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2-19 20:41:00
흑백 현실 속 총 천연색 꿈
영화 [더 폴]리뷰
이 글은 영화 [더 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샤흐리야르 왕의 마음이 이랬으리라.
불륜을 저지르는 왕비의 모습을 지켜만 보았을 왕의 마음이 로이(리 페이스)는 어쩐지 이해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 자신의 꼬라지를 본다면, 오히려 왕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찰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가련한 환자는 사랑에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커리어 까지도 자신의 척추처럼 박살 나게 생길 위기였으니까. 이 기구한 운명을 꼼짝없이 견뎌야만 하는 답답함을 알아주는 누군가라도 등장해 주면 좋으련만. 지금 로이의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리 봐도 아직 숫자를 3까지 밖에 모르는 것만 같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운타루)의 존재가 전부였다.
그러나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 앞니 빠진 암살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이 결국 그렇게 넘고 싶어 하는 요단강(?)도, 쉽게 건널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의 운명까지 내걸어 볼 심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이 구원자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로이는 입을 열었다. 이 얕고 가는 자신의 목숨줄을 좌지우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꼬마 샤흐리야르 왕 앞에서. 로이는 기꺼이 세헤라자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암살자의 스턴트는 실로 대단했다.
로이가 수행할 수 없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스턴트 역할을 거리낌 없이 수행했다. 물론 이 초보 복면에게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이 넘어가는 숫자에 기겁을 하기도 하고(!) 공범인 주제에 도덕적 잣대가 너무 높아 대역을 하지 않겠다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지만. 세헤라자데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황홀경에 빠져 망설임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미션 수행의 시간이나 방법도 치밀해져 갔다.
하지만 마지막 미션의 벽은 이 하룻강아지 대역에게는 여전히 조금은 높았다. 닿을 듯 닿지 않아 힘껏 까치발을 해야 할 것임을. 로이는 알 수 있었다. 로이는 반드시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이루고 싶었고. 그러려면 알렉산드리아에게 연료를 계속 불어넣어 까치발의 끝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간신히, 하지만 반드시 쥐어져야만 했다.
그는 환상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스턴트를 이어가야만 했다. 오디어스를 찾아가는 여정은 더 험하고 어려워져 갔고. 그의 애달픈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마스크 밴디트는 충실하게 로이의 대역을 해냈다. 알렉산드리아의 눈이 여전히 처음처럼 빛나는 것을 보면서. 로이는 현실의 자신도. 자신의 대역인 밴디트로서도. 조금은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도, 삶도 조금씩 간절해지는 세헤라자데는 자꾸만 자신의 왕이자 대역인 알렉산드리아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로이는 다리에서 떨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모두가 실패했다며 손가락질을 하던 그 순간을. 단 한 번의 낙하로 인해. 자신이 알던 사람들의 등 외에는 이제 기억할 수 있는 모습은 없을 것만 같았다. 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원래 서 있던 곳이 참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로이를 대신해 그 높은 곳에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낙하해 버린. 이 꼬마 스턴트역을 보며. 로이는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로이의 작은 왕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라고 명령했지만. 세헤라자데는 이제 이 허무맹랑한 모험의 끝이 자신의 손으로 이뤄져야 함을 알고 있었다. 로이는 환상 속 모든 인물들을 추락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실패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인물들의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추락은 마치 영화 [인셉션]의 킥(kick)과도 같아서. 두 세계에 모두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저 한 세계에서 추방할 뿐. 그 어떤 의미의 실패도, 죽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의 추락으로 인해 겁에 질린 로이는 그 사실조차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 겁쟁이인 자신을 대신해 기꺼이 추락을 감행했고. 결국 그를 죽음이라는 망상에서 구해냈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결국 세속적 욕심이 3까지 밖에 없는 무자비한 왕(?)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추락이자 실패라 여겼던 작품을 이 꼬마 대역에게 보여주겠다는 결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심의 끝에. 두 운명 공동체(?)는 겨우 웃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쫓은 뒤 덩그러니 둘 만 남아버린 환상의 세계는 이제 끝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몇 번이고 재생될 것만 같은 유일하고도 독특한 이야기가 되어. 두 벤디트의 뱃속에서 영원히 날갯짓을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추락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힘차게 날아오르면서.
마치면서
그들의 인생은 서로를 만나기 전 까지는 흑백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로를 만나는 순간부터 꾸게 된 모든 꿈들은 총천연색이었다. 차갑고 메말랐던 일상이 이렇게 질감과 색감으로 넘쳐나는 것으로 변화할 때까지의 지분은 거의 모두 알렉산드리아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영화를 보며 그저 잿빛에 지나지 않았던 회사원의 하루를 예쁘게 물들여 준. 같이 영화를 봐준 친구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만두 또 먹으러 가쟈!!!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추락, 스턴트, 그리고 세헤라자데의 모티브를 가지고 글을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의 TMI]
1. 정말 물리적으로 시간이가 없다. 돌아버림
2. 환상 속 5인조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후레쉬맨 같아서 빵 터짐
3. 이런 뽀송한 질감의 영화 너무 좋다
[다음 리뷰 예고]
미키 17!!
원작이랑 얼마나 다를지(?) 기대된다. 근데 봉감독님 나빠.. 애를 원작보다 열 번이나 더 죽였어ㅠㅠ
#더폴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munalogi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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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자본과 번호, 이름과 사랑
퇴근하고 잔뜩 지친 몸을 이끌어 지하철에 오른다. 각자의 온도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뜨끈한 등과 어깨를 꾹, 꾹 밀며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 본다. 한 정거장 지나자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간, 당신의 눈이 드물게 번쩍 빛난다. 그러나 옆에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던 중년 여자가 당신보다 훨씬 빠르게 엉덩이를 붙여버린다. 당신은 미간을 팍 구기고 다시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다. 유해한 도파민이니, 뇌세포를 파괴한다느니의 말들은 쓸모없다. 무의미한 작은 직사각형의 세상으로 당신은 있는 힘껏 오늘로부터 도망친다.
결국, 21 정거장 내내 서서 온 당신은 길거리에서도 핸드폰에 눈을 떼지 않는다. 아무리 편한 운동화를 신어도 언덕을 오르는 종아리는 풍선처럼 부풀어 터질 것만 같다. 당신은 길고도 긴 여정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 버튼을 누르다가 무심코 거울 속 자신과 마주한다. 그 속의 사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당신의 자리가 아닌) 당신의 자리를 뺏은 중년 여자와 얼굴이 겹쳐지면서, 핸드폰으로 겨우 외면했던 질문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내가 원래 이런 표정이었나?"
나는 정말 '나'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름 모를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거울 속 나는 몇 번째 '나'일까?
블랙 코미디 + SF + 우화의 공식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지독히 사실적이면서도 어쩐지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블랙 코미디 + 우화' 공식으로 성공한 작품을 말하자면 당연히 <기생충>(2019)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자본과 계급으로 분명하게 나뉜 두 가족의 이야기를 보면 속이 울렁거리면서도 어쩐지 헛웃음이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싹 젖는 감각이 생생한 동시에 몽롱한 동화 같으니 말이다. 한국 SF 장르와 봉준호 감독 세계관에 한 획을 그은 <설국열차>(2013)도 디스토파이 세계관에서 아주 긴 열차 칸으로 나뉜 계급 이야기다. 위와 아래, 앞과 뒤. 뒤집으면 언제든 서로가 될 수 있는 구조. 그는 열과 행의 이미지로 끊임없이 자본주의에 잠식된 현재와 미래를 그리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논의한다.
그의 대표적인 크리처 무비인 <괴물>(2006)과 <옥자>(2017)도 전체적인 세계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빠질 수 없다. 이렇게 계승한 블랙 코미디 + SF + 우화로 더욱 견고해진 봉준호 감독의 작가 주의 세계관을 통해 <미키 17>(2025)이 세상에 나왔다.
<미키 17>은 지구가 멸망을 앞둔 디스토피아적 근미래 배경이다.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나자고 주장하는 이들과 망가진 지구를 어떻게든 고쳐서 쓰자 주장하는 정당의 대립이 이루어지는 혼란함 속에서, 친구 '티모'와 차린 마카롱 가게가 쫄딱 망해 거액의 빚을 진 주인공 '미키'는 빚쟁이를 피해 지구를 떠나려고 한다. 얍삽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티모와 달리 자존감도 낮고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어떻게든 영토 개척 프로젝트 우주선에 탑승하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접수를 받는 직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제대로 읽었는지 몇 번이나 물어봤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익스펜더블은 진짜 '극한 직업'이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모두 미키를 앞세운다. 우주선을 고치는 줄 알았더니 사실 방사능 실험이었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몸이 망가지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4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얼음행성 '니플하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미키가 먼저 땅을 밟고 있는 힘껏 공기를 마신다. 그리고 피를 토한다.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몇 번이고 죽음은 미키'들' 덕분에 다른 요원들도 마음껏 차가운 입김을 볼 수 있게 된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와 일상에 도사리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미키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나샤'의 사랑이다. 미키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곁을 지켜주는 나샤를 사랑하면서도, 최고의 요원인 그녀가 왜 하찮은 자신을 사랑하는지 의문을 품으며 그녀를 내조한다.
그날도 17번째 미키는 추락사로 몸이 반토막이 나 죽었어야 했는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얼떨결에 살아남아 지나가던 티모에게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티모는 떨어진 무기만 챙기고 다친 그를 향해 재수 없는 질문만 툭 던진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그렇게 덩그러니 남은 미키는 행성의 주인인 '크리퍼'에게 잡아 먹히며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크리퍼는 잡아먹긴커녕 미키를 질질 끌고 가 얼음 동굴 밖으로 내보낸다. 크리퍼가 자신을 눈밭에 던져 얼려 죽일 작정이라고 생각한 미키 추위에 떨며 힘겹게 함선으로 돌아온다. 잔뜩 지친 몸을 침대에 내던지는 순간, 어떤 인기척에 이상함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 미키 '18'과 마주한다.
복제의 사이클
'익스펜더블'은 사뭇 다른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의 '복제 인간'과 다른 점은 미키가 자신이 익스펜더블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이것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징그럽고 코믹한 정치인 마샬 부부의 영토 개척지 정책의 핵심은 좋은 유전자로만 구성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몇 번이나 복제된 미키는 불량품에 불과하다. 나샤와 카이, 과학자 도로시를 제외한 주변 인물들도 미키가 느낄 고통과 죽음을 경시한다. 죽음에 대한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살피지 않는다. '그게 네 쓸모고 직업이야.'라는 폭력적인 말 한 마디면 미키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니까. 과학자와 의료진도 처음엔 프린팅 되는 몸을 잘 받아줬지만, 나중에는 바닥으로 꼴사납게 떨어져 구겨진 몸에 주사 바늘을 꽂을 뿐이다.
시체, 쓰레기 등 자본과 사회의 찌꺼기는 모두 '사이클러'에 던진다. 용광로처럼 생긴 사이클러는 단순히 쓰레기를 소각하는 게 아닌, 단백질을 다시 분해하고 재생산해서 다음 미키를 만들어내고 선원들의 식사가 된다. 익스펜더블이 아닌 인물들도 자기도 모르게 이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다. 미키는 끊임없이 소각되고 다시 출력되며, 권력에 의해 멸시받는 노동자들의 응집된 몸이 된다.
꼭 프린터기에 들어가야만 복제 인간의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마샬 부부는 특히 우수한 가임기 여자 요원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궁, 아니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샬 부부를 향한 카이의 날카로운 질문처럼 그들에게 여성은 다른 의미의 '인간' 프린터다. 인류 번식과 자신들의 부를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를 출산할, 인간이지만 프린터의 역할을 해줄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퍼와 인간의 첫 대면에서 미키가 아닌 제니퍼가 죽었을 때 추악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카이와 제니퍼가 연인 사이인 줄도 모르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성과 결합해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란 편견도 끼얹으며 말이다.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일파 마샬은 이상하리만치 '소스'에 집착한다. 살아있는 베이비 크리퍼의 꼬리를 잘라 바로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장면은 경악스럽다. 굳이 손가락에 찍어 맛을 보라고 권유하고, 배양육인지도 모르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미키에게 메인 디쉬가 아닌 소스 맛이 어떤지 묻는다. 이렇듯 소스는 일파가 강력하게 표현하는 권력의 상징이자 일개 노동자들과 자신의 차이다. 효율을 위해 정해진 칼로리 안에서 구역질 나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닌, 맛과 건강을 추구하고 음미하는 삶이 최고의 권력인 것이다. 미키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긴 하지만, 마샬 부부의 눈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비슷하다. 노동자 1, 노동자 2, 비위를 잘 맞추는 노동자, 말을 안 듣는 노동자. 선원들은 자신들을 미키와 달리 분명한 이름과 존엄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부의 시선에선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휴지 조각 같은 존재들일뿐이다. 생존을 인질로 잡고 있는 자본의 힘이 있는 한 사이클러는 무엇보다 뜨겁고 부지런히 권력을 위해 움직인다.
인간보다 나은 크리퍼
’Creepy’에서 유래된 이름인 ‘크리퍼‘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완전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인간의 시선에선 낯선 외형이 두렵고 징그럽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니플하임에 마음대로 정착해 들쑤시고 다니는 인간이야 말로 외계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이름도 꽤 무례하게 느껴진다.) 애초에 크리퍼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생명체도 아니었고, 유일한 친구인 티모마저 외면한 위험에 빠진 미키를 구해준다. 미키는 크리퍼의 의도를 완전히 오해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나샤는 '크리퍼가 구해줬다'라고 정확하게 짚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2000)를 본 사람들이라면 크리퍼를 보자마자 ‘오무’가 떠올랐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 나라와 나라의 대립을 그린 영화로 주인공 ‘나우시카’가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오무 무리들과 소통하는 장면은 미키가 통역기를 사용해 크리퍼에게 곧 가스가 살포될 테니 도망치라고 알리는 장면과 비슷하다. 크리퍼가 본격적으로 서사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어쩐지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장르 믹싱 기법이 눈에 띈다.
크리퍼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소통하며 정보 공유가 가능하다. 미키의 이름도 잡혀있는 베이비 크리퍼 ‘조코’를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마마 크리퍼는 외형이 똑같은 두 베이비 크리퍼의 이름을 정확히 구분한다. 죽은 아이는 ‘로코’, 잡혀 있는 아이는 ‘조코’.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명확하게 각자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으며 공동체가 힘을 합쳐 움직여야 하는 순간이 언제인지 잘 알고 있다. 외형도 전부 다르고 고유한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치환되는 인간들이, 정작 동료가 위험에 빠진 순간 힘을 합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마 미키가 크리퍼였다면 마마 크리퍼는 단순히 그의 이름에 번호를 붙여 구분하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익스펜더블이라는 비윤리적인 직업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더 앞서 삶의 터전인 행성을 그렇게 오염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역사를 넘나들며 과학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니 당연한 대가라는 말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받은 만큼만 되갚고, 선의를 보이는 이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태도. 이러한 크리퍼의 자세에서 우리는 진작 갖추어야 할 인간성을 배운다.
나를 마주하기
영화는 미키 ‘17’과 미키 ‘18’이 대면하면서 본격적인 위기에 닥친다. 미키 18은 지금까지 누적된 미키의 정보를 다운로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키 17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이다. 뭐만 하면 죽여버린고 말하며 높은 폭력성을 띄고, 대책 없이 충동적이며, 엄청 밝힌다. 17은 자신을 가차 없이 죽이려는 18과 몸싸움을 하면서 나샤에게 전해 들었던 지금까지의 미키와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실감한다.
시간을 앞당겨 익스펜더블이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을 때로 돌아가본다. 악용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 주장하자마자 한 미친 과학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멀티플'을 만들어 노숙자를 죽인다. 둘도 아니고 셋이나 만들어 무고한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을 계기로, 익스펜더블은 공식적으로 지구 안에서 시행이 금지되며 멀티플은 중범죄가 된다.
다시 돌아와 미키 18을 죽이려고 나름 노력해 보는 미키 17의 눈을 보자. '또 다른 나'와 처음 마주한 그는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지고 죽을 거란 공포와 자신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는 놀라움, 혼란 등에 빠져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 채 몸이 반쯤 사이클러 속에 들어간다. 반면, 미키 18은 17에 대한 확실한 반감이 있다. 거울을 보듯 겁에 질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모습에 17은 더 혼란스럽다.
비슷하지만 미세한 차이점이 있는 얼굴로 나란히 서있는 둘의 모습은 마치 자아 분열의 가시화된 것 같다. 얼음 동굴에서 무심코 쓰레기를 버리듯 던진 티모의 질문은, 실험쥐처럼 수없이 이용당하는 미키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자기 방어와 누적된 폭력성을 발현시킬 트리거로 작용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미키 17이 처음으로 욕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18이라는 점이다. 처세술에 강하고 얍삽한 티모를 비꼬는 발언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무례함에 대응한 적 없던 미키 17은 나샤에게 접근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화를 참지 못한다. 심지어 마샬 부부와의 만찬에서 입에 올리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7이 씩씩 거리는 대상은 다름 아닌 18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호기심에 빨간 버튼을 눌러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미키는 죄책감에 모든 우선순위에서 자신을 제외한다. 17의 이러한 위축된 태도는 18의 화를 키운다. 만찬에 초대해 놓고 실험 중인 배양육을 먹인 것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보다 카펫이 소중한 부부에게 뭐라고 하고 나왔냐는 질문에 17은 작은 목소리로 답한다.
"저녁 식사 감사하다고... 하고 나왔어."
그런 수모를 겪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냐고 불같이 화를 낸 18은 당장이라도 케네스를 죽이겠다며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정말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눈다. 폭발하는 공격성이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 표출될 때, 관객은 17을 향한 18의 반감이 애증이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미키 18은 17과 대치하던 중 티모를 보자마자 사이클러에 던져 죽이려 든다. 비록 분열된 두 사람이지만 미키가 처음으로 자신을 지키려고 시도한 순간이었다.
내가 너라서 알 수 있는 열등감과 자기혐오, 그리고 트라우마. 빨간 버튼 따위로 사고가 날 만큼 자동차를 엉망으로 만든 회사 잘못이라는 18의 말은 평생 미키가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그는 무모하고 폭력적인 또라이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용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뻔해도, 결국 우리를 구하는 건 사랑
서로 으르렁 거리는 17과 18 사이에서 혼자 신난 사람은 다름 아닌 연인 '나샤'다. 지금껏 다양한 미키를 봐온 나샤는 정반대 성격의 두 미키를 보며 굉장히 흥분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날 수 있냐는 미키 17의 질문에 그녀는 '반대 상황이라면 너도 나처럼 좋아할걸?'하고 가볍게 받아친다. 멀티플인걸 숨겨줄 테니 미키를 나누자는 카이의 말에는 불같이 화를 낸다. 16이든 17이든 18이든, 나샤에게 미키는 오로지 단 한 명이니까.
나샤는 엉뚱한 면이 있지만, 인정받은 소수 정예 엘리트 요원으로서 단단한 내면과 외면을 갖춘 인물이다. 미키는 다방면에서 월등한 그녀가 대체 왜 가장 낮은 계급인 자신과 사랑을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바이러스와 각종 실험으로 죽어가는 미키를 두고 볼 수 없던 그녀는 직접 진공복을 입고 실험 캡슐 안으로 들어간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서 희생하는 자를 돌본다.
베이비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몸이 묶인 채 이로 밧줄을 잡은 나샤는 미키에게 신호를 받고 'C3' 전략을 펼친다. C3는 아기를 안는 것 같은 자세로, 미키와 나샤의 섹스 체위 중 하나이다. 칼로리마저 철저히 계산하고 먹어야 하는 우주선 안에서 섹스는 가장 비효율적인 에너지 활동이다. 마샬 부부는 생존을 빌미로 니플하임에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섹스를 금지시키지만, 그들은 장난으로 체위를 그려가며 계속 몸을 겹친다. 나샤가 미키의 전략으로 베이비 크리퍼를 구해 눈밭을 달리는 장면은, 그들의 섹스가 결여된 존중과 냉소적 자본주의로 만들어진 노동과 권력보다 더 가치 있음을 증명한다.
케네스와 대치하던 18은 기어코 죽음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은 케네스는 그런 감정이야 말로 인간성의 증거라고 자극한다. 그러나 미키 18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나샤와 함께 서 있는 미키 17을 보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이름을 불러줄 사랑이야말로 지금 모두에게 필요한 본성이라는 것을. 뒤에 붙는 거지 같은 숫자 따위는 집어치우고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그들을 괴롭혔던 동그란 버튼을 꾹 누른다.
거대한 스케일의 SF 영화로 봉준호 감독은 사랑을 말한다. 너무 큰 서사와 화제성에 비해 작은 주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번만 더 고민해 보자. 사랑이 조금 뻔하긴 해도, 작았던 적은 없다. 우리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는 것도, 너를 사랑하는 것도 식상한 말처럼 느껴져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무수한 호칭에 짓눌려 더미 속에 묻혀버린 내 이름을 건져 먼지를 툭툭 털어주고, 어쩐지 낯선 내 얼굴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힘이 남는다면 아끼는 이들의 이름도 찾아 숫자는 치워버리고 광이 나게 닦아보자. 미키와 나샤, 크리퍼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 가치를 배웠으니까.
무수히 생산되는 '나' 속에서 진정한 내 이름을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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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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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이 오징어 게임을 멈출 수 있나요?'라는 질문
편하지 않은 하루하루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남자 성기훈(이정재)이다. 수중에 456억이 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455명이 죽은 기억이 잊혀지지 않은 채로 그렇게 떠다닌다. 그렇게 바라던 큰 돈이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성기훈. 다시 양복남(공유)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2년간 성기훈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딱지치기를 하던 그 때를 떠올리던 성기훈. 사람까지 풀어 양복남을 찾았지만 결과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지없이 성기훈의 머릿속에는 양복남이 있었다. 간절히 찾았던 바람이 통한 걸까? 성기훈이 고용한 사람들이 양복남을 찾았다고 제보한다. 양복남을 추적하는 성기훈. 기훈은 준비가 돼 있었다. 양복남과 성기훈이 대면한다. 원하는게 뭐냐고 묻는 양복남. 성기훈은 양복남에게 ‘게임을 멈추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성기훈은 어렵지 않게 그 게임을 멈추는 방법으로 ‘오징어 게임의 재참가’라는 방안을 고안해낸다. 게임으로 성기훈을 초대하는 프론트맨(이병헌). 성기훈의 게임이 다시 시작됐다. 과연 기훈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까?
키치한 향 그대로
이 <오징어 게임 2>는 전작이 구사했던 장점을 그대로 이어갔다. 전작이 대단히 신선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간단한 룰 하에 다양한 장점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가령 가장 첫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예로 들어본다. 한국의 시청자들 입장에서 이 게임의 룰을 이해하는 건 너무나도 쉽다. 움직이는 사람이 술래가 된다는 것 자체는 우리 어릴 때 한 번쯤 친구들과 해봤을 것이다. 여기서 영희의 눈 움직이는 기괴한 이미지와 이 장소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사건으로 게임에 차이점을 두면서 인형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움직이면 죽는다는 간단한 서스펜스가 1화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 두가지는 ‘오징어 게임’ 시리즈를 사실상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 간단한 게임 규칙 덕에 인간에 집중하기 쉽다. 가령 시즌1 에서 장덕수(허성태)와 한미녀(김주령)과의 관계 묘사에는 게임 룰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서 따라오는 것이기도 했다.
<오징어 게임 2>는 시리즈를 계승하며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영희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그대로 계승하며 서슬퍼런 서스펜스를 이어가나 싶더니 O와 X라는 직관적인 도형으로 다시 한 번 이 현대사회를 가로지르는 규칙(민주주의)에 도전한다. 간단하고 쉬운 이미지에 생사가 갈려있다는 기괴한 서스펜스가 드라마의 동력이 된다는 전편의 특징을 승계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전편에 비해 더 나아진 부분도 있다. 전편 1편에서 다룬 것은 ‘이 사회가 곧 게임과도 같다’라는 비유였다. 감독은 밖으로 나가도 지옥이고 게임 안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글쓴이는 이 시즌 2에서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더 확장시켰다고 보는 쪽이다. O와 X라는 직관적인 이미지로 사람을 나눈다. 그리고 그 투표가 캐릭터간의 희비가 엇갈린다. 받아들이기도 쉬운데 그 결과마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자연스레 투표가 이 게임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가 선택한 것 아닌 결과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 투표의 성질이라고 설명하는 셈이다. 이 투표에 관한 부분은 당연히 우리 현실을 비출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O와 X말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여기에 덧붙여 황동혁 감독은 게임으로도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둥글게 둥글게’ 게임 같은 경우를 생각해본다. 이 게임은 인원 수대로 짝을 짓는 게임이다. 짝을 못 지으면 죽는다. 글쓴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짝짓기’라는 행위 그 자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장금자(강애심)처럼 노년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김영미(김시은)처럼 이 게임에 주눅들어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게임에서 주최자들은 각기 다른 다양성을 어떻게 고려하고 있을까? 겉으로는 민주적이고 선택을 존중하는 척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게임의 패자들은 살해당한다. 아예 패자로 낙인찍어 재기할 가능성조차 주지 않는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중 하나가 세상을 가로지르는 기준이라는 것을 고려해봤을 때 이런 비유가 드라마의 밀도를 높이는데 유효하다.
선을 가로짓다
이 드라마는 선(line)에 관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선’이며, 이는 인물들이 양자택일의 순간에 놓이게 되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O와 X를 사이에 두고 인물들이 선택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단순한 게임 룰이 아니라, 드라마 속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도의적 선택과 맞닿아 있다. 즉, 이 선은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과 도덕적 신념을 시험하는 도구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선이 단순히 선과 악을 나누는 경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친구 사이에서도, 가족 사이에서도 이 선택은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인간적이기 때문에 겪는 이 감정이 이 상황의 근원을 묻는다. 과연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에서 온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아니면 명확한 경계를 긋는 것에 더 집착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이 드라마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선을 완벽하게 넘지 못한 세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캐릭터의 성격상 애매한 입장에 서 있다. 이 입장 때문에 극의 흐름을 바꾸는 선택지를 둔다. 이로 인해 선택의 무게를 더욱 절실하게 감당해야 했다. 이 점은 우리 개개인이 사회 시스템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의 욕망과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 이 선택이 우리 사회에 폭력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을까? 이 질문은 드라마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드라마는 성기훈과 프론트맨을 잇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인물은 1번과 456번이라는 수치상의 대비로도 구분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길을 걸어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프론트맨은 성기훈의 안티테제로 기능한다. 왜? 그의 게임에 대한 태도가 성기훈이 가진 논리를 먼저 사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기훈은 자신의 논리가 옳다고 믿는다. 하지만 프론트맨 역시 오징어 게임이 필요한 이유에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이 관점에서, 두 사람이 가진 이 논리가 현실 사회에서도 타당할까? 그는 단순한 시민이지, 남의 삶을 판단하는 판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프론트맨 역시 게임을 운영하는 것이 마치 정당한 일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성기훈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음을 고려하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결국, 이 드라마는 성기훈과 프론트맨을 통해 우리 사회의 구조와 선택의 딜레마를 조명한다. 이들이 어디까지 같고,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그리고 그 선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시리즈의 원동력이 되며, 시청자로 하여금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앞에 선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
드라마의 장점만 언급했지만, 전작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도 남는다. 황준호와 선장이 이끄는 이야기는 기대만큼 흥미롭지 않았고, 노을(박규영)이라는 캐릭터는 이 게임의 틀과도 같은 역할이라는 점에서 장르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중요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메인 플롯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했다. 또한, 명기(임시완)의 캐릭터는 시즌 3의 결말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기능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유명 유튜버라는 설정이 서사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희(조유리)와의 관계 역시 다소 모호하게 그려져, 두 인물의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긴장감이 떨어졌다.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에피소드 7은 시즌 2가 시즌 3에 종속되는 느낌을 주며 급전개로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2는 시즌 1만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의 전통을 잘 계승했으며, 장르적 재미를 놓치지 않았고, 현대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특히, 스릴러 장르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없었다면 일부 장면들(특히 1화)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시즌 1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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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격 노출 뒤 드러난 세 남녀의 숨겨진 욕망
밀실을 소재로 얽히고설킨 세 남녀의 치정극. 동명의 콜롬비아 영화를 리메이크한 <히든 페이스>는 에로틱 스릴러로서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원작만 봐도 수위 높은 노출과 파격적 설정이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이는 리메이크 버전의 기대 요소 중 하나. 에로틱 장인인 김대우 감독이 연출을 맡아서인지 극장에서 마주한 영화는 그 기대감을 충족할 만하다. 아름답고도 수위 높은 베드신의 완성도 뿐만은 아니다. 그 장면에 숨겨진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뜨거움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이 좀 일찍 찾아오는 게 아쉽지만 말이다.
지휘자 성진(송승헌)은 오케스트라 첼리스트이자 약혼녀인 수연(조여정)의 영상 편지를 확인한다. 결혼 스트레스 때문에 해외로 떠난다는 내용을 본 그는 깊은 상실감을 느낀다. 그녀의 부재를 대신해 첼리스트 미주(박지현)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온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상류층의 삶에 염증을 느낀 그는 자신과 비슷한 성향과 흙수저라는 공통점을 가진 미주에게 매력을 느끼고, 술을 건하게 마신 비 오는 밤, 자기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낸다. 중요한 건 이 모습을 수연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 집 안에 있었던 밀실 공간에 갇힌 그녀는 이후 성진과 미주의 불륜을 마주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작품을 제안받고 영화를 다시 보니 처음 볼 때와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와 DNA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발현되지 못한 욕망의 뿌리들이 저 먼 아래에서 서로 연결돼 있는 듯한 지점에 가장 이끌렸다.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우 감독은 <히든 페이스> 리메이크 이유를 이렇게 답했다. 기존 원작은 개연성과 디테일보다는 밀실 콘셉트를 밀어붙이며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욕망에 집중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주인공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의도가 결여되어 위험한 사랑의 테스트로만 비쳤던 게 사실이다.
김대우 감독은 원작의 단점을 메우고 자신만의 결로 다잡기 위해 계급 갈등을 집어넣는다. 성진은 개천에서 용 난 흙수저 케이스다. 그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 건 단장인 엄마의 소중한 딸 수연의 힘이 크다. 자기 손을 일궈낸 결과물이 아닌 수연의 힘으로 엉겁결에 상류층이 된 그는 내색하지 않지만 수연의 꼭두각시처럼 생활하게 된다.
이런 마음을 하소연할 때 없는 성진에게 슈베르트를 좋아하고 소주를 즐겨 마시는 흙수저 미주는 공감 대상이 되고, 서로 통한 마음을 바탕으로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욕정으로 분출된 것.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성진과 미주, 그리고 이를 밀실에서 본 수연의 관계는 더 복잡미묘하게 엮인다.
“인간은 포장이야” 오케스트라 단장이자 수연의 엄마 혜연(박지영)이 내뱉은 이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흙수저든 금수저든, 실력이 있든 없든 간에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 마련. 알맹이가 어떻든 남에게 보이는 게 중요하다는 이 말을 역행하듯 감독은 성진과 미주의 베드신을 그저 아름답게만, 그리고 단순히 그들만의 복잡미묘한 사랑으로 그리지 않는다. 스포일러라서 밝힐 수 없지만 이 관계는 어떤 의도를 담고 시작된 위험한 불장난이다. 마치 <인간중독>의 진평(송승헌)과 가흔(임지연)과는 다른 결의 주인공들과 이야기로서 발전한다는 걸 내비치는 듯 말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밀실에 갇힌 건 수연이 자초한 일. 그 안에서 이들의 불륜을 목격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이 설정 또한 주인공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밀실에 갇히게 된 원작과 달리 수연이 스스로 들어가 갇히게 된 이유를 집어넣는다. 수연과 미주가 원래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새로운 설정을 가미한 영화는 더 나아가 호의를 무기 삼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수연의 전사를 보여주며, 밀실에 갇힌 것 자체가 과거의 죗값을 치르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계급 갈등이란 무거운 주제 의식을 삽입, 밀실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차용한 에로틱 스릴러라는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음란서생> <방자전> <인간중독> 등 감독은 꾸준히 계급 갈등을 소재로 포장지에 감싸진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려왔다. 이런 점에서 <히든 페이스>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작에서 느껴진 애틋한 사랑과 연민은 이번엔 없다. 대신 정해진 계급 사회 안에서의 차가운 욕망을 발현하고 그에 따른 비틀어진 행복에 취하는 인물들과 결말을 보여준다.
<히든 페이스>는 김대우 감독의 진일보한 연출력을 보여준 건 맡지만, 마지막까지 관객들을 설득하기에는 힘이 달린다. 계급 갈등을 조장하는 부유층의 이미지는 피상적일뿐더러, 후반부 반전에 따른 관계 역전이 파격적인 놀라움을 주지만, 이를 도달까지의 속도감이 더디다. 결말에 따른 공허함도 크다. 이는 호불호가 갈릴 이유로 보인다. <주홍글씨> <상류사회> 등 소재와 이야기 흐름이 비슷한 영화의 기시감도 걸림돌이다.
이런 단점을 메우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송승헌은 꼭두각시로 살아갈 것인지, 자신의 원하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조여정은 겉으로는 호의를 내비치지만, 그 자체를 족쇄로 삼아 사람들을 부리는 상류층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대우 감독과 첫 협업인 박지현은 두 인물의 관계를 전복시키며, 반전을 꾀하는 모습을 잘 그린다. 특히 과감한 노출 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한다.
영화 제목처럼 세 인물은 숨겨진 자신들의 얼굴을 내보이고, 각자가 누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취한다. 이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본연의 얼굴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잔혹한 사회에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더 가져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게 공허함 뿐일지라도.덧붙이는 말: 극 중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4개의 즉흥곡 D.899 중 제3번, 그리고 교향곡 8번 ‘미완성’이 삽입되었는데, 각 곡마다 성진의 마음과 각 장면의 의미를 더 아로새긴다. 특히 초반 성진의 마음을 빼앗는 미주의 첼로 연주곡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후반부 이 영화엔 얄팍한 서정성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걸 역설적으로 내보이는 듯한 교향곡 8번 ‘미완성’은 주의 깊게 들어보길 바란다.
평점: 3.0 / 5.0
한줄평: 원작보다 높은 수위, 원작보다 좋은 짜임새, 원작보다 아쉬운 속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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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애라는 금기에 갇힌 욕망을 마주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로스트 도터>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올리비아 콜맨)'. 바닷가에서 유유자적하던 그녀의 눈에는 마찬가지로 해변에 놀러 온 젊은 엄마 '니나(다코타 존슨)'가 계속해서 들어온다. 딸 엘레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딸과 잠시 떨어진 사이에 꽤나 힘들어하는 니나의 모습을 보면 레다는 자신의 두 딸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그렇게 평화롭던 레다의 휴가에 조금씩 균열을 생긴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이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던 차에 갑자기 엘레나가 실종되고, 레다는 해변가 숲에서 그녀를 찾아 니나에게 되돌려 보낸다. 그리고 레다는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과거의 자신(제시 버클리)'을 니나와 겹쳐 보면서 상념과 혼란에 빠져든다.
<다크 나이트>, <크레이지 하트>, <나의 작은 시인에게> 등에 출연한 배우 매기 질렌할의 연출 도전작인 <로스트 도터>. 소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영상화한 작품인 <로스트 도터>는 감독의 데뷔작인 것을 고려할 때 상당히 화려한 실적을 자랑한다. 이 영화는 202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후,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다만 수상실적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비해 <로스트 도터>의 도입부는 좋게 말하면 평이하고, 나쁘게 말하면 재미가 없다. 그리스로 휴가를 온 레다가 숙소에 짐을 넣고, 바닷가에서 햇살을 쬐며 책을 읽고, 바다를 보며 식사하는 장면들은 대체 왜 이 작품이 찬사를 받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롭고 또 지루하다. 그나마 몇몇 관광객들과의 불화, 해변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인 '윌(폴 메스칼)'과의 대화만이 그 지루함을 견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그러나 평이함이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제목에 걸맞은 사건이 발생함과 동시에 영화는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감추어 왔다는 듯이 강렬한 서스펜스가 자아내는 격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을 빠뜨린다.
그 중심에는 인형이 있다. 해변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던 니나는 딸 엘레나를 잃어버리고, 레다는 다른 해변가 관광객들과 함께 그녀를 찾아 나선다. 해변 옆 숲에서 그녀를 발견한 레다. 그녀는 니나에게 엘레나를 돌려보내는 한편, 엘레나가 들고 다니던 인형을 남몰래 가져간다. 흥미로운 것은 엘레나의 인형이 레다의 현재와 과거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가 된다는 점이다. 레다가 충동적으로 훔친 후 극진히 돌보는 이 인형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던 그녀의 죄책감과 모성을 포기했던 과거에 대한 회한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젊은 시절 교수가 되기 위해 학업에 열중해야 했던 레다는 첫째 딸 비앙카에게 자신이 아끼던 인형 미니 마마를 물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일반적으로 인형에 담긴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의미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보통 인형은 부모의 사랑이 담긴 선물이다. 그러나 인형에는 동시에 부모를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말고 알아서 시간을 보내라는 속뜻도 담겨 있다. 사랑의 증표로 보이면서도 부모와 아이의 관계가 단절됨을 의미하는 이중적인 물건인 것이다. 실제로 엄마의 속뜻을 알아챈 비앙카는 서운함과 미움을 인형에게 표출한다. 이에 레다는 인형을 아끼지 않는 비앙카에게 오히려 화를 내며 인형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인형은 도로 위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이렇게 부서진 인형은 아이와의 관계를 끊어버린 엄마 레다의 모성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 순간을 기점으로 <로스트 도터>는 단순히 '딸을 잃어버린' 이야기가 아닌, '딸을 포기하는' 이야기가 된다. lost가 lose의 과거형인 만큼, 단지 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딸을 포기했던 이야기에 관한 것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엘레나의 인형이, 그리고 부서져 버린 레다와 비앙카의 인형이 바로 그 계기다. 실제로 인형을 만남과 동시에 레다는 막 엄마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자신을 회상하고 마찬가지로 처음 엄마가 된 니나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옛 기억과 새로운 만남 사이에서 영화는 모성애라는 이름의 금기가 숨기고 있던 여성의 욕망을 가감 없이 스크린에 펼쳐놓으며 평화롭던 이야기에 긴장감과 불편함을 불어넣는다.
이때 <로스트 도터>에서 긴장감과 동시에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은 세 엄마의 교집합이 고루한 엄마의 이미지를 다방면에서 파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시 버클리의 젊은 레다는 딸들과의 전화가 그녀를 지루하게 하고, 그녀 또한 딸들을 재밌게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파괴한다. 올리비아 콜맨의 레다는 아이들을 떠날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며 펑펑 울고, 이런 그녀는 희생적인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다. 다코타 존슨의 젊은 엄마 니나는 결혼 후 가족과 완전히 어울리지 못하다 보니 자신의 존재감을 잃은 채 방황한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육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는 어머니상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때 세 엄마의 교집합은 희생 대신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이기심이며, 그렇기에 그들은 고정된 이미지 안에서 각자의 이유로 괴로워한다.
이처럼 다른 것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레다와 니나의 관계 쉬이 형성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니나의 고모를 필두로 니나의 가족들은 레다를 의심한다. 그들은 자신이 타고난 엄마가 아니란 걸 인정하고, 어머니가 희생정신으로 무장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레다가 니나를 추동할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니나의 가족은 그녀가 레다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을 방해하며 레다를 유달리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일례로 레다는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리는 남자들에게 항의하지만, 그들은 관리인이 올 때만 조용히 하며 그녀가 유달리 예민한 인물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레다는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과거의 자신을 니나와 겹쳐보기 시작한다. 니나 또한 레다에게 결혼과 육아에 지친 자신을 고백한다. 여기서 영화는 외도라는 소재를 이용해 그들의 연대에 임팩트를 준다. 물론 외도와 불륜 그 관계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으며, 젊은 레다와 니나 모두 이것이 잘못된 관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애인의 존재는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아이들과 육아로 인해 사라질 듯한 자신들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레다가 자신의 학문적 능력과 업적을 알아주는 하디 교수와 사라에 빠지고, 니나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인정해주는 윌과 눈이 맞는 이유다. 이렇게 레다는 휴가지 바닷가에서 만난 한 여성과의 관계 안에서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딸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모성애의 가치와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당장 레다가 만들어낸 니나와의 연대와 관계는 분노, 질투, 회한, 죄책감이 뒤얽힌 레다의 감정 때문에 붕괴된다. 피 흘리는 레다가 두 딸과 통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기적인 엄마였던 레다마저도 결국에는 완전히 모성애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괴하거나 거부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의 가치는 비록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일시적으로나마 모성애를 둘러싼 금기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 것 그 자체에 있다. 사실 모성애는 그간 인류를 지탱해 온 신화 중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를 비롯해 수많은 고대적 여신들의 역할이 출산을 통한 우주와 생명의 창조로 여겨졌다. 이처럼 인간에게 여성의 출산, 그리고 이후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성의 변화는 항상 신성시되었고,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질서로 여겨졌다.
이때 모성애가 성스럽고 거룩하게 여겨진 것은 그것이 그 자체로 금기이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위험하거나 성스럽고 거룩한 금기의 대상은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금기가 특정한 의미 체계와 사회 질서를 설정하기에, 카오스(Chaos)를 초래하려는 욕망은 통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사회적 금기는 범람하는 강물을 제어할 둑을 쌓듯이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이 표출될 통로였다. 아이를 기르는 데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는 모성애라는 금기가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하며 희생을 요구하듯이. 대신 모성애라는 금기가 만든 통로 안에서 여성은 엄마가 되어 새로이 정체성을 획득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듯이. 이렇게 금기는 욕망으로 인한 일상의 해체를 막으며, 이는 모성애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러한 안정성은 일시적으로 파괴될 때 역설적으로 재확인되고 강화된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안정적으로 구축되었던 일상을 헤집어놓으며 그간 허용되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위반은 안정된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일상의 근간이 되는 금기의 존재에게 더 강한 권위를 부여한다. 강렬한 축제를 통해 일탈을 맛본 후에 일상적 삶에 더 집중할 수 있듯이 금기를 일시적으로 깨고 표출된 욕망은 도리어 삶을 안정적으로 만든다. 이는 불륜의 장소로 낙점된 레다의 휴가 숙소에서, 엄마로서의 자격을 던져버리고자 했던 니나와 그런 니나에게 공감해주던 레다 간의 연대가 깨어지고, 레다의 휴가도 끝나며 그들이 다시금 각자의 엄마로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로스트 도터>는 여성이 고통 속에서 자녀를 포기하더라도 죄책감에 빠지는 대신 온전한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렇기에 희생적인 모성애가 지탱하던 안정된 세계가 주던 평화로움은 이기적인 모성애와 일탈로 인한 불안정성과 긴장감을 거쳐 다시금 회복된다.
이는 매기 질렌할 감독이 “엄마, 연인, 여성으로서 느낀 은밀한 감정들이 책 속에 표출되었다. 기이하고 고통스럽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느꼈다”라고 말한 것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특정한 모습의 엄마를 묘사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숨 막히는 압박을 느끼는 엄마의 모습도 긍정하고, 그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는 엄마도 긍정하며, 그 순간들을 견뎌낸 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자부하기도 하는 엄마의 모습도 긍정한다. 그래서 <로스트 도터>는 성별에 따라, 아이의 유무에 따라, 육아 경험의 정도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영화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모습의 엄마에 자신이 가깝든 간에, 모성애라는 금기를 깨는 이들의 용기를 부정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이렇게 <로스트 도터>는 모성애를 둘러싼 신화에 도전하며, 그 금기에 숨겨져 있던 격동의 현실을 스크린 위로 끄집어 올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성애라는 금기의 명암 사이에 숨어 있는 폭풍우를 끄집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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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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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헤어질 결심>,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6관왕
ⓒ 네이버 영화
제9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에서 <헤어질 결심>은 작품상 외에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조명상, 음악상을 받으며 6개의 상을 휩쓸었다.
<더 패뷸러스>, 12월 23일 공개
ⓒ 넷플릭스
패션계에 인생을 바친 청춘들의 꿈과 사랑, 우정을 그린 로맨스 시리즈 <더 패뷸러스>가
오는 12월 23일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드라마에는 채수빈, 최민호 등이 출연한다.
이소룡 전기 영화, 이안 감독 연출
ⓒ 네이버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연출한 이안 감독이 이소룡 전기 영화 연출을 맡는다고 밝혔다.
이안 감독의 아들 메이슨 리가 주연을 맡는다고 한다.
<웬즈데이>, 공개 첫 주 만에 전 세계 83개국 1위
ⓒ 넷플릭스
팀 버튼 감독이 연출해 공개 전부터 국내외 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넷플릭스의
<웬즈데이>가 공개 첫 주 만에 전 세계 83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을 포함한
93개국에서 TOP 10에 진입하기도 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2023년 5월 개봉 확정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전 세계적으로 흥행을 일으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가 6년 만에 오는 2023년
5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로 관객을 찾아온다.
<드라이브 마이 카>, 개봉 1주년 기념 재개봉
ⓒ 네이버 영화
제74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시작으로 ,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 장편영화상,
제79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은
<드라이브 마이 카>가 개봉 1주년을 기념하여 22일부터 극장에서 재개봉한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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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져스 1편 삭제씬 총정리
#산돌구름 #어벤져스1 #삭제씬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2021. 04. 08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인트로
00:34 마리아 힐 & 오프닝
01:35 외로운 캡틴
03:35 캡틴과 웨이트리스
04:37 경찰 비하인드
05:23 앤트맨 힌트
06:09 너무 오랜만에 찾아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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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라이 미 투 더 문> 메인 예고편
달 착륙 프로젝트 성공을 위한 광고 마케터와 발사 책임자의 우주적 만남🔥 달 착륙 프로젝트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플라이 미 투 더 문] 7월 12일 극장에서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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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메인 예고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나일 강의 죽음]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다시 돌아온 '에르큘 포와로'의 명품 추리극!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온다"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 메인예고편 전격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