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수2022-11-16 19:08:09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공포 영화가 아니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 리뷰
(출처: 네이버 영화)
경고: 스포일러 주의!
시골 소녀 엘리(토마신 맥킨지)가 런던의 어떤 패션 대학에 입학한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그녀의 꿈 속에는 샌디(안야 테일러조이)라는 여자 가수가 나타난다. 샌디가 살았던 1960년대 런던은 엘리가 항상 꿈꾸는 장소이기도 하다. 엘리는 샌디를 엿보며 샌디처럼 성공을 꿈꾼다. 그러나 샌디는 성공하지 못한다. 샌디 주위의 남자들은 샌디를 이용했다. 그리고 살해했다. 그 꿈 이후 엘리의 현실 속에는 샌디의 유령이 나타나 엘리를 괴롭힌다.
나는 이 정보를 듣고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했다.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는 모습에 대한 기대, 그 갈등을 마무리하는 방법에 대한 불안. 결론부터 말하자.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모호해지는 모습은 성공적으로 묘사했다. 꿈 속 장면에 나타났던 런던 풍경도 붉은 색깔을 사용해 화려하고 고풍스럽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갈등을 마무리하는 데는 실패했다. 초반 ~ 중반에는 갈등을 잘 키우는 듯하더니 후반에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공포 영화에 기대했던 것을 깨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공포에 대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포 자체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공포 때문에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습만 잘 보여줘도 충분히 재밌는 영화가 나온다. 나한테는 <서스페리아>나 <킬링 디어>가 그랬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공포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공포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시해 초반 ~ 중반에 쌓아올린 공포감을 무너뜨려버린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통해 공포 영화 특유의 오싹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빨간색, 피, 혼령으로 가득 찬 연출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인상에 남은 것은 엘리의 성장이었다. 도시 생활 속의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이 엘리가 좋아할법한 신나는 옛날 음악을 타고 전달된다. 영화를 공포 영화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다. 공포 영화의 연출을 빌린 성장 영화라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에드가 라이트'가 연출한 '공포 영화'라는 키워드 때문일까. 이 영화에 느꼈던 모든 의문이 해결된 뒤 나한테는 아쉬움밖에 남지 않았다. 보통 공포 영화가 끝날 때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드는데 말이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가 공포에 대해 설명을 자제했다면 어땠을까. <유전>처럼 여운이 짙은 명작 호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에드가 라이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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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2 |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위선자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우승자가 되어 456억 원이라는 거액을 손에 넣었지만, 게임에서 죽은 친구와 동료를 잊지 못하는 '성기훈'(이정재). 그는 사람들이 돈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이 게임을 중단시키기로 결심하고, 게임 진행의 총책임자인 '프론트맨'(이병헌)을 쫓는다. 그 출발점으로 기훈은 2년간 서울 지하철을 뒤진 끝에 게임 참가자 모집책인 '딱지남'(공유)을 찾아낸다.
딱지남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기훈은 마침내 프론트맨을 만나만, 곧바로 그의 계략에 당한 나머지 다시 한번 오징어 게임에 끌려간다. 경험을 살려 경마장 친구 '박정배'(이서환)를 포함해 모든 참가자를 살리고, 게임을 멈추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기훈. 그러나 '타노스'(최승현) 등 상금에 눈이 먼 참가자들은 그의 말을 부정하며 혼란을 초래하고, 그 사이 가명으로 게임에 참여한 프론트맨은 기훈과 그의 계획을 더 자세히 파헤친다.
1승을 더한 속편의 저주
<오징어 게임>이 쌓아 올린 금자탑은 화려했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흥행한 작품 중 하나였고, 제74회 에미상에서도 남우주연상과 작품상을 비롯해 여섯 부문을 석권했다. 자연히 시즌 2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겉모습은 기대를 충족시키기도 남았다. 주연 이정재는 <스타워즈>에도 출연하면서 더 중요한 배우로 성장했고, 임시완, 강하늘, 이진욱 등 각각 드라마 한 편의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배우들도 결집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공개된 <오징어 게임 2>는 전 세계적인 흥행력과는 별개로 실망스럽다. 시작은 좋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힘이 부족하다. 여러 이유가 있다. 다음 시즌을 위한 징검다리라는 점이 명확하다 보니 극의 완성도가 부실하다. 지난 시즌에 비해 캐릭터들의 매력도 명확하지 않다. 새롭게 등장한 게임들도 지난 시즌에 비해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메시지다. <오징어 게임>은 잔혹하고 원초적인 자극을 통해 적자생존, 계급사회, 승자독식 같은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발했다. 3년 만의 속편은 주제의식을 계승하고, 확장시키려는 듯하다. 그러나 속편의 완성도와 존재 자체가 작품과 브랜드 간의 갈등을 극대화한 결과, <오징어 게임 2>는 위선자라는 오명을 피하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과 경제적 합리성
자본주의 질서는 한 가지를 전제한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합리성을 갖췄다는 가정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돌아올 효용이 극대화되는 선택지를 자율적으로 고른다. 이익이 되는 행동을 선택하고, 피해를 주는 선택은 포기한다. 3년 전, <오징어 게임>은 경제적 합리성이 극단적으로 발현된 상황을 보여줬다.
'상우'(박해수), '일남'(오영수)과 기훈의 대립이 그 예시다. 상우는 456억 원을 얻기 위해서 우정, 연민처럼 인간적인 가치를 기꺼이 포기한다. 일남은 기훈과 마지막까지 내기를 한다. 눈 오는 밤에 얼어 죽기 직전인 노숙자를 아무도 돕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는 인간의 선악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인간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명제에 대한 판단이다. 일남이 보기에 남을 도와서 얻는 정서적 만족은 경제적으로 무의미하다.
기훈은 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타인을 수단화하거나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면서 상우를 끝까지 설득한다. 우승 상금도 다른 참가자의 목숨값이라 여기며 쓰지 않는다. 일남과 달리 사람들이 아직 경제적인 효용보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경제적 가치 외에 인간성, 신뢰 같은 의미도 같이 고려한다는 것. 기훈은 극단화된 현실의 구조와 논리에 이상적으로 맞서는 인물인 셈이다.
그렇기에 오징어 게임 속 놀이들은 기훈의 이상과도 같았다. 언제나 아름답고, 소중했다. 하지만 어릴 적 추억은 막대한 상금 앞에서 피로 물들었다. 참가자들은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을 속이고 죽이며 인간성을 내버렸다. 경제적 합리성이 극에 달한 오징어 게임이라는 시공간에서 기훈의 믿음은 추억의 놀이처럼 변색되고 타락했다. 이 간극은 다른 데스 게임보다 오징어 게임이 특히 잔혹하고, 충격적인 이유였다.
무승부로 끝난 러시안룰렛
<오징어 게임>이 기훈의 신념을 외적으로 무너뜨리는 이야기였다면, <오징어 게임 2>는 그 반대다. 기훈 스스로 자기 믿음의 모순에 빠지는 이야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두 번째 시즌의 첫 화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와 맞닿아 있다. 딱지남이 노숙자들에게 빵과 복권 중 하나를 고르게 하는 대목, 그리고 기훈과 딱지남이 러시안룰렛을 하는 장면에 에피소드 7개가 전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빵과 복권 중 합리적인 선택지는 빵이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극히 낮으니까. 그러나 노숙자 대부분은 복권을 고른다. 딱지남은 그런 그들 앞에서 남은 빵을 짓밟는다. 일종의 세리머니다. 게임 요원이었던 그는 게임에 참가했던 아버지를 직접 죽인 후 조직에서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했다. 즉, 그는 일종의 신자유주의적 삶의 방식을 체화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낮은 확률에 인생을 거는 게임 참가자들은 도태된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
오징어 게임을 내재화한 딱지남과 기훈의 러시안룰렛은 향후 펼쳐질 싸움의 함의를 암시한다. 그가 보기에 기훈의 대의는 모순 범벅이다. 뺨을 맞는 대가로 돈을 받을 때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존엄성을 포기했다. 인간적 가치 대신 물질적 효용을 선택했고, 그 끝에서는 우승 상금도 획득했다. 모든 이득을 챙긴 후에야 게임을 파괴하겠다고 날뛴다. 딱지남의 시점에서는 기훈의 정의가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러시안룰렛으로써 기훈의 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기훈이 먼저 게임의 규칙을 어기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기훈은 규칙을 깨지 않았다. 이에 딱지남은 규칙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먼저 규칙을 어기는 것은 기훈의 모순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까지도 부정한다는 말이니까. 다르게 보면 기훈도, 딱지남도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못한 셈이다.
모순 끝에 패배한 2라운드
러시안룰렛이 1라운드였다면, 오징어 게임은 2라운드라고 할 수 있다. 프론트맨은 기훈의 바로 옆에서 게임에 참가하며 그의 신념과 믿음을 시험한다. 지난 게임 속 일남과 기훈을 연상시키는 언행을 보여며 기훈을 혼란에 빠트린다. 더 나아가 기훈을 자기모순 속에 가두고자 한다. 그 중심에는 새로운 규칙인 투표가 있다.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이 진행 여부를 결정한다. 그때마다 기훈은 딜레마를 마주한다.
거액의 상금보다 생명과 도덕성 등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 기훈의 이상은 투표 때마다 부정당한다. 그의 선의와 이상은 게임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합리성에 앞에서 무력하다. 지금까지 번 상금으로는 게임장 밖의 삶을 바꿀 수 없다는 논리는 기훈의 친구와 동료도 설득될 정도로 강력하다. 기훈이 핏대를 높일수록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은 중단되지 않는다"던 프론트맨의 말만 거듭 증명될 뿐이다.
결국 기훈은 1라운드와 달리 2라운드에서는 패배한다. 현실의 벽 앞에서 힘없는 이상주의가 얼마나 무용했는지를 증명하고 만다. 딱지남 앞에서와 달리 기훈은 자기 규칙과 소신을 저버린다. 인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던 그가 게임의 중단이라는 '대'를 위해 일부 참가자라는 '소'를 희생한다. 밤 사이 참가자 간에 솎아내기가 자행될 때, 기훈은 싸움에 휘말린 참가자들을 돕는 대신 사망자로 위장해 진행 요원을 공격할 기회만 엿본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 2>의 클리프행어는 시작과 동시에 예정된 결말에 가깝다. 자신의 영웅 행세가 위선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기훈은 모순 없이 딱지남과 프론트맨의 논리를 진정으로 파훼할 방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서 신념을 고수한 캡틴 아메리카와 루크 스카이워커도 한 번 패배한 후에야 타노스와 다스 베이더를 꺾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난 데 없는 클리프행어
문제는 만듦새다. 설령 서사적으로 필요했더라도, 허술한 전개와 불완전한 내용 때문에 클리프행어는 작위적이다. 기훈의 위선을 드러내는 쿠데타만 해도 설득력이 없다. 그의 쿠데타 시도 자체는 자연스럽다. 기훈은 애초에 오징어 게임을 파괴할 작정이었으므로. 그러나 게임 중단을 원한 참가자들이 쿠데타에 순순히 가담하는 전개는 부자연스럽다. 지금까지 챙긴 상금만으로도 그들은 빚을 갚고 수술비를 낼 수 있기 때문.
즉, 기훈과 프론트맨이 대면하는 엔딩을 위해 이야기가 작위적으로 설계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오징어 게임 2>는 전반적으로 산만하다. 시즌 3을 위해 포석을 두는 데만 열중한 나머지 서사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는 인물도, 눈에 띄는 새 캐릭터도 없다. 극을 주도한 딱지남과 프론트맨은 기존 캐릭터이고, 그 외의 인물들은 조상우나 '장덕수'(허성태)만큼의 생동감을 갖추지 못했다.
그나마 성전환 수술 비용을 벌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특전사 군인, '조현주'(박성훈)가 눈에 띈다. 희생정신과 의리, 정의감과 풍부한 전투 경험을 다 갖춘 그녀는 트랜스젠더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파괴하면서 유의미한 서사와 분량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탈북자 문제, 전세 사기 피해, 미혼모와 낙태 이슈, 청년층의 영끌 투자 열풍 등 여러 사회적 문제를 투영하려 한 시도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이기도 하다.
시즌 2라는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분량을 늘린 듯한 구성도 발목을 잡는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기훈과 준호가 섬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준호의 섬 탐색은 곁가지로 밀려난다. 시즌 2에서 아무런 활약도 보여주지 못할 캐릭터를 위해 에피소드 하나를 날린 셈이다. 그 결과 클리프행어를 마주했을 때, <오징어 게임 2>가 다음을 위한 7시간짜리 티저처럼 느껴지는 실망감을 지울 길이 없다.
긴장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징어 게임 2>가 시청자의 기대를 온전히 충족시킨 것도 아니다. 기훈과 프론트맨의 대립각을 강조하기 위해서 장르적 쾌감을 일부 포기한 대가다. 물론 게임 자체가 재미없지는 않다. 새로운 게임을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시도는 나름대로 유효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직후에 제기차기, 공기놀이, 비사치기, 팽이 돌리기 등과 같이 지난 시즌에 없었던 게임을 배치해 예상을 빗겨 나간 구성이 대표적이다.
짝짓기 게임을 전환점으로 활용한 선택도 영리했다. 게임과 투표를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은 나름대로 서로 의지할 팀을 만든다. 그런데 짝짓기 게임을 기점으로 참여자들의 본성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로 인해 불신의 씨앗이 커지고, 참가자들의 관계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짝짓기 게임이 일반적으로 단합을 위한 레크리에이션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실과 정반대 되는 양상은 더욱 흥미롭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이라는 예상된 함정을 피하지는 못했다. 동화 같은 세트와 동요가 배경으로 깔린 살육 장면은 본질적으로 지난 시즌이 보여준 폭력적인 스펙터클과 다르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더 지루하다. 한국 한정으로는 캐스팅이 이 문제를 심화한다. 지난 시즌과 달리 각자 드라마 주연을 맡아도 될 배우들이 대거 합류한 결과 누가 살고 죽을지 모르는 스릴을 거의 느낄 수 없다.
게임이 끝날 때마다 치러진 투표도 역효과를 낸다. 투표는 일종의 사회적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대화와 협상, 토론과 설득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양극화된 한국 정치 지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아슬아슬하게 갈린 투표 결과에 불복하는 모습 등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이 투표도 세 번째에 이르면 긴장감보다는 지루함의 비율이 높아진다. 투표가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게임이 계속 진행될 거라는 사실이 뻔히 보이기 때문.
위선자의 상술
결과적으로 <오징어 게임 2>는 속편의 존재 자체가 내재한 모순점을 노출하고 만다. <오징어 게임>의 메시지는 상술했듯이 명확했다. 탐욕으로 인해 극한으로 나아간 자본주의의 끝에 위치한 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였다. 가난한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죽일 때, 그 과정마저도 상업화하고 즐기는 현대 사회의 구조와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2>는 본말이 전도됐다. 날카로운 풍자는 잊고, 어린 시절 놀이를 잔인하게 만들면 성공한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췄다. 즉, 철저히 돈벌이를 위한 작품으로 변했다. 매텔, 크록스, 조니 워커를 비롯해 콜라보 대열에 합류한 수많은 브랜드는 그 방증이다. 황동혁 감독도 시즌 1의 금전적 보상이 충분하지 못한 나머지 계획에도 없던 작품을 제작했다고 밝혔으니 예견된 상황일지도 모른다.
물론 넷플릭스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판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이미 <오징어 게임 2>가 갖가지 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으니까. 넷플릭스 드라마 최초로 서비스 중인 모든 국가(93개국)에서 동시 1위를 달성했고, 첫 주에만 6,80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드라마 역대 첫 주 최다 시청수도 경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 게임 2>는 빚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보인다. 시즌 1에 비해 덜 흥미롭고, 짜임새도 부족한 어린 시절 놀이만으로는 노골적인 상업성과 지독한 돈 냄새가 다 가려지지 않기 때문. <오징어 게임>이라는 브랜드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지운 셈이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시즌 3의 전개에 따라 시즌 2가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 정도가 아닐까.
Poor 형편없음
돈에 미친 개가 돈 냄새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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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은 프로, 사랑은 바보'인 여성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이 영화에서 굳이, 어떻게든 이야기할 거리를 찾는다면 주인공 재연의 캐릭터 설정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광고 업계에서 감독으로 일하는 이십 대 후반의 여성 재연은 현장에서는 냉철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인다. 일터에서 재연의 권위는 그녀의 프로다운 태도와 능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사랑에서의 재연은 정반대다. 촬영장에서와는 다른 표정으로 남자 친구에게 애교를 부리면서 계속 ‘을’처럼 군다. 고압적인 예비 시모에게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목격하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갖기 위해 제주도로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이별과 사랑 이야기를 만나며, 마음을 ‘분리’하고 ‘수거’할 필요성을 깨달아간다.
주변에 재연 같은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학업, 취업 등의 영역에서는 철두철미하고 능숙한데 유독 애정 문제에서만큼은 답답할 정도로 바보가 되는 이성애자 여성 친구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는 건가 싶어 놀랐던 기억…. 나는 종종 ‘일과 사랑’에 대한 그녀들의 불일치에 어안이 벙벙해지곤 했다. 친구들 나름대로는 이래저래 만나 봐도 ‘그놈이 그놈이더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고, 내가 알지 못한 매력을 나름대로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는 종종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 ‘바보 같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깎아 먹는 상황에 좌절했고, 언젠가부터는 이해를 ‘포기’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상대의 사랑과 욕망을 투명하게 이해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라 자위하면서.
이는 아마도 남성과 여성이 가진 사회적 자원이 다른 방식으로 평가되는 것이 애정의 대상을 고르는 개개인의 무의식에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혹은 불평등한 젠더 권력의 격차가 개개인의 친밀성 실천을 특정한 방식으로 주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과 사랑’의 아찔한 불일치는 현실에서 똑똑한 이성애자 여성을 절망케 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그러나 일과 사랑 사이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자신의 감정을 다시 사용할 만한 것과 버려야 할 것(분리수거)으로 추리는 재연의 이야기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작위성이 극대화된 여러 캐릭터다. 재연은 제주도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여러 사랑, 이별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재연이 더 단단하고 건강한 사랑관을 갖는 것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어 보인다. 재연의 답답한 사랑에는 사회적 맥락이라도 있는데, 다른 캐릭터들의 사랑은 내실 없는 자극으로만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재취업을 준비하는 애인에게 매달 300만 원씩 용돈을 주고 헤어진 후에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다고 믿는 남자, 뷰티 인플루언서지만 연애는 해보지 못한 여자, 능력주의와 성과주의에 기반해 교수 퇴출을 요구했으나 해당 교수가 연인의 어머니란 걸 알고 다시 복직 운동을 벌이는 남학생,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화를 내면서도 그녀가 임신 중지를 선택하자 화를 내는 남성……. 이들 캐릭터에게는 깊이 있고 내밀한 일상적 친밀성 경험에 대한 탐색이 근본적으로 부재한다. 이들의 사연은 작위의 퍼즐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재연이 이들에게서 감정을 분리수거하는 법을 배운다면, 그 내용은 고작 ‘그래도 내가 저 사람들보다는 낫네’ 정도일 것만 같다. 재연을 위해서는 친밀성과 사랑, 감정에 관한 근본적인 재탐색이 필요해 보인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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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코엔 형제 작품. 다시 봤다. 다시 보고 또 놀랐다. 먼저, 영화 제목을 아무렇게나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코엔 형제가 'no country for old men'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 영화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이번에 알았다.
예이츠의 시 가운데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라는 시에서 가져온 구절로 원래는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예이츠의 시를 읽어보자.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 (저것은 노인의 나라가 아니다.)
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팔짱 낀 젊은이들, 나무 위 새들,)
-- Those dying generations -- at their song, (노래하고 있는 저 죽어가는 세대)
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 (연어 폭포, 고등어 우글대는 바다)
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 (물고기, 짐승, 새들이 여름 내내)
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 (잉태되고 태어나 죽는 모든 것을 찬양한다.)
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모두가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Monuments of unaging intellect.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엔 관심이 없다.)
An aged man is but a paltry thing, (늙은이란 하찮은 것)
A tattered coat upon a stick, unless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일 뿐이리라)
Soul clap its hands and sing, and louder sing (육신의 옷이 너덜너덜 해지는 것을)
For every tatter in its mortal dress, (영혼이 좋아 손뼉치고 크게 노래하지 않는다면)
Nor is there singing school but studying (영혼의 장엄한 기념비를 배우지 않는다면)
Monuments of its own magnificence; (노래를 배울 곳은 아무 데도 없다.)
And therefore I have sailed the seas and come (그래서 나는 바다를 항해하여 왔다)
To the holy city of Byzantium. (거룩한 도시 비잔티움으로.)
O sages standing in God's holy fire (아 벽의 황금 모자이크 그림 속에 있는 듯)
As in the gold mosaic of a wall, (신의 거룩한 불 속에 서 있는 성현들이시여,)
Come from the holy fire, perne in a gyre, (그 성화에서 원을 그리며 내려오셔서)
And be the singing-masters of my soul.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어 주시라.)
Consume my heart away; sick with desire (내 심장을 다 태워버려 주시라, 욕정에 병들고)
And fastened to a dying animal (죽어갈 동물성에 매어)
It knows not what it is; and gather me (제 자신을 알지 못하는 그 심장을 -그리고 나를 거두어 주시라)
Into the artifice of eternity. (영원히 죽지 않은 예술품 안으로.)
Once out of nature I shall never take (자연을 벗어나기만 하면 나는 다시는)
My bodily form from any natural thing, (어떤 자연물에서도 내 육신을 취하지 않으련다.)
But such a form as Grecian goldsmiths make (대신 그리스의 금 세공인들이 망치질한 금과)
Of hammered gold and gold enamelling (황금 유약을 발라 만든 형체를 취하여)
To keep a drowsy Emperor awake; (졸고 있는 황제를 깨우련다.)
Or set upon a golden bough to sing (아니면 황금 가지 위에 앉아)
To lords and ladies of Byzantium (비잔티움의 귀족과 부인들에게 노래해주련다)
Of 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 (지나간 것과 지나가는 것들, 그리고 다가올 것에 대해.)
따라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아니라,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겠다. 어느쪽이든, 이 영화를 상징하는데 있어 기가 막히게 들어 맞는다.
원작 소설을 쓴 코맥 맥카시는 미국 작가로 하드보일드한 액션 스릴러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 역시 '액션 스릴러'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매우 하드보일드한 것만은 틀림없다.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텍사스의 사막 근처에 살고 있는 주인공 모스는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마약 거래 현장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돈가방을 발견한다. 그리고 냉혹한 살인자 안톤 쉬거에게 쫓긴다.
돈가방을 갖고 도망다니는 주인공, 그를 쫓는 살인마 안톤 쉬거, 두 사람을 추적하는 지역보안관. 여기서 '노인'은 지역 보안관 에드를 말한다. 삼대를 이어 지역 보안관으로 일하고 있는 에드는 노련한 경찰이지만, 무차별,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옛날을 그리워한다.
영화 제목과 관련한 직접적인 언급은 영화 끝부분에 에드와 다른 보안관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품위와 존경의 시대가 사라진 지금의 사회에서는 노인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다.
코엔 형제의 작품이 독특하면서도 매력을 끄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개성 있고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보여주는 때로 엉성하면서도 예상하지 못하는 대사는, 웃음과 함께 소름이 끼치게 만든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칼슨 웰즈를 보자. 그는 최근에 HBO의 미니시리즈 '참 형사(트루 디텍티브)'에도 주연으로 등장한 배우인 우디 해럴슨인데, 여기에서는 겉멋든 킬러로 등장한다.
살인마 안톤 쉬거를 처치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등장해서 뭔가 멋진 역할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짧은 시간에 무수한 대사를 늘어 놓지만 결국 안톤 쉬거에게 맥없이 죽고 만다.
또한 주인공 모스 역시, 거의 살인마를 따돌리고 한숨 놓기 직전에 어처구니 없게도 멕시칸 갱에게 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장모 때문이다. 살인마 안톤 쉬거 역시 자신이 목표로 삼은 모스의 아내 칼라를 찾아가 죽이고, 교통사고를 당한다. 죽지는 않았지만 부러진 뼈를 감싸고 사라진다.
결국,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지는데, 보안관 에드 역시 퇴직한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서, 노인은 입을 닫는다. 즉, 돈과 마약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인의 지혜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보안관 에드(토미 리 존스)의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나온다. 그는 총이 필요 없던 과거의 보안관 선배들 이름을 나열한다. 그때가 그래도 인간적인 시대였다고 회상한다. 지금은 미치광이의 시대라고 말하며. 그리고 곧바로 안톤 쉬거가 보안관에게 붙잡혀 경찰차에 태워지고, 수갑을 찬 채 보안관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전화로 보고를 끝낸 보안관을 목졸라 죽이는 안톤 쉬거. 그의 두 팔목에 수갑에 긁힌 핏자국이 선명하고, 발버둥친 보안관의 발쪽으로 어지러운 흔적이 가득하다. 보안관 차를 훔쳐타고 나온 안톤 쉬거는 앞서가던 자동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살해한다. 그의 살인에 동기가 있을까.
텍사스주 테럴 카운티의 사막에서 사냥을 하던 모스는 우연히 갱들이 서로 죽고 죽인 현장을 발견한다. 다섯 대의 트럭과 주위에 널브러진 채 죽어 있는 사람들. 그는 한 트럭에서 가득 찬 마약을 발견한다. 아마도 마약 거래를 하던 자들이 서로 총질을 해서 모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이다. 모스는 분명 근처에 생존자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나무 아래 죽은 사람을 발견한다. 그 옆에는 가방이 있고, 그 가방 안에 2백만 달러가 들어 있었다.
모스는 돈가방을 갖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트럭에서 죽어가던 사람이 물을 달라던 말을 기억하며 내키지 않지만, 물통을 가지고 다시 현장으로 간다. 한밤중, 물을 달라던 멕시코인은 이미 죽었고, 모스는 다시 돌아가려하지만, 갱단의 일행이 도착하고, 모스는 쫓기게 된다.
모스의 운명은 여기서 갈린다. 범죄 현장에서 돈가방을 발견한 것은 행운일지 모르나,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고, 사람이 그냥 죽는 걸 지켜보지 못하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가 물을 가지고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부자로 살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건 결국 자신의 의지이며, 그 선택에 따라 다시 운명이 갈리는 아이러니는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긴 모스는 돈가방을 들고 도망하고, 아내는 오데사로 보낸다. 범죄 현장에 차를 두고 도망했기 때문에 이미 그의 정체는 드러났고, 돈을 찾기 위해 범죄조직에서 자기 뒤를 쫓아 올 거라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안톤 쉬거는 사막의 주유소 매점에 들르고, 매점 주인과 신경전을 벌인다. 이 장면에서 매점 주인은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에 맞닥뜨린다. 살인마 안톤 쉬거는 차를 뺐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싸이코패스인데, 매점 주인과의 동전 내기에서 매점 주인의 선택이 맞자 아무렇지 않은 듯 그냥 매점을 나간다. 이건 그 나름의 원칙이 있다는 뜻이다.
안톤 쉬거는 두 남자를 만나 범행 현장에 도착하고, 돈가방 안에 들어 있는 추적기를 찾을 수 있는 송신기를 받는다. 그리고 두 남자를 살해한다. 양복을 입고 추적 송신기를 들고 나타난 두 남자를 미루어 짐작하면, 마약범죄조직을 체포하기 위한 위장 거래를 하던 경찰 수사관 또는 마약단속국(DEA), FBI 요원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돈가방을 지닌 채 죽은 사람은 경찰이거나 FBI 요원 또는 그들과 함께 일하는 비밀요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안톤 쉬거는 모스의 트레일러 집을 찾아가고 그곳을 샅샅이 살펴본다. 트레일러 관리실에 가서 모스의 행방을 묻지만, 관리실 아주머니는 절대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안톤 쉬거는 말 없이 사무실을 나간다. 그의 행동은 언듯 이해하기 어렵지만, 기싸움에서 살짝 밀리는 느낌이다.
안톤 쉬거가 트레일러에서 나가고 뒤 이어 보안관들이 트레일러를 찾아온다. 보안관은 아무 단서를 찾지 못하지만, 안톤 쉬거는 집안에 있던 우편물에서 모스의 처가집 전화번호를 찾아내 확인한다.
모스는 텍사스주와 멕시코의 경계인 '델 리오'에 도착해 허름한 모텔인 델 리오 레갈 모텔 138호에 묵는다. 방의 환풍구에 돈가방을 숨기고,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다른 모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와 138호 맞은편 37호실을 하나 더 빌린다.
안톤 쉬거는 멕시코로 가는 길에 '델 리오 레갈 모텔'을 지나다 수신기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 모텔에 모스가 있다는 걸 확신한다. 모스는 37호에서 환풍기에 올려 놓은 돈가방을 끌어당기고, 안톤 쉬거는 총과 산소탱크를 들고 맨발로 138호를 찾아간다. 두 사람의 대결은 조용하면서도 긴장감 높은 장면으로 이어진다.
138호를 급습한 안톤 쉬거는 그 방에서 세 명의 멕시코인을 발견하고 살해한다. 멕시코인들은 마약 범죄조직원들이고, 이들이 쉽게 모스의 행방을 알 수 있었던 건 돈가방에 든 송신기를 찾을 수 있는 수신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칼슨 웰스의 등장은 하드보일드한 영화에 약간의 유머를 넣으려는 코엔 형제의 의도로 보인다. 멕시코 마약조직은 안톤 쉬거를 제거하려고 살인청부업자 칼슨 웰스를 고용한다.
레갈 모텔에서 도망한 모스는 이글 패스 호텔 213호에 묵는데, 이때 카운터를 보는 사람에게, 자기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잠을 자려고 누운 모스는 돈가방을 살펴보다 송신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을 쫓는 살인자가 매우 가까이 있다는 걸 직감한다.
모스와 안톤 쉬거는 여기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총을 쏜다. 둘 다 만만찮은 상대였고, 둘 다 총상을 입는다. 총상을 입은 안톤 쉬거는 사라지고, 모스는 피를 흘리며 멕시코 국경을 걸어서 넘는다. 다리 중간에서 돈가방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리고, 무사히 국경을 지나 멕시코로 들어가는 모스. 이제 악몽은 끝난 걸까.
다리에 총을 맞은 안톤 쉬거는 약국 앞에 주차한 차에 불을 지르고, 약국에서 필요한 약을 훔쳐 나온다. 그는 총상이 심했지만,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꿰맨다. 그는 확실히 보통사람과는 다른 인간이다.
그 사이, 병원에 입원한 모스를 찾아온 사람은 칼슨 웰스. 겨우 3시간만에 모스를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보안관 에드는 모스의 아내 칼라 진을 오데사에서 만난다. 칼슨 웰스는 국경 다리에서 모스가 던진 돈가방을 발견하지만, 호텔로 쫓아온 안톤 쉬거에게 당한다. 안톤 쉬거가 칼슨 웰스를 죽인 직후, 모스와 전화 통화를 하고, 서로 두고 보자고 벼른다.
안톤 쉬거는 모스가 병원에 있다는 것도 알지만 찾아가지 않고, 그의 아내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모스는 병원에서 나와 다시 미국 쪽으로 국경을 넘은 다음, 돈가방을 찾아 아내에게 전화한다. 엘 파소의 데저트 샌즈 모텔로 오라고. 엘 파소 역시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도시다.
멕시코 마약조직은 모스의 장모에게서 정보를 얻고, 모스의 아내 칼라 진은 보안관에게 남편 모스의 행방을 알려주고, 안톤 쉬거는 모스를 쫓는다. 이들은 모두 엘 파소에서 맞닥뜨린다. 보안관이 엘 파소의 데저트 샌즈 모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총격전이 벌어진 뒤였고, 모스는 죽어 있었다.
모스의 장례를 치르고 곧 이어 칼라 진의 어머니도 암으로 사망한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온 칼라 진은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톤 쉬거를 만난다. 안톤 쉬거는 이번에도 동전을 던져 정하라고 칼라 진에게 말한다. 칼라 진의 집에서 나온 안톤 쉬거는 무심한 상태로 운전하다 다른 차와 부닥치고, 부상을 입고 사라진다.
보안관 에드는 퇴직하고, 아내와 차를 마시며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꿈에서 아버지를 봤고, 아버지는 춥고 어두운 오솔길을 앞질러 가시면서, 횃불을 들고 있었노라고 한다.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안톤 쉬거가 살해한 사람은 모두 열두 명이다. 이 가운데 두 명은 살해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도로에서 만난 닭장차 운전수와 마지막 장면의 칼라 진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역시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멕시코 국경과 맞닿아 있는 테럴 카운티에서 시작해 델 리오, 오데사, 엘 파소로 삼각형으로 이어지는 도시와 연결된다.
보안관 에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지역은 과거와는 너무 달라졌고, 사람들이 돈과 마약으로 타락했으며, 도덕과 상식이 사라진 현실이 개탄스럽다. 늙어가는 에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느끼고 은퇴한다. 삶은 사막처럼 건조하고 메마르며, 불투명해서 행복한 삶이란 마치 파랑새를 찾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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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액션인데 로맨스 같았던 파과
'파과', 거의 10년 가까이 된 이야기일 텐데 난 이 서사를 소설로 처음 접했다. 처음 읽고 누군가가 멋있는 제작자가 나타나 이걸 영화화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10년전의 나는 그만큼 흡인력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더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영화는 60대 킬러를 주인공으로 해야 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이런 캐스팅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이 들리고, 이혜영 배우님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캐스팅만으로도 영화관에 가서 볼 이유가 충분했다. 다만 10년의 간극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내용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관람하는 데 있어 좋은 결론을 냈을까 아닐까.
1. 복수극인 줄 알았으나
이 영화 속 인물은 많지 않다. 킬러 조각의 주변 인물들인데 워낙 세상과 단절하며 살아온 탓에 주위에 사람도 많지 않은 탓도 있다. 그런 조각의 삶에 끼어든 신입 킬러, 투우. 처음에는 그가 조각의 삶을 망치러 온 것 같았다. 뭔가 과거에 조각이 그의 원한을 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점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조각의 관심이 필요했음을 알게된다. 그는 조각을 원망한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여자로 느낀 것 같진 않고 그녀를 엄마로 생각한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인 그녀를 원망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찾아오지 않아 절망한 아이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투우가 강선생의 아이를 납치한 것은, 아이를 약간은 질투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에는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자신은 잊어놓고 강선생의 아이에게 시선을 보내는 조각을 또 한 번 원망하고, 조각의 시선 끝에 있는 그 아이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방법이 온전치는 않았지만 누군가의 온전한 사랑이 필요했던 아이였음을 알고 나면 투우가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밝히지'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랬다면 이 영화의 주제는 의미가 없어졌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밝히고 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면 투우의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생각한다.
2.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는 조각
사실 이 서사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더라도 생은 아름다운 것이니 그럼에도 살아가보자는 조각의 의지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을 끊는 것이 일상인 그녀가 생은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사실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항상 생과 사의 기로에 있는 그녀에게 죽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고, 항상 서늘한 주검만을 바라보던 그녀가 죽음을 앞두고 보니 갑자기 죽음이 아닌 생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생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저 멀리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을 바라보며 나의 생은 어떠했는가를 반추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유효기간이 다 되어 가는 삶이기에 남은 생은 누군가의 죽음의 순간에 존재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생의 순간에 함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의 생기에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에 한 줄기 의미를 찾고 싶어졌던 것 같다. 그녀의 삶은 그저 일, 일, 일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는 점에서 그녀의 삶도 투우처럼 얼마나 외롭고 처절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이런 킬러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그 다음 생을 살아내는데, 의미없이 나의 하루를 흘려보내기는 싫어졌다. 조각은 자신을 '파과'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예전과 같은 기량을 뽐낼 수 없는 자신을 상품성 없는 과일과 같다고 느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는 내내 죽음만을 생각했던 그녀가 비로소 생을 생각하던 그 순간부터 그녀의 진짜 삶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점점 병들고 있지만 그녀의 정신은 점점 생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전성기란 모두가 다른 시기에 찾아온다. 그녀의 신체적 전성기는 그녀를 킬러 계의 전설로 만들었지만 그녀의 인생의 진정한 전성기는 오히려 병이 찾아오고 난 뒤가 아닐까. 몸이 고장나고 나서야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과 가끔은 온정을 주고받는 사람처럼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가 강선생과 인연을 이어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녀의 삶은 전과는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총평
그녀가 행하는 죽음은 명분이 있지만 그녀의 삶은 지속할 명분이 없었기에 방황하던 그녀에게 강선생은 참 귀인인 것 같다. 그렇게 모두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다만, 투우가 안타까울 뿐이다. 투우가 살아서 조각과 함께 교류할 수 있었다면 좋을텐데...... 영화 특성상 액션 영화이다 보니 누구 하나는 죽고 살고 하긴 해야 하는데, 워낙 투우가 조각을 보는 눈이 애틋했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난 이 영화가 액션이 아니라 로맨스영화 같았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투우를 연기한 김성철 배우의 눈빛이 죽이고 싶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애정하는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눈빛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릭터에 바로 몰입할 수 있었다. 액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액션은 문외한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액션을 보면서 중간중간 설레고 싶다면 이 영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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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발 떨어지니 더 격렬히 끓어오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592년 4월, 왜군은 단 15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점령하며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그러나 '이순신(박해일)'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북선을 앞세워 남해안을 장악하자 이내 왜군은 보급에 난항을 겪는다. 이에 용인 전투에서 10만 명의 조선군을 격퇴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는 해전을 통해 이순신을 꺾고 보급품을 전달함과 동시에 명나라로 진격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부산포에 수군을 집결시키고, '나대용(박지환)'이 설계한 거북선의 도면을 훔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이순신(박해일)'은 '원균(손현주)'의 방해에 맞서가면서 선조가 의주로 파천하는 등 수세에 몰린 조선을 구하기 위한 최선의 작전을 고민하며 한산도로 출전한다.
전쟁 이론을 다룬 유명한 경구들을 이야기할 때 프로이센의 군인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속 다음 말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전쟁은 다른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의 연장(延長)"이라며 전쟁이 대립하는 의지들의 충돌이라고 보았다. 모든 전쟁은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에 자기 의지를 강요하려 하는 한 국가가 많은 수단 중 선택한 한 가지 옵션에 불과하다. 즉, 전쟁의 명분과 목적, 승패의 기준점은 그 전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많은 전쟁 영화들도 단지 전쟁과 전투의 양상을 그려내는 것만큼이나 그 전쟁의 명분과 정치적 의미를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일례로 <300> 시리즈는 (비록 역사 왜곡 논란이 있지만) 러닝타임 동안 자유 대 압제라는 이데올로기적 대결에서 전자가 승리하는 쾌감을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준 바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도 비록 패배한 전투이지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분기점이 되었던 덩케르크 퇴각의 의미를 스크린 위에 온전히 재현해냈다. <고지전>은 아예 전쟁을 통해 전쟁의 무의미함과 아이러니함을 꼬집은 바 있다.
1700만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흥행작의 반열에 오른 <명량>의 후속작이자 프리퀄로, <최종병기 활>과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은 <한산: 용의 출현>도 다르지 않다. 1592년 음력 7월 8일에 펼쳐진 한산도 대첩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한산>은 전쟁의 두 주체, 조선과 일본의 의지를 각각 의(義)와 불의(不義)로 설명한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도 정합한다. 일본군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이유로 아무런 명분 없이 조선을 침략했기에, 조선과 일본은 순도 100%의 가해자와 피해자다. 그러니 임진왜란이 의와 불의가 싸우는 전쟁인 것은 명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의와 불의의 전쟁을 풀어내는 드라마적 측면이다. 특히 <명량>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은 <한산>의 선택이 인상적이다. <명량>은 전쟁을 왕과 종묘사직이 아닌 백성을 위한 싸움이라 규정하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메시지를 극대화했다. 실제로 왕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금 전쟁에 나설 것을 명 받은 백전노장은 국가와 군주를 위한 충성심에 앞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울돌목으로 향했고, 역으로 백성의 도움을 받아 기적처럼 승리한다. 이러한 정치적 함의는 2014년 개봉 당시 <명량>이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할 수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이 민심의 중요성을 전하는 방식이 다소 올드하고 일차원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말을 할 수 없어 치마를 흔들며 위기를 알리는 '정 씨(이정현)'의 모습이나 백성의 희생을 보여주는 캐릭터였던 '임준영(진구)'처럼 부자연스러운 캐릭터들의 이야기는 극의 흐름을 툭툭 끊었다. 이 고생을 몰라주면 후손들이 전부 후레자식이라던 대사 역시 영화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산>은 다르다. 오히려 형보다 더 낫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일본군의 시점을 강조하며 이순신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한 영화는 가장 먼저 부산의 일본군 진영을 비춘다. 또 일본군이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비하는 모습을 착실하게 그려낸다. 걸핏하면 조선인들을 죽이는 평면적인 악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두려움이 곧 전염병이라면서 아군의 패잔병을 죽여 혹시 모를 불씨를 제거하는 주도면밀함, 간첩의 침투와 그로 인한 정보의 유출을 경계하는 치열한 첩보전, 군사적 약점을 지우기 위해 전력을 증강하고 작전을 가다듬는 철저함이 대신한다.
반면에 스크린 속 조선군은 취약하다. 거북선을 잃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탈취당하며, 학익진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즉, 영화는 의롭지 못하다는 단편적인 인상 대신 신중하고 영리하며 강대한 불의 앞에 흔들리는 의로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순신의 학익진은, 그리고 예상치 못했던 거북선의 등장은 역으로 더 큰 감동을 준다. 철저하고 신중했던 불의가 의로움으로 쌓은 바다의 성 앞에서 필연적으로 궤멸되는 모습은 이른바 품격 있는 '국뽕'으로 이어진다. 한산 바다에 수군 군영을 구축하며 단단한 방패를 만드는 모습으로 영화가 결말을 맺는 이유이자, 작중 최고의 씬스틸러인 거북선이라는 소재가 단지 눈요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거북선을 장님 배라는 의미의 '메구라부네'라고 줄곧 부르던 왜군 장수들은 거북선을 마주친 순간 영화 초반 패잔병들이 그러했듯이 해저 괴물이라는 의미의 '복카이센'이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군의 거북선에 대한 두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곧 의로움의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자칫 억지스럽거나 정서적으로 과장될 수 있었던 항왜 '준사'의 서사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한산도 대첩과 맞물린다. 아군을 보호하지 않는 왜군의 악의를 경험한 왜장 준사는 이순신을 만나 마음을 고쳐 먹고 의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들고 의병과 함께 전투에 임한다. 이 모습의 함의는 굳이 과장된 감정선이나 대사를 통하지 않아도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는 강력한 성인 학익진과 자연히 오버랩된다. 그렇기에 전쟁과 전투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는 <한산>의 방식은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련되게 느껴진다. '정보름(김향기)'와 '안준영(옥택연)' 캐릭터의 분량이 전편에 비해 적어서 인위적이고 신파적인 연출이 줄어든 것도 영화의 담백함에 기여한다.
또 영화가 이순신의 활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칼을 대조해 의로움의 필연적 승리와 그 쾌감을 강조하는 것도 흥미롭다. 와키자카의 칼은 명나라로 진격하려는 야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두려움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패잔병을 죽이는 그의 칼은 왜군끼리도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분열의 칼이며, 명나라까지 향하는 지도가 그려진 황금 부채로 변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순신은 죽을 위기에 처한 부하 나대용을 구하기 위해 총을 맞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활을 쏴 나대용을 보호하고, 약점이 드러난 거북선을 구해낸다. 그리고 나대용과 거북선은 찰나의 순간 이순신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보답한다. 그래서 와키자카의 칼도 조총도 이순신을 위협할 수는 없다. 의로움이 담긴 이순신의 활 앞에서 악의로 가득한 그의 무기는 무용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한산 대첩에서 갑옷에 화살에 맞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영리하게 활용한 드라마의 힘이 돋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장수가 자신의 무기를 활용하는 방식이 대비되는 점도 드라마에 입체감을 더한다.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칼을 뽑는 와키자카와 달리, 작중 이순신이 활을 쏘는 장면은 딱 세 번 등장한다. 이는 신중함을 기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경험을 답습하는 와키자카와 달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신중한 이순신의 차이를 드러낸다. 와키자카는 한산도 바다가 용인 전투와 같은 지형이라는 이유로, 또 이순신의 학익진이 과거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드러난 학익진의 약점을 공유할 것이라고 판단해 과거의 전술을 반복한다. 반면에 꿈속에서 녹둔도에서의 전투를 다시 한번 마주한 이순신은 와키자카의 선택을 예측한 후 마지막까지 확실한 한 수를 기다리다 왜군의 공격을 되받아 역공한다.
이러한 차이점은 두 배우의 서로 다른 스타일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변요한은 본래 신중하고 치밀하지만 전투에 돌입하면서 야망에 부풀었다가 학익진 앞에서 좌절해 절망하는 와키자카의 입체적인 변화를 잘 짚어냈다.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 대사와 비중에도 불구하고 박해일의 절제된 표정 연기가 지장(智將)으로서의 이순신을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유다.
물론 모든 드라마적 측면은 결국 전투와 전쟁의 양상을 알기 쉽게, 또 박진감 있게 펼쳐 보인 연출과 구성 덕분에 빛난다. 우선 당포에서 견내량과 한산으로 이어지는 전투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조선 수군의 학익진과 일본 수군의 어린진이라는 진형을 넓고 수직적인 구도로 잡아내 그 형태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밑바닥이 둥근 일본군 함선과 밑바닥이 평평한 판옥선의 차이점을 활용해 전투의 변수를 만들기도 하며, 거북선들의 충파로 인한 박진감이나 전방위 포격으로 적을 섬멸하는 모습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또 전반적인 임진왜란의 흐름을 활용하는 측면에서도 영리함이 돋보인다. 지형적으로 유사한 용인 전투의 전황을 상세히 설명해 한산도 대첩의 전술적 가치까지도 부각하는가 하면, 선조의 몽진을 강조하며 한산도 대첩이 지니는 전략적 측면에서의 의의도 스크린에 담는 데 성공한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적으로 각색한 지점도 눈에 띈다. 일례로 영화는 역사 속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의 특징을 합쳐 가상의 전투를 만들어 낸다. 본래 전주성이었던 일본군의 목적지를 전라좌수영으로 변경해 한산도 대첩 전후의 위기감을 더 고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적 서술을 충실히 따르며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원균의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다른 미디어들과는 달리 무능하고 비겁한 원균의 캐릭터성을 온전히 묘사하면서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외적 위기는 물론 진이 뚫릴 수 있다는 식으로 조선군 내부의 위기도 조성한다. 그 결과 거북선의 기습과 돌격 , 학익진의 위력, 평소와 달리 화약을 잔뜩 준비한 이순신의 지략 등의 임팩트는 모두 극대화된다.
특히 이는 영화를 제작할 때 한산도 대첩이 명량 해전에 비해 여러 핸디캡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명량 해전은 이순신 개인에게도,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도 절대적인 어려움이 있는 전투였다. 총지휘관은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어머니를 잃은 상태였고, 조선 수군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후 12척의 판옥선만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130여 척이나 되는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니 명량 해전은 별다른 각색 없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반면에 한산도 대첩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 중이었고, 전력도 온전했다. 이순신 개인 입장에서도 사천 해전에서 총탄을 맞아 부상당한 것 정도를 제외하면 일신상에 크게 특이한 부분이 없다. 즉, 한산 대첩은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중대한 승전이지만 오히려 처절함과 승리의 쾌감이 덜 직관적인 전투다. 이러한 핸디캡을 강렬한 스펙터클이 돋보이는 긴 분량의 해전 씬과 영리한 각색을 통해 극복했기에 <한산>의 임팩트는 결코 <명량>에 뒤처지지 않는다.
아쉬움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다. 시리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안준영과 정보름 캐릭터는 왜군과의 첩보전을 담당하면서 이번에도 일정 부분의 분량과 비중을 분배받는다. 그런데 그들은 전반적으로 담백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신파의 감정선을 유지하면서도, 시리즈의 연속성을 부각한다고 보기에는 역할이 작다. 그러다 보니 찰나의 순간 삽입된 그들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영화의 최대 장점인 영리한 각색과 전투씬도 단점이 없지는 않다. 영화는 한산도 대첩 이후 조선 수군이 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그런데 정작 부산진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 포함된 3차 출정이 아닌 이순신의 4차 출정에 포함된다는 점에서 굳이 한 데 합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한편 거북선이 나타나는 전투씬은 배와 배가 충돌하며 원초적인 쾌감을 느끼게 해 주는데, 다만 거북선에 사용된 CG의 수준이 부자연스러운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인 작전 도중 암초 바다를 해쳐 나오는 조선군과 그대로 좌초되는 일본군을 묘사할 때처럼 순간순간의 장면에서도 부자연스러운 그래픽이 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비해 적게 등장하고, 인간적인 고민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도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물론 김한민 감독이 이순신 3부작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명량 해전에서는 용장(勇將)을, 한산해전에서는 지장(智將)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기는 하다. <명량>이 영웅 이면의 고뇌에 주목했다면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젊은 장군이자 리더인 이순신의 자질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노량: 죽음의 바다>가 인간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한층 원숙해진 현장(賢將) 이순신을 그려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는다면, 이 단점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한산: 용의 출현>은 전편의 단점은 수정하고, 객관적인 접근법을 통해 같은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부각하면서, 품격 있는 사극이자 영웅전, 그리고 전쟁 영화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해낸다.
A(Acceptable, 무난함)
온 국민이 아는 해전에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데 성공한 의와 불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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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이 리뷰에는 시리즈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요 결정을 할 때 우리는 ‘감’ 혹은 ‘확신’이라는 걸 느낀다. 그 선택을 하지 말라는 혹은 선택하라는 느낌. 그건 아주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할 수도 있다. 그동안 내가 보고 들었던 것과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면 더 좋다고 이야기한 여러 근거들을 바탕으로 어떤 결정을 한다. 바로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통해 우리는 ‘확신’을 느낀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그 선택을 하기까지 여러 확신할만한 근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충분히 근거를 들며 설명할 수 있고, 또 꺼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도 편하다.
반대로 어떤 순간에는 확실히 눈에 보이는 건 없지만 그냥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감’ 이 작동할 때다. 여기엔 내세울만한 근거가 없다. 그저 과거 자신의 경험 속에 녹아들어 있는 느낌을 바탕으로 결정하는 순간이다. 그건 ‘확신’은 아니지만, 그 느낌은 우리가 그것을 ’ 확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냥 그 느낌을 믿고 선택을 한다. 그것이 옳은 선택일 수도, 나쁜 선택일 수도 있다. ’ 확신‘과 ’ 감‘ 으로 선택한 것들 모두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다.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 O 난감>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판단할 때, ‘감’ 혹은 ‘확신’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분명 옳은 길이라 생각하고 선택하지만 이들이 만난 감정들은 인물 자신들에게 계속 혼란이라는 것을 던져준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맞다고 확신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진짜 맞는지 계속 의심하게 된다. 평범한 대학생 이탕(최우석), 강력계 형사 장난감(손석구) 그리고 연쇄살인마 송촌(이희준)이 가진 ‘감’ 혹은 ‘확신’은 정말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감정 - 대학생 이탕의 '감'
이탕은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는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는 피해자였고 대학교에 가서도 어떤 식으로 살아갈야할지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에겐 특별한 목표도 없고 그저 학교에 다니면서 알바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편의점 알바를 하던 어느 날 그는 진상 손님을 만나고 얼마 후, 그 손님과 같이 있던 일행과 길에서 다툼을 벌인다. 그리고 들고 있던 망치로 상대의 머리를 쳐 죽음에 이르게 한다. 평범했던 그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이후 이탕에게는 특별한 '감'이 생긴다. 연쇄살인범이나 범죄자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이탕이 처음 죽였던 남자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이었고, 두 번째로 죽이게 된 여자 역시 알고 보니 살인범이었다. 그가 가진 '감'은 지나가다가도 문득 범죄자의 느낌을 받고 돌아보며 새로운 살인 대상을 찾는다. 이후 몇 년에 걸쳐 이탕은 그런 범죄자들을 처단하며 돌아다닌다. 여기엔 조력자인 노빈(김요한)의 도움이 있었다. 노빈은 자신의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다루는 능력으로 범죄 대상을 물색하거나 증거를 없애고, 이탕이 살아갈 수 있게 의식주를 해결해 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탕은 자신의 감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저 지나가다 어떤 느낌 만으로 죽일 상대를 찾아낸다. 조력자인 노빈의 도움이 있지만, 그건 살인 대상을 찾은 이후에 벌어진다. 어쨌든 이탕이 죽인 모든 사람은 강력한 범죄의 가해자들이다. 그들에게 피해를 받은 대상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죽어 마땅한 인물들이다. 하지만 '확신'없이 벌어진 그 살인들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걸 지켜보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게 영웅적인 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탕이 자신이 하는 살인들에 자신 없어하는 것도, 바로 그런 문제의식에 있다. 그저 '감'만으로 살인을 하는 것,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괴물이 되어야만 하는 평범한 학생 이탕은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계속 허우적댄다.
두 번째 감정 - 전직 형사 송촌의 '감'
이 시리즈의 최대 빌런인 송촌은 전직 형사였다. 그는 살인범이었던 아버지의 과오를 바로 잡고자 형사에 지원해 좋은 형사가 되고자 한다. 하지만 경찰 내부의 시선이 그렇게 곱지 않다. 특히나 가장 좋지 않게 보는 건 장난감 형사의 아버지다. 어떤 사건을 거친 이후 그 역시 조력자 노빈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노빈의 도움으로 나쁜 범죄자를 죽이면서 살인 행위를 이어간다. 송촌 역시 자신만이 가진 '감'으로 범죄자를 찾고 응징한다. 그가 가진 '감'은 그가 형사로서 가진 것이기도 하고,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송촌은 새롭게 영웅 노릇을 하는 이탕이라는 인물을 만나서 상대가 가진 '감'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다. 송촌은 이탕에게 죽일 상대가 범죄자라는 '확신'이 있는지 묻는다. 송촌이라는 인물은 자신이 물색한 상대를 죽일 때 상대가 범죄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형사적인 느낌과 감으로 판단해 실행할 뿐이다. 그래서 송촌은 오랜 기간 그런 살인을 해오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송촌 역시 '확신'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멈추지 못한다. 그가 멈추는 건 자신의 '감'이 틀렸거나 이제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송촌은 자신의 끔찍한 행위들을 정당화할 '확신'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전까지 그는 '감'에 따라 누군가를 추적하거나 살인을 해나간다. 그가 이야기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건, 그가 가진 '감'이 무서울 만큼 꽤나 정확하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탕의 '감'과 송촌의 '감'은 무엇이 다른 걸까. 결국 두 사람의 그 느낌 때문에 그들의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세 번째 감정 - 현직 형사 장난감의 '감'
형사 장난감은 다신이 맡은 구역에서 벌어지는 살인들을 보고 그것에 이탕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자신의 '감'으로 '확신'한다. 그래서 이탕이 일했던 편의점을 몇 번이나 방문해서 이탕에 대해서 조사하고 이미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른 각도로 살펴본다. 하지만 그는 이탕이 살인을 했다는 증거나 목격자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이탕이 살인범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장난감 형사는 무엇 때문에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건 그만의 '감'이 있기 때문이다. 형사로서의 '감'이 그에게 이탕이 살인범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사실 장난감 형사는 송촌 역시 추적하고 있다. 이탕과 마찬가지로 송촌이 영웅 놀이를 하고 있는 살인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탕이 송촌과 같은 분류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형사로서의 '감'만 있을 뿐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나 목격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추적하는 힘이 떨어지게 되는 것도 그가 가진 증거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역시 자신의 '확신'을 증명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말미, 장난감 형사는 어떤 사건 때문에 분노에 가득 차 송촌을 죽이려 한다. 그가 가진 '확신'은 '분노'와 함께 뒤섞여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만약 그 에너지를 이기지 못해 그가 살인을 한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탕, 송촌과 장난감의 행동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같은가.
시리즈 <살인자O난감>은 '감'이 만들어내는 '확신'이 얼마나 약해빠진 것인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자신들의 '감'을 '확신'으로 바꿔 살인을 행하거나 누군가를 잡으려 한다.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 인물 모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지 못했다. 이탕, 송촌, 장난감을 각각 대비시키던 시리즈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세 인물을 한 곳에 몰아넣어두고 어떤 것이 맞는지 보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누구의 '감'이 더 믿을만한가. 그 '감'은 진짜인가.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감'을 느끼면, '행동'으로 옮기고 그 결과에 '확신'을 가진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하고 있을 이 감정의 프로세스가 과연 정말 옳은 것인지, 맞게 하고 있는 것인지, 시리즈 <살인자O난감>이 재차 묻고 있다. 세 인물이 가진 능력이 진짜 초능력인지 아니면 그냥 느낌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지만, 이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본 모든 사람들은 '감'으로 '확신'한다. 이들의 능력이 진짜라는 것을.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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