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5-02-28 17:47:22
시작됐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던, <미드 90>
<미드 90>은 어른을 절대 생략하지 않는다.
* 글에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드 90 Mid90s, 2018 제작
미국 | 드라마 | 85분
감독: 조나 힐
시작됐지만 그 끝은 알 수 없던, <미드 90>

여기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스러운 손길을 느껴본 적 없는 아이가 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나, 진정으로 함께 산다고 확신할 수 없어 외로운 13살 사춘기 소년, 스티비. 아빠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고 엄마의 관심은 오직 생계유지이며, 형(이안)은 무차별적인 폭력만 가한다. 가족이지만, 큰아들 생일에 남자친구 얘기를 하며 부끄러워하는 엄마와 동생이 건넨 선물을 똥 씹은 표정으로 내던지는 형을 어린 스티비가 온전히 이해하기란 힘든 일이다. <미드 90>는 스티비의 삶을 이루는 시공간을 담아내는 일에 주력한다. 왜 왜소한 아이의 몸에 푸른 멍이 가득한지 설명하지 않는다. 처음엔 그를 방황하는 청춘으로도 표현하지 않는다. 매일 가족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 바쁜 아이에게 ‘방황’과 ‘청춘’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가혹한 처사니까. 따라서 스티비의 세계는 외줄타기처럼 아찔하다. 불안이 가득한 사건들은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그 사건들은 전부 시작만 존재할 뿐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 어떤 사건이 스티비를 무자비하게 삼켜버릴지 짐작할 수 없기에 영화 <미드 90>은, 해피엔딩은 물론 치유 과정도 섣불리 기대할 수 없는 이야기로 우리를 맞이한다.
스티비는 형의 방 안에서 세상을 배우며 산다. 양아치 같은 형을 혐오하면서도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 우연히 거리에서 어른의 기세에 눌리지 않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동네 형들을 발견하기 전까진 그랬다. 형의 주먹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스티비는 보드를 타고 도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낯선 그들에게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저들과 함께라면, 자신을 옭아맨 현실에서 탈주할 수 있을 거란 강한 확신에 다음 날부터 동네 형들의 아지트 보드 가게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서클 눈치를 보며 며칠을 보냈을까, 마침내 서클 일원 로벤이 스티비에게 악수를 청한다. 스티비는 로벤의 ‘함부로 고맙다고 말하지 말라’는 첫 번째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의 언어를 열심히 배우고, 행동강령을 습득하며 서클에 스며든다.

"땡볕! 너도 갈래?"
서클의 입단 조건은 명확했다, ‘우리와 똑같이 하며 살 것’. 스티비는 거친 욕설과 도를 넘는 일탈을 일삼는 서클에 온전히 소속되기 위해 정말, 죽도록 노력한다. '멋들어진 보드를 타면서 술과 담배를 하고,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틈틈이 섹스를 즐기는 어른'이 되고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활용한다. 서클은 스티비에게 자유이자 꿈이며, 우정이자 사랑이 꿈틀거리는 곳,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이자 유일한 자부심으로 정의된다. 형의 낡은 보드를 가장 아끼는 노래 테이프와 바꾸고, 위험한 도전을 서클 일원으로 함께하고, 엄마 돈을 훔치는 등 숱한 노력 끝에 스티비는 새 보드와 서클의 일원임을 인증하는 별명, ‘땡볕’을 얻는 데 성공한다. 아이러니하지만 드디어 그도 험악한 세상으로 내던져진, 방황하는 청춘이 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과거, 엄마 돈을 훔치기 전에 빗으로 자기 허벅지를 세게 문지르며 자신을 체벌했던 아이는 달라진다. 집 안에서 혼자 고독과 외로움을 피하고자 했던 자학을, 보드를 타는 서클 친구들과 함께 차들이 다니는 도로 위에서 마음껏 행한다. 그들에게 자학은 자학이 아니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에선 당연한 일과였고, 맥없이 흐르는 시간 속의 즐거움이었으며, 자연스러운 경험 축적이었다. "어차피 우린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 죽어, 그러니 그냥 즐겨!" 서클 일원, 존나네의 말처럼, 불합리와 불안정, 불건전함은 곧 삶의 규칙이자 지혜였으니까.

서클과의 교류에도 스티비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형의 무시무시한 폭력과 엄마의 강압적인 폭언은 계속됐다. 스티비는 하루빨리 그 누구도 함부로 자신을 건들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를 표출하고, 느껴보지 못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껴야 했으며, 이는 가족을 이해하는 일과 가족과 함께 사는 과정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 결과 스티비는 더 위험한 상황 속에 뛰어든다. 한 손에는 담배를, 다른 손에는 술병을 들고 다니며 기꺼이 몸을 땅바닥에 내리꽂는다.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거라곤 종잇장 같은 몸뿐이고, 친구들과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온몸이 부서져도, 심지어 죽을 뻔해도 좋으니까. 스티비의 결연한 목표가 서클 일원들의 삶으로 연결되고 흡수되자, <미드 90>은 기다렸다는 듯 스티비에서 멈추지 않고 서클 개개인이 가진 속사정을 이야기 곳곳에 털어놓는다.
레이, 존나네, 4학년, 루벤도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동시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중이다. 영화는 서클 활동을 통해 이들이 사실 자기 미래를 향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음을 설명한다. 사회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보호받고 도움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탈출해 자기와 같은 동족을 만나, 새로운 가족을 결성한 이들을 응원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스티비의 필연적인 성장통과 서클 친구들의 내일을 향한 의지를, 넘어지고 깨져도 끝끝내 일어나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는 스케이트보드로 전달한다. 또한 서클 이야기를 비행 청소년들의 사건 사고로 치부하지 않고 사회가 낳은, 묵과할 수 없는 문제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문제투성이인 서클이 이들의 유일한 안식처로 이해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스티비가 보드를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안도감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이다. 이후 스티비는 존나네의 음주운전으로 크게 다치고 만다. 그러나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구들의 우정과 연대에 활짝 웃는다.

영화 속 어른들은 행동하지만, 서클의 멈추지 않는 보드 질주에 한없이 무력하게 비친다. 도로의 무법자들을 막는 일과 비행 청소년과 자기 아들을 구분하는 일에 급급할 뿐이다. 하지만 <미드 90>은 어른을 절대 생략하지 않는다. 방관자든 제삼자든 구경꾼이든 상관없이 보드를 타는 서클 주변에 항상 위치하게 하고, 두 세계를 한 화면에 담는다. 본 영화가 시각적으로 더욱 의미 있는 건 서클의 성장통을 단독으로 노출하지 않고, 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혼란을 매 순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목적은 당연히 두 세계의 통합. 영화는 그 귀중한 결과를 마지막 장면에 수놓는다. 병원에 입원한 아들을 찾아온 서클을, 아들의 진정한 친구들로 받아들이는 스티비 엄마의 깊은 이해와 따뜻한 눈빛으로 말이다.
<미드 90>은 그 나이를 겪어야만 하는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린 작품이다. 성장을 위해 방황을 필수적으로 엮었고,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이들의 모습을 따스하게 비췄다. 이따금 현란하고 화려한 보드 곡예가 눈물짓게 하는데, 우린 이미 이 눈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시작됐지만 끝은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웠고 또 다행스러웠던 우리의 그때를, 그 간절했던 순간들을 잊었을 리 없으니까‥. 단언컨대 <미드 90>이 단순히 가혹하기만 한 영화였다면, 많은 이가 자전적 얘기를 담은 조나 힐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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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스오피스 1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4DX 후기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23.04.26 개봉)
감독: 아론 호바스, 마이클 제레닉
더빙: 크리스 프랫, 안야 테일러 조이 등
드림, 짱구는 못말려 등을 뚫고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렸던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저는 닌텐도 유저도 아니었고... 슈퍼 마리오라곤 캐릭터 얼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이걸 굳이 돈 내고 영화관 가서 봐,,,?? 싶었었는데
주변 후기가 너무너무 좋길래~ 보러 갔어요
총평부터 말하자면 슈퍼 마리오는 무조건 4DX로 봐야 한다!
2D로 봤으면 재미가 반감 될 거 같거든요
내용도 재미있긴 하지만 4D가 진짜,,,
역대급으로 바람 불고 역대급으로 흔들리는 ㅋㅋㅋㅋㅋㅋㅋ
안전벨트 없으면 날아갈 것만 같은 (근데없음)
저 롯데월드 온 줄 알았잖아요
그만큼 신났다는 뜻입니다
저는 슈퍼 마리오 게임을 모르는 사람이라 알고 있던 사람들보다는 이해가 어렵더라고요
나오는 캐릭터들, 아이템들, 레이스들 모두 게임에 나온 거라던데
저는 사전 정보가 1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살짝 정신이 없기도 했고 스토리상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처음엔 마리오와 루이지의 형제애를 메인 스토리로 잡고 가나 보다 싶었는데요
다크 세곈가,, 거기에 빠진 루이지를 구하기 위함이라기보단
그냥 버섯 세계에서의 일들을 보여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리오가 원탑으로 빌런을 무찌른 것도 아니고
공주와 키노피오를 포함하여 마리오를 돕는 인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엔딩에서 루이지와의 우애를 강조하는 게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락성만 놓고 보자면 완벽했어요
쳐지는가 싶으면 바로 코믹 요소 작용하고 또 재미없어지는가 싶으면 바로 다음 레벨로 넘어가거든요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게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최대 장점 아닐까 싶어요!
그걸 4DX로 경험하면 더욱 더 배가 되는 거구요...
왜 자꾸 포디에 집착해 하시겠지만 이건 정말 4DX로 봐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 ㅠㅠ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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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정신없이 일상을 보내다가도 순간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한평생 우리를 따라다녔고 또 따라다닐 이 질문은,
'대체 무엇이 의미 있는가'
자꾸만 길을 잃는 이들에게 웨스 앤더슨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극작가 콘래드가 쓴 연극과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스터로이드'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열린 '소행성의 날' 행사 참석을 위해 과학 천재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등 여러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외계인의 등장으로 이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갇히고 만다. 이 이상한 연극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극 속 인물들과 극 밖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영화는 연극 속 내용과 비하인드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을 현실처럼, 비하인드인 현실을 연극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극은 컬러 화면이며, 자연스러운 화면 전환을 보여주는 반면, 비하인드 씬에서는 흑백 화면과 내레이션, 연극 세트와 같은 화면 구성을 가진다. 이러한 경계는 영화가 진행되며 자꾸만 무너진다. 현실의 내레이터 배우가 뜬금없이 연극 장면에서 등장하고, 오기 역의 배우는 도저히 극 중 오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연극 밖으로 뛰쳐나간다. 엔딩에서는 연기학원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모두 잠에 빠져드는 연기를 펼친다. 그중 한 배우가 벌떡 일어나며 무언갈 외치는데 이때 배우를 비추는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현실과 극의 경계가 뒤섞이는 순간이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외계인이 나타난 후 우드로는 아버지 오기에게 말한다. '모든 게 불확실해요.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왜 소행성을 훔친 건지, 그게 우리건 맞는 건지, 우린 아는 게 없다고요.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수상한 외계인의 등장이 우드로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 동안, 오기 역 배우 존스는 조금 다른 사건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왜 오기는 전기 버너 위에 손을 올렸는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다. 땅을 파는 자판기, 잘려 나간 오기와 아내의 장면,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의도. 그러나 존스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오기가 버너 위에 왜 손을 올렸는지다. 결국 극 밖으로 뛰쳐나와 연출가 슈버트를 찾아간 그는 말한다. 아직도 이 연극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슈버트는 그런 그에게 의미는 상관없으니, 그냥 이대로 계속 연기하라 답한다.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 존스는 아내 역을 맡았던 배우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서 잊고 있던 삭제 장면에 관해 들은 그는 묻는다. 왜 잘랐을까요? 좋은 장면인데. 배우는 답한다. 아마 러닝타임 때문이겠죠.
극으로 돌아간 존스는 무사히 연기를 끝내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성황리에 막을 내린다. 그러나 우드로도, 존스도, 연출가도, 관객도 각자의 의문을 해결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상관없다는 것.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기에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극의 모든 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문을 가지고서라도 나아가는 것이다. 엔딩에서 배우들이 외친 대사처럼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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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남긴 어떤 것
올해 봄에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원제: Prisoners of Geography)을 읽었다. 책 내용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영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리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동의하는 주장이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특히 유럽인들이 억지로 그어버린 직선의 국경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아프리카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없이 통치 편리성만 중시하면서 멋대로 국가의 경계를 만들어버렸다. 둘 중에서도 아프리카는 더 심각한 편이라 아프리카 고유의 기후에 직선의 국경선에 의한 분쟁이 더해져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 중에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언제쯤 개선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프리카 지도 출처: maps.com
이런 아프리카의 가나 아크라와 케냐의 나이로비가 내 첫 출장지였다.
(Borading Pass와 Kenya Airways)
친구들은 위험한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철없이 가보지 못한 대륙, 아프리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에만 설레 들떠있었다. 입사 약 1년 만에 떠난 첫 출장, 그리고 안전을 고려해 묵게 될 비싼 5성급 호텔, 아프리카 내에서 이동할 때만 탈 수 있다는 비즈니스석. 철없는 신입 직원을 설레게 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부끄럽지만 ‘일은 선배가 많이 하겠지’라는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그리고 중남미 배낭여행하면서 워낙 열악한 환경은 많이 접해봤으니 딱히 걱정이 되거나 두려울만한 것도 없었다.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의 대표 도시이다. 심지어 유엔본부가 있는 이 도시는 아프리카에 대해 가질만한 나의 선입견을 다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사무소 소장님께서 좋은 식당, 비싼 카페에 데려가 주신 것을 안다.
(같은 도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상반된 풍경)
출장 마지막 날, 사무소 소장님께서는 출장 소감을 물으셨다.
“이주임, 아프리카 와보니까 어때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하기도 했고 훨씬 좋은데요?”
“사실 이주임이 호텔이랑 사무실만 왔다 갔다 했는데, 사무실이나 호텔이나 다 여기서 제일 동네에 있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뭐라 반박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정말 일부분의 모습만 보고 좋다고 말해버렸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매우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할리우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내게는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영화는 커피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 덴마크에서 온 카렌과 그곳에서 만난 데니스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 케냐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는 이 영화는 드넓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보여주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의 상까지 탔다.
그런데 이게 이 영화의 전부일까? 커피 농장은 거기 원래 살던 사람들이 경영해야 맞을 텐데, 왜 덴마크인이 여기까지 와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커피 농장을 운영한 걸까? 러브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유럽인들의 제국주의, 케냐 침략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전역이 엄청 찌듯이 더울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나이로비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날씨가 한국보다도 훨씬 좋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중에서 특히 케냐에 많이 몰려왔던 데에는 이 기후도 한몫했을 듯하다. 영화 원작 소설의 작가이자 실제 주인공인 카렌의 농장이 위치했던 지역도 케냐에서 가장 서늘하고 커피 농사에 좋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 곳에서 살던 원주인들은 유럽인들에 쫓겨나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카렌이 케냐를 떠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에 제목을 Out of Africa라고 지은 걸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제목처럼 유럽인들은 결국 아프리카에서 떠나야(Out)했다. 삶의 터전을 뺏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케냐와 아프리카에 무엇을 남기고 갔을까.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다른 부족을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하나의 국가로 묶어놨기 때문인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이런 상흔만을 남기고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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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풋풋함과 맞바꾼 애틋함
* <동감>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동감 (2022)
감독: 서은영
출연: 여진구, 조이현, 김혜윤, 나인우, 배인혁
장르: 로맨스, 판타지
상영시간: 114분
개봉일: 2022.11.16
1999년의 대학생 ‘김용(여진구)’과 2022년의 ‘김무늬(조이현)’. 두 사람은 우연히 HAM 무전기를 사용하다가 23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거짓말 같은 통신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각자 95학번과 21학번이라고 주장하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그저 누군가의 심술 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차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며 얼굴도 모르고, 실제로 만날 수도 없는 교신기 너머의 상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두 남녀는 가까워진다.
‘김용’은 기계공학과 신입 여학생 ‘한솔(김혜윤)’에게 첫눈에 반한다. 여학생이 귀한 학과에 당돌한 성격에 예쁘기까지 한 학생이 들어왔으니 학교 생활에 따분함을 느끼던 ‘용’에게 활력을 가져다 주기 충분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성격까지 좋은 ‘용’은 나름 학교의 인싸지만 연애 앞에서는 숙맥이나 다름 없었고 20년이나 앞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무늬’는 무전을 통해 여심 저격 방법을 코칭해 준다. 조언은 성공적이었고, ‘김용’은 ‘한솔’과 꿈에 그리던 연애를 시작한다.
자신의 감정에 직진할 줄 아는 ‘김용’과 달리 ‘무늬’는 2022년 현재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고민을 안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에 가면 인생이 잘 풀릴 줄 알았지만 대학에 가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은 물론 오랜 남사친 ‘영지(나인우)’를 두고는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무전을 통해 고민을 토로하며 답답함을 털어내고, ‘김용’ 역시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다는 비슷한 고민을 듣고는 동질감을 느낀다. 쉽게 상념을 풀어 놓을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더 많은 시간을 무전으로 함께한다.
그러나 23년이라는 시간 차를 둔 소통은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무전 통신을 두고 대화만이 오갔을 뿐이지만 각자가 존재하는 시대상의 흔적들도 교신기를 따라 함께 이동했다. 처음에는 1999년도에 사는 ‘김용’이 이해할 수 없는 유행어 정도만이 이동할 뿐이었다. ‘김용’은 자신이 40대가 되어서야 뒤늦게 알 수 있을 법한 신조어를 이해하며 박장대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래에 벌어지게 될 일들을 선택적으로 들을 수 없던 ‘용’은 절대 미리 알아서는 안 될 사건까지 알게 된다. 과거 ‘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무늬’는 ‘용’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전하고, 연애를 시작한 이후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동감>은 2000년 개봉한 ‘유지태’, ‘김하늘’, ‘하지원’ 주연의 <동감>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남녀가 교신한다는 핵심적인 설정만 그대로 유지한 채 작중 배경만 ‘1979년-2000년’에서 ‘1999년-2022년’으로 바꾸었다. 또한 원작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은 ‘김하늘’이 과거를 살아가고, 남주인공을 맡은 ‘유지태’가 현재를 살고 있던 반면 리메이크 작에서는 남주인공인 ‘여진구’가 1999년 과거를, 여주인공 ‘조이현’이 2022년 현재를 맡았다.
중반까지의 진행은 매우 자연스럽고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풋풋함이 뚝뚝 떨어진다. 신입 여학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랑꾼으로 분한 ‘여진구’와 수줍음과 당찬 면모를 모두 갖춘 매력적인 ‘한솔’ 캐릭터를 소화하는 ‘김혜윤’의 연기력은 작중 오글거리는 대사마저 매끄럽게 소화할 정도로 뛰어나다. 두 사람이 학생회관 건물 앞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썸을 타는 과정은 여느 캠퍼스 배경의 멜로 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지만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이 익숙한 스토리라인 속에 재미를 불어넣는다. 특히 로맨스의 감정선을 단독으로 이끌어가는 ‘여진구’의 힘이 대단하다. (‘방가방가’ 같은 최악의 대사도 맛깔 나게 소화하는 치명적인 매력이란.)
문제는 <동감>이 단순 캠퍼스 로맨스 장르의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20년의 간극을 두고 있는 남녀가 짝사랑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동감’을 느끼고, 이 과정을 단 한 번의 대면 없이 오로지 무전 상의 목소리로만 교류한다는 점에서 애틋함을 자아내는 게 핵심 주제이자 중요한 감정선이다. 하지만 원작과 시간적인 배경만 다르게 설정했을 뿐인데 남녀 주인공의 소통은 그리 애틋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용’과 ‘한솔’의 로맨스는 풋풋하면서도 몰입감 있게 그려졌지만 ‘무늬’와 ‘용’의 소통은 전반적으로 어색하기만 하다. ‘베프’, ‘이불킥’ 같은 철 지난 유행어들로 세대 차이를 보여주려는 대사들은 억지스럽기까지 하며 ‘조이현’의 연기력이 ‘여진구’에 비해 부족한 탓에 집중을 흐린다. ‘김혜윤’과 ‘여진구’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감초 같은 매력을 더한 ‘배인혁’이 등장하는 과거 신은 캠퍼스물 특유의 유쾌함과 청춘의 건강한 에너지가 돋보이는 반면 ‘조이현’과 ‘나인우’가 합을 이루는 신은 완성도 낮은 웹드라마를 보듯 부자연스럽다. 후반부 ‘무늬’의 감정선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은 것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1999년의 남자와 2022년의 여자가 오래된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퍽 판타지 같은 설정이다. 2000년에 개봉한 원작 역시 이러한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낭만적인 색채를 부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2022년의 <동감>은 기술이 너무도 발전한 세상의 ‘무늬’가 ‘김용’의 흔적을 척척 찾아내고, 비현실적인 상황의 흐름을 두 사람이 쉽게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판타지의 색깔이 옅다. 특히 ‘용’의 짝사랑 이야기와 달리 실제 있을 법한 Z세대 대학생의 고민을 다룬 ‘무늬’의 이야기는 낭만을 반감시키고 현실성을 덧입히는 요소다. ‘HAM 무전기’와 ‘공중전화’, 1990년대 음악 등 향수와 감성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품들만 들고 왔을 뿐 각 장치들은 애틋함이나 아련함을 연출하지 못한다. 특히 주인공이 소나기를 맞으며 이별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김광진’의 ‘편지’를 사운드트랙을 사용한 것은 촌스럽고 조악하기까지 하다.
원작에 비해 풋풋하고 밝은 색감을 더하는 데는 성공 했는지 몰라도 판타지 로맨스의 애틋함을 살리는 데는 실패했다. 원작의 장치들을 그대로 따라가느라 리메이크 작품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는데 일부 한계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후반부에 갑작스레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것도 뜬금없다.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 첫사랑에 실패한 ‘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는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진심은 언제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영지’를 향한 ‘무늬’의 진심이 통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작중 단 한 번도 아련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등장인물들만이 ‘동감’을 느끼고, 관객은 작품에 전혀 ‘동감’할 수 없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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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고 돌아 마주한 자신의 원죄
2010년부터 매년 가을마다 기존 장편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소재와 장르로 퀄리티 높은 단막극을 보여준 KBS 드라마 스페셜이 코로나 상황을 맞이한 시장 변화에 맞춰 2021년부터 선보인 ‘TV 시네마’ 프로젝트로, 11월 23일 CGV 단독으로 관객을 찾아온 영화 유포자들 리뷰입니다. 얼마 전 ‘귀못’도 그렇고, 작년에도 사회의 현실과 미래 모습을 담아 미스터리, 공포, 스릴러 등 각기 다른 장르의 ‘희수’, ‘F20’, ‘통증의 풍경’, ‘사이렌’으로 찾아왔던터라 익숙한 관객들도 많을 듯합니다. OTT 시장으로 인해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허물어져 반드시 변할 수밖에 없는 공영 방송이라는 틀에 맞추다 보니 아직 미완적 과정에 놓인 듯 보이지만 매해 시의적절한 이야기가 있어 관심 있게 지켜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이번 작품 역시 극장에 개봉 뒤 Wavve를 통해 선공개 스트리밍 서비스가 되고 2022년 12월 28일에 TV로 방영될 예정이니 참고하시고요.※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영화 유포자들 정보 및 예고편
당신의 취미 생활은 온 세상이 알게 될 겁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며 결혼을 목전에 둔 유빈, 약혼녀 선애가 해외 업무차 자리를 비우자 그의 오랜 친구 상범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며 클럽으로 그를 이끌고 갑니다. 그리고 어느 방에 끌려가 유흥을 즐기다, 쓰러지게 되는데, 일어나 보니 전날 밤의 기억과 핸드폰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급하게 돌아온 선애를 우여곡절 끝에 맞이하고 급하게 새로 폰을 개통하는 찰나, 의문의 사내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3천3백만 원을 구해오지 않으면 은밀한 취미를 세상에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받는데...
예고편│ Trailer
영제: The Distributors│감독: 홍석구│각본: 정우철출연진: 박성훈, 송진우, 박주희, 지민혁, 김소은, 임나영 외 多장르: 드라마, 범죄, 스릴러│상영 시간: 101분국가: 한국│등급: 15세 관람가평점: 관람객 9.0, 네티즌 7.46, 기자·평론가 4.0, 왓챠피디아 2.2제작: KBS , 아센디오│배급: 와이드 릴리즈(주)개봉일: 2022년 11월 23일시청 가능 서비스: 현재 극장 상영 중, 이후 Wavve 공개# 영화 유포자들 평점
사회 문제 인식을 전한다
2020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물론, 국제 사회에도 알려지며 외신들도 엄청난 주목과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N번방 사건’에 대한 고찰을 담아내려 합니다.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일반적 상황이라기보다 협박 받았지만 과거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과연 누가 범인인가를 생각하기보다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강화를 향한 개개인 스스로의 의식 변화를 요구하는 모양새를 취하죠. 이는 현재 최악의 상황에 놓인 유빈이 회상하는 과거로 알게 되는 범죄 행위와 뻔뻔함이 묻어나 그가 말하는 인간적 해결 방법이란 모순적 발언에 씁쓸한 분노를 만듭니다. 결국 가해자를 마주한 마지막 장면에서 마치 거울을 본 듯 놀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자신의 범죄 흔적이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왔다는 걸 느껴지게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필수가 되어버린 채 점차 익명성이 하나의 특징이 된 소셜 네트워크의 빈틈을 파고든 사이버 범죄 속 숨어있는 가해자의 민낯에 접근하며 분노로 시작해 권선징악의 희망 사항을 전달합니다. 며칠 전 뉴스를 통해 호주에서 접한 ‘L 씨’처럼 끝까지 추적해 붙잡힌 그 실체에 어쩌면 약간의 카타르시스도 따라올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브라운관에서 주로 활동한 박성훈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죄의식과 함께 혼돈에 빠지는 모습은 앞서 얘기한 그 미묘한 경계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도유빈이라는 인물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일종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KBS 드라마 스페셜 TV 시네마라는 테마로 제작된 영화라고 하지만, 아직은 그 사이에서 헤매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보여주기엔 미장센이나 복선이 단막극 그 이상의 연출이 보이진 않고, 대사 역시 의도적이긴 하나 장면과 어울린다 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공영 방송의 가이드라인이 케이블이나 OTT에 근접하기엔 어려웠다고 할까요? 그렇지만 엔딩의 미러 장면은 노골적이라 해도 확실히 전달해 주고 싶은 메시지를 채워준 듯해 기억에 남았습니다. 과도기라 장점도, 단점도 명확했지만 앞으로 계속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줄 KBS 드라마 스페셜 TV 시네마에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네요. :)한 줄 평 : 개개인의 의식변화가 필요하다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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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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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마지막 기대작 준비.. [ 오징어 게임 시즌2 | 공식 메인 예고편 ] 리액션 & 리뷰 Squid Game Season 2 Official Trailer | 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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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 초기대작 오징어게임 시즌2 메인 예고편 감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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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패뷸러스> 티저 예고편
까이고,치이고,흔들려도 우린 오늘도 직진! 치열하고 뜨거운 청춘들이 온다? 뜨겁게 빛나는 밀레니얼 라이프 《더 패뷸러스》 11월 4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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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30초 예고편
소설가를 꿈꾸는 막심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촌 형의 여자친구 다프네에게 자신의 복잡한 연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막심의 이야기를 듣던 다프네 역시 남몰래 간직했던 자신의 연애담을 슬그머니 꺼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