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2-11 12:26:51
영화 보고 나면 편지할게요
잊을 수 없는 영화 속 편지

씨네픽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녕하세요, 씨네픽입니다.
날씨가 부쩍 추워졌는데 다들 건강 잘 챙기고 계신가요?
다가온 연말연시로 인해 편지 쓸 일이 많아졌죠.
에디터는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고 받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편지와 가까운 사람인가요?
편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어도 괜찮습니다.
편지와 어색한 사람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불쑥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길 거예요.
그럼, 영화 보고 나면 또 편지할게요.
사랑을 담아,
씨네픽 드림.

줄거리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줄거리
아빠와 20여 년 전 갔던 튀르키예 여행.
둘만의 기억이 담긴 오래된 캠코더를 꺼내자 그해 여름이 물결처럼 출렁이기 시작한다.

줄거리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윤희' 앞으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편지를 몰래 읽어본 딸 '새봄'은 편지의 내용을 숨긴 채 발신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여행을 제안하고, '윤희'는 비밀스러웠던 첫사랑의 기억으로 가슴이 뛴다. '새봄'과 함께 여행을 떠난 ‘윤희’는 끝없이 눈이 내리는 그곳에서 첫사랑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데…

줄거리
쌍둥이 남매인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 나왈의 유언을 전해 듣고 혼란에 빠진다. 유언의 내용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생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자신이 남긴 편지를 전해달라는 것. 또한 편지를 전하기 전까지는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 담겨있다. 어머니의 흔적을 따라 중동으로 떠난 남매는 베일에 싸여 있던 그녀의 과거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끝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는데....

줄거리
“오늘은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오후, 세미는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 하은에게로 향한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마음을 오늘은 반드시 전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쳐 흐르는 마음과 달리 자꾸만 어긋나는 두 사람.
서툰 오해와 상처를 뒤로하고, 세미는 하은에게 진심을 고백할 수 있을까?

줄거리
용돈 벌이를 위해 폴의 러브레터 대필을 맡게 된 엘리.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자꾸 만나다 보니 이 친구, 정이 든다. 그런데 그건 둘째 치고, 러브레터 상대에게 자꾸 설레는 걸 어쩐담?

줄거리
"1998년 1월엔 눈이 많이 왔어요. 감기 조심하세요." '일마레'로 이사온 성현(이정재 분)에게 이상한 편지가 남겨있다. 1999년, 2년 후로부터 온 편지. 그 편지에 있던 내용들이 예언과도 같이 현실 속에 나타난다. 그날은 거짓말 같이 함박눈이 내리고. 자신의 편지가 1998년 12월로 갔다는 것을 믿게 된 은주(전지현 분)는 자주 그곳으로 편지를 보낸다.

줄거리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뉴올리언즈. 80세의 외모를 가진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버튼.
부모에게 버려져 양로원에서 노인들과 함께 지내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12살이 되어 60대의 외모를 가지게 된 그는 어느 날 6살 소녀 데이지를 만난 후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잊지 못하게 된다. 청년이 되어 세상으로 나간 벤자민은 숙녀가 된 데이지와 만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 비로소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벤자민은 날마다 젊어지고 데이지는 점점 늙어가는데…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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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친한 친구 사이도 한 번의 낙인으로 영원히 멀어지기도 한다.
시놉시스
레오와 레미는 둘 도 없는 친한 친구이다. 둘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서로가 좋은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중학교에 처음 입학하면서 호모라고 놀리는 덩치 큰 동급생 때문에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 레미는 레오를 피하게 되고 레오는 그런 레미에게 왜 피하냐고 물어보지만 레미가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과연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들에게 왜 그런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까?
이 영화는 친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동성애라는 무거운 주제라고 보는 해석도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한 해석은 조금 다르다. 레미는 상냥하고 음악적으로 재능이 있어서 연주회에도 참가한다. 레미가 플라리넷을 즐겨 부르는 모습이 레오에게는 레미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라고 보았다. 레오가 나중에 레미의 매니저를 한다고 자처했을 만큼 대단하게 여겼나 보다. 또한 동성애로 의심받는 장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둘이 침대에서 안고서 자거나 서로를 만지거나 하는 장면들이다. 하지만 덩치 큰 동급생에게 호모라고 들은 레미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레미가 없는 상실감에 레오는 자신을 나무라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레미의 엄마인 소피에게도 찾아가며 계속해서 자책감을 가지고 레미의 빈자리를 어떻게든 다른 방식으로 채우려 했다. 하키를 하는 레오는 그런 상실감 때문에 하키 경기에서 넘어지기도 하지만 가깝게 지낸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처음에 레미도 사실은 레오를 싫어하지 않았다. 둘이 어긋난 계기는 바로 호모라는 단어였다. 그 단어 때문에 둘의 우정은 어긋나버렸고 티격태격하게 된다.
클로즈라는 영화에서도 학생들 중에 레즈비언 커플이 나오는데 레오와 레미에게 서로 사귀는 게 아니냐는 질문도 한다. 그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레오와 레미는 어떻게든 호모라는 낙인을 피하기 위해 애써왔다. 단지 극심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을 뿐인데 오해를 산 것이다. 레미의 장례식에 참여한 레오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생각이 많아져 잠도 못 자고 무서워서 이불에 오줌을 싸기도 한다. 클로즈라는 영화 제목만큼 이 둘에게 누군가가 무심코 뱉은 단어가 큰 아픔을 주고 가까웠던 사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이 영화의 흐름은 정적이고
따뜻하게 흘러간다.
그게 가장 큰 이 영화의 묘미였던 것 같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영화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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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에서 보내는 응원
"나이 드니까 눈물만 많아져. 어쩐지 눈물이 나네." 같은 말에서는 괜스레 낙엽 냄새가 난다고, 그러니 내 입에서 나오기엔 좀 방정맞은 것 같다고, 아마도 십대쯤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들이 왜 저런 문장을 골랐는지 알 것 같은 순간들이, 가끔 그 비슷한 말이 슬쩍 떠오르는 날들이 있다. 이전에는 무심하게 넘어가던 일들이 실은 여상하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탓이다.
꽃 한 송이 피는 순간이나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아문 자리는 어쩜 그리 경이로운지. 남들 다 하고 사는 일 중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들이 많은지.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느낌을 즐기며 천문학 책을 읽어보는데 중력이나 관성 같은 개념은 어쩜 그렇게 신비로운지. 모두 다 이전에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두 번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 깨달음이 켜켜이 쌓인 자리에 무언가 와 닿았을 때, 그래서 물방울이 터지듯 눈물이 훅 고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어쩐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기실 이게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걸까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할 시간이 우리에겐 많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나이 드니까', '어쩐지'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시간을 그렇게 허덕허덕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에 수록된 단편을 읽다가 그렇게 "어쩐지" 울컥한 장면이 있다. 어떤 자매의 이야기였는데, 동생에게 생긴 큰 변화를 엄마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언니가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이었다. 버는 돈 대부분을 책과 영화에 쏟아내며 사는 자신의 존재는 엄마에게 어떨까 생각하는, 뭐 대략 그런 문장이었다. 전철 한가운데서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터졌다. 어쩐지 울컥하네. 그리고 마침 전철 한가운데였으므로, 종점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으므로 그 "어쩐지"의 정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건 내가 가진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정적인 것들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엄마도 아빠도 눈치를 주지 않건만 괜스레 눈치 보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십대 때처럼 대단한 입신양명을 꿈꾸는 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는 세간의 말에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세간'과 반대로 가는 삶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그 걸음조차 흔들리는 그대로 괜찮다고 끌어안아준다. 좋은 영화, 마음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찬실은 마치 어려운 날 함께 앉아있어 주는 친구처럼 따스하고 다정하다.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 정말 굉장히 운이 좋은 찬실이란 사람이 나오나 봐 ” 라고 생각한 한국인이 있을까? ( 내 친구는 자꾸 “ 찬실이는 복도 없지 ” 로 기억했다. ) 시놉시스를 볼 것도 없이 찬실이의 날들이 꽤나 박복하게 굴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제목이기도 하다.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프로듀서다. 즉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영화라는 형태에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할 때, 그걸 현실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기획과 제작부터 홍보와 개봉까지 전 과정에 손이 닿는 사람, 본인 말을 빌자면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다. 찬실은 예술 영화로서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감독과 오래 같이 일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영화 찍으며 평생 살 줄 알았다. 감독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갑작스럽게 실업자가 될 때까지는.
찬실이의 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OST 가사처럼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부대껴오는 것이다. 시간과 애정을 다 바쳐 사랑한 영화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고 때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기도 하면서 찬실은 씩씩하게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추려 언덕길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 문간방으로, 사각형도 오각형도 아니고 반지하도 1층도 아닌 방으로 이사한다. 생계를 위해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급브레이크 걸린 길에서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나.
찬실에게는 별로 여유가 없다. "한국 영화계의 보배"라며 찬실을 추켜세우던 영화사 대표는 ‘감독의 예술이었으니 프로듀서가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며 직업인으로서의 찬실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때마침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친다는 단편영화 감독 영을 보면서는 또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하다. 좋아하고 어쩌고 할 만큼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리고 정작 알아보면 그렇게까지 잘 맞지도 않지만 ("노올란?!"), 이 정도면 대충 업계도 맞겠다 사람도 다정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적당히 연애라도 해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조각배 같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던 찬실의 일상에 한 남자가 더 나타난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맘보 춤을 출 것만 같은 속옷 차림새에, 추위에 파르라니 떨면서도 콘셉트에 충실하게 머리카락까지 고슬고슬 만지작거리는 그는,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한다. 유령일까 환상일까 아니면 영화의 현신 같은 존재일까. 아무튼 그는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고, 찬실은 "이제 내가 미칬는갑다... 완전히 돌았는갑다..." 하고 서러워한다.
이 모든 주변인 틈바구니에서 찬실은 어떤 카테고리로 규정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뚜렷하게 계약서 찍힌 직업도 없고, 함께 서로를 보듬자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도 없고, 하다 못해 여태까지 해왔던 일조차도 없어졌지만 찬실은 늘 최선을 다한다. 장국영에게 고민 상담을 하거나, 영과 잘해보겠다고 도시락 싸들고 따라가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소피에게도 너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고, 더듬더듬 한글을 배우는 집주인 할머니 숙제를 도와드리거나 함께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그리고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도시 곳곳에 세금으로 조성한 공간을 저렇게 귀엽게 활용할 수도 있구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무시하고 오즈 야스지로(를 비롯해 '시네필'들이 좋아하는 감독)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렇게 유쾌할 수도 있구나. 빛날 찬 열매 실, "내하고 닮았나" 고민했던 모과처럼 단단하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모과 바로 뒤에 붙어나온 배, 사과, 곶감 등 영화 대박 기원 고사상의 과일들은 끝내 그녀의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찬실에게는 알찬 열매라면 으레 그렇듯 은은한 윤기가 돈다.
그러는 동안 장국영은 찬실에게 계속 묻는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영화를 "해나갈 수 있을까" 묻는 찬실에게, 찬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묻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영과 "잘될 수 있을까"를 묻는 찬실에게, 외로운 건 외로운 것일 뿐이니 상대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일련의 일들 끝에 찬실은 모든 걸 게워낸 사람이 물병을 더듬더듬 붙들듯 다시 영화를 잡는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찬실은 "하고 싶은 일"의 첫걸음을 떼어나간다.
영화 끝에서 찬실은 장국영이 메어주는 아코디언을 한 품 가득 끌어안고 희망가를 연주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시작과 끝에 어쩐지 쓸쓸한 바람 소리를 품고 있는 악기여서일까. 제목은 희망이라지만 어쩐지 절망적인 시대에 불리던 아득한 노랫말이어서일까. 그 장면은 어쩐지 눈물겹다.
이 영화에서 내게 "어쩐지" 눈물이 난 부분은 이 장면이었다. 차분한 연주 끝, 그동안 자기 일처럼 열을 내며 해준 장국영의 조언이 더 이상 찬실에게 필요치 않다는 걸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
"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그 차분한 인사는 마치 영화와 주고받는 말 같았다. 우리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영화에 있어 늘 외부자라고만 느꼈던 내게도 영화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었다. 우주 어딘가에서도 누군가가 담은 마음을, 때로는 택배 받듯 때로는 유리병 편지 받듯 건네어 받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오래오래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이따금 끄집어내어 살펴보는 것. 그게 영화와 나의 관계였다. 찬실처럼 프로듀서가 되고 감독이 될 일도, 영처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업을 두루 섭렵할 일도, 하다 못해 이미 폐간된 <키노> 지를 쌓아놓고 정성일 평론가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일도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영화는 선물처럼 가까이 와준다. 마치 이 영화, 찬실이 그랬듯.
영상으로 보다 보면 닮아 보인다. 진짜다.
영화의 현신 장국영. 그를 우리가 길이길이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영화의 아우라가 있으니까. 이 영화에도 나온 <아비정전>의 옷차림이 그의 외적 시그니처라면, <패왕별희>는 그의 내적 시그니처였다. <패왕별희>에서 그가 맡은 데이는 철저하게 이야기 속으로 침잠한 인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가장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데이인데, 그럼에도 그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건 영화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의 극단에 서 있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쥬샨이다. 거친 현실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던 쥬샨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던 데이. 샬로는 그 사이에서 남편이었다 패왕이었다 하며 갈지자로 걸었다. 이야기 안에만 있고자 한 이에게 현실은 너무 거셌고, 현실을 바지런히 걷고자 한 이에게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었다. 끝내 현실은 이야기를 밀어내지 못했고, 이야기는 현실을 지우지 못했다. 공리와 장국영은 대척점에 있었지만 실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찍힌 대척점이었다. 현실과 픽션은, 삶과 영화는 그렇게 먼 것 같지만 멀지만은 않다.
이따금 <패왕별희>의 어떤 장면이 생각나는 이유. 장국영의 눈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 삶에 에너지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내가 찬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들여다보는 이유. 우리가 늘 이야기를 찾는 이유는, "사는 게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라는 찬실의 말에, 다른 이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서 비춰주는 찬실의 플래시에 녹아 있는지 모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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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의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해
돌덩이 같은 가방을 메고 하루 종일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보따리 강사. 그럼에도 동료 강사의 부당해고에 분노하며 생계는 나몰라라 투쟁에 앞장서는 ‘나의 딸’ 혼인 신고조차 할 수 없는 동성 연인과 7년 째 연애를 하고 있는 ‘나의 딸’이 집으로 돌아왔다, 동성 연인과 함께. 세상의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는 딸과 세상에 부적합한 딸을 이해할 수 없는 나 우리가 함께 마주할 세계가 있을까?
<딸에 대하여> 줄거리
불편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나의 감정을 하나로 꼽자면 이 말밖에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은 정말 어디선가 봤을 법한 아니 이미 내 주변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너무 현실적이기에 불편할 수밖에. 이 영화는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성소수자인 딸과 딸의 연인이 중심이 아니라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7년째 연애 중인 딸의 연인은 여자다. 그래도 눈앞에서 딸의 연애 그리고 그 연인을 보지는 않았기에 탐탁지 않아도 참고 있다.
그런데 마음 준비할 생각도 없었지만 겨를 없이 갑작스레 함께 살게 된 딸과 그의 연인.
딸의 연인이라는 여자, 레인과 함께 살기 시작한 엄마. 늦은 밤 딸과 함께 속닥거리는 소리도 아침저녁마다 겹치는 동선도 모두 불편할 따름이다. 딸에게는 쉬이 드러내지 못하는 불쾌한 속내를 레인에게는 잘도 드러낸다. 딸이 그린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겪고 있는 일들이 모두 레인 탓이라 여기는 걸까. 아니면 잠깐이면 끝날 장난을 7년 동안 이어온 그 둘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버스에서 본 여학생들처럼 아직까지도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는 둘의 모습에 시종일관 뭐가 얹힌 듯이 가라앉아 있는 표정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명하다.
왜 하필 내 딸이. 세상의 부조리에 부조리하다 말하는 건 당연하지만 내 딸이 그 부조리 속에 있는 건 안된다. 남들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부모의 마음 알지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린에게 이 투쟁은 곧 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면할 수 없다. 멈출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딸의 행동에 당장 화를 내고 그만두라 소리치고 싶지만 남들이 말하는 평범과는 먼 딸의 삶을 마주 하긴 두렵다. 그린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불편해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나의 가족이 나를 그리고 내 연인을 불쾌해 하는 걸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터질 듯 말 듯 한 아슬한 분위기와 불편하고 울분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을 정말 잘 표현한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압권이었다. 덕분에 서로 이해하지 않고 있던 세상들이 충돌했을 때 장난 혹은 잘못된 것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실재하고 있는 모습을 맞닥뜨렸을 때의 인물들의 울분과 분노가 아무려 나와 관련 없는 이해 못 하는 관점이라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든다.
엄마의 삶은 딸에 대한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엄마는 가족도 아무도 없는 제희를 돌보고 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살뜰히 그를 챙기는 엄마. 모두가 그 모습에 의문을 표한다. 요양 보호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아님 이타적인 마음에 의해?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제희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일 거라는 공포 그리고 불안 때문이었다. 그의 일이 내 일이 될 수도 있고 아니 내 일이 될 테니까.
결국 세상에 내팽개쳐진 제희를 위해 소리치고 직접 움직이는 엄마를 보며 그린의 맞서는 행동들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겠더라. 결국 모두들 각자의 부조리에 맞서고 있다. 엄마는 나 혹은 나의 딸이 될지도 모르는 무연고자로서의 삶이 두렵기에 소리를 내고 그를 끝가지 돌본다. 엄마의 삶 역시 사회적 약자로서의 연대와 투쟁으로 가득하기에 자신의 딸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엄마이기에 딸을 먹으면서도 결국 끝까지 곁에 있어준다.
그린과 레인의 모습은 7년의 연애 기간이 무색하지 않게 안정적이다. 그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게 된 엄마. 그린이 생판 남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게 된 엄마. 그린과 레인 주변에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본 엄마. 결국 무연고자로 아무도 오지 않는 장례식을 치렀지만 그린과 레인, 그리고 자신까지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들로 조금이나마 채워진 장례식장을 본 엄마. 그는 그런 일들을 겪었다고 당장에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세상을 뒤엎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엄마의 미소가 편안해 보이는 건 그런 타인의 삶을 혹시 나에게도 펼쳐질지 모르는 그런 불안한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멋대로 해석해 본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딸에 대하여>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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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의 사고실험 혹은 순수오락, 그리고 희망
<미키 17>과 비교할 만한 봉준호의 영화들로는 <설국열차>, <옥자>, 그리고 넓게 잡으면 <기생충>까지 들 수 있겠다. <미키 17>이 <설국열차>, <옥자>에 이은 봉준호의 세 번째 영어 영화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들뿐만 아니라 <기생충>과도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 영화들은 <미키 17>과 관련지어 언급할 만하다. 봉준호는 이 세 영화들에서 자본주의 논리에 기반한 현대사회를 비판, 풍자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존재하는 현실을 대유법으로 과장하거나(<옥자>) 우화적으로 도식화하는(<설국열차>, <기생충>) 방식이었다. 그런데 <미키 17>은 경우가 좀 다르다.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듯 <미키 17>은 죽었다가 재프린팅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인간이라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영화에서도 설명에 오랜 시간을 할애한 이후 오프닝 타이틀을 띄울 만큼 이 설정은 중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미키 17>이 위의 세 영화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전제에서 시작된 풍자는 현실세계에 미치는 효력이 없다. <미키 17>이 던지고 있는 '희소성이 없는 생명도 효율성에 우선하는가?'라는 질문은 익스펜더블이라는 영화 내 세계의 특수한 전제 하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현실과 영화가 비유의 언어로 엮여 있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과 달리 <미키 17>은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잇는 끈이 끊겨 있다. 봉준호의 전작들과 <미키 17>의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미키 17>에 대한 판단의 시작이다. 자주 성기어지는 각본, 산만하게 결합하는 장면들, 전작들의 요소가 어설프게 섞인 세계 등은 부차적인 문제다.
과격하게 뭉뚱그리자면 <미키 17>의 달라진 전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미키 17>의 달라진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의 경우. 관객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키 17>을 납득할 수 없다. 미키가 아무리 고난을 겪어도, 마샬 부부가 아무리 우스꽝스럽게 그려져도 관객은 <미키 17>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풍자와 비판은 현실에 복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현실과 떨어진 전제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사고실험에 가까워진다. 두 번째, ‘<미키 17>의 달라진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의 경우. 관객은 봉준호를 오락영화 감독으로 여긴다. 천만 영화 두 편과 블록버스터급 규모의 영화 세 편을 보유한 감독인 봉준호는 실제로 예술영화 감독이기보다 히치콕을 보고 자란 장르영화 감독이기를 자처해왔다. 이 경우라면 현실과의 연결이 느슨해진 <미키 17>의 전제는 그가 보다 자유롭게 원초적 오락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키 17>의 문제는 오히려 두 번째 경우에서 발생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순수 오락영화를 기대하며 극장에 들어섰던 두 번째 관객은 실망하며 극장을 나선다. 바로 그 오락적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키 17>은 SF 블록버스터로서도, 블랙코미디 장르영화로서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미키 17>은 류승완 필모그래피에서의 <밀수>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었으나 실패한 경우다.
봉준호의 영화가 흥미로워질 때는 후반부에 이르러 질문을 살짝 비틀 때이다. <설국열차>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커티스와 남궁민수 모두가 죽을 때이다. <옥자>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미자가 옥자를 살 때이다. <미키 17>에서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미키 17>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마마 크리퍼가 루코와 인간의 1대1 생명 교환을 요구할 때이다. 따지자면 <옥자>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미키 17> 속 세계는 ‘희소성 없는 생명 < 효율성’의 공식을 주장한다. 크리퍼 종족은 ‘1개의 생명 = 1개의 생명 > 효율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뿐이다. 크리퍼는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약간 고능한 존재로 그려지며, 미키를 살려준 이유는 단지 죽일 이유가 없어서였다. 만약 이들에게도 익스펜더블이라는 특수한 전제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이 질문에 대한 봉준호의 대답이 궁금해진다.
이동진 평론가는 <옥자>에 대해 ‘봉준호의 세계에서 희망은 횃불이 아니라 불씨다’라는 한 줄 평을 남겼다. 이 말은 <미키 17>에도 적용된다. 크리퍼마저 생명의 가치를 계산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항해 봉준호는 ‘마샬&미키 18 - 루코’의 2대1 교환이라는 묘수를 둔다. 생명의 등가교환을 요구하는 크리퍼의 질문에 그 질문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미키 17>에서 희망이 불씨의 형태인 이유는 그 희망의 크기가 작아서가 아니라 희망이라는 봉준호의 대답이 형식적으로 눈에 띄지 않아서이다. 영화에서 2대1 교환이라는 선택은 그 불균질함이 강조되지도 않고, 마마 크리퍼의 요구와 미키 17&18의 멀티플 문제, 마샬이라는 빌런에 대한 해결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서사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봉준호가 내놓은 이 독특한 형식의 대답이 <미키 17>의 실패 속에서도 반짝이는 불씨처럼 느껴진다는 점 자체가 이 영화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지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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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귀 EO'의 여정을 굳이 지켜봐야 하는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당나귀 EO>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이 당나귀, 뭔가 다르다
<당나귀 EO>는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19번째 장편 영화로,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당나귀다. 이름은 EO. 카메라는 그의 여행을 조용히 뒤따른다. 동물보호단체에 의해 서커스단으로부터 구조된 EO. 그는 농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축구팀 마스코트도 됐다가, 소지지 공장에서 간신히 탈출하며 폴란드에서 이탈리아까지 여행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선뜻 와닿지 않는다. 당나귀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대사도 적고, EO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단편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한 이질감도 있다.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연기하는 당나귀도 바뀌다 보니 더욱 그렇다. 중간중간 VR 게임을 하는듯한 실험적인 구도가 삽입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고요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워서 지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친절하다. 자칫 지리멸렬할 뻔한 예술 영화의 속살을 음미할 문을 슬쩍 열어준다. 오프닝이 그 문이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EO는 파트너인 '카산드라'(산드라 지말스카)와 함께 관능적인 공연을 펼친다. 파편화된 이미지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EO와 카산드라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호흡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굳이 당나귀의 눈을 빌려 인간 세상을 관조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동물에 관심 없는 동물단체의 역설
카산드라와의 공연이 끝나고, EO는 곧장 생이별을 경험한다. 동물 서커스가 동물 학대라는 시위대가 등장해 카산드라를 비난한다. 서커스단을 떠난 EO는 다름 동물과 함께 한 목장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마스코트로서 기념행사의 배경을 장식한다. 정치인과 동물보호단체 관계자가 맥주를 들고 자축하는 동안. 목장에서의 삶은 서커스단에서의 생활과 다르지 않다. EO는 짐을 나르고, 다른 말은 화보 촬영의 도구로 사용된다.
자연히 의문이 생긴다. 동물 보호 단체에게 동물 학대는 어떤 의미일까? 동물을 수단으로써 활용하지 말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화보 촬영이나 짐 나르기에 말과 당나귀를 이용하는 관행도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학대한다고 비난받던 카산드라만 EO를 사랑으로 대한다. 그를 찾아내고, 생일을 축하해 준다. 심지어 그 순간 EO는 마침내 자기 발로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렇듯 EO의 여정은 동물 보호 단체의 역설을 지적하면서 진정으로 시작된다. EO가 서커스단에서 착취당한다는 보호 단체의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EO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진정으로 동물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보다는, 동물을 구하는 정의로운 자기 모습에 도취되는 모순이다. 이후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이는 <당나귀 EO>가 보여주려는, 또 EO가 목격한 인간 세상의 본질이나 다름없다.
인간에게 휘둘리는 동물의 가치
실제로 EO는 다양한 인간 세상을 만나며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점을 목격한다. 이때 핵심은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기분에 따라 EO를 대한다는 것. 훌리건이 대표적이다. 축구 경기에서 이긴 팀은 EO를 팀의 마스코트로 여긴다. 경기를 이기게 해 준 승리의 상징이다. 반대로 패배한 팀 서포터즈는 EO를 저주한다. 괜히 등장해서 경기를 망쳤다며 비난한다. 이들의 행동은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인간의 변덕, 정의심, 무관심의 발로로 인해 인간 주변이 다친다는 것. EO가 겪은 대부분의 폭력이 그런 형태였다. 인간에게는 신경 쓸 겨를이나 가치도 없는 당연한 일이지만, 인간이 무심코 던진 돌에 동물은 맞아서 피를 흘린다는 것. 마구간, 농장, 숲, 소방대원, 동물 병원, 햄 공장 트럭, 도축장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일방향적인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한 저택에서 잘 드러난다. 한 백작 부인이 신부인 아들을 혼낸다. 그러다가 돌연 둘이 불륜 관계일 수 있다는 암시가 나온다. 관객 입장에서는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는 자세한 사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EO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장면이므로. EO는 그저 저택을 외면하고 떠난다. 그의 무관심은 인간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반대로 인간은 아무런 생각 없이 동물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이 비대칭성 때문에 EO의 여정은 슬플 수밖에 없다.
메시지와 일체화된 연출
영화의 메시지는 다양한 연출 기법을 만나 극대화된다. 빨간 조명이 대표적이다. 중간중간 삽입된 붉은 화면은 여러 동물의 시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늘을 날다가 땅에 떨어지는 새, 좁은 운동장을 돌고 도는 말, 넘어지고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자기 모습을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로봇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영화 속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더 떠올릴 수 있다. 사냥 당해 죽은 늑대, 모피 때문에 죽은 여우, 어항에 갇힌 물고기.
이는 EO의 마지막 행선지가 소 도축장인 이유다. 빨간 조명이 가득한 서커스장에서 출발한 EO의 여정은 붉은빛 가득한 트럭을 거쳐 함께 죽어야만 하는 도축장에서 끝난다. 인간 세상의 모순을 목격한 모험의 끝은 죽음이다. 이 과정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당나귀 EO> 인간의 관점으로만 고려하는 동물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진정한' 폭력에 대해서도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붉은 조명 외의 다른 수단 덕분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롭게 고찰하자는 메시지에는 더 큰 힘이 실린다. 핸드헬드, EO의 시야에 맞춘 카메라워크, 동물 형태의 로봇을 활용한 화면 구성 등 실험적인 요소가 동원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삽입된다. 이는 곧 생각의 전환, 사고의 충격을 유발한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화법으로 EO의 메시지를 상기시키는 셈이다.
낮은 곳에 임하신 당나귀
이에 더해 <당나귀 EO>는 동물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동물의 이야기를 인간사로 확장시킨다. 실제로 붉은 조명은 동물들이 학대당하고 죽어가는 순간은 물론, 인간들이 다칠 때도 삽입된다. 일례로 살라미용 말고기를 운반하는 트럭 운전사는 한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 그러다가 여성은 도망치고, 운전사는 괴한을 만나 죽는다. 이때 트럭 내부는 온통 빨갛다. EO는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한다.
심지어 이 당나귀에게 의미심장한 종교적 이미지가 덧붙여져 있기 때문에 이 장면이 특별하다. EO에게는 역행의 이미지가 달라붙는다. 다시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붉은 조명 속에서 카산드라는 쓰러진 EO를 부둥켜안고 운다. 그러다가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그녀는 EO를 일으켜 세운다. 마치 죽었다가 되살아나듯이.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나와 폭포 앞 아치 다리에 멈춰 선 EO를 비출 때도 마찬가지다. 카메라는 폭포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 강물이 거꾸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이미지 속에 EO를 담는다. 도축장으로 가기 직전인 EO는 마치 죽음으로부터 도망갈지, 담담히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거스르고, 죽음 앞에서 고민하는 당나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동물과 비루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의 삶까지 모두 살펴보는 당나귀. 말보다 효용가치가 없어서 가장 안 좋은 취급을 받는 당나귀. 이 상징을 한 데 모으면 한 인물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바로 예수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왔던 그가 이번에는 당나귀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온 듯한 인상을 주는 셈이다.
즉, 죽음과 폭력의 이미지가 넘쳐나는 영화에서 EO는 대사 없이 말한다. 가장 흔하고 초라하게 죽는 당나귀의 여정을 통해서 동물은 물론, 인간 사회의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실마리를 구하라고. 결국 <당나귀 EO>는 한 구원자, 메시아의 여정을 되풀이하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바로 이것이 평범해 보이는 한 당나귀 여행을 눈여겨 지켜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가장 낮은 곳에서 모순덩어리 인간 세계를 관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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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레이더스 시사회 영화 후기 - 독재로부터 자유를 빼앗기질 않을 권리!
서기 2043년 독재국가인 에머슨이 전쟁을 명분으로 하여 미성년자들을 아카데미라는 곳에 데려가 인간병기로 만든다. 니스카는 자신의 어린 딸인 와시즈를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와시즈는 아카데미에 끌려가게 되고 그로부터 10개월이 흐른다.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한편 와시즈는 아카데미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며 지낸다. 하지만 외톨이로 지내는 와시즈에게 교관이 다가와 자신의 어머니인 니스카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실망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니스카는 자신의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아카데미의 경계에서 매일 원망한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카데미에 있는 자신의 딸과 아이들을 구출하려고 준비하는데...
근미래의 디스토피아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영화!
하니엘의 영화 잠깐 엿보기
단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에머슨에게 길들여진 인간병기로 만들어진다면?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희망이란 없는 걸까?
이 영화는 2043년의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다. 시민들은 식량을 드론으로 배급받는데 형편없는 음식들이다. 그리고 국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여버리는 독재 국가인 에머슨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 자유가 빼앗긴다면 희망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에 쓰일 인간병기를 만들기 위해 미성년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아카데미에서 훈련시킨다. 하지만 미성년자들은 결국 군인으로 키워져 전장에 배치되고 권력의 도구로 쓰이게 된다. 만약 우리도 근미래에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까? 자유라는 게 없어지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과 다를 게 없어진다.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면 사회가 얼마나 비참해지게 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독재가 실행한다 해도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 예시가 니스카를 도와주는 인디언 부족들인데 이들은 토착민이면서 자신의 영토를 수호한다. 후반부에 갈수록 에머슨의 군대와 드론들이 쳐들어와 이들과 싸우려고 하지만 자연을 수호하는 와시즈의 능력이 늦게 발휘된 덕분인지 물러나게 된다. 전쟁을 한다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자유를 빼앗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영화 '나이트 레이더스'였다.
독재 국가는 독을 탄 음식을 억지로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니엘의 주관적인 영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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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불호가 갈린 베놈 완결판 액션(?)드라마 / 액션보다는 브로맨스 / 라스트 댄스 / 감동적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베놈: 라스트 댄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끝나고 1개, 총2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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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람보르기니 : 전설이 된 남자> 메인 예고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람보르기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고향으로 돌아온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그는 트랙터 회사를 세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겠다는 야망을 품고있다. 타협 없는 노력 끝에 결국 트랙터 개발에 성공하였지만, 그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페루치오는 동경하는 자동차 제조사 회장 ‘엔초 페라리’를 찾아가 동업을 제안하지만, 시골 촌놈 취급을 받으며 거절당하는 굴욕을 당한다. 이에 격분한 페루치오는 업계에서 유능하다고 알려진 자동차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며, 황소같이 강력한 차를 만들기위해 의기투합한다. 제네바 모터쇼까지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페루치오는 정말 세상에 선보인 적 없던 최고의 차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황소처럼 강렬한 실화가 눈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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