 원했던 성취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드림 -그리고 정상 가족-에 대한 에블린의 집착은 남편과 대화를 거부하게 만들고, 딸의 여자친구를 아버지에게 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킬 뿐이다.
벌랜트는 잔혹한 낙관주의가 ‘정치적 우울’을 유발한다면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인한 정치적 우울은 “다루기 힘든 세상의 난관에 대한 냉담, 냉소, 무관심 등의 정동적 판단 속에 집요하게 남아있다” 라고 설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에블린이 모든 사람에게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에블린 나름의 방어 기제이자, 잔혹한 낙관주의가 유발하는 우울이 초래한 것이다. 우울증은 이렇듯 개인에게 부과되는 원칙적인 제약이 없을 때만 발병한다.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차등적인 가능성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은 법적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다중우주라는 과학적 개념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장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은 ‘버스 점프’ 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중우주, 그러니까 드넓은 ‘가능성’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데, 이 다중 우주는 수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최악의 삶을 사는 중인 우리의 에블린에겐 기회의 땅이지만, 조부 투파키에겐 긍정성의 과잉이 초래한 병리적 허무주의의 세계에 불과하다.
SF가 과학적 외삽을 통해 현재의 사회 규범을 재고하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버스 점프 기술은 에블린의 삶을 중지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버스 점프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무 조사를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그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가족과의 관계를,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이 현존하는 시공간 자체를 낯설게 만든다. 영화는 에블린의 시점 쇼트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숏-역숏 기법을 사용할 때도 늘에블린의 뒷모습을 프레임에 넣으면서 관객이 에블린과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버스 점프라는 기술이 촉발한 중지의 사유는 관객이 철저히 에블린의 삶을 ‘관찰’함으로써 관객자신의 일상에 ‘노붐 Novoum’을 가져오는 효과를 낳는다.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 속 거울 이미지는 라깡의 거울 단계를 떠올리게 한다. 거울 속 나의 이미지는 외형적으로 ‘나’와 닮았지만, 현존재로서 ‘나’와는 다르다.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아이는 사실 타자적 이미지인 거울 이미지를 진정한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첫 장면은 함께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에블린 가족의 거울 이미지로 시작한다. 에블린은 이 거울 이미지, 그러니까 정상 가족이라는 자신의 환상이 투사된 이미지를 현실이라고 믿지만, 불이 켜지고 반사된 이미지 속엔 가득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내, 진짜 남편인 웨이먼드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불쑥 나타나 에블린을 부른다. 거울 이미지는 에블린의 현실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제는 잔혹한 낙관주의로부터 깨어나야 한다고. 그러므로 에블린과 관객 사이의 동일시를 방해하는 미묘한 어긋남은 거울 이미지가 사실 환상에 불과함을 폭로하는 장치이다. 영화가 선사하는 중지의 미학은 ‘모든 것 everything’의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관객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Ⅱ. 상실이 유발하는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
프로이트는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무언가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한다. 흔히 우울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우울은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심지어는 실존하지 않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잃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수반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무언가를 상실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 물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그래서 슬퍼한다. 커다란 모자 속에 너구리를 숨기고 함께 요리하던 요리사는 너구리를 뺏기고, 국세청 직원은 남편과 이혼하며, 손이 소시지로 변해버린 평행 우주 속 에블린은 연인과 이별한다. 가족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조이는 정체성을, 그 모든 평행 우주 속 가능성 속에서 조부 투파키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겪지만, 누구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의 유일한 차이점을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슬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빈곤하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자아가 빈곤해지고 공허”해진다.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 그래서 “비난하고 처벌하고, 추방”해야 하는 자아. 영화속 등장인물들을 불안, 분노, 좌절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이 아닌 ‘우울’로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자기 혐오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상실의 리비도를 자아에 통합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공격” 한다는 점에서 ‘우울’하다.
국세청 직원은 욕을 섞어가면서까지 자신이 받은 상을 과시하고, 과도할 정도로 깐깐하게 세무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과시는 결핍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떠들어대는 인물의 내면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자리한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우주 속에서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4655번째 평행 우주에서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의 열렬한 신자로, 에블린을 찾아 죽이려고 한다. 그녀의 이마엔 방금 ‘진짜’ 에블린의 세상에서 영수증에 싸인 펜으로 그린 원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4655번째 평행 우주의 에블린을 때려눕힌 국세청 직원은 조부 투파키가 “사람들의 본질과 그들의 자존감(self worth)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알고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전지전능함 앞에서, 쓰러진 에블린 앞에 인질로 잡힌 직원들은 나약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 앞에서 한 개인의 무력함을, 자기 자신의 쓸모없음을 이해해 줄 단 한 명의 에블린을 찾아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다.
미친 사람처럼 우주를 누비며 학살을 일삼는 조부 투파키는 단순히 자신을 이렇게 만든 에블린에게 화가 난 것도, 이 세상에 절망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무인 세계로 돌아가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 파괴적 ‘열광’은 가능성의 세계 속에서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우울증 환자의 조증과도 같다. 조부 투파키는 마치 구원을 원하는 듯이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있는단 한 사람, 에블린을 애타게 찾아다닌다. 그리고는 마침내 찾은 ‘그’ 에블린에게 자기와 함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을 호령할 수 있음에도 무의 세계로 자멸하려는 조부 투파키의 모습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에도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지고 마는 현대인과 닮아있다. 그의 멜랑콜리는 평행 우주 속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손가락이 소시지가 될지언정, 어떤 평행 우주에서도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가능성의 우주에서조차 나는 ‘고작’ 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혐오. 조부 투파키는 자기의 삶이 거대한 세상 속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허무나 좌절의 외침이 아니다.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그냥 가 버려. 딸이 ‘이것’보다는 더 나은 세계로.” 모든 것이 가능해서,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상을 탓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특별함은 엄마를 영웅으로, 딸을 빌런으로 내세운 줄거리에서 모성애의 아름다움이나 애증의 모녀 관계를 넘어, 현대인의 고질적인 자기 혐오적 멜랑콜리를 그려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이것’보다는 딸을 찾아 떠나라고 외치는 조부 투파키의 멜랑콜리는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겹쳐 새로운 정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버틀러는 젠더 이상과 현실적인 젠더 사이의 차이에서 젠더 규범을 전복할 수 있는 저항성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은 우울증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실의 내면화는 상실의 부인이 되고, 상실의 거부는 우울증이 된다. 만약 상실의 대상이 동성애라면, 동성애적 리비도 집중은 죄의식을 수반한다. 이렇듯 우울증적 주체는 상실의 대상이 무의식화되어 있으므로 드러내는 애도를 통해 상실을 ‘해소’할 수 없다.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좋은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에게 화가 난 조이는 차를 타고 세탁소를 떠나려고 한다. 에블린은 조이를 불러 세우지만, 옴싹달싹 움직인 입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살 좀 빼’라는 핀잔뿐이다. 조이는 평생을 중국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이성애 중심의 ‘정상 가족’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그러나 버틀러의 지적처럼, 고착화된 젠더 규범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자기혐오적 멜랑콜리를 수반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에게 에블린은 늘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딸’이었 고, 따라서 퀴어라는 정체성은 에블린에게 있어 숨겨야만 하는, 수치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다. “나르시시즘과 죄책감, 수치심”을 동반하는 자기혐오는 오랜 시간 “성적 타자로서 차별적 배제와 억압적 대우를 받은 결과”이다.
조이의 문화적 우울과 성적 타자로서 자기혐오는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와는 분명 다르다. 조부 투파키는 가능성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조이는 주체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 둘의 우울을 한 장면에 겹쳐 놓는다. 데칼코마니처럼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장면은 차 문을 열고 떠나려는 조이를 에블린이 붙잡는 구도로 촬영되었다. 파란 옷과 붉은 옷, 대낮과 한밤, 우울과 열광. 동전의 양면처럼 조부 투파키와 조이는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경험을 겪지 않고도 소외되고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에게 먼저 손내밀 수 있다. 그들이 느끼는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우리도 충분히 느끼고 있으므로. 상대방이 우울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맞이할 때, 비로소 타자를 향한 손짓이 시작될수 있다.
Ⅲ. 우연의 접촉이 만들어낸 정동의 이행
영화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혐오적 우울에 찌들어 있다고.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드러내는 데 그쳤다면 이렇게 호평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3부 ‘올 앳 원스’는 모든 것, 모든 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찰나의 순간이 소중함을 설파하면서,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자기혐오로부터 타인을 구원하는 몸짓을 선보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몸짓’은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다. ‘손가락이 소시 지인 인간이 발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라는 설명은 엽기 코믹 영화를 소개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이는 영화가 서사 매체로서 앞뒤 문맥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과는 별개로, 언어적 묘사나 대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정동적 ‘잉여’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와 들뢰즈에서 기원한 정동은 세 가지 다른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는 전이 로서의, 그리고 우리가 휘말리게 되는 비인격적, 또는 전인격적(pre-personal) 힘의 운동으로, ‘인간이 인간 아닌 모든 것과 공유하는 것의 한계 표현, 즉 사물에 자신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으로서 정동이다. 두 번째는 좀 더 인격적인 정동으로, 정동적 강도들이 신경계로 들어와 종국에는 인지하게 되는, 즉 인격체의 표상으로서 정동이다. 세 번째로 정동은 “정동을 촉발하고, 정동이 촉발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정동은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전이”하며 고정된 상태가 아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정동은 무엇보다,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촉발되는 강도 또는 힘을 의미한다.
조부 투파키가 보여준 베이글과 마주한 에블린은 자신의 인생이 빙빙 도는 무의미한 하루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사소한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인생의 궤적은 어느 우주에서는 중요하게 느껴지지만, 다른 우주에서는 ‘바다에 휩쓸릴’ 모래 알갱이일 뿐이다. 에블린은 베이글이 촉발한 이 모든 우울과 공허함, 자기혐오의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모든 것이 무상한 세상에 서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에블린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고, 너구리를 고발하고, 웨이먼드를 유리 조각으로 찌르고, 세탁소를 부수고 결국엔 돌이 되기를 택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자의 첫 발걸음이 고작 타인을 향한 공격이라는 게? 인생의 경로를 마구잡이로 활주하는 조부 투파키와 달리, 우리가 고작 '이따위’로 살게 된 데엔 차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전인격적 정동이 작용한다. 운명과도 같은 전인격적인 힘에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인간은 또한 언어로 굳어진 감정을 인지한다. 아마 에블린은 베이글을 보면서 좌절과 혼란과 절망과 분노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차마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이 영화처럼, 몸과 몸의 우연한 접촉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힘의 연속체이기도 하다. 세탁소를 압류하러 찾아온 국세청 직원은 웨이먼드와 몇 마디 나눈 후, 난동을 피운 에블린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에블린이 어떻게 했냐고 묻자, 웨이먼드는 그냥 얘기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조부 투파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흐름이 단지 확률적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웨이먼드의 울음기 어린 눈망울에서, 지친 듯 떠나는 국세청 직원의 발걸음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에블린이 깨뜨린 유리 조각을 치우며 웨이먼드가 부르는 노래에서 에블린은 운명의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이, 곧 있으면 휩쓸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찰나의 순간이 소중한 이유를 발견한다.
세상은 전례 없이 넓어졌다. 버스 점프라는 기술 없이도 누구든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의 사례는 매일같이 SNS와 인터넷을 떠돈다. 에블린이 겪는 우울과 절망은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우리가 느끼는 우울과 절망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싸우고, 욕한 뒤,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처럼” 느낀다. “친절해야 한다”라는 웨이먼드의 외침은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거울 속에서 에블린을 부름으로써 촉발했던 중지의 사유가 관객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했던 것처럼, 내가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남을 공격하는 이상한 작태를 성찰하게 한다. 그러나 이 ‘친절’은 표면적인 다정함이나 기계적인 배려를 의미하지 않는다. 웨이먼드의 친절은 조부 투파키의 자기혐오적 우울까지 모두 끌어안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표현이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몸짓이다. 영화 속에서 웨이먼드가 국세청 직원에게 정확히 무슨 뭐라고 말했는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웨이먼드의 태도가 잔혹한 낙관주의의 냉소를 끊어낼 만큼 강력하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이글을 마주한 조부 투파키와 그의 추종자, 그리고 에블린은 모두 우울의 정동에 속박되어 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도 모른 채 욕망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파괴의 충동으로 나아가는 조부 투파키는 이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이는 달리 말하면 그 모든 가능성 속에서 우연히도 너와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마주하고 있음을 경탄하는 표현이다. ‘모든 가능성’은 행복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한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괴롭다는 이유로 타인을 공격하는 조부 투파키는 불행하지만, 괴로워도 타인에게 다가설 줄 아는 웨이먼드는 행복하다. 그게 웨이먼드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방식이다.
조부 투파키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주는 대신, 웨이먼드를 안아준다. 몸과 몸의 접촉. 그 사이를 흐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힘. 변주하고 흐르고 이행하는 정동의 물결. 혼란스럽고 무서운 세상에서 벗어나 차라리 돌이 되기를 택한 에블린처럼, 우연의 접촉이 행복을 향한 열쇠였음에도 우리는 꿋꿋하게 거리 두기를 고집해 온 것은 아닐까? 단지 포옹 한 번이면 해결될 일을 애써 말로, 문자로 표현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몸과 몸의 접촉만큼이나 타인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에블린은 영화가 시작한 지 장장 두 시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짓는다. 에블린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은, 조부 투파키가 그토록 갈구하던 삶의 의미는 타인과의 우연한 접촉에 있다.
조부 투파키는 그 접촉마저도 금방 사라질 것이라며 비웃는다. 에블린은 공격을 멈추고 ‘이 멍청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사랑할 존재가 있다’라며 모든 우주의 국세청 직원을 껴안는다. 총알은 곧 철없는 남편이 세탁소 곳곳에 붙여 두던 눈알 스티커로 변하고, 에블린 자신의 이마와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에게 스티커를 쏜다. 생채기를 내거나 박히지 않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스티커의 감촉은 웨이먼드의 친절함과 맞닿아 있다. 타인이 접촉을 거부하는 그 순간에도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접촉의 몸짓. 영화는 그제야 에블린의 시점에서 조부 투파키의 추종자들을 훑는다. 그러나 이 시점은 에블린의 두 눈이 아닌 멍청함으로 가득한 찰나의 순간에도 사랑을 찾을 줄 아는 ‘스티커’의 시점이다.
이마 한가운데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은 자신을 공격하는 추종자들과의 신체적 접촉, 즉 몸과 몸의 마주침을 통해 긍정의 감정을 이행(移行, passage)한다. 이 장면에서 접촉은 그것이 키스이든, 골절된 뼈의 접합이든, 향수의 감각이든 간에 신체의 오감을 포함하는 감각의 이행으로 확장된다. 에블린과 접촉한 사람들은 싸우려는 의지를 잃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데, 이때 그들이 느끼는 정동은 손으로 움켜쥔 모래처럼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사이로 빠져나간다. 영화 속 등장인물만 에블린의 정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영화를 단지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라는 비비안 섭책의 말처럼, 관객은 배우의 표정과 음악, 조명, 미쟝센, 촬영, 편집, 그리고 이 모든 게 뒤섞인 영화의 쇼트를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Ⅳ.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세탁기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옷가지와 영수증 위에 어지럽게 그려 놓은 동그라미, 그리고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까지. 1부 ‘모든 것 Everything’을 상징하는 ‘원’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을 관통한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결말은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는 원과 같다. 잔혹한 낙관주의에 빠졌던 에블린은 여전히 낙관주의에 골몰한다. 그러나 에블린이 낙관적으로 붙잡고 있는 대상은 에블린이 손을 놓으면 언제든 깨져버릴 유약한 환상이 아니다. 에블린의 아빠는 “너는 내 딸이 아니”라며 에블린을 무시하지만, 에블린은 아빠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블린 스스로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조이가 자신처럼 자기혐오의 늪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빠가 했던 것처럼 조이를 에블린의 시선에서 재단하고 ‘정상’과 ‘행복’의 범주에 끼워 맞추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에블린은 자신의 전지전능한 힘 대신, ‘끌어안음’을 통해 조부 투파키를 베이글로부터 구원한다. 조부 투파키/조이는 이 마지막 접촉조차 거부하지만, 에블린은 그런 조부 투파 키/조이에게 다가가 조이에게 ‘살 좀 빼’라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에블린이 미치광이 같은 조부 투파키의 눈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는’ 외침을 읽은 것은 에블린 역시 똑같은 상처를 아버지에게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무한히 반복하는 우리의 일상처럼, 처음과 끝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똑같아 보이는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엔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원에 티끌 같은 점이라 해도, 우연의 접촉이 낳은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는 특별하다. 에블린이 그 티끌 같은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말하자, 허무주의의 베이글 속에서 손을 뻗는다. 손과 손, 눈빛과 눈빛, 사과와 사과, 돌과 돌, 행성과 행성. 때로 몸과 몸의 접촉은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형상이지만,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삶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쌓여 있는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며, 에블린은 잔소리를 퍼붓고, 조이는 여자친구를 사귄다. 원처럼 다시 돌아온 시작점에서 영화는 모든 것이 가능해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노래한다. 그것은 에블린의 잔소리처럼 쌉싸름하고, 웨이먼드와의 키스처럼 달콤하며, 국세청 직원의 핀잔처럼 짜다. 그 무언가는 모든 가능성의 확률을 뚫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너와 내가 만났기에 가능한 기적이다. 붉은 옷 대신 푸른 옷을 입고 다시 돌아온 국세청 사무실에서, 에블린은 다시 한 번 묻는다. “죄송해요. 방금 뭐라고 하셨죠?”
Relative contents
-
- 한명쯤 마음에 품고 있잖아요 지브리 남주. 최애 지브리 남주 고르기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이자 지브리의 신작이 공개되었습니다!!
항상 따듯한 분위기의 영상과 함께 아련하고 설레는 이야기들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는데요 오늘은 줄거리와 더불어 지브리 최애 남주를 선택해볼까요??
-
- 지나치게 정직했던 뮤지컬의 영화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와 가족의 품을 떠나 일제와의 전투에 나선 대한제국 의병대장 ‘안중근(정성화)'. 몇 차례의 전투에서 패전을 맛본 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한가지 맹세를 한다.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며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3년 이내에 처단하지 못하면 자결하기로 결의한 것.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안중근은 오랜 동지 ‘우덕순(조재윤)', 명사수 ‘조도선(배정남)', 독립군 막내 ‘유동하(이현우)', 독립군을 보살피는 동지 ‘마진주(박진주)'를 만나 이토를 죽일 거사를 획책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이토에게 접근한 독립군의 정보원 ‘설희(김고은)'로부터 이토가 하얼빈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6일,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은 이토를 사살하는 데 성공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 선다.
<영웅>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본래 2019년에 촬영 후 2020년 3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의 영향 때문에 개봉이 연기되었고, 3년 만인 2022년 12월에 마침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근본적으로 원작이 있는 영화는 언제나 같은 시험에 빠진다. 영화의 작법과 다른 예술의 작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간과하면 욕심이 너무 과해지고, 영화로 재해석된 결과물로 인해 원작의 매력을 잃을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원작을 의식하면 그저 아류작에 불과해진다. 원작의 가치는 느껴질지 몰라도 굳이 영화로 만든 이유를 알 수 없다. JK 필름에서 제작한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후자에 부합하는 영화다. 가지고 있는 장단점 모두 원작 뮤지컬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로 극을 옮기는 과정에서 붉어진 문제점도 적지 않다. 결과적으로 <영웅>은 클리셰를 남발하고 수많은 웃음과 눈물 포인트를 삽입하는 JK 필름의 익숙한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시아주의자 안중근을 조명하는 입체성
<영웅>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안중근의 의거가 목표한 바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전달하는 기본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그가 의병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으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군사 작전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이 작전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예상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게 눈에 띈다. 흔히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독립투사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의거는 의외로 더 큰 목적을 지닌 작전이었다. 안중근은 단순히 조선의 독립을 바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협력을 희망하는 아시아주의자였다. 그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한중일 3국이 동등한 자격으로 협력하여 동양의 평화를 일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일환으로 마치 지금의 유럽 연합과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어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의 존재감 덕분에 '아시아주의'라는 이상을 둘러싼 두 인물의 사상적 대립은 더욱 부각된다. 이토가 부르는 넘버 '출정식'과 안중근이 노래하는 '동양평화'의 대조가 단적인 예시다. 이토는 하얼빈 시찰이 "극동의 평화와 문명을 여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라면서 "평생을 바쳐왔던 꿈 아시아는 낙후되었다. 아시아는 위태롭다. 막강한 일본을 만들어 아시아를 통일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 대동아공영!"이라고 노래한다. (비록 '대동아공영'이라는 표어 자체는 태평양 전쟁 당시부터 사용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무력으로 통합하여 서구 열강에 대적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자 이토의 사고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안중근은 "서로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 서로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 그게 바로 동양 평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지혜"라고 읊조린다. 현실에서 아시아주의를 실천하는 것만이 한중일 모두의 이익을 위한 길이라고 믿었던 셈이다. 즉, 안중근의 시각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는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해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토는 죽어야만 했다. 조선의 독립은 물론, 진정한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기에 처단 대상이었다. 이처럼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을 걷지 않은 덕분에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에는 강력한 당위성과 설득력이 생긴다. 평범한 반일 영화나 평면적인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이나 일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일본의 일부 제국주의자가 싫다는 안중근의 말은 10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충분히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를 간과한 결정적인 실수
하지만 <영웅>의 장점은 온전히 빛나지 못한다. 뮤지컬의 배경을 확장, 확대하는 데 그친 전반적인 구조와 구성이 <영웅>의 매력을 가리기 때문이다. 거사 직전,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선이 고조되는 "그날을 기약하며"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마진주 등 작전에 참여할 인물들은 차례대로 거리에 등장한 후 각자의 심경을 노래한다. 마치 어벤져스처럼 원을 그리며 노래하는 그들 주변에는 수많은 한인이 등장한다. 그렇게 그들은 다 함께 거리를 행진하면서 거사의 성공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뮤지컬 관객들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담아낼 뿐이고, 도시의 거리 역시 뮤지컬 무대 배경이 넓어진 것에 불과하다.
분량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시퀀스도 마찬가지다. 오프인 시퀀스인 "단지동맹" 장면이나 또 다른 하이라이트인 "영웅" 시퀀스에서도 배경인 설원과 자작나무 숲은 그저 인상적인 배경에 불과하고, 무대장치의 확장일 따름이다. 클라이맥스인 "장부가" 시퀀스도 뮤지컬을 재현하고 카메라에 옮겨 담는 데에만 주력한 영화의 지향점을 재확인시켜준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는 교수대에 올라선 안중근을 그저 정면에서 담아내며, 사형집행을 지켜 보는 이들은 뮤지컬 객석 관객들처럼 느껴진다. 영화 관객들도 뮤지컬 관객의 연장선상에 위치할 따름이다.
따라서 <영웅>이 원작 뮤지컬 무대를 영상화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영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영화'로서의 특이점이 없다는 점이다. 넘버의 연속으로 구성된 뮤지컬은 근본적으로 노래마다 응축된 감정이 터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그 지점에 다다르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따라서 뮤지컬 영화는 뮤지컬의 한계를 영화적 내러티브 구조나 다른 방식의 장치들을 더해 해결해야 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영웅>의 한계점은 명확하다. 어색한 화면분할이나 조악한 추격전, 하얼빈역 전경이나 설원처럼 과장된 CG의 활용 등으로는 이야기 사이 사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 즉, 뮤지컬의 영화화에 실패한 <영웅>은 '뮤지컬' 영화일지언정 뮤지컬 '영화'는 아니다.
장점마저 퇴색시킨 수많은 의문점
결국 <영웅>은 곳곳에서 문제를 노출하며 무너진다. 노래 전후로 시퀀스와 시퀀스, 장면과 장면이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다. 안중근과 설희, 동지들의 넘버는 그들의 기개를 보여줄 뿐, 이야기 전개를 위한 디테일을 담지 못한다. 실제로 하얼빈역과 채가구역으로 나누어 작전을 준비하는 것 외에 거사를 위한 계획이나 이토의 눈앞에서 정보를 캐내는 설희의 활약 등은 자세히 묘사된다고 보기 어렵다. 일례로 설희가 민비의 죽음 때문에 이토를 향한 원한을 키웠다면, 원한 자체는 노래에 담더라도 이토에게 접근하고 그의 신임을 얻는 과정은 더 정교하게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하다못해 이토가 당시 일본인들도 비판할 정도로 여색을 밝히는 인물이었다는 점만 언급했어도 설희의 스토리가 더 입체적이고 구체적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대신 영화는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는 입장을 취한 채 빈자리를 윤제균 감독 특유의 유머로 채운다.
이에 더해 자기 손으로 자기 장점을 퇴색시키기도 한다. 영화는 안중근이 조선의 독립보다 더 원대한 이상을 좇게 된 이유를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다가 크게 다치는 장면 이후로 영화의 배경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전환된다. 이 시점부터 안중근은 거리 연설에서 아시아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이토를 죽이기 위한 작전에 몰두한다. 하지만 다시 등장한 안중근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느껴진다. 안중근이 어떻게 동양평화론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변화의 연속성을 부각할 수 있는 시퀀스를 중간에 하나 추가하는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이 부족한 결과인 셈이다.
스토리의 한쪽 기둥을 맡고 있는 설희를 다루는 방식도 아쉽다. <영웅>은 안중근과 동지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설희가 각기 한 축을 이루는 영화다. 특히 설희의 경우 단독 넘버를 두 개나 가져갈 정도로 주역인 안중근과 이토와 맞먹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캐릭터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는다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희의 비중은 조금 조절되더라도 전개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설희의 비중을 줄이고 안중근의 비중을 좀 더 늘려 주인공의 내면을 더 깊이 묘사하는 게 어떨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빈약한 스토리를 음악과 배우의 열연으로 덮는 것보다는 영화적으로 더 적절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웅>은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은 무대 뮤지컬 같다는 인상을 좀처럼 깨지 못한다.
부족한 디테일이 낳은 신파
이처럼 허술한 만듦새는 끝내 감정의 과잉과 신파로 이어진다. 그래도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다루는 대목에서는 신파가 적절히 활용된 듯 보인다.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항소와 아들의 목숨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아픔과 그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아들의 고통을 애절한 선율 속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또 지극히 인간적이고 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내와의 갈등과 사별은 모든 독립 운동가의 숭고함을 오히려 감정적으로 부각해 준다.
반면에 안중근을 제외한 다른 인물은 대부분 신파를 위해 희생되고 만다. 당장 진주의 오빠인 '마두식(조우진)'의 운명이나 진주와 동하의 로맨스에서는 관객을 울음바다에 빠뜨리기 위한 목적이 강하게 느껴진다. 앞서 보았듯이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디테일이 부족하다 보니 그 허술함을 신파로 대신한다는 인상이 진하게 남는다. 그러면서 정작 신파적 연출이 일관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또 다른 조력자인 우덕순과 조도선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웃음을 위해 단편적으로 활용되고 소비될 뿐 진중하게 조명될 기회를 잡지 못한다. 채가구역에서 거사를 준비하던 이들이 안일하게 작전을 철회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는 개그성 장면이 대표적이다. 안중근과 달리 법정에 선 우덕순과 조도선의 모습이 어색할 정도다.
<영웅>의 기술적 성취는 본작의 장단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웅>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시도된 바 없는 촬영 방식이 도입된 영화로 알려졌다. 촬영 현장에서 직접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라이브 녹음 방식을 채택해 70% 이상의 분량을 현장 녹음 버전으로 담아냈다. 이 대목은 뮤지컬을 단순히 촬영했을 뿐인 영화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가상의 현실감을 살리되, 더 커지고 정제된 형태로 다시 태어난 뮤지컬 영화 <영웅>의 필연적인 장점이자 한계가 고스란히 노래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P(Poor, 형편없음)
뮤지컬 '영화' 대신 '뮤지컬' 영화를 선택한 안일함의 대가.
-
- 이제는 한 타임 쉬어가야 할 때
한국 영화에서 시리즈로 4편까지 나온다는 건 매우 드문데, 극장을 통해 개봉된 4편 모두 흥행률 100%를 달성한다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범죄도시4'의 훙행력은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전 시리즈에 비해 '범죄도시4'의 새로운 점을 묻는다면,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괴물형사 마석도(마동석)는 '범죄도시4'에서 대규모 온라인 불법도박을 움직이는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고, 조직을 움직이는 백창기(김무열)와 그 뒤에 서 있는 CEO 장동철(이동휘) 두 명의 빌런을 상대해야 했다.
영화 주연이자 제작을 맡은 마동석은 '범죄도시'의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진화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딱히 업그레이드됐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2편부터 4편까지 1년 간격으로 제작하고 개봉해서인지 새로운 스토리나 캐릭터, 액션, 유머도 딱히 찾아볼 수 없었다. '범죄도시' 시리즈를 두어 편만 봤다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그림으로 전개된다.
식상함을 주지 않기 위해 영화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다. 장첸(윤계상)에서 강해상(손석구), 잔혹한 빌런을 1명으로 모자랐는지 주성철(이준혁)과 리키(아오키 무네타카) 2명으로 늘리기까지 했다. 범죄 내용도 바꿔왔다. 해외 납치·협박·살인, 마약 유통 및 살인, 온라인 도박 조직 운영 및 살인까지 다양하다. 다만 극악무도함을 표현하는 건 똑같다는 점.
사실 '범죄도시4'에서 작품성을 운운하는 건 쓸데없는 논쟁일 것이다. 이 영화의 강점은 극악무도한 빌런을 강력한 원펀치로 때려눕히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엔터테인먼트다. 그래서 알고도 보게 만드는 '김치찌개맛', '된장찌개맛' 영화라는 평이 많은 것도 관객들의 입맛에 잘 맞아서다. 그러면서 마석도와 장이수(박지환) 등 일부 캐릭터의 말맛이 만들어내는 웃음펀치가 사이드킥처럼 작용한다.
라면, 제육볶음, 돈가스, 떡볶이 등이 대중의 소울푸드라고 해도 1년 365일 내내 먹다 보면 질리는 시점이 오듯, 영화 또한 마찬가지. 어차피 마석도가 범인들을 시원하게 때려잡을 것을 뻔히 알기에 긴장감은 자연스레 떨어지게 된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장점인 액션이 4편에선 딱히 특별하거나 '오!'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신선하지 않다. 1편부터 줄곧 권투를 기반으로 한 타격감 최대치를 선사하는 핵펀치가 똑같이 나오고, 용병 출신 백창기가 빠르게 휘두르는 단검 액션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이 영화만의 시그니처 액션도 아니다. 관객들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마동석의 결과물이 실망스러울 뿐이다.
마동석이 기획한 '범죄도시'는 총 8편이며 이제 절반이 지났다. 4편까지 연달아 찍었던 것에 반해, 5편부터는 제작 및 개봉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예정이다. 이 점이 '범죄도시' 팀에게는 한 템포 쉬어가는 좋은 시점일 것이다. 매우 잘됐다. 다만 현재 틀에서 개선하지 않고 끝까지 고수한다면 관객들은 점점 멀리할 것이다. 의미 없이 시리즈를 늘려가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나 '트랜스포머' 시리즈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길 바라면서.
★★
-
- 이와이 슌지의 '편지'는 계속해서 쓰이는 중이다
영화 제목을 <Last Letter> 대신 <Letter Lasts>라고 고쳐도 될까. 'Last'에는 '마지막의'라는 형용사적/부사적 의미도 있지만 '계속하다'라는 동사적 의미도 있다. (이 동사는 자동사와 타동사의 뜻을 둘 다 지녔다) "소망했으나 이뤄지지 않은 일들, 마지막 순간에 차마 선택하지 못한 일들, 밤이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되고 소설이 된다"라는 김연수의 말처럼, <라스트 레터>(2020)의 이야기는 한 편의 편지가 어떻게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그것이 나아가 소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절을 담았다.
감독 이와이 슌지의 고향 센다이에서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먼저 영화(2018)로 만들어졌고 소설판으로도 나왔으니, 마츠 다카코와 히로세 스즈가 주연한 이 <라스트 레터>는 그러니까 세 번째로 쓰인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는 다섯 번에 걸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만든 단편 영화(2017)가 기반이 되었고 영화에 등장하는 소설 '미사키' 역시 별도의 책으로 썼으니.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고 또 쓰는 일. 과거가 된 이야기를 거기 내버려 두지 않고 계속해서 꺼내고 발신하고 수신하는 방식으로 쓰여온 이 <라스트 레터>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편지이자 소설의 형식을 닮았다.
<라스트 레터>에서 무엇보다 핵심적인 것은 영화 속 모든 편지가 손으로 쓰인 물리적 실체가 있는 편지라는 점이다. 물성이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수신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읽히기도 하며 그것의 발신지(주소)가 존재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2019)에서 20년도 더 지난 얼어붙은 과거를 편지가 녹여내었고 그것이 당사자의 딸을 중심으로 현재에 재소환되었듯, 과거의 '미사키'이자 현재의 '아유미'(히로세 스즈의 1인 2역), 과거의 '유리'이자 현재의 '소요카'(모리 나나의 1인 2역) 그리고 현재의 '유리'(마츠 다카코)와 현재의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를 오가는 이 이야기는 결국 2020년대에 와 편지라는 수단이 갖는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청량한 여름을 배경으로, <라스트 레터>는 "나는 나쓰메 소세키 소설을 좋아해. 너는 어떤 책을 좋아하니?" 같은 이야기, "잘 지내고 있습니까?" 같은 이야기, 그리고 "바람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의 시절을 능히 지탱하는지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이 영화의 촬영과 음악, 음향은 꽤 중요하게 여겨진다) 성공하지 못한 소설가도 누군가에게는 사인을 받고 싶은 '히어로'가 되고는 한다. 지금쯤 다시 떠올려보는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이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영화를 보기 전의 나'에게 쓰는 긴 편지를 써 내려가야 했다. 1995년 <러브레터>로 시작된 이와이 슌지의 서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 역시 그것을 계속 써야만 한다.
-
- 괴롭힘은 관심의 표현이 아니다.
제목만 봤을 땐, 풋풋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여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막상 보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였다. 확실한 주제와 따뜻한 시선 그리고 단단함이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주어진 은연중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누군가 정해주는 결말로 한정 짓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우리를 중심으로 한 단편 영화 '그날의 우린' 리뷰를 시작해보려 한다.
낯선 것의 시작은 우리에게 있어서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 우리의 모습을 본 건우는 그를 빌미로 이상한 부탁을 한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은 황당하면서도 그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더욱이 상대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이용하려는 마음은 그저 끔찍스러울 뿐인데도.
괴롭힘은 관심의 표현이 아니며 그저 폭력일 뿐이지만 아직도 은연중에 남아있는 사회의 편견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보편적인 시선은 아직 쉽게 바뀌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마지막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조금씩은 움직이는 것 같아서 우리를 응원하고 싶었다. 영화 '그날의 우린'은 2022 원주 옥상 영화제에서 볼 수 있으며 퍼플레이 온라인 상영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9월 10일 토요일까지 관람 가능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
-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이란?
시놉시스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원고 250명의 학생들을 포함해서 305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기적적으로 구조된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 부모들은 큰 트라우마를 겪는다. 김태현 무대 감독은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을 창설하고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세월호 침몰 사건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중에 자체 지원한 희생자 부모들인 수인 엄마,애진 엄마,예진 엄마,영만 엄마,동수 엄마,순범 엄마,윤민 엄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을 통해 승화시키는데...
자식들을 사고로 잃은 슬픔을 유가족들은 차마 말하지 못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간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이 유쾌한 연극을 통해 트라우마를 이겨내보려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준다. 자식을 잃고도 자신의 일에 전진하며 살아가는 부모도 있고 잊지 못해 유품을 정리하지 못한 가족도 나온다.
장기자랑이라는 연극은 단원고 학생들이 세월호를 타기 전에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신 그 역할을 유가족 부모들이 하고 있는데 그중에 중도 포기하는 유가족 부모들도 있었다. 사실은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그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기 싫어할 테고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원하지 않는 엄마들도 있었기에 그 빈자리를 전문 배우들을 섭외시켜 메꾸었다고 한다.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은 각 지방으로 돌아가면서 연극을 시작했으며 자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 도착하지 못한 제주도까지 가서 간담회도 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울컥한 마음으로 2021년 단원고에서 연극을 한다. 그전에 단원고에서 추모 팀으로 연극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교장과 교감 선생님의 반대로 무산됐다. 마지막으로 유가족 엄마들이 연극을 끝내면서 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사고 앞에서 인명 피해가 났을 때 희생자들의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과 상실감은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장기자랑을 통해 알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의 슬픔!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
-
-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당신이 여름에 보면 좋을 영화
** 영화 우리집의 스포일러가 담긴 콘텐츠입니다.
대사로 알아보는 영화 두 번째 이야기는, 작년 여름에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입니다.
영화 우리집은 아래 링크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 영화 <소울메이트> 티저 예고편
우린 가장 빛났고, 나는 네가 그리워 당신은 어떤 이름이 떠오르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