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2-03 11:29:42
전근대의 질곡, 그리고 근대의 ‘예수’가 된 여자
영화 〈노스페라투〉

8★/10★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질곡, 누군가는 이를 끊어내야만 한다. 1838년 독일, 엘렌은 성적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악마와 교합한다. 이날 이후, 엘렌은 악몽을 꾸고 심신미약에 시달린다. 한편, 엘렌의 남편 토마스는 거액의 부동산 계약을 위해 타지에 있는 올록 백작에게 향한다. 토마스가 떠나자 엘렌의 불안 증세는 점차 심해진다. 의사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도록 엘렌에게 코르셋을 입으라 권한다. 발작 증세를 억누르기 위한 결박도 권한다. ‘예민한’ 여성에 대한 근대 의학의 일반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엘렌의 증세는 악화일로다. 의사는 고민 끝에 한때 촉망받는 의료인이었던 미치광이 연금술사에게 엘렌을 데려간다. ‘현대식’을 표방하는 의사의 자기 패배 선언이다.
한편 엘렌의 고통이 점차 가중되는 동안, 토마스 역시 올록 백작과 만나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한다. 내내 그에게 끌려다니던 토마스는 마침내 올록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쳐 나온다. 올록은 그런 토마스를 뒤따른다. 올록은 오랫동안 때를 기다렸다. 엘렌을 비롯한 또 다른 수하가 있는 도시로 향해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을 확립할 때를.

올록이 도착하자 도시에는 금세 전염병이 퍼진다. 엘렌의 증세를 처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충돌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이 전염병을 악마의 영향력이라 진단하고, 누군가는 그런 해석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은 죽을 쑨다. 전근대에 대한 근대의 연전연패다.
이제 올록이 온 도시를 지배하기 직전이다. 엘렌이 나선다. 그녀는 내내 자신이 더는 올록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는 올록이 아닌 남편을 사랑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결국 올록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이 올록을 전근대의 세계로 완전히 퇴장시켜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연금술 대 의학, 악마의 재림 대 전염병. 즉 전근대와 근대의 패러다임 전쟁에서 후자는 번번이 패배했다. 전근대의 질곡으로 표상된 악에 완전히 잡아먹힐 위기다. 그러자 근대적 분류‧인식 체계에서 늘 뒤처져 있다고 모욕당해온 여성인 엘렌이 그 모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악마 올록과 성적으로 교합해 해가 떠오르면 올록이 돌아가야만 하는 관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번다. ‘마녀(악마에 대한 성욕)’, ‘히스테리(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여성)’라는 낙인을 기꺼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악마에게 소멸을 선사해 근대를 온전히 열어젖히는 예수로서 희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이 숭고한 희생을 결심하는 결정적 동기가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문, 경제적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두 개인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인 현상이다.

이 영화는 최초로 뱀파이어가 등장한 동명의 영화(〈노스페라투〉(1922))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를 넉넉히 견딜 만큼 깊이 있는 상징을 적확하게 활용한다. 클래식한 연출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해 몰입감을 유지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숨 막히게 몰아붙이거나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공포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은근하게 장악하여 곱씹게 한다. 이전에 〈라이트하우스〉에서 본, 로버트 에거스가 그려낸 미지의 것에 대한 열망과 공포의 메타포가 더욱 세련되게 발전해 계승되었다는 데에 대한 반가움도 크다. 가히 ‘걸작’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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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잘 지내나요, 조제.
영화의 국경이 없다는 말이 있듯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로맨스를 즐겨보는 편인데 양국의 로맨스 영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이 있다. 한국 로맨스는 빠른 전개속도를 가진 현실적인 맛으로 본다면, 일본 로맨스는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이나 특별한 소재들을 보는 맛이 있다. 다만, 2000년대 로맨스는 양국을 불문하고 조금씩 닮아있다. 좀 더 간단명료하고 편안하고 담백하지만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는 것. 영화의 전개 속도는 느릿한 반면, 인물들이 세세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려고 노력한다는 것. 때문에, 2000년대 일본 로맨스 영화도 국내 영화만큼이나 좋아하는 편인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 중 가장 좋았던 영화로 꼽을 수 있겠다.
일본 로맨스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조금 특별하다는 데에서 시작된다. 불치병이라던가 환상이라던가 같은 것들 말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이런 소재들을 활용하는데 조금 유난하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2000년대 일본 로맨스는 이런 유난함의 적절한 균형을 잘 맞추는 듯 하다. 주인공 조제(이케와키 치즈루 분)또한 마찬가지다. 배경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조제는 걸을 수 없다. 영화 전반적으로도 이유는 알 수 없다. '걸을 수 없다' 라는 전제 조건에서 이미 영화는 시작되어있다. 다만, 유난한 소재에 비해 사건진행은 사소하게 진행된다. 연출상 일본 특유의 문화가 보여 조금 당황스럽지만 뚜렷한 자극 없이 천천히 로맨스의 전개 방식을 따라간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인 영화였다. 자칫하면, 로맨스 영화라는 틀을 벗어나 뒤죽박죽이 될 수도 있는 표현하기 어려운 소재를 두고 관객으로 하여금 완전한 한 편의 로맨스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뒤로 미뤄놓고 ... 영화 속 첫번째 관람포인트는 영화 속 여백에 있다. 배경음악과 필름화된 사진들의 적절히 교차시켜 영화 사이에 짧은 여백을 만들어낸다. 전반부에서는 오프닝의 느낌을 살려주려 한 것이 느껴지지만, 후반으로 돌입하며 감정선을 길게 이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둘째로, 당시 년도의 시대상과 배경을 보는 것에 재미가 있다. 국내 정서와는 다른 모습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에서 오는 재미도 영화가 주는 특별한 요소 중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배치와 연출에 있다. 영상미는 둘째치고, 전개속도와 더불어 시점의 큰 변화 없이 영화를 끌어가는 것이 흥미롭다. 영화 속 인물들의 양상은 다양하고 시점은 츠네오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것이 영화를 후반부까지 잘 이끌어간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제목부터 아이러니한 조합에 이끌려 영화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제목의 의미는 영화만큼이나 특별하다. 주인공인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와의 만남에서 그녀는 자신의 본명인 '쿠미코'라는 이름을 숨기고 '조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현실에선 움직일 수 없고 무엇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소설 속 '조제'라는 이름을 통해 사랑을 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전반적으로 그녀는 '조제'로 남아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쿠미코는 어디에도 갈 수 없기에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호랑이'는 그녀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다만, 츠네오를 만난 뒤 츠네오와 함께라면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츠네오는 상쇄시킬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제는 아주 외로운 곳에서 살았다. 그녀의 공간은 몇 평 되지 않는 방안이었고 만나는 사람은 할머니가 전부였으며 그녀에게 탈출구는 오직 이른 아침에 나가는 산책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삶에 불쑥 등장한 츠네오였다. 함께 밥을 먹고, 외출을 하고, 시간을 나누며 둘은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녀의 할머니가 나타나 조제에게 이런 삶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다시끔 찾아간다. 어쩌면 물고기는 그녀의 삶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일정한 공간과 틀에서 제 몸을 벗어나지 못한 채 한정적인 삶만을 살아야 했던 그녀 스스로를 물고기에 투과했을 수도 있고, 결국 츠네오 덕분에 한계에서 벗어나 바다로 떠나게 되어 그녀의 삶이 한층 더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일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묵은 숙소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물고기라 칭하며 쓸쓸함에 오는 동질감이었을 수도 있다. 앞선, '조제'와 '호랑이'에 비해 '물고기'의 의미는 어느 쪽으로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내용으로 돌아와,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던 점은 츠네오가 그녀를 단순 장애인으로써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를 '장애인'으로써 동정하는 것이 아닌 '한 여자'로써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한다. 그의 행동에 특별한 배려는 없다. 그녀를 업어주는 것 외에는 가끔 그녀가 걷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영화 전반적으로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평범히 연애하는 남녀' 그렇게 느껴지게끔 연출을 이어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기 떄문에 오히려 사랑의 평범함에 대해서 잘 드러나지 않았을까. 주인공 둘 다 극적인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나 둘의 행동에 큰 변화를 두지 않음으로써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꽤나 적나라한 베드씬을 넣어놓은 이유도 여기 있지 않나 싶다.
영화에 대해 알아보면서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건 이 영화가 마치 '장애'에 관한 사회적 문제를 다룬 영화처럼 비춰진다는 것이다. 물론 놓칠 수 없는 부분이고 감독의 주제의식이 어느정도 엿보이는 장면들도 여럿 볼 수 있다. 다만, 본질이 로맨스인 이 영화에서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사랑'에 관한 고찰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제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장애에 대한 극복으로 당당한 삶' 같은 것들이라기 보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변화와 여정'이라고 이야기 하고싶다. 무엇보다 영화 속 조제의 설정이었던 '장애'가 사실 신체적인 불편함 그 자체를 의미하기 보다 '일상 속 일반인들이 사랑하며 마주하는 일종의 장애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사람을 만나며 우리가 겪는 장애는 신체, 감정, 불안, 재력, 환경 등 어떤 요소도 될 수 있다. 영화 속 설정에서는 신체를 토대로 장애물을 구축해, 사랑하는 사람끼리 마주칠 수 있는 차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츠네오를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츠네오는 진심으로 오열한다.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담백하게 이별을 말하고서 말이다. 누가 있든 개의치 않고 그저 울기만 할 뿐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동정으로서 그녀를 배려한 것이 아닌 짧고도 길었던 1년하고도 몇 달간의 연인 관계였던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담담한 이별이었지만 조제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츠네오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조제를 데리고 가족들에게 인사하러 가는 길에 고민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랑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진 츠네오의 모습도 이해가는 슬픈 양면성이 가슴에 남는다.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라는 무기력한 말과 다르게 전동휠체어를 타고 일상을 보내는 조제의 모습이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넘치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고나서 깊은 후유증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그건 남아있는 조제를 위하는 마음이자 둘의 사랑을 옆에서 직관한 후에 오는 상실감일지도 모르겠다. 둘이 결국 이별했으니 비극적인 엔딩이라고 말해야할까? 어쩌면, 우리가 바랬던 것 처럼 '둘은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와 같은 엔딩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원하던 엔딩에 도달한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꼭 영화가 결말이 나야만 엔딩이 아닌 것처럼 주인공 둘도 결국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또 다른 사랑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몇 평짜리 공간에서 발을 뗀 조제의 앞에도 어떤 날들이 기다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른 삶을 기대할 수 있다. 조금 억지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해피엔딩이 아닐까. 사랑에 대한 본질과 동시에 사랑이 가진 연약함을 깊게 엿볼 수 있는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아쉬움을 달래고 글 몇자로 영화를 담아낸다. 영화 속 츠네오가 그랬듯 조제같은 여자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만 같다.
사진 출처 : <ジョゼと虎と魚たち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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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여인 / La Chinoise
La Chinoise 중국여인
Jean luc godard 장 뤽 고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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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화의전당 씨네라이브러리에서 '드디어' 감상한 라 쉬노아즈.
구하기 굉장히 어려운 영화였는데 여기 있었다.
쨌든 간략 감상평을 남기면,
"바보같은 국정에 불만인 청년들이 택한 가장 이상적인 이데올로기 마오이즘. 그러나 마오이즘의 실체와 본질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고다르를 포함한 60년대 당시 프랑스청년들이 왜이렇게 마오이즘에 열광했을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대명사인 프랑스에서 진짜 공산당과 공산주의 찬양했던 것일까 싶어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걸보니 단번에 이해가 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들은 뭣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찬양한거다.
무식한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 케이스가 딱 이거.
자기나라꼴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여기저기 활개치는 미국놈들은 꼴보기 싫고, 공산주의인데도 이런 미국놈들이나 다른 유럽국가에 흔들리는 유럽내 공산주의 국가들도 마음에 안드는 그들 눈에 들어온 국가가 중국이었던 것이다.
그 어느 서방세력에 흔들리지도 않고 자기들만의 '지조'가 있는 국가가 중국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들이 보기에는 마오쩌둥이 말하는 사상이 국민을 가장 잘 생각해주는 이상적인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되는 프랑스 정치를 다시 세우고 싶은 청년들이 급급하게 찾은 대안이 마오이즘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소규모의 마오이즘 찬양모임원들의 이야기를 1시간 39분동안 보여준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곱씹을수록 웃기다.
휘황찬란하게 마오이즘과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설파하지만, 그 알맹이에 대한 물음을 물으면 대답은 못하고 화를내거나 '그런건 중요치 않아'하고 둘러댄다.
후반부의 기차씬은 여자주인공의 정신상태를 완연히 보여준다. 교수님이 묻는 질문과 모순적인 부분에 대해 던지는 의문들에 그녀는 단 한마디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오직 '분노와 폭력'만이 그녀의 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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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마오이즘을 찬양했던 과거 자기 자신에게 현재 고다르가 하고 싶은 말을 보여주는 영화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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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솔직히 개인적으로 1시간39분이 후반부에가서는 고문으로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지루했는데, 이런 의미들을 곱씹어보면 나쁘진 않은 영화였다.
지루한 이유: 공간의 변화 없음. 인물의 변화 없음. 인물 감정 변화 없음. 비율 답답함. 배경지식없으면 이해하기 힘듦. 등등
좋은 이유: (개인적으로) 이걸 통해 '드디어' 프랑스 마오이즘 열풍을 이해하게 됨. 색감이 진짜 너무 이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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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소 봐온 고다르 영화와는 달랐어서 약간 당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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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영화 '몽상가들'의 주인공들의 심리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왜 진정 몽상가들인지 알게 되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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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고다르광 아니면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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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4월 16일을 추모하다
8★/10★
〈너와 나〉를 연출한 조현철 감독은 이 영화가 세월호를 추모하는 영화라고 밝혔다. 그런데 영화에는 ‘세월호’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세월호의 비극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두 여고생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영화가 무수히 많이 세월호를 소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산이라는 배경, 학교, 수학여행, 배가 침몰했다는 라디오 방송 등등. 우리는 세미와 하은의 내일을 알고 있다. 두 여고생의 일상과 사랑, 지극히 사소한(그러나 그로 인해 아름다운) 누군가의 순간들이 어떻게 중단될지를 말이다.
수학여행을 앞둔 세미는 불길한 꿈을 꾼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하은이 죽는 꿈이었다. 하은에게 고백하기를 마음먹고 기회를 살피던 세미는 불안과 긴장을 안고 하은을 찾는다. 하은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한 상태고, 그래서 내일 수학여행도 함께 가지 못한다. 그런데 세미가 하은을 찾아가 수학여행을 함께 가자고 조른다. 다리 깁스뿐 아니라 넉넉지 않은 형편에 급작스레 비용을 마련하기도 어렵지만, 세미의 간절함은 하은에게도 전해지고 둘은 함께 수학여행에 갈 방법을 찾는다.
그런데도 세미는 불안하다. 하은에게 비밀이 있는 것만 같아서다. 세미는 슬쩍 하은의 마음을 떠보기를 반복하지만 하은은 자꾸 말을 돌린다. 하은은 나보다 다른 친구가 더 소중한 게 아닐까? 하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하은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일방적인 것은 아닐까? 그러나 불안이 깃든 욕망을 하은에게 반복적으로 투영하는 세미는 마침내 오해를 풀고 하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날 밤 둘은 몇 번이고 인사하고 다시 돌아서기를 반복하는,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이 하기 마련인 애틋하고 다정한 인사를 나눈다. 마치 이것이 둘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둘의 마지막 인사는 하은이 입원한 병원의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한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곳에서 둘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뒤면 그들 역시 장례식장을 찾은 다른 사람들처럼 슬픔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이다. 왜 사소하지만 행복한 일상이 죽음과 짝을 이뤄야만 할까? 세월호 이후 많은 이를 고민케 한 질문이다. 이는 〈너와 나〉를 추동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세월호 이후와 사회구조적 문제제기 대신 참사 이전의 삶에 카메라를 돌린다. 세월호라는 예정된 미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하은과 세미는 어렵게 확인한 서로의 마음,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이어갔을 것이다. 〈너와 나〉에는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반드시 직접 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상의 사소한 아름다움이 곳곳에 담겨 있다. 영화는 언젠가 우리가 직접 경험했거나 일상에서 스쳐 가며 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그 또래 학생들의 풋풋함과 설렘, 평범한 나날의 고민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예정된 비극이 두 사람의 일상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우리는 자꾸만 두 사람이 빚어내는 매 순간을 흘려 보내지 못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불가능한 희망을 되뇐다. 부디 내일이 오지 않기를. 하은과 세미가 작별하지 않기를.
영화는 내내 햇살이 깃든 듯 밝고 부드러운 화면 질감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이 질감은 두 사람의 일상을 다정하고 살갑게 재현하는 효과와 동시에 세미의 꿈과 어우러져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흩뜨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탁자에 걸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보이는 오브제와 만나면 비극을 예시하는 듯도 보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미래와 현재를 겹쳐 산 자와 죽은 자를 하나로 포갠다. 죽은 사람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다 떠났던 생명까지도. 추모와 애도의 의지가 깃든 이 환상 속에서 나는 네가 되어 깨어나고, 너와 나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무수히 반복돼 메아리치는 ‘사랑해’라는 말은 떠나간 자에게 건네지 못한 말이자 남겨진 자를 위무하는 속삭임으로 승화된다. 이 중층의 포개짐으로 서로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게 된 자들은 ‘우리’가 되어 비극으로 헤어지고 상처받은 자들을 다시 한데 모은다. 이렇게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선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세월호를 추모한다. 매월 4월 16일, 이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날, 그리고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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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이미 망해버린 세계에서 아이들은 성장할 수 있을까
여름이 지나가면/코리안시네마
시놉시스
신도시 개발계획이 있는 지방의 한 마을이 있다. 마을로 부랴부랴 이사를 오는 기준의 가족. 동네가 ‘시’로 승격이 되고 난 뒤에는 진학에 유리한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 자격도 없어진다. 새롭게 다닐 학교에서 전학 수속을 밟고 있는 사이, 기준의 새 운동화가 사라진다. 신발 도둑으로 의심을 받는 아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결손가정의 형제들이다. 기준의 가족은 이 형제들이 신발 도둑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고작 신발 정도니까 모른 척 넘어가 준다.(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어린이의 세계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다층적으로 굴곡진 어른의 세계와 닮은 점이 꽤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조수석에 앉은 기준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희망에 부푼 엄마와는 달라 보인다. 서울에 살며, 적당한 재력을 가진 기준의 부모는 기준을 위해 농촌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농어촌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기준이 잔뜩 불만인 이유는 단지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간다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기준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자기 삶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부모 욕망이 투영되는 객체일 뿐이라는 점을 감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촘촘한 기획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포박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는 부모와 기준 모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기준은 전학 첫날부터 브랜드 운동화를 도둑맞는다. 부모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영문, 영준 형제가 범인인 듯 보이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기준에게는 이 사건이 뜻밖의 계기가 된다. 영문은 또래 집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친구들은 그가 분위기를 잡고 한 마디만 하면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금방 움츠러든다. 기준도 영문이 무섭다. 동시에 영문과 가까워지면 금세 그와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겠다고도 느낀다. 기준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영문 형제에게 호의를 베푼다. 부모가 기준에게 ‘더 좋은’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 시골로 이사 왔듯이, 기준 역시 나름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형제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준은 결코 부모가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하고 나름의 삶 기획을 이어간다. 이후는 악화일로다. 물론, 부모의 관점에서 말이다. 기준은 영문 형제와 함께 도둑질, 폭력 사건에 자주 연루되고 그럴수록 무리에서 상승하는 자신의 지위를 은근히 즐긴다. 기준은 늘 영문에게 더 잘 보일 방법을 찾는다.
기준을 ‘나쁘게 물들인’ 영문, 영준 형제에게도 자기 삶 기획이 있다. 이들 역시 부모 없이 근근이 삶을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남에게 위협감을 주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자신의 미래를 모색해왔다. 요컨대 모두는 자기 자신의 상황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좋은’ 미래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획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관철될까?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자의 기획이다. 기준은 결국 그의 비행을 참지 못하는 부모에게 이끌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기준은 끝까지 영문, 영준 형제와 어울리고 싶다. 영문, 영준 형제는 자상한 척 시혜와 동정, 멸시의 시선을 교차로 건네는 기준의 부모님이 밉다.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준의 부모와 달리 자기 삶 기획을 관철할 아무런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반영하듯,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어른과 사회가 없다. 자식에게 계급을 세습하는 일만이 중요한 부모와 형제를 방치하는 학교와 이웃이 있을 뿐이다. 공적 역할을 상실한 사회, 신자유주의적 경쟁관계가 만연한 사회는 모두가 자기 안위만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아이들까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연루되게 했다. 아이들 사이의 폭력과 경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어르고 달래고 뒷받침해줘야 할 어른과 사회가 사라져가는 속도와 비례해 더욱 첨예해진다.
이렇게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쟁 문화는 어린이들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꼼수를 써도 좋은 학교 가서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부모와 친구를 괴롭히더라도 권력감만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기준은 닮은 데가 많다. 영화는 여러 질문을 남긴다. 서울로 돌아간 기준은 부모의 뜻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부모의 계급을 세습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기준이 정말 행복해질까? 영문과 영준은 어떨까? 그들에게 다른 삶 기획이 들어설 기회가 주어질까?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지금 그들이 부득이하게 들어선 ‘비행’의 길에서 오랜 시간 허덕이지 않을까?
어린이,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최근의 영화에서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종종 출구 없는 미로처럼 보이는 경향이 보인다. 그 양상은 갈수록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처음부터 망해 있는 상태다. 기존 질서에 안착한 어른들은 뒤틀린 세계에 무심하고, 탈락한 어른들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늘 외롭다. 사회가 늘 ‘우리의 미래’라며 상찬하는 어린이들은 이런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때문에 ‘어린이가 희망이다’라는 말은 지독한 위선이다. 썩은 토양에 뿌린 씨앗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와 마찬가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3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213)
-5월 5일 21:00 CGV전주고사 4관(457)
-5월 8일 10:30 메가박스전주객사 1관(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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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당신과 나를 ‘우리’라 부를 수 있다면
어릴 적, W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국제 사회의 사건 사고를 다루는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시에라리온의 여성 할례 이야기였다. 성차별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던 나이였지만, 불합리함에 분노했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러나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타자화에 의한 안도감이었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히잡 반대 시위를 촉발점으로 체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는 이란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한 가족의 모습이다. 국가를 위해 평생을 일한 이만은 수사 판사로 승진하며, 부와 명예에 한층 가까워진다. 그러나 독재 사회에의 고위직이란 체제에 복무하는 일로 조금이라도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제거하는 일을 수반한다. 이로 인해 내적 갈등을 겪는 이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의 안전을 위해 받은 총을 집안에서 분실하며 이만의 가족은 차차 무너진다. 사라진 총에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이만. 그의 ‘거짓말쟁이’ 찾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실 이 가족의 분열은 언제든 벌어질 일이었다. 그저 체제에 복무하는 이만의 공모자인 어머니 나즈메에 의해 유예된 일일 뿐이었다. 이 작품에서 이만은 구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며, 두 딸 레즈반과 사나는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매일 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두 세대가 바라보는 방식은 무척이나 다르다. 이만은 TV라는 레거시 미디어의 문법에 따라 반체제 시위를 폭동으로 바라본다. SNS를 통해 시위를 접하는 레즈반과 사나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현재의 시위를 어떤 혁명이라고 바라본다. 어느 날, TV를 틀어놓고 가족들은 식사를 한다. 시민들의 행동을 폭동에 불과하다고 규정하는 목소리에, 레즈반은 반기를 들고 가족 내의 균열은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레즈반과 사나가 경험하는 시위의 모습은 스마트폰을 경유하여 전달된다. 시위대가 현실 속에 투쟁하며 보여주는 진실이 담긴 이미지들. 카메라의 기능뿐만 아니라, 동료 시민들에게 이미지의 확산을 가능케하는 스마트폰의 순기능이 여기에 있다. 이 작품에서 카메라가 긍정적인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만은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떠나, ‘거짓말쟁이’ 찾기를 시작한다. 특이한 점은 이만이 격식을 갖춘 수사를 행한다는 것이다. 캠코더를 놓고 증언을 구하고 증거를 찾아 남기려는 이만. 그 또한 이미지의 힘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진실을 기록한다고 착각한 채 기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성찰은 놓친다. 누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카메라를 쥐었는가에 따라 이야기는 극적으로 달라진다. 이런 상황은 언론의 모순을 드러낸다. 발화의 주체에 따라 소거되고 강조되는 이야기가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바라보게 만들지 않았는가.
가족들에 대한 불신이 쌓이며 이만은 결국 가족들을 가두기에 이른다. 이때 상황을 뒤집는 것은 막내 사나이다. 총을 훔친 범인이기도 한 그녀는 레즈반과 나즈메를 구한다. 그리고 우스운 숨바꼭질이 이어진다. 고향의 유적지로 보이는 공간에서 이만은 가족들을 찾아 헤맨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야 할 지점에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구멍이 가득한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숨바꼭질. 이는 결국 현재의 이란이 가진 감시 체제는 허술하기 그지없고, 개인을 억압하기만 하는 사회는 언젠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총을 든 사나와 이만은 대치 상황에 이른다. 이만에게서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과 체제의 모순에 내적 갈등을 하던 모습은 지워진 지 오래, 그는 사나를 도발한다. 이때 사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녀는 불안감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과감하게 이만을 역사의 무덤으로 보내기를 선택한다. 영화는 이렇게 구세대와의 단절을 명확히 선언하며 끝을 맺는다.
영화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 영화계에 정치성은 소거된 지 오래다. 소수의 독립영화를 제외한 영화들은 오락성에 매몰되어 있다. 한편, 억압적이기 그지없는 이란이라는 나라에서는 용기 있게 체제에 반기를 드는 영화가 등장했다. 감독은 용기가 없어서 결국 망명을 선택했다 말하지만, 이런 작품을 만든 것 자체가 용기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언젠가 세상도 바뀌지 않을까. 사회와 유리된 영화는 결국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없는 나는 해외의 상황을 보는 순간마다 여전히 타자화의 욕망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연대하고 싶은 마음만은 이전보다 강해졌다. 나와 당신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내가 당신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대의 목소리를 전하고 싶다.
*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를 통해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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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판 포켓몬스터: 정글의 아이, 코코 / 劇場版ポケットモンスター ココ, 2020
원래, 극장에서 챙겨보던 시리즈는 아니었습니다.
으레, 시리즈라는 것도 1편 다음으로 2편, 3편 그리고 숫자 몇이 붙을지 모를 만큼 장기화가 된다면 떠나기 마련이죠.
그렇게, 떠났다가 '1세대 무인편'을 다시 극장판으로 만든다는 소식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물론, <너로 정했다!>는 기대만큼의 완성도는 아니었지만 큰 스크린으로 보는 '오프닝 테마'는 최고였고 이는 509,555명이라는 국내 최다 관객수로 보여주었죠.
이후 <모두의 이야기>는 아쉬웠던 완성도를 크게 보완했으며, <뮤츠의 역습>을 3D로 "리메이크" 하는 등 저를 비롯한 올드팬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번 <정글의 아이, 코코>는 첫 시험대에 올라선 영화로 '과연,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을지?' -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포켓몬들이 살아가고 있는 숲에서 "자루도"들은 무리를 지으며 소위, 군림하고 있는데요.
그런 가운데, 무리에서 떨어진 한 "자루도"는 강가에 버려진 인간 아이를 발견하고 이를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무리는 "자루도"외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법도 때문에 무리에서 벗어나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됩니다.
그렇게, 아이의 이름은 "코코"가 되었지만 커가면서 "자루도"와는 다르다는 혼란함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지우"와 "피카츄"를 만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떼는데...내가 알던 포켓몬이 맞나?
1. 분명히, 낯선데 익숙하단 말이야.
앞서 이번 <정글의 아이, 코코>를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오리지널 작품으로 소개했습니다.
이런 이유에는 포스터에도 있듯이 "자루도"라는 새로운 포켓몬을 내세웠고 "코코"라는 오리지널 캐릭터의 등장까지 이전 극장판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니까요.
그럼에도, <정글의 아이, 코코>는 엄연하게 이전 작품들과 동일하게 "리부트"에 속해있는 작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레비"의 존재는 저와 같은 올드팬들에게는 게임에서 접했던 "너도밤나무 숲"을 떠오르게 만드니 이만해도 충분했으니까요.오리지널 작품이야? 아니, 그럼 리부트야?
그럼에도, "세레비"가 전면으로 나서는 극장판이 아니기에 올드팬들에게는 쉬이 만족감을 일으키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부제에도 쓰여있는 <정글의 아이, 코코>, 이 캐릭터의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익숙한 작품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앞에서 살펴본 줄거리만 보더라도, 쉬이 예상하실 그 작품 바로 <타잔>입니다.
극에서 "자루도"에게서 길러진 "코코"가 숲에서 포켓몬들과 살아가는 장면은 "타잔"이 고릴라 무리에게서 길러지고 정글에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이후 숲을 파괴하는 인간 무리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니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2. 디테일과 클리셰
그렇기에 <정글의 아이, 코코>는 이를 알고 있는 '저와 같은 올드팬들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큰 고민을 했을 겁니다.
아이들이야, <타잔>을 모르겠지만 저희는 <타잔>을 "디즈니"로 그것도 비디오와 컴퓨터 게임으로 지겹도록 접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정글의 아이, 코코>의 디테일은 흥미롭습니다.
극 중 "코코"가 "자루도"에게서 길러진 설정이라 두 캐릭터들의 대화를 사람들의 언어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를 "지우"와 "피카츄"의 시점에서는 해당 "포켓몬 언어"로 보여줘 보다 이들의 대화, 그리고 이야기에 집중케합니다.로켓단의 나옹은 얼마나, 대단한 거야?
극에서 이들을 유사 부모의 관계로 시작합니다.
물론, <타잔>에서는 아이를 잃은 에피소드로 "타잔"을 거두었던 것과 다르게 그 동기는 우연성 짙게 시작하나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극 중 "코코"의 팔뚝은 "자루도"처럼 덩굴을 메고서 나무에 걸어 이동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자루도"처럼 될 수 없다는 것에 혼란을 겪고 "코코"는 절망을 느끼는데요.
이에 "자루도"는 '너는 자루도!'임을 끊임없이 말하나 이제는 이를 숨길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낍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비슷한 "지우"의 등장은 포켓몬의 말이 아닌 사람의 언어까지 사용하게 되는 "코코"의 변화는 이 관계의 위기를 보여줘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니 시작은 미약했을지라도 끝은 창대해지고 있는 것이죠.3. 설명이 된 상태라면, 플래시백은 촉매가 된다.
그리고 예고했듯이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무리들의 등장하며, 영화는 어느덧 후반부를 맞이합니다.
이에 보여주는 포켓몬 특유의 액션신도 좋지만, 역시 빛나는 건 "코코"와 "자루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이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주어 이들의 감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어 진부하게 느껴질법한 눈물 후 부활을 멋지게 보여주는데요.
보통 "플래시백"을 설명보다는 감정에 읍소한다고 말했지만, 이미 앞에서 이들의 관계를 쭉 보았기에 "플래시백"의 활용은 오히려, 촉매가 되어 빠르게 나타날 수 있던 것이죠.후반부는 플래시백의 연속?
영화 <정글의 아이, 코코>는 앞에서 보여준 것과 다르게 후반부에는 "플래시백"을 연속적으로 비춰줍니다.
앞서 말했듯이 "코코"와 "자루도"의 이야기처럼 설명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다면, 상관없으나 다른 캐릭터에 이를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는데요.
바로, 악당에 위치한 "제드 박사"가 그러한데 이미 영화에서 숲을 파괴하려는 인간 무리들의 리더 격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입니다.
이만해도 충분하나,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쳐내 "코코"와의 대결 동기를 짧은 시간으로 연결시키는데 이 모든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풀어내자니 따라가기가 힘들더군요.
그래도, <정글의 아이, 코코>는 이와 동일한 제목을 가진 작품의 평가 '코코를 꼭꼭 보세요.'를 다시 꺼내게 만들 만큼 재밌게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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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드세요 연상호씨, 당신 아직 죄인 아닙니다
**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보시고 감상해주세요!
** 영화에 대한 비난이나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영화 '염력'을 개봉하자마자 관람했습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신선한 시도였기에, 많은 호불호가 갈릴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염력의 장단점과 캐릭터 특징을, 2분 안에 주관적으로 압축하여 빠르게 정리해봤습니다. (이 때문에 영상 편집 퀄은 다소 떨어질 수 있습니다)영상 속에 아기자기하게 많은 재미요소가 들어가있으니 재밌게 감상해주세요 :)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왓챠에서 '진상명' 팔로우 하시면 빠른 평 업데이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염력 #연상호 #류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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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매미소리> 메인 예고편
여기 소리에 울고 웃는 부녀가 있다 매미소리만 들으면 곡소리를 내는 딸, '수남' 곡소리 나는 초상집만 다니면 신명이 나는 아버지, '덕배' 최악의 죽음을 맞이하려는 딸과 최고의 죽음을 찾으려는 아버지 진도의 어느 뜨거운 여름날 20년 만에 마주친 부녀의 듣그러운 불협화음 한 판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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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십계> 메인 예고편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두려워한 바로는 이스라엘 아기를 죽이라 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울음과 절규가 가득한 와중
애굽의 공주는 갈대 상자에 누인 '모세'를 아들로 키우게 되는데...
어느 날, 광야의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데...
고난의 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떠나는 출애굽의 여정!
이제,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의 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