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02 16:33:14
1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거인> 김태용 감독과 배우 최우식, 신작에서 재회

2014년에 개봉한 영화 <거인>으로 한국 영화계에 큰 돌풍을 일으켰던 김태용 감독이 신작 <넘버원>(가제)에서 당시 주연을 맡아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던 배우 최우식과 재회합니다.
추석 시즌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는 <넘버원>은 엄마가 해준 집밥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카운트다운 숫자가 보이는 하민(최우식)의 이야기를 그릴 예정입니다.
<아쿠아맨> 제이슨 모모아, DCU 영화 복귀

<아쿠아맨>의 제이슨 모모아가 새로운 DCU 영화 <슈퍼걸: 우먼 오브 투모로우>에서 ‘로보’로 캐스팅되었습니다. ‘로보’는 Czarnia 행성 출신의 안티히어로로, 폭력적이고 괴짜 같은 성격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초인적인 힘과 재생 능력을 가진 현상금 사냥꾼이며 혼란과 파괴를 즐기는 캐릭터로 아직까지 대규모 할리우드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적이 없어 관객의 기대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더 배트맨: 파트 II>, 2027년으로 개봉 연기

로버트 패틴슨의 <더 배트맨> 속편이 또다시 개봉 연기를 알렸습니다. 이미 2025년 10월 3일에서 2026년 10월 2일로 한 차례 연기한 바 있는 해당 속편은 최종적으로 2027년 10월 1일(북미 기준)에 개봉될 예정입니다.
속편 역시 <더 배트맨>을 연출한 맷 리브스가 각본과 연출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으며, 1편에 출연했던 조 크라비츠, 앤디 서키스, 제프리 라이트, 콜린 파렐이 돌아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존 윅> 제작 ‘라이온스게이트’ 매각되나

<존 윅>, <트와일라잇> 등 걸출한 작품을 다수 제작한 ‘라이온스게이트’가 현재 매각을 고려 중이라고 합니다.
<더 크로우>, <메가로폴리스> 등 2024년에 대형 실패작들을 다수 내놓은 ‘라이온스게이트’의 구체적인
구매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스튜디오 고위 관계자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열린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한편, 2025년 개봉예정작으로는 <발레리나>, <나우 유 씨 미3> 등이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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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최연이 학교에 전학오고 하경과 지내면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다.
하경도 마찬가지로 최연에게 같은 감정을 느끼는데...
학창시절은 혼란스러운 시기다.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저렇게 사소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을 겪으면서 내가 성장한 것이 아닐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상대방을 향한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를 몰라서 혼란스러웠던 순간을 포근하게 풀어낸 작품이다. 그런 순간에도 최연의 시선은 하경에게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신호등 장면이 제일 좋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 명이 인지하더라도 다른 한명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를 수 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인지하는 순간이 일치하기는 어렵다. 먼저 인지하는 사람이 있고 늦게 인지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늦게 인지한다고 잘못은 아니다. 원래 자기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는 건 쉽지 않다.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부정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자각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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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룰라
탈룰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가 섬세하고 짜임새 있으며 대화의 중심이 남성이 아닌, 여성의 시각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여성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관객은 이 영화가 해피엔딩일 거라고 어느 정도 알고 본다. 최소한 싸이코, 스릴러, 범죄, 호러 영화는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낡은 밴을 끌고 다니며 전국을 떠도는 젊은 연인 루(탈룰라)와 니코는 소소한 도둑질도 하고, 마음 내키는대로, 발길 닿는대로 떠돈다. 그렇게 약 2년을 떠돌다보니 니코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루에게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결혼도 하고, 취업도 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루는 한심하다는 듯 니코를 바라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얼마나 좋은데, 그런 미친 짓을 하느냐며 타박한다. 밴을 끌고 전국을 다니며 사는 것이 자유롭게 보이고, 니코가 훔쳐온 엄마의 신용카드로 기본 생활은 영위하고 있으니, 이들이 밥을 굶는 경우는 없었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니코는 뉴욕에서 루를 만나 불쑥 집을 떠난 것처럼,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생겼고, 루가 꿈에서 무중력 상태에 있다가 놀라서 깨던 날, 니코는 말 없이 루를 떠나 집으로 돌아간다.
혼자 남게 된 루는 낡은 밴을 몰아 니코의 집이자 니코의 부모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간다. 가장 먼저 니코의 엄마 마고를 만나지만, 마고는 루를 의심한다. 마고도 남편과 이혼 수속 중이어서 마음이 복잡하다. 루는 거리를 떠돌다 호텔에 몰래 들어가 객실 문앞에 놓인 음식 찌꺼기를 훔쳐 먹다 한 여성에게 들킨다. 이 여성, 캐롤린은 루를 호텔 직원으로 착각하고, 외출할테니 아기를 봐달라며 팁을 100달러나 준다. 캐롤린은 아기가 싫고, 아기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롭다고 불평을 털어 놓는다.
그렇게 하룻밤 아기를 봐주고, 새벽에 돌아온 캐롤린은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잠을 자고, 아침에 호텔을 나가려는 루는 아기가 너무 애처럽게 울어 하는 수 없이 아기를 데리고 나온다. 루는 아기를 데리고 다시 마고의 집으로 가고, 아기를 니코의 아이라고 거짓말한다. 마고는 어쩔 수 없이 아기와 루를 집으로 들이고, 세 사람은 함께 생활한다.
잠에서 깬 캐롤린은 아기와 루가 사라진 것을 보고, 루가 아기를 납치했다고 생각하고, 호텔과 경찰에 알린다. 경찰이 등장하고, 이제 아기 납치 사건이 된 상황에서 캐롤린은 이 일이 너무 크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호텔 직원의 제보로 언론에 보도되고, TV 뉴스에도 아기 납치 사건이 보도된다.
캐롤린은 부자인 남편과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아기를 낳으면 남편의 관심을 받을까 생각해 임신, 출산의 과정을 겪지만,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면서도 처량하다. 아기는 보모가 대신 키워주고 있었다.
마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 루와 아기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루는 아파트 앞에서 레모네이드 장사를 해 돈도 조금 번다. 하지만 마고는 이런 루의 모습이 마땅치 않다. 마고는 지식인이고, 살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로, 자존심과 자부심이 강한 여성이다. 마고는 거의 웃지 않으며, 모든 사람에게 차갑고 쌀쌀 맞게 대한다. 그렇다고 그의 내면까지 나쁜 인성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마고는 자기를 잘 도와주고, 볼 때마다 친절하게 대하는 아파트 수위 마누엘에게 호감을 갖고, 마누엘을 집으로 초대해 와인을 마시자고 제안한다. 물론, 이때 마고는 남편과의 이혼 스트레스, 게이로 커밍아웃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들이 있었겠지만, 마누엘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마고의 남편이자 니코의 아빠인 스티븐이 마고와 루를 초대해 점심을 같이 먹는다. 스티븐은 몇 년 전에 커밍아웃을 했고, 다른 게이와 함께 살고 있다. 이 게이 커플은 아이를 입양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고아를 입양하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한다. 캄보디아는 돈만 주면 쉽게 아이를 입양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고아가 아닌 아이도 입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고는 스티븐에게 거의 20년 동안이나 자기를 속였다고 비난한다. 즉, 성정체성이 다른 것을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와 결혼했으며, 결혼 기간 내내 자신(스티븐)의 성정체성을 고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마고의 비난에 스티븐은, 자기가 게이라는 걸 마고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반박한다. 20년 전, 마고는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쓰고 있었고, 스티븐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고 역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자기의 삶 - 학문 - 에 충실하다보니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이쯤에서, 관객은 루와 니코가 왜 집을 뛰쳐나와 집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철없는 어린 집시인줄 알았던 두 사람에게 깊고 큰 마음의 상처가 있었고, 그것은 모두 부모로 인해 생긴 것임을 알게 된다.
니코는 아버지가 게이라고 커밍아웃하는 걸 보면서 크게 충격 받았을 것이고, 오랜 동안 엄마와 아버지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서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루 역시 어렸을 때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늘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마음에 남아 있다. 이 두 청년이 그나마 잘 견디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건, 이들이 마약을 하거나, 마약중독자가 아니라는 것, 니코의 경우 언제든 돌아갈 집(엄마)이 있다는 것이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었기에 범죄자나 마약중독자가 되지 않았다고 보여지고, 그보다 더 직접적 원인으로는 이 청년들이 아직은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다.
캐롤린은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택시에서 우연히 거리에 있는 루와 아기, 마고를 발견한다. 막 지하철을 타려는 그들을 쫓아가지만 놓치고, 집에 돌아온 캐롤린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경찰, 아동보호국 직원 앞에서 남편의 비난을 들으며 괴로워한다.
캐롤린이 본 장면을 통해 정보를 얻은 경찰은 곧바로 루와 아기를 추적하고, 이때 마침 경찰에게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러나 관객은 다 아는, 제보가 들어온다.
루는 아기와 둘이 처음 니코를 만났던 뉴욕의 부둣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그때 니코가 다가왔고, 두 사람은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간다. 아기가 아프다고 생각한 루는 병원에서 아기를 치료하려 하지만, 의료보험도 없고, 신원도 명확하지 않아 치료를 거부당하는데, 마고의 집으로 갔던 경찰은 루와 아기가 병원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마고와 캐롤린은 영화 거의 마지막에 만난다. 마고의 주방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캐롤린은 자기가 얼마나 형편 없는 여자인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엄마인지 처음 본 마고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아기를 낳고도 남편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자, 아기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아기가 미웠다고 말한다.
마고는 캐롤린의 처지를 충분히 공감하면서, 자기도 아들 니코가 아기였을 때를 떠올리며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마고가 임신한 것은 대학원 때, 박사 논문을 쓰던 당시였고, 마고는 모성애를 느낄 여유도 없이 출산하고, 논문에 매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아이와 충분한 교감을 나누지 못했고, 아이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다.
병원에 있던 아기와 루와 니코는 달려온 경찰에 체포되고, 아기는 캐롤린의 품으로 돌아간다. 이제 캐롤린은 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자기가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는다. 그렇게 루는 경찰에 체포당하고, 마고는 걱정말라고 다독인다. 루는 경찰차에 실려가면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뿌듯한 기쁨을 느끼며 혼자 슬며시 웃는다. 루는 자기가 세상에 혼자 버려진 외로운 아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마고 역시, 혼자 공원을 산책하다 문득 중력이 사라지며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본능적으로 나뭇가지를 붙잡는다.
마고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다시 지상(과거의 현실)으로 내려올 것인가, 아니면 나뭇가지를 놓고 중력이 없는-새로운 세상-삶을 살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낀다.
영화는 여성의 시각, 여성의 입장에서 모성애,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들여다 본다. 여성은 무조건 모성애를 가져야 하고, 모성애를 느끼지 못하거나, 모성애가 없으면 비난받아야 하는가. 캐롤린의 경우, 남자(남편)에게 종속된 수동적 삶을 살아간다. 남편에게 관심을 끌어야 하고, 성적 매력을 잃지 않도록 외모를 꾸며야 하고,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자기가 낳았지만, 아기는 보모가 키우고, 자기는 그 시간에 몸매 관리, 피부 관리를 해야 하고, 남편에게 잘 보이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살아왔다. 그럼에도 남편은 자기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아기의 육아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며,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고 아내 캐롤린을 비난한다.
대부분의 남성(남편)이 비슷하다. 육아는 아내(여성)가 전적으로 하는 것이며, 남편이 조금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꽤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캐롤린은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자기가 산후우울증을 겪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출산과 육아에 무지하다. 산후우울증이 심하면 산모는 아기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캐롤린이 삶의 의미, 자기 존재의 가치를 남편의 사랑에 두었다면, 마고는 자기의 학문적 성취에 두었다. 둘은 형식적으로는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같다. 즉,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와 정서적 결합을 해야 할 시기에 아이보다 자기의 욕망에 더 충실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건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 있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정서적 방임이자 아동학대다.
여기에 남성(남편)이 육아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 것도 정서적 방임과 아동학대의 책임을 물어야 하며, 마고의 남편은 게이로 커밍아웃하면서 자기의 성정체성, 자기의 삶을 당당하게 드러내지만, 정작 아내 마고와 아들 니코의 삶에 대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성소수자는 항상 사회적으로 약자이므로 보호받아야 하는가의 딜레마가 있다. 니코의 아빠는 마고와 니코에게는 약자가 아닌, 강자로 군림하는 존재다.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고, 남성이며, 사회적 기득권에 속하는 백인이다. 그가 단지 게이라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인 마고와 소년인 니코보다 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루, 마고, 캐롤린은 여성이라는 존재만으로 이미 사회적 약자다. 감독은 세 명의 여성을 각각 사회적 범주의 대표적 캐릭터로 설정한다. 루는 부모의 학대와 방임 속에서 버림받은 여성으로, 마고는 지식인이고 지성인이지만 남성권력 -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사회 -의 사회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여성으로, 캐롤린은 미인이어서 남성에게 인기가 많지만, 돈 많은 남성과 결혼해 남성(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속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대표한다.
이들은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억압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자각을 하게 된다. 그 시도는 성공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성이 현재의 사회 구조인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늘 소수자, 약자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자각이 생기고, 그런 여성들이 연대해 사회의 조직으로 발전하고, 힘을 갖게 된다면, 여성의 삶은 물론, 모든 인간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세 명의 여성이 지향하는 삶을 중심으로 보여주었다면, 여성과 가족이라는 두번째 주제도 눈여겨 볼 내용이다. 영화에서 '정상적인 가족'은 없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회질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말하고, 교육하는 '가족'의 의미를 뜻한다. 즉, 이성애를 가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가족 단위를 말한다.
루는 어려서 가족이 해체되었고, 엄마가 자기를 버렸으며,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진 경험이 없다. 그래서 니코가 '정상적인 삶'을 살자고,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고..했을 때, 진심으로 짜증을 낸다. 루에게 가족은 트라우마다. 자기가 아이 때 버림받은 것처럼, 자기가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생기면, 또 그런 일이 발생할 것 같은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마고에게 가족은 불행하다. 남편은 커밍아웃하고 떠나가고, 아들 역시 갑자기 집을 나갔다. 그는 이혼하자는 남편의 요구에 몇년째 합의하지 않고 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캐롤린은 다른 사람이 보면 행복한 가족이었지만, 그는 자존심도, 자기애도 없어서 한 가족을 이끄는 '엄마'의 역할을 알아서 포기한다. 즉, 결혼해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지만, 그의 정신적 단계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마고는 루가 아이를 데리고 오자, 그렇게 함께 살면서 한 가족을 이루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루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마고는 루와 아이를 사랑한다. 루는 돌발적으로 캐롤린의 아이를 호텔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아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인지 깨닫는다. 루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임신, 출산도 하지 않았지만, 아기를 키우는 마음은 진짜 엄마만큼이나 애틋하다.
캐롤린은 아이를 잃어버리고 나서부터 진짜 엄마가 된다.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을 걸 알고 있지만, 그런 결말과 관계 없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성이 살아나고, 자신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이혼당하면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오히려 독립적이고 자존감 있는 삶을 살게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세 명의 여성은 아기를 중심으로 만나게 되었고, 어쩌면 이들은 세 명의 엄마와 한 아기가 가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의 형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마고의 남편이 다른 게이를 만나 가족을 이루고, 가정을 꾸린 것처럼, 인간 집단의 최소 단위인 가족은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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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네 오빠도 그럴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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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성덕]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 및 퍼가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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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를 이해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오빠”가 포승줄에 묶여 기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미안한 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우리 오빠는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는 또 다른 “오빠”의 덕후인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괜찮은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기 오빠만 아니라면 저런 일이 일어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너의 태도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네가 웃고 있다는 점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미소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안도감을 결국 숨기지 못해 내게 들켰다는 사실을 네가 알까.
우리 사이를 10년이나 지속하며 지내온 나조차도 덕후가 되어 이상한 필터가 눈과 마음에 씌워버린 채 내 앞에 앉아 있는 낯선 너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째서 만들어진 신(God)에 가까운 검은 머리 짐승에게 이토록 마음뿐 아니라 이성까지 빼앗겨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너와 있을 때 생겨나는 묘한 불편함은 손톱 옆 거스러미처럼 계속 나를 긁어 댔다. 너는 늘 우리 오빠 이야기만 했고. 우리 오빠의 작품을 보기를 강요했으며. 우리 오빠가 팬들 중 유일하게 너를 팔로우했다며 제주도에서도 보인다는 롯데 타워만큼이나 올라간 어깨를 으쓱댔으니까. 만난 것은 우리 두 사람인데 어째서 약속 장소에는 나는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 같기만 한지. 그리고 왜 약속을 잡은 나와는 이야기하지 않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주제에 내 약속 상대를 뺏아간 그 누군가와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지. 네가 즐거워서 얼굴이 더 밝아질수록 나의 불쾌함은 그 밝음의 그림자처럼 깊어져만 갔다.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늘 입버릇처럼 자존감의 성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심리학에서 의존할 대상이 필요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지 못한 인정과 사랑을 충족시킬 대상을 내세울 때 연예인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대입했다. 그만큼 너의 애정은 자신을 향한 푸념만큼이나 광기에 가까웠고. 나는 너의 그런 찬란함만 가득한 광기가 이해가 가면서도 온전히 안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너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저런 거”쫓아다니는 애들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던가. 혹은 직업에서 그다지 입지를 다지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너는 참 열심히도 살았다. 덕질하느라 적금도 겨우 넣는다는 너의 푸념은 입가에서 마를 날이 없었던 건 너는 쏙 빼고 말하겠지만.
영화 속엔 네 친구들이 참 많더라. 그런 사건이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오빠가 그럴 리가 없다며 옹호하기도 했고. 쿨한 척 죗값을 치르고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으며. “너네 오빠”의 가면 벗은 모습을 밝힌 기자 한 사람이. 세상에서 잠시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느낄 때까지 무지성으로 헐뜯기도 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나는 팬으로 대변되는 집단의 대다수가 가진 좋아한다는 감정이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도 한다. 그 죽고 못 사는 오빠가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인 줄 짐작으로 알았으면서도 기꺼이 눈을 가렸음을 말할 때는 머뭇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면서 더더욱. 결국 그들의 선택적 눈가림이 진짜 피해자들에겐 2차 가해이기도 함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일하며 그 사람을 좋아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해도 온전히 떳떳함을 느끼지 못하고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리는 것처럼.
물론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억울하기도 하겠지. 입에도 담기 싫은 그 일이 생긴 후, 팬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급 취급을 당하거나. 걔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당사자가 아닌 팬들에게 넘겼을 테니까. 그뿐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너를 떠올리고 있는 나조차도 내가 너를 이해해 “주겠다”는 시건방진 마음을 가지고 다리나 꼰 채로 의자에 앉아 맘껏 너를 비웃으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으니까. 너를 포함한 그 집단은 이런 시선과 아니꼬움까지 업은 채 본질보다 더 왜곡되고 있을지도 모르지.
영화가 다루는 대상, 혹은 질문에서 빠져 있는 게 피해자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너도 피해자 중 한 부류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것도 돈, 시간, 마음까지 다 바친 대상에게.
세연이 박사모를 찾아가는 모습을 비추었을 때의 얼굴을 네가 보았어야 했다.세연에겐 거울 요법이었을 테고. 그 어떤 기준도 없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열변을 토하는 박사모 회원 중 한 사람을 보면서 세연이 느꼈을 어이없음은 내게도 조금의 통쾌함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의 기세에 밀린다는 생각을 아마 너네 오빠가 최고인 줄 알던 너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처음 만나보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뭐 요새 하는 말을 빌리자면 자강두천(자존심 강한 두 천재) 정도가 되겠지.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 지점은 묘하게 내가 너와 별반 다른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나 조차도 은근히 선을 긋고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시작점. 불쾌하지만 사실적이고 어딘가 축축하지만 화려한 독버섯이 가득 피어 있는 길티 플레저를 닮은 이 영화처럼.
나도 충동적으로 용돈의 일부를 털어 [리틀 드러머 걸] 블루레이 세트를 사고(언제 오냐ㅠ),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것에 강박적이며.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영화를 찾기 위한 여정을 외롭게 걷는 것을 즐기는 데다 “대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고급인 척 하지만. 그래도 “너 정도”는 아니니까.라는 말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 오빠”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너보다는 “수준 높은”것을 하고 있다고 너를 매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훅 밀려왔다.
그런 사람 좋아하지 말고 네 인생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어 늘 마음속 파우치에 그 문장을 고이 챙겨 다녔던 나도 그다지 떳떳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개입해야 할 문제일지 아닐지 투표를 한다면 개입하지 않는다에 더 많은 표가 들어있을 것임은 투표 전인 지금도 명백해 보이니까. 어차피 정도와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 좋아하는 것을 향한 다양한 감정은 네가 그렇고, 영화 속 인물이 그렇고 나에게도 그랬듯이, 모두의 마음속 하늘에 뜬 채 지지 않는 엉망진창 무지개일 텐데 말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뿌리 깊은 덕질이 하루 안에 그칠 리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그려진 것처럼. 행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건강하게 덕질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러나 그 행복하기 위한 덕질의 전제 조건으로 나중에 상처받을까 봐 애초에 마음을 다 주지 말자고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의 말에는 반대한다. 사랑이란 것이 우연처럼 찾아와 남남이던 두 사람을 우리로 엮어 뗄 수도, 떼고 싶지도 않게 여겨지던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과연 그 다짐이 제대로 작동해서 헤어질 때 마음 한 구석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강판에 갈려 나가는 것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 적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의 행동이 정상에 가까울 리 없다. 그러니 너도 나도. 정상인 척 숨기려 하지는 말자. 하지만 일상만은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자. 여전히 나보다 정도가 심한 덕질을 하는 네게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두 발 모두를 허공에 띄워 정처 없이 표류하기보다 적어도 가계부만은 쓰기를.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선택한 덕질이라 할지라도 현실 앞에 눈 감기보다 한쪽 눈 정도는 뜰 수 있기를.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지긋지긋하게 너를 덕질하는 현실이 너를 놓아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는 말자.
그러니 다음에 만날 때는 너의 23 아이덴티티 중 그 오빠의 덕후인 모습은 숨긴 채 만나자. 덕질은 너만의 것일 뿐. 다른 사람 마음의 옷걸이에 제멋대로 걸어두는 외투가 아니다. 불쾌함을 느낀 상대방이 너의 외투를 툭 떨어뜨린다고 해서 네가 옷걸이를 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너와 나는 그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시간도 감정도 존중하는 길일 테니까.
또한 네가 좋아해 마지않는 그 오빠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자. 우리 오빠는 그럴 리가 없다라던가 어떻게 팬들한테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로라도 인정해야 한다. 행여나 네 마음속 감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런 “안 좋은 일”이 탈옥해서 세상에 돌아다닌다 해도.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늘 알아야 한다. 애초에 너네 오빠의 자유의지가 그랬을 뿐이다. 너네 오빠는 그럴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었을 뿐. 너는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없고. 그 사람은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어야 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덕질은.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더 자유로울 것이다. 물론 어렵겠지만.
삶에 지쳐 오아시스를 찾을 수는 있을지언정. 신기루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자.
우리, 남보다 나를 앞세운 삶을 살자.
마치면서
정말 뒤틀려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분명 어이없는 마음이 들게 하면서도 마지막의 성찰을 보여 주는 부분에서 세연의 얼굴 표정은 아 자신이 이렇게 비쳤을 수도 있겠구나를 알게 한다. 어머니의 부분도 좋았다. 적어도 어머니는 팬심에 삶의 지혜가 더해져 조금 더 건강한 방법으로 강제 탈덕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이제 웃으면서 지나 보낸 것 같은 모습을 보이셨으니까.
정말 영화 보는 내내 친구의 모습이 겹쳤다. 실제로 리뷰 속 사건들과 친구의 태도 때문에 절교를 마음먹은 적도 있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친구가 이제는 만날 때 더 이상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기간제 연장을 한 것 이긴 하지만. 내가 누굴 이해하려는 스스로의 마음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에 대한 좀 더 나이 들어버린 자가 할 수 있는 꼰대 마인드를 온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학생=공부라서 나는 전교에서 놀았고 혹은 사범대를 갔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부분도 우스웠다. 어차피 학벌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님은 스스로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애초에 화이트 칼라에 해당하는 집단들이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게 말이 되는 일이었다면 탈의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의대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올 만큼 노력한 사람이니 사람 하나쯤 화장실에서 죽인다고 매장당하는 게 아깝다는 말에 이토록 분노감을 느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리뷰를 쓰는 방식도 매우 고민했다. 애초에 덕질에 대한 과도한 친구로 인해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보통 덕질을 바라보는 사람이 훈계하는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똑같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낫다는 시선을 가진. 내 모습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영화의 내용과 녹여서.
흑역사에 대해 가감 없이 털어놓고 성찰하려는 태도를 가진 감독의 배짱도. 영화도 모두 좋았다.
[이 글의 TMI]
1. 은근히 터지는 부분이 있음.
2. 9월에 본 영화 중 최고라 자부할 수 있음.
3. 마지막 남은 사랑니가 대공사(+위험함)를 해야만 뽑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됨.
4. 치과에서 이 덩치에 울 뻔함.
5. 정말 지옥의 카운트다운만 남은 셈.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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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 우정이 재조명한 오명의 역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38년 가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준비하면서 유럽은 또다시 전쟁의 문턱에 선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제레미 아이언스)' 총리는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절박하게 움직이고, 각국 정상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할 합의안을 만들 회담을 뮌헨에서 열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영국 총리 보좌관인 '휴 레거트(조지 맥케이)'와 독일 외교관인 '폴 본 하트만(야니스 니에브외너)'도 뮌헨으로 향한다. 한때 옥스퍼드 대학에서 둘도 없는 친구였던 둘. 그러나 이제 두 옛 친구는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닌 채 서로의 맞은편에 앉는다. 히틀러의 야욕을 깨달은 독일인은 히틀러를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뮌헨 협정'을 막기 위해서, 영국인은 그 친구로부터 나치 독일의 기밀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뮌헨 협정'은 1938년 9월 30일에 영국, 프랑스, 나치 독일, 이탈리아 4개국이 체결한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중 독일인이 많았던 주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게 양도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당시 팽창주의적 행보를 보이던 나치 독일은 독일인 인구 비율이 높은 인접국 영토를 차지하려 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전쟁은 그 일환이었다. 이때 나치 독일의 전력을 과대평가한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뮌헨 협정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뮌헨 협정 체결 후 불과 1년 만에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 대전의 문을 열었다. 이렇게 '뮌헨 협정'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의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선언과 함께 역사의 오점으로 남았다.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 소설을 영상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뮌헨 협정의 막전 막후를 생생히 포착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뮌헨 협정을 단순히 역사의 오점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화는 영국인과 독일인의 우정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조명하고, 뮌헨 협정으로부터 개인적인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함의를 끄집어낸다.
사실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의 초반부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유명인들이 아닌 두 청년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만 빼면 그리 특별하지 않다. 영화는 런던과 베를린을 오가며 당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던 유럽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좇는다. 다우닝 가 10번지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나치 독일과의 중재를 부탁하려는 정치인과 외교관들의 진땀 흐르는 노력이 보인다. 반대로 베를린의 술집에서는 히틀러의 벼랑 끝 외교 전략에 불만을 품은 관료들과 전쟁을 두려워하는 군부 인사들이 쿠데타를 모의한다.
물론 이러한 전반부는 나름대로 몰입해서 볼 만하다. <1917> 속 윌리엄의 전력질주를 연상시키는 휴의 달리기는 실제 전투 못지않게 다급한 외교전의 실상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런 그가 정작 아내와는 결혼기념일조차 함께 보낼 수 없는 상황은 안쓰러움을 자아내면서 그 급박함을 더욱 강조해준다. 쿠데타 모의를 주도하는 폴과 그의 동료들의 모습은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생사의 갈림길에 선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다만 굳이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가 아니어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배경인 대다수의 작품이 이 매력을 공유하기에 차별화되는 부분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런던과 베를린에서 각자 동분서주하는 두 주인공이 뮌헨으로 향하는 순간, 영화는 마침내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펼칠 준비를 마친다.
왜냐하면 작중 뮌헨은 그저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도시가 아니라, 휴와 폴이 헤어지고 또 재회하며 서로의 변화를 확인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과거 뮌헨의 한 술집에서 두 친구는 극명한 견해 차이를 확인한다. 그들이 늘 그랬듯 장난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를 사이에 두고 진심으로 언쟁을 펼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국민인 폴을 사로잡은 열등감은 다른 자리에 앉아 있던 독일 국민들의 열등감을 만나 히틀러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로 이어진다. 그는 이미 비극의 씨앗이 보이는 히틀러의 인종차별과 잔인함에는 눈을 감는다. 언쟁 이후 두 친구는 그대로 연이 끊어지는데, 이 순간 뮌헨은 정치가 개인들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시켜주는 공간이다.
하지만 다시 찾은 뮌헨은 다르다. 두 친구는 여전히 히틀러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지만, 그 차이의 원인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폴은 개인의 일상적 경험이 정치적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알지만, 휴는 그렇지 않다. 자신의 열광적 지지가 히틀러라는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했음을 깨달은 폴. 그는 스스로를 막지 못했고 다른 이들도 말리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한 지식인으로서 회한한다. 이를 바탕으로 히틀러의 야욕을 알리고 나치 독일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뮌헨 협정을 막기 위한 활동에 나서기도 한다. 반면에 휴는 정치적 움직임과 결정에 순응하며 그 안에 갇혀 있다. 그에게 체코 사태와 전쟁 위협은 총리 보좌관으로서 바쁘게 일해야 하는 환경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견해나 주체성과는 무관하게 당장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달성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평행선을 달리던 두 친구의 우정은 함께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던 친구 레냐를 사이에 두고 마침내 한 점에서 만난다. 유대인으로서 히틀러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해 심신이 모두 피폐해진 그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휴는 비로소 히틀러의 정치적 선택이 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몫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의 재회 이후 180도로 달라진다. 단지 MI6의 명령대로 폴이 갖고 있는 히틀러의 회의록을 입수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히틀러의 야욕을 막기 위해서 폴처럼 동분서주한다. 이처럼 순차적으로 묘사되는 폴과 휴의 변화는 왜 세 친구가 파티를 즐기는 장면이 영화의 오프닝인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이 작품은 단지 역사의 거시적 흐름을 빌리고 있을 뿐, 실제로는 개인들의 일상 속 경험이 갖는 정치적 힘을 조명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또 다른 주인공인 네빌 체임벌린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는 총리 체임벌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네빌을 비춘다. 첫 세계대전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낀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그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트라우마라는 창을 통해 국제정치의 흐름을 살핀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피하는 것,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폴이 넘겨준 기밀 정보를 애써 외면하는 것도, 폴과의 만남을 주선한 휴를 힐난하는 것도, 원래 구상대로 히틀러와 뮌헨 협정에 서명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일이다. 사실 이는 앞서 살펴봤듯이 그가 잠시 동안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단지 연기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이와 관련해 체임벌린을 향한 관점을 살짝 비튼다. 그가 귀국 직전 급히 히틀러와 독대하는 것, 그 자리에 휴의 동행을 허락한 것, 그리고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말을 가능케 한 각서에 히틀러의 서명을 받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속도감 있게 펼쳐 보인다. 이를 통해 체임벌린 역시 자신을 둘러싼 정치적 물결에 떠내려가는 대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그 물결의 흐름을 스스로 만드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방증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인 것이다.
작중 휴나 휴의 아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영국 국민들은 무조건적으로 전쟁을 반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체임벌린이 히틀러로부터 평화 각서를 받아낸 덕분에, 영국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기점을 갖게 되었다. 만약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파기할 경우, 자연히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저 전쟁의 공포에 휘둘리며 유약하고 순진해 보이던 체임벌린도 사실 두려움과 트라우마라는 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토대로 역사의 흐름에 대비할 줄 아는 노회한 정치가였던 것이다. 이는 영화가 뮌헨 협정이라는 거대한 이슈 못지않게 체임벌린과 휴의 관계, 체임벌린과 폴의 만남에 상당한 비중을 부여하며 그들의 변화와 선택을 관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가 이러한 개개인의 변화와 선택을 온전히 담아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당장 레냐처럼 그 활용법이 아쉬운 캐릭터가 있기 때문이다. 비극의 직접적 피해자이자 당사자인 그녀는 조금 더 전향적으로 활용될 수 있었을 텐데, 두 친구 사이에서 그저 가교로써 소비되어 버린 듯한 인상이 짙게 남는다.
또한 영화의 만듦새도 시선을 흐트러트린다. 상술했듯 당장 전반부 내용이 지나치게 정석적인 것은 무색무취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도 다소 가리는 듯 보인다. 이에 더해 당시 나치 독일 정부 내의 혼란상이나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영국의 속사정에 대한 배경 지식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 점도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본격적인 드라마가 꽃피우는 중반부 전까지는 작품 안의 세계는 급박한데 정작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부조화가 초래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마치 신화와 같은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의의를 증명해낸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트로이의 역사가 한 음유시인의 노래에 깃들어 있었던 것처럼, 신화는 지금은 잊힌 사건을 기억하게 만드는 저항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몇 줄의 서술과 흑백 사진 및 영상에 미처 담기지 못한 이면의 사건을 조명하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되살려내 오명으로 가득한 역사를 다시 쓴다는 점에서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도 신화와 다르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역사의 뒤안길에 숨어 있던 패자의 이야기를 불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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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가 ‘불법’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내는 법
8★/10★
동쪽 시장에서 아버지가 동전 2개로 작은 쥐를 사오셨네
그런데 고양이가 와서 작은 쥐를 먹어버렸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
이번에는 개가 고양이를 먹었네
아버지가 시장에서 산 쥐를 먹은 그 고양이를〈Alla Fiera Dell‘Est〉라는 이탈리아 노래 가사 일부다. 유럽, 북미 등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노래는 계속 이어진다. 쥐는 고양이에게 먹히고, 고양이는 개가 삼켜버리고, 개는 지팡이로 두드려 맞고, 막대기는 불에 탄다. 더 강한 존재가 더 약한 존재를 먹거나 제압하는 일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민자들이 이 노래를 부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래 가사 속 약한 존재들의 운명이 여기저기서 치이기만 하는 자신들의 처지와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 거장 다르덴 형제의 신작이자 칸영화제에서 75주년 특별기념상을 수상한 〈토리와 로키타〉는 두 이민자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로키타가 벨기에 어딘가에서 체류증 허가를 얻기 위한 심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로키타는 자신이 이미 벨기에에서 체류증을 받은 토리의 친누나라고 주장하며, 어린 동생 토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자신 역시 체류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사관의 질문이 뒤따른다. 말투는 차분하지만 질문의 내용은 날카롭다. 로키타는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끝내 공황 장애가 와서 약을 먹고는 눈물로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로키타가 거짓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키타는 토리의 친누나가 아니다. 토리는 아프리카에서 횡행한 마녀/주술사 사냥의 표적이 되어 학대와 린치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반면 로키타는 체류증을 발급받아 가사노동자로 일하며 고향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유로 유럽에 체류 중인 토리와 로키타는 같은 보육원에서 생활하며 어느덧 친 남매보다 더 끈끈한 사이가 된다. 로키타는 토리를 지극히 아끼고 돌봐주며 토리 역시 로키타가 체류증을 발급받을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한다. 요컨대 토리와 로키타는 유럽 사회의 가장 낮고 험한 곳에서 그 무엇도 끊어낼 수 없는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다르덴 형제는 이번에도 누군가의 삶을 극화하여 소비하는 대신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기법으로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과 삶을 차분히 담아낸다. 마약 배달 및 재배, 이주 브로커의 갈취, 성착취 등이 등장하지만 이 소재들은 이주자들의 취약함을 과잉 극화하는 데 활용되지 않는다. 토리와 로키타가 조금씩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우정과 사랑이 더 깊어지는 과정에 카메라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불가능한 관계를 일구어낸 토리와 로키타는 끝내 비극을 마주하고 만다. 체류의 ‘합법성’을 따지는 일이 한 인간 존재를 ‘불법’으로 내몰고, 가장 취약한 자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단단하게 만들어낸 관계는 폭력적으로 응징당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안보, 국경, 안전과 같은 가치들은 대폭 강화되었고 이 가치를 ‘훼손’하는 존재들은 곧바로 강한 비난‧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즉 이주자들은 ‘국민/민족 정체성’을 헤친다는 오래된 비난과 더불어 새로운 차별과 배제의 언어에도 대응해야만 했다. 이주자들은 더한층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의 표상이 되어버렸고 그만큼 연대, 포용, 환대의 가치 역시 약화되었다. 〈토리와 로키타〉가 다르덴 형제의 전작에 비해 비관적이라는 관람평이 이어지고 있다. 악화된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그러나 이민자와 정주자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만 맺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토리와 로키타가 주고받은 우정과 사랑이 전체 사회로 확대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억지로 꺾여버린 토리와 로키타의 우정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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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시> | 지나치게 디즈니다워서 엉망인 100주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사 '매그니피코 왕'(크리스 파인)이 다스리는 왕국 '로사스'. 100살이 된 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뤄지길 고대하는 소녀 '아샤'(아리아나 드보즈)는 매그니피코를 도우러 간 자리에서 우연히 그가 숨겨 온 어두운 진면목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런 아샤 앞에 무한한 힘을 지닌 특별한 '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별은 염소 '발렌티노'(앨런 튜딕)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별의 힘을 믿고 매그니피코의 음모를 막기로 결심한 아샤는 일곱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을 먼저 눈치챈 매그니피코는 야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폭주하기 시작하고, 아샤와 친구들은 예상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디즈니의 모든 것'이 문제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갖는다. 예를 들어 픽사 애니메이션은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 관객에게도 소구력이 있다. 예상 못한 뭉클함에 눈물 한 방울 흘리는 경험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이미지가 가장 공고한 제작사라고 볼 수도 있다. 디즈니만의 매력 두 가지는 백 년간 변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동화와 뮤지컬이다. 물론 디즈니도 <주토피아>, <모아나>, <겨울왕국>처럼 동화를 변주하기는 했다. 그러나 드림웍스처럼 동화를 파괴하고 재창조하지는 않았다. 또 설령 작품 평가가 부정적이어도, 디즈니의 음악만큼은 대체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100주년 기념작 <위시>는 이러한 디즈니만의 이미지를 온전히 구현하려는 노력이 가득 담긴 선물 세트다. 지극히 동화적인 이야기에는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피터 팬> 같은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의 오마주가 가득하다. 귀를 즐겁게 하는 뮤지컬 음악 사이로는 디즈니 특유의 교훈과 새로운 사회에 발맞추려는 변화가 깃들어 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디즈니스러운 만듦새는 끝내 <위시>의 발목을 잡는다. 지난 100년 간 쌓아 올린 디즈니의 유산을 한 데 모아놓고 보니, 그들끼리 충돌하면서 여러 모순을 드러내고 만다. 그로 인해 <위시>는 자기만의 매력도 좀처럼 찾지 못한다. 결국 디즈니의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어지고 말았다.
평범해도 괜찮아. 어차피 동화니까.
<위시>의 이야기는 평범하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형식만큼이나 전형적이다. 늘 그렇듯이 악의를 지닌 악역과 그로부터 고통받는 공주가 등장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공주는 여러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예상대로 빌런을 꺾는 데 성공한다. 권선징악이라는 환상은 뛰어난 기술력과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더 빛난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평범한 이야기를 비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위시>가 디즈니 100주년 기념작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초심을 찾으려는 시도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본래 맛깔나게 동화를 들려주는 할머니나 유모 같은 존재였다. 관객에게 순수한 즐거움과 희망을 주는 것이 디즈니 작품의 목적이었고, 디즈니의 매력이었다.
<위시>의 그래픽과 음악만 봐도 초심을 강조하려는 듯한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기존 작품에 비해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래픽이 눈에 띈다. 동물 털까지 세밀하게 만들어낼 줄 아는 최신 기술력을 좀처럼 뽐내지 않는다. 외려 직접 그리거나 손으로 나무를 파내 만든 판화로 찍어낸 듯한 느낌이 강하다. OST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디즈니의 오프닝 음악을 변주한 선율이 가득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위시>는 지극히 동화답기에 오히려 신선하다. 지난 몇 년간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항상 변화를 쫓느라 바빴다. 동화가 아닌 소재를 찾거나, 동화를 변주하려고 노력했다. 새로운 시도는 관객을 매료하기도 했지만, 디즈니만의 개성을 잃고 픽사 작품을 닮아간다는 비판을 낳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시>의 지극히 원형적인 이야기가 역으로 인상적일 여지가 분명히 존재한다.
형식과 내용의 충돌
문제는 <위시>의 동화적인 형식이 정작 내용과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시>는 제목대로 소원에 대한 동화다. 로사스 국민은 매그니피코 왕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소원을 맡긴다. 왕은 매달 로사스를 위협하지 않는 소박한 소원 하나만을 이뤄준다. 그는 로사스 사람들은 자기가 맡긴 소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왕에게 소원을 안전히 맡기는 데에 만족한 채로 살아간다.
아샤는 이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한다. 소원을 이뤄주는 기준을 자의적으로 정하고, 공익을 위해 개인의 소원을 희생하며, 소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자유와 가능성을 평생 뺏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래서 아샤는 왕 대신 별에게 소원을 빈다. 로사스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원을 되찾고, 소원을 이루기 위해 살도록 해달라고. 그러자 이 소원을 들은 별은 땅에 내려와 아샤와 함께 모든 소원을 되찾는 여정에 나선다.
<위시>는 이 과정을 통해 다음처럼 말한다. 소원을 이룰 개개인의 자유와 가능성은 별처럼 아름답고 소중하다고.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고, 구속될 수 없는 존재니까. 이 대목이 발단이다. <위시>의 교훈은 형식만큼이나 동화적이다. 그런데 그 교훈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은 동화로 포장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 결과 <위시>는 동화와 현실, 형식과 내용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동화로 노래할 수 없는 현실
실제로 <위시>의 교훈은 익숙한 현실을 소환한다. 우리 모두 하나의 별이니 자존감을 갖고 전진하자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들은 이야기다. 이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역량과 가능성을 살리고, 재능을 오롯이 발전시켜 최상의 결과를 만들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미국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이고, 더 나아가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발현인 셈이다.
그런데 스크린 너머 관객의 현실에서 <위시>의 교훈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소원을 지녀도 재능과 가능성을 찾을 수 없는 환경에 처했거나, 재능을 알더라도 계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소원을 이루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기도 하다.
심지어 마이클 샌델 교수의 지적대로 운이 따라 성공한 사람들에게 모든 과실이 쏠리고, 실패한 이들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패자들이 멸시받는 일이 많아지기도 했다. 즉, 스크린 너머의 현실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회의감, 기회의 평등에 대한 의문, 신자유주의 체제애 대한 불신이 나날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소원을 이루자'는 <위시>의 교훈은 제목만큼이나 꿈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자연히 <위시>의 메시지는 하늘에서 땅으로는 내려와도, 스크린 너머까지는 닿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동화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순간 거부감을 키울 뿐이다. 동화로 포장할 수도 없고, 환상만으로 해결될 수도 없는 현실을 기만하는 것 같은 위선마저 느껴진다.
동화라서 보이는 구멍
물론 <위시>는 나름대로 형식과 내용, 메시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고 애쓴다. 유머, 노래, 화려한 CG를 총동원한다. 하지만 끝내 동화라는 한계를 벗어나려 하지는 않으며, 결국 동화라는 이유로 생략된 수많은 현실은 수많은 구멍을 낳는다. 우선 동화라는 이유로 평범한 이야기를 옹호할 수 없다. 오히려 드라마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겨울왕국> 감독인 크리스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캐릭터도 매력이 없다. 전형적인 동화의 주인공인 아샤와 그의 아버지는 흥미롭지 않다. 귀여움만 어필하는 염소도 <겨울왕국> 속 스벤에 비하면 존재감이 부족하다. 반전을 염두에 둔 '왕비'(안젤리크 카발)도 근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한 '주체적인 여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나마 매그니피코가 강렬하다. 행적은 뻔하지만, 과하게 무게 잡는 대신 유머로 잔뜩 무장한 악역이라서 차라리 새로워 보이기 때문.
이런 상황에서는 디즈니의 야심 찬 변화도 설득력을 잃는다. 아샤에게는 일곱 난쟁이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성별과 인종으로 이뤄진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다양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인종별로 고정관념적인 외모를 활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으니까. 당장 아샤의 가장 친한 친구 '달리아'(제니퍼 쿠미야마)만 해도 동아시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키가 작고, 통통하며, 안경을 쓴 여성으로 그려졌다.
이에 더해 동화의 근본적인 한계가 또 한 번 디즈니의 발목을 잡는다. 아무리 다양한 인종과 성별이 작품 내에 공존한다고 해도 다양성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병풍에 불과하다. 동화는 특정한 주인공 한 명의 이야기이고, 필연적으로 그의 특징만 부각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처럼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줘야 할 변화도 <위시>에서는 결국 모순으로 귀결된다.
엔딩 크레디트만 빛난다
그럴수록 <위시>에는 100주년을 기념하겠다는 강박만이 남는다. 물론 강박의 순기능도 있다. 모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교집합 내지는 프리퀄 같은 오마주는 디즈니 작품을 보며 자란 관객에게 독특한 감동을 안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녹아 있는 엔딩 크레디트 역시 100주년에 걸맞은 인상적인 순간을 선사한다.
다만 이 모든 노력은 찰나의 기쁨일 뿐이다. 과거의 영광은 변화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할리우드에서도 꿈과 환상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잘 그려내기로 유명했던 디즈니의 100주년 기념작 치고는 중요한 미덕을 여럿 빼먹은 셈이다. 그러니 <위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안에 담긴 디즈니의 현재와 미래가 마냥 화려해 보이지는 않으므로.
Poor 형편없음
동화와 현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표류 중인 디즈니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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