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5-02-19 20:41:00
흑백 현실 속 총 천연색 꿈
영화 [더 폴]리뷰
이 글은 영화 [더 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샤흐리야르 왕의 마음이 이랬으리라.
불륜을 저지르는 왕비의 모습을 지켜만 보았을 왕의 마음이 로이(리 페이스)는 어쩐지 이해되는 것만 같았다. 아니, 지금 자신의 꼬라지를 본다면, 오히려 왕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찰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가련한 환자는 사랑에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커리어 까지도 자신의 척추처럼 박살 나게 생길 위기였으니까. 이 기구한 운명을 꼼짝없이 견뎌야만 하는 답답함을 알아주는 누군가라도 등장해 주면 좋으련만. 지금 로이의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리 봐도 아직 숫자를 3까지 밖에 모르는 것만 같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운타루)의 존재가 전부였다.
그러나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 앞니 빠진 암살자(?)를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자신이 결국 그렇게 넘고 싶어 하는 요단강(?)도, 쉽게 건널 방법이 생길 것만 같았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의 운명까지 내걸어 볼 심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을 망치러 온 이 구원자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로이는 입을 열었다. 이 얕고 가는 자신의 목숨줄을 좌지우지하게 될지도 모르는 꼬마 샤흐리야르 왕 앞에서. 로이는 기꺼이 세헤라자데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암살자의 스턴트는 실로 대단했다.
로이가 수행할 수 없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스턴트 역할을 거리낌 없이 수행했다. 물론 이 초보 복면에게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이 넘어가는 숫자에 기겁을 하기도 하고(!) 공범인 주제에 도덕적 잣대가 너무 높아 대역을 하지 않겠다며 생떼를 부리기도 했지만. 세헤라자데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황홀경에 빠져 망설임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미션 수행의 시간이나 방법도 치밀해져 갔다.
하지만 마지막 미션의 벽은 이 하룻강아지 대역에게는 여전히 조금은 높았다. 닿을 듯 닿지 않아 힘껏 까치발을 해야 할 것임을. 로이는 알 수 있었다. 로이는 반드시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이루고 싶었고. 그러려면 알렉산드리아에게 연료를 계속 불어넣어 까치발의 끝에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간신히, 하지만 반드시 쥐어져야만 했다.
그는 환상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스턴트를 이어가야만 했다. 오디어스를 찾아가는 여정은 더 험하고 어려워져 갔고. 그의 애달픈 마음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마스크 밴디트는 충실하게 로이의 대역을 해냈다. 알렉산드리아의 눈이 여전히 처음처럼 빛나는 것을 보면서. 로이는 현실의 자신도. 자신의 대역인 밴디트로서도. 조금은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도, 삶도 조금씩 간절해지는 세헤라자데는 자꾸만 자신의 왕이자 대역인 알렉산드리아 앞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로이는 다리에서 떨어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모두가 실패했다며 손가락질을 하던 그 순간을. 단 한 번의 낙하로 인해. 자신이 알던 사람들의 등 외에는 이제 기억할 수 있는 모습은 없을 것만 같았다. 로이는 고개를 들었다. 원래 서 있던 곳이 참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로이를 대신해 그 높은 곳에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낙하해 버린. 이 꼬마 스턴트역을 보며. 로이는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로이의 작은 왕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라고 명령했지만. 세헤라자데는 이제 이 허무맹랑한 모험의 끝이 자신의 손으로 이뤄져야 함을 알고 있었다. 로이는 환상 속 모든 인물들을 추락시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실패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인물들의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추락은 마치 영화 [인셉션]의 킥(kick)과도 같아서. 두 세계에 모두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저 한 세계에서 추방할 뿐. 그 어떤 의미의 실패도, 죽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의 추락으로 인해 겁에 질린 로이는 그 사실조차 쳐다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전해주기 위해. 겁쟁이인 자신을 대신해 기꺼이 추락을 감행했고. 결국 그를 죽음이라는 망상에서 구해냈다.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는, 결국 세속적 욕심이 3까지 밖에 없는 무자비한 왕(?)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추락이자 실패라 여겼던 작품을 이 꼬마 대역에게 보여주겠다는 결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심의 끝에. 두 운명 공동체(?)는 겨우 웃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쫓은 뒤 덩그러니 둘 만 남아버린 환상의 세계는 이제 끝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몇 번이고 재생될 것만 같은 유일하고도 독특한 이야기가 되어. 두 벤디트의 뱃속에서 영원히 날갯짓을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추락은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힘차게 날아오르면서.
마치면서
그들의 인생은 서로를 만나기 전 까지는 흑백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로를 만나는 순간부터 꾸게 된 모든 꿈들은 총천연색이었다. 차갑고 메말랐던 일상이 이렇게 질감과 색감으로 넘쳐나는 것으로 변화할 때까지의 지분은 거의 모두 알렉산드리아에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영화를 보며 그저 잿빛에 지나지 않았던 회사원의 하루를 예쁘게 물들여 준. 같이 영화를 봐준 친구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만두 또 먹으러 가쟈!!!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 추락, 스턴트, 그리고 세헤라자데의 모티브를 가지고 글을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의 TMI]
1. 정말 물리적으로 시간이가 없다. 돌아버림
2. 환상 속 5인조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후레쉬맨 같아서 빵 터짐
3. 이런 뽀송한 질감의 영화 너무 좋다
[다음 리뷰 예고]
미키 17!!
원작이랑 얼마나 다를지(?) 기대된다. 근데 봉감독님 나빠.. 애를 원작보다 열 번이나 더 죽였어ㅠㅠ
#더폴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munalogi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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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해리에게
내가 이 드라마를 완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워낙 드라마를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탈이 빠른 편이라 내가 이 드라마에 대단한 이입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방영 초반이라서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드라마 예감이 좋아서 오늘도 주절거려본다.
우선 배우진들이 아주 탄탄하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사람들의 수준은 아주 높아져서 캐스팅만으로는 그 드라마의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기력은 알아주는 배우들이 나와주어 한 번은 기대하게 했다. 그렇다. 나도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본 것이다. 다만, 이 드라마를 완주할 수 있을지는 극본에 달린 듯하다.
다만, 이 드라마에 관심이 간 이유는 이 드라마가 해리성 장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새 드라마의 소재가 정신적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비추는 경우가 많아져 굉장히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리뷰한 적도 있었다. 사실 이 드라마는 그냥 로맨스가 주된 내용이긴 하다. 로맨스만 있는 장르였다면 볼 생각을 안했겠지만 이 드라마는 소재가 굉장히 흥미롭다. 여기에 해리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으로 여자 주인공에게 서사를 부여하면 지금 현재 남주가 저렇게 까칠하게, 못되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될 것 같다. 현재 방영 시점까지 남자 주인공의 행동은 과잉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하는 행동이라기엔 과잉되어 있다는 뜻이다. 잠깐의 뇌피셜을 해보자면, 남주 현오는 여주 은호가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4화 엔딩에서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해리성 장애까지는 몰랐던 것 같다. 추후 나올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과잉된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구나 느끼는 현 시점에 이런 드라마가 나와주어 고맙긴 하다. 주은호가 동생을 기억하며 동생이 사라진 들판에서 해매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은호는 마음 속에 그런 들판을 해매면서 동생 혜리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애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혜리를 기억하면서도 혜리가 해매던 들판에 자신을 몰아넣어 자신을 벌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야말로 지금 이 신선한 느낌에서 입덕까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는 베이스는 로맨스이긴 하지만 약간 '나의 아저씨' 같은 힐링이 될 만한 여지가 있는, 필력이 좋은 드라마라고 느꼈다. 어느 순간 신혜선 배우가 오열하는 신이 한 번쯤은 나올 것 같은데, 그 때에 이 드라마를 보는 내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었으면 좋겠다.
요새 볼 만한 드라마가 참 없다고 느꼈는데, 시작이 신선한 만큼 기대가 되는 드라마를 만나 기분이 좋아 이래저래 주절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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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내밀한 욕망으로의 여정
욕망: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본능
사람이라면 누구나 욕망한다. 아니, 이 지구상의 생명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탐하고,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을 탐닉하고자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며, 이러한 본능은 우리들을 헤아릴 수 없이 번화하고 다채로워지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욕망의 종류는 다양하다. 꿈을 향한 야망, 야욕, 야심이 있는가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인 의욕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적 욕망을 말하는 애욕, 정욕, 성욕 등도 있다. 사실, 욕망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욕망은 무엇으로든 이름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많은 욕구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지만 가장 괄시 받는 것이 있다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성욕을 꼽을 수 있겠다.
요즘은 꽤나 개방적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문화권에서는 성애를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성행위는 암묵적으로 '많은 수가 수행하고 있으나' '차마 발설되지 못할' 욕망으로 치부되며, 그것은 나아 사람들로 하여금, 욕구 그 자체를 스스로 거세해 버리게끔 압박하기도 한다.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는, 가볍고, 방탕하고, 차마 상종 못할 '짐승'이 되기도 하고, '싸구려 인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것이 바람직한 성이라면, 우리는 그 욕망을 반드시 억압해야만 할까?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이런 의문에 대한 재치있는 답을 담고 있다.
1. 인생이 재미 없는 여자, '낸시'
'낸시'는 삶이 재미없다. 종교학 선생인 그는 평생토록 학생들에게 그들의 욕망을 단속하기를 강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인생은 브레이크의 연속이었다. 이건 이래선 안돼. 이건 이렇게 보일 거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래, 나는 재미없어. 하지만 내가 ~할 순 없잖아. 이런 말들은 끊임 없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그것은 족쇄가 되어 그의 삶을 지치고 지루하고 지난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 대단한 오르가즘은 문턱에조차 다다른 적이 없었다.
남편을 잃고 선생 일도 은퇴한 어느 오십 줄. 그런 낸시는 오랜 결심 끝에 새로운 자유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방법이랄 것은 바로, 젊고 매력적인 남자인 '리오 그랜드'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2. 고지식함과 방탕함
그렇게 고심 끝에 생전 처음 보는 남자의 시간을 샀는데, 낸시는 그럼에도 걱정할 것이 많다. 나이 들어 볼품 없어졌을 몸을 보이는 것도 걱정스럽고, 소위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수없이 갈등한다. 눈 앞에는 근사한 리오 그랜드가 앉아 있지만, 그는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낯선 세계로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처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허둥지둥한다. 초보 운전수가 운전을 할 때 손에 땀을 쥐는 것과 같이, 누구나 처음은 녹록치 않다.
그러니 낸시가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인 리오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네 어머니는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거 아시니?" 같은 고지식한 말들을 쏟아내는 것 뿐이었으리라.
한편, 리오 그랜드는 아주 능숙하다.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산 사람들을 그 각각에 맞추어 즐거움을 선사하는 법을 알았고, 그것에 그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기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는 전문가답게, 조금 특별한 손님인 낸시를 차분히 기다린다. 이윽고 그는, 낸시와의 오랜 대화와 얼마쯤의 춤을 즐긴 끝에, 낸시가 바랐던 것을 선사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아름다우며,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욕망해도 좋다고.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고.
3. 무심한 어머니와 상처입은 아들
그러나 그 대단한 리오 그랜드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끝없이 사적인 물음을 일삼는 낸시와의 대화를 통해 리오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의 아프고 쓰라린 기억을 자꾸만 떠올린다. 그는 어머니의 눈에 지나치게 방탕했던 탓에 미움 받았고, 그 탓에 많은 것을 숨기고 숨으면서 안전한 그만의 요새에 다다랐다. 그는 '리오 그랜드'라는 가면을 쓰고 손님들의 돈을 받음으로써 안전한 곳에서, 마음껏 방탕할 수 있는 시간을 영위한다. 그곳에서 만큼은 그는 탕아가 아니라 전문가가 되므로, 그는 그 안락함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 밖과 안을 철저하게 유리시키고자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런 리오를 그만의 '방'에서 끄집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낸시다. 리오가 자유를 되찾아준 바로 그 손님 말이다. 낸시가 과격하고 무례한 방식으로 리오를 '커밍아웃'시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한 것이라고 한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있다. 바로 낸시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했다는 것.
리오에게 낸시는 손님이기도 하고, 저를 매정하게 저버린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낸시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 다시 말해, '리오 그랜드'라는 인물을 속단하고 고지식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자신이 만든 어떤 '틀'에 밀어넣으려고 했던 일에 대해 사과했다. '너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너는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낸시는 리오가 자신을 달래며 해주던 다정한 말들을 그에게 되돌려준다. 낸시는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리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스스로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남의 욕망을 서둘리 재단하던 과거의 일들을 반성했다. 그 고지식하던 사람이, 비로소 진솔한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어쩌면 낸시가 리오에게 해준 말은, 그가 어머니, 혹은 그밖의 많은 모진 말을 던지던 이들에게서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른다.
3. 우리가 외면해왔던 내밀한 욕망에 대하여
꼰대와 탕아의 만남은 썩 어울리지도 않은데다가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을 것 같지만, 실은 낸시와 리오는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다. 어떤 형태로든 간에, 욕망에 충실한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낸시와 리오는 서로를 만남으로서 각자의 구원을 받았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그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의 짐을 벗어든 순간, 욕망을 마주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진다. 낸시는 마침내, 그가 50년이 넘도록 느끼지 못했던 오르가즘을 맞이한다.
4. 우리는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내내 말한다. 욕망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좀 더 스스로와 세상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거울에 자신의 맨몸을 비춰보며 미소짓는 낸시처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좀 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색안경을 끼는 일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유교걸이라 이 영화의 핵심적인 소재인 '매춘'(리오는 시간을 사고 파는 일이라고 했지만)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는 조금 더 고민된다. 이것은 보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벗어 던져야할 족쇄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걸 차치한다면, 글쎄, 영화 자체는 즐거웠다. 엠마 톰슨은 귀여웠고, 데릴 맥코맥은 섹시하다. 두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구원했으면서도, 고루한 로맨스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나의 욕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오래 고민해 볼까 한다. 혹시 아는가? 나 또한 누군가에게서 구원을 받거나, 그를 구원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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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롤>의 인물의 감정과 욕망을 구축하는 영화적 방법
Ⅰ. 서론
<캐롤>은 2015년, 감독 토드 헤인즈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화 <밀회(Brief Encounter, 1945)>의 장면과 형식을 오마주로 시작하는 <캐롤>은 로맨스 영화의 계보를 이어가 보이면서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감독의 의도와 다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1950년대 뉴욕에서 평범한 백화점 점원인 테레즈(루니 마라)와 딸을 두고 남편과 이혼 소송중인 캐롤(케이트블랜챗)이 만나 서로에게 빠져들고 일반적이지 않은 사랑에서 감정적 혼란을 겪기도 하면서 사회적 시선들을 뒤로한 채, 서로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테레즈의 성장드라마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작고 어린 소녀의 의상에서 숙녀로 성장한 듯한 의상들과 화장법. 캐롤을 통해 성숙해지는 테레즈. 프레임의 변화도 있다. 화면의 앵글 또한 테레즈를 양각으로 잡는 장면이 많아진다. 또, 영화 내용 면에서 테레즈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비교적 수동적인 인물에서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도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내면과 외면의 모두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캐롤>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원작은 <The Price of Salt, 1952>로, 미국의 유명 스릴러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레즈비언 소설이다. 작가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주석-미국정신의학협회가 동성애를 사회병질적 인격장애로 분류한 1952년)를 감안하여 필명(클레이 모건)으로 출간하여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주목할 점은 당시의 레즈비언에 대한 인식이다. 캐롤의 감독 토드 헤인즈는 영화 캐롤을 평범하지 않은 사랑의 이야기로, 사회적 마이너 그룹의 사랑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i] <Velvet Goldemine>, <Far from Heaven>과 같은 감독의 전작들과 그의 커밍아웃도 작품을 관찰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이다.
<캐롤>은 영화의 주 인물인 캐롤과 테레즈 뿐만 아니라 캐롤의 남편 하지, 테레즈의 남자친구, 친구 등 주변인물까지의 욕망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이 자연스레 표출되는 감정들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의 제한의 중요성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상대방과 함께 하게 되기까지 과정들에서의 미세한 표현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적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감독이 인물들의 감정과 욕망구축의 표현방법을 살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캐롤>은 테레즈의 성장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제목이 ‘캐롤’인만큼 캐롤이 주인공 아니냐는 주인공의 대한 논란도 있었다. 이 또한 본고가 진행됨에 따라 연출적 분석을 통해 밝혀가도록 하겠다. 본고는 감독의 인터뷰만을 참고하여 필자가 영화를 분석하는 방향으로 분석을 수행한다. 감독이 어떤 영화적 방법들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욕망을 나타냈는지 분석한다.
Ⅱ. 본론
1. 색상으로 나타낸 인물들 개인의 욕망
영화를 보면 주로 적색과 녹색이 대비되는 듯하면서 어우러지도록 나온다. 영화의 시기적 배경이 크리스마스라는 점과 인물의 이름이 ‘캐롤’이라는 점에서도 두 색의 관계와 등장인물들의 관련됨을 떠올릴 수 있다. 감독은 인물의 욕망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 인물에게 색상을 부여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물들은 본인의 욕망을 색상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가장 강렬하게 본인의 욕망, 색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캐롤이다. 우선, 캐롤은 첫 등장부터 거의 주로 적색의 의상, 또는 그런 소품들과 함께 화면에 나온다. 이는 캐롤의 욕망과 동시에 캐롤의 강한 캐릭터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캐롤의 평소의상>
캐롤은 영화 주 부분에서 적색의 의상을 입음으로써 그렇지 아니한 때의 감정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색상의 변화는 캐롤의 네일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진1>은 캐롤을 만나고 캐롤과 잠시 헤어지기 전까지의 캐롤의 네일 색상이다. 테레즈를 거리를 두고 서로를 전화와 같은 방식으로 소통할 때까지만 해도 캐롤의 네일 색상은 붉은 계열이다. <사진2>와 <사진3>은 캐롤과 떨어져있는 기간 동안의 캐롤의 네일 색상이다. 붉은 계열의 색상이 아닌 거의 하얀색이다. 캐롤의 네일 색상을 통해 테레즈와 완벽하게 분리되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진4>는 캐롤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 테레즈를 만나는 장면이다. 캐롤의 네일 색상으로 캐롤은 다시 본인 자신을 찾았음을 나타낸다.
테레즈의 색상은 캐롤만큼 명확하게 색을 나타내고 있진 않지만 주로 연한 색, 혹은 녹색 계열의 색을 띠고 있다. <사진5>를 보면 테레즈의 옷과 커튼이 연하게 푸른색을 띠고 있다. <사진6>은 캐롤과 떨어지게 된 후 본인의 집, 벽을 도색하는 장면이다. 색상이 없던 연한 색 벽에서 연하지만 녹색을 띠고 있는 색으로 도벽을 하며 본인의 색을 찾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물들의 색상은 인물 자신의 감정과 캐릭터를 성명해주기도 하지만 둘의 관계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사진 7>은 테레즈가 캐롤과 여행을 가기로 한 후, 짐을 챙기는 장면이다. 테레즈는 적색 니트를 곱게 접어 넣은 뒤, 하얀 이너웨어를 가방 안쪽에 넣음으로써 여행에서의 캐롤과의 관계를 암시한다. <사진 8>과 같이 서로의 색이 바뀜으로써 서로의 감정적인 교류와 서로가 동화되어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캐롤과 테레즈의 첫 정사씬 직전의 <사진 9>장면에선 공간 전체를 적색 조명과 적색의 벽지로 둘로만 가득 찬 공간을 나타낸다
색상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은 뒤에서 공간별 분석 시, 좀 더 분석하도록 한다.
2. 공간을 통한 인물들의 감정구축
백화점은 모두의 욕망의 공간이자 사회적 억압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테레즈가 근무하는 곳으로써 테레즈가 놓은 사회적 환경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행사용 모자, 정부의 지시를 받는 경비원, 인형들에게 둘러싸인듯한 강압적인 분위기는 주인공을 억압하는 상황과 사회를 드러낸다. 또한, 백화점은 캐롤과 테레즈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로 붉은 모자, 붉은 스카프, 붉은 립스틱,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미지의 캐롤이 백화점 직원인 테레즈와 극명한 대비를 이룰 수 있게 해준다.
캐롤과 테레즈의 첫 사적인 만남의 장소인 레스토랑은 캐롤의 욕망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캐롤의 붉은 옷이 겉옷으로 가려져 있고 인물들의 주변인 의자와 메뉴판, 전체적인 느낌인 적색을 띠고 있다. 이를 통해 캐롤은 테레즈를 본인의 욕망으로 만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캐롤의 욕망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의 욕망을 발현해보려는 테레즈와 사랑의 욕망을 발현해보려는 캐롤이 대비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캐롤의 집에선 캐롤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하지의 욕망도 드러난다. 부러진 크레파스를 붙인다던가, 싱크대를 고치다가 본인의 의도대로 되지 않음에 분노하기도하며 욕망을 드러낸다. 캐롤의 집은 캐롤의 딸 린다를 향한 욕망의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캐롤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하지와 캐롤의 대화 중 가정부를 화면에 잡음으로써 사회적 시선에 대한 캐롤의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함께 여행을 가기로 한 캐롤과 테레즈가 자동차를 타고 터널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들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자 중요한 감정선을 영화적으로 잘 나타낸 장면이다. 자연적인 배경 사운드를 없애고 드라마틱한 빛과 어둠의 과장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구축하고 그들만의 세상을 강조한다. 또한, 푸른 빛의 라이트를 이용하여 테레즈의 감정도 명확해져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호텔은 캐롤과 테레즈 둘의 공간이다. 그러한 호텔의 외부와 내부를 조명의 대비로 차갑고 냉정한 현실과 따듯한 그들만의 세상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러한 공간들은 캐롤의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른 호텔 씬에서 캐롤과 테레즈를 보여주기 전에 벽에 하지와 캐롤의 딸 린다를 떠올릴 수 있을만한 사진을 걸어두어 캐롤이 집을 벗어나도 하지와 린다(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감독은 이러한 연출들을 통한 감정구축을 한 덕분에 후에 캐롤의 선택에서 관객들이 캐롤의 감정을 증폭시켜 느낄 수 있게 한다. 또, 영화가 테레즈의 성장이야기로도 볼 수 있을만큼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면서 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의 테레즈 <사진 10>와 영화의 후반부의 테레즈 <사진 11>의 의상이라던가 화장법에서 차이가 나는데 호텔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들을 보여줌<사진 12>으로 테레즈의 성장이 캐롤의 영향이었음을 나타낸다.
테레즈와 떨어진 후, 캐롤은 하지와 시댁에 가는데 이곳에서도 감독은 캐롤의 감정을 서서히 구축한 후 증폭시킨다. 인물들이 잡히기 전, 정치적 내용의 TV를 계속 보여줌으로 시대적 억압을 보여준다. 캐롤의 시선과 시댁보다 웨이터에게 더 밝게 웃어줌으로써 캐롤이 그 자리를 불편해하고 어울리지 못함을 나타낸다. 캐롤의 주변을 막고 있는 답답한 구도의 앵글과, 캐롤의 목과 잔마다 둘러져 있는 금색 띠를 통해 억압받는 캐롤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더 긴장되게 만든다. 이런 감정들이 구축한 후 린다를 만나는 장면으로 캐롤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린다를 안고 다시 실내로 들어가려는 캐롤과 시댁을 밝은 조명과 어두운 조명으로 한번 더 대비시킨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장면들 중 캐롤이 친정에 가는 장면은 가장 복합적인 연출이 담겨있고 하나의 씬 안에서 감정의 증폭이 가장 잘 나타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의 장면은 위치선정에 의해 권력관계를 표현한다. <그림 1>을 보면 위치적 우위는 이미 하지의 우위를 나타내주지만 캐롤이 화살표와 같이 이동을 함으로써 주도권을 잡는다. <사진 13> 참조. 정에 온 캐롤은 붉은색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고 앵글 또한 특이하다. 기본적으로 쓰이는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법정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 긴장감을 높였다. <사진 14>참조. 장면에서는 다른 장면들에 비해 긴 대사로 주제를 배우의 입에서 풀어내는데, 진부할 수 있는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스테이징이라던가, 화면적 효과, 배우들의 연기력 등으로 감정을 구축해놓고 실행함으로써 전달력이 있는 장면으로 만들었다.
캐롤과 테레즈가 재회하는 레스토랑 장면에선 레스토랑 바닥의 적색과 하얀벽의 조화로 캐롤(적색)과 테레즈(하얀색)이 동등해짐을 보여준다. 캐롤의 의상에서도 적색이 많이 빠졌고 테레즈의 의상도 진하게 하였다. 꽃으로 비교적 앵글이 안정적인 캐롤과 주변을 비워 공허한 테레즈, 인물의 상태가 드러나도록 구도를 잡았다.
3. 영상표현을 통해 나타낸 감정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인상적이고 파격적으로 봤을 것이다. 캐롤을 찾아 캐롤의 친구 애비를 찾아갔는데 애비의 차가운 태도와 자신의 대한 캐롤의 입장을 듣고 절망적이고 불안한 하지의 상태를 화면이라는 큰 프레임 속의 작은 프레임을 통하여 나타냈다. 이와 비슷하게 막히는 도로와 빽빽한 뉴욕의 건물들을 통해 캐롤의 복잡한 속내를 표현하였다.
그런 반면, 공허한 인물의 감정을 나타낸 장면들도 있다. 넓고 조용한 거리를 인물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잡아 인물의 텅 비어있는 내면과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보여지고 싶지 않은 인물의 감정을 표현했다.
비슷하게 캐롤과 테레즈가 여행을 떠나고 차안에선 둘만의 애정을 나누지만 밖의 도로는 말라 비틀어진 도로를 잡아 현실과 대조됨을 나타냈다.
영화를 보면 <사진 15>와 같이 인물을 한쪽 귀퉁이에 몰아넣은 듯한 느낌을 받을 만한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감독은 이러한 구도를 통해 서로의 옆자리가 비어있음을 통해 외로움을 나타내고 합리화 시키고 있다. 테레즈와 캐롤이 만나기 시작한 후엔, <사진 16>처럼 소품 등으로 빈 공간이 채워져 있음을 나타냈다.
영화에서 감독은 프레임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나누기도 한다. 캐롤과 테레즈가 떨어지고 캐롤이 테레즈를 그리워하던 중, 캐롤은 우연히 택시를 타고 가다 테레즈를 본다.
캐롤이 테레즈를 보는 시선을 흔들리게 촬영하고, 테레즈를 건물의 벽에 의해 의해 사라졌는데 캐롤은 택시 창문의 마지막 필러에까지 들어가면서 테레즈를 보려고 한다. 테레즈가 인파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 단절됨을 극화시켰다. 이런 식으로, 차의 필러라든가 창문의 창살을 이용해 프레임을 나누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인물의 감정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비교적 자주 표현하고 있다.
캐롤의 집에서는 벽을 통한 프레임으로 테레즈의 입장에서 다가가기에 쉽지 않음을 표현했다.
캐롤과 애비의 장면에서는 화면에 다른 뭔가가 함께 나온다던지 답답한 앵글로 당당하지 못한 그들을 나타냈다. 대화하고 있는 둘을 불빛으로 비추면서 대화가 끝나는 것으로 범죄자들과 라이트의 관계를 나타냈다.
비슷하게 캐롤이 테레즈에게 여행을 제안하면서 카메라를 선물하는 장면에선 화면에서 인물들이 일부만 나올 정도로 화면을 일부만 할애하여 찍었다. 당당하지 못한 사랑의 시작을 나타냈다.
전화하는 장면에서는 서로 마주보는 듯하게 장면을 연결하여 캐롤과 테레즈의 대비와동시에 그리움을 나타낸다.
4. 상징적인 표현들
종종 주변의 인물, 제 3자들은 비춰 인물이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감독은 소품들을 이용하여 서로에게 서로가 물들어감을 나타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캐롤이 맥주를 병째로 마심과 동시에 테레즈는 전용 잔에 담아 서로 건배를 한다. 또, 초반에는 담배를 잘 피지 않던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고부터 흡연자가 되도록 하였다.
배경이 겨울이다 보니 눈이 오는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감독은 눈을 이용하여 같이 여행을 가기로 결정하였을 때, 둘이 여행을 떠났을 때와 같이 인물들의 깊어지는 감정을 나타냈다.
테레즈는 영화에서 포토그래퍼로 나오는데, 인물사진은 찍지 않던 테레즈가 사진의 대상이 사물에서 사람을 찍어 테레즈의 성장이라고도 보여주고 테레즈의 욕망의 대상이 캐롤이라는 것도 보여준다.
영화의 맨 시작부분에서 모형기차가 돌아가고 작은 모형 기차이지만 관객들이 실물 크기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안에 있는 것처럼 엄청 크게 잡았다. 그리고 남색 사람 모형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기차가 지나간다. 이것을 복선으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테레즈가 캐롤을 만나러 가려고 발걸음을 돌릴 때, 기차소리가 난다. 장난감 기차의 작동을 켠 후, 그것을 바라보는 테레즈와 백화점을 오픈시키고 캐롤이 등장하여 실수로 그 장난감기차의 버튼을 건드려 기차를 세운다. 그렇게 캐롤과 테레즈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기차에 대해 ‘달리는 기차는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진행되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라고 말한 적 있다. [ii] 원작 소설인 <The Price of Salt>에선 캐롤이 인형을 사가지만 영화에선 캐롤이 기차를 사간다. 그런 점에서 감독은 기차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고 <캐롤>은 하나의 달리는 기차와 같은 이야기다.
Ⅲ. 결론
감독은 욕망과 감정구축의 표현에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덕분에 이러한 감정과 욕망구축의 표현들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인물들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크게 전달 할 수 있었다. 한템포 쉬고 연기를 한다던가 배우들의 연기도 감정강조에 큰 역할을 한다. 감독은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감정을 구축시키고 증폭시키는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또한, 비교적 교과서적인 방법보다는 새로운 방법들을 많이 사용했다. 그로 인해 중요한 부분들을 더 강조 할 수 있었다.
토드헤인즈 감독의 전작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다소 있었지만 <캐롤>은 시청을 거듭하며 볼수록 경이로웠다. <캐롤>은 다양한 부문에서 상을 받은 만큼 다양한 부문에서 섬세한 연출이 느껴지고 한 장면 장면, 단 하나도 의미 없는 연출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섬세한 연출과 인물들의 감정이 영화적 표현으로 나타난 영화이다. 다양한 영상표현방법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있다. 분석을 하면서도 빠져들 수 밖에 없었고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의 표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Closer
이 매혹적인 영화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캐롤과 테레즈가 마셨던 올리브 넣은 마티니를 따라서 마시고 테레즈가 쓰던 수첩에 글을 적는다면 어떨까.
한창 <캐롤>에 빠졌을때의 내 모습을 보니 갈색 털코트에 노란색으로 탈색한 단발머리였다. 당시엔 너무 달라서 생각도 못했지만 지금 다시 보니 캐롤을 어렴풋하게 무의식적으로 따라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좋아하는 영화를 곱씹으며 체험하는 것은 영화팬으로서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혼자서만은 영화의 세계를 실현시키는 것이 어려웠지만 배급사 하이스트레인저의 클로저가 영화 속의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스크린 밖으로 꺼냈다.
상영회가 끝나고 마티니 한잔과 함께 <캐롤>의 굿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위의 굿즈를 포함한 다양한 상품들은 온라인 및 오프라인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굿즈를 설명하는 담당자님에게서 영화를 향한 진한 애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앞으로의 상영회도 기대가 된다. #클로저상영회
*본 상영회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i]
Sight & Sound.
토드 헤인즈 인터뷰
[ii]
Sight & Sound.
토드 헤인즈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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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5주 차, 최신 씨네 뉴스 2호
📮 5월 5주차 2번째 씨네뉴스가 도착했습니다!
✨ HBO <해리 포터> 시리즈, 드디어 해리·론·헤르미온느 주인공이 확정됐습니다!
30,000명이 넘는 지원자 중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세 배우가 전 세계 팬들 앞에 처음으로 공개됐어요.
🔹 해리 포터 – 도미닉 맥러플린
🔹 헤르미온느 그레인저 – 아라벨라 스탠턴
🔹 론 위즐리 – 앨러스터 스타우트
오는 여름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며, 시리즈는 원작의 책 한 권씩을 한 시즌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해요.
새로운 시대의 마법사들이 만들어갈 또 다른 호그와트의 이야기, 어떤 마법이 펼쳐질지 기대되지 않나요? 🪄
🗞️
❶ ‘해리 포터’가 HBO 시리즈로 새로운 주연 배우와 돌아온다.
❷ 마틴 스코세이지, 차기작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재회할까?
❸ 조쉬 오코너, 조엘 코엔 신작‘잭 오브 스페이드’ 주연 확정
❹ 대니 보일의 영화 ‘28년 후 ’6월 19일 국내 개봉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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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이라는 소름끼치는 무게
<로스트 도터>는 헐리웃에서는 작년 공개되어 아카데미 시상식 3개부문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지만 국내에서는 이제야 개봉하면서 모성을 다룬 <브로커>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다.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는 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최고작은 아니라거나 소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호불호가 갈리는 악재마저 겹친 <브로커>는 모성에 대해 전통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제작한 이후 '여성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피드백을 받고 고심했고 그 결과 탄생한 이야기가 <브로커>라고 밝힌 바 있다. 소영(이지은 분)이 어머니가 되어가는 여정을 그렸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소영은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어머니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신인 여성감독 매기 질렌할의 <로스트 도터> 속 모성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레다(올리비아 콜먼 분)는 성인이 된 딸들을 언급하기만 할 뿐 스크린으로 소환하지는 않는다. 레다의 딸들은 스크린 상에서 어린 아이들로서만 존재하며 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닌 레다의 커리어를 방해하고 레다를 괴롭히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고레에다 감독이 천착해온 주제인 가족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드러나는 가족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특히 고레에다 감독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어느 가족> 속 가족은 현대화된 핵가족의 틀조차 거부하고 시간을 거슬러 대가족의 형태를 두팔벌려 환영한다. 이들은 혈연이 아닐 뿐 전형적인 엄마와 아빠, 할머니, 형제자매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브로커> 속 가족 또한 배경을 부산으로 옮겨왔을 뿐 친모이자 엄마 역할을 수행하는 소영,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나눠맡는 동수(강동원 분), 아빠이자 가장 혹은 할아버지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현(송강호 분) 그리고 아기 우성의 형으로 기능하는 해진으로 구성된다. 고레에다 감독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가족 내에서 희생해야 하는 여성이나 가장의 무게 등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다. <브로커> 속 가족은 아기 우성을 중심으로 구성원이 역할을 구성하지만 각자의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현의 세탁소는 문 닫은 채 남겨져도 괜찮은 것인지, 동수가 찾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인지, 해진 또한 새로운 가족을 찾을 수는 없는지, 소영은 우성을 되찾거나 놓아준 후 자신만의 삶을 구축할 수는 없는 것인지 영화는 답해주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드러나는 각 캐릭터의 모습은 이들을 뒤쫓던 형사 수진(배두나 분)마저 우성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게 만든다.
반면 <로스트 도터>는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 어머니에 집중한다. 레다는 가족여행 대신 홀로 휴가를 온 교수이고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삶에서 남편을 지운 것처럼 보인다. 레다가 마주치는 어머니들에게 레다는 인사치레로라도 긍정적인 말을 거의 해주지 못한다. 육아의 기쁨에 대해 설파하는 대신 임산부에게 '자식은 끔찍한 부담이에요'라고 경고하고 가족 파티를 하겠다는 가족에게 자리조차 비켜주지 않는다. 자식이 태어난 후 떠나버린(아마도 컬럼비아 대학으로 교수 발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남편의 빈 자리를 힘겹게 메꾸며 홀로 가정을 받쳐온 레다에게 가족 파티란 어머니의 희생을 가리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조차 남성들이 아닌 임신한 여성에게 전가되고 거절하는 레다 옆에서 남자들은 무례하게 욕이나 내뱉을 뿐이다. 가정의 허상을 깨달은 지 오래인 레다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상황에 대한 사과도 여성에게 미뤄지고 레다는 모든 상황을 이해한듯 사과를 받아들이고 자리를 피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레다의 등에 떨어진 솔방울은 가족 혹은 자식의 무게를 대변한다. 어느날 갑자기 레다에게 주어져 상흔으로 남지만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는 솔방울 흔적은 두번 떨어지면서 레다의 두 딸을 비유한다.
아이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아이라는 무게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전혀 다른 두 시각을 드러내는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단연 감독의 성별이다. 상대적으로 육아 참여도가 낮은 동아시아의 남성인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는 주로 어린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담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사람들에게 한없이 친절한 동시에 어른에게서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한다. 반면 <로스트 도터> 속 아이들은 때로는 무심하고 때로는 잔인하며 애정으로 오인되는 관심을 갈구한다. 그리하여 <로스트 도터> 속 엄마들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육아에 지친 니나(다코타 존슨 분)와 젊은 레다(제시 버클리 분)의 표정은 엄마이길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성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기 위해, 혹은 스스로 우성을 키우기 위해 분투하는 소영과는 달리 니나와 레다는 아이를 자신에게서 분리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얻길 원한다. 감독의 반성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브로커>조차 단독 육아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눈으로 본 이상적인 모성이 반영된 반면 <로스트 도터>는 현실적인 모성에 기반한 이야기에 가깝다. <브로커>와 <로스트 도터>는 각각 모성에 대한 환상과 현실을 반영하며, 어느 쪽에 이입할 것인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브로커>의 흥행 스코어와 평을 볼 때 모성의 환상에는 관객이 크게 공감하지 못한 듯하다.
레다가 아이에게서 훔친 인형은 제목과 맞물려 레다의 딸들인 비앙카와 마사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다가 망가진 레다의 인형에 대한 대체품으로 그 이미지를 옮겨간다. 비앙카가 망가뜨리고 자신이 창 밖으로 내던져 산산조각난 인형은 출산과 육아로 한계에 다다른 레다 그 자신을 반영한다. 결국 레다가 훔친 인형은 레다 그 자신이며,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도망가 자기 자신을 추스른 레다의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깨끗이 씻기고, 새 옷과 신을 사서 신긴 인형은 서사 내내 레다의 곁을 떠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입에서 벌레를 뱉어낸다.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딸들을 떠나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형상화된 벌레는 인형의 입에서 기어나오며 내면의 오물을 모두 걷어낸다. 레다는 니나에게 끊임없이 인형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해 주는데 이는 결국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육아는 언젠가 끝나고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는 엄마 선배로서의 조언이다. 하지만 인형을 돌려받는 니나는 아직 육아의 도중이기에 레다의 조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레다를 공격한다. 같은 위치에 놓인 여성, 엄마 동지조차도 그 과정을 온전히 겪어내기 전에는 모성의 굴레와 그 끔찍함에 대해 공감할 수 없음을 영화는 잔인하게 설명한다.
동시기 개봉한 모성에 관한 두 영화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허상과 실재를 보여준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지만, 확실한 것은 모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부성의 무게와는 전혀 다르며 겪어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피로와 상처로 해안가에 쓰러진 레다가 다시 벗겨내는 오렌지 껍질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피로와 상처에 대해서는 내색하지 않고 딸들과 통화하는 레다의 모습은 자식 앞에서 삶의 무게를 내색할 수 없는 부모의 무게를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성인이 된 딸들과 물리적인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레다는 마음 한 켠으로는 내려놓고 싶은 모성의 소름끼치는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브로커> 이미지는 네이버영화 출처입니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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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놈: 라스트 댄스 | SSU에 '로건' 향을 첨가한 라스트 댄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환상의 짝꿍이자 안티히어로인 '에디 브록'(톰 하디)과 그의 심비오트 '베놈'. 카니지와 맞서 싸우며 샌프란시스코를 엉망으로 만든 뒤 멕시코로 도주한 두 친구는 멀티버스에 갔다 온 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스트릭랜드'(치웨텔 에지오프) 준장이 이끄는 미군 특수부대가 '페인'(주노 템플) 박사의 연구에 필요한 심비오트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을 쫓기 시작한 것.
그들의 추적을 힘겹게 따돌리며 뉴욕으로 향하던 에디와 베놈. 하지만 그들은 또 다른 추적자를 마주한다. 과거 심비오트에 의해 감옥에 갇힌 심비오트의 창조자 '널'(앤디 서키스)이 외계 괴물 '제노페이지'를 지구에 보내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 에디와 베놈에게만 있는 감옥의 열쇠, 코덱스를 갖기 위해서. 이에 에디와 브룩은 그들의 마지막 동행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에 돌입한다.
SSU에 <로건> 한 숟갈
슈퍼 히어로 영화에게 마지막 편이 있는 것은 훈장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편이 나올 정도로 시리즈가 이어졌다는 방증이고, 이는 매번 조금씩은 다른 모습으로 팬들을 만족시켰다는 의미니까. 실제로 10년 전만 하더라도 <다크나이트 라이즈> 정도를 제외하면 마무리 인사를 건넨 히어로 영화는 거의 없었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조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전까지는 끝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휴 잭맨의 울버린과 이별한 줄 알았던 <로건>은 유독 뇌리에 강렬히 각인됐다. 엑스맨 시리즈에서도 울버린을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 찰나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작별을 고할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서부극 작법으로 히어로 영화를 풀어냈기에 참신했고, 몸도 마음도 고통스러운 히어로에게 안식처를 마련했기에 더욱 뭉클한 작품이었다.
톰 하디와 켈리 마르셀 감독도 여러모로 <로건>을 감명 깊게 본 듯하다.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이하 SSU)의 개국공신인 <베놈> 시리즈의 최종장, <베놈: 라스트 댄스>(이하 <베놈 3>)가 <로건>과 흡사하기 때문. 캐릭터를 다루는 방법도, 줄거리도, 히어로에게 헌사를 보내는 방식마저도 닮았다. 물론 단순히 <로건>을 베낀 작품은 아니다. <베놈> 시리즈와 SSU만의 캐주얼한 멋과 맛은 여전하니까. 심지어 단점마저도.
베놈과 에디가 마침내 빛나다
완성도에 비해 <베놈> 시리즈가 흥행한 원동력은 크게 둘이다. 베놈 캐릭터 자체의 인기와 영화 속 베놈과 에디의 콤비. 극 중 베놈이 코믹스 속 빌런 캐릭터에 비해 지나치게 착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의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포악하나 귀여운 구석이 있는 베놈과 예리한 기자이지만 허술한 일면이 있는 에디 브록이 만담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닮아가는 성장 이야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다만 <베놈> 시리즈는 여태 자기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 베놈과 에디의 관계를 단순히 유머 소재로 쓰거나, 다른 캐릭터를 조명하고자 둘의 서사를 축약했기 때문. 마지막 편인 <베놈 3>는 다르다. FBI에게 쫓기며 멀티버스까지 경험한 두 친구가 안티히어로로 활동할 동안 놓친 것을 짚어주면서 베놈과 에디 둘의 관계에 온전히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마침내 그들의 동행에는 감정선이 더해졌다.
그 중심에는 '마틴'(리스 이판) 가족이 있다. 로건이 로라를 에덴으로 데려주다가 농장을 운영하는 가족에게서 평화를 느꼈듯이, 에디와 베놈도 제노페이지의 추격을 따돌리고 뉴욕으로 가던 중 마틴 가족을 만난다. 그들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에디와 베놈은 각자 잊고 지내던 것을 깨닫는다. 에디는 '앤'(미셸 윌리엄스)과 결별한 뒤 평범한 일상과 가정을 갖지 못한 회한을. 베놈은 자기 때문에 에디가 포기한 것들의 소중함을.
그 덕분에 <베놈 3>는 지난 두 편과 퍽 다른 분위기다.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유대감 덕분에 베놈의 희생은 <베놈> 시리즈에게서 기대하지 않은 감동을 안긴다. 시리즈 3편을 통틀어서 가장 감정적으로 깊고, 파고가 높은 순간이다. <베놈>, <모비우스>, <마담 웹>과 같은 SSU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고려했을 때 놀라운 진보처럼 보이기도 한다. 1, 2편의 각본을 맡았던 켈리 마르셀이 메가폰을 잡은 결실이 아닐까 싶다.
<로건> 맛 대신 향만 첨가하다
캐릭터 구축 외에도 <베놈 3>이 <로건>의 장점을 활용하려 한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드러난다.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부터가 <로건>과 매우 흡사하다. 베놈과 에디는 울버린과 프로페서 X가 그랬듯이 샌프란시스코를 난장판으로 만든 후 멕시코로 도망간다. 제노페이지의 습격을 받고 나서는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고, 베놈은 울버린이 그랬듯이 영웅적인 희생을 선택하며 결말을 마주한다.
예상치 못한 공통점도 있다. 두 영화 모두 자유의 여신상을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하다. <로건>이 그랬듯이 <베놈 3>도 자유의 여신상에 베놈과 에디의 관계를 투영시킨다. 특히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에 도착한 이민자들을 맞이해 왔던 역사를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뉘앙스도 느껴진다. 외계인인 베놈과 심비오트가 자기 쓰임새를 증명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모습은 미국에 정착하려는 이민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베놈 3>는 <로건> 향만 낼뿐, <로건>의 감동이나 강렬한 인상까지 따라 하지는 못했다. 마치 오렌지 과즙을 넣은 환타와 오렌지 향만 더한 환타의 맛이 상이한 것처럼. 그 이유는 영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있다. 외적인 이유로는 <로건> 만큼 농축된 경험이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관객과 함께 쌓아 올리고 공유한 시간이 울버린의 그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니, 근본적으로 하위 호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내적인 이유로는 <베놈 3>의 방향성을 꼽을 수 있다. <베놈 3>는 부족한 깊이를 메우기 위해서 철저히 에디와 베놈 중심으로, 캐주얼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편의적인 전개를 적극 활용해 SSU와 <베놈> 시리즈 특유의 매력을 뽐내려 한다. 플롯을 꼬지도 않았고, 복잡한 은유나 암시도 자유의 여신상을 제외하면 없다. 나머지 캐릭터는 온전히 두 친구를 위한 도구일 뿐이며, 그들의 추억을 회상할 때를 제외하면 앞만 보고 달린다.
여전한 단점
그 대가로 <베놈 3>는 이전처럼 완성도를 잃었다. 우선 개연성이 부족하고, 몰입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일례로 베놈과 첸 아주머니가 춤을 추다가 제노페이지에게 위치를 들키는 일련의 과정은 모든 순간이 의아해서 쉽사리 납득할 수 없다. 스트릭랜드 준장, 페인 박사, 크리스마스 연구원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심비오트를 적대하거나 돕는 동기, 그리고 변심하는 과정 대부분이 생략된 나머지 그들의 선택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빌런과 심비오트의 활용법도 허망하다. 실질적인 메인 빌런 제노페이지는 평범한 외계인 CG 캐릭터에 불과하다. 물리적인 힘만 강할 뿐, 그들에게 부여된 특별한 서사나 개성은 전무하다. 심비오트 묘사도 일관성이 없다. 1편에서는 인류에게 거대한 위협이었다가, 갑자기 선역으로 묘사되기 때문. 2편 말미에 등장시키면서 기대감을 키웠던 '톡신'(스티븐 그레이엄)과 같은 캐릭터도 단순히 설명을 위한 도구적으로 소비해 버렸다.
SSU의 고질병인 편집 문제도 여전하다. 급작스러운 화면 전환 때문에 일정한 톤을 유지하지 못했다. 음악 활용이 단적인 예시다. 사용된 노래는 제각기 일리가 있지만, 각 시퀀스를 이어서 보면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같은 재치는 찾기 어려운 셈이다. 결말에 삽입된 마룬 5의 'Memories'만 보더라도 추모의 의미를 담은 가사는 적절했지만, 이전까지의 분위기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액션은 기대대로다. 특히 말과 같은 동물을 베놈이 활용하는 장면은 예고편 못지않게 본편에서도 눈길을 끈다. 심비오트 군단의 활약도 흥미롭다. 서로 다른 능력을 지닌 심비오트의 액션은 베놈에게 익숙해진 관객에게 새 볼거리를 보여주고, 눈을 즐겁게 한다. 다만 그들이 매력을 다 보여주기도 전에 퇴장한다는 점, 그리고 액션이 밤에만 펼쳐지다 보니 분간이 잘 안 되고 어지럽다는 게 옥에 티다.
깔끔한 결말 끝에 남는 물음표
종합하면 <베놈: 라스트 댄스>는 지극히 <베놈>답고, SSU다운 마무리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기존 시리즈의 팬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최종장인 셈이다. 다만 일관성 있는 끝인사와는 별개로 <베놈 3>는 몇몇 의문을 남긴다. 쿠키영상에서 암시된 향후 시리즈의 전개가 오리무중이기 때문. 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멀티버스와 MCU의 연계는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없다.
한 두 가지 힌트가 있을 뿐이다. 에디 브록을 스파이더맨의 도시인 뉴욕에 남겼다는 점, 베놈을 퇴장시키면서 SSU에서든 MCU에서든 안티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으로서 베놈을 등장시킬 환경을 마련했다는 점 정도가 유효한 암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놈의 라스트 댄스가 최소한의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영화에서 어떻게 등장하든 간에 여전히 베놈과 에디의 동행을 기대케 하니까.
Poor 형편없음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으니 그래도 이만하면 성공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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