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5-01-09 18:55:12
토대를 잃지 않기
영화 <총을 든 스님> 리뷰
SYNOPSIS.
2006년의 부탄 왕국.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도착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민주주의다. 국왕이 자진해서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민주주의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정국가 부탄에서 역사상 첫 번째 선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투표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당국은 모의 선거를 마련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파란당, 빨간당, 노란당 선거로 인해 서로 반목하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선거 감독관은 마을의 존경을 받는 큰 스님이 총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POINT.
✔️ 건재한 왕이 직접 전제 왕권을 내려놓고 도입한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실화. "투표가 뭔데요? 우린 폐하가 좋은데?" 상태의 국민들 실화. 거기서 스님이 갑자기 총을 찾는다? 부탄이기에 가능한 매력적 시놉시스
✔️ 도르지 감독에게는 부탄 관광청이 상 줘야 하지 않을까? (어쩐지 부탄은 안 줄 것 같지만) 아름답게 펼쳐지는 부탄의 풍광에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하는 이유.
✔️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묻는, 이 시국에 알맞은 작품
✔️ 중간중간 짤막하게 나오는 아이들이 그야말로 신스틸러.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 새해 당신의 마음을 맑게 해줄 작품. 1월 1일에 개봉했습니다!

행복한 부탄에 찾아온 변화
부탄은 인도와 티베트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나라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국민행복지수'를 중요시하는 나라라고 오래 전 교과서 한귀퉁이에 소개된, 그래서 어쩐지 샴발라 같은 낙원의 이미지로 막연하게 그려질 만큼 잘 모르는 나라다. 나는 부탄 영화감독도 딱 한 명밖에 모른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몇 년 전 <교실 안의 야크>로 우리를 찾아왔던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이다.
파오 초이닝 도르지 감독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진 부탄은, 우리가 기존에 알던 부탄의 이미지처럼 맑고 청량했다. 루테인과 지아잔틴 섭취는 안 해도 될 것 같은,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과 거기 기대 사는 사람들의 면면을 부드럽게 그리기 때문이다. <교실 안의 야크>만 해도 야심만만하고 젊은 교사가 산간벽지 학교로 부임해 가면서 겪는 일들을 사랑스럽게 담았다. 그런데 차기작 제목에 총이 들어간다고요. 그것도 평화와 비폭력의 상징인 스님과 함께? 궁금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부탄은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놓여 있다.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당연스럽게 왕이 갖던 권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 상황 앞에서, 과연 선출은 무엇이고 투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부터 정립해야 한다. 선거 사무원들은 전세계가 주목할 상황 앞에 그럴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고자 지역을 두루 다니며 사람들에게 선거의 개념을 알리고 모의 선거를 치르고자 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넌센스한 상황들이 계속 펼쳐진다. 애초에 행정적인 이름과 생일이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선거 명부를 작성하는 것부터가 일이다.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력이 사람들을 크게 옭아맨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그 권력을 억지로 쪼개 경쟁을 붙여야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이 시간을 통해 무언가를 도모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투표를 하거나 말거나 자기 뱃속을 불리는 게 중요한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가 뭔데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큰스님의 "총을 구해 오라"는 발언일 것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결합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어서 그런가 우리는 좀더 세속적인 상상을 하게 되지만... 흠흠. 아무튼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영화 속 인물들이 보이는 각양각색의 반응은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피를 흘리며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이루었고, 지금도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과 상호 견제의 원리를 통해 우리를 지키는 중인 한국 사회는 영화 속 부탄과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에게도 유효타로 날아든다.
정치적인 의견 차이가 배신처럼 간주된다면, 거기서 우리는 어떻게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제도를 들이는 과정에서 우리는 제도 그 이상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다수가 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남들이 목숨 걸고 갈구한 것이라면 여기서도 필요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행복으로 가는 길은, 우리 손으로 어떻게 그려가야 할까?

자본주의도 통역이 되나요?
이 영화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을, 하필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런 때에 숙고하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민주주의만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주주의의 좋은 짝, 자본주의다. 영화에는 총을 둘러싼 대화가 영어-부탄어 통역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 문장들은 단순히 말뜻을 옮기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통역자 '밴지'는 단순하게 말을 비슷한 단어로 옮기는 게 아니라, 표현과 그 의도까지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분칠을 해서 성실하고 매끄럽게 내어 놓는다.
자본주의를 최우선으로 하는 언어와 어찌 보면 그 대척점 비슷한 곳에 가 있는 언어를 옮기는 것은, 발화된 말 뒤에 있는 마음까지도 적절히 분칠을 해서 내어 놓아야만 하는 일이 된다. 밴지가 통역한 것은 영어와 부탄어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부탄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절히 양념을 치고 거짓도 보태어, 화자와 청자 사이에 약간씩 괴리가 발생한다.
이 괴리는 작지만 흥미로웠는데, (이 영화에서는 작은 수준으로만 등장하지만) 이러한 괴리가 자라고 자라면 우리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되는 거구나 싶어서였다. 이미 죽어 있는 마음의 시체 비슷한 것에 분칠을 해봤자 악취를 가릴 수 없다. 가치를 상실한 말은 언어의 거죽을 뒤집어써도 언어를 파괴할 뿐이다. 아무리 주절주절 단어를 끌어 모아 가려봐도 기표 뒤의 기의는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작지만 명확히 드러난다.

이 영화는 묻는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두 제도. 잘 발휘될 때의 장점과 잘못 발휘될 때의 해악도 명확한 이 제도 앞에서, 시스템 이면의 가치를 잊지는 않았는지, 잃지는 않았는지. 제도 이전에 우리 마음의 토대에 놓여야 할 것은 무엇인지, 마치 부처님의 미소처럼 순하고 부드러운 양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영화의 결말에서는 어쩐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이라는 백석의 시구가 떠올랐다. 우리 같이 쪼이고 싶은, 따뜻한 모닥불 같은 영화였다.
Relative contents
-
- 연극적 장치를 빌린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영화 <도그빌>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세트 였다. 항상 영화를 볼 때 장소가 바뀌고 실제 현실 에 있는 장소 같은 세트의 영화만 보다가 연극처럼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이 영화 속에서 진행 되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했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이 공간이 어색해서 뒷부분에 이 곳을 빠져나와서 다른 장소가 나오길 기대하기도 했다. 근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 세트에 익숙해져 갔고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공간 마다 경계를 나누는 벽이 없어서 감시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고 앞 뒤가 다 막혀 있어서 답답한 느낌을 극대화 한 것 처럼 보였다.
그레이스가 자신이 속해 있던 갱을 떠나 착하게 살기 위해 혹은 평화로움을 꿈꾸고 도그빌로 도망쳐왔지만 도그빌도 겉으로는 평화로우면 모든걸 회의로 정하는 민주적인 마을 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의 다시 약자와 강자가 나뉘어지고 젊은 여성은 또 눈요기거리가 되고 만다. 착하고 고분고분한 그레이스가 어느 순간 무시를 당하는 존재로 전락 하게 된다.이런 그레이스가 불쌍해보이기도 하였고, 왜 반발을 하지 않는지 답답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누구나 자신보다 만만해 보이는 상대가 있으면 우위를 점할려고 하고 항상 새로운 약자를 찾아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려는 것이 추한 인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성폭행을 당하고 누워있는 장면이 특히 이 세트의 특성이 잘 보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레이스는 도그빌 주민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옆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 다닌다. 천장에서 이 세트를 비추었을 때, 그레이스가 굉장히 작고 약자처럼 보였다. 도그빌 주민들의 입장에선 방이 다 나누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공간이겠지만 내가 보는 입장에서는 한쪽은 성범죄를 당하고 있고 한쪽은 아무렇지 않게 할 일을 하고 있는게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 마을 주민들의 이중성을 보여주었다고 느껴졌다.
도그빌 주민 중에서 가장 오만하다고 느껴진 캐릭터는 톰이었다. 자신이 철학자,지식인인 척하고 그레이스를 위해 도와줄 것 행동 하더니 배신을 때린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까지 소설 에다가 써도 되지? 라고 하는 모습이 허울뿐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그레이스가 톰을 쏘는 장면이 가장 통쾌하기도 하였지만, 그레이스가 다시 갱으로 들어가서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왜 제목이 계속 도그빌일까 궁금 했는데 마지막에 개와 같이 목줄을 찬 그레이스와 유일한 동물인 ‘모세’만 살아 남은 것과 마지막에 개만 살아남은 것을 보고 도그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 "마음 속 어두운 유머를 지켜내기"
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다,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유머스러운 불편함을 줄 수 있구나.
🍿영화의 제목
분명 이 영화에서 진중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래리. 그러나 제목을 왜 'the serious man'이 아니라 'a serious man'이라고 지었을까. 어쩌면 이 영화는 본인에게 닥치는 불행은 반드시 원인을 동반해야 한다는, 답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가진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 아니었을까. 그러한 메시지치고는 상당히 찝찝했지만 그랬기에 더욱 예뻐보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비록 나도 인생 새내기지만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무리 나에게 고통이 와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며 이 또한 미래에서 돌이켜보면 나도 모르게 이를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켜버린다. 한동안 아프다가 언젠가 가장 깔끔하게 사라질 존재에 불과하다.
🍿래리의 꿈과 현실
항상 답을 원하고, 이를 쫓고, 압박 당하고 힘들어하는 래리의 현실. 그에 반해 그의 꿈은 무의식들의 총 집합체가 야생적으로 뛰어다니는 판타지였다. 그의 꿈과 현실의 엇갈림은 더욱 그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해결'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던져줬다는 생각이다. 본인이 지금 이 시련을 반드시 해결해야만 그가 꿨던 꿈에서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그러나 우리 삶에서의 변화는 늘 불가피하다. "어떻게"라는 되뇌임 대신 "이렇게"라는 말을 새겼으면 하는 그였다.
개인적으로 결말이 참 아름다웠던 영화다. 물론, 여기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행복한 결말이 아니다. 본 영화에서 래리가 강조했던 어절 '인식의 차이', 관객들의 인식에 따라서 결말은 다르게 해석되기에 소중하게 다가왔다.
🍿삶은 물리일까, 철학일까
본인의 뜻과 달리 클라이브 학생에게 F같은 C-를 줘버린 래리
본인의 좌절과 달리 결국 종신 재직권 지원자에 통과하게 된 래리
본인의 희망과 달리 의사로부터 알 수 없는 전화를 받은 래리
그리고 마치 그들의 미래를 까맣게 칠해버릴 것 같았던 토네이도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바라봤던 대니.
이 모든 결말은 어쩌면 지금, 항상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불편함의 바람이다. <시리어스 맨>에서는 물리를 강조했지만 사실상 나에게는 철학처럼 다가왔다. 래리가 강의 시간에 빼곡하게 채웠던 칠판은 본인의 삶을 대하는 복잡하고 모호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첫 1시간 30분은 마냥 마을 사람들이 진지한 래리를 양육하는 코미디처럼 보였다. 그러나 후반부 15분은 우울하지만 행복하고, 다소 시끄러운 방식으로 고독함을 선사했다.
본인에게 닥친 불행을 늘 자신 혹은 타인의 탓 더 나아가 어디에서든 이유를 찾아 책임을 피하거나 안으려는 사람들. 이 영화는 당신들에게 'Why so serious'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차피 지나갈 고통이다, 계속 그 고통을 손에 쥐고 있어봤자 커지기만 하지 결코 작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제목의 관사 'a'처럼, 본 내용은 단순히 한 남자를 그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그리고 있다. 우리의 삶은 늘 변화를 타고 쉽게 날릴수도, 굳게 박힐수도 우리의 생각에 따라!
-
- 나의 해피엔딩이 누군가에겐 새드엔딩일 수도 있다
감기
줄거리
전염되면 무조건 죽음에 달하는 최악의 바이러스가 한국에 퍼졌다.
너무 빠른 전염 속도에 결국 도시 폐쇄 조치가 내려지는데...
*해석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해피엔딩이 누군가에겐 새드엔딩일 수도 있다
숨은 의미 찾기
보통 이런 재난 영화 속 인물들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로만 나누기 힘들다.
그들을 구분 짓기 쉽지 않은 이유는 인물들에게 갈림길이 주어지고, 그중 하나를 무조건 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마치 바이러스를 찾아내고 사람들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연구원이 막상 자기 딸이 감염된 순간에는 그 사실을 숨기고 이기적 행태를 보이는 것과 같이 말이다.
하나 이 영화에서 평이한 인물은 앞서 말한 ‘인해’ 외에는 찾기 어렵다. 그 외의 인물들은 온전히 선이거나, 온전히 악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극렬하게 대립하는데, 이 과정 탓에 관객은 지루해진다. 완전한 선의 편에 서는 인물이 존재할 경우 99%의 확률로 선이 이기기 때문에 긴장감이 사라진다. 게다가 이에 맞서는 악인은 강할지언정 진부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선한 인물로 대변되는 ‘지구’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정의감으로 무장한 구조 대원이다. 그는 조건반사적으로 타인을 돕고 무적이며 동료 조력자까지 있다. 그는 남들이라면 쉬이 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해낸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감염되지 않고, 민간인 금지구역에도 자유롭게 들어가며, 자신을 막는 열댓 명의 사람들에 맞서고도 아이를 업고 기어이 빠져나온다. 이렇게 무적의 주인공을 세워놓고 그토록 진부한 악인이라니. 영화 내용은 앞의 30분만 보더라도 어떻게 이어질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리뷰하는 것은 순전히 ‘몽싸이’라는 인물 하나 때문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밀항을 시도한 동남아인.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의문의 바이러스로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죽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면역항체를 가진 사람이다. 그가 죽는 장면을 보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는데,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질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부 백인이고 몽싸이가 흑인이라면?
영화가 인종차별을 의도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앞뒤 맥락 없이 ‘한국에 바이러스가 퍼졌다’는 설정을 할 수는 없으니 그 경로를 비교적 가까운 동남아로 설정했을 뿐이다. 해외에 다녀온 한국인이나 외국인 여행객이 바이러스의 원인일 수도 있었지만, 바이러스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확산되었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밀항’하는 ‘동남아인’이라는 인물을 택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의아한 것은 몽싸이라는 인물을 영화 내에서 소비하는 방식이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그는 대한민국에 감기 바이러스를 퍼트린 원흉이면서도 동시에 유일하게 항체를 가진 희망이기도 하다. 상반된 두 가지의 역할을 부여받은 그는 한 쪽에게는 쫓기고 한 쪽에게는 보호받는 기이한 상황에 놓인다. 그러다가 결국 쫓는 쪽에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만다. 원흉으로서도 희망으로서도 제 역할을 종료당한 그는 ‘희망’이라는 타이틀만 미르에게 수혈하고 사라진다.
사실을 짚어보자. 그는 가난한 집에 돈을 보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밀항을 주선한 브로커는 한국인이며, 그들을 운반하려다가 놓친 운반책 역시 한국인이다. 그에게 감기를 옮아 바이러스를 산발적으로 퍼트린 사람도 한국인이고, 이들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늑장을 부린 이마저 한국인이다.
그렇다고 몽싸이에게 처음 감염되어 죽은 병우를 탓하는 건 아니다. 다만, 몽싸이가 밀항을 '선택'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악으로 만들어버리고, 죽어도 안타깝지 않은 자로 만드는 영화의 구조가 아쉬웠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미르에게 가려져 '숭고한 희생'으로도 취급받지 못한다. 그저 한 명의 밀입국자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남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나 버린다.
우리 엄마 쏘지 마세요!
게다가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어린아이를 해결책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긴박한 대치상태에서 뛰쳐나온 작은 아이가 평화를 요구하는 장면은 감동을 넘어선 한국식 신파에 가깝다. 거기에 '항체 보유자 김미르'라니. 아이는 우리 미래의 새싹입니다, 따위의 구호가 생각난다. 아무리 영화일지라도 고작 9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에게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워야 했을까?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스틸컷
이쯤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동남아 계열 외국인 노동자와 어린아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 놓인 이들은 전부 사회적 약자다. 영화는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인류에게 닥친 재앙도, 인류에게 남은 미래도. 잘 생각해 보라, 영화 끝의 에필로그까지 지켜보아도 감염자의 시체를 대량으로 불태웠던 일에 대해 누가 책임졌다는 언급조차 없지 않은가.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누군가에게는 해피엔딩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새드엔딩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고,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새드엔딩도 언젠가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기에.
코로나 이후 보니 하이퍼리얼리즘 공포영화
감상평
개봉 당시엔 그저 그런 흔한 재난 영화인 줄 알았더니 WHO의 팬데믹 선언을 예언한 영화, 감기.
순위권 안으로 돌아갈 땐 안 보다가 문득 볼 것도 없고 해서 다시 봤다. 영화 속 결말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서 괴리감이 컸다. 금방금방 바이러스가 종식되는 영화에 비해 현실은 코로나가 장기화되는 걸로도 모자라 위대 코로나 시대로 접어드는 판국이니.
어쨌거나 코로나 사회를 살아가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특히 기침할 때 비말이 퍼지는 슬로 모션은 소름이 돋았다.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장면이 나올 때마다 아주 '불-편'했다. 중간중간 마스크도 안 끼고 손수건으로 대충 끼고 다닌 장혁이 대체 어떻게 감기 안 걸렸는지 그게 제일 의문.
보는 내내 그 짤이 생각났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절대 볼 수 없는 캐릭터 중 하나가 ‘정의롭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잘 참는 장혁’이라던…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영화. 그야말로 장혁이 아니면 이 역할을 할 사람이 없겠다 싶은… 너무도 뻔한 캐릭터지만, 이런 뻔하디 뻔한 캐릭터에 딱 맞게 설정된 영화이다 보니 억지스러워도 이 이상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
- 논란의 디즈니 '인어공주' 실사판 후기
인어공주
23.05.24 개봉
뮤지컬/가족판타지/로맨스, 전체 관람가
미국, 135분
감독: 롭 마샬
출연: 할리 베일리 등
디즈니의 시대는 한물 갔다며 욕을 욕을 먹던 바로 그 작품...!
흰 피부에 빨간 머리가 대명사인 인어공주를
흑인으로 캐스팅해서 난리가 났던 바로 그 작품...!
드디어 '인어공주'를 봤습니다~~
다 보고 난 후 드는 생각을 말해 보자면 이거였어요
흑인 인어공주도 나쁘지 않겠다
다만!
이미 원작이 있는 작품에 '꼭'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해야만 했던
그 이유...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노래? 물론 잘합니다 노래 부를 때마다 감탄해요
그런데 노래 평균 만큼 하는 예쁜 배우가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네 인정합니다 저 외모지상주의 맞아요 . . .
자고로 여주 남주는 예쁘고 잘생겨야만 한다는 고정관념 있습니다
아무리 외모지상주의가 문제로 꼽히는 시대라지만
공주는. 예뻐야. 만. 한다는 생각. 있고요.
미국에서는 백인 외의 공주가 나왔다며 좋아한다던데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요?
아리아나 그란데가 이 역할을 했다면
전 광광 울면서 덕질 했을 거예요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빨간 머리도 차별받았다고 들었어요 해리포터 론처럼요
그걸 엎어 준 캐릭터가 인어공주인 건데
새빨간 머리조차 따라 하지 않았다면... 정말 인어공주가 맞을까요?
레게머리라 포크로 빗질 못하고 꼬을 때는 진심 킹받았어요
그게 인어공주 성격 잘 보이는 씬인데 ㅠ......ㅠ
사실 인어공주만 문제인 건 아녔어요
에릭 왕자도..............................................
원래 이 배우님을 모르긴 했지만
영화 보고 있는데 저 사람이 에릭일 거라고 상상도 못함
심지어 내용이랑 개뜬금 없는 입양아 설정까지 . . .
이제 픽사가 디즈니를 먹을 차례인가?
트라이튼이랑 우르슬라가 진짜 찰떡 캐스팅이었던 거 같고
바네사는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분량 3분쯤 되는 거 같은데 반했어요
못 된 표정 짓는데 너무 예쁜 거 있죠
크루엘라도 그렇고 이제 악녀의 시대가 오는 걸까요?
우리 모두 인어공주 이야기는 알잖아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해피 엔딩이 된다는 게 다른 점이죠
그런데도 실사판을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기대했던 건
디즈니라는 대기업이 가진 자본이 얼마나 대단한지였겠죠?
네 CG랑 효과랑 노래요 ㅎㅎ
근데 바다가... 그닥 예쁘진 않더라고요......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속 바다도 어두컴컴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때는 인어공주를 엄청 밝게 그려 놔서
그래도 화사하고 아름다운 동화 속 얘기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근데 이건... 아바타 2보다도 어둡고 우중충한 바다였어요
우르슬라의 바다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듯
디즈니 실사판을 많이 본 건 아니에요
미녀와 야수 알라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피노키오 정도?
근데 네 개 다 정말 동화 속 얘기 같고 어딘가 신비롭고
피노키오는 CG가 대박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이번 인어공주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영화인 것 같아요
동화를 재해석하는 요즘 스타일st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크루엘라처럼 더욱!! 화려하게 만들었어야겠다 싶어요
이야기는 고대로 갖다 쓰면서 캐릭터성은 버리려고 하면...
원작의 팬도, 요즘 스타일을 좋아하는 팬도 잡지 못하잖아요
마케팅 포인트가 불확실했다는 게 가장 큰 실패 이유인 것 같습니다
*스토리: 2/5점
*연출: 1/5점
*영상미: 1/5점
*연기: 3/5점
*OST: 3/5점
-
- 머글이 보기엔 나쁘지 않은
나는 공식적인 머글이다. 영화를 좋아해서 이렇게 끼적거리긴 하지만 연예인을 덕질한다거나 특정 장르를 덕질하진 않는 그저 잡식 인간이다. 그런데 삶이 무료하던 시점에 한 애니메이션를 실사화한 영화를 보았다. 당연히 애니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애니는 보지 않았는데, 찾아보니 이게 그렇게 설레는 애니였나 보던데 뭐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판단하는 나의 기준은 오글거림의 유무이기 때문에 이 영화 오글거리지 않았다는 지점에서 큰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보아하니, 애니에는 남주 여주 뿐만이 아니라 남주의 누나도 등장하는 것 같던데 이번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더라. 이후에 시즌 2를 제작하려는 걸지, 그냥 분량상 잘라낸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영화의 장점은 로맨스가 주된 주제인 영화인데, 모든 장면들이 과하지 않다. 감정 표현도 과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되어 있다. 군인이라는 남주의 캐릭터에 맞게 모든 표현이 절제되어 있다. 그리고 여주 또한 대단히 오버를 떨지 않는 캐릭터이다. 일본 영화는 가끔 연극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인물들의 리액션이 한국인이 느끼기엔 과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류의 로맨스는 아닌, 아련함이 가미된 로맨스라서 볼만 했던 것 같다. 약간 애니 실사화라고 하면 으레 그런 오버스러운 리액션이 떠올랐는데, 이 애니는 애초에 그런 소재가 아니었던 것 같더라.
오히려 이 영화가 일본 영화같다고 느꼈던 지점은 이능력자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대를 불문하고, 불이나 바람을 다룰 줄 안다는 초능력자들이 등장하는 것이, 일본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 때문에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가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담백하게 넣어놔서 그런지 초능력자들의 결투로 이어지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보는데 크게 거부감이 없었다.
뭐, 대단한 칭찬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킬링영화용으로는 나쁘지 않다는 의견을 적고 싶었던 것 뿐이다. 대단한 잘 만든 영화라고까지는 평가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름 설레는 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싶으신 분들이나 '나는 머글인데 일본 실사화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다'하시는 분들이 입문용으로 도전해보면 좋을 만한 영화인 것 같다. 뭐, 내 주변 오타쿠를 자처하는 친구들은 실사화를 굳이 왜 보려고 하는 친구들도 많긴 하지만 말이다. 간편하게, 크게 자극적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을 때 흘러가듯이 보면 나쁘지 않은 영화인 것 같아서 괜시리 한 번 넣어봤다. 요 근래 너무 심각한 영상물들만 소개한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지금까지 칭찬만 이어갔으니 아쉬운 점을 말해본다면, 물론 로맨스 장르라는 지점에서는 크게 결격 사유는 없지만 수많은 장르 중의 하나인 영화라고 봤을때는 뭐 그렇게 자주 볼 것 같진 않다는 점 정도? 크게 별로는 아닌데 대단히 추켜세워줄 만한 장점도 없는 그래서 더 특이하게 느껴졌는 지도 모르겠다. 약간 평양냉면 처음 먹는 느낌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 분명히 나쁘지는 않은데, 아 뭔가 박수까지는 안나오지? 라고 생각하며 의아했던 기억이 있는데, 혹시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피드백 주실 분 있으면 주시면 감사하겠다.
-
- [마거리트의 정리] 너 자신을 알라
[마거리트의 정리]
2보다 높은 짝수, 그러니까 ‘4 6 8 10 ~’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742년, 프로이센 수학자 골드바흐는 오일러에게 편지로 자신의 추측을 전달했다. 4는 2+2로 표현할 수 있고, 6은 3+3, 8은 3+5와 같이,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로 짝수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 리뷰에 짧은 수학 지식을 가져온 이유는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 영화 내내 주인공 마거리트가 세계의 난제인 ‘골드바흐의 추측’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이것이다. 관객에게 어떤 수학적 정보나 이해를 도울 예시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작을 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똑같이 어려운 비유였다. 마작이란 게임을 알고 계신 관객은 중간마다 놀라움을 표현하시기도 하셨다. 부끄럽지만 수학을 놓고 산지 아주 오래전이라 영화 속에 나오는 다양한 수학 기호와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편할지 걱정된 적은 또 처음이다. 공포영화는 온 힘을 다해 부술 텐데.
하지만 수학적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알고 있다. 영화에서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늘어지는 작업이자 붙잡고 있던 서사의 긴장감을 끊어버리는 행위다. 영화가 굉장히 어려운 난제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보여줄지 고민을 한 흔적이 이곳에서 느껴졌다. 애초에 수학적 지식을 나열하는 단순함은 짧게 보여준다. 대신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벌어지는 드라마에 가까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서사를 부여한다. 즉,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평소 수학과 밀접한 연관이 없는 사람도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사실 조금 걱정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확인하고 주인공 마거리트의 모든 행적을 걱정했다. 상업 영화가 아니며, 칸 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매번 긴장한다. 독특한 소재로 관심을 얻었으나 눈이 피곤할 정도로 선정적이거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PC요소로 재미가 반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애초에 처음부터 각오하고 보았기에 놀라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건 정말 갑작스레 행동하거나 튀어나오는 억지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마거리트’는 스스로 위대한 행보를 걷는다. 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것처럼 격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매혹적인 상대에게 집중하기도 한다. 마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던 암탉이 담장 밖 세상에서 다양한 생물과 환경을 만나는 것처럼 ‘마거리트’는 세상을 경험한다. 재밌는 점은 마거리트가 경험하는 일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인인 마거리트는 이미 클럽에서 춤을 춘다는 정보는 알고 있는 상식이다.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도박은 불법이며 도박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본 마거리트는 믿음, 배신, 사랑이란 감정들에 대해서 머리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골드바흐의 추측’을 해결할 열쇠지, 인생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떠올랐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도 누구나 경험했을 일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수학과 암호 해독을 좋아해서 일반인이 자주 하는 일상을 보내지 않은 것과 똑같았다. 보통 영화에서 묘사하는 천재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강박’이다. ‘마거리트’는 수학에 대한 강박을 가졌고, 이것은 자연스레 오로지 학교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하는 단순함으로 이어진다. ‘실내화 신은 수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 일련의 사건으로 학교 밖을 자의적으로 나간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이 세상에서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 조안, 휴 같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마거리트는 실내화 대신 운동화를 신으며 앞서 언급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다. 심지어 수학 천재답게 머릿속으로 마작의 모든 수를 세며 도박판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기도 한다. 반드시 연구 논문을 마치고 교수님의 애제자로서 성공해야 했던 그녀에게 이런 일상은 가혹한 일탈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춘기 늦바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로지 숫자에만 매몰된 그녀의 눈을 뜨게 해주는 휴가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면 바보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책이나 대중 매체로 알고 있던 미술 작품이나 자연경관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 말이다. 그래서 마거리트가 음습한 수학 천재 모습 대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파리의 대학생 같은 행동을 할 때 반가웠다. 의외로 많은 관객이 그녀의 엉뚱한 행보에 웃으셨다.
드라마 ‘퀸즈갬빗’은 1950년대 체스 천재 베스가 세계 정상에 올라가는 과정을 다룬다. 천재가 어떻게 주목을 받으며,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대해 주인공을 극한으로 내몰며 뼈저리게 알려준다.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도 마찬가지다. 113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무수히 많은 시련이 몰아친다. 퀸즈갬빗에서 느꼈던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체스 경기’와 같이 이번에도 ‘영화 자체가 하나의 수학적 증명 과정이다’라고 느꼈다. 영화 초반부 증명에 실패한 마거리트가 몇 걸음 물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정보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하나하나 다시 인생 전체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관객으로서 증명 과정 전체가 독특해서 즐거웠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련을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며 흔들리는 것에서 인간적인 공감을 느꼈다. 비록 그녀가 어떤 난제를 풀어가는지 그 과정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치도록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거리트의 욕망, 결심, 뛰어남을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아마 전국에 계신 수학 선생님들이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 전, 남는 시간에 틀어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
-
- 대무가 - 무당들의 쇼미더머니가 시작된다
-
쇼타임! 신(神)들린 무당들의 통쾌한 한.판.대.결!
유아독존 신빨 대신 술빨로 버티는 40대 마성의 무당 '마성준'(박성웅)
백발백중 1타 무당을 꿈꾸며 역술계를 평정한 30대 스타트업 무당 '청담도령'(양현민)
인생역전 갓생을 노리며 10주 완성 무당학원을 등록한 20대 취준생 무당 '신남'(류경수)
신빨 떨어진 무당들이 용하다 소문난 전설의 '대무가' 비트로 뭉쳤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서 50억 원을 손에 넣으려는 이 구역 미친X '익수'가 판을 벌리고
'대무가' 무당즈는 각자 일생일대의 한탕을 위해 비트에 몸을 맡긴 채 프리스타일 굿판 대결을 펼치는데…
-
- 영화 <아임 유어 맨> 메인 예고편
페르가몬 박물관의 고고학자 ‘알마’는 연구비 마련을 위해
완벽한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오직 ‘알마’만을 위해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된
맞춤형 로맨스 파트너 ‘톰’과
3주간의 특별한 동거를 시작하게 되는데…
-
- 넷플릭스 <킹덤: 아신전> 공식 예고편
[2021년 7월 23일, 넷플릭스 공개]
비극과 배신이 삶을 덮친다.
기이하고 불길한 뭔가를 발견한다.
한순간에 가족과 동족을 잃은 여인.
오직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그녀가 짙은 어둠을 마주한다.
<킹덤>의 스페셜 에피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