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7-08 11:23:58
<블랙 위도우>, 코로나 이후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할까?
박스오피스를 점령하러 온 MCU의 복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만큼 영화팬들을 한곳으로 모일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사는 없을 텐데요.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지난 2년 동안 극장에서 슈퍼 히어로를 찾아볼 수 없었죠. <블랙 위도우>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상치와 텐 링즈의 전설> 그리고 <이터널스>는 개봉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디즈니 플러스는 이 공백을 매우기 위해 <완다 비전>, <팔콘과 윈터 솔저> 그리고 <로키>를 꾸준히 연재했지만, 영화관에서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메인 캐릭터 급 슈퍼 히어로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블랙 위도우>가 개봉하게 됩니다. 1년 이상의 개봉 연기 끝에 도착한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솔로 영화 <블랙 위도우>는 북미 기준 7월 9일 금요일에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이미 7월 7일에 개봉했으며 가파른 관객 수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죠. 북미 지역 4,100곳에서 상영될 <블랙 위도우>는 개봉 3일 만에 7,500만 달러에서 8,500만 달러 사이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블랙 위도우>는 현재 46곳의 해외 시장에서 상영되고 있으니, 이를 통해 5,000만 달러의 추가 수익도 가져가게 될 듯합니다. 마블 영화의 흥행 보증 시장 중 하나인 중국에서의 개봉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블랙 위도우>는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를 추월하여 북미 개봉작 중, 코로나 이후 가장 좋은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할 영화가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측이 사실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인데요. 개봉과 동시에, <블랙 위도우>를 디즈니 플러스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 어드벤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그리고 엠마 스톤 주연의 <크루엘라>가 개봉했을 때도 비슷한 전략을 구상한 적 있었죠. 그러나 2억 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블랙 위도우>를 같은 날 대형 스크린 혹은 집에서 볼 수 있기에, 앞으로 MCU 입장에서는 독보적인 상업 기록을 경신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블랙 위도우>의 주말 예상 스코어는 코로나 시대에 비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지만, 코로나가 없었던 시절, 극장에서만 볼 수 있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경쟁하기 힘들 것입니다. 다수의 히어로가 출연하는 <어벤져스> 시리즈뿐만 아니라, MCU 솔로 영화인 <토르>, <블랙 팬서>그리고 <캡틴 마블>와의 경쟁에서도 말이죠. 하지만 디즈니가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전체 티켓 판매에 타격을 받는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 플러스를 가입하고, 또 이용할지가 주목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디즈니에서 자세한 수치는 공개하지 않겠지만, 넷플릭스를 뛰어넘는 이용자 확보를 위한 전략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도 디즈니 플러스가 상륙한 국가에서만 가능한 일, 아직 디즈니 플러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저희는 극장에서만 <블랙 위도우> 관람할 수 있겠네요…
씨네랩 에디터 Moon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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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한 미소 뒤에서 바라보는 심연에 관한 공포
'어두운 날들이여 안녕, 외로운 눈물이여 안녕, 이제는 행복해질 시간이라 생각해' 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노래 가사를 부른다. 신나는 노래. 왠지 모르게 내 마음도 활짝 웃는 것 같다. 사실 어제 좀 늦게 잤다. 내가 좋아하는 맨유의 경기를 보다 늦게 잤다. 아니 사실 그 이전에 책을 한 권 읽고 잤다. 바로 <혐오의 과학>이라는 책이다. 전 세계를 강타한 혐오범죄에 탐구했던 이 책. 45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이지만 거의 하루 꼬박 걸려서 다 읽었다. 엥? 이러지 않았는데? 나 그래도 책 일찍 읽는 편이었는데, 갑자기 내용이 너무 어렵게 느껴 저서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왜 이렇게 됐지? 생각해보면 그동안 책을 읽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기 때문이었다. 깊게 따져보면 그것은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단지 본'것에 가깝다. 그것도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집중해서 본 게 아니다. 그냥 시선을 그쪽으로 옮긴 것뿐이다. 왜 그렇게 됐지? 즐거운 하루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거리에 멈춰 서서 음악을 바꾼다. 바로 들리는 건 자우림의 <샤이닝>이다. 내가 기댈 곳은 어디인가.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던 카페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갑자기 씁쓸해진다. 내가 견뎌온 삶의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때문에 가끔 세상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샤이닝>이 지났다. 바로 나오는 곡은 아이유의 <밤편지>다. 또 느닷없이 드는 생각. 이런 거 생각해서 뭐해? 그냥 그렇게 묻어두는 거지. 다시 컨디션이 좋지도 않지만 안 좋지도 않은 상태로 돌아간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쨌든 웃을 만한 순간을 주기 때문은 아닐까? 이렇게 왔다갔다 하는 나와 우라를 위해 호러 영화 한 편이 등장했다. 관객을 불러들일 거면 좀 예쁜 웃음이 좋았을 걸, 이 사람들은 너무 기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스마일>이다.
기괴하게 웃는 사람들
정신건강의학과 주치의 로즈 코터. 그녀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사회에 무언가를 기여한다는 생각은 로즈의 소중한 동기부여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로즈. 여느 날과 다름없이 진료를 보고 있었다. 그녀 앞으로 들어온 환자 한 명이 있었다. 환자의 이름은 로라. 로라는 남들은 볼 수 없지만 자기에게는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의사의 관점에선 분명한 망상이다. 로라의 상태를 진단하는 로즈. 로라는 크게 화를 내며 난 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라가 목격했던 광경을 털어놓는다. 대학원생이었던 로라. 그녀의 담당 교수였던 무뇨즈가 로라를 호출했고, 금세 망치로 자기의 머리를 스스로 가격해서 죽었다고 한다. 죽으면서 건넸던 말은 유언이 아니라 기괴한 웃음뿐이었다고 전하는 로라. 무뇨스 교수의 자살 이후 로라의 눈에만 이상한 웃음이 보인다. 당황하는 로즈. 주치의로서 무언가 피드백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로라가 발작을 일으켰다. 공황까지 오는 것 같다. 더 화들짝 놀라는 로즈. 로라는 발작을 일으키며 “그것이 오고 있어요!”라고 소리 지른다. 갑자기 이 발작을 멈추더니 로즈는 주변에 있는 깨진 조각을 줍는다. 기괴하게 웃는 로라. 곧 로라는 깨진 조각으로 스스로 목을 그어 목숨을 끊는다.
충격적인 상황. 정신과 주치의라고 해서 특별하게 멘탈이 강한 건 아니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로즈. 정신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계속 찝찝하게 머리에 남는 건 로라가 죽기 전에 로즈에게 했던 말이다. “무뇨스 교수는 자살하기 전에 기괴하게 미소를 지었어요!”라는 말이 비단 자기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다음 날. 로즈는 지나가다가 환자 한 명이 이상하게 웃는 모습을 목격한다. 환자 칼에게 다가가는 로즈. 칼은 로즈에게 다가가자마자 “넌 죽게 될 거야!”라고 소리친다. 화들짝 놀라는 로즈. 정작 칼은 계속 수면 상태였다. 이때 겪은 일을 상관에게 말하는 로즈. 상관은 로즈에게 일주일 동안 잠깐 쉬고 오라고 말한다. 그 때만 해도 잘 몰랐다. 로즈는 큰 구멍을 파고 있었다는 걸.
호러 만세
영화의 톤은 흑백이었다. 주인공은 남자 둘. 남자 둘은 등대에서 일하고 있다. 두 남자는 따뜻한 성격을 가지지 않았다. 내내 까칠한 두 남자. 어떤 남자는 자기 이름도 거짓으로 둘러댔다. 나이 든 남자는 내내 젊은 남자에게 극언을 내뱉는다. 아무도 없는 등대와 해안가. 상사인 것처럼 구는 중년의 남자와 많은 일에 젊은 사람은 학을 떼고 있다. 이렇게 불안한 자의식이 점점 깊어질 때쯤 젊은 남자의 눈에 인어의 시체가 보인다. 분명히 과거에 전해 듣기로는 '인어의 시체를 목격하는 것은 그 광경을 본 자가 미쳐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었다. 미쳐가고 있는 것인가. 나를 침잠하는 바닷가와 서서히 조여 오는 사운드에 젊은 남자는 정신을 잃어간다. 앞에서 소재로 쓴 영화는 <라이트하우스>다.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잘 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분명히 신화에서도 레퍼런스가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가 끝까지 봐야 이해가 용이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를 깊게 파지 않은 분들이라면 도중에 하차할 확률이 굉장히 높다. 그렇게 큰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지만 나는 이 <라이트하우스>가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운드와 흑백 연출로 서서히 돌아버리는 인물의 처지를 깊게 잘 묘사했다. 러닝타임을 보면서 내내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 때문에 극의 끝까지 잘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우리나라에 <곡성>이란 영화가 이미 있었다. 그렇지만 <라이트하우스> 역시 신선했다고 생각한다. <곡성>과 비슷하게 인물을 서서히 옥죄는 연출을 보다 새롭게 접근했다. '얼마나 끔찍할까'의 공포가 아닌 '내가 처한 상황이 답도 희망도 없다'라는 두려움을 영화 전반을 이끄는 정서로 선택한 것이다. <곡성>이 2016년이고 <라이트하우스>가 2019년이니 이 두 영화는 꽤나 신선했다고 볼 수 있다. <쏘우> 시리즈를 위시로 한 슬래셔 무비나 <살인 소설>에서 봤던 '갑툭튀' 형 점프 스퀘어를 넘어 두려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호러는 이렇게 점점 더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장르에서 조금씩 빈틀어서 더 새로운 결과물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이 <스마일>은 이런 관점에서 신선하다. 일단 우리는 배트맨의 호적수 '조커'를 알고 있다. 찢어진 입으로 기괴한 웃음을 내뱉는 조커. 히스 레저와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기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임팩트를 한 방 먹였다. 또 어렸을 때 '빨간 마스크' 한번쯤 다들 들어봤잖아? 이렇게 웃는 모습으로 기괴함을 연출하는 방식은 잘 생각해보면 사실 몇 번 봤었다. 또 <트루스 오어 데어>라는 영화가 이미 개봉했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신선한 이유가 단지 웃음 때문에? 아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와 웃음이 갖는 관련성이 탁월하기 때문에 신선하다. 일단 이 웃음과 영화의 주요 소재는 끊임없이 대비된다. 극에서 웃는 얼굴의 모습이 '아예 고통이 없음'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다. 이는 왜 이 스마일이라는 소재가 양면적인 측면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이 된다. 핵심 소재를 결국 넘어서야 '스마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면의 무언가를 담아내지 못하면 결국 불안한 자의식 속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현대사회의 그림자는 영화 전부를 관통하며 호러 분위기를 연출한다. '스마일'이라는 제목과 포스터를 보러 갔다가 더 깊숙한 내면의 심연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익숙한 맛으로
소재에 대한 접근은 신선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기존 영화들과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는 지점도 있다. 바로 이미지 사용법이다. 이 영화는 이미지 사용을 잘했다. 일단 포스터부터 볼 수 있는 기괴한 미소는 누구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 세상에서 가장 께름칙한 미소를 가져다가 포스터에 박았다. 이 웃는 얼굴은 영화 끝까지 반복해서 나타난다. 관객들은 이 기괴한 미소에 1차적으로 적응한다. 으. 저거 기분 나쁘게 웃네. 그런데 여기다 기름을 붓는다. 바로 미술을 활용했던 방식이다. 극은 여러모로 잔인하게 소품을 잘 활용한다. 자기가 직접 날카로운 걸 갖고 목을 긋는 건 기본이다. 직접 자기 머리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식칼 비슷한 걸로 사람 몸을 푹푹 찌르기도 한다. 또 중후반부쯤에 굉장히 잔인하게 피살당한 인물의 사진이 나온다. 이런 고어 묘사가 영화에서 가볍게 휙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 작품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로라의 자살부터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엔딩 직전 시퀀스에서 해소시키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영화가 두렵다가도 주제와 맞닿아 있으니 경제적으로 잘 썼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또 이 감독의 연출 방식은 사운드 구성에도 강점이 있다. 봤던 소재를 중반부까지 이끄는 건 음향의 힘이 다 했다. 사실 이런저런 영화를 봤던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초반부 전개가 익숙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쓴 <곡성> <유전> <라이트하우스>를 살짝 비튼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기존의 것들과 차이점을 부여하며 초장부터 빠른 템포로 관객을 시종일관 제압한다. 예를 들어 칼이 로즈에게 '넌 결국 죽게 될 거야!'라고 소리 지르는 신이 있다. 목소리 톤을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듯싶다. 살짝 얼빠진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늘한 경고가 될 때가 있다. 영화는 이 지점을 기가 막히게 캐치해서 표현한다. 또 지지징하는 효과음도 어느 장면에서 기괴해야 하고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한 채로 잘 들어갔다. 우리가 어떤 밴드의 음악을 듣는다고 가정해보자. 밴드 합주를 하는데 드럼이 압도적으로 못하면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이야기에 딱 달라붙은 상태로 소리를 묘사한다. 작게 "로...즈"하는 속삭임도, 로즈의 눈에 타인의 기괴한 미소가 보일 때도 사운드에 변박을 주며 충분한 호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올해 <탑건 : 메버릭>이 거의 8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쳤다. 이 영화의 강점으로 많은 분들이 음향을 뽑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르릉하는 비행기 소리를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다. 영화는 이와 다른 측면에서 강점을 내비친다. 아마 이 영화의 음향 효과가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다. 아마 이 영화의 음향이 관객을 내내 붙잡고 집중하게 만들 테니까.
별개로 영화에서 강점으로 작용했던 건 캐릭터 설정이다. 우선 영화에는 로즈의 전남친과 현남친이 나온다. 여기서 현남친 캐릭터 설정이 좋았다. 우선 <유전>을 이야기할 수 있다. <유전> 거의 단점이 없다시피 한 영화지만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있다. 바로 아내 애니가 그렇게 미쳐가고, 아들을 하대하고 있는데 남편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이다. 또 스콧 데릭슨의 <살인 소설>에서도 그냥 좀 조용히 신경 끄고 살지 왜 사서 고생을 만드는가? 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글쓴이가 호러에 식견이 그렇게 넓은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현남친 캐릭터는 확실히 클리셰를 벗어난 느낌이다. 앞의 두 영화 <유전> <살인 소설>과는 다르다. 아무리 사랑하는 여자친구라도 다 받아주는 건 너무 극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이를 비틀듯이 영화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인물을 묘사한다. 이 현남친 캐릭터와 비슷한 맥락을 하는 것이 상담사와 전남친 캐릭터다. 전자는 현남친과 비슷하게 적절하게 사용됐지만 후자는 엔딩부에서 살짝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두 인물이 영화를 이끌고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가 좀 더 매끄럽게 물 흐르듯이 진행됐다. 이미지만큼이나 캐릭터를 잡았던 감독의 수가 돋보인다.
아쉬운 것도 있어
그렇게 연출가의 강점도 들어가고 주인공 소시 베이컨의 열연도 느껴지지만 단점은 당연히 있다. 바로 점프 스퀘어다. 이 연출 방식 전부가 무의미하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가령 예고에서도 나오는 분홍색 여자가 니트를 입고 창을 똑똑 두드리는 장면은 점프 스퀘어가 잘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끔찍한 이미지들과 함께 시너지를 부분도 군데군데 있다. 그러나 (이 부분도 예고에 나오는 부분이다) 주인공 로즈가 화들짝 놀라서 기절하는 곳이 굳이 유리여야 했는가? 에 대해서는 살짝 아쉽다. 비슷한 맥락에서 로즈가 헛것을 보는 장면이 여러 번 제시된다. 왜 헛것을 볼까? 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의 원인 절반이 '집에 불을 켜지 않아서'로 귀결 지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냥 단순히 관객을 깜짝 놀래키기 위해 점프 스퀘어가 소모적으로 사용됐던 건 많이 아쉽다. 이게 주요한 순간에 점프 스퀘어가 들어간 것이 아닌 비교적 덜 핵심인 장면에 들어가니까 이질감이 더 크다. 감독님이 자신이 없으셨나? 이미 충분히 영화 잘 만들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엔딩부의 전개는 좀 아쉽다. 일단 영화를 보면서 중후반부에 방향키를 트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이 부분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입부에 로라가 죽기 전에 했던 대사가 생각나면서,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 더 완성도가 높은 각본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 이 방향키를 틈으로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물은 극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관련 있다. 이 메시지에 대한 통찰을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이 인물의 등장이 소모성으로 휙 쓰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오케이. 엔딩까지 가는 빌드업 좋았고. 터트려야 할 데에서 터트렸고. 클리셰 깨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극후반부 가장 마지막 시퀀스가 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조악하다고까지 느낀 부분이었다. 뻔한 호러에서 탈피하고 싶었나? 영화의 처음과 끝이 조응하고, 이 '웃는 것'의 속성과도 대응하는 방식은 1절만 하면 됐다. 그런데 굳이 그걸 그런 식으로 비틀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
결국 지은 미소에 관하여
어느덧 20대 중반을 지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어떤 인생이든 나와 그렇게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같았던 내 유년시이었다. 이것도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내가 어림잡지도 못할 정도로 뒤틀린 인생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또 우리의 삶에서 이 영화가 차용한 주요 소재가 왜 인간에게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지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어야 하는 것은 참 외로운 일이다. 그것만큼이나 더 아픈 건 주위 사람들이 그런 인물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사람에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는 이 지점을 경제적으로 활용하며 폭주한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필요하다. 행동과학에 '담아내기'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각자의 어린 시절에 크고 작게 다가오는 부침을 '별 것 아니다'라고 버텨주는 것이 '담아내기'의 뜻이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기에 이 '담아내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극은 이런 인간의 불완전성을 내세우며, 모두의 마음속에 진 응어리를 미소로 일깨운다. 내가 만든 세상을 일깨울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미소 지으며 정신승리한 채로 버틸 것인가? 감독은 굉장히 서늘하고 기괴한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조던 필, 아리 애스터, 로버트 애거스가 현재 호러 영화 기대주 탑 3으로 언급되고 있다. 뒤틀린 판타지/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발상/호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각 감독들의 주요 특징이다. 이 셋 만큼은 아니더라도 '인간 내면에 관해 묻는다'라는 특징을 가진 신성이 등장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드린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함께 극장에서 볼 만한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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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다는 것 잘 알지만 그래도
별안간에 <어벤저스 : 엔드게임>이 생각난다. 한창 마블 유행할 땐 안 보고 재개봉판이 열릴 때 봤다.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이라. 다른 덕후들과 마찬가지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극후반부에선 눈물 날 것 같은 울컥함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때 이야기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에 말 안 되는 게 몇 개 있었다. 앤트맨이 그렇게 해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그 양자역학? 다중우주(멀티버스)? 에 대한 연구가 너무 쉽게 착착 이뤄지는 거 아닌가? 아무리 브루스 배너랑 토니 스타크가 똑똑하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들여야 할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쉽게 나온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의 인구가 반으로 접힌 것 치고는 문제 해결이 싱거웠던 셈이다. 그리고 마블도 이 작품 이후에 걸핏하면 '블립'을 들고 오니 마블빠인 나는 진작에 개연성이 헐거운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애써하는 인정에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에 대한 내 생각이 담겨있다. 우리, 살면서 시간을 몇 번이나 돌릴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이다. 시간은 무슨 짓을 해도 돌릴 수 없다. 애써 과거의 나에게서 교훈을 얻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아로새길수록 공허함만 커진다. 내가 한국영화를 사랑하게 됐던 계기도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가 울림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좋아했던 분들은 다들 공감할 것 같다. 각자가 놓쳤던 너무 많은 것들이 마음이 아프거든. 이젠 그것들을 반성할 줄도 안다고 말하고 싶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계속해서 똑같은 일만 반복한다. 삶의 매 순간에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만 고르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 여행하는 영화들을 알면서도 보게 되는 것 같다. 이 모든 게 저 여행처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이다. <프리 가이>를 연출했던 숀 레비 감독이 바로 다음 해에 신작을 갖고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깊다. 소재는 시간 여행이다.
미래에서 온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다
12살 소년 애덤은 별 볼일 없는 남자애다. 친구도 없어 보이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매일 같은 반 급우들을 두들겨 패거나 맞는 게 일상인 애덤. 여느 때와 똑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던 도중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어딘가 부상을 입은 듯한 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애덤. 몇 마디 나눠보고 나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이 아저씨는 2050년의 나 자신이다.금세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보기 시작한다. 저 여자랑 자게 되나요? 미래에는 이렇게 몸짱이 되나요? 누가 과거의 나 아니랄까 봐 쓸데없는 말이 많다. 어른 애덤은 금세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말하게 된다. 시간 여행이란 게 생겼고 이것 때문에 현재의 많은 것들이 꼬여있다고 한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과거의 애덤과 현재의 애덤이 힘을 합쳐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성인 애덤과 어린이 애덤이 각자(애덤)의 삶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가는 내용이 영화의 주요 줄거리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개 있을 것이다. 모두의 마음 속에 있을 법한 감정들이다. 영화 안에서도 이에 대해 묘사가 있다. 당하기만 했던 나 자신에게 보내는 격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지 못했던 마음. 더 받고 싶었지만 허무하게 날 떠났던 사람. 뭐 그런 미련들이 영화 안에 제시된다.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주가 된다. 영화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이런 감정을 떠나보내지 못했기에 후회와 자기혐오로 가득 찼던 지난 세월에 대해 주인공이 코멘트하게 만든다. 이 코멘트 역시 영화의 주요 소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전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던 것들이 맞다. 기존의 시간 역행영화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냐고 물으면 솔직한 대답은 아니오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이런 소재들이 숀 레비 특유의 유쾌한 감성과 잘 맞는 편이라 특별한 개성이 있다.
어떤 영화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후회와 자기혐오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혐오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간단히 자아를 싫어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자기혐오는 미련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 못한 말이 그 사람에게 돌아와서 미련으로 남으면 그게 자기혐오로 변하는 것이다. 청년 애덤은 사람들에게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어머니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청년 애덤이 소년 애덤에게 어머니에게 꼭 무언가 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영화 전부를 관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인물을 배치한 이유는 사실 되게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에 이입하라고 만들어놓은 장치이다. 근데 이런 감정이입의 결말이 어떤 식으로 향하는가도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메시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시간여행을 해서 과거의 나의 멍청함을 무찌를 수 있다고 쳐보자. 그래서,'과연 어떤 선택지를 골랐으면 무언가 달랐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이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 간의 처지를 통해 우리는 그 질문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뭐 이런 귀결이 기존의 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하면 사실 크게 할 말은 없다. 어느 정도는 클리셰를 따라간 게 맞으니까. 그런데 주인공 청년 애덤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밝고 유쾌하지만 마음에 그늘이 진 인물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서 영화를 보는데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다른 장르물과 특별한 차이점을 갖는 영화
첫 번째. 영화 색감이다.전작 <프리 가이>에서는 게임을 영화로 옮겼었다. 그에 맞게 화사하고 비비드 한 색감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살짝 다르다. 소재의 특성상 좀 생각이 많아 보여야 하는 효과가 꼭 들어가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에 맞게 겨울에 찍은 듯한 시각적/시간적 배경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미장센이 잘 뽑혔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주인공 라이언 레이놀즈의 퍼포먼스다.이 인물 애덤은 내면에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유년시절이 그렇게 밝지도 못했다. 근데 사람 자체가 근본적으로 밝은 구석도 있어서 유머감각도 탑재해야 한다. 이거 어렵다. 뭐 보편적으로 있는 인간형인 것도 맞지만 이 인물은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에 이걸 다 보여줘야 한다. 그에 맞는 눈빛 연기, 대사 치는 톤, 제스처 하나하나까지 사람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난 <데드풀> 시리즈도 안 본 사람이라 이 배우의 연기가 낯설었는데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다. 아. 액션 연기도 좋았다.
세 번째. 균형감각이다.각본이 균형을 잘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년 애덤의 어머니와 청년 애덤이 술집에서 대화하는 신이 있다. 여기서 감독은 아이가 괴롭힘 당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남편이 세상을 떠났던 이유에 대해서도 깊게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당신은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했다'식의 말을 던지고 홀연히 사라진다. 뭐 시간여행이라고 하는 것의 암묵적 룰을 지키기 위해 이랬다고 하기엔 역시 감독의 연출 의도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2번에서 언급한 것과 닿아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과거의 부채의식에 '그게 무엇이든 괜찮아'라고 위로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사실보다 그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청년 애덤이 그 대사를 한 것이겠지. 그리고 그게 곧 감독의 연출 의도일 것이고. 영화는 이렇게 드라마틱한 처지 변화보다 적당히 선을 긋는 스탠스를 보인다.
극의 개성을 살리는 좋은 퍼포먼스
배우들의 연기는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정도다. 주인공 라이언 레이놀즈의 연기는 3번에서 적었기에 더 쓸 필요 없을 것 같다. 다른 역의 조 샐다나나 마크 러팔로도 탁월했다. 조 샐다나는 뭔가 레이놀즈보다 나이 더 들어 보이는 비주얼인데 은근히 어울려서 놀랐다. 또 마크 러팔로는 멀티버스 유경험자다운 연기가 보였다. 지금 저 역할이 브루스 배너라고 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봤던 느낌이긴 해도 실제 있을법한 아버지이자 과학자 느낌이 나서 좋았다. 다음은 소년 애덤을 맡은 워커 스코벨이다. 이거 데뷔작이라고 하던데, 어색한 티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대사 많았는데 외우느라 어려웠을 듯.
적당히 얕은 영화의 농도
감독의 전작 <프리 가이>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가벼운 영화다. 그러라고 만든 영화기도 하고.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 적당한 농도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쉬운 것도 있다. CG 액션 연출을 좀 더 멋있게 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너무 뿅뿅하는 시각효과에 엔딩부도 슬로모션이라던가 예전 티 나는 연출을 쓴 게 아쉽기는 하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대사의 톤이나 청년 애덤의 행적이라던가 중후반부까지 끌고 가는 메시지가 생각을 많이 하게 해서 너무 밝고 유치한 느낌은 아니다. 20대 중반의 남성이 보기에 무리 없었다.
누가 이 영화를 봐야 할까?
무난한 액션/SF물이다. 넷플릭스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떠나보내지 못했던 마음의 부채의식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난 이 영화를 보고도 다 보내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근데, 조금은 그 생각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러분도 그런 것들을 좀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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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영화의 무덤 앞에서, 다시 영화를 묻다.
영화 정보
감독: 라두 주데 (Radu Jude)
제작국가: 루마니아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62분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특별전 :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아시아 프리미어
시놉시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타케리뷰
라두 주데(Radu Jude)의 2024년작 <잠 #2>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1963년 실험영화 <잠(Sleep)> 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험 다큐멘터리다.
“The most wonderful thing about living is to be dead.”라는 워홀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의 무덤을 1년간 실시간으로 비추는 웹캠 스트리밍을 데스크톱에서 녹화하고 편집해 만든 62분 분량의 작품이다. 영화에는 서사도, 인물도, 대사도 없다. 단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계절과 날씨, 낮과 밤이 교차하고, 사람과 동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 우리는 이미지의 탄생과 소멸, 감시와 연출, 존재와 소비라는 복잡한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워홀의 무덤 앞은 ‘영원한 잠’의 공간이지만, 그곳은 좀처럼 조용하지 않다. 낮에는 무덤을 관리하는 이가 등장하고, 밤에는 고라니나 다람쥐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거린다. 방문자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손을 흔든다. 이들은 추모객이 아니라, ‘자신이 찍히고 있음’을 인식한 퍼포머다. 누군가는 캠벨 수프 캔이나 금발 가발처럼 워홀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놓고 가기도 한다. 이 반복적 행위는 워홀 생전의 작업인 반복, 복제, 이미지화를 무덤이라는 장소를 통해 역설적으로 재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영화’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전통적인 촬영 장비 없이, 단지 컴퓨터 데스크톱 화면을 1년간 녹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화면에는 Earth Cam이 보이고 화면을 녹화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디지털 매체의 물리성과 흔적이 숨김 없이 드러난다. 영화는 움직임보다 시간의 밀도에 집중하며, 관찰과 기다림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시네마의 감각을 되살린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1896)>에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림을 기록했듯,
<잠 #2>은 질문한다. 영화는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가?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관객은 이 영화에서 무덤을 찾는 이들과 동일시된다. 무언가를 보고,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며, 결국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영화적 체험이 된다.
감독은 단 한 번의 카메라 이동도 없이, 시간의 흐름과 반복을 통해 죽음과 생명, 정지와 운동, 감시와 연출, 기록과 망각 사이의 긴장을 구축한다. 정점은 가장 격렬한 자연 현상인 비바람과 천둥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도달한다. 자연이 소란스러울수록, 무덤은 더욱 고요하고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정적은 영화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시간을 밀도 있게 담아내는 형식’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웹캠이라는 감시 장치가 자동적으로 영상을 기록하고, 감독이 그것을 선택해 편집하며, 관객이 다시 관람하는 이 삼중 구조는 관찰, 노출, 프라이버시를 둘러싼 현대적 감각을 불러낸다. <잠 #2>은 다큐멘터리 윤리와 창작 주체의 위치에 대해 묻는 동시에, 영화라는 예술이 ‘기록’ 이상의 어떤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지 묻는다.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섹션에 이 영화가 초청된 것은 단지 형식 실험의 결과가 아니다. <잠 #2>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의 경계, 영화가 지속될 수 있는 방식, 그리고 동시대 관객이 감각하는 감수성을 정면으로 탐색하는 작품이다. 장르와 상업성으로 포화된 동시대 영화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은 영화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앤디 워홀은 생전 ‘관람거리’를 생산하던 이미지의 작가였다. <잠 #2>은 그가 죽은 후,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다시 소비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또한 그러한 반복 소비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롱도, 찬양도 아닌 침묵 속의 응시로 답한다. 마치 관처럼 정적인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 워홀의 무덤 앞에서, 영화의 무덤을 조용히 열어젖히며.
상영 일정
2025년 5월 1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2025년 5월 3일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5년 5월 5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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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산업의 침체의 이유
관객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과거의 흥행 공식에 매달려 진부해지는 작품은 관객들에게 혼쭐이 난다.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만들어준다. OTT 서비스의 확대가 그 흐름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개인화되는 시대에 관객의 '특정' 취향에 맞지 않는, 그야말로 대중이라는 거시적인 관점만을 노리는 작품들은 이제 쉽게 흥행의 문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릭레이어>는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그 성과 또한 해외에서 먼저 나타났다. 놀랍지 않다. 흥행에 실패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영화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시놉시스의 몇 글자만 본더래도 독자들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이 영화는 몹시 '진부'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 적 CIA인가? 언제 적 비밀 요원인가? 그리고 언제 적 은퇴한 요원의 복귀를 그리는 이야기인가.
놀랍게도 이 작품은 '할리우드식 액션'의 정형화된 공식을 보여준다. 그게 사실이다. '이 장면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바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꿈보다 이 영화가 미래의 확신을 준다.
은퇴한 CIA 요원은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있다. 무려 '벽돌공'이다. '브릭레이어'라는 영화 제목은 말 그대로, 단순하게 벽돌공을 뜻하는 영어 단어를 사용한 거다. 평범한 벽돌공이 힘을 숨긴 이야기라니. 평상시에는 벽돌을 쌓는 사람이 알고 보니 CIA 요원이었던 놀라운 이야기다. 세상에 어느 곳에서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아마도 어디서든.
세계 질서를 어지럽히고, CIA의 세계적 신용도를 떨어뜨림으로써 혼란을 야기하려는 어떠한 세력이 등장한다. 그 세력의 중심에는 수상한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주인공의 한때 돈독하던 친구다. 한때 CIA 요원으로서 함께했고, 미래가 유망하던 둘이었다. 이제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게 된 둘은 다른 지향점을 두고 치열하게 싸운다. 목숨을 걸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분명 <브릭레이어>의 이야기는 아닐 텐데 어디서 볼 법한 내용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흔한 이야기라는 거다. 흔한 이야기를 전하려면 그 방식이 특별해야 하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 방식 또한 그리 특별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정형화'되어 있으니까.
은퇴한 요원은 그 비뚤어진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CIA에 돌아온다. 응징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내가 해결하겠다"라는 웅장한 마음가짐은 덤. 이런 땀내 나는 이야기에 여성 배역이 빠지면 섭섭하다. 아름다워야 하고,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정형화된 흥행 공식이니까.
당연히 둘은 서로 투덜대야 한다. 그렇지만 증오해서는 안된다. 언제든지 서로 사랑인 듯 사랑 아닌 묘한 케미스트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면 그게 정형화된 공식이다. 마초이즘의 둔탁하고 거친 느낌을 다소 완화해 줄 완충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이런 장르의 여주인공 존재 이유가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이게 흥행하기 위해서라면 필요하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있나. 그렇다. 올바른 지적이다. 그 흥행 공식은 이제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그래서 어떠한 관점에서 보면 2010년대 영화 같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마치 남자 주인공이 요원직에서 은퇴했지만 이번만큼은 비밀 작전에 나서는 것처럼.
서로 챙기고, 돕는다.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돕는다. '하이, 큐!' 사인이 떨어지면 준비됐다는 듯 카메라 바깥에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위적인' 움직임이다. 과거에는 통쾌했을지도 모른다.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 순간에 풀어주면서 쾌감을 느끼게 했을 거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 그렇게 하겠다' 싶으면 어디선가 여자 주인공이 차를 끌고 온다. 어디선가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살리러 온다. 서로의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기 위한 "명대사" 한 두줄은 필수다. 이런 정형화된 공식은 플롯에서 관객을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다. 갑자기 영화에서 빠져나와 관객이 '감독'이 된다. '지금 입장해!' '지금 도망쳐!' 관객이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적재적소에 예측하는 대로 이야기가 착착 진행된다.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린다. 서스펜스를 만드는 연출은 필수이며,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 빌런도 있다. 그 빌런이 눈을 감기 전까지 주인공도 어디서나, 어떤 고난에서든 살아남는다. 전형적인 위기-극복 서사다. 극복 서사가 당연해지니 주인공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든지 관객은 서스펜스를 느끼지 못한다. 어차피, 극복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살아 돌아온다.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누가 다 알면서도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해외에서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 관객은 우리나라 관객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국내 관객도 해외 관객과 수준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브릭레이어>가 국내에서 흥행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우리는 가질 수 있겠는가. <브릭레이어>의 국내 흥행 실패도 예견된 수순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국내 영화 산업이 침체기를 겪는 상황에서 여러 곳이 그 돌파구를 제시하며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소위 '중박'용 영화 생산을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실험 정신, 도전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이익을 위한 영화'만 생산되고 그친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당연히 흔해빠진 구성과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급급해진다. 그런 문제점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비 인식마저 높인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으면 관람하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생긴다. 그 선례가 <서브스턴스>, <해피엔드>다. 입소문이 나거나,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야 하는 작품만 살아남고 있다. 지금까지는 해외 영화들이 그런 점에서 선전하고 있다.
<브릭레이어>는 그런 점에서 해외 영화임에도 국내 영화 특유의 문제점을 수반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일종의 오답 노트가 되어주고 있다. 당연히 미국 영화 산업도 침체를 맞으며 내부적으로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브릭레이어>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이제는 정말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드러내면 다른 이들에게 반감을 사기 쉽다. 노골적인 의도를 가지는 영화들은 이제 그만 나올 때가 됐다.
*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다녀온 뒤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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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 가장 손쉽게 불안을 감추는 방법
<독립시대>는 인상적인 자막으로 시작한다.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겠다는 공자의 다짐과 그 이후엔 무엇을 해야 하냐는 제자의 물음. 곧바로 영화의 배경이 될 타이페이가 가난을 극복하고, 세계 부자 도시로 거듭났음이 텍스트를 통해 전해진다. 이어지는 이미지는 직전의 묵직한 말과는 상반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롤러스케이트를 비추는 클로즈업.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인물이 롱샷으로 비춰진다. 잘 나가는 연극의 연출가로 유추되는 한 남자는 롤러스케이트에 의지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며 기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다. 입도 발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 기자 또한 끝없이 몸을 움직인다. 언뜻 보기에 그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예술가로 보인다. 기자들과 함께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라니.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 모습에서 그의 불안을 읽었다. 정박된 카메라, 끝없이 움직이는 인물. 풍요를 맞이한 대만 사회는 평온해 보이나, 실상은 혼란스럽다. 제자의 질문을 곱씹게 된다. 풍요, 그 다음엔 무엇이 오는가. 다음 컷은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표절 의혹에 휩싸여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절망한 인물. 그의 친구인 몰리는 묻는다. “그런 비극적인 몰골로 희극을 하겠다고?” 거창한 공자의 말로 시작한 이 작품은 전례 없던 풍요의 시대에도 여전히 불안한 청년들의 일상을 비추며, 본격적으로 당시의 대만 사회로 시점을 이동시킨다.
이 작품의 시작을 장식하는 인물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버디이나, 사실 작품에서 그의 비중은 크지 않다. 대신 이 작품은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몰리, 그녀와 약혼을 앞두고 있는 재력가의 아들 아킴, 몰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비서인 치치, 그리고 그녀의 보수적인 애인 샤오밍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이 작품을 얄팍하게 요약하기는 쉽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중심으로 흔들리는 네 사람의 일과 사랑, 그리고 우정의 이야기.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갈등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 이 정도로 이 작품을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그 너머의 이야기가 있다. 네 명의 주인공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인물은 치치다. 치치는 몰리의 비서로서 표절 사건의 해결사이자, 겉보기에 모난 데 없는 호감형의 인물로 모두의 환심을 사는 인물이다. 게다가 뛰어난 미모로 극중에서 말하는 ‘보조개 미소’를 항상 장착하고 다니는 치치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다. 언제나 친절한 그녀에게 수많은 남자들은 관심을 표하고, 몰리를 비롯한 여자들은 그녀에게 크게 의지한다. 이런 다정한 성격 탓에 그녀는 수많은 갈등 상황의 중재자가 된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도 아닌 갈등 상황들에 휘말려 들어가는 그녀. 어느새 그녀의 매력적인 ‘보조개 미소’는 타인에 의해 ‘위선’적인 미소로 재단 당한다. 표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몰리의 형부에게 그런 가식적인 미소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정도는 그녀에게 익숙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친한 친구인 몰리마저 그녀에게 비슷한 말을 건넨다. “그 미소로 눈길은 끌겠지만, 미소 속에 숨겨진 속은 모르겠어.” 사실 이런 치치의 태도는 영화의 태도와 닮아있다. 치치가 언제나 ‘보조개 미소’를 달고 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웃음기를 잃지 않는다. 잠깐 진지한 생각을 해볼라치면 그런 시간은 사치라는 듯 관객을 웃긴다. 물론 몰리와 치치, 치치와 샤오밍의 관계에도 어두운 면은 있다. 그러나 작품은 주인공들의 얽히고설켜있는 관계를 이용해 진지한 순간을 손쉽게 빠져나간다. 가끔 인물들이 자신들의 고뇌를 논하느라 진지해질 법하면, 아킴과 버디를 필두로 한 인물들이 등장해 웃음을 주는 식이다. 뼈가 있는 웃음이더라도 웃음은 웃음이다. 참으로 희극적인 영화가 아닌가.
웃음은 사실 불안을 숨기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나 또한 그에 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어떤 불행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능력, 심지어는 그 불행을 그저 웃음거리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나의 재능 중 하나다. 이렇게 불안을 끝없이 통제해 온 나는 내 삶이 내가 연출하는 영화이길 바랐다. 노력한다면 원하는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연극에 가까웠다. 아무리 불안을 웃음으로 감추어 봐도 변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등장하고 NG가 난다. 영화라면 다시 찍으면 될텐데 연극은 그렇지 못하다. OK컷만을 건져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자꾸 많은 것이 어긋난다. 오프닝 시퀀스에 버디는 말한다. “인생은 연극이고, 연극이 곧 인생이에요.” 그의 말은 단순히 연극인으로서 자신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연극이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한다. 그리고 실패를 감당하고 사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희극 같은 이 작품을 잔뜩 웃으며 즐기고 나면, 아름다운 엔딩이 우리를 반긴다. 서로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건네며 헤어짐을 말하는 두 사람. 두 사람의 얼굴에 아쉬움이라곤 없어 보인다. 치치는 말한다. “모두가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찾는다면 자기 자신은 누가 지키겠어?” 이때 실질적인 주인공인 치치가 어떤 ‘독립’을 하는 엔딩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아름답게 어긋난다.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진 샤오밍에겐 어쩐지 후회가 느껴진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을 열자, 치치가 그를 반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산뜻하게 말하는 치치. 샤오밍은 그녀를 꽉 안는다. 꽉 닫힌 해피엔딩 같은 결말. 그러나 이 아름다운 엔딩은 영화 <아사코>의 엔딩과 겹쳐 보였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음에도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두 사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던 여자 주인공을 남자 주인공은 내치지 못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구한 집의 베란다에 선다. 처음 집을 계약할 때는 아름답다고 말했던 강을 보며 남자는 다른 말을 한다. “더러운 강이네.” 여자는 답한다. “그래도 아름다워.” <독립시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나아질까. 그것은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샤오밍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실패를 각오하고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서있던 두 사람은 최소한 지금만은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매일을 연기하고 매일을 실패하는 나이고, 우리이다. 그럼에도 함께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나는 실패에 대해서라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굴 것이다. 또 바보같이 능숙한 연기를 하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문 앞에 서겠지. 풍요도 관계에 대한 갈증과 불안은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독립’ 없는 ‘독립시대’의 흥미로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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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안>믿음과 신념으로 지켜내는 정의
변호사 ‘낸시’(조디 포스터)는 프로 보노(pro bono, 변호사를 선임할 여유가 없는 개인 혹은 단체에 대해 보수를 받지 않고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활동의 일환으로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리타니아 출신 '슬라히(타하르 라힘)'의 변호를 맡는다.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라는 혐의를 받은 그는 기소와 재판 없이 6년 간 관타나모에서 수감생활을 이어 왔다. 그를 접견한 후 그의 무죄를 주장하기로 결정한 낸시는 동료 '테리(쉐일린 우들리)'와 그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아 나서지만, 진실을 가로막은 국가 기밀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 한편 그의 유죄를 확신하던 군 검찰관 ‘코우치(베네딕트 컴버배치)’ 중령은 재판 준비를 하면 할수록 아무리 봐도 부족한 증거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쿠바에 위치한 관타나모 수용소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과 같은 테러리스트는 물론 단지 테러와 연관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은 민간인들까지 납치, 감금한 후 고문을 행한 것으로 악명 높다.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자랑으로 삼는 미국의 수치이기도 하다. 이 장소가 논란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변호인 선임권, 묵비권, 재판받을 권리 및 신체 자유와 같은 개인권의 말살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고 믿어졌던 원칙이 복수심과 원한 앞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흑역사인 것이다. 이곳에 무고하게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모리타니안>은 이 흑역사를 두 가지 관점에서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살라히의 과거와 낸시, 코우치 중령의 현재를 연결시키며 인권이 무참히 짓밟힌 상황에서 정의가 바로 서는 과정을 조명한다. 다른 하나는 낸시와 코우치 중령이 펼치는 법정 공방을 각각 공적 맥락과 사적 맥락에서 비추며 정의의 양면성을 논한다.
이때 전자는 한 개인의 세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로 그들의 종교성을 선택한다. 살라히는 신에게 모든 것을 위탁한다. 유일하게 마음 편히 말을 섞을 수 있었던 옆방 수감자가 죽자 서아프리카의 독실한 이슬람 국가 모리타니아에서 온 슬라히는 신에게 매달린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정당한 삶을 달라고, 관타나모에서 억울하게 죽은 수감자들에게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반면에 낸시는 철저히 변호사의 윤리와 원칙에 스스로를 의탁한다. 그녀는 살라히가 고문으로 인해 허위 자백서를 작성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며 변호를 포기한 동료 테리와 달리, 그녀는 자신이 믿는 원칙과 신념을 다시 한번 붙잡는다. 낸시는 모든 사람에게 사법 정의는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다시 한번 슬라히를 접견하고 그에게 진실을 말할, 정의를 바로잡을 기회를 준다.
코우치 중령은 두 사람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달리 말해 살라히의 신에 대한 믿음과 낸시의 사법 정신에 대한 신념의 접점이다. 그는 9.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의 남쪽 타워를 들이받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친구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살라히를 기소해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관타나모의 실상을 깨달은 후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러던 그는 끝내 교회를 찾은 후에 마음을 정한다. 정의를 추구하고, 무고한 이들을 도우라는 신의 말씀에 응답한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동시에 개신교인으로서 슬라히를 기소할 수 없다고 결단을 내린 뒤, 군복을 벗는다. 이렇게 개인의 믿음과 신념은 비록 그 대상과 방식은 다를지언정 정의를 바로잡는 초석이 된다.
이처럼 개인의 종교적 믿음과 신념을 전면에 내세운 스토리텔링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야기에 감정적인 면을 북돋아 준다. 특히 신에게 호소하는 슬라히, 미국의 법과 헌법을 굳게 믿는 낸시, 신의 가르침과 헌법 정신의 공통점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코치 중령의 모습이 한 데 응축된 것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법정 장면이 백미다. 8년 만에 서게 된 재판장에서 살라히는 그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일은 큰 충격이었지만 미국이 저지른 범죄를 자신이 용서했기에 자신은 자유라고 주장한다. 신의 가르침대로 아랍어로 자유와 용서는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또 법정과 판사의 결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미국의 법정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법의 정의를 실현할 것이기 때문에, 법정에서의 선고는 그에게 신의 뜻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살라히가 무고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할 기회도 준다는 점에서 더욱 호소력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를 탄생시킨 테러와의 전쟁 및 미국과 중동 지역의 외교적 분쟁은 역사적, 정치외교적 뇌관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폭탄임이 분명하다. 영국의 식민통치, 유대인의 이주, 4번의 중동전쟁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테러단체의 활동,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과 그로 인한 반미 감정이 한 데 어우러진 결과다. 이러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는 흔히 이슬람교와 기독교라는 두 세계 종교의 충돌이라는 피상적인 그림 밑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두 종교의 신이 알려준 가르침과 미국 법정의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모리타니안>의 메시지는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 종교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두꺼운 물감에 가려진 밑그림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편 영화의 두 플롯 중 나머지 하나는 낸시와 코우치 중령을 대조시키며 신에 대한 믿음, 그에 못지않은 법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고 필요한 경우 과감히 꺾을 줄 아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낸시는 철저히 공적인 가치와 원칙에 입각해서 재판을 준비한다. 애초에 슬라히의 재판을 맡기로 한 것도 프로보노 활동의 일환이었던 만큼, 그녀에게 이 사건은 단지 무너진 법치주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낸시는 어머니에게 전화해달라는 슬라히의 요청을 연민과 동정심을 자아내려는 피고인의 전략으로 취급할 정도로 슬라히에게 인간적이고 사적인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다.
반면에 코우치 중령에게 슬라히 사건은 일, 업무, 국가적 차원의 사건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이번 사건은 무죄 추정의 원칙과는 별개로 절대 틀릴 수 없는 사건이다. 실제로 슬라히의 재판에 투입된 직후 그는 가장 먼저 죽은 친구의 아내를 찾아가 범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낸시와 코우치가 관타나모 수용소 휴게소에서 만난 장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코우치 중령은 그녀가 미국의 적을 옹호한다고 비꼬며 이길 수 없는 재판을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에 낸시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변호사라고 비난받는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슬라히는 아직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면서 미국의 사법 제도가 허점이 존재했다면 어떡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이처럼 사적인 분노와 적개심과 공적 가치에 입각한 질문과 대답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사건에 인위적이면서도 강력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 동시에 상당히 인상적인 연출을 통해 그들의 신념과 원칙을 한 번에 무너뜨리면서 그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작중 과거와 현재 장면은 각각 1.33:1과 2.35:1의 다른 화면비율로 표현되는데, 두 주인공이 관타나모의 진상을 알게 되는 상황에서는 두 화면이 겹쳐져서 나타나며 그들이 받은 충격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다.
이는 둘이 슬라히의 사건을 대하는 자세가 180도로 달라지는 것에 대해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제 낸시는 살라히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수모와 고통을 한 인간으로서 보듬어주려고 하고, 반대로 코우치 중령은 모든 개인적인 원한을 뒤로한 채 공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이렇게 <모리타니안>은 상황에 따라 추구하는 정의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꺾을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되는 아이러니를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제시하며 인권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다만 사건의 진상과 해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범생처럼 훑고 지나가는 정공법을 취해서인지 영화는 간과하기 어려운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관타나모 수용소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자행되었는지가 세상에 알려진 지도 오래된 상황에서 과연 잔혹한 고문 기법을 그리 세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물고문과 성고문을 비롯해 시청각을 괴롭혀 잠을 못 자게 하고, 슬라히의 어머니를 납치한 후 강간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말로만 들어도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만한 고문을 연달아 보여준다.
이는 고문 장면이 그렇게까지 세세하지 않아도 진상을 깨달은 낸시와 코우치 중령의 충격, 슬라히가 겪어온 고통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연출로 보인다. 슬라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의 이야기가 잊힐 정도로 분량이나 비중 배분에 있어서도 아쉬움을 남기며, 상당히 긴 시간 동안 해당 장면이 지속되다 보니 피로감이 누적되어 그 충격이 갈수록 약해지는 역효과도 낳는다. 그 결과 <모리타니안>은 배우들의 연기, 작품의 메시지, 연출과 편집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강렬한 임팩트를 스스로 깎아내리며,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작품, 영국 작품, 각색, 남우주연, 촬영상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 아쉬운 완성도로 관객을 마주한다.
A(Acceptable, 무난함)
때때로 불편하지만 성공적으로 진중하게 재현된 인권 탄압과 정의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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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몇배는 더 잔인하다! 반전 또 반전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에취한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allwey01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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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경이 보여주는 멀티버스 액션! 이렇게 기발한 방법이 있었다니!!
?Rabbitgumi 입니다!
양자경 주연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개봉했어요.
멀티버스를 다루는 무척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주인공 에블린이 다른 우주와 연결하면서 보게 되는 다양한 다른 버전의 자신을 보는 장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요.
마치 인생의 갈래길에서 다른 선택을 한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죠.
다양한 가능성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액션도 좋고, 영화의 유머도 꽤 타율이 높아요.
무엇보다 예측가능하지 않으면서 묘하게 설득되는 이야기 전개가 무척 훌륭합니다.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배우 양자경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겠죠.
무척 따뜻한 가족 영화로 볼 수도 있어요.
이 영화 궁금하시죠?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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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 굿 맨> 메인 예고편
조용한 섬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는 ‘벤자민’과 ‘오드’는
서로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6년 차 연인이다.
가정을 꾸리고 싶은 두 사람은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드’가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벤자민’은 그런 ‘오드’를 대신해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는데…
세상의 편견과 고정관념에 맞서는
용기 있는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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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뮌헨 : 전쟁의 문턱에서> 공식 예고편
로버트 해리스가 집필하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원작의 영화. 1938년 가을, 전쟁의 위기에 내몰린 유럽. 아돌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준비하고,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는 중이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뮌헨으로 향하는 영국 공무원 휴 레것과 독일 외교관 파울 폰 하르트만. 협상이 개시되자 두 오랜 대학 친구는 자신들이 얽히고설킨 정치적 음모와 거대한 위협의 정중앙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 대가는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