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3-24 13:52:51
지옥 테마파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넷플릭스 [계시록] 리뷰
이 글은 넷플릭스 작품 [계시록]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명 메뚜기 탈을 쓰고 춤추는 사람이었던 그가, 스무 번째 대상을 타는 모습을 지켜본 날이 있었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그가 여태껏 거쳐온 징검다리들과 절벽들이 내 머릿속에서 스쳐가면서 벅차올랐다.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의 형성에 있어서 정점을, 혹은 또 다른 순간의 환희를 기록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이렇듯 누군가의 세계관이 차곡차곡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야만 지켜볼 수 있는 일이기에, 영광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실망스럽거나 의아할 때도 많다. 그 안에 속해 있는 모든 블록들이 마음에 들면 금상첨화겠지만. 쏟아지는 정보의 사회의 소비자로서는. 단 하나의 조각만 마음에 든다 해도 꽤 건진 게 많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넷플릭스의 [계시록]은 내게 한 번쯤은 앞에 서서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가로수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상호 감독 유니버스의 큰 두 갈래 중[지옥]에서 파생된 쪽에 가까운 작품이고, 또 다른 세계관을 차지하는 좀비 떼가 나오는 영화들에 비해 어둡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아포페니아(참고 1)적 사고를 가진 목사 성민찬(류준열)의 모습은 [지옥]의 정진수의 모습과 참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미 몇십 년에(?) 걸쳐 내재되어 있어 차마 들여다볼 수 없었던 그의 분노와 변화를 이번 작품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해성사라 볼 수도 있는 비밀이 밝혀지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무대도 늘 폐허라는 것도 일치한다. [지옥]에서 쌓아 올린 악마적인 이미지의 재현이 자연스러운 것 역시 덤이라면 덤이다. 물방울만으로 권양래(신민재)를 악마로 만든 모습에서는 고개마저 제법 끄덕여졌다.
그렇다.
이 작품은 [지옥]의 "파생"이지 완벽하게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분명히 기시감으로 가득하지만, 작품의 절반 가량을 할애해 인물의 상황을 만들어가는 솜씨는 꽤 괜찮았기에. 초반부에서 느꼈던 강렬함은 마치 지옥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하지만. 꽤 새로웠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이 작품의 장기였던 치밀한 맛은, 유괴범이 유괴(?)되는 과정부터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부분부터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까지 겹쳐져서 작품의 성격이 급격하게 바뀌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살인자 O 난감] 같은 작품에서 [암수 살인]으로 노선이 변경되고. 그 위에 프로파일링과 치유를 급격히 끼얹어 얼레벌레 마무리해버리려는 것만 같다.
또한 연희(신현빈)가 환영을 보는 장면에서의 카메라 촬영 기법은, 새로운 시도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아이폰 손떨림 방지 광고영상 보다도 못하게 보였다. 어두운 데다 귀신까지(?) 등장하는 이 장면을 더 들여다보다가는 내가 환영을 연희보다 자주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쾌함이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남아 길이길이 되새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나무였건만. 훗날 사진첩을 돌아봤을 때 그날의 추억만 생각날 뿐 그때 느낀 아름다움을 오롯이 기억해 낼 수는 없을 것만 같은. 의미가 많이 사라진 가로수가 된 것만 같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을 사진첩에 남기게 될 것이다. 그의 세계관이 맘에 들고 아니고의 문제는 확실히 별개이지만. 이번 세계관이 나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참고 1
아포페니아: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 의미를 찾는 것.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을 작품에서도 인용하는데. 이런 사람들의 경우는 배가 떨어지면 기어코 까마귀를 만들어 낸다고 묘사됨.
[이 글의 TMI]
1. 마라탕에 꿔바로우 최고!
2. 그리고 난 월요일부터 하체 피티 받는 최후를 맞이함.
3. 요새 자꾸 꿈을 꾸는데... 로또를 살까(?)
#계시록 #연상호 #신현빈 #류준열 #신민재 #한국영화 #지옥 #넷플릭스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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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어퍼컷을 날리다
제목과 브래드 피트만으로 영화를 접근했던 나에게 약간의 칭찬을 주고 싶다. 1999년 당시 젊은 브래드 피트의 연기 모습과 삶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 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이고 자칫 무식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배경 속 반전 결말과 함께 철학적이고 생각해봐야 할 내용이 더러 있는 영화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 네이버 스틸컷
파이트(Fight)
제목 그대로 <파이트 클럽>은 싸움 장면이 많이 나오는 영화다. 스트레스와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원초적인 수단으로 등장하는 파이트 클럽은 마치 우리가 UFC 경기를 보는 것처럼 폭력에 환호성 하고 희열을 느낀다. 사회에 반항하는 듯한 작은 규모의 파이트 클럽이 점차 미국 전역으로 성장 및 확대해가는 흐름을 볼 때 얼마나 반사회적인 감정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는지,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조금은 씁쓸한 영화 흐름이다. 파이트(Fight)라는 의미가 영화에서 단순히 사람과 사람 간의 주먹다짐만이 아닌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삶을 파이트(Fight)한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들이 이용하는 파이트 클럽은 바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새로운 힐링 모임이자 위로의 공간이 된다.
이후 영화는 파이트(Fight)의 영역을 키워나간다. 작은 주먹다짐으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던 모임에서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테러 조직으로 변질되어 사회에 저항한다. 인간이 가진 내재된 사회적 분노를 보여주는 것이 마치 테일러 더든이 <다크 나이트> 조커가 생각나게 한다. 이런 영화 흐름은 결말에도 영향을 끼친다. 테일러 더든이 신용 회사들의 폭파를 막기 위해 헐레벌떡 근처 빌딩으로 달려왔지만, 이후 폭파는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반사회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에 어울리는 결말일 수도 있고,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영화 흐름과도 잘 맞는 결말 같다.
연출
<파이트 클럽>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에게 영화 촬영과 편집을 맡아준 거 같은 깨알 재미를 보여준다. 테일러 더든을 설명하는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내레이션 장면부터 중간중간 테일러 더든이 영화 릴을 교체한 것처럼 등장하는 빠른 포르노 사진의 등장은 영화가 그 자체가 테일러 더든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폭력 요소가 많은 영화라서 전체적인 톤이 어두워 보이는 촬영은 <파이트 클럽>과 어울리는 미장센을 뽐낸다. 그러나 암울한 색감이 드는 배경과 달리 빨강 가죽재킷이나 화려한 색상의 셔츠를 즐겨 입는 테일러 더든을 보면 그가 상상 속 인물이었다는 반전 결말에 납득이 가는 의상들이다. 이러한 연출을 볼 때,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엄청난 센스가 보이는 연출이다.
인생
당신에게 양자택일이 주어졌다. 안정적인 삶과 도전적인 삶.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파이트 클럽> 속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과감하다. 삶의 감사함을 얻기 위해선 죽음의 문턱 혹은 눈 앞에 다가온 위기를 지나야지 비로소 진정한 삶의 희망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것이 좋은 인생이고 올바른 인생이라는 답은 없다. "자기 계발은 자위행위일 뿐이야"라는 테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의 말도 이해가 간다. 한번뿐인 인생을 자기 계발로만 연연하기에는 허무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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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와 자녀의 간극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우린 살면서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한다. 태어나 처음 만나는 부모부터 주변에 하나씩 생기는 친구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 각각의 세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그 주변의 사람들이 영향을 준다. 가족부터 지역, 국가 단위까지 다양하게 확대되면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위기나 외모, 습성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큰 영향을 준다.
그렇게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또 새로운 문화나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인류는 그런 식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과 만나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면서 우리 사회를 만들어 왔다. 이렇게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즐겁게 느껴지지만 한 편으로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의 사람을 만나고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나면 더욱더 잘 모르는 상대방의 내면에 있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문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원소가 어우러져 사는 도시 엘리멘트 시티
픽사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세계에는 물, 불, 흙, 공기라는 4개의 원소가 살고 있다.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엘리멘트 시티'는 이 네 가지 원소가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꽤 큰 대도시다. 여기에 살고 있는 엠버(목소리: 레아 루이스)는 불의 원소다. 불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 대도시로 온 엠버의 부모님은 힘들게 가게 하나를 만들어 대도시에 자리 잡으면서 엠버를 키워냈다.
이 영화는 미국의 이민자들이 흔히 겪는 부모와 자녀 간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한국 사회로 돌려보면, 우리 한국 부모 세대들이 은퇴 직전에 자식과 겪는 문제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의 부모세대들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해 고등교육을 받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자녀를 낳아 키워낸 그 세대는 그 모습 그대로 영화 속 엠버의 부모에 대입할 수 있다.
엠버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똑같은 속성을 가진 불 원소와 결혼하길 빈다. 완전 상극이라고 예상되는 물 원소와는 절대 만나서는 안된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엠버는 우연히 물 원소인 웨이드(목소리: 마무두 애시)를 만나 호감을 가지게 된다. 두 인물은 가게의 파이프 배관에서 물이 새는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가까워지고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엠버의 부모는 절대적으로 자신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인물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들이 살아왔던 삶 속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줬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 부모세대들도 이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경상도 출신 부모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반대로 전라도 출신 부모들은 경상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자녀들이 결혼할 때 자신이 싫어하는 지역 출신과는 결혼을 반대하기도 한다.
지금 부모세대가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
비록 이해를 빠르게 하기 위해 지역을 대입하여 설명하긴 했지만, 각각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종류'가 존재한다. 그건 출신지역이 될 수도 있고, 인종이 될 수도 있고, 국적이 될 수도 있고, 학력이나 재산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각각이 느끼는 것이 다양하지만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부모가 원하는 것과 자녀가 원하는 것의 차이가 이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흔히 벌어지기 때문에 <엘리멘탈>이 한국에서 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녀들은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희생하며 키워준 부모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삶의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그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미안함의 힘일 것이다. 자신을 키우느라 부모 자신이 원하는 건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자녀는 자라면서 계속 봐왔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가 바라는 이상향에 맞춰가려고 노력한다.
영화 속 주인공 엠버는 그런 삶의 한가운데 서있다. 부모는 자신의 가게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엠버는 그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부모가 당연하게 물려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생각을 못한다. 여기에 부모가 가장 싫어하는 물 원소의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서 엠버는 점점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는 엄청난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긴장감을 만드는 건 빌런이 아니라 부모와 엠버 간의 간극
엠버의 고민은 사실 많은 자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자신을 키울 때 어떤 고생을 했는지 보면서 자란 자녀라면 더욱더 부모의 말에 반하는 결정을 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이런 자녀의 고민을 무척 섬세하게 담고 있다. 부모의 기대에 반하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분노조절장애가 되는 엠버의 이미지는 속으로 끙끙 앓고만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엠버가 사랑에 빠지는 웨이드와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데다, 만나면 서로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것처럼 느껴지는 물과 불의 만남은 보는 입장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둘이 손을 잡았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원소의 속성이 변화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진다. 부모가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이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을 나누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둘을 응원하게 된다. 완전히 다른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게 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영화 <엘리멘탈>에는 빌런이 없다. 대신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건 엠버가 원하는 것과 부모가 원하는 것의 간극이다. 그 둘 사이가 벌어질만한 일이 생기면 그 긴장감은 더욱 극대화된다. 어쩌면 이런 엠버와 부모의 갈등과 간극이 한국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다. <엘리멘탈>은 다른 나라에서는 큰 흥행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250만 명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했다.
이 영화를 연출한 피터 손 감독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애니메이터 출신이다. 한국인 이민자의 자녀인 피터 손 감독은 동양적인 갈등 구소를 넣고 부모에게 하는 큰 절 같은 동양적 요소를 추가해 넣으면서 영화에 동양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애니메이터 출신으로서 각 원소가 생활하는 모습이나 분위기를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극장에서 관람하기 좋은 영화다. <엘리멘탈>에는 나쁜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무서운 장면이다 선정적인 장면이 없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부모와 자녀 각각의 입장으로 영화를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 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아직 상영 중인 극장에서 가족과 관람을 추천한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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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달다, 달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기는 초콜릿은 카카오 농도나 첨가되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달콤한 맛부터 씁쓸한 맛, 짭조름한 맛 등 다양한 맛을 지니고 있다. 영화 '웡카'는 한 입만 먹어도 살이 찔 것 같은 치명적인 단맛을 내뿜는다.
'웡카'는 소설가 로알드 달이 집필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프리퀄 작품이자 서브 주인공 윌리 웡카(티모시 샬라메)의 과거사를 다룬다. 2005년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아닌 1971년작 동명 영화의 세계관을 토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술사이자 초콜릿 메이커인 윌리 웡카는 자신만의 초콜릿 가게를 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도시에 입성한다. 자신만의 특별한 레시피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초콜릿을 만들 자신은 있었으나, 도시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 스크러빗 부인(올리비아 콜먼)에게 속아 낡은 여인숙에 묵다가 일꾼으로 전락했고, 마법 초콜릿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으나 초콜릿 카르텔 3인방의 견제 속에 고난의 연속. 심지어 웡카의 초콜릿을 훔쳐가는 움파룸파(휴 그랜트)까지 등장해 과연 초콜릿 No.1이 되려는 그의 꿈이 이뤄질 수 있을지 궁금하게 만든다.
사실 '웡카'의 서사는 전형적인 권성징악형+성장 구조로 되어 있어 특별히 신선하거나 새로운 것은 없다. 대신 '웡카' 메가폰을 잡은 폴 킹 감독이 전작인 '패딩턴' 시리즈에서 선보였던 따뜻한 가족영화스러운 연출을 이번 작품에서도 선보이고 있어 저 연령층까지 부담 없이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 웡카를 비롯해 주변 인물들, 심지어 영화 속 악당들까지 사랑스럽다. 스크러빗과 블리처(톰 데이비스) 콤비, 악랄한데 2% 부족한 듯한 초콜릿 카르텔 3인방은 저마다 매력을 뽐낸다. 특히 움파룸파를 연기한 휴 그랜트는 '웡카'의 최강 신스틸러다. 주황색 피부에 초록색 머리를 한 45㎝ 요정으로 분장한 그의 모습은 웃음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물론 '웡카'에서 티모시 샬라메를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반짝반짝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진 와일더(1971년), 조니 뎁(2005년)에 이어 웡카를 맡으면서 뮤지컬 영화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가창력, 춤, 연기 3요소를 소화해 글로벌 스타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순수하면서도 선량한,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찬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끌고 나간다.
명곡 'Pure Imagination(완벽한 상상)'을 필두로 경쾌하고 달달한 노래들과 화려한 군무, 통통 튀는 CG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둥실 초코' 맛을 선사해 기분 좋게 만든다. 너무나도 달달한 '웡카'의 초콜릿 맛에 취해 기분 좋게 귀가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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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적인 세계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일
영화 <문라이트>를 두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만을 한다는 것은 작품을 겉도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문라이트>는 서정성 짙은 퀴어 영화로, 이 영화가 서정성 짙은 퀴어 영화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있습니다. 때문에, 굳이 저까지 이미 나와있는 수많은 좋은 평론들위에 비슷한 한마디를 거드는 것보다는 비록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한 훌륭한 작품은 답을 정해놓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를 전달해주며, <문라이트>는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아도 이미 다양한 화두를 제시하는 훌륭한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회, 방임된 채로 자라는 빈민가의 아이들, 다름의 이유로 받는 차별의 시선과 폭력, 그리고 사랑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까지. <문라이트>를 이야기할 때 다룰 중요한 이야기들은 많지만, 개인적으로 눈길이 갔던 이 영화의 화두는 ‘정체성’입니다. 타인의 시선이 정해주는 ‘나’, 내가 정의하는 진짜 ‘나’에 관한 정체성말입니다.
영화는 이 정체성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졌습니다. Nomen est omen, 이름은 곧 운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문라이트>는 주인공 샤이론의 성장과정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보여주는데, 이 세시기에 샤이론은 각각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세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주인공 ‘샤이론’과 각각의 삶을 보자면, 각각의 샤이론과 그에게 붙여진 이름을 통해서 샤이론이 폭력적인 세상속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수 있을 것입니다.
ⅰ, Little
유년기의 샤이론은 가장 작은 존제, ‘Little’이란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덩치도 작고 키도 작은 샤이론은 또래 아이들에게 쫓겨 마약 소굴인 15번가로 도망쳐 온 후 어두운 폐가에 숨어듭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폐가로 친구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숨은 샤이론. 그리고 그런 폐가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돈 후안(마허샤마 알리)입니다. 이 시기 샤이론은 특히 말이 없습니다. 가장 작은 존재이자 약자인 샤이론이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침묵을 지키면서 세상을 관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Little’은 그의 또래들 사이에서 샤이론을 부르는 별명인데, 이 별명은 또래들보다 덩치가 작은 샤이론을 빗대어 비하하는 말입니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은 샤이론을 낮춰 부르지 않고 그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불러줍니다.
케빈
그는 샤이론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Little’이라고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어떤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고, 우정의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샤이론의 친구 케빈입니다. 케빈은 영화 <문라이트>에서 샤이론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인데, 이 시기 케빈이 샤이론에게 해준 “왜 당하고만 있어?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라는 말은 샤이론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돈 후안.
돈 후안과의 만남은 첫 만남이후로도 계속됩니다. 유년기 시절 돈 후안과의 짧은 만남과 교류는 영화 <문라이트>를 관통하는 주제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특히 해변가에서 둘이 나눈 대화는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유년기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만난 돈 후안은 아버지가 없는 샤이론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해주며,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세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마.”
D : “한번은 어떤 할머니를 지나쳐 가고 있었어.”
D : “미친 듯이 들떠서 뛰고 있는데, 그 할머니가 나를 잡고는 말했어.”
D : ‘달빛을 쫓아 뛰어다니는구나. 달빛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너도 파랗구나. 이제 널 그렇게 불러야겠다. 블루.’
C : “그럼 아저씨의 이름은 블루인가요?”
D : “아니...”
D :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마.”
ⅱ, Chiron
청소년기의 샤이론입니다. 샤이론은 이제 ‘리틀’이라는, 자신을 놀리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샤이론’으로 불려지길 원합니다. 샤이론은 성장했고, 이제 세상 모든 일에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르고 약해보이는 몸은 여전합니다. 때문에 차별의 시선과 폭력앞에서 샤이론의 저항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이름, ‘샤이론’이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샤이론. 그것은 샤이론의 이름이긴 해도 샤이론이 선택한 이름은 아닙니다. 때문에, 샤이론이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성장의 과도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의 중반에 있기에 적합할 것입니다.
케빈
이 시기 만난 케빈은 샤이론과 깊은 관계로 진전됩니다. 우정처럼 보였던 케빈과 샤이론의 관계는 이 시기에 애정으로 변합니다. 샤이론에게 학교에서 관계를 맺었다며 가볍게 말하는 케빈의 눈빛은 가볍고 철없으며, 목소리와 성대모사는 경박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남성성을 과장하여 드러내어, 또래들에게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샤이론을 대할때만큼은 케빈의 눈빛은 깊고 진지합니다.
그리고 다시 학교. 이 시기 샤이론을 괴롭히는 동급생, 테렐은 케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옵니다.
블랙.
학교의 화단 앞. 테렐은 궁지에 몰린 초식 동물을 공격하려는 맹수처럼 누군가를 응시하며 그 누군가를 중심으로 한바퀴를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테렐이 이빨을 들어내고 달려든 것은 샤이론이 아닌 케빈입니다.
“이봐 케빈. 저 새끼 갈겨. 패버려.”
“그래 저 호모새끼말이야.”
테렐은 겁먹은 케빈을 다그칩니다. 케빈의 앞에 서있는 것은 샤이론입니다. 케빈은 테렐과 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반면, 샤이론은 고개를 높이 들고 그들 앞에 당당하게,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샤이론은 케빈에게 맞을때마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지만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서 똑바로 일어서서 자신을 향한 폭력과 차별의 시선에 마주합니다. 아마 이 순간에, 샤이론은 이제 자신이 겪은 아픔의 크기만큼 성장했을 것이며, 자신의 진짜 이름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블랙. 냉수에 얼굴을 담았다가 고개를 들어올린 샤이론의 모습은 말 그대로 블랙입니다. 상처에서는 선혈이 붉게 빛나고, 피부는 검정색이지만,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투영되는 샤이론의 영혼이 가진 색은 더없이 맑고, 밝게 빛납니다. 그의 빛나는 눈빛에는 순수한 결연함과 용기가 녹아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자신의 운명을 찾은 것처럼, 그의 눈빛은 진중합니다.
ⅲ, Black
샤이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테렐을 향한 폭력은 단순한 복수의 감정도 있지만, 케빈을 위한 희생이자 용기이기도 합니다. 케빈은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보이는 세상과 시선에 주눅들어 자신을 감추는데 급급했던 반면, 샤이론은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케빈을 위해 기꺼이 용기를 냈습니다. 그래서 당시 경찰에게 연행된 샤이론과 케빈이 나눈 시선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세상과 맞선 자’와 그러지 못한 자의 감정이 녹아있습니다. 케빈의 시선에는 어떤 분함이, 샤이론의 시선에는 흐릿한 안정감과 평화가 언뜻 읽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샤이론은 이젠 완벽한 성인이 되었고, 이 시기는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를 시작하는 한편의 꿈. 유년기 시절 ‘폴라’가 샤이론에게 했던 말, “쳐다보지 마!”라는 고함과 함께 잠에서 깨며 블랙의 삶이 스크린에 나타납니다. 꿈에서 깬 블랙은 세면대에 받아놓은 얼음물에 얼굴을 담았다가 꺼내는데, 이때 그의 피부는 달빛이 아닌 인공 조명의 빛을 받아서 푸르게 빛납니다. 이 두 개의 컷은 샤이론이 더이상 과거와 같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습다. 이 두 장면은 자신의 검은 피부를 인공 조명의 푸른 빛으로 물들이는 ‘부정’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푸른 빛을 뒤집어 쓴 샤이론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푸른 빛은 그의 본래 색위에 덮어 씌워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는 그가 가진 본래의 피부 색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겉모습을 근육질로 다부지게 만들어도 오랜만에 만난 옛 사랑과 엄마의 말 몇마디에 눈물을 흘리는 그의 변하지 않는 여린 내면처럼, 지워질 수 없는 그의 검은 피부색 위에 블랙은 푸른색을 덧칠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이름.
흐릿하게 보이는 잔상. 푸른 바다, 푸른 달빛. 도대체 누가 푸른 달빛아래에서 흑인아이들도 모두가 푸른 빛을 낸다고 했던가요? 아이들은 푸른 세상에서 모두가 자신의 색을 지키고 있습니다. 당연스럽게도, 푸른색이 그보다 더 짙은 검정색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죠. 이 잔상은 샤이론이 점차로 세계속에서 자신의 색을 되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가 되찾은 색은 그의 이름이 됩니다. 그의 이름은 누군가가 지어준 것이지만, 동시에 그가 선택한 이름입니다. 바로 케빈이 샤이론을 부르곤 했던 별명, ‘블랙’입니다.
영화는 샤이론의 세 시기를 보여주며 그의 성장과정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시기, 샤이론을 칭하는 이름의 의미는 모두 다릅니다. ‘리틀’은 샤이론을 둘러싼 세계가 정해준 이름. ‘샤이론’은 태어나기전부터 부모가 정해주었으며, 샤이론 역시 옳다고 생각하는 이름. ‘블랙’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인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며 선택한 이름입니다.
영화 <문라이트>가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사랑’의 역할이 크다는 데에 있습니다. 리틀은 돈 후안과 테레사의 사랑으로 샤이론으로 성장했고, 샤이론은 케빈과 테레사의 사랑으로 성장했으며, 블랙은 폴라와 케빈의 사랑으로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이 정의하는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가며, 그들의 사랑속에서 위로받고 한 뼘 더 성장해갈 것입니다.
푸른 빛의 상흔, 지워지지 않는 블랙
이 영화는 어린 리틀을 다시 호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푸른 달빛아래, 푸른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 온통 푸른 세상속에서 홀로 서 있는 아이. 온통 푸른 세상이지만, 아이는 그 안에서 여전히 자신의 색을 유지하고 꼿꼿이 서있습니다. 군데군데 푸르게 빛나는 아이의 피부는 아름답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푸른 빛이 아이가 가진 검은색의 피부위에 침투해있기에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아니, 그렇기에 아름다울지도 모르죠. 검은 피부위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은 세상이 애정어린 손길로 샤이론에게 칠해준 아름다운 반사광이 아닌, 세상이 폭력적으로 모두에게 칠해버린, 일종의 상흔입니다.
때문에, 달이 세상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칠해놓은 푸른 빛과 자신의 본연의 색을 함께 갖고 있는 샤이론의 모습을 담은 <문라이트>는 폭력적인 세계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켜내는 인간상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온몸에 수많은 상처를 입고도 세상과 당당히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서정적으로 표현한 영화는 <문라이트>의 이전과 이후로 한동안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데미안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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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2021)
마고 로비의 할리퀸을 제외하면 어떤 특별함도 찾아볼 수 없었던 전작의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가오갤 시리즈의 제임스 건 감독하에 속편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미 <가오갤>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보여주기도 했고, 일단 굉장히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인 제임스 건의 지휘아래 만들어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DC가 내놓았던 이전 작품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불명예를 씻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부디 전작은 잊으시오...!
이 영화는 전작을 지워내고 새롭게 다시 쓰고자 하는 의도가 언뜻 엿보이는 작품이다. 우선 할리퀸을 비롯한 몇몇 캐릭터를 제외하곤 전작과의 접점이 없으며,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팀원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다가 작전에 투입된 전작과는 달리 이 영화는 역순행의 플롯을 여러차례 사용하여 전작의 익숙한 이야기 구성을 버리고 새로운 플롯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구성이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으며 쉽게 따라갈 수 있어서 나름 성공적이라고 보았다. 그외에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죽는 전작의 주요 멤버의 모습, 그리고 ‘2’가 아닌 정관사 ‘The’를 붙인 영화의 제목 등을 통해서 이 작품은 이전 작품인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완전히 지워내고, 그 자리에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새롭게 써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칙칙한 DC에 마블 한 스푼
히어로 무비의 양대 브랜드 DC와 마블의 차이점을 말하라면, 대다수 사람들이 영화의 분위기를 말할 것이다. DC의 히어로 무비는 대체로 어두운 반면, 마블의 히어로 무비는 대체로 밝고 화사하다. 흥행작은 밝고 화사한 분위기의 마블 히어로 영화들이 앞서지만, DC의 어두운 히어로 무비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DC의 흥행타율이 낮았던 것은 사실이고, 흥행을 떠나서 그 어두운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작품은 <조커>,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정도로 손에 꼽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분명, DC의 어두운 분위기는 마블과는 남다른 매력을 갖고, 때때로 걸출한 성공사례들을 만들기도하지만, 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분명 실패한 사례였다.
애초에 소재에 대한 접근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었을까? 새롭게 기획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마블의 <가오갤>을 감독했던 제임스 건에게 감독을 맡기고 새롭게 돌아왔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작품을 대하면서 이전 작품과는 다른 매력으로 중무장했다. 우선 딱딱하게 프로파일을 읽으면서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팀원들을 소개하던 전작의 방식과는 달리, 이 영화는 작품속 인물들이 직접 자신의 프로파일을 읽거나 보여주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순차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런 방식으로 캐릭터와 관객의 거리는 조금 더 가까워진다. 어딘가 하나씩 모자라거나 단단히 미쳐있는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B급 감성 역시 캐릭터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요소중 하나다.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만큼, 영화가 산만하고 난잡해질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캐릭터간의 전체적인 조율이 좋아 그 소란스러움에서 오히려 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잔인함이 유혈이 낭자한 정도를 넘어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다만, 이 영화는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등급이 증명하듯이 꽤나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특히 태스크 포스 X의 릭 플래그의 팀원들이 함정에 빠져 힘든 전투를 해나가는 씬의 잔인함에는 깜짝 놀랄 정도다. 그저 단순히 유혈이 낭자한 것이 아니라 신체가 훼손되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아마도 그건 첫 장면부터 자극적인 영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또한 빌런 영화인만큼 그 장르의 매력을 위해 잔인함과 냉혹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빌런 영화라고 해서 잔인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무조건 이해해주어야 하는 부분인걸까? 개인적으로는 어느정도는 옳지만, 어느정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술에 윤리의 척도를 들이댄다는 일이란 역시 어느정도는 무리가 있는 일이지만, 어느정도는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미디어시대에 예술작품들이 대중들의 잠재의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어떨까.
개인적으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어느정도는 오락적인 연출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정도는 영화의 주제를 위해서 고어적인 연출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딱지를 달고 나온 작품인만큼,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미 충분한 교육을 받았고, 자정의 능력이 있는 성인들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때문에, 이미 청불 등급을 달고 나온 이 영화는 표현의 자유를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 물론,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영화의 고어함은 단순히 끔찍한 장면을 늘어놓는 것으로 관객들의 내재된 폭력성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의 오락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누군가를 단순히 고문하고 괴롭히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액션의 합으로 연출되는 이 영화의 잔인한 장면들은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키는 요소들이다. 또한, 주연과 조연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오는 잔인한 죽음은 사회에서 가장 가치없는 루저들의 죽음과 영웅의 죽음, 그리고 한 나라의 지배자와 독재자의 죽음이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도 역시 잔인한 걸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다소 꺼려지는 작품일 수도 있을듯)
루저들이 무너뜨리는 거인들의 역사
여튼,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잔혹한 범죄자들로 구성된 팀으로, 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를 쳐주지 않는 이들이다. 즉, 이들은 흔히 루저라고 불리는 사회의 가장 최약계층들로도 상징되는데, 이 영화속에서 이 루저들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저항군, 독재국가의 시민들과 쥐 떼는 서로 같은 상징성을 갖고 연결된다. 그리고 이들이 자신보다 훨씬 큰 거인을 쓰러트린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 그리고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에서 확인한 그 배후와 그것을 풀어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영화는 잔혹한 범죄자에 불과한 루저들의 이야기를 현대 사회의 힘없고 약한 이들의 이야기로 확장시키고 있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는 단순한 오락영화에 그쳤던 전작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매력적인 오락성을 놓치지 않되, 그 단순했던 전작의 이야기와 소재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제임스 건 감독의 탁월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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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개인의 투쟁기를 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할 때가 있다. 부당하게 자신의 것을 빼았겼거나, 불이익을 받을 때 그리고 자신의 친한 지인이나 가족이 어떤 피해를 당할 때면 그것에 대항하여 투쟁을 해야 한다. 그것은 법적인 투쟁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시위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 투쟁의 경중은 있겠지만 누구나 어떤 기관이나 개인에게 불만을 토로하거나 논쟁을 하는 것도 개개인의 작은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권리나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데는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 투쟁이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그 상황에 적응해서 살아가게 된다. 그 영향은 그대로 자녀에게도 전달되어 어떤 에너지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 자녀도 작은 투쟁을 해나가며 삶을 이어간다. 어쩌면 이런 작은 싸움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렇게 아주 작은 투쟁들을 이어나간다. 무엇보다 모든 투쟁의 과정에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길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기회가 오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방행자라는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의 아들 손원경의 삶도 비춘다. 손원경은 장난감 수집광으로 장난감 박물관을 운영하며 지내왔던 인물이다. 그가 이런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발자취를 알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어머니 방행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은 투쟁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그의 죽음에 대한 부당함을 같이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의 투쟁은 아주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에게서 온 이혼 통보 서류를 받은 그는 곧 이혼 취소 소송을 진행한다. 그 당시에 전례가 없었던 법적 투쟁으로 방행자는 그 일에 자신의 노력을 다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지냈던 그에게 그것은 어쩌면 그가 느낀 부당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영어로 된 메모와 그가 그 당시 테이프에 녹음했던 통화 기록들에서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그 일에 매달렸는지 알 수 있다.
그가 두 번째로 투쟁하게 된 것은 조금은 사회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오랜 기간 살았던 대원군의 별장에 대한 것이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가 나타나며 법적 투쟁에 나선다. 몇십 년의 법적 싸움 끝에 결국 집을 잃게 되는데 그 이후 그는 에너지를 잃은 듯 보이지만 그는 그 싸움의 에너지를 그림을 그리거나 피아노를 배우면서 소모해 나간다.
아들과 손자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마지막 투쟁은 아들의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 경향신문 본사 건물에서 장난감 박물관을 하던 아들 손원경은 매장과 관련하여 신문사의 부당한 대우를 받고 매장을 철수하게 되는데 그 싸움을 그 당시 아팠던 아들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여러 매장과 관련이 있었고 신문사와의 투쟁이었기에 어쩌면 가장 사회적인 투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 신문사 건물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다.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방행자라는 인물이 어떤 방식으로 싸움을 이겨냈고, 또 어떤 인물인지를 조금씩 보여준다. 해당 인물의 아들이 연출하고 있는 다큐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개인적인 사심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는 영화다. 영화는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객관적 일지는 사실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방행자라는 인물의 투쟁이다. 방행자의 투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개인에게는 좀 크게 느껴지고, 사회에서는 그렇게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목소리를 외부에 알릴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소 객관성이 떨어져 보이고 영화적 완성도가 조금 부족해 보여도 이런 개인적인 노력과 삶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은 있을 것이다. 영화 <그리고 방행자>는 그런 점에서는 의미 있는 다큐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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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병 환자들의 이선생 찾기는 계속된다
?Rabbitgumi 입니다!
지난 주 영화 독전2가 넷플릭스에 공개되었습니다.
1편의 하이라이트와 결말부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어요.
감독이 바뀌었지만 등장인물은 그대로 입니다.
형사 원호와 락 그리고 브라이언이 극을 이끌죠.
큰칼이라는 강력한 캐릭터도 있죠.
그런데 영화가 많이 느슨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영상에서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업데이트하고 있는 영화 에세이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일반적인 영화 리뷰 보다는 보면서 떠올렸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정리하여 전달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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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아걸 제아가 리뷰하는 영화 싱 스트리트 & Lost Stars 기타 라이브??이거 안 보면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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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고슬링이 그레이 맨으로, 크리스 에반스가 사이코패스 기질의 적수로 출연하는 <그레이 맨> 넷플릭스 제작의 스릴러 영화로 앤서니 루소와 조루소가 연출을 맡았다. 7월 22일,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 공개 예정. 그 외에도 아나 데 아르마스, 레게장 페이지, 다누시, 바그네르 모라, 알프리 우다드가 출연한다. 마크 그리니의 소설 <그레이맨>을 원작으로 하며, 조 루소와 크리스토퍼 마커스, 스티븐 맥필리가 각본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