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cto2025-02-10 22:46:05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리뷰
추락에서 비상으로: <더 폴>이 빚어낸 영화적 경이
비극 속에서 피어난 환상의 세계
오렌지를 따다 사고로 팔을 다친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스턴트 중 추락사고로 다리를 다친 로이. 그들의 만남은 모두 '추락'에서 비롯된다. 타르셈 싱 감독의 걸작 <더 폴>(2006)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독창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인물들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며,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영화는 로이의 판타지 속 이야기와 두 사람이 처한 냉혹한 현실이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전개된다. 환상의 세계는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로이의 절망과 알렉산드리아의 희망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로이가 들려주는 영웅담은 점점 그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며 변주되고, 알렉산드리아는 그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영화적 미학
<더 폴>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는 CG 없이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촬영된 로케이션 장면들이다. 이국적 풍광과 건축물이 어우러진 미장센은 현실과 환상을 경계 없이 넘나들며, 마치 한 편의 그림처럼 스크린을 채운다. 특히, 붉은 천으로 뒤덮인 장례식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영화적 이미지가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감정과 서사의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추락에서 비상으로: 구원의 서사
그러나 <더 폴>이 단순히 미장센만으로 기억될 작품은 아니다. 이 영화의 정수는 ‘추락’에서 시작된 두 인물이 서로를 통해 다시금 ‘비상’하는 과정에 있다. 깊은 우울과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 로이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품은 알렉산드리아. 두 사람은 현실의 잔혹함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알렉산드리아가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려 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녀는 단순한 청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능동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그리고 로이 역시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자신의 절망을 극복할 희망을 찾는다.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헌사
<더 폴>은 영화적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면서도, 단순한 형식미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그 본질을 탐구한다. 감독 타셈 싱은, 영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스턴트맨들의 헌신을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한다. 영화의 한 컷, 한 장면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헌신의 결과물임을 강조한다.
결국, <더 폴>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려는 스턴트맨들의 노력, 그리고 영화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의 삶과 희망을 담아낼 수 있는 위대한 매체임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작품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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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찰나를 영원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지?
나는 믿지 않는다. 첫인상이 거짓을 말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첫눈에 볼 수 있는 건 오직 상대의 외형뿐이고, 셜록 홈즈가 아닌 나로서는 상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누군가 내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한다면 약간 불신의 대상이 된다. 내 어디를 보고 반했다는 거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반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애초에 첫눈에 반한다는 감각이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겠다. 첫눈에 '잘생겼다' 혹은 '웃는 얼굴이 밝다' 같이 긍정적인 인상을 받을 수는 있어도, 그게 어떻게 사랑까지 번질 수 있는지. 내게 사랑이라는 관념은 첫눈에 반한다는 관념과 평행선에 놓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 <캐롤>을 보고서는 평행선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약간이라도 각도가 틀어져 있다면 얼핏 평행선 같아 보여도 언젠가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첫눈에 반하는 모든 사랑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떤 사랑은 이해할 수 있구나. 씨앗 하나가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을 사랑이라 한다면, 세상에는 잭과 콩나무처럼 하루아침에 하늘까지 자라나는 나무도 있는 것이다. 속도가 아주 빨라 일반적인 성장과 달라 보이지만, 그것도 분명 자라나는 과정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그렇게 내가 몰랐던 사랑의 일면을 각인시킨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이들도 가끔 첫눈에 반하는 이유는, 이런 사랑 때문일 것이다.
시선, 꿰뚫고 들어와 붙드는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에게 유독 시선이 마주치고, 시선 끝에서 상대가 사라지면 어쩐지 다시 더듬더듬 눈 끝으로 찾아보게 되고. 그렇게 캐롤와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마주친다. 1950년대의 부요함이 가득 놓인 아름다운 매대를 사이에 두고, 시선은 곧 대화로 자라난다. 영어 듣기 평가 수준으로 평이해질 수 있었을 점원과 손님의 대화인데, 시선에서 자라난 대화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이 녹아든다. 숨죽이고 보게 만든다.
<캐롤>은 두 배우 사이의 시선이 중요하게 기능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시선은 단순히 서로를 바라보며 은근한 시그널을 보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캐롤>에서 오가는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거 깊숙한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근무하지만 앞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데, 사람을 찍는 건 기분이 이상하다며 새나 나무, 창문을 주로 찍는다. 원작 소설의 테레즈가 지망한 연극 무대 만드는 일에 비교하면, 사진은 시선으로 시작해 시선으로 끝나는 작업이다. 게다가 테레즈가 사람을 찍지 않으려는 이유 또한 의미심장하다. "사생활을 침해 invasion of privacy"하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시선은 단순히 누군가의 겉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침공하여 끝내 꿰뚫고 만다는 인상을 남긴다. 식기로 치면 버터나이프보다는 외려 포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차를 타고 도시 외곽에 있는 캐롤의 집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잠깐 차가 멈춰 섰을 때 테레즈가 카메라를 꺼내어 캐롤을 바라보다 사진을 찍는 장면도 있지만, 앵글이 담아내는 시선 또한 관객이 두 사람 마음에 동화되게 만든다. 눈으로 만져보는 느낌이 들 만큼 가까이에 느껴지는 캐롤의 코트 촉감, 라디오 버튼의 느낌, 햇볕이 얼굴에 닿는 느낌, 차창에 묻은 먼지까지도. 그 차에 함께 탄 듯 사랑의 시선에 동참하고 나면, 어느새 사랑은 시선을 먹고 자라고 시선은 다시 사랑을 머금게 된다. 남루한 일상에 빛이 더해진다.
순간, 온 삶으로 기다려온
사랑이 찾아온 순간 테레즈는 변한다. 이전까지는 마치 삶의 사건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듯이, 대부분의 결정을 유보하며 지내왔다. 남자친구 리처드에게도, 리처드가 함께 하자고 종용하는 유럽 여행에도 은근슬쩍 대답을 미루면서. 그러나 마침내 사랑이라는 사건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 테레즈는 마치 폭주 기관차 같다. 작게는 장갑을 보내고, 교외에 있는 캐롤 집에 찾아가는 것부터, 인물 사진을 찍고,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캐롤의 편지를 받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까지. 전에 없이 당당한 태도로 애비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까지.
결정적인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행위처럼, 테레즈의 사랑의 행위에는 망설임이 없다. 햇살처럼 사라지는 시선을, 순간을 영구히 잡아두는 것. 찰나의 결정이 영구한 무언가를 만들고 붙든다는 점에서, 사진은 두 사람의 사랑과 닮은 행위다. 사진 한 장에도 이야기가 가득 배어 있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들처럼. 사진이 담긴 풍경을 온전히 응시하게 만드는 사울 레이터의 사진들처럼. 토드 헤인즈 감독이 20세기 뉴욕을 닮은 사진들을 잔뜩 참고하여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되새겨본다.
이혼을 결정하고 나서도 계속 캐롤을 붙드는 남편 하지, 그리고 딸 린디에 대한 양육권 등 복잡한 역학 관계에 놓여 있는 캐롤로서는 테레즈처럼 마구 달려갈 수는 없다. 테레즈는 일생에 처음 맞이하는 사랑의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울기도 하고 작아지는 기분도 느끼면서 있는 대로 흔들리는 테레즈와 달리, 캐롤은 이미 사랑의 경험을 과거에 두고 온, 사랑에 온전히 젖어 들어도 보고 거기서 물러나 보기도 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진은 찍는 사람 못지않게 찍히는 사람의 역할 또한 중요한 예술 작업이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의 두 사람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단순히 마주쳤는지 아닌지, 그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과거에 두고 온 사랑은 테레즈가 아니기에,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바로 지금 피어나는 순간에 거한다.
사랑, 도구로 전락할 수 없는
<캐롤>은 그 아름다운 사랑만을 고스란히 담는 데에 집중한다. 반공과 군비 경쟁으로 무장한 1950년대 미국의 보수성 안에서 정체성을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사랑이 아닌, 2차 세계 대전 이후 역대급으로 풍요로웠던 시대의 일면을 거니는 사랑이 있다. 지나갔기에 더욱 낭만적으로 보이는 도시 구석구석, 아름다웠던 20세기의 정물들 사이에서 캐롤과 테레즈의 사랑은 빛난다. 가족과 보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명절에,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난 두 사람의 사랑에 오롯이 집중한다.
사랑의 시선은 이처럼 오롯이 상대를 향해야 한다. 이 지극히 당연한 명제는 현실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진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면서도 테레즈의 계획과 감정이 아닌 자기의 그것들에 테레즈를 편입시키려는 리처드 혹은 캐롤의 의지를 달래려는 게 아니라 꺾으려 드는 하지를 볼 때 이는 더욱 선명해진다. 플로리다로 같이 떠나자는 하지의 말, 유럽 여행을 생각해 보았냐는 리처드의 말과 달리, 테레즈를 향한 캐롤의 질문은 조심스러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심란한 와중에도 쇼윈도의 캐논 카메라를 보고 테레즈를 떠올리는 캐롤의 선물 박스에는 필름까지 한가득 들어 있다. (카메라 주면서 필름 잔뜩 같이 주는 그게 사랑 아니면 뭐냐고요) 캐롤을 피사체로 담으면서 한층 넓어진 테레즈의 사진 세계는, 카메라를 만나 한 번 더 넓어진다. 필름으로 세상을 담고, 용액 처리를 하면서 흑백 사진을 뽑아내고... 찬찬히 바라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과정이다. 두 사람의 언어는 그렇게 찬찬히, 섬세하게 뻗어 간다.
시선 끝에 자기 자신이 있다면, 아무리 함께 있어도 아무리 사랑을 말해도 결국 자기애로 귀결될 뿐이다. 상대를 자기애의 부차적인 요소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 있을까. 사랑이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현실에서 그런 서글픈 광경은 너무 많이 일어난다.
사랑이 싹트고, 사랑이 자라고, 서로의 사랑과 삶을 관통해 들어가는 것까지. 시선의 방향대로 사랑이 무르익는다. 그렇게 시선으로 자라난 사랑은 전신을 가득 메우고 발끝까지 가득 차올라, 종내에는 발걸음으로 완성된다. 나무처럼 거대하게 자라난 사랑이 마침내 약동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처럼, 궁극적으로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누군가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아무 말 없이 <캐롤>을 함께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흑백 카메라로 서로를 담아 보여주면 족하겠다. 서로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따라가 본다면 다른 말은 필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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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정신없이 일상을 보내다가도 순간 삶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한평생 우리를 따라다녔고 또 따라다닐 이 질문은,
'대체 무엇이 의미 있는가'
자꾸만 길을 잃는 이들에게 웨스 앤더슨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극작가 콘래드가 쓴 연극과 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스터로이드'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열린 '소행성의 날' 행사 참석을 위해 과학 천재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 등 여러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외계인의 등장으로 이들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갇히고 만다. 이 이상한 연극의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 극 속 인물들과 극 밖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영화는 연극 속 내용과 비하인드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연극을 현실처럼, 비하인드인 현실을 연극처럼 보여준다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라는 극은 컬러 화면이며, 자연스러운 화면 전환을 보여주는 반면, 비하인드 씬에서는 흑백 화면과 내레이션, 연극 세트와 같은 화면 구성을 가진다. 이러한 경계는 영화가 진행되며 자꾸만 무너진다. 현실의 내레이터 배우가 뜬금없이 연극 장면에서 등장하고, 오기 역의 배우는 도저히 극 중 오기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며 연극 밖으로 뛰쳐나간다. 엔딩에서는 연기학원에 앉아있던 배우들이 모두 잠에 빠져드는 연기를 펼친다. 그중 한 배우가 벌떡 일어나며 무언갈 외치는데 이때 배우를 비추는 화면은 컬러로 바뀐다. 현실과 극의 경계가 뒤섞이는 순간이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외계인이 나타난 후 우드로는 아버지 오기에게 말한다. '모든 게 불확실해요.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왜 소행성을 훔친 건지, 그게 우리건 맞는 건지, 우린 아는 게 없다고요.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수상한 외계인의 등장이 우드로의 인생을 흔들어 놓는 동안, 오기 역 배우 존스는 조금 다른 사건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 왜 오기는 전기 버너 위에 손을 올렸는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이상한 점은 한 둘이 아니다. 땅을 파는 자판기, 잘려 나간 오기와 아내의 장면,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의도. 그러나 존스가 가장 궁금해하는 건 오기가 버너 위에 왜 손을 올렸는지다. 결국 극 밖으로 뛰쳐나와 연출가 슈버트를 찾아간 그는 말한다. 아직도 이 연극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슈버트는 그런 그에게 의미는 상관없으니, 그냥 이대로 계속 연기하라 답한다.
다시 무대에 오르기 전 존스는 아내 역을 맡았던 배우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에게서 잊고 있던 삭제 장면에 관해 들은 그는 묻는다. 왜 잘랐을까요? 좋은 장면인데. 배우는 답한다. 아마 러닝타임 때문이겠죠.
극으로 돌아간 존스는 무사히 연기를 끝내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성황리에 막을 내린다. 그러나 우드로도, 존스도, 연출가도, 관객도 각자의 의문을 해결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상관없다는 것.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기에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극의 모든 뜻을 파악하기도 전에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끝내 아무것도 알 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의문을 가지고서라도 나아가는 것이다. 엔딩에서 배우들이 외친 대사처럼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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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는 셈 치고 이 메디컬 드리마를 봐야하는 다섯가지 이유
▷한줄평 : 우리에겐 영웅적 서사가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다
▷드라마 : 중증외상센터, 넷플릭스 2025.1월
▷평점 : ★★★
지난 2025년 1월 24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메디컬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를 볼까 말까? 고민이다.
<종합병원>1994년, <허준>1999년, <하얀거탑>2007년, <뉴하트>2007년, <골든타임>2012년, <굿닥터>2013년, <낭만닥터 김사부>2016년,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년
등과 같은 메디컬 드라마를 보아 왔던 터라 뭐 새로운 게 있을까 싶다.
으레 뛰어난 의술을 자랑하는 천재 의사를 중심으로, 그를 추종하는 초짜 후배 의사, 노련하고 헌신적인 간호사,
그리고 주인공과 갈등을 일으키는 원장단의 인물 구도는 메디컬 드라마의 전형이다.
중간중간 위험천만하고 긴박한 수술 장면도 빠질 수 없고, 간간이 눈물 쏙 빼놓는 감동적인 사연과 신파가 들어가면 금상첨화이다. 뭐 이제 새로운 게 있을까?
그런데도, 요즘 <중증외상센터>를 보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지금 우리에게는 슈퍼 히어로가 필요하다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참으로 암담하기만 하다. 작년 초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정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암초처럼 수면 아래 자리하고 있고,
최근에는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위기는 정점으로 향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연일 TV 뉴스에 도배되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지치고 힘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를 일거에 해소해 버리는 백강현(주지훈)과 같은 슈퍼 히어로의 등장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럴 때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판타지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폭발음과 함께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하는 블록버스터급 주인공의 등장 장면은 이건 현실이 아니라고 대놓고 이야기한다.
8부작 정주행하면 약 7시간(411분) 동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의 향연에 푹 빠져들 수 있다.
2023년에 이미 촬영을 마친 드라마를 이제서야 공개하는 것은 때를 보는 지혜가 남다르다고나 할까? 노림수가 엿보인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 출처 : 페이스북
둘째, 한편의 성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한국대학교병원 중증외상팀에 새롭게 부임한 백강현(주지훈)을 중심으로, 항문외과에서 스카우트된 양재원(추영우), 책임감 강한 시니어 간호사 천장미(하영),
마취통증의학과 레지던트 박경원(정재광)이 중증외상센터의 원팀으로 세워져 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나라의 중증외상센터가 법적, 제도적 미비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백강현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판타지 속 영웅들로 교화되어가는 듯하다. 마치 어벤저스팀과 같이 말이다.
이런 영향력은 드라마에서 중증외상팀을 중증외상센터로 발전시키고, 우리나라의 권역외상센터로의 외연의 확장으로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실제로 2012년 "중증외상센터 설립을 위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이국종법)에 따라 5개 권역외상센터(Regional Trauma Center)가 설치되었으며,
지금까지 총 17개의 센터가 운영되고 있다.[주1] 한 개인의 성장이 조직의 성장과 전 사회의 성장까지 도모한다는 점에서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메시지가 분명해 보인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 출처 : 페이스북
셋째, 생명을 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중증 외상 환자 발생 비율이 사무직보다는 노동직이 높다는 연구 보고서가 있다.[주2]
외상사고는 공장에서 산업재해로 다치거나, 버스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군대에서 총기 사고가 나거나, 산행 중 추락하는 등으로 발생한다. 이렇게 외상사고는 바로 나 자신, 나의 가족이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병원조차 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드라마 장면 중 병원에서 가장 많은 수익이 나는 곳으로 장례식장, 식당, 주차장이 언급되는 것은 웃픈 현실이다.
그래서 의료시스템은 적자가 발생하더라도 운영이 되어야 하는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암 치료는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역량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중증외상사고 대응은 낮은 수준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투자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주3]
그래서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돈보다는 생명을 살리는 본질에 충실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장면들은 우리 사회에 무엇이 중요한지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우리는 계속 뛰어야 했다. 환자의 죽음에 괴로워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는 사치였다.
24시간, 365일. 한순간이라도 우리가 멈추면 누군가의 심장도 털컥 따라 멈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뛰어야 했다. 환자의 심장을 계속 뛰게 하기 위해 우린 계속 뛰어야 한다.'
<중증외상센터> Episode 03 : 우린 계속 뛰어야 한다 / 양재원(추영우)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 출처 : 페이스북
넷째, 빌런(악역)들조차 귀엽고 사랑스럽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주인공과 갈등을 벌이는 빌런(악역)의 등장이다.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중증외상센터와 백강혁(주지훈)은 병원장 최조은(김의성)과 기조실장 홍재훈(김원해)에게는 눈엣가시이다.
그 대립 갈등 속에서 애제자 양재원(추영우)을 빼앗기고 백강혁을 적대시하는 항문외과 한유림(윤경호) 과장의 연기는 당연 압권이다.
이들 악역들의 전략이 그리 주도면밀하지 않고 허술하기만 하다. 그래서 갈등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금세 해소되어 버린다.
초반에 적대적이었던 한유림(윤경호) 과장이 오히려 백강혁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역할로 교화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귀엽기만 하다.
메타버스 속 가상 현실은 우리네 상황과 매우 닮아 있지만 현실 타개를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지금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바램의 투영인듯싶다.
답답하지 않고 쉽다. 빠르다. 속 시원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 출처 : 페이스북
다섯째, 우리나라 외상센터의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웹 소설과 웹툰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자는 2018년 이국종 교수의 수필 <골든아워>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국종 교수는 아주대학교 외상외과 전문의로 재직하면서 권역외상센터 설치, 닥터헬기 도입 등을 주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주4]
병원 경영진과의 갈등을 여과 없이 언론에 노출했었다. 2011년에는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인질을 구출하는 아덴만 여명작전에서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치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예화는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아프리카 수단에서의 총격전으로 부상당한 군인을 에어 앰뷸런스로 이송하고 치료하는 스토리로 각색되어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닥터헬기를 이용하여 사고 현장에 신속하게 접근하여 골든타임 내에 처치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병원 자체적으로 헬기를 보유하기 어렵고 소방청 소방항공 소방헬기를 이용해야 한다.
(작중 배경은 2015년으로 2022년 기준 지금은 총 8호기의 정부 지정 닥터헬기가 운용되고 있다)[주5]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응급헬기의 사용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헬기 이착륙 위치를 아무 곳에나 할 수 없어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그래서 장면 곳곳에 보건복지부 장관 강명희(김선영)의 등장과 지원은 반갑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스틸컷 / 출처 : 페이스북, 이국종 교수(현재 국군대전병원장), 경기도에서 운영 중인 닥터헬기 'AW-169' /출처 : 경기도
드라마 <중증외상센터>는 현실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인물들로 가득하다.
마치 영화 속 영웅적 인물이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듯, 현실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낼 인물이나 정책에 대한 갈망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암울한 새해 벽두에 던지는 화두가 유쾌하면서도 묵직해 보인다.
<참고자료>
[주1] 나무위키(권역외상센터) :https://namu.wiki/w/%EA%B6%8C%EC%97%AD%EC%99%B8%EC%83%81%EC%84%BC%ED%84%B0?from=%EC%A4%91%EC%A6%9D%EC%99%B8%EC%83%81%EC%84%BC%ED%84%B0
[주2] 한겨레21(『교통사고 사망률도 유전되는 더러운 세상』/김기태 기자) : https://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8725.html
[주3] 닥터프렌즈(외상외과의 역사/원작자 Dr.이낙준) : https://www.youtube.com/watch?v=oWwSVw7dGJk
[주4] 세바시 797회 강연 (이국종 교수편, 2017년 8월 7일) : https://www.youtube.com/watch?v=A_zuHvBlvkA
[주5] 중앙응급의료센터(닥터헬기운용 현황) : https://www.e-gen.or.kr/nemc/business_doctor_helicopte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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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처스 라운지> | 학교에 비친 사회를 보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난 사건이 빈번한 학교에 부임한 신임 교사 ‘카를라’(레오니 베네쉬). 그녀는 이민자 출신 학생이 범인으로 몰리자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교무실에서 예상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노트북 카메라를 켜 둔 채 지갑을 옷에 두고 수업에 들어갔다 온 사이, 돈을 가져간 사람의 블라우스가 카메라에 찍힌 것.
카를라는 범인을 찾으러 나서고, 이내 용의자를 발견한다. 학교 직원 '쿤'(에바 로에보)'이 문제의 블라우스를 입은 것. 이에 학교는 쿤의 출근을 금지하고, 쿤의 아들이자 카를라의 학생인 '오스카'(레오나르드 슈테트니쉬)는 카를라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 이후, 카를라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큰 시련을 마주한다.
학교와 교사를 빌려 사회를 이야기하다
<티처스 라운지>는 '독일영화상'에서 최고의 영화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여우주연상 등 5관왕을 달성한 영화다. 화려한 수상경력과 교무실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조합하면 이 작품의 소재를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교권이다.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을 통해 교권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카를라는 어떻게든 교내 도난 사건을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불똥이 튄다. 편견과 선입견, 오해가 겹치면서 학부모는 교사를 비난한다. 학교와 교사는 권위를 내세워 비난을 막으려 한다. 학생들도 교내 언론 같은 스피커를 활용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학교는, 특히 교무실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마치 최근 한국의 교실을 들여다보는 듯한 광경이 스크린 위에 펼쳐진다.
이 광경은 최근에 개봉한 영화 한 편을 연상시킨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이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두 작품은 우연히도 비슷한 사회적 갈등을 다룬다. 교내에서 발생한 사건을 두고 학생, 학부모, 교사의 관점이 엇갈리는 파국을 다룬다. 단순히 교권의 추락만 지적하는 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질적인 원인, 사회 전체의 책임을 지적하는 점도 공통점이다.
단,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장르의 차이다. 괴물이 비극 섞인 판타지를 지향한다면, 티처스 라운지는 강렬한 스릴러로 나아간다. 이 차이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두 작품의 끝도 상이하게 만든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괴물>과 공유한 여러 공통점에서 불구하고, 차별화된 톤과 메시지로 관객을 휘어잡는다.
<괴물>을 닮았다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가장 큰 공통점은 교권 이슈를 불쏘시개로 쓴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교권 이슈를 활용해 더 시급한 문제를 지적한다. 소통의 단절이다. 방식은 다르다. <괴물>은 관객을 현혹하는 방식을 택했다. 학부모, 교사의 시점에서 사건의 편린만 먼저 보여준 후에 학생의 관점에서 진상을 보여줬다. 학부모나 교사에게 동조한 관객 스스로가 편견과 선입견에 빠져 있었음을 자각하도록 만들면서 문제점을 체감시켰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소통이 단절된 상황 속에 관객을 던져 놓는다. 핵심은 모두들 눈을 가린 채로 코끼리를 만지기 바쁘다는 것. 모든 주인공은 각자의 사실만 믿는다. 카를라는 블라우스의 문양에만 꽂혀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카를라의 인터뷰 중 입맛에 맞는 대목만 기사화한다. 학부모들은 카를라의 변명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갈등의 시발점인 카를라가 뒤늦게 진실을 찾으려 고군분투하나 여의치 않다.
결국 <티처스 라운지>는 철저히 학교 내의 이야기만 다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사회 전체를 다룬다.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관용의 부재,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견과 선입견의 존재. 이들이 교권 자체의 하락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인 셈이다.
<괴물>과는 다른 학교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티처스 라운지>와 <괴물>의 공통점은 생각보다 눈에 잘 안 띈다. 포장 방법이 퍽 다르기 때문.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학교를 활용하는 방법에서 비롯된다. <괴물>에서 학교는 여러 배경 중 하나에 불과했다. 또 문제가 발생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을 어루만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례로 미나토는 교장 선생에게 트롬본을 배우면서 위안을 찾았다.
<티처스 라운지>는 정반대다. 철저히 학교 안에서의 상황만 다룬다. 학교 내부를 보여주는 방식도 억압적이다. 1.31:1의 좁은 화면 비율을 활용해 학교를 꽤 폐쇄적인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살렸다. 이에 더해 학부모, 교사, 학생의 시점을 교차한 <괴물>과 달리 <티처스 라운지>는 카를라에게만 집중한다. 그녀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의 중심에 있고, 관객은 그녀의 시점에서 모든 사건을 본다.
그 덕분에 <티처스 라운지>는 스릴러 영화의 재미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 학생들은 서로 주먹을 휘두르고, 교사에게 욕을 한다. 교사들은 해결법을 두고 서로에게 고함을 질러댄다. 간담회에 참석한 부모들은 법적조치를 들먹이며 교사를 비난한다. 오해와 편견이 쌓이는 서스펜스, 갈등이 일제히 분출되는 폭발력은 좁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한층 강렬해진다. 여기에 신경을 자극하는 음악까지 더해지면 교내 갈등은 한 층 첨예해진다.
다른 학교, 다른 결론
스릴러의 미덕에 충실한 결과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 역시 <괴물>에 비해 더 날카롭다. 사회적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 예를 들어 영화는 정체성 정치의 부작용을 자연스럽게 지적한다. 폴란드 출신이라는 카를라의 개인적 배경을 꼬투리잡거나, 교사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는 교내 언론의 행태는 단순히 학교 내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학교의 도난 사건 대응 역시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학교를 일종의 감옥으로 묘사하면서 학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질문하기 때문. 학교는 학칙을 어겼다고 의심되는 학생을 처벌하고, 통제하고, 다른 피의자를 찾아내기 위해 학생들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교정, 감시, 처벌은 감옥의 생리와 다를 게 없다. 학교의 존재의의와 목적에 대해 다시금 고찰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티처스 라운지>가 <괴물>과 전혀 다른 결로 마무리되는 이유다. 두 작품은 모두 '교권의 위기' 혹은 '소통과 관용의 부재'처럼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괴물>은 그 끝을 비극적인 판타지로 마무리했다.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하기를 바라는 한 줌의 기대와 희망을 품어 관객에게 날려 보냈다. 반면에 <티처스 라운지>는 더 직접적이고 명확한 대안을 제시한다. 전자가 시라면, 후자는 에세이에 가깝다.
큐브에 새겨진 결론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티처스 라운지>의 결론은 카를라가 오스카에게 건넨 큐브에 담겨 있다. 학교는 오스카에게 강제 전학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그는 학교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한 채 교실에 계속 남아 있는다. 동료 교사들이 경찰을 부를지 고민하는 사이 카를라는 오스카 옆 책상에 앉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담임교사로서 그의 옆을 지킨다.
그러자 오스카는 카를라가 건넸던 큐브를 조용히 맞추기 시작한다. 오스카와 갈등을 빚기 시작할 때 그녀는 큐브를 건넸다. 알고리즘에 맞춰 순서대로 풀어내야 하는 큐브처럼 다른 문제들도 원칙을 따를 때만 풀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들 사이에 숱한 오해와 편견이 쌓인다 해도, 차분하게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나란히 앉은 카를라와 오스카의 모습에서 그들이 99분 간 이어진 갈등의 탈출구를 마침내 찾은 듯 보이는 이유다.
물론 카를라는 이상적인 교사가 아니다. 학칙을 어겼고, 섣부른 추측으로 일을 키웠다. 하지만 그녀는 실수를 인정했고, 마지막까지 교사로서의 원칙을 지켰으며, 의무를 다했다. <티처스 라운지>를 단순한 스릴러 영화로 취급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추측과 선동이 난무하고 신뢰를 찾기 힘든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학교가 이렇게 폭발적인 공간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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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키 17 | 봉준호답게 일탈한 SF 모범생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빚을 내어 친구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차린 마카롱 가게가 망한 나머지 사채업자를 피해 다녀야 하는 '미키 반스'(로버트 패틴슨). 아예 지구 밖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한 그는 정치인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의 외계 행성 니플하임 식민지 개척단에 합류한다. 티모와는 달리 아무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위험한 일을 도맡고 죽으면 다시 신체가 출력되는 '익스펜더블'로 자원한다.
온갖 생체 실험에 동원되면 죽고 출력되기를 16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여자친구 '나샤'(나오미 애키) 덕분에 4년의 항해를 견뎌낸 '미키 17'. 니플하임 행성 탐사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탐사 도중 외계 생명체 ‘크리퍼’를 조우하고, 죽을 위기를 피해 우주선에 간신히 복귀한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이미 ‘미키 18’이 프린트되어 있었고, 복제 인간이 둘 이상 공존할 수 없다는 규칙에 따라 두 미키는 서로를 죽이려 든다.
봉준호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만남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복기해 보면 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한 작품 내에서도 의외의 타이밍에 장르를 변환하거나, 과감한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다는 것. <기생충>에서는 '부자는 악하고 빈자는 선하다'는 고정관념을 뒤엎는 전개와 블랙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전환되는 구성으로 충격을 선사했다. 꼬리칸의 반란의 성공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열차라는 시스템 자체를 전복하는 <설국열차>의 결말도 마찬가지였다.그렇기 때문에 <미키 17>은 기대만큼 우려도 컸다. '관습에 구속되지 않는 비틀림'이라는 봉준호의 특징이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다뤄질지 의문이었던 것. 워너 브라더스와 협업하고 제작비만 1억 2천만 달러가 투입된 <미키 17>은 <설국열차>나 <옥자>와는 또 다른,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으니까. 규격화된 시스템과 봉준호가 어떤 조화를 보여줄지 걱정 반, 기대 반일 수밖에 없었다.
<미키 17>의 결과물은 전반적으로 할리우드스럽다. 전개는 SF 클리셰에 충실하다. 봉준호라는 명성에 비하면 깊이도 얕아 보인다. 다양한 철학, 종교, 윤리, 정치적 딜레마와 알레고리가 삽입됐지만, 어느 것도 진득이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특별하다. 디테일로 빚어낸 블랙 코미디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 즉, <미키 17>은 할리우드의 SF 모범생이 전학생 봉준호를 만나 펼쳐 보이는 성실한 일탈의 결과물 같다.
'봉테일'로 빚은 불쾌한 블랙 코미디
<미키 17>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불쾌함이다. 특히 디테일하게 빚어낸 불쾌함을 토대로 이뤄지는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다 보면 '봉테일'이라는 수식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심에는 3D 생체 프런터가 있다. 이 프린터는 일반 3D 프린터처럼 입력된 설계도대로 인체를 찍어낸다. 그런데 이 프린터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도 일상적이라서 그 자체로 기괴한 유머처럼 느껴진다.
프린터가 작동하는 방식부터가 그렇다. 외관은 MRI 기계처럼 깔끔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생겼지만, 정작 작동하는 방식은 옛날 프린터처럼 투박하다. 과거 프린터들은 출력물을 인쇄할 때 종이를 한 번에 매끄럽게 내보내지 않았다. 문서를 한 줄씩 인쇄하면서 덜커덩거리면서 조금씩 종이를 내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 프린터 또한 덜컹거리면서 미키를 머리부터 서서히 밖으로 뽑아낸다. 마치 종이 문서를 출력하듯이.
이처럼 일반적인 프린터가 작동하는 익숙함과 프린터에서 종이가 아닌 사람이 출력되다는 낯섦 간의 괴리감은 미묘한 불쾌함을 조성한다. 이 불쾌함은 프린터 사용자들의 태도 때문에 증폭된다. 그들의 태도는 지극히 일상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법하다. 핸드폰 게임을 하느라 출력 과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거나, 받침대를 뒤늦게 깔거나, 출력이 되는 사이 다른 작업을 하다가 출력물이 이상하다고 짜증을 내는 식이다.
문제는 프린터에서 종이가 아니라 미키 반스라는 사람이 출력된다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투박한 작동 방식이라는 디테일의 진가가 드러난다. 단지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세태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로부터 아무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그로테스크함을 더 구체적으로 짚어주기 때문. 유머러스한 연출도 한 몫하다. '사람을 출력한다'는 사안의 심각성과 가벼운 분위기 사이의 간극 덕분에 불쾌함은 극대화된다.
익숙함+봉준호=특별함
프린터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인간의 존엄성을 아무렇지 않게 훼손하고 짓밟는 그로테스크함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가짜 임무를 주고 미키를 우주로 내보내서 인체 방사선 실험을 한다. 새 행성에 도착하자마자 보호 장비 없이 미키를 보내서 대기 상의 바이러스를 파악한 뒤 백신을 만든다. 저녁 만찬에 초대해서는 배양육을 임상실험하고, 부작용이 나타나자 내친김에 신형 진통제 효능까지 시험한다.
이 온갖 생체 실험에도 불구하고 미키는 일절 불평도, 반항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사채를 빌리고 돈을 갚지 못해 죽을 처지가 되자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했으니까. 자본주의 시스템의 폐해를 다루는 이 대목은 SF 영화의 클리셰에 가깝다. <설국열차>의 꼬리칸을 익스펜더블로 바꾼 것처럼도 보이고,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가 판도라 행성으로 향한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그 기괴함과 유머가 뒤섞인 미묘한 분위기 덕분에 클리셰는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된다. 실제로 <미키 17>에서는 돈이 없어서 지구를 떠난다는 클리셰도 마치 생체 프린터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사채업자 '다리우스'는 돈을 안 받아도 되니 그저 사람이 죽는 모습을 즐기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이는 인명 경시 풍조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이미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세태를 고발하는 다른 차원의 효과를 낸다.
<기생충>에서 '박동익'(이선균)이 '김기택'(송강호)의 냄새에 묻은 가난함을 지적하는 것과도 유사한 방식이다. 선악 이분법을 활용하지 않고도 빈부격차를 실감케 한 것처럼, 인간을 액수로 수치화하지 않아도 이미 인간이 돈이나 다름없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익숙하고 강고한 클리셰의 벽에 봉준호다운 디테일이 균열을 일으키면서 <미키 17>의 폭은 넓어지고 깊이도 더해진다.
SF 모범생을 일탈시키다
클리셰에 봉준호 향을 첨가해 색다른 맛을 내는 방식은 <미키 17>이 해결책을 제시할 때도 유효하다. 사실 앞서 보여준 문제의식에 대한 <미키 17>의 답안은 너무 모범적이고, 순진하기까지 하다. 두 방향의 아가페적 사랑을 해결책으로 내놓기 때문. <미키 17>은 니플하임에 사는 크리퍼처럼 모든 생명을 아끼고, 나샤처럼 타인을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면 생명이 경시되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극 중 서로의 존재를 처음 인지한 크리퍼와 인간은 정반대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크리퍼를 전부 죽이려 하지만, 크리퍼는 처음 보는 인간도 죽을까 봐 걱정하면서 구해준다. 또 종족을 위한 길이라며 미키를 17번이나 죽이는 인간들과 달리 크리퍼는 인간에게 잡힌 새끼 한 마리를 구하려고 모든 종족이 전투에 나선다. 즉, 모든 생명을 더한 만큼 한 생명이 소중하다는 <옥자>스러운 메시지를 인간과 크리퍼의 대비 속에 담아낸다.
한편 나샤의 사랑은 미키를 변화시킨다. 미키가 무기용 살상가스 테스트를 당할 때, 나샤는 그를 홀로 두지 않는다. 방호복을 입고 실험실 안에 들어가서 그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준다. 또 티모가 다리우스의 협박 때문에 미키 17을 죽이려 할 때도 나샤는 목숨을 걸고서 그를 구해낸다.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은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미키 17을 각성시키고, 그가 케네스의 압제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사랑의 힘을 찬양하는 메시지도 사실 신선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기서도 봉준호다운 색다름을 엿볼 수 있다. 미키 17과 나샤는 항해 중에 여러 섹스 체위에 이름을 붙였는데, 그중 하나가 케네스의 압제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신호로 활용된다. 아가페적 메시지를 순간 에로스적으로 풀어내는 유머 덕분에 진부할 뻔한 장면에 생동감이 깃든 셈이다. 이 또한 봉준호가 할리우드 SF 모범생을 변화시킨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악역을 무찌르는 사랑의 힘
한편, 사랑의 메시지는 정치 풍자의 영역으로도 확장된다. 미키를 출력할 때 가장 독특한 지점은 그의 기억과 성격이 보존되고 이어진다는 것. 바로 이 대목에서 마셜 부부가 상징하는 파시즘에 대한 경계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의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미키는 존재 자체로 마셜의 이상에 반하기에, 그의 성장 서사는 그 자체로 케네스의 실패와 퇴락을 뜻하기 때문.
마셜 부부는 인간 중심주의와 우생학을 신봉한다. 식민지 행성 개척 프로젝트도 더 우월한 인류를 만들겠다는 비틀린 신념의 일환이다. '일파'(토니 콜레트)'가 만드는 '소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소스를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소스를 즐길 줄 아는 우월한 종자와 즐기지 못하는 열등한 종자로. 더 맛있고 좋은 소스에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생학에 기반해 니플헤임 행성을 개척하려는 케네스의 신념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케네스가 보기에 복제품이라서 진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미키는 열등한 존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복사되는 존재이기에 미키는 진정으로 진화할 수 있다. 미키 17과 미키 18의 만남이 미키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어주기 때문. 미키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자기가 엄마 차에 있던 빨간 버튼을 누른 순간 교통사고가 발생해서 엄마가 죽었다고 믿는 것. 버튼이 실제 원인이었는지와는 무관하게.
미키 17은 또 다른 '나'를 만나 달라진다. 그는 우유부단한 자신과 달리 과감한 미키 18을 보면서 모든 미키가 죄책감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케네스와 크리퍼의 전쟁을 막기 위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자폭 버튼도 망설임 없이 누르는 미키 18로부터 자신에게도 있을 가능성을 배운다. 마셜 부부가 등장한 백일몽에서 과거와는 달리 당당히 일파와 맞서는 미키 17의 모습은 그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평범함의 힘을 믿다
미키의 변화는 평범한 사람들을 향한 격려처럼도 보인다. 현실적으로 대중에 속한 한 개인은 미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케네스 같은 독재자의 시점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수없이 복제된 미키의 집합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이들이, 대중이 미키처럼 자신의 가능성과 힘을 자각할 때, 케네스는 비로소 힘을 잃는다.
일례로 미키와 나샤는 번역기를 만들어 준 과학자 '도로시'(팻시 패런)나 일파의 지시를 불이행한 '지크 요원'(스티브 박) 등 자기 본분에 최선을 다한 평범한 대원들 덕분에 크리퍼를 몰살하려는 케네스의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즉, 자기 자신을, 연인을, 동료를,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는 평범한 이들의 가능성을 믿는, 달리 말해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이야기가 <미키 17>인 셈이다.
다만 사랑이라는 주제와 정치 비판 간의 연결고리가 부각되지 않다 보니 <미키 17>의 의도는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다. 미키 17과 미키 18의 협력 과정보다 갈등이 강조된 결과 미키 17의 변화와 성장이 조명받지 못한 것. 그렇다고 두 미키의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도 않았다. 나샤의 진짜 연인이 누구인지를 중심으로 둘 중 누가 진짜 '나'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돌연 둘의 갈등을 유야무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수박 겉핥기처럼 지나가는 대목이 많은 나머지 정치 비판이 일차원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례로 케네스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 극단주의의 심화라는 정치적 흐름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캐릭터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배경이나 개인사가 단편적으로 묘사되다 보니 케네스라는 캐릭터 자체가 다소 직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거시적인 정치 흐름이 아닌 특정 정치인만을 겨냥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최고는 아닐지언정
이에 더해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가 여러 플롯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인상도 짙다. 크리퍼 번역기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눈에 띄는 복선이나 암시 없이 함장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식이다. 티모나 카이 같은 미키의 주변 인물들이 명확한 쓰임새 없이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전개는 과욕이 아닌가 싶다. 복제 인간 활용법도 '멀티버스의 나'를 등장시킨 MCU의 스토리텔링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서 신선하지는 않다.
그래서 <미키 17>을 봉준호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할리우드 SF 영화로서 성실하고 매끄럽게 만들어졌지만 특별한 지점은 보이지 않는다. 예상보다 블랙 코미디에 가까워서 큰 스케일이나 막대한 제작비도 와닿지는 않는다. 클라이맥스를 제외하면 우주선 내부에서 대부분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 그 결과 전반부에 가득한 기괴함의 충격에 비해서는 후반부와 결말의 즉각적인 쾌감이 부족하다.
그 대신 곱씹을수록 풍미는 깊어진다. 봉준호다운 장치가 친절하고 모범적인 상상력 사이로 만든 균열이 덕분에 의도한 맛이 뒤늦게 느껴지는 것. 가까이서 보면 범작이지만, 멀리서 볼 때 수작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거대 자본과 작가의 창조성이 타협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처럼 보인다. 이렇게 <미키 17>은 봉준호 스타일로 소화한 할리우드 SF를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봉준호가 제출한 할리우드 SF학 개론 중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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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탈북 청년과 한국 청년, 우리들의 같고 다름에 관하여
믿을 수 있는 사람/A Tour Guide
Korea/2023/95min/한국경쟁
통계*에 따르면 2022년까지 남한에 들어온 탈북민의 숫자는 3만 4천여 명 정도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주인공 박한영은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곽은미 감독이 창조한 인물로, 3만 4천이라는 추상적 숫자에 감춰진 구체적 얼굴을 상상해보게끔 하는 인물이다. 한영은 이제 막 한국에 들어와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가이드로 경력을 쌓는 중이다. 탈북 후 중국에 있을 때 강제 북송의 위협에 시달렸기에 얼른 돈을 벌어 안정적인 생활을 일구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다. 함께 탈북한 동생 인혁과 북에 있는 엄마와 다시 재회해 새 출발하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과 “생긴 건 똑같지만 외국인보다도 못하게 대우받는” 탈북민인 한영이 한국사회에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다. 직장 동료들의 텃세를 견디며 돈을 벌기에도 바쁜데, 동생 인혁은 감감무소식이고 한영의 핸드폰에 ‘감시자’로 저장된 보호 담당 경찰관 태구의 연락도 귀찮기만 하다. 그나마 먼저 한국에 넘어와 자리를 잡은 선배 탈북민만이 한영의 비빌 곳이 되어준다.
가이드의 수입과 연계된 쇼핑에서 읍소하듯 화장품을 반 강제로 팔고, 경복궁이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둥의 거짓말로 중국인 관광객의 호감을 얻으며 어찌어찌 가이드 일에 적응한 한영. 그러나 한영이 한국사회에 온전히 정착할 수 있는지는 그녀의 의지에만 달려 있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2016년 한국이 사드(THAAD)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고, 이후 외교적 대치가 이어졌다. 관광 산업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일명 ‘사드 보복’이 이어지자 한영은 일자리를 잃고 어렵게 일군 성과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다. 더불어 점차 새 출발을 다짐했을 때의 산뜻한 마음을 잃어간다. 새 출발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영에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탈북민 동료들은 각자의 생존과 미래를 치열하게 모색하느라 바쁘고, 한국인 동료는 한영의 성장을 경계한다. 처음엔 성가셨으나 꾸준한 진심으로 한영의 마음을 연 태구와의 관계는 사적인 친밀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토록 어렵게 탈북했는데도 한영이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건 이 때문이다. 다시 한번, 그녀는 한국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소수자는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한영이 실수나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탈북민 전체를 투영하여 비난한다. ‘탈북민이라 못 미덥다’, ‘탈북민이라서 그렇다’ 등등. 탈북민 정체성은 내내 한영의 삶을 그녀 자신이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점유한다. 그리고 이는 곧 한영의 삶에 ‘사소한’ 잘못이 누적되어 꼬여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소수자를 향한 편견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일탈’이 주류 사회에서는 ‘범죄/잘못’으로 인식되고, 이를 통해 또다시 소수자를 뭉뚱그리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영이 겪는 고난을 전시하듯 늘어놓지 않는다. 사실, 누군가는 한영의 객관적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탈북민이든 아니든 한국에 사는 많은 청년이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올해 하반기에 개봉 예정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볼 관객들이, 이 보편적 퍽퍽함에 더해지는 ‘소수자라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가만히 응시해보길 희망한다. 영화의 마지막, 조금은 원망하는 듯한 감정이 담긴 한영의 눈빛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우리의 구체적인 같고 다름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http://www.s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392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 초청으로 제24회전주국제영화제에 기자로 참석해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는 제 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월 28일 13시, 5월 3일 13시 30분, 5월 5일 19시에 상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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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전투 그 이상이다. 전쟁이다! 레지스탕스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