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09 21:07:05
나부끼는 번민의 돌파구
영화 <하얼빈> 리뷰
SYNOPSIS.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안중근이 이끄는 독립군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인 일본인들을 풀어주게 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 사이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1년 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안중근을 비롯해 우덕순, 김상현, 공부인, 최재형, 이창섭 등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마음을 함께하는 이들이 모이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과 독립군들은 하얼빈으로 향하고, 내부에서 새어 나간 이들의 작전 내용을 입수한 일본군들의 추격이 시작되는데…
하얼빈을 향한 단 하나의 목표, 늙은 늑대를 처단하라
POINT.
✔️ <남산의 부장들>에 이어, 역사적 순간을 담아낸 영화 타율이 좋은 우민호 감독의 작품
✔️ <기생충>으로도 잘 알려진 홍경표 촬영감독의 미학이 빛나는 작품
✔️ 이미 여러 차례 다루어진 만큼, 안중근의 거사 자체를 조망하기보다 안중근의 내면에 집중했으며, 어마어마한 로케이션과 어우러지는 비장미가 있는 작품
✔️ 많은 배우들의 합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어요

연기 아른거리는 회화 속에서
영화는 초장부터 기존의 안중근 서사와 다른 길을 갈 것임을 명확히 한다.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독립 운동가들의 회동 모습은 마치 바로크 회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며, 안중근 서사 하면 기대하는 역동적인 스펙타클 대신 담배 연기처럼 아스라한 의심의 기운이 감돈다. 그러나 이 무드야말로 실제 독립운동의 무드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독립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을 아는 미래가 아닌, 과연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지, 미래가 있다 한들 거기에 내 자리는 있을지 회의감과 번민 속 현재에서 걸어간 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밀정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으며, 안중근이 나타난다. 흔히 결의에 찬 장면으로 묘사되는 단지(斷指)의 순간으로 걸어들어온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의 순간조차 안중근이라는 인물 한 사람에게 확신에 찬 핀 조명을 쏘는 대신, 유령 혹은 그림자처럼 아른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그림자를 그 주변에 둘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방점을 찍은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던 1908년에서 1909년이었으니까. 의구심과 자괴감, 갈등과 번민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정서는 빛 아래 있어도 그림자였다. 극중 가장 역동적이라 할 수 있는 전투 장면조차 승리 혹은 패배를 강조하기보다 처절한 아비규환을 그리고 있다.
그 지옥도에서 안중근이 택하는 길은 만민공법을 지키고 스스로가 대한의 참모중장임을 잊지 않는 것, 다시 말해 그의 내면과 신념을 지키는 길이었다. 탄환을 명중시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순간의 카타르시스로 극을 빠르게 전환시키는 대신, 영화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고뇌가 때로는 고꾸라지고 때로는 맞아떨어지는 길을 담는다. 주변 인물들과 때로는 합심하고 때로는 불화하면서, 안중근은 (실제 역사에서는 '동양평화론'이 될) 그의 길을 간다.

각지고 막힌 상자 속에서
반면 확신에 찬 인물이 있다. 릴리 프랭키가 분한 이토 히로부미는 시종 확신에 차 있다. 실제 역사에서 1-2년 후에 이루어질 경술국치(1910.08.29)를 앞두고, 단상에 서서 담담한 말투로 한일 병합을 말한다.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온 나라"에서 은혜 입은 것도 없는 백성들이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는 말조차 담담하게 내뱉는다.
그의 공간은 하나 같이 각지고 막혀 있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네모 반듯한 귀족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똑같은 뒤통수는 똑같이 수그려지고, 이동할 때에도 그의 자리는 사방이 틀어막힌 기차 칸이다. 러시아 공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차 칸도 바깥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의심과 번민으로 흔들리는 독립운동가들의 기차와 달리, 확신으로 감싸인 공간에서 그는 남의 인생을 손발 삼아 움직이며 덤덤히 침탈의 길을 간다.

이는 얼어 붙은 두만강이나 숲이나 너른 사막으로 표상되는 안중근의 공간, 그림자와 연기가 아른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그림 같은 공간과 대조적이다. 이 공간적인 대비는 마치 확신이 꼭 옳은가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가는 침탈의 길에 확신을 가진 이토 히로부미와, 끝없는 번민으로 내면의 두레박을 길어 올리는 안중근, 그리고 유령처럼 서성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마음. 안중근이 내면으로 던져 올린 두레박은 영화 마지막에 기어코 마중물을 길어 올렸고, 유령처럼 서성거리는 인물들은 죽음 이후에도 유령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는 아우라를 남겼다. 하지만 확신은 총탄에 스러진다.

푸른 꿈과 시린 번민으로 열린 공간에서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이 시국'에 잘 어우러진다며 여러 차례 회자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언제나 절망의 뒤편에 희망이 있다는 것, 이제는 진부한 문장이지만 빛은 그림자와 함께 도드라진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다시 내년에 도모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채로, 독립의 실낱 같은 가능성을 바라보는 괴롭고 지난한 길. 신뢰와 의심을 동시에 품고,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즉각적인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그 길을 걷는 한 인간의 고뇌. 영화는 안중근의 거사까지 직진하여 가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회전하며 주변 인물들을 에두르는 고뇌의 그림자를 품는다. 총알이 날아가는 모양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지난한 길을 갔을 사람들의 마음을 어렴풋하게 가늠해 보게 만든다.

그리고 이 마음은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보편적이다. 희망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두 다리를 걷어붙이고 진창에 서야 하기에. 푸른 꿈은 언제나 곱고 예쁜 자리에만 있지 않다. 그 색깔은 시린 번민의 색깔과 맞붙어 있다. 희망과 절망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빛과 그림자가 언제나 등을 붙이고 있듯이. 그 자리는 안중근의 공간들처럼 탁 트여 있다.
희망에 꽉 막힌 확신 같은 건 없지만, 가능성은 사방으로 트여 있지만, 그림자처럼 담배 연기처럼 나부끼지만, 이 번민을 인정하고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광장 또한, 탁 트인 곳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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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발한 설정을 진지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잊을 때가 있다. 무언가 이루고 싶다는 의지와 집념은 그것에 몰입하게 만들지만 그 사이에 나라는 자아는 잠시 감춰진다. 어쩌면 그건 몰입이 선사하는 멋진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그것에 심취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게 되기도 한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 속에서 그래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만드는 건, 그렇게 강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고, 또 무언가가 되고 싶어 그것을 이루기 위한 무언가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그 의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의지와 집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모두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원하는 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잊은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한 남자가 망가진 차 옆에서 깨면서 시작한다. 자신이 누군지 왜 그렇게 부상을 당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향하고 이름을 확인하지만 밤 12시가 되자 다른 사람의 몸에서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다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작은 단서들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맨 처음 깨어났을 때 옆에 있던 노숙자(박지환)가 그 첫 단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강이안(윤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문진아(임지연)라는 여자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잃어버린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의 이야기, <유체이탈자>
강이안은 12시간마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깨어난다. 영화는 그의 정신이 왜 이렇게 다른 사람 사이에서 옮겨 다니는지는 영화 후반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또한 강이안이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정보를 제한적으로 제시하면서 관객들이 영화 속 주인공과 똑같은 시점으로 영화를 따라가게 만든다. 가장 처음 알게 되는 건, 주인공의 의지다. 그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한다. 영화의 첫 목격자인 노숙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이 알아놓은 정보를 저장하고 반복해서 따라가는 등, 그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가 가진 의지는 이 영화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이자 동력이다.
영화 속에서 강이안의 얼굴은 사실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몸에서 정신을 차린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하는 건 자신의 얼굴이다. 얼굴을 보며 자신이 어느 위치의 사람에게 들어왔는지를 확인하고 주변을 살핀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처럼 그 몸의 인물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당황스러운 모습은 영화 초반을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다. 그래서 꽤 세세하게 그가 몸과 얼굴을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강이안의 모습으로 영화가 진행되지만 거울 속의 모습이나 간간히 강이안이 들어간 몸의 모습도 비친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의 모습을 모르지만 관객은 그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강이안의 기억을 찾는데 핵심 역할을 하는 문진아는 과거에 강이안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인물이지만 실제로 기억을 찾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강이안이 끝까지 의지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게 만드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노숙자는 사실 초반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강이안을 돕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후반부에는 노숙자와 강이안의 버디 무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노숙자는 영화 속에서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름이 없는 사람과 몸이 없는 사람이 같이 힘을 합쳐 자기 자신을 찾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주연을 맡은 배우 윤계상은 혼란스러워하는 강이안의 모습을 잘 담아냈고, 그가 가진 액션 능력을 이 영화에서 한껏 보여주고 있다. 좁은 곳에서 벌어지는 근거리 격투나 권총 액션은 꽤 현란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다양한 인물들과 벌이는 근접 액션 장면이 영화 마지막까지 이어지면서 끝까지 영화적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문진아 역을 맡은 배우 임지연도 꽤 과격하고 빠른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총 7명의 인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표정을 연기에 반영했다. 실제로 촬영 시 다른 배우들과 한 달 넘게 사소한 행동까지 맞추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단점을 상쇄하는 흥미로운 설정과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에서 빌런 박실장(박용우)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도 인상적이다. 박 실장은 사실 초반에는 진짜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은 누아르나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빌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너무 전형적으로 많이 보아왔던 악당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은 있지만 영화적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로는 충분하다. 그가 웃음을 짓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그의 다음 행동이 어디까지 갈지 한계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는 영화에 긴장감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영화 속 강이안은 자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의지로 자신의 몸과 기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과거에 해왔던 모든 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었지만 과거에 가지고 있던 의지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결국 그것이 강이안을 끝까지 버티게 만들고 7명의 인물들의 몸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게 만든다. 어쩌면 그 의지가 누군가에게는 그가 강이안이라는 것을 알아채게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그가 가진 의지는 영화 초반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마리를 하나씩 찾게 만들고 조각조각 모은 퍼즐 같은 단서들을 조합하여 결국에는 그 일의 원인과 자신을 찾게 만든다.
영화 <유체이탈자>는 꽤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유체를 이탈한 자가 다른 사람의 몸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는 설정은 그동안 보아왔던 기억상실증 서사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더 붙인 것이다. 아주 단순하고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지만 진행되는 영화적 공간과 인물을 한정적으로 제시하고 그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관객과 퍼즐을 맞춰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흥미로운 액션 스릴러다. 영화에는 총기 액션, 격투액션, 카 체이싱 등 다양한 액션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포함하고 있다. 특히나 강이안의 몸이 바뀔 때, 주변 환경이 바뀌는 모습은 모션 컨트롤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되었는데 꽤 색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유체이탈자>는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기반하고 있지만 인물들 간에 이동하며 벌어지는 상황들이 다소 작위적이고, 새로운 인물로 이동될 때마다 벌어지는 일들이 반복되면서 다소 루즈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또한 주인공이 단서를 알게 되는 순간마다 운이 많이 따르기도 해 설득력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최근에 등장한 한국 액션 스릴러 영화 중에서 꽤 신선하고 긴장감의 밀도도 높다. 또한 신선한 설정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주인공 강이안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 영화는 다양한 액션과 함께 이야기의 반전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극장에서 관람할 때 몰입감을 주게 된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라면 극장에서 관람 시 만족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유체이탈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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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브리 정주행 특집 ③] 코쿠리코 언덕에서 (From Up on Poppy Hill, 2011)
- 지브리 정주행 특집 세번째 영화 -
"오래 됐다고 없애는 건 과거의 기억을 버리는 거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걸 무시하는 거라고!"
코쿠리코 언덕에서, 2011
과거에 남겨져있는 우리들의 낭만을 위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낭만으로 기억되는 걸까?
<코쿠리코 언덕에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Synopsis
바닷가 마을, 코쿠리코 언덕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우미'는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매일 깃발을 올린다.
그리고 '슌'은 매일 아침 등교하는 배에서 언덕 위 깃발을 바라보며 답신을 하듯 따라 깃발을 올린다.
한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에서는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학교에서는 낡은 동아리 건물의 철거 명령이 내려오고, 우미와 슌 그리고 학생들은 역사와 추억이 담긴 동아리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운동을 벌이고 청소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우미와 슌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가던 중, 우연히 우미의 사진첩을 보다가 서로의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감정을 이대로 계속 키워가도 좋을지, 고민하고 혼란에 빠진다.
▶ Review
1. 우리들이 사랑했던 그때 그 선배...?
개인적으로는 <귀를 기울이면>의 세이지보다 이 작품 속 슌이 첫사랑의 이미지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기 많은 선배 st...
학교 동아리 건물에서 필사를 하다가 우미를 돌아보는 장면이랑 롤러로 드사판을 밀어 신문을 복사하는 장면은 첫사랑 기억을 조작하기 충분했다.
2.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꾸는 우리들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낡고 오래된 동아리 건물!
학교 이사장은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데,
깨어있는 학생들은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미래도 있다며 철거 반대 운동을 한다.
나는 일상에서 등장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배경도 인물도 전부 현실적인데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들.
예를 들면 아주 운명적인 인연이라던가... 아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사는 집이라던가...
이 작품에서는 이 동아리 건물과 동아리부 학생들이 그랬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동아리 활동에 임하지 않았고
그저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또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 정도에 불과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에 아주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동아리 건물도 다닥다닥 상점마냥 붙어서는 각각의 특성을 자랑하는 게 꽤 매력적이었다.
철거를 반대하기 위해 다같이 애정을 가지고 힘을 모아 동아리 건물을 청소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꽤 판타지스럽게 다가왔다.
어떤 일이든 어떤 분야든 열정을 가지고 빠져드는 건 너무나 매력적인 것 같다.
그리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좋았다.
겉으로 보기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우리는 항상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때 각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
3. 막장 아닌 막장? 그때라서 그럴 수 있었던 오해들
이 작품에서는 막장 아닌 막장 요소가 나오는데, 바로 막장드라마의 단골 요소인 '이복남매' 설정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이복남매가 아니었는데
항해를 하다 죽은 친구를 위해 친구의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된 데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건지는 몰라도 우미와 슌 두 사람 굉장히 닮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예전에는 아이가 바뀌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고,
친구들이나 이웃끼리 교류가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을 생각했을 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히)한국인에게는 굉장히 익숙하고 진부한 설정인지라 보면서 읭??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아버지 세대의 세 사람의 우정은 보기 좋았다.
p.s 사실 보면서 읭??하게 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잠깐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우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문에 죽은 피해자로 나오는데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단 한 마디 대사일 뿐이고 그 이상의 언급이 없긴 했지만 보면서 이미 찝찝해진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 Best Quotes
1.
오래됐다고 없애는 건 과거의 기억을 버리는 거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걸 무시하는 거라고!
새로운 것에 매달려 역사를 무시하는 너희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지?
소수자 의견을 듣지 않는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어!
2.
내가 매일 깃발을 올리면서 아빠를 불렀기 때문에
아빠가, 아빠 대신...
선배님을 보내주셨다고 생각해요.
3.
-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나?
- 네! 10년간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 오호, 10년이라... 그래서 뭐 좀 알아냈나?
- 태양의 수명은 길고! 인간의 인생은 짧고!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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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영은 돌아와도 우리의 순간은 돌아오지 않아 ! "Carpe diem"
얼마 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재개봉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을, 현재를 마음껏 즐기라는 용기를 주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만나기 전, 처음 이 영화를 만나 가슴 설레던 순간을 돌이켜보며 리뷰를 적으리라 마음먹었다.
지하철에서 인상 깊은 한 광고를 보았다. ‘많은 전자기기와 책을 보는 탓에 우리나라 청소년 대부분이 근시안이다.’라며 안경 교정을 추천하는 광고였다. 시력이 약하여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아도 멀리 있는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컫는 근시. 나는 이 광고를 보고 근시안은 단지 시력을 말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 교육 체제 아래 우리 사회 청소년들은 당장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에 급급해 스스로 미래를 마음껏 상상해 볼 시간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잃어버린 시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의 모습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으나 점차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토드 앤더슨’,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늘 순종해왔지만, 이제는 스스로 꿈을 찾아가려는 ‘닐 페리’, 우연히 만난 소녀에게 빠져 사랑을 배우는 ‘녹스 오버스트리트’, 당차고 과감히 도전을 즐기는 ‘찰리 달튼’, 모범생이지만 현실적이고 기회주의적 면모를 가진 ‘리처드 카메론’까지 다양한 성향을 지닌 학생들이 등장한다. 뚜렷한 개성과 성향을 지닌 서로 다른 다섯 소년은 키팅 선생을 만나면서 내적 성장과 변화를 겪는다. 소년들이 다니는 웰튼 아카데미는 ‘헬(Hell)튼 아카데미’ 라고 불릴 정도로 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은 물론, 엄격한 규율과 통제를 내세우며 학생들의 아이비리그 진학을 목표로 하며, 앞서 소개한 다섯 소년 역시 의사, 법조인 등 부모님들이 원하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진로를 염두에 두고 입학한 학생들이다. 그러나 웰튼 아카데미의 우수 졸업생이었던 키팅은 웰튼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교육과는 달리 학생들에게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할 것을 권유한다. 그는 시라는 문학을 통해 학생들 내면에 잠재 되어있는 가능성을 일깨워주고,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모한다. 키팅 선생의 남다른 교육 방식은 영화의 초반부터 드러나는데, 첫 수업 시간, 키팅은 학생들에게 어떻게 시에 하나하나 점수를 매기고 평가할 수 있겠냐며 책의 서문 찢게 한다. 엄격한 교육과 교과서적인 틀 안에서 자라온 학생들은 책을 찢으라는 선생의 말에 당황하고 주저하며 쉽게 책에 손을 대지 못하지만, 이내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책을 찢어나가기 시작한다. 주저하던 학생들이 하나둘 직접 손으로 책을 찢어가는 해당 장면은 키팅 선생으로 인해 학생들이 점차 변화해 나갈 것을 암시함과 동시에 학생들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내딛는 첫 발걸음을 의미하는 듯 하고,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을 골라야 한다면, 두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첫 번째는 키팅 선생이 수업 시간에 시 발표를 주저하는 토드를 이끌고 앞으로 나가 내면에 있는 생각들을 자유로이 뱉을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다. 어느 날 숙제로 해온 시를 발표해오라는 말에 숙제를 하지 못했다며 자신이 써온 시를 감추려하는 토드의 모습을 본 키팅은 토드를 교탁 앞으로 데리고 나가 칠판 위에 걸린 사진을 보고 연상 되는 것들, 그냥 지금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것들을 주저 없이 말하게 하는데, 쉬이 시도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토드는 이내 키팅 선생의 적극적인 유도를 따라 떠오르는 생각들을 과감히 내뱉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소설『데미안』의 한 구절을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매사 소극적이고 주저하던 토드가 처음으로 스스로 한정 지었던 틀을 깨고 나와 더 큰 세상을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우물쭈물 조금씩 말을 내뱉다 키팅 선생의 열정적인 지도로 점차 과감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토드의 모습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도 하는 한편, 과거 인물과 같은 이유로무언가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아쉬운 기회들을 후회하게 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난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는 평소 토드의 이성적 자아와 그보다 더 깊은 내면에 묻어두었던 자유로운 상상들이 충돌해 소용돌이처럼 밖으로 뒤섞여 나오는 것이다. 이 장면을 담은 카메라의 앵글 또한 인상적인데, 빙글빙글 돌며 빠른 속도로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은 당황스러운 상황 속 자신조차도 처음 접하는 낯선 모습에 혼란스럽기도, 벅차기도 한 토드의 마음을 더욱 드러내는 듯 하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은 닐 페리의 죽음이다. 우여곡절 끝에 올린 연극이지만 그 무대조차도, 자신의 진심조차도 아버지에게 철저히 무시 당하자 닐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다. 그의 죽음은 내면이 엿보이는 차분하고도 온화한 표정과 함께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공연 전날 밤, 아버지의 말에 더 반박하지 않고 닐은 그저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이나 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닌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와 순종적인 미소에서는 자신의 환경 내에서는 스스로 결정하고 해나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낀 닐의 좌절과 체념,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와 상실이 느껴진다. 가족 모두가 잠든 사이 그는 아버지의 서랍 속에 숨겨져 있던 권총으로 서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죽음은 마치 안톤 체홉<갈매기>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킨다. 연극 <갈매기>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는 것을 택한 뜨레쁠레프는 그의 사망 장소가 서재였다는 점, 그 죽음이 자살이었던 점, 권총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닐의 죽음과 유사한 면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감독의 의도였을지,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러한 닐의 죽음은 비록 현실에서는 아버지로 인해 연극이라는 소중한 꿈에 다가가지 못했어도, 생의 마지막 순간만큼이라도 연극을 하고 싶었던 간절한 꿈을 이룬 것으로 보이며 그의 꿈을 향한 열망과, 꺾여진 희망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는 키팅을 바라보며 하나둘씩 책상 위로 올라가 그들만의 존경과 지지를 표한다.
아이들이 책상 위로 올라갈 때까지 로우 앵글(Low-angle)로 아이들의 하반신과 그 사이로 보이는 놀란 교장의 당혹한 표정을 담고 있던 카메라는 아이들이 모두 올라선 후 하이 앵글(High-angle angle)로 전환되어 책상 위에 올라선 소년들이 바라보는 키팅 선생의 모습을 비춘다. 이러한 구도는 소년들을 거대한 인물처럼 보이게 하며, 그들이 기존과는 다른 위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카메라는 다시 로우-앵글로 돌아와 키팅 선생의 시선에서 바라본 소년들의 모습을 담는데, 이것은 변화한 소년들과 그러한 소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키팅의 마음 또한 함께 깊이 느낄 수 있게 하며 그들의 관계성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관계성이 돋보인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교실에 있던 학생들 중 일부만이 토드의 행동에 함께 참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극 중 키팅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책상에 올라가지 않은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묵묵히 교과서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 점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었을 때, 새로운 사상에 찬성하고 따르는 쪽이 있다면 그에 반대하는 쪽 역시 존재함을, 새로운 사상에 동의하지만 행여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두려워 동조하지 못하는 다수 또한 있음을 생각하게 만들며 우리 사회를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부모와 학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이들이 서명하도록 강요하는 교장, 가부장적인 가정과 사회적 격차 등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우리의 양심에 손을 얹어보게 하는, 깊은 생각에 빠지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교사와 학교,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정말 누려야 하는 건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왜 사는가?’.
그리고 외친다. “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걱정하는 대신 용감하게 하고 싶은 꿈들을 펼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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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결국 누구보다도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스즈코
스즈코가 처한 상황, 하루 아침에 범죄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의 대상이 된 상황은 스즈코도 스즈코 인생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본인이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살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건은 터져버렸고, 그 이후의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옛 동창들의 왕따는 스즈코가 감당해야만 하는 문제들이었고, 스즈코도 감옥에서 나와서 텅 빈 거리를 걸으면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고민하며 노래를 불렀던 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착잡한 마음에 대비되게끔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스즈코는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백 만엔을 열심히 벌어낸다. 스즈코에게 그 당시는 도피라는 키워드는 생존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동네를 벗어나야 내가 산다"는 마음이었겠지. 그리고 백만엔 이 모일 때마다 도망쳐온 바다, 산골, 도시 그 어느 곳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바닷가에서 만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에게서는 극강의 철벽을 시전하고, 산골에서도 자신의 상처에 얽매여 살고 있는 그녀에게 좁디 좁은 산골 사회가 표출하는 공격성 때문에 그녀는 더 움츠러들게 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적응"을 하지 못한다. 백 만엔은 "나는 그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 없는 범죄자입니다. 나를 깊이 알아갈수록 당신은 날 혐오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스즈코의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밝게 살아가려고 하는 스즈코의 인생 목적이자 자기 혐오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잘못 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부정적인 세상의 시선에 굴복하는 스즈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스즈코는 그 누구와도 친해지지 않은 채, 혼자 세상을 맴돌며 가족에게까지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는데, 스즈코의 동생은 스즈코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왕따의 피해자로 현실을 도망가고 싶어하는 동생은 스즈코를 자신의 암울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동창에게 놀림 받고 있는 스즈코가 당당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동생에게 인상적으로 남겨졌기 때문인데, 동생의 인식과는 달리 스즈코는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동생이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동생은 답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계속 살아가보겠다는 결심을 담은 편지를 스즈코에게 전달함으로써 스즈코와는 다른 선택을 했음을 보여준다. 관객 입장에서는 둘 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둘 다 서로가 더 나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설정은 꽤나 흥미롭다. 거지 같은 현실에서 도망친 여자, 그 현실을 그대로 감내하고 있는 동생, 은근히 비교가 되면서 보고 있으면 애잔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표면적 진실 말고 그 이면을 보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 말들은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고,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단지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 나와 관련없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평가내리는 모습들을 제대로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비판하기에는 내 마음이 콕콕 찔리는 이유는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까.
스즈코의 남자 친구는 스즈코의 내면에 깊이 자리한 정착 욕구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다. 남자 친구의 거짓말만 아니었더라면 스즈코는 계속 남자 친구 곁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앞서 등장한 두 장소에서의 떠돌이 생활과 그로 겪게된 오해와 편견들로 지칠대로 지친 스즈코에게 제 때에 나타난 사람이었는데, 스즈코가 백만 엔을 다 모아 떠나갈까 두려워 돈을 빌리며 오해를 사기 충분한 행동을 한다. 이는 스즈코가 떠나려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이 남자는 스즈코를 붙잡으려다 오히려 스즈코를 떠나보낸 것이다. 머리를 잘 못 쓴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냥 솔직히 "백만엔이 모여도 나를 봐서라도 떠나지 말라"그 말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나 답답했었다. 하지만 이런 계기가 있었기에 스즈코는 자신이 굉장히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동생보다도 더 성숙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모든 고통에는 좋은 대가도 함께 온다. 이유없이 지나가는 고통은 없는 것이다.
영화는 열린 결말인데, 나는 스즈코의 마지막 대사와 독백 대사들로 보건대 스즈코는 남자 친구와 재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걸어나갈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시 떠나간 곳에서는 계속 지금까지 살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상황, 상처에 정면 돌파하는 용기 있는 모습, "나는 잘 못 한 것이 없어"라며 당당한 태도를 가지고 살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 때문에 상처받은 스즈코가 자신에게 내려야 할 처방은 떠돌이 생활이 아니라 어쩌라고 식의 마이웨이의 당당한 마인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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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된 꿈의 자유: ‘미몽’ 속 신여성의 비극
출처 : 나무위키
억압과 통제로 얼룩진 시대 속, 한 여성이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게 삶의 방향을 선택하려는 순간,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가 아닌 사회적 낙인이었다. 영화 미몽은 그러한 여정을 그린다.
진취적으로 자신의 길을 모색하려는 애순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선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 소위 ‘신여성’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명칭은 환호가 아닌 불편함과 경계의 시선 속에 만들어진 낙인이었음을 알게된다.
제목 미몽(迷夢)은 ‘헛된 꿈’이라는 뜻으로, 애순의 자율적인 삶의 추구가 사회에 의해 ‘잘못된 욕망’으로 규정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그리고 부제 ‘죽음의 자장가’는 신여성의 가능성과 희망을 품은 이 이야기가 결국 비극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암시한다.
애순은 사랑을 좇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은 '도덕'이라는 이름의 경계선 너머로 규정되고, '자유'는 곧 '방탕'으로 해석된다. 사회는 그녀를 이상과 비난 사이의 어딘가, 정의되지 않은 자리에 밀어 넣어 자유를 향한 그녀의 몸짓은 곧 사회적 틀에 다시금 갇혀버리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영화 속 ‘새장 속의 새’는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날고자 했지만, 어디론가 갈 수 없었던 그녀와 새는 결국 다시 철창 속에 안긴다. 겉으로는 보호받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자유를 빼앗긴 채 갇혀 있는 존재. 이는 곧 애순의 처지이자 당시 신여성으로 일컬어졌던 수많은 여성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새장 속에 갇힌 순간, 그 자유는 존재하되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 전락하는 새와 같이 애순 역시 자율적인 삶을 꿈꾸며 사회의 벽을 넘어서려 하나, 그녀를 둘러싼 도덕과 규범이라는 철창은 그녀의 날갯짓을 끝내 허공에 머물게 만들어버렸다. 즉, 그녀가 느끼는 자유의 감각은 철창 너머 펼쳐진 허상일 뿐,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이다.
애순은 순간순간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지만, 그 모든 선택은 사회의 금조 속에서 철저히 제한되고 있었고,결국 그녀는 날 수 있는 새이되 날지 못하는 새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고로 끝나는 결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신여성의 꿈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냉혹한 메시지다. 그것은 경고이자 거부였다. 애순의 죽음은 그녀 개인의 비극이기보다 여성의 자율성과 가능성에 눈감은 시대의 비극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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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물방울로 그린 세월의 흔적들
이 모든 게 끝이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끝이 있다는 말.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는 막연함은 참 답답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데 명확한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끝이 있다는 것.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건가 봐'라고 썼던 글 한 편이 생각난다. 좋은 것 맞나? 그렇게 마지막 날이 오면 세상을 이해할 날이 올까? 일단 내가 '작가님' 소리 듣고 싶어 벌였던 오만 짓이 생각났다. 그리고 사회복무요원 생활 동안 왜 키보드를 놓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런 것들은 이해하고 말고 가 없다. 그냥 내가 그런 삶을 사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벌이는 일이다.
문득 이런 나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띠리리링. "이 작가의 이상향은 이동진 평론가지만 현실은 그냥 한국의 씨네필 중 하나일 뿐입니다" 라는 문장을 내 마음 안에서 짓는다. 아니거든! 나 그래도 원고료도 받아보고 방송도 나와보고 조회수도 잘 나오거든! 시나리오 봐달라는 메일 온 적도 있거든! 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나는 이미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어차피 남의 시선(들)중 하나 아닌가? 뭔가를 써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결국 중요했던 건 '나 자신이 왜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서는 못 베기나'에 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나도 모를 동기부여에 탐구하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여기 두 예술가가 영화로, 각자의 마음 안에 들어온 구멍 하나를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와 지난한 세월이라는 구멍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다.
전설적인 아티스트
1929년. 김창열 화백은 그 해에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치하. 어린 시절 서예를 비롯한 미술을 배우며 보냈던 유년기. 화백이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전공했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랐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벗어났던 일제의 수탈을 뒤로하고, 한국전쟁까지 겪었다. 곯고 곯은 김 화백. 그렇게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겪으며 방황하던 화백은 서울과 제주,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다. 동료 예술가 백남준과 시간을 보내다 캔버스 뒤편에 맺힌 물방울을 보게 된다.
그렇게 50여 년의 화가 인생을 물방울에 투영하는 김창열 화백. 197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데 도화선이 됐다. 백남준과 함께 한국의 현대미술을 이끄는 트렌드세터가 된 김창열 화백. 예술가로서 입지전적인 명성을 얻은 그지만 그의 내면은 복잡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왜 물방울을 고집했는지, 노자를 신봉하면서도 예술가적인 명성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좋고 밝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아버지가 아닌 달마대사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인물이었는지 등등. 아들 김오안 감독은 아버지가 견뎌내야만 했던 삶의 지난함 들을 탐구해보고자 했다.
재미있는 영화
난 다큐멘터리를 별로 안 좋아했다. 어렸을 때 투니버스 볼 시간도 없는데 다큐멘터리 볼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런데 엄마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종종 보곤 했었다. "엄마~ 돌리면 안 돼요?" 징징댔던 나. 그리고 거의 20여 년이 지난다. 20대 중반이 된 나. 역시 나이가 들면 취향은 바뀌는 것일까? 이제는 다큐멘터리에 무덤덤해졌다. 잔잔한 것들도 곧잘 봐서 그런가 싶었다. 나에게 여전히 다큐멘터리는 그냥 잔잔한 영화 장르에 가깝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잔잔하지 않다. 잔잔하지 않다고 느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시각효과 구성이 좋았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돌이켜보는 아들의 시각이다. 당연히 부친 김창열 화백이 화가니까 그의 작품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 장르마다 변환에 효과를 부여한 시각적 쾌감이 대단하다. 어떤 시퀀스에 그림이 연속적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굉장하다. 영화에서 제시된 그의 삶을 스르륵 돌아보면서, 굉장히 많은 물방울의 수가 지나간다. 그럼 아련해진다. 아버지가 지나왔던 삶에 아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느껴진다. 이렇게 이 영화에서 물방울 그림을 다시 구조화시키는 방식은 굉장히 탁월한 리메이크 노래를 듣는 느낌이다. 한 장르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이와 살짝 다른 지점이지만 '왜 아버지(김창열 화백)는 물방울을 그리는 데에 집중했을까?'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김 화백의 아버지가 갖고 있는 과거를 중심으로 전개해야 한다. 그거랑 관련이 있으니까. 감독은 어떤 장면과 나레이션으로 이를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에세이를 읽으면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이 시퀀스는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것까지 다 계산한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이 이유를 듣고 나면 김 화백의 그림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적으로 아버지를 소재로 했지만 왜 김오안 감독의 작품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시퀀스였다. 이는 김창열 화백의 자의식 탐구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오는 영상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장르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잘 뽑아낸 셈이다.
두 번째. 장면마다 촬영을 잘했다. 김창열 화백 얼굴 나타나는 클로즈업. 눈 오는 설산. 화백이 자 그리고 선 찍 긋는 장면. 이런 장면 하나하나 구도도 잘 잡았고 색감도 예뻤다. 이 영화가 눈이 심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영상미의 아름다움도 한몫했다. 이 영상미는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심오하게 들릴 수 있는 한 인물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딱딱 이해가게 배치한 좋은 연출 방식이다. 영화를 보면서 신기했던 것이, 과거의 뉴스 자료를 갖고 온 방식이었다. 아니 2022년에 보는 데도 어제 찍은 것 같은 동영상들이었다. 이런 거 어떻게 가져왔대? 또 앞 두 가지와는 좀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스릴러, 코미디 장르가 연상되는 장면도 영화 곳곳에 있으니 감독님이 영화를 많이 보신 것 같은 느낌이다.
깊은 자의식을 들여보다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어두우면 작품이 쉽게 나온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극단적으로 활용한 것이 아마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일 것이다. 이 감독의 영화를 보며 느낀 건 '생각 많아서 짜증 나겠다'였다. 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 자기의 혼을 드러내는 거겠지. 비단 라스 폰 트리에뿐만 아니라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속할 수도 있다. 첫사랑이라 서투를 수밖에 없었던 것(<박쥐>), 모성애의 방향에 대한 탐구(<마더>) 둘 다 어두운 감정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다. 이것 역시 어두운 내면을 소재로 삼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
예술가에게 있어 소재란 무궁무진하다. 온갖 것을 가지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으면 예술가다. 영화는 이 예술가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직업적 특징을 다뤘다. 아버지가 겪어온 어둠은 무엇인지, 그럼에도 아버지가 추구했던 즐거움이 무엇이었는지, 그 삶이 남기고 간 건 무엇인지 등등을 탐구하며 아버지가 예술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추론하며 제시한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앞에서도 썼듯 이것은 아들 김오안 감독의 영화다. 이 영화에는 김오안이라는 예술가가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 도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인 메타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굉장히 신선하고 독창적이다. 영화가 전해주는 시각적 재미 중 하나가 여기에서도 온다고 생각한다. '엥? 이게 영화가 되네? 그리고 꽤 잘 만들었네?' 싶은 것이다. 이런 예술가적 창의성은 관객에게 영향을 주기 충분하다. 비단 내가 지금 쓰는 글도 한 종류의 예술이다. 이런 걸 좋아하고 한 30대가 되고 나서도 하고 싶은 나의 입장으로서도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법론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는 그래서 다른 분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다. 상영관에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다음 주 금요일 14일에 VOD로 출시된다고 하는 것 같다. 뭔가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시는 분들은 이 영화의 방법론이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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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도저에 탄 소녀 리뷰 - 무엇이 그녀를 불도저에 태웠는가 (스포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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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현실 폭주 드라마
‘불도저에 탄 소녀’는 갑작스런 아빠의 사고와 살 곳마저 빼앗긴 채 어린 동생과 내몰린 19살의 혜영이 자꾸 건드리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폭발하는 현실 폭주 드라마다.
드라마 ‘SKY캐슬’, ‘어쩌다 발견한 하루’에서 강단과 순수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며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 김혜윤이 장편영화 첫 주연을 맡아 한쪽 팔에 용 문신을 하고 거침없이 내달리는 유일무이한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한다. 실제로 김혜윤은 직접 불도저를 다루며 혜영 역할을 위해 뜨거운 에너지를 쏟아 부어 인물의 들끓는 내면을 온몸으로 표출해 열정을 불태웠다.
개성파 연기자 배우 박혁권과 영화 ‘범죄와의 전쟁’ 드라마 ‘경찰수업’, ‘쌍갑포차’ 등의 오만석 배우, 또한 가수이자 배우로 활동 중인 예성이 출연해 극의 완성도를 더한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박이웅 감독의 데뷔작으로 사회를 향한 관점과 인물에 대한 시선으로 중장비를 끌고 관공서를 들이박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각본을 썼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현실성이 가진 이야기의 힘을 기반으로 현재를 가리키는 시의성을 더해 공감을 이끈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에서 선보여 평단과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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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쌓아올린 삶 어떤 이야기는 떠난 후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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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7일, 넷플릭스 공개]
전설이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